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 은혜...

(교회 게시판에 제가 올린 글입니다.)

은혜란 무엇일까?
소위 "은혜받았다"는 말로 자주표현되는 그 은혜란 무엇일까?

'주일 예배에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이번 부흥집회 때 은혜를 꼭 받아야 하는데...'
'이번 설교는 은혜가 안 되네...'
'찬양을 부르며 충만한 은혜를 느꼈어요.'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은혜란 내 마음 속에 느끼는 어떤 좋은 감정, 특별한 감동, 감정적 고양, 혹은 맺혔던 것이 풀리는 것같은 '느낌'을 가리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배나 부흥집회, 찬양집회 등에 참석하면서 우리는 그 '은혜'를 기대한다. 찬양인도자나 설교자는 그 은혜라는 것을 '느끼게' 해 줄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기본 자세이며, 그 기대에 충족하는 설교자, 혹은 집회를 '좋은' 집회 혹은 설교자, 그렇지 않은 경우를 '좋지 않은' 혹은 '문제 있는' 집회 혹은 설교자로 간주한다.
이것은 비단 성도들 뿐만이 아니다. 설교자나 찬양인도자 또한 그런 관점에 사로잡혀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은혜를 '끼치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한다. 감동을 불러 일으킬만한 적절한 예화, 삶에 와 닿게 하기 위한 성경 풀이, 고민이나 걱정, 삶의 문제들에 대한 성경의 솔루션 등, 설교자는 그의 메시지가 각 사람에게 피부에 와 닿게 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소위 청중들이 '은혜'받은 듯한 결과가 나왔을 때는 '성공적' 설교라 자찬하고, 반응이 좋지 못할 때는 '실패한' 설교라고 스스로 자책한다.
이렇듯 모든 집회에서 '은혜'는 빠져서는 안되는 필수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은혜를 받기 위해 모이고, 은혜를 끼치기 위해 집회를 준비하고 인도한다. 

은혜가 중심이다.

그런데, 그렇게 중요한 그 '은혜'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감동'과 같은 것인가? 내 눈에서 눈물을 흘리게하는 그 어떤 것, 내 마음을 찡하게 하거나, 뭉클하게 하거나, 아니면 뭔가 회복되게 하는 그 어떤 '느낌'인가?
모두가 그렇듯 집회에서, 혹은 찬양이나 성경이나 기도를 통해서 기대하며 얻어낼 수 있는 그 어떤 것인가?
잔뜩 기대하고 참여했던 수련회에서 아무런 감동이나 특별한 느낌을 받지 못했을 때, 실망하며 그 '은혜'를 주시지 않은 하나님을 (적극적으로건 소극적으로건 간에) 원망하는 경우에서 보듯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의무가 있는 그 어떤 특별한 것인가?

성경적으로 볼 때 은혜란 주는 자의 뜻을 따라서 자격없는 자에게 값없이 주어진 (많은 경우 값비싼) 선물(혹은 좋은 것)이다. 은혜는 네 가지의 요소로 구성된다.
1. "주는 자의 뜻을 따라서"
은혜는 근본적으로 주는 자의 뜻에 달려 있다. 그것은 요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주는 자가 기뻐하는 대로, 주고 싶은 대로 주는 것이 은혜이다. 만약 그것이 의무가 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은혜가 아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은혜를 베푸는 기준은 "주는 자의 기뻐하는 뜻"이라는 것이다. 그 기준은 결코 강요될 수 없는 것이다. 기준이 강요가 될 때, 그것은 더 이상 은혜가 아니라 의무가 된다. 많은 경우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말할 때, 이 부분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마태복음 20장의 포도원 주인과 품꾼의 비유를 읽으면서 대부분 그 비유를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이유가 그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서 은혜는 은혜를 베푸는 자가 기뻐하는 뜻에 따르는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가르쳐 주신다. 몇 시간을 일했건 간에, 한 데나리온을 주는 것은 공평의 원리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원리를 따르는 것이라는 것이 이 비유의 핵심이다.
은혜는 하나님께 요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은혜를 주시지 않는 것에 대해서 원망하거나 서운해 한다면, 그것은 이미 은혜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처사이다.

