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을 준비하면서 가장 도움이 되는 글이 있어서 여기 퍼 나릅니다. 유기성 목사님께서 페이스북에 쓰신 글이고 늘 그렇듯 허락받지 않고 제 맘대로 여기에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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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손을 붙잡고 있습니까?
1. 오늘 새벽기도회 때, 김영광목사님께서 신 34장에 나오는 모세의 죽음에 대하여 설교하면서, 지금 하나님과 함께 있을 모세의 마음은 어떠할지 생각해 보자고 했습니다.
2. 그렇게 들어가 보고 싶었던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 보지 못하고 요단 동편에서 죽어야 했던 모세, 눈이 흐려진 것도 아니고 기력이 쇠한 것도 아니라 하였으니 하나님께서 건강했던 모세의 생명을 강제로 취하여 가셨다는 말입니다.
게다가 모세의 무덤 조차 아는 이가 없게 만드셨습니다.
40년 광야 길을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왔던 모세로서는 얼마나 섭섭한 일이겠으며, 하나님은 왜 이리 무정하게 하신 것일까요?
3. 그러나 천국에 있는 모세의 마음은 어떨까 생각해 보니 모세에게는 조금도 원망이 없으며 오히려 이 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할 것이라고 깨달아졌습니다.
가나안 땅은 천국을 상징하는 곳입니다. 실제 천국은 아닙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길을 지나던 이상으로 고생을 하였습니다.
모세는 천국의 상징인 가나안이 아니라 진짜 천국에 간 것입니다.
그러니 모세가 무엇이 억울했을까요?
영상으로 보던 휴양지를, 직접 가게 되었다면 억울한 것입니까? 기뻐할 일입니까?
4.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의 눈에서 사라지고, 무덤 조차 아는 이가 없게 됨으로 모세는 우상숭배의 대상이 되는 시험 조차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충분히 숭배의 대상이 될만한 인물이었습니다. 만약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하나님 앞에서 모세는 얼마나 민망했을까요?
사실 출애급은 모세가 이룬 업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 하신 일입니다. 가나안 정복도 모세가 있어야 될 일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모세가 가나안 땅에서 계속 이스라엘 백성들의 관심과 의지의 대상이 되었다면 하나님의 역사에 걸림돌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요단 동쪽 편에서 죽음으로 이런 우려가 다 사라진 것입니다.
5. 모세는 혈기 한번 부린 벌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것만은 아니었음이 분명합니다.
신 34:10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이것이 모세를 향한 하나님의 평가였습니다.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있었고, 그것은 모세를 위하여도 축복이었습니다. 모세는 십자가 구원의 예표인 출애급이라는 위대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쓰임받았다는 것 만으로 족한 것입니다.
종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지 않고, 하나님만 드러나시고 적절한 순간에 깨끗이 뒤로 물러난 것이 얼마나 멋있는 일입니까?
모세는 지금 천국에서 자신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것에 대하여 춤을 추며 감사하고 또 감사하고 있을 것입니다.
6. 그렇습니다. 우리의 판단은 하나님 앞에서 서 보아야 정확히 내려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을 보면 ‘좋다 싫다’, ‘감사하다 섭섭하다’ ‘순종이 된다 안된다’ 모든 것이 다 달라집니다.
7. 그러므로 2013년 마지막 날인 오늘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의 삶을 하나님 앞에서 보게 해 주시기를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한 해를 보내는 이 순간, 억울한 일, 고통스런 일, 기쁜 일, 자랑스런 일들이 있지만 하나님 앞에 서면 완전히 바뀔 것이 한 둘이 아닐 것입니다.
8. 제 마음의 소원은 오직 하나입니다.
새벽에 잠에서 깨는 순간, 주님이 가장 먼저 생각나고, 밥을 먹을 때도 주님을 바라보고, 사람을 만나도, 설교를 해도, 길을 걸을 때도 혼자 있을 때도 오직 주님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주님의 품 안에서 하루를 마감하고 잠이 드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제가 주님께 드릴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 주님께서 제게 말씀하시고 주님의 마음을 알게 하시고 제가 갈 길과 해야 할을 가르쳐주시고 주님의 능력으로 행하게 하시며 친히 저를 통하여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일하실 것입니다.
어떤 일에도 걱정 염려하지 않고 오직 주님의 사랑으로 주위의 모든 이들을 사랑만 하다가 주님이 오라 하실 때, 기쁘게 주님께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9. 2009년 7월부터 이 소원으로 24 시간 주님만 바라보고 살려 했습니다.
일기를 통하여 매일 주님 바라보는 마음을 기록해 왔습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 이제 좀 익숙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 온전히 주님을 바라보고 산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정도만 가지고도 놀라운 변화였습니다. 제 마음이 완전히 뒤집어지고 있습니다.
무엇 보다 매일 매일 주님은 어떻게 역사하실까 기대가 됩니다.
실패도 하지만 곧 회복이 됩니다. 전처럼 실패하는 자리에서 오래 헤매지 않게 되었습니다.
저는 앞으로 주님이 어떻게 주님의 말씀을 제 삶 속에 이루실지 너무 너무 기대가 됩니다.
10. 2012년 6월부터 매일 페이스북에 24 시간 주님을 바라보는 마음을 컬럼으로 썼습니다. 때로는 너무나 힘든 일이었지만 이 역시 제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매일 주님께서 제 삶 속에서 역사하신 일을 기록하려다 보니, 정말 살아계시고 역사하시는 주님을 생생히 경험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11. 지난 일년 반 동안 페이스북에서 저와 함께 하여 주셨던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여러분들께서 댓글로 ‘좋아요’로 메시지로 반응해 주신 것이 제게도 너무나 유익하였고 힘이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외롭지 않았습니다.
12. 새해는 여러분 모두가 주님과 동행하는 것 하나만 충실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 예수님 안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시고 완벽한 계획이 있기 때문입니다.
13. 지금 여러분이 주님의 손을 붙잡고 있다면, 2014년 새해를 완벽히 준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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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20131216,대학 평가에 대한 단상 (이만열 교수)
아래 글은 숙명여대 사학과 교수님으로 재직하셨던 존경하는 이만열 교수님께서 페이스북에 올리신 글을 허락 없이 무단으로 복사한 것입니다. 교수님의 말씀에 100% 공감하며 한국의 대학사회에 대해 심히 걱정이 많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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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16,대학 평가에 대한 단상]: 최근 몇 몇 후배 교수들과 대화를 나눠본 적이 있다. 대화를 나눌 때마다 대학의 변화에 대해서 실감하게 되었다. 그 변화는 우리의 재직 때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것들이어서 놀랍기도 하고 한편 걱정스럽기도 했다. 10여년 전 은퇴할 때만 해도 변화를 어렴풋이 감지했지만, 이렇게 급격하게 변화될 줄은 미처 몰랐다. 그 때까지만 하더라도 중세 이래 지속되어 온 전통적인 대학이념이 유지될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지금은 전통적인 대학상이 존속할 것인가에 대한 회의마저 갖게 되었다.
대학이 변하고 있다고 해서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시대변화에 따라 대학도 변화되어야 한다. 가끔 나의 걱정이 시대변화를 제대로 읽지 못하는 편견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생각을 하면 대학을 두고 걱정하는 내 생각이 얼마나 객관적인가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사람 저사람으로부터 거의 공통되는 우려를 들었을 때, 그런 걱정이 단순히 어떤 개인의 생각이 아니고 대학사회가 공동적으로 느끼고 있는 것이라는 것도 어렴풋이 느끼게 되었다.
그들이 대학을 두고 걱정하는 것 중 대학 평가 하나만 언급하겠다. 교육부에서 행해 오던 대학 평가는 최근에는 모 언론매체에서도 그렇게 하고 있다고 들었다. 교육부와 언론기관은 나름대로 전문가에 의해 다듬어진 평가시스템을 가지고 전국의 대학을 평가할 것으로 안다. 교육부는 대학평가에 따라 막대한 인센티브와 제재를 무기로 활용하고 있다. 대학은 교육부의 이런 전횡에 대해서 주눅이 들어 있고 눈치보기에 급급하다. 평가는 교육부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다. 모 언론기관에서도 최근 수년간 그 평가의 노하우를 축적하고 나름대로 그 평가기준을 개선시켜 가면서 지속적으로 계속해 왔다. 직접적인 인센티브나 제재는 없지만 언론의 영향력 또한 교육부 못지않다. 대학들은 교육부나 언론기관의 평가에 크게 신경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앞으로 대학에 진학할 학생수가 축소됨에 따라 대학구조조정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고 보니, 이런 평가는 대학의 생존문제와도 직결된다고 할 수 있다.
평가의 기준 가운데는 졸업생들의 취업률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취업률을 올리고 실업률을 낮추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고 있다. 그렇게 되다보니 연구와 교수에 힘을 쏟아야 할 교수들이 졸업생들의 취업에 더 신경을 쓰면서 그 방면에 노력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한편 이해됨직 하면서도 한편 서글프지 않을 수 없다. 대학이 전문직업학교로서 기능해야 할 때가 머지 않았고 아울러 지성인으로서의 대학 교수가 거간꾼쯤으로 전락되는 현상이 오지 않을까 두렵다.
졸업생들의 취직의 문제는 곧 연구와 교수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다. 몇 몇 재벌이 인수한 대학에서 사회수요에 따라 학과와 강의를 구조조정한다는 것은 이미 상식화되어 있다. 실용적이지 않은 학문이 퇴출되고 그런 학과는 폐쇄당한다. 그 희생의 대상은 결국 인문학으로 거의 귀결된다. 철학과가 문을 닫고 철학 강의가 사라진다. 인간과 세계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인 철학을 퇴출시키는 형국이라면, 대학이 존재할 이유가 있을까. 세계관과 상상력 등과 관련되어 있는 인문학이 봉쇄당하게 된다면, 실용적인 분야가 양적으로 팽창된다고 해서 질적인 성장을 담보할 수 있을까. 그렇게 될 수 없다. 사립대학과 함께 국공립대학에서도 일어나는 이런 현상마저 좌시해야 할까. 최근 어느 기업에서 실용적인 분야를 담당한 부서에 그 분야와는 거의 관련성이 없는 인문학 전공자를 선출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 깊은 속은 알 수 없지만 세계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이나 인문학적 상상력이 없이는 실용적인 분야도 병진 발전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일까.
대학 평가는 곧 교수 개개인에 대한 평가로 이어진다. 교수에게 주어진 임무는 결국 연구와 교수(가르침)일 것이다. 가르치는 문제는 학생들에 의한 강의평가 등으로도 이뤄지기 때문에 여기서는 굳이 언급하지 않겠다. 문제는 연구다. 대학이 연구의 산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오늘날 시행되고 있는 연구평가시스템으로써 대학 연구의 질을 어느 정도 담보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외국 저널에 게재하여 세계학계의 평가를 중요시한다고 하지만, 국내의 경우는 대부분 평가의 일차적인 기준을 연구의 양에 두고 있다. 그러다 보니 논문을 양산하는 경향이 뚜렷해졌다. 양이 질을 유도할 수 있다는 말도 있지만, 이렇게 다작의 연구가 평가에 그대로 흡수되고 보니 너나 할 것 없이 논문의 양산에 유혹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자연계는 그렇다 치더라도, 인문 사회계에서 1년에 10편 이상의 논문을 쓴 경우가 있다니 이것은 한마디로 놀랍다. 이게 한국 대학의 현실이다.
논문의 양산에는 결국 피상적인 리서치를 통해 통계수치에 의한 간단한 현장 조사 같은 것이 주를 이루고 있다고 한다. 물론 상황에 따라서는 그런 간단한 조사에 의한 리서치가 논문으로 좋은 구실을 할 경우가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연구 분위기가 대학사회를 휩쓸게 되면 이론적인 연구는 거의 어렵게 될 것이다. 수십편의 자료를 이용하여 숙성시킨 논문은, 논문의 양으로 교수의 연구업적을 평가하는 분위기하에서는 쉽게 자라잡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사회의 병리를 찾아내고 그 근원적 치유에 연구시간을 쏟는 그런 심원한 연구가 쉽게 자리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은 명약관화하다. 연구평가를 어떻게 하는 것이 온당한가에 대한 객관적 기준이 없다는 이유로, 양적 기준으로 연구를 평가한다면 일생을 그 한권의 저술을 위해 고민하는 교수는 나올 수 없을 것이다. 대학이 그렇게 된다면, 우리 사회의 지도이념을 고민하는 아카데미즘은 사라질 것이 뻔하고, 대학의 존재이유도 다시 되묻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재래할 것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불구하고 대학에서는 이런 문제를 지양하기 위한 자구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교육부에서 뿌리는 막대한 지원금은 이렇게 대학의 자율성을 마비시키고 건전한 상식마저 폐쇄시키려 하고 있다. 그 많은 프로젝트로 대학의 자구적 발전을 위한 연구에 투자하라. 지성인들 사이에서는 가장 먼저 퇴출시켜야 할 정부의 부처로 교육부를 지목해 왔는데, 대학이 그 평가에 목을 매고 있다면 대학의 질적인 발전은 더 이상 기할 수 없을 것이다. 또 대학이 가장 시장친화적인 언론사에서 하는 평가에 눈치를 본다면 그 또한 대학을 시장논리에 내 맡기는 것이나 다름없다. 대학이 교육부와 언론사의 평가를 벗어나야 할 이유는 이 밖에도 있을 것이다.
양산체제로 연구평가를 전환시킨 결과, 연구에 긴 시간을 투자한 연구가 나오지 않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이것은 또한, 대학의 학문적 고민을 통해 생산된 지성․사상이 치유해야 할 사회문제에 대해서도, 단기적이고 단견적인 처방 밖에는 내놓을 수 없다. 양산체제 하에서 생산된 연구가 강의의 주조를 이루게 된다면, 거기서 배우는 학생들의 지성과 인격이 어떻게 될 것인지 불문이가지(不問而可知)다. 단견적이고 경쟁적이며 이기적인 인간으로 배양할 것이 틀림없다. 얼마전 후배 교수들에게 대들듯이 말했다. 오늘날 학생들이 스펙쌓기에 바쁘고 찰나적인 인간으로 화하고 정의감이 무디어지는 것은 바로 대학 강단의 책임이 크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MB정권 기간, 저 거짓되고 사악한 행태를 보면서도 한번도 제대로 항거하지 못한 그런 대학생들을 양산한 것은 바로 이런 대학의 존재 행태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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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16,대학 평가에 대한 단상]: 최근 몇 몇 후배 교수들과 대화를 나눠본 적이 있다. 대화를 나눌 때마다 대학의 변화에 대해서 실감하게 되었다. 그 변화는 우리의 재직 때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것들이어서 놀랍기도 하고 한편 걱정스럽기도 했다. 10여년 전 은퇴할 때만 해도 변화를 어렴풋이 감지했지만, 이렇게 급격하게 변화될 줄은 미처 몰랐다. 그 때까지만 하더라도 중세 이래 지속되어 온 전통적인 대학이념이 유지될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지금은 전통적인 대학상이 존속할 것인가에 대한 회의마저 갖게 되었다.
대학이 변하고 있다고 해서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시대변화에 따라 대학도 변화되어야 한다. 가끔 나의 걱정이 시대변화를 제대로 읽지 못하는 편견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생각을 하면 대학을 두고 걱정하는 내 생각이 얼마나 객관적인가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사람 저사람으로부터 거의 공통되는 우려를 들었을 때, 그런 걱정이 단순히 어떤 개인의 생각이 아니고 대학사회가 공동적으로 느끼고 있는 것이라는 것도 어렴풋이 느끼게 되었다.
그들이 대학을 두고 걱정하는 것 중 대학 평가 하나만 언급하겠다. 교육부에서 행해 오던 대학 평가는 최근에는 모 언론매체에서도 그렇게 하고 있다고 들었다. 교육부와 언론기관은 나름대로 전문가에 의해 다듬어진 평가시스템을 가지고 전국의 대학을 평가할 것으로 안다. 교육부는 대학평가에 따라 막대한 인센티브와 제재를 무기로 활용하고 있다. 대학은 교육부의 이런 전횡에 대해서 주눅이 들어 있고 눈치보기에 급급하다. 평가는 교육부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다. 모 언론기관에서도 최근 수년간 그 평가의 노하우를 축적하고 나름대로 그 평가기준을 개선시켜 가면서 지속적으로 계속해 왔다. 직접적인 인센티브나 제재는 없지만 언론의 영향력 또한 교육부 못지않다. 대학들은 교육부나 언론기관의 평가에 크게 신경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앞으로 대학에 진학할 학생수가 축소됨에 따라 대학구조조정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고 보니, 이런 평가는 대학의 생존문제와도 직결된다고 할 수 있다.
평가의 기준 가운데는 졸업생들의 취업률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취업률을 올리고 실업률을 낮추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고 있다. 그렇게 되다보니 연구와 교수에 힘을 쏟아야 할 교수들이 졸업생들의 취업에 더 신경을 쓰면서 그 방면에 노력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한편 이해됨직 하면서도 한편 서글프지 않을 수 없다. 대학이 전문직업학교로서 기능해야 할 때가 머지 않았고 아울러 지성인으로서의 대학 교수가 거간꾼쯤으로 전락되는 현상이 오지 않을까 두렵다.
졸업생들의 취직의 문제는 곧 연구와 교수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다. 몇 몇 재벌이 인수한 대학에서 사회수요에 따라 학과와 강의를 구조조정한다는 것은 이미 상식화되어 있다. 실용적이지 않은 학문이 퇴출되고 그런 학과는 폐쇄당한다. 그 희생의 대상은 결국 인문학으로 거의 귀결된다. 철학과가 문을 닫고 철학 강의가 사라진다. 인간과 세계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인 철학을 퇴출시키는 형국이라면, 대학이 존재할 이유가 있을까. 세계관과 상상력 등과 관련되어 있는 인문학이 봉쇄당하게 된다면, 실용적인 분야가 양적으로 팽창된다고 해서 질적인 성장을 담보할 수 있을까. 그렇게 될 수 없다. 사립대학과 함께 국공립대학에서도 일어나는 이런 현상마저 좌시해야 할까. 최근 어느 기업에서 실용적인 분야를 담당한 부서에 그 분야와는 거의 관련성이 없는 인문학 전공자를 선출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 깊은 속은 알 수 없지만 세계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이나 인문학적 상상력이 없이는 실용적인 분야도 병진 발전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일까.
대학 평가는 곧 교수 개개인에 대한 평가로 이어진다. 교수에게 주어진 임무는 결국 연구와 교수(가르침)일 것이다. 가르치는 문제는 학생들에 의한 강의평가 등으로도 이뤄지기 때문에 여기서는 굳이 언급하지 않겠다. 문제는 연구다. 대학이 연구의 산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오늘날 시행되고 있는 연구평가시스템으로써 대학 연구의 질을 어느 정도 담보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외국 저널에 게재하여 세계학계의 평가를 중요시한다고 하지만, 국내의 경우는 대부분 평가의 일차적인 기준을 연구의 양에 두고 있다. 그러다 보니 논문을 양산하는 경향이 뚜렷해졌다. 양이 질을 유도할 수 있다는 말도 있지만, 이렇게 다작의 연구가 평가에 그대로 흡수되고 보니 너나 할 것 없이 논문의 양산에 유혹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자연계는 그렇다 치더라도, 인문 사회계에서 1년에 10편 이상의 논문을 쓴 경우가 있다니 이것은 한마디로 놀랍다. 이게 한국 대학의 현실이다.
논문의 양산에는 결국 피상적인 리서치를 통해 통계수치에 의한 간단한 현장 조사 같은 것이 주를 이루고 있다고 한다. 물론 상황에 따라서는 그런 간단한 조사에 의한 리서치가 논문으로 좋은 구실을 할 경우가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연구 분위기가 대학사회를 휩쓸게 되면 이론적인 연구는 거의 어렵게 될 것이다. 수십편의 자료를 이용하여 숙성시킨 논문은, 논문의 양으로 교수의 연구업적을 평가하는 분위기하에서는 쉽게 자라잡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사회의 병리를 찾아내고 그 근원적 치유에 연구시간을 쏟는 그런 심원한 연구가 쉽게 자리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은 명약관화하다. 연구평가를 어떻게 하는 것이 온당한가에 대한 객관적 기준이 없다는 이유로, 양적 기준으로 연구를 평가한다면 일생을 그 한권의 저술을 위해 고민하는 교수는 나올 수 없을 것이다. 대학이 그렇게 된다면, 우리 사회의 지도이념을 고민하는 아카데미즘은 사라질 것이 뻔하고, 대학의 존재이유도 다시 되묻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재래할 것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불구하고 대학에서는 이런 문제를 지양하기 위한 자구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교육부에서 뿌리는 막대한 지원금은 이렇게 대학의 자율성을 마비시키고 건전한 상식마저 폐쇄시키려 하고 있다. 그 많은 프로젝트로 대학의 자구적 발전을 위한 연구에 투자하라. 지성인들 사이에서는 가장 먼저 퇴출시켜야 할 정부의 부처로 교육부를 지목해 왔는데, 대학이 그 평가에 목을 매고 있다면 대학의 질적인 발전은 더 이상 기할 수 없을 것이다. 또 대학이 가장 시장친화적인 언론사에서 하는 평가에 눈치를 본다면 그 또한 대학을 시장논리에 내 맡기는 것이나 다름없다. 대학이 교육부와 언론사의 평가를 벗어나야 할 이유는 이 밖에도 있을 것이다.
