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오랫만에 한 지체와 만나서 대화를 나누었다.
믿음의 문제로 힘들어하고 있고, 분노와 체념이 섞인 가운데 내 앞에 나타난 그 지체...
자신의 믿음없음, 자신이 주님 안에 있지 않음을 확신하고 내 앞에 나타는 그 지체를 보면서 참 안타까움이 앞섰다. 그리고 도와주고 싶었다.
믿음에 대해서, 복음에 대해서 하나하나 점검해 나가는 과정 속에서 그의 믿음에 문제가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십자가의 형벌, 그 대속의 죽으심을 인정하시 않으려고 하고, 그것에 관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불평과 원망이 있는 그를 보면서, 복음이 그에게 온전히 영접되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졌고, 그와 함께 그것을 깊이 있게 나누었다. 그는 비록 영접하고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그동안 포기한 가운데 어두움 속에 있던 그 상태를 벗어나서 주님 앞으로 나아가겠다고 약속했다.
그 역시 다른 지체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모습을 보는 데, 그리고 자신의 구원의 여부를 확인하는데 obssess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역시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주님을 놓치고 있었다. 그분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해 본 적도 없는 듯 했다. 오로지 나... 오로지 자신이 믿음없음과 자신의 죄와 자신의 불신앙의 증거들만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던 것...
도대체 그것들을 그렇게 들여다보는 이유, 들여다보게하는 이유가 뭘까? 내가 만난 모든 지체들은 바로 그것이 신앙의 최고 목적인 것처럼 자신을 들여다보고, 자신의 부족함과 믿음없음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 결과 그들은 모두 절망하고 있었고, 불안해 하고 있었고, 어두움 가운데서 벗어나지 못한 가운데 신음하고 있었다.
길이 되신 예수님... 진리가 되신 예수님... 생명이 되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을 완전히 망각하고 자신만을 돌아보는 가운데, 영혼은 시들어가고 파괴되어간다. 그렇다. 내 안에는 선한 것이 없고, 내 안에는 소망이 없다. 내 안을 들여다 볼 때 나오는 것은 구정물처럼 더러운 것들, 약한 것들, 추악한 것들 뿐이다.
성경은 내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성경의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 사역이다. 그렇다면 교회의 모든 사역과 모든 가르침은 그분께 집중되어야 한다. 그분만이 소망이고, 그분만이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 되기 때문이다. 집나간 아들이 돼지우리에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처지만을 바라본다면, 비관자살하는 것이 당연한 귀결이다. 살 의미가 없는 것이다. 신앙 생활, 교회생활을 해봐야 의미가 없는 것이다. 탕자가 돼지우리에서 생각한 것은 자신의 처지뿐만 아니라 선하신 아버지이시다. 그분의 풍요와 그분의 인자하심을 생각할 때, 집을 향한 발걸음을 내 디딜 수 있는 것이다. 어두움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그리스도를 바라보도록 그들의 시선을 바꾸어 주는 것이다. 고개를 들어 그분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거기에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 진정으로 내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바로 그 때만 가능하다. 내가 내 안을 들여다 볼 때, 내 부족함을 보긴 하지만, 결코 제대로 볼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거기에서 내 모습이 보이는 것이다. 그분의 거룩하심이 내 추함을 드러낸다. 그분의 선하심이 내 악함을 드러낸다. 그분의 무한하신 사랑이 내 사랑없음을 드러낸다. 그분을 알면 알수록, 거기에 비춘 내 모습이 매우 정확하게 드러난다. 거기에서 진정한 회개가 터져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자신에게 절망하는 동시에 주님을 바라보며 소망을 갖는 것이 바로 거기에서 가능한 것이다.
"당신은 어떤 존재입니까?"라는 질문이 어떤 면에서보면 매우 도움이 되는 것 같지만, 실재적으로 사람들을 저주의 길로 이끄는 위험한 질문이 될 가능성이 있는 질문인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께 모든 관심과 시선을 집중해야 한다. 그것만이 살 길이다.
크심..
그분은... 항상 내 수용 범위를 훨씬 벗어나시는 크신 분이다...
내가 뭘 좀 안다고 설쳐대며 그분을 이해하고 깨달았다고 생각할 때...
그리고 그분의 거룩하심을 알고, 그 거룩하심을 나도 본받아 나아가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을 때...
나는 그래도 좀 괜찮은 존재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을 때...
내 신앙은 그래도 좀 낫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그분이 현존 앞에 내 자신이 맞딱드려지게 된다.
그분 앞에서 내 무식함이 얼마나 치가 떨릴 정도인지...
그분을 아는 지식이 얼마나 형편없었는지... 얼마나 제한적이었는지..
그리고 그분의 거룩하심과 흠이 없이 깨끗하심을 볼 때, 내 소위 쓸만한 신앙이라는 것이 얼마나 누더기에 불과한 것인지....
그분 앞에 부끄러워 고개조차 들 수 없을 많큼 창피한 내 자신을 발견할 뿐이다...
내 스스로 내 죄에 몸서리치도록 고통스러울 때...
나처럼 더러운 자를 주님께서 받아주실 리가 없다고 주님으로부터 돌아서려고 할 때...
내 죄의 크기가 너무 커서 이 세상 어떤 것으로도 그 죄를 깨끗이할 수 없다고 절망할 때...
심지어 주님조차도... 주님의 십자가조차도 이 흉악한 죄, 더러운 죄를 깨끗케 하기에는 역부족이라고 느끼고 소망을 발견할 수 없을 때...
그 때 그 분의 현존 앞에 다시 한 번 내 자신을 비추인다.
그분은 흉악한 강도와,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던 창녀와, 불가촉천민 취급을 받았던 문둥병자를 품으시고 사랑하시고 그들의 죄를 용서하신 분....
내 죄가 아무리 크더라도, 내 죄가 아무리 지저분하다 하더라도, 내 스스로에게 절망할 만큼 그 죄가 나를 억누르고 나를 절망으로 몰더라도, 그것을 감당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
세상의 어떤 죄도 그 십자가보다 크지 않고, 그 십자가 위에서 해결되지 못할 죄는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내 죄는 크지만, 그분은 그 죄보다 더 크신 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이라는 것...
그분은 언제나 내 제한된 인식의 한계를 뛰어넘으시는 위대하시고, 거룩하시고, 능력이 있으신... 바로 내 구원자가 되신다는 사실...
그것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믿는 자의 유일한 희망이다.
그분 앞에서는 고개를 숙이고 경배하는 것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내가 뭘 좀 안다고 설쳐대며 그분을 이해하고 깨달았다고 생각할 때...
그리고 그분의 거룩하심을 알고, 그 거룩하심을 나도 본받아 나아가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을 때...
나는 그래도 좀 괜찮은 존재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을 때...
내 신앙은 그래도 좀 낫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그분이 현존 앞에 내 자신이 맞딱드려지게 된다.
그분 앞에서 내 무식함이 얼마나 치가 떨릴 정도인지...
그분을 아는 지식이 얼마나 형편없었는지... 얼마나 제한적이었는지..
그리고 그분의 거룩하심과 흠이 없이 깨끗하심을 볼 때, 내 소위 쓸만한 신앙이라는 것이 얼마나 누더기에 불과한 것인지....
그분 앞에 부끄러워 고개조차 들 수 없을 많큼 창피한 내 자신을 발견할 뿐이다...
내 스스로 내 죄에 몸서리치도록 고통스러울 때...
나처럼 더러운 자를 주님께서 받아주실 리가 없다고 주님으로부터 돌아서려고 할 때...
내 죄의 크기가 너무 커서 이 세상 어떤 것으로도 그 죄를 깨끗이할 수 없다고 절망할 때...
심지어 주님조차도... 주님의 십자가조차도 이 흉악한 죄, 더러운 죄를 깨끗케 하기에는 역부족이라고 느끼고 소망을 발견할 수 없을 때...
그 때 그 분의 현존 앞에 다시 한 번 내 자신을 비추인다.
그분은 흉악한 강도와,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던 창녀와, 불가촉천민 취급을 받았던 문둥병자를 품으시고 사랑하시고 그들의 죄를 용서하신 분....
내 죄가 아무리 크더라도, 내 죄가 아무리 지저분하다 하더라도, 내 스스로에게 절망할 만큼 그 죄가 나를 억누르고 나를 절망으로 몰더라도, 그것을 감당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
세상의 어떤 죄도 그 십자가보다 크지 않고, 그 십자가 위에서 해결되지 못할 죄는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내 죄는 크지만, 그분은 그 죄보다 더 크신 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이라는 것...
그분은 언제나 내 제한된 인식의 한계를 뛰어넘으시는 위대하시고, 거룩하시고, 능력이 있으신... 바로 내 구원자가 되신다는 사실...
그것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믿는 자의 유일한 희망이다.
그분 앞에서는 고개를 숙이고 경배하는 것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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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5:27:00
떠나고 싶다...
떠나고 싶다...
비행기를 타고, 저 멀리... 고향으로...
여기... 이곳에서의 모든 것은 그대로 뒤로 한 채...
그냥...
떠나고 싶다...
모든 것이... 덧없다...
비행기를 타고, 저 멀리... 고향으로...
여기... 이곳에서의 모든 것은 그대로 뒤로 한 채...
그냥...
떠나고 싶다...
모든 것이... 덧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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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3:23:00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화를 내는 것, 진노하는 것.. 그 자체가 죄인가?
분명히 그것은 죄가 아니다. 만약 그것이 죄라면, 진노하시는 하나님이 죄를 짓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진노하신다. 분노하신다. 그것이 하나님에 의해서 된다고 해서 진노가 다른 것이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분노... 그것은 죄를 향한 분노이며, 불의와 부정을 향한 진노이다. 하나님은 그 속성상 절대로 죄를 지으실 수 없는 분이다. 따라서 그분의 진노는 죄의 카테고리 안에 있지 않다. 만약 그렇다면, 화 자체, 분노 자체가 죄라고 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이 화를 내도 되는가? 나는 어떤 경우에는 그리스도인이 화를 내도 될 뿐만 아니라 화를 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진노를 해야할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불의를 볼 때, 특별히 나 자신에게 가해진 불의보다는 사회적 부정과 불의, 그리고 약한 자들에게 가해지는 불의, 죄를 볼 때 그것을 지켜보면서 아무런 감정이 없이 평상심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이고,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책임을 져버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공의가 훼손되고 있는 그 현장에서, 그리고 고아와 과부를 돌보시고, 그들을 품으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이 머무는 약한 자들에게 가해지는 불의와 부정을 보면서, 자식된 자로서 아무런 느낌을 받지 못한다면, 사실 자신이 그분의 자녀인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아버지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고 아버지 일이 곧 내 일이기 때문에 결코 평상심을 유지하고 그대로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 때, 반드시 분노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진노해야한다. 공분을 느껴야 한다. 그 때는 분노, 화는 정당화될 수 있다.
