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시대의 기독교

 코로나(COVID-19)로 인해서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온 세계가 고통을 겪고 있다. 21세기가 들어서면서 새로운 세기에 대한 전망 중에서 두 가지가 눈에 띄였는데 한 가지는 바이러스와 박테리아에 의해서 인류가 큰 위협을 받을 것이라는 전망과 21세기는 종교의 세기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었다. 적어도 전자는 이미 현실로 드러났고(앞으로 더 독한 것들이 와서 인류를 위협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후자는 예상치 못한 의미에서,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일부 맞아들어가고 있다.

최근 광화문에서 있었던 집회의 주축이 사랑제일교회이고 그 교회의 담임목사인 전광훈 목사가 중심을 이룬 (건전하지 못해 보이는) 보수단체들의 집회가 있은 후 코로나 사태가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개신교의 이름으로 자행된 집회 참가자들과 그들의 리더들의 행태는 나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의 분노와 반감을 자아내고 있다. 정부는 이들의 무모함과 위험한 행동에 대처하느라 너무나 많은 수고를 하고 있다.

이런 개신교 일부의 행태를 보면서 대부분의 교회와 리더들, 교인들은 그들에 향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심지어 손가락질하고 비난을 서슴지 않는다. 마치 "그들"과 "우리"는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하지만 조금만 더 들여다 보면 그 둘이 결코 다르지 않은 한 몸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며칠 전 대통령과 회동을 한 소위 개신교 리더들이라고 하는 자들의 일부가 정부의 방역 방침을 반대하는 듯한 목소리를 내고 자신들을 사업자 취급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한 좋은 예인 것이다. 코로나 상황이 얼마나 엄중한 상황이고, 자신들의 종교 집회 행위가 이웃과 사회에 얼마나 큰 해를 끼칠 것인지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이기적인 기독교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개신교 교회와 교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정부의 방역지침을 잘 따르면서 협조하고 있다. 그리고 문제 많은 개신교에 대해서 개혁의 목소리를 꾸준히 내는 사람들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광화문 집회 참가자들이 독버섯과 같은 존재들이라면, 한국의 평균적 교회의 풍토가 그 독버섯이 잘 자랄 수 있는 토양을 제공했다는 것이 내 의견이다. 이런 면에서 "그들"과 "우리"를 나누면서 한 발 빼려고 하는 교회 지도자들과 교인들의 행태는 꼬리자르기식의 대처일 뿐, 언제든지 제2, 제3의 광화문 집회자들을 양산할 수 있다. 개신교는 그들의 모습의 자신의 민낯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받아들이고, 철저한 자기개혁을 시작해야만 독버섯이 자랄 수 없는 토양으로 완전한 기경이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기존의 개신교회의 어떤 특징들이 이런 독버섯이 자랄 토양이 되었는가? 첫번째는 반지성주의이다. 이 전의 글에도 강조한 것으로 기억하는데 루터의 종교개혁의 핵심 중 하나는 성경이다. 성직자만 읽을 수 있었던 성경을 일반 성도들에게 돌려주는 것, 그래서 그들이 성경을 직접 읽고 묵상하고 연구하도록 하는 것이 종교개혁의 핵심 중 하나다. 하지만 현재의 개신교인들 중에서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은 물론 읽기라도 하는 사람은 찾아 보기가 매우 드물다. 교회는 그것을 강조하지 않으며 많은 경우 오히려 그들을 성경으로부터 떼어놓는다. 그저 목회자가 설교를 통해서 전하는 것 정도면 충분하다고 여기게 만든다. 여기에는 교인들을 목회자에게 의존하고 종속되게 만들고자하는 매우 불순한 의도도 숨어있다고 확신한다. 성경을 열심히 읽는 성도들은 교회 안에서 목회자에게 매우 부담스러운 존재이며 그들이 성경을 바탕으로 목회자에게 반대하거나 반발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오히려 성경에 대해서 철저하게 무지한 가운데, 목회자의 말을 하나님의 말로 여기고 무조건 "순종"(나는 맹목적인 추종이라고 부르고 싶다)하는 교인들을 선호하기에 성경은 이미 대부분의 일반 성도들로부터 멀어져 있다. 따라서 그들은 성경을 기준으로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자신의 판단이 없고 목회자가 옳다고 말하는 대로 끌려가게 되어 있다.

