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나라를 다스리시며"

왕이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거하며 소처럼 풀을 먹으며 하늘 이슬에 젖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낼 것이라. 그 때에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아시리이다. 또 그들이 그 나무 뿌리의 그루터기를 남겨 두라 하였은즉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줄을 왕이 깨달은 후에야 왕의 나라가 견고하리이다. (단 4:25-26)

느부갓네살왕.
바벨론 제국의 2대 왕.
애굽을 무너뜨리고 제국을 확장시킴으로 명실상부한 대제국을 다스리는 황제.
天上天下唯我獨尊(천상천하유아독존)의 지상 절대자.
모든 인간의 두려움의 대상이며 부러움의 대상.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높아질 대로 높아져 있던 그에게 꿈을 꾸게하시고, 그것을 통해서 그를 낮추신다. 자기 위에 어느 인간도 있을 수 없는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그였지만, 그가 자신보다 비교도 되지 않게 높으신 하나님, 이 우주의 절대자이신 그분이 결국 "인간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분인 하나님을 알고 그분 앞에 겸손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알게 될 때까지 낮추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 주셨고, 실재로 7년 동안 그를 짐승과 같은 처지에 처하게 하심으로 그를 낮추셨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보여주시기를 원하셨던 것은, 그 절대권력이 결코 자신이 성취한 것이 아니요, 하늘의 하나님께서 당신의 기쁘신 뜻을 따라 잠시 그에게 맡긴 것이라는 것을, 그래서 그 모든 것의 원천이 되시는 하나님을 경외할 것을 가르치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의 왕을 찬양하며 칭송하며 존경하노니 그의 일이 다 진실하고 그의 행하심이 의로우시므로 무릇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그가 능히 낮추심이니라.(단 4:37)

험한 7년의 세월을 통해서 하나님의 낮추심을 경험한 느부갓네살왕의 결론은 7년의 고통이 아깝지 않은 교훈을 얻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는 "하늘의 왕" 앞에서 겸손을 배웠다.

겸손...
그것은 하나님을 세상의 주권자로 인정하고, 모든 것이 그분으로부터 나왔다는 것, 그리고 그 분 앞에 나는 그분께서 기쁘신 뜻을 따라 부르시고 쓰시는 종일 뿐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물론 지극히 선하시고, 나를 사랑하시는 그분이시기 때문에, 나를 단순히 폐기처분 가능한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내 스스로의 주인이 되거나, 하나님이 아닌 다른 존재/것을 하나님의 자리에 놓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교만이다.

세상의 패권을 거머줬던 느부갓네살에게만 겸손이 필요한 것일까? 나처럼 아무 가진 것도 없고, 능력도 없는 자, 세상에 내세울 것이 없는 자는 하나님께서 그토록 찾으시는 겸손의 덕목을 이미 충분히 갖추고 사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느부갓네살 앞에서는 한 없이 작아지고 스스로를 낮출 수 밖에 없는 나이지만,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는 그렇지 못한 내 모습을 자주 보게 된다. 하나님께서 너무 크시고 위대하셔서 내 좁은 시야에서 그분을 담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 세상에서는 두려운 사람들이 너무 많은데, 왜 정작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마음은 찾아보기 힘들까? 왜 세상의 권세자들, 잘나가는 사람들 앞에서는 한 껏 겸손한데, 하나님 앞에서는 목을 꼿꼿이 세우고 머리를 숙이지 못할까?

겸손하지 못함에 있어서 내가 느부갓네살보다 덜하지 않는 것을 늘 보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느부갓네살을 통해서 나에게 엄히 명하신다.
"겸손하라!"

섬기는 일로 매우 마음이 아픈 지금...
마음에서 솟아나는 분노가 나를 휩싸려고 하는 지금...
하나님께서는 내 심중에 엄히 명하신다.

"겸손하라!"

"Lord, I'm nothing, and You--only You--are the 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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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시 비상사태 대처 요령

나는 운전할 때는 항상 긴장한다. 그것은 언제나 사고의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많은 긴장은 운전에 도움이 되지 않지만, 약간의 긴장은 운전시 실수를 줄여주는 좋은 약이 된다.
오늘 신문을 보다 비상시에 대처하는 요령을 읽었다. 좋은 Tip인 것으로 생각된다. 같이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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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레이크가 말을 듣지 않는다면 페달 브레이크가 말을 듣지 않는다면, 엔진 브레이크와 주차 브레이크를 활용해야 한다. 가속페달에서 발을 떼고, 현재 달리는 속도에 맞춰져 있는 기어를 한 단계 내려주면 단계적으로 속도를 떨어뜨릴 수 있다. 이런 방식으로 충분히 속도를 낮췄으면, 주차 브레이크를 당겨 차를 멈출 수 있다. 주차 브레이크를 갑자기 넣으면 차체가 돌아갈 우려가 있으므로, 여러 번에 걸쳐 조금씩 제동을 걸어줘야 한다. 만약 주차 브레이크도 잘 걸리지 않고 급하게 차를 멈춰야 하는 상황이라면, 도로 옆에 있는 배수로나 충돌방지 벽 등 바깥에 단단하게 고정된 물체에 차를 접촉시켜 일어나는 마찰력을 이용해 멈출 수도 있다.

