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저녁에는 한국 음악이 많이 그리워졌다. 거의 그런 경우가 없었는데... 한국이 그리워졌는지... 그냥 듣고 싶었다... 그래서 Youtube에서 찾아서 노트북에 저장해 두었던 음악들을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들었다.
나도 나이가 많이 들었는지, 이제는 흘러간 옛노래에 해당하는 음악들에 마음이 끌렸다. 이 음악을 듣던 그 시절이 그리웠는지도 모른다... 그냥 음악을 들으며 예전 그 시절로 잠시 추억에 잠겨 여행을 다녀왔다.
양희은-아침이슬
예민-어느 산골 소년의 사랑 이야기
서울대 트리오-젊은 연인들
강인원, 권인하, 김혀식-비오는 날의 수채화
김광석-거리에서, 그녀가 처음울던 날, 서른 즈음에, 이등병의 편지, 타는 목마름으로, 흐린 가을하늘에 편지를 써
정태춘-떠나가는 배, 사랑하는 이에게
조동진-나뭇잎 사이로
조정희-참새와 허수아비
조하문-내 아픔 아시는 당신께
푸른하는-겨울바다
피노키오-사랑과 우정사이
해바라기-사랑으로
햇빛촌-유리창엔 비
김현식-내 사랑 내 곁에
둘다섯-밤배
박인희-모닥불 피워 놓고
박인희-방랑자
배따라기-그댄 봄비를 무척 좋아하나요, 비와 찻잔 사이
소리새-그대 그리고 나
송창식-우리는
신형원-개똥벌레
썰물-밀려오는 파도 소리에
안치환-마른 잎 다시 살아나, 광야에서,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귀뚜라미, 어느 별에서, 찔레꽃, 자유
N.EX.T-인형의 기사
안치환의 노래는 언제 들어도 가슴이 뛴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저항성의 노래를 부르는 그를 보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도전을 받는다. 식지 않은 열정으로 더 나은 세상을 노래하는 그보다는 최소한 더 큰 열정,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열정이 나에게 있어야 함을 다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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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좋아하는 노래들 순위 (나도 어쩔 수 없는 운동권 세대인 386 세대인가 보다...)
1. 안치환-광야에서
2. 안치환-솔아솔아 푸르른 솔아
3. 정태춘-떠나가는 배
4. 푸른하는-겨울바다
5. 정태춘, 박은옥-사랑하는 이에게
6. 양희은-아침이슬
7. 강인원, 권인하, 김혀식-비오는 날의 수채화
8. 김광석-거리에서
9. 박인희-모닥불 피워놓고
10. 썰물-밀려오는 파도 소리에
보물 7
(2005년 2월 23일에 쓴 글)
둘째인 예연이랑 놀고 있었다.
블록 놀이를 하면서...
요즘 예연이는 블록 놀이에 재미가 들린 모양이다.
잘 놀고 있었는데...
무슨 생각이 났는지 갑자기 자기방으로 후다닥 뛰어 들어갔다...
아무 말도 없이..
그리고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이...
잠시후...
방에서 걸어오는 예연이의 표정은 밝았다.
얼굴에 웃음을 띄며 큰 소리로 씩씩하게 물었다.
"아빠! 방구소리 들렸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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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8:00:00
여성들의 옷차림
요즘 오스틴의 한 낮 기온이 화씨 100도를 넘는 날이 많아졌다. 덥긴 참 덥다.
그래서 그런지, 아니면 날씨와 상관 없이 그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있는 UT의 여학생들의 옷차림이 너무나 "간소"한 것을 본다. 솔직한 마음으로 말하자면, 옷을 입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가 혼동이 될 정도인 경우도 흔하다.
한창 젊은 나이, 육체적으로 가장 아름다울 때, 자신의 몸매를 드러내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내 개인적으로는 눈쌀이 찌푸려지는 것을 어쩔 수 없다. 이제 나도 나이가 든 건가? 아름답고 예쁘다고 생각하기 보다는 자라나고 있는 내 딸들이 그런 옷을 입고 다닐까봐 걱정이 많이 된다. 이제는 캠퍼스의 여학생들을 부모의 입장에서 바라볼 나이가 되었나보다... '내 딸들이 저런 것을 안 배웠으면 좋겠는데...'라는 생각 밖에는 안든다. 나중에 캠퍼스의 학생들을 보면서 손자를 생각할 나이가 되면 그것을 귀엽게 봐 줄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길지는 모르지만, 지금으로서는 참 안타까울 뿐이다.
