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일부 사람들과 언론에서 제기하는 문제에 대하여(2)

(혹시 이 글에 반대하시는 분은 댓글로 그 이유를 사실에 입각해서 논리적으로 반박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런 글은 언제든 환영합니다. 다만 사실에 입각해야 하기 때문에 먼저 사실여부를 확인해 주시고, 또한 논리적 비약이 없어야 합니다. 만약 사실에 입각하지 않거나, 논리적 비약이 너무 심하거나, 욕설이 있는 댓글은 그냥 삭제합니다.)

A와 B는 서로 사이가 좋지 않다. A는 좀 독선적인 면이 있어서 B를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하려는 경향이 있다. B는 그런 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대화와 타협으로 문제를 풀어가면 좋겠지만, A는 원래 그런 식으로 일을 진행해 본 적이 없다. A가 평생 해오던 일의 방식은 상명하복이었기 때문이다(그가 그의 윗사람이 명령에 절대 복종했는지는 좀 의심스럽긴 하다). B는 그런 A가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래서 B는 A가 하는 일마다 딴지를 걸고, A를 놀림으로써 그가 하려는 일을 매사에 방해했다. 그런 B를 너무 싫어한 A는 B를 경찰에 신고하려 했지만, B가 하는 일이 꼴보기 싫고 화나게는 하지만 그렇다고 법을 명백히 어겼다고 보기에는 좀 무리가 있어서 분을 삭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A는 칼을 들고 어김없이 꼴보기 싫은 짓으로 자신을 훼방하는 B를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다행히 B는 A의 협박을 피해 목숨을 건지긴 했지만 약간의 상처를 입었다.

물론 A와 B의 이야기는 실제 사건이 아니고 만들어낸 것이며, A는 윤석열 대통령을, B는 민주당, 특히 이재명 대표를 비유한 것이다. 좀 많이 단순화한 면이 없지 않지만, 적어도 내가 본 국내 정치는그렇다. 이 대표와 민주당이 탄핵을 '남발'하면서 대통령과 정부가 의도하는 것을 저지하려 했다(야당에 의해 탄핵 당했던 인사들의 면면을 좀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는 있다). 그리고 다른 야당들과 연합하여 숫적 절대우세로 정부의 정책을 좌절시킨 경우도 많았다. 그것에 분노한 대통령은 법적으로 이 대표와 민주당을 막아보려고 했지만, 딱히 그 과정에서 위법한 것은 없었기 때문에(물론 현재 재판 중에 있는 이재명 대표 개인의 위법 여부와는 완전히 별도의 문제이다) 이에 대해 분노하고 답답해 하다가 내놓은 결론이 계엄이었다.

대통령의 조치에 대해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그것이 헌법과 법률에 위배된다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결론은 헌법재판소가 내릴 것이고, 대통령 및 그와 함께 계엄조치에 참여한 사람들의 내란죄 여부는 사법부가 판단할 것이니 여기서 내가 나서서 자세히 설명할 필요는 없어보인다. 다만, 대통령의 조치가 합법적인 것이 아니라고 인정하는 사람 중에서 아주 많은 사람들이 이 대표를 내세우면서 대통령의 조처가 그럴만 했다고 동정하고 있는 점은 생각해볼만 하다. 그들은 '대통령을 파면시켜서 이 대표 좋은 일 시킬 수 없다'거나 '대통령이 그렇게까지 한 근본적인 원인 제공자는 이 대표와 민주당이니 이 대표가 더 나쁘다'라고 주장한다. 어떤 주장을 하든지 간에 대통령을 옹호하는 측에서는 이 대표에 대한 혐오를 감추지 않으며 그를 끌어들인다. 그런데 그것이 맞을까?

위에서 A와 B의 관계로 초래된 끔찍한 결말을 예로 들어보자. A에게 B라는 존재는 정말 밉고 제거해버리고 싶을 수도 있다. 그리고 B가 한 모든 행동이 옳다고 볼 수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A가 칼을 들고 B를 죽이겠다고 달려든 것을 B의 책임이라며 B를 비난하는 것, 더 나아가 A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것이 옳은가? 그리고 칼을 든 사람이 A이기 때문에 그 행위를 더 동정하는 것이 옳은가? 만약 B가 칼을 들고 A를 죽이려고 했다면 어떨까? 보는 사람에 따라서 A와 더 친한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B와 더 친한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그에 따라 자신이 더 친한 사람에게 마음이 가는 것은 이해하지만, 법적인 잣대는 A와 B에 무관하게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따라서, A가 칼을 들고 폭력을 행사하며 살인미수의 범죄를 저지른 것은 B와는 무관하게 판단해야 한다. 법적으로 B의 잘못과 A의 잘못은 별도의 사건이며 위법한 정도에 따라서 각각 처벌을 받으면 될 일이다. A의 행위에 B를 끌어들이는 것은 전에 다른 글에서 언급했던 것과 같이 피해자를 비난하는 (blaming the victim) 전형적인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에서 기인한 것이다. B는 위법한 것이 없다. 다만 그가 그렇게까지 했어야 했는지, A의 심기를 그렇게까지 불편하게 하고 A가 하려는 것을 그렇게까지 좌절시켰어야 했는지에 대해서 도덕적으로 문제삼고 비난할 수는 있다. 하지만 A가 칼을 들고 B를 살해하려고 한 것은 전적으로 위법한 행위이고 그것은 어떤 식으로는 용납되거나 두둔할 수 없는 행위이다.

다른 글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이 대표와 민주당에 대해서 대통령이 했어야 하는 것은 대화, 설득, 양보, 타협, 대국민 선전전 등의 정치적인 행위였다. 그것으로 이 대표와 민주당을 코너로 몰고갔어야 했고, 그것으로 그들의 항복을 받아냈어야 했다. 하지만 대통령은 야당과 대화를 거부했고, 그들을 설득하려 하지 않고 위협했으며, 양보나 타협을 시도하지 않고 상대가 백기를 들고 항복하기를 기대했다. 그것은 정치적이지 못한 대처이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정치적이어야 하는 자리인 대통령에 걸맞지 않은 행동이었다. 그리고 그가 택한 최후의 방법은 군대의 무력을 사용한 폭력적 억압인 계엄을 통해서 야당을 굴복시켜 항복을 받아내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나라의 헌법체계 내에서는 결코 용납되지 않는 범죄이다.

그리고 그 계엄을 '윤석열'이 했기 때문에 용납된다는 생각도 절대 인정할 수 없다. '윤석열'을 옹호하거나 동정하는 사람들은 만약 '이재명'이 대통령 자리에 앉아서 똑 같은 것을 했더라도 마찬가지로 옹호하거나 동정했을까? 절대 그렇지 않다. 만약 '이재명'이 대통령으로서 같은 것을 했더라도 국민적 저항에 직면했을 것이고 그 중에서 가장 격렬하게 저항하는 사람들이 바로 지금 대통령을 동정하며 지지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다시 한 번 더 강조하는데) 법의 잣대는 누구에게나 동일해야 한다. 이번 계엄을 '윤석열'이 하건, '이재명'이 하건 상관 없이 똑같이 엄격히 법이 적용되어야 하고 똑 같이 처벌을 받아야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민주당의 김부겸 전 총리를 좋아한다. 그리고 국민의힘에서는 유승민 전 대표를 좋아한다(공교롭게 둘 다 대구 출신 정치인이다). 하지만 설사 그 둘 중 어느 누구든 대통령 자리에 앉아서 지난 12월에 '윤석열'이 했던 것과 같은 것을 한다면 나는 절대로 그를 지지하거나 동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탄핵되고 파면되며, 내란죄로 처벌 받기를 간절히 바라며 그것을 위해 광장에 나갈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지 혐오하는지와 전혀 상관 없이 법은 객관적으로 적용되어야 하며 그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그것이 법치주의의 기본이다.

대통령의 범죄는 범죄 그 자체로 봐야 한다. 그리고 거기에는 이 대표와 민주당에 대한 혐오가 끼어들 여지가 없다. 이 대표와 민주당에 대해 혐오는 그 자체가 독립적인 것으로 그들에 대해서는 그들에 대한 혐오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다수를 이뤄서 선거로 심판하면 된다(물론 이 대표 개인에 대한 사법적 심판은 법적 절차에 따라 진행될 것이고 그것은 사법부의 권한이므로 기다리면 된다). 그러니 제발 대통령의 탄핵 심판과 내란죄 판단에 이 대표를 끌어들이는 무모하고 무식한 짓을 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런 말을 입에 올리는 사람을 볼 때마다 (        ) 때문에 참 딱하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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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일부 사람들과 언론에서 제기하는 문제에 대하여(1)

(혹시 이 글에 반대하시는 분은 댓글로 그 이유를 사실에 입각해서 논리적으로 반박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런 글은 언제든 환영합니다. 다만 사실에 입각해야 하기 때문에 먼저 사실여부를 확인해 주시고, 또한 논리적 비약이 없어야 합니다. 만약 사실에 입각하지 않거나, 논리적 비약이 너무 심하거나, 욕설이 있는 댓글은 그냥 삭제합니다.)

지난 12월 계엄사태 바로 그날 내가 사는 아파트 단톡방에는 이 일로 상당히 뜨거웠었다. 물론 대부분은 지금 이 시대에 계엄이 무슨 뜬금없는 짓인지에 대한 성토가 많았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침묵했고 의사를 표현한 극히 일부 중에는 계엄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 중 한 명은 말했다. "계엄에 그리 찬성하는 것은 아니지만, 요즘 국회가 하는 짓을 보면 필요하다는 생각도 들어요." 그리고 계엄 이후의 시국에서 계엄을 적극 찬성하는 쪽과, 그리 찬성하지는 않지만 필요했다는 쪽에서는 혼란한 국회, 특히 민주당에 원천적인 잘못이 있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이 논리는 도대체 무슨 논리인지 사실 아직도 이해되지 않는다. 애써 이해해 보려고 한다면, 민주당을 주도로 하는 국회의 탄핵 남발과 정부 정책의 발목잡기가 대통령과 행정부를 마비시켰고, 그것으로 인해 국정 혼란이 왔으니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국회의 폭거를 저지하는 방안으로 계엄은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사실 전혀 말이 안 되는 주장이다. 그 이유는 정말 여러 가지이지만 여기에서 그것들을 모두 다루며 문제를 지적할 생각은 없다. 그저 한 가지만 생각해보고자 한다. 민주당에서 최근에 한 모든 것에 대해서 변호할 생각은 없다. 그들이 취한 액션에 모두 동의하지도 않는다. 다만 그들의 액션이 어떤 차원에서 이루어졌는지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많은 사람이 지적하는 탄핵이나 정부 정책에 대한 반대, 그리고 정부 정책과 충돌하는 법의 입법 등에 대해서 어떤 사람이나 단체가 그런 조치를 증오하고 경멸하면서 그에 대한 반대 의사를 충분히 표명할 수는 있지만, 그런 조치 자체가 불법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그 모든 조치는 헌법과 법률의 테두리 안에서 취해진 것들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검찰이나 경찰에 고소해서 그 조치가 불법적이었다는 것을 호소해서 불법 여부에 대해 법원의 판결을 받으면 될 일이다. 우리나라의 시스템에는 불법을 해결할 수 있는 고유의 방법이 있다. 하지만, 민주당과 야당이 취한 조치에 대해 심하게 비판하는 대통령과 정부, 그리고 여당조차도 그것들을 법정으로 끌고 갈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 조치들이 헌법과 법률을 명백히 어기고 있지 않다는 것을 반증한다.