반지성주의는 일반 성도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요즘 신학교에 진학하는 사람들이나, 신학교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이 가지는 지적인 열등감(혹은 열등함)도 큰 몫을 차지한다. 목사나 신학생들이 지적으로 매우 무식하다. 최근 지적 흐름에 대해서 토론하거나 반박할 능력을 가진 자들이 몇이나 될까? 많은 경우 그들은 지적으로 성숙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 그리고 소위 "목회활동" 중심이기 때문에 앉아서 성경을 깊이 연구할 틈도 없고, 노력도 하지 않는다. 성도가 무지하기 때문에 목회자가 어느 정도 무지하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교인들은 설교 단상에서 선지자적 목회자를 좋아하지 않고 엔터네이너를 더 사랑한다. 입담 좋은 이야기꾼에게 귀를 기울이지 죄와 회개를 지적하는 통렬한 설교는 부담스러워 한다. 따라서 많은 목회자들은 지적인 성숙과 성경연구에 노력과 시간을 투자하지 않는 가운데 자신도 반성주의적 존재가 되어간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 처한 교회가 한국에 얼마나 많은가?

두 번째는 앞에서도 설명했듯, 목회자에 절대복종하는 교회 풍토, 그리고 수많은 교회 프로그램으로 성도들을 교회 중심으로 이끌어 들이는 교회의 행태, 이런 원인에 성경에 대한 무지를 더해 초래되는 교회 안에서의 생활과 교회 밖에서의 생활이 철저히 분리되어 있는 이런 상황이다. 개신교, 특히 장로교에서 목사는 장로들 중 한 명일 뿐이다. 장로들의 역할이 나뉘는데, 그 중에서 설교와 목회를 담당하는, 조금은 특별한 장로일 뿐이다. 하지만 현대 한국 교회에서 담임목사(다른 목사는 거의 무시된다)의 역할을 거의 하나님 수준이다. 담임목사에게 하는 것이 하나님에게 하는 것과 같다는 무언의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 (성경 어디에 그런 가르침이 있는지 모르겠다. 내가 아는 바로서는 내 주위의 작은 자에게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에게 하는 것이라는 가르침은 분명히 있다. 담임목사가 그 "작은 자" 그룹에 속하는지는 심히 의심스럽다.) 무지한 교인들이 담임목사를 하나님처럼 떠받드는 가운데 담임목사가 아무리 비이성적이고 불법적인 행위를 한다고 하더라도 교인들은 그를 따라간다.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크고작은 목회자의 비리와 부정과 불법을 교회가 떠안고 가는 것도 그 때문이다. 성도를 목회자의 추종자로 만들기 위해 교회는 많은 프로그램들을 돌리며 교인들을 교회 안에 묶어두려고 한다. 개신교의 교인은 세상에 파송받은 작은 목회자/선교사들이다. 그들이 있어야 할 곳은 교회가 아니라 세상 한 가운데이며, 거기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향기를 전하며 세상사람들을 섬기는 자들이다. 하지만 교회는 그들을 교회로 불러들이고 묶어놓는다.