나는 어리고 약한 영혼들에게 가해지는 영적인 학대를 접하면서, 분노를 느낀다. 매우 심한 분노를 느낀다. 약한 영혼들의 무지와 어림을 이용해서 잘못된 신학으로 그들을 어두움으로 몰아가는 그 학대를 보면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얼마나 진노하고 계실지 생각한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마 18:6)
예수님의 이 말씀은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 말씀은 다른 두 복음서에서도 강조되어 있는 예수님의 중요한 가르침 중의 하나이다.(눅 17:2, 막 9:42) 예수님은 분명히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 있는 "소자"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믿음 안에 어리고 연약한 자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믿음 안에 있지만, 어리고 연약해서 믿음 없어보이는 행동들과 상태에 자주 빠지는 자들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들을 실족하게하는 자들은 누구일까? 두 부류이다. 한 부류는 죄의 유혹으로 인도하는 자들이고, 다른 한 부류는 당시의 바리새인들처럼 감당하기 힘든 무거운 짐을 그 위에 얹어 놓음으로써 그들이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게 하는 자들인 것이다. (사실 두 부류는 궁극적으로 한 부류이다.)
최근 나는 후자의 경우를 많이 본다. 비록 바리새인들처럼 행위의 조항들을 들고 와서 들이대는 것은 아니지만, 성경적 근거도 희박한 "구원의 기준"이라는 것들을 들이대면서 연약한 자들을 한없는 나락으로 이끈는, 어두움 가운데 쓰러져 신음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말도 안되는 영적 학대를 접하면서, 큰 분노를 느낀다. 나는 그들이 바로 예수님의 그 저주의 말씀에 해당하는 죄를 받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하지만 문제는 나에게도 있다. 그런 영적 학대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귀한 영혼들을 어두움으로 몰아가는 무책임한 자들을 보면서 분노를 느끼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것이 도를 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엡 4:26-27)
분노는 그 자체가 죄는 아니지만, 분노를 품는 자는 죄에게 기회를 줘서 스스로 죄에 빠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렇기 때문에 분노를 품고 있는 자는 스스로가 아무리 정당한 원인으로 분노를 품고 있다 하더라도 스스로를 매우 경계해야 하며, 그 분노를 선한 일의 에너지로 바로 치환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 분노를 품고 그 에너지를 사용해서 더 열심히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더 열심히 영혼들을 바르게 섬기고, 더 열심히 자신을 돌아보며 자신도 같은 오류에 빠져 같은 죄를 짓지 않는지를 돌아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 분노를 인간에 대한 미움으로 치환시킬 기회를 주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는 순간 마귀가 나를 실족시킬 절호의 기회를 잡게 되고, 내가 쓰러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죄를 보면서 내가 비판하며 내가 분노하는 가운데, 내 스스로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는 죄 가운데 거할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최근 영혼들에게 가해지는 영적 학대의 사례를 접하면서, 내 안에 끓어 오르는 분노가 자리잡게 되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내가 실족하고 죄를 짓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전혀 기뻐하지 않으시는 모습이다. 내 스스로가 먼저 회개해야 한다. 불의에 항거하며, 맞서 싸우는 것은 멈추지 않겠지만, 그 가운데 하나님 앞에 죄를 짓는 것은 스스로 자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도 그들과 같은 불의한 자에 지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분명히 그것은 죄가 아니다. 만약 그것이 죄라면, 진노하시는 하나님이 죄를 짓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진노하신다. 분노하신다. 그것이 하나님에 의해서 된다고 해서 진노가 다른 것이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분노... 그것은 죄를 향한 분노이며, 불의와 부정을 향한 진노이다. 하나님은 그 속성상 절대로 죄를 지으실 수 없는 분이다. 따라서 그분의 진노는 죄의 카테고리 안에 있지 않다. 만약 그렇다면, 화 자체, 분노 자체가 죄라고 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이 화를 내도 되는가? 나는 어떤 경우에는 그리스도인이 화를 내도 될 뿐만 아니라 화를 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진노를 해야할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불의를 볼 때, 특별히 나 자신에게 가해진 불의보다는 사회적 부정과 불의, 그리고 약한 자들에게 가해지는 불의, 죄를 볼 때 그것을 지켜보면서 아무런 감정이 없이 평상심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이고,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책임을 져버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공의가 훼손되고 있는 그 현장에서, 그리고 고아와 과부를 돌보시고, 그들을 품으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이 머무는 약한 자들에게 가해지는 불의와 부정을 보면서, 자식된 자로서 아무런 느낌을 받지 못한다면, 사실 자신이 그분의 자녀인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아버지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고 아버지 일이 곧 내 일이기 때문에 결코 평상심을 유지하고 그대로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 때, 반드시 분노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진노해야한다. 공분을 느껴야 한다. 그 때는 분노, 화는 정당화될 수 있다.
나는 어리고 약한 영혼들에게 가해지는 영적인 학대를 접하면서, 분노를 느낀다. 매우 심한 분노를 느낀다. 약한 영혼들의 무지와 어림을 이용해서 잘못된 신학으로 그들을 어두움으로 몰아가는 그 학대를 보면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얼마나 진노하고 계실지 생각한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마 18:6)
예수님의 이 말씀은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 말씀은 다른 두 복음서에서도 강조되어 있는 예수님의 중요한 가르침 중의 하나이다.(눅 17:2, 막 9:42) 예수님은 분명히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 있는 "소자"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믿음 안에 어리고 연약한 자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믿음 안에 있지만, 어리고 연약해서 믿음 없어보이는 행동들과 상태에 자주 빠지는 자들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들을 실족하게하는 자들은 누구일까? 두 부류이다. 한 부류는 죄의 유혹으로 인도하는 자들이고, 다른 한 부류는 당시의 바리새인들처럼 감당하기 힘든 무거운 짐을 그 위에 얹어 놓음으로써 그들이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게 하는 자들인 것이다. (사실 두 부류는 궁극적으로 한 부류이다.)
최근 나는 후자의 경우를 많이 본다. 비록 바리새인들처럼 행위의 조항들을 들고 와서 들이대는 것은 아니지만, 성경적 근거도 희박한 "구원의 기준"이라는 것들을 들이대면서 연약한 자들을 한없는 나락으로 이끈는, 어두움 가운데 쓰러져 신음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말도 안되는 영적 학대를 접하면서, 큰 분노를 느낀다. 나는 그들이 바로 예수님의 그 저주의 말씀에 해당하는 죄를 받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하지만 문제는 나에게도 있다. 그런 영적 학대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귀한 영혼들을 어두움으로 몰아가는 무책임한 자들을 보면서 분노를 느끼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것이 도를 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엡 4:26-27)
분노는 그 자체가 죄는 아니지만, 분노를 품는 자는 죄에게 기회를 줘서 스스로 죄에 빠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렇기 때문에 분노를 품고 있는 자는 스스로가 아무리 정당한 원인으로 분노를 품고 있다 하더라도 스스로를 매우 경계해야 하며, 그 분노를 선한 일의 에너지로 바로 치환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 분노를 품고 그 에너지를 사용해서 더 열심히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더 열심히 영혼들을 바르게 섬기고, 더 열심히 자신을 돌아보며 자신도 같은 오류에 빠져 같은 죄를 짓지 않는지를 돌아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 분노를 인간에 대한 미움으로 치환시킬 기회를 주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는 순간 마귀가 나를 실족시킬 절호의 기회를 잡게 되고, 내가 쓰러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죄를 보면서 내가 비판하며 내가 분노하는 가운데, 내 스스로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는 죄 가운데 거할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최근 영혼들에게 가해지는 영적 학대의 사례를 접하면서, 내 안에 끓어 오르는 분노가 자리잡게 되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내가 실족하고 죄를 짓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전혀 기뻐하지 않으시는 모습이다. 내 스스로가 먼저 회개해야 한다. 불의에 항거하며, 맞서 싸우는 것은 멈추지 않겠지만, 그 가운데 하나님 앞에 죄를 짓는 것은 스스로 자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도 그들과 같은 불의한 자에 지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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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11:47:00
교만...
무지에 열정을 더하면 독선이 된다.
그리고 독선에 자기 의(義)를 더하면 교만이 된다.
신학적, 성경적 무지가 얼마나 큰 해악을 끼치는지 몸서리쳐질 만큼 분명히 본다.
하나님에 대한 열정이 얼마나 위험한 것이 될 수 있는지... 그 무지 가운데서 그 열정이 영혼을 잠식하고, 한 영혼을 어두움 가운데로 몰아가고, 급기야 실족하게 까지하는 무서운 죄를 범하는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
자기 의(義)... 자기가 옳다는 확신... 그리고 자기만 옳다는 확신...
분별이라는 이름으로... 그것도 무지한 자신의 상태를 알지 못한 채, 소위 분별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그 교만과 독선...
자신이 분별할 준비도 능력도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망각한 상태에서 휘둘러 대는 그 무시무시한 분별이라는 칼날에 많은 영혼들이 상처받고 피흘리며 쓰러진다. 교만한 자들의 눈에는 쓰러져 피흘리며 고통하는 그 영혼들은 소위 "믿음없는" 불쌍한 영혼들일 뿐이다... 자신들의 말과 행동이 비수같은 칼날이 되어 영혼에게 해악을 끼쳤는지는 결코 돌아보지 않는다. 모든 것이 타인의 잘못일 뿐... 그들이 거듭나지 않아서일 뿐... 그 칼부림을 해대는 자신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확신한다. 철저한 무지... 자기 중심적인 사고... 남탓하는 것은, 남이 부족하다고,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쉬운 일이다... 자신을 돌아볼 줄 아는 자, 자신의 내면을 철저하게 돌아보고 자신의 과오를 볼 줄 아는 자들... 그런 자들이 진정으로 귀하게 쓰임받는 자들이다... 교만한 자들은 칼끝을 타인에게 들이대는 것에는 매우 익숙하지만, 그 칼을 자신 안에 있는 엄청난 오류와 잘못을 수술하기 위해 자신에게로 돌리는 데는 매우 인색하다...
