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뜻...

지난 얼마 동안 주님의 뜻을 구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늘 그렇듯이, 주님의 뜻을 분명히 안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네요... 특히 중요한 일일수록 더 그렇다는 것을 느낍니다.
주님의 뜻을 아는 방법에 대해서 이론적으로는 많이 알지만, 늘 실재에 있어서는 그 많은 이론들이 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을 느낍니다. 그것은, 하나님이라는 분의 존재가 몇개의 원리나 법칙이 아니라 살아계신 인격이시기 때문이겠지요. 하나님이 인격이시라는 것은 바로 몇 개의 변수를 통해서 발견되는 하나의 함수가 아니라는 것, 똑 같아보이는 조건과 상황이라 할지라도 그 결론은 다를 수 있다는 것이 바로 그분이 인격이시라는 것의 의미 인 것 같습니다.

그분의 뜻을 아는 것은, 몇 가지의 변수나 요소를 통해서 알아내는 것이 아니라, 그분과 깊은 관계, 그분과의 깊은 친밀함을 통한 방법 밖에 없다는 것... 그분의 마음 깊은 곳에 내 마음이 닿을 때에야 그분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는 것... 그래서 그분의 뜻을 아는 것은 매우 어렵지만, 또 한편으로는 매우 쉬운 것인 것 같습니다. 그분과 "친하기만" 하면, 특별히 구하지 않아도 이미 알게 되는 그 어떤 것이 아닐까요?

그렇게 본다면, 그분의 뜻이 분명히 보이지 않는 것은 아마도 어느새 나와 하나님의 사이가 서먹서먹해진 모양입니다. 나는 그분과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관계라는 것이 한 사람만 가깝다고 느낀다고 해서 실재로 가까운 것은 아닌 것인데... 하나님은 저를 그렇게 생각하시지 않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히 친밀한 관계가 되지 못하는 가장 중요한 원인이 바로 나의 죄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하나님의 뜻을 잘 파악하지 못하는 지금의 상태는 제 신앙에 빨간 불이 들어 온 것이라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죄"가 유일한 원인은 아니지만, 그래서 다른 원인이 있을 수 있지만, 가장 가능성이 높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가장 치명적인 해악을 끼치는 것이 죄라는 것을 고려할 때, 진지하게 제 삶을 돌아보며, 그간 알게 모르게 지은 죄가 하나님과 저 사이를 벌려 놓지 않았나 점검해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너무나 중요한 때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꼭 알아야 하는 때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중요한 만큼, 그와 비례하여, 제 삶이 정결해 져야 하며, 제 마음이 청결해 져야 할  때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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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will cost you everything"

Steve Lawson 목사님의 설교 중 일부...
최근 들었던 모든 말씀 중에서 가장 Powerful하고, 내 스스로를 돌아보며, 겸손해 질 수 밖에 없게 만드는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내 자신이 정말 한 없이 부끄러워지며, 다시 한 번 사도 바울의 삶을 묵상하며, 그의 삶을 갈망한다. 주님을 푯대로 앞만 보고 달려가는 삶...

(이 비디오를 알게 해 준 동역자 이유경 자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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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함되시는 주님...

어릴 때부터 또래 아이들에 비해 등치가 유난히 컸던 나... 항상 가장 크고 가장 무섭게 생겼다고 친구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나였지만, 그런 나를 어머니는 항상 걱정하셨다. 마음이 너무 여리다고... 이 험한 세상 살아가기에 너무 연약하다고... 남들이 들으면 말도 안된다고 할 것이고, 자기자식이라서 그렇게 착각하는 것이라고 말하겠지만, 나는 어머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안다... 어머님처럼 자식인 나를 잘 파악하는 사람은 없다.

내가 얼마나 감정적으로 약한 사람인지, 얼마나 두려움이 많은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상처를 쉽게 받는지, 약하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의존적인지... 겉으로 보이는 나와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 내 안에 있다.

주님을 만난 후... 내 자신이 변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믿음 때문에, 내가 많이 변했다. 두려운 가운데서도 주님에 대한 신뢰 때문에 담대해질 수 있고, 상처를 쉽게 받는 내 자아는 여전하지만, 주님께서 방패가 되셔서 상처를 받지 않도록 도우시고, 감정적으로 연약하지만, 나를 굳게 세우셔서 강하게 하신다. 내 연약함은 그대로 있는데, 주님이 내 안에 함께 계시기 때문에 강함을 경험하게 된다. 참으로 신기하다...

오늘 아침 한 형제를 멀리 떠나 보내기 위해 공항으로 함께 했다. 헤어지면서, 나의 연약함이 여전히 내 안에 있음을 느꼈다. 잠깐의 이별에 대한 아쉬움으로 인해서 약해지는 감정... 아주 떠나는 것도 아닌데, 왜 이리 감상적이 되려고 하는지... 잠깐 떠나 있는 것도 감당하지 못해서 약해지는 못난 내 모습... 그 때,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그 감정을 추스릴 수 있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뜻인 이상 최선이라는 것에 대한 믿음. 그리고 이 땅에서는 언제나 헤어짐의 아픔이 있지만, 천국에서는 그런 아픔이 없이 영원토록 같이 있을 수 있다는 믿음.

