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곤.. 사회적 약자..

In a room at the Soto House, 32 Fourth Street, San Francisco, was found the body of W. G. Robbins. He had turned on the gas. Also was found his diary, from which the following extracts are made:--
"March 3.--No chance of getting anything here. What shall I do?
"Marc 7.--Cannot find anything yet.
"March 8.--Am living on doughnuts at five cents a day.
"March 9.--My last quarter gone for room rent.
"March 10.--God help me. Have only five cents left. Can get nothing to do. What next? Starvation or--? I have spent my last nickel to-night. What shall I do? shall it be steal, beg, or die? I have never stolen, begged, or starved in all my fifty years of life, but now I am on the brink--death seems the only refuge.
"March 11.--Sick all day--burning fever this afternoon. Had nothing to eat to-day or since yesterday noon. My head, my head. Good-by, all!"
-from Jack London's "Revolution"

1910년에 출간된 Jack London의 책에 소개된 실재 있었던 한 사건이다.
한 귀중한 영혼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그 사건을 볼 때, 가슴이 아프다.

사람들은 세상을 Macro한 관점에서 본다. Micoro하게 보이는 세상은 자기 자신과 관련된 것 뿐이다. Macro한 관점에서는 개개인의 고통이 보이지 않는다. 시스템의 문제, 전체적인 조화의 문제만 다룰 뿐이다. 주식을 예로 본다면, 종합주가지수만 보이는 것이다. 시장전체의 흐름에만 관심이 있지 개개 종목들의 등락은 눈에 들어 오지 않는다. 인간 세상의 정치는 근본적으로 Macro한 관점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다. 전체 소비자 물가지수, 국민 총생산 등등의 Macro한 지표만 보일 뿐, 그 숫자에 파 묻힌 개인사에는 관심이 없다.
사람이 Micro한 관점을 가지긴 하지만, 그것은 다분히 자기 중심적이다. 다시 주식의 예로 들자면, 그 많은 종목 중에서 자기가 투자하고 있는 종목들, 혹은 관심을 가진 몇 종목만 Micro하게 볼 뿐, 다른 종목들은 눈에 들어 오지도 않는다. 그와 마찬가지로 인간은 자기의 형편과 자기의 주변만을 Micro한 관점에서 관심을 가지고 자세히 살펴보기 때문에 그것을 가지고 세상을 판단한다. 내가 먹을 것이 좀 있고, 경제적으로 살기가 그리 고단하지 않으면, 그 사람에게 세상은 살 만한 세상이다. 그에게 세상의 다른 모습들은 보이지 않는다. W. G. Robbins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W. G. Robbins은 100년 전에만 있었을까? 지금 이 순간, 이 땅에는 동일한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없을까? 역사가 보여주는 것은, W. G. Robbins는 늘 우리와 함께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Macro한 관점과 나 중심의 Micro한 관점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그들을 우리가 의식적으로 보려고 하지 않는다면, 언제나 그들의 존재는 나의 인식 속에서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속성이다.

그런 인간에게, 그런 나에게,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신다.
"나는 고아와 과부의 하나님이다."
다시 말하면, W. G. Robbins를 주목하시고, 그를 아픈 마음으로 바라보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을 모른다면 모르지만, 하나님을 아는 자로서, 하나님의 시선이 머무르는 그 곳에 내가 무관심하다면, 그것은 죄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의 모든 인간들이 먹고 살기에 충분한 식량과 자원과 땅을 주셨다. 문제는 인간의 욕심이 그것들을 한쪽으로 치우치게 하고, 그것을 차지하지 못한 자들을 빈곤으로 몰아가는 것이다. 세상은 결국 Zero Sum Game이다. 한쪽이 편안하고 많이 차지하면, 다른 한쪽은 그만큼 불편하고 비참하고 적게 소유하게 되어 있다. 구약에서 누누히 강조되는 하나님의 공의는 양쪽의 편차를 인정하긴 하지만, 그 편차가 약자들을 비참한 상황으로 몰아내는 것까지를 허용하지 않으시는 공의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토지의 희년 제도를 만드신 것이나, 율법을 통해서 가난한 자들을 위한 배려를 명령하신 것이나, 당신 스스로를 고아와 과부, 즉 사회에서 가장 약한 자, 가난한 자의 하나님이라고 강조하신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죄악과 불의가 관영한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물질을 주시고, 내가 가진 물질을 통해서 그들이 도움을 받기 원하신다. 물론 하나님께서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른 사람을 위해 쓰라고 하시지는 않는다. 나 또한 가장 평균적인 삶(그것을 어떻게 규정하든지 간에)을 영위할 권리가 있다. 하지만, 평균 이상의 소득은 반드시 이웃과 하나님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런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 땅의 W. G. Robbins들을 일부러 찾아 발견하고, 그들을 위해 내가 가진 것, 아니,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것을 나눔으로 W. G. Robbins들이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도록 돕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고아와 과부의 하나님이라면, 나도 고아와 과부를 구체적이고 실천적으로 돕는 그런 자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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