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공, 멸공, 승공은 기독교의 정신이 아니다!(3)


그리스도인으로서 북한과 공산주의를 결코 선하다고 말할 수 없다. 분명 그것은 악이다. 하지만, 그것이 악인 이유를 분명히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북한과 공산주의는 그 자체로서 악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구분이 매우 중요한 이유는 바로 "종북"을 비판하며, "멸공"을 기독교의 교리처럼 설파하는 자들과 그런 교회의 이중성에 있다. 만약 그들이 북한과 공산주의를 비판한다면, 당연히 그들과 비슷한 행태를 자행하는 모든 악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비판해야 한다. 인간의 존엄성이 무시되는 현장이라면, 그 어디든지, 그 대상이 누구든지간에 신랄한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다양한 목소리가 존중되지 않고, 하나의 목소리만 용인되며, 다른 모든 목소리를 "숙청"의 대상으로만 보는 세력이 있다면, 그 세력 또한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생활을 유지해야할 경제권을 무시하는 세력이 있다면 그 세력 또한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문제는 소위 종북타파 운운하는 기독교 내의 일부 세력들이 국내의 그런 악들에 대해서, 특히 정부가 보이는 그런 동일한 행태에 대해서는 이상하리만치 침묵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칭송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분명히 해두지만, 나는 북한의 지도부와 공산주의를 옹호할 생각이 추호도 없다. 성경적으로 볼 때,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며 진노의 대상이다. 따라서 그들에 대한 비판은 (다양한 형태로) 가해져야 한다.
하지만... 그 동일한 잣대로 국내의 상황들, 특히 정부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성경적으로 볼 때, 현재의 정부는 결코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그런 정부가 아니다. 오히려 그분의 진노의 대상이다. 특별히, 이 정부가 기독교의 이름을 내 걸고 출범한 정부이고, 대통령이 교회의 장로라는 직분을 가진자로 국내에 너무나 잘 알려진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는 오히려 북한에 대한 진노보다 더 클 수 있다. 왜냐하면, 북한은 적어도 하나님의 이름을 팔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스스로 기독교에 적대적인 자들로 자처하고 있고, 세상의 모든 자들은 북한이 악당인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자행하는 악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MB 정부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더럽히고,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에 대한 냉대를 부추기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는 더 클 수 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이라면, 하나님의 이름의 거룩성을 그 누구보다도 귀한 가치로 여기는 믿음의 사람들이라면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답은 자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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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공, 멸공, 승공은 기독교의 정신이 아니다!(2)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북한이, 그리고 공산주의가 악인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무시이다. 인간은 (적어도 기독교적 관점에서 본다면) 두 가지의 측면을 동시에 갖는다. 하나는 하나님을 떠나 심판 받을 수 밖에 없는 죄인,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엄한 자이다. 이 양자적 측면이 인간을 지극히 독특하게 만든다. 어쨋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존중받아야 한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는 인간에 대한 희망과 인간에 대한 존중에서 시작되었다. 자본의 악랄한 착취에 인간의 가장 기본권인 생존권조차 위협받는 극한으로 몰려가는 노동자들을 분석하면서, 그들이 다수의 힘으로 폭력에 의해 자본가 계급을 제압하고, 그들만의 유토피아를 만들어 모두 같이 잘 살자는 것이 공산주의의 이념이다. 하지만, 그런 낭만주의적 인간관은 성경에서 정확하게 제시하는 극히 이기적인, 죄악된 인간이라는 현실에 발을 붙이고 있지 않기 때문에 실패할 수 밖에 없는 내재적 모순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공산주의는 시작부터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체제인 것이다. 그런 실패를 극복하기 위해, 혹은 인간의 죄성의 발현의 통로로서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무자비한 인권 유린을 자행했다. 죄악된 인간들을 자신들의 이상적인 체제에 순응시키기 위해 전례없이 강력한 독제체제를 구축해야만 했고, 독제로 권력이 강화되는 가운데, 죄악된 한낫 인간인 지배자들의 타락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가운데, 노동자들의 천국을 만들기 위해 시작된 정치체제가 그전의 그 어떤 악한 체제에 못지 않은 해로운 악이되어 버린 것이다.
그 가운데 사회적 다양성은 말살되어갔다. 공산주의라는 유일한 이념만이 인정을 받고 다른 모든 사상들은 "반동"이라는 꼬리표가 달려져 숙청의 대상이 되었다. 그 사회에서는 유일하게 한 목소리만 가능한 사회가 되어 버렸다.
다양성이 사라져버리고, 인간성에 대한 말살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경제적으로도 지극히 비효율적인 사회가 되어버렸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인간은 지극히 이기적인 존재이다. 자본주의가 성공하고 살아 남을 수 밖에 없는 제도인 것은, 자본주의의 가장 핵심에는 바로 그 인간의 이기성을 인정하고 그 이기성에 체제의 핵심과 근간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이기성을 부정한다. 이기성과 체제가 절묘하게 연계되어 있는 자본주의에서는 생산성이 날이 갈수록 높아질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노력하면 할수록 더 많이 얻어지는 결과물을 노력한 본인이 가져가는 제도이기 때문이다. 공산주의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그 사회에서는 생산성이 지극히 낮을 수 밖에 없다. 이런 이유로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생산성이 지극히 낮은 비효율적 경제체제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가난이 일상인 삶이 된 것이다.

