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맹인들을 그들이 알지 못하는 길로 이끌며,
그들의 알지 못하는 지름길로 인도하며,
암흑이 그 앞에서 광명이 되게 하며,
굽은 데를 곧게 할 것이라.

내가 이 일을 행하여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리니,
조각한 우상을 의지하며,
부어 만든 우상을 향하여 너희는 우리의 신이라 하는 자는
물리침을 받아 크게 수치를 당하리라!

너희 못 듣는 자들아!
들으라!
너희 맹인들아!
밝히 보라!

맹인이 누구냐?
내 종이 아니냐?
누가 내가 보내는 내 사자 같이 못 듣는 자겠느냐?
누가 내게 충성된 자 같이 맹인이겠느냐?
누가 여호와의 종 같이 맹인이겠느냐?

네가 많은 것을 볼지라도 유의하지 아니하며,
귀가 열려 있을지라도 듣지 아니하는도다(사 42:16-20)


And I will lead the blind
in a way that they do not know,
in paths that they have not known
I will guide them.

I will turn the darkness before them into light,
the rough places into level ground.
These are the things I do,
and I do not forsake them.

They are turned back and utterly put to shame,
who trust in carved idols,
who say to metal images,
“You are our gods.”

Hear, you deaf,
and look, you blind, that you may see!

Who is blind but my servant,
or deaf as my messenger whom I send?
Who is blind as my dedicated one,
or blind as the servant of the Lord?

He sees many things, but does not observe them;
his ears are open, but he does not hear. (ES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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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이 탈취를 당하게 하신 자가 누구냐?"

"야곱이 탈취를 당하게 하신 자가 누구냐? 이스라엘을 약탈자들에게 넘기신 자가 누구냐? 여호와가 아니시냐? 우리가 그에게 범죄하였도다! 그들이 그의 길로 다니기를 원하지 아니하며, 그의 교훈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사 42:24)

나에게 일어나는 좋지 않아 보이는 것들이 모든 하나님의 심판이고 정죄라는 생각도 잘못되었지만, 그런 것들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확신, 하나님은 "내가 생각하기에 좋은 것"만 주시는 분이라는 주장은 어디에서 나온 신학인가? 적어도 성경적인 주장은 절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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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

"여호와의 사자가 나가서 앗수르 진중에서 십팔만 오천 인을 쳤으므로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본즉 시체뿐이라."(사 37:36)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나는 언제쯤 그 사실을 믿을 수 있을까?
왜 그리도 그것이 믿어지지 않을까?

교리적으로는 100% 동의하는 그 단순한 사실이, 내 삶에서 진심으로 고백되지 않는 것은, 그 만큼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고, 더 근본적으로는 하나님과 친밀한 인격적인 교제를 갖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와 동시에 내 죄성이 얼마나 큰가에 대해서도 동시에 보여주고 있는 증거다.

그분의 전능하심을 내가 진심으로 믿는다면, 조지 뮬러와 같은 기도의 삶은 그저 늘상 있는 삶의 모습이 될 것이고, 불구덩이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메드락과 사삭과 아벳느고와 같이 삶에 두려움이 없이 오히려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소망이 넘쳐날 것이고, 아귀다툼하는 사회 속에서 성실하게 살지만 그렇다고 부모없는 고아처럼 온 몸에 힘을 주며 자기가 모든 것을 다 해야하는 것처럼 고통스럽게 살지도 않을 것이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충만하여 그분께 내 삶의 주파수를 맞추며 살 수밖에 없을텐데... 내 삶은 그런 모습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아침에 QT하며 기도하는 것 잠깐, 그리고 나서는 마치 하나님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정신없이 이 일 저 일 하는 가운데, 녹초가 되어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가서 퍼져 잠만 자는 인생. 하나님께 이것저것 해달라는 요구는 많지만, 그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 아버지라는 사실을 묵상하며, 기뻐하며 감사하며, 내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 살피는 것은 턱없이 부족한 삶.

18만 5천이라는 군대는 인구가 매우 적었던 그 당시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보더라도 어마어마한 군대이다. 당시 예루살렘에 살았던 인구보다 더 많았을 것이다. 사실상 그들을 물리치기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런 그 군대를 보고 항복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엎드려 기도했던 히스기야도 참 대단한 인물이다. 어쨋든 그런 군대를 한 순간에 없애버리신다. 하나님께서 "치시니" 그 큰 군대는 "시체"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이다.
하나님께서는 요즘 여러 경로를 통해서 이 믿음없는 자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시고, "제발" 믿으라고 하시는 것 같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세상은 두려워 보이고, 내면에서는 온갖 불평만 쌓인다. 잘해야 한다는 생각에, 아니, 살아 남아야 한다는 두려움에, 온 몸에 힘이 들어가 삶은 피곤하기만 하다. 생존에 모든 것을 걸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나라는 안중에도 없다. 그저 내 일, 내 가족 뿐이다. 그것에 도움되는 것은 "선한 것"이고 그것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악한 것"으로 분류된다. 마치 사사기에서 왕이 없으므로(다시 말해 왕이신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지 않음으로) 각자 자기 원하는 대로 살았던 것처럼, 꼭 그런 영적, 도덕적 무정부 상태로 살아가게 된다. 그것이 내 삶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삶에서 돌이키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당신의 전능하심을 내게 보여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는 삶은 편안하다. 하나님께서 내게 모든 "좋은 것"을 주시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주인되는 삶을 내려 놓고 전능하신 그분께 삶을 맡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분의 차에 무임승차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나에게 그런 특권을 누릴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그분과 함께 푸른 풀밭도 가고, 사망의 골짜기로도 가는 것이다. 바울이 고백하는 것처럼 풍부에도 처할 줄 알고, 비천에 처할 줄도 알게 되는 것이다. 어느 상황이나 두려움이 없다. 그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세상이 도저히 알 수 없는 비밀스러운)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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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프랑스 고등학교 졸업시험문제

아래는 페이스북에서 어떤 분이 올린 글 중에서 퍼온 것입니다.
프랑스 고등학교의 졸업시험문제라는데요.

프랑스의 대학입학시험인 바깔로레아의 문제도 이 문제들과 비슷하게 출제된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이런 질문들이 프랑스 교육에서 매우 중요한 것들로 다뤄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겠지요?


고등학교 수준에서 어떤 답을 내놓을지 궁금합니다.
어떤 답을 하든지 간에, 이런 문제를 놓고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 그리고 그것을 학교에서 가르친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나 부럽기만 합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는 생각하는 사람을 키워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그 "생각하는" 시민이 참된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기반이 되는 것이지요.