"身體髮膚는 受之父母니 不敢毁傷이 孝之始也"
우리의 몸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므로 감히 훼상하지 않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다. (효경)
우리의 몸은 우리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그것을 최대한 존중하고 아끼고 가꾸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도리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요즘에는 그 "가꾼다"는 것이 과도하게 "sexuality appeal"에 치중되어 있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결코 기뻐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것은 성경을 비추어볼 때 분명한 사실이다.
자신의 몸을 단정하고 우아한 옷으로 가리면서도 맵시를 드러내는 옛스러운 멋이 무척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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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8:00:00
공동체에 대한 사탄의 공격
요즘 내가 섬기는 청년부를 향한 사탄의 파상공격을 본다. 3년이 약간 못되는 시간 동안 부장으로 섬기면서 사탄은 지속적으로 우리 공동체를 공격해 왔지만, 지난 두 달 정도처럼 내가 정신을 못차릴 정도로 여러 방면에서 심각하게 공격을 해 온 경우는 본 적이 없었다. 어디서부터 막아야 할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을 정도로 사탄은 공격을 한다. 청년부의 리더들을 공격해서 섬김에 집중할 수 없도록 하고, 지체들을 속여서 믿음 가운데 나아오지 못하게 막고, 믿음의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가게 하고, 반목과 질시와 상처가 난무하게 하고, "바쁜 일들"과 바뀌는 멤버 속에서 진행되어야 할 일들이 진행되지 않고, 복음에 대한 열정은 식어지고, 마음이 모아지지 않고, 특별히 리더인 나와 내 가정을 공격함으로써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지 못하게 방해한다.
사실 이런 사탄의 활발한 공격은 청년부의 대부분의 지체들이 감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다. 심지어 영적인 리더들인 목자들조차도 부분적으로는 느낄지 모르지만, 그 규모와 심각성에 대해서는 도저히 감을 잡지 못할 만큼, 은밀하게 진행이 되고 있다. 하지만 공동체의 영적인 리더로서, 우리 모임의 진정한 리더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뜻에 민감하게 반응해야하는 나로서는, 사탄의 공격에도 민감해질 수 밖에 없다. 사탄은 믿음의 공동체를 절대 그대로 두지 않는다.
사탄이 이번 여름에 왜 이렇게도 발악을 하면서 우리 공동체를 흔들어서 무너뜨리려고 할까? 무시무시한 해일처럼 밀려오는 사탄의 공세를 보면서, 한 편으로는 난감함과 두려움을 느끼기도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기대감이 생긴다. 하나님께서 우리 공동체에 무슨 역사를 시작하려고 하시는 것인지... 사탄은 미리 그것을 알고 그 은혜가 우리 공동체에 임하기 전에 공동체가 지리멸렬하게 무너지도록 하기 위해 발악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곳에 사탄의 공격도 그만큼 더 해지는 것은 믿음 생활을 통해서 늘 경험해 왔던 것이다. 사탄이 이렇게도 날뛰는 것을 보면서 혼자서 생각에 잠긴다.
'하나님께서 가을 학기에 복음의 역사를 일으키시려나?'
'이번 여름 수련회가 은혜가 충만한 수련회가 될건가?'
'하나님 안에서 귀하게 쓰일 한 영혼이 곧 하나님 앞으로 나아와 믿음을 고백하는 역사가 일어나려나?'
생각만해도 즐거운 상상이다... 그래서 날뛰는 사탄을 보면서 기분이 절로 좋아진다.
하지만 믿음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보는 것과 날뛰고 있는 사탄을 대적하는 것은 구분되어야 한다. 이토록 파상적으로 공격하고 있는 사탄에 대해서 이 공동체를 섬기는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가?
사실 많은 고민이 된다. 하지만 그 결론을 뻔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 물론 여러 가지 프로그램이나 회의를 통해서 사탄에 대해서 맞서보려고 노력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결코 사탄을 이기지는 못한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오히려 그런 노력들은 사탄의 계략에 말려드는 것 뿐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복종하고, 악마를 물리치십시오. 그러면 악마는 달아날 것입니다."(약 4:7)
어떤 학자들은 이 본문을 하나님께 복종하기 위해서는 마귀를 대적해야 한다라는 뜻으로 해석한다. 하지만 나는 그 해석에 반대한다. 오히려 악마에 대적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완전한 순종을 드리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것이라는 해석이 맞다고 본다. 예수님께서 사탄으로부터 세 번의 시험을 받으셨을 때, 당신께서는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떠올리심으로, 그리고 그 말씀만이 진리임을 선포함으로 사탄을 물리치셨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이 극한의 상황에서 파상공격을 가하던 사탄으로 하여금 물러갈 수 밖에 없도록 만든 것이다.