공산주의가 악하다면, 그 자체로 악하다기보다는(우리는 사도행전에서 보여주는 믿음에 근거한 공산주의적 삶의 방식(개인의 소유를 팔아 모두 함께 나누는 공동체)이 긍적적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는 성경이 공산주의적 삶의 방식 자체에 대해서 부정하고 있지 않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물론 그 구현 방식은 성령의 임재에 의한 그분의 강력한 다스리심이 기반이 되고 있다는 것이 인간이 만든 공산주의와의 근본적인 차이이다.), 그 공산주의체제 하에서 벌어질 수 밖에 없는, 인간 존엄성에 대한 무시, 다양성의 말살, 경제적 비효율성 등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북한이 악이라면, 그런 부정적 요소들이 역사상 그 어느 나라보다도 더 극대화된 사회이기 때문일 것이다. 거기에 덧붙여 한낱 인간에 불과한 존재를 종교적 숭배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 (결국 그것은 앞에서 말한 악들을 더 효율적으로 자행하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지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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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공, 멸공, 승공은 기독교의 정신이 아니다!(1)

요즘, "종북"이라는 말이 많이 사용되고 있다. 보수(사실 보수라기보다는 수구가 더 정확하지만)진영에서 진보진영을 비난할 때 어김없이 사용하는 형용사이다.
정치적으로 두 진영으로 나뉘어 있는 가운데 서로를 비난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단어든지 가져다 쓰면서 상대의 이미지에 먹칠을 하는 것이 정치의 일부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그들을 비난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문제는 보수의 정치적 논리와 편의에서 사용되는 "종북"이라는 비난조의 단어가 소위 일부 기독교에서, 교회와 목사들에 의해서 마치 그것이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것처럼 오용되는 것에 대해 비판하고자 한다.

일부 대형교회와 많은 중소규모의 목회자들을 북한을 빨갱이이고 악이기 때문에 반공, 멸공, 승공이 하나님의 뜻이고, 따라서 마치 기독교 교리의 중요한 일부인 것처럼 설파하며 교인들을 오도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반공, 멸공, 승공은 기독교의 복음과 상관 없는 구호일 뿐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보수적(보다 더 정확히 발해서 수구적) 정치 이념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기독교를 이용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김홍도 목사는 너무나 잘 알려진 예이고, 이번 총선에서 느닷없이 등장한 기독자유민주당도 그런 좋은 예이다.

북한이 악인가? 공산주의가 악인가? 마귀인가? 하나님의 적인가? 복음의 적인가?
물론 어떤 면에서 보면 그렇다. 하지만 여기서 그들이 어떻게 해서 악이 되는지, 혹은 악으로 규정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좀 더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이 세상에서 정신이 조금이라도 제대로 되어 있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북한을 (특별히 북한 정권을) 선하다고 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맞다. 그들은 악이다. 하지만, 왜 그들이 악인가? 독제체제라서 그런가? 물론 그럴 수 있다. 민주주의를 절대적인 신앙으로 삼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북한의 독제 체제는 악이 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볼 때 독제체제는 악인가? 그 체제 자체가 악으로 규정될 수 있는가?
아니다. 결코 그럴 수 없다. 성경에서 보여주는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왕이신 절대왕정이다. 거기는 결코 민주주의가 발을 붙일 수 없는 정치체제를 가지고 있다. 지극히 완전하시고 선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완벽하게 왕이 될 만하고, 되어 마땅한 존재이신 하나님이 왕위를 차지하고 있긴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하늘나라의 정치체제는 독재정치이다.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서 죽이시면서까지 백성들을 사랑하는 왕, 공의와 사랑으로 다스리는 왕, 존재의 무게 자체가 완전히 다른 탁월한 존재인 왕이긴 하지만 독재는 독재다. 만약 민주주의가 지고의 선이고, 독재가 극한 악이라면 하나님 나라는 독재가 아니라 민주정치를 가져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독재는 그 자체로 성경적인 악이라고 볼 수 없다.
물론 하나님 앞에 모두 죄인들이고 아무도 더 낫다고 볼 수 없는 인간들 사이에서는 불완전하지만, 그나마 최선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이 민주주의일지 모른다. 하지만 플라톤이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주장했던 것처럼, 뛰어난 철학자들에 의한 통치가 더 낫다고 볼 수도 있다. 요컨데, 민주주의 그 자체가 기독교의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근거는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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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하나...


언론의 왜곡보도를 보여주는 신랄한 풍자의 그림.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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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하나님의 형상...

