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중립??
정치적이지 않기 위해서 중립의 자리를 찾아 가는 것.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닌 자리에서 마치 세상을 초월한 것처럼 보이는 것. 그것보다 더 정치적인 것을 없다. 소위 그 "중립"을 지키기 위해 정치에 대해서 매우 민감해야 하기 때문에...
종교가 정치의 한 분파와 결탁할 때 반드시 썩는다. 그런 의미에서 종교는 정치와 거리를 두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정치의 회색지점을 애써 찾아가며 모든 이슈에 대해서 침묵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정치를 초월하는 것이 중요하지 중립을 절대화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란 말이다.
종교인, 특히 내가 속한 개신교도라면, 정치적인 것보다 하나님 적인 것, 성경적인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 되어야 한다. 성경적이다 보면 때로는 수구꼴통이라고 비난 받을 때도 있고, 때로는 종북이라고 비난 받을 수도 있다. 물론 때로는 매우 무관심해 보이는 때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가치를 가장 우위에 두는가, 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지키고자 애를 쓰는가이다.
작금의 한국 현실은,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침묵하는 것, 방관하는 것, 혹은 박근혜 정부에 동조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다. 그렇다면 정치적 중립을 지키기 위해 애써 외줄타기를 하며, 세상을 초월하는 듯 먼 산만 바라보고 있는 한국 교회는 하나님의 진노를 피해가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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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 속에서 희망을...
그 사실로 인해 나는 이 야만스러운 사회에 대한 절망을 극복하고 희망을 가진다. 그 희망은 순전히 그분의 존재와 속성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그 크기는 참 크다. 그것이 감사 제목이다.
그 분은 절대 실망시키지 않는 분이라는 것을 믿고, 그 분이 기뻐하시는 일을 내 삶의 바운더리 안에서 묵묵히 해나간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결과 내 삶의 결을 맞추는 일은 그래서 너무나 중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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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대학을 바라보며..,
소위 고등교육기관인 대학에서 진정한 교육에 대한 논의는 이미 사라졌고, 등록금 동결 혹은 인하와 신입생 감소에 따른 적자를 해결하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으로 모든 것을 돈의 문제로 환언해서 말하는 그런 논리가 지배적이다. 이윤추구가 최고의 목적인 기업과 별반 다를 바가 없는 모습이 되어 버렸다.
문제는 백번 양보해서 생존이 최고의 가치가 된 대학간 무한 경쟁 구도 속에서 적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돈이 최상의 가치가 되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돈을 버는 것으로 조직을 살리는 기업의 경험이 없는 교수출신의 본부 관계자들이 보이는 너무나 아마추어적이고 기업 운영의 ABC도 모르는 행태는 가히 장탄식을 불러 일으킬만 하다. 기업으로서의 대학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그 조직이 가진 가장 핵심역량을 증대시키며, 비핵심부문의 효율화를 도모하는 것이 가장 기본인데도 불구하고, 요즘 대학의 행태는 그에 대한 무지로 값을 톡톡하게 치렀던 1980년대의 기업들이 보인 행태의 답습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핵심부문의 역량을 지키는 것이 시장의 변동에 기민하게 대응하는 유일한 방법이고, 그것이 손상되었을 때 기업의 생명이 치명적인 타격을 입음으로 인해서 회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는 것을 대학을 운영하는 관계자들은 완전히 무지한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더구나 대학은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이 아니고 교육과 연구를 통해서 사회에 공헌하는 기관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핵심역량인 학생교육과 교수의 연구환경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작금의 상황은 대학들로 하여금 경쟁에서 생존하게는 할지 몰라도 궁극에는 대학무용론의 폭탄을 맞을 것이다.
대학이 대학다움을 잃어버린다면, 대학의 존재 이유가 없이 않겠는가?
학생은 고객이나 머리수로 따지는 돈이 아니라, 그리고 기업에서 일시적으로 쓰고 버릴 부품이 아니라, 이 사회의 미래이다. 이들을 바르게 가르치는 것은 국가와 세계를 위한 일이다. 이들에게 비판적 사고, 종합적 사고, 치밀한 사고, 방대한 독서에서 나오는 넓은 관점을 가지도록 돕는 것은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가는 확실한 길이다.