양산체제로 연구평가를 전환시킨 결과, 연구에 긴 시간을 투자한 연구가 나오지 않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이것은 또한, 대학의 학문적 고민을 통해 생산된 지성․사상이 치유해야 할 사회문제에 대해서도, 단기적이고 단견적인 처방 밖에는 내놓을 수 없다. 양산체제 하에서 생산된 연구가 강의의 주조를 이루게 된다면, 거기서 배우는 학생들의 지성과 인격이 어떻게 될 것인지 불문이가지(不問而可知)다. 단견적이고 경쟁적이며 이기적인 인간으로 배양할 것이 틀림없다. 얼마전 후배 교수들에게 대들듯이 말했다. 오늘날 학생들이 스펙쌓기에 바쁘고 찰나적인 인간으로 화하고 정의감이 무디어지는 것은 바로 대학 강단의 책임이 크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MB정권 기간, 저 거짓되고 사악한 행태를 보면서도 한번도 제대로 항거하지 못한 그런 대학생들을 양산한 것은 바로 이런 대학의 존재 행태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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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at
오전 10:06:00
어려움.
세상은 학교이고 인생은 배움이다.
내 주변에 많이 있는 뛰어난 분들을 통해 배우고,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문제를 통해 배운다.
내 약점이 드러날 때는 고통스럽지만 그것을 통해 깨닫는 바 역시 크다.
내어리석음은 나를 경손하게 하고 하나님께 의뢰하는 마음을 키우고, 연약한 모습은 나로 하여금 더 강해지겠다는 다짐을 하게 한다.
세상은 두려운 곳이지만 포기할 정도는 아니다. 20년, 아니 30년, 더 나아가 40년 후를 바라보며 한 걸음씩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련다.
남들보다 빨리 갈 능력은 없지만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갈 수는 있다.
내일은 오늘봐는 더 큰 나. 더 강한 나. 더 지혜로운 나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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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주변에 많이 있는 뛰어난 분들을 통해 배우고,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문제를 통해 배운다.
내 약점이 드러날 때는 고통스럽지만 그것을 통해 깨닫는 바 역시 크다.
내어리석음은 나를 경손하게 하고 하나님께 의뢰하는 마음을 키우고, 연약한 모습은 나로 하여금 더 강해지겠다는 다짐을 하게 한다.
세상은 두려운 곳이지만 포기할 정도는 아니다. 20년, 아니 30년, 더 나아가 40년 후를 바라보며 한 걸음씩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련다.
남들보다 빨리 갈 능력은 없지만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갈 수는 있다.
내일은 오늘봐는 더 큰 나. 더 강한 나. 더 지혜로운 나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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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at
오전 9:57:00
Humility is...
“Humility is not thinking less of yourself, but thinking of yourself less.”--by C.S. Lewis
... and thinking more of God and other people...
"Truly true" as Francis Schaeffer once sa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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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nd thinking more of God and other people...
"Truly true" as Francis Schaeffer once sa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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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at
오전 9:11:00
아브라함과 함께 받는 복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갈 3:9)
그동안 성경을 많이 읽어봤지만, 그리고 갈라디아서는 특히 많이 읽어봤지만, 오늘 묵상 본문 말씀 중에서 이 구절이 가슴에 꽂힌다.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야고보와는 달리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의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율법이 아니라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맥락 가운데 나온 것이다. 그리고 믿음으로 받는 복은 궁극적으로 구원임을 생각할 때, 아브라함이 받은 복은 궁극적으로는 구원일 것이다.
하지만, 본문의 의도는 그런 차원에만 머물지는 않는 것 같다. 바울의 전도로 인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의 복음을 받은 갈라디아교회의 영적 질서를 어지럽히고 있는 것은 바로 율법주의였고, 그 율법주의를 주창하는 자들은 필시 유대인, 특히 바리새출신 기독교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유대인들에게 아브라함은 육신의 조상일 뿐만 아니라 그들이 믿는 유대교의 조상이기도 하다. 율법주의의 주창은 바로 그들이 말하는 (바리새인이라는 그 호칭의 원뜻과 같이)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을 말하고, 그것은 바로 로마의 압제로 나라를 빼앗긴 유대인들이 율법을 준수함으로써 아브라함이 받았던 모든 복, 즉 자속의 복과 땅의 복을 받을 수 (혹은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은 그런 그들의 전제와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받았던 모든 복은 그의 믿음에서 근거한 것이지 그의 행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야고보도 그의 믿음을 확증해 주는 근거로서의 행위를 강조함으로 바울과 같은 입장에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또한 아브라함에게 약속되었던 그 "복"을 누리는 통로라는 것이다.
개신교, 특히 세상의 물질적 축복에 과도한 관심을 가지는 경향을 경계하는 측에서는 아브라함이 받은 복을 "구원"으로 한정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일 것이다. 그는 오실 메시야를 믿었기 때문에 그분을 바라보고 즐거워하는 특권을 누렸고, 구원을 얻었다.
하지만 아브라함이 받은 복은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그리고 선지자로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하심을 받았다. 그의 불순종이 있었지만, 그 믿음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용서하시고 아브라함의 보호자요 하나님되심을 포기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그에게 필요한 것들을 부족함이 없이 채우셨다. 비록 정작 약속하신 자손과 땅의 축복은 아브라함 당대가 아니라 후대로 미루셨지만...
아브라함과 함께 받는 복은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복이라고 믿는다.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
그동안 성경을 많이 읽어봤지만, 그리고 갈라디아서는 특히 많이 읽어봤지만, 오늘 묵상 본문 말씀 중에서 이 구절이 가슴에 꽂힌다.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야고보와는 달리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의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율법이 아니라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맥락 가운데 나온 것이다. 그리고 믿음으로 받는 복은 궁극적으로 구원임을 생각할 때, 아브라함이 받은 복은 궁극적으로는 구원일 것이다.
하지만, 본문의 의도는 그런 차원에만 머물지는 않는 것 같다. 바울의 전도로 인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의 복음을 받은 갈라디아교회의 영적 질서를 어지럽히고 있는 것은 바로 율법주의였고, 그 율법주의를 주창하는 자들은 필시 유대인, 특히 바리새출신 기독교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유대인들에게 아브라함은 육신의 조상일 뿐만 아니라 그들이 믿는 유대교의 조상이기도 하다. 율법주의의 주창은 바로 그들이 말하는 (바리새인이라는 그 호칭의 원뜻과 같이)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을 말하고, 그것은 바로 로마의 압제로 나라를 빼앗긴 유대인들이 율법을 준수함으로써 아브라함이 받았던 모든 복, 즉 자속의 복과 땅의 복을 받을 수 (혹은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은 그런 그들의 전제와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받았던 모든 복은 그의 믿음에서 근거한 것이지 그의 행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야고보도 그의 믿음을 확증해 주는 근거로서의 행위를 강조함으로 바울과 같은 입장에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또한 아브라함에게 약속되었던 그 "복"을 누리는 통로라는 것이다.
개신교, 특히 세상의 물질적 축복에 과도한 관심을 가지는 경향을 경계하는 측에서는 아브라함이 받은 복을 "구원"으로 한정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일 것이다. 그는 오실 메시야를 믿었기 때문에 그분을 바라보고 즐거워하는 특권을 누렸고, 구원을 얻었다.
하지만 아브라함이 받은 복은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그리고 선지자로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하심을 받았다. 그의 불순종이 있었지만, 그 믿음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용서하시고 아브라함의 보호자요 하나님되심을 포기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그에게 필요한 것들을 부족함이 없이 채우셨다. 비록 정작 약속하신 자손과 땅의 축복은 아브라함 당대가 아니라 후대로 미루셨지만...
아브라함과 함께 받는 복은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복이라고 믿는다.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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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0:04:00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할까?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벧후 3: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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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8:10:00
[펌] WCC에 대한 유기성 목사님의 견해
아래 글은 최근 논란이 많이 되고 있는 WCC에 대한 유기성 목사님의 견해입니다. 목사님께서 페이스북에 올리신 글을 허락도 받지 않고 제 맘대로 그대로 복사해 옮긴 글입니다.
한 글자도 더하거다 뺄 것이 없이 고스란히 제 마음을 그대로 담아 놓으신 듯한 글이네요. 놀랍고 존경스럽습니다.
-------------------
WCC 한국총회에 대한 논란에 대하여
1. 부산에서 목회할 때, 감리교 목사라는 한가지 이유로 이단 취급을 받았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감리교 신학교의 교수들의 신학적 입장 때문에 보수적인 교회로부터 받은 정죄요 따돌림이었습니다. ‘교수들이 그러니 너도 같을 것이 아니냐?’ 는 것입니다.
2. 안타까운 일은 WCC 문제로 그와 비슷한 일을 지금 다시 겪는다는 것입니다.
WCC에서 국민일보에 광고할 때, 한국 총회의 조직표를 내 보낸 모양인데, 거기에 제 이름과 사진이 실렸습니다.
그로 인하여 제게 메일로, 페이스북 메시지로, 댓글로 해명을 요구하거나 비난하거나 심지어 이단이라, 신사참배와 같은 배교자라고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3. WCC 총회 조직에 제가 들어간 것은 저의 동의 절차를 생략하고 제가 감리교 목사인 이유 하나 때문에 감리교 본부에서 그렇게 올린 것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 일에 대하여 적극적인 조치나 해명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전에도 그런 일이 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WCC에서 제기된 주장들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WCC 총회 개최를 반대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WCC 총회가 모이지 못하게 시위를 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보는 것은 잘못된 발언이 나올까봐 아예 회의를 소집하지 말자는 것과 같은 논리이기 때문입니다.
4. WCC에 대하여 가장 중립적이고 균형있는 글을 쓰신 고신대 신대원 양낙흥 교수의 논문을 읽어 보시기를 추천합니다. (인터넷에 검색하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5. WCC는 본래 세계 선교라는 지상 명령을 수행함에 있어 분리된 여러 개신교회들의 경쟁과 중복적 투자가 중대한 장애물이 된다는 것을 인식한 선교사님들의 필요에 의하여 시작된 조직입니다.
또한 1, 2차 세계 대전을 목격한 세계 교회 지도자들이 전쟁과 폭력을 막고 세계 평화를 유지하는 일에 대한 기독교의 책임감을 느끼고 국제 연합과 유사한 국제적 교회협의 기구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세계적 협력을 가능하게 하는 교회 단체의 필요성을 자각하여 구상된 것입니다.
6. 그렇다고 WCC가 소속 교회들을 완전히 통합하는 세계교회는 아닙니다. 사도신경이 말하는 ‘하나의 거룩한 교회’도 아닙니다. 전 세계의 여러 교단들이 함께 모여 의논하고 전도나 선교를 비롯한 구제와 자선 등의 기독교 사역에 힘을 합치자는 것입니다.
7. 당연히 WCC는 다양한 신학과 경향을 가진 교회들을 회원으로 두고 있습니다. 신학적으로 진보 뿐 아니라 보수적인 교단들이 어우러져 있습니다. 따라서 WCC에는 공식적 신학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하나님으로 고백한다”는 것, 그리고 성경의 권위와 삼위일체론을 인정한다는 것 외에는 상세한 신학 체계가 없습니다.
8. WCC는 각 회원 교회가 원치 않는 신학적 입장을 강요하거나 다른 교회와 통일을 이루도록 강압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WCC 회원 교회들 가운데 일부나 거기에 속한 일부 인사들에게 해당되는 문제를 가지고 WCC 회원 교회 전부 혹은 다수가 그렇다고 주장하는 것은 WCC를 충분히 알지 못하여 오해하는 것입니다.
9. 안타까운 것은 WCC 안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이들이 주로 진보적 신앙을 가진 자들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때로 가슴 철렁하는 주장들이 제기되기도 합니다.
10. 저는 동성애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에는 결코 동의하지 않습니다. 종교다원주의가 시대적인 대세이라, 타 종교에 대하여 열린 마음으로 대하여야 한다는 점에는 수긍하지만, 다른 종교에도 구원의 길이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구원받을 유일한 길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을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11. 저는 신학적으로 분명히 보수적인 입장입니다.
그러나 진보적 신학을 가진 이들을 배도자 배교자, 신사참배자 등으로 정죄하는 것에는 반대합니다.
언제가는 주님 앞에서 양과 염소로 갈라지는 일이 있겠지만 그것이 보수신학이냐 진보신학이냐로 갈라진다고 믿지는 않습니다. 그들이 맺는 열매를 통하여 구분이 될 것입니다.
12. WCC 총회를 반대하는 이들 중에도 도저히 함께 할 수 없는 이들이 있음을 봅니다.
WCC 총회를 반대하는 것 하나만 가지고 다 같은 부류라고 말하면 틀림없이 화를 낼 것입니다. 말이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WCC 총회에 참가했다고 다 같은 사람들이라고 매도하는 것은 크게 잘못을 하는 것입니다.
13. WCC 논란은 갑작스런 문제가 아니라 진보적인 신학과 보수적인 신학의 해묵은 논쟁일 뿐입니다.
14. 저는 신학교에 다닐 때 진보적인 신학을 가르치는 교수님으로 인하여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아침마다 수업이 시작되기 전 몇몇 친구들이 다락방에 모여서 교수님들이 회개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그런 입장에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15. 그러나 저는 진보적인 신학적 견해를 가진 이들도 너무나 성실하고 진실되고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임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제 친구들이기도 합니다. 그들의 주님을 향한 사랑과 열정을 인정하며 존경하기도 합니다.
16. 진보적 신앙을 가진 이들이 성경적인 진리를 고수하거나 외적인 경건에 대하여 강조하는 면에는 약하기도 하지만 약자와 고난당하는 자, 소외된 자들에 대한 관심과 교회의 책임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깁니다.
하나님의 정의를 구현하는 일을 위하여는 고난당하는 것을 감수하는 용기가 있었습니다.
이 일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결코 있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17. 보수 정통 신앙을 가진 이들은 성경적 진리를 고수하고 경건에 힘쓰고 전도에 열심을 내는 것은 매우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사회 정의에 대하여 무관심하거나, 기복적인 신앙에 빠지거나, 탐욕적으로 교회 성장을 추구하거나 끊임없이 분열을 일삼는 것은 마음 아픈 일이었습니다.
18. 저는 보수적인 신앙을 가진 성도나 진보적인 신앙을 가진 성도들이 서로에게서 배울 점이 있다고 믿습니다.
19. WCC 논란에 대하여 마음이 아픈 것은 성숙한 토의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WCC에 참여하면 배도자 배교자라 정죄하는 글을 보았지만 저를 설득하지 못하였습니다.
WCC에 대하여 비판적인 입장을 가지는 것은 필요하지만 장점은 외면하고 단점만 부각시켜 말하거나 감정적으로 정죄하고 왜곡된 주장만 하는 것은 옳바른 방식도 아니고 성경적 태도도 아닙니다. 오히려 순수성과 진정성에 대한 의심을 부추길 뿐입니다.
무엇 보다 이런 방식은 오류에 빠진 사람들을 돕는 길도 못 되며 오히려 반발만 초래하는 일이 됩니다.
20. 미국 교회에 독일의 진보 신학이 소개되었을 때, 많은 보수적 신앙을 가진 신학자들이 학교를 지키면서 신학적인 토론과 설득을 통하여 문제를 풀어가지 못하고, 분리하는 결정을 함으로써 대부분의 미국 신학교들이 진보적 신학자들의 차지가 되었던 일을 거울 삼아야 할 것입니다.
21. 양낙흥교수님의 말씀에 저도 동의합니다.
“한국의 보수 복음주의 교회들이 정말 자신들의 신학과 강조점의 건전성을 확신하고 그것에 자신감과 애착을 가지고 있다면 WCC에 들어가서 리더십을 발휘함으로 WCC의 이탈을 바로 잡는 적극적 역할을 하는 것을 검토할 수는 없을까?”
22. “분명한 학문적 이론적 근거를 가지고 어떤 신학과 경향을 비판하는 것은 필요하고, 이런 건설적이고 신사적인 평가와 지적은 그 대상들에게도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자성과 반성을 통한 궤도 수정의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23. “정말 WCC의 신학적 오류와 복음주의적 신학의 건전성을 확신한다면 불신자들과 이교도들에게 선교하러 가는 것 이상으로 그리스도의 교회로 자처하는 형제들을 진리로 인도하고 설득해야 할 책임이 있을 것이다”
24. “세계교회협의회는 전 세계 기독교회들 최대의 모임이다. 지상의 어떤 기독교 단체도 그처럼 세계 100여개 이상의 나라들에서 모인 수 백개의 교단들로 이루어진 것이 없다. 전 세계 기독교회들이 단합된 반응을 보일 필요가 있을 때 전 세계의 회원 교회들에게 연락하여 공동의 보조를 취하도록 요청할 수 있는 길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WCC는 설령 그것에 다소 교리적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가볍게 포기해서는 안 될 가치 있는 기독교 단체이다. 신실한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들은 하나님 나라의 대의를 위해 이 세계적 기독교 단체를 잘 활용할 필요가 있다.“
25.이럴 때일수록 우리가 정말 주목해 보아야 할 주님의 말씀이 있다고 봅니다.
계 2장에서 에베소교회가 이단을 막으려고 애를 썼던 점을 칭찬하시면서도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것을 엄히 책망하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도 그럴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한가지 계명을 주셨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요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그러므로 WCC 총회에 대한 논의는 하되 판단과 정죄가 아니라 형제를 사랑함으로 하였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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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글자도 더하거다 뺄 것이 없이 고스란히 제 마음을 그대로 담아 놓으신 듯한 글이네요. 놀랍고 존경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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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CC 한국총회에 대한 논란에 대하여
1. 부산에서 목회할 때, 감리교 목사라는 한가지 이유로 이단 취급을 받았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감리교 신학교의 교수들의 신학적 입장 때문에 보수적인 교회로부터 받은 정죄요 따돌림이었습니다. ‘교수들이 그러니 너도 같을 것이 아니냐?’ 는 것입니다.
2. 안타까운 일은 WCC 문제로 그와 비슷한 일을 지금 다시 겪는다는 것입니다.
WCC에서 국민일보에 광고할 때, 한국 총회의 조직표를 내 보낸 모양인데, 거기에 제 이름과 사진이 실렸습니다.
그로 인하여 제게 메일로, 페이스북 메시지로, 댓글로 해명을 요구하거나 비난하거나 심지어 이단이라, 신사참배와 같은 배교자라고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3. WCC 총회 조직에 제가 들어간 것은 저의 동의 절차를 생략하고 제가 감리교 목사인 이유 하나 때문에 감리교 본부에서 그렇게 올린 것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 일에 대하여 적극적인 조치나 해명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전에도 그런 일이 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WCC에서 제기된 주장들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WCC 총회 개최를 반대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WCC 총회가 모이지 못하게 시위를 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보는 것은 잘못된 발언이 나올까봐 아예 회의를 소집하지 말자는 것과 같은 논리이기 때문입니다.
4. WCC에 대하여 가장 중립적이고 균형있는 글을 쓰신 고신대 신대원 양낙흥 교수의 논문을 읽어 보시기를 추천합니다. (인터넷에 검색하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5. WCC는 본래 세계 선교라는 지상 명령을 수행함에 있어 분리된 여러 개신교회들의 경쟁과 중복적 투자가 중대한 장애물이 된다는 것을 인식한 선교사님들의 필요에 의하여 시작된 조직입니다.
또한 1, 2차 세계 대전을 목격한 세계 교회 지도자들이 전쟁과 폭력을 막고 세계 평화를 유지하는 일에 대한 기독교의 책임감을 느끼고 국제 연합과 유사한 국제적 교회협의 기구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세계적 협력을 가능하게 하는 교회 단체의 필요성을 자각하여 구상된 것입니다.
6. 그렇다고 WCC가 소속 교회들을 완전히 통합하는 세계교회는 아닙니다. 사도신경이 말하는 ‘하나의 거룩한 교회’도 아닙니다. 전 세계의 여러 교단들이 함께 모여 의논하고 전도나 선교를 비롯한 구제와 자선 등의 기독교 사역에 힘을 합치자는 것입니다.
7. 당연히 WCC는 다양한 신학과 경향을 가진 교회들을 회원으로 두고 있습니다. 신학적으로 진보 뿐 아니라 보수적인 교단들이 어우러져 있습니다. 따라서 WCC에는 공식적 신학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하나님으로 고백한다”는 것, 그리고 성경의 권위와 삼위일체론을 인정한다는 것 외에는 상세한 신학 체계가 없습니다.
8. WCC는 각 회원 교회가 원치 않는 신학적 입장을 강요하거나 다른 교회와 통일을 이루도록 강압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WCC 회원 교회들 가운데 일부나 거기에 속한 일부 인사들에게 해당되는 문제를 가지고 WCC 회원 교회 전부 혹은 다수가 그렇다고 주장하는 것은 WCC를 충분히 알지 못하여 오해하는 것입니다.
9. 안타까운 것은 WCC 안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이들이 주로 진보적 신앙을 가진 자들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때로 가슴 철렁하는 주장들이 제기되기도 합니다.
10. 저는 동성애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에는 결코 동의하지 않습니다. 종교다원주의가 시대적인 대세이라, 타 종교에 대하여 열린 마음으로 대하여야 한다는 점에는 수긍하지만, 다른 종교에도 구원의 길이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구원받을 유일한 길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을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11. 저는 신학적으로 분명히 보수적인 입장입니다.
그러나 진보적 신학을 가진 이들을 배도자 배교자, 신사참배자 등으로 정죄하는 것에는 반대합니다.
언제가는 주님 앞에서 양과 염소로 갈라지는 일이 있겠지만 그것이 보수신학이냐 진보신학이냐로 갈라진다고 믿지는 않습니다. 그들이 맺는 열매를 통하여 구분이 될 것입니다.
12. WCC 총회를 반대하는 이들 중에도 도저히 함께 할 수 없는 이들이 있음을 봅니다.
WCC 총회를 반대하는 것 하나만 가지고 다 같은 부류라고 말하면 틀림없이 화를 낼 것입니다. 말이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WCC 총회에 참가했다고 다 같은 사람들이라고 매도하는 것은 크게 잘못을 하는 것입니다.
