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토요일 밤에 정말 오랫만에 TV를 켰는데, 볼 만한 프로가 거의 없었다.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다가 어느 방송사의 유엔 사무총장인 반기문씨에 대한 프로에 시선이 멈췄다.
그가 어떻게 유엔 사무총장이 될 수 있었는가에 대해서 성공요인을 분석한 것이었다. 그 프로에서 꼽은 첫번째 요인이 바로 영어. 방송은 그의 영어가 매우 "유창하다"고 설명했다. 그 영어로 인해서 세상을 알게되고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알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영어로 말하는 그분을 보면서 오히려 나는 반대의 생각을 했다. 그분의 영어는 결코 유창하지 않았다. 적어도 발음으로 볼 때는... 요즘 젊은 세대의 기준으로 볼 때는 중하위권도 들 수 없을 만한 영어였다. 그분의 영어를 보면서 '저렇게 영어를 못하는데도 유엔 사무총장이 될 수 있구나!'하는 생각을 가졌다.
하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 볼 때, 그분이 결코 영어를 못하는 분이 아니었다. 오히려 어느 정도는 "유창했다." 무슨 말인가? 그것은 발음의 차원이 아니라 영어를 구사하는 차원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영어 발음은 영어의 작은 한 요소에 불과하다. 발음이 영어의 전부는 아니다. 결코 아니다. 오히려 중요한 부분도 아니다. 특별히 몇 개의 발음만 주의한다면 발음문제는 외국인으로서 충분히 봐 줄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단어와 문장의 구사력이다. 물론 반총장님의 영어에서 콩글리시의 흔적을 자주 볼 수 있었지만, 발음에 비해서 문장 구사력이 더 뛰어남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유창함"은 발음도, 문장 구사력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분의 문장 구사력이 발음보다 뛰어나다고 하지만, 객관적인 기준으로 본다면 중간정도의 수준에 불과하다. 사실 그분의 영어실력이 특출나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세계의 이목이 그의 입에 집중되며 공감하며 감탄하는가? 그것은 영어라는 포장지에 실려 나오는 그분의 사상과 철학과 삶과 리더십이다. 결국 반총장님은 그분이 가진 그 무엇, 그 콘텐츠로 세상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세계 평화를 위한 그의 열정, 자신감, 그리고 그분의 인격에서 품어져 나오는 인간적인 매력과 리더십이라는 뛰어난 콘텐츠가 바로 그분의 영어를 차원이 다른 연설로 만드는 것이다.
영어 열풍에 빠져 있는 한국사회... 영어를 잘하는 사람들은 넘쳐나지만, 반총장님과 같은 그런 콘텐츠를 가진 사람을 찾아보기가 매우 드물다. 영어라는 포장지만 그럴듯하게 갖출 뿐, 그것으로 담아낼 그 뭔가를 부단히 배우고 또 생각하고, 고민하는 것이 없다. 영어라는 포장지에 담아낼 그 무엇이 없다면, 그 포장지는 휴지조각일 뿐이라는 것... 그것을 명심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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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
출퇴근 길 이용하는 마을버스 안에 있는 화면을 통해서 보여지는 아이돌 그룹들의 뮤직비디오를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은... 잘 훈련되고 잘 만들어진, 하지만 혼이 없는, 엔터테인먼트 기계(혹은 자동인형) 같다는 것이다.
음악을 통해서 낭만과 사랑과 현실의 어려움에 대한 위로를 받아왔던 나에게는, 오히려 더 현실적이고, 자본주의의 냄새가 강하게 나는 상품화된 그들의 소위 "음악"이 진열대의 하나의 상품처럼 친근감이 없다. 오히려 재벌의 행태를 본받아 그 전철을 밟아가는 연예기획사의 그 막강한 힘이 느껴져 거부감이 더해갈 뿐... 영혼 깊숙히 울리는 울림이 아니라, 말초신경의 감각에 호소하는 그들의 춤과 노래는 피상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천편 일률적인 춤과 노래. 혹독한 훈련과 기획에 의해 만들어진 이미지에 갖혀 사는 그들이 오히려 불쌍하다. 지금은 저렇게 열심히 하고 있지만, 효용가치가 떨어지면 언제든지 용도폐기가 되겠지라는 생각이 든다.
참 암울할 세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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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을 통해서 낭만과 사랑과 현실의 어려움에 대한 위로를 받아왔던 나에게는, 오히려 더 현실적이고, 자본주의의 냄새가 강하게 나는 상품화된 그들의 소위 "음악"이 진열대의 하나의 상품처럼 친근감이 없다. 오히려 재벌의 행태를 본받아 그 전철을 밟아가는 연예기획사의 그 막강한 힘이 느껴져 거부감이 더해갈 뿐... 영혼 깊숙히 울리는 울림이 아니라, 말초신경의 감각에 호소하는 그들의 춤과 노래는 피상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천편 일률적인 춤과 노래. 혹독한 훈련과 기획에 의해 만들어진 이미지에 갖혀 사는 그들이 오히려 불쌍하다. 지금은 저렇게 열심히 하고 있지만, 효용가치가 떨어지면 언제든지 용도폐기가 되겠지라는 생각이 든다.
참 암울할 세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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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4:00:00
룸살롱
안철수 교수가 룸살롱에 간 것을 본 적이 있다는 미확인 소문에 오늘 급기야 여당의 대선후보까지 나서서 진실을 밝히라고 안교수에게 요구했다.
확인이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룸살롱에 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도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강하게 여론몰이를 하며 안교수의 신선한 이미지에 상처를 내겠다는 의도이리라. 그리고 많은 국민들은 그 소위 '의혹'에 고개를 갸우뚱하며, '안철수가 그런 사람이었어?'라고 의문표를 붙이기를 고대하는 마음이리라. 물론 많은 국민들은 지금까지 늘 그래왔듯이 그런 이미지 놀이, 언론 플레이에 넘어가겠지... 그 전략은 우리 나라에서는 이미 그 효과가 검증된 것이니까...
사실 갔었는지의 여부에 대해서조차도 분명하지 않은 상황이긴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었다치고, "안교수가 룸살롱에 갔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람들은 자기의 경험에 비추어서, 그리고 일반화된 이미지로 그 의미를 거기서 추출하는 것이고, 그것은 진실, 혹은 사실과 동떨어져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여당에서는 바로 이런 것을 가지고 play를 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내 평생에 룸살롱에 간 적이 있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그렇다"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사실이니까...
그렇다면, 사람들은 나에 대해서 무슨 평가를 내릴까?
'세상에... 크리스천이라는 사람이... 그것도 집사가...'
'겉보기는 멀쩡해 보이는데, 뒤로는 할 짓 다 했군...'
'그럴 줄 알았어... 어쩐지... 위선자.'
등등 나는 악한 세상에 속한 자로서, 그 중심에서 할짓 다한 못된, 그리고 위선적인 크리스천으로 낙인찍힐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하지만 정작 "룸살롱에 갔었다"라는 것이 뭘 의미하는지는 아직 모호하다. 사실 이야기 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내가 룸살롱에 갔었던 것은 단 한 번. 군대에 있을 때(그때는 크리스천이 아니었다) 졸병시절, 광주의 한 시내에서 동기 기수 중에서 가장 친하게 지냈던 네 명이 만났다. 그 중 한 명이 대낮인 2시에 술을 먹자고 제안했고, 자기 형님이 룸살롱을 하고 있으니 거기로 가자고 제안했다. 동생이 동기들과 왔으니 술 값을 많이 안 받을 것이라면서... 그 때도 술을 안 마시던 나는 좀 꺼려지긴 했지만, 동기들이 가자고 해서 같이 따라갔다.
지하로 내려간 룸살롱에는 진짜 "룸"이 있었다.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둘러 앉아 술을 먹을 수 있도록 구조가 된 방.. 거게에 네 명의 군바리들이 앉았다. 대낮에... 룸살롱 주인이었던 동기 형님이 들어와 우리들과 인사하고, 먹고싶은 것 뭐든지 먹으라며 푸짐한 과일안주와 여러 안주를 들여 보냈다. 젊은 여자 한 명과 함께...
동기들은 술을 먹기를 원했지만, 대낮부터 술을 먹기가 좀 그랬는지, 그리 많이 마시지 않았고, 술에 입도 대지 않는 나는 안주만 냅다 집어 먹었다. 같이 들어오 여자는 내 동기와 잘 아는 사이인지 룸살롱 영업이나 손님들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고, 동기들은 힘든 군대생활에 대해 푸념하다가 네 시 정도에 룸살롱을 나왔다.