믿음은 소망을 낳고, 소망은 이 땅의 모든 아픔을 이길 힘을 준다. 세상에서 많은 소망이 있지만, 영원한 진리에 기반한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가지는 소망이 유일하다. 다른 모든 것은 물거품일 뿐...

나의 강함되시는 주님...
내 소망되시는 주님...

주님을 찬양한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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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

방금...
사랑하는 동역자의 아픔을 함께 했다.

바로 어제 참으로 어려운 일을 당한 그 지체...
어제 그 사실을 알고 난 후 하루 종일 그 때문에 마음이 안 좋았다. 한숨이 절로 나오면서, 어떻게 위로할 방법이 없는 것이 한스러웠고, 그것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오늘 같이 점심을 먹으며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행히, 그는 믿음 가운데 담담하게 그 현실을 받아 들이고 있었고, 주님을 신뢰하며, 그분께 인생을 맡기는 믿음으로 이겨나가고 있었다.

믿음... 인생의 가장 어렵고 절망적인 순간에, 그에게서 피어나는 믿음의 열매는 참으로 아름다왔다.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어떤 한 순간에도 흔들리지 않는 것이 참으로 놀라왔다. 거센 폭풍의 한 가운데 있으면서도, 뒤집어지지 않는 커다란 배를 보는 것과 같았다. 믿음의 능력, 복음의 능력은 참으로 위대했다.
그 앞에서 내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믿음에 대해서 거대한 말들을 쏟아붓는 나에게, 그와 비례한 믿음의 실재가 있는가? 말이 아니라 삶으로 보여줄 수 있는... 증거될 수 밖에 없는... 그런 믿음... 부끄럽다...

인생의 가장 힘든 이 시간에 주님을 붙잡는 그에게, 주님의 위로와 인도하심이 충만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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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눅 9:62)

예수님 당시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본다."는 말은 오래전부터 내려온 하나의 격언이었다.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 그 때에 그것에 집중하지 못하고 다른 일을 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는 뜻의 격언이다. 예수님께서는 그 격언, 모두가 이미 알고 있는 그 격언을 사용하셔서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자세에 대해서 말씀하시다.

쟁기를 잡는 자는 밭에 고랑을 만드는 자이다. 그는 앞을 똑바로 보고 밭에 고랑을 내는 일이 집중해야 한다. 쟁기를 잡는 자가 자기 앞의 고랑에 집중하지 않고 뒤를 돌아 본다는 것은 일을 잠쉬 쉬거나 아니면 일을 하는 동시에 다른 일에 신경쓴다는 말이다.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의 제자는 하나님 나라의 일에 일꾼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다. 그분의 나라를 위하여, 아니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 구원을 얻은 자들이다. 자신의 유익과 내 삶의 목표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위해서 부르심을 받은 존재들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서 하나님의 일에 부르심을 받은 자로서 합당한 자세는 그 일에 매진하는 것이다. 똑바로 앞을 보고, 주님이 인도하시는 길을 따라 "Soli Deo Gloria"를 위해서 내 인생을 드리는 것이다. 그것에 전념하는 것이다. 내가 일상의 삶에서 무엇을 하든지, 누구와 있든지 간에 오로지 그것이 내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SDG의 쟁기를 잡고 앞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뒤를 돌아보며, 주변의 세상을 바라보거나, 롯의 아내처럼 유황불에 심판을 받고 있는 소돔성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돌아보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을 뿐 아니라, 예수님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자면,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다." 이 말씀은 참으로 무서운 말씀이다. 여기서 "합당하다"라는 말은 "적합하다" "순응하다"라는 말이다. 하나님 나라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은 어디에 적합할 것인가?

일상의 삶을 살면서, 하나님이 주신 쟁기를 붙잡고 살아가는 가운데, 내 시선, 내 관심, 내 삶의 목표는 어디에 있는지 겸허하게 돌아보게 된다.

"Soli Deo Gloria"인가?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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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is very good..."

"This is very good, Kwangjin!"

방금 전에 한 교수에게서 받은 메일의 첫 문장이다.
내가 쓰고 있는 논문은 미국학과 역사학 교수들 뿐만 아니라, 미국문학과 경영학과의 교수들의 도움이 있지 않으면 쓸 수 없는 논문이다. 미국학의 연구 방법론의 특징이 interdisciplinary이기 때문에 여러 전공을 이용하여 하나의 현상을 설명해내야 한다.
여러 전공들 중에서 가장 중요하면서도 가장 자신없는 전공이 경영학이다. 학부 때는 물론이고 그 이후에도 수업을 들어 본 적이 없는 전공이다. 2003년 가을학기 때, 경영대 대학원 수업인 Organizational Behavior를 딱 한 번 들었을 뿐이고, 그 때 교수였던 한 교수를 내 논문 committee에 초대하여 위원이 된 후, 그분이 준 방대한 양의 논문을 혼자 독학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교수의 도움과 지도를 받아가며 공부한 것이었지만, 워낙 기초가 없고, 특히 통계가 핵심인 그 전공에서 통계적 지식이 전무한 상태에서 공부를 해야했기 때문에 참으로 어려웠고, 지금도 어렵다.