살다보면, 때로는 밥을 먹고 있는 내 자신이 식충이나 동물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사회에서 제 구실도 못하면서, 능력도 없으면서, 꾸역꾸역 밥을 축내는 내 자신을 보면서 느끼는 느낌이다.
그럴 때면 내 자신에 대한 혐오감으로 가득 차 오른다.
내 스스로가 가치없는 인간으로 보이고, 삶이 무의미해진다.
'나같은 인간은...' 하며 별의별 생각이 다 든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하나님 앞에 죄악된 생각임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창세 전에 나를 품으시고, 나를 창조하신 그분의 뜻과 계획을 온전히 무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 스스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은 내 의지와 상관 없는 창조주의 의지의 결과이다. 그분은 목적을 가지고, 사랑 안에서 귀하게 나라는 인간을 창조하셨다. 그런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 결과가 바로 내 스스로에 대한 혐오인 것이다.

나는 내 스스로를 비하하거나 혐오할 권리가 없다. 그것은 나에 대한 주권이 나에게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은 피조물인 나를 귀하게 여기신다.

내 스스로에 대한 비관적인 생각은 참으로 위험하기도 하다. 그것은 그런 생각이 내 자신에게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이 사회에 기여하는 "실질적인" 역할이 없는 사람들은 존재 가치가 없는 듯한 그런 태도, 능력이 없는 자들과 장애를 가진 자들을 멸시하는 태도가 바로 같은 마음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사악한 생각이다. 인간은 그 누구든지 간에 인간인 그 자체로서 존귀하고 이 땅에 존재할 가치를 충분히 가진다. (사실 매우 드물게 이런 원칙이 적용되기 매우 힘들어 보이는 경우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귀한 자이고, 다른 모든 것을 떠나 그 자체로서 존중받고 이 땅에 살 권리를 보장받아야 마땅한 존재인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이 내가 능력이 있고,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라는 사실이 참으로 놀랍다. 그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날이 갈수록 뼈저리게 느낀다.
그분은 나를 있는 그대로, 부족하고 무능력한 그대로 받으신다. 그분의 자녀로 나를 품으신다. 내가 부족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큰 은혜와 사랑으로 품으신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닌가?

내가 오늘도 밥을 먹고 생존하며 이 땅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마치 내가 무슨 중요한 사람이나 된 듯한 태도를 가지고 자신있게 살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런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다. 나를 창조하신 그분 때문이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그분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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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부터 난 지혜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 거짓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리라."(약 3:14-18)

내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하나님의 엄위하신 말씀이다. 이 말씀이 내 스스로를 한 없이 부끄럽고 수치스럽게 만든다.

하나님. 저를,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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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시 자실한 두 중학생을 생각하며...

인간에 대한 이해, 타인에 대한 배려, 특히 약자와 소수에 대한 배려를 완전히 상실한 채, 개인의 성공과 물질적 풍요가 주는 안정만을 지상의 가치로 여기는 지극히 이기적인 사회... 그런 사회에서 아이들에게 서로 잘 지내라고, 서로 죽이지 말라고 하는 것은 완전히 딴 세상에서 사는 사람처럼 살라고 강요하는 것과 같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자화상이다. 그들에게서 어른들의 일그러진 모습이 보인다. 그들을 어떻게 비난하랴? 그런 상태에서 만 가지의 "대책"이란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저 땜빵식일 뿐, 사태만 더 악화시는 것. 사실 어른들도 그 대책이라는 것을 모른다. 만약 알았다면 그들 먼저 변했겠지...

하나님의 복음이 그 정답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자로서 존엄하기 때문에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함을... 그리고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인간에게, 특히 약자와 소수에게 특별한 사랑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마땅히 그들을 섬겨야 한다는 가장 기본적인 진리가 거기에 담겨 있다. 강한 자가 약한 자의 발을 씻기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기독교의 핵심이자, 이 사회의 핵심 가치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이 사회를 바꾸는 힘이고, 자살로 죽어가는 아이들을, 그들의 피폐한 삶을 풍요롭고 살 가치가 있게 만드는 것이다. 복음으로 혁명을... 혁명을 일으켜야 한다.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그의 십자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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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오후...

토요일 오후...
서울대 캠퍼스는 한산하다. 몇몇 학생들과 캠퍼스를 구경하기 위해 찾은 아이들과 어른들...

서울대 바깥은 이미 봄이 왔지만, 이곳은 아직 봄의 문턱에 진입하기 직전의 상황인듯, 약간은 춥다.

토요일에도 학교에 나와 연구실에서 수업준비하고 논문준비하는 것이 참... 이렇게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래도 공부할 곳이 있고, 나를 바쁘게 하는 일거리가 있다는 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에게 얼마나 감사해야할 일인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지난 수요일에 있었던 총선 후, 마음을 추스리기가 너무 쉽지 않았다. 쓰라린 패배에 따른 원망과 좌절. 공의와 정의를 기대했건만, 세상은 달랐다.
아직도 마음이 잘 잡히진는 않지만, 일상을 삶에서 내가 해야할 일을 감당하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 한산한 캠퍼스에서 다음 주 수업시간에 만날 학생들을 생각하며, 그들에게 최고의 것을 주는 선생이 되어야 겠다는 마음, 그리고 학계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기여를 해야겠다는 다짐,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 왕, 내 주인, 내 친구, 내 모든 것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그분의 가장 충실한 동반자요, 종이요, 제자가 되겠다는 소망을 품고, 나아간다.

