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주보에 나타난 재미있는(?) 오타들...
Next Friday we will be serving hot gods for lunch.
If you would like to make a donation, fill out a form, enclose a check and drip in the collection basket.
Nov. 11: An evening of boweling at Lincoln Country Club.
Women's Luncheon: Each member bring a sandwich. Polly Phillips will give the medication.
Karen's beautiful solo: "It is Well With My Solo."
Congratulations to Tim and Ronda on the birth of their daughter October 12 thru 17.
If you choose to heave during the Postlude, please do so quietly.
We are grateful for the help of those who cleaned up the grounds around the church building and the rector.
Hymn: "I Love Thee My Ford."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요 6:44)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무서운 말씀이다.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은 곧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것이고, 그것은 곧 구원을 의미한다. 그 구원의 역사가 누구에 의해서 어떻게 진행이 되는지를 분명히 보여주시는 말씀이다.
구원의 역사는 하나님 아버지의 전적인 역사이다. 그분이 구원을 시작하시며 진행하시며 완성하신다.
여기서 "이끌다"라는 동사로 사용된 "헬퀴오"는 "잡아 끌다"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한 인생을 택하셔서 강권적으로 잡아 끄시는 역사가 있지 않으면 구원은 있을 수가 없다. 스스로는 한 발짝도 내디딜 능력이 없는 자를, 아니 능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 마음의 중심에 반역하며 하나님을 거스르는 자를 하나님께서 강한 팔로 붙잡으려서 잡아 이끄셔야만 구원이 가능한 것이다.
오로지 그것이다. 그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라고 단언하신다. "올 수 없다"는 말은 장애물들이 있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 방해물들이 있어서 그것을 극복하기 힘들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어인 "뒤나마이"는 '능력'을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가 아니면, 인간 내부에는 예수님께로 갈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스스로 구원을 이룰 수 있는 가능성/능력이 완전히 zero라는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기쁘신 뜻을 따라 택정하신 자들... 그 선택하신 자들을 하나님께서는 그 강한 팔을 펴셔서 멸망 가운데서 예수님께로 잡아 끄신다. 그것이 구원이다. 바로 그런 은혜를 입은 자들만 "마지막 날에 다시 사는" 특권을 누린다.
나는 그 강한 팔에 이끌려 예수께로 간 자인가?
아니면 스스로 능력도 전혀 없으면서 예수님을 향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가운데, 여전히 멸망가운데 있는 자인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무서운 말씀이다.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은 곧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것이고, 그것은 곧 구원을 의미한다. 그 구원의 역사가 누구에 의해서 어떻게 진행이 되는지를 분명히 보여주시는 말씀이다.
구원의 역사는 하나님 아버지의 전적인 역사이다. 그분이 구원을 시작하시며 진행하시며 완성하신다.
여기서 "이끌다"라는 동사로 사용된 "헬퀴오"는 "잡아 끌다"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한 인생을 택하셔서 강권적으로 잡아 끄시는 역사가 있지 않으면 구원은 있을 수가 없다. 스스로는 한 발짝도 내디딜 능력이 없는 자를, 아니 능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 마음의 중심에 반역하며 하나님을 거스르는 자를 하나님께서 강한 팔로 붙잡으려서 잡아 이끄셔야만 구원이 가능한 것이다.
오로지 그것이다. 그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라고 단언하신다. "올 수 없다"는 말은 장애물들이 있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 방해물들이 있어서 그것을 극복하기 힘들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어인 "뒤나마이"는 '능력'을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가 아니면, 인간 내부에는 예수님께로 갈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스스로 구원을 이룰 수 있는 가능성/능력이 완전히 zero라는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기쁘신 뜻을 따라 택정하신 자들... 그 선택하신 자들을 하나님께서는 그 강한 팔을 펴셔서 멸망 가운데서 예수님께로 잡아 끄신다. 그것이 구원이다. 바로 그런 은혜를 입은 자들만 "마지막 날에 다시 사는" 특권을 누린다.
나는 그 강한 팔에 이끌려 예수께로 간 자인가?
아니면 스스로 능력도 전혀 없으면서 예수님을 향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가운데, 여전히 멸망가운데 있는 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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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0:30:00
허무...?
절대적인 신의 존재와 죽음 이후의 심판을 상정하지 않는다면, 이 사회의 가장 근본이 되는 도덕률(법의 기초가 되는)은 존재 할 수 없다. 따라서 이 사회의 존속을 위해서라도 신과 심판은 반드시 존재한다고 가정해야 한다. Immanuel Kant가 한 말이 있다.
뛰어난 사상가였던 칸트의 말은 상당히 양심적인 고백인 것이다. 인간의 모든 도덕은 그 도덕이 가능하게 한 초월적인 존재를 상정하지 않는다면 의미없는 것이 되어버린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분의 심판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내가 선하게 살며, 내 욕망을 절제하며, 남을 배려하며 살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무신론자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선하게 살아야 하며, 규범을 지키며 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사회계약이며, 그것을 통해서만 혼란과 폭력이 멈춰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의 심판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혼란이 있으면 어떻고 폭력이 있으면 어떤가? 내 욕망을 극대화 하기 위해서 남에게 피해가 좀 간다손 치더라도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내 욕망과 내 만족을 극대화 하기 위해 남에게 피해를 받지 않아야 하고, 그렇다면 나도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아야 한다는 주장은 의미없는 주장일 뿐이다. 남은 남일 뿐이고, 내 욕구, 내 욕망를 채우고 적당히 살다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이나, 남의 피해를 받지 않고자 나도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그 가운데서 내 욕구를 채우지 못하고 불만 가운데서 살아가는 것... 그 두 가지 중에서 어느 것이 더 낫다고 단언할 수 있는가? 그 기준은 무엇인가?
만약 내가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고 심판을 믿지 않는다면, 나는 궁극적으로 허무주의자가 되었을 것이다. 내 육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온갖 짓을 다 하며 산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는가? 궁극적으로 죽을 인생, 그리고 죽고난 뒤에 사라질 허무한 인생인데, 그 인생을 쾌락으로 채운들 무슨 의미가 있는가?
만약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니체의 주장대로 이 생을 더 사는 것보다는 자살하는 것이 훨씬 더 정직하게 인생에 대해 반응하는 것이리라...
내일 지구가 망하더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말했던 스피노자의 결연한 의지도, 그 인생을 뒤덮는 허무를 극복할 수는 없는 것... 사과나무를 심는 그 행동은 그날의 의미를 부여할 뿐, 지속성이 없는, 더구나 아무런 의미를 부여할 수 없는 인간의 헛된 수고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인생의 의미, 이 세상의 존재의 의미, 다시 말하면 이 세상이 존재하도록 지탱하고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분명히 드러난다. 그것은 그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 그리고 그 하나님이 부여하신 존재의 의미와 사명인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존재의 이유가 있는 것이고, 그것은 자신 안에 생래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창조주에 의해서 부여된 것이다. 모든 존재, 특히 모든 인간이 그 인생을 의미있게 살기 위해서는 그를 존재하게 하신 창조주의 뜻을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리고 그 뜻에 맞추어 나를 심판할 그 날이 있다는 것을 잊지 않고 사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바로 오늘 내가 어떤 모습으로, 무엇을 하며, 무엇을 위해, 왜 존재해야하는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인생은 결코 허무하지 않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우리를 위한 그분의 심판은 분명히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뛰어난 사상가였던 칸트의 말은 상당히 양심적인 고백인 것이다. 인간의 모든 도덕은 그 도덕이 가능하게 한 초월적인 존재를 상정하지 않는다면 의미없는 것이 되어버린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분의 심판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내가 선하게 살며, 내 욕망을 절제하며, 남을 배려하며 살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무신론자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선하게 살아야 하며, 규범을 지키며 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사회계약이며, 그것을 통해서만 혼란과 폭력이 멈춰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의 심판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혼란이 있으면 어떻고 폭력이 있으면 어떤가? 내 욕망을 극대화 하기 위해서 남에게 피해가 좀 간다손 치더라도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내 욕망과 내 만족을 극대화 하기 위해 남에게 피해를 받지 않아야 하고, 그렇다면 나도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아야 한다는 주장은 의미없는 주장일 뿐이다. 남은 남일 뿐이고, 내 욕구, 내 욕망를 채우고 적당히 살다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이나, 남의 피해를 받지 않고자 나도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그 가운데서 내 욕구를 채우지 못하고 불만 가운데서 살아가는 것... 그 두 가지 중에서 어느 것이 더 낫다고 단언할 수 있는가? 그 기준은 무엇인가?