1장 인간(Human) 

Q1-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행복이 가능한가? 
Q2-꿈은 필요한가? 
Q3-과거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우리는 자유로운 존재가 될 수 있을까? 
Q4-지금의 나는 내 과거의 총합인가? 
Q5-관용의 정신에도 비관용이 내포되어 있는가? 
Q6-사랑이 의무일 수 있는가? 
Q7-행복은 단지 한순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인가? 
Q8-타인을 존경한다는 것은 일체의 열정을 배제한다는 것을 뜻하는가? 
Q9-죽음은 인간에게서 일체의 존재 의미를 박탈해 가는가? 
Q10-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수 있나? 
Q11-행복은 인간에게 도달 불가능한 것인가? 

2장 인문학(Humanities) 

Q1-우리가 하고 있는 말에는 우리 자신이 의식하고있는 것만이 담기는가? 
Q2-철학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 
Q3-철학자는 과학자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가? 
Q4-역사가는 객관적일 수 있는가? 
Q5-역사학자가 기억력만 의존해도 좋은가? 
Q6-역사는 인간에게 오는 것인가 아니면 인간에 의해 오는 것인가? 
Q7-감각을 믿을 수 있는가? 
Q8-재화만이 교환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Q9-인문학은 인간을 예견 가능한 존재로 파악하는가? 
Q10-인류가 한 가지 언어만을 말하는 것은 바람직한가? 

3장 예술(Arts) 

Q1-예술 작품은 반드시 아름다운가? 
Q2-예술없이 아름다움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가? 
Q3-예술 작품의 복재는 그 작품에 해를 끼치는 일인가? 
Q4-예술 작품은 모두 인간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가? 
Q5-예술이 인간과 현실과의 관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가? 

4장 과학(Sciences) 

Q1-생물학적 지식은 일체의 유기체를 기계로만 여기기를 요구하는가? 
Q2-우리는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만을 진리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Q3-계산, 그것은 사유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인가? 
Q4-무의식에 대한 과학은 가능한가? 
Q5-오류는 진리를 발견하는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 
Q6-이론의 가치는 실제적 효용가치에 따라 가늠되는가? 
Q7-과학의 용도는 어디에 있는가? 
Q8-현실이 수학적 법칙에 따른다고 할 수 있는가? 
Q9-기술이 인간조건을 바꿀 수 있는가? 
Q10-지식은 종교적인 것이든 비종교적인 것이든 일체의 믿음을 배제하는가? 
Q11-자연을 모델로 삼는 것이 어느 분야에서 가장 적합한가? 

5장 정치와 권리(Politics&Rights) 

Q1-권리를 수호한다는 것과 이익을 옹호한다는 것은 같은 뜻인가? 
Q2-자유는 주어지는 것인가 아니면 싸워서 획득해야 하는 것인가? 
Q3-법에 복종하지 않는 행동도 이성적인 행동일 수 있을까? 
Q4-여론이 정권을 이끌 수 있는가? 
Q5-의무를 다하지 않고도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가? 
Q6-노동은 욕구 충족의 수단에 불구한가? 
Q7- 정의의 요구와 자유의 요구는 구별될 수 있는가? 
Q8-노동은 도덕적 가치를 지니는가? 
Q9-자유를 두려워해야 하나? 
Q10-유토피아는 한낱 꿈일 뿐인가? 
Q11-국가는 개인의 적인가? 
Q12-어디에서 정신의 자유를 알아차릴 수 있나? 
Q13-권력 남용은 불가피한 것인가? 
Q14-다름은 곧 불평등을 의미하는 것인가? 
Q15-노동은 종속적일 따름인가? 
Q16-평화와 불의가 함께 갈 수 있나? 

6장 윤리(Ethics) 

Q1-도덕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반드시 자신의 욕망과 싸운다는 것을 뜻하는가? 
Q2-우리는 좋다고 하는 것만을 바라는가? 
Q3-의무를 다하는 것만으로 충분한가? 
Q4-무엇을 비인간적인 행위라고 하는가? 
Q5-일시적이고 순간적인 것에도 가치가 존재하는가? 
Q6-무엇이 내 안에서 어떤 행동을 해야 할 지를 말해 주는가? 
Q7-우리는 정념을 찬양할 수 있는가? 
Q8-종교적 믿음을 가지는 것은 이성을 포기한다는 것을 뜻하는가? 
Q9-정열은 우리의 의무 이행을 방해하는가? 
Q10-진실에 저항할 수 있는가? 
Q11-진리가 우리 마음을 불편하게 할 때 진리 대신 우리에게 위안을 주는 환상을 좇아도 좋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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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아침의 단상


월요일부터 토요일 오후 5시까지는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더 바쁘게, 더 치열하게 산다. 하지만 토요일 5시부터 월요일 출근 때까지는 일에 관한 모든 것을 깨끗이 있고, 안식을 즐긴다.

밀린 일을 생각하면 그 쉬는 시간이 아깝고,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해야할 것같은 압박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내게 주어진 시간에 하지 못할 일이라면, 내 능력 밖이며, 내 능력 밖에 있는 것을 추구하는 것은 내 본분이 아니다. 그것 없이 이룰 수 있는 것이 내게 주어진 것이며, 그것으로 만족할 줄 아는 법을 배우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가족들과 모든 시간을 보낸 토요일 저녁과 일요일 이후, 월요일인 오늘 새벽에 일어나서 어머니를 병원에 모시고 가서 입원수속을 처리하고 늦게야 연구실에 왔지만, "생산적이지 못한" 시간에 대한 부담이 없이 마음이 한없이 가볍고 즐거운 것은 바로 그 한계에 대한 인정과, 그 한계를 두신 창조주에 대한 인정과 감사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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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의 단상


419... 그 때 민주화를 부르짖었던 세대는 지금 어떤 모습으로 있는가?
518... 피를 흘리며 독재에 항거하던 그 세대는 어떤가?
629... 그 넥타이 부대는 어떻고?

그때 그들은 모두 기존 세력, 당시의 중심 세대에 항거했다.
지금은 그들이 기존 세력이고 중심 세대인데, 그들은 (혹은 그 가운데 한 명인 나는) 무슨 변화, 무슨 발전을 이뤄가고 있으며 그것을 위해 뭘하고 있는가?

나만의 생각인지는 모르지만, 그 세력들은 대부분 보수화 되어가는 가운데, 그들이 저항했던 그 세대의 모습을 답습하고 있는 것 같다.