그것이 내 평생에 처음이자 마지막 룸살롱 체험이었다.
내 평생에 룸살롱에 가본 적이 있는가?
물론 있다. 하지만 그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
내 경험이 룸살롱에 갔다는 일반적인 인식과 이미지와 어떤 면에서 일치하는가 혹은 일치하지 않는가?
'안철수 교수가 룸살롱에 갔다'는 주장이 의미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아무것도 없다. 그것으로 안교수를 평가할 만한 내용이 없다는 것이다. 그저 이 이슈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진실이든 아니든 간에 안 교수의 이미지가 그런 것이 문제가 될 정도로 대중들에게 깨끗하게 인식되고 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런 문제를 이슈화시켜야만 했을 정도로 여당에서 안교수에 대한 효과적인 공격거리를 (아직까지는)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룸살롱에 상습적으로 들락거리며 접대받고 접대하며, 여성에 대해서 수많은 추태와 비행을 일삼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당에서, 마치 자신들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듯이 "룸살롱"을 이슈화하는 것이다.
정말... 치졸한 작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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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인이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룸살롱에 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도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강하게 여론몰이를 하며 안교수의 신선한 이미지에 상처를 내겠다는 의도이리라. 그리고 많은 국민들은 그 소위 '의혹'에 고개를 갸우뚱하며, '안철수가 그런 사람이었어?'라고 의문표를 붙이기를 고대하는 마음이리라. 물론 많은 국민들은 지금까지 늘 그래왔듯이 그런 이미지 놀이, 언론 플레이에 넘어가겠지... 그 전략은 우리 나라에서는 이미 그 효과가 검증된 것이니까...
사실 갔었는지의 여부에 대해서조차도 분명하지 않은 상황이긴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었다치고, "안교수가 룸살롱에 갔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람들은 자기의 경험에 비추어서, 그리고 일반화된 이미지로 그 의미를 거기서 추출하는 것이고, 그것은 진실, 혹은 사실과 동떨어져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여당에서는 바로 이런 것을 가지고 play를 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내 평생에 룸살롱에 간 적이 있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그렇다"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사실이니까...
그렇다면, 사람들은 나에 대해서 무슨 평가를 내릴까?
'세상에... 크리스천이라는 사람이... 그것도 집사가...'
'겉보기는 멀쩡해 보이는데, 뒤로는 할 짓 다 했군...'
'그럴 줄 알았어... 어쩐지... 위선자.'
등등 나는 악한 세상에 속한 자로서, 그 중심에서 할짓 다한 못된, 그리고 위선적인 크리스천으로 낙인찍힐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하지만 정작 "룸살롱에 갔었다"라는 것이 뭘 의미하는지는 아직 모호하다. 사실 이야기 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내가 룸살롱에 갔었던 것은 단 한 번. 군대에 있을 때(그때는 크리스천이 아니었다) 졸병시절, 광주의 한 시내에서 동기 기수 중에서 가장 친하게 지냈던 네 명이 만났다. 그 중 한 명이 대낮인 2시에 술을 먹자고 제안했고, 자기 형님이 룸살롱을 하고 있으니 거기로 가자고 제안했다. 동생이 동기들과 왔으니 술 값을 많이 안 받을 것이라면서... 그 때도 술을 안 마시던 나는 좀 꺼려지긴 했지만, 동기들이 가자고 해서 같이 따라갔다.
지하로 내려간 룸살롱에는 진짜 "룸"이 있었다.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둘러 앉아 술을 먹을 수 있도록 구조가 된 방.. 거게에 네 명의 군바리들이 앉았다. 대낮에... 룸살롱 주인이었던 동기 형님이 들어와 우리들과 인사하고, 먹고싶은 것 뭐든지 먹으라며 푸짐한 과일안주와 여러 안주를 들여 보냈다. 젊은 여자 한 명과 함께...
동기들은 술을 먹기를 원했지만, 대낮부터 술을 먹기가 좀 그랬는지, 그리 많이 마시지 않았고, 술에 입도 대지 않는 나는 안주만 냅다 집어 먹었다. 같이 들어오 여자는 내 동기와 잘 아는 사이인지 룸살롱 영업이나 손님들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고, 동기들은 힘든 군대생활에 대해 푸념하다가 네 시 정도에 룸살롱을 나왔다.
그것이 내 평생에 처음이자 마지막 룸살롱 체험이었다.
내 평생에 룸살롱에 가본 적이 있는가?
물론 있다. 하지만 그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
내 경험이 룸살롱에 갔다는 일반적인 인식과 이미지와 어떤 면에서 일치하는가 혹은 일치하지 않는가?
'안철수 교수가 룸살롱에 갔다'는 주장이 의미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아무것도 없다. 그것으로 안교수를 평가할 만한 내용이 없다는 것이다. 그저 이 이슈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진실이든 아니든 간에 안 교수의 이미지가 그런 것이 문제가 될 정도로 대중들에게 깨끗하게 인식되고 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런 문제를 이슈화시켜야만 했을 정도로 여당에서 안교수에 대한 효과적인 공격거리를 (아직까지는)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룸살롱에 상습적으로 들락거리며 접대받고 접대하며, 여성에 대해서 수많은 추태와 비행을 일삼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당에서, 마치 자신들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듯이 "룸살롱"을 이슈화하는 것이다.
정말... 치졸한 작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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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5:09:00
Emily Dickinson의 시 한 편
Success is counted sweetest
By those who ne'er succeed.
To comprehend a nectar
Requires sorest need.
Not one of all the purple host
Who took the flag to-day
Can tell the definition,
So clear, of victory!
As he, defeated, dying,
On whose forbidden ear
The distant strains of triumph
Burst agonized and clear!
By those who ne'er succeed.
To comprehend a nectar
Requires sorest need.
Not one of all the purple host
Who took the flag to-day
Can tell the definition,
So clear, of victory!
As he, defeated, dying,
On whose forbidden ear
The distant strains of triumph
Burst agonized and cl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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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4:17:00
이사야 12장
그 날에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는 내게 노하셨사오나
이제는 그 노가 쉬었고
또 나를 안위하시오니
내가 주께 감사하겠나이다!"
할 것이니라.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의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그 날에 너희가 또 말하기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 이름을 부르며
그 행하심을 만국 중에 선포하며
그 이름이 높다 하라!
여호와를 찬송할 것은
극히 아름다운 일을 하셨음이니
온 세계에 알게 할찌어다!
시온의 거민아!
소리를 높여 부르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가 너희 중에서 크심이니라!"
할 것이니라You will say in that day:
“I will give thanks to you, O LORD,
for though you were angry with me,
your anger turned away,
that you might comfort me.
“Behold, God is my salvation;
I will trust, and will not be afraid;
for the LORD GOD is my strength and my song,
and he has become my salvation.”
With joy you will draw water from the wells of salvation. And you will say in that day:
“Give thanks to the LORD,
call upon his name,
make known his deeds among the peoples,
proclaim that his name is exalted.
“Sing praises to the LORD, for he has done gloriously;
let this be made known in all the earth.
Shout, and sing for joy, O inhabitant of Zion,
for great in your midst is the Holy One of Israel.”
(Isaiah 12 ES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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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9:54:00
요나를 생각하며...
소위 선지자이지만 하나님의 분명한 명령을 받고도 그 메시지를 전달해야할 곳이 아니라 정반대 방향으로 도망한 자.
자신의 불순종으로 배가 침몰하고 모두가 죽게되었지만, 끝끝내 회개하지 않고 차라리 바다에 던져져 죽음을 택할 만큼 반역적인 자.
바다에서 죽었어야 했지만, 고래를 통해 구원하신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 하나님께 감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이 동일한 인자와 자비로 니느웨 사람들을 구원했을 때, 이를 갈며 하나님께 대들며 차라리 자신을 죽여달라고 함부로 하나님께 망언을 했던 자.
땡볕에서 자신에게 시원한 그늘이 되어주던 박넝쿨을 벌레로 하여금 죽게하시고, 뜨거운 바람으로 고통을 더하신 하나님을 원망하며 저주하며 대들던 자.
