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복을 받을 자와 저주를 받을 자

Thus says the Lord:
“Heaven is my throne,
and the earth is my footstool;
what is the house that you would build for me,
and what is the place of my rest?
All these things my hand has made,
and so all these things came to be,
declares the Lord.
But this is the one to whom I will look:
he who is humble and contrite in spirit
and trembles at my word.
“He who slaughters an ox is like one who kills a man;
he who sacrifices a lamb, like one who breaks a dog's neck;
he who presents a grain offering, like one who offers pig's blood;
he who makes a memorial offering of frankincense, like one who blesses an idol.
These have chosen their own ways,
and their soul delights in their abominations;
I also will choose harsh treatment for them
and bring their fears upon them,
because when I called, no one answered,
when I spoke, they did not listen;
but they did what was evil in my eyes

and chose that in which I did not delight.” (Isaiah 66:1-4, ESV)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타락 가운데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인간들, 한 사람도 빠짐없는 모든 인류 중에서 하나님께서 "돌아보실" 자들, 즉 그분의 복을 받을 자들은 그분 앞에서 겸손하고 통회하며 그분의 말씀에 대해 왕의 말씀으로 받고 경외함으로 떠는 자들(he who is humble and contrite in spirit and trembles at my word)이다.
반면에 그분의 저주를 받을 자들에 대해서는 길게 서술되어 있는데, 그들은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가증하게 여기시는 일을 즐겨하는 자들이며, 따라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이다. 주목할 것은 그 저주받을 자들이 교회와 담을 쌓고 사는 자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He who slaughters an ox is like one who kills a man;
he who sacrifices a lamb, like one who breaks a dog's neck;
he who presents a grain offering, like one who offers pig's blood;
he who makes a memorial offering of frankincense, like one who blesses an idol.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 소와 양(매우 값비싼 재물)을 드리고 곡식제사를 드리고 하나님께 분향을 드리는 자들이다. 예배에 열심이 있는 자들이고 나름대로 헌신된 자들이다.
하지만 그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태도, 그리고 그들의 일상의 삶은 가증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숫소를 잡아 하나님께 드리지만, 그들의 삶은 살인(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무시)하는 자들이다. 혹은 직접 살인하지 않더라도 살인하는 자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고 하나님을 인정하는 마음이 없는 것과 동일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양을 드리지만, 그 드리는 양에 안수하면서 자신의 죄를 통한히 여기고, 주님 앞에 눈물로 사죄하기 보다는 마치 당시 유대사회에서 가증한 동물인 개의 목을 꺾는 것과 같이 무심하고 의미 없이 예물을 드린다.
결론적으로 이들은 예배 행위, 종교 생활에는 매우 열심이 있는 자들이고, 누가 보던지 거룩한 자들로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자들이지만, 실재에 있어서는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 없는 예배와 삶을 드리는 자들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돌이키시기 위해 여러번 말씀하신다. 그들을 부르셨지만, 아무도 들으려고 하지 않았고, 의지적으로 그 악행을 지속한다.

because when I called, no one answered,
when I spoke, they did not listen;
but they did what was evil in my eyes

and chose that in which I did not delight.

그런 그들을 하나님께서는 증오하신다. 그리고 심판하신다.

교회에서 내가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는 그런 "신앙인" 혹은 그리스도인인가? 나의 열심이 보통 수준을 넘어섰고, 내 헌신으로 교회가 부흥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런대로 쓸만한 신자라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진정으로 예배에 임하는 자신의 자세와 교회 밖에서의 자신의 삶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예배 가운데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겸손(내 주장을 모두 포기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인 권위를 부여하며 그 말씀에 따라 사는 것)과 통회(자신의 죄와 죄의 본성에 대해,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삶속에서 닮아가지 못한 것에 대한 아픔으로 가슴을 찢는 회개), 그리고 말씀을 사랑하며 늘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왕의 마음을 알고 왕의 뜻을 알아 경외함으로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 있는지를 철저하게 살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열심이, 그 교회 안에서의 열심이 오히려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것이될 가능성이 많다. 

오늘 말씀을 읽으며 참으로... 참으로...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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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 생각을 따라..."

"내가 종일 손을 펴서 자기 생각을 따라 옳지 않은 길을 걸어가는 패역한 백성들을 불렀나니"(사 65:2)

하나님께서 정의하시는 죄. 그것은 "자기 생각을 따라 옳지 않은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여기서 "옳지 않은 길을 걸어가는 것"이 죄가 드러나는 현상이라면, "자기 생각을 따라"는 죄의 원인이며, 죄의 본질 그 자체이다. 즉 죄는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자기 생각을 따라 사는 것으로서, 그것은 반드시 옳지 않은 길로 귀결되게 마련이다.

국정원때문에 온 나라가 시끄럽다. 이명박 정부의 안하무인식의 통치의 결과이다. 자신만 옳기 때문에 대화를 거부하고, 자신이 제시하는 (내가 보기에는 지극히 천박하며 반국가적인) 비전이 절대적으로 옳기 때문에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법질서나 규칙은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는, 우리 속담에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식으로(내가 우리 속담 중에서 제일 싫어하는 속담이다) 온갖 불법을 자행한 결과 썩어 문드러진 정부의 치부 중 지극히 일부가 드러나는 것이다. 지극히 부끄러운 일, 불법을 자행하고도 스스로 "국정원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떳떳이 말하는 그 조직의 수장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 온갖 죄를 짓고, 더러움가 가증함에 찌들어 있으면서도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하는 가증한 이스라엘과 너무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이 무덤 사이에 앉으며 은밀한 처소에서 밤을 지내며 돼지 고기를 먹으며 가증한 것들의 국을 그릇에 담으면서, 사람에게 이르기를 '너는 네 자리에 섰고, 내게 가까이 하지 말라. 나는 너보다 거룩함이라.'하나니, 이런 자들은 내 코의 연기요, 종일 타는 불이로다."(사 65:4-5)

말씀대로 그들의 행위는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이 되어야 마땅하다. 불법을 행한 자들, 거짓을 일삼고, 권력에 의지해서 국민을 우롱하는 자들은 처벌 받아야 한다.