젊은 한 때의 이상에 사로잡힌 열정이 진정으로 의미가 있게 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현실을 모르는 어린시절의 철없는 치기가 아니라 나이가 들어서도 끝까지 붙잡고, 그것에 삶을 던질 수 있다는 것을 구체적인 삶으로 보여줄 때 의미가 있는 것 아닐까?

내가 가장 듣기 싫은 말 중의 하나는 "나도 한 때는..."이라는 말이다.
"나도 한 때는 데모 열심히 했었지..."
"나도 한 때는 정의를 위해 몸을 불살랐었지..."
"나도 한 때는 신앙생활 열심히 했었지..."

"나도 한 때는..."

그럴 때마다 나는 마음 깊은 곳에서 "입닥쳐!"라고 외치고 싶다.
과거는 과거일 뿐 중요한 것은 현재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무엇을 위해 살고 있고, 무엇을 얻기 위해 투쟁하고 있는가이다.

내 스스로에게 "입닥쳐!"라고 말하지 않는 그런 삶을 살기 위해서 오늘도 치열하게 고민하며 싸우며 살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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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위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후 11:15)

고린도교회에서 바울과 그가 전하는 복음을 대적하는 자들에 대해서 바울은 엄중하게 경고한다. 그들은 복음을 훼방하는 사탄의 일꾼들이며, 그들이 어떤 모습으로 보이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열매, 즉 삶(행위)으로 그들 자신들을 입증할 것이고, 그것으로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내 스스로는 적어도 복음을 훼방하는 쪽에 선 사탄의 일꾼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이 말씀은 오늘 아침 내 마음을 찌른다. 그것은 내가 생각하는 것, 그리고 글쓰고 말하는 것으로 판단받는 것이 아니라 내 행위, 내 삶으로 주님 앞에서 판단 받을 것을 분명히 일깨워주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생각이 많다. 그리고 그 생각들을 글로, 혹은 말로 자주 표현한다. 이런 것들은 나로 하여금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데 큰 도움을 준다. 그래서 앞으로도 계속 생각하고 글과 말로 표현하는 작업은 지속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중요한 함정이 있다. 즉, 내가 생각하는 것, 그리고 말하는 것이 바로 나 자신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내 글을 읽거나 내 말을 듣는 사람들을 착각하게 할 뿐 아니라, 더 심각하게도 내 자신을 착각하게 한다. 그 결과 행위(열매, 삶)는 거의 없는데도, 내가 그런대로 쓸만한 사람인 것처럼 착각하는 가운데, 자기의를 높이 쌓아간다. 그 가운데 내 속사람은 후패해가고, 하나님 앞에 씻을 수 없는 큰 죄를 짓는 것이다.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나는 행함에서 지극히 볼품없는 한심한 사람이다. 수 많은 생각과 진리들이 내 머릿속에 머물고, 내 손끝에 머물러 있을 뿐, 행위로 옮겨진 경우는 극히 드물다. 말 그대로 외화내빈인 것이다. 사람들은 속을지 모르지만, 그리고 내 스스로가 내 자신을 속일 수는 있지만, 하나님은 속이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겉모습을 보시거나, 내 말을 보시는 분이 아니라, 내 중심을 보시며, 그 중심에 이끌려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내 행위와 삶을 보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분의 시각에서 볼 때 나는 빈약한 열매를 가진 나무일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참으로 한심하고 더러운 죄인, 그것도 극악무도한 죄인일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그 하나를 보시고, 나를 붙드시는 그 하나님의 이해할 수 없이 놀라운 은혜로 인해서 내가 구원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일은 없겠지만, 하나님 앞에 고개를 들 수 없이 부끄러운 내 모습을 본다. 그리고 그것을 개선시킬 능력이 내게 전혀 없음을 보고 탄식한다.

오직 주의 긍휼만을 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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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심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하지 못하였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었노라. 그러나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가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고후 7:5-6)

오늘 아침 이 말씀이 나에게 큰 위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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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를 하고 싶다...


진득하게 앉아서 공부를 하고 싶은데...
많이 읽고 깊이 생각하는 가운데 벽돌을 쌓는 심정으로 천천히, 하지만 차근차근 한 글자씩 빈 종이에 쏟아 놓고 싶은데...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우리 학교는 그나마 좀 낫지만, 요즘 대학에서는 연구실적이라는 숫자를 지표로 제시하고 그것에 무조건 맞추기를 원하기 때문에, 아직 숙성되지도 않은 아이디어들이 글이 되어 뿌려진다. 사회가, 대학이 그 숙성의 시간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마치 실험 결과가 나오면 뚝딱 글이 나오기를 기대하는 것처럼, 전공을 불문하고 목표치를 제시한다.
열심히 살고 열심히 읽고 열심히 쓰지만, 내가 진정으로 관심이 있는 그런 공부는 요원하기만 하다.
내 인생에 단 한편의 논문을 쓰고 말더라도 진정으로 의미있는 그런 논문을 쓰고 싶은데...
언제까지나 이렇게 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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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모습

최근 오랫만에 한 사람의 사진을 볼 기회가 있었다.
반갑고 기뻤다.
하지만, 내 마음 가운데 생겨나는 슬픔 한 조각은 왜일까?

내가 사는 하루의 삶은 내 모습을 결정한다. 그 모습이 쌓이고 쌓여서 내가 외모로 풍기는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인생에서 하루가 차지하는 분량 만큼의 영향력으로 내 하루 분의 삶은 내 모습을 바꾼다. 보이지 않게, 조금씩... 날마다 대하는 사람은 그 변화를 감지하지 못한다. 날마다 그 변화를 대하는 가운데, 그 사람에 대한 기대도 변하기 때문에... 하지만 일정 기간 그 사람을 대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 변화를 금새 감지한다.

어떤 사람은 그 분위기 속에서 지적인 향취가 나고,
어떤 사람은 거룩함이 묻어난다.
어떤 사람은 돈의 냄새가 때로는 은은하게, 때로는 강하게 나고,
어떤 사람은 악취가 난다.
어떤 사람은 너무 변해서 이 사람이 그 사람인지 다시 생각하게 하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은 10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인 경우도 있다.

10년 뒤, 그리고 20년 뒤 나에게서는 어떤 풍취가 느껴질까?
나를 오랫만에 만난 사람들이 내 모습 속에서 무엇을 발견할까?
내가 실망하고 슬퍼했던 것 만큼이나 그들도 나를 보고 실망하고 슬퍼할까?
아니면 변함없는 모습을 볼까?
그것도 아니면, 그 전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존경할 만한 그런 풍취가 느껴질까?