요나는 악한 인간의 표상이다. 그런 인간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를 설득하시고 훈계하시고 가르치시는 하나님. 요나서를 보면 마치 하나님의 세계에는 요나 한 사람 밖에 없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집중하신다. 요나가 말을 안듣는다면, 다른 사람을 시켜 그 메시지를 전하면 되는 것인데, 마치 이스라엘, 아니 이 세상에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할 만한 사람이 없다는 듯이 집요하게 그에게 그 일을 일임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때로는 이런 하나님이 낯설게 느껴진다. 이해될 듯 하면서도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처신.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바로 그 요나같은 자, 아니 요나보다 더 흉악한 자가 바로 나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그 반역적인 요나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그를 품으시고 설득하시고 훈계하시는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이 나에게도 적용될 수 있음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른다. 마치 이 세상에 귀한 존재는 나 한 사람 밖에 없다는 듯이, 내게 집중하시고, 나를 관용하시고, 나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나 한 사람을 위해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죽이시기까지 하신 그 사랑을 보여 주시는 하나님. 그 이해될 수 없는 사랑이 바로 요나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다.
요나서는 니느웨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요나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과 사랑을 더 극명히 보여준다. 결국, 다른 모든 성경의 책들처럼, 요나서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가장 중점적으로 보여주며 잘 보여주는 책이다.
요나의 하나님... 그분은 죄인을 오래 참으시는 분이며, 그 크신 자비와 인자로 죄인을 가슴에 품으시는 창조주이시다. 그분이 바로 나의 하나님이다.
감사. 감사.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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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불순종으로 배가 침몰하고 모두가 죽게되었지만, 끝끝내 회개하지 않고 차라리 바다에 던져져 죽음을 택할 만큼 반역적인 자.
바다에서 죽었어야 했지만, 고래를 통해 구원하신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 하나님께 감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이 동일한 인자와 자비로 니느웨 사람들을 구원했을 때, 이를 갈며 하나님께 대들며 차라리 자신을 죽여달라고 함부로 하나님께 망언을 했던 자.
땡볕에서 자신에게 시원한 그늘이 되어주던 박넝쿨을 벌레로 하여금 죽게하시고, 뜨거운 바람으로 고통을 더하신 하나님을 원망하며 저주하며 대들던 자.
요나는 악한 인간의 표상이다. 그런 인간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를 설득하시고 훈계하시고 가르치시는 하나님. 요나서를 보면 마치 하나님의 세계에는 요나 한 사람 밖에 없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집중하신다. 요나가 말을 안듣는다면, 다른 사람을 시켜 그 메시지를 전하면 되는 것인데, 마치 이스라엘, 아니 이 세상에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할 만한 사람이 없다는 듯이 집요하게 그에게 그 일을 일임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때로는 이런 하나님이 낯설게 느껴진다. 이해될 듯 하면서도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처신.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바로 그 요나같은 자, 아니 요나보다 더 흉악한 자가 바로 나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그 반역적인 요나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그를 품으시고 설득하시고 훈계하시는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이 나에게도 적용될 수 있음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른다. 마치 이 세상에 귀한 존재는 나 한 사람 밖에 없다는 듯이, 내게 집중하시고, 나를 관용하시고, 나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나 한 사람을 위해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죽이시기까지 하신 그 사랑을 보여 주시는 하나님. 그 이해될 수 없는 사랑이 바로 요나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다.
요나서는 니느웨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요나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과 사랑을 더 극명히 보여준다. 결국, 다른 모든 성경의 책들처럼, 요나서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가장 중점적으로 보여주며 잘 보여주는 책이다.
요나의 하나님... 그분은 죄인을 오래 참으시는 분이며, 그 크신 자비와 인자로 죄인을 가슴에 품으시는 창조주이시다. 그분이 바로 나의 하나님이다.
감사. 감사.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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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0:47:00
다니엘과 세 친구가 부러운 이유
다니엘서를 공부하면서 다니엘과 세 친구인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혹은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참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
그 이유 하나는 다음 구절에 나온다.
"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지식을 얻게 하시며 모든 학문과 재주에 명철하게 하신 외에 다니엘은 또 모든 이상과 몽조를 깨달아 알더라.(As for these four youths, God gave them learning and skill in all literature and wisdom, and Daniel had understanding in all visions and dreams.)"(1:17, 영문은 ESV)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지식을 얻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모든 학문과 재주에 명철하게 하셨다. 학문을 하는 나로서는 가장 부러운 능력이 바로 지식과 학문에 명철하게 하시는 것 아닌가? 공부를 하면 할수록 내가 뭔가를 알아간다는 생각보다는 부족함을 느끼며 내 능력없음을 한탄하는 경우가 훨씬 많은 내 현실을 보면서 하나님으로부터 학문에 대한 능력을 부여받은 다니엘과 세 친구가 무한 부럽기만 하다.
그들이 부러운 또 다른 이유, 더 중요한 이유는 바로 그들의 동역이다.
"이에 다니엘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그 동무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에게 그 일을 고하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이 은밀한 일에 대하여 긍휼히 여기사 자기 다니엘과 동무들이 바벨론의 다른 박사와 함께 죽임을 당치 않게 하시기를 그들로 구하게 하니라."(단 2:17-18)
느부갓네살왕이 범상치 않은 꿈을 꾼 후에 그 꿈이 무엇인지와 그 해석을 동시에 알려라는 추상같은 명령, 어찌보면 불가능한 명령을 내린 후 그 당시 지식인들이 모두 처형될 위기에 처해있을 때, 하나님을 굳게 믿은 다니엘이 자신이 그 일을 감당하겠다고 선언한다. 그것은 자신의 목숨을 건 행동이었다. 만약 그가 말한 대로 왕이 무슨 꿈을 꿨는지를 말하지 못한다면, 그는 왕을 농락한 댓가로 처참한 죽음을 맞이해야 했으면, 자신의 민족 또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그런 위험한 모험이었던 것이다. 그런 절대절명의 상황에서 기도를 부탁할 수 있는 친구들이 그에게는 있었다. 그리고 그 친구들은 마치 자신의 목숨이 걸린 것처럼 간절하게 기도했고, 마침내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에 응답해서 다니엘에게 그 꿈과 해석을 보여 주셨다.
이후로도, 바벨론과 페르시아라는 당시 초강국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지켜가는 데 많은 생명의 위협을 겪었고, 풀무불과 사자굴이라는 죽음의 경계선을 넘나드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그럴 때, 그들은 믿음의 동역자가 있었고, 그 동역자와 같이 함께하는 가운데 넘어지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서로 격려하는 가운데 믿음의 길, 자신들의 목숨과 기득권을 내려 놓는 길로 나아갈 수 있었고, 종국에 이방의 한 중심, 우상숭배의 한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 복된 자들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목숨을 걸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길로 나아가는 결단. 그것은 바벨론과 페르시아의 시대 뿐만 아니라 오늘날 한국에서도 동일하게 믿는 자에게 요구되는 결단이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 뿐만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교회가 맘몬이라는 우상을 섬기며 거기에 절하고 있는 이 사회 속에서, 거기에 절하지 않고, 살아계신 하나님께만 경배를 드리고 그분께만 무릎을 꿇겠다는 믿음의 결단은 사회 뿐만 아니라 교회 내에서도 조롱과 핍박의 대상이다. 때로는 밥줄을 포기해야만 하고, 작게는 사람들 사이에서의 삶을 포기해야 한다. 그런 믿음의 길을 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은 내 개인이 하나님 앞에 보다 더 바르게 서고, 거룩한 삶 가운데 그분을 더욱 의지하는 것과 함께, 동시에 같은 뜻을 가지고 서로 격려하며 기도해주고, 함께 삶을 나누는 동역자들인 것이다.
나는 동역자들과 함께 살아가는 믿음의 삶이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를 경험했었다. 하지만 삶의 터전이 완전히 바뀐 지금, 거의 1년 동안 광야에 홀로 남아 있는 외톨이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동역자가 그립다. 믿음으로 나를 깨어있게 하고, 같이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일을 도모할 동역자들...
그것이 바로 다니엘과 세 친구가 무척 부러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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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유 하나는 다음 구절에 나온다.
"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지식을 얻게 하시며 모든 학문과 재주에 명철하게 하신 외에 다니엘은 또 모든 이상과 몽조를 깨달아 알더라.(As for these four youths, God gave them learning and skill in all literature and wisdom, and Daniel had understanding in all visions and dreams.)"(1:17, 영문은 ESV)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지식을 얻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모든 학문과 재주에 명철하게 하셨다. 학문을 하는 나로서는 가장 부러운 능력이 바로 지식과 학문에 명철하게 하시는 것 아닌가? 공부를 하면 할수록 내가 뭔가를 알아간다는 생각보다는 부족함을 느끼며 내 능력없음을 한탄하는 경우가 훨씬 많은 내 현실을 보면서 하나님으로부터 학문에 대한 능력을 부여받은 다니엘과 세 친구가 무한 부럽기만 하다.