하지만, 이런 일은 국가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언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 모습이 바로 내 모습이 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자라면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하는 이유가,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늘 묵상하고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그분의 뜻에 순종할 수 있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삶이 죄로부터 벗어나는 삶이며, 죄로부터 벗어나는 삶이 거룩한 삶이고, 거룩한 삶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고, 하나님의 목적대로 살 때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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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다 주의 백성이니이다"

"주께서 기쁘게 공의를 행하는 자와 주의 길에서 주를 기억하는 자를 선대하시거늘 우리가 범죄하므로 주께서 진노하셨사오며, 이 현상이 이미 오래 되었사오니 우리가 어찌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으며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가 없사오니, 이는 주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숨기시며 우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소멸되게 하셨음이라. 그러나 여호와여,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라. 여호와여, 너무 분노하지 마시오며 죄악을 영원히 기억하지 마시옵소서! 구하오니 보시옵소서! 보시옵소서! 우리는 다 주의 백성이니이다."(사 64:5-9)

You meet him who joyfully works righteousness,
those who remember you in your ways.
Behold, you were angry, and we sinned;
in our sins we have been a long time, and shall we be saved?
We have all become like one who is unclean,
and all our righteous deeds are like a polluted garment.
We all fade like a leaf,
and our iniquities, like the wind, take us away.
There is no one who calls upon your name,
who rouses himself to take hold of you;
for you have hidden your face from us,
and have made us melt in the hand of our iniquities.
But now, O Lord, you are our Father;
we are the clay, and you are our potter;
we are all the work of your hand.
Be not so terribly angry, O Lord,
and remember not iniquity forever.
Behold, please look, we are all your people. (Isaiah 64:5-9, ESV)

하나님의 은혜는, 기쁘게 공의를 행하며 하나님의 길에서 서서 하나님을 기억하는 자를 기뻐하시는 내 하나님을 오랫동안 의지적으로 거역하여 징벌을 받는 자, 생각에서, 그리고 삶의 방식에서 부정한 자가 되어 누더기같은 의를 입고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영적 생명이 말라 비틀어진 잎사귀처럼 되어, 세속의 바람에 힘없이 이리 밀리고 저리 밀려가며 그리스도인으로서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그런 자가되어 주님의 가장 큰 형벌인 "신적유기(내어버려두심)"을 당하는 가운데 소멸을 향해 속절없이 떠내려 갈 때, 바로 그 때 우리의 입에서 흘러 나오는 간절하고 진심이 담긴 한 마디의 고백 "하나님! 하나님은 내 아버지이십니다."라는 고백 하나에 마음을 돌이키시고 구원을 베푸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5장에서 탕자의 비유를 들어 너무나 적확하게 표현하신 그 하나님. 내 아버지...

아버지의 그런 은혜 때문에 이 세상이 존속하고, 죄인 중의 괴수인 내가 이 땅에서 호흡하며, 하나님 앞에 예배드릴 수 있는 것...

그 은혜의 크기를 내가 가늠할 수 있을까?

그저 그 앞에 무릎꿇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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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fort for the Contrite (Isaiah 57:14-21)

And it shall be said,
“Build up, build up, prepare the way,
remove every obstruction from my people's way.”
For thus says the One who is high and lifted up,
who inhabits eternity, whose name is Holy:
“I dwell in the high and holy place,
and also with him who is of a contrite and lowly spirit,
to revive the spirit of the lowly,
and to revive the heart of the contrite.
For I will not contend forever,
nor will I always be angry;
for the spirit would grow faint before me,
and the breath of life that I made.
Because of the iniquity of his unjust gain I was angry,
I struck him; I hid my face and was angry,
but he went on backsliding in the way of his own heart.
I have seen his ways, but I will heal him;
I will lead him and restore comfort to him and his mourners,
creating the fruit of the lips.
Peace, peace, to the far and to the near,” says the Lord,
“and I will heal him.
But the wicked are like the tossing sea;
for it cannot be quiet,
and its waters toss up mire and dirt.

There is no peace,” says my God, “for the wicked.” (Isaiah 57:14-21, ESV)

The greatest solace from God, my father and King...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복은 낮아지는 것, 그것도 하나님 앞에 낮아지는 것이다.
그 낮아짐은 자신의 흉악한 죄성(과 그로 인한 결과물인 죄악들)을 직시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위대하심을 인식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인간 중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 쓸 만한 사람이라고 고개를 들 수 있는 자는 없다. 다만, 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서 무지할(아니 넘쳐날) 뿐이다. 내가 그러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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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을 굳게 잡은 고자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나의 안식일을 지키며 내가 기뻐하는 일을 선택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잡는 고자들에게는 내가 내 집에서, 내 성 안에서 아들이나 딸보다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그들에게 주며 영원한 이름을 주어 끊어지지 아니하게 할 것이며, 또 여호와와 연합하여 그를 섬기며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그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은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사 56:4-7)


For thus says the Lord:
“To the eunuchs who keep my Sabbaths,
who choose the things that please me
and hold fast my covenant,
I will give in my house and within my walls
a monument and a name
better than sons and daughters;
I will give them an everlasting name
that shall not be cut off.
“And the foreigners who join themselves to the Lord,
to minister to him, to love the name of the Lord,
and to be his servants,
everyone who keeps the Sabbath and does not profane it,
and holds fast my covenant—
these I will bring to my holy mountain,
and make them joyful in my house of prayer;
their burnt offerings and their sacrifices
will be accepted on my altar;
for my house shall be called a house of prayer
for all peoples.” (Isaiah 56:4-7, ESV)