내가 지금 이 상황에서 해야하는 것, 그리고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다.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붙잡으며, 그분의 온전한 하나님되심과 구원자 되심을 더 분명하게 하는 것이다. 그 가운데 그분께 기도로 매달리는 것이다.그것이 사탄을 물리치는 가장 좋은 공격이다. 사탄이 아무리 두렵게 나를 공격해 오고, 이 공동체를 무너뜨리려고 하더라도, 내가, 그리고 우리 공동체가 하나님께 복종하기로 사생결단을 내린다면, 사탄은 우리 공동체에 대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이다.
결국 내가 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 분의 넓은 품에 더 가까이 파고드는 것 밖에는... 그리고 우리 공동체의 진정한 주인이신 그분이 하실 위대한 일을 인내함으로 기다리는 것 밖에는...
사탄의 공격... 주님 안에서는 그것마저 은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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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8:00:00
하나님의 징계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이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 거듭남을 경험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며, 양자로 입양된다. 창조주이시고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특권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항상 즐거운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나의 아버지되신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과 공의로우신 성품, 그리고 그분의 사랑받는 자로서 주목받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죄악 가운데 있을 때, 그분께 다시 반역으로 나아갈 때, 나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이제는 나를 그냥 죄 가운데 내버려 두시지 않으신다. 그분은 나를 징계하신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히 12:6-8)
아무리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채찍이라 할지라도, 그 징계는 고통스럽다. 때로는 그것이 죽을 것 같은 고통, 극심한 고통이다. 견디기가 너무 힘들어서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나고 생각될 정도로...
나는 최근에 심한 고통 가운데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거기에서 벗어나 있는 것은 아니다. 나에게 왜 이런 고통이 있는 것인지를 묵상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나에게는 내가 죽는 고통, 아니 한 번 죽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죽음을 맛보는 고통이 있었다. 어느날 하나님께 기도하는 가운데, 그 고통의 원인이 10년이 훨씬 넘은 옛날에 지었던 죄와 약 6년 전에 지었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임을 깨달았다. 그 죄에 대해서 나는 회개를 했지만 그 죄의 결과를 지금 물으시는 것을 보면서, 내가 그 죄로부터 아직 완전하게 돌이키지 못했음을 그 징계를 통해 드러내 보여주시는 것을 깨달았다. 내 안에 아직 더 철저하게 회개를 해야할 것들이 남아 있음을 보여 주셨다. 나의 내면 깊숙이 박혀 있어서 어지간 해서는 절대로 드러날 수 없는 근본적인 죄악을 그 채찍질을 통해서 겉으로 드러나게 하시고, 내 스스로도 속아서 처리된 것으로 여겼던 그 죄악들을 드러내시면서 나에게 보다 철저한 회개를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을 깨닫고 난 후, 하나님의 채찍--아직도 죽을 것 같은 고통을 안겨다 주는 징계이지만--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을 본다. 그 채찍에 묻어나는 하나님의 사랑과 안타까운 마음을 읽게 된다. 이제는 나에게 가해지는 그 고통보다도 그 매를 드셔야 했던 내 아버지의 마음, 그 찢어지는 아픔을 보게 된다. 그래서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 매를 드셔야 했던 내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한다.
나는 그 전에는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저 머리로만 알고 있었을 뿐...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그 비밀을 알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쓰셔야 했고, 이제 하나님께서 쓰시는 그 자리에서는, 예전에는 그냥 넘어 갔던 그 죄들을 가지고는 더 이상 쓰실 수 없기 때문에, 나를 더 은혜의 자리로, 성숙의 자리로 인도하셔야 했기 때문에, 나를 향하여 그렇게 뒤늦은 이 때에 채찍을 드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채찍을 통해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느낄 때, 그 채찍은 아프긴 하지만, 상처를 남기지 않는다. 오히려, 그 채찍을 통해 내 죄악된 자아가 죽어가며, 반면에 내 안에서 영적인 새 살들이 돋아나는 것을 느낀다. 그것은 신비이고, 환희이고, 감격이다.
나를 징계하시는 나의 아버지... 나의 주인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감사... 감사... 감사... 그 외에는 드릴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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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8: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