문제는 내 논문의 가장 핵심적인 이론이 바로 경영학의 이론이라는 것이다. 이 경영학의 이론을 활용하여 문학 작품들을 분석하고, 그 분석과 미국의 역사와 문화를 연결시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 내 논문의 큰 방향이다. 만약 이론이 문제가 생기면 논문은 완전히 와해될 수 밖에 없다.
지금까지 어떤 미국학자도 이런 시도를 해 본적이 없다. 미국학과 내의 교수들이 내 논문의 방향을 보면서, 만약 성공한다면 true interdisciplinary한 논문이 될 것이라며 기대감을 나타냈다.

이런 자신없는 분야, 하지만 너무나 중요한 분야의 여러 이론이 내 논문에 필요한데, 그 중 하나의 분야인 "What is organization?"이라는 부분의 논문과 책을 읽고 나름대로 정리한 후 내 이론을 거기서 도출해 냈다. 글의 길이는 더블스페이스의 12포인트로 네장 반. 어찌보면 마음먹고 쓴다면 반나절이면 쓸 수 있을 것 같은 짧은 이 글을 만들어 내는데, 작년 가을과 올해 초 몇 달이 소요되었다. 알지 못하는 분야를 이해해야 했고, 읽어야 했고, 그것들을 비판적으로 보면서 문제를 지적해야 했고, 또한 그것을 내것으로 만들어야 했다.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이 작업을 마친 후, 교수에게 그 짧은 글을 보내서 feedback을 부탁했다. 그 교수는 경영학 내에서 전 미국에서 유명한 학자이고, 그 분야의 최고 저널의 editor이기도 한 분이다. 오래 공부하긴 했지만, 문외한인 내가 정리한 글을 그 대학자에게 읽게 한다는 것이 부담이 매우 크긴 했지만, 그래도 도움을 받을 분이 그분 밖에 없어서 용기를 내어 글을 보냈다.

약 3주가 지난 후... 오늘 그 글에 대한 답변을 받은 것이다.
"This is very good, Kwangjin! I think it's entirely appropriate ...."

교수로부터 답을 기다렸지만 (그분은 현재 경영대의 associate dean으로 일하기 때문에 정말 바쁜 분이다.) 답이 없어서, 일단 더 기다리지 않고 그 이론을 작품 분석에 적용해 나가기로 하고 글을 쓰고 있었다. 만약 내 글에 대해 딴지가 걸리고 수정을 많이 해야 한다면, 그 동안 분석해 나갔던 것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다시 시작해야하는 위험부담이 있었지만, 도리가 없어서 글을 계속 써 내려갔다. 그런데, 오늘의 답장은 내가 아무런 수정이 없이 그대로 진행을 시켜 나가도 된다는 싸인인 것이다.

참 기뻤다...

이 교수를 만나는 과정, 그리고 그 이후 Oral 시험을 준비하는 과정, 논문 Committee를 구성하는 과정, 논문을 쓰는 과정... 그 모든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을 본다. 하나님께서 구체적이고 세밀하게 인도하셔서 나로 하여금 이 논문을 마칠 수 있도록 주장하시는 것을 본다.
솔직히... 나는 너무나 거대한 이 논문 프로젝트를 진행시키거나 끝마칠 능력이 없는 자이다. 누구보다도 내 스스로가 그것을 너무 잘 안다. 기적이 있지 않으면, 절대로 마칠 수 없는 이 논문... 그런데 지금까지 기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하나님께서는 역사하시며, 내가 갈 수 없는 길을 가도록 인도하신다. 그분께서 모든 것을 이루시고, 나로 하여금 그냥 가게 하시는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 논문을 쓰는 이 과정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과정이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손을 보는 과정이다. 참으로 dynamic한 인생의 경험이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모든 것을 맡기고, 그저 그분의 능력을 즐기는 무능력한 종으로서, 하나님께서 있기를 원하시는 그 자리에 있으련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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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오늘도... 하루 종일 논문을 썼다. 그래 봐야 얼마 쓰지 못하긴 했지만, 그래도 논문에 약간의 진척이 있었다.

나는 논문을 쓰는데, 나만의 방법을 사용한다. 글 전체의 흐름을 파악하기 위해서, 글자를 최대한 작게하고, 줄간격을 다닥다닥 붙인 후 한 페이지를 두 단으로 나뉘게 해서 한 페이지에 최대한 많은 글이 들어가도록 해서 글을 쓴다. 학교에서 제공하는 표준적인 틀이 있지만, 그 틀을 사용하다보면 논문이 한눈에 들어 오지 않아서, 방향을 잃고 이리저리 헤매다니기 쉽상이기 때문이다.

