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에 대한 소회...

지난 11일 퇴근 길에 지하철에서 기절하여 바닥에 쓰러진 후 약 11일 만인 어제 학교에 나가서 일정시간 버티다가 채점해야 할 것들을 겨우 챙겨서 집에 일찍 왔다. 그리고 오늘은 서울 동부의 한 호텔에서 있었던 과 교수님들과의 회식에 참여했고 학교에 잠깐 들러 이번에는 지하철을 타고 집에 오는 "모험"을 감행했다. 비록 지하철에서 집까지 걸어 오지는 못하고 택시를 타긴 했지만...

바닥난 체력은 오늘 과교수님들이 보여주신 사랑과 아내의 정성스러운 간호로 언젠가는 채워 지겠지... 그리고 다음 주 월요일에 좋은 병원에서 진찰을 하기로 했으니 원인도 밝혀질 것이고...

신체적인 것 외적인 원인을 찾는다면, 올해 겪은 큰 일들: 어머니의 소천, 세월호, 아메리카학회 국제학술대회, 그리고 학교관련 긴 출장, 이 네 가지가 에너지를 고갈시킨 원인으로 보인다.

그 중 어머니의 소천. 오늘 약속장소로 가면서 어머니를 모시던 길을 지날 때, 차 안에서 가슴이 먹먹하고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어머니...'
그 냥 그 말을 혼자 되뇌이던 것 외에는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세월호는 어머님의 소천보다도 훨씬 정서적 에너지의 소모가 큰 사건이었다. 어머니는 연세가 있으신 분이었고, 천국에 계실 것이라는 믿음이 나에게 아픔 가운데서도 위로를 줬지만, 내 자식같은 아이들과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들을 그 차가운 바다에 수장해 버린 그 사건, 그리고 그 사고와 유가족을 대하는 정부와 여당, 제1야당의 태도는 나를 분노하게 만들었고 무기력하게 만들었고 우울하게 만들었다. 오랜 눈물로 내 심신이 지쳐갔던 모양이다. 나는 도저히 이 악한 자들을 용서할 수 없다. 지금도 그들에 대한 분노가 끌어 오른다.

체력이 다시 충전된다면 그 분노를 사회변혁으로 승화시키는 일을 조금씩 더 구체화시켜 나가야겠다.(물론 지금은 학기말 성적을 내는 것이 급선무....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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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식하는 유민이 아빠를 보며...

솔직히... 내 딸이 그런 사고를 당했다면 나는 유민이 아빠처럼 그렇게 저항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훨씬 더 과격했을 것이고, 아마도 이성을 잃은 행동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유민이 아빠를 보면서, 그의 단식을 보면서, 정말 격렬하게 저항하면서도, 법과 품위를 지키는 그 모습에서 존경하는 마음이 저절로 우러난다.
나 역시 그가 죽기를 절대 원하지 않고, 건강하게 승리하기를 바라지만... 감히 그에게 단식을 중단하라고 말 할 수는 없다.
딸에 대한 미안함, 그 딸의 죽음이 결코 헛된 죽음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그 죽음이 그 이후에 있을, 수 많은 죽음을 막는 거룩한 희생이 되어야만, 그나마 아픈 가슴을 부여잡고라도, 그 죽음의 의미를 부여하며, 그것으로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고, 후에 유민이를 만났을 때 면목이라도 설 것이라고 믿는 그 마음을, 비슷한 나이의 딸을 가진 아빠로서 충분히 이해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유가족이 원하는 특별법을 만듦으로서 그를 살리는 것만이 유일한 길인 것 같다.
정치권이 아무리 악한 자들이 모인 집단이라 하더라도, 한 아이의 아버지의 이 처절한 몸부림을 죽음으로까지 몰아갈까? 두려운 것은 그럴 수도 있다는 느낌이 점점 커진다는 것, 그것이다.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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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패드

산 지 8개월 정도 된 아이패드 에어.

이 주 전에 갑자기 많이 뜨거워진 적이 있었다.

그 후 밧데리 충전 능력이 현격히 떨어진다. 그 전에는 한 번 충전에 많으면 1주일, 적으면 3일 정도는 너끈히 견뎠는데, 지금은 똑같이 사용하는데도 많으면 3일이다. 물론 충전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그 전보다 훨씬 짧아졌다. 그래서 좋은 면이 있기도 하지만, 오래 쓰지 못한다는 것이 더 불편하다.

