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교육이다!


플라톤은 "국가론"에서 왕정, 귀족정치, 공산주의, 민주주의 중 민주주의가 가장 위험하고 좋지 않은 제도라고 평가했다. 그것은 민주주의가 중우정치로 변질될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었다. 어찌보면 그는 민중의 판단 능력을 신뢰하지 않는 엘리트 주의자였던 것 같다. 그래서 그가 제안한 것은 철인정치. 그것은 일종의 왕정, 혹은 독재정치로서 모든 권력이 집중되는 독재의 자리에 가장 현명한 철학자를 앉힘으로써 사회를 위해 최선의 정치를 펼치는, 일종의 이상적인 사회를 꿈꿨었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비현실적인지는 그와 비슷한 정치체제를 갖췄던 Pax Romana 시기의 로마에서 엿볼 수 있다.

오늘날 한국의 정치상황을 볼 때, 일부 대선후보에 대한 맹목적인 지지를 보내는 대중을 볼 때, 플라톤의 사상이 옳은 것 아닌가하는 회의가 강하게 밀려온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인정치는 답이 아니다. 대안이 될 수 없다. 오히려 민주주의를 강화시켜나가는 것이 정답이다. 유권자들의 의식을 성숙시키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바른 방향인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교육의 문제는 바로 우리 나라의 운명에 직결됨을 알 수 있다. 민주사회에서 교육의 최고 목표는 성숙한 시민의 육성이 되어야 한다. 독립적으로 사고하고, 건전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그런 "시민"의 육성이 핵심이다.

그런데 과연, 우리의 교육은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대통령이 바뀐다면 물론 세상이 바뀔 것이다. 하지만 근본적인 변화는 교육의 변화에서 온다. 초등학교부터 민주시민의로서의 소양을 갖추는 일에 강조점을 두는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불행한 역사의 반복으로부터 우리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문제는 교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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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


지난 토요일 지금은 은퇴하신 영문과 원로 교수님이신 이상옥, 천승걸, 김명렬 선생님들과 제자 교수님들 몇 분과 함께 산행을 했다. 학생때 무서워서 자주 피해 다녔던 이상옥, 김명렬 선생님, 그리고 미국문학에 대해서 많이 가르쳐주신 천승걸 선생님.
하늘 같이 높은 그분들과 같이 산행을 하는 가운데, 유쾌하고 따뜻한 그분들의 일 면을 볼 수 있었다. 제자들이 찾아와 같이 하는 산행을 즐거워하시는 그 모습. 막내도 아주 갖난 애에 불과한 나에게 등산용 컵을 주시며 "이제 멤버가 되었으니 꼭 나와야 한다"고 장난 스럽게 말씀하신 선생님들과 즐거운 산행을 하는 가운데 그분들 밑에서 배우던 학창시절이 떠올랐다.
그리고 오늘 우리나라 최고의 문장가 중의 한 분이신 김명렬 선생님께서 잊지 않으시고 당신의 글 한편을 나에게 이메일로 보내 주셨다. 역시나 명문장...
학자로서 한 시대를 풍미하셨고, 우리 나라 영문학 교육의 틀을 세우신 원로 선생님들께서, 특히 암과 싸우고 계시는 천승걸 선생님께서 건강하게 오래 사시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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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27

화요일인 어제 중요한 프리젠테이션이 있었다. 잘 해야하는 것이기 때문에 월요일 저녁에 집에서 프리젠테이션 연습을 했다. 많이는 못했지만 두 세번 정도 전 과정을 연습했고, 조금은 개선 시킬 수 있었다.
아빠가 오랫만에 집에 일찍와서 혼자서 중얼거리는 모습을 본 딸들... 나름 대로 사안의 중요성을 알고 이런 저런 피드백을 주었다. 감사하게도...
연습을 어느 정도 마무리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요즘은 막내의 개인 사정상 막내가 아내와 자고 나는 큰 애랑 같이 이층침대에서 잔다.
자리에 누워 있는데, 윗층에 누워 있던 하연이가 말을 꺼낸다.

"아빠?"
"왜?"
"저기, 프리젠테이션 할 때 앞에 있는 사람들을 자주 쳐다봐야하는 것 같아요."
"그래?"
"예. 얼마전에 영어말하기 대회에서 내 친구는 앞을 자주 쳐다보면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했고, 나는 중간에 잊어버릴까 봐서 앞을 못보고 써서 가져간 종이만 봤는데, 친구가 상을 탔어요."
"그렇구나~~"
"예. 그러니 종이만 읽지 말고 앞에 있는 사람들을 자주 보면서 하세요."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큰 애의 조언에 참 감사했다. 아빠를 위하는 마음, 그리고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주는 그 조언. 내용보다 마음에 감동했다.

