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내 모든 죄악을 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 능력은 나의 과거, 현재, 미래의 죄를 모두 처리하신 능력이며, 그 십자가를 믿음으로 받아들인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믿음의 가장 기초에 해당하는 이 사실은 믿는 자들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죄인이었던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용서함을 받았고, 이제는 만왕의 왕이시고 절대적으로 선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의롭다함을 받는 가운데, 천국을 소유한 자로 살게 된 것은 이 세상 그 어느 복보다도 큰 복임이 틀림이 없습니다.
용서받은 자. 죄사함을 받은 의인...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타이틀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죄문제는 완전히 해결된 것일까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서 진정으로 거듭난 영혼에게 "죄책감"은 있을 수 없는 것일까요? 신앙생활을 오래 할수록 자신의 죄인됨에 대한 고백이 점차 사라질 수 밖에 없을까요? 죄문제는 십자가에서 해결 되었으니, 이제는 다른 문제, 혹은 하나님을 믿는 긍정적인 면에 집중해야만 할까요?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은 "예"와 "아니오"가 동시에 답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죄책감"이라는 단어 때문입니다. 죄책감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율법의 정죄로 인한, 사망으로 이끄는 죄책감입니다. 이 죄책감은 사탄이 이용하는 죄책감이며, 이로 인해서 우리는 고통당하며, 결국 영원한 심판 가운데 처할 수 밖에 없는 죄책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율법에서 오는 정죄의 저주를 해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1-4)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은 정죄의 문제, 죄책감의 문제, 결국 죄문제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자유인--죄의 정죄로부터의 자유--입니다.
두번째 죄책감은 율법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이것은 다시 두 가지의 경우가 있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인이 죄에 노출되었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경고와 회개의 메시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마암아 죄로부터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인도 죄의 유혹에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그로 하여금 돌이키도록 말씀하십니다. 때로는 고통스러울 정도로 우리를 징계하시는 방법으로 말씀하시기도 하고, 때로는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모습으로 안타까와 하시기도 하는 모습으로 다가 오시기도 하지만, 그 목적은 하나입니다. 그것은 죄의 자리를 떠나서 아버지의 은혜의 자리, 거룩의 자리로 다시 돌아오라는 메시지입니다. 율법의 정죄에서 나오는 죄책감이 오히려 자신에 대해서 절망하게 하고, 자신을 책망하는 가운데 정죄의 사슬에 더 묶이게 함으로써, 더 확실한 마귀의 종이 되게하는 효과가 있다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정죄는 죄의 자리를 속히 떠나서 다시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나아오도록 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두번째는 내가 특별히 죄를 짓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 앞으로 점차 나아감으로써 생겨나는 죄책감(죄인식)입니다. 그것은 영적으로 더욱 성숙해 가는 가운데 빛이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때, 그 빛이 더 강렬해짐으로 인해서, 그 전에는 보지 못했던 내 자신의 죄된 모습을 보게 되기 때문에 생기는 죄책감입니다. 그전에는 빛이 약해서, 혹은 빛을 가리고 있는 부분이 있어서 드러나지 않았던 내 존재의 지저분한 모습들이 서서히 더 확실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런 죄책감은 영적으로 성장하지 않았다면, 결코 볼 수 없었던 것들, 그 전에는 결코 죄라고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서, 하나님을 더 깊이 경험하고, 그분을 더 알아감으로써, 이제는 죄라고 인식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죄인식은 나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더 확실하게 무릎을 꿇도록 인도합니다. 자신의 죄인됨을 인식할수록, 십자가가 위대해져 보이고, 그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사랑의 크기가 더 커보이고, 그런 나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위대해져 보입니다. 이런 죄인식은 나로 하여금 내 자신을 더 내려 놓게 하고, 주님을 붙들게 하며, 주님께만 소망을 두게하고, 따라서 보다 더 확실하게 주님의 종으로서 자신을 드리게 됩니다.
이런 죄인식은 내가 하나님을 더 깊이 경험하고 있다는 증거이며, 내 안에 생명이 있으며 자라고 있다는 증거이며, 내 영적 감수성이 더 발달하여 예민해져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믿음이란 역설의 연속입니다. 내가 그리스도께 종이 된 정도 만큼, 자유를 누립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어야만 생명이 내 안에 역사합니다. 내가 내 삶을 포기할 때, 진정으로 내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내가 쥐고 있는 모든 것을 내려 놓을 때, 진정으로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됨을 인식한 만큼, 내 삶은 거룩해져갑니다. 수많은 위대한 영적 선배들이 그들의 신앙이 성숙해 갈수록 자신의 죄인됨을 더 처절하게 고백하고, 죄와 더 치열하게 싸웠던 것은 그들의 삶에서 죄의 절대량이 많아져서가 아니라 바로 그들이 주님 앞으로 한 걸음씩 나아갔기 때문입니다. 그 가운데 그들의 삶은 더욱 정결해져가고, 더욱 거룩해져가는 것입니다.
영적인 성숙, 다시 말해 빛이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성장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주님 앞으로 불려갈 때까지 지속되는 과정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 "영원한 죄인"인 삶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진정한 축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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