조금씩 제 색깔을 내기 시작한 개나리를 보면서, 좌절하지 않고 감사하며, 희망하며, 내 자신 안의 어두움, 그리고 이 사회, 내 조국의 어두움과 싸우리라.

책 읽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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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로 살 것인가?

부활주일 아침...
예배를 드리면서, 그리고 하루 종일 깊이 생각한 것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의미가 이 땅을 사는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에 관한 것이었다.

주님이 부활하셨다!

여러 면에서 너무나 기쁜 소식... 신학적으로, 그리고 이론적으로는 기뻐해야 할 이유를 수도 없이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지금 나는 기쁜가? 정말 기쁜가? 그분의 부활이 내 삶에 절대적으로 복음으로 다가오는가?

자신있게 답할 수 없는 것이 내 현실...

하루가 24시간이 아니라 48시간이더라도, 일주일이 7일이 아니라 14일이더라도 시간이 부족해서 허덕이며 하루하루 한 순간 한 순간을 정신없이 살아가는 나에게, 고갈되는 체력과 정신력 가운데 이번 학기가 탈없이 지나가기만을 고대하고 있는 나의 삶에 부활은 어떻게 기쁨이 되는가?

내 마음 속에 뚜렷이 떠오른 한 생각... 그것은 그분이 살아계시다는 것이다.
내 하나님, 내 구원자, 내 도움, 내 피할 바위, 내 피난처, 내 능력, 내 주인께서 지금 살아 계시다는 것이다. 그것이 나에게 기쁨이 되지 아니한가?

내 인생... 마치 아무 도움도 없이 스스로의 인생을 스스로의 힘으로 개척해 나가야 하는 고아와 같이 살아간다면, 나는 삶에 매몰되어 살 수 밖에 없고, 일주일의 삶에서 한 치의 여유도 없이, 생존을 위해 투쟁해야 하는 것이 내 삶의 현 주소...
턱없이 부족한 내 능력... 너무나 많이 주어지는 일들... 그 간극, 그 괴리를 매꾸는 것은 오로지 더 일하고, 더 노력하고, 더 내 자신을 쥐어 짜는 것 밖에 없다면... 내 인생은 결국 그 가운데서 피폐해지거나(성공할 경우), 무너지는 것(실패할 경우) 외에는 다른 결론이 없어보인다.

하지만, 주님이 부활하셔서 살아계신다. 그분은 내 주인이고, 하나님은 내 아버지이시다. 내가 사는 것은 그분의 뜻 안에서 사는 것이고, 그분이 허락하신 반경 안에서 사는 것이다. 애초에 내 능력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내 노력으로 완성된 뭔가를 이루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는 게임의 룰이 다르다.
살아계신 그분의 능력으로 사는 것이다. 그분이 살아계셔서 나를 지켜보고 계시고, 그분의 전능하신 오른 팔로 나를 붙드시는 것이다.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그분을 하실 수 있다.

그분과 교제하며, 그분을 사랑하며, 순종하며, 그분의 뜻 안에 거하며, 하루하루, 순간순간을 충실하면서도 성실히 살아간다면 내 능력과 내 과업의 엄청난 간극은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 의미를 잃는다.

그분이 살아나셨고, 살아 계신다. 나는 우주에 던져진 미아가 아니다. 나에게는 내 주님이 계신다.

부활이... 그분의 부활이 참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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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칙, 준법

며칠 전 아침 5시에 차를 몰고 학교로 향했습니다.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일찍 학교에 가서 일을 시작하기 위해서였지요. 오랫만에 차를 몰고 달려가는 길 내내 너무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그것은 단 한 대를 제외한 모든 차들이 교통신호를 완전히 무시하고 달리는 것을 봤기 때문입니다. 빨간불과 파란불이 아무런 의미가 없었고, 도로에 그려진 차선마저도 그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듯 마구 질주하는 차들... 차종에 상관 없이, 택시, 승용차 가리지 않고 모든 규칙을 무시하며 달리는 그 모습...
'내가 미국에서 너무 오래 살았나?'라고 혼자 생각하며, 이 희한한 광경을 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빨간불이 켜진 횡단보도 앞에서 정차해 있는 내 자신이 너무나 불편하고, 내가 이상한 사람이 되어버린 듯한... 융통성이 전혀 없고, 앞뒤 꽉막힌 사람이 되어 버린듯한 자괴감. 나도 그들과 같이 달려야 하지 않을까하는 마음과 그러고 싶은 충동 가운데, 얼마 안 되는 정차 시간이 길게만 느껴졌습니다.

요즘 정치권에 대한 분노, 특히 이명박 정부에 대한 분노가 우리 나라를 휩쓸고 있습니다. 그 분노의 본질은 법과 규칙을 그 누구보다도 지키고 수호해야할 장본인들이 법과 규칙을 무시하며 목적을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지 거리끼지 않았던 것에 대한 것일 겁니다. 하루가 멀다하고 터져나오는 대형 스캔들을 보면서 "세상에!" "저런!" 등등의 탄식가운데 그들을 정죄합니다.