세 번째는 교회의 정치 성향이다. 미국의 보수교회와 마찬가지로 한국의 교회는 기본적으로 보수주의다. 교회가 보수적인 것은 문제가 없다. 보수적인 것과 보수주의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한국의 교회는 보수적인지는 모르겠지만 정치적으로 편향된 것은 사실이다. 모든 교회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정치적이며, 정치적으로 특정 당, 특정 정치세력과 과도할 정도로 결탁되어 있다. 해방 전 우리나라 기독교의 중심이 평양이었고, 북쪽이 강했었는데, 공산화되면서 북한의 교회가 이루 말할 수 없는 잔인한 탄압을 받았고, 그 악몽같은 경험을 가지고 남쪽으로 내려온 기독교인들이 공산당에 대해서 반감을 가지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점에서 북한 공산당이 잘 한 것은 하나도 없다. 문제는 그런 경험과 박정희 시대에 권력과 결탁한 교회 지도자들의 결국 정치적으로 편향된 교회를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다. 교회가 세상의 모든 일을 판단하는 유일한 잣대는 성경이어야 한다. 보수주의나 진보주의가 아니라 성경주의여야 하며 성경적이어야 한다. 성경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은 때로는 극진보주의적인 모습도 보일 수 있고 극보수의 모습도 보일 수 있다는 말이다. 성경은 결코 진보주의이기만 하거나 보수주의이기만 하지 않는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하나님적일 뿐이다. 진보주의가 하나님적인가? 보수주의가 하나님적인가? 그런 면도 있고 그렇지 않은 면도 있다. 교회가 할 일은 성경을 중심으로 보수주의이건 진보주의이건 통렬하게 비판하는 선지자적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하지만 개신교는 그런 중심을 잃어버리고 보수주의라는 색안경을 끼고 세상을 바라본다. 성경 이전에 보수주의라는 정치색깔이 먼저인 것으로 적어도 나는 본다.

이 외에도 지적할 것은 정말 많다. 일부 목사들이 대통령에게 교회를 사업장 대하듯 하지 말라고 했다지만, 나는 현재 정말 많은 개신교 교회들이 영적 장사를 하는 사업장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개신교 일반 교인들 뿐만 아니라 목사와 장로, 집사들의 도덕적 감수성이 사회일반의 평균 이하인 경우도 허다하다. 사회의 등불이 아니라 수치가 되어버린 목사, 장로, 집사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지만 여기까지만 하련다. 코로나 사태로 개신교에 대한 국민의 이미지는 매우 부정적이 되었다. 교인들 중에는 이것이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나는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교회가 뿌린 씨를 정직하게 거두고 있는 것 뿐이며, 교회가 철저하게 반성하고 회개하고 갱신해야만 하는 이유를 보여주고, 오히려 원동력이 된다고 믿는다. 만약 개신교가 이를 등한시 한다면, 개신교는 결코 다시 일어서지 못할 것이다. 양적 팽창은 있을 수 있겠지만, 질적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은 요원해질 것이다. 솔직히 나는 개신교의 갱신 가능성에 대해서 매우 낮게 보고 있고, 루터가 했던 것과 같은 또 한번의 종교개혁이 있어야 할 것으로 보이고, 나는 그런 새로운 종교개혁에 기꺼이 동참할 생각을 가지고 있다.

개신교여! 무지에서 벗어나기를... 비둔해진 거대한 공룡같은 상태에서 벗어나길...

나는 잠재적인 성범죄자다 & 당신 잘못이 아니다(박원순 서울시장의 죽음을 애도하며...)

(2020년 7월 9일 시민운동가이자 서울시장인 박원순 변호사 사망)

어제 오후에 내가 존경하고 사랑해 마지 않는 시민운동가이자 정치인 한 사람인 박원순 서울시장이 극단적인 선택으로 생을 마감했다. 대학생 시절 참여했던 참여연대의 창립자이고 너무 훌륭한 시민운동을 전개해온 시민운동가, 인권과 약자를 사랑했고 위했던 변호사, 탁월한 행정가이자 정치인인 한 사람의 죽음은 나에게 너무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더구나 그분이 상호합의에 의한 불륜도 아니고 한쪽에서 일방적으로 행한 범죄인 성추행으로 고소당한 바로 다음날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것이 내 마음을 복잡하게 했다.

