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알아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관대 저를 생각하시나이까? 사람은 헛것 같고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으니이다!"(시 144:3-4)
시편 기자의 이 탄식이 곁들여진 감탄은 하나님을 아는 자들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흘러 나올 수 있는 고백이다. 그것은 자신의 보잘 것 없음을 잘 아는 지식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하나님의 크심과 위대하심에 대한 지식에 더 그 기반을 두고 있다.
나는 보잘 것 없는 자이고, 흉악한 자이다. 내가 어떤 자인지를 더 분명하게 아는 것은 믿음에 큰 도움이 된다. 하지만, 그 지식에는 한계가 있다. 그것은 자신의 가치가 0를 향해 한 없이 수렴해 가는 것을 실제로 느끼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시편 기자의 진정한 고백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그 경험에서 나온다. 그분의 가치, 그분의 크기가 무한대로 수렴해 가는 것을 진정으로 깨닫고 경험하게 될 때, 그 분이 나를 "생각하시고" "알아주시는" 것이 얼마나 있을 수 없는 일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사실,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없어지고 모든 지식이 폐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시작되어도 결코 그치지 않는 것은, 아니 천국에서도 영원히 지속될 우리의 "일"은 위대하신 하나님을 더 알아가는 일이다. 그일은 영원을 지속한다 하더라도 결코 끝이 날 수 없는 것이다. 그만큼 하나님은 크고 위대하시기 때문이다.
사실 시편 144편은 위대하신 하나님에 대한 고백으로 시작한다. "나의 반석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로 시작한 시편은 "여호와는 나의 인자(lovingkindness)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의 산성이시요, 나를 건지는 자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피난처시요, 내 백성을 내게 복종케 하시는 자"라고 고백하고 있다. 그것은 그의 삶 가운데서 경험한 위대하신 하나님에 대한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고백인 것이다.
위대하신 하나님을 만난 모든 인간은, 그 앞에서 자신의 보잘 것 없음을 본다. 그리고 그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다. 마치 베드로가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할 수 밖에 없었던 것처럼...
그런 성스러운 조우(holy encountering)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핵심인 것이다. 그런 조우가 있는 자들은 하나님 앞에 고개를 뻣뻣이 들고 있을 수가 없다. 그분 앞에 늘 엎드리며, 그분의 은혜와 긍휼만을 구할 뿐이다. 그분께 자신의 욕구와 욕망을 내세우지 않고, 그분의 뜻이 이 땅 가운데 이루어지는 주의 기도를 자신의 기도로 삼는 것이다.
그런 자들은 위대하신 하나님의 엄청난 능력을 경험하게 된다. 대적을 흩으시며 파하시는 장수이신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고, 환란 가운데서 나를 구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런 자들이 바로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인 것이다. 그리고 시편 기자는 목소리 높여 외친다.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하나님을 아는 진정한 지식이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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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1:08: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