그것이 대학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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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사태 101일째를 맞는 아침에
얼마전 유시민씨가 새누리당의 지지는 물질에 대한 욕망과 안정을 향한 욕구 두 가지의 기둥에 지탱되고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정말 맞는 분석이라고 봅니다. 더 잘 살고자하는 욕망과 불안에 대한 공포만큼 끈질긴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물론 잘 살고자 하는 욕망과 안정에 대한 욕구는 잘 못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상식과 도덕과 법을 무시하고라도 더 많이 물질적으로 누리겠다는 욕구(강남에 편입되고자 하는 욕망)는 잘 못된 것입니다. 안정은 좋은 것이지만, 그것이 약한 자의 희생이나 자신과 다른 목소리를 레이블링(대표적으로 "빨갱이")하고 제거함으로써 얻어지는 안정이라면, 그것은 안정이 아니라 폭거입니다.
새누리당의 지지는 긍정적인 의미의 잘 살고자 하는 욕망과 안정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라 심히 왜곡되고 부패한의미의 잘 살고자 하는 욕망과 안정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내 개인의 정치적 성향을 떠나서,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양심을 걸고, 이는 반 성경적이고, 반 하나님적임을 믿습니다. 내 종교적 양심이 그것이 내가 이 악과 맞서 싸워야 한다고 명령합니다.
적어도 내가 읽는 성경은 법과 원칙이 바로 서는 것, 약자의 권리가 무시당하지 않는 것, 생명의 존엄성이 훼손되지 않는 것, 아픈 자와 함께 아파하고 고통받는 자와 함께 고통받는 것, 강자가 약자를 무릎꿇고 섬기는 것,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의 공의에 그 어느 때보다도 배고프고 목마릅니다.
애통하는 마음이 제 마음을 가득한 것이 지금보다 더 한 때는 없었습니다.
심령이 지금처럼 가난해져 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약속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배부르게 하시고, 위로하시고, 부요하게 하시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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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왕되심 선포
"예수님은 나의 왕이시다."
최근 기독교 일부에서 시도하고 있는 예나왕(예수님은 나의 왕) 운동. 그것은 바람직한 운동이고 확대되어야 할 운동임의 분명하다. 하지만 세상이 "예수님이 왕이야?"고 물을 때 용기 있게 "그렇다. 예수님이 왕이시며."라고 대답할 준비를 하고 실재 그렇게 하면 되는걸까?
만약 이 시대의 표준적인 교인들이 그렇게 대답한다면 세상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적어도 내 생각에는 박장대소를 하면서 더 큰 조롱이 소위 우리의 왕이라 불리우는 예수님께 쏟아지지 않을까?
대부분의 교회에서 이미 예수님은 그 왕위를 찬탈 당한지 오래다. 그 자리에 담임목사의 절대 권력, 맘몬사상, 출세, 권력을 향한 욕망, 세상보다 더 지저분한 욕정들이 대신하고 있다. 최근 교인이라는 이름으로 치부를 드러내는 정치인들은 교회의 예외적인 현상이 아니라 민낯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교인들이 예수님을 왕이라고 선포하면 선포할수록 오히려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아이러니가 현실이다. 이 기형적이고 가슴아픈 현상에 기여하는 자들은 소위 교회의 리더들이나, 그 핵심에는 목화자들이 자리하고 있다. 마치 하나님을 가장 경외해야 할 제사장들이 주축을 이루었던 사두개인들처럼, 믿음의 한 가운데 있어야 할 목회자들이 오히려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주요그룹에 있는 것이다(물론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다,).
가슴이 아프다. 예수님을 왕으로 선포하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것들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그에 걸맞는 삶을 살기 위한 분투가 따라야 한다. 믿는 자들 개개인의 세상의 도덕 기준을 훨씬 능가하는 삶과 그런 삶을 지향하는 모습이 너무나 중요하다. 그럴 때에야 내 입으로 고백하는 예수님의 왕되심에 세상이 진지하게 반응할 것이다.
최근 장로 대통령으로 시작해서 많은, 소위 기독교 관련 인사들의 작태를 보면서, 그리고 그런 그들을 호위하고 감싸는 교회의 흉측한 망동을 보면서, 마음 속에 깊은 탄식이 흘러 나오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Soli Deo Gloria!
우리의 삶에 이 모토가 각인되어 있다면, 우리가 입을 벌리지 않아도, 이미 세상은 적어도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왕이라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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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환의 추모 노래
그렇게 울고, 그렇게 분노하고, 그렇게 미안했는데... 아직도 눈물이, 분노가, 미안함이 많이, 아주 많이 남아 있다는 것. 이 노래를 들으면서 새삼 깨닫는다.
이제는...
무기력과 슬픔과 분노와 미안함을 간직한 채, 뭔가를 시작하련다.
가만히 있지 않으련다.