"알았다. 정말 고맙다. 내일 프리젠테이션 할 때 꼭 명심할께."
"예, 안녕히 주무세요."
"잘 자라!"

그리고 그 다음날, 프리젠테이션 시간에, 하연이의 그 조언이 내 머리속을 떠나지 않았다.

비록 초등학생의 조언이지만, 내 딸이 벌써 이렇게 커서 아빠에게 조언을 해줄 정도가 되었다니... 참 대견하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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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왜?

늘 떠오르는 질문...
그 대답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뻔히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터져나오는 질문... 왜?

장로교 목사이자 신학자로서 매우 존경하는 RC Sproul 교수. 지난 7년 동안 그의 강의와 설교를 거의 날마다 빠짐없이 들으면서 느낀 것은 탁월한 그의 신학적 지식, 특히 조직신학적 지식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그의 사랑과 충성의 크기가 대단하다는 것이다. 물론 사람 속이야 내가 절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지난 7년간 그의 강의를 통해서 느낀 것은 그것이다.
그는 이 시대의 선지자요, 하나님의 말씀을 깨우는 등불이다.
그런 그의 사랑하는 아들인 RC Sproul, Jr. 경제학 박사이자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헌신된 그는 사랑하는 아내를 암으로 먼저 떠나 보내야만 했다. 그리고 남은 아이들(친자식들과 입양한 아이들)을 혼자서 키워내는 어려움을 감내해야만 했다. 사랑하는 아들의 아픔은 곧 부모의 아픔. Sproul교수도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그런 그들이 작년에 방송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대담을 하는 것을 들었다. 가식이 아니라 진심에서 나오는 고백. 비록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하셨는지는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것이 최선이라는 것...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그들의 고백은 참 아름다왔다.

그런 그들에게 닥친 또 하나의 비극.
Sproul 교수의 손녀이자 Sproul, Jr.의 딸,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지만, 집안의 기쁨이었던 그 딸인 Shannon을 하나님께서 데려가셨다. 할아버지가 "인간의 사는 목적이 무엇인가?"라고 질문했을 때, 이제 막 말을 배우기 시작한 Shannon이 "For the gory [glory] of God."라고 앙증맞게 그렇지만 진지하게 답하던 그 아이. 할아버지가 방송에서 강의하면서 너무 대견해 하면서 자랑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그 천사같던 아이를 하나님께서 데려가신 것이다.
그들의 아픔은 얼마나 클까? 아무리 신학자요 믿음에 뛰어난 사람들이라 해도 그 가슴에 남을 그 아픔은...

하나님을 그토록 사람하는 사람들에게 왜?

아픔과 눈물과 이별과 죽음이 없는 그날... 그 날을 간절히 소망하며, Sproul 교수와 그 아들에게 하나님의 큰 위로가 있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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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ologetics without love...


이 시대의 가장 뛰어난 기독교변증론자인 Ravi Zacharias가 한 말: "Apologetics without love is simply decapitating the people in front of you." 가슴에 깊이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 사실 apologetics는 노력과 지적 능력으로 어느 정도의 수준에 오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사랑에 뒷받침이 되지 않는다면, 엄청난 상처와 폐해를 가져올 수 밖에 없는 가공할 무기가 되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이다. Zacharias가 말하는 그 사랑이란 성경적인 사랑이고, 그 사랑은 성령의 능력이 아니면 절대로 우리 안에 갖출 수 없는 것이다. 오로지 하나님 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랑은 사랑의 공급원이신 하나님 당신과의 끊임없는 친밀한 교제로만 우리 안에 전달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내가 하나님과 매우 친밀한 사랑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지 않는다면, apologetics는 오히려 독이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는 세대에 apologetics는 참으로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그 지식이 결코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 사람의 마음을 한 치도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지 않는다면, 선무당이 사람잡듯 위험한 지식이 되는 것이다.

결국...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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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보험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촛돌이라 그것을 믿는 이는 다급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 (사 28:16)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히 심판의 날을 피하는 보험이 아니다. 믿음은 그 이상이다. 믿음의 본질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며, 그분과 깊은 교제 가운데 그분을 닮아가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길을 따라가는 가운데 내 모든 삶의 영역에서 그분의 모습이 드러나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것이 믿음의 본질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보장성 보험의 성격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성경이 말씀하시듯,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크게는 심판의 날, 작게는 개인적인 종말이나 환난의 때에 다급하게 허둥대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보호자가 되시고, 그분 덕분에 하나님의 심판이 우리를 피해가며, 설사 환난과 마주한다 하더라도 이 세상의 주권자시고 왕중의 왕되신 그분을 믿는 믿음 가운데서 묵묵하게 환난을 견딜 수 있기 때문이다. 그분이 피할 바위가 되시는 경험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주의 미아로 던져진 채 아무 의지할 바가 없어, 돈, 권력, 인맥, 학벌 등으로 환난날 자신의 피할 바위를 삼으려고 하는 헛된 세상의 노력과는 비교할 수 없이 견고한 보호막.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다.
여호와를 송축하라! 그분께 감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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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책 중 나누고 싶은 부분들...

