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主語가 되는 언행

(2005년 1월 14일에 쓴 글)

"여자의 말이 그가 나의 행한 모든 것을 내게 말하였다 증거하므로 그 동리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요한복음 4:39)
요한복음에 나오는 이 본문은 사마리아의 한 동네 우물가에서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여인을 만나 몇 마디를 나누신 후에 그 여인이 동네 사람들에게 돌아가서 행한 행위를 보여준다. 사마리아는 이스라엘이 북쪽의 이스라엘과 남쪽의 유다로 분단되었을 때, 북쪽 이스라엘에 속해있던 지역이다. 북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앗수르에게 망한 후에 앗수르의 폭압적이고 민족말살 정책에 의해 이방인들과 혼인을 많이 하게되어 이방의 피가 섞이게 되었다. 반면 남유다는 후에 바벨론에 멸망했는데, 바벨론은 이민족 유화정책으로 인해서 민족적 순수성을 그대로 유지한 채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바벨론 포로생활 70년 후에 고토로 돌아온 유다 백성들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성을 재건하고 나라를 다시 세우지만, 이제는 더 이상 사마리아 사람들을 자신들의 형제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은 오히려 이방인들보다도 더 사마리아인들을 멸시했으며, 개에 비유하였다. 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과 상종하는 것을 물론이고 그 지역에 발을 들여 놓는 것조차 수치스러워 했다. 한 마디로 사마리아인들은 유다 사람들에게 不可觸 賤民이었다.
그런 그 곳을 유다 사람인 예수님이 들어가시기로 작정하시고 들어가신다. 거기서 첫번째로 만난 사람이 바로 땡볕에 물을 길러 나온 사마리아의 여인이었다. 당시 물을 긷는 것은 여자들의 몫이었다. 하지만 물을 긷는 것은 더위를 피해 아침이나 저녁즈음에 물을 긷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리고 우물가에서 여인들은 모여서 소식도 주고받는 살롱과 같은 역할을 했다. 하지만 예수님과 만난 여인은 한 낮에 물을 길러 나온 여인이었다. 그 여인은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 아무도 없는 시간대에 나와서 물을 길을 수 밖에 없는 삶의 질고를 안고 사는 여인이었다. 그의 인생은 이미 파탄이 났으며, 그 동네에서도 그 여인에 대한 좋지 않은 쑥덕거림, 그를 피하는 동네 사람들로 인해서 많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여인이었다. 그런 그를 예수님이 만나신 것이다.
예수님은 가장 천대받는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소외된 그 여인을 만나러 금단의 구역인 사마라아에 발을 들여 놓으신 분이다. 어머니인 마리아가 그리스도를 잉태하였을 때 기도한 내용 그대로 그분은 가장 낮은 자에게 임하신 하나님이셨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 (누가복음 1:51-53)
예수님과 몇 마디를 나눈 사마리아 여인은 처음에는 그 분을 여행자로, 후에는 선생님, 선지자, 그리고 결국 메시야로 인정하게 되었다. 예수님께서 그의 인생의 질고를 꿰뚫어 보시고 그의 가장 아픈 부분, 그리고 그 족속의 가장 원한이 되는 부분에 대해서 그분처럼 확실히 아시고, 그 문제를 그분처럼 시원하게 해결하신 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분이 神的 위엄으로 본인을 그리스도라고 드러 내실 때, 여인의 마음은 그분의 선포에 대해서 자발적인 인정으로 가득차게 된 것이다.
"메시야를 만났다!" 그 여인은 메시야를 만난 기쁨에 사로잡혔다. 그 메시야는 유대인들이 원하고 기다리던 유대인들만의 메시야, 로마를 물리치고 자기들만의 나라를 세워서 이방인들과 피가 섞인 사마리아인들을 내어칠 그런 무시무시한 메시야가 아니라 자신들에게, 그것도 가장 멸시받는 본인에게 찾아오시는 그런 메시야라는 것을 알고, 또한 그 분이 자신의 가장 깊은 곳까지 아시고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경험하고 그 마음이 기쁨에 충만하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를 만난 그는 이제 변했다. 그 더운 땡볕을 무릎쓰고라도 사람들의 눈을 피하고자 했던 그가 이제는 양동이를 버려두고 한달음에 달려가서 마을 사람들을 "대면"하고 그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한다.
"그리스도를 만났다! 그 분이 나의 삶을 아시고 또 그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
마을 사람들은 그의 변화를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자신들이 아는 그 여인은 남편을 다섯이나 갈아치우고, 험한 인생을 살아가는 무기력하고 움츠러드는 여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그들에게 너무나 당당하게 외친다. "그리스도를 만났다!" 마을 사람들은 그의 말보다는 그를 그렇게 변화시킨 힘에 대해서 끌렸을 것이다. 그리고 그 호기심에 예수께 나아와 그를 만났다. 그리고 그분이 진정한 메시야라른 것을 인정하게 된다.
"예수의 말씀을 인하여 믿는 자가 더욱 많아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줄 앎이니라 하였더라." (요한복음 4:41-42)
가장 낮은 자리에 있던 사마리아를 찾아오신 예수님은 그 때와 꼭 같이 가장 낮은 자리에 있던 나에게 찾아오셨다. 그 분은 내 죄 문제를 해결해 주셨고, 또 내 삶의 인도자가 되어서 많은 일들을 행해 주셨다. 여기까지는 사마리아 여인과 나의 경험이 동일하다. 하지만 그 이후가 많이 다르다. 사마리아 여인은 그 후 사람들에게 돌아가서 그의 경험을 전했다. 많은 말은 나오지 않지만 그가 사용한 말의 시작은 "그"로 시작한다. "그"는 주님을 가리킨다. 여인은 자신의 삶에 그분께서 하신 역사를 그대로 가감없이 사람들에게 전달한다. 그것은 사실이었고, 그것을 애써 감출필요가 없었다.