하루하루의 삶을 어떤 마음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가는가가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바로 내 자신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오늘 무엇을 위해 어떤 마음으로 살았는가, 아니 살고 있는가를 점검하지 않고 그냥 살아 간다면, 10년 뒤 내 모습은...

For we must all appear before the judgment seat of Christ, so that each one may receive what is due for what he has done in the body, whether good or evil. (2 Corinthians 5:10, ESV)

아련한 아픔 가운데, 내 자신을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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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요즘...
진리의 선포는 있지만, 촉촉하게 영혼을 적시는 성령의 역사가 드물고, 수 많은 교인들이 열심히 봉사하고, 그 봉사가 조직적으로 매우 잘 되어 있지만, 섬김이 적은 그런 교회를 경험하고 있다.
바른 것이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당연히 좋고, 그것이 없다면 절대로 가까이 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 바름이 매말라버린 바름이라면, 오히려 그것이 진짜 바름인지 다시 생각해 봐야하지 않을까?
소위 "무위도식"을 끔찍히 싫어하는 목회자의 명령을 따라 교인들의 열심으로 섬기는 것은 바른 것이다. 분명히 바른 교리 위에 서 있고, 그것을 실행함으로 순종하고자 열심히 하고, 교회도 조직적으로 그것을 권장하고 이루어 갈 때, 그것은 참 멋진 일이다. 하지만, 그것인 영혼에 대한 사랑과 관심, 그것도 온유와 겸손과 친절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면, 부담스럽기만 할 뿐이다. 그것은 그들의 열심일 뿐이지, 그 봉사의 대상인 영혼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모든 것이 잘 갖춰져 있지만, 핵심이 빠져 있다는 느낌이 드는 그런 교회... 많은 면에서 부족하지만, 온유함과 겸손함 가운데 사랑이 있는 교회... 둘 중 어느 교회가 더 좋은 교회라고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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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19금 물품


최근 온라인 마켓에서 19세 이하에게는 팔 수 없는 일명 "19금" 제품 하나를 샀다.
그것은 바로...

"레이저 포인터"

온라인 마켓에서 레이저 포인터를 검색했는데, 사진들이 온통 빨간 동그란 원 안에 19가 써진 사진들 뿐이어서 순간 당황했다.

"내가 뭘 잘못 입력했나?"

다시 해 봐도 똑 같이 19금이어서 성인 인증하고 들어가 봤더니, 모두 "레이저 포인터"...
이게 왜 19금일까?

아이들이 레이저 포인터로 장난치다가 실명위기까지 가는 경우가 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이 있지만, 그래도 19금은 좀... 너무 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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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같은 예수님...

부활하신 예수님은 왜 부활후 바로 승천하시거나, 아니면 전과 같이 제자들과 함께 하시지 않고 가끔씩 그들 가운데 나타나기만 하셨을까?

이유야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나는 여기서 어머니처럼 자상하신 예수님을 본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은 예수님의 지상사역의 매듭이었고, 그 이후의 사역은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의 사역이며, 그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은 교회의 사역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적어도 마지막 때까지는 전에 계시던 방식으로 이 땅 가운데 계시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어린 새끼를 두고 둥지를 떠나지 못하는 어미새처럼, 예수님은 지상에 남겨진 제자들을 권념하시고 그들을 도우신다. 예수님과 함께 하지 않고 보혜사이신 성령과 함께 해야하기 때문에 그들과 늘 같이 계시지는 못하지만, 그들에게 종종 나타나셔서 그들의 믿음을 도우신다. 성령강림의 그 날까지 예수님께서 그들을 붙들고 도우시는 것이다.

특히 베드로에 대하시는 예수님의 태도는 참으로 온유하며 자상하다. 가룟인 유다만큼이나 예수님께 죄를 범한 베드로. 마음은 예수님과 함께 하고 싶었지만, 육신의 연약함으로 두려움 가운데, 예수님과의 관계를 완전하게 (= 세 번) 부인했던 그가 예수님께 가진 무거운 죄책감과 그 스스로에게 가졌을 자괴감으로 깊은 고통 가운데 있었던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한 번도 직접적으로 그를 책망하지 않으실 뿐 아니라 그 일 자체를 언급하지도 않으신다. 다만 그에게 나타나시며, 당신의 살아계심과 하나님되심을 드러내 보여주실 뿐이다. 그가 믿음을 일고 자포자기하는 가운데, 그를 짓누르는 죄책감 속에서 유다처럼 자살을 하거나, 아니면 믿음을 포기하고 떠나버리지 않도록 그를 붙잡아 주신다. 방황하는 베드로의 영혼이라는 배의 닻(anchor)이 되어 주셔서, 그를 도우신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그를 먹이시며, 세 번(= 완전하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시면서 그의 마음 중심에 자리잡은 죄책감과 자괴감을 꺼내어 치료하신다. 온유함 가운데 묻어나는 베드로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 그것이 바로 베드로를 치유하였고, 나중에 성령강림으로 인해 그리스도의 위대한 제자로 성장하게 만든 것이다.

내 인생을 살면서 베드로보다 훨씬 더 큰 죄악으로 예수님을 부인하고 대적한 적이 있다. 변명을 하자면 여러가지로 변명할 수 있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어버린 그 일들은 나를 늘 짓눌러 왔다. 하지만, 베드로와 제자를 대하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참 감사드리게 된다. 예수님은 당장 죽어 마땅한 나를 참으시고, 기다리시고, 먹이시고, 그리고 온유함으로 내게 말씀하신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대답은 정해져 있다. 그리고 그것으로 회복의 역사가 일어난다.

어머니같이 자상하고 온유한 예수님의 사랑. 정말... 놀랍고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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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e you..."

주일이었던 어제,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기 위해 가던 큰 딸이 나에게 인사했다.

"See you next weekend!"

주 중에는 아침에 아이들이 일어나기 훨씬 전에 집을 나서고, 밤에는 잠자리에 들고서야 집에 오는 아빠를 보지 못하는 아쉬움의 표현인지, 아니면 그냥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주말에 보자고 한 말인지... 마음 속에서 순간적으로 의문이 들면서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인가?'하는 생각이 스쳐지나 갔다.