" . . . 기독교 신앙이 지난 세월 동안 우리 겨레를 감화시켰던 불교나 유교처럼 공평무사한 지도자와 인재들을 배출해 내고 있는가? 참으로 가슴에 손을 얹고 같이 고민해 볼 질문이 아닐 수 없다. 적어도 우리 세대는 근현대사의 초입에 한국교회가 발휘했던 지도력을 충분히 계승하는 데 부족함을 보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한국교회의 영적 쇄신과 신학적 사유의 성숙, 신앙 실천의 심화를 통해 한국 사회를 공평과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공동체로 변혁하라는 사명에 직면해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여기서 단지 한 나라의 중심 종교가 불교나, 유교나, 기독교냐에 대한 관심을 피력하는 것이 아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어떤 종교의 신앙 실천이 하나님의 통치 원리에 더욱 충실하느냐이다. 기독교회는 스스로 주창하는 그 절대적 진리(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신봉자답게 절대적 의미의 진리 실천에 투신해야 할 사명을 수행해야 한다.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기독교 신앙의 절대적 옳음을 스스로에게 선포하고 그 실천의 책임을 능히 감당해야 한다. 타종교에 대한 피상적 우월감을 피력하거나 우리 민족사의 한 시기에 상당한 고등종교 역할을 맡았던 타종교를 폄하하는 것은 교회 본연의 복음 전파의 일부가 아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이 확실한 진리를,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자신에게 각인시키고 실천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애국가는 대한민국이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때까지 존속되기를(대한민국 만세!) 희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한민국이 하나님 나라를 닮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다니엘서 5장의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계시가 아닐 수 없다. 하나님께서 한 나라의 왕의 통치 연대를 정하시기 위해 가난한 자들에 대한 공동체의 사랑과 돌봄, 권력 엘리트들의 탈법과 불법에 대한 사법적 견제력, 그리고 억울하게 희생당한 사회 구성원들을 위한 사회적 재활 및 복구 에너지의 양 등을 측량하셔서 나라의 존속 연대를 정하신다는 사실을 참으로 두렵고 떨리는 진리로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런 벨사살 같은 자는 세계 도처에 있다. 그들은 자신을 존숭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이 이룬 성취에 도취되어 자신의 성취가 가져다 준 권력을 극단까지 사용한다. 멸망의 날 직전까지도 그들은 알지 못한다. 현대는 가히 자아숭배의 세기다. 자기를 숭배하고 자기 매력을 극대화하고 상품화하여 이익을 얻으려는 시대다. 과도한 자부심 문화와 자기선전 문화가 지배하는 현대 사회에서 때때로 교만은 악이 아니라 덕처럼 칭송받는다. 운동 경기나 전쟁, 시장을 선점하기 위한 경쟁에서 이긴자들의 자기도취적 환호성은 어디서나 들을 수 있다. 우승한 선수들의 자기영화적 도취, 이긴 자들의 함성 등, 세계는 온통 이긴 자들의 자기자랑 이야기로 가득차 있다. 이들은 벨사살과 같은 인간들이다. 벨사살처럼 자기 권력과 부귀영화에 취해서 하나님의 저울을 무시하는 자가 바로 무신론자다. 그는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고 전능하신 분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교만은 인간의 자아를 무한히 부풀려, 하나님은 너무 작게 보이게 하고 자신은 너무 크게 보이게 만든다. 부풀려진 자아를 가진 인간에게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다. 교만의 죄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도 이해할 수도 없게 만든다."

--김회권, <<하나님나라 신학으로 읽는 다니엘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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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


지난 토요일에 있었던 두 사랑하는 지체들의 결혼식 안내문...

행복하기를, 승리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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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자들... 하나님 나라와 특별한 관계에 있는 집단"

