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말이 그가 나의 행한 모든 것을 내게 말하였다 증거하므로 그 동리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요한복음 4:39)
요한복음에 나오는 이 본문은 사마리아의 한 동네 우물가에서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여인을 만나 몇 마디를 나누신 후에 그 여인이 동네 사람들에게 돌아가서 행한 행위를 보여준다. 사마리아는 이스라엘이 북쪽의 이스라엘과 남쪽의 유다로 분단되었을 때, 북쪽 이스라엘에 속해있던 지역이다. 북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앗수르에게 망한 후에 앗수르의 폭압적이고 민족말살 정책에 의해 이방인들과 혼인을 많이 하게되어 이방의 피가 섞이게 되었다. 반면 남유다는 후에 바벨론에 멸망했는데, 바벨론은 이민족 유화정책으로 인해서 민족적 순수성을 그대로 유지한 채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바벨론 포로생활 70년 후에 고토로 돌아온 유다 백성들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성을 재건하고 나라를 다시 세우지만, 이제는 더 이상 사마리아 사람들을 자신들의 형제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은 오히려 이방인들보다도 더 사마리아인들을 멸시했으며, 개에 비유하였다. 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과 상종하는 것을 물론이고 그 지역에 발을 들여 놓는 것조차 수치스러워 했다. 한 마디로 사마리아인들은 유다 사람들에게 不可觸 賤民이었다.
그런 그 곳을 유다 사람인 예수님이 들어가시기로 작정하시고 들어가신다. 거기서 첫번째로 만난 사람이 바로 땡볕에 물을 길러 나온 사마리아의 여인이었다. 당시 물을 긷는 것은 여자들의 몫이었다. 하지만 물을 긷는 것은 더위를 피해 아침이나 저녁즈음에 물을 긷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리고 우물가에서 여인들은 모여서 소식도 주고받는 살롱과 같은 역할을 했다. 하지만 예수님과 만난 여인은 한 낮에 물을 길러 나온 여인이었다. 그 여인은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 아무도 없는 시간대에 나와서 물을 길을 수 밖에 없는 삶의 질고를 안고 사는 여인이었다. 그의 인생은 이미 파탄이 났으며, 그 동네에서도 그 여인에 대한 좋지 않은 쑥덕거림, 그를 피하는 동네 사람들로 인해서 많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여인이었다. 그런 그를 예수님이 만나신 것이다.
예수님은 가장 천대받는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소외된 그 여인을 만나러 금단의 구역인 사마라아에 발을 들여 놓으신 분이다. 어머니인 마리아가 그리스도를 잉태하였을 때 기도한 내용 그대로 그분은 가장 낮은 자에게 임하신 하나님이셨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 (누가복음 1:51-53)
예수님과 몇 마디를 나눈 사마리아 여인은 처음에는 그 분을 여행자로, 후에는 선생님, 선지자, 그리고 결국 메시야로 인정하게 되었다. 예수님께서 그의 인생의 질고를 꿰뚫어 보시고 그의 가장 아픈 부분, 그리고 그 족속의 가장 원한이 되는 부분에 대해서 그분처럼 확실히 아시고, 그 문제를 그분처럼 시원하게 해결하신 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분이 神的 위엄으로 본인을 그리스도라고 드러 내실 때, 여인의 마음은 그분의 선포에 대해서 자발적인 인정으로 가득차게 된 것이다.
"메시야를 만났다!" 그 여인은 메시야를 만난 기쁨에 사로잡혔다. 그 메시야는 유대인들이 원하고 기다리던 유대인들만의 메시야, 로마를 물리치고 자기들만의 나라를 세워서 이방인들과 피가 섞인 사마리아인들을 내어칠 그런 무시무시한 메시야가 아니라 자신들에게, 그것도 가장 멸시받는 본인에게 찾아오시는 그런 메시야라는 것을 알고, 또한 그 분이 자신의 가장 깊은 곳까지 아시고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경험하고 그 마음이 기쁨에 충만하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를 만난 그는 이제 변했다. 그 더운 땡볕을 무릎쓰고라도 사람들의 눈을 피하고자 했던 그가 이제는 양동이를 버려두고 한달음에 달려가서 마을 사람들을 "대면"하고 그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한다.