만약 내가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고 심판을 믿지 않는다면, 나는 궁극적으로 허무주의자가 되었을 것이다. 내 육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온갖 짓을 다 하며 산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는가? 궁극적으로 죽을 인생, 그리고 죽고난 뒤에 사라질 허무한 인생인데, 그 인생을 쾌락으로 채운들 무슨 의미가 있는가?
만약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니체의 주장대로 이 생을 더 사는 것보다는 자살하는 것이 훨씬 더 정직하게 인생에 대해 반응하는 것이리라...
내일 지구가 망하더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말했던 스피노자의 결연한 의지도, 그 인생을 뒤덮는 허무를 극복할 수는 없는 것... 사과나무를 심는 그 행동은 그날의 의미를 부여할 뿐, 지속성이 없는, 더구나 아무런 의미를 부여할 수 없는 인간의 헛된 수고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인생의 의미, 이 세상의 존재의 의미, 다시 말하면 이 세상이 존재하도록 지탱하고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분명히 드러난다. 그것은 그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 그리고 그 하나님이 부여하신 존재의 의미와 사명인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존재의 이유가 있는 것이고, 그것은 자신 안에 생래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창조주에 의해서 부여된 것이다. 모든 존재, 특히 모든 인간이 그 인생을 의미있게 살기 위해서는 그를 존재하게 하신 창조주의 뜻을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리고 그 뜻에 맞추어 나를 심판할 그 날이 있다는 것을 잊지 않고 사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바로 오늘 내가 어떤 모습으로, 무엇을 하며, 무엇을 위해, 왜 존재해야하는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인생은 결코 허무하지 않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우리를 위한 그분의 심판은 분명히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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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8:26:00
William Foxwell Albright
William Foxwell Albright...
1891년에 태어나서 1971년에 죽은 이 시대의 위대한 학자 중의 학자...
그의 학문적 위치에 비견될 만한 20세기의 유일한 인물은 아인슈타인이다. Albright는 고고학계에서 다른 어떤 누구와도 비교될 수 없는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이었다. 그에게 늘 따라다니는 genius라는 수식어는 그의 이름에 붙여졌을 때에야 비로소 그 의미가 생생하게 살아 있는 단어가 될 만큼 그는 뛰어난 학자였다. 그가 죽고난 후 4년 뒤에 그의 가장 가까운 제자들에 의해서 쓰여진 책 제목도 인상적이다. William Foxwell Albright: A Twentieth-Century Genius(1975)
고고학계에서 그의 업적과 그의 이론은 그가 죽을 때까지 그 어느 누구도 감히 도전할 수 없는 성역이었다. 그가 죽고난 후에야 매우 조심스럽게 그의 연구 업적에 대해서 minor한 도전이 있어 왔지만, 그의 위치는 전혀 흔들림이 없이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고고학 중에서 그의 전공분야는 Middle East였고, 특히 성경 고고학에 있어서 대가였다. 그는 중근동 지방의 거의 모든 언어를 완전히 마스터했고, 그 지역의 고고학적인 지식을 거의 모두 섭렵했다.
그 방대한 지식과 학문적인 엄격함을 가지고, 성경의 유효성에 대해서 깊은 연구를 거듭했다. 그의 가장 큰 없적 중의 하나는 19세기 독일에서 시작된 High Criticism과 Low Criticism의 경향을 완전히 무효화시킨 것이라 하겠다. 사실 그 두 가지 본문비평은 성경을 고대 신화와 역사를 짜집기한 하나의 교훈집으로 평가절하했었다. 하지만 Albright는 그 주장을 완전히 뒤엎은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책인 William Foxwell Albright: A Twentieth-Century Genius에서 제자들은 말한다. "Dr. Albright does not believe that 'every word (in the Bible) was written by the hand of God. The Bible was written by human beings, and is the Word of God through man.'"
성경의 권위에 대한 보다 더 분명한 Albright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Albright가 한 말)"Considering everything, the Hebrew Bible is the most extraordinarily accurate record because of the empirical attitude of the Israelites, from Moses on, to matters of fact. It's an extraordinary record of human experience."
세상은 성경을 쉽게 비판한다. 그리고 그 비판은 대부분 근거가 매우 빈약하다. 심지어 학자들조차 학문적 엄격성을 결여한 채, 성경을 폄하한다. 이에 대해 Albright는 신랄한 비판을 가했다. 그가 죽던 해인 1971년에 발간된 The Anchor Bible: Matthew (S. S. Mann와 공저)의 서문에 그의 비판이 잘 드러나 있다.
For much too long a time the course of New Testament scholarship has been dictated by theological, quasi-theological, and philosophical presuppositions. In far too many cases commentaries on NT books have neglected such basic requirements as up-to-date historical and philosophical analysis of the text itself. In many ways this preoccupation with theological and metaphysical interpretation is the unacknowledged child of Hegelianism. To this should be added the continuing and baleful influence of Schleiermacher and his successors on the whole treatment of historical material. The result has often been steadfast refusal to take seriously the findings of archaeological and linguistic research. We believe that there is less and less excuse for the resulting confusion in this latter half of the twentieth century.
Closely allied with these presuppositions is the ever present fog of existentialism, casting ghostly shadows over an already confused landscape. Existentialism as a method of interpreting the New Testament is based upon a whole series of undemonstrable postulates of Platonic, Neo-Platonic, left-wing scholastic, and relativistic origins. So anti-historical is this approach that it fascinates speculative minds which prefer clichés to factual data, and shifting ideology to empirical research and logical demonstration.
세상은 하나님을 싫어한다. 증오한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싫어하고, 그 말씀을 부담스러워 한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학문적 엄격성을 가지고 접근한다면 가볍게 치부할 수 없는 책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밖에 없는데도, 그들은 그런 노력을 기울이려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아니, 의도적으로 그것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Albright와 같은 위대한 천재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학문적 지식과 엄격성으로 접근한다 하더라도 결코 무효화 할 수 없는, 그래서 그 천재를 무릎꿇게 하는 그런 책이 바로 성경이다.
세상이 그 무엇이라고 성경을 폄하해도,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1891년에 태어나서 1971년에 죽은 이 시대의 위대한 학자 중의 학자...
그의 학문적 위치에 비견될 만한 20세기의 유일한 인물은 아인슈타인이다. Albright는 고고학계에서 다른 어떤 누구와도 비교될 수 없는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이었다. 그에게 늘 따라다니는 genius라는 수식어는 그의 이름에 붙여졌을 때에야 비로소 그 의미가 생생하게 살아 있는 단어가 될 만큼 그는 뛰어난 학자였다. 그가 죽고난 후 4년 뒤에 그의 가장 가까운 제자들에 의해서 쓰여진 책 제목도 인상적이다. William Foxwell Albright: A Twentieth-Century Genius(1975)
고고학계에서 그의 업적과 그의 이론은 그가 죽을 때까지 그 어느 누구도 감히 도전할 수 없는 성역이었다. 그가 죽고난 후에야 매우 조심스럽게 그의 연구 업적에 대해서 minor한 도전이 있어 왔지만, 그의 위치는 전혀 흔들림이 없이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고고학 중에서 그의 전공분야는 Middle East였고, 특히 성경 고고학에 있어서 대가였다. 그는 중근동 지방의 거의 모든 언어를 완전히 마스터했고, 그 지역의 고고학적인 지식을 거의 모두 섭렵했다.
