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 22

(2006.03.17. 작성)

아빠가 선물..

며칠 전에 아침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 전날은 전에 하연이 생일 선물 받은 것들 중 마음에 들지 않는 것들을 환불하고 대신 이것 저것을 사와서 그 선물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었다.
그 때 예연이가 한 말...

"아빠, 아빠가 예연이 선물이예요!"

(흐뭇한 아빠...)

아빠가 기뻐하는 모습을 본 하연.. 뒤질새라 이제는 엄마까지 끌어들이는 정치적인 하연이...

"아빠, 하연이는 아빠엄마가 하연이 선물이예요!"

한참 후...

밥을 먼저 먹고 집을 나서기 위해 밥을 먹고 있는 예연이에게 늘 하듯이 뽀뽀를 했다. 아빠가 뽀뽀하면 늘 그 뒤에 자기 입술을 손으로 닦던 예연이.. 이번에는 좀 다르다..
손을 내밀어 아빠 입술을 닦아 준다. 밥을 먹는 자신이 미안했는지...

또 한 번 감동...

아이들과 함께하는 것... 그것은 감동의 연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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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Quote...

"Who knows when it happens, but it happens. Suddenly you realize that you're switching from saying 'Hi' to saying 'Bye.' And it's a full-time job: death. You really have to wrench your head around to look in the other direction, because death's so apparent now, and it wasn't apparent before. You were intellectually persuaded that you were going to die, but it wasn't a reality." - Martin Am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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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족하는 마음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 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 앞과 본디오 빌라도를 향하여 선한 증거로 증거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내가 너를 명하노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나타나실 때까지 점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딤전 6:6-12)


공자의 제자 중 안회는 지극히 가난했지만, 학문과 덕행을 중하게 여겨 그 가난 가운데서도 불평하지 않고 오히려 즐거워 했다고 한다. 거기서 안빈락도(安貧樂道)라는 고사성어가 나왔다. 가난하지만 편안함을 유지하고, 도를 즐거워한다는 말... 옛날 선비들이 추구하던 하나의 가치였던 것같다.

디모데전서에도 비슷한 말씀이 나온다.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안빈락도에 불가의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의 사상을 곁들인 듯한 이 말씀은 사실 근본적으로 다르다. 공자 사상과 불교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자신 안의 욕심을 비우는 것에 초점이 있고, 그것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것에 주안점이 있는 반면, 성경의 말씀은 자신을 비우는 것이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며, 비우는 것이 아니라 채우는 것에 초점이 있기 때문이다.


자족하는 마음은, 결국 세상에 대한 욕심이 없는 마음이다. 세상에 대한 욕심은 돈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표되고 있다. 돈 그 자체가 악은 아니지만, 돈을 사랑하는 것이 악이며 만악의 뿌리가 된다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돈을 사랑하는 마음...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을 향하는 마음... 성경 말씀에 의하면 그것은 우리에게 평안과 자족하는 마음을 빼앗는다. 그리고 그것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것으로 인해서 믿음의 사람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돈을 사랑하는 마음, 세상을 향하는 마음... 그것은 해악을 가져다 준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이 쉽게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안회가 가난 가운데서도 평안했다고 하지만, 그 안에 진정 평안이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지식을 사랑하고 도를 사랑하는 가운데 바르게 살고자하는 그 마음과 열정이 있었지만, 그것이 그로하여금 진정으로 구원을 가져다 주었을지...


성경의 자족하는 마음, 세상과 돈을 사랑하지 않는 마음은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로 가득 채울 때만 가능하다. 그냥 비우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가득 차 있기 때문에 더 이상 다른 것으로 채울 수 없고, 필요도 없는 것이 성경의 자족이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 한 분으로 완전히 만족하기 때문에... 더 이상 다른 것이 필요가 없기 때문에... 가장 고귀하고 소중한 것을 이미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른 어떤 것에도 내 눈길을 돌릴 필요가 없기 때문에 세상에 마음을 두지 않고, 돈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것...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나고 경험한 자들은 자신의 삶에 자연스럽게 자족하는 마음이 자라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자신의 구체적인 삶이 경건하고 거룩한 모습이 되어 가는 것을 발견한다. 그것은 수양이나 도를 닦아서 되는 것이 아니다. 자연스럽게, 저절로 되는 것이다. 애써 힘쓰는 것이 아니라,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그렇게 되어 있는 것... 그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이다.

그분으로 가득찬 삶... 오늘도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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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강의

오늘 미국에 온지 거의 8년 만에 처음으로 강의를 했습니다.
미국에서 유학하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당연히 하는 강의인데... 저는 이제야 했네요...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학생들에게는 TA 자체를 준 적이 없는 학과... 그리고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사람을 강의하는 자리로 내세워 본적이 없는 과에서 공부하다 보니 참 늦어졌습니다.

저희 과에서 두 명밖에 없는 외국인, 그리고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유일한 학생으로서 과의 최근 역사상 처음으로 외국인으로서 강의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오늘 아침 1시간 15분 동안 19세기 미국의 industrialization과정을 설명하며 회사에서의 manager들의 출현과 그들의 중요성에 대해서 강의했습니다. 약 100명의 미국 학생들의 관심을 온 몸에 받으며 강의하는 내내, 매우 평안했고, 좋았습니다. 강의를 즐겼고, 이 학생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것을 마음 껏 전달해 주었습니다. 그들이 짧은 이 강의를 통해서 뭔가 도움이 되는 것을 하나라도 더 얻어 갔으면 하는 마음에 준비한 강의를 진행 했습니다.
영어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순간이나, 내용을 까먹어서, 혹은 강의 슬라이드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순간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냥 물 흐르듯 흘러갔습니다.

강의가 끝나고 나서 학생이 "Great lecture!"라고 내게 말 했을 때, 참 감사했습니다.

오늘 아침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것을 확신했고, 내 준비의 여부에 상관 없이 주님이 함께 하신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평안을 유지하고 기뻐할 수 있음을 보았고, 주님께 기도하기를 강의가 끝나고 나서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 기도가 응답되었음을 봅니다.

강의를 하면서... 거의 3년 반 동안 매주 토요일 전하는 말씀.... 이제는 익숙해 져서 쉽게 할 수 있을 것 같은 그 설교보다 생전 처음으로 하는 이번 강의가 훨씬 쉽고 편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말씀을 준비할 때는 엄청난 긴장감과 기도하는 마음, 그분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는 부담감, 그분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해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에 말씀을 들고 서는 그 순간까지 얼마나 힘든지 알 수가 없습니다. 말씀을 전하고 난 뒤에는 몸이 거의 탈진 상태이며 쉬고 싶다는 생각 밖에는 들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강의는 그것에 비하면 너무나 쉬운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결코 쉬워질 수 없는 것인지를 다시 한 번 깨닫습니다. 그것은 영혼에 관한 것이며, 생명이 달린 문제이며, 나의 주권자 대신 절대자 하나님의 사자로 서는 것이기 때문이겠지요...

어쨋든 생애 처음으로 (1) 대학에서 (2) 영어로 (3) 미국인들 앞에서 강의를 한 오늘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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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면서도 반복적으로 짓는 죄 한 가지...

내 신앙 인생에 있어서 주기적이고 반복적으로 짓는 죄 한 가지...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너무나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도 짓는 죄 한 가지...
그리고 철통같은 방어막을 세우고 죄를 짓지 않으려고 해도 어느 틈엔가 내 곁에 와 있는 그 죄 한 가지...

그것은... 의지할 대상을 바꾸는 것이다.
매 순간, 모든 일에 있어서 진정한 의지의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을 다른 것으로 바꾸는 것이다.
내 경우에... 그것은 대부분이 사람이다.

성경적으로 볼 때, 인간은 사랑의 대상일 뿐, 의지의 대상이 아닌데...
그것을 너무 잘 알고 있는데... 그리고 그것이 진리라는 것을 여러 경험을 통해서 확인하는데... 그래서 내 마음이 하나님만 의지하도록 꼭 붙잡아 두려고 하는데...

