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탄생 때부터 오해 가운데 이 땅에 오셨고, 오해 가운데 사셨고, 그 오해 때문에(물론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이지만) 죽으신 분이시다.
동방박사들로부터 유대인의 왕의 탄생에 대해 전해들은 헤롯과 예루살렘은 "소동"했다. 왜 그랬을까? 당연히 왕이 나셨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안다. 유대인들이 그토록 기다려왔던 메시야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왕, 즉 메시야는 어떤 존재인가?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줄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 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마 2:16)
헤롯은 왜 탄생하신 메시야를 죽이려고 했을까? 그것은 그가 "왕"으로 오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그 "왕"이라는 단어를 정치적으로 해석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왕권을 무너뜨리고, 자기 대신 왕으로 군림할 메시야를 두려워 했던 것이다. 그래서 아예 그럴 가능성부터 없애버리고자 수 많은 아이들을 죽이는 잔학한 일을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헤롯왕만 그랬을까? 사실 누가복음에 나오는 극소수의 선지자급 신앙인들을 제외하고는 (혹은 그들조차도) 이 땅에 오신 왕인 예수 그리스도를 정치적인 왕으로 받아들이려 했다. 수 많은 이적들을 통해서 병자들을 고치는 것은 그가 메시야라는 징표가 되었을 뿐 아니라, 가난과 억압에 고통스러워하던 민중들에게 더 나은 세상을 약속하는 확증으로 받아들여졌다. 빈들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을 때,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민족이 그토록 기다리던 다윗과 같은 번영을 약속하는 하나의 결정적인 징표로 여겨졌다. 민중들은 예수를 왕으로 모시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그와 함께 군대를 결성하여 로마를 무너뜨리고 자주독립국가, 경제, 군사, 정치적으로 막강한 위대한 이스라엘 재건의 꿈을 이루고자 했다.
반면, 정작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정치적 메시야로 해석되는 것을 철저히 경계하셨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을 때, 몰려드는 군중들을 향하여 그들이 예수님을 완전히 오해하고 있음을 분명히 밝히셨다. 기적을 행하면서도 당신 자신의 정체성인 메시야됨을 드러내는 것을 극히 꺼리셨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향하여 환호하며 경배하는 자들 가운데서 곧 무너져 완전히 파괴될 예루살렘과 성전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셨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과 민중들의 처참한 상황에 관심이 전혀 없으셨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분은 치유하셨고, 먹이셨고, 곤고한 그들을 가르치심으로 바른 길로 인도하셨다. 하지만 그것은 예수님의 주요 관심사가 아니었다. 당신 자신을 향해 몰려드는 민중들을 보며,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같이 유리방황하는 것을 안타까와 하셨다. 그들이 죄 가운데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과 분리된 처참한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을 가슴 아파 하셨다. 사회적으로 공인된 죄인들이 있는가 하면, 겉으로는 거룩한 척하면서 내면의 흑암 가운데 썩어들어가는 자아로 고통하는 죄인들도 있고, 양심에 화인맞아 아무런 감각이 없이 살아가는 죄인들도 있는, 모두가 죄인인 이 세상을 향하여 아픔을 가지고 계셨고, 그 죄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가신 분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것은 바로 당시 이스라엘 민중들의 정치적 메시야에 대한 갈망을 채워주지 못하는 예수에 대한 분노와 실망이었다. 그들을 끝끝내 그것을 포기하지 못한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지 2000년이 지난 지금... 당시 민중들이 갈망하던 정치적 메시야에 대한 기대는 포기 되었는가? 많은 에큐메니컬 진영의 운동들과 일부 교단이 추구하는 진보적 사회운동화된 기독교에서 추구하는, 혹은 표방하는 예수는 어떤 존재인가? 그 예수의 이미지를 예수님께서 기뻐하시고 만족하실 것인가? 물론 예수님께서는 사회정의와 사회적 약자의 복지에 대해서 지대한 관심을 보이시는 분이시다. 하지만 그것이 예수님께서 중점을 두셨던 것인가? 성경이 보여주는 예수님이 바로 그런 모습인가?
진보진영뿐만 아니라, 보수진영, 그리고 복음주의 진영에서의 예수는 어떤가? 이 땅의 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친히 육신을 입고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구원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가 충분히 인정되고 있는가? 개인주의화 되어버린 신앙, 물신주의, 기복주의, 평화와 번영을 추구하는 신앙의 모습은 축소화되고 변형된 "정치적 메시야관"이 아닌가? 정치적인 메시야로서 민중들의 삶의 질을 높이고, 이스라엘 민족의 민족적 자부심을 고취시키는 것이 당시의 소망이었다면, 개인의 삶의 질을 높이고, 잘 살고, 평안하며, '예수를 믿으니 모든 것이 잘 된다'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며 예수를 좇아가는 것... 그것이 현대판 정치적이 왕으로 오신 예수를 모시는 모습이 아닌가?
예수님에 대한 오해... 그것은 사실상 예수님께서 탄생하시기 전부터 이미 형성되어 있던 것이며,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을 때, 그리고 그 이후 이천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 가운데 살아 있는 일종의 우상숭배이다.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바로 그 오해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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