오늘 불현듯 생각이 떠올라 계산을 해 보니, 내가 쓰는 포맷으로 할 때, 30페이지에서 50페이지를 작성하면 박사 논문이 완성되는 것으로 계산이 되었다. 학교의 박사논문 포맷으로 할 때, 지금 한 페이지가 약 8-9페이지 정도가 되기 때문이다. 30페이지를 작성하면 240-270페이지가 되는 것이고 50페이지를 작성하면 400-450페이지 정도가 된다. 우리 과에서는 졸업생들이 주로 400페이지 정도를 작성하는 것을 생각할 때, 나도 그 정도로 하고 싶지만, 최대한 빨리 졸업해야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250페이지 선에서 끝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렇게 하면, 졸업하고 나서 책으로 출판할 때까지 훨씬 더 많은 작업이 필요하고 고생하겠지만, 그래도 졸업을 늦추는 것보다는 낫지 않나 생각된다.
250페이지를 써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앞이 막막해 지고, 언제나 끝을 보려나하는 생각에 힘들어지는데, 지금 내가 쓰고 있는 포맷으로 30페이지만 넘기면 된다고 생각하니, 해볼만 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거나 저거나 사실 같은데, 느낌이 다르다. 조삼모사의 착각인줄은 알지만, 마음 상태가 다른 것은 어쩔 수 없다.
30 장만 쓰면 되는데...
사실 지금 쓰는 글의 포맷으로 볼 때, 두 장이 한 수업의 term paper에 맞먹는다. 그렇다면, term paper를 15개 쓰는 것과 맞먹고, 그것은 5학기의 term paper의 분량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장난이 아닌 분량이고, 또 그 15개의 term paper를 하나의 논지 하에서 일관되게 작성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할 때 더 어려워진다. 그리고... 오늘은 글이 특이하게 매우 잘 써지는 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반 페이지를 채우는데 그쳤다.
하지만, 30페이지만 생각하련다. letter size 30 장만 채우면 졸업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그 페이지들을 채워 주실 것을 기도하며 열심히 써 나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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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목자...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군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11-15)

선한 목자... 우리 주님... 그분은 양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며 그들에게 꼴을 얻게 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위험이 닥칠 때, 목숨을 걸고 그들을 지키며 종국에 그들을 진정한 생명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스스로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시는 분이다.

삯군 목자... 영혼에 대해 책임의식이 없는 자... 자신의 양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위험이 닥칠 때면 언제든지 자신의 안위가 우선순위에 떠오르는 자. 이리가 와서 양들을 늑탈하며 죽이는 그 때에, 양을 버리고 달아나는 자. 결국 목자라는 타이틀은 가지고 있지만 진정한 목자가 아닌 자이다.

나는 어떤가?
예수님은 진정한 목자로서 모든 영혼들의 선한 목자가 되신다. 그분만이 목자이시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 예수님만이 진정한 목자라면, 나는?
예수님만이 진정한 목자이기 때문에 나는 운명적으로 진정한 목자가 될 수 없고, 따라서 삯군 목자일 수 밖에 없는 것인가?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없는 자로 태어난 운명을 가진 자인가?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릴 수도 없고, 버릴 필요도 없이, 위험이 닥칠 때, 양을 버리고 달아날 수 밖에 없는 자인가?

진정한 목자는 예수님 한 분 뿐이시다. 교회의 진정한 머리가 되시고, 영혼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밖에는 없다. 그분만이 진정한 목자가 되시고, 그분만이 진정한 주인이 되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의 동역자로 부르심을 받는 자로서, 영혼을 섬기는 일로 부르심을 받은 자로서, 삯군 목자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내가 내 목숨을 내어주어 양들을 섬길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양들에 대해서 무책임한 목자가 되는 것만이 나에게 남아있는 옵션은 아니다. 분명 예수님께서 삯군 목자에 대해서 말씀하셨을 때, 당시 이스라엘의 영적 리더들을 겨냥하신 말씀이고, 그들이 영혼들에 대해서 아무런 책임감이 없이, 자신의 안위만을 챙기는 그 행태를 신랄하게 비판하시는 것이다.

나는 선한 목자가 될 수 없다. 하지만 삯군 목자처럼 양들에 대해 무책임하며, 위기의 순간에 양들을 버리고 도망하는 일은 더더욱 할 수 없는 일이다. 주님은 그 무책임함에 대해서 엄하게 질책하신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저에게 맡기리라.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하여 동무들을 때리며 술친구들로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 24:45-51)

나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쳐 그들을 보호하는 선한 목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삯군 목자도 될 수 없다. 내 위치는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종이다. 선한 목자이신 나의 주인님의 종으로서, 예수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것은 (얼마 전에 묵상한 내용인) 바로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주는" 것이다. 그것을 "주인이 올 때"까지 하는 것이다.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오실 그 때까지 하는 것이다.