2011년에 iPod Touch 샀을 때도 똑 같았다. 약 8개월 정도 지나고 나니 한 번 엄청 뜨거워지더니 그 후로는 밧데리가 전과 같이 않게 되었다. 그래서 AS를 요구했더니, 애플 정책상 수리는 불가능하고 다른 것으로 교체해 준다고 해서 그렇게 하랬다. 멀쩡해 보이던 새로 받아온 기계는 다시 몇 개월 지나자 여기저기 고장이 나기 시작했다. 사설 수리기관에 가서 수리를 의뢰했는데, 뜯어 보더니 하는 말이 문제있는 부품을들 이것 저것 조립해서 만든 문제가 아주 많은 refub이라고 한다. 쉽게 말해 걸레 조각 모아서 겨우 옷 모양을 만들어 놓은 형국이랄까? 문제는 원 제품을 살 때의 보증기간이 넘으면 애플은 아무 것도 안 해준다는 것. 두 번째 제품이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 그 보증 기간을 2개월 정도 넘긴 후였으니, 자기들은 책임질 수 없고,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다고 딱 잡아 뗐다.

아이패드가 문제의 조짐을 보인다. AS기간이 충분히 남아 있다. 그래도 AS를 받을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이런 경험 때문이다.

아이패드가 어느새 내 생활의 중심에 들어와 있다. 그것 없이는 생활이 어려울 정도로... 어찌해야할지...

속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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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돌이킴

오늘 아침 밧새바와 간음하고 우리야를 살인하는 다윗을 봤다. 하나님께서 그의 행동을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표현이 성경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시게 하고 그분을 대적하는 죄악을 저지르는 다윗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하지만, 최근에 어떤 분으로부터 남자는 돈과 권력이 생기면 꼭 딴짓을 하게 되어 있다고 들었는데, 만약 나라면 그 지위에 있을 때 다윗보다 더 정결한 삶을 살 수 있었을까? 장담하건데 결코 아니다. 이렇게 돈없고 힘없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서슴지 않고 죄악을 저지르는 내가 다윗의 자리에 있다면 아마도 성경에 나온 악한 왕들의 계보에 들 것이 뻔하다.

다윗의 죄악을 볼 때마다 놀라는 것은, 그의 죄악의 크기와 깊이가 아니다. 오히려 그의 돌이킴이 참으로 놀랍다. 그가 한창 죄악 가운데 있을 때, 나단 선지자가 그에게 나타난다. 그의 출현 자체가 다윗에게는 가슴 철렁한 이벤트였을 터... 왜냐하면 나단은 그 전부터 선지자에 방불하던 다윗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던 선지자의 선지자였기 때문이다. 나단이 그를 알현하고자 했을 때, 그것을 허용했다는 것 자체가 다윗답다. 나라면 다난의 등장이 의미하는 것을 충분히 알았을 것이기 때문에 그이 면담을 거부했을 것이다. 마음이 불편했을 것이고, 창피했을 것이고, 무엇보다 죄악을 더 즐기기 위해서... 하지만 다윗은 그와의 면담을 허락한다.

잔뜩 긴장한 다윗에게 나단은 딴소리를 한다. 다윗은 밧세바와의 사이에 대해서 추상같은 비판이 있을 것이라 예상했는데, 그것이 아니라 사소한 문제를 들고 나온 것이다. 아마 그는 그것이 비유라는 것을 알아채지 못한 것 같다. 나단은 가축이 많은 부자와 암양 한 마리 밖에 없는 가난한 자 사이의 불의를 마치 다윗과는 관련이 없는 하나의 법적으로 다뤄야 할 케이스인 것처럼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다윗은 자신의 치부가 드러나지 않았다는 안도감과 자기가 지은 죄책감 때문에 이 사건에 대해서 과도하게 반응한다. 그는 그 부자에게 대노하면서 그를 즉각 엄벌할 의지를 드러낸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이 정의의 편에 서 있다고 포장하고 싶었을 터이다.

안도감 속에서 죄책감을 의로운 겉모습으로 깊이 숨기고자 하는 그에게 나단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You are the man!"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물어보나 마나다. 내가 죄를 지은 것을 스스로 인정한다고 해도, 다른 사람이 그렇게 면전에서 그 죄를 들춰낼 때, 그것도, 불의의 습격으로 그렇게 될 때, 나는 분명 그에 반발할 것이다. 죄는 죄이고, 창피한 것, 황당한 것은 다른 문제이니까... 아마 나단을 그 자리에서 쫓아 냈을 것이고, 내가 한 행위가 사람들에게 미안한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밧세바를 끝까지 책임졌다고, 그 때는 어쩔 수 없었다고... 혹은 심지어 밧세바에게 책임을 뒤집어 씌워서 그 여자가 나를 유혹해서 그런 일이 생겼다고... 가능한 모든 구실을 내세워 내 체면을 세우기 위해서 노력했을 것이다.

