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내게 알게 하셨으므로...

"내가 너희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까지 간절히 경계하며 부지런히 경계하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청종하라 하였으나 그들이 청종치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고 각각 그 악한 마음의 강퍅한 대로 행하였으므로 내가 그들에게 행하라 명하였어도 그들이 행치 아니한 이 언약의 모든 말로 그들에게 응하게 하였느니라 하라. ... 여호와께서 내게 알게 하셨으므로 내가 그것을 알았나이다! 그 때에 주께서 그들의 행위를 내게 보이셨나이다!"(렘 11:7-8, 18)

내가 죄악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결코 잠잠하게 침묵하시는 분이 아니다. 죄악 가운데 있는 내가 그분의 음성을 듣지 못해서 그렇게 느낄 뿐이지, 그분은 나를 죄에서 돌이키기를 원하시는 분이다. 그분은 "간절히 경계하며 부지런히 경계"하심으로 내가 죄의 길에서 떠나서 그분의 말씀을 청종하는 복된 인생을 살기를 원하시는 분이다.

때로는 그 간절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죄를 계속 짓는다. 하지만 때로는 그 음성을 분명히 듣고 있고, 심지어 그 죄악으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내리실 징계가 어떤 것인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죄짓기를 지속하고 감행한다. 그 순간만큼은 내가 믿는 사람인가 스스로 의심할 정도이다. 죄악으로 인해 돌처럼 굳은 내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전혀 미동도 하지 않는다. 그분이 나의 왕이요 내 인생의 주인이라고 고백했던 고백은 온 데 간 데 없고, 죄악에 완전히 사로잡힌 자아만 있을 뿐이다.

후에... 내가 행했던 죄악을 다시 돌이켜 보게 되고, 물밀듯이 밀려오는 후회와 그 죄악으로 인해 내 삶에 있을 수 밖에 없는 죄악의 결과로 주어지는 고통 가운데 신음한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구원받은 자에게 하나님께서 그 죄를 묻지 않으시지만, 그 죄악의 결과까지 항상 없애 주시는 것은 아니다. 마치 밧새바와 간음한 다윗의 죄를 하나님께서 용서하셨지만, 그 아들을 데려가시는 고통마저 없애지 않으시는 것처럼, 죄악은 반드시 고통스러운 결과를 나에게 가져다 주는데, 그것까지 하나님께서 항상 없애 주시는 것은 아니다. (물론 하나님 안에서는 그것조차도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능력 아래 있다.)

죄악으로 인해서 스스로 자초한 고통을 당하며 그 죄악된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면서 밀려오는 회한 가운데 하나님 앞에 나아가 회개하는 것도 주님의 은혜로만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은 그 고통 가운데 있으면서도 회개하지 못한다. 회개는 성령의 조명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알게 해 주셔야만 알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보다 훨씬 복된 것, 내 삶에 늘 있기를 간구하는 것은 죄악을 짓는 그 순간, 혹은 그 직전에 하나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 그 죄악에 머물지 않고, 혹은 그 죄악을 저지르기 전에 그 죄가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를 미리 아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내게 알게 하셨으므로 내가 그것을 알았나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강권하셔서 내 모습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수 있는 눈을 갖는 것이다. 그래서 그 죄악에서 속히 벗어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나는 그것이 참으로 복된 회개라고 생각한다. 그런 회개가 내게 있다면, 나는 늘 하나님 안에서 그분을 모시고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뒤늦은 후회는 없는 것보다는 좋지만, 그 후회 자체를 하지 않도록 사는 것이 진정으로 현명한 삶이고, 복된 삶이라는 것을... 요즘처럼 절실하게 느낀 적이 없었다...

보물 6

(2005년 1월 31일에 쓴 글)

토요일 오전은 아이들과 함께하는 날이다. 주로 집에서 애들 밥먹이고 애들과 같이 시간을 보낸다.

지난 토요일은 날씨가 쌀쌀하고 비도 약간 와서 집안에서 주로 놀았다. 하연이 예연이와 함께 어린이 디즈니 채널을 같이 보고 있었다.

아이들이 늘 그렇듯이 만화영화를 하자 놀라운 집중력을 발휘하면서 프로그램에 몰입하고 있었다.

미국 TV는 의례 그렇듯이 약 10분 정도의 방영 후에 광고가 나간다.

한참을 몰입하고 있던 하연이가 광고가 시작되자 눈을 내게로 돌렸다. 그리고 나서 하는 말..

"아빠! 만화영화 하다가 왜 광고가 나오는지 알아요?"

"...... 글쎄... 왜 그럴까?"