그 때는 주인이 정한다. 종이 정하는 것이 아니다. 종에게 요구되는 것은 성실함과 인내이다. 이리가 와서 양들을 덥칠 때, 주인과 함께 이리들과 맞서 싸우는 자이다. 도망가는 자가 아니다. 어려운 상황을 피해 도망가는 자는 예수님의 제자라 할 수 없다.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마 12:30)
예수께서 열 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요 6:67-68)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충성된 종이 되어 "주인이" 정하신 그 때까지 그분과 함께하는 자...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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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빔툰...

나는 한겨레신문의 "비빔툰"을 좋아한다. 집에 비빔툰 만화책이 세권이나 있다. 아이들도 무척 좋아해서, 몇 번씩 읽고 읽고 또 읽는다...

오늘 아침 이번 주 비빔툰을 여기 올린다. 저작권 문제가 되는지 모르겠지만... 같이 나누고 싶다.



출처: http://www.hani.co.kr/arti/cartoon/bibimtoon/41799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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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키스의 마무리 투수인 리베라의 인터뷰

현역 메이저리거 마무리 투수 중 최고인 양키스의 리베라가 한국 기자와 인터뷰한 내용의 일부입니다.

"그로부터 1시간 30분 후, 스트레칭을 마치고 돌아온 리베라를 클럽하우스에서 다시 만났다. 매일 경기 전 성경을 읽냐고 묻자 "매일 읽는다"고 말했다. 라커룸에서 성경을 읽고 있는 친구는 리베라가 유일했다. 그래서 하루에 몇 번 읽냐고 되묻자 "시간이 날 때마다 성경을 읽는다"며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당신을 보통 양키스의 '수호신'이라고 부른다고 말하자 리베라는 "나는 신이 아니다. 그리고 나는 아무런 힘이 없다. 나의 신은 하나님(Jesus)"이라는 의외의 대답을 했다.

당신은 위기 순간마다 마운드에 올라 타자들과 상대해 거의 대부분 승리를 거두는데 어떤 마음으로 던지냐고 묻자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내 힘으로 타자들을 상대한 적이 없다. 마운드 위에서 공을 던질 때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긴다. 그리고 그는 항상 나를 도와 주신다. 나는 단지 매일 기도하며 성경을 읽을 뿐"이라고 말했다."


인터뷰 전문

야외예배...

오늘 교회에서 야외예배를 드렸다. 일년에 한 번씩 공원에 가서 드리는 예배...(참고로 많은 분들은 자연으로 부르신 하나님을 찬양했었는데... 사실 어디에도 자연은 없었다. artificiality의 흔적으로 충만한, 사람이 "조성"한 공원의 한 가운데였을 뿐...) 30년 만에 재기도 차보고, 작년에 이어 줄다리기도 해 봤다(줄다리기에 있어서 생애 첫 패배를 맛보았다). 예전같지 않게 둔해져버린 몸을 확인할 수 있었던 2인3각 경기에서 같은 목장의 형제님과 호흡을 맞추어 보기도 했다. 즐거웠다. 온 교인들이 같이 예배드린 후 같이 모여서 먹고 노는 가운데, 한 교회로 부르신 하나님의 뜻을 볼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최근 하나님께 여쭙고 있는 매우 중요한 한 가지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답을 찾는데 골몰해 있었다. 모든 싸인들을 통해서, 말씀을 통해서 주님께서 주시는 답을 듣고 싶었다. 지난 시간 동안 거의 90% 정도 마음의 확정이 있었지만, 마지막으로 확증해 주시는 하나님의 seal을 잡고 싶었다. 하지만 오늘도 여전히, 적어도 그 질문에 대한 답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말씀은 모호했다. 기다렸던 화룡정점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모든 상황으로 볼 때, 그리고 그간 받았던 말씀들로 봤을 때, 답은 이미 정해진 것인지도 모른다. 믿음이 없는 상태에서 자기 고집을 부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애써 주어진 답을 더 확인하려고 하는 불순종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너무나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한치의 틀림이 없이 주님의 뜻만 100% 드러나는 가운데 일을 진행하고 싶은 욕심 때문에 주님께 묻고 또 묻는다. 내 모든 관심이 거기에 두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일에 있다. 요즘 잠잘 때 마저도, 꿈 속에서도 주님의 분명하신 뜻을 구하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한다. 매일 아침에 일어나서 드는 첫 생각이 바로 그 질문과 그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다. 전에는 절제하던 콜라도 요즘은 과음을 하게 된다.(전에는 1주일에 한 캔 정도씩만 먹던 것이, 이번 주만 하더라도 두 캔에, 두컵, 그리고 오늘 하루만 해도 작은 병으로 두 병을 마셨다. 콜라는 내가 가슴이 답답할 때 주로 찾는, 나에게는 "술"과 같은 것이다.)