초임 교수로서, 해야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상황 가운데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자 주 중에는 새벽에 나가고 하루 종일 연구실에 쳐박혀서 수업준비, 연구를 열심히 하다가 밤늦게 집으로 돌아간다.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은 보통 14시간에서 15시간. 그에 반해 주중에 집에서 보내는 시간은 7시간 정도. 아이들에게 미안해서 금요일과 토요일 저녁, 그리고 주일 종일을 아이들에게만 집중하며 같이 시간을 보내지만, 아이들에게는 그 정도는 너무나 부족한 시간일터...

생각해보면, 아이들이 나를 가장 필요로 할 때가 지금이고, 앞으로 6-7년이 지나고 나면 아빠는 뒷전이고 자신들의 삶을 찾아 바쁘게 살아갈텐데... 내가 하는, 혹은 해야하는 일과 아이들과 함께하는 그 시간의 균형을 맞추기는 쉽지가 않다.

현재로서는 주중에 아침에는 새벽에 나가더라도, 저녁식사는 같이하며,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데, 적어도 당분간은 실현이 불가능한 꿈인 것 같다.

하나님께서 능력 없는 자를 붙드셔서 지적생산성을 현격히 높여 주시기만을 바랄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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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그분의 의지.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요 19:28)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시던 그 과정에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특성은 철저한 수동성이었다. 그분은 십자가의 고난이 시작되던 감람산에서부터 시작해서 자신을 위해 적극적으로 변호하신 적이 없고, 더구나 이적을 배푸시지 않았다(말곰의 귀를 고쳐주신 것을 제외하고는). 체포부터 시작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기까지 예수님은 세상의 악과 권력에 철저하게 희생당한, 마치 아무 힘이 없이 맹수의 공격에 당하는 어린 양과 같은 모습이셨다. 이런 모습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그의 십자가 사건을 실패한 사역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오히려 이 모든 것은 세상의 악의 속성을 속속들이 알고 계신 하나님에 의해 철저하게 계획된 사건인 것이다. 마치 가룟인 유다처럼, 그 악, 악한 자들은 자신들의 파워를 최대한으로 끌어 올려 창조주이신 예수님에게 해를 가하기를 갈망했고, 실재로 행동에 옮겼다. 하지만 예수님 한 분께 쏟아부은 그들의 악으로(혹은 그 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지극히 놀랍고, 지극히 선하신 일을 이루신다. 그것도 철저히 그분의 계획에 의해서...

십자가에 운명하시기 전, 예수님은 당신 편에서 이루어져야할 일들이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면밀히 점검하셨다("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태초에 계획하신 일들이었고, 성경을 통해 계시된 것들이었다. 당신 자신의 시나리오대로 일점일획도 어김없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보신 후, 성경에 예언된 대로(다시 말하면 당신 자신의 계획 대로) "내가 목마르다"는 말씀을 하신다.

십자가라는 비극의 자리는 참으로 paradox한 자리이다. 그것은 최고의 범죄자들의 자리였지만, 가장 고귀한 하나님이 달리셨던 자리였고, 철저한 수동성을 보이신 예수님에 의해 그 어떤 사건보다도 적극적으로 기획된 사건이었으며, 그 무엇보다도 잔인하고 끔찍한 형벌의 자리이지만, 그 무엇보다도 고귀하고 순수하며 아름다운 자리이고, 완전한 실패자의 자리이면서도 성경 역사상 최고의 승리의 자리이다.

믿음의 길을 가면서, 때로는 하나님이 이 세상의 역사를 이끌어가시는 주인이신가, 그분이 내 삶에 관심이라도 있으신가하는 회의가 들 때가 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어떻게...'라며 스스로에게 질문한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제한된 시야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인간의 한계 안에 머물러 있는 우리 눈에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그저 아무런 힘없이, 능력없이 끌려가는 죄수일 뿐인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믿음의 눈이 필요하다. 보이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분의 선하심과 전능하심을 믿는 믿음. 그리고 그 믿음 가운데 더욱 더 주님을 붙잡고 의지하는 신뢰. 그 믿음과 신뢰가 강해져 갈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시야를 조금씩 획득하게 된다. 그러는 가운데, 마치 엘리사가 천군천사가 자신을 호위하고 있는 것을 본 것처럼, 그 전에는 전혀 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를 보는 것이다. 그것이 믿음의 삶이고, 그것이 믿는 자만이 누리는 신비스러운 비밀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날을 기념하는 성 금요일인 오늘. 슬픔과 기쁨, 고통과 쾌락, 수치와 영광, 탄식과 감사가 공존한다.

참으로 기이한 날이다. 하나님의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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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참된 목회자...

이 글은 "복음과상황" 2013년 4월호에 게재된 김회권교수의 "사랑의교회 사태로 본 목회자의 욕망" 중 일부를 허락없이 옮겨 놓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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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혼미의 시대에 영적 분별력을 가진 사람들이 천연기념물처럼 희귀해진 오늘, 한국교회 그리스도인들이 분명히 알아야 할 한 가지 진실은 회개와 쇄신을 요청하는 설교자가 하나님의 영에 가득 찬 예언자요 하나님으로부터 온 참 선지자라는 사실이다. "평안하다"고 외치며 '돈'과 '쾌락'을 추구하는 설교자들, 그리고 대중의 중심 죄악을 규탄하거나 전혀 애통해하지도 않는 설교자들은 하나님과 아무 상관없는, 기독교를 빙자한 종교 흥행사들이다. 하나님에게 속한 설교자들은 하나님이 마음 쏟는 곳에 자신의 마음을 쏟는다. 하나님의 마음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던져져 사는 일 자체가 힘겨운 가장 연약하고 병든 사람들의 삶의 자리다. 가장 연약하고 병든 지체들에게 마음이 잇닿아 있는 상한 목자들이야말로 예언자적 설교자다. 예언자적 설교는 시대의 죄악을 규탄하지만, 그 시대의 중심 죄악 때문에 상하고 망가진 하나님의 어린 양을 돌보는 위로 넘치는 설교다. 곤핍한 자들을 도와주는 황금이 입과 혀, 십자가 핏빛 진심이 깃든 심장을 지닌 설교자를 통해 선포되는 설교다.
(중략)
성령을 알고 성령에 사로잡힌 목회자들은 하나님께 가까이 갈수록 자신의 욕망을 쉽게 부인할 수 있고, 자아가 작아지는 경험을 한다. 타인을 지배하고 조종하려는 권력 정치의 달인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의 몸과 마음을 하나님의 영에 맡겨버리는 순명과 순종만이 하나님을 아는 목회자의 특징이다. 목회자들이 대기업가들이나 정치 지도자들과 쉽게 친교하면서도 어떤 거리감이나 긴장감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들을 그들과 동류의 지배자나 왕적 통치자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대형교회 건물, 불필요한 학위, 정치 경제 거물급과의 스스럼없는 친교와 어울림을 과시하는 것은, 교인을 섬기려는 마음보다는 지배하고 통치하려는 세속군주적 욕망의 변형일 가능성이 크다. 실명을 부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엄청난 군중을 목회한다고 믿는 대형교회 목회자는 겸손하신 성령의 역사에 오랫동안 노출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성령은 거룩한 진리의 영이시며 지극히 인격적인 영이시기에,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군중을 모아놓고 목회한다고 주장하는 대형교회 목회자들의 마음 안에는 거하실 공간이 없을 것이다.
(중략)
교회의 진정한 부흥과 성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보혈 공로와, 그것을 개인의 심령 속에 매개하고 실재화하시는 성령의 종횡무진의 역사하심으로 가능하다. 그러니 모든 목회자는 성령의 역사에 자신의 몸과 마음을 내맡기기만 하면 된다. 기도와 찬양, 설교와 예배는 이 성령의 자유로운 역사하심을 매해하고 중개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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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글이 참으로 주옥같은 글입니다. 가능하면 전문을 정독하시기를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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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믿었으므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요 16:27)