"신학적으로 보면, 가난한 자들은 하나님 나라와 특별한 관계에 있는 집단이다. 현대 경제학에서 보면 이들은 경제 발전의 어둔 음영에 사는 자들로서 기껏해야 복지정책의 수혜자일 뿐 거의 "없는 자"처럼 취급당한다. 나라의 각종 경제지표를 하향 평준화하는 존재다. 한마디로 국민 대우를 충분히 누리지 못하는 존재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력 있는 국경선은 미국과 러시아, 한국과 일본, 동구와 서구 사이에 그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들과 가난하지 않은 자들 사이에 그어져 있다. 그 국경선 이쪽과 저쪽은 너무나도 다른 나라다. 가난한 자들이 중심적 지위를 차지하는 곳은 하나님 나라밖에 없다. 그래서 경제학에서는 천대받는 가난한 자들이 신학적으로는 우대받는다. 하나님 나라는 가난한 자들의 상속 자산이기 때문이다(눅 6:20; 마 5:3). 이런 이유로 가난한 자들은 하나님의 특별 계약으로 묶여 있는 특별 백성이라 불린다. 이 말은 어떤 특정 정치 이데올로기를 신격화 하는 말이 전혀 아니다. 공산당이나 노동당 등 특정 정당의 우월적 지위를 인정하는 말은 더더욱 아니다. 정치 조직으로 자신의 권리를 주장조차 하지 못할 연약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관심은 모세오경, 예언서, 잠언서와 시편, 공관복음서, 바울 서신 등 성경 66권 전체에 걸쳐 일관되게 강조된다.
(중략)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의 도덕적 선량함 때문에, 또 가난한 자들이 순박하고 상대적으로 선하기 때문에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지상의 권력구조 속에서 아무에게도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할 수 없는 절대 고독자인 가난한 자들의 눈물과 탄식에 슬픔과 동정을 느끼시는 자비로운 하나님이시며, 착취와 압제, 자원 약탈과 기회 박탈 등 불의한 사회구조에 분노하는 공의로운 하나님이시다. 이런 점에서 신학은 경제학과 정반대의 입장에서 가난한 자들을 바라본다. 가난한 자, 장애인, 연약한 자들은 하나님의 특별 호의와 복을 촉발하는 신학적 자산이다. 그들은 결코 이방인도 아니요 주변인도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애로운 시선과 거룩한 보호를 누리는 선민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가난한 자들을 우대하는 나라가 하나님 나라와 동맹을 맺은 나라다."

--출처: 김회권, <<하나님 나라 신학으로 읽는 다니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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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 하나 더...

지난 주 토요일 밤에 정말 오랫만에 TV를 켰는데, 볼 만한 프로가 거의 없었다.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다가 어느 방송사의 유엔 사무총장인 반기문씨에 대한 프로에 시선이 멈췄다.

그가 어떻게 유엔 사무총장이 될 수 있었는가에 대해서 성공요인을 분석한 것이었다. 그 프로에서 꼽은 첫번째 요인이 바로 영어. 방송은 그의 영어가 매우 "유창하다"고 설명했다. 그 영어로 인해서 세상을 알게되고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알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영어로 말하는 그분을 보면서 오히려 나는 반대의 생각을 했다. 그분의 영어는 결코 유창하지 않았다. 적어도 발음으로 볼 때는... 요즘 젊은 세대의 기준으로 볼 때는 중하위권도 들 수 없을 만한 영어였다. 그분의 영어를 보면서 '저렇게 영어를 못하는데도 유엔 사무총장이 될 수 있구나!'하는 생각을 가졌다.

하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 볼 때, 그분이 결코 영어를 못하는 분이 아니었다. 오히려 어느 정도는 "유창했다." 무슨 말인가? 그것은 발음의 차원이 아니라 영어를 구사하는 차원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영어 발음은 영어의 작은 한 요소에 불과하다. 발음이 영어의 전부는 아니다. 결코 아니다. 오히려 중요한 부분도 아니다. 특별히 몇 개의 발음만 주의한다면 발음문제는 외국인으로서 충분히 봐 줄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단어와 문장의 구사력이다. 물론 반총장님의 영어에서 콩글리시의 흔적을 자주 볼 수 있었지만, 발음에 비해서 문장 구사력이 더 뛰어남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유창함"은 발음도, 문장 구사력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분의 문장 구사력이 발음보다 뛰어나다고 하지만, 객관적인 기준으로 본다면 중간정도의 수준에 불과하다. 사실 그분의 영어실력이 특출나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세계의 이목이 그의 입에 집중되며 공감하며 감탄하는가? 그것은 영어라는 포장지에 실려 나오는 그분의 사상과 철학과 삶과 리더십이다. 결국 반총장님은 그분이 가진 그 무엇, 그 콘텐츠로 세상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세계 평화를 위한 그의 열정, 자신감, 그리고 그분의 인격에서 품어져 나오는 인간적인 매력과 리더십이라는 뛰어난 콘텐츠가 바로 그분의 영어를 차원이 다른 연설로 만드는 것이다.