교만한 자... 그들은 동역을 모른다. 지극히 제한된 소수의 사람들과 같이 일하는 그것만을 그들은 동역이라 부른다. 자신과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들은 "믿지 않는 자" "복음이 없는 자"라고 쉽게 규정해 버린다. 그리고 배척하고 함께하지 않는다.
분별이라는 이름으로...
그것이 바로 교만이라는 것을 그들은 알까?
그 교만이 지극히 가증스러운 것이라는 것... 그것을 알까?
분별할 능력도 준비도 되어 있지 않는 자들이 스스로 겸손할 줄 모르고 날뛰는 그 가증스러운 가공할만한 무식함의 횡포....
그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제발... 깨달아야 할텐데...
그리고 독선에 자기 의(義)를 더하면 교만이 된다.
신학적, 성경적 무지가 얼마나 큰 해악을 끼치는지 몸서리쳐질 만큼 분명히 본다.
하나님에 대한 열정이 얼마나 위험한 것이 될 수 있는지... 그 무지 가운데서 그 열정이 영혼을 잠식하고, 한 영혼을 어두움 가운데로 몰아가고, 급기야 실족하게 까지하는 무서운 죄를 범하는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
자기 의(義)... 자기가 옳다는 확신... 그리고 자기만 옳다는 확신...
분별이라는 이름으로... 그것도 무지한 자신의 상태를 알지 못한 채, 소위 분별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그 교만과 독선...
자신이 분별할 준비도 능력도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망각한 상태에서 휘둘러 대는 그 무시무시한 분별이라는 칼날에 많은 영혼들이 상처받고 피흘리며 쓰러진다. 교만한 자들의 눈에는 쓰러져 피흘리며 고통하는 그 영혼들은 소위 "믿음없는" 불쌍한 영혼들일 뿐이다... 자신들의 말과 행동이 비수같은 칼날이 되어 영혼에게 해악을 끼쳤는지는 결코 돌아보지 않는다. 모든 것이 타인의 잘못일 뿐... 그들이 거듭나지 않아서일 뿐... 그 칼부림을 해대는 자신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확신한다. 철저한 무지... 자기 중심적인 사고... 남탓하는 것은, 남이 부족하다고,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쉬운 일이다... 자신을 돌아볼 줄 아는 자, 자신의 내면을 철저하게 돌아보고 자신의 과오를 볼 줄 아는 자들... 그런 자들이 진정으로 귀하게 쓰임받는 자들이다... 교만한 자들은 칼끝을 타인에게 들이대는 것에는 매우 익숙하지만, 그 칼을 자신 안에 있는 엄청난 오류와 잘못을 수술하기 위해 자신에게로 돌리는 데는 매우 인색하다...
교만한 자... 그들은 동역을 모른다. 지극히 제한된 소수의 사람들과 같이 일하는 그것만을 그들은 동역이라 부른다. 자신과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들은 "믿지 않는 자" "복음이 없는 자"라고 쉽게 규정해 버린다. 그리고 배척하고 함께하지 않는다.
분별이라는 이름으로...
그것이 바로 교만이라는 것을 그들은 알까?
그 교만이 지극히 가증스러운 것이라는 것... 그것을 알까?
분별할 능력도 준비도 되어 있지 않는 자들이 스스로 겸손할 줄 모르고 날뛰는 그 가증스러운 가공할만한 무식함의 횡포....
그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제발... 깨달아야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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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4:54:00
"자기 존재의 밑바닥을 확인해야 한다?" (2)
그렇다면 두번째 질문...
자기 존재의 밑바닥을 확인한다는 것이 정말 가능한 것일까?
결론은 "불가능하다"이다.
사실 내 죄성의 바닥을 확인이 가능하다는 생각은 지극히 인간적인 생각이다. 그것은 인간을 과대평가한 소치일 뿐이다.
인간의 죄성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의 타락상이 창세기 3장부터 11장까지 잘 나와 있고, 성경 전체를 통해서 보여지고 있다. 인간의 밑바닥은 죽을 때까지 확인해도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타락했다. "Total Depravity"는 인간의 타락 범위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정도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만약 우리가 내 죄악의 밑바닥을 확인하고자 한다면, 평생 죽을 때까지 그것만 하더라도 죽기전에 그 바닥을 확인할 수 없다. 그것이 성경적이다.
밑바닥을 확인한다는 말 그 자체가 뭔가 내 죄의 끝이 있다는 것을 명시적으로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나도 잘 안다. 그리고 그 말들을 자주 사용하는 자들의 기본적인 생각은 내가 내 스스로에게 철저하게 절망할 만큼 내 죄인됨을 확인해야 한다는 의미로 그 말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도 잘 안다. 하지만 그게 그거다. 내 죄악의 밑바닥을 확인하는 것이 불가능할 만큼, 내가 내 스스로에게 철저하게 절망하는 것도 불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내 안에 생기는 죄에 대한 내성 때문이다.
내 안에 흉악한 죄를 발견할 때,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나에게 절망한다.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런 죄를 짓는 내 모습이 너무나 당연해 보인다. "So what?" 그런 반응을 보이게 마련이다. 인간은 죄에 대해 내성을 가졌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많은 죄를 짓고도 살아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인간의 모습을 보고 스스로의 죄를 보고 절망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참으로 친절한 의협심과 사명감에 가득차 있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거듭나기 위해서는 부서져야 한다는 것을 철저하게 믿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나서서 부서지는 것을 도와주고, 때로는 그것이 도를 넘어 돕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부숴뜨리기로 작정하고 나서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 사례들을 잘 알고 있다. 그것을 위해서 인격을 모독하는, 참으로 무례한 언행까지도 서슴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참으로 불쌍한 자들... 그들이 망각한 것은, 그것은 옆에서 도와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자신들이 나설 일이 아니라는 것... 자신들이 나서는 것은 인간적인 열심과 과욕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 그렇게 해서 나오는 결과는 대부분이 영혼을 더 깊은 어두움과 상처 가운데로 몰아가는 것일 뿐이라는 것... 인간이 진정으로 스스로의 죄를 보며 절망하게 되는 것은 오직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 어찌보면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서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나선 교만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본인들은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된다고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식으로 역사하시는 분이 아니다. 만약 옆에서 진정으로 돕고 싶다면, 한 영혼의 죄를 들춰내고, 찔러대고 상처를 주는 대신, 그 영혼에 성령의 역사가 있도록, 성령께서 임하셔서 그 영혼이 자신의 죄악됨을 철저히 깨달을 수 있도록 기도해 주는 것 뿐이다. 그리고 사랑과 온유와 인내로 그 영혼을 섬기는 것이다.
사실 한 영혼이 자신의 죄인됨을 가장 철저하게, 그리고 효과적으로 깨닫는 방법은, 자신의 죄악됨에 집중하는 것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노출되었을 때이다. 믿음이 있건 없건간에 성경의 말씀으로 사람은 하나님께 노출될 수가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 노출되었을 때, 인간은 그 거룩하시고 흠이 없으신 하나님에 비해서 자신이 얼마나 형편 없는지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라는 햇볕이 비추일 때 인간은 자신의 어두움을 자각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한 영혼에게 죄악을 지적하며 끝임없이 자신의 죄, 부족함, 나약함, 더러움에 집중하게 하는 것보다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주며, 그분께 시선을 고정시키도록 하는 것이 최고의 방법이다.
결론적으로 내 밑바닥... 그것을 들여다 본다고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게 될 때,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려주는 그 말씀에 노출되어 그분을 바라보게 될 때(그것은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하다), 그 때에야, 내 자신의 밑바닥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인 내가 영혼을 위해 할 수 있는 것... 그것은 그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지속적으로 말씀을 통해 나누는 것 뿐이다. 정말 그것 뿐이다...
자기 존재의 밑바닥을 확인한다는 것이 정말 가능한 것일까?
결론은 "불가능하다"이다.
사실 내 죄성의 바닥을 확인이 가능하다는 생각은 지극히 인간적인 생각이다. 그것은 인간을 과대평가한 소치일 뿐이다.
인간의 죄성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의 타락상이 창세기 3장부터 11장까지 잘 나와 있고, 성경 전체를 통해서 보여지고 있다. 인간의 밑바닥은 죽을 때까지 확인해도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타락했다. "Total Depravity"는 인간의 타락 범위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정도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만약 우리가 내 죄악의 밑바닥을 확인하고자 한다면, 평생 죽을 때까지 그것만 하더라도 죽기전에 그 바닥을 확인할 수 없다. 그것이 성경적이다.
밑바닥을 확인한다는 말 그 자체가 뭔가 내 죄의 끝이 있다는 것을 명시적으로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나도 잘 안다. 그리고 그 말들을 자주 사용하는 자들의 기본적인 생각은 내가 내 스스로에게 철저하게 절망할 만큼 내 죄인됨을 확인해야 한다는 의미로 그 말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도 잘 안다. 하지만 그게 그거다. 내 죄악의 밑바닥을 확인하는 것이 불가능할 만큼, 내가 내 스스로에게 철저하게 절망하는 것도 불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내 안에 생기는 죄에 대한 내성 때문이다.
내 안에 흉악한 죄를 발견할 때,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나에게 절망한다.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런 죄를 짓는 내 모습이 너무나 당연해 보인다. "So what?" 그런 반응을 보이게 마련이다. 인간은 죄에 대해 내성을 가졌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많은 죄를 짓고도 살아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인간의 모습을 보고 스스로의 죄를 보고 절망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참으로 친절한 의협심과 사명감에 가득차 있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거듭나기 위해서는 부서져야 한다는 것을 철저하게 믿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나서서 부서지는 것을 도와주고, 때로는 그것이 도를 넘어 돕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부숴뜨리기로 작정하고 나서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 사례들을 잘 알고 있다. 그것을 위해서 인격을 모독하는, 참으로 무례한 언행까지도 서슴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참으로 불쌍한 자들... 그들이 망각한 것은, 그것은 옆에서 도와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자신들이 나설 일이 아니라는 것... 자신들이 나서는 것은 인간적인 열심과 과욕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 그렇게 해서 나오는 결과는 대부분이 영혼을 더 깊은 어두움과 상처 가운데로 몰아가는 것일 뿐이라는 것... 인간이 진정으로 스스로의 죄를 보며 절망하게 되는 것은 오직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 어찌보면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서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나선 교만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본인들은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된다고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식으로 역사하시는 분이 아니다. 만약 옆에서 진정으로 돕고 싶다면, 한 영혼의 죄를 들춰내고, 찔러대고 상처를 주는 대신, 그 영혼에 성령의 역사가 있도록, 성령께서 임하셔서 그 영혼이 자신의 죄악됨을 철저히 깨달을 수 있도록 기도해 주는 것 뿐이다. 그리고 사랑과 온유와 인내로 그 영혼을 섬기는 것이다.