다윗이 위대한 것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단의 추상같은 돌직구에 그는 말한다.

"I have sinned against the LORD."

변명도 없고, 군더더기도 없다. 체면도 없고, 자존심도 없다. 하나님께서 죄를 지적하실 때, 그 앞에 무조건, 즉각적으로 무릎꿇는 것. 그것이 참 대단하다. 죄를 지은 경험이 많은 나로서는 도저히 불가해한 것이 바로 다윗의 이 반응이다. 이것이 바로 다윗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는 태도인 것이다.

성경이 지적하듯, 인간을 옥죄는 죄의 결박은 참으로 단단하고 집요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위대한 것은 그 죄의 결박으로부터 나를 자유케 했다는 것 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여전히 죄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다. 다윗은 스스로 죄인임을 고백하는 이 모습을 통해서 구약의 인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미리 받은 믿음의 조상 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내 안에 그런 십자가의 능력이 나타나고 있는가? 내가 죄인임을 고백하며, 주님 앞에 즉각적으로 무릎꿇고 회개하는 그런 삶이 내 일상의 삶이 되고 있는가? 이 아침에 다윗을 보면서 내 자신을 부끄럽게 돌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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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중립??

교황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인간적인 고통 앞에 서면 마음이 시키는 대로 행동하게 된다"면서 "어떤 이들은 이를 두고 '정치적인 이유로 그렇게 한다'고 생각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세월호 사고) 희생자의 아버지, 어머니, 형제, 자매를 생각하면 그 고통이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클 것"이라면서 "내 위로의 말이 죽은 이들에게 새 생명을 줄 수 없지만 희생자 가족을 위로하면서 우리는 연대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한겨레신문 2014.8.19

정치적이지 않기 위해서 중립의 자리를 찾아 가는 것.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닌 자리에서 마치 세상을 초월한 것처럼 보이는 것. 그것보다 더 정치적인 것을 없다. 소위 그 "중립"을 지키기 위해 정치에 대해서 매우 민감해야 하기 때문에...

종교가 정치의 한 분파와 결탁할 때 반드시 썩는다. 그런 의미에서 종교는 정치와 거리를 두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정치의 회색지점을 애써 찾아가며 모든 이슈에 대해서 침묵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정치를 초월하는 것이 중요하지 중립을 절대화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란 말이다.

종교인, 특히 내가 속한 개신교도라면, 정치적인 것보다 하나님 적인 것, 성경적인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 되어야 한다. 성경적이다 보면 때로는 수구꼴통이라고 비난 받을 때도 있고, 때로는 종북이라고 비난 받을 수도 있다. 물론 때로는 매우 무관심해 보이는 때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가치를 가장 우위에 두는가, 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지키고자 애를 쓰는가이다.

작금의 한국 현실은,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침묵하는 것, 방관하는 것, 혹은 박근혜 정부에 동조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다. 그렇다면 정치적 중립을 지키기 위해 애써 외줄타기를 하며, 세상을 초월하는 듯 먼 산만 바라보고 있는 한국 교회는 하나님의 진노를 피해가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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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 속에서 희망을...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사실. 그리고 그분이 역사의 주관자라는 사실.

그 사실로 인해 나는 이 야만스러운 사회에 대한 절망을 극복하고 희망을 가진다. 그 희망은 순전히 그분의 존재와 속성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그 크기는 참 크다. 그것이 감사 제목이다.

그 분은 절대 실망시키지 않는 분이라는 것을 믿고, 그 분이 기뻐하시는 일을 내 삶의 바운더리 안에서 묵묵히 해나간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결과 내 삶의 결을 맞추는 일은 그래서 너무나 중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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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잊지 맙시다!

세월호 침몰로 희생된 귀한 생명의 사연을 모아 놓은 곳.

한겨레 신문사 추모 웹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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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대학을 바라보며..,