우매하고 무지한 나이기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데 있어서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늘 존재한다. 그렇다면, 이미 주어진 하나님의 분명한 뜻을 몇 번씩 확인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잘 못 알고 섣불리 행동에 옮겼다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으로 확인되는 보다는 차라리 백배 나은 것이라 믿는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구한다... 주님의 뜻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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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

늦은 밤... 일찍 잠자리에 들고 잠을 잘 자는 나인데... 오늘은 유난히 잠이 오지 않는다.
목장 모임 후 피곤한 몸으로 밤 늦게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지만, 몸만 뒤척일 뿐...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는 몇 가지 중요한 문제들 때문인지... 머리속은 복잡해져만 가고, 그만큼 잠은 나에게서 멀어져 간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교회에 가야하는데...'하는 염려가 있었지만, 말똥말똥한 눈을 감고 잠을 청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기 보다는 말씀 앞에 앉았다. 이 한 밤... 복잡한 머리와 마음을 말씀 앞에 내려 놓고, 구약과 신약을 넘나들며 읽는 동안, 마음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는 것을 느낀다. 말씀의 능력이다. 말씀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새삼스럽게 느낀다.

결국... 믿음이다.
모든 것을 그분께 맡기고, 잠자리에 들었다.
비록 내일 아침 잠에서 깨어난 후 다시 같은 문제들의 무게에 짓눌리겠지만, 주님께서 이 밤 만큼은 그 짐을 잠시 내려 놓게 하시고, 잠을 허락하신다.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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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날 준비...

이번 주에 도서관에 있는 제 방을 비우라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원래 도서관 방은 박사과정 학생 중에서 Candidate들에게만 무료로 주는데, 한 학기가 지나고 나면 한 번 renewal을 할 수 있고, 그 다음에는 방을 비운 다음, 새로운 방을 assign 받아야 합니다. 주로 독방을 선호하기 때문에 독방이 많고, 독방을 얻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서 두 명이 같이 쓰는 방도 조금 있습니다. 저는 지금 교회의 대학부장으로 섬기는 박일 형제님과 방을 같이 쓰고 있지요. 저는 한 번 renewal을 했기 때문에 곧 방을 비우고 다시 apply를 한 뒤 독방을 얻어야 합니다. 그래서 방을 비우라는 통보를 받은 것이지요...

우리 두명이 같이 방을 비우라는 통보를 받았는데, 두 사람이 느끼는 것은 완전히 딴 판인 것을 봅니다. 방을 둘이서 나눠 쓰고 있는데, 제 쪽의 책꽂이에는 책들이 가득 차 있고, 책상 위에는 이런저런 잡다한 것으로 꽉 차 있습니다. 반면, 박일형제 쪽의 책꽂이는 텅 비어 있고, 책상도 매우 깨끗합니다. 거의 아무것도 없지요... 전공이 전공인지라, 논문을 많이 보는 그쪽과 책을 많이 봐야하는 제 쪽의 극명한 차이라고 할 수 있지요...
사정이 그런지라, 방을 비우라는 통보를 받은 박일형제는 언제든지 떠나도 좋다는 표정이고, 몸만 움직이면 된다는 느긋함이 있습니다. 반면, 저는 이 책들을 일단 집에 가져다 둬야 하는데, 큰 여행가방으로 네 다섯 번 정도를 옮겨야하고, 또 가뜩이나 좁은 집에 산더미처럼 책을 쌓아 두어야 한다는 생각에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여기를 떠나지 않고 그대로 있을 수 있을까를 궁리하느라 바쁩니다. 너무 많은 책들과 자료들을 주렁주렁 달고 있기 때문에 기동성에 있어서는 완전히 "0"에 가까운 것이지요.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벧전 1:17)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 4:14)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 11:13-16)

이 땅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인생은 궁극적으로 하늘에 본향을 둔 자들의 나그네 인생입니다. 나그네로 살면서, 너무나 많은 것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다니는 사람은 없습니다. 나그네는 말 그대로 나그네일 뿐, 이 땅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마치 이 땅이 본향인 것처럼 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다리고 계신 그 본향을 생각하며, 이 땅에서의 여행 목적을 충실히 감당하고 다시 돌아갈 것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최근 제 인생을 정리하는 기회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자로서 가볍게 살겠다고, 그리고 그렇게 살고 있다고 생각해 왔었는데, 너무나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서 움직일 수 없는 제 자신을 보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 자존심, 애착, 비전, 관성화된 삶의 모습, 죄악된 습관, 변화에 대한 두려움, 상처로 인한 애증 등등... 이것들 중에서 사람들에 대한 애착 (성경적 의미로서의 사랑이 아니라 지극히 인간적인 면에서...)이 제 기동성에 너무나 많은 장애가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그네로서, 저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곳으로 즉각 움직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분의 명령, 그분의 뜻이 가장 절대적인 것이고, 그 외의 모든 것들을 거기에 예속되어야 합니다. 그분이 이 땅에서 하늘로 부르신다면, 그 때에도 기쁨과 감사 가운데, 가볍게 떠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나그네의 삶입니다.