그들이 부러운 또 다른 이유, 더 중요한 이유는 바로 그들의 동역이다.
"이에 다니엘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그 동무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에게 그 일을 고하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이 은밀한 일에 대하여 긍휼히 여기사 자기 다니엘과 동무들이 바벨론의 다른 박사와 함께 죽임을 당치 않게 하시기를 그들로 구하게 하니라."(단 2:17-18)
느부갓네살왕이 범상치 않은 꿈을 꾼 후에 그 꿈이 무엇인지와 그 해석을 동시에 알려라는 추상같은 명령, 어찌보면 불가능한 명령을 내린 후 그 당시 지식인들이 모두 처형될 위기에 처해있을 때, 하나님을 굳게 믿은 다니엘이 자신이 그 일을 감당하겠다고 선언한다. 그것은 자신의 목숨을 건 행동이었다. 만약 그가 말한 대로 왕이 무슨 꿈을 꿨는지를 말하지 못한다면, 그는 왕을 농락한 댓가로 처참한 죽음을 맞이해야 했으면, 자신의 민족 또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그런 위험한 모험이었던 것이다. 그런 절대절명의 상황에서 기도를 부탁할 수 있는 친구들이 그에게는 있었다. 그리고 그 친구들은 마치 자신의 목숨이 걸린 것처럼 간절하게 기도했고, 마침내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에 응답해서 다니엘에게 그 꿈과 해석을 보여 주셨다.
이후로도, 바벨론과 페르시아라는 당시 초강국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지켜가는 데 많은 생명의 위협을 겪었고, 풀무불과 사자굴이라는 죽음의 경계선을 넘나드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그럴 때, 그들은 믿음의 동역자가 있었고, 그 동역자와 같이 함께하는 가운데 넘어지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서로 격려하는 가운데 믿음의 길, 자신들의 목숨과 기득권을 내려 놓는 길로 나아갈 수 있었고, 종국에 이방의 한 중심, 우상숭배의 한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 복된 자들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목숨을 걸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길로 나아가는 결단. 그것은 바벨론과 페르시아의 시대 뿐만 아니라 오늘날 한국에서도 동일하게 믿는 자에게 요구되는 결단이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 뿐만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교회가 맘몬이라는 우상을 섬기며 거기에 절하고 있는 이 사회 속에서, 거기에 절하지 않고, 살아계신 하나님께만 경배를 드리고 그분께만 무릎을 꿇겠다는 믿음의 결단은 사회 뿐만 아니라 교회 내에서도 조롱과 핍박의 대상이다. 때로는 밥줄을 포기해야만 하고, 작게는 사람들 사이에서의 삶을 포기해야 한다. 그런 믿음의 길을 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은 내 개인이 하나님 앞에 보다 더 바르게 서고, 거룩한 삶 가운데 그분을 더욱 의지하는 것과 함께, 동시에 같은 뜻을 가지고 서로 격려하며 기도해주고, 함께 삶을 나누는 동역자들인 것이다.
나는 동역자들과 함께 살아가는 믿음의 삶이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를 경험했었다. 하지만 삶의 터전이 완전히 바뀐 지금, 거의 1년 동안 광야에 홀로 남아 있는 외톨이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동역자가 그립다. 믿음으로 나를 깨어있게 하고, 같이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일을 도모할 동역자들...
그것이 바로 다니엘과 세 친구가 무척 부러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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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12:49:00
겸손... 언제나...
얼마 전 일이다.
내 지도교수님 아래에서 같이 배웠던 한 후배가 선생님을 뵈러 학교에 찾아온다고 연락이 왔다. 지금 신문사 기자로 있는 후배인데, 겸사겸사 선생님께 인사드리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도 같이 뵈면 좋겠다고 그랬다.
선생님과 시간을 조정해 보려 했는데, 시간이 맞지 않아서 매우 이른 아침에 만나기로 했다. 장소는 내가 있는 곳 바로 옆방인 미국학연구소장실...
나는 약속된 날 시간에 맞춰 평소보다 일찍 연구실로 나갔다. 얼마 후 선생님께서 오셨다. 그러면서 이것 저것 부지런히 준비하시는 모습이었다. '다른 부담되는 손님도 아니고 제자가 찾아 오는데, 그냥 맞으시면 될텐데 뭘 그리 준비하시나?'하는 생각에 의아했다. 바로 옆방에 내가 있었음에도, 혼자서 뭔가를 하고 계셨다.
나는 내 방에 머물러 있다가 화장실로 갔다. 거기서 선생님과 마주쳤다. 화장실 바로 옆에 생수와 싱크대가 있는 작은 방이 있는데, 거기서 열심히 컵들을 씻고 계셨다. 찾아오는 제자와 나에게 특별한 커피를 대접하시고 싶은 것이었다. 그래서 커피메이커를 씻으시고, 물을 담으시고, 또 컵을 씻으시면서 준비하고 계시는 것이었다.
서울대언어교육원장, 한국아메리카학회회장, 서울대미국학연구소장 등등 현재 여러 큰 기관의 수장으로 일하고 계시는 선생님께서, 그것도 내 스승님께서, 제자인 나를 바로 옆방에 두고도 손수 그런 일을 직접하시는 것을 보면서, 제자를 대접하시고자 하는 스승의 따뜻한 마음과 함께, 그분의 소탈함과 겸손함이 느껴졌다.
언젠가 다른 학교를 방문했을 때, 거기에 계셨던 교수 한 분이 "교수 사회에 있다보면, 다들 자기도 모르게 어느새 높아져서 대접받는 것에 익숙하고 대접하는 것에는 매우 서투르게 된다."는 푸념을 들었다. 학교에 1년 밖에 있지 않았고, 또 신분도 교수가 아니라 시간강사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충분히 이해가 될 만한 경험들을 많이 했다.
그런 교수 사회에서 수 십년을 계셨던 선생님의 작은 섬김은 큰 감동으로 다가왔고 선생님의 그 마음쓰심과 (당신께서는 의도하지는 않으셨겠지만) 직접 행동으로 제자에게 가르치심에 감사했다.
교만, 오만, 자만...
나는 그 누구보다도 쉽게 높아지는 자이다. 스스로를 높이고 교만해지는 자이다. 그럴 자격도 없는 자임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높이는데 매우 민감한 자이다. 그런 내가 스승의 작은 섬김을 보면서 절로 고개가 숙여지며, 내 자신을 다시 한 번 진지하게 돌아보고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에게 배울 수 있는 훌륭한 스승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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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지도교수님 아래에서 같이 배웠던 한 후배가 선생님을 뵈러 학교에 찾아온다고 연락이 왔다. 지금 신문사 기자로 있는 후배인데, 겸사겸사 선생님께 인사드리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도 같이 뵈면 좋겠다고 그랬다.
선생님과 시간을 조정해 보려 했는데, 시간이 맞지 않아서 매우 이른 아침에 만나기로 했다. 장소는 내가 있는 곳 바로 옆방인 미국학연구소장실...
나는 약속된 날 시간에 맞춰 평소보다 일찍 연구실로 나갔다. 얼마 후 선생님께서 오셨다. 그러면서 이것 저것 부지런히 준비하시는 모습이었다. '다른 부담되는 손님도 아니고 제자가 찾아 오는데, 그냥 맞으시면 될텐데 뭘 그리 준비하시나?'하는 생각에 의아했다. 바로 옆방에 내가 있었음에도, 혼자서 뭔가를 하고 계셨다.
나는 내 방에 머물러 있다가 화장실로 갔다. 거기서 선생님과 마주쳤다. 화장실 바로 옆에 생수와 싱크대가 있는 작은 방이 있는데, 거기서 열심히 컵들을 씻고 계셨다. 찾아오는 제자와 나에게 특별한 커피를 대접하시고 싶은 것이었다. 그래서 커피메이커를 씻으시고, 물을 담으시고, 또 컵을 씻으시면서 준비하고 계시는 것이었다.
서울대언어교육원장, 한국아메리카학회회장, 서울대미국학연구소장 등등 현재 여러 큰 기관의 수장으로 일하고 계시는 선생님께서, 그것도 내 스승님께서, 제자인 나를 바로 옆방에 두고도 손수 그런 일을 직접하시는 것을 보면서, 제자를 대접하시고자 하는 스승의 따뜻한 마음과 함께, 그분의 소탈함과 겸손함이 느껴졌다.