사실 한 영혼이 자신의 죄인됨을 가장 철저하게, 그리고 효과적으로 깨닫는 방법은, 자신의 죄악됨에 집중하는 것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노출되었을 때이다. 믿음이 있건 없건간에 성경의 말씀으로 사람은 하나님께 노출될 수가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 노출되었을 때, 인간은 그 거룩하시고 흠이 없으신 하나님에 비해서 자신이 얼마나 형편 없는지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라는 햇볕이 비추일 때 인간은 자신의 어두움을 자각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한 영혼에게 죄악을 지적하며 끝임없이 자신의 죄, 부족함, 나약함, 더러움에 집중하게 하는 것보다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주며, 그분께 시선을 고정시키도록 하는 것이 최고의 방법이다.
결론적으로 내 밑바닥... 그것을 들여다 본다고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게 될 때,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려주는 그 말씀에 노출되어 그분을 바라보게 될 때(그것은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하다), 그 때에야, 내 자신의 밑바닥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인 내가 영혼을 위해 할 수 있는 것... 그것은 그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지속적으로 말씀을 통해 나누는 것 뿐이다. 정말 그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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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2:06:00
"자기 존재의 밑바닥을 확인해야 한다?" (1)
"거듭나기 위해 자기 존재의 밑바닥을 확인해야 한다."
일면 맞는 말이지만, 일면 완전히 틀린 말이다.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자각이 생긴 사람이기도 하지만, 자기 자신에 대한 자각도 동시에 생긴 사람이다. 내가 누구인지 알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거듭나기 전에는 그래도 나는 쓸만 한 사람. 의인이라고 자청하기는 쑥스럽지만, 악인이라고 평가하는 것에 도저히 동의할 수 없고, 나쁜 짓을 했지만, 그래도 착한일을 더 많이한, 그것이 아니더라도 그리 나쁜일을 많이 하지 않은 그런 대로 괜찮은 사람이라는 자의식을 가지고 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면, 그런 자신이 얼마나 더러운지, 사도 바울의 표현에 의하면 "죄인 중에 내가 괴수"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자신의 존재의 밑바닥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런데, 거듭나기 위해서 반드시 그 전에 자신의 밑바닥을 확인해야 하는 것일까? 그것이 반드시 그런 순서대로 되는 것일까? 그리고 더 나아가 자신의 밑바닥을 확인한다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
개인적인 회심의 경험을 이야기하자면, 내 경우에는 거듭나기 전에 분명히 내 존재의 타락성과 부패성을 철저하게 자각했다. 내 죄성이 얼마나 뿌리깊은지, 내가 얼마나 형편없는 죄인인지를 분명히 알았고, 그것을 내 힘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깊은 절망도 맛 보았다. 그런 나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진정으로 구원이었고, 인간을 죄인으로 정죄하는 성경은 분명히 진리였다.
하지만, 내가 경험한 것이 모든 사람의 구원 경험에서 발견되는 것인가? 반드시 그런 프로세스를 거쳐야만 하는 것인가?
아니다. 결코 아니다. 절대 아니다. 만약 그런 식으로 구원 프로세스를 공식화 한다면, 그것은 진리를 왜곡하는 것이다.
물론 자신의 죄성에 대한 어느 정도의 자각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이해하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자기 존재의 밑바닥"을 경험해야만 복음을 받아 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밑바닥은 복음을 영접한 후 하나님을 더 깊이 경험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부산물일 가능성이 더 높다. 거룩하신 하나님, 흠이 없으신 그분을 알면 알수록, 거기에 비친 내 모습이 얼마나 더러운지, 그 전에 상상할 수 없었던 정도로 더럽고 벌레만도 못한 죄인임을 깨달아 가게 되는 것이다. 그런 깨달음, 그런 바닥 확인은 하나님을 만나고 지속적으로 경험하는 가운데 깊은 교제가 없으면 불가능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내 경우처럼 특별하게 역사하지 않으신다면, 그런 바닥확인은 당연히 거듭난 이후에 있는 하나의 과정인 것이다. 따라서 밑바닥 확인을 거듭남의 필수 요건인 것처럼 가르치는 것은 성경의 진리를 호도하는 것이다.
내 경우에는 나라는 인간이 특별히 교만하고, 자기 의에 가득차는 성향이 매우 강한 자이고, 내 스스로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교만한 자이기 때문에,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특별히 나를 낮추시고, 가망성 없는 내 모습을 직시하게 하심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찾지 않으면 안되도록 인도하신 것이다. 그것은 나를 창조하신 창조주로서 그 누구보다도 나를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나를 구원하시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그것을 모든 사람에게 일반화 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빌리 그래함 목사님의 부인이신 루스 그래함은 교회에서 태어나서 교회에서 자랐다. 그분은 자신의 죄성에 절망해서 자신의 존재의 밑바닥을 확인한 극적인 경험이 없었다. 그분은 자신이 언제 영접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어느 순간은 물론이고 대충 어느 나이 정도에 영접했는지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분은 분명 거듭난 자였고, 하나님의 자녀였다. 극적으로 회심을 경험했던 빌리 그래함 목사님은 루스 그래함을 절대로 거듭나지 않은 자라고 정죄하지 않았고, 오히려 한 믿음 안에 있는 자로서 평생을 같이 동역했고, 많은 열매를 맺고 크게 쓰임을 받았다. 루스 그래함이 태어나면서부터 믿음을 가졌던 것은 절대 아니다. 그 인생의 어느 시점에 분명히 구원 받은 시점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분의 구원 경험, 혹은 회심 경험은 나나 그분의 남편의 경험과는 다른 것이었다.(RC Sproul교수는 Conversion과 Conversion Experience는 분명히 구별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분에 따르면 그것을 혼동함으로써 많은 오류들이 양산되고 있다고 가르친다. 나는 전적으로 그의 주장에 동의한다. 내가 전에 다니던 교회가 그런 혼동가운데 있고 그래서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그렇다고 그분을 믿음 없다고 정죄할 것인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에 맞게 구원의 역사를 배푸신 것이다.
결론적으로 거듭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의 죄인됨의 밑바닥을 반드시 경험해야한다는 것은 결코 성경적이지 않은 주장인 것이다.
(다음에 계속...)
일면 맞는 말이지만, 일면 완전히 틀린 말이다.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자각이 생긴 사람이기도 하지만, 자기 자신에 대한 자각도 동시에 생긴 사람이다. 내가 누구인지 알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거듭나기 전에는 그래도 나는 쓸만 한 사람. 의인이라고 자청하기는 쑥스럽지만, 악인이라고 평가하는 것에 도저히 동의할 수 없고, 나쁜 짓을 했지만, 그래도 착한일을 더 많이한, 그것이 아니더라도 그리 나쁜일을 많이 하지 않은 그런 대로 괜찮은 사람이라는 자의식을 가지고 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면, 그런 자신이 얼마나 더러운지, 사도 바울의 표현에 의하면 "죄인 중에 내가 괴수"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자신의 존재의 밑바닥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런데, 거듭나기 위해서 반드시 그 전에 자신의 밑바닥을 확인해야 하는 것일까? 그것이 반드시 그런 순서대로 되는 것일까? 그리고 더 나아가 자신의 밑바닥을 확인한다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
개인적인 회심의 경험을 이야기하자면, 내 경우에는 거듭나기 전에 분명히 내 존재의 타락성과 부패성을 철저하게 자각했다. 내 죄성이 얼마나 뿌리깊은지, 내가 얼마나 형편없는 죄인인지를 분명히 알았고, 그것을 내 힘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깊은 절망도 맛 보았다. 그런 나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진정으로 구원이었고, 인간을 죄인으로 정죄하는 성경은 분명히 진리였다.
하지만, 내가 경험한 것이 모든 사람의 구원 경험에서 발견되는 것인가? 반드시 그런 프로세스를 거쳐야만 하는 것인가?
아니다. 결코 아니다. 절대 아니다. 만약 그런 식으로 구원 프로세스를 공식화 한다면, 그것은 진리를 왜곡하는 것이다.
물론 자신의 죄성에 대한 어느 정도의 자각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이해하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자기 존재의 밑바닥"을 경험해야만 복음을 받아 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밑바닥은 복음을 영접한 후 하나님을 더 깊이 경험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부산물일 가능성이 더 높다. 거룩하신 하나님, 흠이 없으신 그분을 알면 알수록, 거기에 비친 내 모습이 얼마나 더러운지, 그 전에 상상할 수 없었던 정도로 더럽고 벌레만도 못한 죄인임을 깨달아 가게 되는 것이다. 그런 깨달음, 그런 바닥 확인은 하나님을 만나고 지속적으로 경험하는 가운데 깊은 교제가 없으면 불가능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내 경우처럼 특별하게 역사하지 않으신다면, 그런 바닥확인은 당연히 거듭난 이후에 있는 하나의 과정인 것이다. 따라서 밑바닥 확인을 거듭남의 필수 요건인 것처럼 가르치는 것은 성경의 진리를 호도하는 것이다.
내 경우에는 나라는 인간이 특별히 교만하고, 자기 의에 가득차는 성향이 매우 강한 자이고, 내 스스로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교만한 자이기 때문에,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특별히 나를 낮추시고, 가망성 없는 내 모습을 직시하게 하심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찾지 않으면 안되도록 인도하신 것이다. 그것은 나를 창조하신 창조주로서 그 누구보다도 나를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나를 구원하시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그것을 모든 사람에게 일반화 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빌리 그래함 목사님의 부인이신 루스 그래함은 교회에서 태어나서 교회에서 자랐다. 그분은 자신의 죄성에 절망해서 자신의 존재의 밑바닥을 확인한 극적인 경험이 없었다. 그분은 자신이 언제 영접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어느 순간은 물론이고 대충 어느 나이 정도에 영접했는지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분은 분명 거듭난 자였고, 하나님의 자녀였다. 극적으로 회심을 경험했던 빌리 그래함 목사님은 루스 그래함을 절대로 거듭나지 않은 자라고 정죄하지 않았고, 오히려 한 믿음 안에 있는 자로서 평생을 같이 동역했고, 많은 열매를 맺고 크게 쓰임을 받았다. 루스 그래함이 태어나면서부터 믿음을 가졌던 것은 절대 아니다. 그 인생의 어느 시점에 분명히 구원 받은 시점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분의 구원 경험, 혹은 회심 경험은 나나 그분의 남편의 경험과는 다른 것이었다.(RC Sproul교수는 Conversion과 Conversion Experience는 분명히 구별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분에 따르면 그것을 혼동함으로써 많은 오류들이 양산되고 있다고 가르친다. 나는 전적으로 그의 주장에 동의한다. 내가 전에 다니던 교회가 그런 혼동가운데 있고 그래서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그렇다고 그분을 믿음 없다고 정죄할 것인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에 맞게 구원의 역사를 배푸신 것이다.