반드시 이 세상을 바꾸고야 말겠다.
꿈의 소풍을 떠나 부디 행복 하여라--안치환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야속한 시간만 흘러가고
그렁한 눈망울만이
저 검은 바다를 응시할 뿐
제발 꿈이라면 좋겠어
숨죽인 기도의 노래도
부서지는 파도를 따라
아무 흔적도 없이 흩어져 버려
기적을 바랬지만 생명을 원했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대답없는 꽃이여
천국이 있다면, 천국이 있다면
꿈의 소풍을 떠나 그곳에서
부디 행복하여라
미안해
꿈의 소풍을 떠나 부디 행복하여라
마지막까지 불렀을 이름
엄마.. 엄마
다가온 절망의 그림자
끝내 오지 않는 삶의 끈이여
기적을 바랬지만 생명을 원했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대답없는 꽃이여
천국이 있다면, 천국이 있다면
꿈의 소풍을 떠나 그곳에서
부디 행복하여라
미안해
꿈의 소풍을 떠나 부디 행복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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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함민복 시인의 추모시
함민복
배가 더 기울까봐 끝까지
솟아 오르는 쪽을 누르고 있으려
옷장에 매달려서도
움직이지 말라는 방송을 믿으며
나 혼자를 버리고
다 같이 살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갈등을 물리쳤을, 공포를 견디었을
바보같이 착한 생명들아!
이학년들아!
그대들 앞에
이런 어처구니 없음을 가능케 한
우리 모두는...
우리들의 시간은, 우리들의 세월은
침묵도, 반성도 부끄러운
죄다
쏟아져 들어 오는 깜깜한 물을 밀어냈을
가녀린 손가락들
나는 괜찮다고 바깥 세상을 안심시켜 주던
가족들 목소리가 여운으로 남은
핸드폰을 다급히 품고
물 속에서 마지막으로 불러 보았을
공기방울 글씨
엄마,
아빠,
사랑해!
아, 이 공기, 숨 쉬기도 미안한 사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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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을 잃어버린 교회
세월호 내 아픔.
온 국민이 겪고 있는 이 슬픔과 충격이 어떤 결과를 낳게 될지 모른다. 적어도 지금 보이는 조짐으로는 전과 그리 많이 다른 세상을 만들어 가는 그런 기폭제로 사용될 가는성은 적어 보인다. 그것이 참 암울하다.
그런 상황에서 한 가지는 꼭 집고 넘어갈 것이 있다.
하지만 일부가 말하는 것처럼 사고가 발생했을 때, 안내방송을 따르지 않고 독자적으로 판단해서 그 위기를 탈출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발상이다. 그럴 때일수록 안내방송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승무원의 안내에 따라 그들에게 적극적으로 협조해야 한다. 그래야 살 수 있는 것이다.
어머니의 마지막 시간
잡념 하나...
이 사회를 지금보다 더 낫게 만들 수 있는 길이 무엇일지...
내가 직접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또 그런 사회를 만들 능력과 비전이 있는 차세대 지도자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그들을 내가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
야당은 물론 여당에도 내 마음에 품고 있는 정치인들이 있다. 각기 다른 특성을 가진 사람들이지만, 적절한 때에 이 나라를 이끌게 된다면 우리 나라와 세계에 큰 도움이 될 만한 사람들... 그들이 그들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도록, 그리고 바른 이상을 품을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는 것은 이 땅을 살고 있는 지식인의 의무가 아닐까?
학생들이 바른 시민의식을 가지고, 각자의 능력으로 사회에 공헌할 수 있도록 교육시키는 것과 이 땅을 좀 더 나은 사회로 만들기 위한 연구는 내 인생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이고 결코 타협할 수 없는 평생의 과업이지만, 그것에 머무르지 않고 어떤 식으로든 사회에 기여하는 삶을 살고 싶다.
허덕일 수 밖에 없는 과도한 논문 업적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 현실을 볼 때, 어찌보면 사치스러운 고민이지만, 나를 지금 여기까지 키워주고 보살펴준 이 사회에 대한 은혜를 잊어버리고 살 수는 없지 않은가? 고민하는 가운데 탐색하는 작업이 계속되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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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 아픔, 아픔
오늘 아침 묵상 본문.
진정으로 경건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면, 진정한 "종교"를 가진 사람이라면, 반드시 그 삶에서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과 배려, 그리고 세상적 가치관으로부터 자신을 정결하게 지키는 분투가 공존해야 한다.