십자가의 고난을 목전에 두신 예수님께서 하늘의 비밀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이 땅에서의 유언을 남기시면서 당신께서 가장 하시고 싶은 말씀, 제자들을 붙잡아 주실 그 놀라운 비밀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 중 제자들에게 가장 위로가 되고 소망이 되었던 말씀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는 말씀이 아닐까?
유대인에게 하나님은 지금의 이슬람의 알라와 비슷한 면이 있었다. 그분은 크고 위대하시며,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신 분으로 범접하기 힘든 분이셨다. 특히 예수님 당시에는 이스라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많이 약화되었고, 절대자로서 멀리 떨어진 율법의 체화된 모습이 지배적이었다. 그런 이미지는 율법주의자들이었던 바리새인들에 의해 강화되었다. 따라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고, 그분과 친밀한 인격적을 관계를 갖는 것도 불가능하게 여겨졌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그분은 내 아버지가 되신다. 그럴 뿐만 아니라 그 아버지는 엄격하고 무섭기만 한 체벌주의적인 아버지가 아니라, "친히(himself)"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사실 그 말씀이 제자들에게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보다 더 복음이 아니었을까?

그 아버지의 사랑. 친히 직접 사랑을 베푸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조건에 대해서 예수님은 단 하나로 정리해서 말씀하신다. 그것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을 믿었으므로"였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께서 주요 구주임을 믿는 믿음이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필요충분조건이 되는 것이다.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회의가 들 때가 있다. 그분이 사랑이 멀게만 느껴지고, 마치 세상에 혼자 던져져 고아가 된 것 같은 느낌으로 힘들 때가 있다. 느껴지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 하나님이 사랑을 확신하는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오늘 가르치신다. 그것은 내 안에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있는가? 그 크기와 상관 없이, (내가 임의로 만들어낸 것이 아닌) 성경에 객관적으로 묘사된 그 예수, 그분의 대한 사랑이 존재하는가, 그리고 바로 그 예수님을 내 하나님이요 구원자로,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이 땅 가운데 보내신 메시야로 믿는 믿음이 있는지를 확인하면 된다. 그 믿음이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나를 친히 사랑하고 계시는 것이다. 내가 그것을 친밀하게 경험하든 말든 말이다. 그 사랑과 믿음이 있는 자는 하나님께 빌립과 같은 요구를 하지 않는다.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믿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진리다.

오늘도 하나님의 사랑 안에 푹 젖어 살련다. 감사와 기쁨으로... 그것은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니까... 그것도 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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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글]"먼저 그의 의를 구하라"