"그리스도를 만났다! 그 분이 나의 삶을 아시고 또 그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
마을 사람들은 그의 변화를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자신들이 아는 그 여인은 남편을 다섯이나 갈아치우고, 험한 인생을 살아가는 무기력하고 움츠러드는 여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그들에게 너무나 당당하게 외친다. "그리스도를 만났다!" 마을 사람들은 그의 말보다는 그를 그렇게 변화시킨 힘에 대해서 끌렸을 것이다. 그리고 그 호기심에 예수께 나아와 그를 만났다. 그리고 그분이 진정한 메시야라른 것을 인정하게 된다.
"예수의 말씀을 인하여 믿는 자가 더욱 많아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줄 앎이니라 하였더라." (요한복음 4:41-42)
가장 낮은 자리에 있던 사마리아를 찾아오신 예수님은 그 때와 꼭 같이 가장 낮은 자리에 있던 나에게 찾아오셨다. 그 분은 내 죄 문제를 해결해 주셨고, 또 내 삶의 인도자가 되어서 많은 일들을 행해 주셨다. 여기까지는 사마리아 여인과 나의 경험이 동일하다. 하지만 그 이후가 많이 다르다. 사마리아 여인은 그 후 사람들에게 돌아가서 그의 경험을 전했다. 많은 말은 나오지 않지만 그가 사용한 말의 시작은 "그"로 시작한다. "그"는 주님을 가리킨다. 여인은 자신의 삶에 그분께서 하신 역사를 그대로 가감없이 사람들에게 전달한다. 그것은 사실이었고, 그것을 애써 감출필요가 없었다.
나는 달랐다. 나도 꼭 같이 사마리아 여인처럼 주님의 구원, 그리고 그분의 도우심을 경험했지만, 나는 사람들에게 달려가서 "그"를 주어로 하지 않고 "나"를 주어로 하는 문장들을 만들어 내었다. 그리고 "그"는 문장에서 사라졌다.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모든 것들을 "나"를 주어로 설명할 때 하나님의 역사는 드러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이번 학기 학비를 면제받게 되었을 때, 믿는 주위의 형제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 주셨다."고 분명히 사실을 이야기 했지만, 주위의 안믿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운이 좋았지 뭐..."라고 답을 했다. 그 과정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셨는지는 모두 생략되어 있었다. 그것이 나의 현재의 모습이다.
믿음을 가지고 난 후에, 나는 "그리스도의 향기"에 나의 삶의 촛점을 맞추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바른 삶의 자세를 가지고 주위에 칭송을 들을 만한 그런 선행과 바른 행실을 해 나갈 때, 기독교에 대한 사람들의 반감을 해소시킬 수 있고, 그를 통해서 복음이 전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내 입을 통해서 이러니저러니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면서 백마디 말을 해서 사람들의 반감을 불러 일으키는 것보다는 한 가지 바른 행실로 인해서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내 입에서 하나님과 성경에 대한 말을 안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히 틀린 생각이었다. 일단 나는 바른 행실로 사람들을 감동시킬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비록 주님을 영접하고 변화된 사람이지만 나의 옛 본성으로 인해서 수시로 넘어지고 실수하는 불완전한 인간인 뿐이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완전해 보이는 것은 내가 완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완전하게 인정하시는 하나님편에서의 인정이 있기 때문일 뿐이었다.
두번째, 설사 내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정직하고 바른 삶을 산다 할지라도, 그들은 그 삶을 통해서 그 삶을 가능케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그들은 나를 "좋은 사람" 혹은 "훌륭한 사람"으로 생각했지 나를 통해서 "하나님은 참 선하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내게 깨닫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바르고 정직한 삶을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입을 열어서 하나님의 역사를 선포하고 주위 안믿는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한 것이다. 없는 것을 꾸며서 만들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게 행하신 모든 것들을 여과없이 그대로 하나님을 주어로 인정할 때, 그들의 시선이 나를 넘어 하나님께로 향하게 된다는 것. 그리고 평소의 삶에서 하나님을 "주어"로 삼는 삶이 있어야만 후에 기회가 되어 복음을 전하게 될 때, 그 복음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사마리아 여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오늘의 말씀이다.
"하나님. 하나님께서 제 삶에 행하신 모든 것을 하나님을 주어로 하여 표현하기를 원합니다. 예전의 습관처럼 움츠려들지 않게 하시고 있는 사실을 주위 누구에게나 당당히 여과없이 말할 수 있는 제가 되게 하여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