맞습니다. 그들은 정죄 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을 심판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탈법이 우리의 규칙위반과 본질적으로 다를까요? 사안의 경중에 차이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법과 원칙을 존중하는 마음이 없다는 면에서는 같은 것이 아닐까요? 이번에 그들을 심판하면 다음에는 나아질까요? 우리 안에, 우리 사회 안에 준칙과 준법의 정신이 사라져 있는데, 그것이 가능할까요?

그리스도인이 20프로가 넘는다는 우리 한국사회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이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을 삶으로 실천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자들은 당연히 국가의 법도 두려워하고 존중할 줄 아는 자들이어야만 합니다. 그들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질주하며 달리는 그들 가운데,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으로 자처하는 자들은 없었을까요?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복음으로 거듭났다는 것이고, 거듭난 자들은 세상의 목적을 따라 살아가는 자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들입니다. 모든 면에서 다를 수 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교통신호를 지키는 것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회변혁을 위해 투표해야합니다. 사회 변혁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적극적으로 "운동"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세상이 바뀔 것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바른 삶을 먼저 사는 것, 그리고 그런 바른 삶의 기운이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확산됨으로써, 세상이 함부로 살지 못하도록 소금의 역할을 하는 것. 그것이 빠진다면, 그 "운동"은 허상에 불과할 것입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밤중에 내가 빨간불이 켜진 횡단보도 앞에서 정차해 있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전하는 것 못지 않게 중요한 일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내 신앙 고백이요,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표지이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이 아무리 불편하고, 튀지 않고 다른 사람들과 같이 행동하고 싶은 욕구가 치솟더라도, 그것 때문에 나는 그 자리를 지킵니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참여...

숨이 턱턱 막히게 정신없고 바쁜 일정. 하루가 24시간이라는 것, 그리고 일주일이 7일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 또한 체력과 정신력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이 원망스럽기만 한 작금의 상황.

하지만, 그 바쁜 것을 내려 놓고, 어제 가족들과 함께 여의도에 갔다. 일주일의 피로와 긴장감, 두개의 강의로 극도로 피곤한 몸, 그리고 당장 처리해야 할 산적한 일들을 뒤로하고, 나보다 더 큰 나, 내 조국의 앞날과 그보다 더 중요한 내 주님의 나라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실천으로 방송 3사의 파업공연에 참석했다.
내리는 비, 수많은 인파, 오래 서있어서 힘들어하는 아이들. 고생스러웠다. 하지만, 파업에 참여한 사람들 속에서 상식과 진실과 정의를 향한 간절한 열망을 보았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리라는 강한 확신 가운데서, 공연을 즐겼다. 어린시절, 대정부투쟁이 일상이었던 광주에서 자랐고, 시위가 한창이었던 때 대학을 다닌 나로서는 새로운 방식의 파업과 대정부 투쟁이 약간은 낯설었지만, 그 때보다 훨씬 바람직하고 효과적이 되었다는 생각을 가졌다. 불법과 부정에 대해 싸우면서 폭력을 사용하는 것은 그 때나 지금이나 동의할 수없는 것. 불법과 부정은 선과 정의로 이길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어제 비록 정부와 방송사 사장들을 욕하는 욕은 좀 거슬렸지만, 그래도 폭력이 아니라 축제로, 강요가 아니라 호소로 진행되는 그 모습은 바로 내가 원하던 그런 시위와 저항의 모습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쓰러져 정신없이 자고 일어나 또 다시 내 바쁜 일정을 시작했다. 그렇게 또 일상에 매몰되어 살아 가겠지... 하지만, 내 일신의 안락이 아닌, 내 조국과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열정과 마음은 결코 잊지 않을 것이고, 또한 그 운동에 참여는 점차 강화시켜 나갈 것이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힘으로...

seasons

예연이는 시인이다. 가끔씩 쓰는 시가 참 대견할 정도이다. 아래는 그 시들 중 하나...

제목: Seasons

spring summer
fall winter.
4 seasons of the year
spring, summer fall is here,
lets get ready.
winter's near.
flowers, ice cream colored leaves,
way too cold to feel the breeze.
picking, swimming, viewing, freezing,
four seasons of the year.

"Why don't you..."

방학...
한국에 와서 처음 맞는 겨울방학... 역시 미국에 비해 훨씬 길다.