언젠가 다른 학교를 방문했을 때, 거기에 계셨던 교수 한 분이 "교수 사회에 있다보면, 다들 자기도 모르게 어느새 높아져서 대접받는 것에 익숙하고 대접하는 것에는 매우 서투르게 된다."는 푸념을 들었다. 학교에 1년 밖에 있지 않았고, 또 신분도 교수가 아니라 시간강사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충분히 이해가 될 만한 경험들을 많이 했다.
그런 교수 사회에서 수 십년을 계셨던 선생님의 작은 섬김은 큰 감동으로 다가왔고 선생님의 그 마음쓰심과 (당신께서는 의도하지는 않으셨겠지만) 직접 행동으로 제자에게 가르치심에 감사했다.
교만, 오만, 자만...
나는 그 누구보다도 쉽게 높아지는 자이다. 스스로를 높이고 교만해지는 자이다. 그럴 자격도 없는 자임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높이는데 매우 민감한 자이다. 그런 내가 스승의 작은 섬김을 보면서 절로 고개가 숙여지며, 내 자신을 다시 한 번 진지하게 돌아보고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에게 배울 수 있는 훌륭한 스승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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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12:16:00
뉴스타파
대안언론의 상징인 뉴스타파가 회원을 모집하고 있습니다.
그 동안 뉴스타파를 후원할 길을 열리기를 기도하고 바라고 있었는데, 드디어 열렸네요. 저는 기쁨으로 동참했습니다.
제 블로그를 보시는 분들 중 많은 분들이 재정지원에 참여하면 좋겠습니다.
어두워져만 가는 이 땅에 진실이라는 빛을 비추는 이 운동이 하나님 나라 운동과 완전하게 일치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이 프로가 하는 일의 많은 부분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리라 확신합니다.
회원가입은 뉴스타파 홈페이지에서...
http://www.newstap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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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7:45:00
동성애에 관한 가장 성경적인 입장
내 생각에 동성애에 관한 가장 성경적인 입장은 High Pointe Baptist Church의 Juan Sanchez목사님의 설교에서 확실하게 들어난다고 생각한다.
동성애에 대해서 기존교회의 입장은 배척-적대나 용인-수용의 두 가지 중 하나였다. 하지만, 성경적으로 볼 때, 그 둘은 모두 잘못된 것이다. 설교의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단어도 반대할 것이 없는 참으로 뛰어난 설교를 같이 나누고 싶다.
"And Such were Some of You: Healing for the Sexually Broken" (Leviticus 20: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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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에 대해서 기존교회의 입장은 배척-적대나 용인-수용의 두 가지 중 하나였다. 하지만, 성경적으로 볼 때, 그 둘은 모두 잘못된 것이다. 설교의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단어도 반대할 것이 없는 참으로 뛰어난 설교를 같이 나누고 싶다.
"And Such were Some of You: Healing for the Sexually Broken" (Leviticus 20: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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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0:13:00
잡념...
사장이 동성애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대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fastfood 체인점 중에서 가장 직원들에게 인간적으로 대하고 손님들에게 질 좋은 음식을 제공하는 Chic-fil-A가 "vice company"로 낙인 찍혀 시카고를 비롯한 몇 개의 도시에서 영업취소 처분을 받았다.
어찌보면 직원들과 사회에 심각한 해악을 끼치고 있는 맥도날드를 비롯한 다른 패스트푸드 기업들이 모범으로 삼고 따라야 할 만큼 성경적이고 양심적으로 경영을 해온 기업에 대해서 이토록 가혹한 형벌을 내리면서도, 그 악이 만천하에 공개되었을 뿐만 아니라 검증이 된 악한 거대 기업들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제대로 못하는 미국의 liberal들을 다시 한 번 주의깊게 바라본다. 오바마 대통령의 비서실장을 지냈던 엠마뉴엘 시카고 시장의 그 단호한 조치가 나로 하여금 미국 리버럴들에 대한 내 입장을 재고하게 만든다.
무엇이 악이고 무엇이 선인가? 명백한 악에 대해서 침묵하는 그들이 왜 동성애의 문제에 대해서는 그토록 민감하게 반응하는가? 한 잡지의 기자가 liberal facism이라고 부르는 이 작태를 보면서, 미국사회, 그리고 더 나아가 현 세상의 가치전도를 본다.
어찌보면 절대적 가치의 기준을 잃어버린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예견된 결과이기도 하지만, 가치의 전도가 이미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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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1:42:00
하나님의 질투...
"보라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예루살렘과 유다가 의뢰하며 의지하는 것을 제하여 버리시되 . . ."(사 3:1a)
하나님의 선언이다. 무서운, 하지만 감사한...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나의 의지할 유일한 분이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그분은 내가 의지하는 잡다한 다른 것들, 하나님 외의 모든 것을 제하여 버리실 것이다. 나로서는 그 동안 의지하던 바를 잃어버리기 때문에 당황스럽고 세상 살 맛이 나지 않을 정도로 고통스럽고 불안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은 끝끝내 진정한 의지할 바 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의지할 바를 모두 끊으심으로 하나님 당신만을 바라보고 의지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사실 그분 외에 의지할 만한 것이 세상에 어디 있는가? 세상에는 영원한 것도, 전능한 것도, 전지한 것도 아무 것도 없다. 내가 의지하는 대상 역시 유한자일 뿐이고 피조물일 뿐이고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에 있는 것들 뿐이다. 내 죄악된 본성이 영원하신 하나님을 끝끝내 무시하고, 다른 곳으로 내 시선을 돌리게 하고 마음을 두게 함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내 의지하는 바를 모두 끊으시고, 나를 벼랑끝으로 모시는 것은, 바로 거기에 그분이 계시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를 돌이킬 수 없기 때문에, 내 죄악이 그만큼 크고 내 존재에 사무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질투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준다. 그분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질투하실 필요도 없는 것이고, 질투하지 않는다면, 내가 우상을 섬기고 세상을 의지하든 말든 그분이 신경쓰실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내가 의지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고, 당신만을 의지함으로 당신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기를 원하신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할 때, 하나님께서는 결코 가만 있지 않으실 것이다. 분명 내 모든 것을 끊으시고, 나를 벼랑 끝을 몰 것이다. 무섭지만, 그것이 하나님 사랑이고, 그렇기 때문에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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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선언이다. 무서운, 하지만 감사한...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나의 의지할 유일한 분이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그분은 내가 의지하는 잡다한 다른 것들, 하나님 외의 모든 것을 제하여 버리실 것이다. 나로서는 그 동안 의지하던 바를 잃어버리기 때문에 당황스럽고 세상 살 맛이 나지 않을 정도로 고통스럽고 불안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은 끝끝내 진정한 의지할 바 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의지할 바를 모두 끊으심으로 하나님 당신만을 바라보고 의지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사실 그분 외에 의지할 만한 것이 세상에 어디 있는가? 세상에는 영원한 것도, 전능한 것도, 전지한 것도 아무 것도 없다. 내가 의지하는 대상 역시 유한자일 뿐이고 피조물일 뿐이고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에 있는 것들 뿐이다. 내 죄악된 본성이 영원하신 하나님을 끝끝내 무시하고, 다른 곳으로 내 시선을 돌리게 하고 마음을 두게 함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내 의지하는 바를 모두 끊으시고, 나를 벼랑끝으로 모시는 것은, 바로 거기에 그분이 계시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를 돌이킬 수 없기 때문에, 내 죄악이 그만큼 크고 내 존재에 사무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질투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준다. 그분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질투하실 필요도 없는 것이고, 질투하지 않는다면, 내가 우상을 섬기고 세상을 의지하든 말든 그분이 신경쓰실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내가 의지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고, 당신만을 의지함으로 당신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기를 원하신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할 때, 하나님께서는 결코 가만 있지 않으실 것이다. 분명 내 모든 것을 끊으시고, 나를 벼랑 끝을 몰 것이다. 무섭지만, 그것이 하나님 사랑이고, 그렇기 때문에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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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9:57:00
사 2:22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 (사 2:22)
이 말씀을 접할 때마다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은, 그 말씀이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경헝을 통해서 어느샌가 그것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늘 알고 있는 이 말씀이 접할 때마다 새로운 것은, 알기는 하지만, 내 삶이 그 말씀에 준하는 삶이 아니라 어느새 인간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리라.
어리석고 죄악된 인간인 나. 참으로 답답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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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씀을 접할 때마다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은, 그 말씀이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경헝을 통해서 어느샌가 그것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늘 알고 있는 이 말씀이 접할 때마다 새로운 것은, 알기는 하지만, 내 삶이 그 말씀에 준하는 삶이 아니라 어느새 인간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리라.