소위 믿는 자가 사회정의와 분배의 문제에 무관심하고 개인 차원의 "믿음생활"에 머문다면, 그것은 기형적인 믿음이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땅히 해야할 것을 져버리는 것이다.
내가 작금의 사회를 보면서 가슴이 이토록 아픈 것은, 그리고 그것을 타개하기 위해 기도하면서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를 찾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내 개인의 이익이나 미래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 그분의 최대 관심사인 "고아와 과부"들이 억압당하고 있는 그 현실이 하나님의 가슴을 얼마나 아프시게 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내 아버지, 내 하나님의 그 아픔이 내 마음으로 전달된다. 그것이 나를 너무 고통스럽게 한다.
이런 악함을 그냥 지켜보고 있기만 한다면, 나는 비겁자이고, 죄악을 저지르는 것일 터이다. 세상의 방법은 아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해야할 역할, 행동을 찾아야 할 때이다.
정말...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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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먼저입니다. --유기성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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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느 목사님께서 설교 중에 자신의 시험 실패담을 이야기하셨습니다.
대학 다닐 때, 전공 시험을 치렀는데, 시험지를 받아보니 논술형 문제 하나였답니다.
열심히 답안을 작성하였는데, 석장을 빼곡히 썼답니다.
시험을 보고 나오면서 ‘혹시 수석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 아닌 걱정을 했을 정도로 답안을 잘 썼는데, 낙제였습니다.
2. 교수님을 찾아가서 왜 낙제냐고 항의를 했더니, “네가 교수해라!” 하시면서 “시험 문제에 대한 대답을 써야지 네가 할 말만 잔뜩 썼지 않았느냐?” 하시며 야단을 치셨답니다.
시험지를 받아들었으나 질문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어서 ‘정성이라도 다하자’ 하는 마음으로 아는 것을 다 썼답니다. 그리고 밑줄도 치고 중간 중간에 꽃도 그려 넣고 최선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답안지를 작성하였답니다.
그러나 교수님이 제시한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니었기에 낙제라는 것입니다.
3. 그러면서 목사님은 ‘우리가 인생을 이렇게 사는 것이 아닙니까?’ 하며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정성을 다하고 최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열심히 살지만 그렇게 살았다고 합격한 인생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목적대로 살아야 잘 사는 것입니다.
그러러면 하나님을 알아야 하고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하고 인생의 목적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4. 제 목회의 삶을 돌아보면서 가장 반성이 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목회를 열심히는 했습니다. 저 나름대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파악했는지에 대하여는 자신이 없는 것입니다.
5. 행 16장을 보면 사도 바울의 아시아 전도를 성령 하나님이 막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전도는 너무나 중요합니다. 그러나 전도가 아무리 중요해도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하지 않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는 것을 깨우쳐 줍니다.
6. 사도 바울은 모든 길이 막힌 것 같은 때에 성령의 인도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열린 문이 비로소 보였습니다. 동서남북이 다 막혔는데, 바다를 점프하여 유럽에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었습니다.
7. 사도 바울의 위대함은 성령께서 그 길을 막으실 수 있었던 사람이었다는 데 있습니다. 보통은 성령께서도 못말립니다. 한다면 하고 안한다면 안합니다.
열심히 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마음대로 목회하고 선교하고 사역하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최선을 다하는 열심 보다 중요합니다.
8. 어느 집사님이 목회자로 부름을 느끼지만 주님의 확인이 없다고 상담을 왔습니다.
‘주님이 부르셨다면 왜 주님의 확인이 없을까?’ 생각하면 물었습니다.
“하나님의 어떤 확인을 기대하십니까? 신대원에 갈 길이 열리지 않습니까? 아니면 고생할 걱정 때문입니까?”
대답을 못하고 우물쭈물 하더니 ‘먹고 살 길이 막막하다’는 것이었습니다.
9. 대부분 하나님의 확인을 구하는 이유는 고생하지 않을 길을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분명히 “가라” 하셨다는 확인을 그렇게 얻으려는 이유는 그러다가 어려워지면, 실패라고 여겨지면 하나님이 책임지라는 것입니다.
10.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마음을 정직하게 분별받는 일에 용감해야 합니다.
합리화하지 말아야 합니다. 숨기지 말아야 합니다.
11.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기가 힘들다고 말합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분명히 말씀하시지 않으셔서 문제일까요?
아닙니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뜻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12. 빌리그래함 목사에게 평생 세 번의 큰 유혹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한번은 큰 대학교의 총장으로 와달라는 청빙이었고, 한번은 상원의원에 출마하라는 제안이었고 한번은 부통령으로 출마하라는 제안이었답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자기 영광을 위한 욕심임을 알고 거절했다고 했습니다.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부름은 전도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빌리그래함이 있었던 것입니다.