고자처럼, 영적으로 볼 때, 스스로 생명을, 그리고 선한 열매를 생산할 능력이 전혀 없는 나이지만, 그런 내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언약을 굳게 잡을 때, 그분께서 나에게 아들이나 딸보다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주신다.
혈통적으로 이스라엘에 속하지 못하여 그들의 말대로 영원한 지옥의 불쏘시개가 되어 마땅한 이방인인 나이지만, 하나님과 연합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이름을 사랑하고, 왕이신 그분의 종이되고 안식일을 지키며, 하나님의 언약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분의 언약을 굳게 지킨다면, 자격없는 나를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으로 일컫는 성스러운 산으로 인도하시며, 거기에서 기도하게 하시며, 자격없는 자가 드리는 희생 재물을 받으시며, 그 가운데 기쁨을 누리도록 허락하신다.

그것이 복음이 아니고 무엇이랴?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성취된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고아와 과부를 돌보시는 하나님께서, 그보다도 못한 흉악한 죄인인 나를 지옥불에 던지지 않으시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하시고, 자녀삼아 주셔서, 고자인 나에게 생명을 누리게 하시고, 이방인인 나를 하나님 집의 식구로 맞아 주신다.

이보다 더 큰 복이 어디에 있을까?

그저... 감사... 감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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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hid not my face from disgrace and spitting..."

The Lord God has given me
the tongue of those who are taught,
that I may know how to sustain with a word
him who is weary.
Morning by morning he awakens;
he awakens my ear
to hear as those who are taught.
The Lord God has opened my ear,
and I was not rebellious;
I turned not backward.
I gave my back to those who strike,
and my cheeks to those who pull out the beard;
I hid not my face
from disgrace and spitting. (Isaiah 50:4-6, ESV)

“Listen to me, you who know righteousness,
the people in whose heart is my law;
fear not the reproach of man,
nor be dismayed at their revilings.
For the moth will eat them up like a garment,
and the worm will eat them like wool;
but my righteousness will be forever,
and my salvation to all generations.” (Isaiah 51:7-8, ES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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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SNS와 인간의 고독

아래 글은 "복음과상황" 2013년 6월호에 게제된 김현준님의 글 중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독일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Zigmunt Bauman)은 인터넷과 SNS의 발달로 인해 개인은 '각자 자신의 보호막 속에 갇히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외로움을 달래려는 사람들은 인터넷을 '선택적'으로 이용하고, 자신의 '입맛에 맞는' 정보만 취하고, 개인의 선호도에 따라 친구를 SNS 상에서 추가 혹은 차단한다. 이로써 독서하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창밖을 응시하며 타인의 세계를 상상해 보는 일, 홀로 고독하게 사유하는 행동은 점점 덜하게 된다. '외로움'을 달래려는 행동들이 인간 상호 소통의 기반인 내적 견고함을 다지는 '고독'의 시간을 빼앗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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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에 살면서...

지난 2월 하순부터 안양에 살면서 느낀 것.

무질서 & 이기주의

버스는 신호, 속도, 차선, 안전 무시하고 질주하기 일쑤이고, 자동차는 정도는 조금 낫지만 그래도 마찬가지...
사람들은 뭐가 그리 급한지 남에 대한 예의는 안중에도 없이 뛰고 부딪히고 개인적인 공간을 침범하고, 순서를 지키지 않고...

한 버스 정류장이 너무 혼잡하고 위험해서 민원을 넣었더니, 돌아오는 공무원의 답변은 내가 제안한 대로 바꾸면 사람들이 불편해하기 때문에 안 된다는 답변... 안전보다 편의가 우선인... 그런 곳. (답장을 보내면서, 사람이 죽거나 다쳐야 뭔가 할 생각이냐고 항의했건만, 콧방귀도 안뀌는 것 같다.)

미국에 살 때, 오스틴이 대도시가 아니어서 그랬겠지만, 여유와 질서가 있었다.
한국에 와서 부천에 살면서 미국과 비교되면서 실망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 동네는 질서 준수와 타인에 대한 배려가 있었다.

그런데, 내가 살던 부천의 그 동네보다는 많이 더 잘사는 동네로 이사왔는데, 이 안양은, 적어도 내가 사는 안양의 평촌지역은 부천보다 훨씬 못하다.

교육열로 유명한 안양의 평촌.
무슨 교육열인지...
뭘 가르치겠다는 것인지...
남은 안중에도 없고, 나만 앞서나가면 된다는 것을 가르치고 싶은 것인지...

하긴, 길거리에 수없이 버려지는 쓰레기들, 특히 학생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버리고 가는 그것들이 바로 그런 교육의 결과를 보여주는 것 아닌가?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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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교회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들'

아래 글은 제 글이 아니라 미주뉴스엔조이에서 퍼온 글입니다.
경건과 열심을 생각조차 않고, 자신의 욕망을 따라 아무렇게나 살면서 스스로를 늘 용서하고 정당화하고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대부분인 요즘 교회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조심스럽게 읽어야 할 글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 반대쪽에 있는 열심을 내는 그룹 내에서 흔히 나타나는 모습에 대해서 이야기한 너무 좋은 내용을 담고 있어서 같이 나누고 싶네요.
본문에도 나와 있지만, 바로 내모습을 돌아보며 더 겸손하며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기사원글: http://www.newsnjoy.us/news/articleView.html?idxno=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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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들'
최태선 목사의 '평화의 사람들', 경건의 능력인가 폭력인가