나는 달랐다. 나도 꼭 같이 사마리아 여인처럼 주님의 구원, 그리고 그분의 도우심을 경험했지만, 나는 사람들에게 달려가서 "그"를 주어로 하지 않고 "나"를 주어로 하는 문장들을 만들어 내었다. 그리고 "그"는 문장에서 사라졌다.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모든 것들을 "나"를 주어로 설명할 때 하나님의 역사는 드러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이번 학기 학비를 면제받게 되었을 때, 믿는 주위의 형제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 주셨다."고 분명히 사실을 이야기 했지만, 주위의 안믿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운이 좋았지 뭐..."라고 답을 했다. 그 과정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셨는지는 모두 생략되어 있었다. 그것이 나의 현재의 모습이다.
믿음을 가지고 난 후에, 나는 "그리스도의 향기"에 나의 삶의 촛점을 맞추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바른 삶의 자세를 가지고 주위에 칭송을 들을 만한 그런 선행과 바른 행실을 해 나갈 때, 기독교에 대한 사람들의 반감을 해소시킬 수 있고, 그를 통해서 복음이 전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내 입을 통해서 이러니저러니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면서 백마디 말을 해서 사람들의 반감을 불러 일으키는 것보다는 한 가지 바른 행실로 인해서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내 입에서 하나님과 성경에 대한 말을 안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히 틀린 생각이었다. 일단 나는 바른 행실로 사람들을 감동시킬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비록 주님을 영접하고 변화된 사람이지만 나의 옛 본성으로 인해서 수시로 넘어지고 실수하는 불완전한 인간인 뿐이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완전해 보이는 것은 내가 완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완전하게 인정하시는 하나님편에서의 인정이 있기 때문일 뿐이었다.
두번째, 설사 내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정직하고 바른 삶을 산다 할지라도, 그들은 그 삶을 통해서 그 삶을 가능케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그들은 나를 "좋은 사람" 혹은 "훌륭한 사람"으로 생각했지 나를 통해서 "하나님은 참 선하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내게 깨닫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바르고 정직한 삶을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입을 열어서 하나님의 역사를 선포하고 주위 안믿는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한 것이다. 없는 것을 꾸며서 만들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게 행하신 모든 것들을 여과없이 그대로 하나님을 주어로 인정할 때, 그들의 시선이 나를 넘어 하나님께로 향하게 된다는 것. 그리고 평소의 삶에서 하나님을 "주어"로 삼는 삶이 있어야만 후에 기회가 되어 복음을 전하게 될 때, 그 복음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사마리아 여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오늘의 말씀이다.
"하나님. 하나님께서 제 삶에 행하신 모든 것을 하나님을 주어로 하여 표현하기를 원합니다. 예전의 습관처럼 움츠려들지 않게 하시고 있는 사실을 주위 누구에게나 당당히 여과없이 말할 수 있는 제가 되게 하여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기도