브레이크는 평소 점검을 해둬야 한다. 브레이크를 깊이 밟아야 제동이 되거나 제동이 늦게 걸리면 브레이크 패드가 닳았을 가능성이 높다. 페달을 밟을 때 긁힌 소리가 날 때에도 마찬가지다. 타이어 안쪽 디스크 표면에 굴곡이 심해도 제동 능력이 떨어진다.

■ 시동이 갑자기 꺼졌다면 세워둔 차가 움직이지 않는 것과는 다르게 달리는 도중 시동이 꺼지면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먼저 바로 비상점멸등을 켜서 긴급상황임을 알리고 안전한 곳으로 차를 밀어 옮겨야 한다. 전지의 상태가 괜찮다면, 수동변속 차량의 경우 기어를 1단이나 2단에 놓고 클러치 페달을 밟지 않은 상태에서 시동모터를 회전시키면 차가 움직인다. 20m 정도는 이런 방식으로 차를 움직일 수 있다. 그러나 자동변속 차량은 기어가 파킹(P)이나 중립(N) 위치가 아니면 시동모터가 돌지 않기 때문에 주위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급하게 차를 옮겨야 하는 경우라면, 다시 기어의 위치를 바꿔가며 시동을 걸어보는 방법도 있다. 그러나 시동이 꺼진 이유를 정확히 알기 어려우므로, 정비업체의 도움을 받는 것이 현명하다.

■ 엔진이 과열됐다면 계기판의 온도계가 'H'를 가리키거나 적색눈금에 있고, 엔진 냉각수가 넘쳐흘러 보닛 위에서 김이 올라온다면 엔진이 과열된 것이다. 엔진 과열 상태에서도 계속 주행하면 엔진에 치명적인 손상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즉각 운행을 멈춰야 한다. 도로 가장자리의 그늘로 차를 멈춰 세우고 보닛을 열어 상태를 먼저 확인한다. 과열된 라디에이터 캡을 곧바로 열어버리면, 증기나 뜨거운 물이 솟구쳐 화상을 입을 위험이 있다. 증기가 충분히 빠진 것을 확인한 뒤에 캡을 열도록 한다.

냉각팬이 돌지 않으면, 시동을 끄고 퓨즈박스의 전동팬 퓨즈가 끊기지 않았는지, 보조탱크 캡이 완전히 조여 있는지를 확인해본다. 이상이 없다면 더 운전하지 않고 정비공장의 도움을 받는다. 냉각팬이 돌아가는데도 과열됐다면 냉각수가 부족한 경우가 많다. 이때에는 엔진을 공회전 상태로 유지해 과열을 진정시킨 뒤 시동을 끄고 엔진을 식힌 상태에서 냉각수를 채운다. 엔진이 과열된 상태에서 차가운 냉각수를 부으면 엔진에 무리가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냉각수가 새어나온다면 운행하지 않는 것이 좋다.

■ 엔진에서 불이 난다면 주행 중 고무 타는 냄새가 나면서 차 앞 쪽에서 검은 연기와 불꽃이 보인다면, 차를 안전한 곳에 세운다. 자동차의 화재는 대부분 전기적 결함 때문에 발생하기 때문에 시동을 끄는 일이 급선무다. 보닛을 열고 담요나 걸레, 소화기 등을 활용해서 불을 꺼야 한다. 단, 아무 준비 없이 갑자기 문부터 열어선 안된다. 산소공급이 갑자기 많아져 폭발의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 타이어에 펑크가 났다면 달리는 도중 타이어에 펑크가 나면 차체가 갑자기 기울어진다. 운전대를 힘껏 쥐고 균형을 잘 잡아 안전한 곳으로 이동해야 한다. 엔진시동을 끄고 주차브레이크를 당긴 뒤 교환할 타이어의 대각선 위치의 타이어에 고임목을 받친다. 비상 공구들을 꺼내 잭을 교환할 타이어에서 가장 가까운 잭포인트에 설치한다. 앞바퀴는 뒤쪽 10㎝, 뒷바퀴는 앞쪽 10㎝에 있다. 타이어가 지면에서 약간 뜰 때까지 잭을 올리고, 휠너트를 풀어 여분의 타이어로 바꿔 끼운다.

출처: http://www.hani.co.kr/arti/economy/car/40431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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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18

(2007.5.23.에 쓴 글)





"아빠! 보지 말아요! 절대 보면 안 되요!"
예연이가 뭘 하는지 종이에 뭔가를 그리면서 아빠에게 경고한다.
사실 보고 싶지 않았는데, 보지 마라고 하니 좀 궁금해지긴 했다..
한참 후, 예연이가 아빠에게 주는 거라며 그 종이를 들이 밀었다.

얼굴 가득 만족과 기쁨의 미소를 띈 채...

손으로 만드는 하트 모양의 그림이 참... 나를 기쁘게 했다..