결론적으로 거듭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의 죄인됨의 밑바닥을 반드시 경험해야한다는 것은 결코 성경적이지 않은 주장인 것이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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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2:06:00
[펌]Growing into Salvation through the Living and Abiding Word of God (1 Peter 2:1-3)
지난 주 주일 우리 교회 설교 말씀이다.
지난 주에 허리를 심하게 다쳐서 교회를 가지 못하고 침대에 누워 인터넷으로 예배를 드렸다.
말씀을 들으면서 참으로 놀랐다. 지극히 성경적이고, 지극히 균형잡힌 그 말씀...
그 말씀을 들으면서, 내 안에 뿌리깊게 자리잡은 신학적 오류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너무나 기뻤다. 너무 감사했다. 이런 귀한 말씀을 들을 수 있게 되어서...
http://highpointeaustin.org/archives/sermons/growing-into-salvation-through-1-peter-21-3
지난 주에 허리를 심하게 다쳐서 교회를 가지 못하고 침대에 누워 인터넷으로 예배를 드렸다.
말씀을 들으면서 참으로 놀랐다. 지극히 성경적이고, 지극히 균형잡힌 그 말씀...
그 말씀을 들으면서, 내 안에 뿌리깊게 자리잡은 신학적 오류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너무나 기뻤다. 너무 감사했다. 이런 귀한 말씀을 들을 수 있게 되어서...
http://highpointeaustin.org/archives/sermons/growing-into-salvation-through-1-peter-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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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4:31:00
복음이란 무엇일까?
최근 한 달 사이에 예전에 다니던 교회의 청년부 지체들을 만나게 되었다.
처음에는 두 세명을 우연히, 혹은 다른 관계로 만나서 이야기 나누는 수준이었다. 그 때까지 교회를 떠난 자로서 멀리서 지켜보고만 있겠다는 생각을 해왔기 때문에 내가 떠나고 난 후 공동체가 잘 되기만을 바라는 마음만 가지고 있었을 뿐 어떤 액션도 취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이 두 세명을 만난 후 마음이 바뀌었다. 내가 그냥 지켜보고 있을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깨달았다. 하나님께서 결코 내가 그냥 있기를 원하지 않으신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나에게 찾아오는 지체들을 결코 피하지 않기로 했고, 아주 가끔은 낙망 가운데 쓰러져 있는 지체들에게 다가갈 필요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를 만난 그들... 대부분 나를 만나기를 먼저 원해서 만났던 그들은 모두 절망과 깊은 어두움 가운데 있었다. 구원에 대해서 확신은 없었고, 절망과 온갖 어두움이 그 영혼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들은 나를 만나자 마자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 내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나로서는 참으로 고통스러웠다. 왜냐하면, 그것은 온통 자신에 관한 이야기 뿐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의 믿음 생활을 듣기를 원했는데, 그들은 자신의 부족한 부분, 자신이 구원받지 못했다는 확신을 갖게한 교회가 알려준 자신의 부족한 부분들에 대해서만 나열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그들의 영혼은 좌절해 있었고, 어두움 가운데 거하고 있었다. 이들 이후에 만난 모든 영혼들은 동일한 모습을 나에게 보여줬다. 그들에게 믿음이란 도저히 다다를 수 없는 높은 "경지"에 있는 그 무엇일 뿐이었고, 자신들은 그 경지에 도달할 수 없는 형편없는 존재일 뿐이라는 확신이 너무 강했다.
절망 가운데서 눈물을 보이는 그들... 그것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내가 그 지체들을 만나서 할 수 있는 것은 단 한 가지 밖에 없었다. 그것은 복음을 전하는 것...
자신의 죄와 부족한 부분에만 고정되어 있는 시선을 돌려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는 것...
절망스러운 자신의 모습... 죄가 끊이지 않는 자신의 모습... 자기 의로 가득찬 자신의 모습... 믿음이 없이 연약해 쓰러지는 자신의 모습...
그렇다! 그것이 바로 인간이다. 칼빈이 Total Depravity라고 인간의 상태를 정의했을 때, 그가 그리고 있는 모습, 그리고 성경이 보여주는 인간의 모습은 바로 선한 것이 하나도 있을 수 없는, 그 존재 자체가 죄이고 악인 모습이었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절대 희망이 없다. 인간에게 집중하면 할수록 우리는 절망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마귀는 우리를 죄로 유혹한 뒤, 그런 죄된 우리의 모습에 집중하게 하고, 거기에 눌려 있게하고, 그래서 어두움 가운데서 자포자기한 상태에서 마귀의 종으로 계속 살게 한다. 그것이 그의 전략이다.
복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그런 형편없는 존재, 벌레만도 못한 나같은 존재를 위해서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으로 오셨고, 이 땅에서 "나를 위해서" 완벽하게 의로운 삶을 사셨고, "나를 위해서" 아니 "내 그런 더러운 죄, 아니 죄된 본성"을 짊어지시고 내가 달려야 할 십자가에 달리셨고, 하나님은 내가 있어야 할 그 자리에 내 죄를 지시고 달리신 그분께 모든 진노를 쏟아 부으셨고, 그 결과 죄의 궁극적인 결과인 죽음을 예수님께서 "내 대신" 맛 보셔야 했다는 것... 그래서 이제 나에게 더 이상 정죄가 없다는 것, 그리고 그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 살아계시고, 나의 주가 되시기 때문에, 나는 그분의 지배를 받으며 그분을 닮아가는 삶, 이제는 죄를 위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 그럴 자격이 전혀 없는 자가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그런 영광스런 자리로 부르심을 받게 되었다는 것.... 그것이 복음 아닌가?
그 복음은 분명 죄된 나의 모습을 보게 하지만, 그것이 절대 중심이 아니라는 것... 그것이 너무나 중요한 진리이다. 복음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내 죄와 내가 형편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보는 것에서 그친다면, 그것은 저주일 뿐이다. 거기에는 절망밖에 없다. 그런 나를 보는 시선에서, 내가 그렇게 죄인이기 때문에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 그것이 복음 아닌가? 나에게 철저히 절망하는 대신, 그분께 완전한 희망을 두는 것이 그것이 바로 복음이 아닌가?
정말 놀라운 것은... 정말 가슴아픈 것은... 내가 만난 모든 지체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시선, 예수 그리스도께 소망을 두는 그 소망,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을 완전히 망각한 채, 자신의 죄됨에만 너무 obssessed되어 있는 것을 본 것이다...
어찌 그럴 수가... 도대체... 도대체... 뭘 배웠길래?
모든 지체들에게 내가 한 것은 복음을 전하는 것 뿐이었다.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한 것 뿐이었다. 그런데 그 복음을 들은 그들이 보인 반응... 너무나 놀라는 그 반응... 눈을 번쩍 뜨는 그 반응...
솔직히 그 반응을 보고 내가 놀랐다. 그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너무나 기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듣고 놀라면 안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가 놀랐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듣고, 그분이 구원자가 되신다는 그 소식을 듣고, 그분께 모든 것을 집중하고 그분만 바라보라는 그 설명을 듣고, 그들이 놀랐다....
한 지체가 나를 만나고 나서 이메일을 보내 왔다. 사실 다음과 같은 메일은 그 지체만의 반응이 아니었다. 모든 지체들이 보이는 동일한 반응이었다.
"어제 들은 내용을 오늘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그 은혜... 내가 어떻게 해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받게 되는 그 십자가가 내것이라는 것을 정말 오랫만에 다시 깨닫게 되었고, 또 오랫만에 "예수님"의 이름이 나에게 저주가 아닌 구원의 이름으로 다가왔습니다. 예전 저에게 찾아와 주신 예수님을 다시 만나게 되는것 같아 너무나 기쁘고 정말 잃었던 것을 다시 찾은 듯 하였습니다.
오늘 정말 오랫만에 말씀을 보며 너무 두렵더군요... 정말 그 말씀을 제가 제대로 받고는 있는지.. 라는 생각에 두려웠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제가 필요한 말씀을 찾고 끼워 맞추고 있는 제 모습을 보았고, 하나님께 초점이 맞추어지지 않은 것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나에 눈을 뜨게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이해하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라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주권은 하나님께 계시다는것을 잊고 있었고 초점은 그분에게 있어야 한다는 것도 잊고 있었습니다."
복음과 더불어 만난 모든 지체들에게 강조한 것은 성경공부였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진리 그 자체라는 것.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모든 판단 기준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나도, 어떤 인간도 교회도 아닌 성경이라는 것. 성경만이 진리이고,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하시고자 하는 모든 말씀을 성경에 다 해 놓으셨기 때문에 부지런히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것이 믿는 자의 바른 자세라는 것을 누누히 강조했다.
나를 만난 이후 그들의 변화는 분명했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게 되었고, 말씀을 사랑하게 되었고, 거룩한 삶,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향한 열정이 생기는 것을 보았다.
최근 어떤 경로를 통해서 전에 내가 다니던 교회에서 나를 위험인물로 지목하고, 나를 블랙리스트에 올렸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내가 지체들을 만나서 교회를 떠나라고 부추기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로부터 오는 모든 연락에 반응하지 말라고 상부에서 지시가 내려진 모양이다.
사실 내가 만났던 많은 지체 중에서 내가 교회를 떠나라고 권면한 지체는 한 명 뿐이다. 그 지체는 그것을 거부했고, 지금도 열심히 다니고 있다. 나머지 지체 중 절반에게는 교회를 떠나지 말고 그 교회에서 중요한 것들을 더 배울 것을 권면했고, 그 나머지 절반에게는 본인들이 원하는 대로 하라고 권면했다. 내가 적극적으로 교회를 떠나라고 한 것은 한 경우 빼놓고는 없었다. 교회를 떠나는 것이 내 관심사가 아니기 때문에 그 주제는 대화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도 못했다. 중요한 것은 복음이었고, 그리스도였고, 말씀이었다.