그 방대한 지식과 학문적인 엄격함을 가지고, 성경의 유효성에 대해서 깊은 연구를 거듭했다. 그의 가장 큰 없적 중의 하나는 19세기 독일에서 시작된 High Criticism과 Low Criticism의 경향을 완전히 무효화시킨 것이라 하겠다. 사실 그 두 가지 본문비평은 성경을 고대 신화와 역사를 짜집기한 하나의 교훈집으로 평가절하했었다. 하지만 Albright는 그 주장을 완전히 뒤엎은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책인 William Foxwell Albright: A Twentieth-Century Genius에서 제자들은 말한다. "Dr. Albright does not believe that 'every word (in the Bible) was written by the hand of God. The Bible was written by human beings, and is the Word of God through man.'"
성경의 권위에 대한 보다 더 분명한 Albright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Albright가 한 말)"Considering everything, the Hebrew Bible is the most extraordinarily accurate record because of the empirical attitude of the Israelites, from Moses on, to matters of fact. It's an extraordinary record of human experience."
세상은 성경을 쉽게 비판한다. 그리고 그 비판은 대부분 근거가 매우 빈약하다. 심지어 학자들조차 학문적 엄격성을 결여한 채, 성경을 폄하한다. 이에 대해 Albright는 신랄한 비판을 가했다. 그가 죽던 해인 1971년에 발간된 The Anchor Bible: Matthew (S. S. Mann와 공저)의 서문에 그의 비판이 잘 드러나 있다.
For much too long a time the course of New Testament scholarship has been dictated by theological, quasi-theological, and philosophical presuppositions. In far too many cases commentaries on NT books have neglected such basic requirements as up-to-date historical and philosophical analysis of the text itself. In many ways this preoccupation with theological and metaphysical interpretation is the unacknowledged child of Hegelianism. To this should be added the continuing and baleful influence of Schleiermacher and his successors on the whole treatment of historical material. The result has often been steadfast refusal to take seriously the findings of archaeological and linguistic research. We believe that there is less and less excuse for the resulting confusion in this latter half of the twentieth century.
Closely allied with these presuppositions is the ever present fog of existentialism, casting ghostly shadows over an already confused landscape. Existentialism as a method of interpreting the New Testament is based upon a whole series of undemonstrable postulates of Platonic, Neo-Platonic, left-wing scholastic, and relativistic origins. So anti-historical is this approach that it fascinates speculative minds which prefer clichés to factual data, and shifting ideology to empirical research and logical demonstration.
세상은 하나님을 싫어한다. 증오한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싫어하고, 그 말씀을 부담스러워 한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학문적 엄격성을 가지고 접근한다면 가볍게 치부할 수 없는 책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밖에 없는데도, 그들은 그런 노력을 기울이려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아니, 의도적으로 그것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Albright와 같은 위대한 천재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학문적 지식과 엄격성으로 접근한다 하더라도 결코 무효화 할 수 없는, 그래서 그 천재를 무릎꿇게 하는 그런 책이 바로 성경이다.
세상이 그 무엇이라고 성경을 폄하해도,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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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9:14:00
[펌] You Might be a Southern Baptist if...
(A funny humor...)
You Might be a Southern Baptist if...
You think God's presence is always strongest in the back three pews.
You think John the Baptist founded the Southern Baptist Convention.
You think "Amazing Grace" is the national anthem.
The first complete sentence you uttered was "We've never done it this way before."
You judge the quality of the sermon by the amount of sweat worked up by the preacher.
Your definition of "fellowship" has something to do with food.
You ever wonder when Lottie Moon and Annie Armstrong will be paid off.
You honestly believe the Apostle Paul spoke King James English
You think worship service music has to be loud.
You think Jesus actually used Welch's grape juice and saltine crackers.
You think preachers who wear robes are in Cahoots with the communists.
You judge the quality of a service by the length of the service.
You ever wake up in the middle of the night craving fried chicken and interpret that feeling as a call to preach.
You believe you are supposed to take a covered dish to heaven when you die.
You have never sung the third verse of any hymn.
You have ever put an IOU in the collection plate.
You think someone who says "amen" while the Pastor is preaching might be a charismatic.
You complained because your Pastor only works one day a week and then he works too long.
You clapped in church last Sunday and felt guilty about it all week.
You think the epistles are probably the wives of the apostles.
You are old enough to get a senior citizen discount at the pharmacy, but not old enough to be promoted into the senior adult Sunday School class.
You Might be a Southern Baptist if...
You think God's presence is always strongest in the back three pews.
You think John the Baptist founded the Southern Baptist Convention.
You think "Amazing Grace" is the national anthem.
The first complete sentence you uttered was "We've never done it this way before."
You judge the quality of the sermon by the amount of sweat worked up by the preacher.
Your definition of "fellowship" has something to do with food.
You ever wonder when Lottie Moon and Annie Armstrong will be paid off.
You honestly believe the Apostle Paul spoke King James English
You think worship service music has to be loud.
You think Jesus actually used Welch's grape juice and saltine crackers.
You think preachers who wear robes are in Cahoots with the communists.
You judge the quality of a service by the length of the service.
You ever wake up in the middle of the night craving fried chicken and interpret that feeling as a call to preach.
You believe you are supposed to take a covered dish to heaven when you die.
You have never sung the third verse of any hymn.
You have ever put an IOU in the collection plate.
You think someone who says "amen" while the Pastor is preaching might be a charismatic.
You complained because your Pastor only works one day a week and then he works too long.
You clapped in church last Sunday and felt guilty about it all week.
You think the epistles are probably the wives of the apostles.
You are old enough to get a senior citizen discount at the pharmacy, but not old enough to be promoted into the senior adult Sunday School cla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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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1:13:00
정중동...
조용하다...
핸드폰 벨이 울렸다.
모르는 전화번호...
그래도... 받는다...
심한 잡음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알아들을 수 없는 스페인어...
끊는다...
다시 조용하다...
청년부를 사임하면서 내 삶에 나타난 여러가지 변화 중 너무나 분명해서 늘 느낄 수 밖에 없는 변화는 바로 잠잠해져버린 교회 쪽지와 핸드폰이다.
지난 4년간 하루에 4통꼴로 끊임없이 오던 다양한 연락은 거의 2주가 다 되어가는 동안 단 한통의 쪽지도 없었다.
그리고 핸드폰... 한국에서 한참 유행하던 말대로 캔디폰이 되어버린 내 휴대폰...
물론 그 전에도 전화가 아주 자주 오는 것은 아니었지만, 2주일이 다 되도록 단 한 통의 전화도 없는 것은... 너무했다... 깜빡 잊고 전화를 두고 나가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그런 핸드폰...
오죽했으면, 광고성 전화인 것을 알고도 받아야겠다는 충동에 사로잡혀 전화를 받았을까?
정중동(靜中動)... 움직임이 없이 고요함 가운데서 움직이는 것...
그것이 하나님께서 내게 원하시는 것인가?
세상에서는 정(靜)하지만 하나님에 대해서는 동(動)하는 것...
세상에서 보면 아무 것도 하는 것이 없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무지하게 바쁘게 움직이는 것... 그분을 향해 달려가는 것... 그분과 함께 많은 일을 하는 것...
나는 지금 영적인 동(動) 가운데 있는가?
핸드폰 벨이 울렸다.
모르는 전화번호...
그래도... 받는다...
심한 잡음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알아들을 수 없는 스페인어...
끊는다...
다시 조용하다...
청년부를 사임하면서 내 삶에 나타난 여러가지 변화 중 너무나 분명해서 늘 느낄 수 밖에 없는 변화는 바로 잠잠해져버린 교회 쪽지와 핸드폰이다.
지난 4년간 하루에 4통꼴로 끊임없이 오던 다양한 연락은 거의 2주가 다 되어가는 동안 단 한통의 쪽지도 없었다.
그리고 핸드폰... 한국에서 한참 유행하던 말대로 캔디폰이 되어버린 내 휴대폰...
물론 그 전에도 전화가 아주 자주 오는 것은 아니었지만, 2주일이 다 되도록 단 한 통의 전화도 없는 것은... 너무했다... 깜빡 잊고 전화를 두고 나가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그런 핸드폰...
오죽했으면, 광고성 전화인 것을 알고도 받아야겠다는 충동에 사로잡혀 전화를 받았을까?
정중동(靜中動)... 움직임이 없이 고요함 가운데서 움직이는 것...