"전에는 하나님을 잘 구슬러서 내가 원하는 것들을 받아내고, 그것이 가뭄에 콩 나듯이 겨우 성공했을 때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게 기도의 전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기도는 주로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시고 나는 듣는 자가 되는 법을 배우는 기도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끄시는 한판 춤이다.
나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한다. 정말 들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참 좋아하신다는 걸 깨닫는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에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마련하신 잔치에 나타나면 하나님은 너무나 좋아하신다. 내 속 저 깊은 곳에서는 가끔 딴 세상의 음악 소리가 들려오고, 그 리듬은 내 안에 살아 있는 것한 것들을 남들에게 풀어 낸다. 정말 짜릿하다.
생애 처음으로 나는 기도를 좋아하게 되었다. 전혀 지루하지가 않다. 이제 관계형 기도, 즉 내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이 나를 아는 그런 기도야말로 간청형 기도(내가 원하는 것을 구하는 기도)와 감사 기도(내가 받은 모든 복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도)를 할 수 있는 참된 열정의 근원이 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나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 원하신다. 나를 아시는 그분께서, 그분을 나에게 알리시고, 서로 "친한" 관계가 되기를 원하신다. 그분의 종이면서도 동역자이고, 자녀이면서도 왕되신 그분의 신하이며, 친구이면서도 피조물의 겸손을 유지하는 가운데, 더 친밀하고 가깝운 하나되는 관계를 원하신다.
하지만 내가 그분에게 다가가는 모습은 관계에 중점이 되어 있지 않고, 많은 경우 균형을 잃고 있다. 그분에게 이것저것 해 달라는 목록을 가지고 가서 그분에게 간구한다(많은 경우 왕되신 하나님께 협박성 부탁을 드리거나, 심지어 겸손과 공손을 가장한 명령을 내릴 때도 있다.). 그분이 내가 원하시는 대로 해 주시면 감사하고, 그렇지 않으면 불평과 원망이 가득하다. 그 모든 모습을 종합해 볼 때, 내가 하나님께 다가가는 것은 그분에게서 뭔가를 얻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좀 심한 말로 하면 그분의 전능하심을 이용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이다.

그런 내 모습이 얼마나 가증스럽고, 하나님 편에서 보시기에 가슴을 아프게하는 것인지, 하나님 입장에서 조금만 생각해 봐도 알 수 있다. 내가 인간 관계에서 가장 혐오하는 경우는 나에게 다가오는 사람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다가올 때이다. 나로부터 뭔가를 얻어낼 수 있다는 것 때문에 나의 인격과 나라는 사람에는 상관 없이 나에게 다가오며 친한 척하는 것. 속으로는 내가 혐오스러우면서도, 나와 같이 있고싶지 않으면서도, 나에게서 얻어낼 수 있는 그것을 바라며 친한 척 하는 것... 그런 관계를 지극히 혐오한다. 나에게서 원하던 것을 얻어낸 순간, 그 관계는 의미가 없어지고, 나로부터 등을 돌리게 마련이다.
내 신앙생활이 그런 모습이 아닌가? 하나님께 뭔가 얻어낼 필요가 있을 때는, 기도며, 묵상이며, 찬양이며, 하나님께서 좋아하실 만한 모든 것을 하면서도, 일단 내 필요가 모두 채워졌다고 생각하면, 그분을 잊어버리고 마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분께 등을 돌리고 마는 그런 신앙... 그런 모습이 아닌가?
사실상 내가 그분을 필요로 하는 진정한 이유가, 하나님 외에는 절대로 채울 수 없는 내 안의 빈 곳 때문인데... 세상에 그 어떤 것으로도,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주어진 것이라 할지라도, 내 존재의 본성 가운데 그것들로는 결코 채워질 수 없는 그 것을 하나님만이 채우실 수 있고, 하나님과의 깊고 끊임없는 교제로만 채워질 수 있는 영적 궁핍함을 보지 못하고, 그저 세상적으로 내가 원하는 것들--평안, 기쁨, 감사, 물질적인 풍요, 정신적 안정, 종교적 채워짐 등등--을 채우고는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고 마는 그런 수준의 신앙이 바로 내 신앙이 아닌지 오늘 아침에 다시 돌아보게 된다.
오늘 아침에 하나님께 드린 기도 내용이 그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지 않는지... 하나님 당신을 구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사역들, 내 필요들에 집중된 그 기도가 내 신앙의 현주소를 나타내 준다.