어느 순간... 내 마음은 주위의 "믿을 만한 사람들"--주로 영적인 리더나 동역자들--에게 그 의지하는 마음을 주고 있는 것을 본다. 그리고 그것은 그 의지하는 마음이 위태로와 질 때, 그 의존했던 상태가 깨어지려고 할 때, 혹은 깨어지고 난 후에야 내가 그랬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내가 주위의 지체들에게 입버릇처럼 하는 그 말... 인간을 믿고 의지하게 되면, 반드시 언젠가 그 사람으로부터 상처를 받게 되어 있다는 말... 하지만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을 전적으로 의지하면 결코 실망하지 않는다는 그 말...

내가 진정으로 믿고, 진리라고 생각하고 가르치기까지 하는 말이지만, 왜 그리 내 안에서 완전히 실재가 되지 않는 것인지...
사람과의 관계는... 그저 사랑을 퍼부어주는 것만으로는 안 되는 뭔가가 있는 것인지...

아직도 내 안에 인간을 향한 기대가 있는 것인지...

하나님을 바라보며 인간을 사랑하고, 순전히 하나님 때문에 인간에게 기대를 거는 것... 그것이 정답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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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었을 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원하는가?"

제가 TA로 일하고 있는 학부 수업시간에 교수님이 퀴즈 문제를 냈습니다. 매번 수업시간마다 퀴즈를 내는데, 오늘은 특이한 질문을 하더군요.
"죽었을 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원하는가?"
물론 정답은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학생은 점수를 받는 것이지요..
제가 grading을 담당하기 때문에, 오늘은 약 100개 정도 되는 카드들을 하나씩 자세히 읽어 보았습니다. 대부분의 답변은 자신의 성취, 자신의 노력으로 기억되기를, 또한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의미있는 사람이었다고 기억되기를 바란다는 답변이었고, 좋은 남편 아내, 딸, 아들, 아빠, 엄마 그리고 좋은 친구로 기억되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약 100개 정도가 되는 카드 속에서 6개가 그리스도인의 답변에 해당하는 답을 했습니다.
"At the end of my life, I'd like people to say there was no (Student's name) only Jesus Christ. Faith, hope and love are what she lived for."
"I would like to be remembered for the contributions I made to bettering society and for living my life under Christian principles as an example to others."
"I want to be remembered for putting God first, others second, and myself third."
"I want to be remembered as a Christian. A disciple of Christ who carried out his mission and shared his word with others."
"I'd like to be remembered as a nice, faithful, and respectful man. As a disciple of Christ."
(나머지 한 답변은 제 교회 대학부 소속의 지체의 답변이니 여기서는 공개하지 않겠습니다.)

답변을 읽으면서 사람들이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살펴보다가, 내 자신의 답변은 어떤 것이 될 것인가를 곰곰히 생각했습니다. 물론 항상 생각해 왔기 때문에 금방 내 답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이 질문은 잘못 되어 있거나 아니면 그리 중요한 질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세상 사람들에게는 의미있고, 중요한 질문일지 모르지만, 그리스도인에게는 중요할 수 없는 질문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중요한 질문은 바로 "내 인생에 대해서 심판자이신 예수님은 어떻게 평가하실 것인가?"입니다. 모든 인생은 마지막 날에 그분 앞에 서게 될 것이고, 내가 내린 내 인생의 평가, 혹은 다른 사람들이 내린 평가는 그 앞에서 의미를 잃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직 중요한 것은 바로 주님의 평가, 그분의 판결일 뿐입니다.
나는 그분의 평가를 생각하며, 그분의 뜻에 맞추어 하루를 지내고 있는가?
내 스스로에게 심각하게 질문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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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그분께서]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는 주님의 약속의 말씀이 소망이 됨에도 불구하고, 나를 한 없이 두렵게 만드는 것은 바로 "그리하면"이라는 접속사이다. 하나님께서 내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신다... 하지만 그것은 절대 무조건적인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단서를 다셨다.
"그리하면..."
내 삶이 그분의 관심사와 그분의 일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그리하면"은 크나큰 축복이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그리하면"은 큰 재앙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씩... 내 삶의 기도에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서운한 마음이 들 때가 있다. 그럴 때일수록 내 스스로를 돌아보며, 내가 주님의 나라와 주님의 의를 얼마나 구하고 있고, 그것을 소망하면서 살고 있는지를 살펴야 마땅하지만, 죄된 습성을 지니고 있는 내 안에 그분을 향한 서운함이 독버섯처럼 자라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어젯밤... 그 생각을 하다가 문득... '만약 하나님께서 내가 하나님을 대하는 것처럼 나를 대하신다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다시말해 "그리하면"이라는 단서 조항이 기계적으로, 문자적으로 그대로 적용된다면 어떤 결과가 있을까를 생각해 봤다.

만일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면...
만일 내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싶은 만큼, 하나님께서 나를 기쁘게 하신다면...
만일 내가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노력하는 것 만큼, 하나님께서 내 뜻을 알기를 원하신다면...
만일 내가 하나님의 관심사가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만큼, 그분이 내 관심사를 아시고, 그것을 이루시기 위해 일하신다면...
만일 내가 하나님의 다급한 마음을 아는 만큼, 그분이 내 다급함을 아신다면...

만약 진정으로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나에게 닥칠 수 있는 가장 큰 재난이 아닐까? 하지만, 진정으로 은혜인 것은,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나를 향한 주님의 사랑과 관심과 열정과 일하심은 하나님을 향한 나의 헌신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시다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감사의 제목이다. 그리고 아무리 주님께서 침묵하고 계시는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그분께 감사하며, 그분을 찬양하고, 그분을 높일 수 있는 것이다.

그 가운데서, 다시... 내 자신을 돌아보며 나에게 퍼부어주시는 은혜와 사랑과 관심 만큼 주님의 나라와 주님의 의를 구하고 있는지 살피며, 그것을 위해 내 삶을 던지는 것... 그것이 믿음생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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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하지 않은 믿음의 고백

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질러 가로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으사 저희의 말함을 허락지 아니하시니 이는 자기를 그리스도인 줄 앎이러라.(눅 4:41)

귀신들이 예수님께 드리는 이 고백... 베드로가 예수님께 그 고백을 드렸을 때, 예수님은 그것이 하나님께서 알게 하신 하늘의 지식이라고 말씀하셨고, 그 고백을 진정으로 기뻐하셨다. 하지만 동일한 고백이 누가복음 4장에서만 해도 두번이나 드려지는데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 고백을 싫어하신다. 그리고 귀신들에게 명령하여 그 입을 다물게 하신다.

세상 사람들은 아무도 모르는 예수님의 정체를 귀신들은 정말 '귀신같이' 알고 있었다. 그리고 정확하게 고백한다. 34절에서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고 고백하고, 본 절에서는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다. 그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분의 권세를 알았을 뿐만 아니라 그 권세에 떨며 두려워 하고 있었다. (34절의 "아!"는 성경에서 유일하게 등장하는 것으로 놀라움과 공포를 나타내는 말이다.)
문제는 그들이 그분의 정체를 알 뿐만 아니라, 그분께 순종하며 그분을 주인으로, 자신의 삶의 절대주권자로 인정할 의도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단순히 자신들을 멸하지 말아 달라는 것, 아직 무저갱에 들어갈 때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들에게 해를 끼치지 말아달라는 것 뿐이었다.

귀신들의 고백은 예수님에 대한 사탄적 고백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그것은 예수님을 정면으로 대적하며 조롱하고 멸시하는 것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분명히 알고 그분의 권세를 두려워하지만, 그분께 온전히 순종하려는 뜻이 없는 것이다.

복음이라는 단어가 넘쳐나는 세상이다. 웬만한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들어 보았다. 그리고 세상의 아주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입으로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고백한다.