얼마 전 제가 쓴 글에 댓글이 달렸습니다. 반가운 마음으로 읽어보았습니다. 그런데 '악플'이었습니다. 댓글을 쓴 분은 분명 뭔가를 아는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적어도 나름대로 성경을 읽었고 해석하고 최소한 설교를 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댓글의 내용은 참 신랄했습니다. 읽을수록 댓글을 단 사람의 마음이 참 날카롭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우월감에서 나온 댓글이었습니다. 분명 댓글을 단 사람은 제가 쓴 글이 유치하거나 조잡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잠시 동안이었지만 제 마음은 아팠습니다. 제 글이 마음에 들지 않고 유치하게 느껴졌다면 좀더 어른스런 방법으로 지적해주고 조언해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온라인상의 교제의 특성이기도 하지만 거기에는 기독교 특유의 특성으로 자리 잡은 오만이 실려 있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에는 그런 종류의 폭력이 난무합니다. 자신이 경건하다고 생각하는 오만이 다른 이들을 향한 판단과 정죄로 이어집니다. 분명 그 사람의 생각은 무언가 옳은 것을 위해 자신이 일조를 하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복음을 위해 개혁을 위해 혹은 순수함을 유지하기 위한 당연한 노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합니다.
심한 경우에는 칼로 찌르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고통을 느끼게 합니다. 그것이 치명적인 폭력이라는 것을 당사자는 여간해서는 인식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경건의 폭력'이라고 표현한 어떤 분의 글을 읽고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새벽기도에 오래도록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석한 집사님의 눈길이 무섭습니다. 그분의 머릿속에는 새벽기도에 빠진 목사와 장로들의 빠진 횟수와 날자가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십일조를 정확하게 꼬박꼬박하는 신자의 눈길이 무섭습니다. 그분의 머릿속에는 십일조을 빼먹거나 제대로 하지 않는 동료 신자들의 목록이 빼곡히 들어 있습니다.

40일 금식기도를 다녀온 권사님의 눈길이 무섭습니다. 그분의 시선에는 '너는 왜 금식기도를 하지 않느냐'는 무언의 질타가 섞여 있습니다. 크고 건강한 교회를 다니는 성도가 무섭습니다. 그분의 말투에는 작고 별 볼일 없는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에 대한 우월감이 넘쳐납니다. 무언가를 깨달은 '안티'가 무섭습니다. 그분의 몸짓에는 깨닫지 못한 어리석은 사람들을 향한 손가락질이 배어있습니다.

신학 박사 학위를 받은 신학자가 무섭습니다. 그분 앞에 서면 모든 사람들이 종류별로 차곡차곡 분류되어 버리고 맙니다. 성도수가 제법 되는 교회 목사들이 무섭습니다. 그분의 권위와 무게가 엄청난 압박으로 성도들을 찌그러트립니다.

사실 이런 모습은 성경에도 기록되어 있는 오래 된 전통입니다. 너무도 경건이 몸에 배어 스스로 자신들을 구별된 존재라고 여겼던 바리새인들의 모습이 바로 그런 모습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는 것도 모자라 울타리 율법까지 만들어 놓고 철저하게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심지어는 음식에 집어넣는 양념까지 십분의 일을 구분하여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신앙의 일상화로 이어진 것이 아니라 '자기과시'의 일상화가 되어 버렸습니다. 율법과 경건이 종교의 광기로 치달았습니다. 그래서 수틀리면 사람들을 돌로 쳐 죽이고자 하는 무서운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아시시의 프란체스코의 전해지는 많은 이야기들 중 하나입니다. 프란체스코의 제자들이 스승과 함께 40일 금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하루를 남겨 놓은 39일째 되는 날 젊은 제자 하나가 맛있는 스프 냄새에 이끌려 자신도 모르게 한 숟가락을 입에 떠 넣고 말았습니다. 그 순간 함께 금식을 하던 제자들은 눈을 부릅뜨고 그 젊은 제자를 노려보았습니다.

그 눈길 속에는 유혹에 넘어간 불쌍한 영혼을 향한 애처로움이 아니라 분노에 찬 정죄의 따가운 시선이 들어 있었습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았던 제자들은 유혹에 넘어간 젊은 제자를 엄하게 꾸짖어주기를 바라며 스승, 프란체스코를 쳐다보았습니다.

그런데 프란체스코는 말없이 수저를 집어 들더니 젊은 제자가 먹었던 스프를 천천히 떠먹기 시작했습니다. 경악의 눈길로 스승을 쳐다보고 있는 제자들을 향해 프란체스코는 조용히 말했습니다.

"우리가 금식을 하며 기도를 드리는 것은 모두가 예수님의 인격을 닮고 그분의 성품을 본받아 서로가 서로를 참으며 사랑하며 아끼자는 것입니다. 저 젊은이가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스프를 떠먹은 것은 죄가 아닙니다. 하지만 그를 정죄하고 배척하는 여러분들이야말로 지금 큰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굶으면서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는 실컷 먹고 사랑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바른 신앙이 무엇인지, 경건의 폭력이 어떤 것인가를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39일 동안 무사히 금식을 마친 프란체스코의 제자들에게서 그들의 엄격한 경건과 돈독한 신앙이 오히려 형제를 짓밟고 자신들의 영성마저 망가트리고 있다는 사실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 주변에는 이러한 이야기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율법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다고 다른 이들을 욕하고 질타하면서 그보다 더 큰 사랑의 계명을 어기던 바리새인들의 모습을 오늘 우리의 모습 속에서 확인하기란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우리도 바리새인들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仁) 과 신(信)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23:23)

선종(禪宗)에서는 깨달음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데, 그것을 잘못할 수 있음과 동일한
것으로 봅니다. 참으로 귀중한 생각입니다. 사람은 얼마든지 잘못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아니 '잘못할 수 있음'이야말로 인간의 인간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욕망과 고통으로 가득 찬 어리석은 범부(凡夫)들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서로 긍휼하게 여기고 잘못했을 때에는 그 잘못을 꾸짖고 정죄하기보다는 잘못을 깨닫고 바른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인내하면서 기다려주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경건은 겸손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믿음은 사랑으로 승화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경건과 믿음은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 대한 배타와 거부가 될 것이며 무엇보다 폭력이 되어 다른 사람의 영혼을 상하게 하는 끔찍한 범죄가 될 것입니다.

