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묵상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그들을 무서워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보다 먼저 가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 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신 1:29-31)

오늘 아침 묵상 말씀이 하루 종일 머리를 맴돈다.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약속을 받으면 좋아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지금 내가 처한 현실에서 하나님께서 그런 약속을 하신다면, 감사가 넘치고 모든 근심걱정이 사라질 것같은데...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정작 이 말씀을 받은 60만의 성인 남자들 가운데 그 말씀을 문자 그대로 믿었던 사람은 이 말씀을 전한 모세 외에 단 두 사람 뿐이었다는 사실. 지금 내가 그 때의 그 사람들과 특별히 다르지 않다고 했을 때, 이 말씀을 철저하게 신뢰할 확률은 60만 분의 2에 불과한 것. 그만큼 말씀을 받고 믿음으로 화답하기가 힘들다는 것 아닌가?

사실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은 약속 하나 뿐이요, 눈 앞에 보이는 것은 거대한 아낙 자손들이 지키고 있는 훨씬 발전된 문명. 사실 거기에 비하면 원시 유목민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이스라엘은 그들이 평가했던 것처럼 메뚜기에 불과한 것. 현실과 하나님의 약속 사이에서 나는 분명히 그들과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신명기의 이 말씀이 간절히 필요한 현재의 상황에서 오히려 이 말씀은 내 안에 하나님에 대한 믿음없음을 드러내 보여준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다른 사람들과 달랐던 것은 같은 것을 봤지만, 그들이 보지 못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그 그림에서 겹쳐서 봤던 것. 메뚜기 같은 자신들과 거대한 산과 같은 적들만 있는 그림이 아니라, 우주를 창조하시고 그 산들을 창조하신 위대한 하나님이 그들의 그림에 존재했던 것. 그것이 그들을 담대하게 했다.

60만 분의 2. 결국 불가능하다는 것. 인간으로서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그 철저히 타락한 본성 상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필요하고, 그분의 십자가가 필요하고, 성령의 역사가 필요한 것같다. 하나님께서 내 죄악된 자아를 십자가에서 처리하시고, 내 안에 거주하시면서 그 분의 능력으로 나를 믿음과 신뢰로 이끌지 않으시면, 나는 그분을 결코 믿을 수 없는 존재인 것. 심지어 구원을 받은 이후에도 하나님으로부터 세상으로 튕겨져 나가려는 죄성을 완전히 처리하지 못해 그분이 직접 잡아주지 않으시면, 은혜의 궤도로부터도 이탈할 수 밖에 없는 형편없는 존재라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죄악된 나를 본다. 그리고 그런 나를 은혜로 강하게 붙드심으로 믿음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본다.

그저... 감사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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