내 기도의 대부분이 하나님 당신 자신을 구하고, 하나님 당신 자신을 누리고, 함께하는 것들로 채워지는 그날을 꿈꾼다. 그분과 너무 친하기 때문에 그분에 대해서, 그리고 나에 대해서 더 풍성한 이야기를 나누는 그런 기도의 시간을 꿈꾼다. 위에서 인용한 글대로 하나님과 "한 판의 춤"을 추는 기쁨의 시간, 그분 안에 거하는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아직은 멀었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그 길로 인도하시길 간절히 기도한다.

남편으로서의 나...

아내가 학교에 간 사이... 점심을 먹고 남겨진 그릇들을 좀 씻었다. 소위 설거지...

어렸을 적... 네 명의 아들과 집안에서는 꿈쩍도 하지 않았던 아버지를 "섬기셔야" 했던 어머니가 생각난다. 오부자가 쏟아내는 엄청난 빨래들을 빨래하고, 그들이 한 창 자랄 때 먹어대던 음식을 준비하고, 많개는 10개의 도시락을 새벽 6시까지 준비하시며, 그 많은 설거지와 집안 청소를 감당하셨던 어머니... 밖에서 신나게 놀다가 집에 들어가면, 세탁기가 없어서 빨래를 말 그대로 산더미처럼 쌓아 놓으시고 일일이 손빨래를 하시던 어머니를 보고도 도와드릴 생각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밥달라고 소리치며 졸라대기만 했고, (특히 막내인 내 동생이 심했는데) 밥달라고 했을 때 바로 밥을 대령하지 않으면, 밥을 안 먹겠다고 협박아닌 협박을 해대기에 일쑤였다. 아버지와 두 형들은 밥을 먹으면서 짜다는 둥 싱겁다는 둥, 반찬이 너무 부실하다는 둥 반찬에 대한 평가가 끊이지 않았다. 어린 내가 보기에도 너무하다 싶은 그 불평들을 어머니는 아무말 없이 그냥 감내하셨다.
어머니라고 불평이 없으시고 힘드시지 않았을까? 어머니는 항상 딸을 낳지 못한 자신의 운명을 탓하셨다. 하루 종일 엄청난 집안일로 온 몸이 쑤시고 아파올 때면, 나를 부르셔서 안마를 시키시면서, "딸을 낳았어야 했는데... 내가 지지리도 복이 없지..."라며 신세한탄을 하셨다. 5대 장손이자 독자, 그리고 그것도 아버지를 일찍 여의신 내 아버지에게 시집와서 낳는 자식마다 아들을 낳으셨던 어머니는, 두 아들을 낳으시고 딸을 기대하셨다. 셋째를 임신하여 출산한 아들이 바로 나였다. 그리고 내 동생까지 출산하시고는 용하다는 점장이를 찾아가셔서 다음에 딸을 낳을 가능성을 물으셨단다. 그 때 그 점장이는 아들을 일곱을 낳아야 딸을 낳을 수 있을 것이라고 예언했고, 일곱이라는 숫자에 놀라셔서, 더 이상 자식 낳는 것을 포기하셨다. 어머니는 이 모든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셨다.
어머니는 딸을 낳지 못한 자신을 탓하셨을 뿐, 아들들에게 일을 분담시키시는 것에 대해서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셨다. 오히려, 내가 "아주" 가끔씩 어머니를 돕기 위해서 나서기라도 할 때는 사내는 부엌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고 딱 잘라 말씀하셨다. 신발과 옷들, 양말, 이불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손빨래를 하실 때에도, 어머니는 딸 없는 타령만 하셨을 뿐이었다.

