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말씀

지난 얼마의 기간 동안 나에게 개인 묵상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말씀하시던 하나님께서 그 말씀으로 나를 준비시키신 뒤 주일 말씀을 통해서 확실하게 인증하셨다.

I love those who love me; And those who diligently seek me will find me. (잠 8:18)

열린교회 김남준 목사 주일설교 말씀

때로는 하나님께서 내 속속들이 너무 잘 알고 계시는 것이 피부에 느껴지며, 참 두려워질 때가 있다. 지난 주일, 바로 그런 경험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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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분


아침부터 밤까지 밖에 거의 나가지 않고 지내는 연구실...
하루 종일 혼자서 읽고 쓰고, 인터넷 서핑하고...

생명이라고는 이따금 들어오는 모기들과 파리들 뿐인 연구실에 화분을 하나 갖다 놓았다.
연구실이 새로지은 건물에 있어서 새집에서 나는 냄새가 나는데, 환기도 한계가 있어서 그 냄새를 없애는 데 도움이 될까해서 가져다 놓았다.
그런데, 나 외에 한 생명이 나와 함께 있다는 것이 참... 너무 좋다. 말도 없고, 조용히 그저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생명이지만,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나에게 위안이 되고, 친구와 같은 느낌이 든다.
내 방에서 안 좋은 냄새만 흡수하지 말고, 햇볕도 많이 받아 건강하게 오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창가에 두었다.

감사한 동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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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artlessness...

It's not knowledge of God that I need but following Him.
It's my heart... It's my heart... that God is seeking not the heartless religious behaviors and offerings.

 최근 내 삶을 보면서 불현듯이 깨닫게 되는 것. 그것은 하나님께 전적으로 마음을 드리지 않는다는 것.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적다는 것이다.
행위는 많이 있지만, 그 안에 진정한 마음, 간절한 사랑이 담겨있지 않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그런 제사를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 있을까? 어떤 분이 말한 대로 그것은 "painted lie"에 불과한데, 그것을 하나님께 바칠 수 있을까?

어느새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식은 것이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교회 안에서 믿음의 동역자들과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있게 나누는 나눔이 없다는 것이 가장 치명적인 영향인 것 같다.

동역자가 필요하다. 공동체가 필요하다. 공동체가 없이 살아 온 지난 일년의 결과는 바로 heartlessness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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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델리 이탈리아 감독...

오늘 새벽 3시 30분... 눈을 비비고 일어나 TV 앞에 앉았다. 유로 2012 결승전을 보기 위해서...
그 동안 바빠서 단 한 게임도 못봤는데,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결승은 도저히 그냥 넘어 갈 수 없어서, 좀 무리했다.
게임은 스페인의 가공할 능력이 유감없이 발휘되는 가운데, 수비축구의 대명사인 이탈리아가 4대0으로 졌다. 스페인은 막강했고, 빈틈이 없는 반면, 이탈리아는 너무 운이 없었다. 스페인보다 하루를 덜 쉰 덕에 많이 피로해 있었고, 선수들의 부상은 치명적이었다. 절대 4대0으로 질 팀이 아닌데, 그런 결과가 나왔다. 스페인의 예술적인 축구를 보면서 한 편으로는 즐겼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이탈리아가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가슴이 아팠다.

경기가 끝난 후 그라운드의 유일한 흑인 선수였던 "악동"으로 유명한, 준결승의 영웅 이탈리아의 발로텔리는 자신의 화난 감정을 잘 다스리지 못하는 것이 역력했다. 그런 그에게 이탈리아 감독인 프란델리 감독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상대에게 너희가 더 잘했다고 말하며 악수를 청해라. 패배를 인정할 줄 알아야 성장한다."


참 멋있는 감독의 멋있는 조언이다. 패배와 실수는 우리 삶에서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것들로부터 성장할 수도 있고 그것으로 인해 인생이 무너질 수 있는 상황에서 그것을 어떻게 활용하는가 하는 우리의 자세일 것이다. 프란델리 감독은 발로텔리에게 우승 이상의 중요한 인생의 교훈을 가르친 것이다.
누구나 승리를 원한다. 성공을 원한다. 하지만, 패배할 때, 그것을 인정하고, 그 패배를 딛고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을 배우는 것이 바로 그 성공의 밑거름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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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감사...