어리석고 죄악된 인간인 나. 참으로 답답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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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1:59:00
"내 원수에게 보복하리라"
네 고관들은 패역하여 도둑과 짝하며 다 뇌물을 사랑하며 예물을 구하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지 아니하며 과부의 송사를 수리하지 아니하는도다! 그러므로 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전능자가 말씀하시되 "슬프다! 내가 장차 내 대적에게 보응하여 내 마음을 편하게 하겠고 내 원수에게 보복하리라"(사 1:23-24)
오늘 아침에 묵상한 말씀인 이사야 1:21-31의 일부이다.
이사야 당시의 이스라엘을 보시는 하나님의 탄식. 하나님을 슬프게 만든 이스라엘의 죄악상은 바로 정치적, 사회적 지도자들의 부패였다. 그들은 뇌물로 부패한 자들이며, 사회적 약자인 고아와 과부를 돌보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억압하고, 가진자들, 힘있는 자들만의 사회를 건설해 나갔다. 바로 오늘의 우리 한국 사회의 모습이다. 법과 원칙과 정의의 수호자여야할 대통령은 비리와 부정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능력만을 우선시한다. 사회적 법질서를 확립해야할 검찰은 정치적 경제적 권력의 시녀로 가진자들의 수호자일 뿐, 약자들에게는 냉혹하리만큼 가혹하다. 사법부 역시 다를 바가 없다. 그들의 작태는 하나님을 슬프게 만들며, 하나님으로 하여금 "보복하리라"는 결심을 하게 만든다. 하나님이 얼마나 무서운지,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보복하리라"고 하실 때, 그저 코웃음칠 거리로 밖에 안 보이겠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 나에게는 매우 두렵고 떨리는 경고의 말씀으로 들린다.
하지만, 문제는 내가 '그들'이라고 비난하는 그들의 작태로부터 내가 자유로운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 경고의 말씀이 나와는 상관없이 그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말씀인가 하는 것이다. 나 또한 가진자의 일부로서 그들과 한 자리에서 그들만큼 악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는 않지만, 그들의 잔치상으로부터 떨어지는 떡부스러기로 배를 불리는 자가 아닌가? 이미 기득권에 속한, 혹은 속하게 될 사람으로서, 그들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그들을 비난하면서도, 그들이 세워 놓은 질서 속에서 특혜를 받으며,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으면서 누릴 것은 다 누리는 그런 사람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은 곧 나를 향한 말씀이요 경고인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그들을 향해 외칠 수 있어야 한다. 이사야처럼... 그가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자로서, 사회의 귀족출신으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이 있었지만, 그것을 내려 놓고, 그가 속한 사회를 향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자로 쓰임받았던 것처럼, 그리고 그 끝에 톱으로 켜서 죽임을 당했던 것처럼, 약자들을 위해 싸우고, 행동하고, 가진자들을 향해 쓴소리를 퍼붓지 않는다면, 나 역시 하나님을 슬프시게 만드는 악한 자인 것이다.
사회적 약자들의 원망과 곡성 점점 높아지는 이 때에 내 한 목숨, 내 삶의 안위를 위해 그 소리에 귀를 닫는 것은 죄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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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에 묵상한 말씀인 이사야 1:21-31의 일부이다.
이사야 당시의 이스라엘을 보시는 하나님의 탄식. 하나님을 슬프게 만든 이스라엘의 죄악상은 바로 정치적, 사회적 지도자들의 부패였다. 그들은 뇌물로 부패한 자들이며, 사회적 약자인 고아와 과부를 돌보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억압하고, 가진자들, 힘있는 자들만의 사회를 건설해 나갔다. 바로 오늘의 우리 한국 사회의 모습이다. 법과 원칙과 정의의 수호자여야할 대통령은 비리와 부정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능력만을 우선시한다. 사회적 법질서를 확립해야할 검찰은 정치적 경제적 권력의 시녀로 가진자들의 수호자일 뿐, 약자들에게는 냉혹하리만큼 가혹하다. 사법부 역시 다를 바가 없다. 그들의 작태는 하나님을 슬프게 만들며, 하나님으로 하여금 "보복하리라"는 결심을 하게 만든다. 하나님이 얼마나 무서운지,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보복하리라"고 하실 때, 그저 코웃음칠 거리로 밖에 안 보이겠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 나에게는 매우 두렵고 떨리는 경고의 말씀으로 들린다.
하지만, 문제는 내가 '그들'이라고 비난하는 그들의 작태로부터 내가 자유로운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 경고의 말씀이 나와는 상관없이 그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말씀인가 하는 것이다. 나 또한 가진자의 일부로서 그들과 한 자리에서 그들만큼 악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는 않지만, 그들의 잔치상으로부터 떨어지는 떡부스러기로 배를 불리는 자가 아닌가? 이미 기득권에 속한, 혹은 속하게 될 사람으로서, 그들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그들을 비난하면서도, 그들이 세워 놓은 질서 속에서 특혜를 받으며,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으면서 누릴 것은 다 누리는 그런 사람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은 곧 나를 향한 말씀이요 경고인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그들을 향해 외칠 수 있어야 한다. 이사야처럼... 그가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자로서, 사회의 귀족출신으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이 있었지만, 그것을 내려 놓고, 그가 속한 사회를 향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자로 쓰임받았던 것처럼, 그리고 그 끝에 톱으로 켜서 죽임을 당했던 것처럼, 약자들을 위해 싸우고, 행동하고, 가진자들을 향해 쓴소리를 퍼붓지 않는다면, 나 역시 하나님을 슬프시게 만드는 악한 자인 것이다.
사회적 약자들의 원망과 곡성 점점 높아지는 이 때에 내 한 목숨, 내 삶의 안위를 위해 그 소리에 귀를 닫는 것은 죄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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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0:31:00
새로운 분위기
어제, 사무실을 다시 배치했다.
창고 분위기가 나던 것을 연구실 분위기로 바꿨다. 가구와 모든 것을 새로 배치해서 완전히 새로운 공간이 되었다.
무엇보다 창문으로부터 불어오는 바깥 시원한 바람이 직접 나에게 오도록 해서 좋다. 그리고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면 바로 숲이 보이고 하늘이 보이는 것이 좋다.
공부 열심히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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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1:01:00
그리움...
문득... 어스틴에서 만났던 많은 사람들을 떠올린다.
한 사람... 한 사람... 한 사람...
내 삶을 풍요롭게하고 감사하게 만들어 줬던 고마운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
평생에 남을 내 추억의 커다란 일부는 바로 그들과 만들어 갔던 기억들이 아닐까?
모두가 사랑스럽고, 모두가 보고 싶다.
그 사랑하는 영혼들 중에 특히 한 사람이 많이 보고 싶고 생각난다.
맑고 깨끗한 가운데 유난히 상처가 많던 그 영혼...
순수한 그 마음에 세상의 풍파가 큰 생채기를 많이 냈지만, 그 순수함만은 결코 잃지 않았던 그 영혼...
비틀거리면서도 주님을 붙잡고, 결코 그 분을 부인하지 않았던 아름다운 영혼...
악에 둘러 싸임으로 그 자신도 악이 될 여지가 충분히 있었지만, 그 거대한 악 조차도 어떻게 할 수 없었던,그 중심 깊숙이 선함을 가지고 있던 영혼...
여러모로 성숙함에도 불구하고, 천진난만한 아이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던 영혼...
그를 생각할 때마다 너무나 미안한 마음이 내 마음을 가득가득 차고 넘친다. 도와주지 못하고, 품어주지 못하고 오히려 더 큰 상처만 주었기에...
생면 부지의 땅에서 홀로 하루 하루의 삶을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을 그를 생각한다.
주님의 은혜가 그와 늘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돌보심이 그와 늘 함께 하시기를...
그의 인생 끝날 때까지 주님이 그의 친구가 되어 주시기를...
주님으로 인해 그의 입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기를...
주님의 말씀이 그 영혼에 생수처럼 쏟아지기를...
정말 그렇게 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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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 한 사람... 한 사람...
내 삶을 풍요롭게하고 감사하게 만들어 줬던 고마운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
평생에 남을 내 추억의 커다란 일부는 바로 그들과 만들어 갔던 기억들이 아닐까?
모두가 사랑스럽고, 모두가 보고 싶다.
그 사랑하는 영혼들 중에 특히 한 사람이 많이 보고 싶고 생각난다.
