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You have heard that it was said, ‘An eye for an eye and a tooth for a tooth.’ [39] But I say to you, Do not resist the one who is evil. But if anyone slaps you on the right cheek, turn to him the other also. [40] And if anyone would sue you and take your tunic, let him have your cloak as well. [41] And if anyone forces you to go one mile, go with him two miles. [42] Give to the one who begs from you, and do not refuse the one who would borrow from you. (Matthew 5:38–42 ESV)
언젠가 TV에 출연한 전직 대법관의 말이 내 가슴 속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 그분은 민사소송 전문 판사로서 대법관까지 오른 탁월한 분인데, 그분의 말이 민사소송에서 내가 조금 손해봤다고 느낄 때가 객관적으로 양측이 공평한 지점이라는 것이다. 내 측에서 볼 때 손해도 아니고 이익도 아니고 그냥 평균정도의 결과를 가져오는 판결이라면 상대측에서는 상당히 손해를 본 불공정한 판결이라고 느낀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공평한 판결을 했을 때 양쪽에서 느끼는 것이 x값의 손해라면, 한쪽이 평균정도의 결과라고 느낄 때 상대편은 원래의 x에 더하여 상대가 당연히 느꼈어야 할 또 다른 x만큼의 부당함을 느끼게 되어 2x의 손해를 본 것으로 느낄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매우 손해봤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분의 말은 나로 하여금 기독교인을 대하는 사회의 평가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더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기독교인이 아니라 하더라도 상대와 갈등해결 시 약간 손해봤다는 느낌을 주는 결과가 객관적으로 볼 때 양측에 공평한 결과라고 할 때, 이 사회가 오래 전부터 가져온 종교인, 특히 기독교인에 대한 기대가 더해지면 어떨까? 비기독교인들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의 가르침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파편적으로나마 주워들어서 아는 것이 있고, 또한 종교인 일반에게 가지는 의도치 않은 기대감은 양측의 갈등 상황에서 상대인 기독교인에서 더 큰 희생을 기대하는 마음을 자연스럽게 갖게 만든다. 따라서 이런 경우에 내가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x값 만큼이 아니라 x+y(혹은 xy)값 만큼 추가로 손해를 봤다고 느낄 때 조차도 상대는 x값 만큼 손해봤다고 느낄 공산이 크다. 일반 상황에 비해서 나에게 덤으로 부과된 y값 만큼의 손해감은 기독교인인 나에 대한 상대의 기대치의 크기이다. 기대가 크면 y값이 커져서 나에게는 손해감이 그만큼 더 커지지만, 상대는 그것이 당연한 것으로 느껴져, 오히려 본인이 x만큼 손해 봤다고 여기는 것이다.
여기서 내가 교회의 일반 평신도가 아니고 목사, 장로, 안수집사 등의 직책을 맡고 있는 사람이라면 y값은 평신도에 비해 매우 커질 수 밖에 없다. 그런 경우에는 내가 매우 매우 큰 손해를 봤다고 하더라도, 상대는 여전히 자신이 x만큼 손해봤다고 느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일반 평신도, 더구나 교회 직분을 가진 사람이 상대방으로 하여금 이익을 봤다고 느끼게 하지는 못하더라도 손해보지는 않았다고 느끼게 하려면 2x+y(혹은 2xy)만큼의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큰 손해를 감수하는 것도 비기독교인들에게 그저 간신히 욕을 얻어먹지는 않는 정도일 뿐, 그들로부터 칭찬을 듣거나 존경을 받을 수는 없다. 만약 긍정적인 평가를 얻기 위해서는 거기에 +a의 추가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 +a의 크기와 긍정적인 평가가 비례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것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기독교인의 갈등 공식이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장에서 악한 자에게 저항하지 말고 오른뺨을 맞으면 왼뺨을 갖다대고, Tunic을 뺏으려 하면 Cloak도 주라고 하신 이유는 바로 이런 세상의 공식을 생각하셨기 때문이 아닐까? 세상(악한 자)으로부터 매우 큰 부당함을 받는다고 느끼는 것은 기독교인이고, 그들이 그렇게 느꼈을 때 최대한 손해를 감수할 각오를 해야 한다고, 그래도 세상의 좋은 평을 듣지 못할 때가 많겠지만, "개독교"라 욕은 얻어먹지 않을 수 있고, 예수님의 존함과 얼굴에 먹칠하지 않는 기독교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기독교인의 갈등 공식이 이럼에도 불구하고, 사회 생활을 하면서 목사와 장로, 안수집사들을 포함한 기독교인들은 손톱만큼도 손해볼 생각이 없어 보이고 당연히 감수해야 하는 x 정도의 손해를 봤다고 느낄 때는, 세상의 모든 십자가를 자신 혼자 지고서는 성인(聖人) 수준의 대단한 믿음을 가진 자인 양 호들갑을 떤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에는 털끝 만큼의 희생을 감내하려 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들이 자신의 것을 챙기기는 과정에서 상대에게 최대한의 손해를 떠넘기려 하는 시도 가운데 보여주는 추태의 정도가 세상 사람들보다 월등히 더 크다는 것을 많이 경험한다. 그리고 그런 추태는 목사를 비롯한 소위 교회의 지도자들일수록 더한 경우가 많다. 기독교인들이 그저 일반 비기독교인들 정도의 양심만 가져도 정말 고마울텐데, 그들보다 양심이 턱없이 부족하고, 거기에 더해 성경이나 자신의 신앙지식으로 자신의 더러운 추태를 미화시키고 정당화하는 것은 정말 탁월하다. 그것으로 인해 양심은 화인을 맞았고, 얼굴을 철판을 깔아 온갖 추악한 짓을 다 하면서도 거룩한 척, 목사요, 장로요, 안수집사, 기독교인으로 대접은 다 받으려고 고개를 뻣뻣이 들고 다닌다.
그런 그들은 자신들이 바로 "개독교"라는 세상의 평가를 유발하는 주요 장본인들이며, 자신들이 우리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땅에 내동댕이 치고, 예수님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자들이라는 것을 신경이나 쓸까? 그저 끝없는 욕망과 욕심의 노예가 되어 기독교와 예수를 방패와 부적 삼아서 세상을 향해 흔들어 대며, 자신들은 종말에 임할 하나님의 엄위하신 진노를 피할 수 있는 면벌부를 받은 듯 이 세상에서 득세하고 저 세상에서 천국의 특권을 누리겠다고 가없는 영적 탐욕의 더러운 수렁에 뒹굴거리는 돼지같은 존재들일 뿐이라는 것을 그들은 알까?
Everyone to whom much was given, of him much will be required, and from him to whom they entrusted much, they will demand the more. (Luke 12:48b ESV)
예전에는 멋모르고 교회에서 여러 직분을 맡았었지만, 요즘은 교회에서 지도자 혹은 직분자에게 주어지는 무게가 너무 두렵기 때문에 '서리집사'를 포함한 일체의 직분을 거부하며 지극히 작은 평신도로 살아간다. 그리고 그 평신도의 무게도 너무 버거워 하나님께 그 무게를 견딜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그리고 언젠가는 2x+y+a(혹은 2xya)의 손해, 혹은 그 이상의 무게도 감당할 만한 겸손과 희생과 순종과 결단을 달라고 기도한다.
진정... 절대로 절대로 내 눈 앞에 보이는 수 많은 영적 돼지들과 같이 되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