그런 어머니가 불쌍했고, 나는 커서 장가가면 아내를 많이 도와주는 남편이 되리라 다짐했었다. 그리고 대학에서 여성운동에 대해서 공부하면서, 어머니께서 과거의 관습에 사로잡히신 분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남성도 가사일을 도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나도 그런 여성운동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자가 되었다.

아내를 만나서 결혼했다. 좋은 남편이 되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정말... 내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설거지가 필요한 그릇들은 내 눈에는 보이지도 않았고, 빨래를 기다리는 빨래감들은 내 일이 아니라 아내의 일처럼 느껴졌다. 집안에서 보이는 지저분한 것들은 아내를 탓하는 구실이 되었을 뿐, 내가 치워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하연이를 낳고, 너무 고생하는 아내를 보면서, 불쌍했지만, 내가 도와줘야 한다는 것, 그 짐을 덜어 주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 몸은 매우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즐겼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만 열심히 하는 그런 남편이다. 컴퓨터가 고장나면 밤을 세워서라도 고치고, 차가 수리나 관리가 필요하면, 아내가 아무 말이 없더라도, 즉각즉각 고치고 관리하고, 뭔가를 만들어야만 하면 계획을 세우고 만들어 낸다. 보편적으로 남자들이 좋아하는 집안 일들을 하는 것은 너무나 즐겁고 당연히 내가 해야할 일들이므로 그 일들은 불평없이 감당한다. 하지만 부부로서 같이 감당해야할 가사 노동에는 도통 관심이 가지 않는다. 아마 어렸을 때부터 철저하게 훈련을 받아서 이미 내 몸에 프로그램밍이 되어버린 것 아닌가 생각된다.
결혼 10년이 지난 지금... 그런 나의 모습은 여전하다.
이런 나의 모습은 아내를 늘 힘들게 했고, 그것이 아내에게는 가시가 되었다. 믿음 안에서 굳건하게 서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 된 것이다. 그가 힘들어 할 때, 나는 그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는 그런 남편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최근에 많은 회개를 하게 되었다.
성경에서는 아내에 대한 남편의 역할을 분명하게 가르치신다.
엡 5:25-29
남편이신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셔서 교회를 위하여 자기를 내주신 것같이,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교회를 물로 씻고,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여서, 거룩하게 하시려는 것이며, 티나, 주름이나, 또 그와 같은 것들이 없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교회를 자기 앞에 내세우시려는 것이며, 교회를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를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여야 합니다.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무도 자기의 육신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기르시고 돌보시는 것처럼, 사람은 자기의 육신을 가꾸고 보살핍니다. (표준새번역)
남편이 아내에게 대해서 하나님 앞에서 가지는 의무는 그 아내를 거룩하며 아름답고 정결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남편이 아내를 그렇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아내를 거룩하고, 정결하며, 아름답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것이다. 남편의 역할은 아내가 그리스도를 더욱 깊은 관계를 가지고, 그리스도를 더욱 사랑하며, 그분 안에 온전히 거할 수 있도록 돕는 조력자가 되는 것이다.
조력자로서의 역할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아내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것이다. 영적 리더십을 가지고, 아내를 말씀으로, 기도로 인도하는 가운데, 그가 그리스도께 더욱 가까이 가도록 돕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남편인 내가 주님 앞에 더 나아가야 한다.
다른 하나는 아내가 그리스도 앞에 나아가는 데 남편인 내가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나의 연약함이, 나의 죄가 내 아내를 지속적으로 시험에 들게하고, 그가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을 막는 자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남편으로서의 내 역할을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가사일에 대한 나의 습관적 무관심과 비협조가 내 아내로 하여금 시험에 들게하고 그가 주님 앞으로 나아가는 데 걸림돌이 된다면, 나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있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모든 가사일을 도맡아서 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아내에게 큰 짐을 지워놓고, 나 혼자 거룩한 척 하는 그 모습을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지켜보고 계시고, 그것을 언젠가 징계하실 것이라는 것을 나로 하여금 분명히 깨닫게 하셨다.
결국 내가 집안에서 가사일을 적극적으로 돕고, 아내의 짐을 덜어주는 일은, 단순히 남편으로서 아내를 돕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셨으므로, 나는 순종하겠다. 내 몸을 쳐서 복종시키는 것이 그분의 종으로서 내가 취해야할 마땅한 자세이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 설거지를 하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명령에 겸손하게 무릎을 꿇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