하지만...
그 고백이 순종이 실리지 않은 고백이라면, 그 고백이 그분을 영화롭게 하고자 하는 열망과 동반된 것이 아니라면, 그 고백이 진정 그 삶 가운데 절대주권자로 임하신 예수님을 있는 그대로 모셔드리는 것이 아니라면, 내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그분이 내 삶을 사시고, 내 인생이 그분께 온전히 드려지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이 귀신들의 고백과 어떤 점에서 다르다고 할 수 있을지...
내가 예수님께 드리는 소위 신앙고백이라고 하는 그것에 "예수께서 꾸짖으사 저희의 말함을 허락지 아니하"실 만큼 역겨워 하지 않으신다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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찢어진 성소의 휘장...

성금요일...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돌아가신 날... 그리고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무덤에 안장되신 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직후 세 시간 동안 온 세상이 깜깜해졌다. 그것은 이땅에 하나님의 아버지의 은혜의 따사로운 빛이 사라지는 것을 보여 준다. 인간의 대표로 인간의 모든 죄를 담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철저하게 버리시는 아버지의 진노, 거기에는 생명의 빛이 있을 수 없다. 주님은 주님이 존재한 그 영겁의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없었던 아버지와의 단절, 아버지의 버리심을 경험하며 그것에 고통하며 처절하게 몸부림치신다. 아버지와의 단절, 그 은혜의 비추심이 없는 그것이 그가 당한 육신의 모든 고난보다도 훨씬 고통스러우셨던 것이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는 그 고통의 절규이다.

주님께서 돌아가시자(원어 그대로로 하면,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께 내어 드리자")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와 성소를 구분하던 커튼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져 둘이 된다. 그리고 최초의 성막 이후에 인간들에게 철저히 감추어 있었던 지성소,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그곳, 언약궤와 그 위의 속죄소, 그 은혜의 보좌가 사람들에게 드러난다. 인간의 편에서 본다면 죽지 않고도 그 속죄소를 볼 뿐만 아니라 나아갈 방법이 생겼으며, 하나님의 편에서 본다면, 당신의 거룩함을 손상시키지 않고도 인간을 만날 수 있는 접점이 생긴 것이다.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커튼(휘장)은 성인의 손으로 재서 한 뼘의 두께로 매우 무겁고 두꺼운 천이었으며, 극상품의 재질로 매우 정교하게 짜여진 것이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벽은 그만큼 두꺼웠다. 아무리 날카로운 칼로도 결코 찢을 수 없는 두터운 장벽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가로 놓인 장벽이었다. 그것은 바로 죄의 장벽. 죄와 거룩 사이의 장벽이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으심은 바로 그 장벽을 단번에 위에서 아래로 찢어버리는 놀라운 능력이었다.
지성소와 성소를 구분하던 그 휘장에는 그룹 천사들의 모양이 수놓아져 있었다.(출 26:31-33) 성경에서 그룹천사들은 하나님의 호위천사들이고,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인간을 에덴에서 쫓아내시고 그들이 하나님께서 계신 그곳으로 접근하지 못하도록 수비하게 하신 천사들이다.(창 3:24)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겨 내린 것은 바로 그 에덴으로의 길이 그리스도로 인해서 열리게 된 것을 의미한다. 인간이 하나님과의 천의무봉(天衣無縫)의 관계 속에서 영원한 생명과 기쁨을 누린 던 그 곳, 그 상태로의 회복의 길이 주님으로 인해서 열린 것을 의미한다.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나는 천국을 소유할 수 있게 된다.

성경에 의하면 휘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다.(히 10:20)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 에덴으로 통하는 길은 그의 몸이 찢기지 않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나의 죄 때문이다. 내 죄가 주님과 나 사이에 건널 수 없는 벽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주님은 나를 위해... 자신의 몸을 찢으셨다. 나에게 말로 다 할 수 없는 하나님의 복을 허락하시기 위해서 주님은 하나님이시면서도 인간들에게 조롱과 핍박을 받으셨으며,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채찍의 고통과 십자가의 고통을 감내하셨다. 아무 죄가 없으신 그분의 육체에서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피가 터지고, 십자가에서 그분이 생명을 잃어갈 때, 주님은 무엇을 생각하셨을까? 무엇을 생각하시며 그 고통을 참으셨을까? 바로 내 이름이 아닐지... 나를 생각하시며, 나를 사랑하시는 그 마음으로 내 죄를 끝까지 담당하시며, 나로 하여금 영생을 얻게 하고자 그 고통을 감내하셨을 것이다.

내가 달려야할 십자가... 내가 당해야할 핍박과 고난... 그분은 나를 대신해서 이 모든 일을 당하셨다. 그런 그분이 그 희생 가운데 나에게 무엇을 원하셨을까? 십자가 위에서 나를 생각하시면, 나에게 무슨 기대를 하셨을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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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21

(2006.03.06에 쓴 글)

통통하네..

토요일 아침은 늘 분주하다... 한글학교에 가는 아내와 아이들, 그리고 교회에 가는 나는 시간에 맞추어 나가기 위해서 후다닥 식사를 마치고 나갈 준비를 한다.
지난 토요일도 마찬가지였다. 모두들 조금 늦게 일어나는 바람에 더 정신 없이 챙겨야 했다는 것을 빼곤...

식사를 하고 화장실에서 거울을 보며 이를 닦고 있었다. 그 때 하연이가 들어오더니 내 옆에 나란히 섰다. 그러더니 갑자기 손을 쓱 내밀어 내 엉덩이를 만졌다. 그러더니 하는 말..

"어? 통통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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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돌아봄

2002년 7월에 미국에 온 후, 한국을 방문하는 것과 단기선교를 다녀온 것을 제외하고는 우리 가족이 떠난 첫 여행이었다. 매일 24시간 intensive하게 같이 보낸 시간들... 아마 그 자체가 앞으로 가장 소중한 추억이 되지 않을까 싶다.

약 3천 900마일의 장거리 여행. Texas, New Mexico, Arizona, Utah, Nevada, California를 넘나드는 긴 여행...

여행 소요경비는 총 1,100불...

소요기간 7일과 반나절....

아픈 사람 없었고, 다친 경우가 거의 없었고, 경미한 사고도 없이 무사하게 다녀온 여행이었다. 하나님께 참으로 감사할 일이다.

내 개인적으로는 내면에 있어왔던 갈등이 점점 더 증폭되어가는 상황에서 떠난 여행이었다. 여러가지로 분노하는 것도 있었고, 아픔도 있었고, 방향을 잡지 못해서 갈팡질팡하고 있을 때였다. 하나님께서 어디론가 떠나서 시간을 가지며 자신을 돌아보라는 뜻이 아니었나 싶다.

