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가어(孔子家語)의 육본편(六本篇)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良藥苦於口 忠言逆於耳(양약고어구 충언역어이)
그 뜻은 "좋은 약은 입에 쓰고, 충신의 말은 귀에 거슬린다"는 뜻이다. 좋은 약은 입에는 쓰지만 몸에는 좋고, 충신의 말은 귀에는 거슬리지만 그 말을 받아서 따르면 나라가 잘된다는 말이다.
이 말은 듣는 사람 입장에서 주는 교훈이다. 예나 지금이나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말은 듣기에 좋지 않다는 것이 진리인가보다. 들을 때 기분이 나쁘더라도 그 기분에 따라서 반응하지 말고, 그 말에서 진정으로 나에게 도움이 되는 진실이 있는지를 차분하게 생각해 보라는 성현의 충고이다. 사실 잘 알기는 하지만, 나만 보더라도 감정이 앞서는 가운데 어리석은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더 많다는 사실을 볼 때 따르기에 쉽지 않은 조언이다.
그런데 이 말은 또한 충고를 하는 입장에서도 곰곰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말이다. 누군가에게 쓴소리를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현대의 인간관계에서는 좀처럼 (비난이나 정죄가 아닌) 쓴소리를 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 그것은 그만큼 인간관계가 피상적이 되어버렸다는 것과, 인간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약화 되었음을 보여준다. 만약 내가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리고 그 대상이 자기 스스로에게 해가 되는 행동을 하는 것을 내가 본다면, 상대가 듣기 거북해 한다고 하더라도 쓴소리를 하는 것이 진정을 그 상대방을 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누군가에게 주는 "쓴소리"가 그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그로 하여금 힘들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약"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참 쉽지 않은 문제이다. 쓴소리는 그 단어 자체가 이미 상대방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것을 전제로하고 있기 때문에 모순처럼 들린다. 어떻게 해야할까?
사실, 나도 잘 모른다. 그 답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을까? 하지만, 나에게 원칙은 있다. 그것은 바로 내가 그 상대방이 잘되는 것을 진정으로 바라는 마음이 내 안에 있는지, 그리고 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지, 마지막으로 그 말을 하는 내가 충분히 겸손한지를 판단한 뒤에 그 모든 것이 'yes'라고 답이 될 때에만 사전에 충분한 기도와 준비 가운데 그 쓴소리를 하는 것이다.
상대방이 진정으로 잘 되는 것을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없다면, 내 입에서 나오는 쓴소리는 단순히 비방과 비난에 불과하다. 비방과 비난은 상대에 대한 감정적, 인격적 모독이며 공격일 뿐이다. 그 내용이 아무리 바르고 정당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상대로 하여금 깊은 상처를 줄 뿐, 그 사람에게 덕이 되게 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상대방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 인격 자체를 내 가슴에 품는 마음이 없다면, 다시 말해 상대에 대한 미워하는 감정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 쓴소리는 그저 돌을 던지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결국 그 사람에게 의미가 없거나 상처를 남길 뿐이다.
쓴소리를 하는 내가 충분히 겸손하지 않다면, 다시 말해서 상대방을 가르치려고 들거나, 내가 너보다 더 낫다는 식의 태도를 가지고 훈수를 두려고 한다면,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메시지가 전달되기 전에 마음을 닫게 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 내용이 아무리 좋은 내용이라 하더라도, 그 사람을 위해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진심으로 상대방을 위하고, 사랑한다면 쓴소리를 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내 입에서 나오는 모든 쓴소리가 반드시 그 사람을 위하고 사랑하는 것이 되지는 않는다. 쓴소리를 하는 사람은 반드시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
영적인 공동체에서 리더로 섬기면서, 쓴소리를 해야할 필요가 가끔씩 생긴다. 그럴 때면 나는 쓴소리를 해야하는지에 대한 갈등 가운데 기도한다. 하나님께서 내 입술을 주장해 달라고... 그리고 내 내면의 상태를 살피며, 진정으로 내가 쓴소리를 할 준비와 자격이 되어 있는지를 체크한다. 만약 하나라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쓴소리를 하는 것보다는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더 유익하다. 만약 모든 것이 준비가 되어 있다면, 반드시 "사전에 준비된 상태에서" 쓴소리를 한다. 그렇게 전달되는 쓴소리는 (듣는 사람의 상태에 따라 다르지만) 많은 경우 그 마음이 전달되기 때문에 영혼을 변화시키는데 쓰임을 받는다. 거기까지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이것이 적어도 아직까지는 "쓴소리"를 하는 것에 대한 나의 원칙이다.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90년대 중반, "부흥"으로 내 가슴을 뜨겁게 했던 고형원씨의 또 다른 찬양인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참으로 영성이 깊은 찬양 작곡가라는 느낌이 든다. 이 찬양을 부를 때마다, 하나님 나라를 향한 소망이 불타오르고, 이 땅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치열한 영적인 전쟁 가운데 내 모든 것을 바치겠다는 각오를 다지게 된다.
