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회 간 둘째를 생각하며...

오늘 둘째가 학교에서 수련회 갔다. 평창으로 간다는데, 오늘 하루 종일 마음의 불안함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방금 아내에게서 무사히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았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불안한 마음이 약간을 줄어들었지만 그렇다고 불안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약 500일 전, 들뜬 마음으로 수학여행을 떠나던 꽃같은 아이들과 선생님들, 그리고 어른들이 수장되었다. 그 큰 배가 서서히 가라 앉는 것을 눈 앞에 보면서도 부모도, 그 누구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마음을 찢어졌지만 속수무책이었다. 그 때의 그 공포감과 좌절감이 내 안에 깊은 상처를 남긴 것 같다. 객관적으로 보면 너무 과민반응을 보이는 것이 분명하지만,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는 그렇지 않다.

세월호 이후 무엇이 바뀌었는가? 세월호 유가족들은 진상규명과 재발방지를 요구하며 필사적으로 싸우는데, 정부와 사회는 그들을 보상금을 노리는 자들로, 세상을 소란스럽게 만드는 자들로, 심지어 귀찮은 자들로 매도하지 않았는가? 그러는 사이에 진상규명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모든 것은 조용히 덮인다. 정부는 물론이고 사회는 반성하지 않는다. 그래서 안전사고가 끊이지 않는다. 심지어 여객선과 화물선의 운항도 세월호 사태 이전에 비해서 그리 나아진 것이 없단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그토록 필사적으로 싸우는 이유는 그들의 자식들의 희생이 의미없는 것이 되지 않게하려는 것이다. 그 아이들은 이미 죽었지만, 그들의 죽음이 앞으로 올 비슷한 사고를 예방함으로 수 많은 인명을 구하는 데 기여했다는 그런 의미부여, 그로 인한 위안이 바로 그들이 그토록 원하는 것일터... 그렇다면 그들의 싸움으로 득을 보는 것은 사실 그들이 아니라 우리다. 그들이 아무리 싸운다고 아이들이 살아돌아오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들의 노력으로 내 생명, 우리 아이들의 생명이 덜 위험해 지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그들의 싸움은 그들의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바로 내 싸움이 되어야 하고, 우리의 싸움이 되어야 한다. 그들이 그냥 잠잠하게 있더라도...

그런데 그 싸움은 여전히 그들의 싸움이고, 사회는 그들을 잊어간다. 그리고 "아직도 그러고 있느냐"는 반응으로 싸늘한 시선을 그들에게 던진다. 이것보다 더 큰 부조리가 있을까?

둘째가 걱정되고 보고 싶은 오늘 나는 세월호를 기억하는 노란리본 뱃지 두 개를 얻었다. 그것은 그간 기억은 하고 있지만 그들과 함께한다는 적극적 의사표명을 하지 않았던 내 자신을 반성하고, 세상에 그들을 잊으면 안된다는, 나도 결코 잊지 않겠다는 내 스스로의 반성의 고백이자 세상을 향한 항변이다.

모든 아이들이 안전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어른들인 우리가 만들어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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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에 순종하려는 의지

어제 퇴근길에 들은 Ravi Zacharias의 질책이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는 현대 교회의 문제가 말씀이 부족한 것, 혹은 말씀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진단하며 목소리를 높여 질책했다.

나는 그의 말에 100% 동의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이 시대 교회에서 보이는 양상은 말씀에 대한 이해, 말씀을 진지하게 탐구하는 자세가 너무나 희박하기 때문이다.  Sola Scriptura가 개신교의 가장 중요한 모토 중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어느새 장식품이 되어 버렸고, 말씀은 설교단에서, 혹은 라디오에서 설교자에 의해 한 번 소화된 것을 듣는 것으로 끝인 세대가 바로 우리 세대이다. 일반 성도들 뿐만 아니라 장로 집사들, 그리고 심지어 수 많은 목회자들까지도 말씀에 얼마나 무지한지... 치가 떨릴 정도이다.

하지만 Zacharias가 지적한 것은 보다 근본적인 것이다. 말씀에 무지한 원인이 바로 말씀을 싫어하기 때문이라는 것. 그리고 말씀을 많이 아는 자라 하더라도 그 말씀에 순종하는 자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 그것이 무서운 것이다.

내 자신을 생각해 보았다. 아침마다 말씀 앞에 무릎 꿇겠다고 다짐했지만, 바쁘고 급한 일이 생기면 그 시간이 대폭 줄어들기 있쑤이고, 그렇지 않고 말씀을 읽을 때에도 5-6 장 정도 읽는 그 시간, 30분에서 한 시간 밖에 안 되는 그 시간에 내 마음을 말씀 앞에 겸손히 하고, 온 마음을 다해 만군의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 보다는 읽는 도중에 생각은 딴데로 흐르는 경우도 종종 있고, 눈은 말씀을 따라가고 있지만 생각은 다른 일을 떠올리면서 그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하는 경우도 있다. 급하면 빨리 해치우고 싶은 마음이 들고, 말씀 후에 기도할 때에도 전심을 다해 기도하기보다는 하나님께 드리는 하나의 인사치례로 후다닥 끝내고 밀려있는 일을 하는 경우도 많다. 뿐만 아니라 일상의 삶에서, 관계에서, 하나님 중심을 외치고 살지만, 실제의 모습은 나 중심이고 세상 중심이며 하나님은 어느새 변방으로 밀려나버린 삶을 살기 일쑤이다. 그 와중에 짓는 죄악은 일일이 나열하기가 부끄러울 정도이다. 생각과 말은 성인의 삶을 지향하지만, 실제의 모습은 죄인 중의 괴수의 삶을 사는 위선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Zacharias는 그런 내 태도에 엄중한 경고를 던져준다. 하나님은 나에게 그런 대접을 받으실 분이 아니라는 것.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만왕의 왕이 되시는 분이라는 것, 그분은 나를 구원하신 구원자이시고, 나의 아버지가 되시는 분이라는 것. 이 온 우주도 그분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닌데, 하물며 나같은 것은 눈에 띄지도 않을 것에 불과한데, 그런 나를 주목하시고 찾아 와 주시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이라는 것.