방학이 되면 일감이 없어서 실업자 신세가 되는 특성 때문에, 무직 상태로 집에 머물렀다. 그로 인해 방학 내내 우리 가족은 거의 함께 집에서 생활했다. 아이들은 40일을 집에서 빈둥빈둥 거리면 지겨워서라도 어딘가에 좀 나가자고 조를만도 한데... 전혀... 아무 데도 가잔 말 없이 둘이서 잘 논다... 물론 "논다"는 마냥 즐겁게 보낸다는 뜻 만은 아니다. 때로는 깔깔거리며 웃고, 때로는 작은 창작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하고, 때로는 각자 공부하거나 책을 읽는다... 그리고 물론 때로는 아웅다웅 싸우다가 울기도하고 서로 으르렁거리기도 한다.
그 "노는" 행위 중의 하나가 이 비좁은 아파트에서 서로 쫓고 쫓기는 "놀이"이다. 때로는 하연이가 쫓기고, 때로는 예연이가 쫓기지만, 주로는 예연이가 쫓기고 하연이가 쫓아가서 응징한다. 그걸보면 예연이가 장난을 걸고, 장난을 걸다 좀 지나쳐서 하연이를 자극하는 경우가 많은가보다. 이 쫓고 쫓기는 행위는 자주 있는 일상이라서 처음에는 주의를 주다가 나중에는 포기하고 그냥 관망만 하게 된다.

어느날 하연이와 예연이가 방안에서 숙덕거리며 뭔가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 좀 옥신각신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예연이가 튀어나와 안방으로 후다닥 도망갔다. 드디어 또 쫓기 "놀이"가 시작되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이상하게 하연이가 예연이를 쫓아가지 않았다. 도망가던 예연이는 언니가 쫓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 못했으리라... 잠시후 안방에서 예연이의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대단히 화가난듯이 자기가 도망 나왔던 방을 향해 씩씩거리며 걸어갔다. 그러면서 큰 소리로 화내면서 하는 말:

"YOU!!!!! Why don't you chase me????????"

어스틴을 떠나며...

어제 어스틴을 떠나 LA로 왔습니다. 그리고 내일 한국행 비행기를 타고 미국을 떠납니다.

공항에서 렌트했던 차를 돌려주고, 짐을 들고 카운터로 향하는 발걸음...
비행기가 이륙했습니다. 밖을 보지 않으려고 했는데, 언뜻 비행기가 기울면서 저도 모르게 시선이 바깥을 향했습니다.
창문밖으로 보이는 오스틴 정경....
거기에 있는 제가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들 생각에 울컥했습니다.
저를 너무나 사랑하고, 제 졸업을 누구보다도 기뻐해 주었을 지체들 중 거의 대부분에게 간다는 말도 못했습니다. 신라 향가 중 제망매가의 첫구절처럼 저는 간다는 말도 못하고 떠났습니다.
그리고 떠나면서 큰 아픔을 남긴 경우도 있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떠올립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조용히 떠나야 했다는 것을 그들이 언젠가는 이해해 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저에게 주어진 생명의 기간 중 9년을 보냈던 곳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곳에서 수 많은 스승들, 하나님의 사자들을 예비해 주셨고, 그들을 통해 지극히 악하고 어리석을 저로 하여금 하나님을 깨닫고 배우도록 하셨습니다. 9년의 배움과 훈련에도 불구하고, 저는 아직도 지극히 작은 자일 뿐이고, 문자 그대로 죄인 중의 괴수일 뿐이지만, 그렇게도 더디게 하나님을 깨닫고, 아직도 무식하고 완악한 자이지만, 그래도 그런 저에게 주님을 경험하고 아는 지식을 더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제가 의도했든 혹 그렇지 않든지 간에 저로 인해서 상처와 고통을 받은 모든 분들께 고개숙여 깊이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저 주님의 긍휼과 은혜로 저를 용서해 달라고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모두들 사랑합니다. 진정으로....

Words...

" It truly was an honor for me to serve on your committee.  I know how hard you worded and I think you did an amazing job on your dissertation.  It was one of the most interesting ones I’ve ever read.  Thank you again for asking me to be on your committee.  I thoroughly enjoyed it.  I wish you the best of luck and I hope you keep in touch."

제 논문심사 위원이었던 경영학과 교수님의 메일입니다. 경영학에서는 뛰어나기로 정평이 나있는 교수이지요... 이 메일을 방금 읽었네요...
이 모든 칭찬은 제가 받아야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받으셔야 마땅하기 때문에, 분명히 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렇게 글로 올리며, 다른 사람들과 함께 저도 같이 주님을 찬양하기를 원합니다.

저는 아무런 능력이 없습니다. 겸손의 말이 아니라 진짜입니다. 저희 학과에서도 가장 못난 학생이었고, 가까이서 지켜보는 사람들이 답답해 할 정도로 학문적인 능력이 없는 사람입니다.
제 안에서 선한 것이 나올 수가 없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제가 더 잘 압니다.

그런 빈 깡통같은 저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시고, 하나님께서 주도하실 때, 그 인생이 어떻게 될 수 있는지를 보게 됩니다.

진심으로... 진심으로... 위대하신 주님입니다.

감사...

오늘은 저에게 중요한 날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주님의 능력과 위대하심을 체험하는 귀한 경험을 했습니다.

제 지도교수가 저에게 쓴 글 중 첫 부분입니다.

"Congratulations again on a fine performance at this morning's defense and on completion of a strong, convincing dissertation---well argued and well written."