아이들을 키우는 재미란 이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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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에 상관 없이...

지난 주부터 몸이 좋지 않았습니다. 지난 주 금요일에는 많이 아팠지만, 전체적으로는 몸이 약간 안 좋은 상태, 피로가 항상 있는 상태였습니다.
몸이 안 좋으니 하나님 앞에서의 제 모습도 쉽게 흐트러지는 것을 봤습니다. 새벽에 일어날 때, 몸지 좋지 않으니 좀 더 누워 있어야 할 것 같은 유혹이 매우 강하게 들었고, 피곤한 가운데, 주님을 찾는 것 조차도 피곤한 하나의 "일"로 치부되어 버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수 많은 소유물을 가져가시는 시험을 허락하신 후, 왜 가장 나중에 그 몸을 치셨는지, 좀 이해가 갑니다. 막대한 소유물을 잃는 것보다, 사랑하는 자녀들을 잃는 것보다, 자신의 몸에 찾아온 고통과 어려움에 쉽게 무너지는 인간의 속성을 잘 알고 계신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시험하신 것이 온몸에 난 욕창과 그로인해 뼈속까지 아픔을 느끼는 고난을 주심으로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자세를 잃지 않는지를 보시고 싶으셨던 것 같습니다.

욥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작은 것에 이리도 쉽게 흔들리는 저 자신을 보면서, 주님 앞에 참 부끄럽습니다. 약간의 불편함과 피곤함일 뿐인데, 주님을 구하는 시간, 주님을 만나는 시간, 주님을 향한 열정이 이리도 쉽게 사라져버리는 것인가하는 생각에 제 자신의 소위 "믿음"이라는 것을 다시 돌아보게 됩니다.

지난 주일에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하나님을 시험하며 대적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출애굽 때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하고 그분을 높이며 기뻐하던 바로 그들이, 광야에서의 생존을 위해 가장 필요한 물이 없어서 고통할 때, 같은 입으로 하나님을 원망하고 대적하는 말을 하는 것을 보여 주시면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에 대한 전적인 신뢰이며, 그 신뢰는 상황에 상관 없이 그분의 선하신 인도하심을 믿고, 그분을 의지하며 기다리는 것, 그리고 그분을 묵묵히 따르며 순종하는 것이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약간의 고통에 이리 쉽게 흐트러지는 저의 모습을 보면서, 이스라엘과 같은 처지에 있었다면, 그들보다 더 앞장서서 하나님을 대적했을 자라는 것을 보게 해 주셨습니다.
부끄럽지만, 이런 제 모습을 보여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또 스스로에게 속아서 그런 대로 쓸만한 믿음을 가진 자라고 자고하였을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제 자신의 이런 모습을 주님께 솔직하게 고백하고, 회개해야겠습니다. 그리고 그런 저를 너무나 잘 아심에도 불구하고, 자녀로 삼으시고, 그리스도의 제자로, 하나님의 일을 맡은 종으로 부르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주님의 능력과 인도하심과 "상황과 처지에 상관 없이" 순종케 하심을 구해야겠습니다.

주님만이 소망이고, 주님만이 힘이며, 주님만이 모든 것 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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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소유...

내 소유는 이것이니 곧 주의 법도를 지킨 것이니이다(시 119:56)
This has become mine, That I observe Your precepts.(NASB)

지금 주님 앞에서 나도 이 고백을 할 수 있을까?
다시 오실 그 심판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섰을 때, 내가 이 고백을 할 수 있을까?

내가 지금 현재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많은 것들이 이 고백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정말 관계가 있는 것들인가?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 재판장이신 그분께서 물으실 엄위하신 질문들을 미리 나에게 보여 주셨는데,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만들어가는 인생을 살고 있는가, 아니면 그 답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인생을 살고 있는가?

인생을 살면 살수록, "내일"은 없다는 것을 느낀다. 오직 "오늘"만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내 인생의 최종평가는 결국 오늘 나의 삶으로 내려 질 것이다. 왜냐하면 내일의 삶도 오늘의 삶과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오늘 내가 주님 앞에서 충실한 삶을 살았는지가 중요한 이유이다. 만약, 그렇지 못한 삶을 살았다면, 그것에 대한 여러가지 변명과 이유가 있겠지만, 그래서 다시 내일을 기약하겠지만, 내일도 역시 여러 이유와 변명거리로 인해서 오늘과 마찬가지로 실패한 삶을 살 것이 분명하다.

장차 오실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는 바로 오늘, 이 시간, 이 자리에서 해야 한다. 내가 하는 모든 일이 그분께 답을 드리는 것들이 되어야 한다. 주의 말씀이 지배하는 삶, 주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삶. 그래서 그분의 법도를 지키는 것이 지금 이 시간, 이 자리에서 "나의 것"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것이 복된 삶이다. 무엇을 하든지 주께하듯하며, 주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해야 한다. 무엇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인지 잘 모를 때도 있지만,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열정과 주님을 기쁘시게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하는 갈망이 내 안을 가득 채워야 한다.

나는 오늘 그런 삶을 살겠다. 살고야 말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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