그렇다면 민주당의 그런 조치는 합법적인 조치들이다. 따라서 그것들은 정치적 영역에서 풀어야 마땅하다. 법적 영역과 정치적 영역이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 둘은 엄연히 다른 영역이다. 다시 말해 민주당의 여러 조치는 불법은 아닐지 모르겠지만 정치적으로 비판을 받아야 하는 것일 수 있다. 다만 법의 영역과 정치의 영역에서는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이 완전히 다르다. 정치의 영역에서는 정치적 논리로 권력의 원천인 국민에게 호소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한다. 즉, 국민 다수에게 민주당의 조치가 국가와 국민에게 어떻게 해로울 수 있는지를 호소하고 다수의 지지를 얻어 그것으로 민주당을 압박해서 그들의 변화를 이끌어 내야하는 것이다. 그 방법 외에 어떤 물리력이나 법적인 힘을 동원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최근에 미국 대통령이 취임한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첫날 여러 법안에 서명함으로써 자신의 지지자들이 원하는 정책을 강력하게 밀고 나갈 것이라는 의지늘 천명했다. 그가 취한 여러 조치들 중 하나는 2020년 대통령 선거 직후 선거 자체를 부정선거로 부정하고 의회를 물리력으로 점거하고 난동을 부리고 의회경비대에게 폭력을 행사했던 일부 트럼프 극렬지지자들에 대한 사면을 단행한 것이다. 우리가 보기에는 말도 안되는, 용납할 수 없는 이 조치에 대해서 미국 내에서도 비판이 거세다. 하지만, 미국에서 대통령의 사면권은 미국 대통령의 고유의 권한으로 합법적이고 그에 대해 전통적으로 법적으로 저항할 방법이 없다. 정치적인 공간에서 그에 저항할 수는 있지만 그 밖의 공간에서 그에 대항하는어떤 물리력도 용인되지 않는다. 그저 미국 국민들에게 그 사면의 부당성을 호소하고 다수의 국민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등을 돌려 대통령에게 정치적 힘이 실리지 않게 노력하는 방법 밖에는 없다는 뜻이다. 그것이 민주주의이고 미국의 법질서이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이다. 누구든 대통령과 정부를 욕하고 비난할 수 있다. 그리고 그와 반대 편에 있는 야당에 대해서도 똑같이 할 수 있다. 물론 그것은 근거가 분명한 것이 되어야 하고 근거가 없는 가짜 선동은 절대 용납될 수 없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별도로 생각해보자. 충분한 근거가 있다면, 그리고 그것에 기반한 자신의 의견이라면 우리나라 법질서 내에서 충분히 비판하면 심지어 비난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을 벗어나 어떤 형태든 물리력을 행사하는 것은 절대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대통령이 국회, 특히 야당인 민주당에 대해서 정치의 공간에서 비판하며 국민의 지지를 호소하는 것은 언제든 용납될 수 있는 것이지만, 군대를 동원하며 물리력을 사용하는 것은, 그것도 법질서의 테두리를 벗어나서 그것을 사용하려는 것은 어떤 식으로는 용납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짓을 행한 대통령을 두둔하며 국회, 특히 민주당을 욕하는 일부 지지자들의 행태는 옛날에 남편에게 무차별 폭력을 당하는 여성을 욕하며 맞을 짓을 했다며 혀를 끌끌차며 방관을 일삼았던, 오히려 피해자를 욕하고 가해자 편에 섰던 못된 이웃과 다를 바 없다.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다. 제발 정신 차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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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의 포괄적차별금지법에 대한 반감에 대하여... (2)

(혹시 이 글에 반대하시는 분은 댓글로 그 이유를 사실에 입각해서 논리적으로 반박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런 글은 언제든 환영합니다. 다만 사실에 입각해야 하기 때문에 먼저 사실여부를 확인해 주시고, 또한 논리적 비약이 없어야 합니다. 만약 사실에 입각하지 않거나, 논리적 비약이 너무 심하거나, 욕설이 있는 댓글은 그냥 삭제합니다.)

포괄적차별금지법에 대한 기독교의 반응에 대해 다른 면에서 살펴보자. 내 견해가 틀렸을수도 있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포괄적차별금지법에만 집중하면서 그것으로 나라가 망할 것처럼 떠들어대는 기독교인들이 위선적으로만 보인다. 2015년 2월 26일에 간통죄가 폐지되었을 때, 교회는 왜 침묵했는가? 간통죄를 위헌으로 결정한 헌법재판소를 악마화하면서 왜 들고 일어서지 않았는가? 좀 억지스러울지 모르지만 혹시 세상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 간통죄에 대해서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 아닐까? (사실, 미국 통계로 볼 때, 간통의 경우 교회 안과 밖이 거의 차이가 없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나라 교인이라고 해서 그보다 더 나은 결과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2015년에 왜 헌법재판소는 간통죄를 폐지했을까? 몇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핵심적인 것은 성(性)은 사적인 것이고 개인의 선택이기 때문에 개인의 성적 자기 결정권은 사생활의 영역이며 국가는 개인의 사생활의 자유를 침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개인이 성행위를 누구와 어떻게 하든 타인에게 일정 정도 이상의 피해를 입히지 않는 한 국가가 개입할 수 없는 개인의 영역이라는 것이다. 그 원칙이 동일하게 복사되어 적용될 수 있는 것이 바로 동성애이다. 성이 개인의 선택이기에 그 누구를 대상으로 해야하는지를 국가가 개입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대상이 이성이든 동성이든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바로 개인이지 국가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간통죄 폐지와 차별금지법 내의 동성애 차별 금지는 완전이 동일한 원칙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왜 간통죄에는 아무 말 없던 기독교인들이 동성애에는 이렇게 난리를 치면서 반대하고 악마화하는 것인가? 도대체 왜?

제발 오해 없기를... 나는 동성애를 반대한다. 그리고 헌법재판소 결정의 기반인 '성적 자기결정권'은 어느 정도는 개인에게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전적으로 사적인 영역에 속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성행위는 지극히 사적인 면도 있지만 동시에 사회적이고 공적인 면도 있다. 만약 전적으로 사적인 영역에만 속한다면 아버지와 딸이 완전한 상호 동의와 합의 하에 성행위를 하는 것, 나아가 그들이 결혼하는 것을 막을 법적 근거가 없다. 왜냐하면 그 둘의 성적 결합은 그들만의 사적인 결정이기 때문이고, 어느 누구도 피해를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현재로는 아버지와 딸의 성적 결합 및 결혼을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라 믿는다. 그 이유는 그것이 허용될 경우 사회 근간이 흔들리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성행위는 개인적 차원에만 마물지 않고 어떤 면에서는 지극히 사회적이고 공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행위에는 국가가 개입할 수 없는 부분도 있지만 개입해야 하는 부분도 있다. 그렇기에 포괄적차별금지법에서 보호하려는 동성애 역시 전적인 개인의 선택으로 인정할 수 없는 부분이 있으며, 그렇다면 사회가 그에 대해 어떻게 합의할 것인지라는 과정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적어도 내 개인적인 판단으로는 아직 우리 사회가 동성애를 전적으로 합법화하는 것에 대해 충분한 논의와 협의가 있지는 않다고 생각해서 그 조항에 반대한다.

단,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하나님의 뜻'을 내세우는 자들의 편협함과 무식함과 아집이다. 제발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을 함부로 쓰지 말기를 바란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을 쓰려면, 자신이 정말 자신의 모든 지식과 뜻을 하나님 앞에 내려 놓고 그분의 뜻만을 여과없이, 가감없이, 통으로, 완전하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점검해 봐야 한다. 그리고 그분의 뜻에 자신도 완전히 복종할 준비가 되어야 한다. 비록 그분의 뜻과 내 생각이 다를지라도...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주변 사람들과 사회에 들고 나갈 때는 내가 성경 전체의 맥락에 부합하게 사용하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하며, 전략적으로 극히 제한된 시간 동안 한 쪽에 집중하는 경우는 불가피하더라도 다른 중요한 것들에 대한 신경을 쓰지도 못할 만큼 과하게, 오랜 기간 치우치지는 않는지 늘 스스로를 점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칫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신성모독죄를 범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것은 참으로 무거운 범죄이다. 차별금지법에 집착하는 일부 교인의 작금 행태가 바로 그것에 해당한다.

기독교인의 포괄적차별금지법에 대한 반감에 대하여... (1)

(혹시 이 글에 반대하시는 분은 댓글로 그 이유를 사실에 입각해서 논리적으로 반박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런 글은 언제든 환영합니다. 다만 사실에 입각해야 하기 때문에 먼저 사실여부를 확인해 주시고, 또한 논리적 비약이 없어야 합니다. 만약 사실에 입각하지 않거나, 논리적 비약이 너무 심하거나, 욕설이 있는 댓글은 그냥 삭제합니다.)

주일에 예배드리러 교회에 간다. 예배 중에 대표기도를 드릴 때, 자주 언급되는 것이 바로 '포괄적차별금지법'이다. 기도문에서 그 법을 언급되는 것을 들을 때마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 기도를 하는 사람이 거의 항상 그 법을 반성경적인 법으로 규정하고 그 이면에는 그 법을 입안하고 통과시키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에 대한 증오와 그들을 악마로 보면서 동시에 이 법이 우리 사회를 무너뜨릴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느낀다. 사실, 이 법에 대해서는 일부 교수들 사이에서도 이미 많이 회자되었던 것이고, 이 법을 반대한다는 교수 모임으로부터 서명에 동참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나도 서명에 참여한 적도 있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차별을 찬성하는 사람은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법에 교회 내에서 격렬한 저항을 직면하고 심지어 악마화된 이유는 그 안의 독소조항 때문이라고 알고 있다. 바로 동성애에 대한 부분이다. 그것을 제외한다면 교회 내에서 그런 격렬한 저항이 있을리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성경을 꾸준히 읽고 공부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노력하는 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성경의 가르침은 동성애를 금지하고 있고 동성애는 하나님의 뜻에 반한다고 나는 믿는다. 이는 믿음의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내 지적인 차원에서도 동일한데, 지금까지 동성애를 지지하거나 동성애에 대한 책들과 자료들을 읽어보고 동성애 지지자들과 대화를 나눠봤지만 기존에 내가 가지고 있었던 반대 의견을 바꿀만큼 설득력 있는 주장을 아직까지는 접하지 못했다. 그래서 동성애에 동의하지 않고, 그것을 합법화하는 일체의 법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내 개인적인 견해임을 우선 분명히 해 둔다.

하지만 교회 내에서 언급되고 있는 포괄적차별금지법에 대한 기독교인의 반대는 교회 안에서 뿐만 아니라 국가적으로 큰 문제를 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 그 이유는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이 법에 대한 반감이 모든 다른 이슈를 무력화시키는 블랙홀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이 법이, 그리고 이 법만이 나라의 운명을 결정한다고 믿어버리는 듯, 이 문제에 과도하게 집중하는 기독교인을 보면서 우려가 앞선다. 그리고 그들의 그런 처사는 합리적이지도 않고 성경적이지도 않다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에는 참으로 다양한 이슈가 있다. 그 모든 이슈들이 다 중요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매우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이슈들이 있다. 고령화, 빈부격차, 청년 실업문제, 부동산 문제 등등 일반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이슈들이 있고, 이 이슈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입법부와 행정부가 어떻게 문제를 풀어가는지 관심을 가져야 한다. 또한, 성경적으로 보더라도 그렇다. 하나님의 뜻은 동성애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동성애를 막는다고 하나님의 뜻이 완전히 이루어지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나라가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동성애만이 성경적으로 중요하고 긴급한 이슈도 절대 아니다. 따라서 동성애라는 렌즈만으로 사회를 바라보고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려는 단순무식한 사고는 절대적으로 지양해야 한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과도하게 차별금지법에 집중한 일부 기독교 목사들과 교인들은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있다.

