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인 어제 저녁, 한 지체에게서 전화가 왔다.
전화를 받을 때부터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대화를 나누면서 죄의 유혹 가운데서 승리하지 못하고 늘 패배하는 자신에 대한 혐오와 한탄을 듣게 되었다.
급기야 그는 통곡하며 울기 시작했다.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할 정도로 울어대는 그 지체... 그 통곡은 절규였고, 그것은 반복되는 죄에 의 끈질긴 유혹을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자괴감의 탄성이었다. 그만큼 죄의 관성이 그를 힘 있게 붙들고 있었던 것이다. 벗어나고 싶지만, 깨끗하고 싶지만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죄의 종이 되어버린 자신에 대한 회한이었다. 엉엉 울어 대는 그 울음소리를 통해서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아픔을 볼 수 있었다.
마귀는 그렇게 한 인간을 물고 늘어지고 있었다. 저항할 수 없는 죄의 유혹, 그리고 그 유혹에 너무나 쉽게 반응해서 끌려가버리는 자아는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자신의 신앙의 모습, 믿는 자의 삶의 모습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 간극의 거리 만큼 자신에 대해 좌절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해 자라 가려고 노력하는 그,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보고자 하는 열망을 가진 그를, 주기적으로, 일 주일에 꼭 한 번씩, 나락으로 빠뜨리며 꼼짝 못하게 하는 사탄... 그는 거봐란듯이 웃으며 또 한 번의 승리를 만끽하며 쾌재를 부르고 있었으리라.
나도 할 말을 잃었다. 그로 하여금 계속 울도록 그냥 둘 수 밖에...
한참을 울게 그냥 둔 뒤에, 그의 삶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의 어린시절, 성장기의 시절, 그리고 나중에 우리 교회에 처음 왔을 때, 그리고 지금의 모습... 그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가 통곡하며 한탄스럽게 외쳤던 "변화 없이 죄의 유혹에 쉽게 너머지고 마는 자신의 모습"은 사실이 아님을 알려 주었다. 그의 일생을 통해서 죄인인 그를 하나님께서 얼마나 변화시켜 주셨는지, 그분의 인도하심과 변화를 불러오신 자비하신 능력의 역사를 같이 나누면서, 그는 결코 예전과 같이 않으며, 새로운 존재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 그가 믿음으로 취한 십자가의 능력, 그리고 그 안에서의 거룩한 성도의 모습.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죽고 그분으로 인해 다시 살게 되었다는 그 믿음의 고백이 어떻게 그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는지를 같이 나누었다.
그리고 또 한 번의 실패 가운데 너무 오래 있지 말고, 주님 앞으로 나아오라고 권면했다.
사람은 죄를 짓는 동안, 그리고 그 직후에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가 가장 필요한 때임에도 불구하고, "죄의식" 때문에 쉽게 그 앞으로 나아오지 못한다. 하지만 그것은 마귀가 노리는 속임수에 넘어가는 것이다.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주님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주님이 필요한 것이다.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을 안다면, 그분이 어떤 분인지를 안다면, 그 때가 바로 주님 앞으로 나아가 주님께 매달릴 수 있다.
그에게 당장 말씀을 묵상하고, 주님을 찬양하고, 주님께 회개와 간구의 기도를 드리라고 권했다.
전화 통화를 통해서 서서히 자신의 비참한 상태를 벗어나고 있는 그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말씀 앞으로 나아가겠다는 말과, 서로에 대한 사랑을 확인했다. 그리고 앞으로는 죄의 유혹이 자신을 엄습할 때, 지체없이 나에게 전화하라고 했다. 하나님을 찾으면 좋지만, 그 일에 있어 지속적으로 실패한 그에게, 눈에 보이는 누군가 의지할 사람이 필요했다. 그것이 나라면, 내가 언제든지 전화를 받을테니, 그 때마다 연락해서 같이 기도하고 권면하기로 했다.