그분을 홀대하는 내 자신을 깨달았고, 그 근저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려고 하는 내 자신의 죄악이 또아리를 틀고 있다는 것에 몸서리가 쳐졌다.

나는 그런 자인 것이다. 그 크신 하나님의 은혜에도 불구하고 의지적으로 그분을 거역하고 그분을 멀리하고자 하는 본성을 가진 자가 바로 나라는 것. 적어도 나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분의 말씀을 혐오하고, 내 자신을 앞세우고자 하는 욕망이 바다처럼 거대한, 흉악한 자라는 그의 지적이 딱 들어 맞는 지적이다.

그 진노의 설교를 들으면서 참 슬펐다. 나라는 존재가 그 정도 밖에 안 된다는 것이 슬펐고, 그런 나에게 그렇게 푸대접을 받는 하나님께 죄송해서 슬펐다.

그런 나를 보게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하나님께 내 죄악을 자복한다면, 하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셔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내 안에서 만들어 주시지 않을까? 참 그렇게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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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uno

2013년 1월인가? 처가댁을 방문했다가 태어난 지 한 달 밖에 안 되는 강아지 두 마리를 집으로 데려왔다. 강아지들을 데려올 것인가를 고민할 때, 나와 둘째는 적극 찬성, 첫째는 유보, 아내는 반대했었다. 찬성이 많았기 때문에 결국 데려 오기로 했고, 그 중 한 마리는 강아지를 키우기를 원하시는 둘째 친구의 할머니 댁으로 보냈다(지금도 대접 잘 받고 잘 살고 있는 것 같다).






강아지는 어릴 때는 키우기가 재미있지만 커가면서 어려움이 점점 늘어난다. Bruno라고 이름붙인 우리 애도 그랬다. 강아지 때는 똥오줌 가리게 하는 것 빼놓고는 다른 문제는 없었다. 물론 그것도 쉽지는 않았지만...

강아지가 커서 개의 모습이 점점 드러나면서 가장 큰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했는데, 털이 너무나 많이 빠진다는 것이다. 봄과 가을 털갈이 할 때 무지막지하게 빠지는 것을 차치하고도 그 외에도 상당히 많은 양의 털이 빠진다. Bruno가 잠시 놀다간 자리를 진공청소기로 청소하면 턱이 수북히 싸이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을 정도였고, 음식, 옷 등 모든 곳에서 Bruno의 털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야 집에 거의 없고 밖에서 생활하는 사람이니 크게 신경쓰이지 않지만, 아내의 스트레스는 대단했다. 원래 강아지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 스타일에다 털관리에 먹이고 똥오줌 치우는 것을 떠맡아야 했기 때문에 참 힘들어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베란다에서 키우기로 했다.

문제는 베란다로 내 보내면서 Bruno의 성격이 거칠어진 것. 그 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베란다에서 생활하면서부터 외부 사람들을 보면 낯설어 하면서 심하게 짖어댔다. 하지만 이런 문제는 밖에 산책할 때만 생기는 문제라서 그나마 좀 나은 것이었고,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우렁찬 목소리. Bruno는 큰 개가 아니고 중간에서 작은 축에 속하는 크기이지만, 목소리만으로 본다면 대형개 못지 않은 소리를 낸다. Bruno가 자주 짖는 편은 아니다. 하지만 짖을 때면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온 동네에 울려퍼질 정도이다.




그 전에 살던 동네에서는 개들이 많아서 그런지 그런 큰 목소리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온 동네에 개짖는 소리가 많이 들렸기 때문에 거기에 묻힌 것이다. 하지만 새로 이사온 동네는 그 전보다 훨씬 조용한 곳이다. 그래서 그런지 Bruno 때문에 민원이 많이 들어 온 모양이다. 근처 사는 사람이 찾아오기도 했었다.

그런 불만을 접수하고 나름대로 노력을 많이했다. 덕분에 적어도 우리가 보기에는 짖는 횟수가 전보다 현저하게 줄었다. 하지만 이웃들이 보기에는 부족했나보다. 며칠 전 저녁에 갑자기 경찰 두 명이 찾아왔다. 공손하고 좋게 말하긴 했지만 이 동네 주변 사람들의 민원이 경찰서로 들어 오고 있으니 조치를 취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제안한 것이 성대수술.
평생 처음 경찰의 방문을 받고 온 가족들이 비상대책회의를 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옵션은 짖지 않도록 조치하는 것(성대수술이나 마스크 착용)과 처가댁으로 돌려 보내는 것.
일단 마스크 착용에 대해서 알아 봤지만, Bruno의 성격상 더 큰 문제를 일으킬 것이라는 것, 그리고 효과가 거의 없을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남은 것은 둘 중 하나: 성대수술 아니면 돌려 보내는 것.