복음을 전하는 나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죄인인 우리에게 유일한 희망이고 생명이라는 것을 전하는 내가 위험인물이고 기피해야할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다면, 참 아이러니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바로 그 교회가 스스로 복음에 목숨을 건다고 생각하는 교회이기 때문이다.
내가 사랑하는 지체들이 있는, 사랑하는 교회이다. 나는 그 교회가 하나님 안에서 복음 안에서 바르게 자라가는 것을 참으로 소망한다. 교회가 잘못되는 것은 내가 바라는 것이 절대 아니다. 복음이 바르게 이해되고 그리스도가 소망이되고 중심이되고 생명이되고 기쁨이 되는 가운데, 모두가 십자가로 인해서 해방의 기쁨을 만끽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한다.
만약 그런 내가 그들의 경계 대상이고 기피 대상이라면, 나로서는 할 말은 단 한 가지 밖에 없다.
"Let it be! I don't care!"
나는 나를 찾아 오는 불쌍한 영혼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하는 그 일... 바로 그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처음에는 두 세명을 우연히, 혹은 다른 관계로 만나서 이야기 나누는 수준이었다. 그 때까지 교회를 떠난 자로서 멀리서 지켜보고만 있겠다는 생각을 해왔기 때문에 내가 떠나고 난 후 공동체가 잘 되기만을 바라는 마음만 가지고 있었을 뿐 어떤 액션도 취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이 두 세명을 만난 후 마음이 바뀌었다. 내가 그냥 지켜보고 있을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깨달았다. 하나님께서 결코 내가 그냥 있기를 원하지 않으신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나에게 찾아오는 지체들을 결코 피하지 않기로 했고, 아주 가끔은 낙망 가운데 쓰러져 있는 지체들에게 다가갈 필요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를 만난 그들... 대부분 나를 만나기를 먼저 원해서 만났던 그들은 모두 절망과 깊은 어두움 가운데 있었다. 구원에 대해서 확신은 없었고, 절망과 온갖 어두움이 그 영혼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들은 나를 만나자 마자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 내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나로서는 참으로 고통스러웠다. 왜냐하면, 그것은 온통 자신에 관한 이야기 뿐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의 믿음 생활을 듣기를 원했는데, 그들은 자신의 부족한 부분, 자신이 구원받지 못했다는 확신을 갖게한 교회가 알려준 자신의 부족한 부분들에 대해서만 나열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그들의 영혼은 좌절해 있었고, 어두움 가운데 거하고 있었다. 이들 이후에 만난 모든 영혼들은 동일한 모습을 나에게 보여줬다. 그들에게 믿음이란 도저히 다다를 수 없는 높은 "경지"에 있는 그 무엇일 뿐이었고, 자신들은 그 경지에 도달할 수 없는 형편없는 존재일 뿐이라는 확신이 너무 강했다.
절망 가운데서 눈물을 보이는 그들... 그것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내가 그 지체들을 만나서 할 수 있는 것은 단 한 가지 밖에 없었다. 그것은 복음을 전하는 것...
자신의 죄와 부족한 부분에만 고정되어 있는 시선을 돌려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는 것...
절망스러운 자신의 모습... 죄가 끊이지 않는 자신의 모습... 자기 의로 가득찬 자신의 모습... 믿음이 없이 연약해 쓰러지는 자신의 모습...
그렇다! 그것이 바로 인간이다. 칼빈이 Total Depravity라고 인간의 상태를 정의했을 때, 그가 그리고 있는 모습, 그리고 성경이 보여주는 인간의 모습은 바로 선한 것이 하나도 있을 수 없는, 그 존재 자체가 죄이고 악인 모습이었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절대 희망이 없다. 인간에게 집중하면 할수록 우리는 절망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마귀는 우리를 죄로 유혹한 뒤, 그런 죄된 우리의 모습에 집중하게 하고, 거기에 눌려 있게하고, 그래서 어두움 가운데서 자포자기한 상태에서 마귀의 종으로 계속 살게 한다. 그것이 그의 전략이다.
복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그런 형편없는 존재, 벌레만도 못한 나같은 존재를 위해서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으로 오셨고, 이 땅에서 "나를 위해서" 완벽하게 의로운 삶을 사셨고, "나를 위해서" 아니 "내 그런 더러운 죄, 아니 죄된 본성"을 짊어지시고 내가 달려야 할 십자가에 달리셨고, 하나님은 내가 있어야 할 그 자리에 내 죄를 지시고 달리신 그분께 모든 진노를 쏟아 부으셨고, 그 결과 죄의 궁극적인 결과인 죽음을 예수님께서 "내 대신" 맛 보셔야 했다는 것... 그래서 이제 나에게 더 이상 정죄가 없다는 것, 그리고 그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 살아계시고, 나의 주가 되시기 때문에, 나는 그분의 지배를 받으며 그분을 닮아가는 삶, 이제는 죄를 위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 그럴 자격이 전혀 없는 자가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그런 영광스런 자리로 부르심을 받게 되었다는 것.... 그것이 복음 아닌가?
그 복음은 분명 죄된 나의 모습을 보게 하지만, 그것이 절대 중심이 아니라는 것... 그것이 너무나 중요한 진리이다. 복음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내 죄와 내가 형편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보는 것에서 그친다면, 그것은 저주일 뿐이다. 거기에는 절망밖에 없다. 그런 나를 보는 시선에서, 내가 그렇게 죄인이기 때문에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 그것이 복음 아닌가? 나에게 철저히 절망하는 대신, 그분께 완전한 희망을 두는 것이 그것이 바로 복음이 아닌가?
정말 놀라운 것은... 정말 가슴아픈 것은... 내가 만난 모든 지체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시선, 예수 그리스도께 소망을 두는 그 소망,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을 완전히 망각한 채, 자신의 죄됨에만 너무 obssessed되어 있는 것을 본 것이다...
어찌 그럴 수가... 도대체... 도대체... 뭘 배웠길래?
모든 지체들에게 내가 한 것은 복음을 전하는 것 뿐이었다.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한 것 뿐이었다. 그런데 그 복음을 들은 그들이 보인 반응... 너무나 놀라는 그 반응... 눈을 번쩍 뜨는 그 반응...
솔직히 그 반응을 보고 내가 놀랐다. 그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너무나 기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듣고 놀라면 안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가 놀랐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듣고, 그분이 구원자가 되신다는 그 소식을 듣고, 그분께 모든 것을 집중하고 그분만 바라보라는 그 설명을 듣고, 그들이 놀랐다....
한 지체가 나를 만나고 나서 이메일을 보내 왔다. 사실 다음과 같은 메일은 그 지체만의 반응이 아니었다. 모든 지체들이 보이는 동일한 반응이었다.
"어제 들은 내용을 오늘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그 은혜... 내가 어떻게 해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받게 되는 그 십자가가 내것이라는 것을 정말 오랫만에 다시 깨닫게 되었고, 또 오랫만에 "예수님"의 이름이 나에게 저주가 아닌 구원의 이름으로 다가왔습니다. 예전 저에게 찾아와 주신 예수님을 다시 만나게 되는것 같아 너무나 기쁘고 정말 잃었던 것을 다시 찾은 듯 하였습니다.
복음과 더불어 만난 모든 지체들에게 강조한 것은 성경공부였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진리 그 자체라는 것.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모든 판단 기준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나도, 어떤 인간도 교회도 아닌 성경이라는 것. 성경만이 진리이고,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하시고자 하는 모든 말씀을 성경에 다 해 놓으셨기 때문에 부지런히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것이 믿는 자의 바른 자세라는 것을 누누히 강조했다.
나를 만난 이후 그들의 변화는 분명했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게 되었고, 말씀을 사랑하게 되었고, 거룩한 삶,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향한 열정이 생기는 것을 보았다.
최근 어떤 경로를 통해서 전에 내가 다니던 교회에서 나를 위험인물로 지목하고, 나를 블랙리스트에 올렸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내가 지체들을 만나서 교회를 떠나라고 부추기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로부터 오는 모든 연락에 반응하지 말라고 상부에서 지시가 내려진 모양이다.
사실 내가 만났던 많은 지체 중에서 내가 교회를 떠나라고 권면한 지체는 한 명 뿐이다. 그 지체는 그것을 거부했고, 지금도 열심히 다니고 있다. 나머지 지체 중 절반에게는 교회를 떠나지 말고 그 교회에서 중요한 것들을 더 배울 것을 권면했고, 그 나머지 절반에게는 본인들이 원하는 대로 하라고 권면했다. 내가 적극적으로 교회를 떠나라고 한 것은 한 경우 빼놓고는 없었다. 교회를 떠나는 것이 내 관심사가 아니기 때문에 그 주제는 대화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도 못했다. 중요한 것은 복음이었고, 그리스도였고, 말씀이었다.
복음을 전하는 나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죄인인 우리에게 유일한 희망이고 생명이라는 것을 전하는 내가 위험인물이고 기피해야할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다면, 참 아이러니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바로 그 교회가 스스로 복음에 목숨을 건다고 생각하는 교회이기 때문이다.
내가 사랑하는 지체들이 있는, 사랑하는 교회이다. 나는 그 교회가 하나님 안에서 복음 안에서 바르게 자라가는 것을 참으로 소망한다. 교회가 잘못되는 것은 내가 바라는 것이 절대 아니다. 복음이 바르게 이해되고 그리스도가 소망이되고 중심이되고 생명이되고 기쁨이 되는 가운데, 모두가 십자가로 인해서 해방의 기쁨을 만끽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한다.
만약 그런 내가 그들의 경계 대상이고 기피 대상이라면, 나로서는 할 말은 단 한 가지 밖에 없다.
"Let it be! I don't care!"
나는 나를 찾아 오는 불쌍한 영혼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하는 그 일... 바로 그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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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3:08:00
"아빠! 봐봐요!"
(2010년 11월 8일에 쓴 글.)
예연이가 얼마전부터 자전거를 본격적으로 타기 시작했다. 전에는 자전거가 무서워서 보조 바퀴를 달거나 내가 잡아 주지 않으면 혼자서 못탔었는데, 그래서 한참을 타지 않았었는데... 이번에 새롭게 시도해 보라고 했더니 너무나 잘 탄다. 대견스럽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예연이가 자전거를 탈 때, 반드시 내가 지켜보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리적으로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는 아빠이지만, 그 아빠가 예연이를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예연이로 하여금 두려움을 이기고 자전거를 도전하도록 하고, 또 신나게 자전거를 타도록 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을 느낀다. 아빠의 존재가 사라지면, 예연이 안의 모든 자신감도 같이 사라지는 것이다.