죄의 유혹과 그 유혹에 쓰러져서 고통하는 한 지체의 일이지만, 나 또한 그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않다. 누구나에게 죄의 유혹은 있을 수 밖에 없으며, 언제나 유혹은 강하다. 강하지 않은 유혹은 이미 유혹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고, 정결과 거룩을 향해 나아가려는 갈망 가운데 있는 나에게, 왜 죄의 유혹이 사라지지 않고, 그 유혹과 싸우는 치열한 싸움이 끊이지 않을까? 그것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할까? 나는 늘 왜 이 모양일까? 예수님께서 친히 시험을 당하신 분으로서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신다고 말씀하셨는데, 왜 나에게는 시험을 이기게 하시는 예수님의 능력을 온전히 체험하지 못하는 것일까?
내가 진정으로 믿는 자라면, 다시 말해 나의 죄인됨으로 인해 십자가에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라면, 결코 그 전과 그 이후가 같을 수 없다. 그리고 날이 감에 따라 그 변화는 반드시 내 삶 가운데 있을 수 밖에 없다.
주님께서 나로 하여금 시험을 이길 수 있도도록 도우시는 방법은 몇 가지가 있다.
첫째는 시험이 시험이 아니게 만들어 버리시는 것이다. 죄의 유혹이 아예 유혹으로 느껴지지 않게 만들어 버리시는 것이다. 전에는 세상의 성공과 사람들의 인정이 나를 늘 유혹하였고, 내 자신을 드러내고, 내 자신이 영광을 받고자 하는 유혹에 너무 쉽게 넘어지는 자였다면, 그리스도를 알고 나서 그분을 체험할수록, 세상의 것들과 비교도 되지 않는 너무나 귀한 그분임을 알게 되고, 모든 영광이 그분께 돌려져야 함을 충분히 깨닫기 때문에 더 이상 내가 동일한 유혹을 "느끼지 조차" 못하는 자가 되어 버린다.
내 삶에 그런 변화들이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둘째, 특정한 죄의 유혹에 쉽게 빠지는 사람들 중의 상당수는 그 안에 있는 깊은 상처 때문이다. 성적으로 타락한 삶을 탐닉하는 형제들, 자신을 사랑해 줄 누군가가 없으면 살 수 없는 자매들 등등.. 그런 사람들의 내면에는 깊이 상처받은 자아가 자리잡고 있다. 그런 경우에는 아무리 성경적인 지식이 많고 체험을 많이 한다 하더라도 쉽게 유혹에 무너지고 만다. 주님은 십자가의 복음으로 그 상처를 치유하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다. 그분이 십자가에 돌아가시면서 우리의 상처까지도 같이 십자가에 못박으셨다는 사실, 그리고 우리 안에 그분의 영이 사시고, 그분이 내 안의 더 많은 영역을 장악하시고, 어두운 구석에 치유의 광선인 빛을 비추시기 때문에 내 안의 상처들이 오로지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으로 완전한 치유를 경험한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하심으로써, 죄의 유혹이 나를 엄습할 때,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고, 하나님의 아파하시는 마음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다. 그럼으로써 죄악의 습관에 물든 우리의 본성이 죄에 민감하게 반응하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하시고, 적당한 말씀을 떠올리게 하심으로써 그 죄악의 유혹을 물리치게 도우시는 것이다.
언제나, 죄의 유혹을 물리치기는 결코 쉽지 않다. 심지어 예수님조차도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을 때, 가볍게 이기신 것이 아니다. 유혹이 유혹인 한에 있어서는 언제나 나를 무너뜨릴 파워를 가지고 나에게 다가 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어떤 경우에도 우리가 잊어서는 안되는 사실 한 가지는, 나의 주인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그 죄악의 권세와 파워보다도 훨씬 더 크신 분이시며, 넉넉히 이길 힘을 가지신 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죄와 싸워보려고 하지 말고, 주인되신 주님을 붙잡고 의지함으로 그분께 맡기고, 그분의 그늘 아래 숨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죄의 유혹은 반드시 우리를 고통으로 인도한다. 하지만 주님께 피하는 자는 기쁨과 승리를 얻게 될 것이다.
사랑하는 내 지체가 주님으로 인해 동일한 죄의 유혹을 물리치고 승리함으로 그 입가에 환한 미소를 지을 그날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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