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날 준비...

이번 주에 도서관에 있는 제 방을 비우라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원래 도서관 방은 박사과정 학생 중에서 Candidate들에게만 무료로 주는데, 한 학기가 지나고 나면 한 번 renewal을 할 수 있고, 그 다음에는 방을 비운 다음, 새로운 방을 assign 받아야 합니다. 주로 독방을 선호하기 때문에 독방이 많고, 독방을 얻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서 두 명이 같이 쓰는 방도 조금 있습니다. 저는 지금 교회의 대학부장으로 섬기는 박일 형제님과 방을 같이 쓰고 있지요. 저는 한 번 renewal을 했기 때문에 곧 방을 비우고 다시 apply를 한 뒤 독방을 얻어야 합니다. 그래서 방을 비우라는 통보를 받은 것이지요...

우리 두명이 같이 방을 비우라는 통보를 받았는데, 두 사람이 느끼는 것은 완전히 딴 판인 것을 봅니다. 방을 둘이서 나눠 쓰고 있는데, 제 쪽의 책꽂이에는 책들이 가득 차 있고, 책상 위에는 이런저런 잡다한 것으로 꽉 차 있습니다. 반면, 박일형제 쪽의 책꽂이는 텅 비어 있고, 책상도 매우 깨끗합니다. 거의 아무것도 없지요... 전공이 전공인지라, 논문을 많이 보는 그쪽과 책을 많이 봐야하는 제 쪽의 극명한 차이라고 할 수 있지요...
사정이 그런지라, 방을 비우라는 통보를 받은 박일형제는 언제든지 떠나도 좋다는 표정이고, 몸만 움직이면 된다는 느긋함이 있습니다. 반면, 저는 이 책들을 일단 집에 가져다 둬야 하는데, 큰 여행가방으로 네 다섯 번 정도를 옮겨야하고, 또 가뜩이나 좁은 집에 산더미처럼 책을 쌓아 두어야 한다는 생각에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여기를 떠나지 않고 그대로 있을 수 있을까를 궁리하느라 바쁩니다. 너무 많은 책들과 자료들을 주렁주렁 달고 있기 때문에 기동성에 있어서는 완전히 "0"에 가까운 것이지요.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벧전 1:17)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 4:14)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 11:13-16)

이 땅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인생은 궁극적으로 하늘에 본향을 둔 자들의 나그네 인생입니다. 나그네로 살면서, 너무나 많은 것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다니는 사람은 없습니다. 나그네는 말 그대로 나그네일 뿐, 이 땅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마치 이 땅이 본향인 것처럼 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다리고 계신 그 본향을 생각하며, 이 땅에서의 여행 목적을 충실히 감당하고 다시 돌아갈 것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최근 제 인생을 정리하는 기회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자로서 가볍게 살겠다고, 그리고 그렇게 살고 있다고 생각해 왔었는데, 너무나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서 움직일 수 없는 제 자신을 보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 자존심, 애착, 비전, 관성화된 삶의 모습, 죄악된 습관, 변화에 대한 두려움, 상처로 인한 애증 등등... 이것들 중에서 사람들에 대한 애착 (성경적 의미로서의 사랑이 아니라 지극히 인간적인 면에서...)이 제 기동성에 너무나 많은 장애가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그네로서, 저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곳으로 즉각 움직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분의 명령, 그분의 뜻이 가장 절대적인 것이고, 그 외의 모든 것들을 거기에 예속되어야 합니다. 그분이 이 땅에서 하늘로 부르신다면, 그 때에도 기쁨과 감사 가운데, 가볍게 떠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나그네의 삶입니다.

제 방에 있는 책들은 논문에 너무나 필요한 책들이라 쉽게 정리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 인생에 주렁주렁 매달린 것들... 하나님의 명령에 즉각적으로 순종하지 못하게 만드는 모든 것들은 차근차근히 정리해 나아가야겠습니다. 제 삶을 정말 가볍고 단순하게 만들어야겠습니다. 그분과의 깊은 관계 속에서 매우 단순화된 삶으로 만들어 가야겠습니다. 언제든지 이 땅을 떠날 준비를 하면서, 본향을 바라보고, 나그네의 삶임을 절대 잊지 않고 살아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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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개:

익명 :

형. 멀지만 않으면, 제가 별로 쓸만한 머쓸이 없어도,
책옮기는 것 도와드리고 싶습니다만.

디모데후서의 말씀도 생각이 나는군요.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에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기억하려 애쓰지 않으면
강한 휘발성을 발휘하며
싸악 잊혀져버리는 하나님의 말씀.
으으..

주말 평안하세요.

필라델피아에서 ㄱ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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