그것이 하나님께서 내게 원하시는 것인가?
세상에서는 정(靜)하지만 하나님에 대해서는 동(動)하는 것...
세상에서 보면 아무 것도 하는 것이 없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무지하게 바쁘게 움직이는 것... 그분을 향해 달려가는 것... 그분과 함께 많은 일을 하는 것...
나는 지금 영적인 동(動) 가운데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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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3:49:00
Anne Bradstreet의 글 중에서....
아래 글은 1630년 Arabella호를 타고 미국으로 이주해온 청교도 중의 한 사람이었던 Anne Bradstreet이 자녀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 남긴 글 중에서 발췌한 것이다. 인생의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 깊이 체험한 믿음의 선배의 경험에서 우러나는 충심어린 권고가 마음에 울린다.
Among all my experiences of God's gratious Dealings with me I have constantly observed this, that he hath never suffered me long to sitt loose from him, but by one affliction or other hath made me look home, and search what was amisse so usually thos it hath been with me that I have no sooner felt my heart out of order, but I have expected correction for it, which most commonly hath been upon my own person, in sicknesse, weaknes, paines, sometimes on my soul, in Doubts and feares of God's displeasure, and my sincerity towards him, sometimes he hath smott a child with sicknes, sometimes chastened by losses in estate,--and these Times (thro: his great mercy) have been the times of my greatest Getting and Advantage, yea I have found them the Times when the Lord hath manifested the most love to me. Then have I gone to searching, and have said with David, Lord search me and try me, see what wayes of wickednes are in me, and lead me in the way everlasting; and seldom or never, but I have found either some sin I lay under which God would have reformed, or some duty neglected which he would have performed. And by his help I have layed Vowes and Bonds upon my Soul to perform his righteous commands.
If at any time you are chastened of God, take it as thankfully and Joyfully as in greatest mercyes, for if yee bee his yee shall reap the greatest benefit by it.
Among all my experiences of God's gratious Dealings with me I have constantly observed this, that he hath never suffered me long to sitt loose from him, but by one affliction or other hath made me look home, and search what was amisse so usually thos it hath been with me that I have no sooner felt my heart out of order, but I have expected correction for it, which most commonly hath been upon my own person, in sicknesse, weaknes, paines, sometimes on my soul, in Doubts and feares of God's displeasure, and my sincerity towards him, sometimes he hath smott a child with sicknes, sometimes chastened by losses in estate,--and these Times (thro: his great mercy) have been the times of my greatest Getting and Advantage, yea I have found them the Times when the Lord hath manifested the most love to me. Then have I gone to searching, and have said with David, Lord search me and try me, see what wayes of wickednes are in me, and lead me in the way everlasting; and seldom or never, but I have found either some sin I lay under which God would have reformed, or some duty neglected which he would have performed. And by his help I have layed Vowes and Bonds upon my Soul to perform his righteous commands.
If at any time you are chastened of God, take it as thankfully and Joyfully as in greatest mercyes, for if yee bee his yee shall reap the greatest benefit by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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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7:23:00
배고픔
저녁 6시 15분...
수업을 마치고 돌아 오는 길.
배가 고팠다. 그리고 배 고픔보다 더 중요한 것은... 뭔가가 먹고 싶어졌다.
얼마나 오랫만인가?
지난 7월과 8월... 태어나서 처음으로 식욕을 잃었었다.
아침 한 끼로 하루를 버텼다. 아무 것도 먹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에... 배는 고팠지만, 입이 음식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내면의 고통으로 식욕을 완전히 상실했기 때문에...
하루를 버틸 수 있는 최소한의 음식이면 족했다...
그 고통이 지나가고 있는 것인가?
배고픔과 함께 약간의 식욕이 생겼다.
많이 먹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에, Wendy's에 가서 99센트짜리 작은 햄버거를 사 먹었다.
전 같으면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에 매우 부담스러워했던 위가 이제는 다르게 반응한다. 반가와 하는 듯...
회복인가?
아니면 그저 바빠진 일상 가운데서 더 많은 에너지를 요구하는 몸의 단순한 반응인가?
시간은... 역시 흘러 가는가보다...
수업을 마치고 돌아 오는 길.
배가 고팠다. 그리고 배 고픔보다 더 중요한 것은... 뭔가가 먹고 싶어졌다.
얼마나 오랫만인가?
지난 7월과 8월... 태어나서 처음으로 식욕을 잃었었다.
아침 한 끼로 하루를 버텼다. 아무 것도 먹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에... 배는 고팠지만, 입이 음식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내면의 고통으로 식욕을 완전히 상실했기 때문에...
하루를 버틸 수 있는 최소한의 음식이면 족했다...
그 고통이 지나가고 있는 것인가?
배고픔과 함께 약간의 식욕이 생겼다.
많이 먹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에, Wendy's에 가서 99센트짜리 작은 햄버거를 사 먹었다.
전 같으면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에 매우 부담스러워했던 위가 이제는 다르게 반응한다. 반가와 하는 듯...
회복인가?
아니면 그저 바빠진 일상 가운데서 더 많은 에너지를 요구하는 몸의 단순한 반응인가?
시간은... 역시 흘러 가는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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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1:16:00
요압, 아비아달, 나단
다윗의 주변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모두가 충성스러운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운명은 각기 달랐다.
그 대표적인 예들이 요압, 아비아달, 나단이다.
요압은 다윗이 떠돌이 생활을 하며 숨어지내던 아둘람굴 시절부터 다윗과 동고동락을 하던 사람이었다. 용사였으며, 다윗의 가장 측근에 있는 사람으로 지금으로 국방부 장관을 지낸 사람이었다. 당시 가장 신뢰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리고 가장 리더십이 있고, 용맹하며, 군사적으로 능력있는 자가 아니라면 결코 차지 할 수 없는 자리가 바로 군대장관이었다. 군대장관은 언제든지 왕에게 반역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압은 다윗이 죽음의 위협 가운데 있을 때에도, 밧세바와 간음의 죄를 짓는 그 타락의 자리에도 다윗을 떠나지 않았던 심복이었다.
하지만 그는 교만한 자였다. 다윗을 섬기는 자였지만, 다윗의 명령을 수시로 무시했다. 자신이 보기에 부당하다면 왕의 명령도 소용이 없었다. 다윗이 보는 앞에서는 매우 충신인 것처럼 행동했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었다. 다윗은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을 어떻게 제어할 수 없어서 그냥 지켜보기만 했다.
요압이 결정적으로 다윗의 눈 밖에 난 것은 바로 다윗 왕위 계승문제에서였다. 다윗이 전에 분명히 솔로몬을 다음 왕으로 지목했음을 분명히 앎에도 불구하고, 그를 지지하지 않고, 아도니야가 스스로 왕이 되려고 했을 때, 그의 편에 동조하게 된다.
그것은 명백한 왕명의 거역이었고 반역이었다. 이것을 계기로 그는 다윗의 눈 밖에 나게 되고, 결국 솔로몬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다윗의 심복이고, 충신인 것처럼 보였지만, 마음으로 다윗에게 온전한 충성을 바치지 않았던, 그래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불순종을 일삼던 자의 최후였던 것이다.
아비아달도 요압과 비슷한 경우이다. 사울의 공격을 피해 급히 달아나던 때에 배가 고파 자신의 성소를 찾았던 다윗에게 막 꺼내온 진설병을 주었다는 이유로 가족과 친족이 사울로부터 몰살당하는 끔찍한 피해를 입었던 그를 다윗이 찾아가서 다윗의 무리 가운데 거하게 함으로 그와 다윗의 관계는 시작되었다. 그는 제사장으로서 다윗과 늘 함께했었다. 압살롬이 반역했을 때에도 그는 다윗을 위해 충성을 바쳤던 자였다. 후에 합류한 사독과 함께 두 명의 대제사장 중 한 명으로서, 아니 사독보다 더 앞선 자로서 다윗왕국에서 영적인 리더의 역할을 감당했던 자였다.