13. WCC 논란은 갑작스런 문제가 아니라 진보적인 신학과 보수적인 신학의 해묵은 논쟁일 뿐입니다.
14. 저는 신학교에 다닐 때 진보적인 신학을 가르치는 교수님으로 인하여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아침마다 수업이 시작되기 전 몇몇 친구들이 다락방에 모여서 교수님들이 회개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그런 입장에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15. 그러나 저는 진보적인 신학적 견해를 가진 이들도 너무나 성실하고 진실되고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임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제 친구들이기도 합니다. 그들의 주님을 향한 사랑과 열정을 인정하며 존경하기도 합니다.
16. 진보적 신앙을 가진 이들이 성경적인 진리를 고수하거나 외적인 경건에 대하여 강조하는 면에는 약하기도 하지만 약자와 고난당하는 자, 소외된 자들에 대한 관심과 교회의 책임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깁니다.
하나님의 정의를 구현하는 일을 위하여는 고난당하는 것을 감수하는 용기가 있었습니다.
이 일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결코 있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17. 보수 정통 신앙을 가진 이들은 성경적 진리를 고수하고 경건에 힘쓰고 전도에 열심을 내는 것은 매우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사회 정의에 대하여 무관심하거나, 기복적인 신앙에 빠지거나, 탐욕적으로 교회 성장을 추구하거나 끊임없이 분열을 일삼는 것은 마음 아픈 일이었습니다.
18. 저는 보수적인 신앙을 가진 성도나 진보적인 신앙을 가진 성도들이 서로에게서 배울 점이 있다고 믿습니다.
19. WCC 논란에 대하여 마음이 아픈 것은 성숙한 토의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WCC에 참여하면 배도자 배교자라 정죄하는 글을 보았지만 저를 설득하지 못하였습니다.
WCC에 대하여 비판적인 입장을 가지는 것은 필요하지만 장점은 외면하고 단점만 부각시켜 말하거나 감정적으로 정죄하고 왜곡된 주장만 하는 것은 옳바른 방식도 아니고 성경적 태도도 아닙니다. 오히려 순수성과 진정성에 대한 의심을 부추길 뿐입니다.
무엇 보다 이런 방식은 오류에 빠진 사람들을 돕는 길도 못 되며 오히려 반발만 초래하는 일이 됩니다.
20. 미국 교회에 독일의 진보 신학이 소개되었을 때, 많은 보수적 신앙을 가진 신학자들이 학교를 지키면서 신학적인 토론과 설득을 통하여 문제를 풀어가지 못하고, 분리하는 결정을 함으로써 대부분의 미국 신학교들이 진보적 신학자들의 차지가 되었던 일을 거울 삼아야 할 것입니다.
21. 양낙흥교수님의 말씀에 저도 동의합니다.
“한국의 보수 복음주의 교회들이 정말 자신들의 신학과 강조점의 건전성을 확신하고 그것에 자신감과 애착을 가지고 있다면 WCC에 들어가서 리더십을 발휘함으로 WCC의 이탈을 바로 잡는 적극적 역할을 하는 것을 검토할 수는 없을까?”
22. “분명한 학문적 이론적 근거를 가지고 어떤 신학과 경향을 비판하는 것은 필요하고, 이런 건설적이고 신사적인 평가와 지적은 그 대상들에게도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자성과 반성을 통한 궤도 수정의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23. “정말 WCC의 신학적 오류와 복음주의적 신학의 건전성을 확신한다면 불신자들과 이교도들에게 선교하러 가는 것 이상으로 그리스도의 교회로 자처하는 형제들을 진리로 인도하고 설득해야 할 책임이 있을 것이다”
24. “세계교회협의회는 전 세계 기독교회들 최대의 모임이다. 지상의 어떤 기독교 단체도 그처럼 세계 100여개 이상의 나라들에서 모인 수 백개의 교단들로 이루어진 것이 없다. 전 세계 기독교회들이 단합된 반응을 보일 필요가 있을 때 전 세계의 회원 교회들에게 연락하여 공동의 보조를 취하도록 요청할 수 있는 길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WCC는 설령 그것에 다소 교리적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가볍게 포기해서는 안 될 가치 있는 기독교 단체이다. 신실한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들은 하나님 나라의 대의를 위해 이 세계적 기독교 단체를 잘 활용할 필요가 있다.“
25.이럴 때일수록 우리가 정말 주목해 보아야 할 주님의 말씀이 있다고 봅니다.
계 2장에서 에베소교회가 이단을 막으려고 애를 썼던 점을 칭찬하시면서도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것을 엄히 책망하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도 그럴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한가지 계명을 주셨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요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그러므로 WCC 총회에 대한 논의는 하되 판단과 정죄가 아니라 형제를 사랑함으로 하였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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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at
오전 11:24:00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이 아니요, 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도 아니라.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신 30:11-14)
하나님께서는 신명기에서 구약의 율법을 재정립하신다. 예수님식으로 간단히 요약하면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눅 10:27)는 것이다. 그 율법에 대해서 자세히 말씀하시고 나서 하신 말씀이 바로 이 말씀이다. 하나님의 명령은 나에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나를 만드신 하나님께서, 그래서 나를 너무나 잘 아시는 그분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나는 그 명령 정도는 가볍게 지킬 수 있도록 창조된 피조물인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볼 때 이 명령은 그리 녹록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본문의 말씀대로 저 하늘 끝에 있어서 도저히 실현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왜일까?
그것은 하나님의 피조물인 내가 죄로 인해 완전히 망가졌기 때문이다. 죄는 암덩어리처럼 온 세포에 퍼져서 내 몸이 제 구실을 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죄라는 암덩어리가 없었다면 너끈히 이룰 수 있는 그 일을, 이제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구약의 명령은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죄에 찌들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바로미터라고 할 수 있다.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내 몸에 퍼져있는 암덩어리를 성령의 능력으로 제거해가는 작업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즉 온전하지는 않더라도 내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는 영역들이 늘어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구원의 증거는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정도가 늘어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구원받은 기쁨 중의 하나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내 자신을 발견하는 것.
그렇게 평생을 살다보면 율법에의 순종이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닌" 정도까지는 아니라 할지라도 지금보다는 훨씬 편하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순종의 제사를 드리게 되지 않을까? 하루라도 빨리 백발 노인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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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신명기에서 구약의 율법을 재정립하신다. 예수님식으로 간단히 요약하면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눅 10:27)는 것이다. 그 율법에 대해서 자세히 말씀하시고 나서 하신 말씀이 바로 이 말씀이다. 하나님의 명령은 나에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나를 만드신 하나님께서, 그래서 나를 너무나 잘 아시는 그분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나는 그 명령 정도는 가볍게 지킬 수 있도록 창조된 피조물인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볼 때 이 명령은 그리 녹록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본문의 말씀대로 저 하늘 끝에 있어서 도저히 실현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왜일까?
그것은 하나님의 피조물인 내가 죄로 인해 완전히 망가졌기 때문이다. 죄는 암덩어리처럼 온 세포에 퍼져서 내 몸이 제 구실을 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죄라는 암덩어리가 없었다면 너끈히 이룰 수 있는 그 일을, 이제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구약의 명령은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죄에 찌들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바로미터라고 할 수 있다.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내 몸에 퍼져있는 암덩어리를 성령의 능력으로 제거해가는 작업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즉 온전하지는 않더라도 내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는 영역들이 늘어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구원의 증거는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정도가 늘어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구원받은 기쁨 중의 하나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내 자신을 발견하는 것.
그렇게 평생을 살다보면 율법에의 순종이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닌" 정도까지는 아니라 할지라도 지금보다는 훨씬 편하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순종의 제사를 드리게 되지 않을까? 하루라도 빨리 백발 노인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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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9:05:00
[펌]사랑으로 증명하라 - 유기성 목사
유기성 목사님께서 페이스북에 올리신 글.
1.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라” “24 시간 주님을 바라보라” “주님과 친밀히 동행하라” “‘예수님은 나의 왕’이라고 고백하며 살라” 고 도전하면서 순간 순간 ‘내가 과연 잘 하고 있는가?’ 돌아보게 됩니다.
2. 너무 지나치다고 여기는 이들도 있고, 아예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조심스러운 반응은 너무 신비주의로 빠지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입니다.
3. 솔직한 제 심정은 누가 무엇이라고 해도 주 예수님을 지식으로 아는데 머무르지 말고 살아계신 주님으로 만나고 동행해야 진정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고후 5:13) 라고 한 사도 바울의 고백이 저의 고백입니다.
4. 그러나 저의 의도와 달리 지나치게 나가는 사람도 생길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이런 문제는 언제나 있어 왔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아무리 좋은 것도 변질시키고 왜곡시키는데 선수였습니다.
성령으로 시작하여 육체로 마치게 되는 일도 늘 있어 왔습니다.
5. 그래서 저는 영을 분별하는 중요한 기준 하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으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이 주신 기준입니다.
요 13: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6. 희랍의 비극 작가 소포클레스는 그의 노년에 이르러 그 자신이 쓴 비극보다도 더 참담하고도 원통한 일을 겪었는데, 재산 상속권이 손자에게 넘어갈 것을 두려워했던 장남 이오폰이 아버지 소포클레스를 미쳤다고 법원에 금치산자 소송장을 내었던 것입니다.
소장에는 소포클레스가 "노망이 들었고 악마에 사로잡혔으므로 재산 관리 능력이 없다"는 소송 이유를 썼습니다.
7. 친아들로부터 노망이 들었고 악마에 사로잡혔다고 고소를 당한 80 고령의 소포클레스의 심정은 비참했습니다. 위대한 시인이라고 존경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악마에 사로잡힌 늙은이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8. 침묵하는 것은 아들의 주장을 묵인하는 것이 될 터이고 그렇다고 법정에서 아들과 싸울 수도 없었습니다. 그럴수록 사람들에게 "과연..." 하는 실망을 안겨 줄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9. 이런 상황에서 노 시인은 법정에 서서 그의 작품 "크로노스 오이디프스"를 낭랑하게 낭송했습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노 시인의 입술에서 노기도 아니라, 애원도 아니고, 맑은 샘물과 같은 시가, 모든 사람의 가슴을 적시는 사랑의 이야기가 온 법정에 울려 퍼졌을 때 누가 그를 가리켜 악마에 사로잡힌 늙은이라고 여길 수 있었겠습니까?
10. 소포클레스가 아들의 말을 듣고 비정하게 돌아선 사람들을 향해 결코 자기가 망령이 난 것도 악마에 사로잡힌 것도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보이는 것은 오직 그의 시 자체 뿐이었습니다.
11. 우리는 때로 우리가 진정 예수님의 사람임을 증명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으로 그것을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말은 하면 할수록 논쟁으로 흐르기 쉽고, 더 혼란스럽기만 하고 심지어 추해지기도 합니다.
자기가 누구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우리가 해야 될 일은 오직, 하나, 우리의 삶으로 사랑을 보여주는 것 밖에는 도리가 없습니다.
12. 진정한 사랑은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 한 분이면 충분한 사람, 예수님이 왕인 사람입니다.
때로 가정이나 교회, 또는 세상에서 억울하고 분한 평가를 받아도 우리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일은 오직 예수님이 왕이 된 사람의 삶 –곧 사랑만 하며 사는 삶을 사는 것 밖에는 도리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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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 가운데서 이 분을 존경하는 정도가 목회자 우상화 수준으로 가지 않을까 걱정스럽기까지 한다.
그분은 경배받아 마땅한 하나님의 노예일 뿐인데... 그리고 유목사님 자신도 자신을 idol로 떠받드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실텐데... 그분의 말씀 하나 하나가 내 마음을 찌르는 진리의 말씀이다보니... 어쨋든 대단하신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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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라” “24 시간 주님을 바라보라” “주님과 친밀히 동행하라” “‘예수님은 나의 왕’이라고 고백하며 살라” 고 도전하면서 순간 순간 ‘내가 과연 잘 하고 있는가?’ 돌아보게 됩니다.
2. 너무 지나치다고 여기는 이들도 있고, 아예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조심스러운 반응은 너무 신비주의로 빠지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입니다.
3. 솔직한 제 심정은 누가 무엇이라고 해도 주 예수님을 지식으로 아는데 머무르지 말고 살아계신 주님으로 만나고 동행해야 진정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고후 5:13) 라고 한 사도 바울의 고백이 저의 고백입니다.
4. 그러나 저의 의도와 달리 지나치게 나가는 사람도 생길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이런 문제는 언제나 있어 왔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아무리 좋은 것도 변질시키고 왜곡시키는데 선수였습니다.
성령으로 시작하여 육체로 마치게 되는 일도 늘 있어 왔습니다.
5. 그래서 저는 영을 분별하는 중요한 기준 하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으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이 주신 기준입니다.
요 13: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6. 희랍의 비극 작가 소포클레스는 그의 노년에 이르러 그 자신이 쓴 비극보다도 더 참담하고도 원통한 일을 겪었는데, 재산 상속권이 손자에게 넘어갈 것을 두려워했던 장남 이오폰이 아버지 소포클레스를 미쳤다고 법원에 금치산자 소송장을 내었던 것입니다.
소장에는 소포클레스가 "노망이 들었고 악마에 사로잡혔으므로 재산 관리 능력이 없다"는 소송 이유를 썼습니다.
7. 친아들로부터 노망이 들었고 악마에 사로잡혔다고 고소를 당한 80 고령의 소포클레스의 심정은 비참했습니다. 위대한 시인이라고 존경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악마에 사로잡힌 늙은이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8. 침묵하는 것은 아들의 주장을 묵인하는 것이 될 터이고 그렇다고 법정에서 아들과 싸울 수도 없었습니다. 그럴수록 사람들에게 "과연..." 하는 실망을 안겨 줄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9. 이런 상황에서 노 시인은 법정에 서서 그의 작품 "크로노스 오이디프스"를 낭랑하게 낭송했습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노 시인의 입술에서 노기도 아니라, 애원도 아니고, 맑은 샘물과 같은 시가, 모든 사람의 가슴을 적시는 사랑의 이야기가 온 법정에 울려 퍼졌을 때 누가 그를 가리켜 악마에 사로잡힌 늙은이라고 여길 수 있었겠습니까?
10. 소포클레스가 아들의 말을 듣고 비정하게 돌아선 사람들을 향해 결코 자기가 망령이 난 것도 악마에 사로잡힌 것도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보이는 것은 오직 그의 시 자체 뿐이었습니다.
11. 우리는 때로 우리가 진정 예수님의 사람임을 증명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으로 그것을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말은 하면 할수록 논쟁으로 흐르기 쉽고, 더 혼란스럽기만 하고 심지어 추해지기도 합니다.
자기가 누구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우리가 해야 될 일은 오직, 하나, 우리의 삶으로 사랑을 보여주는 것 밖에는 도리가 없습니다.
12. 진정한 사랑은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 한 분이면 충분한 사람, 예수님이 왕인 사람입니다.
때로 가정이나 교회, 또는 세상에서 억울하고 분한 평가를 받아도 우리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일은 오직 예수님이 왕이 된 사람의 삶 –곧 사랑만 하며 사는 삶을 사는 것 밖에는 도리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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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1:27:00
어머니
토요일 아침 어머니를 뵈러 기차를 타고 광주로 내려갔다. 광주에서 뵌 어머니는 며칠 전에 위독했던 환자라는 사실이 무색할 정도로 건강하셨고, 식사도 매우 잘 하셨다. 이틀 동안 어머니와 함께하면서 '이제는 한 고비 넘겼구나'라고 생각하며 원래 월요일까지 함께하려던 계획은 접고 어제 밤에 올라왔다.
그리고 오늘 아침. 어머니의 안부가 걱정되어 전화를 드렸다. 어머니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했는데 이모가 받으신다. 그리고 매우 걱정된 목소리로 어머니께서 심한 고통 중에 매우 힘들어 하신다고 말씀하신다.
사실 어제부터 통증이 시작되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아프셨던 것이다. 그런데 아들이 당신 때문에 일하는데 차질이 있을까봐, 그리고 멀리 떨어져 사는 아들이 걱정할까봐 그 극심한 고통을 참으시고 내 앞에서 연기를 하셨다는 것. 그리고 내가 떠나자 마자 쓰러지셔서 고통때문에 아파 정신을 읽고 힘들어 하신다는 것...
평생을 아들들 걱정으로 살아오신 어머니...
인생의 마지막 시간을 보내시는 그 순간까지도 아들들을 위한 그 마음.
자식으로서 오히려 그 마음 때문에 더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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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오늘 아침. 어머니의 안부가 걱정되어 전화를 드렸다. 어머니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했는데 이모가 받으신다. 그리고 매우 걱정된 목소리로 어머니께서 심한 고통 중에 매우 힘들어 하신다고 말씀하신다.
사실 어제부터 통증이 시작되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아프셨던 것이다. 그런데 아들이 당신 때문에 일하는데 차질이 있을까봐, 그리고 멀리 떨어져 사는 아들이 걱정할까봐 그 극심한 고통을 참으시고 내 앞에서 연기를 하셨다는 것. 그리고 내가 떠나자 마자 쓰러지셔서 고통때문에 아파 정신을 읽고 힘들어 하신다는 것...
평생을 아들들 걱정으로 살아오신 어머니...
인생의 마지막 시간을 보내시는 그 순간까지도 아들들을 위한 그 마음.
자식으로서 오히려 그 마음 때문에 더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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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0:15:00
어머니의 마지막 시간들.
지난 화요일(10월 8일). 이모님으로부터 전화를 받고 급히 광주로 내려갔다.
지난 3일부터 어머니께 극심한 통증시 시작됐다는 것. 너무 아파서 집 근처의 큰 병원을 찾았는데, 진료 후 바로 당장 호스피스병동으로 들어 오라고 했다는 것. 그 의사 말로는 (오판이라고 믿고 싶지만) 2주 밖에 안 남으셨다는 것.
자식들이 염려할까봐 그 사실을 함구하고 계셨다가, 현재 사시는 집문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말씀을 하신 것이다.
지난 9월 첫째주에 약 8개월간 어머니의 췌장암 치료를 하던 건국대병원으로부터 더 이상 손 쓸 것이 없다며 사형선고를 듣고 광주로 내려가신 어머니. 췌장암 환자 중에서 매우 드물게 잘 버티고 계신다며 담당 의사선생님이 신기해 하던 어머니에게 갑작스럽게 떨어진 그 선고에 얼얼하던 기억이 엊그제 같은데... 그리고 그분 말씀으로는 앞으로 3개월이라는 예상을 듣고 그래도 조금은 시간이 있다고 믿고 있었는데, 이리 빨리 진척될 줄은 몰랐다.
앞으로 뵐 시간이 얼만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가족들과 함께 내려갔다.
사랑하는 어머니의 생의 끝이 가시권에 들어 왔다는 사실이 나를 멍하게 만들고,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다. 아버지 돌아가실 때 이후로 눈물을 흘려본 적이 언제인가?
광주. 어머니는 호스피스 병동에 들어가기를 거부하셨다. 바로 그 병동에서 2007년에 아버지를 보내신 경험이 있기 때문에 그 병동에 들어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이후가 어떻게 되는 것인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바램은 지금 사시는 집에서 최대한 버티다가 들어 가시겠다는 것. 들어 가시는 그 순간까지 평상시의 삶을 살고 싶으시다는 것. 어머니의 소식을 듣고 모인 자식들 중 어느 누구도 어머니를 만류하는 사람이 없었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어머니의 뜻을 받들어 그것이 가능한 길을 찾는 것일 뿐...
어머니와 형제들을 뒤로하고 어제 밤에 올라왔다.
내 기억 속에는 나에게 사랑을 알게하시고, 희생을 알게하신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영원하겠지만, 이제 살아계신 어머니를 뵈올 날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앞으로 어머니의 상을 치를 때까지 수업하고 수업을 준비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중단하고, 어머니 곁에 머물러야 할 것 같다.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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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일부터 어머니께 극심한 통증시 시작됐다는 것. 너무 아파서 집 근처의 큰 병원을 찾았는데, 진료 후 바로 당장 호스피스병동으로 들어 오라고 했다는 것. 그 의사 말로는 (오판이라고 믿고 싶지만) 2주 밖에 안 남으셨다는 것.
자식들이 염려할까봐 그 사실을 함구하고 계셨다가, 현재 사시는 집문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말씀을 하신 것이다.
지난 9월 첫째주에 약 8개월간 어머니의 췌장암 치료를 하던 건국대병원으로부터 더 이상 손 쓸 것이 없다며 사형선고를 듣고 광주로 내려가신 어머니. 췌장암 환자 중에서 매우 드물게 잘 버티고 계신다며 담당 의사선생님이 신기해 하던 어머니에게 갑작스럽게 떨어진 그 선고에 얼얼하던 기억이 엊그제 같은데... 그리고 그분 말씀으로는 앞으로 3개월이라는 예상을 듣고 그래도 조금은 시간이 있다고 믿고 있었는데, 이리 빨리 진척될 줄은 몰랐다.
앞으로 뵐 시간이 얼만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가족들과 함께 내려갔다.
사랑하는 어머니의 생의 끝이 가시권에 들어 왔다는 사실이 나를 멍하게 만들고,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다. 아버지 돌아가실 때 이후로 눈물을 흘려본 적이 언제인가?
광주. 어머니는 호스피스 병동에 들어가기를 거부하셨다. 바로 그 병동에서 2007년에 아버지를 보내신 경험이 있기 때문에 그 병동에 들어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이후가 어떻게 되는 것인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바램은 지금 사시는 집에서 최대한 버티다가 들어 가시겠다는 것. 들어 가시는 그 순간까지 평상시의 삶을 살고 싶으시다는 것. 어머니의 소식을 듣고 모인 자식들 중 어느 누구도 어머니를 만류하는 사람이 없었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어머니의 뜻을 받들어 그것이 가능한 길을 찾는 것일 뿐...
어머니와 형제들을 뒤로하고 어제 밤에 올라왔다.