여행하는 내내, 좋은 곳들을 돌아 봤지만, 그리고 가족과 즐거운 시간을 가졌지만,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자주 한숨을 내 쉬는 나를 보면서 아내는 걱정했다. 복잡한 머리와 가슴은 그랜드 캐년의 웅장함과 Zion 캐년의 아름다움에도 해결되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서 복잡한 마음을 상당히 많이 정리해 주셨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마 24:45)
"Who then is the faithful and sensible slave whom his master put in charge of his household to give them their food at the proper time?"(NASB)
"종"은 하인이 아니다. δουλος라는 단어의 의미는 "노예"이다. 물론 동일한 본문의 누가복음에서는 이 종이 "청지기"로 표현되어 있지만, 청지기는 신분이 아니라 역할을 말해주는 단어이다. 신분은 노예이다. 노예 중에서 다른 동료 노예들(집 사람들, οι’κετείας)을 돌보며 섬기는 일, 특히 그들에게 정한 때, 그들에게 꼭 필요한 때(καιρός)를 따라 고기를 공급함으로 그들이 주인을 위한 노동을 지속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을 위해 특별히 구별된 자이다. 그는 노예들 중에서도 주인의 신임을 받는 자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종말에 대해서 강조하시면서, 그 종말을 맞이하는 가장 지혜로운 자는 바로 하나님의 청지기로서의 역할을 감당하는 자라는 말씀을 주셨다. 믿음의 지체들을 돌보며, 그들에게 생명의 양식을 나누어주는 일을 감당하는 자... 그는 복이 있는 자이다.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마 24:46)
주님의 약속의 말씀이었으며, 내가 어떤 자세로 무엇을 해야하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시는 말씀이었다. 이 말씀이 그 웅장한 그랜드 캐년보다도 더 크게 나에게 다가왔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것과 같은 착각 속에서, 여행하는 내내 그 말씀을 깊이 묵상했다.
나는 결국 종이다. 그리스도의 노예일 뿐이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양식 나누어주는 일을 충성과 지혜로 감당하면 되는 것이다. 그 양식을 통해서 지체들이 건강하게 자라고, 그 양식을 통해서 새생명이 탄생하는 일에 쓰임 받는 것... 그것이 내가 관심을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것... 그것을 위해서 내 섬김이 집중되어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내 안에 내가 너무 많이 살아 있다. 노예가 아니라 주인이 되어 있는 내 모습... 그리고 양식을 나누어 주는 일 뿐만 아니라 너무나 많은 다른 일에 신경을 쓰고 있는 모습, 그리고 그 와중에 양식을 나누어주는 일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모습...
하나님께서는 내 모습을 보시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너는 내 노예다. 내가 하라는 것만, 신경써라.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줘라. 나머지는 내가 다 하마...'
'예... 주님...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답했지만, 사실 아직도 내 안에는 struggle이 있다. 말로는 순종했지만, 아직 내 스스로가 그분의 노예라는 것이 인정이 안 되는 모양이다. 기도하기는 진정으로 주님의 노예로서 주님께서 찾으시는 그런 청지기가 되기를 바란다.

또 하나의 말씀은 차 안에서 들었던 유기성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서 받았다.
"여러분! 교회에서 잘잘못을 따지기 잘하는 사람들은 선악과를 많이 먹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선악과를 하나만 먹어도 선과 악을 분별하며 따질 줄 알게 되었는데, 얼마나 많이 먹었으면 그렇게 따지는 것을 잘하겠습니까?"
전에 들으면서도 내 이야기라고 생각했지만, 다시 들으니, 정말 내 얘기다. 내 안에 얼마나 "옳은 것"에 대한 집착이 많은지... 그리고 그 "옳은 것" 때문에 분노하고 있는지... 사실 그 옳은 것에 분개하면서 내 스스로가 옳지 못한 쪽으로 많이 기울어 가고 있는지를 보았다. 옳은 것보다 사랑이 더 중요하다는 말씀... 물론 사랑은 진리에 기반을 두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일의 시시비비를 분명히 가리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내 모습을성찰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신뢰"였다.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을 신뢰한다는 것. 그분께 모든 것을 맡긴다는 것. 그래서 내 안에 염려와 근심이 없다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것을 깊이 묵상했다.

이번 여행은 내 개인적으로 spiritual retreat이었다. 폭포수와 같이 쏟아지는 은혜를 경험한 것은 아니지만, 삶의 자리를 떠나 낯선 곳을 다니면서, 새로운 시각으로 내 자신을, 내 신앙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이제 삶의 자리로 돌아온 지금... 그 받은 말씀들을 하나하나 기억하며, 그 앞에 무릎꿇으려고 한다. 꿇어지지 않는 무릎, 완고한 내 자신을 보지만, 결국 무릎꿇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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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찾으시는 열매 맺는 삶을 살려면...

성경에서 가르치시는 열매맺는 삶의 비결... 같이 나눠보고 싶습니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치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벧후 1:3-9)

여행-귀환

Palm Springs에서의 일박... 숙소였던 Extended Stay에 침대가 두개인 방이 모두 차서 할 수 없이 침대가 하나 밖에 없는 방에서 자야했다. 물론 프론트에서 smoking room인 더블침대의 방이 비어 있다고 했지만, 평생 담배 냄새라면 경기를 일으키는 나 였기 때문에, 특별히, 잠잘 때는 매우 깊이 잠드는 편이지만, 담배 냄새가 조금이라도 나면 잠을 자지 못하는 습성 때문에, 거절했다. Front에서 미안한 나머지 suite room을 줬다. 넓고 좋은 방... 하지만 하나뿐인 침대... 거기서 예연이와 나는 바닥에 이불을 깔고 잠을 잤다. 약간 불편하긴 했지만 잘 만 했다. 어릴 적.. 아니 결혼하기 전까지 방바닥에서 잠을 잤던 옜날 생각이 났다. 그것도 벌써 11년이 훨씬 지났다...


(우리가 묵었던 Palm Springs의 숙소)

Palm Springs는 말 그대로 Palm으로 가득찬 작은 도시였다. 참 이국적인 이 도시를 즐겨보지도 못하고 다음 경유지인 El Paso로 향했다. 하루 종일 달렸다. 79마일의 속도로... 중간에 기름을 넣고 휴게소에서 식사를 하는 것 빼놓고는 계속 달렸다.
저녁 늦게 El Paso에 도착했다. 11시 정도 된 줄 알았는데, 아직 10시였다. 미국을 동에서 서로 여행하다보니 시간이 많이 혼동되었다. 내가 속한 Central Time, Mountain Time, Pacific Time zone을 오갔을 뿐만 아니라, Daylight Saving이 시작된 직후라 더 혼동되었고, 더구나 Daylight Saving에 참여하지 않는 Arizona를 중심으로 여행했기 때문에 무지하게 헷갈렸다. El Paso에 도착한 뒤 이제 텍사스로 돌아 왔으니 이제는 어스틴 시간으로 살면 되겠다고 안도했었는데, 텍사스의 서부 끝인 El Paso는 텍사스의 도시였지만 텍사스 시간인 Central Time을 따르지 않고 Mountain Time을 따른다는 것을, 도착해서야 알았다.
어쨋든 여행의 마지막 숙소인 El Paso의 한 호텔에서 푹 쉬고, 다음날 아침 예배를 드리기 위해 엘파소한인침례교회로 향했다. 참고로 El Paso에서 오스틴까지는 10시간 정도가 걸린다. 9시 30분에 출발한다 하더라도 저녁 7시 30분에 도착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중간에 한 번도 안 쉴 경우에... 아침 8시 30분에 1부예배가 있다고 해서 그것을 목표로 준비했는데, 너무 피곤한 나머지 내가 늦게까지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바람에 교회에 9시 10분 정도에 도착했다. 하나님께 너무 죄송한 마음... 아무리 여행중이라지만, 그리고 아무리 일찍 출발해야 한다지만 예배에 있어 이건 너무했다는 생각에 정말 속이 많이 상했다. 예배가 뒷전으로 쳐지는 상황...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것이 준비된 마음으로 정성스럽게 나아오는 것이 아니라 형식화 되는 이 상황... 그리고 피곤하다는 이유로 그것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내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차를 타고 가면서 아내에게 늦게 도착하는 한이 있더라도 다음 예배를 제대로 드리고 가자고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 말을 하지 못하고 혼자 속으로만 스스로를 원망하고 있었다.
그런데 교회에 도착해 보니 아무도 없었다. 문도 모두 잠겨 있었다. 예배를 드리고 있거나 드렸다는 흔적이 전혀 없었다.

'왠일인가?'