하지만 그도 요압과 마찬가지로 마지막 순간에 솔로몬이 아니라 아도니야의 편에 섬으로 인해서, 결국 은혜의 자리에서 멀어지게 된다. 그 누구보다도 왕의 마음을 잘 아는 자였기 때문에, 실수로 아도니야의 편에 선 것이 아니다. 주인의 뜻을 분명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뜻에 순종하지 않는 의지적인 불순종의 모습을 보인 것이다. 그것은 반역이었다.
하나님께 구별된 제사장을 함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솔로몬은 아비아달을 요압과 같이 처리하지 않은 대신, 그를 그의 고향집으로 쫓아보낸다. 이후로 아비아달의 집안은 중앙정치와는 완전히 거리를 두고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목숨은 구했지만, 그 반역의 댓가는 컸다.
요압과 아비아달과는 다른 케이스가 나단 선지자였다. 그는 언제 어디서 다윗의 진영에 합류했는지 기록이 없다. 그럼에도 그는 다윗 개인의 영적인 리더와 조언자 역할을 하는 인물이다. 그는 다윗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사자였다. 다윗이 밧세바와의 간음으로 끔찍한 죄악 가운데 있을 때, 추상같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를 일깨운 것은 나단 선지자였다. 다윗이 하나님을 위한 전을 짓고자 마음에 생각하고 있을 때, 그 마음을 아시고 하나님의 뜻을 전한 것도 나단 선지자였다. 나단 선지자는 다윗이 중요한 고비에 있을 때, 하나님의 바른 길을 알려 준 등불과도 같은 존재였다.
나단은 끝까지 다윗에게 충성한다. 차기 왕에 대한 다윗의 마음이 사무엘에게 있음을 알았고, 또한 그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마음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그 왕의 마음을 받아, 그것을 받드는 자였고, 지키는 자였다. 왕이 바르지 못한 길로 갈 때는 옆에서 보기에 심하다 할 정도로 너무나도 엄하게 그 왕을 대했지만, 그 모든 것은 다윗을 위한 것이었고, 그를 사랑하였기 때문에 감당한 그 자신의 십자가였던 것이다.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충신이었다.
나는 청년들을 섬기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난다. 최근에는 요압과 같은 청년을 보았다. 겉으로는 너무나 충성스러운 자였지만, 결코 그 마음이 하나님과 하나되지 못하고 결국 그 가운데 끔찍한 죄를 짓고야 마는, 그래서 스스로 은혜의 자리에서 떨어져 나가버린 불쌍한, 그렇지만 너무나 악한 사람을 보았다.
아비야달과 같은 청년도 있었다.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그 구원을 잃어버리지는 않지만, 하나님 앞에서 상을 받을 만한 어떤 것도 없이,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울 수 밖에 없는 그런 청년도 있었다.
물론 나단과 같은 청년들도 많이 봤다. 겉으로는 부족한 것이 많아 보이지만, 그 중심이 하나님께로 향해 있어서 죽도록 충성하며, 순전한 마음을 하나님께로 바치는 그런 너무나 아름다운 청년들도 보았다.
그렇다면 정작 나는 어디에 속하는가?
나는 누구인가?
내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분께 늘 변하지 않는 충성을 바치는 나단과 같은 자인가?
아지면 겉으로는 거룩한 척하면서, 왕의 명령을 불순종하는 그런 악행을 일삼는 죄인인가?
내 소망은 나단에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 나의 왕... 그분 앞에 내 모든 것을 다 바쳐 충성을 바치고자 하는 소망이 나에게 있다. 간절함이 나에게 있다. 하지만 그것이 진정으로 내 삶을 통해서, 내 모든 삶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는가?
이 두려운 질문 앞에 오늘도 나는 아파하며 무릎을 주님 앞에 꿇는다.
그 대표적인 예들이 요압, 아비아달, 나단이다.
요압은 다윗이 떠돌이 생활을 하며 숨어지내던 아둘람굴 시절부터 다윗과 동고동락을 하던 사람이었다. 용사였으며, 다윗의 가장 측근에 있는 사람으로 지금으로 국방부 장관을 지낸 사람이었다. 당시 가장 신뢰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리고 가장 리더십이 있고, 용맹하며, 군사적으로 능력있는 자가 아니라면 결코 차지 할 수 없는 자리가 바로 군대장관이었다. 군대장관은 언제든지 왕에게 반역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압은 다윗이 죽음의 위협 가운데 있을 때에도, 밧세바와 간음의 죄를 짓는 그 타락의 자리에도 다윗을 떠나지 않았던 심복이었다.
하지만 그는 교만한 자였다. 다윗을 섬기는 자였지만, 다윗의 명령을 수시로 무시했다. 자신이 보기에 부당하다면 왕의 명령도 소용이 없었다. 다윗이 보는 앞에서는 매우 충신인 것처럼 행동했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었다. 다윗은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을 어떻게 제어할 수 없어서 그냥 지켜보기만 했다.
요압이 결정적으로 다윗의 눈 밖에 난 것은 바로 다윗 왕위 계승문제에서였다. 다윗이 전에 분명히 솔로몬을 다음 왕으로 지목했음을 분명히 앎에도 불구하고, 그를 지지하지 않고, 아도니야가 스스로 왕이 되려고 했을 때, 그의 편에 동조하게 된다.
그것은 명백한 왕명의 거역이었고 반역이었다. 이것을 계기로 그는 다윗의 눈 밖에 나게 되고, 결국 솔로몬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다윗의 심복이고, 충신인 것처럼 보였지만, 마음으로 다윗에게 온전한 충성을 바치지 않았던, 그래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불순종을 일삼던 자의 최후였던 것이다.
아비아달도 요압과 비슷한 경우이다. 사울의 공격을 피해 급히 달아나던 때에 배가 고파 자신의 성소를 찾았던 다윗에게 막 꺼내온 진설병을 주었다는 이유로 가족과 친족이 사울로부터 몰살당하는 끔찍한 피해를 입었던 그를 다윗이 찾아가서 다윗의 무리 가운데 거하게 함으로 그와 다윗의 관계는 시작되었다. 그는 제사장으로서 다윗과 늘 함께했었다. 압살롬이 반역했을 때에도 그는 다윗을 위해 충성을 바쳤던 자였다. 후에 합류한 사독과 함께 두 명의 대제사장 중 한 명으로서, 아니 사독보다 더 앞선 자로서 다윗왕국에서 영적인 리더의 역할을 감당했던 자였다.
하지만 그도 요압과 마찬가지로 마지막 순간에 솔로몬이 아니라 아도니야의 편에 섬으로 인해서, 결국 은혜의 자리에서 멀어지게 된다. 그 누구보다도 왕의 마음을 잘 아는 자였기 때문에, 실수로 아도니야의 편에 선 것이 아니다. 주인의 뜻을 분명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뜻에 순종하지 않는 의지적인 불순종의 모습을 보인 것이다. 그것은 반역이었다.
하나님께 구별된 제사장을 함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솔로몬은 아비아달을 요압과 같이 처리하지 않은 대신, 그를 그의 고향집으로 쫓아보낸다. 이후로 아비아달의 집안은 중앙정치와는 완전히 거리를 두고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목숨은 구했지만, 그 반역의 댓가는 컸다.
요압과 아비아달과는 다른 케이스가 나단 선지자였다. 그는 언제 어디서 다윗의 진영에 합류했는지 기록이 없다. 그럼에도 그는 다윗 개인의 영적인 리더와 조언자 역할을 하는 인물이다. 그는 다윗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사자였다. 다윗이 밧세바와의 간음으로 끔찍한 죄악 가운데 있을 때, 추상같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를 일깨운 것은 나단 선지자였다. 다윗이 하나님을 위한 전을 짓고자 마음에 생각하고 있을 때, 그 마음을 아시고 하나님의 뜻을 전한 것도 나단 선지자였다. 나단 선지자는 다윗이 중요한 고비에 있을 때, 하나님의 바른 길을 알려 준 등불과도 같은 존재였다.
나단은 끝까지 다윗에게 충성한다. 차기 왕에 대한 다윗의 마음이 사무엘에게 있음을 알았고, 또한 그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마음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그 왕의 마음을 받아, 그것을 받드는 자였고, 지키는 자였다. 왕이 바르지 못한 길로 갈 때는 옆에서 보기에 심하다 할 정도로 너무나도 엄하게 그 왕을 대했지만, 그 모든 것은 다윗을 위한 것이었고, 그를 사랑하였기 때문에 감당한 그 자신의 십자가였던 것이다.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충신이었다.