동성애 외에도 중요하고 긴급한 이슈가 많다. 예를 들어 윤석열 대통령과 그 부인 주변에서 드러나고 있는 무속인들의 농간을 보라. 그것이 얼마나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며, 사회를 휘청거리게 하고 있는지 아는가? 성경에서 볼 때 무속인에 대한 것과 동성애에 대한 것 중에서 하나님의 진노가 어느 것에서 더 크게 드러나 있는가? 둘 사이에 우열을 가릴 수 있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동성애만큼이나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는 것이 바로 무속인들이다. 사무엘상에서 사울이 최종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사건이 무엇이었는가? 사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왕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그분을 의지하지 않고 병사들의 사기진작을 위해 제사장도 아닌 자신이 직접 하나님께 제사를 올림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기 시작했고 그 후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그 버림받음이 확정되었지만, 그것의 종지부는 사무엘상 28장에서 자신의 불안함과 두려움을 극복하려고 엔돌의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는 것에 있었다. 사울은 참으로 딱하고 하나님의 뜻을 잘 모르는 죄악된 왕이었지만, 그조차도 이스라엘에서 무속인을 완전히 제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라는 것을 알 정도로 하나님은 무속에 대해 진노하신다.(레19:31, 20:6, 27, 신18:10~12, 삼상15:23)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이라면 그런 하나님의 진노와 같은 마음을 무속인과 무속행위에 대해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그런 그 무속에 둘러싸여있고 그것을 추종하며 그것으로 국가의 중요사를 결정했던 대통령과 그 부인과 그 주변 세력이 눈 앞에 있는데도, 한국 교회와 기독교인이 보이는 지금의 반응은 어떤가? 개 교회 안에서, 그리고 교인들이 속마음으로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공개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듯 침묵한다. 그리고는 2024년에 "회의결과 임기만료폐기"된 차별금지법에만 온통집중하여 그것이 악 중의 악으로서 그것으로 사회가 당장 무너질 악이라는 듯 떠들어댄다. 이 간극을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하나님의 교회이고 하나님의 뜻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동성애에 반대하는 그것만큼 무속에 의지하는 대통령과 그 주변인들에게 반대해야 맞는 것 아닌가? 그런데 왜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는가? 그렇다면 동성애에 대한 반대가 정말로 순수하게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충성의 결과라고 해석할 수 있을까? 혹은 내 주변에서 차별금지법에 대해 열띠게 반대의견을 내놓은 자들이 대부분 윤석열 정부를 맹목적으로 지지하고 민주당을 악마화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하나님의 뜻은 구실에 불과할 뿐 다른 것이 본질적인 동인(動因)인인 것은 아닌가? 그것이 아니라면, 동일하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고 볼 수 밖에 없는 대통령과 그 주변인에 대한 맹목적인 지지나 미온적인 태도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것 뿐만 아니다. 적어도 내가 읽은 성경에서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에 대해서 하나님이 가지시는 관심은 무속이나 동성애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크시다. 현대식으로 말하면 빈부격차와 정의실현에 대한 것이다. 그것에 대해 교회가 동성애 이상으로 목소리를 내고 있는가? 현대판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에 대한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 모두 포함한 정부의 태도에 대해서 강하게 질책하고 있는가? 예배 때 대표기도할 때마다 부르짖고 있는가? 그 외에도 동성애 만큼 중요하고 절박한 이슈가 얼마나 많은가? 그것들에 대해서 최소한의 관심이라도 가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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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앞 탄핵 집회에 모인 젊은이들을 보며

(혹시 이 글에 반대하시는 분은 댓글로 그 이유를 사실에 입각해서 논리적으로 반박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런 글은 언제든 환영합니다. 다만 사실에 입각해야 하기 때문에 먼저 사실여부를 확인해 주시고, 또한 논리적 비약이 없어야 합니다. 만약 사실에 입각하지 않거나, 논리적 비약이 너무 심하거나, 욕설이 있는 댓글은 그냥 삭제합니다.)

지난 12월 국회 앞 탄핵집회, 1차와 2차 탄핵이 있었던 두 토요일에 국회 앞으로 갔다. 끊임 없이 몰려드는 인파들, '윤석열 탄핵'을 외치는 군중 속에서 미약하나마 내 몸과 목소리를 더했다. 그것이 역사에 남을 이 시기에 내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몸부림이었다. 80년대 수 많은 집회에 참여하고 지켜봤던 사람으로서 그 집회에서 내가 본 특이한 점은 젊은이, 특히 젊은 여성이 그 누구보다도 적극적이었고 열정적이었다는 것이다. 언론에는 20대, 30대만 주로 언급했지만, 내가 직접 본 것은 10대 중반과 후반의 너무나 어린 학생들이 참 많이 함께 했다. 이 추운 날, 그들을 이 광장으로 이끈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들이 신기하면서도 대견했고, 고마웠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씁쓸함도 있었다. 교회에는 왜 이 많은 젊은이가 보이지 않는가? 교회는 왜 이들을 품지 못하는가? 이 엄동설한에 이들이 이렇게 많이 모였는데, 교회에는 왜 이들이 그렇게 보기 힘든가?

고민이다. 그리고 그 원인은 참 여러가지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원인은 교회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밖, 그리고 그 젊은 층에게도 있을 수 있다. 이에 대해 그날, 그리고 그 후에 곰곰히 생각하면서 나에게 떠오른 그 원인 중 하나는 바로 'relevance'의 결여이다. 탄핵 집회에 그 많은 젊은이들이 모인 것은 그 이슈가 자신의 삶과 깊은 연관을 갖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젊은층의 삶과 고민과 생각 속에 깊이 파고들지 못하고 겉도는 교회의 메시지와 기성 교인들이 보여주는 구태가 그들을 교회 밖에 머물거나 심지어 교회 밖으로 튕겨 나가게 만든다. 교회는 그들의 문제와 질문에 답을 할 능력도 의지도 없기에 그들의 삶에 아무런 관련이 없어보이고, 그대신 시대에 뒤떨어지는 구태의 작태를 보이는, 좀 꺼려지는 집단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것의 큰 원인은 교회가 제공한다. 예를들어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탄핵 시국에도 사회 이슈에 입을 닫는다. 그것은 전에 세월호 비극이 있었을 때도 그랬다. 전 국민이 트라우마를 겪은 거대한 비극 속에서 깊은 상처를 받고 아픈 마음을 움켜쥔 국민들에게 교회는 위로의 메시지를 전하지 못했다. 그들은 대부분 침묵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는데 왜 그런 비극이 있는지에 대해서 아무말도 못하거나 (내가 보기에 전혀 성경적이지 않은) 아무말이나 막 던져 상처를 더 깊게 만들었다. 진보든 보수든 상관 없이 젊은이들 뿐만 아니라 수 많은 교인들이 너무나 충격을 받고, 그것에 대해 아파하고 궁금해 하고 있는데도 교회는 일절 언급하지 않는다.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듯 평온하게 지나간다.

물론 그 이유는 충분히 이해한다. 목사가 어떤 말이든 꺼내는 순간 교인들은 분열되고 시끄러워지기 때문에 그것이 두려워서 아예 언급하지 않는 것이다. 아무리 불의가 있어도 그것이 교회를 시끄럽게 할 것이라 판단되면 침묵한다. 예전에 이스라엘 사회에 두렵고 엄위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없이 선포함으로써 미움을 받고 죽임을 당했던 선지자는 현대 교회 안에서 찾아볼 수 없다. 하나님의 뜻보다 사람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는 목회자의 사정을 교인들도 그것을 잘 이해한다. 목회자와 교인들 사이에는 암묵적인 계약이 맺어져 있다. 일부 눈치없는 교인들을 제외하고는 그들도 교회 안에서는 침묵한다. 가장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교회 안에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교인들은 배운다. 그리고 교회 밖에서 그들은 속마음을 꺼내 놓고 세월호에 대해서 말을 하거나, 국회에 의해 탄핵된 대통령을 욕하거나 옹호한다. 지금 이 시국에 가장 중요한 것은 교회에서 말할 수 없다. 교회에서는 아무 일이 없는 것처럼 평안한 얼굴을 하고 만면에 미소를 띄고 그저 적당하게 예의를 차리고 아무일 없는 듯이 평온한 얼굴로 '집사님, 목사님, 장로님' 운운하면서 피상적인 말만 주고 받는다.

사실 그것 뿐만 아니다. 교회에서는 자신의 진짜 중요한 기도제목은 내놓지 못한다. 대부분의 교인들은 그것이 가십거리가 되어 수많은 교인들의 입에 회자되며 수근수근 대는 사람들의 먹잇감이 될 뿐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이는 내가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서 한국 교회에 다시 적응하면서 교인들에게 들으면서 느낀 가장 충격적인 것 중 하나이다. 그들에게 진짜 중요한 것은 교회 밖에 있는 마음을 터 놓을 수 있는 친구나 가족에게 말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어쨌든 교회는 내 삶에 가장 중요한 부분을 드러내 놓지 못하고, 내가 너무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회 이슈에 대해 어떤 말을 듣기가 어려운 곳이 되어 버렸다. 궁금한 것이 있는데, 그에 대해 성경적 해석을 듣고 싶은데, 그 누구도, 심지어 목사도 답을 주지 않는다. 교회가 '의미'와 '해석'을 포기하다 보니 어찌보면 교회는 세상 밖의 각종 모임보다도 못한 곳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내가 몇몇 교회에서 경험한 소그룹 모임에서는 그저 이런저런 사소한 대화거리, 심지어 연예인 뒷담화가 대화의 중심이 되는 경우를 많이 봤다. 하나님만 바라보고, 믿음을 지키며, 교회가 예수님의 몸이기 때문에 좋든 싫든 그 지체가 되어야 한다는 강한 사명감이 있는 젊은이가 아니라면, 그런 교회를 왜 다니고 싶어할까? 교회 밖에는 훨씬 더 재미있고, 의미있고, 좋은 모임들이 많은데?

십자가 복음의 본질을 잃어버린 교회, 일년 내내 설교를 들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지나가는 말로라도 언급조차 하지 않는 빈 껍데기가 되어버린 교회, 그리고 그 십자가의 메시지를 중심으로 사회를 해석하고 판단함으로 성도에게 의미를 주지 못하는 교회는 지금 상태 그대로라면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젊은이들에게 매력적일 수 없고, 그들이 엄동설한에 시간을 내서라도 나가야 하는 그런 곳이 될 수 없다. 세상이 절대로 줄 수 없는 것,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에 교회가 집중하며 그것만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목숨을 걸고 매달리지 않는다면, 그리고 지금처럼 십자가가 설교 중에 지나가면서 가끔 한 번씩 언급하는 주변부의 장식에 불과할 뿐 십자가 위에서 독생자를 내어 주신 하나님께서 세상과 그안에서 벌어진 큰 일에 대해 말씀하시는 뜻을 옛적의 선지자가 그랬듯 추상과 같이 과감하게 지속적으로 끈질기게 선포하지 않는다면, 교회는 젊은이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고 그들을 붙잡을 수도 없다. 그 어줍잖은 도덕율이나 처세술 강의나 이런저런 entertaining으로는 어림도 없다. 그 이유는 그런 것들에 있어서 교회는 세상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등하기 때문이다. 그것으로는 승부가 되지 않는다.