대학들이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들이 되어 간다는 증거는 대학본부에서 "돈"에 대한 강조가 너무 많다는 것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소위 고등교육기관인 대학에서 진정한 교육에 대한 논의는 이미 사라졌고, 등록금 동결 혹은 인하와 신입생 감소에 따른 적자를 해결하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으로 모든 것을 돈의 문제로 환언해서 말하는 그런 논리가 지배적이다. 이윤추구가 최고의 목적인 기업과 별반 다를 바가 없는 모습이 되어 버렸다.
문제는 백번 양보해서 생존이 최고의 가치가 된 대학간 무한 경쟁 구도 속에서 적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돈이 최상의 가치가 되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돈을 버는 것으로 조직을 살리는 기업의 경험이 없는 교수출신의 본부 관계자들이 보이는 너무나 아마추어적이고 기업 운영의 ABC도 모르는 행태는 가히 장탄식을 불러 일으킬만 하다. 기업으로서의 대학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그 조직이 가진 가장 핵심역량을 증대시키며, 비핵심부문의 효율화를 도모하는 것이 가장 기본인데도 불구하고, 요즘 대학의 행태는 그에 대한 무지로 값을 톡톡하게 치렀던 1980년대의 기업들이 보인 행태의 답습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핵심부문의 역량을 지키는 것이 시장의 변동에 기민하게 대응하는 유일한 방법이고, 그것이 손상되었을 때 기업의 생명이 치명적인 타격을 입음으로 인해서 회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는 것을 대학을 운영하는 관계자들은 완전히 무지한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더구나 대학은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이 아니고 교육과 연구를 통해서 사회에 공헌하는 기관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핵심역량인 학생교육과 교수의 연구환경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작금의 상황은 대학들로 하여금 경쟁에서 생존하게는 할지 몰라도 궁극에는 대학무용론의 폭탄을 맞을 것이다.
대학이 대학다움을 잃어버린다면, 대학의 존재 이유가 없이 않겠는가?
학생은 고객이나 머리수로 따지는 돈이 아니라, 그리고 기업에서 일시적으로 쓰고 버릴 부품이 아니라, 이 사회의 미래이다. 이들을 바르게 가르치는 것은 국가와 세계를 위한 일이다. 이들에게 비판적 사고, 종합적 사고, 치밀한 사고, 방대한 독서에서 나오는 넓은 관점을 가지도록 돕는 것은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가는 확실한 길이다.
그것이 대학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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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사태 101일째를 맞는 아침에

새누리당의 최근 행태에도 불구하고, 그 당의 지지율이 크게 변함이 없다는 것 자체에 절망합니다. 노무현 대통령 때에는 작은 실수 하나에도 그렇게 요동을 치던 지지율, 그렇게 날선 비난을 날리던 한국 국민들이, 그와는 비교되지 않는 큰 악행을 서슴지 않는 새누리당에 대해서 그렇게 무덤덤한 반응을 보이는 것을 보면서 우리 한국 사회의 문제를 봅니다.

얼마전 유시민씨가 새누리당의 지지는 물질에 대한 욕망과 안정을 향한 욕구 두 가지의 기둥에 지탱되고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정말 맞는 분석이라고 봅니다. 더 잘 살고자하는 욕망과 불안에 대한 공포만큼 끈질긴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물론 잘 살고자 하는 욕망과 안정에 대한 욕구는 잘 못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상식과 도덕과 법을 무시하고라도 더 많이 물질적으로 누리겠다는 욕구(강남에 편입되고자 하는 욕망)는 잘 못된 것입니다. 안정은 좋은 것이지만, 그것이 약한 자의 희생이나 자신과 다른 목소리를 레이블링(대표적으로 "빨갱이")하고 제거함으로써 얻어지는 안정이라면, 그것은 안정이 아니라 폭거입니다.

새누리당의 지지는 긍정적인 의미의 잘 살고자 하는 욕망과 안정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라 심히 왜곡되고 부패한의미의 잘 살고자 하는 욕망과 안정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내 개인의 정치적 성향을 떠나서,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양심을 걸고, 이는 반 성경적이고, 반 하나님적임을 믿습니다. 내 종교적 양심이 그것이 내가 이 악과 맞서 싸워야 한다고 명령합니다.

적어도 내가 읽는 성경은 법과 원칙이 바로 서는 것, 약자의 권리가 무시당하지 않는 것, 생명의 존엄성이 훼손되지 않는 것, 아픈 자와 함께 아파하고 고통받는 자와 함께 고통받는 것, 강자가 약자를 무릎꿇고 섬기는 것,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의 공의에 그 어느 때보다도 배고프고 목마릅니다.
애통하는 마음이 제 마음을 가득한 것이 지금보다 더 한 때는 없었습니다.
심령이 지금처럼 가난해져 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약속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배부르게 하시고, 위로하시고, 부요하게 하시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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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왕되심 선포

"예수님은 나의 왕이시다."

최근 기독교 일부에서 시도하고 있는 예나왕(예수님은 나의 왕) 운동. 그것은 바람직한 운동이고 확대되어야 할 운동임의 분명하다. 하지만 세상이 "예수님이 왕이야?"고 물을 때 용기 있게 "그렇다. 예수님이 왕이시며."라고 대답할 준비를 하고 실재 그렇게 하면 되는걸까?