내 기억 속에는 나에게 사랑을 알게하시고, 희생을 알게하신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영원하겠지만, 이제 살아계신 어머니를 뵈올 날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앞으로 어머니의 상을 치를 때까지 수업하고 수업을 준비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중단하고, 어머니 곁에 머물러야 할 것 같다.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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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9:16:00
보물 28
첫째인 하연이와 둘째인 예연이는 두 살 차이라서 그런지 자주 다툰다. 한국적인 언니 동생의 위계질서가 있어도 자매지간에 티격태격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그런 위계 질서가 없는 미국적인 평등관계라서 그런지, 그리고 거기에 더해 둘 다 사춘기라서 그 빈도가 좀 많다.
싸움의 프로세스는 이렇다.
주로 예연이가 언니에게 장난을 걸어 온다. 장난은 말장난도 있고, 가벼운 신체적인 접촉도 있다.
이런 장난에 대해서 하연이는 좀 더 과격하게 반응한다. 주로 힘을 써서...
그런 반응을 대하는 예연이는 (늘 그렇듯) 더 격분하는 가운데 힘으로 반격한다.
그 반격이 이제 티격태격의 시작이고, 결국 목소리가 높아지거나 아니면 주로 예연이의 울음으로 끝난다.
어느 쪽으로 귀결되든지 둘의 운명은 엄마나 아빠로부터의 야단이다.
늘 반복되는 패턴의 이 아웅다웅에 대해서 얼마 전에 예연이와 이야기를 나눴다. (나와 둘만의 산책시간이었던가?)
나: 너희들 왜 그리 자주 싸우는거냐?
예: 언니가 너무 과격해요. 나는 장난인데...
나: 언니가 좀 예민하지? 사춘기라서 그래.
예: 장난을 장난으로 받을 줄 모르고 너무 힘을 써요.
나: 그래... 언니가 안 그랬으면 좋겠는데... 그래서 그런데, 네가 언니에게 장난을 걸지 않으면 되지 않을까? 언니를 좀 이해해 주고...
예: 안되요. 절대.
나: 왜?
예: 그럼 무슨 낙으로 살아요? 언니에게 장난치는 것이 삶의 유일한 낙인데...
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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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의 프로세스는 이렇다.
주로 예연이가 언니에게 장난을 걸어 온다. 장난은 말장난도 있고, 가벼운 신체적인 접촉도 있다.
이런 장난에 대해서 하연이는 좀 더 과격하게 반응한다. 주로 힘을 써서...
그런 반응을 대하는 예연이는 (늘 그렇듯) 더 격분하는 가운데 힘으로 반격한다.
그 반격이 이제 티격태격의 시작이고, 결국 목소리가 높아지거나 아니면 주로 예연이의 울음으로 끝난다.
어느 쪽으로 귀결되든지 둘의 운명은 엄마나 아빠로부터의 야단이다.
늘 반복되는 패턴의 이 아웅다웅에 대해서 얼마 전에 예연이와 이야기를 나눴다. (나와 둘만의 산책시간이었던가?)
나: 너희들 왜 그리 자주 싸우는거냐?
예: 언니가 너무 과격해요. 나는 장난인데...
나: 언니가 좀 예민하지? 사춘기라서 그래.
예: 장난을 장난으로 받을 줄 모르고 너무 힘을 써요.
나: 그래... 언니가 안 그랬으면 좋겠는데... 그래서 그런데, 네가 언니에게 장난을 걸지 않으면 되지 않을까? 언니를 좀 이해해 주고...
예: 안되요. 절대.
나: 왜?
예: 그럼 무슨 낙으로 살아요? 언니에게 장난치는 것이 삶의 유일한 낙인데...
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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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0:55:00
단상
하루 종일 연구실에 처박혀 있다가 9시나 10시가 되어서야 집을 향할 때 즈음에는 온 몸을 휘감는 피로감에 많이 힘들다. 그럴 때면 '이렇게까지 살아야 하나?'는 자괴감이 밀려 온다. 그 가운데 스물스물 기어나오는 삶에 대한 불평.
그 불평은 결코 하나님에 대한 원망까지 이어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내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불평은 그 대상이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향한다. 그것은 지금 내 모습을 만드신 분이 그분이기 때문이다. 그분이 나를 두신 자리, 그분이 나를 두신 모양, 형편 등등에 대한 불만이기에 결국 그분에 대한 불만이 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오랜 신앙생활의 훈련으로 인해 그 불평 가운데 오래 머물지 않는 것은 분명 내게 복이다. 불평이 쏟아질 때 즈음, 감사의 제목들이 하나 둘 씩 생각난다.
할 일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
일 할 공간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
건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
공부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 나에게 공부를 지겹지 않게 하심도 감사.
경제적으로 넉넉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부족해서 허덕이지 않게 해 주셔서 감사.
하늘을 바라보며 공부할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
너무 좋은 동료(선배) 교수들을 주셔서 감사.
내가 기여할 수 있는 뭔가가 있는 것에 감사.
가족이 무탈한 것도 감사.
등등등등...
끝없이 흘러나오는 감사는 결국 불평의 기운을 압도한다. 그 가운데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대한 감사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한 감사로 마무리 짓는다.
결국, 내가 어떤 상황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바로 그것이 정말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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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불평은 결코 하나님에 대한 원망까지 이어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내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불평은 그 대상이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향한다. 그것은 지금 내 모습을 만드신 분이 그분이기 때문이다. 그분이 나를 두신 자리, 그분이 나를 두신 모양, 형편 등등에 대한 불만이기에 결국 그분에 대한 불만이 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오랜 신앙생활의 훈련으로 인해 그 불평 가운데 오래 머물지 않는 것은 분명 내게 복이다. 불평이 쏟아질 때 즈음, 감사의 제목들이 하나 둘 씩 생각난다.
할 일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
일 할 공간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
건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
공부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 나에게 공부를 지겹지 않게 하심도 감사.
경제적으로 넉넉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부족해서 허덕이지 않게 해 주셔서 감사.
하늘을 바라보며 공부할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
너무 좋은 동료(선배) 교수들을 주셔서 감사.
내가 기여할 수 있는 뭔가가 있는 것에 감사.
가족이 무탈한 것도 감사.
등등등등...
끝없이 흘러나오는 감사는 결국 불평의 기운을 압도한다. 그 가운데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대한 감사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한 감사로 마무리 짓는다.
결국, 내가 어떤 상황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바로 그것이 정말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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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9:41:00
한의원
1996년 이후 알레르기 비염으로 무지 고생하던 중 지난 주에 한의원을 소개받아 가서 진맥하고 한약을 먹기 시작한 뒤로 일주일에 한 두번씩 침을 맞으러 오라고 해서 피곤하고 힘들었지만 한의원을 향했다. 한의원이 신림사거리에서 서울대 쪽으로 약간 들어간 곳에 있어서 얼마 안 걸릴줄 알고 학교에서 6시에 출발했다. 7시까지라고 했으니 6시 30분 정도에 도착해서 침을 맞으면 되지 않을까 했는데 차가 엄청 많이 막혀서 학교에서 거기까시 55분이 걸리는 바람에 7시가 거의 다 되어서야 도착했다.
너무 늦어서 그냥 갈까 하다가 그래도 거기까지 온 시간이 아까와 들어가면서 선생님에게 늦어서 죄송하다고 했더니,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오느라 수고했다고 하면서 침상에 누우라고 한다. 누우면서 땀이 많이나고 피곤하고 힘들다고 푸념섞어 말했더니 아무 말없이 침을 여러 대를 놓는다. 이렇게 많이 맞을 줄 몰랐는데...
내가 알기로 침은 보통 20분 정도 맞는다고 하는데 7시부터 시작해서 거의 8시까지 꼼짝 못하고 누워 있었다. 약 50분 정도가 경과한 후 침을 뺐고, 선생님과 내 체질과 건강관리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많이 힘들어 하는 것 같아서 비염 뿐만 아니라, 땀을 적게 흘리는 것, 피로를 푸는 것, 원기가 회복되는 것 등 여러 가지를 생각해서 침을 놓았다고 한다. (그래서 침이 그렇게 많았던 모양이다.) 늦은 시간인데도 전혀 짜증내거나 눈치를 주지 않고 차분하게 이야기를 해 주신다. 많은 도움이 되었다.
한의원을 떠나면서 얼마냐고 물었더니, 그냥 가란다. 그리고 다음에 올 때 커피나 맛 있는 것 하나 사들고 오면 된다고...
참 허름한 한의원인데... 우리과 다른 교수님이 오십견 때문에 무척 고생하시는데, 국내 최고의 어깨 권위자인 의사에게 오랫동안 치료를 받았지만 효과가 없어서, 궁여지책으로 이분에게 침 몇 대 맞고 많이 회복됬다면서 신기하다고 소개받은 분인데... 의술에 뛰어난 것 뿐만 아니라(그분의 한약을 먹은지 일주일이 지났는데, 벌써 효과가 있다) 의사로서 돈에 욕심이 없고 사람에 대해 긍휼이 많은 분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요새 이런 분 만나기가 쉽지 않은데... 그분 덕분인지, 오늘 아침이 가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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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늦어서 그냥 갈까 하다가 그래도 거기까지 온 시간이 아까와 들어가면서 선생님에게 늦어서 죄송하다고 했더니,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오느라 수고했다고 하면서 침상에 누우라고 한다. 누우면서 땀이 많이나고 피곤하고 힘들다고 푸념섞어 말했더니 아무 말없이 침을 여러 대를 놓는다. 이렇게 많이 맞을 줄 몰랐는데...
내가 알기로 침은 보통 20분 정도 맞는다고 하는데 7시부터 시작해서 거의 8시까지 꼼짝 못하고 누워 있었다. 약 50분 정도가 경과한 후 침을 뺐고, 선생님과 내 체질과 건강관리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많이 힘들어 하는 것 같아서 비염 뿐만 아니라, 땀을 적게 흘리는 것, 피로를 푸는 것, 원기가 회복되는 것 등 여러 가지를 생각해서 침을 놓았다고 한다. (그래서 침이 그렇게 많았던 모양이다.) 늦은 시간인데도 전혀 짜증내거나 눈치를 주지 않고 차분하게 이야기를 해 주신다. 많은 도움이 되었다.
한의원을 떠나면서 얼마냐고 물었더니, 그냥 가란다. 그리고 다음에 올 때 커피나 맛 있는 것 하나 사들고 오면 된다고...
참 허름한 한의원인데... 우리과 다른 교수님이 오십견 때문에 무척 고생하시는데, 국내 최고의 어깨 권위자인 의사에게 오랫동안 치료를 받았지만 효과가 없어서, 궁여지책으로 이분에게 침 몇 대 맞고 많이 회복됬다면서 신기하다고 소개받은 분인데... 의술에 뛰어난 것 뿐만 아니라(그분의 한약을 먹은지 일주일이 지났는데, 벌써 효과가 있다) 의사로서 돈에 욕심이 없고 사람에 대해 긍휼이 많은 분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요새 이런 분 만나기가 쉽지 않은데... 그분 덕분인지, 오늘 아침이 가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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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12:55:00
자식에게 남겨줄 유산
여호사밧이 그의 조상들과 함께 누우매 그의 조상들과 함께 다윗 성에 장사되고 그의 아들 여호람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의 아우들 아사랴와 여히엘과 스가랴와 아사랴와 미가엘과 스바댜는 다 유다 왕 여호사밧의 아들들이라. 그의 아버지가 그들에게는 은금과 보물과 유다 견고한 성읍들을 선물로 후히 주었고 여호람은 장자이므로 왕위를 주었더니, 여호람이 그의 아버지의 왕국을 다스리게 되어 세력을 얻은 후에 그의 모든 아우들과 이스라엘 방백들 중 몇 사람을 칼로 죽였더라.(대하 21:1-4)
자식에게 물려줄 것이 무엇인가? 여호사밧이 아들들에게 막대한 재산과 왕위를 물려줬지만, 그 아들들의 결국은 어떻게 되었는가? 장자를 제외한 모든 다른 아들들은 비참하게 죽임을 당했고, 동생을 죽인 장자인 여호람는 나라를 망치고, 자신의 가족을 모두 잃고, 결국 창자가 터져서 죽는 가운데, 선왕들과 함께 묻히지도 못하는 불행한 인생을 살게 된다.
세상의 관점에서 본다면, 여호사밧이 자식들에게 최고의 유산을 남겼지만, 결론적으로 그가 믿었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물려주지는 않았다. 그것이 비극의 씨앗인 것이다.
모든 부모들이 그렇듯, 아이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은 마음은 나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정작 실재의 삶에서 내가 아이들에게 주기를 원하는 "좋은 것"이 내가 마음 속으로 생각하는 그 "좋은 것"과 일치하는지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다. 하나님에 대한 신실한 믿음보다 그 외의 다른 것들을 훨씬 더 강조하고 있지 않은가?
부끄럽고 두려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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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에게 물려줄 것이 무엇인가? 여호사밧이 아들들에게 막대한 재산과 왕위를 물려줬지만, 그 아들들의 결국은 어떻게 되었는가? 장자를 제외한 모든 다른 아들들은 비참하게 죽임을 당했고, 동생을 죽인 장자인 여호람는 나라를 망치고, 자신의 가족을 모두 잃고, 결국 창자가 터져서 죽는 가운데, 선왕들과 함께 묻히지도 못하는 불행한 인생을 살게 된다.
세상의 관점에서 본다면, 여호사밧이 자식들에게 최고의 유산을 남겼지만, 결론적으로 그가 믿었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물려주지는 않았다. 그것이 비극의 씨앗인 것이다.
모든 부모들이 그렇듯, 아이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은 마음은 나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정작 실재의 삶에서 내가 아이들에게 주기를 원하는 "좋은 것"이 내가 마음 속으로 생각하는 그 "좋은 것"과 일치하는지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다. 하나님에 대한 신실한 믿음보다 그 외의 다른 것들을 훨씬 더 강조하고 있지 않은가?
부끄럽고 두려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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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9:17:00
[펌] 교회 성장 보다 더 좋은 것
아래 글은 성남의 선한목자교회 담임목사님이신 유기성 목사님께서 페이스북에 올리신 글을 허락받지 않고 무단으로 복사해 퍼 온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 중 강조는 제가 첨가한 것입니다.) 존경스럽고 닮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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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는 주의 종이 되겠다고 신학교에 갔지만, 아골골짝 빈들에도 주의 복음을 들고 갈 마음은 없었습니다.
제 꿈이 큰 교회의 담임목사가 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2. 당시에는 큰 교회의 담임목사가 되면 훌륭한 주의 종이 되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신학생일 때 한국교회는 교회성장 세미나가 유행이었습니다.
3. 교회가 성장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지만 나중에서야 주의 종은 교회를 성장시키는 것 보다 더 중요한 목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주 예수님과 연합한 자가 되어 사역하는 것입니다.
4.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열심히 충성하여 교회를 크게 성장 시키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님과 연합하여 주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처음에 교회 성장을 목표로 삼은 것은 주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알지 못하였고 주님과 연합하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5. 이번 주일에 두 번째 분립 개척교회 교인들을 파송합니다.
처음 분립 개척교회 교인들을 파송할 때, 교인들을 떠나 보내는 마음이 저 스스로도 당황스러울 정도로 아팠습니다.
여전히 교인들을 제 교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6. 지금은 마음이 많이 달라졌지만 아직도 교인을 파송하는 마음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계속하여 분립 개척하는 일을 중단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교인이 느는 것 보다 더 좋은 것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주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7. 솔직히 한동안 저는 교인이 느는 재미로 목회했습니다.
성공 본능에 따라 목회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건강하지 못한 마음임을 깨달았습니다.
주 예수님 조차 ‘나의 성공’을 위하여 이용하는 자였던 것입니다.
8. 교인 늘어 교회가 성장하는 것은 교회에 활기를 불어넘는 중요한 한 동력입니다.
그 동력이 사라지면 교회를 순식간에 무너지거나 침체될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가 성장하는 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9. 그러나 교회 성장이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의 진정한 생명과 동력은 주님이 교회와 함께 하시고 교회를 다스리시고 계시다는 것을 온 교인들이 아는 것입니다.
교회의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10. 주님께 순종하기 위하여 교회 성장도 내려 놓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선교사로 나가라’ 하시면 오직 “예” 뿐입니다.
‘개척하라!’ 하시면 오직 “예” 뿐입니다.
‘교회를 분립하라!’ 하시면 오직 “예” 뿐입니다.
11. 지금 제게는 신학생 때 알지 못했던 사역의 목표가 생겼습니다.
주 예수님과 연합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이 기뻐하실 일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데 더 유익하다면 오직 “예” 할 뿐입니다.
12. 교회 성장에만 매이면 은퇴할 때 허탈할 것입니다.
추한 모습을 보일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교회 성장에만 매이면 다른 교회나 목회자를 경쟁의 대상으로 보게 될 것입니다.
교만과 좌절감을 왔다 갔다 하며 평생 헤매일 것입니다
교회 성장에만 매이면 교회를 진정 건강한 교회로 세울 수 없을 것입니다.
교회의 기초는 교회 성장이 아니라 살아 계신 주 예수님 그 분이기 때문입니다.
13. 교회 성장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교인들이 주 예수님을 분명히 알고 주 예수님과 친밀하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떠나가더라도 주님의 인도를 받았다면 기쁜 일입니다.
14. 건강한 목회를 하는지 점검하는 기준은 교인이 느는 것 보다 더 좋은 것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입니다.
빌 3:7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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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는 주의 종이 되겠다고 신학교에 갔지만, 아골골짝 빈들에도 주의 복음을 들고 갈 마음은 없었습니다.
제 꿈이 큰 교회의 담임목사가 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2. 당시에는 큰 교회의 담임목사가 되면 훌륭한 주의 종이 되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신학생일 때 한국교회는 교회성장 세미나가 유행이었습니다.
3. 교회가 성장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지만 나중에서야 주의 종은 교회를 성장시키는 것 보다 더 중요한 목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주 예수님과 연합한 자가 되어 사역하는 것입니다.
4.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열심히 충성하여 교회를 크게 성장 시키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님과 연합하여 주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처음에 교회 성장을 목표로 삼은 것은 주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알지 못하였고 주님과 연합하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5. 이번 주일에 두 번째 분립 개척교회 교인들을 파송합니다.
처음 분립 개척교회 교인들을 파송할 때, 교인들을 떠나 보내는 마음이 저 스스로도 당황스러울 정도로 아팠습니다.
여전히 교인들을 제 교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6. 지금은 마음이 많이 달라졌지만 아직도 교인을 파송하는 마음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계속하여 분립 개척하는 일을 중단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교인이 느는 것 보다 더 좋은 것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주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7. 솔직히 한동안 저는 교인이 느는 재미로 목회했습니다.
성공 본능에 따라 목회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건강하지 못한 마음임을 깨달았습니다.
주 예수님 조차 ‘나의 성공’을 위하여 이용하는 자였던 것입니다.
8. 교인 늘어 교회가 성장하는 것은 교회에 활기를 불어넘는 중요한 한 동력입니다.
그 동력이 사라지면 교회를 순식간에 무너지거나 침체될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가 성장하는 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9. 그러나 교회 성장이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의 진정한 생명과 동력은 주님이 교회와 함께 하시고 교회를 다스리시고 계시다는 것을 온 교인들이 아는 것입니다.
교회의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10. 주님께 순종하기 위하여 교회 성장도 내려 놓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선교사로 나가라’ 하시면 오직 “예” 뿐입니다.
‘개척하라!’ 하시면 오직 “예” 뿐입니다.
‘교회를 분립하라!’ 하시면 오직 “예” 뿐입니다.
11. 지금 제게는 신학생 때 알지 못했던 사역의 목표가 생겼습니다.
주 예수님과 연합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이 기뻐하실 일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데 더 유익하다면 오직 “예” 할 뿐입니다.
12. 교회 성장에만 매이면 은퇴할 때 허탈할 것입니다.
추한 모습을 보일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교회 성장에만 매이면 다른 교회나 목회자를 경쟁의 대상으로 보게 될 것입니다.
교만과 좌절감을 왔다 갔다 하며 평생 헤매일 것입니다
교회 성장에만 매이면 교회를 진정 건강한 교회로 세울 수 없을 것입니다.
교회의 기초는 교회 성장이 아니라 살아 계신 주 예수님 그 분이기 때문입니다.
13. 교회 성장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교인들이 주 예수님을 분명히 알고 주 예수님과 친밀하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떠나가더라도 주님의 인도를 받았다면 기쁜 일입니다.
14. 건강한 목회를 하는지 점검하는 기준은 교인이 느는 것 보다 더 좋은 것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입니다.
빌 3:7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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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9:44:00
하나님께서 내게 원하시는 것.
하나님께서 나에게서 원하시는 것은 단 한 가지.
내 마음.
그분께 전적으로 드려지는 내 마음을 원하신다.
하지만 나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드릴 준비가 되어 있지만, 마음만은 내 것으로 유지하고 싶어 한다.
"내 마음대로..."
내 시간을 사용하는 것도 내 마음대로...
내 돈을 사용하는 것도 내 마음대로...
내 몸을 사용하는 것도 내 마음대로...
심지어 그분께 드리는 것도, 예배하는 것도, 섬기는 것도 내 마음대로....
하지만 내 마음을 그분께 드리지 않는다면, 내가 아무리 많은 것을 드린다 해도, 그것은 사실 하나님께 드리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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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
그분께 전적으로 드려지는 내 마음을 원하신다.
하지만 나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드릴 준비가 되어 있지만, 마음만은 내 것으로 유지하고 싶어 한다.
"내 마음대로..."
내 시간을 사용하는 것도 내 마음대로...
내 돈을 사용하는 것도 내 마음대로...
내 몸을 사용하는 것도 내 마음대로...
심지어 그분께 드리는 것도, 예배하는 것도, 섬기는 것도 내 마음대로....