========================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나는 이 길을 가리라
좁은 문 좁은 길 나의 십자가 지고
나의 가는 이 길 끝에서 나는 주님을 보리라
영광의 내 주님 나를 맞아 주시리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나는 일어나 달려가리라
주의 영광 온 땅 덮을 때 나는 일어나 노래하리
내 사모하는 주님 온 세상 구주시라
내 사모하는 주님 영광의 왕이시라...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나는 일어나 달려가리라
주의 영광 온 땅 덮을 때 나는 일어나 노래하리
내 사모하는 주님 온 세상 구주시라
내 사모하는 주님 영광의 왕이시라
내 사모하는 주님 온 세상 구주시라
내 사모하는 주님 영광의 왕이시라
내 사모하는 주님 온 세상 구주시라
내 사모하는 주님 영광의 왕이시라
내 사모하는 주님 온 세상 구주시라
내 사모하는 주님 영광의 왕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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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영성이 깊은 찬양 작곡가라는 느낌이 든다. 이 찬양을 부를 때마다, 하나님 나라를 향한 소망이 불타오르고, 이 땅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치열한 영적인 전쟁 가운데 내 모든 것을 바치겠다는 각오를 다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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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나는 이 길을 가리라
좁은 문 좁은 길 나의 십자가 지고
나의 가는 이 길 끝에서 나는 주님을 보리라
영광의 내 주님 나를 맞아 주시리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나는 일어나 달려가리라
주의 영광 온 땅 덮을 때 나는 일어나 노래하리
내 사모하는 주님 온 세상 구주시라
내 사모하는 주님 영광의 왕이시라...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나는 일어나 달려가리라
주의 영광 온 땅 덮을 때 나는 일어나 노래하리
내 사모하는 주님 온 세상 구주시라
내 사모하는 주님 영광의 왕이시라
내 사모하는 주님 온 세상 구주시라
내 사모하는 주님 영광의 왕이시라
내 사모하는 주님 온 세상 구주시라
내 사모하는 주님 영광의 왕이시라
내 사모하는 주님 온 세상 구주시라
내 사모하는 주님 영광의 왕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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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4:37:00
有朋自遠方來
공자는 논어의 학이(學而)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
"친구가 있어 멀리서 찾아오면 그 아니 기쁜가?"
나와 함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도모하는 믿음의 동지들이 있는 것은 참으로 든든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나를 찾아와 같이 믿음의 도리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대화 가운데 서로의 믿음을 세워주며, 격려하는 가운데, 천국을 향해 같이 걸어가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있을까?
믿음에 대해서 공감하는 가운데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세상에서, 나에게 동역자를 주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마음에 기쁨이 넘친다.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
"친구가 있어 멀리서 찾아오면 그 아니 기쁜가?"
나와 함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도모하는 믿음의 동지들이 있는 것은 참으로 든든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나를 찾아와 같이 믿음의 도리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대화 가운데 서로의 믿음을 세워주며, 격려하는 가운데, 천국을 향해 같이 걸어가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있을까?