주일인 어제는 내 생일이었다.

음력으로 생일을 쇠기 때문에, 한 해가 시작되면서부터 아이들이 내 생일을 물어본다.
"When is your birthday this year?"
"I don't know! I didn't check."
"How come you don't even know your own birthday?"

하지만 이내 아이들은 내 생일을 알아 내고, 마크한다. 생일 한달 전쯤부터, 아이들에 계속 물어오기 시작한다.
"What do you want for your birthday?"
"I don't know."
"What is it? Please think about it."
"Yes..."

생일이 가까와 질수록 질문은 더 잦아진다.
사실... 나이가 들어가는 나에게 생일이 무슨 의미가 있으랴? 그저 아이들이 바르고 건강하게 커주는 것이 가장 큰 선물인 것을...

하연이와 예연이가 점점 더 흥분하기 시작한다. 낌새로봐서 생일을 위해 많은 것을 준비하는 것 같다. 특히 예연이가 자주 선물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때로는 "천기"를 누설하기도 한다. 아이들은... 아빠 생일이 재미 있는가보다...

어제, 주일 아침.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아이들이 나에게 뽀뽀하며 생일축하한다고 여러번 반복해서 말해준다. 예배를 마치고 돌아와서 선물 공개시간... 아내와 아이들 두 명이서 준비한 선물은 갯수를 셀 수가 없다. 얼마나 많이 준비했는지... 특히 아이들은 아빠 선물을 사고 또 사도 뭔가 부족한 듯 하여 계속 선물 갯수를 추가했다. 볼펜, 포스트잇부터 시작해서, 노트, 자동차 방향제, 건전지, 사탕, 애프터 쉐이브 로션, 독서대 등등등등.... 하나하나 선물 포장한 정성이 참으로 기특하고 감사하다.
그리고 준비하 파워포인트 프리젠테이션... 아빠 생일을 축하하고 감사하는 프리젠테이션을 보면서, 컴퓨터에 어느 정도 자신 있는 나마저도 그 정성과 디자인에 놀란다..

아내와 아이들이 공동으로 만든 카드(거의 예연이의 작품), 그리고 하연이의 놀라운 카드(정말 멋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예연이의 입이 딱 벌어지게 만든 생일 축하카드... 몇 주일에 걸쳐서 정성스럽게 만들고 또 만든 그 사랑이 듬뿍 담긴 카드들을 보면서 감격한다.

생일날, "What do yo want for your birthday?"라고 물어봐 주는 내 딸들이 있다는 것, 아빠의 생일을 기대하며 기말시험으로 바쁜 와중에서도 정성을 기울여 몇 주 동안이나 카드를 만드는 그런 아이들이 내게 있다는 것, 아침에 일어나 뽀뽀하며 "Happy birthday, Daddy!"라고 말해주는 아이들이 있다는 것, 그리고 케익과 진수성찬을 정성스럽게 차려준 아내가 있다는 것...
참... 나는 복받은 사람이다.

시인인 예연이가 내 생일카드에 쓴 시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읽으면서 눈물이 났다.)

For a dad
You're not so bad
Always fun
And helps me a ton
You work for our family,
That's why we live happily.
I'll always try to follow your way,
I'll never forget
To wish you a happy birth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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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45편


고백이 참... 아름답다...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내가 날마다 주를 송축하며 영영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여호와는 광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이라! 그의 광대하심을 측량치 못하리로다!
대대로 주의 행사를 크게 칭송하며 주의 능한 일을 선포하리로다!
주의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위엄과 주의 기사를 나는 묵상하리이다!
사람들은 주의 두려운 일의 세력을 말할 것이요, 나도 주의 광대하심을 선포하리이다!
저희가 주의 크신 은혜를 기념하여 말하며 주의 의를 노래하리이다!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자비하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도다!
여호와께서는 만유를 선대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
여호와여! 주의 지으신 모든 것이 주께 감사하며 주의 성도가 주를 송축하리이다!
저희가 주의 나라의 영광을 말하며, 주의 능을 일러서
주의 능하신 일과 주의 나라의 위엄의 영광을 인생에게 알게 하리이다!
주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니 주의 통치는 대대에 이르리이다!
여호와께서는 모든 넘어지는 자를 붙드시며 비굴한 자를 일으키시는도다!
중생의 눈이 주를 앙망하오니, 주는 때를 따라 저희에게 식물을 주시며
손을 펴사 모든 생물의 소원을 만족케 하시나이다!
여호와께서는 그 모든 행위에 의로우시며 그 모든 행사에 은혜로우시도다!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
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의 소원을 이루시며 또 저희 부르짖음을 들으사 구원하시리로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는 다 보호하시고 악인은 다 멸하시리로다!
내 입이 여호와의 영예를 말하며, 모든 육체가 그의 성호를 영영히 송축할찌로다!"(시 145)