만약 이 시대의 표준적인 교인들이 그렇게 대답한다면 세상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적어도 내 생각에는 박장대소를 하면서 더 큰 조롱이 소위 우리의 왕이라 불리우는 예수님께 쏟아지지 않을까?

대부분의 교회에서 이미 예수님은 그 왕위를 찬탈 당한지 오래다. 그 자리에 담임목사의 절대 권력, 맘몬사상, 출세, 권력을 향한 욕망, 세상보다 더 지저분한  욕정들이 대신하고 있다. 최근 교인이라는 이름으로 치부를 드러내는 정치인들은 교회의 예외적인 현상이 아니라 민낯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교인들이 예수님을 왕이라고 선포하면 선포할수록 오히려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아이러니가 현실이다. 이 기형적이고 가슴아픈 현상에 기여하는 자들은 소위 교회의 리더들이나, 그 핵심에는 목화자들이 자리하고 있다. 마치 하나님을 가장 경외해야 할 제사장들이 주축을 이루었던 사두개인들처럼, 믿음의 한 가운데 있어야 할 목회자들이 오히려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주요그룹에 있는 것이다(물론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다,).

가슴이 아프다. 예수님을 왕으로 선포하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것들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그에 걸맞는 삶을 살기 위한 분투가 따라야 한다. 믿는 자들 개개인의 세상의 도덕 기준을 훨씬 능가하는 삶과 그런 삶을 지향하는 모습이 너무나 중요하다. 그럴 때에야 내 입으로 고백하는 예수님의 왕되심에 세상이 진지하게 반응할 것이다.

최근 장로 대통령으로 시작해서 많은, 소위 기독교 관련 인사들의 작태를 보면서, 그리고 그런 그들을 호위하고 감싸는 교회의 흉측한 망동을 보면서, 마음 속에 깊은 탄식이 흘러 나오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Soli Deo Gloria!


우리의 삶에 이 모토가 각인되어 있다면, 우리가 입을 벌리지 않아도, 이미 세상은 적어도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왕이라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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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환의 추모 노래


그렇게 울고, 그렇게 분노하고, 그렇게 미안했는데... 아직도 눈물이, 분노가, 미안함이 많이, 아주 많이 남아 있다는 것. 이 노래를 들으면서 새삼 깨닫는다.

이제는...
무기력과 슬픔과 분노와 미안함을 간직한 채, 뭔가를 시작하련다.
가만히 있지 않으련다.
반드시 이 세상을 바꾸고야 말겠다.




꿈의 소풍을 떠나 부디 행복 하여라--안치환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야속한 시간만 흘러가고
그렁한 눈망울만이
저 검은 바다를 응시할 뿐

제발 꿈이라면 좋겠어
숨죽인 기도의 노래도
부서지는 파도를 따라
아무 흔적도 없이 흩어져 버려

기적을 바랬지만 생명을 원했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대답없는 꽃이여
천국이 있다면, 천국이 있다면
꿈의 소풍을 떠나 그곳에서
부디 행복하여라

미안해

꿈의 소풍을 떠나 부디 행복하여라


마지막까지 불렀을 이름
엄마.. 엄마
다가온 절망의 그림자
끝내 오지 않는 삶의 끈이여

기적을 바랬지만 생명을 원했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대답없는 꽃이여
천국이 있다면, 천국이 있다면
꿈의 소풍을 떠나 그곳에서
부디 행복하여라

미안해

꿈의 소풍을 떠나 부디 행복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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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함민복 시인의 추모시

창비 페이스북에 실린 함민복 시인의 세월호 추모시

함민복

배가 더 기울까봐 끝까지
솟아 오르는 쪽을 누르고 있으려
옷장에 매달려서도
움직이지 말라는 방송을 믿으며
나 혼자를 버리고
다 같이 살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갈등을 물리쳤을, 공포를 견디었을
바보같이 착한 생명들아!
이학년들아!

그대들 앞에
이런 어처구니 없음을 가능케 한
우리 모두는...
우리들의 시간은, 우리들의 세월은
침묵도, 반성도 부끄러운
죄다

쏟아져 들어 오는 깜깜한 물을 밀어냈을
가녀린 손가락들
나는 괜찮다고 바깥 세상을 안심시켜 주던
가족들 목소리가 여운으로 남은
핸드폰을 다급히 품고
물 속에서 마지막으로 불러 보았을
공기방울 글씨

엄마,
아빠,
사랑해!