하지만 내 마음을 그분께 드리지 않는다면, 내가 아무리 많은 것을 드린다 해도, 그것은 사실 하나님께 드리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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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9:12:00
악을 행하는 이유
"And he did evil, for he did not set his heart to seek the Lord." (2 Chronicles 12:14, ESV)
분단된 남쪽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르호보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는 중간자적 인물이었다. 아버지인 솔로몬을 이어 왕위에 오른 후, 노역을 감해달라는 백성들의 요청에 교만함으로 포악하게 대응을 한다. 그 모습은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는 모습이다.
이스라엘 10 부족이 여로보암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킨 후, 그는 유다와 배냐만의 성인 남자 십팔만명을 모아 북이스라엘과 전쟁을 벌여 잃어버린 통치권을 회복하려 할 때, 하나님의 선지자가 그 전쟁을 막자 그에 순종하는 모습을 보인다.
북이스라엘 회복을 포기한 그는 남유다 나름대로 강성한 국가를 만들 수 있었다. 국가가 강성해지고 세력이 강해지자 다시 교만해진 그는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고 자신의 뜻대로 행한다. 그에 대해 하나님은 애굽의 군대로 그를 징벌하신다.
저항할 수 없이 강력한 애굽의 군대가 코 앞까지 밀려 왔을 때, 하나님은 다시 선지자를 보내셔서 그를 잘책하신다. 그 질책 앞에서 르호보암은 무릎을 꿇고 회개하며 "스스로 겸비하여 이르되 여호와는 의로우시다"라고 고백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 교만을 꺾은 것이다.
이 겸비함을 보신 하나님께서는 그 특유의 놀랄만큼 자비로운 용서로 그를 용서하시고, 유다를 멸망시키지 않으신다. 대신 여로보암의 교만의 근거인 왕이 세운 강력한 힘과 자랑을 애굽에게 빼앗기도록 허락하신다.
세상적으로는 어떤 왕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이런 르호보암 왕에 대한 성경의 최종 판결은 "르호보암이 악을 행하였으니 이는 그가 여호와를 구하는 마음을 굳게하지 아니하였음이더라"이다. 그것이 그의 인생을 한 문장으로 정리한 것이며, 그것이 바로 그의 인생이다. 그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내려지는 평가가 바로 이것인 것이다.
언뜻 보기에 어리석어 보이고 답답해 보이는 르호보암의 행태는 사실상 나와 비교했을 때, 나보다 한 등급 위의 인간이다. 그와 나는 틈만나면 교만해지려고 한다는 면에 있어서는 동일하지만, 그는 나와 다르게, 그 교만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질책하실 때, 겸손하게 무릎꿇고 잘못을 시인할 줄 아는 자였다. 나는 그와 다르다. 죄악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끝까지 그 말씀 앞에 무릎꿇지 않는 악한 자이다. 그 말씀이 귓가에 들리지 않고, 내 생각(정확히 말하면 내 욕망)만 내 머리 속에 가득 찬 그런 삶을 산다. 그 완악함은 당나귀의 어리석은 고집과 매우 유사한 면을 가지고 있다. 그런 면에서 그는 나보다 낫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께서 "악을 행하였으니"라고 평결을 내리신다면, 하물면 나는 어떠랴?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그의 악행의 원인에 대한 성경의 해석이다. 그가 결국 악한 인생을 살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그가 여호와를 구하는 마음을 굳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ESV는 이 부분은 "he did not set his heart to seek the Lord"라고 번역했다. 그 마음을 하나님을 구하는 데 고정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의 인생에서 어떤 일에든지 주님을 찾는 그것을 최우선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나는 자연스럽게 나 중심의 삶을 살게 된다. 그것은 아담의 범죄로 인해 인간에게 주어진 원죄 때문이다(아니 그 자체가 원죄다). 그렇기 때문에 늘 하나님을 구하며, 그분을 내 삶에 모시도록 "노력"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결국 그분을 내 삶의 중심에 모시는 정도와 빈도의 증가가 있는 삶 아닌가? 그리스도의 성숙이란 내 안에 내가 사라져가고, 그분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 아닌가? 성령의 역사란 바로 그것이 내 안에서 가능하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기적적인 사역이 아니고 무엇인가? 바로 그것이 마지막날 하나님 앞에서 내 인생이 "악하다"는 평가를 면할 수 있는 길이 아닌가?
나는 르호보암보다 더 형편없는 인간이다. 나는 그 만큼 종교적이지도 않고 겸손하지도 않다. 그 본성은 변하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그와 내가 다른 또 한 가지는 내 안에 내가 아닌 다른 존재(성령)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분께서 나를 바꿔가신다는 것, 그래서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구하는 삶으로 조금씩 인도해 가신다는 것. 바로 그것이다. 이 아니 기쁘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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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9:48:00
솔로몬 성전
나팔 부는 자와 노래하는 자들이 일제히 소리를 내어 여호와를 찬송하며 감사하는데, 나팔 불고 제금 치고 모든 악기를 울리며 소리를 높여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되 "선하시도다! 그의 자비하심이 영원히 있도다!"하매, 그 때에 여호와의 전에 구름이 가득한지라. 제사장들이 그 구름으로 말미암아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하나님의 전에 가득함이었더라. (대하 5:13-14)
역대하 4장과 5장에 나오는 솔로몬의 성전.
하나님의 말씀대로 성전을 짓고, 거기에 언약궤를 모시고 하나님께 제사하며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그 장엄한 광경을 상상해 본다. 아론계열의 제사장들이 수 많은 희생제물을 하나님께 드리는 가운데, 레위인들은 성전의 여러 곳에서 각자 맡은 임무를 수행하고,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 등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양대는 하나님을 소리높여 높인다.
죽어가는 짐승의 울부짖음, 찬양, 분주한 섬김, 성전 안에 들어와 있는 이스라엘 남자들의 설렘과 기대, 성전 밖에서 이 모습을 직접 보지 못하고 호기심 가운데 소리로만 듣고 있는 여성들의 기도.
이 모든 광경은 참으로 아름다운 광경이다. 그 모든 것의 중심에는 언약궤가 있고, 그 언약궤의 중심은 속죄소이며, 하나님께서는 상징적으로 그 속죄소에 거하신다. 즉, 모든 것의 중심이 하나님인 것이다.
그것이다. 바로 그것. 모든 것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는 것. 내 모든 삶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는 것. 그리고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이 그분을 섬기는 것. 그것이 바로 성전신앙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이후 은혜의 세대를 살고 있는 나에게 성전은 바로 내 자신이며, 내 안에 성령 하나님께서 내주하신다는 것. 따라서 그 성령 하나님께 순종하는 가운데,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고, 그분께 경배드리는 삶을 사는 것. 그것이 신약시대의 성전 신앙일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 가운데 좌정하신 왕이신 하나님의 위엄. 제사장들이 능히 서서 섬길 수 없을 정도의 위엄을 가지신 그분.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지만, 그분을 마치 옆집 마음씨 좋은 아저씨나 형님, 혹은 손자가 무슨 버릇없는 행동을 해도 "허허!" 웃으며 그냥 봐 념겨주는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로 생각하는 것은 정말 큰 오산이다. 그분의 위엄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것이며, 그분은 내가 고개를 들고 쳐다보는 것조차도 불가능할 정도로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그분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특권을 누리긴 하지만, 그래서 특별히 친밀한 관계를 누릴 수 있는 것은 맞지만, 함부로 대할 대상은 절대 아니다.
하나님. 내 하나님은 내가 늘 그러는 것처럼 쉽게 무시를 받아서는 안되는 분이시다. 귀찮은 존재로 여김을 받아서는 절대 안되는 분인 것이다. 내 편의를 위해 내 욕망을 위해 이용할 수 있는 대상이 절대 아니다!!!
성경적인 의미에서의 "사랑"은 결코 감정의 특정한 상태가 아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 그 경외감에서 나오는 복종.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드리는 내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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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하 4장과 5장에 나오는 솔로몬의 성전.
하나님의 말씀대로 성전을 짓고, 거기에 언약궤를 모시고 하나님께 제사하며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그 장엄한 광경을 상상해 본다. 아론계열의 제사장들이 수 많은 희생제물을 하나님께 드리는 가운데, 레위인들은 성전의 여러 곳에서 각자 맡은 임무를 수행하고,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 등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양대는 하나님을 소리높여 높인다.
죽어가는 짐승의 울부짖음, 찬양, 분주한 섬김, 성전 안에 들어와 있는 이스라엘 남자들의 설렘과 기대, 성전 밖에서 이 모습을 직접 보지 못하고 호기심 가운데 소리로만 듣고 있는 여성들의 기도.
이 모든 광경은 참으로 아름다운 광경이다. 그 모든 것의 중심에는 언약궤가 있고, 그 언약궤의 중심은 속죄소이며, 하나님께서는 상징적으로 그 속죄소에 거하신다. 즉, 모든 것의 중심이 하나님인 것이다.
그것이다. 바로 그것. 모든 것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는 것. 내 모든 삶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는 것. 그리고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이 그분을 섬기는 것. 그것이 바로 성전신앙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이후 은혜의 세대를 살고 있는 나에게 성전은 바로 내 자신이며, 내 안에 성령 하나님께서 내주하신다는 것. 따라서 그 성령 하나님께 순종하는 가운데,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고, 그분께 경배드리는 삶을 사는 것. 그것이 신약시대의 성전 신앙일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 가운데 좌정하신 왕이신 하나님의 위엄. 제사장들이 능히 서서 섬길 수 없을 정도의 위엄을 가지신 그분.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지만, 그분을 마치 옆집 마음씨 좋은 아저씨나 형님, 혹은 손자가 무슨 버릇없는 행동을 해도 "허허!" 웃으며 그냥 봐 념겨주는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로 생각하는 것은 정말 큰 오산이다. 그분의 위엄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것이며, 그분은 내가 고개를 들고 쳐다보는 것조차도 불가능할 정도로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그분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특권을 누리긴 하지만, 그래서 특별히 친밀한 관계를 누릴 수 있는 것은 맞지만, 함부로 대할 대상은 절대 아니다.
하나님. 내 하나님은 내가 늘 그러는 것처럼 쉽게 무시를 받아서는 안되는 분이시다. 귀찮은 존재로 여김을 받아서는 절대 안되는 분인 것이다. 내 편의를 위해 내 욕망을 위해 이용할 수 있는 대상이 절대 아니다!!!
성경적인 의미에서의 "사랑"은 결코 감정의 특정한 상태가 아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 그 경외감에서 나오는 복종.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드리는 내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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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0:21:00
무제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번 죽을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번 맞았으며, 세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 11:23b-27)
존 파이퍼 목사님은 바로 이 본문으로 설교하면서 이런 바울의 삶이 하나님께서 함께하신 강력한 증거가 된다고 역설한다.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으셨다면 이런 상황에서 살아 날 수가 없다는 것.
같은 현상을 바라보면서도 어떻게 그렇게 정반대의 해석을 할 수 있는지... 만약 내가 이런 상황에 있다면, 하나님의 살아계심에 대한 부정을 확신하는 증거가 되었을텐데... 그게 아니라 하나님의 살아계심, 그리고 나와 함께하심의 증거라니...
결국 믿음이 모든 해석의 방향을 결정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예수 믿으면 복받고, 모든 것이 잘 되고, 위로 받고, 어려움에서 구원을 받는다고,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우리를 그렇게 만드실 것이라고 입에 거품을 물고 설교하는 설교자들은 이 본문을 어떻게 해석하는지 정말, 정말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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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파이퍼 목사님은 바로 이 본문으로 설교하면서 이런 바울의 삶이 하나님께서 함께하신 강력한 증거가 된다고 역설한다.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으셨다면 이런 상황에서 살아 날 수가 없다는 것.
같은 현상을 바라보면서도 어떻게 그렇게 정반대의 해석을 할 수 있는지... 만약 내가 이런 상황에 있다면, 하나님의 살아계심에 대한 부정을 확신하는 증거가 되었을텐데... 그게 아니라 하나님의 살아계심, 그리고 나와 함께하심의 증거라니...
결국 믿음이 모든 해석의 방향을 결정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예수 믿으면 복받고, 모든 것이 잘 되고, 위로 받고, 어려움에서 구원을 받는다고,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우리를 그렇게 만드실 것이라고 입에 거품을 물고 설교하는 설교자들은 이 본문을 어떻게 해석하는지 정말, 정말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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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9:37:00
[펌] 진짜 그리스도인
아래 글은 성남에 있는 선한목자교회의 목사님이신 유기성 목사님께서 페이스북에 올리신 것을 퍼온 것입니다. 여기 기록해 놓고 자주 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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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 7:22-23을 보면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였던 이’들 중 많은 이들이 주님 앞에 설 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는 말씀을 들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2.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이 사람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큰 이적을 행하였는데, 어떻게 주님께서 그들을 도무지 알지 못할 수 있는 것입니까?
3. 예수님께서 그들을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말씀한 이유는 “불법을 행하는 자들” 이었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내게서 떠나가라” 단호하게 말씀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4.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큰 능력을 행하는 자가 불법을 행할 때, 관대하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람이니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겠느냐?’ 하면서, 하나님께서도 그 정도는 받아주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나 주님의 이름으로 큰 능력을 행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께서 특별히 사랑하고 쓰시는 종이니 그러한 일을 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5. 그러나 말씀은 정반대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큰 기적을 행할지라도 불법을 행하는 자들은 주님과 상관이 없는 자들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6.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큰 능력을 행하는 자가 되기를 갈망합니다.
그러나 큰 능력을 행하는 것 보다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것은 주님 때문에 불법을 행할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7. 주님의 이름으로 큰 능력을 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종이라는 보증이 아닙니다.
큰 능력을 행하는 자들도 불볍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가짜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주위에서 그런 그리스도인들을 많이 경험합니다.
8. 우리는 큰 능력을 행하기 전에 불법을 행하지 않는 자가 되기를 더 갈망해야 합니다.
기적을 행하는 것 보다 불법을 행하지 않게 되는 것이 더 큰 기적입니다.
9. 예수님에 대하여 아는 것으로는 불법의 유혹을 이길 수 없습니다.
주 예수님과 인격적이고 친밀한 교제 중에 사는 자만이 불법을 이길 수 있습니다.
주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어떻게 불법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
10. 아래는 유정옥 사모님이 쓰신 [말하지 않아도 들리는 소리]에 실린 글입니다.
11. 24일인 금요일부터 이미 추석연휴가 시작되었다. 거리의 움직임이 다르다. 어린아이처럼 설레어 밤을 지새우며 25일을 기다렸다. 그것은 군대 간 아들이 4박 5일 휴가를 오게 되었기 때문이다.
얼굴이 새까맣게 그을린 아들이 현관에 들어섰다. 내가 안아 주겠다고 두 팔을 활짝 벌렸더니 나에게 안기기는 커녕 오히려 나를 덥석 안아준다. 10킬로그램 이상 빠진 아들의 등을 어루만지며 그리웠던 아들을 맞이했다.
12. 그런데 군복을 벗고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는 아들의 다리가 빨갛게 쓸려 있다.
"여기가 왜 그러니?"
"엄마! 걱정 마세요. '네가 진짜 그리스도인이야!'라고 공인된 표예요."
"뭐? 진짜 그리스도인 표?"
13. 이번 유격훈련을 받기 위해 일주일 동안 다른 곳으로 이동했어요. 그 곳에서 샤워를 하고 나서 보니 제 트레이닝복이 없어졌어요. 윗옷은 번호와 이름이 적혀 있어서 그런지 없어졌다가 다시 돌아왔는데 바지는 누군가 훔쳐간거예요. 누군가 옷을 잃어버리면 계속 다른 생도들의 옷을 훔치는 행위가 이어져요.
14. 저도 다른 생도들처럼 옷을 훔쳐서 제 관물을 채워 놓을 것인가? 저는 그 일로 기도해 보았어요.
주님은 당연히 훔치지 말아야 한다고 응답해 주셨지요.
그래서 저는 일주일동안 땀으로 젖어 있는 군복바지 하나만을 입고 견뎠어요.
15. 트레이닝복을 입으면 운동화를 신어도 되지만 군복 바지를 입으면 항상 군화를 갖추어 신어야하기 때문에 불편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다른 생도의 트레이닝복을 훔치는 것은 용납될 수 없었지요.
훈련생 전원이 제가 그리스도인인 줄 알고 있는데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하잖아요.
16. 첫 날은 다른 생도들이 저에게 와서 "너도 옷 하나 훔쳐! 군대에선 그것이 법이야. 일주일을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지 못하고 군복만 입고 지내면 네 살갗이 다 상처날거야. 군데에선 훔치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바보야!"라고 저에게 훔칠 것을 종용했지요.
17. 그러나 어머니!
제가 훔치면 옷을 잃어버린 다른 생도가 또 훔칠 것이고, 훔치는 행위가 계속될 것이 아니겠어요? 부정하고 더러운 행위를 모든 생도들이 경험하게 만드는 것이고 그 행위가 정당하다고 여기게 되는 것이 더 무서운 일이라 그 행위가 계속되는 것을 어찌하든지 제 선에서 막아야 하잖아요.
18. 처음 2~3일은 저를 조롱하고 손가락질 하는 훈련병들이 많았어요. 그들의 야유하는 소리와 눈길을 따갑게 받았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법은 정결하고 완전하지요. 일주일 내내 땀에 찌든 뻣뻣한 군복 바지 하나로 지내는 나에게 다가와 생도들이 뭐라고 말한 줄 아세요?
19. "네가 진짜 그리스도인이야! 네가 진짜 하나님 믿는 사람이야! 우리들은 과연 네가 어떻게 할 것인지 일주일 내내 지켜 보았어! 너를 존경하고 네가 믿는 하나님을 존경해!"라고 하더군요.
20. 어머니! 저는 오백 명이 넘는 그 생도들이 제 앞에서 숙연해지는 얼굴을 보았어요. 그들 중에는 저의 상처에 바르라고 연고를 가지고 오는 사람도 있었고 부대에 도착하자마다 트레이닝복을 사다 준 생도도 있어요.
이천 명이 넘는 생도들이 저에게 붙여준 별명이 "너는 진짜 그리스도인!"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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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 7:22-23을 보면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였던 이’들 중 많은 이들이 주님 앞에 설 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는 말씀을 들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2.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이 사람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큰 이적을 행하였는데, 어떻게 주님께서 그들을 도무지 알지 못할 수 있는 것입니까?
3. 예수님께서 그들을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말씀한 이유는 “불법을 행하는 자들” 이었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내게서 떠나가라” 단호하게 말씀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4.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큰 능력을 행하는 자가 불법을 행할 때, 관대하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람이니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겠느냐?’ 하면서, 하나님께서도 그 정도는 받아주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나 주님의 이름으로 큰 능력을 행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께서 특별히 사랑하고 쓰시는 종이니 그러한 일을 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5. 그러나 말씀은 정반대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큰 기적을 행할지라도 불법을 행하는 자들은 주님과 상관이 없는 자들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6.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큰 능력을 행하는 자가 되기를 갈망합니다.
그러나 큰 능력을 행하는 것 보다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것은 주님 때문에 불법을 행할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7. 주님의 이름으로 큰 능력을 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종이라는 보증이 아닙니다.
큰 능력을 행하는 자들도 불볍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가짜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주위에서 그런 그리스도인들을 많이 경험합니다.
8. 우리는 큰 능력을 행하기 전에 불법을 행하지 않는 자가 되기를 더 갈망해야 합니다.
기적을 행하는 것 보다 불법을 행하지 않게 되는 것이 더 큰 기적입니다.
9. 예수님에 대하여 아는 것으로는 불법의 유혹을 이길 수 없습니다.
주 예수님과 인격적이고 친밀한 교제 중에 사는 자만이 불법을 이길 수 있습니다.
주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어떻게 불법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
10. 아래는 유정옥 사모님이 쓰신 [말하지 않아도 들리는 소리]에 실린 글입니다.
11. 24일인 금요일부터 이미 추석연휴가 시작되었다. 거리의 움직임이 다르다. 어린아이처럼 설레어 밤을 지새우며 25일을 기다렸다. 그것은 군대 간 아들이 4박 5일 휴가를 오게 되었기 때문이다.
얼굴이 새까맣게 그을린 아들이 현관에 들어섰다. 내가 안아 주겠다고 두 팔을 활짝 벌렸더니 나에게 안기기는 커녕 오히려 나를 덥석 안아준다. 10킬로그램 이상 빠진 아들의 등을 어루만지며 그리웠던 아들을 맞이했다.
12. 그런데 군복을 벗고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는 아들의 다리가 빨갛게 쓸려 있다.
"여기가 왜 그러니?"
"엄마! 걱정 마세요. '네가 진짜 그리스도인이야!'라고 공인된 표예요."
"뭐? 진짜 그리스도인 표?"
13. 이번 유격훈련을 받기 위해 일주일 동안 다른 곳으로 이동했어요. 그 곳에서 샤워를 하고 나서 보니 제 트레이닝복이 없어졌어요. 윗옷은 번호와 이름이 적혀 있어서 그런지 없어졌다가 다시 돌아왔는데 바지는 누군가 훔쳐간거예요. 누군가 옷을 잃어버리면 계속 다른 생도들의 옷을 훔치는 행위가 이어져요.
14. 저도 다른 생도들처럼 옷을 훔쳐서 제 관물을 채워 놓을 것인가? 저는 그 일로 기도해 보았어요.
주님은 당연히 훔치지 말아야 한다고 응답해 주셨지요.
그래서 저는 일주일동안 땀으로 젖어 있는 군복바지 하나만을 입고 견뎠어요.
15. 트레이닝복을 입으면 운동화를 신어도 되지만 군복 바지를 입으면 항상 군화를 갖추어 신어야하기 때문에 불편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다른 생도의 트레이닝복을 훔치는 것은 용납될 수 없었지요.
훈련생 전원이 제가 그리스도인인 줄 알고 있는데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하잖아요.
16. 첫 날은 다른 생도들이 저에게 와서 "너도 옷 하나 훔쳐! 군대에선 그것이 법이야. 일주일을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지 못하고 군복만 입고 지내면 네 살갗이 다 상처날거야. 군데에선 훔치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바보야!"라고 저에게 훔칠 것을 종용했지요.