아멘! 아멘! 아멘!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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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알아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관대 저를 생각하시나이까? 사람은 헛것 같고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으니이다!"(시 144:3-4)


시편 기자의 이 탄식이 곁들여진 감탄은 하나님을 아는 자들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흘러 나올 수 있는 고백이다. 그것은 자신의 보잘 것 없음을 잘 아는 지식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하나님의 크심과 위대하심에 대한 지식에 더 그 기반을 두고 있다.
나는 보잘 것 없는 자이고, 흉악한 자이다. 내가 어떤 자인지를 더 분명하게 아는 것은 믿음에 큰 도움이 된다. 하지만, 그 지식에는 한계가 있다. 그것은 자신의 가치가 0를 향해 한 없이 수렴해 가는 것을 실제로 느끼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시편 기자의 진정한 고백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그 경험에서 나온다. 그분의 가치, 그분의 크기가 무한대로 수렴해 가는 것을 진정으로 깨닫고 경험하게 될 때, 그 분이 나를 "생각하시고" "알아주시는" 것이 얼마나 있을 수 없는 일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사실,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없어지고 모든 지식이 폐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시작되어도 결코 그치지 않는 것은, 아니 천국에서도 영원히 지속될 우리의 "일"은 위대하신 하나님을 더 알아가는 일이다. 그일은 영원을 지속한다 하더라도 결코 끝이 날 수 없는 것이다. 그만큼 하나님은 크고 위대하시기 때문이다.
사실 시편 144편은 위대하신 하나님에 대한 고백으로 시작한다. "나의 반석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로 시작한 시편은 "여호와는 나의 인자(lovingkindness)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의 산성이시요, 나를 건지는 자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피난처시요, 내 백성을 내게 복종케 하시는 자"라고 고백하고 있다. 그것은 그의 삶 가운데서 경험한 위대하신 하나님에 대한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고백인 것이다.
위대하신 하나님을 만난 모든 인간은, 그 앞에서 자신의 보잘 것 없음을 본다. 그리고 그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다. 마치 베드로가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할 수 밖에 없었던 것처럼...
그런 성스러운 조우(holy encountering)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핵심인 것이다. 그런 조우가 있는 자들은 하나님 앞에 고개를 뻣뻣이 들고 있을 수가 없다. 그분 앞에 늘 엎드리며, 그분의 은혜와 긍휼만을 구할 뿐이다. 그분께 자신의 욕구와 욕망을 내세우지 않고, 그분의 뜻이 이 땅 가운데 이루어지는 주의 기도를 자신의 기도로 삼는 것이다.
그런 자들은 위대하신 하나님의 엄청난 능력을 경험하게 된다. 대적을 흩으시며 파하시는 장수이신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고, 환란 가운데서 나를 구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런 자들이 바로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인 것이다. 그리고 시편 기자는 목소리 높여 외친다.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하나님을 아는 진정한 지식이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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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내 기도를 주님께 드리는 분향으로 받아 주시고, 손을 위로 들고서 드리는 기도는 저녁 제물로 받아 주십시오. 주님, 내 입술 언저리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 앞에는 문지기를 세워 주십시오. 내 마음이 악한 일에 기울어지지 않게 해주십시오. 악한 일을 하는 자들과 어울려서, 악한 일을 하지 않게 도와주십시오. 그들의 진수성찬을 먹지 않게 해주십시오. 의인이 사랑의 매로 나를 쳐서, 나를 꾸짖게 해주시고 악인들에게 대접을 받는 일이 없게 해주십시오. 나는 언제나 그들의 악행을 고발하는 기도를 드리겠습니다." (시 141:2-5, 표준새번역)