하연이 예연이가 아빠에게 원하는 것... 그것은 "아빠! 봐봐요!"라는 한 마디에 모두 담겨있다. 자신들의 새로운 시도를 아빠가 지켜봐주고, 격려해 주는 것. "우리 딸, 최고다!" "잘 하네!" "와!!"라는 반응이 아빠로부터 나올 때, 아이들은 으쓱하며 기뻐한다. 아빠의 시선과 칭찬이 아이들로 하여금 자신감을 갖게하고 자신에 대한 긍정적인 자아상을 형성해 나가도록 돕는 것을 본다. 아빠의 시선 아래 자란 딸들, 그리고 칭찬을 먹고 자란 아이들은 건강한 자아로 인해서 상처를 적게 받고, 상처를 받아도 잘 이겨 나간다. 아이가 다쳤을 때, 그 아이를 꼭 껴안아주고, 아픔을 공감해 주는 부모가 있는 아이들과, 그렇지 못한 아이들이 그 고통과 상처를 극복해 나가는 시간에 많은 차이가 있다는 연구결과를 본 적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들에게 있어서 아빠는 너무나 중요한 존재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늘 나를 지켜보고 계신다. 그것은 때로는 나에게 너무나 두려운 사실이다. 공의로우신 하나님, 죄에 대해 진노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분 앞에 죄를 짓는 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분은 내 아버지가 되신다. 늘 헤매는 나이지만, 가끔 한 번씩 기특한 일을 할 때면,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 "아빠! 봐봐요!"라고 으쓱하며 자랑할 수 있는 대상, 그 시선으로 인해 자신감을 얻을 수 있는 대상, 그 칭찬으로 선을 행할 힘, 거룩한 삶을 도전해 볼 수 있는 힘을 얻는 그런 아버지이시다.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정말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스스로 자랑하고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는 나를 사랑을 가득 담은 눈으로 바라보시는 아버지...
나에게는 그 아버지가 계신다.
예연이가 얼마전부터 자전거를 본격적으로 타기 시작했다. 전에는 자전거가 무서워서 보조 바퀴를 달거나 내가 잡아 주지 않으면 혼자서 못탔었는데, 그래서 한참을 타지 않았었는데... 이번에 새롭게 시도해 보라고 했더니 너무나 잘 탄다. 대견스럽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예연이가 자전거를 탈 때, 반드시 내가 지켜보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리적으로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는 아빠이지만, 그 아빠가 예연이를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예연이로 하여금 두려움을 이기고 자전거를 도전하도록 하고, 또 신나게 자전거를 타도록 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을 느낀다. 아빠의 존재가 사라지면, 예연이 안의 모든 자신감도 같이 사라지는 것이다.
하연이 예연이가 아빠에게 원하는 것... 그것은 "아빠! 봐봐요!"라는 한 마디에 모두 담겨있다. 자신들의 새로운 시도를 아빠가 지켜봐주고, 격려해 주는 것. "우리 딸, 최고다!" "잘 하네!" "와!!"라는 반응이 아빠로부터 나올 때, 아이들은 으쓱하며 기뻐한다. 아빠의 시선과 칭찬이 아이들로 하여금 자신감을 갖게하고 자신에 대한 긍정적인 자아상을 형성해 나가도록 돕는 것을 본다. 아빠의 시선 아래 자란 딸들, 그리고 칭찬을 먹고 자란 아이들은 건강한 자아로 인해서 상처를 적게 받고, 상처를 받아도 잘 이겨 나간다. 아이가 다쳤을 때, 그 아이를 꼭 껴안아주고, 아픔을 공감해 주는 부모가 있는 아이들과, 그렇지 못한 아이들이 그 고통과 상처를 극복해 나가는 시간에 많은 차이가 있다는 연구결과를 본 적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들에게 있어서 아빠는 너무나 중요한 존재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늘 나를 지켜보고 계신다. 그것은 때로는 나에게 너무나 두려운 사실이다. 공의로우신 하나님, 죄에 대해 진노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분 앞에 죄를 짓는 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분은 내 아버지가 되신다. 늘 헤매는 나이지만, 가끔 한 번씩 기특한 일을 할 때면,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 "아빠! 봐봐요!"라고 으쓱하며 자랑할 수 있는 대상, 그 시선으로 인해 자신감을 얻을 수 있는 대상, 그 칭찬으로 선을 행할 힘, 거룩한 삶을 도전해 볼 수 있는 힘을 얻는 그런 아버지이시다.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정말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스스로 자랑하고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는 나를 사랑을 가득 담은 눈으로 바라보시는 아버지...
나에게는 그 아버지가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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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9:13:00
Elizabeth Taylor
오늘... 몸이 아파서 하루 종일 집에 있었다. 가끔씩 TV를 보면서...
CNN에서 오늘의 이슈는 오늘 아침에 79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 Elizabeth Taylor였다.


개인적으로는 연예인을 거의 신경쓰지 않고 좋아하지 않는 나 조차도, 어렸을 때 본 그녀의 영화 때문에 그녀의 미모에 매료되었던 유일한 배우의 죽음이라 심상치 않게 다가왔다.
미인박명이라고 했던가? 7명의 남자들과 8번의 결혼을 하면서 참으로 기구한 인생을 살다간 그였다.
그녀가 언젠가 불평했다는 말... 그 말이 뇌리에 남는다.
"남자들은 내 미모를 사랑하지만, 내 자신을 사랑하지는 않아요."
늘 남자들을 주변에 달고 다니는 그녀였지만, 사실 많이 외로왔을 것이다.
아파서 자리에 누운 지금... 그리고 외로움과 싸우고 있는 요즘... 그녀의 말이 참으로 가슴에 와 닿는다.
나를 대하는 많은 사람들의 태도.. 그것의 거의 대부분의 경우가 나로부터 뭔가 도움을 얻기 위한 것이다. 그것이 영적인 것이던 세상적인 것이든 간에, 그들은 그것을 위해 나에게 다가온다. 그리고 그들이 얻고 싶은 것을 얻고난 후에는 뒤돌아보지 않고 떠난다. 그것이 내가 지금까지 맺어온 인간관계다.
나를 인간으로 대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래서 내가 누군가를 필요로 할 때, 내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 몸이 아픈 오늘... 그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할 수 없다는 것... 외로운 요즘... 그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같이 있어 줄 사람이 없다는 것...
누구보다도 인기가 많았던 Elizabeth Taylor... 이 땅에 살 동안 그녀가 느꼈을 외로움을 공감하며, 그녀를 추억한다.
CNN에서 오늘의 이슈는 오늘 아침에 79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 Elizabeth Taylor였다.
개인적으로는 연예인을 거의 신경쓰지 않고 좋아하지 않는 나 조차도, 어렸을 때 본 그녀의 영화 때문에 그녀의 미모에 매료되었던 유일한 배우의 죽음이라 심상치 않게 다가왔다.
미인박명이라고 했던가? 7명의 남자들과 8번의 결혼을 하면서 참으로 기구한 인생을 살다간 그였다.
그녀가 언젠가 불평했다는 말... 그 말이 뇌리에 남는다.
"남자들은 내 미모를 사랑하지만, 내 자신을 사랑하지는 않아요."
늘 남자들을 주변에 달고 다니는 그녀였지만, 사실 많이 외로왔을 것이다.
아파서 자리에 누운 지금... 그리고 외로움과 싸우고 있는 요즘... 그녀의 말이 참으로 가슴에 와 닿는다.
나를 대하는 많은 사람들의 태도.. 그것의 거의 대부분의 경우가 나로부터 뭔가 도움을 얻기 위한 것이다. 그것이 영적인 것이던 세상적인 것이든 간에, 그들은 그것을 위해 나에게 다가온다. 그리고 그들이 얻고 싶은 것을 얻고난 후에는 뒤돌아보지 않고 떠난다. 그것이 내가 지금까지 맺어온 인간관계다.
나를 인간으로 대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래서 내가 누군가를 필요로 할 때, 내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 몸이 아픈 오늘... 그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할 수 없다는 것... 외로운 요즘... 그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같이 있어 줄 사람이 없다는 것...
누구보다도 인기가 많았던 Elizabeth Taylor... 이 땅에 살 동안 그녀가 느꼈을 외로움을 공감하며, 그녀를 추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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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1:17:00
요즘은...
요즘...
그 어느 때보다 혼자 있는 것이 싫다...
내 인생에서 그런 적이 없는데...
혼자 있는 것이 두렵다... 혼자 있어서 무서운 것이 아니라, 혼자 있음 그 자체가 고통스러워서 두렵다...
그냥 누군가 내 곁에만 있어 준다면...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이 내 곁에 계시는 것을 알고 만족하고 기뻐해야 하는데...
그래도 인간이... 누군가 나를 따뜻하게 맞아줄... 그런 누군가...
사무치게 그립다...
그 어느 때보다 혼자 있는 것이 싫다...
내 인생에서 그런 적이 없는데...
혼자 있는 것이 두렵다... 혼자 있어서 무서운 것이 아니라, 혼자 있음 그 자체가 고통스러워서 두렵다...
그냥 누군가 내 곁에만 있어 준다면...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이 내 곁에 계시는 것을 알고 만족하고 기뻐해야 하는데...
그래도 인간이... 누군가 나를 따뜻하게 맞아줄... 그런 누군가...
사무치게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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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1:15:00
[펌] How to Stay Safe In the World Today (유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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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11:40:00
요즘 내가 미소지을 때는...
머릿속이 많이 복잡하고, 외로움과 괴로움으로 참으로 쉽지 않은 날들을 보내고 있는 요즘...
나도 모르게 어느새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을 때는, 아니 나도 모르게 넋을 잃고 헤벌레 웃고 있을 때는... 컴퓨터 화면 보호기로 설정해 놓은 아이들 사진이 나올 때다... 2002년, 2003년, 그리고 지금은 2004년 사진들이 컴퓨터 화면에 보인다. 아이들의 갖가지 포즈와 표정은 나를 잡아 끌고, 모든 것을 잊고 그냥 헤벌레... 웃게 만든다..
내 보물들...
나도 모르게 어느새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을 때는, 아니 나도 모르게 넋을 잃고 헤벌레 웃고 있을 때는... 컴퓨터 화면 보호기로 설정해 놓은 아이들 사진이 나올 때다... 2002년, 2003년, 그리고 지금은 2004년 사진들이 컴퓨터 화면에 보인다. 아이들의 갖가지 포즈와 표정은 나를 잡아 끌고, 모든 것을 잊고 그냥 헤벌레... 웃게 만든다..