영어 열풍에 빠져 있는 한국사회... 영어를 잘하는 사람들은 넘쳐나지만, 반총장님과 같은 그런 콘텐츠를 가진 사람을 찾아보기가 매우 드물다. 영어라는 포장지만 그럴듯하게 갖출 뿐, 그것으로 담아낼 그 뭔가를 부단히 배우고 또 생각하고, 고민하는 것이 없다. 영어라는 포장지에 담아낼 그 무엇이 없다면, 그 포장지는 휴지조각일 뿐이라는 것... 그것을 명심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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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

출퇴근 길 이용하는 마을버스 안에 있는 화면을 통해서 보여지는 아이돌 그룹들의 뮤직비디오를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은... 잘 훈련되고 잘 만들어진, 하지만 혼이 없는, 엔터테인먼트 기계(혹은 자동인형) 같다는 것이다.
음악을 통해서 낭만과 사랑과 현실의 어려움에 대한 위로를 받아왔던 나에게는, 오히려 더 현실적이고, 자본주의의 냄새가 강하게 나는 상품화된 그들의 소위 "음악"이 진열대의 하나의 상품처럼 친근감이 없다. 오히려 재벌의 행태를 본받아 그 전철을 밟아가는 연예기획사의 그 막강한 힘이 느껴져 거부감이 더해갈 뿐... 영혼 깊숙히 울리는 울림이 아니라, 말초신경의 감각에 호소하는 그들의 춤과 노래는 피상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천편 일률적인 춤과 노래. 혹독한 훈련과 기획에 의해 만들어진 이미지에 갖혀 사는 그들이 오히려 불쌍하다. 지금은 저렇게 열심히 하고 있지만, 효용가치가 떨어지면 언제든지 용도폐기가 되겠지라는 생각이 든다.

참 암울할 세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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룸살롱

안철수 교수가 룸살롱에 간 것을 본 적이 있다는 미확인 소문에 오늘 급기야 여당의 대선후보까지 나서서 진실을 밝히라고 안교수에게 요구했다.
확인이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룸살롱에 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도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강하게 여론몰이를 하며 안교수의 신선한 이미지에 상처를 내겠다는 의도이리라. 그리고 많은 국민들은 그 소위 '의혹'에 고개를 갸우뚱하며, '안철수가 그런 사람이었어?'라고 의문표를 붙이기를 고대하는 마음이리라. 물론 많은 국민들은 지금까지 늘 그래왔듯이 그런 이미지 놀이, 언론 플레이에 넘어가겠지... 그 전략은 우리 나라에서는 이미 그 효과가 검증된 것이니까...

사실 갔었는지의 여부에 대해서조차도 분명하지 않은 상황이긴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었다치고, "안교수가 룸살롱에 갔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람들은 자기의 경험에 비추어서, 그리고 일반화된 이미지로 그 의미를 거기서 추출하는 것이고, 그것은 진실, 혹은 사실과 동떨어져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여당에서는 바로 이런 것을 가지고 play를 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내 평생에 룸살롱에 간 적이 있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그렇다"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사실이니까...
그렇다면, 사람들은 나에 대해서 무슨 평가를 내릴까?
'세상에... 크리스천이라는 사람이... 그것도 집사가...'
'겉보기는 멀쩡해 보이는데, 뒤로는 할 짓 다 했군...'
'그럴 줄 알았어... 어쩐지... 위선자.'
등등  나는 악한 세상에 속한 자로서, 그 중심에서 할짓 다한 못된, 그리고 위선적인 크리스천으로 낙인찍힐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하지만 정작 "룸살롱에 갔었다"라는 것이 뭘 의미하는지는 아직 모호하다. 사실 이야기 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내가 룸살롱에 갔었던 것은 단 한 번. 군대에 있을 때(그때는 크리스천이 아니었다) 졸병시절, 광주의 한 시내에서 동기 기수 중에서 가장 친하게 지냈던 네 명이 만났다. 그 중 한 명이 대낮인 2시에 술을 먹자고 제안했고, 자기 형님이 룸살롱을 하고 있으니 거기로 가자고 제안했다. 동생이 동기들과 왔으니 술 값을 많이 안 받을 것이라면서... 그 때도 술을 안 마시던 나는 좀 꺼려지긴 했지만, 동기들이 가자고 해서 같이 따라갔다.
지하로 내려간 룸살롱에는 진짜 "룸"이 있었다.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둘러 앉아 술을 먹을 수 있도록 구조가 된 방.. 거게에 네 명의 군바리들이 앉았다. 대낮에... 룸살롱 주인이었던 동기 형님이 들어와 우리들과 인사하고, 먹고싶은 것 뭐든지 먹으라며 푸짐한 과일안주와 여러 안주를 들여 보냈다. 젊은 여자 한 명과 함께...
동기들은 술을 먹기를 원했지만, 대낮부터 술을 먹기가 좀 그랬는지, 그리 많이 마시지 않았고, 술에 입도 대지 않는 나는 안주만 냅다 집어 먹었다. 같이 들어오 여자는 내 동기와 잘 아는 사이인지 룸살롱 영업이나 손님들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고, 동기들은 힘든 군대생활에 대해 푸념하다가 네 시 정도에 룸살롱을 나왔다.
그것이 내 평생에 처음이자 마지막 룸살롱 체험이었다.