제 방에 있는 책들은 논문에 너무나 필요한 책들이라 쉽게 정리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 인생에 주렁주렁 매달린 것들... 하나님의 명령에 즉각적으로 순종하지 못하게 만드는 모든 것들은 차근차근히 정리해 나아가야겠습니다. 제 삶을 정말 가볍고 단순하게 만들어야겠습니다. 그분과의 깊은 관계 속에서 매우 단순화된 삶으로 만들어 가야겠습니다. 언제든지 이 땅을 떠날 준비를 하면서, 본향을 바라보고, 나그네의 삶임을 절대 잊지 않고 살아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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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23

하연이의 My Pledge...
2007년 2월에 작성한 것이다.

인도자 하나님...

지난 8년간의 유학생활... 그것은 저에게 광야생활이었습니다.

의지할 바 없이 단순한 믿음으로 떠난 유학...
유학의 시작부터 하나님께서는 역사하셨고, 그 여정 내내 내 삶에 깊이 개입하고 계시고, 철저하게 준비된 코스대로 제 인생을 인도하시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신 내 삶의 인도자이신 것을 돌아보게 됩니다.
유학을 준비할 때, 있을 수 없는 일을 행하셔서 유학의 길을 열어 주신 하나님.
유학 초기, 교만해져 있고, 뭔가 가진 것이 있는 것처럼 내면에서 우쭐대는 저를 한 없이 낮추시고, 가난하게 하신 하나님.
가난과 학업의 벽에 부딪혀 사면초가에 있을 때,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방법으로 나와 내 가정을 먹이신 하나님.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교회를 더 잘 이해하도록, 다른 모든 길을 막고 철저하게 교회 중심으로 살도록 인도하신 하나님.
그리고 때가 되어서, 교수로서, 학자로서의 훈련을 시작하시고, 그 훈련을 필요할 때에 필요한 단계로 차근 차근히 인도하신 하나님.

이 모든 것이 그 순서가 바뀌기만 하더라도, 나는 하나님 앞에 교만하거나 좌절하거나 했을 텐데... 그 어떤 잘못도 범하지 않도록, 하지만 제 스스로 교만하지 않도록 낮추시며, 동시에 준비시키시며, 성장시키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손길을 돌아보며, 참으로 할 말을 잊습니다.
내가 뭐길래...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먼지 하나보다 더 작고 보잘것 없는 나인데... 그 형편없는 나를 그렇게 신경을 쓰시고, 그 인생에 개입하시고 인도하시는지...
때로는 하나님을 원망하며, 왜 지금 이 때 내가 원하는 것을 주지 않으시는지 따지고 들었던 이 완악한 자를 내치지 않으시고 끝까지 인내하심으로 섬세하게 인도하시는지...

그분이 내 아버지가 아니라면, 그분이 나를 창조하신 분으로서 무한한 사랑을 품지 않으신다면, 가능하지 않는 그 인내와 관심...

유학생활은 어느모로 보나 광야생활이지만... 그 광야생활은 그 어떤 것과도 바꾸고 싶지 않은 너무나 소중한 감사의 시간인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애굽의 풍요, 아니 애굽 전체를 준다 하더라도 결코 바꾸고 싶지 않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경험하는 은혜의 시간인 이 광야의 유학생활...
지금도 여전히 상황은 광야이지만, 이미 이 광야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인 것을 발견합니다. 가나안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곳은 그곳이 어떤 곳이든지 가장 풍요로운 곳이고 감사할 곳입니다.

8년전 이 광야로 인도하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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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

요즘... 중요한 일로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아는 것을 쉬운 일이 아닌 것 같네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감추시기 때문이 아니라, 내 안에 너무나 많은 내 생각과 내 욕심과 바램이 있어서, 그것들이 내는 잡음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음성을 듣지 못하는 것이겠지요.

내면의 잡음이 얼마나 심한지는 혼자서 조용히 소리를 내지 않고 침묵기도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잠시 한 순간도 고요함 가운데 주님 앞에 집중하지 못하는 제 모습을 너무나 적나라하게 발견할 뿐이지요... 내 안에 무슨 생각이 그렇게 많은지...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답답하실까요?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데 있어서, 내 자신의 모든 것을 먼저 그분 앞에 포기하고, 잠잠하게 무릎꿇고 귀를 기울이는 것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애 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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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눅 9:58)

내 인생의 주인이신 예수님...
내 주인이 이 땅에 계실 때 머리둘 곳도 없으셨는데... 종인 나는 어떤지...

주님이 이 땅에 계시면서 당하신 그 고난과 반발과 오해와 핍박...
그분의 종인 나는 어떤지...

