"죽었을 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원하는가?"

제가 TA로 일하고 있는 학부 수업시간에 교수님이 퀴즈 문제를 냈습니다. 매번 수업시간마다 퀴즈를 내는데, 오늘은 특이한 질문을 하더군요.
"죽었을 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원하는가?"
물론 정답은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학생은 점수를 받는 것이지요..
제가 grading을 담당하기 때문에, 오늘은 약 100개 정도 되는 카드들을 하나씩 자세히 읽어 보았습니다. 대부분의 답변은 자신의 성취, 자신의 노력으로 기억되기를, 또한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의미있는 사람이었다고 기억되기를 바란다는 답변이었고, 좋은 남편 아내, 딸, 아들, 아빠, 엄마 그리고 좋은 친구로 기억되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약 100개 정도가 되는 카드 속에서 6개가 그리스도인의 답변에 해당하는 답을 했습니다.
"At the end of my life, I'd like people to say there was no (Student's name) only Jesus Christ. Faith, hope and love are what she lived for."
"I would like to be remembered for the contributions I made to bettering society and for living my life under Christian principles as an example to others."
"I want to be remembered for putting God first, others second, and myself third."
"I want to be remembered as a Christian. A disciple of Christ who carried out his mission and shared his word with others."
"I'd like to be remembered as a nice, faithful, and respectful man. As a disciple of Christ."
(나머지 한 답변은 제 교회 대학부 소속의 지체의 답변이니 여기서는 공개하지 않겠습니다.)

답변을 읽으면서 사람들이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살펴보다가, 내 자신의 답변은 어떤 것이 될 것인가를 곰곰히 생각했습니다. 물론 항상 생각해 왔기 때문에 금방 내 답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이 질문은 잘못 되어 있거나 아니면 그리 중요한 질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세상 사람들에게는 의미있고, 중요한 질문일지 모르지만, 그리스도인에게는 중요할 수 없는 질문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중요한 질문은 바로 "내 인생에 대해서 심판자이신 예수님은 어떻게 평가하실 것인가?"입니다. 모든 인생은 마지막 날에 그분 앞에 서게 될 것이고, 내가 내린 내 인생의 평가, 혹은 다른 사람들이 내린 평가는 그 앞에서 의미를 잃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직 중요한 것은 바로 주님의 평가, 그분의 판결일 뿐입니다.
나는 그분의 평가를 생각하며, 그분의 뜻에 맞추어 하루를 지내고 있는가?
내 스스로에게 심각하게 질문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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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그분께서]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는 주님의 약속의 말씀이 소망이 됨에도 불구하고, 나를 한 없이 두렵게 만드는 것은 바로 "그리하면"이라는 접속사이다. 하나님께서 내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신다... 하지만 그것은 절대 무조건적인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단서를 다셨다.
"그리하면..."
내 삶이 그분의 관심사와 그분의 일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그리하면"은 크나큰 축복이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그리하면"은 큰 재앙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씩... 내 삶의 기도에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서운한 마음이 들 때가 있다. 그럴 때일수록 내 스스로를 돌아보며, 내가 주님의 나라와 주님의 의를 얼마나 구하고 있고, 그것을 소망하면서 살고 있는지를 살펴야 마땅하지만, 죄된 습성을 지니고 있는 내 안에 그분을 향한 서운함이 독버섯처럼 자라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어젯밤... 그 생각을 하다가 문득... '만약 하나님께서 내가 하나님을 대하는 것처럼 나를 대하신다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다시말해 "그리하면"이라는 단서 조항이 기계적으로, 문자적으로 그대로 적용된다면 어떤 결과가 있을까를 생각해 봤다.

만일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면...
만일 내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싶은 만큼, 하나님께서 나를 기쁘게 하신다면...
만일 내가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노력하는 것 만큼, 하나님께서 내 뜻을 알기를 원하신다면...
만일 내가 하나님의 관심사가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만큼, 그분이 내 관심사를 아시고, 그것을 이루시기 위해 일하신다면...
만일 내가 하나님의 다급한 마음을 아는 만큼, 그분이 내 다급함을 아신다면...

만약 진정으로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나에게 닥칠 수 있는 가장 큰 재난이 아닐까? 하지만, 진정으로 은혜인 것은,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나를 향한 주님의 사랑과 관심과 열정과 일하심은 하나님을 향한 나의 헌신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시다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감사의 제목이다. 그리고 아무리 주님께서 침묵하고 계시는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그분께 감사하며, 그분을 찬양하고, 그분을 높일 수 있는 것이다.

그 가운데서, 다시... 내 자신을 돌아보며 나에게 퍼부어주시는 은혜와 사랑과 관심 만큼 주님의 나라와 주님의 의를 구하고 있는지 살피며, 그것을 위해 내 삶을 던지는 것... 그것이 믿음생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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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하지 않은 믿음의 고백

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질러 가로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으사 저희의 말함을 허락지 아니하시니 이는 자기를 그리스도인 줄 앎이러라.(눅 4:41)

귀신들이 예수님께 드리는 이 고백... 베드로가 예수님께 그 고백을 드렸을 때, 예수님은 그것이 하나님께서 알게 하신 하늘의 지식이라고 말씀하셨고, 그 고백을 진정으로 기뻐하셨다. 하지만 동일한 고백이 누가복음 4장에서만 해도 두번이나 드려지는데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 고백을 싫어하신다. 그리고 귀신들에게 명령하여 그 입을 다물게 하신다.

세상 사람들은 아무도 모르는 예수님의 정체를 귀신들은 정말 '귀신같이' 알고 있었다. 그리고 정확하게 고백한다. 34절에서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고 고백하고, 본 절에서는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다. 그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분의 권세를 알았을 뿐만 아니라 그 권세에 떨며 두려워 하고 있었다. (34절의 "아!"는 성경에서 유일하게 등장하는 것으로 놀라움과 공포를 나타내는 말이다.)
문제는 그들이 그분의 정체를 알 뿐만 아니라, 그분께 순종하며 그분을 주인으로, 자신의 삶의 절대주권자로 인정할 의도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단순히 자신들을 멸하지 말아 달라는 것, 아직 무저갱에 들어갈 때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들에게 해를 끼치지 말아달라는 것 뿐이었다.

귀신들의 고백은 예수님에 대한 사탄적 고백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그것은 예수님을 정면으로 대적하며 조롱하고 멸시하는 것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분명히 알고 그분의 권세를 두려워하지만, 그분께 온전히 순종하려는 뜻이 없는 것이다.

복음이라는 단어가 넘쳐나는 세상이다. 웬만한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들어 보았다. 그리고 세상의 아주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입으로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고백한다.

하지만...
그 고백이 순종이 실리지 않은 고백이라면, 그 고백이 그분을 영화롭게 하고자 하는 열망과 동반된 것이 아니라면, 그 고백이 진정 그 삶 가운데 절대주권자로 임하신 예수님을 있는 그대로 모셔드리는 것이 아니라면, 내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그분이 내 삶을 사시고, 내 인생이 그분께 온전히 드려지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이 귀신들의 고백과 어떤 점에서 다르다고 할 수 있을지...
내가 예수님께 드리는 소위 신앙고백이라고 하는 그것에 "예수께서 꾸짖으사 저희의 말함을 허락지 아니하"실 만큼 역겨워 하지 않으신다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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