누구의 이야기랄 것도 없이 우리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더구나 오늘날처럼 자아가 모든 것의 중심이 되도록 부추기는 이 세상 속에서 신앙생활을 잘해보겠다는 사람들이 쉽게 빠지게 되는 함정입니다.

프란체스코의 금식에 관한 이야기를 하나 더 소개하겠습니다. 사순절을 맞아 프란체스코는 사람이 살지 않는 섬에 들어가 금식하기로 했습니다. 프란체스코는 빵 두 덩이를 가지고 섬으로 건너갔습니다. 사순절 기간이 끝나 다시 배를 타고 갔을 때 프란체스코는 한 덩이 반을 들고 있었습니다. 교만해지지 않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부족함을 잊지 않기 위해 금식 기간 동안 빵 반쪽을 먹었던 것입니다. 그가 허기를 참지 못해 빵 반쪽을 먹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가 허문 것은 자신의 완벽함이었습니다. 언제라도 잘못 할 수 있는 인간임을 잊지 않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사랑에 실패하지 않기 위해, 인격에 실패하지 않기 위해 때로 종교에 실패하는 사람이 되는 것은 어떠실는지요? 프란체스코의 빵 반쪽을 기억하면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자신의 완벽함을 버리고, 다른 이의 영혼을 상하게 할 수 있는 경건의 폭력을 제거할 수 있다면 우리들의 교회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평화로운 곳이 될 것입니다.

댓글을 통해 제게 기꺼이 빵 반쪽이 되어주신 형제님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최태선 목사 / 어지니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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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맹인들을 그들이 알지 못하는 길로 이끌며,
그들의 알지 못하는 지름길로 인도하며,
암흑이 그 앞에서 광명이 되게 하며,
굽은 데를 곧게 할 것이라.

내가 이 일을 행하여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리니,
조각한 우상을 의지하며,
부어 만든 우상을 향하여 너희는 우리의 신이라 하는 자는
물리침을 받아 크게 수치를 당하리라!

너희 못 듣는 자들아!
들으라!
너희 맹인들아!
밝히 보라!

맹인이 누구냐?
내 종이 아니냐?
누가 내가 보내는 내 사자 같이 못 듣는 자겠느냐?
누가 내게 충성된 자 같이 맹인이겠느냐?
누가 여호와의 종 같이 맹인이겠느냐?

네가 많은 것을 볼지라도 유의하지 아니하며,
귀가 열려 있을지라도 듣지 아니하는도다(사 42:16-20)


And I will lead the blind
in a way that they do not know,
in paths that they have not known
I will guide them.

I will turn the darkness before them into light,
the rough places into level ground.
These are the things I do,
and I do not forsake them.

They are turned back and utterly put to shame,
who trust in carved idols,
who say to metal images,
“You are our gods.”

Hear, you deaf,
and look, you blind, that you may see!

Who is blind but my servant,
or deaf as my messenger whom I send?
Who is blind as my dedicated one,
or blind as the servant of the Lord?

He sees many things, but does not observe them;
his ears are open, but he does not hear. (ES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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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이 탈취를 당하게 하신 자가 누구냐?"

"야곱이 탈취를 당하게 하신 자가 누구냐? 이스라엘을 약탈자들에게 넘기신 자가 누구냐? 여호와가 아니시냐? 우리가 그에게 범죄하였도다! 그들이 그의 길로 다니기를 원하지 아니하며, 그의 교훈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사 42:24)

나에게 일어나는 좋지 않아 보이는 것들이 모든 하나님의 심판이고 정죄라는 생각도 잘못되었지만, 그런 것들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확신, 하나님은 "내가 생각하기에 좋은 것"만 주시는 분이라는 주장은 어디에서 나온 신학인가? 적어도 성경적인 주장은 절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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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

"여호와의 사자가 나가서 앗수르 진중에서 십팔만 오천 인을 쳤으므로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본즉 시체뿐이라."(사 37:36)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나는 언제쯤 그 사실을 믿을 수 있을까?
왜 그리도 그것이 믿어지지 않을까?

교리적으로는 100% 동의하는 그 단순한 사실이, 내 삶에서 진심으로 고백되지 않는 것은, 그 만큼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고, 더 근본적으로는 하나님과 친밀한 인격적인 교제를 갖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와 동시에 내 죄성이 얼마나 큰가에 대해서도 동시에 보여주고 있는 증거다.

그분의 전능하심을 내가 진심으로 믿는다면, 조지 뮬러와 같은 기도의 삶은 그저 늘상 있는 삶의 모습이 될 것이고, 불구덩이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메드락과 사삭과 아벳느고와 같이 삶에 두려움이 없이 오히려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소망이 넘쳐날 것이고, 아귀다툼하는 사회 속에서 성실하게 살지만 그렇다고 부모없는 고아처럼 온 몸에 힘을 주며 자기가 모든 것을 다 해야하는 것처럼 고통스럽게 살지도 않을 것이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충만하여 그분께 내 삶의 주파수를 맞추며 살 수밖에 없을텐데... 내 삶은 그런 모습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아침에 QT하며 기도하는 것 잠깐, 그리고 나서는 마치 하나님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정신없이 이 일 저 일 하는 가운데, 녹초가 되어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가서 퍼져 잠만 자는 인생. 하나님께 이것저것 해달라는 요구는 많지만, 그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 아버지라는 사실을 묵상하며, 기뻐하며 감사하며, 내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 살피는 것은 턱없이 부족한 삶.