"그건 말이예요... 아직 만화가 덜 그려저서 그릴 시간이 필요해서예요. 광고 나가는 도중에 열심히 그리고 있을거예요..."

나의 명령을 청종하라...

(2004년 10월 28일에 쓴 글)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나의 명령을 너희가 만일 청종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섬기면 여호와께서 너희 땅에 이른비, 늦은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또 육축을 위하여 들에 풀이 나게 하시리니 네가 먹고 배부를 것이라"(신명기 11:13-15)

오늘 본문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나의 명령을 청종하라'고 명하신다. 신명기 10:13 절에서 하나님은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명령과 규례... 이것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제한하시기 위해서, 즉 통제하시기 위해서 주시는 것이 아니다. 우리를 만드시고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무한하신 사랑으로 사랑하신다. 그 사랑으로 우리를 보살피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명령과 규례를 허락하신다. 마치 부모가 자식에게 그러는 것처럼... 하나님 당신께서는 내 자신보다 내 자신의 행복을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더 잘 알고 계신다. 때로는 나의 무지로 인해서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사실인 것이다. '내 생각으로는 이게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 때, 우리는 내 생각을 접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를 필요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를 하나의 굴레로 여기거나 기독교라는 종교의 편협한 자기 중심성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배척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리고 그분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함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를 어길 때,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시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것들로부터 떨어져 나갈 때, 자연스럽게 그런 상태에 내 몰리는 것이 아니다. 어찌보면 그것은 인간이 스스로에게 지우는 벌이라고 할 수 있다.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지만 스스로 나무에서 분리되어 떨어져 나왔을 때, 그 가지는 자연스럽게 말라버리고 종국에는 불에 태워지거나 썩어 없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나무가 가지에게 벌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떨어져 나왔기 때문에 당연하게 초래되는 결과인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는 가지인 우리를 나무에 붙어있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당신께 붙어있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그것은 그분만이 생명의 근원이고 그분만이 복의 근원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열정의 위험