13. 정말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데도 해결안되는 문제가 있습니까?
‘고생도 좋습니다. 죽음도 좋습니다’ 하면 이미 하나님의 뜻이 확실한 일이 많습니다.
14.우리가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자’임을 분명히 하고, 24 시간 주님을 바라보면서 “예수님은 나의 왕십니다” 고백하면 누구나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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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유기성 목사님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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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손을 붙잡고 있습니까?
1. 오늘 새벽기도회 때, 김영광목사님께서 신 34장에 나오는 모세의 죽음에 대하여 설교하면서, 지금 하나님과 함께 있을 모세의 마음은 어떠할지 생각해 보자고 했습니다.
2. 그렇게 들어가 보고 싶었던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 보지 못하고 요단 동편에서 죽어야 했던 모세, 눈이 흐려진 것도 아니고 기력이 쇠한 것도 아니라 하였으니 하나님께서 건강했던 모세의 생명을 강제로 취하여 가셨다는 말입니다.
게다가 모세의 무덤 조차 아는 이가 없게 만드셨습니다.
40년 광야 길을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왔던 모세로서는 얼마나 섭섭한 일이겠으며, 하나님은 왜 이리 무정하게 하신 것일까요?
3. 그러나 천국에 있는 모세의 마음은 어떨까 생각해 보니 모세에게는 조금도 원망이 없으며 오히려 이 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할 것이라고 깨달아졌습니다.
가나안 땅은 천국을 상징하는 곳입니다. 실제 천국은 아닙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길을 지나던 이상으로 고생을 하였습니다.
모세는 천국의 상징인 가나안이 아니라 진짜 천국에 간 것입니다.
그러니 모세가 무엇이 억울했을까요?
영상으로 보던 휴양지를, 직접 가게 되었다면 억울한 것입니까? 기뻐할 일입니까?
4.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의 눈에서 사라지고, 무덤 조차 아는 이가 없게 됨으로 모세는 우상숭배의 대상이 되는 시험 조차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충분히 숭배의 대상이 될만한 인물이었습니다. 만약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하나님 앞에서 모세는 얼마나 민망했을까요?
사실 출애급은 모세가 이룬 업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 하신 일입니다. 가나안 정복도 모세가 있어야 될 일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모세가 가나안 땅에서 계속 이스라엘 백성들의 관심과 의지의 대상이 되었다면 하나님의 역사에 걸림돌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요단 동쪽 편에서 죽음으로 이런 우려가 다 사라진 것입니다.
5. 모세는 혈기 한번 부린 벌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것만은 아니었음이 분명합니다.
신 34:10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이것이 모세를 향한 하나님의 평가였습니다.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있었고, 그것은 모세를 위하여도 축복이었습니다. 모세는 십자가 구원의 예표인 출애급이라는 위대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쓰임받았다는 것 만으로 족한 것입니다.
종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지 않고, 하나님만 드러나시고 적절한 순간에 깨끗이 뒤로 물러난 것이 얼마나 멋있는 일입니까?
모세는 지금 천국에서 자신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것에 대하여 춤을 추며 감사하고 또 감사하고 있을 것입니다.
6. 그렇습니다. 우리의 판단은 하나님 앞에서 서 보아야 정확히 내려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을 보면 ‘좋다 싫다’, ‘감사하다 섭섭하다’ ‘순종이 된다 안된다’ 모든 것이 다 달라집니다.
7. 그러므로 2013년 마지막 날인 오늘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의 삶을 하나님 앞에서 보게 해 주시기를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한 해를 보내는 이 순간, 억울한 일, 고통스런 일, 기쁜 일, 자랑스런 일들이 있지만 하나님 앞에 서면 완전히 바뀔 것이 한 둘이 아닐 것입니다.
8. 제 마음의 소원은 오직 하나입니다.
새벽에 잠에서 깨는 순간, 주님이 가장 먼저 생각나고, 밥을 먹을 때도 주님을 바라보고, 사람을 만나도, 설교를 해도, 길을 걸을 때도 혼자 있을 때도 오직 주님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주님의 품 안에서 하루를 마감하고 잠이 드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제가 주님께 드릴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 주님께서 제게 말씀하시고 주님의 마음을 알게 하시고 제가 갈 길과 해야 할을 가르쳐주시고 주님의 능력으로 행하게 하시며 친히 저를 통하여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일하실 것입니다.