18만 5천이라는 군대는 인구가 매우 적었던 그 당시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보더라도 어마어마한 군대이다. 당시 예루살렘에 살았던 인구보다 더 많았을 것이다. 사실상 그들을 물리치기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런 그 군대를 보고 항복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엎드려 기도했던 히스기야도 참 대단한 인물이다. 어쨋든 그런 군대를 한 순간에 없애버리신다. 하나님께서 "치시니" 그 큰 군대는 "시체"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이다.
하나님께서는 요즘 여러 경로를 통해서 이 믿음없는 자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시고, "제발" 믿으라고 하시는 것 같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세상은 두려워 보이고, 내면에서는 온갖 불평만 쌓인다. 잘해야 한다는 생각에, 아니, 살아 남아야 한다는 두려움에, 온 몸에 힘이 들어가 삶은 피곤하기만 하다. 생존에 모든 것을 걸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나라는 안중에도 없다. 그저 내 일, 내 가족 뿐이다. 그것에 도움되는 것은 "선한 것"이고 그것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악한 것"으로 분류된다. 마치 사사기에서 왕이 없으므로(다시 말해 왕이신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지 않음으로) 각자 자기 원하는 대로 살았던 것처럼, 꼭 그런 영적, 도덕적 무정부 상태로 살아가게 된다. 그것이 내 삶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삶에서 돌이키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당신의 전능하심을 내게 보여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는 삶은 편안하다. 하나님께서 내게 모든 "좋은 것"을 주시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주인되는 삶을 내려 놓고 전능하신 그분께 삶을 맡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분의 차에 무임승차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나에게 그런 특권을 누릴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그분과 함께 푸른 풀밭도 가고, 사망의 골짜기로도 가는 것이다. 바울이 고백하는 것처럼 풍부에도 처할 줄 알고, 비천에 처할 줄도 알게 되는 것이다. 어느 상황이나 두려움이 없다. 그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세상이 도저히 알 수 없는 비밀스러운)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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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프랑스 고등학교 졸업시험문제

아래는 페이스북에서 어떤 분이 올린 글 중에서 퍼온 것입니다.
프랑스 고등학교의 졸업시험문제라는데요.

프랑스의 대학입학시험인 바깔로레아의 문제도 이 문제들과 비슷하게 출제된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이런 질문들이 프랑스 교육에서 매우 중요한 것들로 다뤄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겠지요?


고등학교 수준에서 어떤 답을 내놓을지 궁금합니다.
어떤 답을 하든지 간에, 이런 문제를 놓고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 그리고 그것을 학교에서 가르친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나 부럽기만 합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는 생각하는 사람을 키워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그 "생각하는" 시민이 참된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기반이 되는 것이지요.


1장 인간(Human) 

Q1-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행복이 가능한가? 
Q2-꿈은 필요한가? 
Q3-과거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우리는 자유로운 존재가 될 수 있을까? 
Q4-지금의 나는 내 과거의 총합인가? 
Q5-관용의 정신에도 비관용이 내포되어 있는가? 
Q6-사랑이 의무일 수 있는가? 
Q7-행복은 단지 한순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인가? 
Q8-타인을 존경한다는 것은 일체의 열정을 배제한다는 것을 뜻하는가? 
Q9-죽음은 인간에게서 일체의 존재 의미를 박탈해 가는가? 
Q10-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수 있나? 
Q11-행복은 인간에게 도달 불가능한 것인가? 

2장 인문학(Humanities) 

Q1-우리가 하고 있는 말에는 우리 자신이 의식하고있는 것만이 담기는가? 
Q2-철학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 
Q3-철학자는 과학자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가? 
Q4-역사가는 객관적일 수 있는가? 
Q5-역사학자가 기억력만 의존해도 좋은가? 
Q6-역사는 인간에게 오는 것인가 아니면 인간에 의해 오는 것인가? 
Q7-감각을 믿을 수 있는가? 
Q8-재화만이 교환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Q9-인문학은 인간을 예견 가능한 존재로 파악하는가? 
Q10-인류가 한 가지 언어만을 말하는 것은 바람직한가? 

3장 예술(Arts) 

Q1-예술 작품은 반드시 아름다운가? 
Q2-예술없이 아름다움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가? 
Q3-예술 작품의 복재는 그 작품에 해를 끼치는 일인가? 
Q4-예술 작품은 모두 인간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가? 
Q5-예술이 인간과 현실과의 관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가? 

4장 과학(Sciences) 

Q1-생물학적 지식은 일체의 유기체를 기계로만 여기기를 요구하는가? 
Q2-우리는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만을 진리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Q3-계산, 그것은 사유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인가? 
Q4-무의식에 대한 과학은 가능한가? 
Q5-오류는 진리를 발견하는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 
Q6-이론의 가치는 실제적 효용가치에 따라 가늠되는가? 
Q7-과학의 용도는 어디에 있는가? 
Q8-현실이 수학적 법칙에 따른다고 할 수 있는가? 
Q9-기술이 인간조건을 바꿀 수 있는가? 
Q10-지식은 종교적인 것이든 비종교적인 것이든 일체의 믿음을 배제하는가? 
Q11-자연을 모델로 삼는 것이 어느 분야에서 가장 적합한가? 

5장 정치와 권리(Politics&Rights) 

Q1-권리를 수호한다는 것과 이익을 옹호한다는 것은 같은 뜻인가? 
Q2-자유는 주어지는 것인가 아니면 싸워서 획득해야 하는 것인가? 
Q3-법에 복종하지 않는 행동도 이성적인 행동일 수 있을까? 
Q4-여론이 정권을 이끌 수 있는가? 
Q5-의무를 다하지 않고도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가? 
Q6-노동은 욕구 충족의 수단에 불구한가? 
Q7- 정의의 요구와 자유의 요구는 구별될 수 있는가? 
Q8-노동은 도덕적 가치를 지니는가? 
Q9-자유를 두려워해야 하나? 
Q10-유토피아는 한낱 꿈일 뿐인가? 
Q11-국가는 개인의 적인가? 
Q12-어디에서 정신의 자유를 알아차릴 수 있나? 
Q13-권력 남용은 불가피한 것인가? 
Q14-다름은 곧 불평등을 의미하는 것인가? 
Q15-노동은 종속적일 따름인가? 
Q16-평화와 불의가 함께 갈 수 있나? 