교회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땅의 젊은이들 뿐만 아니라 그 어떤 사람도 그 실존의 핵심에 가 닿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십자가의 복음 뿐이라는 사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피 흘리심으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죽음을 이기셔서 우리에게 구원이 되셨다는 이 진리는 아무리 아무리 아무리 아무리 아무리 아무리 많이 그리고 자주 들어도 질리지 않은 하나님의 메시지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설교는 어떤 본문을 설교하든 반드시 그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십자가에 세상을 살아가는 방향과 방법, 힘, 지혜가 담겨있다. 따라서 십자가의 은혜가 빠진 설교는 사실 설교가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탄핵 이슈 뿐만 아니라 그 어떤 것보다도 모든 인간의 삶에 깊숙하게 'relevance'가 있어서 세상의 모든 일이 그 안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해석될 수 있고,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이 그 안에 있기 때문에, 누구든 그것을 무시할 수 없고 이끌릴 수 밖에 없다. 날씨가 아무리 추워도, 거기가 아무리 멀어도, 삶이 아무리 힘들고 바빠도, 그곳으로 갈 수 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다. 예수님 이후 교회의 역사가 그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교회는 왜 그것을 모르는가? 왜 그것을 잊어버리고 비본질적인 것을 설교하고 비본질적인 것으로 교회를 가득 채우는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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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롬 13:1-2)
 
위의 성경 말씀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보낸 사도 바울의 편지에 있는 내용 중 일부이다. 여기서 "위에 있는 권세들"로 번역된 표현을 English Standard Version(ESV)에서는 "the governing authorities", 즉 다스리는(통치하는) 권위들이라고 번역했다. 당시 로마에 있던 성도들은 이를 무엇으로 받아들였을까? 당시 로마 황제를 비롯한 정치적 권력자들과 그들로부터 그 권한을 위임받은 자들에게 복종하라는 말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을까? 어쨌든 이 본문은 중세를 지나고 근세에 들어서면서 절대왕정 체제에서 왕권신수설의 근거처럼 활용되었다. 유럽의 절대왕정뿐 아니라 우리나라가 속한 아시아에서도 약간의 차이는 있었지만, 통치 권력은 왕에게 집중되어 있었고, 왕권은 입법, 행정, 사법을 모두 아우르는 거의 절대 권력으로 인정되었다. 그런 맥락에서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내이 곧 국가다"라는 발언을 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런 왕이 있는 정치체제인 왕정에서 "귀에 있는 권세들"은 왕권과 그 왕권의 위임을 받아 다스리는 관료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민주공화국 체제에서 우리가 "굴복"해야 할 "위에 있는 권세들"은 누구 혹은 무엇을 의미할까? 일부 기독교인이 (물론 누구냐에 따라 입장을 손바닥 뒤집듯 쉽게 바꾸긴 하지만) 떠받드는 대통령을 의미하는 것일까? 간단히라도 이에 대해서 살펴보기 위해서는 민주공화정 체제에 대해서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근대에 민주공화정을 국가 시스템으로 채택한 최초의 국가는 미국이다. 미국는 1776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후 신생 국가를 설립하면서 정치체제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한 끝에 민주공화국을 선택했다. 주지하다시피 미국의 건국 조상들이 민주공화국을 선택한 데는 왕의 독재에 대한 반감과 두려움이 자리잡고 있었다. 물론 그들이 두려워했던 것은 그 뿐만 아니라 무지한 일반 백성들이 국가 운영에 참여하는 것도 있었지만, 그것은 차후의 문제였고, 가장 중요했던 것은 한 사람이 과도한 정치적 권한을 갖는 것이었다.

그 두려움으로 인해 그들은 당시 영국을 제외한 유럽에서 널리 인정받아왔던 왕권신수설에 기반한 일인 독재 체재인 왕정을 과감히 버리고, 정치적 권력은 사회를 구성하는 사회 구성원의 합의에서 나온다는 사회계약설을 기반으로 민주공화정을 채택했다. 사회계약설에 따르면 모든 정치 권력의 현실 구현(embodiment)은 한 인간인 왕이 아니라, 국민의 합의가 명문화된 헌법을 통해 이루지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절대왕정 시대의 왕/황제 자리에 지금은 헌법이 있다고 봐야 한다. 물론 그 헌법은 국민 합의의 결과이기 때문에 그 합의가 변경되면 그에 따라 변화될 수 있는 것이다.

미국의 건국 조상들은 헌법을 절대적인 위치에 두었고(그리고 그 전통은 지금까지 이어진다. 미국 국민들에게 가장 신성한 문서는 헌법이다.), 다른 모든 것은 그 아래에 종속시켰다. 그 헌법이 사회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되기 위해 크게 세 개의 권력을 분산해서 배치했는데, 그것이 의회, 대통령, 법원이었다. 미국 헌법 조문을 잘 살펴보면 건국 조상들이 그 세 하위 권력 기관 중 어느 것에 가장 비중을 두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 셋 중에서 가장 앞에서 다루고 그 내용도 가장 길게 다룬 기관은 바로 의회이고 그 의회에 가장 큰 권력을 주었다. 하지만 그들은 의회에만 모든 권력을 주지 않았고, 그것을 분산시키고, 상호간 서로 침범할 수 없게 하면서도 어느 정도는 상호 견제가 가능하도록 했다. 따라서 공화정 체제 하에서는 그 세 권력 기관 중 그 어느 곳도 절대적인 권한을 가지지 못한다. 다시 말하면 의회와, 대통령, 사법부는 헌법이라는 절대적 권위를 가지는 현대적 의미의 왕 아래에 있는 신하에 불과한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대통령은 예전의 국왕의 자리에 있는 존재가 절대 아니다. 대통령은 헌법이 정한 테두리 안에서만 권력을 행사할 수 있을 뿐, 그것을 넘어선다면 그것은 절대 권력자인 헌법을 침해하는 것이고, 그것은 반역이고 반란이다. 대통령 뿐만 아니라 세 권력 기관 중 그 어느 누구도 헌법이 정한 테두리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 그것이 바로 근대 사회에서 최초로 민주공화국을 건설한 미국 건국 조상들의 의도였다.

이후 유럽에서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정이 건설되었을 때, 각국의 사정에 따라서 어느 정도의 변용은 있었지만, 헌법의 절대적인 위치, 그리고 그 아래에 분산된 권력구조는 거의 모든 공화국이 공유하는 가치가 되었다. 우리나라는 대체적으로 영미법 체계보다는 유럽의 대륙법 체계를 따랐고 민주공화정을 체택한 나라 중에서 대통령의 권한이 특별히 큰 축에 속한다고 하지만, 기본적인 헌법의 구조와 정신은 미국의 헌법 정신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헌법이 개정될 때마다 대통령의 권한은 축소되고 견제의 대상이 되어왔음은 분명하다. 따라서 우리 나라에서도 그 어느 것보다 헌법은 절대적 위치를 차지하며 대통령을 포함한 모든 것은 헌법에 "굴복"해야 한다.

나는 대한민국의 국민이긴 하지만 그 전에 그리스도인으로서 헌법이 최고의 절대적 위치에 있다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분명히 하나님의 법이 그 헌법보다 더 위에 위치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법을 명백히 위반하는 헌법 조항이 있다면 나는 그 헌법 조항을 준수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로마에게 편지를 보냈던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당시 로마 정부의 모든 명령을 맹목적으로 100% 준행해야만 한다고 가르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헌법과 법률이 '명백하게' 하나님의 뜻을 '정면으로' 거스르지 않는 한, 모든 그리스도인은 (대통령 혹은 특정 정치인이 아니라) 헌법의 권위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사도 바울은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현재 대한민국의 6공화국 헌법 조항 중 성경의 가치를 정면으로 위반한 조항은 없는 것으로 아는데,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모든 그리스도인은 헌법의 절대적 가치를 인정하고 따르고 그것을 수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바로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다. 그런 맥락에서 만약 대통령이 그 헌법에 위반하는 행위를 했다면, 그 대통령을 따르거나 엄호함으로 헌법의 권위에 저항하는 그리스도인은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법적인 문제일 뿐 아니라, 적어도 그리스도인에게는 종교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위 그리스도인이라는 자들이 헌법을 위반한 대통령을 막무가내로 지지하고 옹호하고 있는 것은 보면서 참으로 안타깝다. 제발, 하나님에 대한 반역적 행위를 멈추고, 자숙하기를 바란다.

p.s.: 사실, 그들이 자신들이 지지하지 않는 대통령을 무참하게 비난하고 비판하고 무시하는 그 태도에서 그들의 자의성과 위선이 여실히 드러난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그분께 복종하기보다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구실로 편견과 아집에 기반한 자신의 욕망을 관철시키키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대단히 역겹다.

기독교? 혹은 개독교?

 [38] “You have heard that it was said, ‘An eye for an eye and a tooth for a tooth.’ [39] But I say to you, Do not resist the one who is evil. But if anyone slaps you on the right cheek, turn to him the other also. [40] And if anyone would sue you and take your tunic, let him have your cloak as well. [41] And if anyone forces you to go one mile, go with him two miles. [42] Give to the one who begs from you, and do not refuse the one who would borrow from you. (Matthew 5:38–42 ESV)

언젠가 TV에 출연한 전직 대법관의 말이 내 가슴 속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 그분은 민사소송 전문 판사로서 대법관까지 오른 탁월한 분인데, 그분의 말이 민사소송에서 내가 조금 손해봤다고 느낄 때가 객관적으로 양측이 공평한 지점이라는 것이다. 내 측에서 볼 때 손해도 아니고 이익도 아니고 그냥 평균정도의 결과를 가져오는 판결이라면 상대측에서는 상당히 손해를 본 불공정한 판결이라고 느낀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공평한 판결을 했을 때 양쪽에서 느끼는 것이 x값의 손해라면, 한쪽이 평균정도의 결과라고 느낄 때 상대편은 원래의 x에 더하여 상대가 당연히 느꼈어야 할 또 다른 x만큼의 부당함을 느끼게 되어 2x의 손해를 본 것으로 느낄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매우 손해봤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분의 말은 나로 하여금 기독교인을 대하는 사회의 평가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더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기독교인이 아니라 하더라도 상대와 갈등해결 시 약간 손해봤다는 느낌을 주는 결과가 객관적으로 볼 때 양측에 공평한 결과라고 할 때, 이 사회가 오래 전부터 가져온 종교인, 특히 기독교인에 대한 기대가 더해지면 어떨까? 비기독교인들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의 가르침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파편적으로나마 주워들어서 아는 것이 있고, 또한 종교인 일반에게 가지는 의도치 않은 기대감은 양측의 갈등 상황에서 상대인 기독교인에서 더 큰 희생을 기대하는 마음을 자연스럽게 갖게 만든다. 따라서 이런 경우에 내가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x값 만큼이 아니라 x+y(혹은 xy)값 만큼 추가로 손해를 봤다고 느낄 때 조차도 상대는 x값 만큼 손해봤다고 느낄 공산이 크다. 일반 상황에 비해서 나에게 덤으로 부과된 y값 만큼의 손해감은 기독교인인 나에 대한 상대의 기대치의 크기이다. 기대가 크면 y값이 커져서 나에게는 손해감이 그만큼 더 커지지만, 상대는 그것이 당연한 것으로 느껴져, 오히려 본인이 x만큼 손해 봤다고 여기는 것이다.

   여기서 내가 교회의 일반 평신도가 아니고 목사, 장로, 안수집사 등의 직책을 맡고 있는 사람이라면 y값은 평신도에 비해 매우 커질 수 밖에 없다. 그런 경우에는 내가 매우 매우 큰 손해를 봤다고 하더라도, 상대는 여전히 자신이 x만큼 손해봤다고 느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일반 평신도, 더구나 교회 직분을 가진 사람이 상대방으로 하여금 이익을 봤다고 느끼게 하지는 못하더라도 손해보지는 않았다고 느끼게 하려면 2x+y(혹은 2xy)만큼의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큰 손해를 감수하는 것도 비기독교인들에게 그저 간신히 욕을 얻어먹지는 않는 정도일 뿐, 그들로부터 칭찬을 듣거나 존경을 받을 수는 없다. 만약 긍정적인 평가를 얻기 위해서는 거기에 +a의 추가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 +a의 크기와 긍정적인 평가가 비례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것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기독교인의 갈등 공식이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장에서 악한 자에게 저항하지 말고 오른뺨을 맞으면 왼뺨을 갖다대고, Tunic을 뺏으려 하면 Cloak도 주라고 하신 이유는 바로 이런 세상의 공식을 생각하셨기 때문이 아닐까? 세상(악한 자)으로부터 매우 큰 부당함을 받는다고 느끼는 것은 기독교인이고, 그들이 그렇게 느꼈을 때 최대한 손해를 감수할 각오를 해야 한다고, 그래도 세상의 좋은 평을 듣지 못할 때가 많겠지만, "개독교"라 욕은 얻어먹지 않을 수 있고, 예수님의 존함과 얼굴에 먹칠하지 않는 기독교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기독교인의 갈등 공식이 이럼에도 불구하고, 사회 생활을 하면서 목사와 장로, 안수집사들을 포함한 기독교인들은 손톱만큼도 손해볼 생각이 없어 보이고 당연히 감수해야 하는 x 정도의 손해를 봤다고 느낄 때는, 세상의 모든 십자가를 자신 혼자 지고서는 성인(聖人) 수준의 대단한 믿음을 가진 자인 양 호들갑을 떤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에는 털끝 만큼의 희생을 감내하려 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들이 자신의 것을 챙기기는 과정에서 상대에게 최대한의 손해를 떠넘기려 하는 시도 가운데 보여주는 추태의 정도가 세상 사람들보다 월등히 더 크다는 것을 많이 경험한다. 그리고 그런 추태는 목사를 비롯한 소위 교회의 지도자들일수록 더한 경우가 많다. 기독교인들이 그저 일반 비기독교인들 정도의 양심만 가져도 정말 고마울텐데, 그들보다 양심이 턱없이 부족하고, 거기에 더해 성경이나 자신의 신앙지식으로 자신의 더러운 추태를 미화시키고 정당화하는 것은 정말 탁월하다. 그것으로 인해 양심은 화인을 맞았고, 얼굴을 철판을 깔아 온갖 추악한 짓을 다 하면서도 거룩한 척, 목사요, 장로요, 안수집사, 기독교인으로 대접은 다 받으려고 고개를 뻣뻣이 들고 다닌다.