나는 청년들을 섬기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난다. 최근에는 요압과 같은 청년을 보았다. 겉으로는 너무나 충성스러운 자였지만, 결코 그 마음이 하나님과 하나되지 못하고 결국 그 가운데 끔찍한 죄를 짓고야 마는, 그래서 스스로 은혜의 자리에서 떨어져 나가버린 불쌍한, 그렇지만 너무나 악한 사람을 보았다.
아비야달과 같은 청년도 있었다.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그 구원을 잃어버리지는 않지만, 하나님 앞에서 상을 받을 만한 어떤 것도 없이,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울 수 밖에 없는 그런 청년도 있었다.
물론 나단과 같은 청년들도 많이 봤다. 겉으로는 부족한 것이 많아 보이지만, 그 중심이 하나님께로 향해 있어서 죽도록 충성하며, 순전한 마음을 하나님께로 바치는 그런 너무나 아름다운 청년들도 보았다.
그렇다면 정작 나는 어디에 속하는가?
나는 누구인가?
내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분께 늘 변하지 않는 충성을 바치는 나단과 같은 자인가?
아지면 겉으로는 거룩한 척하면서, 왕의 명령을 불순종하는 그런 악행을 일삼는 죄인인가?
내 소망은 나단에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 나의 왕... 그분 앞에 내 모든 것을 다 바쳐 충성을 바치고자 하는 소망이 나에게 있다. 간절함이 나에게 있다. 하지만 그것이 진정으로 내 삶을 통해서, 내 모든 삶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는가?
이 두려운 질문 앞에 오늘도 나는 아파하며 무릎을 주님 앞에 꿇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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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8:37:00
휴일 하루...
휴일..
근처의 공원에 다녀 왔습니다.
나무, 숲, 아주 작은 폭포와 큰 연못, 시원한 바위 및, trail, 그리고 자연 속의 강...
화려하진 않고 수수했지만, 아름다왔고 Texas적인 경관이었습니다.
그 곳에서 간단한 hiking과 물놀이를 하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근처의 공원에 다녀 왔습니다.
나무, 숲, 아주 작은 폭포와 큰 연못, 시원한 바위 및, trail, 그리고 자연 속의 강...
화려하진 않고 수수했지만, 아름다왔고 Texas적인 경관이었습니다.
그 곳에서 간단한 hiking과 물놀이를 하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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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5:51:00
두려워 해야할 마귀의 공격
마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
엄청난 능력을 가진 영적인 존재.
우는 사자와 같이 늘 내 옆에서 있어 나를 노리는 자.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로서, 마귀는 그리 두려운 존재는 아니다. 그것은 그보다 더 크고 위대하신 예수님께서 내 주인이 되시고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를 두렵게하는 모습으로 나타날 때, 우리는 그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가운데, 그의 이름으로 맞서 싸우면 반드시 승리를 거두게 되어 있다.
그런데 그에게 있어서 진정으로 두려워해야할 것이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마귀의 가장 큰 능력인 속이는 것, 그리고 그 속이는 것에서 비롯된 영적감수성의 마비인 것이다.
다윗에 이어 스스로 왕이 되려고 했던 아도니야. 그는 솔로몬의 자비로 목숨을 구한다. 하지만, 그 스스로가 마땅히 왕이 되었어야 했다는 생각과 그로 인해서 왕위를 찬탈하고자 하는 욕망을 버리지 못한다. 급기야, 음흉한 마음을 품고 솔로몬의 어머니인 밧세바에게 접근한다.다윗의 말년에 그를 시중들기 위해 취했던 매우 아름다운 여인인 아비삭을 자신의 아내로 달라는 것. 그가 밧세바에게 요구한 것은 어찌보면 그리 대단하지 않은 것이었다. 이스라엘에 소문난 미인이었고, 젊은 여자를 탐내는 것은 모든 남자들의 공통적인 욕망인 것이다. 밧세바는 그것을 그리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고, 급기야 솔로몬에게 아도니야를 위해 청하는 지경까지 이른다.
하지만 아도니야의 요구는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고대 중근동 지방에서는 왕위를 이어받은 왕이 선대의 왕의 첩을 자신의 첩으로 취함으로써 자신의 왕권을 과시하는 것이 일반적인 사례였다. 압살롭이 다윗에게 반역한 후 한 일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궁에 남았던 다윗의 첩들과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성관계를 맺는 것은 자신의 왕권을 확실하게 하였다. 아도니야는 바로 그것을 노리고 아비삭을 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아들의 왕권을 노리는 음흉한 계략이었지만, 그것을 전혀 알지 못하고 그 일에 동참하여 협력하는 조력자가 되어버린다. 그의 몇 마디 말로 아도니야에 대한 밧세바의 경계심을 풀게하고, 그 일의 중대함에 대한 감각을 마비시킴으로 그의 편에 서게 하는 것이다. 그의 속임에 넘어가는 것이다.
아도니야의 계략은 마귀가 늘 사용하는 계략이다. 그는 몇 마디의 말을 통해서 인간의 죄에 대한 감수성과 그 결과에 대한 두려움을 마비시킨다. 하와에게 나타났던 뱀이 그랬고, 밧세바와 간음을 행하며, 충실한 부하를 살해하는 끔찍한 일을 저질렀던 다윗에게도 그랬다. 죄에 대한 감수성을 마비시키면, 엄청난 죄조차도 그리 대수롭지 않은, 해 볼만한 일이 되어버리고, 그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두려움 역시 잘 느껴지지 않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우리는 죄를 감행하게 된다.
마귀의 그 무시무시한 공격을 이겨내는 길은 단 한 가지 밖에 없다. 그것은 내 모든 판단의 기준을 하나님의 말씀에 두는 것이다. 아무리 뱀이 하와의 영적 감수성을 마비시켰다 하더라도, 하와가 자신의 판단과 자신의 생각을 기준으로 행동하지 않고, 그에게 주어진 말씀을 기준으로 행동했다면, 그가 죄를 짓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선악과가 그 아무리 먹음직스러워 보인다 하더라도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는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 되었다면, 혹은 그것을 따먹게 되면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을 기억했다면, 선악과를 따 먹을 수가 없다. 밧세바와 간음을 계획하던 다윗이 간음하는 자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무시무시한 진노를 전하는 하나님의 율법을 기억했더라면, 혹은 살인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끔찍한 형벌을 기억했더라면, 다시 말해 하나님의 절대적인 명령인 십계명을 기억했더라면, 그 끔찍한 죄를 저지르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이 세상에 진리는 단 하나뿐...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 말씀을 늘 가까이하고, 그 말씀을 내 삶에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으며, "내"가 원하는 것, "내"가 보기에 별 문제없어 보이는 것을 따라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절대적인 기준이 된다면, 마귀는 결코 나를 쓰러뜨릴 수가 없다. 마귀는 내 영적 감수성,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마비시킬 수는 있지만, 말씀을 통해서 보여지는 분명한 진리를 보지 못하게 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오늘도 말씀을 사랑해야하는 이유... 말씀 안에 거해야 하는 이유... 말씀으로 나를 단련시켜야 하는 이유... 말씀 앞에 내 몸을 쳐서 복종시킴으로 무릎꿇는 훈련을 해야하는 이유이다.
그래야 산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
엄청난 능력을 가진 영적인 존재.
우는 사자와 같이 늘 내 옆에서 있어 나를 노리는 자.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로서, 마귀는 그리 두려운 존재는 아니다. 그것은 그보다 더 크고 위대하신 예수님께서 내 주인이 되시고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를 두렵게하는 모습으로 나타날 때, 우리는 그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가운데, 그의 이름으로 맞서 싸우면 반드시 승리를 거두게 되어 있다.
그런데 그에게 있어서 진정으로 두려워해야할 것이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마귀의 가장 큰 능력인 속이는 것, 그리고 그 속이는 것에서 비롯된 영적감수성의 마비인 것이다.