믿음에 대해서 공감하는 가운데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세상에서, 나에게 동역자를 주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마음에 기쁨이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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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4:48:00
십자가의 위치 에너지
지난 8일 오전 11시 인도네시아 남슬라웨시(South Sulawesi) 상공에서 엄청난 폭발음이 들렸다. 당시 폭발음은 1만 6천km 밖에서도 측정되었으며 하늘에는 흰색연기도 관측돼 지진이라고 생각한 주민들은 대피를 하는등 공황상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미 항공 우주국(NASA)은 그것이 ‘소행성 충돌’이었음을 공식 발표했다. NASA의 보고서에 의하면 이번 소행성은 지름 10m로 시속 4만 5천 마일로 지구 대기권과 충돌했다. 이번 소행성 충돌의 위력은 TNT 5만t의 폭발력과 상응하며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3배 정도 규모다. 그러나 이번 소행성은 다행히 그 크기가 작아서 공중 15km 내지 20km에서 폭발했다. 일부에서는 크기가 25m 가량만 되었어도 지구 표면과 충돌해 엄청난 인명피해를 줄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소행성이 이토록 엄청난 파괴력을 가지는 것은, 그 자체의 강도나 크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그 행성이 지구와 부딪히는 속도와 그것이 가지는 위치에너지 때문에 그런 파워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물리시간에 배운 공식에 의하면 위치에너지 P는 다음과 같이 표현될 수 있다: P=mgh (m: 질량, g: 중력상수, h: 높이) 즉, 공중에 떠 있는 한 물체가 가지는 위치에너지(충돌시의 파괴력)은 그 물체가 무거울수록, 그리고 높을수록 커진다는 것이다. 질량이 작더라도 높이가 높으면 큰 파괴력을 가질 수 있고, 높지 않더라도 질량이 크다면, 마찬가지로 힘이 커진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 존재했던 모든 것 중에서 가장 큰 위치에너지, 가장 큰 파괴력을 가졌던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자리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8)
여기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질량과 위로부터의 이동거리, 즉 높이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인간의 몸으로 오셨지만, 그분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본체" 즉 하나님이시다. 그 존재의 무게가 피조물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무거우신 분이시다. 이 온 우주는 그 말씀 한 마디에 사라지게도 하실 수 있고, 존재하게도 하실 수 있는 엄청난 분이시다. 그의 존재감, 예수의 존재의 무게는 무한대의 값을 가진다.
그분이 이동하셨던 거리는 "하나님과 동등됨" 즉 하늘 보좌에서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신" 그 자리까지 낮아지셨을 뿐 아니라, 인간들 가운데서도 가장 낮고 천한 저주받은 자리인 "십자가에 죽으시는" 자리, 철저히 자신을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신 그 자리까지 내려 오셨다. 그 거리 또한 무한대이다.
하늘 보좌에 앉으신 성자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자리까지 내려 오셨을 때, 그 위치 에너지, 즉 그 파괴력은 얼마였을까? 그 값은 무한대이다. 엄청난 파괴력이다. 그 파괴력은 태초에 최초의 인간인 아담의 범죄로 인해서 세상 그 어느 것도 끊을 수 없는 죄의 강력한 사슬에 매여 종노릇하던 인간들, 역사상 가장 강력한 파괴력으로도 끄떡도 하지 않았던 인간의 죄의 견고한 성벽을 단번에 무너뜨릴 수 있을 만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고후 10:4)이 되시는 것이다.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9)
십자가의 자리는 그렇게 엄청난 파괴력으로 죄악된 내 자신을 무너뜨리는 자리이다. 그 앞에 선 인간은 그 어느 누구든지 그 앞에 무릎꿇을 수 밖에 없으며, 하나님의 엄청난 힘(사랑) 앞에 압도 당한다. 그분의 능력으로 죄의 종노릇 하던 그 마귀의 결박이 끊어지고, 죄악된 자아가 무너진 그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리잡게 된다. 그 엄청난 파괴력을 경험한 자만이 죄악의 자리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거룩을 향한 열망을 가지는 삶을 살 수가 있다.