   그런 그들은 자신들이 바로 "개독교"라는 세상의 평가를 유발하는 주요 장본인들이며, 자신들이 우리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땅에 내동댕이 치고, 예수님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자들이라는 것을 신경이나 쓸까? 그저 끝없는 욕망과 욕심의 노예가 되어 기독교와 예수를 방패와 부적 삼아서 세상을 향해 흔들어 대며, 자신들은 종말에 임할 하나님의 엄위하신 진노를 피할 수 있는 면벌부를 받은 듯 이 세상에서 득세하고 저 세상에서 천국의 특권을 누리겠다고 가없는 영적 탐욕의 더러운 수렁에 뒹굴거리는 돼지같은 존재들일 뿐이라는 것을 그들은 알까?

Everyone to whom much was given, of him much will be required, and from him to whom they entrusted much, they will demand the more. (Luke 12:48b ESV)

   예전에는 멋모르고 교회에서 여러 직분을 맡았었지만, 요즘은 교회에서 지도자 혹은 직분자에게 주어지는 무게가 너무 두렵기 때문에 '서리집사'를 포함한 일체의 직분을 거부하며 지극히 작은 평신도로 살아간다. 그리고 그 평신도의 무게도 너무 버거워 하나님께 그 무게를 견딜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그리고 언젠가는 2x+y+a(혹은 2xya)의 손해, 혹은 그 이상의 무게도 감당할 만한 겸손과 희생과 순종과 결단을 달라고 기도한다.

   진정... 절대로 절대로 내 눈 앞에 보이는 수 많은 영적 돼지들과 같이 되고 싶지 않다.

코로나 시대의 기독교

 코로나(COVID-19)로 인해서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온 세계가 고통을 겪고 있다. 21세기가 들어서면서 새로운 세기에 대한 전망 중에서 두 가지가 눈에 띄였는데 한 가지는 바이러스와 박테리아에 의해서 인류가 큰 위협을 받을 것이라는 전망과 21세기는 종교의 세기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었다. 적어도 전자는 이미 현실로 드러났고(앞으로 더 독한 것들이 와서 인류를 위협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후자는 예상치 못한 의미에서,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일부 맞아들어가고 있다.

최근 광화문에서 있었던 집회의 주축이 사랑제일교회이고 그 교회의 담임목사인 전광훈 목사가 중심을 이룬 (건전하지 못해 보이는) 보수단체들의 집회가 있은 후 코로나 사태가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개신교의 이름으로 자행된 집회 참가자들과 그들의 리더들의 행태는 나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의 분노와 반감을 자아내고 있다. 정부는 이들의 무모함과 위험한 행동에 대처하느라 너무나 많은 수고를 하고 있다.

이런 개신교 일부의 행태를 보면서 대부분의 교회와 리더들, 교인들은 그들에 향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심지어 손가락질하고 비난을 서슴지 않는다. 마치 "그들"과 "우리"는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하지만 조금만 더 들여다 보면 그 둘이 결코 다르지 않은 한 몸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며칠 전 대통령과 회동을 한 소위 개신교 리더들이라고 하는 자들의 일부가 정부의 방역 방침을 반대하는 듯한 목소리를 내고 자신들을 사업자 취급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한 좋은 예인 것이다. 코로나 상황이 얼마나 엄중한 상황이고, 자신들의 종교 집회 행위가 이웃과 사회에 얼마나 큰 해를 끼칠 것인지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이기적인 기독교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개신교 교회와 교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정부의 방역지침을 잘 따르면서 협조하고 있다. 그리고 문제 많은 개신교에 대해서 개혁의 목소리를 꾸준히 내는 사람들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광화문 집회 참가자들이 독버섯과 같은 존재들이라면, 한국의 평균적 교회의 풍토가 그 독버섯이 잘 자랄 수 있는 토양을 제공했다는 것이 내 의견이다. 이런 면에서 "그들"과 "우리"를 나누면서 한 발 빼려고 하는 교회 지도자들과 교인들의 행태는 꼬리자르기식의 대처일 뿐, 언제든지 제2, 제3의 광화문 집회자들을 양산할 수 있다. 개신교는 그들의 모습의 자신의 민낯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받아들이고, 철저한 자기개혁을 시작해야만 독버섯이 자랄 수 없는 토양으로 완전한 기경이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기존의 개신교회의 어떤 특징들이 이런 독버섯이 자랄 토양이 되었는가? 첫번째는 반지성주의이다. 이 전의 글에도 강조한 것으로 기억하는데 루터의 종교개혁의 핵심 중 하나는 성경이다. 성직자만 읽을 수 있었던 성경을 일반 성도들에게 돌려주는 것, 그래서 그들이 성경을 직접 읽고 묵상하고 연구하도록 하는 것이 종교개혁의 핵심 중 하나다. 하지만 현재의 개신교인들 중에서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은 물론 읽기라도 하는 사람은 찾아 보기가 매우 드물다. 교회는 그것을 강조하지 않으며 많은 경우 오히려 그들을 성경으로부터 떼어놓는다. 그저 목회자가 설교를 통해서 전하는 것 정도면 충분하다고 여기게 만든다. 여기에는 교인들을 목회자에게 의존하고 종속되게 만들고자하는 매우 불순한 의도도 숨어있다고 확신한다. 성경을 열심히 읽는 성도들은 교회 안에서 목회자에게 매우 부담스러운 존재이며 그들이 성경을 바탕으로 목회자에게 반대하거나 반발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오히려 성경에 대해서 철저하게 무지한 가운데, 목회자의 말을 하나님의 말로 여기고 무조건 "순종"(나는 맹목적인 추종이라고 부르고 싶다)하는 교인들을 선호하기에 성경은 이미 대부분의 일반 성도들로부터 멀어져 있다. 따라서 그들은 성경을 기준으로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자신의 판단이 없고 목회자가 옳다고 말하는 대로 끌려가게 되어 있다.

반지성주의는 일반 성도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요즘 신학교에 진학하는 사람들이나, 신학교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이 가지는 지적인 열등감(혹은 열등함)도 큰 몫을 차지한다. 목사나 신학생들이 지적으로 매우 무식하다. 최근 지적 흐름에 대해서 토론하거나 반박할 능력을 가진 자들이 몇이나 될까? 많은 경우 그들은 지적으로 성숙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 그리고 소위 "목회활동" 중심이기 때문에 앉아서 성경을 깊이 연구할 틈도 없고, 노력도 하지 않는다. 성도가 무지하기 때문에 목회자가 어느 정도 무지하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교인들은 설교 단상에서 선지자적 목회자를 좋아하지 않고 엔터네이너를 더 사랑한다. 입담 좋은 이야기꾼에게 귀를 기울이지 죄와 회개를 지적하는 통렬한 설교는 부담스러워 한다. 따라서 많은 목회자들은 지적인 성숙과 성경연구에 노력과 시간을 투자하지 않는 가운데 자신도 반성주의적 존재가 되어간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 처한 교회가 한국에 얼마나 많은가?

두 번째는 앞에서도 설명했듯, 목회자에 절대복종하는 교회 풍토, 그리고 수많은 교회 프로그램으로 성도들을 교회 중심으로 이끌어 들이는 교회의 행태, 이런 원인에 성경에 대한 무지를 더해 초래되는 교회 안에서의 생활과 교회 밖에서의 생활이 철저히 분리되어 있는 이런 상황이다. 개신교, 특히 장로교에서 목사는 장로들 중 한 명일 뿐이다. 장로들의 역할이 나뉘는데, 그 중에서 설교와 목회를 담당하는, 조금은 특별한 장로일 뿐이다. 하지만 현대 한국 교회에서 담임목사(다른 목사는 거의 무시된다)의 역할을 거의 하나님 수준이다. 담임목사에게 하는 것이 하나님에게 하는 것과 같다는 무언의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 (성경 어디에 그런 가르침이 있는지 모르겠다. 내가 아는 바로서는 내 주위의 작은 자에게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에게 하는 것이라는 가르침은 분명히 있다. 담임목사가 그 "작은 자" 그룹에 속하는지는 심히 의심스럽다.) 무지한 교인들이 담임목사를 하나님처럼 떠받드는 가운데 담임목사가 아무리 비이성적이고 불법적인 행위를 한다고 하더라도 교인들은 그를 따라간다.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크고작은 목회자의 비리와 부정과 불법을 교회가 떠안고 가는 것도 그 때문이다. 성도를 목회자의 추종자로 만들기 위해 교회는 많은 프로그램들을 돌리며 교인들을 교회 안에 묶어두려고 한다. 개신교의 교인은 세상에 파송받은 작은 목회자/선교사들이다. 그들이 있어야 할 곳은 교회가 아니라 세상 한 가운데이며, 거기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향기를 전하며 세상사람들을 섬기는 자들이다. 하지만 교회는 그들을 교회로 불러들이고 묶어놓는다.

세 번째는 교회의 정치 성향이다. 미국의 보수교회와 마찬가지로 한국의 교회는 기본적으로 보수주의다. 교회가 보수적인 것은 문제가 없다. 보수적인 것과 보수주의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한국의 교회는 보수적인지는 모르겠지만 정치적으로 편향된 것은 사실이다. 모든 교회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정치적이며, 정치적으로 특정 당, 특정 정치세력과 과도할 정도로 결탁되어 있다. 해방 전 우리나라 기독교의 중심이 평양이었고, 북쪽이 강했었는데, 공산화되면서 북한의 교회가 이루 말할 수 없는 잔인한 탄압을 받았고, 그 악몽같은 경험을 가지고 남쪽으로 내려온 기독교인들이 공산당에 대해서 반감을 가지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점에서 북한 공산당이 잘 한 것은 하나도 없다. 문제는 그런 경험과 박정희 시대에 권력과 결탁한 교회 지도자들의 결국 정치적으로 편향된 교회를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다. 교회가 세상의 모든 일을 판단하는 유일한 잣대는 성경이어야 한다. 보수주의나 진보주의가 아니라 성경주의여야 하며 성경적이어야 한다. 성경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은 때로는 극진보주의적인 모습도 보일 수 있고 극보수의 모습도 보일 수 있다는 말이다. 성경은 결코 진보주의이기만 하거나 보수주의이기만 하지 않는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하나님적일 뿐이다. 진보주의가 하나님적인가? 보수주의가 하나님적인가? 그런 면도 있고 그렇지 않은 면도 있다. 교회가 할 일은 성경을 중심으로 보수주의이건 진보주의이건 통렬하게 비판하는 선지자적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하지만 개신교는 그런 중심을 잃어버리고 보수주의라는 색안경을 끼고 세상을 바라본다. 성경 이전에 보수주의라는 정치색깔이 먼저인 것으로 적어도 나는 본다.

이 외에도 지적할 것은 정말 많다. 일부 목사들이 대통령에게 교회를 사업장 대하듯 하지 말라고 했다지만, 나는 현재 정말 많은 개신교 교회들이 영적 장사를 하는 사업장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개신교 일반 교인들 뿐만 아니라 목사와 장로, 집사들의 도덕적 감수성이 사회일반의 평균 이하인 경우도 허다하다. 사회의 등불이 아니라 수치가 되어버린 목사, 장로, 집사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지만 여기까지만 하련다. 코로나 사태로 개신교에 대한 국민의 이미지는 매우 부정적이 되었다. 교인들 중에는 이것이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나는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교회가 뿌린 씨를 정직하게 거두고 있는 것 뿐이며, 교회가 철저하게 반성하고 회개하고 갱신해야만 하는 이유를 보여주고, 오히려 원동력이 된다고 믿는다. 만약 개신교가 이를 등한시 한다면, 개신교는 결코 다시 일어서지 못할 것이다. 양적 팽창은 있을 수 있겠지만, 질적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은 요원해질 것이다. 솔직히 나는 개신교의 갱신 가능성에 대해서 매우 낮게 보고 있고, 루터가 했던 것과 같은 또 한번의 종교개혁이 있어야 할 것으로 보이고, 나는 그런 새로운 종교개혁에 기꺼이 동참할 생각을 가지고 있다.