어떤 일에도 걱정 염려하지 않고 오직 주님의 사랑으로 주위의 모든 이들을 사랑만 하다가 주님이 오라 하실 때, 기쁘게 주님께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9. 2009년 7월부터 이 소원으로 24 시간 주님만 바라보고 살려 했습니다.
일기를 통하여 매일 주님 바라보는 마음을 기록해 왔습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 이제 좀 익숙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 온전히 주님을 바라보고 산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정도만 가지고도 놀라운 변화였습니다. 제 마음이 완전히 뒤집어지고 있습니다.
무엇 보다 매일 매일 주님은 어떻게 역사하실까 기대가 됩니다.
실패도 하지만 곧 회복이 됩니다. 전처럼 실패하는 자리에서 오래 헤매지 않게 되었습니다.
저는 앞으로 주님이 어떻게 주님의 말씀을 제 삶 속에 이루실지 너무 너무 기대가 됩니다.
10. 2012년 6월부터 매일 페이스북에 24 시간 주님을 바라보는 마음을 컬럼으로 썼습니다. 때로는 너무나 힘든 일이었지만 이 역시 제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매일 주님께서 제 삶 속에서 역사하신 일을 기록하려다 보니, 정말 살아계시고 역사하시는 주님을 생생히 경험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11. 지난 일년 반 동안 페이스북에서 저와 함께 하여 주셨던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여러분들께서 댓글로 ‘좋아요’로 메시지로 반응해 주신 것이 제게도 너무나 유익하였고 힘이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외롭지 않았습니다.
12. 새해는 여러분 모두가 주님과 동행하는 것 하나만 충실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 예수님 안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시고 완벽한 계획이 있기 때문입니다.
13. 지금 여러분이 주님의 손을 붙잡고 있다면, 2014년 새해를 완벽히 준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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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20131216,대학 평가에 대한 단상 (이만열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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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16,대학 평가에 대한 단상]: 최근 몇 몇 후배 교수들과 대화를 나눠본 적이 있다. 대화를 나눌 때마다 대학의 변화에 대해서 실감하게 되었다. 그 변화는 우리의 재직 때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것들이어서 놀랍기도 하고 한편 걱정스럽기도 했다. 10여년 전 은퇴할 때만 해도 변화를 어렴풋이 감지했지만, 이렇게 급격하게 변화될 줄은 미처 몰랐다. 그 때까지만 하더라도 중세 이래 지속되어 온 전통적인 대학이념이 유지될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지금은 전통적인 대학상이 존속할 것인가에 대한 회의마저 갖게 되었다.
대학이 변하고 있다고 해서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시대변화에 따라 대학도 변화되어야 한다. 가끔 나의 걱정이 시대변화를 제대로 읽지 못하는 편견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생각을 하면 대학을 두고 걱정하는 내 생각이 얼마나 객관적인가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사람 저사람으로부터 거의 공통되는 우려를 들었을 때, 그런 걱정이 단순히 어떤 개인의 생각이 아니고 대학사회가 공동적으로 느끼고 있는 것이라는 것도 어렴풋이 느끼게 되었다.
그들이 대학을 두고 걱정하는 것 중 대학 평가 하나만 언급하겠다. 교육부에서 행해 오던 대학 평가는 최근에는 모 언론매체에서도 그렇게 하고 있다고 들었다. 교육부와 언론기관은 나름대로 전문가에 의해 다듬어진 평가시스템을 가지고 전국의 대학을 평가할 것으로 안다. 교육부는 대학평가에 따라 막대한 인센티브와 제재를 무기로 활용하고 있다. 대학은 교육부의 이런 전횡에 대해서 주눅이 들어 있고 눈치보기에 급급하다. 평가는 교육부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다. 모 언론기관에서도 최근 수년간 그 평가의 노하우를 축적하고 나름대로 그 평가기준을 개선시켜 가면서 지속적으로 계속해 왔다. 직접적인 인센티브나 제재는 없지만 언론의 영향력 또한 교육부 못지않다. 대학들은 교육부나 언론기관의 평가에 크게 신경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앞으로 대학에 진학할 학생수가 축소됨에 따라 대학구조조정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고 보니, 이런 평가는 대학의 생존문제와도 직결된다고 할 수 있다.