아, 이 공기, 숨 쉬기도 미안한 사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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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을 잃어버린 교회

온 나라가 세월호의 슬픔 때문에 고통당하고 우울해 하고 있는 요즘. 일부의 말대로 국민들이 일상으로 돌아가고자 노력해야 한다는 말에 동의한다. 언제까지나 아파하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
하지만 개인이 그런 노력을 기울이는 것과는 별도로 지도자들, 특별히 영적 지도자들은 이 엄청난 사건에 대한 깊이 있는 해석을 통해서 "의미"를 도출해 내고 그것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는 일을 감당해야 한다. 그것이 그들이 이 땅에 존재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이니까...
그런데, 최근 내가 듣는 대부분의 설교(한 설교를 제외한 모든 설교)에서 이 참사는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고 있다. 거의 언급이 없거나, 아니면 지나가면서 안타깝다는 정도의 의사표현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 가운데서 전해지는 성경 말씀은 왠지 공허하게 들린다. 오늘 내가 다니는 주일설교에서 복음이 전해졌다. 전도를 위한 새가족 초청잔치이기 때문에 복음을 설명하는 내용이었지만, 그 참사와는 (혹은 현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그저 기계적이고 도식적인 복음의 설교는 그 어느 때보다도 공허해 보였다.
치열한 고민이 없이 전해지는 복음.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타락한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이 소식이 이처럼 의미없게 들린 적은 내 인생에 단 한 번도 없었다.
사실 지금이 그 어느 때보다 복음이 필요할 때이다. 믿는 사람에게 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에게도 하나님의 위대한 복음은 진정한 소망이 된다. 아니 유일한 소망이다. 온 나라를 비통하게 만들었던 이 사건을 해석해 내고,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근거도 복음에 있다. 그 복음으로 아파하는 자와 함께 아파하며, 고통하는 자와 함께 고통하는 가운데,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참된 희망의 메시지를 던지는 것이 바로 복음의 능력이 아닌가?
그런 메시지를 줄 수 없는 교회는 이미 능력이 없는 교회이며, 이 땅에 존재 이유가 없는 그런 교회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아니 뒤집어 생각해 본다면, 그런 메시지를 도출할 능력이 없는 교회이기 때문에 그런 참사를 막을 사회적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고, 소금으로서의 짠 맛을 잃어버리고, 그 비극의 탄생에 동참한, 혹은 그것을 주도한 세력이 되어 버린 것 아닌가?

안타깝고 비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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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내 아픔.

세월호 사고로 인해 내 인생에서 가장 우울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올해 1월 말에 어머니께서 돌아가셔서 매우 슬펐지만, 지금처럼 우울하지는 않았으며, 분노하지 않고, 미안한 마음은 없었다. 어머니가 그리울 뿐,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하지 못했던 것을 아쉬워 했을 뿐... 하지만 지금은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수시로 터져나오는 눈물은, 죽음 당한 무고한 생명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내 자신과 사회와 정부를 향한 분노와, 눈 앞에서 사라져가는 생명들을 보고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에서 비롯된 무기력감, 그리고 아이들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다.
온 국민이 겪고 있는 이 슬픔과 충격이 어떤 결과를 낳게 될지 모른다. 적어도 지금 보이는 조짐으로는 전과 그리 많이 다른 세상을 만들어 가는 그런 기폭제로 사용될 가는성은 적어 보인다. 그것이 참 암울하다.

그런 상황에서 한 가지는 꼭 집고 넘어갈 것이 있다.
사고 직후 어린 생명을 애도하는 일부가 슬퍼하며 학생들에게 어른들의 말을 듣지 말고 탈출했었어야 한다며, 교실에서 복종을 강요하는 교육 시스템에 대해서 비난했다. 그 상황에서 아이들이 가만히 있으라는 안내를 듣고 그대로 있었기 때문에 비극이 커졌다는 것을 안타까와 하는 마음에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이다. 아이들이 그 안내보다는 상황을 판단해서 그 안내를 어기고 탈출했더라면 일이 이 지경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인 듯하다.
우리나라 교육에 문제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아이들이 순진하게 안내방송을 믿고 그대로 있었기 때문에 더 많은 희생자가 나온 것도 사실이다. 이 것이 참 가슴 아프게 한다.
하지만 일부가 말하는 것처럼 사고가 발생했을 때, 안내방송을 따르지 않고 독자적으로 판단해서 그 위기를 탈출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발상이다. 그럴 때일수록 안내방송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승무원의 안내에 따라 그들에게 적극적으로 협조해야 한다. 그래야 살 수 있는 것이다.