내 삶의 평안과 안락을 위해 살고자 하는 욕망은 끊임없이 나를 주님의 길로부터 멀어지게 하려 하고, "세상"에 살면서 세상과 큰 갈등이 없이 무난하게 살고 싶은 내 육신의 욕구는, 그리스도의 빛, 복음의 빛을 감추게 만든다. 그분을 부끄러워함으로 숨기고, 그저 그렇게 무난하게 "튀지 않게" 살도록 나를 인도한다.

그런 하루하루의 삶이 결국 내 인생이 되는 것이고, 그 인생을 주님께서 평가하시겠지...

지금 이 시각, 바로 내가 있는 지금 이 자리에서 그분을 따르는 삶을 살고 있는지가 참으로 중요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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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22

(2006.03.17. 작성)

아빠가 선물..

며칠 전에 아침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 전날은 전에 하연이 생일 선물 받은 것들 중 마음에 들지 않는 것들을 환불하고 대신 이것 저것을 사와서 그 선물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었다.
그 때 예연이가 한 말...

"아빠, 아빠가 예연이 선물이예요!"

(흐뭇한 아빠...)

아빠가 기뻐하는 모습을 본 하연.. 뒤질새라 이제는 엄마까지 끌어들이는 정치적인 하연이...

"아빠, 하연이는 아빠엄마가 하연이 선물이예요!"

한참 후...

밥을 먼저 먹고 집을 나서기 위해 밥을 먹고 있는 예연이에게 늘 하듯이 뽀뽀를 했다. 아빠가 뽀뽀하면 늘 그 뒤에 자기 입술을 손으로 닦던 예연이.. 이번에는 좀 다르다..
손을 내밀어 아빠 입술을 닦아 준다. 밥을 먹는 자신이 미안했는지...

또 한 번 감동...

아이들과 함께하는 것... 그것은 감동의 연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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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Quote...

"Who knows when it happens, but it happens. Suddenly you realize that you're switching from saying 'Hi' to saying 'Bye.' And it's a full-time job: death. You really have to wrench your head around to look in the other direction, because death's so apparent now, and it wasn't apparent before. You were intellectually persuaded that you were going to die, but it wasn't a reality." - Martin Am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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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족하는 마음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 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 앞과 본디오 빌라도를 향하여 선한 증거로 증거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내가 너를 명하노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나타나실 때까지 점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딤전 6:6-12)


공자의 제자 중 안회는 지극히 가난했지만, 학문과 덕행을 중하게 여겨 그 가난 가운데서도 불평하지 않고 오히려 즐거워 했다고 한다. 거기서 안빈락도(安貧樂道)라는 고사성어가 나왔다. 가난하지만 편안함을 유지하고, 도를 즐거워한다는 말... 옛날 선비들이 추구하던 하나의 가치였던 것같다.

디모데전서에도 비슷한 말씀이 나온다.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안빈락도에 불가의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의 사상을 곁들인 듯한 이 말씀은 사실 근본적으로 다르다. 공자 사상과 불교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자신 안의 욕심을 비우는 것에 초점이 있고, 그것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것에 주안점이 있는 반면, 성경의 말씀은 자신을 비우는 것이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며, 비우는 것이 아니라 채우는 것에 초점이 있기 때문이다.


자족하는 마음은, 결국 세상에 대한 욕심이 없는 마음이다. 세상에 대한 욕심은 돈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표되고 있다. 돈 그 자체가 악은 아니지만, 돈을 사랑하는 것이 악이며 만악의 뿌리가 된다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돈을 사랑하는 마음...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을 향하는 마음... 성경 말씀에 의하면 그것은 우리에게 평안과 자족하는 마음을 빼앗는다. 그리고 그것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것으로 인해서 믿음의 사람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돈을 사랑하는 마음, 세상을 향하는 마음... 그것은 해악을 가져다 준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이 쉽게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안회가 가난 가운데서도 평안했다고 하지만, 그 안에 진정 평안이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지식을 사랑하고 도를 사랑하는 가운데 바르게 살고자하는 그 마음과 열정이 있었지만, 그것이 그로하여금 진정으로 구원을 가져다 주었을지...


성경의 자족하는 마음, 세상과 돈을 사랑하지 않는 마음은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로 가득 채울 때만 가능하다. 그냥 비우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가득 차 있기 때문에 더 이상 다른 것으로 채울 수 없고, 필요도 없는 것이 성경의 자족이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 한 분으로 완전히 만족하기 때문에... 더 이상 다른 것이 필요가 없기 때문에... 가장 고귀하고 소중한 것을 이미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른 어떤 것에도 내 눈길을 돌릴 필요가 없기 때문에 세상에 마음을 두지 않고, 돈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것...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나고 경험한 자들은 자신의 삶에 자연스럽게 자족하는 마음이 자라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자신의 구체적인 삶이 경건하고 거룩한 모습이 되어 가는 것을 발견한다. 그것은 수양이나 도를 닦아서 되는 것이 아니다. 자연스럽게, 저절로 되는 것이다. 애써 힘쓰는 것이 아니라,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그렇게 되어 있는 것... 그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이다.

그분으로 가득찬 삶... 오늘도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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