어렸을 때는 성추행이나 성폭행을 저지르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더럽고 사악한 자들이라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그건 남일이었다. 그냥 그런 나쁜 놈들이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가 성폭행을 일삼았다는 소식을 전해들었을 때, 그에게 많은 기대를 하고 좋아했던 한 사람으로서 정말 큰 배신감을 느꼈다. 그것은 남일이 아니었다. 심적으로 "우리"의 카테고리에 있는, 기대하고 좋아했던 한 사람으로부터 뒤통수를 세게 얻어 맞아 분노하게 된 그런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감정이 좀 다르다. 배신감이라기 보다는 박원순 시장과 공범이 된 것 같은 느낌. 그만 그 일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 나도 같이 나쁜 짓을 한 그런 감정. 청년의 때부터 좋아하고 존경해 왔기 때문일까? 아니면 여러 면에서 나보다 몇 배나 더 뛰어난 인물의 잘못이 내가 얼마나 형편없고 약하고 악한 사람인가를 여실히 드러내 보여줬기 때문일까? 어젯밤 둘째딸과 길을 걸으면서 내가 아이에게 했던 말은 화난다가 아니라 슬프다는 말이었고, 덧붙여 아빠도 스스로를 잠재적인 성범죄자로 인식하고 각별히 더 조심하고 살아야겠다는 말이었다.

그분은 그렇게 가셨다. 그분의 죄는 분명히 지적해야 하지만, 그분의 인생은 그 죄로 무화(無化)시켜버릴 수 없는 존경받고 인정받아 마땅한 것들이 아주 많은 인생이었다. 그를 미워하지 않는다. 다만 그런 분의 도덕성도 점차 마비시켜버리고 수렁으로 끌어들여버린 그 무엇이 두려울 뿐이다.

이 글을 쓰는 이 순간 매우 걱정되는 한 사람이 있다. 그것은 박시장이 죽기 하루 전 그를 성추행죄로 고발한 사람이다. 그는 박시장의 비서였고, 지속적으로 성추행을 당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성추행의 피해자로서 그가 겪었을 고통을 생각한다. 그리고 그에 덧붙여 마치 그의 고발로 인해 박원순 시장이 죽게되었다는 말도 안되는 인과관계의 자책감(죄책감) 혹은 주변의 비난과 손가락질의 희생양이 되지 않을까 걱정된다. 우리는 어떤 경우도 피해자를 가해자로 둔갑시켜서는 안 된다. 박원순 시장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지지해온 사람이라면 박원순 시장이 죽음의 순간에 자신을 고발한 사람을 미워하며 원망하기보다는 스스로의 잘못을 뉘우치며 자신을 탓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그 고발자는 시장을 죽음으로 몰기 원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당한 피해와 고통에 대한 정당한 법의 댓가를 원했던 것이다.

오늘 벌써 "꽃뱀"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박시장의 죽음을 안타까워 하는 몇 사람들이 그 고발인에 대한 공격을 감행할 것이다. 박시장과 비서 사이에 실제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당사자 외에 누구도 알 수 없지만, 나는 그 고발인이 진실되다고 우선 믿는다. 그리고 그 전제하에 그에게 꼭 말해주고 싶다. 박시장의 비극은 자기 스스로가 초래한 것일 뿐 그대의 잘못이 아니라고... 어떤 경우에도 자책하지 말고 숨지 말고 당당하라고... 그리고 죽음을 선택한 박시장을 용서해 달라고...

흐리고 비오는 날씨가 내 마음을 너무 잘 대변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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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총선 결과를 보며...

(2020년 4월 15일 국회의원 총선 결과 더불어 민주당이 압승했다)

어제 책상 앞에 앉아서 논문에 집중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잡히지 않아 내내 TV앞에 앉아 있었다. 예상한 것 보다 여당에 표가 몰리면서 인과응보라는 생각과 함께 우리나라 정치가 참 큰 일이라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건전한 진보와 보수가 치열하게 경쟁하는 가운데, 힘 있는 소수 정당들이 함께 경쟁하는 건강한 정치문화는 언제쯤 볼 수 있을지...