맑고 깨끗한 가운데 유난히 상처가 많던 그 영혼...
순수한 그 마음에 세상의 풍파가 큰 생채기를 많이 냈지만, 그 순수함만은 결코 잃지 않았던 그 영혼...
비틀거리면서도 주님을 붙잡고, 결코 그 분을 부인하지 않았던 아름다운 영혼...
악에 둘러 싸임으로 그 자신도 악이 될 여지가 충분히 있었지만, 그 거대한 악 조차도 어떻게 할 수 없었던,그 중심 깊숙이 선함을 가지고 있던 영혼...
여러모로 성숙함에도 불구하고, 천진난만한 아이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던 영혼...
그를 생각할 때마다 너무나 미안한 마음이 내 마음을 가득가득 차고 넘친다. 도와주지 못하고, 품어주지 못하고 오히려 더 큰 상처만 주었기에...
생면 부지의 땅에서 홀로 하루 하루의 삶을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을 그를 생각한다.
주님의 은혜가 그와 늘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돌보심이 그와 늘 함께 하시기를...
그의 인생 끝날 때까지 주님이 그의 친구가 되어 주시기를...
주님으로 인해 그의 입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기를...
주님의 말씀이 그 영혼에 생수처럼 쏟아지기를...
정말 그렇게 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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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9:04:00
능력 없는 자의 비밀
능력이란 남이 할 수 없는 일을 해 내는 것과 남도 할 수 있는 일이지만 같은 일을 더 적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해내는 것 두 가지를 포함한다. 대단하고 큰 일은 고사하고 사소한 것 하나를 제대로 해내지 못해서 낑낑 거리며 힘들어하는 내 모습을 보면서 내 능력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인가를 새삼 깨닫는다. 아침부터 나와 서 밤늦게까지 집에 가지 못하고 하루 종일 사무실에 앉아서 일함에도 밤에 오피스를 나가면서 느끼는 것은 뭔가를 이루었다는 뿌듯함이 아니라, 하루 종일 한 것이 없다는 절망감이다.
흔히들 여자에게 외모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이 남자에게는 능력이라고들 말한다.(여자에게 능력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런 면에서 나는 남자로서 정말 보잘 것 없는 자인 것이다. 열심히 일하면 일 하는 만큼 뭔가를 얻고 이룩해 내는 개미보다도 못한 자가 바로 나라는 생각이 든다. 그럴 때 물밀듯이 밀려오는 것이 자괘감, 혹은 자기 모멸감이다. 그리고 그것을 뒤따라 오는 것은 절망이다.
하지만, 다행히 내 경우에는 자기 모멸감과 절망은 오래 머물러 있지 않는다. 그것은 결국 내 자신의 자존감이 내 능력이나 소유, 혹은 성취나 내 자신에게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것들은 1992년 어느 날 서울대 총장잔디 근처의 벤치에서 이미 던져 버렸다. 내 자존감은 내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있다. 그분이 내 자존심의 근거이다.
사실, 나는 내 능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길로 들어섰다. 다른 것은 잘 할 수 있지만, 공부만은 잘 할 자신이 없었던 나를 그 길로 부르신 것이 하나님이셨다. 그분의 부르심만을 좇아서 여기까지 왔다. 내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길로 들어 섰기 때문에, 내 능력으로는 매우 작은 것 하나도 이룰 수 없었다. 나는 그저 그 자리에 있었고, 주어진 환경 속에서 열심히 살았을 뿐이었다. 내 능력과 성취의 크나큰 간극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채우셨다. 그리고 그 성취를 내 대신 이뤄 주셨고, 그 성취를 마치 내가 이룬 성취인양 포장해 주셨다. 그것이 바로 내가 지금 여기까지 오게 된 이유였다.
내 능력에 대한 절망은 날마다, 매 순간마다 일어나는 것이라 하나도 새롭지 않다. 하지만 지금도 놀라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다. 지금쯤이면 적응이 될만도 한데, 그게 아니다. 그분의 역사와 능력은 늘 내 기대를 뛰어 넘는다. 그게... 참 재미있다. 경험해 본 사람만 아는 것이다. 비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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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여자에게 외모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이 남자에게는 능력이라고들 말한다.(여자에게 능력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런 면에서 나는 남자로서 정말 보잘 것 없는 자인 것이다. 열심히 일하면 일 하는 만큼 뭔가를 얻고 이룩해 내는 개미보다도 못한 자가 바로 나라는 생각이 든다. 그럴 때 물밀듯이 밀려오는 것이 자괘감, 혹은 자기 모멸감이다. 그리고 그것을 뒤따라 오는 것은 절망이다.
하지만, 다행히 내 경우에는 자기 모멸감과 절망은 오래 머물러 있지 않는다. 그것은 결국 내 자신의 자존감이 내 능력이나 소유, 혹은 성취나 내 자신에게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것들은 1992년 어느 날 서울대 총장잔디 근처의 벤치에서 이미 던져 버렸다. 내 자존감은 내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있다. 그분이 내 자존심의 근거이다.
사실, 나는 내 능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길로 들어섰다. 다른 것은 잘 할 수 있지만, 공부만은 잘 할 자신이 없었던 나를 그 길로 부르신 것이 하나님이셨다. 그분의 부르심만을 좇아서 여기까지 왔다. 내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길로 들어 섰기 때문에, 내 능력으로는 매우 작은 것 하나도 이룰 수 없었다. 나는 그저 그 자리에 있었고, 주어진 환경 속에서 열심히 살았을 뿐이었다. 내 능력과 성취의 크나큰 간극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채우셨다. 그리고 그 성취를 내 대신 이뤄 주셨고, 그 성취를 마치 내가 이룬 성취인양 포장해 주셨다. 그것이 바로 내가 지금 여기까지 오게 된 이유였다.
내 능력에 대한 절망은 날마다, 매 순간마다 일어나는 것이라 하나도 새롭지 않다. 하지만 지금도 놀라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다. 지금쯤이면 적응이 될만도 한데, 그게 아니다. 그분의 역사와 능력은 늘 내 기대를 뛰어 넘는다. 그게... 참 재미있다. 경험해 본 사람만 아는 것이다. 비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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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2:36:00
신광현선생님 1주기 추모식
오늘 2011년 7월에 작고하신 신광현선생님 추모식이 있었다. 80학번으로서 나보다 9년 선배이신 선생님. 한창 나이에 위암으로 운명을 달리하신 선생님을 기억하며 그분의 죽음을 언타까와하는 분들이 많이 모여 있는 것을 보면서 그분이 어떤 인생을 사셨는지 가늠할 수 있었다. 정승의 개가 죽으면 사람들이 몰려와도 정작 정승이 죽으면 아무도 오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분을 기억하는 자리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슬퍼하는 것은 그분의 삶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리라.
서울대에 교수로 처음 부임하셔서 개설하셨던 첫 전공과목인 중세영문학시간에 보여 주셨던 학자로서의 매력, 모든 여학생들의 선망의 대상이요 남학생들의 감탄의 대상이었던 그 옷맵시와 멋 그리고 훤칠한 키(그 당시 과 사무실에서 일하시던 결혼한 여직원분이 '그분을 볼 때마다 가슴떨려서 말 한 번 못 걸어 봤다'고 했었다.), 친형같은 푸근함으로 감싸 안으시던 그 따뜻한 마음, 티없는 소년같았던 해맑음, 그러면서도 자신을 과시하지 않는 겸손함, 압구정동이 집이고 교수로 부임하자마자 중형차를 타시던 부유한 집안의 배경을 결코 부인하지 않으셨지만 그 온 몸에서 느껴졌던 소탈하심. 그 모든 것이 주변 사람의 감탄의 대상이었고, 그로 인해 그분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그 모든 것 보다도 그분이 가졌던 학문과 세상을 향한 치열한 고민과 탐구, 그리고 인간을 향한 크신 사랑이 바로 모든 사람들이 그를 그리워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가 아닌가 싶다. 그분의 수업을 들었던 학생들은 이구동성으로 그분의 수업을 통해서 지식 뿐만 아니라 인간을 배우고 사랑받았다는 것을 고백한다. 그것이 학생들을 다른 차원의 삶으로 인도했던 것이다.
오늘 추모사에서 인문대 학장이신 배영수 선생님께서 하신 "여운"이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했다. 내가 남기고 싶어서 남기는 그것이 아니라, 내가 떠난 자리에 자연스럽게 남아 있는 여운. 그것은 어떤 것일까? 어떤 것이어야 할까?