현대 기독교인들의 특징은 아무 생각이 없이 산다는 것이다. 교회에 오래 다니지만, 성경 내용도 잘 모르고, 자신이 다니는 교회의 교리가 무엇인지, 심지어 복음이 무엇인지를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목숨을 걸고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믿음의 선배들이 본다면 가슴을 치며 아파할 모습이 현재 교인들의 모습이다.
하지만 우상숭배에 빠졌던 이스라엘에 바알에 무릎꿇지 않은 칠천명을 하나님께서 남겨 두셨던 것처럼, 자신의 믿음에 대해서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성경에 대해서, 바른 믿음과 교리에 대해서 진지하게 탐구하고 연구하면서, 그 믿음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믿음으로 가꾸어 가려는 극소수의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매일 성경을 읽고 연구하며, 하나님께 기도하는 가운데 자신의 요구사항을 하나님께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땅 가운데 두신 뜻을 구하며, 그 뜻에 순종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리라 확신한다.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열정이 있는 사람들, 그리고 꾸준한 연구를 통하여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쌓고, 하나님을 경험하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빠질 위험 중 중요한 한 가지는 속좁고 비타협적이고 배타적인 종교인이 될 위험이다. 그것은 복음에 대해서, 바른 믿음에 대해서 더 연구하면 할수록, "가짜"들에 눈에 들어오고, 그 가운데 "진짜" 믿음/신앙을 추구해 나가는 가운데 나도 모르게 몸에 배는 습성이다.
성경을 공부하면 할수록 현대 기독교가 얼마나 성경에서 멀어졌는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것은 참으로 경악할 만한 수준이다. 값 없이 은혜로 주어진 복음이 싸구려 취급을 받고, 하나님의 위엄과 거룩은 안중에도 없으며, 하나님이 산타클로스나 알라딘의 램프의 거인 혹은 내가 세상에서 잘되기를 바라며 아침마다 정화수에 물떠놓고 기도한 어머니의 마음을 가진 절대자로 취급받는 세상에서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을 따르는 모습을 찾기가 힘든 이 세상에서 바른 믿음을 견지하는 것이 얼마나 쉽지 않은가를 충격적으로 깨닫게 될 때, 우리는 자신의 믿음에 대해서 방어적이며, 나와는 조금이라도 다른 신앙의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에 대해서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게 된다.
물론 그런 태도가 늘 잘못된 것은 아니다. 성경적으로 결코 옳지 않은 믿음을 가진 교인들이 넘쳐나는 이 세상에서 다니엘과 세 친구들과 같은 믿음을 견지하기 위해서는 가짜들과 싸워야 하고, 교회 내에 이미 너무 많이 들어온 세속주의와 물신주의의 우상숭배를 배척해야 한다. 그리고 성경으로 돌아가 거룩한 믿음을 외쳐야 한다.
하지만 교왕과정(矯枉過正)의 오류를 우리 마음에 꼭 새겨야 한다. "바른" 믿음이 좋지만, 그것을 과도하게 추구하다보면, 나만 바른 믿음을 가진 사람으로 착각하게 된다. 내가 알고 있는 것만이 진리라고 착각하게 된다. 바른 신앙과 더불어 매우 중요한 믿음 안에서의 (바르지만) 다양한 모습을 포용할 능력을 상실하고 만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안식일을 범했다는 이유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기로 결의한 바리새인의 끔찍한 오류를 답습할 가능성이 높다. 그것은 바른 믿음에 관심이 없는 것과 동일한 수준의 죄악이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우리 나라의 속담은 참으로 귀한 진리이다. 내가 하나님의 진리를 더 알면 알수록, 나는 겸손하게 된다. 첫째로 하나님에 대해서 겸손하게 되고, 둘째 믿음의 동지들에 대해서 겸손하게 된다. 하나님의 진리 안에서 다양성을 품어 안을 수 있는 넉넉한 가슴을 가지게 된다. 성경이 보여주는 "바른" 믿음에 대해서 날이 갈수록 더 분명하게 깨닫는 반면, 그 믿음의 다양한 현상들에 대한 이해도 깊어지게 된다. 나와 다른 이해를 가진 믿음의 사람들을 "이단"이나 "마귀의 속임에 놀아난 자들"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더 풍성한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그 오류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여러분은 자기가 믿음 안에 있는지를 스스로 시험하여 보고, 스스로 점검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가운데 계시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모르면 여러분은 실격자입니다."(고후 13:5)
내가 바른 믿음 안에 있는지 스스로 시험해 보고 점검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한다. 믿음 뿐만 아니라, 내가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내리는 (정죄가 아닌) 판단들이 잘못되지는 않았는지, 판단이 아니라 정죄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끊임없이 자신을 시험해 봐야 한다. 말씀과 기도 가운데 그 일들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의 신앙에 대해서 여과없이 비판해 줄 수 있는 믿음의 선배들, 믿음의 동역자들을 늘 곁에 두어야 한다.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내 믿음생활이나 내 의견을 가감없이 비판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을 늘 곁에 두어야 한다. 그들의 비판이 나를 깨어나게 하고, 내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들고 겸손하게 만든다. 교회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하다가 이단으로 미혹되어 나간 사람들의 공동적인 특징은 어느 누가 뭐라고 해도 결코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의 귀는 완전히 막혀 있기 때문에 그 이단에서 돌이킬 가능성을 상실하고 마는 것이다.

믿음의 열정이 겸손과 함께 가지 않는다면, 그 열정은 상처와 분열과 파괴를 낳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것은 마귀에게서 온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열정은 반드시 겸손과 함께한다.

Q.T.

매일 아침(되도록이면 아침 혹은 내가 일과를 시작하는 때)에 나는 컴퓨터를 켠다. 뉴스를 통해 세상소식을 알고 싶은 마음도 많고, 나에게 무슨 이메일이 왔을까 궁금하기도 하지만, 그 모든 유혹을 뒤로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온 이메일(매일 QT 본문)을 가장 먼저 읽는다.
그 이메일은 때로는 위로의 말씀, 때로는 징계와 경고의 말씀, 때로는 해독이 필요한 암호문, 때로는 비유, 때로는 직접 들려주시는 음성, 때로는 시 한 편, 때로는 드라마, 때로는 역사 등으로 매우 다양하지만, 나에게 가장 적절한 방식으로 하나님께서는 매일 이메일은 나에게 보내 주신다.
그 이메일을 읽으면서 나는 나와 하나님의 관계가 어떤지를 가장 분명하게 체크할 수 있다. 이메일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든지 간에 그 이메일을 받는 것이 기쁘고 기다려진다면, 나는 하나님과 사랑에 빠진 것이다. 반면 내 마음이 냉랭하거나 귀찮거나, 아니면 이메일을 열어보기도 싫다면, 그것은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에 적신호가 켜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매일 이메일을 보내셔서 나의 영적 상태를 점검하도록 하신다. 그리고 그 이메일에 담긴 메시지를 통해서 나에게 말씀하신다. 오늘은 "붙좇았더라"라는 단 한 마디의 말씀에 하나님께서 내게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을 모두 담아 두셨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나에게는 그 한 마디의 말씀만이 내가 내 삶에 실행에 옮겨야할 그 무엇으로 판단하셨던 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 한 마디로 내 삶의 방향을 설정하시고, 내 삶의 근본 질문을 불식시키신다. 그리고 그 말씀에 순종을 요구하신다.
오늘 하나님으로부터 온 이메일을 읽으면서, 나는 본부로부터 스파이에게 내려진 "지령"을 받는 느낌을 받는다. 앞뒤 맥락 없이, 의문의 여지도 없이 나는 그 한 단어를 실행에 옮기기를 명령받은 것이다. 하나님 나라 운동이라는 프로젝트에서 내가 차지하는 부분은 매우 작다. 하지만 본부이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조율하고 계시다. 나는 그 한 지령을 실행에 옮기면 될 뿐이다.