내 평생에 룸살롱에 가본 적이 있는가?
물론 있다. 하지만 그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
내 경험이 룸살롱에 갔다는 일반적인 인식과 이미지와 어떤 면에서 일치하는가 혹은 일치하지 않는가?

'안철수 교수가 룸살롱에 갔다'는 주장이 의미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아무것도 없다. 그것으로 안교수를 평가할 만한 내용이 없다는 것이다. 그저 이 이슈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진실이든 아니든 간에 안 교수의 이미지가 그런 것이 문제가 될 정도로 대중들에게 깨끗하게 인식되고 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런 문제를 이슈화시켜야만 했을 정도로 여당에서 안교수에 대한 효과적인 공격거리를 (아직까지는)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룸살롱에 상습적으로 들락거리며 접대받고 접대하며, 여성에 대해서 수많은 추태와 비행을 일삼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당에서, 마치 자신들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듯이 "룸살롱"을 이슈화하는 것이다.

정말... 치졸한 작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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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ily Dickinson의 시 한 편

Success is counted sweetest

By those who ne'er succeed.

To comprehend a nectar

Requires sorest need.

Not one of all the purple host

Who took the flag to-day

Can tell the definition,

So clear, of victory!

As he, defeated, dying,

On whose forbidden ear

The distant strains of triumph

Burst agonized and clear!

이사야 12장


그 날에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는 내게 노하셨사오나
          이제는 그 노가 쉬었고
          또 나를 안위하시오니
          내가 주께 감사하겠나이다!"
할 것이니라.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의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그 날에 너희가 또 말하기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 이름을 부르며
          그 행하심을 만국 중에 선포하며
          그 이름이 높다 하라!
          여호와를 찬송할 것은
          극히 아름다운 일을 하셨음이니
          온 세계에 알게 할찌어다!
          시온의 거민아!
          소리를 높여 부르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가 너희 중에서 크심이니라!"
할 것이니라



You will say in that day:
“I will give thanks to you, O LORD,
for though you were angry with me,
your anger turned away,
that you might comfort me.
“Behold, God is my salvation;
I will trust, and will not be afraid;
for the LORD GOD is my strength and my song,
and he has become my salvation.”
With joy you will draw water from the wells of salvation. And you will say in that day:
“Give thanks to the LORD,
call upon his name,
make known his deeds among the peoples,
proclaim that his name is exalted.
“Sing praises to the LORD, for he has done gloriously;
let this be made known in all the earth.
Shout, and sing for joy, O inhabitant of Zion,
for great in your midst is the Holy One of Israel.”
(Isaiah 12 ESV)



National Geographic photo of the month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 정말 아름답다.

요나를 생각하며...

소위 선지자이지만 하나님의 분명한 명령을 받고도 그 메시지를 전달해야할 곳이 아니라 정반대 방향으로 도망한 자.
자신의 불순종으로 배가 침몰하고 모두가 죽게되었지만, 끝끝내 회개하지 않고 차라리 바다에 던져져 죽음을 택할 만큼 반역적인 자.
바다에서 죽었어야 했지만, 고래를 통해 구원하신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 하나님께 감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이 동일한 인자와 자비로 니느웨 사람들을 구원했을 때, 이를 갈며 하나님께 대들며 차라리 자신을 죽여달라고 함부로 하나님께 망언을 했던 자.
땡볕에서 자신에게 시원한 그늘이 되어주던 박넝쿨을 벌레로 하여금 죽게하시고, 뜨거운 바람으로 고통을 더하신 하나님을 원망하며 저주하며 대들던 자.

요나는 악한 인간의 표상이다. 그런 인간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를 설득하시고 훈계하시고 가르치시는 하나님. 요나서를 보면 마치 하나님의 세계에는 요나 한 사람 밖에 없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집중하신다. 요나가 말을 안듣는다면, 다른 사람을 시켜 그 메시지를 전하면 되는 것인데, 마치 이스라엘, 아니 이 세상에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할 만한 사람이 없다는 듯이 집요하게 그에게 그 일을 일임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때로는 이런 하나님이 낯설게 느껴진다. 이해될 듯 하면서도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처신.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바로 그 요나같은 자, 아니 요나보다 더 흉악한 자가 바로 나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그 반역적인 요나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그를 품으시고 설득하시고 훈계하시는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이 나에게도 적용될 수 있음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른다. 마치 이 세상에 귀한 존재는 나 한 사람 밖에 없다는 듯이, 내게 집중하시고, 나를 관용하시고, 나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나 한 사람을 위해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죽이시기까지 하신 그 사랑을 보여 주시는 하나님. 그 이해될 수 없는 사랑이 바로 요나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다.