선겨 결과에 대해 이런 저런 말들이 많다. 그 중에 어이가 없는 것 한 가지는 호남에서의 선겨 결과를 지역색 강화로 몰아가는 것이다. 언뜻 보기에는 맞는 말 같지만 완전히 틀린 분석이다. 지역주의로 몰아가기 전에 주목해야 할 것 두 가지:

1. 호남의 맹주들인 다선 의원들이 끈떨어진 연처럼 떨어져 나갔다. 그것은 그들이 민주당 옷을 입지 못해서가 아니다. 그들은 당선만 시켜주면 민주당에 복당하거나 민주당에 힘을 실어 주겠다고 하소연을 했다. 목포의 박지원 의원은 문재인 대통령에 대해서 쓴소리 한 번 한 적 없다. 하지만 그들은 한심한 표차로 낙선했다. 그 이유는 그들이 국가와 사회를 위해 긍정적인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고, 의정활동에서 만족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호남은 이름이나 지역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다. 그들의 행위와 활동으로 냉철하게 판단한다. 호남주민들은 코로나 사태와 북한 문제, 사회 정의 등에 대해서 대통령과 여당의 정책을 인정해 준 것이다. 물론 경제에 있어서는 못마땅해 하는 면이 없지 않지만...

2. 대구의 김부겸 의원은 대구에서 민주당 당적으로는 결코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지성으로 공을 들이며 최선을 다했다. 그가 다른 지역에 출마했다면 당연히 당선이 되었을 것이지만, 그는 그곳을 끝까지 지켰고, 낙선 후에도 "농부는 자기의 밭을 탓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남겼다. 영남 지역에는 김부겸과 같은 정치인들이 꽤 많이 있다. 대표적인 예가 노무현이었고, 그의 뒤를 따르는 사람들이 참 많다.

그런데 보수 진영헤서 호남에 그토록 공을 들이고 노력하는 정치인이 있는가? 대부분의 경우 아예 후보를 내지 않거나, 후보가 있다고 하더라도 지역구민들이 알지도 못하고, 공감을 전혀 할 수 없는 인물이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보수 쪽에 표를 주고 싶어도 줄 수 있는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거기에서 핑크색 점퍼를 입은 의원이 나올 수 있을 것인가? 왜 그들은 호남사람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호소하지 않는가? 사람들은 민주당 깃발만 꽂으면 당선된다는 호남의 순천에서 20대 총선 때 새누리당의 이정현 의원이 자전거를 타고 지역구 곳곳을 돌아다니며 지극정성을 다 했을 때, 순천 시민들은 그를 국회의원으로 당선시켰다. 민주당 후보의 면면이 성에 차지 않는 것과 이정현 의원의 지극정성이 그들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 이후에 보인 이정현 의원의 행보를 보고 순천 시민들이 크게 실망하여 분노하긴 했지만(그래서 21대에는 영등포에 출마해서 한 자리 지지를 받으며 보기 좋게 낙선했다), 그래도 그를 당선 시킨 것은 호남 사람들이었다.

지역주의는 망국적인 것이고 없어져야 한다. 하지만 지역주의를 그 지역 유권자의 탓으로만 돌리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영남에서 미통당이 아닌 다른 후보들을 지지한 유권자는 정말 많았다. 앞으로 조금만 더 지나면 거기에서는 지역색이 무뎌지고 단색이 아니라 다색으로 변화될 가능성이 충분하다. 마찬가지로 호남에서도 파란색 일색이 아니라 다양한 색으로 바뀌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정치인들이 먼저 자신들이 해야할 숙제를 꾸준히 해 나가야 한다. 그렇지 않고 지금처럼 아예 포기하고 신경쓰지 않으면 그 단색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