내 삶이 기도가 되어 하나님께서 분향과 제물로 열납하실 수 있는 그런 삶이 된다면...
주님께서 악한 입술을 제어하시고, 친히 문지기가 되어 주시는 그런 복을 누린다면...
악을 향해 끊임없이 반응하고 이끌리는 내 마음을 주님께서 지켜주신다면...
악한 세상 가운데서 악인들 가운데 살더라도 그들과 함께 악을 도모하지 않도록 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입는다면...
부정의 축재에 참여하여 그들과 진수성찬을 먹기보다 깨끗함으로 가난함 굶주림을 오히려 즐거워 할 수 있다면...
동역자가 있어 나를 의의 매로 영적 혼수상태에서 깨어나게 하며, 부지불식간이나 의식적으로 짓는 죄에서 돌이키게 하기 위해 내 마음을 찢는 꾸짖음을 듣는 크나큰 복을 누린다면...
죄악과 부정을 일삼는 자들에게 대접할 가치가 없는 자, 대접이 통하지 않는 자로 여겨진다면...
세상의 악을 보면서 그들의 악에 분노하면서 정작 그 악을 내 안에 내면화함으로써 그들과 동류가 되는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면...

정말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정작 내 삶은...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너무나 더럽고 역겨우며, (마음의) 입술에는 언제나 독이 가득하고, (마음으로는) 세상의 악인과 함께 악을 도모하며, 가난을 두려워하고 잘먹과 잘 살고자 하는 욕구가 마음 가운데서 치솟고, 동역자들의 사랑의 매와 꾸짖음에 분노하며, 죄인들과 악인들에게 인정받는 자가 되기를 희망하고, 남의 악을 꾸짖고 분노하면서 정작 내가 그들과 똑같은 악을 범하는.... 천하에 흉악한 죄인 중의 괴수가 아닌가?


다윗의 기도... 감히 내가 하나님께 드릴 수 없는 기도이지만, 이런 흉악한 죄인을 위해 이 땅에 오시고, 그 죄를 감당하시고 십자가에 나 대신 죽으신 내 주인이고 내 하나님이신 예수님, 그분 때문에 (덕분에) 용기를 내어 이 벌레만도 못한 나를 그렇게 만들어 달라고 감히 기도한다.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 그분의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이 나를 변화시키고 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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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학개론



지난 주에 구청에서 공짜로 영화 한 편을 봤다. 약 14-5년만에 영화관 같은 곳에서 본 첫 영화...
<<건축학개론>>

비록 남성의 시각에서 그려진, 남성의 첫사랑의 판타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영화였지만, 첫사랑에 관한 아름다운 스토리와 상징과 절제가 절묘하게 이루어진 참 좋은 영화였다. 이 영화에 대해서 하고 싶은 얘기는 많지만 나도 절제하련다.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사람들은 첫사랑을 떠올리며 가슴이 먹먹함을 경험한다고 하는데, 나는 왜 가슴이 먹먹했을까? 첫사랑과 결혼해서 함께 살면서 매일 보고 있는데...
내 생각에 그 먹먹함이란, 단순히 첫사랑의 기억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90년대 초반을 대학생으로 살았던 사람으로서 느끼는 노스텔지어... 영화의 세세한 소품에 배여있는 90년대 초반의 분위기에 지극히 공감하는 사람으로서 느끼는 "그 시절"에 대한 그리움, 그 젊은 시절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그 시절에 영화의 주인공들처럼 철없고, 순수하고, 서툴렀던 자신의 지나간 과거의 모습에 대한 향수. 그것이 바로 그 "먹먹함"의 원인이리라.

영화의 주제곡인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이 아직도 내 귓가를 맴돈다...

'나도... 그런 시절이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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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n why worry?

딸내미가 이메일로 보내준 그림..


가장 중요한 것...