하나님은 참... 재미 있으신 분이다.

민족들을 진멸하라...

(2004년 10월 23일 쓴 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붙이신 모든 민족을 네 눈이 긍휼히 보지 말고 진멸하고 그 신을 섬기지 말라 그것이 네게 올무가 되리라. (신명기 7:16)

하나님은 신명기 7장 12절부터 26절의 말씀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따르면 복이 있을 것이고, 자신보다 큰 민족들을 멸하고 우상숭배에 빠져있는 가나안 땅을 차지할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하나님의 이 약속의 말씀은 이스라엘에게는 축복으로 보이지만 가나안의 민족들에게는 재앙의 말씀으로 보인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편애하시고 다른 민족들에게는 재앙을 가져오는 이스라엘의 민족적인 신으로 보일만도 하다. 과연 그럴까?

우선 꼭 알아두어야 할 것은 하나님은 빛이 어두움과 함께 할 수 없듯이 죄와 함께 하실 수 없는 분이이다. 하나님 편에서 진노하셔서 죄를 멸하시기 이전에 죄는 하나님 앞에서 그 존재를 상실해 버리게 된다. 그것이 자연스럽게 심판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에 사랑이 무한하시기 때문에 그 참을 수 없는 죄악에 빠져있는 인간들을 오래 참으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딜레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영원히 참으시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가나안의 민족들은 하나님의 끊임없는 일반계시(로마서 1장)에도 불구하고 끊이없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 만든 우상을 섬기고 있었다. 그 정도는 지금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여서 심지어 자신의 첫아들을 죽여서 자신의 신에게 바치는 경우도 있었다. 그 잔인함과 죄성을 온 땅에 편만해 있었다. 하나님은 이런 민족들을 오랫동안 참으셨지만 이제는 심판의 때가 온 것이다. 그 도구로 이스라엘을 사용하시는 것 뿐이다.

이스라엘 민족이라고 해서 하나님의 심판의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기 위해 40일 동안 호렙산에 머물렀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안한 나머지 금을 모아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그것을 자신의 신으로 삼고 그 앞에 절하고 소원을 빌고 있었다. 이를 보신 하나님께서 진노하시고 그들을 완전히 이 땅에서 없애버릴 생각을 하셨다. 이스라엘이라고 예외가 아닌 것이다. 다만 이 때, 이스라엘을 대표해서 하나님 앞에 간구하며 하나님께 용서를 구한 모세가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를 피해갈 수 있었을 뿐이다.

아브라함에 자신의 장막 밖에서 앉아 있을 때, 하나님의 사자들이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는 그들을 알아보았고, 그들을 장막으로 인도하여 극진히 대접하였다. 그 와중에 그들이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려 가고 있는 것을 알아내었다. 그 두 도시는 당시에 그 일대에서 가장 풍요하고 가장 큰 성읍들이었다. 그들의 죄악이 하나님의 인내의 한계를 벗어났고, 따라서 사자들로 하여금 불과 유황으로 그 두 도시를 진멸하시기로 한 것이었다.

이 때 아브라함은 조카 롯이 소돔에 살고 있는 것을 기억하고 어찌하든 그 것을 막아보려고 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자와 흥정을 시작한다. "만약 그 도시에 50명의 의인이 있다면 그래도 그 도시를 멸하시겠습니까? 의인과 악인을 함께 멸하시겠습니까?" 그러자 사자들은 "50명이 있다면 멸하지 않겠다."고 대답하였다. 아브라함은 협상을 계속하여 결국 10인의 의인이 있다면 그 도시를 멸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었다.

그 두 사자들은 소돔과 고모라를 향해갔고, 거기서 의인은 단 한사람, 아브라함의 조카 롯 뿐인 것을 보고 롯을 구해낸 다음 그 두 도시를 멸망시키셨다.

만약 가나안에 하나님 앞에 의인 몇 사람이라도 있었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멸망시키지 않으시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