그것이 믿음의 역사다. 믿는 사람은 그 어느 누구든지 부인할 수 없는, 그리고 믿는 자들은 반드시 경험하는 성령의 건설적 파괴의 체험이다. 그것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경험하는 고통스럽지만 감격스러운 구원의 체험인 것이다. 지름 10m의 작은 소행성의 폭발만으로도 1만 6천km 밖에서도 그 소리를 분명히 들을 수 있었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파괴적 위치 에너지를 경험한 자는 자신 뿐만 아니라 그 주변, 그리고 그를 희미하게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까지 느껴질 만큼의 분명한 변화를 나타내 보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믿음의 경험이다.
소행성이 이토록 엄청난 파괴력을 가지는 것은, 그 자체의 강도나 크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그 행성이 지구와 부딪히는 속도와 그것이 가지는 위치에너지 때문에 그런 파워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물리시간에 배운 공식에 의하면 위치에너지 P는 다음과 같이 표현될 수 있다: P=mgh (m: 질량, g: 중력상수, h: 높이) 즉, 공중에 떠 있는 한 물체가 가지는 위치에너지(충돌시의 파괴력)은 그 물체가 무거울수록, 그리고 높을수록 커진다는 것이다. 질량이 작더라도 높이가 높으면 큰 파괴력을 가질 수 있고, 높지 않더라도 질량이 크다면, 마찬가지로 힘이 커진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 존재했던 모든 것 중에서 가장 큰 위치에너지, 가장 큰 파괴력을 가졌던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자리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8)
여기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질량과 위로부터의 이동거리, 즉 높이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인간의 몸으로 오셨지만, 그분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본체" 즉 하나님이시다. 그 존재의 무게가 피조물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무거우신 분이시다. 이 온 우주는 그 말씀 한 마디에 사라지게도 하실 수 있고, 존재하게도 하실 수 있는 엄청난 분이시다. 그의 존재감, 예수의 존재의 무게는 무한대의 값을 가진다.
그분이 이동하셨던 거리는 "하나님과 동등됨" 즉 하늘 보좌에서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신" 그 자리까지 낮아지셨을 뿐 아니라, 인간들 가운데서도 가장 낮고 천한 저주받은 자리인 "십자가에 죽으시는" 자리, 철저히 자신을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신 그 자리까지 내려 오셨다. 그 거리 또한 무한대이다.
하늘 보좌에 앉으신 성자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자리까지 내려 오셨을 때, 그 위치 에너지, 즉 그 파괴력은 얼마였을까? 그 값은 무한대이다. 엄청난 파괴력이다. 그 파괴력은 태초에 최초의 인간인 아담의 범죄로 인해서 세상 그 어느 것도 끊을 수 없는 죄의 강력한 사슬에 매여 종노릇하던 인간들, 역사상 가장 강력한 파괴력으로도 끄떡도 하지 않았던 인간의 죄의 견고한 성벽을 단번에 무너뜨릴 수 있을 만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고후 10:4)이 되시는 것이다.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9)
십자가의 자리는 그렇게 엄청난 파괴력으로 죄악된 내 자신을 무너뜨리는 자리이다. 그 앞에 선 인간은 그 어느 누구든지 그 앞에 무릎꿇을 수 밖에 없으며, 하나님의 엄청난 힘(사랑) 앞에 압도 당한다. 그분의 능력으로 죄의 종노릇 하던 그 마귀의 결박이 끊어지고, 죄악된 자아가 무너진 그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리잡게 된다. 그 엄청난 파괴력을 경험한 자만이 죄악의 자리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거룩을 향한 열망을 가지는 삶을 살 수가 있다.
그것이 믿음의 역사다. 믿는 사람은 그 어느 누구든지 부인할 수 없는, 그리고 믿는 자들은 반드시 경험하는 성령의 건설적 파괴의 체험이다. 그것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경험하는 고통스럽지만 감격스러운 구원의 체험인 것이다. 지름 10m의 작은 소행성의 폭발만으로도 1만 6천km 밖에서도 그 소리를 분명히 들을 수 있었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파괴적 위치 에너지를 경험한 자는 자신 뿐만 아니라 그 주변, 그리고 그를 희미하게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까지 느껴질 만큼의 분명한 변화를 나타내 보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믿음의 경험이다.
Posted at
오후 1:46: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