속으로 혼자 생각하며 교회를 둘러보고 있을 때, 어떤 나이드신 미국인 부부가 차를 타고 도착했다. 알고보니 그분은 그 교회의 영어예배 담당 목사님이셨다. 그분의 말씀이 원래 8시 반에 1부예배가 있는데, 한국인 목사님이신 담임목사님이 베트남 단기선교를 가시는 바람에 그 주는 1부예배가 취소되었다는 것이다. 2부예배는 영어예배이고, 3부예배가 원래 대예배라고 설명해 주셨다.
내심 기쁜 마음이 들었다. 아내에게 가서 이 사실을 알리고 2부예배에 Full로 참석하자고 했다. 아내는 당연하다는 듯이 흔쾌히 동의했고, 우리 가족은 한인2세들과 몇몇 미국인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다. 예배의 분위기는 매우 어수선했고, 집중이 되지 않았지만, 나는 하나님 앞에 온전한 예배를 드린다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도 기쁨이 넘쳤고 진정으로 하나님께 감사했다. 아이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난 직후, 우리를 환대하며 3부예배에 같이 예배를 드리자고 적극 권면하는 한국인 교인들의 권고를 뿌리치고 오스틴으로 향했다.
오스틴으로 오는 길... 여전히 황량한 광야... 그런데... 이제는 그 광야가 고향처럼 느껴졌다. 그 "광야"가 뉴멕시코나 아리조나의 광야에 비해서 얼마나 나무가 많은지... 얼마나 푸르름이 더한지 깨달았다. 고향에 온 듯 즐기며 운전했다. 중간에 Rest Area에서 쉬었다. 참고로 Rest Area는 화장실이 있고, 속도는 느리지만 무선 인터넷이 되는 곳이다. 또한 식사를 해 먹을 수 있도록 테이블과 의자와 바베큐 시설이 준비되어 있다. Picnic Area는 화장실이 없고 테이블과 의자만 있다. Parking Area는 아무것도 없고 그냥 차를 대고 쉴 수 있는 공간만 있다. Rest Area에서 여행에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블루스타를 켜고 라면을 끓여 먹었다. 텍사스의 광야 한 가운데서 끓여먹는 라면맛... 평소에는 라면을 거의 먹지 않는 나이지만, 거기서만큼은 참 맛있었다.
저녁 11시 정도에 도착하리라 예상했었는데, 다행히 80마일의 속도를 유지한 끝에 9시 30분 정도에 집에 도착했다. 짐을 내려 놓고 대충 정리하고 누운 침대... 역시... 내 집이 최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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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은혜...

(교회 게시판에 제가 올린 글입니다.)

은혜란 무엇일까?
소위 "은혜받았다"는 말로 자주표현되는 그 은혜란 무엇일까?

'주일 예배에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이번 부흥집회 때 은혜를 꼭 받아야 하는데...'
'이번 설교는 은혜가 안 되네...'
'찬양을 부르며 충만한 은혜를 느꼈어요.'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은혜란 내 마음 속에 느끼는 어떤 좋은 감정, 특별한 감동, 감정적 고양, 혹은 맺혔던 것이 풀리는 것같은 '느낌'을 가리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배나 부흥집회, 찬양집회 등에 참석하면서 우리는 그 '은혜'를 기대한다. 찬양인도자나 설교자는 그 은혜라는 것을 '느끼게' 해 줄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기본 자세이며, 그 기대에 충족하는 설교자, 혹은 집회를 '좋은' 집회 혹은 설교자, 그렇지 않은 경우를 '좋지 않은' 혹은 '문제 있는' 집회 혹은 설교자로 간주한다.
이것은 비단 성도들 뿐만이 아니다. 설교자나 찬양인도자 또한 그런 관점에 사로잡혀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은혜를 '끼치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한다. 감동을 불러 일으킬만한 적절한 예화, 삶에 와 닿게 하기 위한 성경 풀이, 고민이나 걱정, 삶의 문제들에 대한 성경의 솔루션 등, 설교자는 그의 메시지가 각 사람에게 피부에 와 닿게 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소위 청중들이 '은혜'받은 듯한 결과가 나왔을 때는 '성공적' 설교라 자찬하고, 반응이 좋지 못할 때는 '실패한' 설교라고 스스로 자책한다.
이렇듯 모든 집회에서 '은혜'는 빠져서는 안되는 필수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은혜를 받기 위해 모이고, 은혜를 끼치기 위해 집회를 준비하고 인도한다. 

은혜가 중심이다.

그런데, 그렇게 중요한 그 '은혜'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감동'과 같은 것인가? 내 눈에서 눈물을 흘리게하는 그 어떤 것, 내 마음을 찡하게 하거나, 뭉클하게 하거나, 아니면 뭔가 회복되게 하는 그 어떤 '느낌'인가?
모두가 그렇듯 집회에서, 혹은 찬양이나 성경이나 기도를 통해서 기대하며 얻어낼 수 있는 그 어떤 것인가?
잔뜩 기대하고 참여했던 수련회에서 아무런 감동이나 특별한 느낌을 받지 못했을 때, 실망하며 그 '은혜'를 주시지 않은 하나님을 (적극적으로건 소극적으로건 간에) 원망하는 경우에서 보듯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의무가 있는 그 어떤 특별한 것인가?

성경적으로 볼 때 은혜란 주는 자의 뜻을 따라서 자격없는 자에게 값없이 주어진 (많은 경우 값비싼) 선물(혹은 좋은 것)이다. 은혜는 네 가지의 요소로 구성된다.
1. "주는 자의 뜻을 따라서"
은혜는 근본적으로 주는 자의 뜻에 달려 있다. 그것은 요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주는 자가 기뻐하는 대로, 주고 싶은 대로 주는 것이 은혜이다. 만약 그것이 의무가 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은혜가 아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은혜를 베푸는 기준은 "주는 자의 기뻐하는 뜻"이라는 것이다. 그 기준은 결코 강요될 수 없는 것이다. 기준이 강요가 될 때, 그것은 더 이상 은혜가 아니라 의무가 된다. 많은 경우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말할 때, 이 부분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마태복음 20장의 포도원 주인과 품꾼의 비유를 읽으면서 대부분 그 비유를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이유가 그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서 은혜는 은혜를 베푸는 자가 기뻐하는 뜻에 따르는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가르쳐 주신다. 몇 시간을 일했건 간에, 한 데나리온을 주는 것은 공평의 원리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원리를 따르는 것이라는 것이 이 비유의 핵심이다.
은혜는 하나님께 요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은혜를 주시지 않는 것에 대해서 원망하거나 서운해 한다면, 그것은 이미 은혜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처사이다.

2. "자격없는 자에게"
은혜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그것을 받는 자가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좋은 것을 받을 자격이 없는 자가 받는 것... 그것이 은혜다. 받을 자격이 있는 자가 받는 것은 보상이지 은혜가 아니다. 포도원 품꾼의 비유에서 제일 먼저 와서 일을 시작한 자들은 하루 종일 일했고, 그에 정당한 품삯인 한 데나리온을 받았다. 그것은 정당한 보상이다. 그것이 은혜가 될 수 없다. 물론 이 비유에서 그들이 선택되지 않았다면 할 일이 없이 놀았을 것이라는 사실을 고려할 때, 은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이 한 일만 놓고 본다면 처음와서 온 종일 일한 그들은 정당한 보상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그 외의 일꾼들은 한 데나리온을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한 데나리온을 준 것은 주인이 베푼 은혜이다.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자격도, 그분으로부터 좋은 것을 기대할 자격도 없는 자라는 것을 망각한다면, 나는 이미 은혜를 받을 수 없는 자인 것이다. 예배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 그 자체가 이미 은혜라는 것... 하나님의 존전에 설 수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전적인 긍휼이 아니면 있을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감사하는 자에게 예배에 참석하는 것 그 자체가 은혜이다. 그 자리에 있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그 특권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한 데나리온이 온전히 주어졌다는 것을 망각한 삼시, 육시, 구시에 온 일꾼들은 자신들보다 늦게 온 11시의 품꾼들이 자신들과 동일하게 한 데나리온을 받는 것에 대해서, 아니, 그들보다 자신들이 더 많이 받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분을 낸다. 그들은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은혜를 감사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처사에 대해서 '공평'하지 못하다고 항의하기까지 하는 가운데 자신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는 사라지고 만다. 그들에게는 은혜가 없는 것이다.