최근에 트위터에서 "하나님을 소유하고 다른 모든 것을 소유한 사람과 하나님을 소유하고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없다."라고 C. S. 루이스가 말했다는 것을 읽었다.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말이었다. 하나님이 전부이고, 그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피부에 와 닿게 표현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소유한 주님. 주님의 소유가 된 나.
그 가치가 얼마나 큰 것인지, 나는 자주 잊는다. 세상이 커보이고, 내가 가진 주님은 작아 보인다.
세상을 따르는 것이 더 멋있어 보이고, 거기에 생명이 있어보인다. 반면 주님은 내 관심 밖으로 사라져 간다.
그것이 바로 내 안에 아직도 남아 있는 뿌리깊은 죄성의 적나라한 모습이다. 주님의 가치를 축소시키고, 내 일상의 밖으로 밀어내려는 경향...

루이스의 한 마디는 나로 하여금 주님의 위대하심, 모든 것 되심을 다시 한 번 스스로 깊이 생각하게 한다.
그렇다. 주님이 전부이다. 그분을 소유하고, 그분의 소유가 된다는 것이 가장, 그리고 유일하게 중요한 일이다.
그리고 그분 안에서 흔들림이 없이 그분만 바라보고, 그분의 크신 능력을 믿고 잠잠하게 있는 것이 이 세상을 진정으로 평안하게 사는 방법이다. 그분 바깥의 세상에서 풍랑이 일건, 허연 이를 드러내고 삼킬 듯이 나에게 다가오건 상관 없이...

주님 때문에... 참...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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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생각 하나...

무신론자가 되기에 자신은 너무 믿음이 부족하다고 말하는 Ravi Zacharias...
그의 말에 100% 동감한다.

무신론자가 된다는 것은 수 많은 질문들에 대해서 덮어두고 넘어간다는 것이고, 그러는 가운데 생을 유지하는 것은 가히 엄청난 믿음을 필요로한다.

나라는 존재가 어디에서 왔는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내 인생의 의미는 무엇이고 어디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하는가?
선과 악,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 등의 "가치"는 어디에 그 근원을 두어야 하는가? 왜 어떤 것을 옳고 어떤 것을 옳지 않은가?
죽음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죽음 이후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인간이 짐승보다, 혹은 아메바나 바이러스나 해충보다 더 고귀하다는 것은 어디에 근거를 둔 것인가?

등등등...

수 많은 질문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거나 회피할 수 밖에 없는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큰 믿음을 수반하는 것이다.

아무리 곰곰히 생각해봐도, 아무리 내 자신에게 정직하게 되물어봐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는 가운데 그에게서 모든 문제들의 확실한 답을 찾는 것이 훨씬 믿음이 덜 필요한 가장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선택이다.

니체 이후 신을 제거한 세상은, 하나님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못하는 그 세상은, 의미를 찾지 못한 채, 표류하는 난파선과 같다. 지금 세상 돌아가는 모양이 딱 그것이다.
세상은 나에게 믿는 자라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세상이 더 큰 믿음을 강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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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력"이란? (이영표 선수 인터뷰 기사 중에서)

이영표 선수가 인터뷰에서 밝힌 축구선수의 정신력에 대한 정의이다. 깊이 새겨들을 만하다.

"자신보다 강한 자 앞에 섰을 때나 혹은 반드시 이겨야 하는 경기를 앞두고 밀려오는 두려움을 스스로 이겨낼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약한 상대를 쉽게 생각하지 않는 것, 경기장 안에서 자신의 감정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 또 졌을 때 빗발치는 여론의 비난을 묵묵히 이겨내는 것, 이겼을 때 쏟아지는 칭찬을 가려서 들을 줄 아는 것도 모두 멘탈에 속한다. 심지어 경기장 밖에서의 생활이 곧 경기장 안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아는 것도 멘탈이다. 그렇기에 멘탈은 경기 당일 날 "한번 해보자!" 라고 외치는 것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가장 강력한 멘탈은 훈련장에서, 그리고 우리의 일상에서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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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A Holy Nation" (레위기 10장)

오스틴에 있는 High Pointe Baptist Church의 Juan Sanchez 목사님의 설교

거룩함, 순종, 참된 그리스도인의 지표에 대해서 참으로 정리가 잘 되어있는 설교말씀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강력히 추천한다. 약간 길지만 꼭 들어 보시길...

http://www.highpointeaustin.org/archives/sermons/a-holy-nation-leviticus-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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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식

과 친구들의 졸업식.
작년 5월에 졸업식 한 이후에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들이 모두 모였다. 나만 빼고... 흑.