17. 그러나 어머니!
제가 훔치면 옷을 잃어버린 다른 생도가 또 훔칠 것이고, 훔치는 행위가 계속될 것이 아니겠어요? 부정하고 더러운 행위를 모든 생도들이 경험하게 만드는 것이고 그 행위가 정당하다고 여기게 되는 것이 더 무서운 일이라 그 행위가 계속되는 것을 어찌하든지 제 선에서 막아야 하잖아요.
18. 처음 2~3일은 저를 조롱하고 손가락질 하는 훈련병들이 많았어요. 그들의 야유하는 소리와 눈길을 따갑게 받았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법은 정결하고 완전하지요. 일주일 내내 땀에 찌든 뻣뻣한 군복 바지 하나로 지내는 나에게 다가와 생도들이 뭐라고 말한 줄 아세요?
19. "네가 진짜 그리스도인이야! 네가 진짜 하나님 믿는 사람이야! 우리들은 과연 네가 어떻게 할 것인지 일주일 내내 지켜 보았어! 너를 존경하고 네가 믿는 하나님을 존경해!"라고 하더군요.
20. 어머니! 저는 오백 명이 넘는 그 생도들이 제 앞에서 숙연해지는 얼굴을 보았어요. 그들 중에는 저의 상처에 바르라고 연고를 가지고 오는 사람도 있었고 부대에 도착하자마다 트레이닝복을 사다 준 생도도 있어요.
이천 명이 넘는 생도들이 저에게 붙여준 별명이 "너는 진짜 그리스도인!"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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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8:55:00
(교회 안에서의) 교제
교회 안에 "교제"라는 것이 무엇일까?
요즘은 심각하게 다시 생각하게 된다.
세상 속에서의 여러 "모임"과 별반 다를 바도 없고...
소위 그 교제라는 것을 하고 난 후에도, 그 교제의 대상이었던 사람들의 중요한 혹은 급한 기도제목도 떠올릴 수 없는 그런 소위 "교제"...
그렇기 때문에 말씀 안에서의 권면이나 위로도 없는 그런 소위 "교제"...
세상적인 이야기나, 재미, 농담, 즐거움, 가벼움... 이 모든 것이 절대로 의미없는 것은 아니고, 그리스도인 간의 교제도 인간의 교제의 한 종류이기 때문에 이런 것들은 빠질 수 없는 것일게다...
하지만, 그것이 중심이라면... 그게 중요한 목적이라면...
아니 더 나아가 그것만 있다면... 그게 끝이라면...
조금은 극단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나는 그런 소위 "교제"는 싫다. 나에게는 그저 시간 낭비일 뿐... 교회 안에서의 그런 "교제"보다 훨씬 더 재미있고, 좋은 세상의 모임이나 만남이 즐비하기 때문에...
마음을 좀 바꿔보려고 노력하지만.. 싫은걸 어떻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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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심각하게 다시 생각하게 된다.
세상 속에서의 여러 "모임"과 별반 다를 바도 없고...
소위 그 교제라는 것을 하고 난 후에도, 그 교제의 대상이었던 사람들의 중요한 혹은 급한 기도제목도 떠올릴 수 없는 그런 소위 "교제"...
그렇기 때문에 말씀 안에서의 권면이나 위로도 없는 그런 소위 "교제"...
세상적인 이야기나, 재미, 농담, 즐거움, 가벼움... 이 모든 것이 절대로 의미없는 것은 아니고, 그리스도인 간의 교제도 인간의 교제의 한 종류이기 때문에 이런 것들은 빠질 수 없는 것일게다...
하지만, 그것이 중심이라면... 그게 중요한 목적이라면...
아니 더 나아가 그것만 있다면... 그게 끝이라면...
조금은 극단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나는 그런 소위 "교제"는 싫다. 나에게는 그저 시간 낭비일 뿐... 교회 안에서의 그런 "교제"보다 훨씬 더 재미있고, 좋은 세상의 모임이나 만남이 즐비하기 때문에...
마음을 좀 바꿔보려고 노력하지만.. 싫은걸 어떻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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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1:18:00
결심
결심들..
1. 오늘부터 영화를 하루에 꼭 한 편 이상 보기로 결심.
2. 오늘부터 통계학 공부를 본격적으로 하기로 결심.
3. 오늘부터 운동(탁구, 배드민턴)하기로 결심.
4. 오늘부터 여러 종류의 소설을 읽기로 결심.
5. 오늘부터 이론공부를 체계적으로 하기로 결심.
6. 오늘부터 미국사 공부를 다시하기로 결심.
7. 오늘부터 아직 안 읽은 경영학 논문 읽기로 결심.
8. 오늘부터 하루에 적어도 일정시간은 논문을 "쓰는 데" 사용하기로 결심.
9. 오늘부터 한 시간 이상 연속적으로 앉아 있지 않기로 결심.
10. 오늘부터 점심과 저녁은 꼭 먹기로 결심.(식사 패턴 변경)
결심... 결심... 며칠이나 갈지...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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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늘부터 영화를 하루에 꼭 한 편 이상 보기로 결심.
2. 오늘부터 통계학 공부를 본격적으로 하기로 결심.
3. 오늘부터 운동(탁구, 배드민턴)하기로 결심.
4. 오늘부터 여러 종류의 소설을 읽기로 결심.
5. 오늘부터 이론공부를 체계적으로 하기로 결심.
6. 오늘부터 미국사 공부를 다시하기로 결심.
7. 오늘부터 아직 안 읽은 경영학 논문 읽기로 결심.
8. 오늘부터 하루에 적어도 일정시간은 논문을 "쓰는 데" 사용하기로 결심.
9. 오늘부터 한 시간 이상 연속적으로 앉아 있지 않기로 결심.
10. 오늘부터 점심과 저녁은 꼭 먹기로 결심.(식사 패턴 변경)
결심... 결심... 며칠이나 갈지...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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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9:11:00
하나님의 복을 받을 자와 저주를 받을 자
Thus says the Lord:
“Heaven is my throne,
and the earth is my footstool;
what is the house that you would build for me,
and what is the place of my rest?
All these things my hand has made,
and so all these things came to be,
declares the Lord.
But this is the one to whom I will look:
he who is humble and contrite in spirit
and trembles at my word.
“He who slaughters an ox is like one who kills a man;
he who sacrifices a lamb, like one who breaks a dog's neck;
he who presents a grain offering, like one who offers pig's blood;
he who makes a memorial offering of frankincense, like one who blesses an idol.
These have chosen their own ways,
and their soul delights in their abominations;
I also will choose harsh treatment for them
and bring their fears upon them,
because when I called, no one answered,
when I spoke, they did not listen;
but they did what was evil in my eyes
and chose that in which I did not delight.” (Isaiah 66:1-4, ESV)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타락 가운데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인간들, 한 사람도 빠짐없는 모든 인류 중에서 하나님께서 "돌아보실" 자들, 즉 그분의 복을 받을 자들은 그분 앞에서 겸손하고 통회하며 그분의 말씀에 대해 왕의 말씀으로 받고 경외함으로 떠는 자들(he who is humble and contrite in spirit and trembles at my word)이다.
반면에 그분의 저주를 받을 자들에 대해서는 길게 서술되어 있는데, 그들은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가증하게 여기시는 일을 즐겨하는 자들이며, 따라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이다. 주목할 것은 그 저주받을 자들이 교회와 담을 쌓고 사는 자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He who slaughters an ox is like one who kills a man;
he who sacrifices a lamb, like one who breaks a dog's neck;
he who presents a grain offering, like one who offers pig's blood;
he who makes a memorial offering of frankincense, like one who blesses an idol.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 소와 양(매우 값비싼 재물)을 드리고 곡식제사를 드리고 하나님께 분향을 드리는 자들이다. 예배에 열심이 있는 자들이고 나름대로 헌신된 자들이다.
하지만 그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태도, 그리고 그들의 일상의 삶은 가증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숫소를 잡아 하나님께 드리지만, 그들의 삶은 살인(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무시)하는 자들이다. 혹은 직접 살인하지 않더라도 살인하는 자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고 하나님을 인정하는 마음이 없는 것과 동일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양을 드리지만, 그 드리는 양에 안수하면서 자신의 죄를 통한히 여기고, 주님 앞에 눈물로 사죄하기 보다는 마치 당시 유대사회에서 가증한 동물인 개의 목을 꺾는 것과 같이 무심하고 의미 없이 예물을 드린다.
결론적으로 이들은 예배 행위, 종교 생활에는 매우 열심이 있는 자들이고, 누가 보던지 거룩한 자들로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자들이지만, 실재에 있어서는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 없는 예배와 삶을 드리는 자들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돌이키시기 위해 여러번 말씀하신다. 그들을 부르셨지만, 아무도 들으려고 하지 않았고, 의지적으로 그 악행을 지속한다.
because when I called, no one answered,
when I spoke, they did not listen;
but they did what was evil in my eyes
and chose that in which I did not delight.
그런 그들을 하나님께서는 증오하신다. 그리고 심판하신다.
교회에서 내가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는 그런 "신앙인" 혹은 그리스도인인가? 나의 열심이 보통 수준을 넘어섰고, 내 헌신으로 교회가 부흥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런대로 쓸만한 신자라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진정으로 예배에 임하는 자신의 자세와 교회 밖에서의 자신의 삶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예배 가운데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겸손(내 주장을 모두 포기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인 권위를 부여하며 그 말씀에 따라 사는 것)과 통회(자신의 죄와 죄의 본성에 대해,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삶속에서 닮아가지 못한 것에 대한 아픔으로 가슴을 찢는 회개), 그리고 말씀을 사랑하며 늘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왕의 마음을 알고 왕의 뜻을 알아 경외함으로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 있는지를 철저하게 살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열심이, 그 교회 안에서의 열심이 오히려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것이될 가능성이 많다.
오늘 말씀을 읽으며 참으로... 참으로...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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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9:35:00
" 자기 생각을 따라..."
"내가 종일 손을 펴서 자기 생각을 따라 옳지 않은 길을 걸어가는 패역한 백성들을 불렀나니"(사 65:2)
하나님께서 정의하시는 죄. 그것은 "자기 생각을 따라 옳지 않은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여기서 "옳지 않은 길을 걸어가는 것"이 죄가 드러나는 현상이라면, "자기 생각을 따라"는 죄의 원인이며, 죄의 본질 그 자체이다. 즉 죄는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자기 생각을 따라 사는 것으로서, 그것은 반드시 옳지 않은 길로 귀결되게 마련이다.
국정원때문에 온 나라가 시끄럽다. 이명박 정부의 안하무인식의 통치의 결과이다. 자신만 옳기 때문에 대화를 거부하고, 자신이 제시하는 (내가 보기에는 지극히 천박하며 반국가적인) 비전이 절대적으로 옳기 때문에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법질서나 규칙은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는, 우리 속담에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식으로(내가 우리 속담 중에서 제일 싫어하는 속담이다) 온갖 불법을 자행한 결과 썩어 문드러진 정부의 치부 중 지극히 일부가 드러나는 것이다. 지극히 부끄러운 일, 불법을 자행하고도 스스로 "국정원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떳떳이 말하는 그 조직의 수장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 온갖 죄를 짓고, 더러움가 가증함에 찌들어 있으면서도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하는 가증한 이스라엘과 너무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이 무덤 사이에 앉으며 은밀한 처소에서 밤을 지내며 돼지 고기를 먹으며 가증한 것들의 국을 그릇에 담으면서, 사람에게 이르기를 '너는 네 자리에 섰고, 내게 가까이 하지 말라. 나는 너보다 거룩함이라.'하나니, 이런 자들은 내 코의 연기요, 종일 타는 불이로다."(사 65:4-5)
말씀대로 그들의 행위는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이 되어야 마땅하다. 불법을 행한 자들, 거짓을 일삼고, 권력에 의지해서 국민을 우롱하는 자들은 처벌 받아야 한다.
하지만, 이런 일은 국가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언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 모습이 바로 내 모습이 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자라면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하는 이유가,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늘 묵상하고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그분의 뜻에 순종할 수 있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삶이 죄로부터 벗어나는 삶이며, 죄로부터 벗어나는 삶이 거룩한 삶이고, 거룩한 삶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고, 하나님의 목적대로 살 때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신다.
하나님께서 정의하시는 죄. 그것은 "자기 생각을 따라 옳지 않은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여기서 "옳지 않은 길을 걸어가는 것"이 죄가 드러나는 현상이라면, "자기 생각을 따라"는 죄의 원인이며, 죄의 본질 그 자체이다. 즉 죄는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자기 생각을 따라 사는 것으로서, 그것은 반드시 옳지 않은 길로 귀결되게 마련이다.
국정원때문에 온 나라가 시끄럽다. 이명박 정부의 안하무인식의 통치의 결과이다. 자신만 옳기 때문에 대화를 거부하고, 자신이 제시하는 (내가 보기에는 지극히 천박하며 반국가적인) 비전이 절대적으로 옳기 때문에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법질서나 규칙은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는, 우리 속담에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식으로(내가 우리 속담 중에서 제일 싫어하는 속담이다) 온갖 불법을 자행한 결과 썩어 문드러진 정부의 치부 중 지극히 일부가 드러나는 것이다. 지극히 부끄러운 일, 불법을 자행하고도 스스로 "국정원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떳떳이 말하는 그 조직의 수장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 온갖 죄를 짓고, 더러움가 가증함에 찌들어 있으면서도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하는 가증한 이스라엘과 너무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이 무덤 사이에 앉으며 은밀한 처소에서 밤을 지내며 돼지 고기를 먹으며 가증한 것들의 국을 그릇에 담으면서, 사람에게 이르기를 '너는 네 자리에 섰고, 내게 가까이 하지 말라. 나는 너보다 거룩함이라.'하나니, 이런 자들은 내 코의 연기요, 종일 타는 불이로다."(사 65:4-5)
말씀대로 그들의 행위는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이 되어야 마땅하다. 불법을 행한 자들, 거짓을 일삼고, 권력에 의지해서 국민을 우롱하는 자들은 처벌 받아야 한다.
하지만, 이런 일은 국가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언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 모습이 바로 내 모습이 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자라면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하는 이유가,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늘 묵상하고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그분의 뜻에 순종할 수 있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삶이 죄로부터 벗어나는 삶이며, 죄로부터 벗어나는 삶이 거룩한 삶이고, 거룩한 삶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고, 하나님의 목적대로 살 때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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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9:03:00
"우리는 다 주의 백성이니이다"
"주께서 기쁘게 공의를 행하는 자와 주의 길에서 주를 기억하는 자를 선대하시거늘 우리가 범죄하므로 주께서 진노하셨사오며, 이 현상이 이미 오래 되었사오니 우리가 어찌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으며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가 없사오니, 이는 주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숨기시며 우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소멸되게 하셨음이라. 그러나 여호와여,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라. 여호와여, 너무 분노하지 마시오며 죄악을 영원히 기억하지 마시옵소서! 구하오니 보시옵소서! 보시옵소서! 우리는 다 주의 백성이니이다."(사 64:5-9)
You meet him who joyfully works righteousness,
those who remember you in your ways.
Behold, you were angry, and we sinned;
in our sins we have been a long time, and shall we be saved?
We have all become like one who is unclean,
and all our righteous deeds are like a polluted garment.
We all fade like a leaf,
and our iniquities, like the wind, take us away.
There is no one who calls upon your name,
who rouses himself to take hold of you;
for you have hidden your face from us,
and have made us melt in the hand of our iniquities.
But now, O Lord, you are our Father;
we are the clay, and you are our potter;
we are all the work of your hand.
Be not so terribly angry, O Lord,
and remember not iniquity forever.
Behold, please look, we are all your people. (Isaiah 64:5-9, ESV)
You meet him who joyfully works righteousness,
those who remember you in your ways.
Behold, you were angry, and we sinned;
in our sins we have been a long time, and shall we be saved?
We have all become like one who is unclean,
and all our righteous deeds are like a polluted garment.
We all fade like a leaf,
and our iniquities, like the wind, take us away.
There is no one who calls upon your name,
who rouses himself to take hold of you;
for you have hidden your face from us,
and have made us melt in the hand of our iniquities.
But now, O Lord, you are our Father;
we are the clay, and you are our potter;
we are all the work of your hand.
Be not so terribly angry, O Lord,
and remember not iniquity forever.
Behold, please look, we are all your people. (Isaiah 64:5-9, ESV)
하나님의 은혜는, 기쁘게 공의를 행하며 하나님의 길에서 서서 하나님을 기억하는 자를 기뻐하시는 내 하나님을 오랫동안 의지적으로 거역하여 징벌을 받는 자, 생각에서, 그리고 삶의 방식에서 부정한 자가 되어 누더기같은 의를 입고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영적 생명이 말라 비틀어진 잎사귀처럼 되어, 세속의 바람에 힘없이 이리 밀리고 저리 밀려가며 그리스도인으로서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그런 자가되어 주님의 가장 큰 형벌인 "신적유기(내어버려두심)"을 당하는 가운데 소멸을 향해 속절없이 떠내려 갈 때, 바로 그 때 우리의 입에서 흘러 나오는 간절하고 진심이 담긴 한 마디의 고백 "하나님! 하나님은 내 아버지이십니다."라는 고백 하나에 마음을 돌이키시고 구원을 베푸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5장에서 탕자의 비유를 들어 너무나 적확하게 표현하신 그 하나님. 내 아버지...
아버지의 그런 은혜 때문에 이 세상이 존속하고, 죄인 중의 괴수인 내가 이 땅에서 호흡하며, 하나님 앞에 예배드릴 수 있는 것...
그 은혜의 크기를 내가 가늠할 수 있을까?
그저 그 앞에 무릎꿇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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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8:44:00
Comfort for the Contrite (Isaiah 57:14-21)
And it shall be said,
“Build up, build up, prepare the way,
remove every obstruction from my people's way.”
For thus says the One who is high and lifted up,
who inhabits eternity, whose name is Holy:
“I dwell in the high and holy place,
and also with him who is of a contrite and lowly spirit,
to revive the spirit of the lowly,
and to revive the heart of the contrite.
For I will not contend forever,
nor will I always be angry;
for the spirit would grow faint before me,
and the breath of life that I made.
Because of the iniquity of his unjust gain I was angry,
I struck him; I hid my face and was angry,
but he went on backsliding in the way of his own heart.
I have seen his ways, but I will heal him;
I will lead him and restore comfort to him and his mourners,
creating the fruit of the lips.
Peace, peace, to the far and to the near,” says the Lord,
“and I will heal him.
But the wicked are like the tossing sea;
for it cannot be quiet,
and its waters toss up mire and dirt.
There is no peace,” says my God, “for the wicked.” (Isaiah 57:14-21, ESV)
The greatest solace from God, my father and King...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복은 낮아지는 것, 그것도 하나님 앞에 낮아지는 것이다.
그 낮아짐은 자신의 흉악한 죄성(과 그로 인한 결과물인 죄악들)을 직시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위대하심을 인식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인간 중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 쓸 만한 사람이라고 고개를 들 수 있는 자는 없다. 다만, 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서 무지할(아니 넘쳐날) 뿐이다. 내가 그러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복은 낮아지는 것, 그것도 하나님 앞에 낮아지는 것이다.
그 낮아짐은 자신의 흉악한 죄성(과 그로 인한 결과물인 죄악들)을 직시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위대하심을 인식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인간 중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 쓸 만한 사람이라고 고개를 들 수 있는 자는 없다. 다만, 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서 무지할(아니 넘쳐날) 뿐이다. 내가 그러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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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7:31:00
언약을 굳게 잡은 고자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나의 안식일을 지키며 내가 기뻐하는 일을 선택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잡는 고자들에게는 내가 내 집에서, 내 성 안에서 아들이나 딸보다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그들에게 주며 영원한 이름을 주어 끊어지지 아니하게 할 것이며, 또 여호와와 연합하여 그를 섬기며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그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은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사 56:4-7)
For thus says the Lord:
“To the eunuchs who keep my Sabbaths,
who choose the things that please me
and hold fast my covenant,
I will give in my house and within my walls
a monument and a name
better than sons and daughters;
I will give them an everlasting name
that shall not be cut off.
“And the foreigners who join themselves to the Lord,
to minister to him, to love the name of the Lord,
and to be his servants,
everyone who keeps the Sabbath and does not profane it,
and holds fast my covenant—
these I will bring to my holy mountain,
and make them joyful in my house of prayer;
their burnt offerings and their sacrifices
will be accepted on my altar;
for my house shall be called a house of prayer
for all peoples.” (Isaiah 56:4-7, ESV)
For thus says the Lord:
“To the eunuchs who keep my Sabbaths,
who choose the things that please me
and hold fast my covenant,
I will give in my house and within my walls
a monument and a name
better than sons and daughters;
I will give them an everlasting name
that shall not be cut off.
“And the foreigners who join themselves to the Lord,
to minister to him, to love the name of the Lord,
and to be his servants,
everyone who keeps the Sabbath and does not profane it,
and holds fast my covenant—
these I will bring to my holy mountain,
and make them joyful in my house of prayer;
their burnt offerings and their sacrifices
will be accepted on my altar;
for my house shall be called a house of prayer
for all peoples.” (Isaiah 56:4-7, ESV)
고자처럼, 영적으로 볼 때, 스스로 생명을, 그리고 선한 열매를 생산할 능력이 전혀 없는 나이지만, 그런 내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언약을 굳게 잡을 때, 그분께서 나에게 아들이나 딸보다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주신다.
혈통적으로 이스라엘에 속하지 못하여 그들의 말대로 영원한 지옥의 불쏘시개가 되어 마땅한 이방인인 나이지만, 하나님과 연합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이름을 사랑하고, 왕이신 그분의 종이되고 안식일을 지키며, 하나님의 언약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분의 언약을 굳게 지킨다면, 자격없는 나를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으로 일컫는 성스러운 산으로 인도하시며, 거기에서 기도하게 하시며, 자격없는 자가 드리는 희생 재물을 받으시며, 그 가운데 기쁨을 누리도록 허락하신다.
