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종류이건 간에, 어떤 이유이건 간에 내 안에 염려, 근심, 걱정, 두려움이 있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여기에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제외된다.)
염려, 근심, 걱정, 두려움은 세상이 두렵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세상에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고, 세상 그 자체로 엄청난 파워와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그렇다. 기계의 톱니바퀴가 매정하게 돌아가고 그 안에서 나는 아무런 능력이 없이 그 돌아가는 톱니바퀴 가운데서 어찌 되었든 그 흐름대로 맞추어 살아가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마음이 들기 때문에 내 안에 염려, 근심, 걱정, 두려움이 자리잡는다. 세상은 무한대로 커 보이고,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상태... 그것이다.
설사 그 무시무시한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이 살아계신다고 믿는다 하더라도 염려, 근심, 걱정, 두려움에 사로잡힐 수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존재하시긴 하지만, 그 능력이 절대적임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힘이 세신 분이긴 하지만, 이 세상을 완전하게 장악하시고, 그분의 뜻 가운데 모든 것을 이루실 수 있는 분, 그렇게 커 보이고, 무시무시해 보이는 이 세상이라 할지라도 그분께 복종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위대한 분, 절대주권자임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세상이 더 커보이고, 나를 근심하게 하고, 염려하게 하고, 그 가운데 걱정이 떠나지 않고, 그것으로 인해 두려워하게 하는 그 상황들, 그 어려움들, 다시 말해 세상의 파워가 하나님의 능력보다 더 막강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절대 능력, 절대 주권을 믿는다 하더라도 염려, 근심, 걱정, 두려움에 사로잡힐 수가 있다. 그분이 이 세상을 전적으로 다스리시는 만왕의 왕이라고 믿는 그 믿음이 확고히 서 있다고 하더라도, 세상 그 어느것도, 어떤 상황이라 하더라도 그분의 주권 아래 있다는 확실한 믿음이 있다 하더라도 나는 두려워하며 근심과 걱정 가운데 신음할 수가 있다. 그것은 그분의 선하심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분의 아버지되심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분이 그 절대 주권으로 나를 망하는 길로 내 몰수도 있다는 의심, 그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어려운 상황 가운데, 세상의 그 엄청난 파워 앞에 파리만도 못한 가운데 벌벌 떨고 있는 나같은 존재를 거들떠 보지도 않으실 것 같은, 험난 세파에 내동댕이쳐진 고아와 같이 내 힘으로 어떻게든 이겨내지 않으면 안되는 그런 존재로 스스로 느낄 때, 나는 근심과 걱정과 염려와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된다. 우주의 미아, 부모를 잃은 고아로서의 그 존재적 두려움이 나를 사로잡기 때문이다.
그 어떤 이유에서건 간에 내 안에 존재하는 염려, 근심, 걱정, 두려움은 내가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고 바로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 땅 가운데 존재하심을 바로 믿는다면, 그리고 그분이 절대주권자로서 세상의 모든 것을 통치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굳게 믿는다면, 그리고 그분, 그 만왕의 왕이 지극하신 자비와 사랑으로 나를 주목하시고, 나에게 가장 선한 것을 주시며, 최고의 길로 인도하심을 믿는다면, 내 안에 염려, 근심, 걱정, 두려움은 자리를 잡을 수가 없다. 그 믿음이 굳게 서 있다면, 비록 내 눈에 내가 망하는 길로 가는 것처럼 보이고, 하나님께서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그리고 내가 하나님의 크신 징계로 인해 극심한 어려움에 처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결국 하나님의 선하심에서 비롯되었으며, 그 선하심으로 나를 선한 길로 인도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결정임을 믿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을 바로 알고 바로 믿으면 나는 반드시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기뻐할 수 있고, 범사에 감사하며, 쉬지않고 기도할 수 있는 것이다. (살전 5:16-18)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을 아는 지식... 그것이 우리를 살리는 것이고,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이기게 하는 것이다.
염려와 근심, 걱정과 두려움으로 떨고 있는 나...
내 모습 가운데 드러나는 지극히 악한 이 모습을 보면서, 내 스스로에게 다시 한 번 믿음의 중요성을 되뇌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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