개신교여! 무지에서 벗어나기를... 비둔해진 거대한 공룡같은 상태에서 벗어나길...

나는 잠재적인 성범죄자다 & 당신 잘못이 아니다(박원순 서울시장의 죽음을 애도하며...)

(2020년 7월 9일 시민운동가이자 서울시장인 박원순 변호사 사망)

어제 오후에 내가 존경하고 사랑해 마지 않는 시민운동가이자 정치인 한 사람인 박원순 서울시장이 극단적인 선택으로 생을 마감했다. 대학생 시절 참여했던 참여연대의 창립자이고 너무 훌륭한 시민운동을 전개해온 시민운동가, 인권과 약자를 사랑했고 위했던 변호사, 탁월한 행정가이자 정치인인 한 사람의 죽음은 나에게 너무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더구나 그분이 상호합의에 의한 불륜도 아니고 한쪽에서 일방적으로 행한 범죄인 성추행으로 고소당한 바로 다음날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것이 내 마음을 복잡하게 했다.

어렸을 때는 성추행이나 성폭행을 저지르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더럽고 사악한 자들이라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그건 남일이었다. 그냥 그런 나쁜 놈들이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가 성폭행을 일삼았다는 소식을 전해들었을 때, 그에게 많은 기대를 하고 좋아했던 한 사람으로서 정말 큰 배신감을 느꼈다. 그것은 남일이 아니었다. 심적으로 "우리"의 카테고리에 있는, 기대하고 좋아했던 한 사람으로부터 뒤통수를 세게 얻어 맞아 분노하게 된 그런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감정이 좀 다르다. 배신감이라기 보다는 박원순 시장과 공범이 된 것 같은 느낌. 그만 그 일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 나도 같이 나쁜 짓을 한 그런 감정. 청년의 때부터 좋아하고 존경해 왔기 때문일까? 아니면 여러 면에서 나보다 몇 배나 더 뛰어난 인물의 잘못이 내가 얼마나 형편없고 약하고 악한 사람인가를 여실히 드러내 보여줬기 때문일까? 어젯밤 둘째딸과 길을 걸으면서 내가 아이에게 했던 말은 화난다가 아니라 슬프다는 말이었고, 덧붙여 아빠도 스스로를 잠재적인 성범죄자로 인식하고 각별히 더 조심하고 살아야겠다는 말이었다.

그분은 그렇게 가셨다. 그분의 죄는 분명히 지적해야 하지만, 그분의 인생은 그 죄로 무화(無化)시켜버릴 수 없는 존경받고 인정받아 마땅한 것들이 아주 많은 인생이었다. 그를 미워하지 않는다. 다만 그런 분의 도덕성도 점차 마비시켜버리고 수렁으로 끌어들여버린 그 무엇이 두려울 뿐이다.

이 글을 쓰는 이 순간 매우 걱정되는 한 사람이 있다. 그것은 박시장이 죽기 하루 전 그를 성추행죄로 고발한 사람이다. 그는 박시장의 비서였고, 지속적으로 성추행을 당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성추행의 피해자로서 그가 겪었을 고통을 생각한다. 그리고 그에 덧붙여 마치 그의 고발로 인해 박원순 시장이 죽게되었다는 말도 안되는 인과관계의 자책감(죄책감) 혹은 주변의 비난과 손가락질의 희생양이 되지 않을까 걱정된다. 우리는 어떤 경우도 피해자를 가해자로 둔갑시켜서는 안 된다. 박원순 시장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지지해온 사람이라면 박원순 시장이 죽음의 순간에 자신을 고발한 사람을 미워하며 원망하기보다는 스스로의 잘못을 뉘우치며 자신을 탓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그 고발자는 시장을 죽음으로 몰기 원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당한 피해와 고통에 대한 정당한 법의 댓가를 원했던 것이다.

오늘 벌써 "꽃뱀"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박시장의 죽음을 안타까워 하는 몇 사람들이 그 고발인에 대한 공격을 감행할 것이다. 박시장과 비서 사이에 실제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당사자 외에 누구도 알 수 없지만, 나는 그 고발인이 진실되다고 우선 믿는다. 그리고 그 전제하에 그에게 꼭 말해주고 싶다. 박시장의 비극은 자기 스스로가 초래한 것일 뿐 그대의 잘못이 아니라고... 어떤 경우에도 자책하지 말고 숨지 말고 당당하라고... 그리고 죽음을 선택한 박시장을 용서해 달라고...

흐리고 비오는 날씨가 내 마음을 너무 잘 대변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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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총선 결과를 보며...

(2020년 4월 15일 국회의원 총선 결과 더불어 민주당이 압승했다)

어제 책상 앞에 앉아서 논문에 집중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잡히지 않아 내내 TV앞에 앉아 있었다. 예상한 것 보다 여당에 표가 몰리면서 인과응보라는 생각과 함께 우리나라 정치가 참 큰 일이라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건전한 진보와 보수가 치열하게 경쟁하는 가운데, 힘 있는 소수 정당들이 함께 경쟁하는 건강한 정치문화는 언제쯤 볼 수 있을지...

선겨 결과에 대해 이런 저런 말들이 많다. 그 중에 어이가 없는 것 한 가지는 호남에서의 선겨 결과를 지역색 강화로 몰아가는 것이다. 언뜻 보기에는 맞는 말 같지만 완전히 틀린 분석이다. 지역주의로 몰아가기 전에 주목해야 할 것 두 가지:

1. 호남의 맹주들인 다선 의원들이 끈떨어진 연처럼 떨어져 나갔다. 그것은 그들이 민주당 옷을 입지 못해서가 아니다. 그들은 당선만 시켜주면 민주당에 복당하거나 민주당에 힘을 실어 주겠다고 하소연을 했다. 목포의 박지원 의원은 문재인 대통령에 대해서 쓴소리 한 번 한 적 없다. 하지만 그들은 한심한 표차로 낙선했다. 그 이유는 그들이 국가와 사회를 위해 긍정적인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고, 의정활동에서 만족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호남은 이름이나 지역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다. 그들의 행위와 활동으로 냉철하게 판단한다. 호남주민들은 코로나 사태와 북한 문제, 사회 정의 등에 대해서 대통령과 여당의 정책을 인정해 준 것이다. 물론 경제에 있어서는 못마땅해 하는 면이 없지 않지만...

2. 대구의 김부겸 의원은 대구에서 민주당 당적으로는 결코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지성으로 공을 들이며 최선을 다했다. 그가 다른 지역에 출마했다면 당연히 당선이 되었을 것이지만, 그는 그곳을 끝까지 지켰고, 낙선 후에도 "농부는 자기의 밭을 탓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남겼다. 영남 지역에는 김부겸과 같은 정치인들이 꽤 많이 있다. 대표적인 예가 노무현이었고, 그의 뒤를 따르는 사람들이 참 많다.

그런데 보수 진영헤서 호남에 그토록 공을 들이고 노력하는 정치인이 있는가? 대부분의 경우 아예 후보를 내지 않거나, 후보가 있다고 하더라도 지역구민들이 알지도 못하고, 공감을 전혀 할 수 없는 인물이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보수 쪽에 표를 주고 싶어도 줄 수 있는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거기에서 핑크색 점퍼를 입은 의원이 나올 수 있을 것인가? 왜 그들은 호남사람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호소하지 않는가? 사람들은 민주당 깃발만 꽂으면 당선된다는 호남의 순천에서 20대 총선 때 새누리당의 이정현 의원이 자전거를 타고 지역구 곳곳을 돌아다니며 지극정성을 다 했을 때, 순천 시민들은 그를 국회의원으로 당선시켰다. 민주당 후보의 면면이 성에 차지 않는 것과 이정현 의원의 지극정성이 그들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 이후에 보인 이정현 의원의 행보를 보고 순천 시민들이 크게 실망하여 분노하긴 했지만(그래서 21대에는 영등포에 출마해서 한 자리 지지를 받으며 보기 좋게 낙선했다), 그래도 그를 당선 시킨 것은 호남 사람들이었다.

지역주의는 망국적인 것이고 없어져야 한다. 하지만 지역주의를 그 지역 유권자의 탓으로만 돌리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영남에서 미통당이 아닌 다른 후보들을 지지한 유권자는 정말 많았다. 앞으로 조금만 더 지나면 거기에서는 지역색이 무뎌지고 단색이 아니라 다색으로 변화될 가능성이 충분하다. 마찬가지로 호남에서도 파란색 일색이 아니라 다양한 색으로 바뀌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정치인들이 먼저 자신들이 해야할 숙제를 꾸준히 해 나가야 한다. 그렇지 않고 지금처럼 아예 포기하고 신경쓰지 않으면 그 단색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이다.

무제

대학사회에서 몇 년 간 생활하면서 느낀 것 한 가지... 누구나 상식, 정의, 희생을 외치고, 또 내가 힘들 때 힘내라고 말하고 몸이 안 좋을 때 건강을 우선 챙기라고 말하지만, 그 모든 외침과 격려의 이면에는 명시적으로 말해지지 않은 괄호 안의, 가장 중요한 assumption이 있다는 것.

그것은 "(내 이익(이해관계)을 1이라도 침해하지 않는다면...)"이다. 만약 자신과 이해관계가 조금이라고 얽히게 된다면, 그 외침과 권고는 아무 의미가 없어지고, 태도는 돌변한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정말 많은 대다수의 대학 구성원들은 그 원칙에 따라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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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이름...

첫 애를 임신했을 때 이름 때문에 많은 고민을 했다. 장인께서 산부인과 의사셨기 때문에 임신 3개월 때 딸이라고 알려주셔서 그 때부터 고민이 시작되었다.
애가 태어난 후 결정된 이름을 가지고 출생신고를 하기 얼마 전 첫 애의 이름에 아내의 성을 넣겠다고 결정해서 그 이름을 들고 갔다. 내 성인 '이'와 아내의 성인 '조' 그리고 아이의 이름 'ㅎㅇ'을 합하여 '이조ㅎㅇ'을 공식 이름으로 등록했다. 물론 성을 '이조'로 등록할 수 없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법적으로는 성이 '이'이고 이름이 '조ㅎㅇ'이지만 어느 누구도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둘째가 태어나면서 언니를 따라서 '이조ㅇㅇ'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이제 둘이 같은 학교에 다닌다. 각기 다른 중학교에 다닐 때는 둘 모두 별명이 '이조'였다. 전국에 하나 밖에 없는 이름을 가진 아이들이라서 '이조'라고 부르면 모두 다 누군지 알았다. 심지어 둘째는 운동회 때 반 단체복에 "2000000000000"라고 썼을 정도였다. 이 둘이 같은 학교에 다니게 되니 늘 화제가 된다. 첫째가 학교에서 그래도 잘 알려졌기 때문에 둘째가 늘 화제였다. 선생님들이나 선배들에게 둘째가 자기 이름을 밝힐 때 늘 따라오는 질문은 "너 이조ㅎㅇ이 동생 아니야?" 혹은 "너 이조ㅎㅇ과 무슨 관계냐?"라는 질문이다. 심지어 경비 아저씨도 같은 질문을 하셨단다.
얼마 전 둘째가 처음으로 알게된 선생님에게 자신의 이름을 말하자 역시 같은 질문... 그리고 나서 그 선생님 왈:
선생님: ㅎㅇ이는 집에서 어때?
ㅇㅇ: 엄청 무서워요.(첫째가 둘째의 군기를 확실히 잡는다.)
선생님: 그래?
ㅇㅇ: 언니가 걸어 오면 가슴이 쿵쾅거려요.
선생님: 하긴 그래... ㅎㅇ이가 걸을 때 유난히 쿵쾅거리면서 걷지...
ㅇㅇ이: ????
이름 때문에 학교에서 겪는 에피소드가 많은데, 그것으로 많이 웃는다. 다행히 아이들이 이름을 그렇게 지어 준 아빠에게 감사해 하고 자신의 이름에 자부심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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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충격적인 죽음

(2018년 7월 23일 정의당 노회찬 의원 자살에 부쳐...)