3. "값없이 주어진"
은혜는 값 없이 주어진다. 댓가가 없는 것이다. 포도원의 비유에서 모든 품꾼들은 일을 했지만, 포도원의 주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것은 불필요한 노동이었다. 사실상 첫번째로 불러온 품꾼들의 노동이 필요했을 뿐이다. 하지만 주인은 "장터에서 놀고 섰는 사람들"이 불쌍해서 그들에게 한 데나리온을 줄 구실을 찾기 위해서 그들을 고용했을 뿐이다. 그에게는 그들의 노동이 의미가 없었다. 따라서 그들의 일량에 관계 없이 그들이 하루를 살기 위해 필요한 한 데나리온을 준 것이다. 그것은 값없이 주어진 은혜였다. 하나님의 은혜는 내가 하나님께 뭔가들 드림으로써 주어지는 반대급부의 보상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자격이 없고, 무가치함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 은혜에 보답할 아무런 능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것이 은혜이다.

4. 선물(혹은 좋은 것)
은혜는 좋은 것이다. 한 데나리온은 당시 품꾼들이 하루에 벌 수 있는 임금이었고, 그것으로 인해 가족이 하루 동안 살아갈 수 있는 금액이었다. 그것은 그들에게 생명이었다. 주인은 그것을 주기 원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신다. 다만, 그 '좋은' 것이 내가 판단하는 것과 다를 때가 많다는 것이 문제이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최선의 것으로 주신다. 그것으로 나를 바른 길로 인도하시고, 내가 생명을 더 누리도록 하시고,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하시고, 경험하게 하신다. 
하지만 나는 내 '필요'가 우선이다. 내가 부족한 것을 채우는 것, 아픈 곳이 낫는 것에 더 관심이 있다. 내 좁은 소견과 경험에 비추어 좋은 것을 하나님께 요구한다. 하지만 우리가 너무 잘 알듯이, 만약 하나님께서 내가 원하시는 대로 '좋은' 것을 주신다면, 내 인생이 얼마나 엉망이 될 것인가? 그분은 전능하신 분이고 전지하신 분이다. 나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너무 잘 아시는 분이시다. 그분께서 나를 위해 주시는 것은 그것이 내 마음에 들던지 그렇지 않던지 간에 기뻐하고 감사해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은혜는 내가 느끼는 어떤 좋은 감정이나 감동이 아니다. 그것은 자격없는 자, 자신이 은혜의 대상조차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 자, 그래서 하나님 앞에 겸손할 수 밖에 없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 차원에서의 좋은 선물을 누리는 것이다. 

인류의 역사상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의 최고봉, 은혜의 결정체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그것은 형언할 수 없이 흉악한 죄인인 나, 아무런 자격이 없는 나를 살리시기 위해서 하나님 당신이 직접 이 땅에 오셔서 모든 고난을 받으시고, 내가 죽어야 할 끔찍한 십자가의 형벌을 대신 받으심으로 나를 살리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 구원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따라서, 아무런 자격이 없는 나에게, 값없이 주신, 하나님과 인간 편에서의 가장 비싼 댓가를 치른 선물인 것이다. 자신의 죄인됨(죄성) 때문에 하나님 앞에 고개를 들지 못하고 긍휼만을 바라며 나아가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긍휼... 죽어 마땅한 죄인, 탄식하며 애통해하는 자를 품으시고 살리시는 그분의 사랑...

그것이 바로 은혜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볼 때마다 은혜의 감동이 없다면, 십자가를 통해서 무한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느끼지 못한다면, 그 어떤 것에서 은혜를 느낄 수 있겠는가? 그 어떤 것에서 은혜를 찾을 수 있겠는가? 

예배를 통해서, 설교를 통해서, 찬양을 통해서 내가 구하는 은혜가 바로 그 십자가의 은혜인가?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와 무릎꿇고 고개를 숙이며 은혜 받을 자격이 없는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는 간절한 마음을 들고 나아오는가?

그것이 진정으로 은혜받는 자의 자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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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내 삶에 근심과 걱정이 떠나지 않는 것, 그리고 근심과 걱정을 해결하는 것이 삶의 중심이 되는 것... 그것은 내가 예수님을 따르고 있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사람들에게 조롱을 당하는 것을 참지 못하는 것, 믿는 자들에게서 받는 부당한 대우와 무시와 불신을 참지 못하는 것은 나 때문에 예수님께서 받으신 그 조롱과 수치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여러 이유로 받는 삶의 고통들... 그것이 무서워 피하고 싶은 것은, 나를 위해서 고통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아픔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지...
환란과 핍박, 죽음을 두려워하며 벌벌 떠는 내 모습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능력과 그분의 위대함을 알지 못하는 무지의 소치가 아닐지...

예수님...
그분이 정답이고, 그분이 모든 문제의 해결인데..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좇을 때, 근심과 걱정도, 수치와 아픔도, 괴로움과 고통도 감사의 제목이 되는데... 두려운 세상 앞에서도, 환란과 핍박 앞에서도 당당하며 위축되지 않는 진정으로 "믿는" 사람이 되는데...
나는 진정으로 주님을 따르는 자인가? 아니면 따르는 시늉만 하거나, 따른다고 생각만 하는 자인가?

오늘 아침 말씀을 통해 내 삶을 돌아볼 때, 참으로 부끄럽다.


찬송가 510장

겟세마네 동산의 주를 생각할 때에
근심이나 걱정을 사양할 수 있을까
나를 항상 버리고 주를 따라 가겠네

빌라도의 뜰에 선 주를 생각할 때에
수치됨과 아픈 것 못 견딜 수 있을까
길이 참고 묵묵히 주를 따라 가겠네

갈보리산 올라간 주를 생각할 때에
나의 받는 괴롬을 비교할 수 없으리
십자가를 짐으로 주를 따라 가겠네

무덤에서 부활한 주를 생각할 때에
환난이나 죽음도 두려울 것 없으리
승전가를 부르며 주를 따라 가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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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LA...

LA...

전에 비행기를 경유하면서 자주 가 봤던 곳. 하지만 실재로 비행기장 바깥의 LA를 경험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개인적으로는 그다지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도시였는데, 아내와 아이들이 가 보고 싶어해서 이번 여행의 경유지로 택했다.

오랫만에 경험해보는 대도시였다. 넘쳐나는 차들과 사람들, 넓게 퍼진 도시. 온갖 종류의 문화가 어우러진 곳. melting pot이론보다는 pizza형 모델에 더 적합한 도시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서울에서도 살아본 나인데... 오스틴에 살면서 시골사람이 다 되었나보다. 넘쳐나는 사람들, 가도가도 끝이 없는 도시의 경계, 그리고 무엇보다 험악하게 운전하는 LA 운전자들을 보면서 도대체가 적응이 되지 않았다. 어서 오스틴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 뿐...
LA에서 하루 반 나절 정도를 머물렀다. 하지만 상습적인 교통체증으로 인해서 다녀본 곳은 계획했던 것만큼 많지 않았다. 길에서 쏟아부은 아까운 많은 시간들... 도시의 비효율...

첫날 처음으로 방문한 곳은 Getty Center였다. Museum 건물 자체와 그 안에 소장된 희귀한 그림들 때문에 유명한 곳이라고 들었다. 하지만 도착시간이 너무 늦어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30분 밖에 없었다. 흥분한 아내... 그리고 이런 데를 왜 왔느냐며 시큰둥한 아이들... 그 사이에서 어정쩡한 나...