그리고 사랑. 학생들에 대한 애정. 그것이 대학에서 가르치는 자로서 반드시 가져야 할 중요한 덕목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나에게는 쉽지 않은 참으로 큰 도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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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4:48:00
What Money Can't Buy: The Moral Limits of Markets by Michael Sandel
방금 Michael Sandel의 What Money Can't Buy: The Moral Limits of Markets를 다 읽었다. 올해 출판된 책으로 우리 나라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하버드대 철학과 교수의 책이다. 전공책들을 읽느라 너무 바빠서 도저히 틈이 안 났지만, 그래도 내가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주제를 다루는 책이라 전철을 오가며 틈틈이 읽어 오늘에야 읽기를 마친 것이다.
Sandel이 이 책에서 제기하고 있는 질문은 단순하면서도 상당히 새로운 것이다. 그것은 시장 메커니즘이 언제나, 그리고 어느 분야에나 최선의 시스템인가 하는 것이다. 사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특별히 후반에 갈수록 시장의 논리는 삶의 여러 분야에 파고 들었다. 심지어 "결혼시장"이라는 말이 전혀 거부감이 없이 사용될 정도로 거의 모든 분야에 시장 메커니즘은 표준으로 자리잡았다. Sandel은 이 책에서 그것이 바람직한가에 대해서 묻고 그 현상을 살펴보고 있다.
학자인 나로서는 Sandel이 보다 더 깊이 있고 치열하게 글을 쓰지 않고, 가볍고 쉽지만 깊이가 없는 책을 저작한 것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하지만, 스스로는 public philosopher로 규정하고 대중과의 소통을 중요시하는 학자인 것을 고려하면, 그의 선택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글을 쉽고 재미있게 씀으로써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그들로 하여금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에 관심을 가지고 더 깊이 생각하게 하는 것만으로도 큰 의의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Sandel이 던지는 질문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사실 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자본주의는 공산주의라는 경쟁상대가 있었고, 어느 시스템이 더 우월한가에 대해서 스스로를 입증해야했고, 자본주의는 공산주의(혹은 사회주의)라는 비교대상을 통해서 평가되었다. 하지만 구소련의 붕괴는 공산주의에 대한 자본주의의 최종적인 승리로 인정되었고, 그 이후 자본주의는 유일한 "진리"가 되었다. 자본주의는 항상 옳은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 가운데 자본주의를 움직이는 핵심 원리인 시장 메커니즘 역시 "진리"로서 인류가 가진 자원을 가장 효율적으로 배분하는 최고의 시스템으로 사람들의 마음 속에 각인되기 시작했다.
자본주의의 승리와 그 시스템에 대한 절대적 신뢰는 자본주의 국가 내에서 그 전에는 적용되지 않던 많은 영역으로 시장 메커니즘이 적용으로 이어졌다. Sandel은 공항이나 놀이공원 등에서 돈을 더내면 티켓을 사러 줄을 설 필요 없이 바로 들어갈 수 있게하는 제도, 시민권 판매, 몸무게를 줄이면 돈을 주는 인센티브 제도, 부자 자녀의 대학입학 허가, 돈으로 사는 친구관계, 선물의 현금화, 죽음의 상품화, 학교와 감옥까지 침투한 광고 등등 많은 구체적인 예를 들면서 70, 80년대 급증한 공공영역 혹은 개인영역에의 시장 메커니즘의 침투를 보여준다.
시장 메커니즘의 도입을 찬성하는 사람들은 예외없이 자원의 효율적인 분배, 즉 효율성의 극대화를 그 논리로 내세우지만, Sandel이 보여주는 것은 시장 메커니즘이 오히려 효율성을 떨어 뜨릴 뿐만 아니라, Civic virtue(혹은 civic spirit)을 퇴보하게 만들고, 도덕성을 떨어뜨림으로써 소기의 효과를 가져오지 못했다는 것을 차근차근 보여준다. 예를 들어 영국과 미국의 헌혈제도를 비교하면서 헌혈을 100% 자원으로 받는 영국의 현혈 비율이나 헌혈된 혈액의 질이 돈으로 인센티브를 주는 미국에 비해 훨씬 높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시장 메커니즘이 적용되는 곳보다 그렇지 않은 곳에서 더 많은 헌혈이 되고 있으며, 더 건강한 사람들이 헌혈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예들을 통해서 시장 메커니즘이 모든 경우에 만능이라는 생각은 허구에 불과함을 일깨운다.
더 나아가 시장 메커니즘에 맞지 않는 공공의 영역에 그 시스템을 적용시켰을 때, 비효율적일 뿐만 아니라 나중에 잘못을 깨닫고 다시 시장 메커니즘을 제거하려고 할 때, 원상태로 복구가 매우 힘든 것임을 보여줌으로써, 시장 만능주의가 얼마나 큰 폐해를 줄 수 있는지, 그리고 그 적용을 얼마나 신중하게 고려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런 깨달음을 바탕으로 그가 독자에게 호소하는 것은 보다 적극적인 참여와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Such deliberations touch, unavoidably, on competing conceptions of the good life. This is terrain on which we sometimes fear to tread. For fear of disagreement, we hesitate to bring our moral and spiritual convictions into the public square. But shrinking from these questions does not leave then undecided. It simply means that markets will decide them for us. This is the lesson of the last three decades. The era of market triumphalism has coincided with a time when public discourse has been largely empty of moral and spiritual substance. Our only hope of keeping markets in their place is to deliberate openly and publicly about the meaning of the goods and social practices we prize.
Sandel의 글을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거리는 경우도 많았지만, 아쉬운 부분도 많았다. 무엇보다 그는 가치, 도덕을 다루면서 왜 그것이 도덕적일 필요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는다. 글 전체적으로 그의 입장은 utilitarian의 입장이다. 최고의 효용성이 가장 최고의 가치가 되는 것이다. 물론 그가 진정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인지, 아니면 독자를 설득하기 위해 그런 입장을 취하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런 그도 결국은 moral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의 논조가 효용성으로만은 설명될 수 없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morality가 civic virtue의 중요한 기틀이 된다면, 그 부분을 더 깊이 다뤘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가 공격하고 있는 시장 메커니즘과 postmodernism의 논리가 어떻게 교묘하게 연결되어 있는지, 어떻게 상호작용을 하는데 서로 promotion하는지, 그리고 postmodernism이 그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moraliity를 상대화 할뿐만 아니라 그 상대화 작업을 통해서 무력하게 만드는지, 그리고 그 틈을 시장 메커니즘이 파고 들게 되었는지를 살폈어야 더 설득력있고, 대안을 제시하는 비판이 되었을 것이다.
또 아쉬운 것은 이 책의 주요 논점의 대상은 아니지만, 시장 메커니즘이 적용될 만한 곳이라고 하는 그런 영역에서 진정으로 그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가 공공영역에서 보는 그런 폐해가 그곳에서도 보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서 전혀 언급이 없다는 것이다. 이 블로그의 어딘가에서 자세하게 썼던 것처럼, 과도한 임금과 소득격차가 시장 메커니즘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고, 앞으로 그 차이가 더 벌어질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는 이 때에, 과연 시장 메커니즘에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 최선인가에 대해 큰 회의가 들 때가 많이 있다.
가장 아쉬운 부분은 그가 한 가지 중요한 factor를 애써 무시함으로써 논의를 복잡하게 끌고 갈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다. 그가 왜 하나님이라는 가장 중요한 요인을 애써 외면했는지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하지만, 그 요인을 배제함으로써 오히려 글의 설득력이 많이 떨어질 수 밖에 없고, 상대주의의 입장에서의 공격에 대항할 수 없는 논리를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앞이마에 회사 광고를 문신으로 새겨넣는 행위를 비판하는 근거는 그 몸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근거로 비판할 때 가장 강력한 논리가 설 수 있다. 하지만 그는 그 근거를 회피한 채, 다른 논리를 대려 하지만, 논리성이 매우 떨어지는, 그래서 저자의 개인적 의견에 불과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마치 천동설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수많은 복잡한 이론들을 개발해야 했던 것을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로 단순 명료하게 설명할 수 있었던 것처럼, 분명하고 명백한 근거를 애써 외면한 결과 이 글은 쓸데없이 여러 말로 설명해야하는, 그것도 설득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논리를 개발해야 했던 것이다.
아쉬운 부분이 분명히 많이 있는 글이지만, Sandel의 주장은 우리 모두가 귀기울여 들을 필요가 있는 중요한 점이라 생각하며 모든 사람들이 꼭 이 책을 읽어 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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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1:58:0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