언제였던가... 그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
작년 대선을 얼마 앞둔 추운 겨울. 정의당대표실에서였던 같다. 박근혜가 탄핵되고, 새로운 세상의 건설에 대한 열망이 차오르고 있던 그 때, 최소 정당으로서 당당히 대선에 심상정을 내세우며 출사표를 던졌던 그 때... 정의당의 선거대책위원장이었던 것 같다. 정의당을 지지하는 학자들이 당대표 회의실에 모여서 그를 중심으로 상견례를 하고 간단하게 회의를 했었다.
나는 그를 좋아했지만 지지하지는 않았다. 나는 오로지 심상정 의원이 대통령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뿐이었고, 그에 대해서는 관심이 별로 없었다. 웬지 그에게는 마음이 끌리지 않았다.

그가 드루킹일당과 엮여있다는 보도가 슬슬 흘러나오던 요즘. 설마 설마 했다. 그는 자신의 결벽을 여러 번에 걸쳐 주장했다. 최근 외국으로 출장나가면서도 카메라에 대고 자신은 깨끗하다고 주장했고, 자신을 신뢰하는 같은 당 의원들에게도 거듭 확인했었다. 그런 그가 외국에서 돌아온지 얼마 안 되어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그로 하여금 그런 선택을 하게 한 원인이 무엇인지 우리는 아직 잘 모른다. 지금쯤 먹잇감을 찾아 떠돌던 하이에나같은 언론은 득달같이 달려들어 물어뜯고 선정적이고 걸러지지 않은 보도들을 쏟아 놓겠지만, 그런 짐승들의 피튀기는 먹이감 싸움은 일절 쳐다보기도 싫다. 분명한 것은 아직 우리는 정확한 팩트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다만 그를 그토록 괴롭게 했던 떳떳하지 못한 뭔가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것은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누가 그를 욕하며, 누가 그에게 손가락질할 수 있으랴? 정치인들 중에서, 그리고 온 대한민국 국민 중에서, 그만큼 사회 정의와 약자들을 위해 피나고 눈물나게 고생하며 싸운 사람이 있을까? 그만큼 처절하게 우리 사회의 악과 맞짱떴던 사람이 있을까? 그 만큼 진보정치에 일반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매력을 가진 사람이 있을까? 정치인, 그것도 유력한 정치인에게 다가오는 수 많은 유혹 중 한 두 가지에 넘어갔을 수 있다. 그것은 잘못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그의 인생, 그의 정치를 손가락질 받을 만한 것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을까? 아니다. 오히려 그의 예민한 감수성, 염치를 아는 마음, 깨끗한 도덕성을 지향하는 열정, 이 시대의 참 양심을 가진 정치인임을 반증해서 보여주는 것이 바로 그의 선택이 아닐까?

그보다 훨씬 더럽고, 추잡하고, 권력욕에 사로잡힌 수 많은 정치인들이 떵떵거리며 살아가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 그에게 머리가 절로 숙여지는 것은, 이 시대의 한 인물이었고, 뛰어난 정치인이었고,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줬던 한 인간의 극단적인 선택을 안타까워하는 마음 때문이리라.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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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암흑기 - 기독교인의 자세

얼마전 다큐멘터리 영화 "공범자들"을 관람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KBS와 MBC 두 공영방송과 YTN을 작정하고 망가뜨리며 길들임으로써 정권의 나팔 역할을 충실히 하도록 만든 과정과 그로인해 말못할 고통을 당한 기자 피디 등을 볼 수 있었다. 한 마디로 이루 말할 수 없는 불의, 악이 날뛰는 모습이었다. 새로운 정부가 들어 선 이제 그 악을, 그 불의를 바로 잡아야 한다. 그것은 역사의 사명이다. 물론 그간 언론길들이기의 결과로 많은 혜택을 받아왔던 일부 정치세력들은 그것을 언론장악이라 규정하고 발악을 하며 반대를 하겠지만... 그들의 발악이 적폐를 청산하여 민족과 국가의 기강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역사적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다.

그런데 이 싯점에서 하나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공범자들"에서 언론장악이 노골화 되면서 수없이 많은 기자 피디들이 고통을 당하며 쫓겨나는 가운데 언론이 제기능을 못하고 무너질 바로 그 때, 나는 누군가로부터 충격적인, 아직도 이해되지 않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2000년대 중반쯤 (2004년에서 2007년 사이로 짐작되는데) 미국에서 유학할 당시, 내가 속해 있던 교회에서는 사경회 주 강사로 선한목자교회의 유기성 목사를 초청했었다. 그리고 그분을 대접하기 위해서 교회의 리더들이 그분과 함께 식사하는 자리를 가졌다. 그 자리에서 그분은 당시 언론이 좌파에 의해 장악되었기 때문에 좌파세력을 몰아낼 필요가 있다고 언급하며 이명박 정권의 언론장악을 동조 및 지지하는 발언을 했었다. 그 발언은 내가 직접 들어서 똑똑히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틀림이 없다.

나는 아직도 그분이 동일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심히 궁금하다. 불법과 악이 자행되었던 그 작태를 긍정적으로 보면서 불의에 동조했던 그 견해가 아직도 동일한지...

예.나.왕.  유기성 목사를 중심으로 시작된 하나의 운동이다. 예수님을 나의 왕으로 모시는 삶을 지향하는, 어찌보면 지극히 당연하면서도 매우 긍정적인 운동이라고 하겠다. 기독교의 본질이며, 나 또한 내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한 왕으로 모시고 있는지 돌아보며 회개하고 돌이키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그가 생각하는 예수는 누구일까? 어두움의 한 가운데서 불법과 악행이 자행되고 있는 그 현장에 눈 감고, 악의 세력과 동조하는 분일까? 세월호 사건으로 꽃같은 생명들이 스러져 갈 때 안타깝다는 말 한 마디 외에는 신앙 안에서 그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그리고 이 사회와 정권에 서슬퍼런 비판 한 마디도 하지 못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는 자의 바른 태도일까?

예.나.왕 운동의 맹점은 그들이 왕으로 모신 "예수"가 그들이 만들어 낸 하나의 우상일 수 있다는 것, 그 "예수"가 성경의 일부에 드러난 반쪽짜리 예수일 뿐, 성경이 온전히 드러내기를 원하는 그런 모습이 아닐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는 지극히 바르게 살고 있다고 착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나.왕 운동의 핵심은 "왕"에 방점이 있는 것 같다. 그분을 진정 왕으로 모시고 있는가를 매일 성찰하는 것. 하지만 "왕" 이전에 "예수"가 더 중요하다는 것. 그분을 제대로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적어도 내가 보기에 유기성 목사의 신앙 노선은 정치적으로는 지극히 보수적이고 종교적으로는 개인주의적인, 다시 말해 일제 강점기에 일제의 탄압을 피하기 위하여 천국, 영성, 개인신앙 위주로 돌아서버렸던 한국 교회의 비겁함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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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택시운전사"

지난 토요일에 가족들과 함께 영화 "택시운전사"를 관람했다. 눈물과 함께...

아내와 아이들은 영화에 대해 상당히 호평을 하면서도 나름 아쉬움을 토로했다. 우리 모두가 이 영화의 가장 주된 메시지들 중 하나가 언론의 역할이라는 것, 그리고 지난 두 정권을 지나면서 완전히 무너져서 '기레기'라는 비아냥을 받아 마땅한 현재의 언론에 대해서 따끔하게 일침을 던지는 영화라는 것은 모두 동의했지만, 영화가 광주에서의 민주화운동 자체에 좀 더 집중해서 보여줬더라면 좋았을 것이란다. 그리고 아내는 거기에 더해 유해진이 연기한 광주의 택시운전사가 조금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과해서 옥의 티처럼 느껴졌단다.

나름 이해할 만한 비평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당시 초등학교 5학년 학생으로서 어리지만 그 과정을 겪은 나로서는 조금 다르게 받아들여졌다. 나에게 이 영화는 외부인인 서울 택시운전사와 외신기자가 왜곡되어 알려진 광주의 진실을 알아가는 과정으로 그려진 것과 동시에 당시 광주에 있던 사람들이 외부에 던지는 무거운 질문은 함께 담고 있다고 느껴졌다. 당시 광주에 있던 사람들이 쿠데타에 이은 정권 찬탈을 기도하는 전두환 일파에 대한 분노와 맞먹는 정도로 언론에 대해서 분노하고 있었다. 영화에서 유해진의 집에서 TV 뉴스를 시청하면서 엄청난 분노를 표출한 그 장면에서 잘 드러나듯, 왜 이 참상이 전혀 알려지지 않고 오히려 왜곡되어 거짓말을 일삼는지 우리로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고, 분노를 극에 달하게 만들었다. 영화는 그 부분, 광주의 비극의 중요한 한 축을 영화에 잘 담아 내었다. 그것은 민주화운동 그 자체와 그것을 억압하기 위해 자행된 악랄한 정부와 군의 만행 못지 않게 중요한데, 그것을 잘 포착한 것이다.

또 하나, 유해진을 대표로 보여지는 당시 광주 시민들의 마음이었다. 영화를 보면서 내가 가장 공감한 인물이 유해진이었다. 바로 그 모습, 그의 말, 그의 행동, 그것이 내가 봤던 우리 부모님, 동네 아줌마 아저씨들, 형들과 누나들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바로 유해진이 광주민주화운동의 핵심을 담고 있는 인물로 보였다. 서울에서 온 택시기사를 따뜻하게 환대하는 그 모습, 그리고 그가 (뜻하지 않게) 데리고 온 외신기자을 대하며 그에게 거는 기대, 서울택시가 고장나자 자신의 택시에서 부품을 가져가라는 광주 택시 운전기사들의 선심, 그리고 불의를 보면서 자신의 안위를 생각하지 않고 나선 그 모습...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택시와 버스 운전기사들 뿐만 아니라 트럭운전기사들, 그리고 차량을 가진 사람들 중 아주 많은 분들이 비극의 한 현장에서 중심역할을 했다는 것은 내가 본 바이고 들은 바이고 아는 바이다. 그리고 운전기사들 뿐만 아니라 내 어머니와 우리 동네 아주머니들이 그러셨던 것처럼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주먹밥을 싸고, 모든 것을 공유하고 서로를 위하고, 나라를 위하는 마음으로 하나가 되었던 것. 혼란 가운데서도 평화롭고, 치안이 잘 유지되고 도둑과 강도가 없었던 것은 바로 유해진으로 대표되는 광주시민들의 성숙한 시민의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광주에 대해서 지금 다시 깊이 생각해 봐야하는 것은 바로 이 시대도 그와 같은 시민의식이 절실히 요구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는, 권력을 가진 자들로 하여금 두려움에 떨게하며 진정으로 국민들을 위하는 것만이 자신들이 살 길임을 각인시키는 길이기 때문이다.

혹시 안 보신 분들이 있다면 꼭 보시기 바랍니다.

청소 아주머니...

그저께 연구실에 들어오니 따끈따근한 옥수수 네 개가 책상에 올려져 있었다. 순간적으로 누구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우리 층을 청소하시는 아주머니.... 그 덕분에 참 맛있는 옥수수를 먹었다.

어제부터 그 아주머니가 내 방문을 기웃거리신다. 급기야 내가 연구실을 좀 오래 비우는 때가 언제인지를 물어보신다. 왜그러시냐고 여쭤었더니 내 방 왁스칠을 하고 싶으시다고...