많은 토론을 하면서 어려운 시기를 겪었다. 특히 첫째가 많이 힘들어 했다. 처음에 데려올 때는 유보 입장을 보이던 아이. 강아지가 싫어서가 아니라 데려 올 경우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 때문에,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성숙한 태도를 견지했던 아이(그 때가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Bruno를 데려 오고 성장해 가면서 Bruno에 대해서 주인의식을 가지고 가장 성실하게 챙기고 마치 동생처럼 아끼고 사랑한 사람은 바로 첫째였다. 밖을 나갈 때면 언제나 Bruno걱정이 먼저였고, 아무리 힘들어도 Bruno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 세상구경시키면서 산책시키는 것을 거르지 않았고, 그를 위해서라면 평소에 잘 않던 청소하기를 마당하지 않았고, 집에 있을 때면 늘 먹을 것 챙겨주고 똥오줌 치워주고, 놀아주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Bruno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늘 그를 아끼던 아이가 첫째였다. 이런 첫째를 보면서 서 내 딸이지만 존경하는 마음이 저절로 든다.

그런 첫째에게 Bruno 문제는 너무나 중요한 문제였다. 논의를 하면서 눈물을 멈추지 않는 첫째. 나는 그런 첫째를 위해 성대수술을 생각했지만, 첫째의 생각은 나와 달랐다. 성대수술을 하는 것은 적어도 그 애 생각에는 인간을 위해 동물을 희생시키는 것이라는 것. 인간이 개를 데리고 있고 싶은 마음에 개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라는 주장. 물로 성대수술을 하더라도 목소리를 완전히 잃지는 않고, 일부 사람들은 개가 그것으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지는 않는다고 주장하지만, 자신을 위해 Bruno에게 그런 희생을 강요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단다. 그래서 마음이 너무 아프지만 시골에 있는 처가댁으로 보내서 거기서 마음껏 짖으며 살도록 하고 싶다고 마음을 토로했다.

'이런 것이 사랑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Bruno를 자주 보지 못하는 아픔을 자기가 떠 안으면서도 Bruno를 온전히 지켜주고 싶은 마음.

이제 걱정은 어떻게 Bruno가 외가집에서 잘 적응하도록 할 것인가였다. 자주 가서 보는 것이 Bruno의 마음을 안정시킬 것인지, 아니면 자주 안 가는 것이 Bruno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데 더 도움이 될지... 오로지 Bruno를 위하는 마음.

어젯밤에 집에 늦게 들어 갔는데, 첫째가 말한다. "I can't believe that Bruno has to go..."

완전한 이별은 아니지만 사랑하는 Bruno와 떨어져야 하는 그 고통을 첫째가 잘 이겨내기를... 아빠로서 간절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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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ust

"If this be so, our God whom we serve is able to deliver us from the burning fiery furnace, and he will deliver us out of your hand, O king. But if not, be it known to you, O king, that we will not serve your gods or worship the golden image that you have set up." (Daniel 3:17-18)

Daniel and his three friends' story always challenges me to check if I'm courageous enough or faithful enough to confront the world like them to preserve my faith and trust in God.

In this short answer of Daniel's friends, I tend to focus more on their firm belief in God's miraculous work that will deliver them who struggle keep faith from the attack of the world. But what is the most important here is the phrase "but if not". I trust in Him and don't betray Him not because He will save me from all the trials and lead me to a victorious life in this world, but because He is my creator, god, savor, and father. In His providence He may deliver me from sufferings, but He may not. The decision is up to Him, not to me. As a creature, son, and worshipper, all I can do is just go the way that will please H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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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버이날의 단상

어제 저녁 어버이날을 맞이해서 두 딸들이 사진첩을 만들어서 선물로 줬다. 지금까지 받아 본 선물 중에서 가장 감동적인, 정성이 느껴지는 선물이었다.

그 사진들 중 하나. 동네 길모퉁이 작은 찻집에서 핫코코아를 먹는 사진. 그리고 그 옆에 있던 아이들의 설명. 정확한 문구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 내용은 소소한 일상에서의 작은 이벤트가 많은 돈을 들인 것보다 더 좋은 추억을 남길 수 있다는 말.

그 사진을 한참 보고도 그 때의 일이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은 어렴풋이 그 때 거기에 온 가족이 갔었다는 것은 기억하지만 왜 갔는지, 뭘 했는지, 무슨 말을 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까맣게 잊고 있었던 그 일을 아이들은 좋은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들에게 좋은 아빠,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 세상에서 크게 성공하거나 돈을 많이 벌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다행이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좋은 추억을 만들어 주는 그런 아빠로서의 삶을 살고 있는가에 대해 다시 한 번 반성하게 된다.

아이들과 함께하면서 내가 믿는 하나님에 대해서 나누고, 세상을 더 아름답게 가꾸고 의미있게 사는 법에 대해서 가르치며, 아이들의 손을 잡고, 그들이 나를 필요로 할 때 곁에 있어주는 그런 아빠가 되고 싶다. 아무리 바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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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단상.

저녁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지금...
발걸음을 집으로 향하는 것, 저녁을 가족들과 같이 하는 것, 저녁 식사 후 아내와 동네를 산책하는 것, 아이들과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는 것, 읽고 싶었던 책을 꺼내 읽다가 잠에 드는 것...
그런 것들이 먼 나라의 꿈같은 이야기로만 느껴지는 것은... 결코 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특히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것 아닐까? 적어도 내가 보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저녁은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아니라 일하는 시간이다.
경쟁은 생산적인 삶을 위해 필요한 것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지켜야 할 것들을 지키지 못 한 채 경쟁으로 내 몰리는 삶은 참으로 비극적이다.
저녁이 있는 삶은 이 시대에는 정치적 구호로나 등장할 정도로 우리 일상의 삶에서 멀어져 있다. 소중한 것을 잃고 살아가는, 아니 살아가기를 강요당하는 이 시대... 암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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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에 대한 소회...