그림에는 특별히 관심이 있지는 않았지만, 예술과 자본의 관계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Pop culture가 형성되기 시작한 20세기 초 이전만 하더라도 예술은 가진 자들의 사치, 혹은 장식품이었던 것을 다시 한 번 되새겨보았다. 예술 중에서 미술과 음악(특히 classic)은 아직까지도 상류층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는 것 아닌가? 미국에서는 Naturalism 이후, 혹은 이미 그 이전부터 자본 혹은 상류층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났는데... 등등 몇 가지 생각이 떠 올랐다.

그날 저녁 산타모니카 해변에 잠깐 들른 후, Korea Town의 한 중국식당에서 봉수형제를 만났다. 약 2년 전까지 청년부에서 동역자로 섬기던 형제... 그 후 처음으로 만나는 것이었지만, 얼마나 반가왔던지... 만나서 각자의 교회생활, 복음, 주님의 은혜, 그리고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하면서 주님 안에서 한 지체된 자들의 은혜로운 교제를 만끽할 수 있었다. 내 개인적으로는 LA에서 가장 좋았던 시간이었다.


다음날 아침, 말로만 듣던 Long Beach로 향했다. 말 그대로 백사장이 길었다. 금요일 아침이라 그런지 사람들은 많이 없었다. 거기서 아이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아이들로서는 태어나서 두 번째(2007년 한국에서의 경험이 처음이다)로 본 바다였다. 특히 파도가 밀려오는 모래사장은 처음이었다. 아이들은 매우 단순한 것에서 즐거움을 찾는 특기가 있는 듯 하다. 우리가 거기서 한 대부분의 '놀이'는 모래사장에 서서 파도를 맞이하는 것. 파도가 밀려오기 전 물에 잠기지 않는 모래 위에 서 있는다. 그 후 파도가 밀려오면, 무릎까지 잠기고, 파도가 빠져 나갈 때, 발 밑에 있는 모래를 쓸어가기 때문에 균형을 잃게 된다. 게다가 파도가 밀려 갈 때, 내 몸이 뒤로 쓸려가는 느낌 때문에 더 균형을 잡기가 힘들다.
매우 단순해 보이는 이것을 아이들은 신기해하고 재미있어 했다. 한참을 같이 서서 그 '놀이'에 집중했다. 나중에 다른 일정 때문에 그곳을 떠나야 할 때 아이들이 얼마나 서운해 했던지... 하연이와 예연이는 이번 여행의 best를 Long Beach에서의 그 '놀이'로 꼽았다.



다음으로 간 곳은 Hollywood와 Beverly Hills... 하연이가 제일 가보고 싶어 했던 곳이다. 거기서 몇 주 전에 아카데미 시상식이 있었던 Kodak 극장과 유명 배우들의 발모양과 손모양이 바닥에 찍힌 곳이 있는 Chinese Theatre 등을 돌아 보았다. 화려한 건물과 장식... 아카데미시상식이 있는 주간에는 Hollywood와 Beverly Hills의 마약 소비량이 일년 중 최고로 많아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즐거워서 일주일 내내 마약파티를 하거나 낙망해서 마약으로 상심을 달래야 하는 그들... 불쌍한 인생들...

(어렸을 때 좋아했던 The Carpenters 앞에서 찍은 사진)

역시나... 그냥 하나의 거리... 그리고 큰 집이 있는 주택가를 돌아 봤다는 느낌 외에 별 다른 소감은 없었다.

그날 저녁.. 봉수형제가 다시 저녁식사를 한 번 더 하자고 제안해 왔다. 일정이 잡혀 있었던 중요한 실험까지 미루면서 우리 가족이 떠나기 전에 꼭 같이 식사하자고 해서 그렇게 하기로 하고 식사 장소를 향해 출발했다. 하지만 금요일 저녁이라 그런지 교통체증에 꽉 막혀 몇 시간을 길에서 허비한 후에, 아쉽지만 그날 만남은 포기하고 숙소가 있는 Palm Springs라는 곳으로 발길을 돌려서 저녁 9시 30분에야 숙소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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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Las Vegas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Zion Canyon에서는 창조주 하나님의 은혜를 만끽하는 기쁨을 누렸다면, Las Vegas에서는 인간의 죄악으로 인한 가슴아픔을 경험했다. 죄악의 도시와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연의 극한 대비를 하루만에 경험했다.


Zion Canyon에서의 감동을 가슴에 간직한 채 Las Vegas로 향했다. Las Vegas는 별로 가고싶지 않은 곳이었지만, 그 곳에는 좋은 호텔이 싼 값으로 제공된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에, 그리고 Zion Canyon에서 LA로 가는 길에 어디엔가는 머물러야 해서 Las Vegas에서 하룻밤 머물기로 했다. 하연이와 예연이는 우리가 돌아보는 관광지보다 오히려 호텔에 더 관심이 많았고, 좋은 곳에서 아빠 엄마와 함께 잠자는 것을 너무 좋아했기에 시설이 좋은 곳에 머물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Priceline에서 본 Las Vegas의 South Point호텔은 환상적으로 보였기 때문에 우리는 잔뜩 기대를 하며 그곳으로 향했다. 도심으로부터 남쪽으로 떨어져 있는 그 호텔은 그 크기가 우리를 압도했다. 엄청난 크기의 호텔, 그리고 넓은 주차장... 새로 지은 것 같은 분위기를 느끼며 우리의 기대는 더 부풀었다. 하지만 그 기대는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1층에 문을 들어서는 순간 우리를 맞이한 것은 담배냄새와 도박장이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두 가지가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인상을 찌뿌리며 호텔 front로 가서 수속을 하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front는 문 입구에 있었는데, 엘리베이터는 도박장 반대편 끝 중앙에 위치해 있었다. 따라서 도박장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되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아내와 아이들과 빠른 걸음으로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방에서 여장을 풀고나서 우리 가족은 의견이 둘로 나뉘었다. 밖에 나가지 말고 호텔에 머물다 다음날 아침에 일찍 LA로 바로 출발하자는 쪽(아이들과 나)과 그래도 이곳에 왔는데, 몇 개의 무료 쇼를 보러 나가자는 쪽(아내)으로 팽팽하게 나뉘다가 결국 일단 나가기로 하고, 차를 몰로 그 유명한 호텔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넘쳐나는 사람들... 화려한 건물들... 쇼들... Las Vegas의 Strip을 잠깐 돌면서 나는 몇 가지를 보았다.

자본
거대한 호텔들, 건물들... 화려한 장식들... 라스베가스의 trademark인 웅장하고 화려한 건물들을 보면서 자본의 위력을 생각했다. 등 하나, 문고리 장식 하나 하나가 모두 거대 자본의 소산이며, 그 자본들의 경연장이 바로 Strip에 모두 모여 있었다. 돈냄새가 물씬 풍겨나는 그 광경... 약간 소름이 돋으며 거부감이 느껴졌다. 거대 자본으로 더 많은 자본을 빨아들이는 문어와 같은, 혹은 고래와 같은 모습... 그 거대 자본의 화려함 아래 지하에 그 어느 도시보다도 더 많은 homeless들이 비참하게 생활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지하의 동굴과 하수구 속에서 인간 이하의 비참한 삶을 살며, 하루를 연명하기 위해 얼마나 치열한 생존싸움을 하는지... 거대 자본의 호텔은 바로 그 패배자들 위에 서 있는 것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가슴이 아파왔다.
동시에 도시의 화려함의 가식이 느껴졌다. Venetian 호텔을 둘러보며 나는 100년 전의 Coney Island를 연상했다. 그 호텔과 비슷한 화려함으로 방문자들에게 절제되지 않은 육적 쾌락을 선사했던 그곳... 이제는 불타 없어져버리고 흔적만 남은 그곳과 같은 운명이 될 것이라는 예감... 그리고 그 화려함의 뒷면에 있는 그 허무함이 온 몸으로 느껴졌다. 왠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건물들이 종이조각에 불과할 것같은 느낌... 그래서 건물을 직접 만져보며 느껴보기까지 했다. 차가운 느낌의 단단한 돌덩어리... 하지만 그 건물들을 바라보며 느껴지는 허무함과 공허함은 가시지 않았다.