그것이 복음이 아니고 무엇이랴?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성취된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고아와 과부를 돌보시는 하나님께서, 그보다도 못한 흉악한 죄인인 나를 지옥불에 던지지 않으시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하시고, 자녀삼아 주셔서, 고자인 나에게 생명을 누리게 하시고, 이방인인 나를 하나님 집의 식구로 맞아 주신다.
이보다 더 큰 복이 어디에 있을까?
그저... 감사... 감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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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8:19:00
"I hid not my face from disgrace and spitting..."
The Lord God has given me
the tongue of those who are taught,
that I may know how to sustain with a word
him who is weary.
Morning by morning he awakens;
he awakens my ear
to hear as those who are taught.
The Lord God has opened my ear,
and I was not rebellious;
I turned not backward.
I gave my back to those who strike,
and my cheeks to those who pull out the beard;
I hid not my face
from disgrace and spitting. (Isaiah 50:4-6, ESV)
“Listen to me, you who know righteousness,
the people in whose heart is my law;
fear not the reproach of man,
nor be dismayed at their revilings.
For the moth will eat them up like a garment,
and the worm will eat them like wool;
but my righteousness will be forever,
and my salvation to all generations.” (Isaiah 51:7-8, ESV)
the tongue of those who are taught,
that I may know how to sustain with a word
him who is weary.
Morning by morning he awakens;
he awakens my ear
to hear as those who are taught.
The Lord God has opened my ear,
and I was not rebellious;
I turned not backward.
I gave my back to those who strike,
and my cheeks to those who pull out the beard;
I hid not my face
from disgrace and spitting. (Isaiah 50:4-6, ESV)
“Listen to me, you who know righteousness,
the people in whose heart is my law;
fear not the reproach of man,
nor be dismayed at their revilings.
For the moth will eat them up like a garment,
and the worm will eat them like wool;
but my righteousness will be forever,
and my salvation to all generations.” (Isaiah 51:7-8, ES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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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7:30:00
[펌] SNS와 인간의 고독
아래 글은 "복음과상황" 2013년 6월호에 게제된 김현준님의 글 중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독일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Zigmunt Bauman)은 인터넷과 SNS의 발달로 인해 개인은 '각자 자신의 보호막 속에 갇히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외로움을 달래려는 사람들은 인터넷을 '선택적'으로 이용하고, 자신의 '입맛에 맞는' 정보만 취하고, 개인의 선호도에 따라 친구를 SNS 상에서 추가 혹은 차단한다. 이로써 독서하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창밖을 응시하며 타인의 세계를 상상해 보는 일, 홀로 고독하게 사유하는 행동은 점점 덜하게 된다. '외로움'을 달래려는 행동들이 인간 상호 소통의 기반인 내적 견고함을 다지는 '고독'의 시간을 빼앗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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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Zigmunt Bauman)은 인터넷과 SNS의 발달로 인해 개인은 '각자 자신의 보호막 속에 갇히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외로움을 달래려는 사람들은 인터넷을 '선택적'으로 이용하고, 자신의 '입맛에 맞는' 정보만 취하고, 개인의 선호도에 따라 친구를 SNS 상에서 추가 혹은 차단한다. 이로써 독서하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창밖을 응시하며 타인의 세계를 상상해 보는 일, 홀로 고독하게 사유하는 행동은 점점 덜하게 된다. '외로움'을 달래려는 행동들이 인간 상호 소통의 기반인 내적 견고함을 다지는 '고독'의 시간을 빼앗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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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1:13:00
안양에 살면서...
지난 2월 하순부터 안양에 살면서 느낀 것.
무질서 & 이기주의
버스는 신호, 속도, 차선, 안전 무시하고 질주하기 일쑤이고, 자동차는 정도는 조금 낫지만 그래도 마찬가지...
사람들은 뭐가 그리 급한지 남에 대한 예의는 안중에도 없이 뛰고 부딪히고 개인적인 공간을 침범하고, 순서를 지키지 않고...
한 버스 정류장이 너무 혼잡하고 위험해서 민원을 넣었더니, 돌아오는 공무원의 답변은 내가 제안한 대로 바꾸면 사람들이 불편해하기 때문에 안 된다는 답변... 안전보다 편의가 우선인... 그런 곳. (답장을 보내면서, 사람이 죽거나 다쳐야 뭔가 할 생각이냐고 항의했건만, 콧방귀도 안뀌는 것 같다.)
미국에 살 때, 오스틴이 대도시가 아니어서 그랬겠지만, 여유와 질서가 있었다.
한국에 와서 부천에 살면서 미국과 비교되면서 실망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 동네는 질서 준수와 타인에 대한 배려가 있었다.
그런데, 내가 살던 부천의 그 동네보다는 많이 더 잘사는 동네로 이사왔는데, 이 안양은, 적어도 내가 사는 안양의 평촌지역은 부천보다 훨씬 못하다.
교육열로 유명한 안양의 평촌.
무슨 교육열인지...
뭘 가르치겠다는 것인지...
남은 안중에도 없고, 나만 앞서나가면 된다는 것을 가르치고 싶은 것인지...
하긴, 길거리에 수없이 버려지는 쓰레기들, 특히 학생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버리고 가는 그것들이 바로 그런 교육의 결과를 보여주는 것 아닌가?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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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질서 & 이기주의
버스는 신호, 속도, 차선, 안전 무시하고 질주하기 일쑤이고, 자동차는 정도는 조금 낫지만 그래도 마찬가지...
사람들은 뭐가 그리 급한지 남에 대한 예의는 안중에도 없이 뛰고 부딪히고 개인적인 공간을 침범하고, 순서를 지키지 않고...
한 버스 정류장이 너무 혼잡하고 위험해서 민원을 넣었더니, 돌아오는 공무원의 답변은 내가 제안한 대로 바꾸면 사람들이 불편해하기 때문에 안 된다는 답변... 안전보다 편의가 우선인... 그런 곳. (답장을 보내면서, 사람이 죽거나 다쳐야 뭔가 할 생각이냐고 항의했건만, 콧방귀도 안뀌는 것 같다.)
미국에 살 때, 오스틴이 대도시가 아니어서 그랬겠지만, 여유와 질서가 있었다.
한국에 와서 부천에 살면서 미국과 비교되면서 실망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 동네는 질서 준수와 타인에 대한 배려가 있었다.
그런데, 내가 살던 부천의 그 동네보다는 많이 더 잘사는 동네로 이사왔는데, 이 안양은, 적어도 내가 사는 안양의 평촌지역은 부천보다 훨씬 못하다.
교육열로 유명한 안양의 평촌.
무슨 교육열인지...
뭘 가르치겠다는 것인지...
남은 안중에도 없고, 나만 앞서나가면 된다는 것을 가르치고 싶은 것인지...
하긴, 길거리에 수없이 버려지는 쓰레기들, 특히 학생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버리고 가는 그것들이 바로 그런 교육의 결과를 보여주는 것 아닌가?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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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0:59:00
[펌] 교회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들'
아래 글은 제 글이 아니라 미주뉴스엔조이에서 퍼온 글입니다.
경건과 열심을 생각조차 않고, 자신의 욕망을 따라 아무렇게나 살면서 스스로를 늘 용서하고 정당화하고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대부분인 요즘 교회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조심스럽게 읽어야 할 글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 반대쪽에 있는 열심을 내는 그룹 내에서 흔히 나타나는 모습에 대해서 이야기한 너무 좋은 내용을 담고 있어서 같이 나누고 싶네요.
본문에도 나와 있지만, 바로 내모습을 돌아보며 더 겸손하며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기사원글: http://www.newsnjoy.us/news/articleView.html?idxno=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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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들'
최태선 목사의 '평화의 사람들', 경건의 능력인가 폭력인가
얼마 전 제가 쓴 글에 댓글이 달렸습니다. 반가운 마음으로 읽어보았습니다. 그런데 '악플'이었습니다. 댓글을 쓴 분은 분명 뭔가를 아는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적어도 나름대로 성경을 읽었고 해석하고 최소한 설교를 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댓글의 내용은 참 신랄했습니다. 읽을수록 댓글을 단 사람의 마음이 참 날카롭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우월감에서 나온 댓글이었습니다. 분명 댓글을 단 사람은 제가 쓴 글이 유치하거나 조잡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잠시 동안이었지만 제 마음은 아팠습니다. 제 글이 마음에 들지 않고 유치하게 느껴졌다면 좀더 어른스런 방법으로 지적해주고 조언해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온라인상의 교제의 특성이기도 하지만 거기에는 기독교 특유의 특성으로 자리 잡은 오만이 실려 있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에는 그런 종류의 폭력이 난무합니다. 자신이 경건하다고 생각하는 오만이 다른 이들을 향한 판단과 정죄로 이어집니다. 분명 그 사람의 생각은 무언가 옳은 것을 위해 자신이 일조를 하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복음을 위해 개혁을 위해 혹은 순수함을 유지하기 위한 당연한 노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합니다.
심한 경우에는 칼로 찌르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고통을 느끼게 합니다. 그것이 치명적인 폭력이라는 것을 당사자는 여간해서는 인식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경건의 폭력'이라고 표현한 어떤 분의 글을 읽고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새벽기도에 오래도록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석한 집사님의 눈길이 무섭습니다. 그분의 머릿속에는 새벽기도에 빠진 목사와 장로들의 빠진 횟수와 날자가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십일조를 정확하게 꼬박꼬박하는 신자의 눈길이 무섭습니다. 그분의 머릿속에는 십일조을 빼먹거나 제대로 하지 않는 동료 신자들의 목록이 빼곡히 들어 있습니다.
40일 금식기도를 다녀온 권사님의 눈길이 무섭습니다. 그분의 시선에는 '너는 왜 금식기도를 하지 않느냐'는 무언의 질타가 섞여 있습니다. 크고 건강한 교회를 다니는 성도가 무섭습니다. 그분의 말투에는 작고 별 볼일 없는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에 대한 우월감이 넘쳐납니다. 무언가를 깨달은 '안티'가 무섭습니다. 그분의 몸짓에는 깨닫지 못한 어리석은 사람들을 향한 손가락질이 배어있습니다.
신학 박사 학위를 받은 신학자가 무섭습니다. 그분 앞에 서면 모든 사람들이 종류별로 차곡차곡 분류되어 버리고 맙니다. 성도수가 제법 되는 교회 목사들이 무섭습니다. 그분의 권위와 무게가 엄청난 압박으로 성도들을 찌그러트립니다.
사실 이런 모습은 성경에도 기록되어 있는 오래 된 전통입니다. 너무도 경건이 몸에 배어 스스로 자신들을 구별된 존재라고 여겼던 바리새인들의 모습이 바로 그런 모습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는 것도 모자라 울타리 율법까지 만들어 놓고 철저하게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심지어는 음식에 집어넣는 양념까지 십분의 일을 구분하여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신앙의 일상화로 이어진 것이 아니라 '자기과시'의 일상화가 되어 버렸습니다. 율법과 경건이 종교의 광기로 치달았습니다. 그래서 수틀리면 사람들을 돌로 쳐 죽이고자 하는 무서운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아시시의 프란체스코의 전해지는 많은 이야기들 중 하나입니다. 프란체스코의 제자들이 스승과 함께 40일 금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하루를 남겨 놓은 39일째 되는 날 젊은 제자 하나가 맛있는 스프 냄새에 이끌려 자신도 모르게 한 숟가락을 입에 떠 넣고 말았습니다. 그 순간 함께 금식을 하던 제자들은 눈을 부릅뜨고 그 젊은 제자를 노려보았습니다.
그 눈길 속에는 유혹에 넘어간 불쌍한 영혼을 향한 애처로움이 아니라 분노에 찬 정죄의 따가운 시선이 들어 있었습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았던 제자들은 유혹에 넘어간 젊은 제자를 엄하게 꾸짖어주기를 바라며 스승, 프란체스코를 쳐다보았습니다.
그런데 프란체스코는 말없이 수저를 집어 들더니 젊은 제자가 먹었던 스프를 천천히 떠먹기 시작했습니다. 경악의 눈길로 스승을 쳐다보고 있는 제자들을 향해 프란체스코는 조용히 말했습니다.
"우리가 금식을 하며 기도를 드리는 것은 모두가 예수님의 인격을 닮고 그분의 성품을 본받아 서로가 서로를 참으며 사랑하며 아끼자는 것입니다. 저 젊은이가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스프를 떠먹은 것은 죄가 아닙니다. 하지만 그를 정죄하고 배척하는 여러분들이야말로 지금 큰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굶으면서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는 실컷 먹고 사랑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바른 신앙이 무엇인지, 경건의 폭력이 어떤 것인가를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39일 동안 무사히 금식을 마친 프란체스코의 제자들에게서 그들의 엄격한 경건과 돈독한 신앙이 오히려 형제를 짓밟고 자신들의 영성마저 망가트리고 있다는 사실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 주변에는 이러한 이야기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율법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다고 다른 이들을 욕하고 질타하면서 그보다 더 큰 사랑의 계명을 어기던 바리새인들의 모습을 오늘 우리의 모습 속에서 확인하기란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우리도 바리새인들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仁) 과 신(信)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23:23)
선종(禪宗)에서는 깨달음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데, 그것을 잘못할 수 있음과 동일한
것으로 봅니다. 참으로 귀중한 생각입니다. 사람은 얼마든지 잘못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아니 '잘못할 수 있음'이야말로 인간의 인간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욕망과 고통으로 가득 찬 어리석은 범부(凡夫)들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서로 긍휼하게 여기고 잘못했을 때에는 그 잘못을 꾸짖고 정죄하기보다는 잘못을 깨닫고 바른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인내하면서 기다려주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경건은 겸손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믿음은 사랑으로 승화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경건과 믿음은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 대한 배타와 거부가 될 것이며 무엇보다 폭력이 되어 다른 사람의 영혼을 상하게 하는 끔찍한 범죄가 될 것입니다.
누구의 이야기랄 것도 없이 우리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더구나 오늘날처럼 자아가 모든 것의 중심이 되도록 부추기는 이 세상 속에서 신앙생활을 잘해보겠다는 사람들이 쉽게 빠지게 되는 함정입니다.
프란체스코의 금식에 관한 이야기를 하나 더 소개하겠습니다. 사순절을 맞아 프란체스코는 사람이 살지 않는 섬에 들어가 금식하기로 했습니다. 프란체스코는 빵 두 덩이를 가지고 섬으로 건너갔습니다. 사순절 기간이 끝나 다시 배를 타고 갔을 때 프란체스코는 한 덩이 반을 들고 있었습니다. 교만해지지 않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부족함을 잊지 않기 위해 금식 기간 동안 빵 반쪽을 먹었던 것입니다. 그가 허기를 참지 못해 빵 반쪽을 먹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가 허문 것은 자신의 완벽함이었습니다. 언제라도 잘못 할 수 있는 인간임을 잊지 않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사랑에 실패하지 않기 위해, 인격에 실패하지 않기 위해 때로 종교에 실패하는 사람이 되는 것은 어떠실는지요? 프란체스코의 빵 반쪽을 기억하면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자신의 완벽함을 버리고, 다른 이의 영혼을 상하게 할 수 있는 경건의 폭력을 제거할 수 있다면 우리들의 교회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평화로운 곳이 될 것입니다.
댓글을 통해 제게 기꺼이 빵 반쪽이 되어주신 형제님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최태선 목사 / 어지니교회
.
경건과 열심을 생각조차 않고, 자신의 욕망을 따라 아무렇게나 살면서 스스로를 늘 용서하고 정당화하고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대부분인 요즘 교회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조심스럽게 읽어야 할 글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 반대쪽에 있는 열심을 내는 그룹 내에서 흔히 나타나는 모습에 대해서 이야기한 너무 좋은 내용을 담고 있어서 같이 나누고 싶네요.
본문에도 나와 있지만, 바로 내모습을 돌아보며 더 겸손하며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기사원글: http://www.newsnjoy.us/news/articleView.html?idxno=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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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들'
최태선 목사의 '평화의 사람들', 경건의 능력인가 폭력인가
얼마 전 제가 쓴 글에 댓글이 달렸습니다. 반가운 마음으로 읽어보았습니다. 그런데 '악플'이었습니다. 댓글을 쓴 분은 분명 뭔가를 아는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적어도 나름대로 성경을 읽었고 해석하고 최소한 설교를 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댓글의 내용은 참 신랄했습니다. 읽을수록 댓글을 단 사람의 마음이 참 날카롭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우월감에서 나온 댓글이었습니다. 분명 댓글을 단 사람은 제가 쓴 글이 유치하거나 조잡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잠시 동안이었지만 제 마음은 아팠습니다. 제 글이 마음에 들지 않고 유치하게 느껴졌다면 좀더 어른스런 방법으로 지적해주고 조언해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온라인상의 교제의 특성이기도 하지만 거기에는 기독교 특유의 특성으로 자리 잡은 오만이 실려 있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에는 그런 종류의 폭력이 난무합니다. 자신이 경건하다고 생각하는 오만이 다른 이들을 향한 판단과 정죄로 이어집니다. 분명 그 사람의 생각은 무언가 옳은 것을 위해 자신이 일조를 하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복음을 위해 개혁을 위해 혹은 순수함을 유지하기 위한 당연한 노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합니다.
심한 경우에는 칼로 찌르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고통을 느끼게 합니다. 그것이 치명적인 폭력이라는 것을 당사자는 여간해서는 인식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경건의 폭력'이라고 표현한 어떤 분의 글을 읽고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새벽기도에 오래도록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석한 집사님의 눈길이 무섭습니다. 그분의 머릿속에는 새벽기도에 빠진 목사와 장로들의 빠진 횟수와 날자가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십일조를 정확하게 꼬박꼬박하는 신자의 눈길이 무섭습니다. 그분의 머릿속에는 십일조을 빼먹거나 제대로 하지 않는 동료 신자들의 목록이 빼곡히 들어 있습니다.
40일 금식기도를 다녀온 권사님의 눈길이 무섭습니다. 그분의 시선에는 '너는 왜 금식기도를 하지 않느냐'는 무언의 질타가 섞여 있습니다. 크고 건강한 교회를 다니는 성도가 무섭습니다. 그분의 말투에는 작고 별 볼일 없는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에 대한 우월감이 넘쳐납니다. 무언가를 깨달은 '안티'가 무섭습니다. 그분의 몸짓에는 깨닫지 못한 어리석은 사람들을 향한 손가락질이 배어있습니다.
신학 박사 학위를 받은 신학자가 무섭습니다. 그분 앞에 서면 모든 사람들이 종류별로 차곡차곡 분류되어 버리고 맙니다. 성도수가 제법 되는 교회 목사들이 무섭습니다. 그분의 권위와 무게가 엄청난 압박으로 성도들을 찌그러트립니다.
사실 이런 모습은 성경에도 기록되어 있는 오래 된 전통입니다. 너무도 경건이 몸에 배어 스스로 자신들을 구별된 존재라고 여겼던 바리새인들의 모습이 바로 그런 모습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는 것도 모자라 울타리 율법까지 만들어 놓고 철저하게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심지어는 음식에 집어넣는 양념까지 십분의 일을 구분하여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신앙의 일상화로 이어진 것이 아니라 '자기과시'의 일상화가 되어 버렸습니다. 율법과 경건이 종교의 광기로 치달았습니다. 그래서 수틀리면 사람들을 돌로 쳐 죽이고자 하는 무서운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아시시의 프란체스코의 전해지는 많은 이야기들 중 하나입니다. 프란체스코의 제자들이 스승과 함께 40일 금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하루를 남겨 놓은 39일째 되는 날 젊은 제자 하나가 맛있는 스프 냄새에 이끌려 자신도 모르게 한 숟가락을 입에 떠 넣고 말았습니다. 그 순간 함께 금식을 하던 제자들은 눈을 부릅뜨고 그 젊은 제자를 노려보았습니다.
그 눈길 속에는 유혹에 넘어간 불쌍한 영혼을 향한 애처로움이 아니라 분노에 찬 정죄의 따가운 시선이 들어 있었습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았던 제자들은 유혹에 넘어간 젊은 제자를 엄하게 꾸짖어주기를 바라며 스승, 프란체스코를 쳐다보았습니다.
그런데 프란체스코는 말없이 수저를 집어 들더니 젊은 제자가 먹었던 스프를 천천히 떠먹기 시작했습니다. 경악의 눈길로 스승을 쳐다보고 있는 제자들을 향해 프란체스코는 조용히 말했습니다.
"우리가 금식을 하며 기도를 드리는 것은 모두가 예수님의 인격을 닮고 그분의 성품을 본받아 서로가 서로를 참으며 사랑하며 아끼자는 것입니다. 저 젊은이가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스프를 떠먹은 것은 죄가 아닙니다. 하지만 그를 정죄하고 배척하는 여러분들이야말로 지금 큰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굶으면서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는 실컷 먹고 사랑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바른 신앙이 무엇인지, 경건의 폭력이 어떤 것인가를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39일 동안 무사히 금식을 마친 프란체스코의 제자들에게서 그들의 엄격한 경건과 돈독한 신앙이 오히려 형제를 짓밟고 자신들의 영성마저 망가트리고 있다는 사실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 주변에는 이러한 이야기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율법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다고 다른 이들을 욕하고 질타하면서 그보다 더 큰 사랑의 계명을 어기던 바리새인들의 모습을 오늘 우리의 모습 속에서 확인하기란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우리도 바리새인들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仁) 과 신(信)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23:23)
선종(禪宗)에서는 깨달음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데, 그것을 잘못할 수 있음과 동일한
것으로 봅니다. 참으로 귀중한 생각입니다. 사람은 얼마든지 잘못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아니 '잘못할 수 있음'이야말로 인간의 인간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욕망과 고통으로 가득 찬 어리석은 범부(凡夫)들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서로 긍휼하게 여기고 잘못했을 때에는 그 잘못을 꾸짖고 정죄하기보다는 잘못을 깨닫고 바른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인내하면서 기다려주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경건은 겸손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믿음은 사랑으로 승화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경건과 믿음은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 대한 배타와 거부가 될 것이며 무엇보다 폭력이 되어 다른 사람의 영혼을 상하게 하는 끔찍한 범죄가 될 것입니다.