지난 11일 퇴근 길에 지하철에서 기절하여 바닥에 쓰러진 후 약 11일 만인 어제 학교에 나가서 일정시간 버티다가 채점해야 할 것들을 겨우 챙겨서 집에 일찍 왔다. 그리고 오늘은 서울 동부의 한 호텔에서 있었던 과 교수님들과의 회식에 참여했고 학교에 잠깐 들러 이번에는 지하철을 타고 집에 오는 "모험"을 감행했다. 비록 지하철에서 집까지 걸어 오지는 못하고 택시를 타긴 했지만...

바닥난 체력은 오늘 과교수님들이 보여주신 사랑과 아내의 정성스러운 간호로 언젠가는 채워 지겠지... 그리고 다음 주 월요일에 좋은 병원에서 진찰을 하기로 했으니 원인도 밝혀질 것이고...

신체적인 것 외적인 원인을 찾는다면, 올해 겪은 큰 일들: 어머니의 소천, 세월호, 아메리카학회 국제학술대회, 그리고 학교관련 긴 출장, 이 네 가지가 에너지를 고갈시킨 원인으로 보인다.

그 중 어머니의 소천. 오늘 약속장소로 가면서 어머니를 모시던 길을 지날 때, 차 안에서 가슴이 먹먹하고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어머니...'
그 냥 그 말을 혼자 되뇌이던 것 외에는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세월호는 어머님의 소천보다도 훨씬 정서적 에너지의 소모가 큰 사건이었다. 어머니는 연세가 있으신 분이었고, 천국에 계실 것이라는 믿음이 나에게 아픔 가운데서도 위로를 줬지만, 내 자식같은 아이들과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들을 그 차가운 바다에 수장해 버린 그 사건, 그리고 그 사고와 유가족을 대하는 정부와 여당, 제1야당의 태도는 나를 분노하게 만들었고 무기력하게 만들었고 우울하게 만들었다. 오랜 눈물로 내 심신이 지쳐갔던 모양이다. 나는 도저히 이 악한 자들을 용서할 수 없다. 지금도 그들에 대한 분노가 끌어 오른다.

체력이 다시 충전된다면 그 분노를 사회변혁으로 승화시키는 일을 조금씩 더 구체화시켜 나가야겠다.(물론 지금은 학기말 성적을 내는 것이 급선무....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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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식하는 유민이 아빠를 보며...

솔직히... 내 딸이 그런 사고를 당했다면 나는 유민이 아빠처럼 그렇게 저항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훨씬 더 과격했을 것이고, 아마도 이성을 잃은 행동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유민이 아빠를 보면서, 그의 단식을 보면서, 정말 격렬하게 저항하면서도, 법과 품위를 지키는 그 모습에서 존경하는 마음이 저절로 우러난다.
나 역시 그가 죽기를 절대 원하지 않고, 건강하게 승리하기를 바라지만... 감히 그에게 단식을 중단하라고 말 할 수는 없다.
딸에 대한 미안함, 그 딸의 죽음이 결코 헛된 죽음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그 죽음이 그 이후에 있을, 수 많은 죽음을 막는 거룩한 희생이 되어야만, 그나마 아픈 가슴을 부여잡고라도, 그 죽음의 의미를 부여하며, 그것으로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고, 후에 유민이를 만났을 때 면목이라도 설 것이라고 믿는 그 마음을, 비슷한 나이의 딸을 가진 아빠로서 충분히 이해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유가족이 원하는 특별법을 만듦으로서 그를 살리는 것만이 유일한 길인 것 같다.
정치권이 아무리 악한 자들이 모인 집단이라 하더라도, 한 아이의 아버지의 이 처절한 몸부림을 죽음으로까지 몰아갈까? 두려운 것은 그럴 수도 있다는 느낌이 점점 커진다는 것, 그것이다.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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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패드

산 지 8개월 정도 된 아이패드 에어.

이 주 전에 갑자기 많이 뜨거워진 적이 있었다.

그 후 밧데리 충전 능력이 현격히 떨어진다. 그 전에는 한 번 충전에 많으면 1주일, 적으면 3일 정도는 너끈히 견뎠는데, 지금은 똑같이 사용하는데도 많으면 3일이다. 물론 충전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그 전보다 훨씬 짧아졌다. 그래서 좋은 면이 있기도 하지만, 오래 쓰지 못한다는 것이 더 불편하다.

2011년에 iPod Touch 샀을 때도 똑 같았다. 약 8개월 정도 지나고 나니 한 번 엄청 뜨거워지더니 그 후로는 밧데리가 전과 같이 않게 되었다. 그래서 AS를 요구했더니, 애플 정책상 수리는 불가능하고 다른 것으로 교체해 준다고 해서 그렇게 하랬다. 멀쩡해 보이던 새로 받아온 기계는 다시 몇 개월 지나자 여기저기 고장이 나기 시작했다. 사설 수리기관에 가서 수리를 의뢰했는데, 뜯어 보더니 하는 말이 문제있는 부품을들 이것 저것 조립해서 만든 문제가 아주 많은 refub이라고 한다. 쉽게 말해 걸레 조각 모아서 겨우 옷 모양을 만들어 놓은 형국이랄까? 문제는 원 제품을 살 때의 보증기간이 넘으면 애플은 아무 것도 안 해준다는 것. 두 번째 제품이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 그 보증 기간을 2개월 정도 넘긴 후였으니, 자기들은 책임질 수 없고,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다고 딱 잡아 뗐다.

아이패드가 문제의 조짐을 보인다. AS기간이 충분히 남아 있다. 그래도 AS를 받을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이런 경험 때문이다.

