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같은 예수님...

부활하신 예수님은 왜 부활후 바로 승천하시거나, 아니면 전과 같이 제자들과 함께 하시지 않고 가끔씩 그들 가운데 나타나기만 하셨을까?

이유야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나는 여기서 어머니처럼 자상하신 예수님을 본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은 예수님의 지상사역의 매듭이었고, 그 이후의 사역은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의 사역이며, 그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은 교회의 사역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적어도 마지막 때까지는 전에 계시던 방식으로 이 땅 가운데 계시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어린 새끼를 두고 둥지를 떠나지 못하는 어미새처럼, 예수님은 지상에 남겨진 제자들을 권념하시고 그들을 도우신다. 예수님과 함께 하지 않고 보혜사이신 성령과 함께 해야하기 때문에 그들과 늘 같이 계시지는 못하지만, 그들에게 종종 나타나셔서 그들의 믿음을 도우신다. 성령강림의 그 날까지 예수님께서 그들을 붙들고 도우시는 것이다.

특히 베드로에 대하시는 예수님의 태도는 참으로 온유하며 자상하다. 가룟인 유다만큼이나 예수님께 죄를 범한 베드로. 마음은 예수님과 함께 하고 싶었지만, 육신의 연약함으로 두려움 가운데, 예수님과의 관계를 완전하게 (= 세 번) 부인했던 그가 예수님께 가진 무거운 죄책감과 그 스스로에게 가졌을 자괴감으로 깊은 고통 가운데 있었던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한 번도 직접적으로 그를 책망하지 않으실 뿐 아니라 그 일 자체를 언급하지도 않으신다. 다만 그에게 나타나시며, 당신의 살아계심과 하나님되심을 드러내 보여주실 뿐이다. 그가 믿음을 일고 자포자기하는 가운데, 그를 짓누르는 죄책감 속에서 유다처럼 자살을 하거나, 아니면 믿음을 포기하고 떠나버리지 않도록 그를 붙잡아 주신다. 방황하는 베드로의 영혼이라는 배의 닻(anchor)이 되어 주셔서, 그를 도우신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그를 먹이시며, 세 번(= 완전하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시면서 그의 마음 중심에 자리잡은 죄책감과 자괴감을 꺼내어 치료하신다. 온유함 가운데 묻어나는 베드로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 그것이 바로 베드로를 치유하였고, 나중에 성령강림으로 인해 그리스도의 위대한 제자로 성장하게 만든 것이다.

내 인생을 살면서 베드로보다 훨씬 더 큰 죄악으로 예수님을 부인하고 대적한 적이 있다. 변명을 하자면 여러가지로 변명할 수 있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어버린 그 일들은 나를 늘 짓눌러 왔다. 하지만, 베드로와 제자를 대하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참 감사드리게 된다. 예수님은 당장 죽어 마땅한 나를 참으시고, 기다리시고, 먹이시고, 그리고 온유함으로 내게 말씀하신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대답은 정해져 있다. 그리고 그것으로 회복의 역사가 일어난다.

어머니같이 자상하고 온유한 예수님의 사랑. 정말... 놀랍고 감사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