아래 글은 제 글이 아니라 존경하는 역사학자이신 이만열 교수님께서 그분의 페이스북에 올리신 것을 퍼온 것입니다. 너무 좋은 내용이라 나누고 싶어서 이렇게 허락도 안 받고 퍼날랐습니다. 이만열 교수님께는 죄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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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그 의를 구하라] 오늘 오후 3시부터 ‘함석헌읽기’강독회가 푸른역사 아카데미에서 모였다. 이 강독회는 매월 한 번 모여 <함석헌저작집>(한길사, 2009) 전 30권 중 1권씩을 읽어나가고 있다. 이번 모임에서는 김제태 목사의 인도로 <먼저 그 의를 구하라>라는 제목의 제 18권을 읽고 토론했다. 이 책에는 1927년 7월 <성서조선> 창간호에서 1940년 3월 제 134호에 이르기까지 함석헌이 쓴 32편의 글을 수록하고 있다. ‘먼저 그 의를 구하라’라는 글은 32편의 글 중 맨 처음에 나오는 글의 제목이기도 하다. 
이 책의 제목 ‘먼저 그 의를 구하라’는, 신약성경 마태복음 6:31-33절에 나오는 다음의 성경 귀절에 나온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개정개역판)
함석헌의 글에는 위의 성경 구절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에서 ‘그의 나라’는 빼 버린 채 ‘먼저 그 의를 구하라’라고만 언급했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 글이 쓰여진 시기가 1927년 ‘일제강점하’라는 사실도 그 점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일제는 일본 이외의 어느 나라도 용납하지 않으려 한 때가 있었다. 
함석헌은 그 시대에 이런 제목의 글을 쓰면서 많이 망서렸다. 당시 조선은 이 말을 받을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그의 말이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눈물로 양식 삼아가며 북만(北滿)으로 들어가는 형제의 손을 붙잡고 이 말로써 전송할 이가 몇인가. 벗은 허리를 꼬부리고 모욕을 옷 삼아 현해탄을 건너가는 자매를 보고 이 말로써 진정한 위로를 드릴 이가 과연 몇인가. 없다.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 그 안에 새 생명이 창조된 이를 제하고는. 만일 그리 말하는 이가 있으면 그는 양심을 속이는 자라고 꾸짖음을 들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미친 자라고밖에 인정을 받지 못하리라. 실로 이 가르침을 그대로 믿기에는 우리 현실문제는 너무 절박한 듯하다. 너무나도 명백한 듯하다. 이 사실을 모르는 체하고 복음을 믿기는 너무나도 무지한 듯하다. 너무나도 시대착오적인 듯하다. 너무나도 고집인 듯하다. 이 가르침을 실행하는 것은 너무나도 개인 중심적이요 너무나도 고식적이요 너무나도 동포애가 없는 듯하다.” 
함석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먼저 그 의를 구하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이유를 이렇게 강조했다. “현실문제가 아무리 급박하더라도 지식이 아무리 긍정을 아니 하더라도 복음은 진리다. 어찌할 수 없이 진리다. 참 생명을 좇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당시 조선의 젊은이들과 민중을 향해 이렇게 외쳤다. 
“근역(槿域:조선)의 자녀들아, 의를 구하자. 생명을 위하여 먼저 그 의를 구하자 - 현실이 아무리 급박한 듯해도. 이는 우원(迂遠)하고 어리석은 말 같고 점점 더 패멸로 인도하는 말 같으리라. 끌어올리는 두레박줄을 놓으라는 것같이 믿을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듯하리라. 그러나 진리다. 생명에 이르는 진리다. 근역의 자녀들아, 오늘날 우리는 불행에 우는 자다. 환난의 물결은 우리 위를 넘고 비탄의 부르짖음은 우리 입에 가득하다. 우리는 온갖 것을 저주하고 싶고 온갖 것을 파괴하고 싶다. 그러나 아니다. 그로 인하여 살길은 아니 온다. 구원은 오직 의의 신으로부터 온다. 그의 의를 구하라. [요한계시록 21: 3-4절 인용] 흰옷 입은 근역의 자녀들아, 그 의를 구하여라. 네 입은 옷은 정의의 흰 빛이 아니냐. 네 맘도 그와 같이 되기를!”
이 글을 쓰던 시기의 함석헌(1901-1989)은 27세에 불과했다. 동경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기 1년 전, 그는 김교신 등 선후배 동지들이 동인지로 간행한 <성서조선> 창간호에 이 글을 발표했다. 글은 당시 일제의 검열을 피할 정도의 수준을 유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표현과 언론의 자유가 있었다면 아마도 식민지 조선의 비참한 현실 묘사와 더 절절한 호소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 비참한 식민지 상황에서도, 그 비극적 절망 속에서도 낙심하지 말고 ‘먼저 그의 의를 구’해야 한다고 희망을 강조했던 것이다. 상황이 아무리 다르더라도 함석헌이 강조한 ‘먼저 그 의를 구하라’는 당부는 오늘날에도 들려져야 한다. 
오늘 강독회에서 토론하면서 필자는 내 부끄러움을 고백했다. 함석헌이 27세의 젊은 나이에 조국의 사회경제적 억압과 궁핍 속에서도 성경의 생명의 말씀을 씨알들에게 소개하고 용기와 희망을 북돋우려고 한 것은 놀랍다고 했다. 그러나 필자는 성경의 그 대목을 여러번 읽었지만 그 말씀에 주목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젊은이들이 사악한 정권 하에서도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등의 사회경제적 욕구에만 관심을 갖고 스펙쌓기에만 열중하지, 자기 사회의 정의의 문제에 대해서는 무관심해 하는 현상을 보면서 이 말씀에 주목하게 되었다. <복음과상황> 2011년 5월호애 ‘빚진자들이 무임승차까지 한다면’이라는 권두 칼럼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오늘날 젊은이들이 취업전선에 몰두하면서 역사의식마저 상실한 듯하다. 젊은이들을 그렇게 만든 기성세대로서 무력감과 자괴감을 통감한다. 그렇다고 젊은이들의 무기력함이 용서받거나 변명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시대 풍조도 경제 이외의 것에는 신경쓰지 못하도록 교묘하게 옥죄고 있어서 무기력증을 반전시킬 분위기 조성 또한 쉽지 않다. 그러나 젊은이들이 이 함정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결국 경제도, 정의로운 사회도 기약하지 못한다. 이럴 때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마 6:33)는 약속의 말씀에 용기를 얻는다. 그렇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결단 없이는 이 정권, 이 암울한 세대가 파놓은 깊은 수렁을 헤쳐나지 못한다. 이승만정권이나 유신독재체제, 신군부파쇼체제의 엄혹함 속에서도 학생과 젊은이들은 투철한 역사의식을 가지고 불의에 항거하면서 자기 몸을 던졌다. 그것이 민주화를 가져왔고 산업화를 이끌었다. 그 때도 취업자리가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경제적으로 암담했다. 그러나 그들은 공동체의 비전을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는’데서 찾았다. 그것은 곧 스스로의 희생을 의미했다. 그 요구에 먼저 순응했다. 자기 몸을 불사르는 젊음들의 희생이 이만한 정도의 오늘을 이룩했다. 호구지책과 안일한 도생(圖生)만을 위해 젊음을 도로(徒勞)하다가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는 말할 것도 없고 거기에 부수적으로 약속한 ‘이 모든 것’도 기약할 수 없다. 무임승차를 즐기는 공동체에 무슨 미래가 약속될 수 있겠는가.”
함석헌은 1927년 일제 강점하 자기 동족이 희망과 용기를 갖도록, 젊은이다운 혈기를 전혀 노출시키지 않은 채 이 글을 썼다. 이를 보고 놀라움과 감사의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27세에 주목했던 그 말씀이 필자에게는 이 나이에 눈에 띄었으니 그것도 부끄럽지만,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는 후반부의 사회경제적 약속을 보고서야 그 앞에 나오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한 말씀에 주목하게 되었으니 그건 더 부끄럽게 느껴졌다. 함석헌이 식민지하의 상황에서 ‘먼저 그 의를 구하라’고 한 것은, 민주화 산업화 시대에 ‘먼저 그 의를 강조한’것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다. 그는 젊은 시절, 벌써 기독교 사상가의 가능성을 이렇게 보여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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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이르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요 11:47-48)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 참으로 많은 기적들을 행하셨다. 그리고 그 기적은 심지어 죽어서 냄새나는 자를 살리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것은 모든 사람을 경악하게 할 능력이었다.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은 모두가 표적이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점이다. 기적을 행하는 그 능력, 그 사건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무엇인가를 가리키고 있었고, 그것은 바로 그것을 행하시는 그분의 정체성이었던 것이다. 예수님의 기적은 그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가리키는 지시자 역할을 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이 행하신 놀라운 일을 단순히 기적이라 하지 않고 표적이라고 했던 것이다.
예수님을 대적했던 종교지도자들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표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예수님의 기적에 대해 논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은 매우 바람직한 질문이었고, 예수님이 바라시던 질문이었다.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이르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하나님께서 내 인생 가운데 행하신 많은 일들을 보면서 나는 지속적으로 물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것들을 누리는 가운데 나는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그분이 베푸시는 것을 받아 누리는 것으로 만족하고 거기서 끝날 것인가? 아니면 그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그분의 뜻을 좇으며 순종하는 가운데 거룩한 삶을 살 것인가? 이 질문을 하는 것 그 자체, 그리고 그 질문에 바른 답을 하는 것은 신앙생활에 매우 중요한 것이다. 이 질문을 잊고 살 때, 우리는 신앙생활의 역동성을 잃어버리게 되어 관성화되고, 마귀의 밥이 되기에 알맞은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바른 질문을 던진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내 놓은 그들의 답은 가히 경악할 만한 것이었다.

