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위대하심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요 11:32)

사람들은 예수님을 직접 볼 수 있다면, 그 믿음이 참으로 커지고, 하나님께 헌신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이다. 예수님 당시 그분의 이적을 보고도 그분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그분에 대한 참 믿음을 가졌던 사람들은 극히 소수였다. 그 소수 중에서도 도드라진 믿음을 가졌던 자들, 어찌보면 예수님의 제자들보다 더 진실하고 바른 믿음을 가졌던 사람들이 바로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였다. 마르다는 베드로가 디베랴 바닷가에서 드렸던 그 위대한 고백과 동일한 고백을 드렸고,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직전, 그분의 장례를 예비했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들조차도 예수님이 진정으로 어떤 분인지를 완전히 알지는 못했다. 그들의 인식능력에 한계가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예수님의 크심이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그 때나 지금이나 죽은자는 죽은자일 뿐, 다시 살 수가 없는 것이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믿음은 그 인식의 한계 내에 머물렀다. 하지만, 예수님은 "나사로야, 나오라!"라고 명령하심으로써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을 해내셨다. 그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신앙생활의 초기에는 모든 것이 새롭기 때문에 열심히 배우려고 한다. 그 배우려는 자세 이면에는 자신의 지식이 짧다는 고백이 있다. 하나님에 대해서 많이 알지 못한다는 인정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초신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갈 수가 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교회 문화와 성경의 지식에 익숙하게 되면, 어느새 마치 자신은 다 아는 것처럼 하나님의 지식을 추구하는 열정이 식게 된다. 그 결과는 신앙생활의 나태함으로 나타나고, 믿음의 열매들은 점점 줄어들게 된다.
하나님은 크신 분이시다. 그 크심은 초신자가 몇 년 열심히 성경을 공부하고 교회생활과 문화에 익숙하게 되었다고 파악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나님의 크심에 비교한다면, 우리의 자람은 미미한 것일 뿐인 것이다. 따라서 언제나 말씀을 대할 때, 예수 그리스도를 대할 때, 우리 안에는 우리의 무지에 대한 인정에서 비롯되는 겸손이 자리 잡아야 한다. 그분은 항상 내 생각보다 크시다는 것을 명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자세로 성경을 접할 때, 성경은 늘 새로운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새로운 예수님의 면모, 그분의 능력, 그분의 인격, 그분의 뜻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새로움 속에서 예수님에 대한 지식은 자라가는 것이고, 우리의 신앙은 성숙해가는 것이고, 우리 안에 지적 교만이 자리잡을 틈을 주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건강한 신앙생활이다.

이 아침. 하나님 앞에는 늘 겸손해야 함을 깨닫는다. 내 안에 있는 교만을 지적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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