2. "자격없는 자에게"
은혜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그것을 받는 자가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좋은 것을 받을 자격이 없는 자가 받는 것... 그것이 은혜다. 받을 자격이 있는 자가 받는 것은 보상이지 은혜가 아니다. 포도원 품꾼의 비유에서 제일 먼저 와서 일을 시작한 자들은 하루 종일 일했고, 그에 정당한 품삯인 한 데나리온을 받았다. 그것은 정당한 보상이다. 그것이 은혜가 될 수 없다. 물론 이 비유에서 그들이 선택되지 않았다면 할 일이 없이 놀았을 것이라는 사실을 고려할 때, 은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이 한 일만 놓고 본다면 처음와서 온 종일 일한 그들은 정당한 보상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그 외의 일꾼들은 한 데나리온을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한 데나리온을 준 것은 주인이 베푼 은혜이다.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자격도, 그분으로부터 좋은 것을 기대할 자격도 없는 자라는 것을 망각한다면, 나는 이미 은혜를 받을 수 없는 자인 것이다. 예배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 그 자체가 이미 은혜라는 것... 하나님의 존전에 설 수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전적인 긍휼이 아니면 있을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감사하는 자에게 예배에 참석하는 것 그 자체가 은혜이다. 그 자리에 있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그 특권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한 데나리온이 온전히 주어졌다는 것을 망각한 삼시, 육시, 구시에 온 일꾼들은 자신들보다 늦게 온 11시의 품꾼들이 자신들과 동일하게 한 데나리온을 받는 것에 대해서, 아니, 그들보다 자신들이 더 많이 받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분을 낸다. 그들은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은혜를 감사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처사에 대해서 '공평'하지 못하다고 항의하기까지 하는 가운데 자신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는 사라지고 만다. 그들에게는 은혜가 없는 것이다.

3. "값없이 주어진"
은혜는 값 없이 주어진다. 댓가가 없는 것이다. 포도원의 비유에서 모든 품꾼들은 일을 했지만, 포도원의 주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것은 불필요한 노동이었다. 사실상 첫번째로 불러온 품꾼들의 노동이 필요했을 뿐이다. 하지만 주인은 "장터에서 놀고 섰는 사람들"이 불쌍해서 그들에게 한 데나리온을 줄 구실을 찾기 위해서 그들을 고용했을 뿐이다. 그에게는 그들의 노동이 의미가 없었다. 따라서 그들의 일량에 관계 없이 그들이 하루를 살기 위해 필요한 한 데나리온을 준 것이다. 그것은 값없이 주어진 은혜였다. 하나님의 은혜는 내가 하나님께 뭔가들 드림으로써 주어지는 반대급부의 보상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자격이 없고, 무가치함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 은혜에 보답할 아무런 능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것이 은혜이다.

4. 선물(혹은 좋은 것)
은혜는 좋은 것이다. 한 데나리온은 당시 품꾼들이 하루에 벌 수 있는 임금이었고, 그것으로 인해 가족이 하루 동안 살아갈 수 있는 금액이었다. 그것은 그들에게 생명이었다. 주인은 그것을 주기 원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신다. 다만, 그 '좋은' 것이 내가 판단하는 것과 다를 때가 많다는 것이 문제이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최선의 것으로 주신다. 그것으로 나를 바른 길로 인도하시고, 내가 생명을 더 누리도록 하시고,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하시고, 경험하게 하신다. 
하지만 나는 내 '필요'가 우선이다. 내가 부족한 것을 채우는 것, 아픈 곳이 낫는 것에 더 관심이 있다. 내 좁은 소견과 경험에 비추어 좋은 것을 하나님께 요구한다. 하지만 우리가 너무 잘 알듯이, 만약 하나님께서 내가 원하시는 대로 '좋은' 것을 주신다면, 내 인생이 얼마나 엉망이 될 것인가? 그분은 전능하신 분이고 전지하신 분이다. 나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너무 잘 아시는 분이시다. 그분께서 나를 위해 주시는 것은 그것이 내 마음에 들던지 그렇지 않던지 간에 기뻐하고 감사해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은혜는 내가 느끼는 어떤 좋은 감정이나 감동이 아니다. 그것은 자격없는 자, 자신이 은혜의 대상조차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 자, 그래서 하나님 앞에 겸손할 수 밖에 없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 차원에서의 좋은 선물을 누리는 것이다. 

인류의 역사상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의 최고봉, 은혜의 결정체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그것은 형언할 수 없이 흉악한 죄인인 나, 아무런 자격이 없는 나를 살리시기 위해서 하나님 당신이 직접 이 땅에 오셔서 모든 고난을 받으시고, 내가 죽어야 할 끔찍한 십자가의 형벌을 대신 받으심으로 나를 살리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 구원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따라서, 아무런 자격이 없는 나에게, 값없이 주신, 하나님과 인간 편에서의 가장 비싼 댓가를 치른 선물인 것이다. 자신의 죄인됨(죄성) 때문에 하나님 앞에 고개를 들지 못하고 긍휼만을 바라며 나아가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긍휼... 죽어 마땅한 죄인, 탄식하며 애통해하는 자를 품으시고 살리시는 그분의 사랑...

그것이 바로 은혜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볼 때마다 은혜의 감동이 없다면, 십자가를 통해서 무한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느끼지 못한다면, 그 어떤 것에서 은혜를 느낄 수 있겠는가? 그 어떤 것에서 은혜를 찾을 수 있겠는가? 

예배를 통해서, 설교를 통해서, 찬양을 통해서 내가 구하는 은혜가 바로 그 십자가의 은혜인가?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와 무릎꿇고 고개를 숙이며 은혜 받을 자격이 없는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는 간절한 마음을 들고 나아오는가?

그것이 진정으로 은혜받는 자의 자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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