요나서는 니느웨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요나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과 사랑을 더 극명히 보여준다. 결국, 다른 모든 성경의 책들처럼, 요나서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가장 중점적으로 보여주며 잘 보여주는 책이다.

요나의 하나님... 그분은 죄인을 오래 참으시는 분이며, 그 크신 자비와 인자로 죄인을 가슴에 품으시는 창조주이시다. 그분이 바로 나의 하나님이다.

감사. 감사.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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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과 세 친구가 부러운 이유

다니엘서를 공부하면서 다니엘과 세 친구인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혹은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참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
그 이유 하나는 다음 구절에 나온다.
"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지식을 얻게 하시며 모든 학문과 재주에 명철하게 하신 외에 다니엘은 또 모든 이상과 몽조를 깨달아 알더라.(As for these four youths, God gave them learning and skill in all literature and wisdom, and Daniel had understanding in all visions and dreams.)"(1:17, 영문은 ESV)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지식을 얻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모든 학문과 재주에 명철하게 하셨다. 학문을 하는 나로서는 가장 부러운 능력이 바로 지식과 학문에 명철하게 하시는 것 아닌가? 공부를 하면 할수록 내가 뭔가를 알아간다는 생각보다는 부족함을 느끼며 내 능력없음을 한탄하는 경우가 훨씬 많은 내 현실을 보면서 하나님으로부터 학문에 대한 능력을 부여받은 다니엘과 세 친구가 무한 부럽기만 하다.

그들이 부러운 또 다른 이유, 더 중요한 이유는 바로 그들의 동역이다.
"이에 다니엘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그 동무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에게 그 일을 고하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이 은밀한 일에 대하여 긍휼히 여기사 자기 다니엘과 동무들이 바벨론의 다른 박사와 함께 죽임을 당치 않게 하시기를 그들로 구하게 하니라."(단 2:17-18)
느부갓네살왕이 범상치 않은 꿈을 꾼 후에 그 꿈이 무엇인지와 그 해석을 동시에 알려라는 추상같은 명령, 어찌보면 불가능한 명령을 내린 후 그 당시 지식인들이 모두 처형될 위기에 처해있을 때, 하나님을 굳게 믿은 다니엘이 자신이 그 일을 감당하겠다고 선언한다. 그것은 자신의 목숨을 건 행동이었다. 만약 그가 말한 대로 왕이 무슨 꿈을 꿨는지를 말하지 못한다면, 그는 왕을 농락한 댓가로 처참한 죽음을 맞이해야 했으면, 자신의 민족 또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그런 위험한 모험이었던 것이다. 그런 절대절명의 상황에서 기도를 부탁할 수 있는 친구들이 그에게는 있었다. 그리고 그 친구들은 마치 자신의 목숨이 걸린 것처럼 간절하게 기도했고, 마침내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에 응답해서 다니엘에게 그 꿈과 해석을 보여 주셨다.
이후로도, 바벨론과 페르시아라는 당시 초강국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지켜가는 데 많은 생명의 위협을 겪었고, 풀무불과 사자굴이라는 죽음의 경계선을 넘나드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그럴 때, 그들은 믿음의 동역자가 있었고, 그 동역자와 같이 함께하는 가운데 넘어지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서로 격려하는 가운데 믿음의 길, 자신들의 목숨과 기득권을 내려 놓는 길로 나아갈 수 있었고, 종국에 이방의 한 중심, 우상숭배의 한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 복된 자들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목숨을 걸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길로 나아가는 결단. 그것은 바벨론과 페르시아의 시대 뿐만 아니라 오늘날 한국에서도 동일하게 믿는 자에게 요구되는 결단이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 뿐만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교회가 맘몬이라는 우상을 섬기며 거기에 절하고 있는 이 사회 속에서, 거기에 절하지 않고, 살아계신 하나님께만 경배를 드리고 그분께만 무릎을 꿇겠다는 믿음의 결단은 사회 뿐만 아니라 교회 내에서도 조롱과 핍박의 대상이다. 때로는 밥줄을 포기해야만 하고, 작게는 사람들 사이에서의 삶을 포기해야 한다. 그런 믿음의 길을 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은 내 개인이 하나님 앞에 보다 더 바르게 서고, 거룩한 삶 가운데 그분을 더욱 의지하는 것과 함께, 동시에 같은 뜻을 가지고 서로 격려하며 기도해주고, 함께 삶을 나누는 동역자들인 것이다.