다윗에 이어 스스로 왕이 되려고 했던 아도니야. 그는 솔로몬의 자비로 목숨을 구한다. 하지만, 그 스스로가 마땅히 왕이 되었어야 했다는 생각과 그로 인해서 왕위를 찬탈하고자 하는 욕망을 버리지 못한다. 급기야, 음흉한 마음을 품고 솔로몬의 어머니인 밧세바에게 접근한다.다윗의 말년에 그를 시중들기 위해 취했던 매우 아름다운 여인인 아비삭을 자신의 아내로 달라는 것. 그가 밧세바에게 요구한 것은 어찌보면 그리 대단하지 않은 것이었다. 이스라엘에 소문난 미인이었고, 젊은 여자를 탐내는 것은 모든 남자들의 공통적인 욕망인 것이다. 밧세바는 그것을 그리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고, 급기야 솔로몬에게 아도니야를 위해 청하는 지경까지 이른다.
하지만 아도니야의 요구는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고대 중근동 지방에서는 왕위를 이어받은 왕이 선대의 왕의 첩을 자신의 첩으로 취함으로써 자신의 왕권을 과시하는 것이 일반적인 사례였다. 압살롭이 다윗에게 반역한 후 한 일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궁에 남았던 다윗의 첩들과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성관계를 맺는 것은 자신의 왕권을 확실하게 하였다. 아도니야는 바로 그것을 노리고 아비삭을 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아들의 왕권을 노리는 음흉한 계략이었지만, 그것을 전혀 알지 못하고 그 일에 동참하여 협력하는 조력자가 되어버린다. 그의 몇 마디 말로 아도니야에 대한 밧세바의 경계심을 풀게하고, 그 일의 중대함에 대한 감각을 마비시킴으로 그의 편에 서게 하는 것이다. 그의 속임에 넘어가는 것이다.
아도니야의 계략은 마귀가 늘 사용하는 계략이다. 그는 몇 마디의 말을 통해서 인간의 죄에 대한 감수성과 그 결과에 대한 두려움을 마비시킨다. 하와에게 나타났던 뱀이 그랬고, 밧세바와 간음을 행하며, 충실한 부하를 살해하는 끔찍한 일을 저질렀던 다윗에게도 그랬다. 죄에 대한 감수성을 마비시키면, 엄청난 죄조차도 그리 대수롭지 않은, 해 볼만한 일이 되어버리고, 그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두려움 역시 잘 느껴지지 않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우리는 죄를 감행하게 된다.
마귀의 그 무시무시한 공격을 이겨내는 길은 단 한 가지 밖에 없다. 그것은 내 모든 판단의 기준을 하나님의 말씀에 두는 것이다. 아무리 뱀이 하와의 영적 감수성을 마비시켰다 하더라도, 하와가 자신의 판단과 자신의 생각을 기준으로 행동하지 않고, 그에게 주어진 말씀을 기준으로 행동했다면, 그가 죄를 짓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선악과가 그 아무리 먹음직스러워 보인다 하더라도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는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 되었다면, 혹은 그것을 따먹게 되면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을 기억했다면, 선악과를 따 먹을 수가 없다. 밧세바와 간음을 계획하던 다윗이 간음하는 자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무시무시한 진노를 전하는 하나님의 율법을 기억했더라면, 혹은 살인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끔찍한 형벌을 기억했더라면, 다시 말해 하나님의 절대적인 명령인 십계명을 기억했더라면, 그 끔찍한 죄를 저지르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이 세상에 진리는 단 하나뿐...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 말씀을 늘 가까이하고, 그 말씀을 내 삶에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으며, "내"가 원하는 것, "내"가 보기에 별 문제없어 보이는 것을 따라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절대적인 기준이 된다면, 마귀는 결코 나를 쓰러뜨릴 수가 없다. 마귀는 내 영적 감수성,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마비시킬 수는 있지만, 말씀을 통해서 보여지는 분명한 진리를 보지 못하게 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오늘도 말씀을 사랑해야하는 이유... 말씀 안에 거해야 하는 이유... 말씀으로 나를 단련시켜야 하는 이유... 말씀 앞에 내 몸을 쳐서 복종시킴으로 무릎꿇는 훈련을 해야하는 이유이다.
그래야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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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8:36:00
지혜
지혜란 무엇일까?
내가 존경하고 신뢰하는 한 미국인 신학자가 언젠가 유대인의 지혜의 개념에 대해서 설명한 적이 있다. 그에 따르면 유대인에게 있어서 지혜란 "하나님을 기쁘시게하는 삶을 살도록 인도하는 지식 혹은 그 어떤 것"이다.
이 정의는 세상적인 정의와는 참으로 많이 다르다.
Oxford 사전은 지혜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the quality of having experience, knowledge, and good judgement; the quality of being wise"
세상적인 정의에는 방향성과 목적성이 결여되어 있다. "무엇을 위해?"가 없는 것이다. 그러한 결여는 "자기 자신을 위해"라는 세상 사람들의 consensus를 미리 상정하고 있기 때문일까?
어쨋든 유대인의 Definition은 매우 성경적이고 하나님 중심적이다. 그들의 인생의 목표가 "하나님을 기쁘시게하는" 것에 맞춰져 있고, 그것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되는 모든 것을 지혜라고 부르는 것이다.
성경 전체는 결국 이 지혜에 대해서 논하는 것이고 가르치는 것이다. 하지만 특별히 구약의 욥기, 잠언, 전도서, 아가서, 그리고 시편은 이 지혜를 전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래서 이들을 지혜서라고 부른다.
그 지혜서들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잠언은 그 지혜가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그 지혜의 출발점이 무엇인지를 반복적으로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
잠언 15:33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지혜의 훈계라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The fear of the LORD is the instruction for wisdom, And before honor comes humility.)
잠언 9:1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The fear of the LORD is the beginning of wisdom, And the knowledge of the Holy One is understanding)
잠언 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The fear of the LORD is the beginning of knowledge; Fools despise wisdom and instruction.)
잠언 15:16 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Better is a little with the fear of the LORD Than great treasure and turmoil with it.)
잠언 31:30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Charm is deceitful and beauty is vain, But a woman who fears the LORD, she shall be praised.)
잠언 3:7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찌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찌어다(Do not be wise in your own eyes; Fear the LORD and turn away from evil.)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fear). 하나님을 무서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사랑하고 존경하지만, 그분을 두려워하는 것, 그분의 위대하심과 거룩하심과, 크신 능력과 내 가장 깊은 속까지 꿰뚫어 보시는 그분의 눈과 그분의 심판을 두려워할 줄 아는 것... 진정으로 그분은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인정할 줄 아는 것, 그것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 두려움이 없이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 수 없으며, 그런 인생은 결코 지혜로운 인생이 아니고 파멸과 저주와 심판 가운데 처할 수 밖에 없는 인생인 것이다.
하나님의 그 거룩하신 이름이 땅에 떨어지고, 일상의 삶에서 무시당하고 온갖 죄악 가운데 경멸당하는 이 시대를 사는 믿는 자로서, 나는 진정한 지혜를 좇아 사는 사람인가?
그분을 진정으로 두려워하는(경외하는) 자인가? 그분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내 삶의 모든 부분에 미치고 있는가?
내가 존경하고 신뢰하는 한 미국인 신학자가 언젠가 유대인의 지혜의 개념에 대해서 설명한 적이 있다. 그에 따르면 유대인에게 있어서 지혜란 "하나님을 기쁘시게하는 삶을 살도록 인도하는 지식 혹은 그 어떤 것"이다.
이 정의는 세상적인 정의와는 참으로 많이 다르다.
Oxford 사전은 지혜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the quality of having experience, knowledge, and good judgement; the quality of being wise"
세상적인 정의에는 방향성과 목적성이 결여되어 있다. "무엇을 위해?"가 없는 것이다. 그러한 결여는 "자기 자신을 위해"라는 세상 사람들의 consensus를 미리 상정하고 있기 때문일까?
어쨋든 유대인의 Definition은 매우 성경적이고 하나님 중심적이다. 그들의 인생의 목표가 "하나님을 기쁘시게하는" 것에 맞춰져 있고, 그것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되는 모든 것을 지혜라고 부르는 것이다.