6장 윤리(Ethics) 

Q1-도덕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반드시 자신의 욕망과 싸운다는 것을 뜻하는가? 
Q2-우리는 좋다고 하는 것만을 바라는가? 
Q3-의무를 다하는 것만으로 충분한가? 
Q4-무엇을 비인간적인 행위라고 하는가? 
Q5-일시적이고 순간적인 것에도 가치가 존재하는가? 
Q6-무엇이 내 안에서 어떤 행동을 해야 할 지를 말해 주는가? 
Q7-우리는 정념을 찬양할 수 있는가? 
Q8-종교적 믿음을 가지는 것은 이성을 포기한다는 것을 뜻하는가? 
Q9-정열은 우리의 의무 이행을 방해하는가? 
Q10-진실에 저항할 수 있는가? 
Q11-진리가 우리 마음을 불편하게 할 때 진리 대신 우리에게 위안을 주는 환상을 좇아도 좋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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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아침의 단상


월요일부터 토요일 오후 5시까지는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더 바쁘게, 더 치열하게 산다. 하지만 토요일 5시부터 월요일 출근 때까지는 일에 관한 모든 것을 깨끗이 있고, 안식을 즐긴다.

밀린 일을 생각하면 그 쉬는 시간이 아깝고,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해야할 것같은 압박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내게 주어진 시간에 하지 못할 일이라면, 내 능력 밖이며, 내 능력 밖에 있는 것을 추구하는 것은 내 본분이 아니다. 그것 없이 이룰 수 있는 것이 내게 주어진 것이며, 그것으로 만족할 줄 아는 법을 배우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가족들과 모든 시간을 보낸 토요일 저녁과 일요일 이후, 월요일인 오늘 새벽에 일어나서 어머니를 병원에 모시고 가서 입원수속을 처리하고 늦게야 연구실에 왔지만, "생산적이지 못한" 시간에 대한 부담이 없이 마음이 한없이 가볍고 즐거운 것은 바로 그 한계에 대한 인정과, 그 한계를 두신 창조주에 대한 인정과 감사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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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의 단상


419... 그 때 민주화를 부르짖었던 세대는 지금 어떤 모습으로 있는가?
518... 피를 흘리며 독재에 항거하던 그 세대는 어떤가?
629... 그 넥타이 부대는 어떻고?

그때 그들은 모두 기존 세력, 당시의 중심 세대에 항거했다.
지금은 그들이 기존 세력이고 중심 세대인데, 그들은 (혹은 그 가운데 한 명인 나는) 무슨 변화, 무슨 발전을 이뤄가고 있으며 그것을 위해 뭘하고 있는가?

나만의 생각인지는 모르지만, 그 세력들은 대부분 보수화 되어가는 가운데, 그들이 저항했던 그 세대의 모습을 답습하고 있는 것 같다.

젊은 한 때의 이상에 사로잡힌 열정이 진정으로 의미가 있게 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현실을 모르는 어린시절의 철없는 치기가 아니라 나이가 들어서도 끝까지 붙잡고, 그것에 삶을 던질 수 있다는 것을 구체적인 삶으로 보여줄 때 의미가 있는 것 아닐까?

내가 가장 듣기 싫은 말 중의 하나는 "나도 한 때는..."이라는 말이다.
"나도 한 때는 데모 열심히 했었지..."
"나도 한 때는 정의를 위해 몸을 불살랐었지..."
"나도 한 때는 신앙생활 열심히 했었지..."

"나도 한 때는..."

그럴 때마다 나는 마음 깊은 곳에서 "입닥쳐!"라고 외치고 싶다.
과거는 과거일 뿐 중요한 것은 현재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무엇을 위해 살고 있고, 무엇을 얻기 위해 투쟁하고 있는가이다.

내 스스로에게 "입닥쳐!"라고 말하지 않는 그런 삶을 살기 위해서 오늘도 치열하게 고민하며 싸우며 살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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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위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후 11:15)

고린도교회에서 바울과 그가 전하는 복음을 대적하는 자들에 대해서 바울은 엄중하게 경고한다. 그들은 복음을 훼방하는 사탄의 일꾼들이며, 그들이 어떤 모습으로 보이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열매, 즉 삶(행위)으로 그들 자신들을 입증할 것이고, 그것으로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내 스스로는 적어도 복음을 훼방하는 쪽에 선 사탄의 일꾼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이 말씀은 오늘 아침 내 마음을 찌른다. 그것은 내가 생각하는 것, 그리고 글쓰고 말하는 것으로 판단받는 것이 아니라 내 행위, 내 삶으로 주님 앞에서 판단 받을 것을 분명히 일깨워주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생각이 많다. 그리고 그 생각들을 글로, 혹은 말로 자주 표현한다. 이런 것들은 나로 하여금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데 큰 도움을 준다. 그래서 앞으로도 계속 생각하고 글과 말로 표현하는 작업은 지속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중요한 함정이 있다. 즉, 내가 생각하는 것, 그리고 말하는 것이 바로 나 자신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내 글을 읽거나 내 말을 듣는 사람들을 착각하게 할 뿐 아니라, 더 심각하게도 내 자신을 착각하게 한다. 그 결과 행위(열매, 삶)는 거의 없는데도, 내가 그런대로 쓸만한 사람인 것처럼 착각하는 가운데, 자기의를 높이 쌓아간다. 그 가운데 내 속사람은 후패해가고, 하나님 앞에 씻을 수 없는 큰 죄를 짓는 것이다.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나는 행함에서 지극히 볼품없는 한심한 사람이다. 수 많은 생각과 진리들이 내 머릿속에 머물고, 내 손끝에 머물러 있을 뿐, 행위로 옮겨진 경우는 극히 드물다. 말 그대로 외화내빈인 것이다. 사람들은 속을지 모르지만, 그리고 내 스스로가 내 자신을 속일 수는 있지만, 하나님은 속이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겉모습을 보시거나, 내 말을 보시는 분이 아니라, 내 중심을 보시며, 그 중심에 이끌려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내 행위와 삶을 보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분의 시각에서 볼 때 나는 빈약한 열매를 가진 나무일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참으로 한심하고 더러운 죄인, 그것도 극악무도한 죄인일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그 하나를 보시고, 나를 붙드시는 그 하나님의 이해할 수 없이 놀라운 은혜로 인해서 내가 구원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일은 없겠지만, 하나님 앞에 고개를 들 수 없이 부끄러운 내 모습을 본다. 그리고 그것을 개선시킬 능력이 내게 전혀 없음을 보고 탄식한다.