아이들은 잘 못한 것이 없다. 비록 그들이 안내방송을 철석같이 믿음으로써 죽음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잘못은 그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일이 다시 발생한다 하더라도 그 아이들은 반드시 그렇게 해야한다. 문제는 어른이며, 문제는 승무원들이며, 문제는 그들을 "구조"하러 간 어른들이다. 그들이 자신들이 해야할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착한 아이들을 죽음으로 내 몬 것이다.
슬픔은 이해하지만, 그래서 여러 가지 생각 가운데 아쉬움이 남는 것은 이해하지만, 본말을 전도하지 않기를... 사건의 본질을 흐리지 않기를... 더 위험한 생각들을 아이들에게, 그리고 더 나아가 모든 사회 구성원들에게 퍼트리지 않기를...

아프다... 정말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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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마지막 시간

지난 수요일 저녁. 동생으로부터 다급한 전화를 받았다.
"어머니께서 위독하시네."
췌장암으로 고생을 하시다 폐에 물이 차고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자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하신 어머니를 뵈러 다녀 온지 이틀만이었다. 그 소식에 광주로 내려 와서 지금까지 머물고 있다.
처음에는 앉으셔서 나를 알아보시던 어머니께서 급격히 상태가 악화되셨다. 하루가 다르고 오전과 오후가 다르게 나빠지시더니 결국 4일만에 움직이지도 못하고 신음소리만 내시는 상태가 되셨다.
고통으로 몸부림치시는 어머니를 보는 것은 정말 고통스럽다. 하지만 그 몸부림도 치지 못하시는 지금의 상태도 그에 못지 않게 고통스럽다.
평생을 지극한 고난 가운데서 그 모진 역경을 이겨내시고 네 아들을 키우신 어머니. 아들들이 모두 장성했음에도 그 아들들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청소일을 하시며 악착같이 돈을 모으셔서 당신의 병원비와 장례비를 마련해 놓으신 어머니. 내게는 그 누구보다도 강인한 인간의 표상이었던 어머니께서 아무 하이 없이 병상에 누워 계신다. 아픈 몸을 뒤척일 기력도 없이... 내 인생의 지주이고 중심이셨던 분. 내 고향이신 어머니의 마지막 시간. 그 어머니의 부재를 어떻게 감당할 것인지 아직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그래도 극심한 고통에서 속히 놓여 하나눔의 품에서 안식하시기를 기도할 수 밖에 없다.

하나님! 어머니를 붙잡아 주시고, 평안으로 인도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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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념 하나...

나는 늘 생각한다.
이 사회를 지금보다 더 낫게 만들 수 있는 길이 무엇일지...
내가 직접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또 그런 사회를 만들 능력과 비전이 있는 차세대 지도자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그들을 내가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
야당은 물론 여당에도 내 마음에 품고 있는 정치인들이 있다. 각기 다른 특성을 가진 사람들이지만, 적절한 때에 이 나라를 이끌게 된다면 우리 나라와 세계에 큰 도움이 될 만한 사람들... 그들이 그들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도록, 그리고 바른 이상을 품을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는 것은 이 땅을 살고 있는 지식인의 의무가 아닐까?
학생들이 바른 시민의식을 가지고, 각자의 능력으로 사회에 공헌할 수 있도록 교육시키는 것과 이 땅을 좀 더 나은 사회로 만들기 위한 연구는 내 인생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이고 결코 타협할 수 없는 평생의 과업이지만, 그것에 머무르지 않고 어떤 식으로든 사회에 기여하는 삶을 살고 싶다.

허덕일 수 밖에 없는 과도한 논문 업적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 현실을 볼 때, 어찌보면 사치스러운 고민이지만, 나를 지금 여기까지 키워주고 보살펴준 이 사회에 대한 은혜를 잊어버리고 살 수는 없지 않은가? 고민하는 가운데 탐색하는 작업이 계속되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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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 아픔, 아픔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깨끗하고 흠이 없는 경건(=종교)은, 고난을 겪고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주며, 자기를 지켜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야고보서 1장 27절)


오늘 아침 묵상 본문.


진정으로 경건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면, 진정한 "종교"를 가진 사람이라면, 반드시 그 삶에서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과 배려, 그리고 세상적 가치관으로부터 자신을 정결하게 지키는 분투가 공존해야 한다.


소위 믿는 자가 사회정의와 분배의 문제에 무관심하고 개인 차원의 "믿음생활"에 머문다면, 그것은 기형적인 믿음이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땅히 해야할 것을 져버리는 것이다.


내가 작금의 사회를 보면서 가슴이 이토록 아픈 것은, 그리고 그것을 타개하기 위해 기도하면서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를 찾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내 개인의 이익이나 미래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 그분의 최대 관심사인 "고아와 과부"들이 억압당하고 있는 그 현실이 하나님의 가슴을 얼마나 아프시게 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내 아버지, 내 하나님의 그 아픔이 내 마음으로 전달된다. 그것이 나를 너무 고통스럽게 한다.