아이패드가 어느새 내 생활의 중심에 들어와 있다. 그것 없이는 생활이 어려울 정도로... 어찌해야할지...

속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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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돌이킴

오늘 아침 밧새바와 간음하고 우리야를 살인하는 다윗을 봤다. 하나님께서 그의 행동을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표현이 성경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시게 하고 그분을 대적하는 죄악을 저지르는 다윗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하지만, 최근에 어떤 분으로부터 남자는 돈과 권력이 생기면 꼭 딴짓을 하게 되어 있다고 들었는데, 만약 나라면 그 지위에 있을 때 다윗보다 더 정결한 삶을 살 수 있었을까? 장담하건데 결코 아니다. 이렇게 돈없고 힘없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서슴지 않고 죄악을 저지르는 내가 다윗의 자리에 있다면 아마도 성경에 나온 악한 왕들의 계보에 들 것이 뻔하다.

다윗의 죄악을 볼 때마다 놀라는 것은, 그의 죄악의 크기와 깊이가 아니다. 오히려 그의 돌이킴이 참으로 놀랍다. 그가 한창 죄악 가운데 있을 때, 나단 선지자가 그에게 나타난다. 그의 출현 자체가 다윗에게는 가슴 철렁한 이벤트였을 터... 왜냐하면 나단은 그 전부터 선지자에 방불하던 다윗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던 선지자의 선지자였기 때문이다. 나단이 그를 알현하고자 했을 때, 그것을 허용했다는 것 자체가 다윗답다. 나라면 다난의 등장이 의미하는 것을 충분히 알았을 것이기 때문에 그이 면담을 거부했을 것이다. 마음이 불편했을 것이고, 창피했을 것이고, 무엇보다 죄악을 더 즐기기 위해서... 하지만 다윗은 그와의 면담을 허락한다.

잔뜩 긴장한 다윗에게 나단은 딴소리를 한다. 다윗은 밧세바와의 사이에 대해서 추상같은 비판이 있을 것이라 예상했는데, 그것이 아니라 사소한 문제를 들고 나온 것이다. 아마 그는 그것이 비유라는 것을 알아채지 못한 것 같다. 나단은 가축이 많은 부자와 암양 한 마리 밖에 없는 가난한 자 사이의 불의를 마치 다윗과는 관련이 없는 하나의 법적으로 다뤄야 할 케이스인 것처럼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다윗은 자신의 치부가 드러나지 않았다는 안도감과 자기가 지은 죄책감 때문에 이 사건에 대해서 과도하게 반응한다. 그는 그 부자에게 대노하면서 그를 즉각 엄벌할 의지를 드러낸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이 정의의 편에 서 있다고 포장하고 싶었을 터이다.

안도감 속에서 죄책감을 의로운 겉모습으로 깊이 숨기고자 하는 그에게 나단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You are the man!"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물어보나 마나다. 내가 죄를 지은 것을 스스로 인정한다고 해도, 다른 사람이 그렇게 면전에서 그 죄를 들춰낼 때, 그것도, 불의의 습격으로 그렇게 될 때, 나는 분명 그에 반발할 것이다. 죄는 죄이고, 창피한 것, 황당한 것은 다른 문제이니까... 아마 나단을 그 자리에서 쫓아 냈을 것이고, 내가 한 행위가 사람들에게 미안한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밧세바를 끝까지 책임졌다고, 그 때는 어쩔 수 없었다고... 혹은 심지어 밧세바에게 책임을 뒤집어 씌워서 그 여자가 나를 유혹해서 그런 일이 생겼다고... 가능한 모든 구실을 내세워 내 체면을 세우기 위해서 노력했을 것이다.

다윗이 위대한 것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단의 추상같은 돌직구에 그는 말한다.

"I have sinned against the LORD."

변명도 없고, 군더더기도 없다. 체면도 없고, 자존심도 없다. 하나님께서 죄를 지적하실 때, 그 앞에 무조건, 즉각적으로 무릎꿇는 것. 그것이 참 대단하다. 죄를 지은 경험이 많은 나로서는 도저히 불가해한 것이 바로 다윗의 이 반응이다. 이것이 바로 다윗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는 태도인 것이다.

성경이 지적하듯, 인간을 옥죄는 죄의 결박은 참으로 단단하고 집요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위대한 것은 그 죄의 결박으로부터 나를 자유케 했다는 것 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여전히 죄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다. 다윗은 스스로 죄인임을 고백하는 이 모습을 통해서 구약의 인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미리 받은 믿음의 조상 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내 안에 그런 십자가의 능력이 나타나고 있는가? 내가 죄인임을 고백하며, 주님 앞에 즉각적으로 무릎꿇고 회개하는 그런 삶이 내 일상의 삶이 되고 있는가? 이 아침에 다윗을 보면서 내 자신을 부끄럽게 돌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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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중립??

교황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인간적인 고통 앞에 서면 마음이 시키는 대로 행동하게 된다"면서 "어떤 이들은 이를 두고 '정치적인 이유로 그렇게 한다'고 생각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세월호 사고) 희생자의 아버지, 어머니, 형제, 자매를 생각하면 그 고통이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클 것"이라면서 "내 위로의 말이 죽은 이들에게 새 생명을 줄 수 없지만 희생자 가족을 위로하면서 우리는 연대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한겨레신문 2014.8.19

정치적이지 않기 위해서 중립의 자리를 찾아 가는 것.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닌 자리에서 마치 세상을 초월한 것처럼 보이는 것. 그것보다 더 정치적인 것을 없다. 소위 그 "중립"을 지키기 위해 정치에 대해서 매우 민감해야 하기 때문에...