평가의 기준 가운데는 졸업생들의 취업률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취업률을 올리고 실업률을 낮추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고 있다. 그렇게 되다보니 연구와 교수에 힘을 쏟아야 할 교수들이 졸업생들의 취업에 더 신경을 쓰면서 그 방면에 노력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한편 이해됨직 하면서도 한편 서글프지 않을 수 없다. 대학이 전문직업학교로서 기능해야 할 때가 머지 않았고 아울러 지성인으로서의 대학 교수가 거간꾼쯤으로 전락되는 현상이 오지 않을까 두렵다.
졸업생들의 취직의 문제는 곧 연구와 교수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다. 몇 몇 재벌이 인수한 대학에서 사회수요에 따라 학과와 강의를 구조조정한다는 것은 이미 상식화되어 있다. 실용적이지 않은 학문이 퇴출되고 그런 학과는 폐쇄당한다. 그 희생의 대상은 결국 인문학으로 거의 귀결된다. 철학과가 문을 닫고 철학 강의가 사라진다. 인간과 세계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인 철학을 퇴출시키는 형국이라면, 대학이 존재할 이유가 있을까. 세계관과 상상력 등과 관련되어 있는 인문학이 봉쇄당하게 된다면, 실용적인 분야가 양적으로 팽창된다고 해서 질적인 성장을 담보할 수 있을까. 그렇게 될 수 없다. 사립대학과 함께 국공립대학에서도 일어나는 이런 현상마저 좌시해야 할까. 최근 어느 기업에서 실용적인 분야를 담당한 부서에 그 분야와는 거의 관련성이 없는 인문학 전공자를 선출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 깊은 속은 알 수 없지만 세계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이나 인문학적 상상력이 없이는 실용적인 분야도 병진 발전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일까.
대학 평가는 곧 교수 개개인에 대한 평가로 이어진다. 교수에게 주어진 임무는 결국 연구와 교수(가르침)일 것이다. 가르치는 문제는 학생들에 의한 강의평가 등으로도 이뤄지기 때문에 여기서는 굳이 언급하지 않겠다. 문제는 연구다. 대학이 연구의 산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오늘날 시행되고 있는 연구평가시스템으로써 대학 연구의 질을 어느 정도 담보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외국 저널에 게재하여 세계학계의 평가를 중요시한다고 하지만, 국내의 경우는 대부분 평가의 일차적인 기준을 연구의 양에 두고 있다. 그러다 보니 논문을 양산하는 경향이 뚜렷해졌다. 양이 질을 유도할 수 있다는 말도 있지만, 이렇게 다작의 연구가 평가에 그대로 흡수되고 보니 너나 할 것 없이 논문의 양산에 유혹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자연계는 그렇다 치더라도, 인문 사회계에서 1년에 10편 이상의 논문을 쓴 경우가 있다니 이것은 한마디로 놀랍다. 이게 한국 대학의 현실이다.
논문의 양산에는 결국 피상적인 리서치를 통해 통계수치에 의한 간단한 현장 조사 같은 것이 주를 이루고 있다고 한다. 물론 상황에 따라서는 그런 간단한 조사에 의한 리서치가 논문으로 좋은 구실을 할 경우가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연구 분위기가 대학사회를 휩쓸게 되면 이론적인 연구는 거의 어렵게 될 것이다. 수십편의 자료를 이용하여 숙성시킨 논문은, 논문의 양으로 교수의 연구업적을 평가하는 분위기하에서는 쉽게 자라잡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사회의 병리를 찾아내고 그 근원적 치유에 연구시간을 쏟는 그런 심원한 연구가 쉽게 자리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은 명약관화하다. 연구평가를 어떻게 하는 것이 온당한가에 대한 객관적 기준이 없다는 이유로, 양적 기준으로 연구를 평가한다면 일생을 그 한권의 저술을 위해 고민하는 교수는 나올 수 없을 것이다. 대학이 그렇게 된다면, 우리 사회의 지도이념을 고민하는 아카데미즘은 사라질 것이 뻔하고, 대학의 존재이유도 다시 되묻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재래할 것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불구하고 대학에서는 이런 문제를 지양하기 위한 자구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교육부에서 뿌리는 막대한 지원금은 이렇게 대학의 자율성을 마비시키고 건전한 상식마저 폐쇄시키려 하고 있다. 그 많은 프로젝트로 대학의 자구적 발전을 위한 연구에 투자하라. 지성인들 사이에서는 가장 먼저 퇴출시켜야 할 정부의 부처로 교육부를 지목해 왔는데, 대학이 그 평가에 목을 매고 있다면 대학의 질적인 발전은 더 이상 기할 수 없을 것이다. 또 대학이 가장 시장친화적인 언론사에서 하는 평가에 눈치를 본다면 그 또한 대학을 시장논리에 내 맡기는 것이나 다름없다. 대학이 교육부와 언론사의 평가를 벗어나야 할 이유는 이 밖에도 있을 것이다.
