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6:1

"여호와여 주의 분노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오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시편 6:1)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 기도이다. 시편 6편에서 시인은 자신의 죄악과 허물로 인해 탄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고통받는 가운데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전체적인 논조는 자신의 허물보다는 자신에게 위해를 가하는 적들의 악으로 인해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6절)라고 탄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10절에 그가 선포하는 것처럼 "내 모든 원수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떪이여 갑자기 부끄러워 물러가리로다!"(10절)이라고 선포함으로 악인들에 대한 심판을 부르짖으며 그의 기도를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책망하지 마시오며",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라고 하는 것일까? 시인이 책망받고 징계받을 만한 것이 뭐가 있길래?
동일한 저자인지는 잘 모르지만, 이 시편은 5편의 연속선상에서 볼 때 이해가 될 수 있다. 5장에서 시인은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직접 복수를 하지 않고 하나님께 나아가 경배함을 노래한다. 그것은 악을 그냥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동일한 악으로부터 지킴과 동시에 그들에 대한 심판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다. 6편에서도 동일한 믿음을 보여준다. 본문 후반부에 노래하듯이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으셔서 그들을 징계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견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 나아가고 하나님의 개입을 바라는 시편 기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께 나아가는 자신을 받아 주실 것인가와 자신의 편이 되어서 대적들을 심판하실 것인가이다. 그것은 단순히 자신이 그분께 나아가는 것, 그리고 자신의 대적이 악하다는 것만으로 자동적으로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이고, 그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죄악이며 허물이다. 그것은 사람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에 대한 것이다.
시인은 자신 또한 하나님의 징계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알고 그것을 두려워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징계 중 가장 무서운 것이 그냥 내어버려두심임을 알고 하나님께 그런 징계를 내리지 말아달라고 청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자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하나님께서 아무 것도 하지 않으시는 것 아닐까?
사실, 내가 어떤 환경 가운데 있건 간에, 그 환경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내 모습이다. 내가 수 많은 대적 가운데 둘러 싸여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과 내가 사랑의 관계 안에 있다면, 두려울 것이 없는 것이다. 반면, 아무래 내가 세상적으로 잘 나간다 할지라도, 혹은 스스로 의롭다 생각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가 확실하지 않다면, 정말로 두려워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영이신 성령님은 나에게 큰 위안이 된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성부 하나님과 나 사이의 중보자가 되시며, 성부의 진노를 받아 마땅한 나를 위해 중보하시며, 그 관계를 사랑의 관계로 맺어 나가시기 때문이다. 사실, 그리스도가 아니었다면, 내가 악인들을 처벌해 달라고 기도를 할 수 있을까? 내 자신이 악인 중 괴수인데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바랄 수 있으며, 그것 때문에 나에게 가해지는 세상의 악에 대해서 악으로 갚지 않고 하나님께 맡기며 초연하며 어느 정도 평정심을 유지하는 가운데 선으로 악을 이길 수 있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특권이다. 그저... 감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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