종교가 정치의 한 분파와 결탁할 때 반드시 썩는다. 그런 의미에서 종교는 정치와 거리를 두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정치의 회색지점을 애써 찾아가며 모든 이슈에 대해서 침묵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정치를 초월하는 것이 중요하지 중립을 절대화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란 말이다.

종교인, 특히 내가 속한 개신교도라면, 정치적인 것보다 하나님 적인 것, 성경적인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 되어야 한다. 성경적이다 보면 때로는 수구꼴통이라고 비난 받을 때도 있고, 때로는 종북이라고 비난 받을 수도 있다. 물론 때로는 매우 무관심해 보이는 때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가치를 가장 우위에 두는가, 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지키고자 애를 쓰는가이다.

작금의 한국 현실은,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침묵하는 것, 방관하는 것, 혹은 박근혜 정부에 동조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다. 그렇다면 정치적 중립을 지키기 위해 애써 외줄타기를 하며, 세상을 초월하는 듯 먼 산만 바라보고 있는 한국 교회는 하나님의 진노를 피해가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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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 속에서 희망을...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사실. 그리고 그분이 역사의 주관자라는 사실.

그 사실로 인해 나는 이 야만스러운 사회에 대한 절망을 극복하고 희망을 가진다. 그 희망은 순전히 그분의 존재와 속성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그 크기는 참 크다. 그것이 감사 제목이다.

그 분은 절대 실망시키지 않는 분이라는 것을 믿고, 그 분이 기뻐하시는 일을 내 삶의 바운더리 안에서 묵묵히 해나간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결과 내 삶의 결을 맞추는 일은 그래서 너무나 중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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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잊지 맙시다!

세월호 침몰로 희생된 귀한 생명의 사연을 모아 놓은 곳.

한겨레 신문사 추모 웹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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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대학을 바라보며..,

대학들이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들이 되어 간다는 증거는 대학본부에서 "돈"에 대한 강조가 너무 많다는 것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소위 고등교육기관인 대학에서 진정한 교육에 대한 논의는 이미 사라졌고, 등록금 동결 혹은 인하와 신입생 감소에 따른 적자를 해결하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으로 모든 것을 돈의 문제로 환언해서 말하는 그런 논리가 지배적이다. 이윤추구가 최고의 목적인 기업과 별반 다를 바가 없는 모습이 되어 버렸다.
문제는 백번 양보해서 생존이 최고의 가치가 된 대학간 무한 경쟁 구도 속에서 적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돈이 최상의 가치가 되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돈을 버는 것으로 조직을 살리는 기업의 경험이 없는 교수출신의 본부 관계자들이 보이는 너무나 아마추어적이고 기업 운영의 ABC도 모르는 행태는 가히 장탄식을 불러 일으킬만 하다. 기업으로서의 대학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그 조직이 가진 가장 핵심역량을 증대시키며, 비핵심부문의 효율화를 도모하는 것이 가장 기본인데도 불구하고, 요즘 대학의 행태는 그에 대한 무지로 값을 톡톡하게 치렀던 1980년대의 기업들이 보인 행태의 답습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핵심부문의 역량을 지키는 것이 시장의 변동에 기민하게 대응하는 유일한 방법이고, 그것이 손상되었을 때 기업의 생명이 치명적인 타격을 입음으로 인해서 회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는 것을 대학을 운영하는 관계자들은 완전히 무지한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더구나 대학은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이 아니고 교육과 연구를 통해서 사회에 공헌하는 기관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핵심역량인 학생교육과 교수의 연구환경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작금의 상황은 대학들로 하여금 경쟁에서 생존하게는 할지 몰라도 궁극에는 대학무용론의 폭탄을 맞을 것이다.
대학이 대학다움을 잃어버린다면, 대학의 존재 이유가 없이 않겠는가?
학생은 고객이나 머리수로 따지는 돈이 아니라, 그리고 기업에서 일시적으로 쓰고 버릴 부품이 아니라, 이 사회의 미래이다. 이들을 바르게 가르치는 것은 국가와 세계를 위한 일이다. 이들에게 비판적 사고, 종합적 사고, 치밀한 사고, 방대한 독서에서 나오는 넓은 관점을 가지도록 돕는 것은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가는 확실한 길이다.
그것이 대학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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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사태 101일째를 맞는 아침에

새누리당의 최근 행태에도 불구하고, 그 당의 지지율이 크게 변함이 없다는 것 자체에 절망합니다. 노무현 대통령 때에는 작은 실수 하나에도 그렇게 요동을 치던 지지율, 그렇게 날선 비난을 날리던 한국 국민들이, 그와는 비교되지 않는 큰 악행을 서슴지 않는 새누리당에 대해서 그렇게 무덤덤한 반응을 보이는 것을 보면서 우리 한국 사회의 문제를 봅니다.

얼마전 유시민씨가 새누리당의 지지는 물질에 대한 욕망과 안정을 향한 욕구 두 가지의 기둥에 지탱되고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정말 맞는 분석이라고 봅니다. 더 잘 살고자하는 욕망과 불안에 대한 공포만큼 끈질긴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물론 잘 살고자 하는 욕망과 안정에 대한 욕구는 잘 못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상식과 도덕과 법을 무시하고라도 더 많이 물질적으로 누리겠다는 욕구(강남에 편입되고자 하는 욕망)는 잘 못된 것입니다. 안정은 좋은 것이지만, 그것이 약한 자의 희생이나 자신과 다른 목소리를 레이블링(대표적으로 "빨갱이")하고 제거함으로써 얻어지는 안정이라면, 그것은 안정이 아니라 폭거입니다.