이런 악함을 그냥 지켜보고 있기만 한다면, 나는 비겁자이고, 죄악을 저지르는 것일 터이다. 세상의 방법은 아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해야할 역할, 행동을 찾아야 할 때이다.

정말...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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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먼저입니다. --유기성 목사님

유기성 목사님께서 페이스북에 남기신 글입니다. 요즘 그분의 묵상을 보면 깊이가 날로 더해가고 더 존경스러운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반의 반의 반의 반이라도 따라갈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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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느 목사님께서 설교 중에 자신의 시험 실패담을 이야기하셨습니다.
대학 다닐 때, 전공 시험을 치렀는데, 시험지를 받아보니 논술형 문제 하나였답니다.
열심히 답안을 작성하였는데, 석장을 빼곡히 썼답니다.
시험을 보고 나오면서 ‘혹시 수석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 아닌 걱정을 했을 정도로 답안을 잘 썼는데, 낙제였습니다.

2. 교수님을 찾아가서 왜 낙제냐고 항의를 했더니, “네가 교수해라!” 하시면서 “시험 문제에 대한 대답을 써야지 네가 할 말만 잔뜩 썼지 않았느냐?” 하시며 야단을 치셨답니다.
시험지를 받아들었으나 질문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어서 ‘정성이라도 다하자’ 하는 마음으로 아는 것을 다 썼답니다. 그리고 밑줄도 치고 중간 중간에 꽃도 그려 넣고 최선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답안지를 작성하였답니다.
그러나 교수님이 제시한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니었기에 낙제라는 것입니다.

3. 그러면서 목사님은 ‘우리가 인생을 이렇게 사는 것이 아닙니까?’ 하며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정성을 다하고 최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열심히 살지만 그렇게 살았다고 합격한 인생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목적대로 살아야 잘 사는 것입니다.
그러러면 하나님을 알아야 하고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하고 인생의 목적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4. 제 목회의 삶을 돌아보면서 가장 반성이 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목회를 열심히는 했습니다. 저 나름대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파악했는지에 대하여는 자신이 없는 것입니다.

5. 행 16장을 보면 사도 바울의 아시아 전도를 성령 하나님이 막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전도는 너무나 중요합니다. 그러나 전도가 아무리 중요해도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하지 않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는 것을 깨우쳐 줍니다.

6. 사도 바울은 모든 길이 막힌 것 같은 때에 성령의 인도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열린 문이 비로소 보였습니다. 동서남북이 다 막혔는데, 바다를 점프하여 유럽에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었습니다.

7. 사도 바울의 위대함은 성령께서 그 길을 막으실 수 있었던 사람이었다는 데 있습니다. 보통은 성령께서도 못말립니다. 한다면 하고 안한다면 안합니다.
열심히 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마음대로 목회하고 선교하고 사역하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최선을 다하는 열심 보다 중요합니다.

8. 어느 집사님이 목회자로 부름을 느끼지만 주님의 확인이 없다고 상담을 왔습니다.
‘주님이 부르셨다면 왜 주님의 확인이 없을까?’ 생각하면 물었습니다.
“하나님의 어떤 확인을 기대하십니까? 신대원에 갈 길이 열리지 않습니까? 아니면 고생할 걱정 때문입니까?”
대답을 못하고 우물쭈물 하더니 ‘먹고 살 길이 막막하다’는 것이었습니다.

9. 대부분 하나님의 확인을 구하는 이유는 고생하지 않을 길을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분명히 “가라” 하셨다는 확인을 그렇게 얻으려는 이유는 그러다가 어려워지면, 실패라고 여겨지면 하나님이 책임지라는 것입니다.

10.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마음을 정직하게 분별받는 일에 용감해야 합니다.
합리화하지 말아야 합니다. 숨기지 말아야 합니다.

11.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기가 힘들다고 말합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분명히 말씀하시지 않으셔서 문제일까요? 
아닙니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뜻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12. 빌리그래함 목사에게 평생 세 번의 큰 유혹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한번은 큰 대학교의 총장으로 와달라는 청빙이었고, 한번은 상원의원에 출마하라는 제안이었고 한번은 부통령으로 출마하라는 제안이었답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자기 영광을 위한 욕심임을 알고 거절했다고 했습니다.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부름은 전도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빌리그래함이 있었던 것입니다.

13. 정말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데도 해결안되는 문제가 있습니까?
‘고생도 좋습니다. 죽음도 좋습니다’ 하면 이미 하나님의 뜻이 확실한 일이 많습니다.

14.우리가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자’임을 분명히 하고, 24 시간 주님을 바라보면서 “예수님은 나의 왕십니다” 고백하면 누구나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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