양산체제로 연구평가를 전환시킨 결과, 연구에 긴 시간을 투자한 연구가 나오지 않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이것은 또한, 대학의 학문적 고민을 통해 생산된 지성․사상이 치유해야 할 사회문제에 대해서도, 단기적이고 단견적인 처방 밖에는 내놓을 수 없다. 양산체제 하에서 생산된 연구가 강의의 주조를 이루게 된다면, 거기서 배우는 학생들의 지성과 인격이 어떻게 될 것인지 불문이가지(不問而可知)다. 단견적이고 경쟁적이며 이기적인 인간으로 배양할 것이 틀림없다. 얼마전 후배 교수들에게 대들듯이 말했다. 오늘날 학생들이 스펙쌓기에 바쁘고 찰나적인 인간으로 화하고 정의감이 무디어지는 것은 바로 대학 강단의 책임이 크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MB정권 기간, 저 거짓되고 사악한 행태를 보면서도 한번도 제대로 항거하지 못한 그런 대학생들을 양산한 것은 바로 이런 대학의 존재 행태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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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움.
내 주변에 많이 있는 뛰어난 분들을 통해 배우고,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문제를 통해 배운다.
내 약점이 드러날 때는 고통스럽지만 그것을 통해 깨닫는 바 역시 크다.
내어리석음은 나를 경손하게 하고 하나님께 의뢰하는 마음을 키우고, 연약한 모습은 나로 하여금 더 강해지겠다는 다짐을 하게 한다.
세상은 두려운 곳이지만 포기할 정도는 아니다. 20년, 아니 30년, 더 나아가 40년 후를 바라보며 한 걸음씩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련다.
남들보다 빨리 갈 능력은 없지만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갈 수는 있다.
내일은 오늘봐는 더 큰 나. 더 강한 나. 더 지혜로운 나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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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mility is...
... and thinking more of God and other people...
"Truly true" as Francis Schaeffer once sa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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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과 함께 받는 복
그동안 성경을 많이 읽어봤지만, 그리고 갈라디아서는 특히 많이 읽어봤지만, 오늘 묵상 본문 말씀 중에서 이 구절이 가슴에 꽂힌다.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야고보와는 달리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의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율법이 아니라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맥락 가운데 나온 것이다. 그리고 믿음으로 받는 복은 궁극적으로 구원임을 생각할 때, 아브라함이 받은 복은 궁극적으로는 구원일 것이다.
하지만, 본문의 의도는 그런 차원에만 머물지는 않는 것 같다. 바울의 전도로 인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의 복음을 받은 갈라디아교회의 영적 질서를 어지럽히고 있는 것은 바로 율법주의였고, 그 율법주의를 주창하는 자들은 필시 유대인, 특히 바리새출신 기독교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유대인들에게 아브라함은 육신의 조상일 뿐만 아니라 그들이 믿는 유대교의 조상이기도 하다. 율법주의의 주창은 바로 그들이 말하는 (바리새인이라는 그 호칭의 원뜻과 같이)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을 말하고, 그것은 바로 로마의 압제로 나라를 빼앗긴 유대인들이 율법을 준수함으로써 아브라함이 받았던 모든 복, 즉 자속의 복과 땅의 복을 받을 수 (혹은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은 그런 그들의 전제와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받았던 모든 복은 그의 믿음에서 근거한 것이지 그의 행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야고보도 그의 믿음을 확증해 주는 근거로서의 행위를 강조함으로 바울과 같은 입장에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또한 아브라함에게 약속되었던 그 "복"을 누리는 통로라는 것이다.
개신교, 특히 세상의 물질적 축복에 과도한 관심을 가지는 경향을 경계하는 측에서는 아브라함이 받은 복을 "구원"으로 한정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일 것이다. 그는 오실 메시야를 믿었기 때문에 그분을 바라보고 즐거워하는 특권을 누렸고, 구원을 얻었다.
하지만 아브라함이 받은 복은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그리고 선지자로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하심을 받았다. 그의 불순종이 있었지만, 그 믿음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용서하시고 아브라함의 보호자요 하나님되심을 포기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그에게 필요한 것들을 부족함이 없이 채우셨다. 비록 정작 약속하신 자손과 땅의 축복은 아브라함 당대가 아니라 후대로 미루셨지만...
아브라함과 함께 받는 복은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복이라고 믿는다.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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