(오른쪽 맨 끝의 미모의 여자는 우리과 교수. 젊은 나이에 정교수가 된 매우 뛰어난 학자요 강사.)


잡생각...

때로는 하나님께서 나만 너무 편애하시는 것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질 때가 있다.
내 모든 일정을 미리 알고 준비해 놓으시고, 감당할 만하게, 하지만, 나에게 최선이 되도록 미리 준비하시는 어머니 같은 하나님.
내가 미래를 모두 알고, 또한 모든 것에 대해 전지한 능력이 있다면, 꼭 그렇게 했을 법하게 하나하나 준비해 놓으시는 하나님을 보면서 그렇게 느낀다.
그런 하나님이니까 맡길 만 하다. 신뢰가 간다. 당장 내일 일을 전혀 모른다 하더라도, 평안 가운데서 오늘을 살 수가 있다.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특권 아닌가?
세상에서 누가 그런 삶의 묘미를 알 것인가?

4시부터 시작될 강연을 위해 연구실을 나서기 10분 전...

준비 상태와 상관 없이 그저 감사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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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음에 감사하며...

토요일 아침.
학회 발표를 앞둔 오전...
조용히 연구실에 앉아 하나님께 감사한다.
살아있음에 대해서... 그것이 참 큰 감사제목이 됨을 지난 주와 이번 주, 폭풍같은 스케줄 속에서 극한을 향해 치닫는 삶을 사는 가운데, 깨달았다.
숨쉬는 것, 움직이는 것, 그리고 주어진 일이 있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어제가 518. 학생들과 518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다. 예전에는 518 때가 되면 대학가는 늘 들썩였다. 하지만 너무나 조용한 캠퍼스, 그저 다른 날에 비해 전혀 특이할 것이 없는 날인 것처럼 살아가는 대학생들을 일깨우고 싶었다.
"역사를 망각하면, 그 역사는 다시 되풀이된다"는 것을 화두고 시작한 518의 내 개인적인 경험들.
초등학교 5학년 때 광주의 한 가운데서, 도청에서 걸어서 15분 거리에 살던 내가 직접 경험한 그 끔찍한 비극, 하지만, 그 안에서 피어나던 민주화에 대한 열망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어제 트위터에서 어떤 한 사람은 "광주사태"는 사회 하층민에 있던 빨갱이들의 반역행위이고, 따라서 그들을 처단하고 진압한 것은 지극히 정당한 정부의 조치였다고 역설하는 것을 들었다. 그가 과연 광주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그렇게 주장하는지... 그 글을 읽으면서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무식하면 용감하고, 과격해질 수 있다.

그 당시 "민중"들은 광주 시민 모두였다. 못 사는 사람들이 일으킨 반란이 아니었다. 오해려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했다. 주로 중간계층에 있는 사람들이 주축을 이뤘지만 거의 모든 광주 시민들이 참여한 범시민적 운동이었다.
원하는 것은 단하나. 민주화. 민주적인 정부를 세우고, 민주적으로 대통령을 국민들이 직접 뽑는 것을 원했다.
광주시민들은 항거하는 와중에도 북한의 선동을 매우 경계했다. 우리 동네에서 총을 들고 정부군에 대해 항전에 참여했던 대학생들, 아저씨들은 간첩으로 보이는 사람, 북한을 찬양하고 선동하는 사람을 붙압아 경찰(혹은 정부군)에 넘겼다고 자랑했다. 그러면서 북한 간첩은 설 땅이 없음을 분명히 했었다. 그 "무용담"을 전해들은 동네 주민들은 모두가 잘 했다고 칭찬했다. 우리 모두는 반공교육을 철저하게 받는 박정희 세대였다. 그런 삶들을 종북 빨갱이로 모는 것을 보면서 참으로 어처구니 없다. 무식하다는 말 밖에는 할 말이 없다.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았지만, 설사 광주 시민들이 빨간물에 든 사람들이라고 치자. 그렇다고 그렇게 학살을 자행하는 것이 맞는가? 임신부의 배를 가르고, 처녀의 가슴을 도려내는(내 어머니께서 직접 그 시신을 보셨다.) 그 악한 행위가 정당화되는가?