방학 동안에... 학생들이 없는 그 시간에 청소하시는 분들은 정말 고달프다. 모든 교실의 책상을 끌어내고 비우고 그 큰 방을 깨끗이 청소한 후 왁스칠을 해야 한다. 그리고 그 작업을 한 층 한 층 해 나가야 하니 얼마나 힘드신지... 얼굴에 맺혀있는 땀방울을 보면서 너무나 죄송스러운 마음이 든다. 얼마 전에 6층(내 연구실이 있는 층)도 왁스칠을 하냐고 여쭸더니 올해는 안 해도 된다고 그러셨다. 그런데도 내 방은 꼭 해 주고 싶다고... 왁스칠 잘 하시는 아주머니를 섭외해 두셨다고...

왁스칠 하면서 화학약품을 들이 마셔야 하고, 내 방의 집기를 모두 빼내셔야 하고, 깨끗이 청소해야 하셔야 하는 그 고초를 아는 나로서는 도저히 그렇게 해 달라고 부탁할 수 없어서 극구 말렸다. 절대... 하지 마시라고...

오늘 아침 방학 중에 학생들과 하는 공부 모임(세 시간)을 하는 사이에 급기야 아주머니가 일을 저지르셨다. 돌아와 보니 방 바닥이 완전히 새로와졌다. 아직도 진동하는 왁스 냄새...

그런데 아주머니 표정이 어둡다. 이유를 여쭤봤더니 마무리 하는 과정에서 실수로 커피메이커의 유리 그릇을 떨어뜨려 깨뜨렸다는 것. 미안해 하시면서 집에 있는 것을 가져다 두시겠단다. 이번에도 절대 그럴 필요 없다고, 원래 오래되서 바꾸려고 했다고, 절대 가져오지 마시라고 읍소를 했고, 그렇게 하시겠다고 하셨지만, 아무래도 걱정된다. 월요일에 연구실에 와 보면 이미 가져다 놓으시는 것 아닌지...

새벽 네 시 반에 출근하셔서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고생하시는 분들... 그 수고에서 몇 푼 받지도 못하고 인정도 받지 못하면서도 최선을 다하시는 그분들께 감사하고 죄송하기만 하다. 커피포트는 제발 그냥 잊어 주시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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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세상은... 교회도 마찬가지... 권력을 쫓는 무리에 의해 접수되고, 그 탐욕스러운 자들이 활개치는 장으로 보인다. 하나님의 이름이나 정의나 국민의 이름을 들이대지만, 그 중심에는 그들의 더러운 물욕, 명예욕, 권력욕이 자리잡고 있을 뿐이다. 그들에게 하나님이나 국민은 그저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내세우는 가면에 불과하다. 세상과 교회는 그들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그럼으로써 타락의 일로를 걸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내가 믿는 것은, 그들의 탐욕보다 더 높은, 더 깊은 곳에 하나님이 계시며, 내 눈에 명확하게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리고 지금 이 시간, 바로 이 자리에서 그분의 존재를 찾기 힘들다 하더라도 그분은 역사하시며, 결국 그분의 뜻대로, 그분의 공의를 드러내며, 그분의 거룩하신 이름을 온전히 보전하며 높이는 방향으로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바로 그 믿음이 나로 하여금 악한 자들이 판을 치는 교회와 세상을 보면서도 절망하지 않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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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

화요일, 금요일은 힘든 날이다. 수업 세 개를 연달아하고 나서 바로 학생 상담을 진행하기 때문이다. 내 경우 학생들이 상담하러 많이 오기 때문에 상담시간 두 시간 내내 열심히 떠들어 대야한다. 수업까지 포함하면 상당히 많은 시간을 떠들고 서있어야 해서 모든 것이 끝나면 녹초가 된다(그런데 목은 멀쩡...).
예전에는 그 후에 학교에서 늦게까지 논문을 쓰려고 남아 있었는데, 너무 힘들다보니 생산성이 지극히 낮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번 학기부터는 그 두 날은 그냥 집에 간다. 가면 가자마자 쓰러져서 심한 경우에는 다음날 아침까지 계속 잔다.
어제도 역시 집에 가자마자 잠이 들었는데, 저녁먹으라고 깨우는 첫째 때문에 깼다. 식사를 하고 피곤해서 침대에 누웠는데, 저녁에 공부하던 둘째가 와서 종알종알대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한다. 꼭 껴앉고 대화를 나누다보니 피로가 싹 가시는 느낌... '행복이란 이런 것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소하지만 힘든 나를 회복시키는 행복을 느끼며, 세월호 유가족이 생각났다. 죽어간 아이들.. 그들도 그 부모에게는 내 딸들과 같은 존재였을텐데... 그 생각이 드니 미안하기도 하고, 그들이 얼마나 괴롭고 힘들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요구대로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자를 처벌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우리 사회가 온 마음을 다해 해 준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평생 그 큰 빈 자리를 느끼며 살아가야 할 사람들이다.
그 아픔은 어떻게 해도 치료될 수 없는 그런 것일 터...
그 아이들 나이가 거의 다 되어가는 우리 딸들을 볼 때마다 세월호 유가족을 생각한다. 그들의 아픔을 생각한다. 내 삶의 힘든 일들에 치여서 그들을 잊는 것이 너무 미안하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아픔을 치유해 주시고 위로해 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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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회 간 둘째를 생각하며...

오늘 둘째가 학교에서 수련회 갔다. 평창으로 간다는데, 오늘 하루 종일 마음의 불안함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방금 아내에게서 무사히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았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불안한 마음이 약간을 줄어들었지만 그렇다고 불안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약 500일 전, 들뜬 마음으로 수학여행을 떠나던 꽃같은 아이들과 선생님들, 그리고 어른들이 수장되었다. 그 큰 배가 서서히 가라 앉는 것을 눈 앞에 보면서도 부모도, 그 누구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마음을 찢어졌지만 속수무책이었다. 그 때의 그 공포감과 좌절감이 내 안에 깊은 상처를 남긴 것 같다. 객관적으로 보면 너무 과민반응을 보이는 것이 분명하지만,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는 그렇지 않다.

세월호 이후 무엇이 바뀌었는가? 세월호 유가족들은 진상규명과 재발방지를 요구하며 필사적으로 싸우는데, 정부와 사회는 그들을 보상금을 노리는 자들로, 세상을 소란스럽게 만드는 자들로, 심지어 귀찮은 자들로 매도하지 않았는가? 그러는 사이에 진상규명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모든 것은 조용히 덮인다. 정부는 물론이고 사회는 반성하지 않는다. 그래서 안전사고가 끊이지 않는다. 심지어 여객선과 화물선의 운항도 세월호 사태 이전에 비해서 그리 나아진 것이 없단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그토록 필사적으로 싸우는 이유는 그들의 자식들의 희생이 의미없는 것이 되지 않게하려는 것이다. 그 아이들은 이미 죽었지만, 그들의 죽음이 앞으로 올 비슷한 사고를 예방함으로 수 많은 인명을 구하는 데 기여했다는 그런 의미부여, 그로 인한 위안이 바로 그들이 그토록 원하는 것일터... 그렇다면 그들의 싸움으로 득을 보는 것은 사실 그들이 아니라 우리다. 그들이 아무리 싸운다고 아이들이 살아돌아오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들의 노력으로 내 생명, 우리 아이들의 생명이 덜 위험해 지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그들의 싸움은 그들의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바로 내 싸움이 되어야 하고, 우리의 싸움이 되어야 한다. 그들이 그냥 잠잠하게 있더라도...

그런데 그 싸움은 여전히 그들의 싸움이고, 사회는 그들을 잊어간다. 그리고 "아직도 그러고 있느냐"는 반응으로 싸늘한 시선을 그들에게 던진다. 이것보다 더 큰 부조리가 있을까?

둘째가 걱정되고 보고 싶은 오늘 나는 세월호를 기억하는 노란리본 뱃지 두 개를 얻었다. 그것은 그간 기억은 하고 있지만 그들과 함께한다는 적극적 의사표명을 하지 않았던 내 자신을 반성하고, 세상에 그들을 잊으면 안된다는, 나도 결코 잊지 않겠다는 내 스스로의 반성의 고백이자 세상을 향한 항변이다.

모든 아이들이 안전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어른들인 우리가 만들어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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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에 순종하려는 의지

어제 퇴근길에 들은 Ravi Zacharias의 질책이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는 현대 교회의 문제가 말씀이 부족한 것, 혹은 말씀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진단하며 목소리를 높여 질책했다.

나는 그의 말에 100% 동의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이 시대 교회에서 보이는 양상은 말씀에 대한 이해, 말씀을 진지하게 탐구하는 자세가 너무나 희박하기 때문이다.  Sola Scriptura가 개신교의 가장 중요한 모토 중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어느새 장식품이 되어 버렸고, 말씀은 설교단에서, 혹은 라디오에서 설교자에 의해 한 번 소화된 것을 듣는 것으로 끝인 세대가 바로 우리 세대이다. 일반 성도들 뿐만 아니라 장로 집사들, 그리고 심지어 수 많은 목회자들까지도 말씀에 얼마나 무지한지... 치가 떨릴 정도이다.

하지만 Zacharias가 지적한 것은 보다 근본적인 것이다. 말씀에 무지한 원인이 바로 말씀을 싫어하기 때문이라는 것. 그리고 말씀을 많이 아는 자라 하더라도 그 말씀에 순종하는 자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 그것이 무서운 것이다.

내 자신을 생각해 보았다. 아침마다 말씀 앞에 무릎 꿇겠다고 다짐했지만, 바쁘고 급한 일이 생기면 그 시간이 대폭 줄어들기 있쑤이고, 그렇지 않고 말씀을 읽을 때에도 5-6 장 정도 읽는 그 시간, 30분에서 한 시간 밖에 안 되는 그 시간에 내 마음을 말씀 앞에 겸손히 하고, 온 마음을 다해 만군의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 보다는 읽는 도중에 생각은 딴데로 흐르는 경우도 종종 있고, 눈은 말씀을 따라가고 있지만 생각은 다른 일을 떠올리면서 그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하는 경우도 있다. 급하면 빨리 해치우고 싶은 마음이 들고, 말씀 후에 기도할 때에도 전심을 다해 기도하기보다는 하나님께 드리는 하나의 인사치례로 후다닥 끝내고 밀려있는 일을 하는 경우도 많다. 뿐만 아니라 일상의 삶에서, 관계에서, 하나님 중심을 외치고 살지만, 실제의 모습은 나 중심이고 세상 중심이며 하나님은 어느새 변방으로 밀려나버린 삶을 살기 일쑤이다. 그 와중에 짓는 죄악은 일일이 나열하기가 부끄러울 정도이다. 생각과 말은 성인의 삶을 지향하지만, 실제의 모습은 죄인 중의 괴수의 삶을 사는 위선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Zacharias는 그런 내 태도에 엄중한 경고를 던져준다. 하나님은 나에게 그런 대접을 받으실 분이 아니라는 것.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만왕의 왕이 되시는 분이라는 것, 그분은 나를 구원하신 구원자이시고, 나의 아버지가 되시는 분이라는 것. 이 온 우주도 그분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닌데, 하물며 나같은 것은 눈에 띄지도 않을 것에 불과한데, 그런 나를 주목하시고 찾아 와 주시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이라는 것.

그분을 홀대하는 내 자신을 깨달았고, 그 근저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려고 하는 내 자신의 죄악이 또아리를 틀고 있다는 것에 몸서리가 쳐졌다.

나는 그런 자인 것이다. 그 크신 하나님의 은혜에도 불구하고 의지적으로 그분을 거역하고 그분을 멀리하고자 하는 본성을 가진 자가 바로 나라는 것. 적어도 나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분의 말씀을 혐오하고, 내 자신을 앞세우고자 하는 욕망이 바다처럼 거대한, 흉악한 자라는 그의 지적이 딱 들어 맞는 지적이다.

그 진노의 설교를 들으면서 참 슬펐다. 나라는 존재가 그 정도 밖에 안 된다는 것이 슬펐고, 그런 나에게 그렇게 푸대접을 받는 하나님께 죄송해서 슬펐다.

그런 나를 보게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하나님께 내 죄악을 자복한다면, 하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셔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내 안에서 만들어 주시지 않을까? 참 그렇게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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