내 보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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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7:16:00
the differences
An unregenerated mind can't understand God's wrath while a regenerated mind can't understand His love and grace. (my words)
교회에 다녀오는 길에 운전하는 차에서 내 머리에 떠오른 생각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불평한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면서 어떻게 인간을 그렇게 잔인하게 심판해? 어떻게 그렇게 협박을 해?" 그것은 하나님이 얼마나 공의로우시고 거룩하시고 정결하신 분이신지에 대해서, 그리고 인간이 얼마나 타락하고 죄많은 존재인지에 대해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그분의 심판에 대해서는 눈을 찌뿌린다. 사실... 그들이 아는 하나님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그들이 만들어낸 지극히 인간적인 개념일 뿐이다. 그들이 심판을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사랑도 모르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험한 자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경험한 자들은 도저히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경험했기 때문에 그분의 공의와 그분의 거룩을 안다. 그리고 그들은 인간의 죄성이 얼마나 뿌리깊고 끔찍한지도 안다. 그 둘 사이의 간극은 도저히 세상 어떤 것으로도 매꿀 수 없을 만큼 크다. 하나님과 인간... 거기에는 도저히 용서와 사랑이 존재할 수 없고, 심판만이 존재해야하는 그런 공간이다. 그것은 너무나 쉽게 잘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것을 뛰어넘으신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와 긍휼... 그분의 사랑이다. 예수 그리스도이다.
나같은 죄인을 사랑하신 하나님....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그래서 믿음이 필요하다.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교회에 다녀오는 길에 운전하는 차에서 내 머리에 떠오른 생각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불평한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면서 어떻게 인간을 그렇게 잔인하게 심판해? 어떻게 그렇게 협박을 해?" 그것은 하나님이 얼마나 공의로우시고 거룩하시고 정결하신 분이신지에 대해서, 그리고 인간이 얼마나 타락하고 죄많은 존재인지에 대해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그분의 심판에 대해서는 눈을 찌뿌린다. 사실... 그들이 아는 하나님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그들이 만들어낸 지극히 인간적인 개념일 뿐이다. 그들이 심판을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사랑도 모르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험한 자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경험한 자들은 도저히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경험했기 때문에 그분의 공의와 그분의 거룩을 안다. 그리고 그들은 인간의 죄성이 얼마나 뿌리깊고 끔찍한지도 안다. 그 둘 사이의 간극은 도저히 세상 어떤 것으로도 매꿀 수 없을 만큼 크다. 하나님과 인간... 거기에는 도저히 용서와 사랑이 존재할 수 없고, 심판만이 존재해야하는 그런 공간이다. 그것은 너무나 쉽게 잘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것을 뛰어넘으신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와 긍휼... 그분의 사랑이다. 예수 그리스도이다.
나같은 죄인을 사랑하신 하나님....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그래서 믿음이 필요하다.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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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2:51:00
외로움...
오늘..
학교에서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오는 길...
셔틀버스에서 내려 내가 사는 아파트로 향했다.
아파트 주차장..
그 곳에서 변함 없이 서서 나를 기다리는 내 차...
모두가 떠나간 듯, 텅 빈 내 마음이 세차게 부는 바람에 너무나 추운 그 때...
'주인님! 제가 있습니다. 저는 이렇게 주인님을 기다리며 제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듯한 그 모습.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학교에서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오는 길...
셔틀버스에서 내려 내가 사는 아파트로 향했다.
아파트 주차장..
그 곳에서 변함 없이 서서 나를 기다리는 내 차...
모두가 떠나간 듯, 텅 빈 내 마음이 세차게 부는 바람에 너무나 추운 그 때...
'주인님! 제가 있습니다. 저는 이렇게 주인님을 기다리며 제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듯한 그 모습.
눈물이 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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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1:28:00
[CCM] I Have a Shelter
I have a shelter in the storm
When troubles pour upon me
Though fears are rising like a flood
My soul can rest securely
O Jesus, I will hide in You
My place of peace and solace
No trial is deeper than Your love
That comforts all my sorrows
I have a shelter in the storm
When all my sins accuse me
Though justice charges me with guilt
Your grace will not refuse me
O Jesus, I will hide in You
Who bore my condemnation
I find my refuge in Your wounds
For there I find salvation
I have a shelter in the storm
When constant winds would break me
For in my weakness, I have learned
Your strength will not forsake me
O Jesus, I will hide in You
The One who bears my burdens
With faithful hands that cannot fail
You’ll bring me home to heaven
© 2008 Integrity’s Hosanna! Music (ASCAP)/Sovereign Grace Worship (ASCAP) (Admin. By Integrity’s Hosanna! Music) Sovereign Grace Praise (BMI)(Admin. By Integrity’s Praise! Mus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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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07:00
침례...
오늘 교회에서 침례식이 있었다. 흑인 자매 한 명이었다.
침례식 전 비디오를 통해서 간증이 방영되었다. 간증문을 읽는 것이 아니라 인터뷰식이었는데, 인터뷰 질문은 나오지 않았고, 그에 대한 답변들만 편집되어서 나왔다. 밝은 표정, 기쁨, 감사가 넘치는 그 모습...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의 삶, 그녀가 만난 예수님, 그리고 그 이후의 변화된 삶과 교회와 침례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밝히는 그 영혼이 참으로 아름다왔다. 모두들 기뻐하며 박수로 그 기쁨에 동참했다.
특이한 것은 침례식이었다. 어디를 봐도 침례탕이 보이지 않는 교회였다. 그런데 알고 보니 위의 사진에서 보이는 큰 스크린 왼편의 높은 곳에 있는 곳에 보이지 않게 침례탕이 있었다. 그리고 더 놀랍게도, 침례식은 우리 교회의 목사님들 중에서도 가장 젊은 목사님인 청년부 담당 목사님이 침례를 집전했다. 일반적으로 senior pastor가 침례를 집전하는 것과는 달랐다. 침례를 집전하면서 침례의 의미가 무엇인지 설명하는 그 설명을 통해서 모든 성도들은 다시 한 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다시 태어난 의미를 되새겼다.
목사님은 물에 잠기는 자매에게 당신의 옛 자아는 예수님 안에서 죽었다고, 그리고 물에서 나오는 그녀에게 이제 당신은 주님 안에서 새생명이라고 선언해 주었고, 그리고 나서 기도로 마무리를 지었다.
기쁨이 있는 침례식...
인상적이었다.
침례식 전 비디오를 통해서 간증이 방영되었다. 간증문을 읽는 것이 아니라 인터뷰식이었는데, 인터뷰 질문은 나오지 않았고, 그에 대한 답변들만 편집되어서 나왔다. 밝은 표정, 기쁨, 감사가 넘치는 그 모습...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의 삶, 그녀가 만난 예수님, 그리고 그 이후의 변화된 삶과 교회와 침례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밝히는 그 영혼이 참으로 아름다왔다. 모두들 기뻐하며 박수로 그 기쁨에 동참했다.
특이한 것은 침례식이었다. 어디를 봐도 침례탕이 보이지 않는 교회였다. 그런데 알고 보니 위의 사진에서 보이는 큰 스크린 왼편의 높은 곳에 있는 곳에 보이지 않게 침례탕이 있었다. 그리고 더 놀랍게도, 침례식은 우리 교회의 목사님들 중에서도 가장 젊은 목사님인 청년부 담당 목사님이 침례를 집전했다. 일반적으로 senior pastor가 침례를 집전하는 것과는 달랐다. 침례를 집전하면서 침례의 의미가 무엇인지 설명하는 그 설명을 통해서 모든 성도들은 다시 한 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다시 태어난 의미를 되새겼다.
목사님은 물에 잠기는 자매에게 당신의 옛 자아는 예수님 안에서 죽었다고, 그리고 물에서 나오는 그녀에게 이제 당신은 주님 안에서 새생명이라고 선언해 주었고, 그리고 나서 기도로 마무리를 지었다.
기쁨이 있는 침례식...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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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6:41:00
새장단
가족들이 떠난 날...
허전한 마음을 분주함으로 달래 보려고, 그리고 빨리 정리하고 공부하는 분위기를 만들고 싶어서 하루 종일 쉬지 않고 일해서 방 구조를 바꾸고 수없이 많이 갖다 버렸습니다.
완전히 새로와진 분위기... 마음을 잡고 공부해야지요..
허전한 마음을 분주함으로 달래 보려고, 그리고 빨리 정리하고 공부하는 분위기를 만들고 싶어서 하루 종일 쉬지 않고 일해서 방 구조를 바꾸고 수없이 많이 갖다 버렸습니다.
완전히 새로와진 분위기... 마음을 잡고 공부해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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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12:56:00
비
가족들이 떠나는 날부터 오스틴에 비가 내립니다. 한 시도 쉬지 않고...
빗소리가 들릴 만큼 굵은 빗줄기도 아니고, 가랑비보다 아주 약간 더 굵은... 소리없지만, 온 땅을 적시는 비...
마치 제 기분을 그대로 담고 있는 것 같은 비입니다.
하루 종일.. 정신없이 집을 renovaton했지만, 마음 속으로는 울고 있었습니다. 굵은 비처럼 통곡은 할 수 없었고, 할 마음도 아니지만, 잔잔하게 슬픔을 느끼며 아파하고 있었습니다. 울컥 울컥 쏟아지는 눈물도 있었지만, 그냥 조용히 슬퍼하는 슬픔이 나를 압도합니다.
그리움과 슬픔..
가랑비가 내리듯이 잔잔하게 제 주위를 맴돌고, 제 내면을 사로잡네요..
빗소리가 들릴 만큼 굵은 빗줄기도 아니고, 가랑비보다 아주 약간 더 굵은... 소리없지만, 온 땅을 적시는 비...
마치 제 기분을 그대로 담고 있는 것 같은 비입니다.
하루 종일.. 정신없이 집을 renovaton했지만, 마음 속으로는 울고 있었습니다. 굵은 비처럼 통곡은 할 수 없었고, 할 마음도 아니지만, 잔잔하게 슬픔을 느끼며 아파하고 있었습니다. 울컥 울컥 쏟아지는 눈물도 있었지만, 그냥 조용히 슬퍼하는 슬픔이 나를 압도합니다.
그리움과 슬픔..
가랑비가 내리듯이 잔잔하게 제 주위를 맴돌고, 제 내면을 사로잡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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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2:51:0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