분명 저에게 한 말씀이지만, 저는 압니다. 그건 제가 들을 말이 아니라,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함께하신 하나님께서 들으셔야 한다는 것을...
그분은 찬양받기에 합당하신 만왕의 왕이십니다.

저는 제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그것을 경험했습니다.

제가 이룬 성과보다도, 하나님으로 인해 기쁜 하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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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

토요일 저녁 9시경...
무작정 아파트를 나섰습니다. 답답하기도 했고, 월요일 오후까지 쓰기 위해서 Rent해 놓은 차를 그냥 놀리는 것이 아까와서 차를 몰고 나섰습니다. 그리고 나선 김에 콜라와 치약을 사기 위해 월마트에 가기로 했습니다.
공교롭게도 월마트와 제가 사는 아파트 한 중간에 전에 다니던 교회가 있습니다. 작년 12월 그 교회를 떠난 후 처음으로 교회에 가 봤습니다. 청년부 모임을 하고 있는지, 차량들이 조금 있었습니다.
교회 주차장을 한 바퀴 돌아 나오면서 여러가지 감정과 생각이 교차했습니다.
2006년 10월부터 거의 4년 동안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늘 토요일은 긴장되는 날이자, 은혜의 날이자, 기쁨의 날이자, 교제의 날이었습니다. 매주 말씀을 준비하기 위해 그렇게 씨름을 했고, 온 몸과 마음을 다해 말씀을 전했고, 청년부가 주님 안에서 바르게 성장하도록 기도하고 돕는 일에 모든 것을 쏟아 부었습니다. 비록 박사과정 유학을 하는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공부보다는 말씀을 연구하고 전하고, 형제자매들을 영적으로 바로 서도록 돕는 것이 항상 우선이었습니다.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다 쏟아 부었습니다. 진정으로 사랑했고, 진심을 다해 섬겼었습니다.

그런 공동체가 교회 안에 있는데... 주차장을 돌아 나올 수 밖에 없는 제 자신이 많이 안타까왔습니다. 제 마음에 그 공동체를 향한 사랑이 아직도 적지 않게 남아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기쁨으로 섬겼던 그 시절들의 느낌이 그대로 되살아 났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잘못된 부분도 많이 있었지만, 나름대로는 순수하게 진리와 복음만을 좇기 위해, 그리고 한 영혼 한 영혼을 돌보기 위해 정성을 다했던 아름다운 시간들이었습니다.

물론 지금와서 저에게 남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빈손으로 왔듯이 빈손으로 머물다가 빈손으로 떠나는 것이 인생인가봅니다.
사랑의 추억 외에는 모든 것을 묻어두고 빈손으로... 이제는 빈손으로...

하지만... 가슴 한 편이... 아려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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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려, 근심, 걱정, 두려움...

어떤 종류이건 간에, 어떤 이유이건 간에 내 안에 염려, 근심, 걱정, 두려움이 있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여기에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제외된다.)

염려, 근심, 걱정, 두려움은 세상이 두렵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세상에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고, 세상 그 자체로 엄청난 파워와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그렇다. 기계의 톱니바퀴가 매정하게 돌아가고 그 안에서 나는 아무런 능력이 없이 그 돌아가는 톱니바퀴 가운데서 어찌 되었든 그 흐름대로 맞추어 살아가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마음이 들기 때문에 내 안에 염려, 근심, 걱정, 두려움이 자리잡는다. 세상은 무한대로 커 보이고,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상태... 그것이다.

설사 그 무시무시한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이 살아계신다고 믿는다 하더라도 염려, 근심, 걱정, 두려움에 사로잡힐 수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존재하시긴 하지만, 그 능력이 절대적임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힘이 세신 분이긴 하지만, 이 세상을 완전하게 장악하시고, 그분의 뜻 가운데 모든 것을 이루실 수 있는 분, 그렇게 커 보이고, 무시무시해 보이는 이 세상이라 할지라도 그분께 복종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위대한 분, 절대주권자임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세상이 더 커보이고, 나를 근심하게 하고, 염려하게 하고, 그 가운데 걱정이 떠나지 않고, 그것으로 인해 두려워하게 하는 그 상황들, 그 어려움들, 다시 말해 세상의 파워가 하나님의 능력보다 더 막강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절대 능력, 절대 주권을 믿는다 하더라도 염려, 근심, 걱정, 두려움에 사로잡힐 수가 있다. 그분이 이 세상을 전적으로 다스리시는 만왕의 왕이라고 믿는 그 믿음이 확고히 서 있다고 하더라도, 세상 그 어느것도, 어떤 상황이라 하더라도 그분의 주권 아래 있다는 확실한 믿음이 있다 하더라도 나는 두려워하며 근심과 걱정 가운데 신음할 수가 있다. 그것은 그분의 선하심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분의 아버지되심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분이 그 절대 주권으로 나를 망하는 길로 내 몰수도 있다는 의심, 그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어려운 상황 가운데, 세상의 그 엄청난 파워 앞에 파리만도 못한 가운데 벌벌 떨고 있는 나같은 존재를 거들떠 보지도 않으실 것 같은, 험난 세파에 내동댕이쳐진 고아와 같이 내 힘으로 어떻게든 이겨내지 않으면 안되는 그런 존재로 스스로 느낄 때, 나는 근심과 걱정과 염려와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된다. 우주의 미아, 부모를 잃은 고아로서의 그 존재적 두려움이 나를 사로잡기 때문이다.