내가 오늘을 살아갈 권리가 있다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 모든 인간도 동일하게 오늘을 살아갈 권리가 있는 것이다. 그들이 아무리 사상적으로 내 반대편 극단에 있다 하더라도 그들에게 주어진 생명은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것이다. 인간이 함부로 할 수 없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인 것이다.

오늘, 내 한 목숨 살아 있음에 감사하면서, 518 때 죽어간 영혼들을 추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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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전경

학교 내 방에서 보이는 전경...
아침의 신선한 공기가 오랫만에 찾아온 여유를 더 상쾌하게 한다.

스승의 날

스승의 날인 어제...

늘 그렇듯, 스승의 날을 맞아서 스승님들을 생각했다. 그리고 그분들께 어떻게 감사의 마음을 전할까 고민했다.

그리고 원고 마감 때문에 정신없이 논문을 쓰다가 시간이 되서 수업에 들어갔다. 영어교육과 대학원 수업.
들어가자마자 깜짝 놀랐다. 풍선 장식, 음료수, 케익(그것도 세 개씩이나), 과자, 과일...
아직 선생의 자리에 있는 것이 어색해서인지 전혀 생각을 못하고 갔다가 학생들이 준비한 것들을 보고서야 실감이 났다.

'나도 선생이구나...'

그리고 나서 선생으로서의 내 자신을 돌아봤다.
그런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는 자인가?
내가 학생들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나?
내 학생들에게 주고 싶은 최고의, 최선의 것을 줬나?
그들의 인생에 도움이 되는 역할을 했나?

그런 생각을 하고 나서야, 스승의 날이 선생의 자리에 있는 나에게 두려운 날로 다가왔다.
내 스스로를 진심으로 돌아보는, 그 가운데 옷깃을 여미는 그런 시간이었다.

부끄럽지 않은 선생, 학자가 되고 싶다. 그저 열심히만 하는 자가 아닌, 나로 인해서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고, 인생에 중요한 뭔가를 얻어가는 그런 선생이 되고 싶다.

어제 정성껏 많은 것을 준비해 준 학생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조국..(통합진보당 사태를 바라보며)

조국...
내 나라. 내 어머니의 나라.

조국이라는 이 단어에는 내가 가장 미워하는 것까지 포함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자주 잊는다.
내가 싫어하는 정치인들, 기회주의자들
내가 싫어하는 부정과 비리
내가 싫어하는 이기주의
내가 싫어하는 교육제도
내가 싫어하는 사소한 규칙위반
내가 싫어하는 아귀다툼
내가 싫어하는 착취적인 자본가와 자본주의의 부정적인 영향들
내가 싫어하는 부패한 종교인들
내가 싫어하는 무지몽매한 유권자들
내가 싫어하는 전두환, 518의 악몽
내가 싫어하는 지역주의
내가 싫어하는 학벌중심, 집단 이기주의
등등등등...

이 모든 것들을 "조국"이라는 한 단어가 감싸고 있다는 것.
내가 조국을 사랑한다면, 비록 싸워야 하는 대상이라 할지라도, 아직은 그 조국의 일부라는 것. 따라서 그것까지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나는 참 자주 잊는다.

그래서 내가 싫어하는 이런 무리들, 이런 행태들을 일거에 없애버리고 싶은 마음,
그리고 그런 자들과 그런 행태들이 존재하는 한 조국 자체를 거부하고 싶은 욕구가 내 안에서 움터오른다.

아니다.
그건 아니다.
조국을 사랑한다는 것은, 있는 그 조국이 담고 있는 모든 아픔을 함께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 모순을 아파하지만, 결코 도외시하지 않고 같이 아파하며, 보다 더 나은 내 조국을 위해 자리를 지키며 때로는 싸우고, 때로는 묵묵히 내 일을 감당해 나가는 것이다.

다른 나라에 비해 너무나 부족한 것이 많은 못난 조국이지만, 그래도 내 아버지 어머니의 나라이며, 내 조상들의 나라이며, 내 아이들이 살아가야할 나라이다.

내 조국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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