"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이 날부터는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53)

예수님의 기적에 대해서 소상히 알고 있었고, 그것이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표적임을 알고 있었던 그들이 예수님을 대적하고, 급기야 그분을 죽이는 모의를 시작하기에 이른 것이다. 아이러니 한 것은 그 살인 모의가 예수님이 행하셨던 가장 극적인 표적인 나사로를 살리는, 죽은 사람을 살리는 그 사건 바로 뒤에 있었다는 것이다. 나사로를 살리신 것은 단순히 한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죽어 냄새나는 인간들을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의 표현이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매우 중요한 사건이며, 태초부터 계획된 하나님의 세상구원에 대한 비밀을 공개하는 것이었다. 아이러니하게 이런 것을 가장 잘 알고 가장 환영해야할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평소에는 원수로 서로에 대해 으르렁거렸던 그들)이 연합하여 예수님을 대적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대적한는 종교지도자들은 인간의 악한 본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 본성은 선악과 사건으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자기중심성에 근거한 하나님의 상대화이다. 즉, 타락한 인간은 모든 것의 가치판단에 자신의 욕망을 중심에 두며, 그것에 부합하지 않으면 심지어 하나님의 위대한 표적이라 할지라도 "거추장스러운 것", "제거되어야 할 것"으로 치부해 버린다는 것이다.

"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는 두 가지가 중요했다. 한 가지는 그들의 종교권력을 유지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유대의 종교-사회적 자치를 유지해 나가는 것이다. 정치적으로는 로마에 복속되어 있었지만, 로마의 피정복민 정책으로 어느 정도 자치를 허용받았었는데, 그것을 지키는 가운데,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해 나가는 것이 그들에게는 가장 중요했던 것이다. 그것에 걸림돌이 되는 것은 그 무엇이든지 간에--심지어 하나님조차도--제거되어야할 것으로 전락해 버리는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가장 은혜롭고 가장 찬양받아 마땅한 하나님의 역사, 그리고 이 땅에 인간의 몸으로 오신 하나님 당신 그 자체를 대적하고 거부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죽일 모의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가증한 성향은 그들만의 것이 아니고 타락한 인간 모두에게 있는, 따라서 내 안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한 번 겸손을 생각한다. 인간들 사이에서 예의를 차리기 위해 자신을 잠시 낮추는 척하는 거짓 겸손이 아니라, 창조주이시고 왕이시고 구원자 되신 하나님을 바로 인식하고, 그 앞에서 무지하고, 죄악되고, 무능력한 존재인 나 자신을 인식하는 것. 그리고 내 안의 죄악된 욕망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늘 배우고, 성경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관점으로 내 안을 채우려는 노력. 부단한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특히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들, 믿음의 공동체에서 중요한 위치에서 섬기는 자들, 그리고 영적인 리더들은 이 부분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 우리가 꼭 염두에 둬야 할 것은 바로 예수님을 죽일 모의를 한 자들이 당대 존경받는 종교 지도자들이었다는 것이다.

남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내 이야기다. 내가 문제다.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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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위대하심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요 11:32)

사람들은 예수님을 직접 볼 수 있다면, 그 믿음이 참으로 커지고, 하나님께 헌신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이다. 예수님 당시 그분의 이적을 보고도 그분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그분에 대한 참 믿음을 가졌던 사람들은 극히 소수였다. 그 소수 중에서도 도드라진 믿음을 가졌던 자들, 어찌보면 예수님의 제자들보다 더 진실하고 바른 믿음을 가졌던 사람들이 바로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였다. 마르다는 베드로가 디베랴 바닷가에서 드렸던 그 위대한 고백과 동일한 고백을 드렸고,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직전, 그분의 장례를 예비했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들조차도 예수님이 진정으로 어떤 분인지를 완전히 알지는 못했다. 그들의 인식능력에 한계가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예수님의 크심이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그 때나 지금이나 죽은자는 죽은자일 뿐, 다시 살 수가 없는 것이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믿음은 그 인식의 한계 내에 머물렀다. 하지만, 예수님은 "나사로야, 나오라!"라고 명령하심으로써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을 해내셨다. 그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신앙생활의 초기에는 모든 것이 새롭기 때문에 열심히 배우려고 한다. 그 배우려는 자세 이면에는 자신의 지식이 짧다는 고백이 있다. 하나님에 대해서 많이 알지 못한다는 인정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초신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갈 수가 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교회 문화와 성경의 지식에 익숙하게 되면, 어느새 마치 자신은 다 아는 것처럼 하나님의 지식을 추구하는 열정이 식게 된다. 그 결과는 신앙생활의 나태함으로 나타나고, 믿음의 열매들은 점점 줄어들게 된다.
하나님은 크신 분이시다. 그 크심은 초신자가 몇 년 열심히 성경을 공부하고 교회생활과 문화에 익숙하게 되었다고 파악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나님의 크심에 비교한다면, 우리의 자람은 미미한 것일 뿐인 것이다. 따라서 언제나 말씀을 대할 때, 예수 그리스도를 대할 때, 우리 안에는 우리의 무지에 대한 인정에서 비롯되는 겸손이 자리 잡아야 한다. 그분은 항상 내 생각보다 크시다는 것을 명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자세로 성경을 접할 때, 성경은 늘 새로운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새로운 예수님의 면모, 그분의 능력, 그분의 인격, 그분의 뜻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새로움 속에서 예수님에 대한 지식은 자라가는 것이고, 우리의 신앙은 성숙해가는 것이고, 우리 안에 지적 교만이 자리잡을 틈을 주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건강한 신앙생활이다.

이 아침. 하나님 앞에는 늘 겸손해야 함을 깨닫는다. 내 안에 있는 교만을 지적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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