나는 동역자들과 함께 살아가는 믿음의 삶이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를 경험했었다. 하지만 삶의 터전이 완전히 바뀐 지금, 거의 1년 동안 광야에 홀로 남아 있는 외톨이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동역자가 그립다. 믿음으로 나를 깨어있게 하고, 같이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일을 도모할 동역자들...

그것이 바로 다니엘과 세 친구가 무척 부러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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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 언제나...

얼마 전 일이다.
내 지도교수님 아래에서 같이 배웠던 한 후배가 선생님을 뵈러 학교에 찾아온다고 연락이 왔다. 지금 신문사 기자로 있는 후배인데, 겸사겸사 선생님께 인사드리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도 같이 뵈면 좋겠다고 그랬다.
선생님과 시간을 조정해 보려 했는데, 시간이 맞지 않아서 매우 이른 아침에 만나기로 했다. 장소는 내가 있는 곳 바로 옆방인 미국학연구소장실...

나는 약속된 날 시간에 맞춰 평소보다 일찍 연구실로 나갔다. 얼마 후 선생님께서 오셨다. 그러면서 이것 저것 부지런히 준비하시는 모습이었다. '다른 부담되는 손님도 아니고 제자가 찾아 오는데, 그냥 맞으시면 될텐데 뭘 그리 준비하시나?'하는 생각에 의아했다. 바로 옆방에 내가 있었음에도, 혼자서 뭔가를 하고 계셨다.
나는 내 방에 머물러 있다가 화장실로 갔다. 거기서 선생님과 마주쳤다. 화장실 바로 옆에 생수와 싱크대가 있는 작은 방이 있는데, 거기서 열심히 컵들을 씻고 계셨다. 찾아오는 제자와 나에게 특별한 커피를 대접하시고 싶은 것이었다. 그래서 커피메이커를 씻으시고, 물을 담으시고, 또 컵을 씻으시면서 준비하고 계시는 것이었다.

서울대언어교육원장, 한국아메리카학회회장, 서울대미국학연구소장 등등 현재 여러 큰 기관의 수장으로 일하고 계시는 선생님께서, 그것도 내 스승님께서, 제자인 나를 바로 옆방에 두고도 손수 그런 일을 직접하시는 것을 보면서, 제자를 대접하시고자 하는 스승의 따뜻한 마음과 함께, 그분의 소탈함과 겸손함이 느껴졌다.
언젠가 다른 학교를 방문했을 때, 거기에 계셨던 교수 한 분이 "교수 사회에 있다보면, 다들 자기도 모르게 어느새 높아져서 대접받는 것에 익숙하고 대접하는 것에는 매우 서투르게 된다."는 푸념을 들었다. 학교에 1년 밖에 있지 않았고, 또 신분도 교수가 아니라 시간강사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충분히 이해가 될 만한 경험들을 많이 했다.

그런 교수 사회에서 수 십년을 계셨던 선생님의 작은 섬김은 큰 감동으로 다가왔고 선생님의 그 마음쓰심과 (당신께서는 의도하지는 않으셨겠지만) 직접 행동으로 제자에게 가르치심에 감사했다.

교만, 오만, 자만...

나는  그 누구보다도 쉽게 높아지는 자이다. 스스로를 높이고 교만해지는 자이다. 그럴 자격도 없는 자임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높이는데 매우 민감한 자이다. 그런 내가 스승의 작은 섬김을 보면서 절로 고개가 숙여지며, 내 자신을 다시 한 번 진지하게 돌아보고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에게 배울 수 있는 훌륭한 스승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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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타파

대안언론의 상징인 뉴스타파가 회원을 모집하고 있습니다.
그 동안 뉴스타파를 후원할 길을 열리기를 기도하고 바라고 있었는데, 드디어 열렸네요. 저는 기쁨으로 동참했습니다.
제 블로그를 보시는 분들 중 많은 분들이 재정지원에 참여하면 좋겠습니다.

어두워져만 가는 이 땅에 진실이라는 빛을 비추는 이 운동이 하나님 나라 운동과 완전하게 일치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이 프로가 하는 일의 많은 부분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리라 확신합니다.



회원가입은 뉴스타파 홈페이지에서...

http://www.newstap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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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에 관한 가장 성경적인 입장

내 생각에 동성애에 관한 가장 성경적인 입장은 High Pointe Baptist Church의 Juan Sanchez목사님의 설교에서 확실하게 들어난다고 생각한다.
동성애에 대해서 기존교회의 입장은 배척-적대나 용인-수용의 두 가지 중 하나였다. 하지만, 성경적으로 볼 때, 그 둘은 모두 잘못된 것이다. 설교의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단어도 반대할 것이 없는 참으로 뛰어난 설교를 같이 나누고 싶다.

"And Such were Some of You: Healing for the Sexually Broken" (Leviticus 20: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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