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

절대적인 신의 존재와 죽음 이후의 심판을 상정하지 않는다면, 이 사회의 가장 근본이 되는 도덕률(법의 기초가 되는)은 존재 할 수 없다. 따라서 이 사회의 존속을 위해서라도 신과 심판은 반드시 존재한다고 가정해야 한다. Immanuel Kant가 한 말이 있다.

뛰어난 사상가였던 칸트의 말은 상당히 양심적인 고백인 것이다. 인간의 모든 도덕은 그 도덕이 가능하게 한 초월적인 존재를 상정하지 않는다면 의미없는 것이 되어버린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분의 심판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내가 선하게 살며, 내 욕망을 절제하며, 남을 배려하며 살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무신론자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선하게 살아야 하며, 규범을 지키며 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사회계약이며, 그것을 통해서만 혼란과 폭력이 멈춰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의 심판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혼란이 있으면 어떻고 폭력이 있으면 어떤가? 내 욕망을 극대화 하기 위해서 남에게 피해가 좀 간다손 치더라도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내 욕망과 내 만족을 극대화 하기 위해 남에게 피해를 받지 않아야 하고, 그렇다면 나도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아야 한다는 주장은 의미없는 주장일 뿐이다. 남은 남일 뿐이고, 내 욕구, 내 욕망를 채우고 적당히 살다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이나, 남의 피해를 받지 않고자 나도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그 가운데서 내 욕구를 채우지 못하고 불만 가운데서 살아가는 것... 그 두 가지 중에서 어느 것이 더 낫다고 단언할 수 있는가? 그 기준은 무엇인가?

만약 내가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고 심판을 믿지 않는다면, 나는 궁극적으로 허무주의자가 되었을 것이다. 내 육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온갖 짓을 다 하며 산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는가? 궁극적으로 죽을 인생, 그리고 죽고난 뒤에 사라질 허무한 인생인데, 그 인생을 쾌락으로 채운들 무슨 의미가 있는가?
만약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니체의 주장대로 이 생을 더 사는 것보다는 자살하는 것이 훨씬 더 정직하게 인생에 대해 반응하는 것이리라...
내일 지구가 망하더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말했던 스피노자의 결연한 의지도, 그 인생을 뒤덮는 허무를 극복할 수는 없는 것... 사과나무를 심는 그 행동은 그날의 의미를 부여할 뿐, 지속성이 없는, 더구나 아무런 의미를 부여할 수 없는 인간의 헛된 수고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인생의 의미, 이 세상의 존재의 의미, 다시 말하면 이 세상이 존재하도록 지탱하고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분명히 드러난다. 그것은 그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 그리고 그 하나님이 부여하신 존재의 의미와 사명인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존재의 이유가 있는 것이고, 그것은 자신 안에 생래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창조주에 의해서 부여된 것이다. 모든 존재, 특히 모든 인간이 그 인생을 의미있게 살기 위해서는 그를 존재하게 하신 창조주의 뜻을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리고 그 뜻에 맞추어 나를 심판할 그 날이 있다는 것을 잊지 않고 사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바로 오늘 내가 어떤 모습으로, 무엇을 하며, 무엇을 위해, 왜 존재해야하는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인생은 결코 허무하지 않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우리를 위한 그분의 심판은 분명히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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