성경 전체는 결국 이 지혜에 대해서 논하는 것이고 가르치는 것이다. 하지만 특별히 구약의 욥기, 잠언, 전도서, 아가서, 그리고 시편은 이 지혜를 전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래서 이들을 지혜서라고 부른다.
그 지혜서들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잠언은 그 지혜가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그 지혜의 출발점이 무엇인지를 반복적으로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
잠언 15:33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지혜의 훈계라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The fear of the LORD is the instruction for wisdom, And before honor comes humility.)
잠언 9:1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The fear of the LORD is the beginning of wisdom, And the knowledge of the Holy One is understanding)
잠언 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The fear of the LORD is the beginning of knowledge; Fools despise wisdom and instruction.)
잠언 15:16 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Better is a little with the fear of the LORD Than great treasure and turmoil with it.)
잠언 31:30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Charm is deceitful and beauty is vain, But a woman who fears the LORD, she shall be praised.)
잠언 3:7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찌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찌어다(Do not be wise in your own eyes; Fear the LORD and turn away from evil.)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fear). 하나님을 무서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사랑하고 존경하지만, 그분을 두려워하는 것, 그분의 위대하심과 거룩하심과, 크신 능력과 내 가장 깊은 속까지 꿰뚫어 보시는 그분의 눈과 그분의 심판을 두려워할 줄 아는 것... 진정으로 그분은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인정할 줄 아는 것, 그것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 두려움이 없이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 수 없으며, 그런 인생은 결코 지혜로운 인생이 아니고 파멸과 저주와 심판 가운데 처할 수 밖에 없는 인생인 것이다.
하나님의 그 거룩하신 이름이 땅에 떨어지고, 일상의 삶에서 무시당하고 온갖 죄악 가운데 경멸당하는 이 시대를 사는 믿는 자로서, 나는 진정한 지혜를 좇아 사는 사람인가?
그분을 진정으로 두려워하는(경외하는) 자인가? 그분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내 삶의 모든 부분에 미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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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9:34:00
4년간의 학습...
토요일인 어제 오후...
나는 하연이의 제안으로 Barnes & Nobles에 있었다.
평안한 토요일 오후...
그런데 5시 40분이 되자 갑자가 긴장되기 시작했다. 뭔가 간절해지며, 뭔가에 집중하기를 원하는 마음...
아무 일이 없는데... 책방에서 relax하고 있는데, 몸은 자동적으로 긴장모드로 전환된 것이다.
지난 4년간... 5시 40분은 나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시간이었다. 준비한 설교를 거의 마무리하고, 하나님께 맡기는 시간... 준비했던 것을 모두 내려 놓고, 하나님께만 집중하며, 청년들에게 주실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를 여쭙고 듣기 위해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께 마음을 향하기 시작하는 시간이 바로 5시 40분이었다.
'하나님! 오늘 청년들에게 전할 한 문장의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그들이 마음에 담아 가야할 바로 그것은 무엇인가요?'
기도하는 가운데, 집중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 가장 긴장된 시간...
4년의 학습효과인가?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몸은 자동적으로 긴장과 집중모드로 넘어간다.
이후 댈러스로 이주한 한 가족이 첫 월급이 나왔다며, 부페 팔레스에서 식사를 대접하겠다고 해서 그 식당으로 갔다. 4년 내내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토요일 저녁 식사를 해 본적이 없는 내가 부페에서 포식을 했다. 하지만 9시가 될 때까지 풀리지 않는 긴장은 여전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언젠가 "We are what we repeatedly do."라고 말했었다.
4년간의 반복된 행동 패턴이 나를 청년부장으로 만들어 버렸나보다...
이제 내 마음과 함께 이 몸이 점점 그 패턴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새로운 삶의 패턴을 만들어 가야 한다.
어떤 패턴이 만들어질까?
기대된다.
나는 하연이의 제안으로 Barnes & Nobles에 있었다.
평안한 토요일 오후...
그런데 5시 40분이 되자 갑자가 긴장되기 시작했다. 뭔가 간절해지며, 뭔가에 집중하기를 원하는 마음...
아무 일이 없는데... 책방에서 relax하고 있는데, 몸은 자동적으로 긴장모드로 전환된 것이다.
지난 4년간... 5시 40분은 나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시간이었다. 준비한 설교를 거의 마무리하고, 하나님께 맡기는 시간... 준비했던 것을 모두 내려 놓고, 하나님께만 집중하며, 청년들에게 주실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를 여쭙고 듣기 위해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께 마음을 향하기 시작하는 시간이 바로 5시 40분이었다.
'하나님! 오늘 청년들에게 전할 한 문장의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그들이 마음에 담아 가야할 바로 그것은 무엇인가요?'
기도하는 가운데, 집중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 가장 긴장된 시간...
4년의 학습효과인가?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몸은 자동적으로 긴장과 집중모드로 넘어간다.
이후 댈러스로 이주한 한 가족이 첫 월급이 나왔다며, 부페 팔레스에서 식사를 대접하겠다고 해서 그 식당으로 갔다. 4년 내내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토요일 저녁 식사를 해 본적이 없는 내가 부페에서 포식을 했다. 하지만 9시가 될 때까지 풀리지 않는 긴장은 여전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언젠가 "We are what we repeatedly do."라고 말했었다.
4년간의 반복된 행동 패턴이 나를 청년부장으로 만들어 버렸나보다...
이제 내 마음과 함께 이 몸이 점점 그 패턴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새로운 삶의 패턴을 만들어 가야 한다.
어떤 패턴이 만들어질까?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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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8:26:00
파송의 노래
언젠가..
내가 청년부를 떠날 때 꼭 불러달라고 부탁하고 싶은 곡이 있었다.
고형원씨의 작품으로 이루어진 불후의 명곡들의 앨범인 "부흥"예수전도단 8집 13번째 곡인 "파송의 노래".
고형원씨의 깊은 영감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참으로 위대한 곡이며, 내 정서와 너무나 잘 맞는 곡이다.
나에게 이 노래를 환송의 인사로 불러주는 청년들의 얼굴에서 간절함과 기도가 묻어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진정으로 이 노래의 가사가 내 삶에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기도한다.
너의 가는길에 주의 평강 있으리
평강의 왕 함께 가시니
너의 걸음걸음 주 인도하시리
주의 강한손 널이끄시리
너의 가는길에 주의 축복 있으리
영광의 주 함께 가시니
네가 밟는 모든 땅 주님 다스리리
너는 주의 길 예비케되리
주님 나라 위하여 길 떠나는 나의 형제여
주께서 가라시니 너는 가라 주의 이름으로
거친 광야위에 꽃은 피어나고
세상은 네안에서 주님의 영광보리라
강하고 담대하라 세상 이기신주 늘 함께
너와 동행하시며 네게 새힘 늘 주시리
내가 청년부를 떠날 때 꼭 불러달라고 부탁하고 싶은 곡이 있었다.
고형원씨의 작품으로 이루어진 불후의 명곡들의 앨범인 "부흥"예수전도단 8집 13번째 곡인 "파송의 노래".
고형원씨의 깊은 영감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참으로 위대한 곡이며, 내 정서와 너무나 잘 맞는 곡이다.
나에게 이 노래를 환송의 인사로 불러주는 청년들의 얼굴에서 간절함과 기도가 묻어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진정으로 이 노래의 가사가 내 삶에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기도한다.
너의 가는길에 주의 평강 있으리
평강의 왕 함께 가시니
너의 걸음걸음 주 인도하시리
주의 강한손 널이끄시리
너의 가는길에 주의 축복 있으리
영광의 주 함께 가시니
네가 밟는 모든 땅 주님 다스리리
너는 주의 길 예비케되리
주님 나라 위하여 길 떠나는 나의 형제여
주께서 가라시니 너는 가라 주의 이름으로
거친 광야위에 꽃은 피어나고
세상은 네안에서 주님의 영광보리라
강하고 담대하라 세상 이기신주 늘 함께
너와 동행하시며 네게 새힘 늘 주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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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2:2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