오직 주의 긍휼만을 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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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심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하지 못하였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었노라. 그러나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가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고후 7:5-6)

오늘 아침 이 말씀이 나에게 큰 위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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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를 하고 싶다...


진득하게 앉아서 공부를 하고 싶은데...
많이 읽고 깊이 생각하는 가운데 벽돌을 쌓는 심정으로 천천히, 하지만 차근차근 한 글자씩 빈 종이에 쏟아 놓고 싶은데...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우리 학교는 그나마 좀 낫지만, 요즘 대학에서는 연구실적이라는 숫자를 지표로 제시하고 그것에 무조건 맞추기를 원하기 때문에, 아직 숙성되지도 않은 아이디어들이 글이 되어 뿌려진다. 사회가, 대학이 그 숙성의 시간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마치 실험 결과가 나오면 뚝딱 글이 나오기를 기대하는 것처럼, 전공을 불문하고 목표치를 제시한다.
열심히 살고 열심히 읽고 열심히 쓰지만, 내가 진정으로 관심이 있는 그런 공부는 요원하기만 하다.
내 인생에 단 한편의 논문을 쓰고 말더라도 진정으로 의미있는 그런 논문을 쓰고 싶은데...
언제까지나 이렇게 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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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모습

최근 오랫만에 한 사람의 사진을 볼 기회가 있었다.
반갑고 기뻤다.
하지만, 내 마음 가운데 생겨나는 슬픔 한 조각은 왜일까?

내가 사는 하루의 삶은 내 모습을 결정한다. 그 모습이 쌓이고 쌓여서 내가 외모로 풍기는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인생에서 하루가 차지하는 분량 만큼의 영향력으로 내 하루 분의 삶은 내 모습을 바꾼다. 보이지 않게, 조금씩... 날마다 대하는 사람은 그 변화를 감지하지 못한다. 날마다 그 변화를 대하는 가운데, 그 사람에 대한 기대도 변하기 때문에... 하지만 일정 기간 그 사람을 대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 변화를 금새 감지한다.

어떤 사람은 그 분위기 속에서 지적인 향취가 나고,
어떤 사람은 거룩함이 묻어난다.
어떤 사람은 돈의 냄새가 때로는 은은하게, 때로는 강하게 나고,
어떤 사람은 악취가 난다.
어떤 사람은 너무 변해서 이 사람이 그 사람인지 다시 생각하게 하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은 10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인 경우도 있다.

10년 뒤, 그리고 20년 뒤 나에게서는 어떤 풍취가 느껴질까?
나를 오랫만에 만난 사람들이 내 모습 속에서 무엇을 발견할까?
내가 실망하고 슬퍼했던 것 만큼이나 그들도 나를 보고 실망하고 슬퍼할까?
아니면 변함없는 모습을 볼까?
그것도 아니면, 그 전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존경할 만한 그런 풍취가 느껴질까?

하루하루의 삶을 어떤 마음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가는가가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바로 내 자신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오늘 무엇을 위해 어떤 마음으로 살았는가, 아니 살고 있는가를 점검하지 않고 그냥 살아 간다면, 10년 뒤 내 모습은...

For we must all appear before the judgment seat of Christ, so that each one may receive what is due for what he has done in the body, whether good or evil. (2 Corinthians 5:10, ESV)

아련한 아픔 가운데, 내 자신을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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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요즘...
진리의 선포는 있지만, 촉촉하게 영혼을 적시는 성령의 역사가 드물고, 수 많은 교인들이 열심히 봉사하고, 그 봉사가 조직적으로 매우 잘 되어 있지만, 섬김이 적은 그런 교회를 경험하고 있다.
바른 것이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당연히 좋고, 그것이 없다면 절대로 가까이 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 바름이 매말라버린 바름이라면, 오히려 그것이 진짜 바름인지 다시 생각해 봐야하지 않을까?
소위 "무위도식"을 끔찍히 싫어하는 목회자의 명령을 따라 교인들의 열심으로 섬기는 것은 바른 것이다. 분명히 바른 교리 위에 서 있고, 그것을 실행함으로 순종하고자 열심히 하고, 교회도 조직적으로 그것을 권장하고 이루어 갈 때, 그것은 참 멋진 일이다. 하지만, 그것인 영혼에 대한 사랑과 관심, 그것도 온유와 겸손과 친절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면, 부담스럽기만 할 뿐이다. 그것은 그들의 열심일 뿐이지, 그 봉사의 대상인 영혼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모든 것이 잘 갖춰져 있지만, 핵심이 빠져 있다는 느낌이 드는 그런 교회... 많은 면에서 부족하지만, 온유함과 겸손함 가운데 사랑이 있는 교회... 둘 중 어느 교회가 더 좋은 교회라고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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