그 어떤 이유에서건 간에 내 안에 존재하는 염려, 근심, 걱정, 두려움은 내가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고 바로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 땅 가운데 존재하심을 바로 믿는다면, 그리고 그분이 절대주권자로서 세상의 모든 것을 통치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굳게 믿는다면, 그리고 그분, 그 만왕의 왕이 지극하신 자비와 사랑으로 나를 주목하시고, 나에게 가장 선한 것을 주시며, 최고의 길로 인도하심을 믿는다면, 내 안에 염려, 근심, 걱정, 두려움은 자리를 잡을 수가 없다. 그 믿음이 굳게 서 있다면, 비록 내 눈에 내가 망하는 길로 가는 것처럼 보이고, 하나님께서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그리고 내가 하나님의 크신 징계로 인해 극심한 어려움에 처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결국 하나님의 선하심에서 비롯되었으며, 그 선하심으로 나를 선한 길로 인도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결정임을 믿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을 바로 알고 바로 믿으면 나는 반드시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기뻐할 수 있고, 범사에 감사하며, 쉬지않고 기도할 수 있는 것이다. (살전 5:16-18)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을 아는 지식... 그것이 우리를 살리는 것이고,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이기게 하는 것이다.

염려와 근심, 걱정과 두려움으로 떨고 있는 나...
내 모습 가운데 드러나는 지극히 악한 이 모습을 보면서, 내 스스로에게 다시 한 번 믿음의 중요성을 되뇌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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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리더의 죄...

영적인 리더...
영혼을 섬기고 영혼을 돕는 리더로서 가장 큰 죄는 성경에 대해 무지한 것이다.
어떤 변명으로도 용서가 되지 않는 것이 바로 그 죄이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때, 그 인도는 파멸의 길일 수가 있다.
자기 혼자 무지 가운데서 그 파멸의 길로 걸어가는 것도 비극이지만, 남의 손을 붙잡고 그 길로 걸어가는 것은 지극히 큰 비극이다.

영적인 리더인가?
두려워하라.
긴장하고, 필사적으로 성경을 연구하고 공부하라. 성경에 대해 무식한 자는 영적인 리더가 될 자격이 없다. 성경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서 도대체 뭘 가르친다는 말인가? 무엇으로 양육하고 인도한다는 말인가?
교회의 목사님이 던져 주시는 이미 소화된 말씀 몇 구절을 전달하는 것으로, 그리고 그 목사님이나 다른 영적리더가 던져준 그것을 마치 자기 것인양 무책임하게 전달하는 것이 영적인 리더인 자신의 역할이라고 생각하는가?
그처럼 무지하고 무책임한 처사가 어디 있는가?

영적인 리더의 자리는 영혼을 인도하는 자리이다.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 한 영혼에게 영향력을 끼치는 자리이다. 그 자리에 있는 자라면, 지극히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는 것을 직접 연구하고 직접 듣고, 그리고 직접 받은그  말씀들, 직접 연구한 그 연구 결과물을 영혼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만약 그런 수고가 싫다면, 아니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영적인 리더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요즘 얼마나 많은 자들이 말씀에 대한 진지한 연구 없이, 스스로 말씀을 깊이 파보지도 않고, 남이 소화해주는 말씀을 전달하는 deliverer로서의 역할로 만족하고 있는지....

참으로 개탄할 일이다...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영적인 리더는 절대로 성경에 대해 무식하면 안 된다.

오슬로 테러 참사를 보며...

노르웨이의 오슬로 테러 참사를 보면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습니다.

한 영혼이 천하보다 더 귀하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립니다.
그 한 영혼을 위해, 그 한 영혼 한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늘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셔서 아기의 모습으로 탄생하시고, 그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고 내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들, 그 인간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하시기 위해서 그분은 십자가의 형벌을 대신 당하셨습니다.

어떠한 주장과 신념도 고귀한 생명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진 하나님의 특별한 창조물을 그렇게 죽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분노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절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악에 대해서는 지극히 혐오하시고 진노하시지만, 인간에 대해서는 한 없는 사랑과 자비와 오래 참으심으로 기다리시고 품으시는 하나님입니다.

너무나 큰 아픔을 당한 노르웨이의 수 많은 사람들에게 주님의 위로를 보냅니다.
그리고 내 안의 인간을 향한 분노가 어떤 결과를 가져 올 수 있는지를 생각하며, 참으로 내 안에 사람을 향한 분노가 있는지 진지하게 다시 돌아봅니다.
인간은 사랑의 대상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사실....
흐르는 눈물 가운데 그 사실을 다시 한 번 되새깁니다.

눈물과 고통과 이별과 질병과 사망이 없는 그 세상...
주님이 오셔서 이루실 그 세상을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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