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죄악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결코 잠잠하게 침묵하시는 분이 아니다. 죄악 가운데 있는 내가 그분의 음성을 듣지 못해서 그렇게 느낄 뿐이지, 그분은 나를 죄에서 돌이키기를 원하시는 분이다. 그분은 "간절히 경계하며 부지런히 경계"하심으로 내가 죄의 길에서 떠나서 그분의 말씀을 청종하는 복된 인생을 살기를 원하시는 분이다.
때로는 그 간절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죄를 계속 짓는다. 하지만 때로는 그 음성을 분명히 듣고 있고, 심지어 그 죄악으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내리실 징계가 어떤 것인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죄짓기를 지속하고 감행한다. 그 순간만큼은 내가 믿는 사람인가 스스로 의심할 정도이다. 죄악으로 인해 돌처럼 굳은 내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전혀 미동도 하지 않는다. 그분이 나의 왕이요 내 인생의 주인이라고 고백했던 고백은 온 데 간 데 없고, 죄악에 완전히 사로잡힌 자아만 있을 뿐이다.
후에... 내가 행했던 죄악을 다시 돌이켜 보게 되고, 물밀듯이 밀려오는 후회와 그 죄악으로 인해 내 삶에 있을 수 밖에 없는 죄악의 결과로 주어지는 고통 가운데 신음한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구원받은 자에게 하나님께서 그 죄를 묻지 않으시지만, 그 죄악의 결과까지 항상 없애 주시는 것은 아니다. 마치 밧새바와 간음한 다윗의 죄를 하나님께서 용서하셨지만, 그 아들을 데려가시는 고통마저 없애지 않으시는 것처럼, 죄악은 반드시 고통스러운 결과를 나에게 가져다 주는데, 그것까지 하나님께서 항상 없애 주시는 것은 아니다. (물론 하나님 안에서는 그것조차도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능력 아래 있다.)
죄악으로 인해서 스스로 자초한 고통을 당하며 그 죄악된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면서 밀려오는 회한 가운데 하나님 앞에 나아가 회개하는 것도 주님의 은혜로만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은 그 고통 가운데 있으면서도 회개하지 못한다. 회개는 성령의 조명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알게 해 주셔야만 알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보다 훨씬 복된 것, 내 삶에 늘 있기를 간구하는 것은 죄악을 짓는 그 순간, 혹은 그 직전에 하나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 그 죄악에 머물지 않고, 혹은 그 죄악을 저지르기 전에 그 죄가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를 미리 아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내게 알게 하셨으므로 내가 그것을 알았나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강권하셔서 내 모습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수 있는 눈을 갖는 것이다. 그래서 그 죄악에서 속히 벗어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나는 그것이 참으로 복된 회개라고 생각한다. 그런 회개가 내게 있다면, 나는 늘 하나님 안에서 그분을 모시고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뒤늦은 후회는 없는 것보다는 좋지만, 그 후회 자체를 하지 않도록 사는 것이 진정으로 현명한 삶이고, 복된 삶이라는 것을... 요즘처럼 절실하게 느낀 적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