새누리당의 지지는 긍정적인 의미의 잘 살고자 하는 욕망과 안정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라 심히 왜곡되고 부패한의미의 잘 살고자 하는 욕망과 안정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내 개인의 정치적 성향을 떠나서,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양심을 걸고, 이는 반 성경적이고, 반 하나님적임을 믿습니다. 내 종교적 양심이 그것이 내가 이 악과 맞서 싸워야 한다고 명령합니다.

적어도 내가 읽는 성경은 법과 원칙이 바로 서는 것, 약자의 권리가 무시당하지 않는 것, 생명의 존엄성이 훼손되지 않는 것, 아픈 자와 함께 아파하고 고통받는 자와 함께 고통받는 것, 강자가 약자를 무릎꿇고 섬기는 것,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의 공의에 그 어느 때보다도 배고프고 목마릅니다.
애통하는 마음이 제 마음을 가득한 것이 지금보다 더 한 때는 없었습니다.
심령이 지금처럼 가난해져 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약속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배부르게 하시고, 위로하시고, 부요하게 하시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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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왕되심 선포

"예수님은 나의 왕이시다."

최근 기독교 일부에서 시도하고 있는 예나왕(예수님은 나의 왕) 운동. 그것은 바람직한 운동이고 확대되어야 할 운동임의 분명하다. 하지만 세상이 "예수님이 왕이야?"고 물을 때 용기 있게 "그렇다. 예수님이 왕이시며."라고 대답할 준비를 하고 실재 그렇게 하면 되는걸까?

만약 이 시대의 표준적인 교인들이 그렇게 대답한다면 세상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적어도 내 생각에는 박장대소를 하면서 더 큰 조롱이 소위 우리의 왕이라 불리우는 예수님께 쏟아지지 않을까?

대부분의 교회에서 이미 예수님은 그 왕위를 찬탈 당한지 오래다. 그 자리에 담임목사의 절대 권력, 맘몬사상, 출세, 권력을 향한 욕망, 세상보다 더 지저분한  욕정들이 대신하고 있다. 최근 교인이라는 이름으로 치부를 드러내는 정치인들은 교회의 예외적인 현상이 아니라 민낯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교인들이 예수님을 왕이라고 선포하면 선포할수록 오히려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아이러니가 현실이다. 이 기형적이고 가슴아픈 현상에 기여하는 자들은 소위 교회의 리더들이나, 그 핵심에는 목화자들이 자리하고 있다. 마치 하나님을 가장 경외해야 할 제사장들이 주축을 이루었던 사두개인들처럼, 믿음의 한 가운데 있어야 할 목회자들이 오히려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주요그룹에 있는 것이다(물론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다,).

가슴이 아프다. 예수님을 왕으로 선포하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것들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그에 걸맞는 삶을 살기 위한 분투가 따라야 한다. 믿는 자들 개개인의 세상의 도덕 기준을 훨씬 능가하는 삶과 그런 삶을 지향하는 모습이 너무나 중요하다. 그럴 때에야 내 입으로 고백하는 예수님의 왕되심에 세상이 진지하게 반응할 것이다.

최근 장로 대통령으로 시작해서 많은, 소위 기독교 관련 인사들의 작태를 보면서, 그리고 그런 그들을 호위하고 감싸는 교회의 흉측한 망동을 보면서, 마음 속에 깊은 탄식이 흘러 나오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Soli Deo Gloria!


우리의 삶에 이 모토가 각인되어 있다면, 우리가 입을 벌리지 않아도, 이미 세상은 적어도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왕이라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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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환의 추모 노래


그렇게 울고, 그렇게 분노하고, 그렇게 미안했는데... 아직도 눈물이, 분노가, 미안함이 많이, 아주 많이 남아 있다는 것. 이 노래를 들으면서 새삼 깨닫는다.

이제는...
무기력과 슬픔과 분노와 미안함을 간직한 채, 뭔가를 시작하련다.
가만히 있지 않으련다.
반드시 이 세상을 바꾸고야 말겠다.




꿈의 소풍을 떠나 부디 행복 하여라--안치환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야속한 시간만 흘러가고
그렁한 눈망울만이
저 검은 바다를 응시할 뿐

제발 꿈이라면 좋겠어
숨죽인 기도의 노래도
부서지는 파도를 따라
아무 흔적도 없이 흩어져 버려

기적을 바랬지만 생명을 원했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대답없는 꽃이여
천국이 있다면, 천국이 있다면
꿈의 소풍을 떠나 그곳에서
부디 행복하여라

미안해

꿈의 소풍을 떠나 부디 행복하여라


마지막까지 불렀을 이름
엄마.. 엄마
다가온 절망의 그림자
끝내 오지 않는 삶의 끈이여

기적을 바랬지만 생명을 원했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대답없는 꽃이여
천국이 있다면, 천국이 있다면
꿈의 소풍을 떠나 그곳에서
부디 행복하여라

미안해

꿈의 소풍을 떠나 부디 행복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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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함민복 시인의 추모시

창비 페이스북에 실린 함민복 시인의 세월호 추모시

함민복

배가 더 기울까봐 끝까지
솟아 오르는 쪽을 누르고 있으려
옷장에 매달려서도
움직이지 말라는 방송을 믿으며
나 혼자를 버리고
다 같이 살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갈등을 물리쳤을, 공포를 견디었을
바보같이 착한 생명들아!
이학년들아!

그대들 앞에
이런 어처구니 없음을 가능케 한
우리 모두는...
우리들의 시간은, 우리들의 세월은
침묵도, 반성도 부끄러운
죄다

쏟아져 들어 오는 깜깜한 물을 밀어냈을
가녀린 손가락들
나는 괜찮다고 바깥 세상을 안심시켜 주던
가족들 목소리가 여운으로 남은
핸드폰을 다급히 품고
물 속에서 마지막으로 불러 보았을
공기방울 글씨

엄마,
아빠,
사랑해!