누구의 이야기랄 것도 없이 우리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더구나 오늘날처럼 자아가 모든 것의 중심이 되도록 부추기는 이 세상 속에서 신앙생활을 잘해보겠다는 사람들이 쉽게 빠지게 되는 함정입니다.
프란체스코의 금식에 관한 이야기를 하나 더 소개하겠습니다. 사순절을 맞아 프란체스코는 사람이 살지 않는 섬에 들어가 금식하기로 했습니다. 프란체스코는 빵 두 덩이를 가지고 섬으로 건너갔습니다. 사순절 기간이 끝나 다시 배를 타고 갔을 때 프란체스코는 한 덩이 반을 들고 있었습니다. 교만해지지 않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부족함을 잊지 않기 위해 금식 기간 동안 빵 반쪽을 먹었던 것입니다. 그가 허기를 참지 못해 빵 반쪽을 먹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가 허문 것은 자신의 완벽함이었습니다. 언제라도 잘못 할 수 있는 인간임을 잊지 않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사랑에 실패하지 않기 위해, 인격에 실패하지 않기 위해 때로 종교에 실패하는 사람이 되는 것은 어떠실는지요? 프란체스코의 빵 반쪽을 기억하면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자신의 완벽함을 버리고, 다른 이의 영혼을 상하게 할 수 있는 경건의 폭력을 제거할 수 있다면 우리들의 교회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평화로운 곳이 될 것입니다.
댓글을 통해 제게 기꺼이 빵 반쪽이 되어주신 형제님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최태선 목사 / 어지니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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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8:43:00
내가 맹인들을 그들이 알지 못하는 길로 이끌며,
그들의 알지 못하는 지름길로 인도하며,
암흑이 그 앞에서 광명이 되게 하며,
굽은 데를 곧게 할 것이라.
내가 이 일을 행하여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리니,
조각한 우상을 의지하며,
부어 만든 우상을 향하여 너희는 우리의 신이라 하는 자는
물리침을 받아 크게 수치를 당하리라!
너희 못 듣는 자들아!
들으라!
너희 맹인들아!
밝히 보라!
맹인이 누구냐?
내 종이 아니냐?
누가 내가 보내는 내 사자 같이 못 듣는 자겠느냐?
누가 내게 충성된 자 같이 맹인이겠느냐?
누가 여호와의 종 같이 맹인이겠느냐?
네가 많은 것을 볼지라도 유의하지 아니하며,
귀가 열려 있을지라도 듣지 아니하는도다(사 42:16-20)
And I will lead the blind
in a way that they do not know,
in paths that they have not known
I will guide them.
I will turn the darkness before them into light,
the rough places into level ground.
These are the things I do,
and I do not forsake them.
They are turned back and utterly put to shame,
who trust in carved idols,
who say to metal images,
“You are our gods.”
Hear, you deaf,
and look, you blind, that you may see!
Who is blind but my servant,
or deaf as my messenger whom I send?
Who is blind as my dedicated one,
or blind as the servant of the Lord?
He sees many things, but does not observe them;
his ears are open, but he does not hear. (ESV)
.
And I will lead the blind
in a way that they do not know,
in paths that they have not known
I will guide them.
I will turn the darkness before them into light,
the rough places into level ground.
These are the things I do,
and I do not forsake them.
They are turned back and utterly put to shame,
who trust in carved idols,
who say to metal images,
“You are our gods.”
Hear, you deaf,
and look, you blind, that you may see!
Who is blind but my servant,
or deaf as my messenger whom I send?
Who is blind as my dedicated one,
or blind as the servant of the Lord?
He sees many things, but does not observe them;
his ears are open, but he does not hear. (ES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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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8:20:00
"야곱이 탈취를 당하게 하신 자가 누구냐?"
"야곱이 탈취를 당하게 하신 자가 누구냐? 이스라엘을 약탈자들에게 넘기신 자가 누구냐? 여호와가 아니시냐? 우리가 그에게 범죄하였도다! 그들이 그의 길로 다니기를 원하지 아니하며, 그의 교훈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사 42:24)
나에게 일어나는 좋지 않아 보이는 것들이 모든 하나님의 심판이고 정죄라는 생각도 잘못되었지만, 그런 것들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확신, 하나님은 "내가 생각하기에 좋은 것"만 주시는 분이라는 주장은 어디에서 나온 신학인가? 적어도 성경적인 주장은 절대 아니다.
.
나에게 일어나는 좋지 않아 보이는 것들이 모든 하나님의 심판이고 정죄라는 생각도 잘못되었지만, 그런 것들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확신, 하나님은 "내가 생각하기에 좋은 것"만 주시는 분이라는 주장은 어디에서 나온 신학인가? 적어도 성경적인 주장은 절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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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8:13:00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
"여호와의 사자가 나가서 앗수르 진중에서 십팔만 오천 인을 쳤으므로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본즉 시체뿐이라."(사 37:36)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나는 언제쯤 그 사실을 믿을 수 있을까?
왜 그리도 그것이 믿어지지 않을까?
교리적으로는 100% 동의하는 그 단순한 사실이, 내 삶에서 진심으로 고백되지 않는 것은, 그 만큼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고, 더 근본적으로는 하나님과 친밀한 인격적인 교제를 갖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와 동시에 내 죄성이 얼마나 큰가에 대해서도 동시에 보여주고 있는 증거다.
그분의 전능하심을 내가 진심으로 믿는다면, 조지 뮬러와 같은 기도의 삶은 그저 늘상 있는 삶의 모습이 될 것이고, 불구덩이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메드락과 사삭과 아벳느고와 같이 삶에 두려움이 없이 오히려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소망이 넘쳐날 것이고, 아귀다툼하는 사회 속에서 성실하게 살지만 그렇다고 부모없는 고아처럼 온 몸에 힘을 주며 자기가 모든 것을 다 해야하는 것처럼 고통스럽게 살지도 않을 것이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충만하여 그분께 내 삶의 주파수를 맞추며 살 수밖에 없을텐데... 내 삶은 그런 모습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아침에 QT하며 기도하는 것 잠깐, 그리고 나서는 마치 하나님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정신없이 이 일 저 일 하는 가운데, 녹초가 되어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가서 퍼져 잠만 자는 인생. 하나님께 이것저것 해달라는 요구는 많지만, 그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 아버지라는 사실을 묵상하며, 기뻐하며 감사하며, 내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 살피는 것은 턱없이 부족한 삶.
18만 5천이라는 군대는 인구가 매우 적었던 그 당시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보더라도 어마어마한 군대이다. 당시 예루살렘에 살았던 인구보다 더 많았을 것이다. 사실상 그들을 물리치기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런 그 군대를 보고 항복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엎드려 기도했던 히스기야도 참 대단한 인물이다. 어쨋든 그런 군대를 한 순간에 없애버리신다. 하나님께서 "치시니" 그 큰 군대는 "시체"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이다.
하나님께서는 요즘 여러 경로를 통해서 이 믿음없는 자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시고, "제발" 믿으라고 하시는 것 같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세상은 두려워 보이고, 내면에서는 온갖 불평만 쌓인다. 잘해야 한다는 생각에, 아니, 살아 남아야 한다는 두려움에, 온 몸에 힘이 들어가 삶은 피곤하기만 하다. 생존에 모든 것을 걸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나라는 안중에도 없다. 그저 내 일, 내 가족 뿐이다. 그것에 도움되는 것은 "선한 것"이고 그것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악한 것"으로 분류된다. 마치 사사기에서 왕이 없으므로(다시 말해 왕이신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지 않음으로) 각자 자기 원하는 대로 살았던 것처럼, 꼭 그런 영적, 도덕적 무정부 상태로 살아가게 된다. 그것이 내 삶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삶에서 돌이키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당신의 전능하심을 내게 보여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는 삶은 편안하다. 하나님께서 내게 모든 "좋은 것"을 주시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주인되는 삶을 내려 놓고 전능하신 그분께 삶을 맡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분의 차에 무임승차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나에게 그런 특권을 누릴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그분과 함께 푸른 풀밭도 가고, 사망의 골짜기로도 가는 것이다. 바울이 고백하는 것처럼 풍부에도 처할 줄 알고, 비천에 처할 줄도 알게 되는 것이다. 어느 상황이나 두려움이 없다. 그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세상이 도저히 알 수 없는 비밀스러운)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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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전능하시다.
나는 언제쯤 그 사실을 믿을 수 있을까?
왜 그리도 그것이 믿어지지 않을까?
교리적으로는 100% 동의하는 그 단순한 사실이, 내 삶에서 진심으로 고백되지 않는 것은, 그 만큼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고, 더 근본적으로는 하나님과 친밀한 인격적인 교제를 갖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와 동시에 내 죄성이 얼마나 큰가에 대해서도 동시에 보여주고 있는 증거다.
그분의 전능하심을 내가 진심으로 믿는다면, 조지 뮬러와 같은 기도의 삶은 그저 늘상 있는 삶의 모습이 될 것이고, 불구덩이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메드락과 사삭과 아벳느고와 같이 삶에 두려움이 없이 오히려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소망이 넘쳐날 것이고, 아귀다툼하는 사회 속에서 성실하게 살지만 그렇다고 부모없는 고아처럼 온 몸에 힘을 주며 자기가 모든 것을 다 해야하는 것처럼 고통스럽게 살지도 않을 것이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충만하여 그분께 내 삶의 주파수를 맞추며 살 수밖에 없을텐데... 내 삶은 그런 모습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아침에 QT하며 기도하는 것 잠깐, 그리고 나서는 마치 하나님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정신없이 이 일 저 일 하는 가운데, 녹초가 되어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가서 퍼져 잠만 자는 인생. 하나님께 이것저것 해달라는 요구는 많지만, 그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 아버지라는 사실을 묵상하며, 기뻐하며 감사하며, 내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 살피는 것은 턱없이 부족한 삶.
18만 5천이라는 군대는 인구가 매우 적었던 그 당시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보더라도 어마어마한 군대이다. 당시 예루살렘에 살았던 인구보다 더 많았을 것이다. 사실상 그들을 물리치기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런 그 군대를 보고 항복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엎드려 기도했던 히스기야도 참 대단한 인물이다. 어쨋든 그런 군대를 한 순간에 없애버리신다. 하나님께서 "치시니" 그 큰 군대는 "시체"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이다.
하나님께서는 요즘 여러 경로를 통해서 이 믿음없는 자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시고, "제발" 믿으라고 하시는 것 같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세상은 두려워 보이고, 내면에서는 온갖 불평만 쌓인다. 잘해야 한다는 생각에, 아니, 살아 남아야 한다는 두려움에, 온 몸에 힘이 들어가 삶은 피곤하기만 하다. 생존에 모든 것을 걸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나라는 안중에도 없다. 그저 내 일, 내 가족 뿐이다. 그것에 도움되는 것은 "선한 것"이고 그것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악한 것"으로 분류된다. 마치 사사기에서 왕이 없으므로(다시 말해 왕이신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지 않음으로) 각자 자기 원하는 대로 살았던 것처럼, 꼭 그런 영적, 도덕적 무정부 상태로 살아가게 된다. 그것이 내 삶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삶에서 돌이키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당신의 전능하심을 내게 보여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는 삶은 편안하다. 하나님께서 내게 모든 "좋은 것"을 주시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주인되는 삶을 내려 놓고 전능하신 그분께 삶을 맡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분의 차에 무임승차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나에게 그런 특권을 누릴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그분과 함께 푸른 풀밭도 가고, 사망의 골짜기로도 가는 것이다. 바울이 고백하는 것처럼 풍부에도 처할 줄 알고, 비천에 처할 줄도 알게 되는 것이다. 어느 상황이나 두려움이 없다. 그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세상이 도저히 알 수 없는 비밀스러운)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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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8:59:00
[펌]프랑스 고등학교 졸업시험문제
아래는 페이스북에서 어떤 분이 올린 글 중에서 퍼온 것입니다.
프랑스 고등학교의 졸업시험문제라는데요.
프랑스의 대학입학시험인 바깔로레아의 문제도 이 문제들과 비슷하게 출제된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이런 질문들이 프랑스 교육에서 매우 중요한 것들로 다뤄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겠지요?
고등학교 수준에서 어떤 답을 내놓을지 궁금합니다.
어떤 답을 하든지 간에, 이런 문제를 놓고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 그리고 그것을 학교에서 가르친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나 부럽기만 합니다.
1장 인간(Human)
Q1-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행복이 가능한가?
Q2-꿈은 필요한가?
Q3-과거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우리는 자유로운 존재가 될 수 있을까?
Q4-지금의 나는 내 과거의 총합인가?
Q5-관용의 정신에도 비관용이 내포되어 있는가?
Q6-사랑이 의무일 수 있는가?
Q7-행복은 단지 한순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인가?
Q8-타인을 존경한다는 것은 일체의 열정을 배제한다는 것을 뜻하는가?
Q9-죽음은 인간에게서 일체의 존재 의미를 박탈해 가는가?
Q10-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수 있나?
Q11-행복은 인간에게 도달 불가능한 것인가?
2장 인문학(Humanities)
Q1-우리가 하고 있는 말에는 우리 자신이 의식하고있는 것만이 담기는가?
Q2-철학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
Q3-철학자는 과학자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가?
Q4-역사가는 객관적일 수 있는가?
Q5-역사학자가 기억력만 의존해도 좋은가?
Q6-역사는 인간에게 오는 것인가 아니면 인간에 의해 오는 것인가?
Q7-감각을 믿을 수 있는가?
Q8-재화만이 교환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Q9-인문학은 인간을 예견 가능한 존재로 파악하는가?
Q10-인류가 한 가지 언어만을 말하는 것은 바람직한가?
3장 예술(Arts)
Q1-예술 작품은 반드시 아름다운가?
Q2-예술없이 아름다움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가?
Q3-예술 작품의 복재는 그 작품에 해를 끼치는 일인가?
Q4-예술 작품은 모두 인간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가?
Q5-예술이 인간과 현실과의 관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가?
4장 과학(Sciences)
Q1-생물학적 지식은 일체의 유기체를 기계로만 여기기를 요구하는가?
Q2-우리는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만을 진리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Q3-계산, 그것은 사유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인가?
Q4-무의식에 대한 과학은 가능한가?
Q5-오류는 진리를 발견하는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
Q6-이론의 가치는 실제적 효용가치에 따라 가늠되는가?
Q7-과학의 용도는 어디에 있는가?
Q8-현실이 수학적 법칙에 따른다고 할 수 있는가?
Q9-기술이 인간조건을 바꿀 수 있는가?
Q10-지식은 종교적인 것이든 비종교적인 것이든 일체의 믿음을 배제하는가?
Q11-자연을 모델로 삼는 것이 어느 분야에서 가장 적합한가?
5장 정치와 권리(Politics&Rights)
Q1-권리를 수호한다는 것과 이익을 옹호한다는 것은 같은 뜻인가?
Q2-자유는 주어지는 것인가 아니면 싸워서 획득해야 하는 것인가?
Q3-법에 복종하지 않는 행동도 이성적인 행동일 수 있을까?
Q4-여론이 정권을 이끌 수 있는가?
Q5-의무를 다하지 않고도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가?
Q6-노동은 욕구 충족의 수단에 불구한가?
Q7- 정의의 요구와 자유의 요구는 구별될 수 있는가?
Q8-노동은 도덕적 가치를 지니는가?
Q9-자유를 두려워해야 하나?
Q10-유토피아는 한낱 꿈일 뿐인가?
Q11-국가는 개인의 적인가?
Q12-어디에서 정신의 자유를 알아차릴 수 있나?
Q13-권력 남용은 불가피한 것인가?
Q14-다름은 곧 불평등을 의미하는 것인가?
Q15-노동은 종속적일 따름인가?
Q16-평화와 불의가 함께 갈 수 있나?
6장 윤리(Ethics)
Q1-도덕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반드시 자신의 욕망과 싸운다는 것을 뜻하는가?
Q2-우리는 좋다고 하는 것만을 바라는가?
Q3-의무를 다하는 것만으로 충분한가?
Q4-무엇을 비인간적인 행위라고 하는가?
Q5-일시적이고 순간적인 것에도 가치가 존재하는가?
Q6-무엇이 내 안에서 어떤 행동을 해야 할 지를 말해 주는가?
Q7-우리는 정념을 찬양할 수 있는가?
Q8-종교적 믿음을 가지는 것은 이성을 포기한다는 것을 뜻하는가?
Q9-정열은 우리의 의무 이행을 방해하는가?
Q10-진실에 저항할 수 있는가?
Q11-진리가 우리 마음을 불편하게 할 때 진리 대신 우리에게 위안을 주는 환상을 좇아도 좋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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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고등학교의 졸업시험문제라는데요.
프랑스의 대학입학시험인 바깔로레아의 문제도 이 문제들과 비슷하게 출제된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이런 질문들이 프랑스 교육에서 매우 중요한 것들로 다뤄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겠지요?
고등학교 수준에서 어떤 답을 내놓을지 궁금합니다.
어떤 답을 하든지 간에, 이런 문제를 놓고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 그리고 그것을 학교에서 가르친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나 부럽기만 합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는 생각하는 사람을 키워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그 "생각하는" 시민이 참된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기반이 되는 것이지요.
1장 인간(Human)
Q1-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행복이 가능한가?
Q2-꿈은 필요한가?
Q3-과거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우리는 자유로운 존재가 될 수 있을까?
Q4-지금의 나는 내 과거의 총합인가?
Q5-관용의 정신에도 비관용이 내포되어 있는가?
Q6-사랑이 의무일 수 있는가?
Q7-행복은 단지 한순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인가?
Q8-타인을 존경한다는 것은 일체의 열정을 배제한다는 것을 뜻하는가?
Q9-죽음은 인간에게서 일체의 존재 의미를 박탈해 가는가?
Q10-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수 있나?
Q11-행복은 인간에게 도달 불가능한 것인가?
2장 인문학(Humanities)
Q1-우리가 하고 있는 말에는 우리 자신이 의식하고있는 것만이 담기는가?
Q2-철학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
Q3-철학자는 과학자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가?
Q4-역사가는 객관적일 수 있는가?
Q5-역사학자가 기억력만 의존해도 좋은가?
Q6-역사는 인간에게 오는 것인가 아니면 인간에 의해 오는 것인가?
Q7-감각을 믿을 수 있는가?
Q8-재화만이 교환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Q9-인문학은 인간을 예견 가능한 존재로 파악하는가?
Q10-인류가 한 가지 언어만을 말하는 것은 바람직한가?
3장 예술(Arts)
Q1-예술 작품은 반드시 아름다운가?
Q2-예술없이 아름다움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가?
Q3-예술 작품의 복재는 그 작품에 해를 끼치는 일인가?
Q4-예술 작품은 모두 인간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가?
Q5-예술이 인간과 현실과의 관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가?
4장 과학(Sciences)
Q1-생물학적 지식은 일체의 유기체를 기계로만 여기기를 요구하는가?
Q2-우리는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만을 진리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Q3-계산, 그것은 사유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인가?
Q4-무의식에 대한 과학은 가능한가?
Q5-오류는 진리를 발견하는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
Q6-이론의 가치는 실제적 효용가치에 따라 가늠되는가?
Q7-과학의 용도는 어디에 있는가?
Q8-현실이 수학적 법칙에 따른다고 할 수 있는가?
Q9-기술이 인간조건을 바꿀 수 있는가?
Q10-지식은 종교적인 것이든 비종교적인 것이든 일체의 믿음을 배제하는가?
Q11-자연을 모델로 삼는 것이 어느 분야에서 가장 적합한가?
5장 정치와 권리(Politics&Rights)
Q1-권리를 수호한다는 것과 이익을 옹호한다는 것은 같은 뜻인가?
Q2-자유는 주어지는 것인가 아니면 싸워서 획득해야 하는 것인가?
Q3-법에 복종하지 않는 행동도 이성적인 행동일 수 있을까?
Q4-여론이 정권을 이끌 수 있는가?
Q5-의무를 다하지 않고도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가?
Q6-노동은 욕구 충족의 수단에 불구한가?
Q7- 정의의 요구와 자유의 요구는 구별될 수 있는가?
Q8-노동은 도덕적 가치를 지니는가?
Q9-자유를 두려워해야 하나?
Q10-유토피아는 한낱 꿈일 뿐인가?
Q11-국가는 개인의 적인가?
Q12-어디에서 정신의 자유를 알아차릴 수 있나?
Q13-권력 남용은 불가피한 것인가?
Q14-다름은 곧 불평등을 의미하는 것인가?
Q15-노동은 종속적일 따름인가?
Q16-평화와 불의가 함께 갈 수 있나?
6장 윤리(Ethics)
Q1-도덕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반드시 자신의 욕망과 싸운다는 것을 뜻하는가?
Q2-우리는 좋다고 하는 것만을 바라는가?
Q3-의무를 다하는 것만으로 충분한가?
Q4-무엇을 비인간적인 행위라고 하는가?
Q5-일시적이고 순간적인 것에도 가치가 존재하는가?
Q6-무엇이 내 안에서 어떤 행동을 해야 할 지를 말해 주는가?
Q7-우리는 정념을 찬양할 수 있는가?
Q8-종교적 믿음을 가지는 것은 이성을 포기한다는 것을 뜻하는가?
Q9-정열은 우리의 의무 이행을 방해하는가?
Q10-진실에 저항할 수 있는가?
Q11-진리가 우리 마음을 불편하게 할 때 진리 대신 우리에게 위안을 주는 환상을 좇아도 좋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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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at
오전 8: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