아, 이 공기, 숨 쉬기도 미안한 사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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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을 잃어버린 교회

온 나라가 세월호의 슬픔 때문에 고통당하고 우울해 하고 있는 요즘. 일부의 말대로 국민들이 일상으로 돌아가고자 노력해야 한다는 말에 동의한다. 언제까지나 아파하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
하지만 개인이 그런 노력을 기울이는 것과는 별도로 지도자들, 특별히 영적 지도자들은 이 엄청난 사건에 대한 깊이 있는 해석을 통해서 "의미"를 도출해 내고 그것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는 일을 감당해야 한다. 그것이 그들이 이 땅에 존재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이니까...
그런데, 최근 내가 듣는 대부분의 설교(한 설교를 제외한 모든 설교)에서 이 참사는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고 있다. 거의 언급이 없거나, 아니면 지나가면서 안타깝다는 정도의 의사표현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 가운데서 전해지는 성경 말씀은 왠지 공허하게 들린다. 오늘 내가 다니는 주일설교에서 복음이 전해졌다. 전도를 위한 새가족 초청잔치이기 때문에 복음을 설명하는 내용이었지만, 그 참사와는 (혹은 현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그저 기계적이고 도식적인 복음의 설교는 그 어느 때보다도 공허해 보였다.
치열한 고민이 없이 전해지는 복음.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타락한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이 소식이 이처럼 의미없게 들린 적은 내 인생에 단 한 번도 없었다.
사실 지금이 그 어느 때보다 복음이 필요할 때이다. 믿는 사람에게 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에게도 하나님의 위대한 복음은 진정한 소망이 된다. 아니 유일한 소망이다. 온 나라를 비통하게 만들었던 이 사건을 해석해 내고,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근거도 복음에 있다. 그 복음으로 아파하는 자와 함께 아파하며, 고통하는 자와 함께 고통하는 가운데,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참된 희망의 메시지를 던지는 것이 바로 복음의 능력이 아닌가?
그런 메시지를 줄 수 없는 교회는 이미 능력이 없는 교회이며, 이 땅에 존재 이유가 없는 그런 교회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아니 뒤집어 생각해 본다면, 그런 메시지를 도출할 능력이 없는 교회이기 때문에 그런 참사를 막을 사회적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고, 소금으로서의 짠 맛을 잃어버리고, 그 비극의 탄생에 동참한, 혹은 그것을 주도한 세력이 되어 버린 것 아닌가?

안타깝고 비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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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내 아픔.

세월호 사고로 인해 내 인생에서 가장 우울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올해 1월 말에 어머니께서 돌아가셔서 매우 슬펐지만, 지금처럼 우울하지는 않았으며, 분노하지 않고, 미안한 마음은 없었다. 어머니가 그리울 뿐,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하지 못했던 것을 아쉬워 했을 뿐... 하지만 지금은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수시로 터져나오는 눈물은, 죽음 당한 무고한 생명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내 자신과 사회와 정부를 향한 분노와, 눈 앞에서 사라져가는 생명들을 보고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에서 비롯된 무기력감, 그리고 아이들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다.
온 국민이 겪고 있는 이 슬픔과 충격이 어떤 결과를 낳게 될지 모른다. 적어도 지금 보이는 조짐으로는 전과 그리 많이 다른 세상을 만들어 가는 그런 기폭제로 사용될 가는성은 적어 보인다. 그것이 참 암울하다.

그런 상황에서 한 가지는 꼭 집고 넘어갈 것이 있다.
사고 직후 어린 생명을 애도하는 일부가 슬퍼하며 학생들에게 어른들의 말을 듣지 말고 탈출했었어야 한다며, 교실에서 복종을 강요하는 교육 시스템에 대해서 비난했다. 그 상황에서 아이들이 가만히 있으라는 안내를 듣고 그대로 있었기 때문에 비극이 커졌다는 것을 안타까와 하는 마음에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이다. 아이들이 그 안내보다는 상황을 판단해서 그 안내를 어기고 탈출했더라면 일이 이 지경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인 듯하다.
우리나라 교육에 문제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아이들이 순진하게 안내방송을 믿고 그대로 있었기 때문에 더 많은 희생자가 나온 것도 사실이다. 이 것이 참 가슴 아프게 한다.
하지만 일부가 말하는 것처럼 사고가 발생했을 때, 안내방송을 따르지 않고 독자적으로 판단해서 그 위기를 탈출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발상이다. 그럴 때일수록 안내방송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승무원의 안내에 따라 그들에게 적극적으로 협조해야 한다. 그래야 살 수 있는 것이다.

아이들은 잘 못한 것이 없다. 비록 그들이 안내방송을 철석같이 믿음으로써 죽음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잘못은 그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일이 다시 발생한다 하더라도 그 아이들은 반드시 그렇게 해야한다. 문제는 어른이며, 문제는 승무원들이며, 문제는 그들을 "구조"하러 간 어른들이다. 그들이 자신들이 해야할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착한 아이들을 죽음으로 내 몬 것이다.
슬픔은 이해하지만, 그래서 여러 가지 생각 가운데 아쉬움이 남는 것은 이해하지만, 본말을 전도하지 않기를... 사건의 본질을 흐리지 않기를... 더 위험한 생각들을 아이들에게, 그리고 더 나아가 모든 사회 구성원들에게 퍼트리지 않기를...

아프다... 정말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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