도박
그 거대 자본이 궁극적으로 노리고 있는 것은 도박을 통한 자본의 증식이었다. 어디를 가나 넘쳐나는 도박장들... 호텔 로비에 설치된 수 많은 도박기계들 앞에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 있는 사람들... 시내의 도박장에서 쏟아져나오고 들어가는 수 많은 인파... 재미로, 혹은 진지하게 일확천금을 노리는 그들은 그들의 헛된 망상이 결국 거대 자본의 희생양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그들은 밤새도록 홀로 버튼을 누르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그들은 무엇을 좇고 있는가? 

마약


호텔에 있던 안내문이다. 우리가 묵었던 호텔 중에서는 유일하게 여기서만 이런 안내문을 볼 수 있었다. 호텔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마약을 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마약사용이 공공연하게 용인되는 곳... 그곳이 Las Vegas이다. 거대한 자본이 제공하는 화려함과 도박의 "쾌락" 속에서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들의 유일한 위안이 되는 것이 바로 마약이 아닐까?

우상
Las Vegas의 Strip은 우상들의 천국이었다. 그리스, 로마의 신들, 불상들을 비롯해서 온갖 종류의 신상들이 난무하는 곳... 물론 그들을 종교적으로 "숭배"하는 사람들은 없었지만, 결국 그 우상이라고 하는 것들이 인간의 쾌락과 번영과 안전을 향한 욕구의 형상화물이라는 것을 고려할 때, Las Vegas가 우상들로 넘쳐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 도시는 결국 인간욕망이라는 우상을 숭배하는 도시인 것이다. Strip에서 그 수많은 우상들 속에서 예수님과 십자가의 모습은 어디에도 발견할 수 없었다. 세상의 온갖 우상들이 넘쳐나는 그곳에서 십자가는 설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섹스
 호텔에 처음 들어 섰을 때 본 것은 도박하는 사람들 사이로 야한 옷을 입고 돌아다니며 서빙하는 여자들이었다. 서빙을 하는데, 왜 그렇게 야한 복장을 해야만 하는지... 길거리의 포스터들... 거리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창녀들... 돈을 주고 섹스를 살 수 있는 안내문을 뿌리는 멕시컨들... 심지어 가장 건전하다는 분수쇼조차도 섹시하게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그런 곳이 바로 Las Vegas였다. 돈과 도박과 마약과 우상은 섹스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Las Vegas... 
그 도시의 별명(the city of sin)대로 죄악이 관영한 곳이었다. 하나님이 없이 인간의 죄악된 본능과 욕구가 그대로 분출되는 곳...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면서 우리 가족은 만장일치로 밖으로 나가기로 한 결정은 잘못된 결정이었다고 결론을 내렸고, 아내는 가족들에게 너무 미안해 했다. 차라리 그냥 호텔 방에서 쉴걸...
언젠가 극동방송을 들으면서 어느 목사님이 Las Vegas에 들러서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는 말을 설교시간에 하는 것을 들었다. Las Vegas에 다녀온 지금... 도대체 그 "즐거운" 시간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더 이해가 되지 않는다.

사실... 처음부터 끝까지 내 입가에 미소를 띄게한 것이 단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경험하면 할수록 인상이 찌뿌려지고, 가슴이 아프고, 하나님의 진노와 아픔과 슬픔이 더 깊게 느껴질 뿐이었다.

죄악의 도시... 주님의 날에 그 도시에 임할 그분의 진노를 생각할 때... 가슴이 아프다...

여행-Zion Canyon

Zion National Park

사실 Zion Canyon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 그곳을 다녀온 지금, 만약 누군가 Grand Canyon과 Zion Canyon 둘 중 한 군데만 선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Zion Canyon을 선택할 것이다.





Grand Canyon이 거대한 스케일을 자랑한다면, Zion Canyon은 아름다움과 체험이 특징인 것 같다.
만나는 미국인들마다 Zion Canyon에 대해서 말할 때 빠뜨리지 않고 쓰는 단어가 "Beautiful"이었다. 그 만큼 Zion Cayion은 아름답다.
공원을 들어서는 입구에서부터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깎아지른듯한 절벽과 바위산의 모습을 매우 가까이에서, 그리고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는 때문인지 유난히도 크고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Grand Canyon에서는 거대한 장관을 여러가지 각도에서, 그것도 멀리 "구경"하는 것에 그쳤는데, Zion Canyon에서는 가까이 다가가서 만져보고, 등산하듯이 올라가보고, 가슴에 품어볼 수 있는 곳이었다. 객관적인 크기 면에서는 Grand Canyon이 훨씬 컸지만, 느낌으로는 Zion Canyon이 더 커보였고, 더 정감이 있었다.
아이들도 Grand Canyon보다 Zion Canyon이 훨씬 아름답고 좋다며 즐거워했다. 특히 입구에 있던 눈 위에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썰매를 타면서 즐거워 했다. 경험, 접촉, 느낌... 이것에 Zion Canyon이 제공하는 특이한 체험이었다.






여행-Grand Canyon

월요일.. 엘파소를 출발하여 New Mexico의 White Sand에 들렀습니다. 밀가루처럼 하얀 모래가 끝없이 펼쳐진 사막. 태어나서 처음보는 사막은 참 이국적이었습니다. 원래는 비가 올 것이라고 예보가 되어 있어서 걱정했었는데, 다행히 비는 오지 않고 약간 흐린 날씨여서 오히려 사막을 보기에 더 좋은 날씨였습니다.
Information Center에서 대야처럼 생긴 모래 썰매를 빌려서 사막 한 가운데서 썰매를 탔습니다. 마치 눈썰매를 타는 것처럼 즐거웠네요... 아이들이 정말 좋아 했습니다. 저도 오랫만에 운동 좀 했습니다. 좀 오래 타고 싶었는데, 바람이 너무 많이 불어서 아이들이 추워했고, 모래가 귀와 코로 들어가는 바람에 오래는 타지 못했습니다.



거기서 약 2시간 정도의 시간을 보내고 나서, Arizona에 있는 Flagstaff으로 향해 달렸습니다. 총 600마일 정도 되는 거리를 달리며 "광야"라는 단어를 다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농지는 거의 없고, 동물들조차 보이지 않는 붉은 광야... T. S. Elliot의 Waste Land를 생각하며, 더 이상 생산적이고 의미있는 것을 생산해 낼 능력을 잃어버린 현대 사회의 병폐와 사막에 샘이 넘쳐 흐르고 푸르른 생명을 약속하신 주님의 약속이 과연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 묵상했습니다. 보이는 것이 아니라 약속하신 말씀을 믿는 믿음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네요..

Flagstaff의 호텔은 Mariott 호텔이었습니다. 너무 좋은 시설에 감탄하며 편하게 잤습니다. 이번 여행에서는 숙소가 모두 참 좋은 곳으로 예약이 되어서 다행이었습니다. Priceline에서 예약했는데, 평균 60불 정도의 가격에 매우 좋은 호텔에서 머물게 되었습니다. 운전을 혼자서 도맡아 하는 저로서는 저녁에 피로가 잘 풀리는 것이 중요한데, 좋은 호텔의 좋은 침대에서 쉬면서 아침에 몸이 온전해지고, 운전할 준비가 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앞으로 다시 차로 여행하게 된다면 숙소를 좋은 곳으로 정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야겠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Grand Canyon으로 갔습니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 깨끗한 시야... 주님이 마련해 놓으신 배려였습니다. Grand Canyon에서 느낀 것은 딱 하나였습니다.

Canyon이 Grand하다는 것.

전에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느꼈던 것과 똑 같은 느낌... 그냥.. 크구나... 하는 것. 오히려 크다는 생각과 함께, 작다는 생각이 함께 느껴졌습니다. 내심... 하나님의 위대하신 일에 대해서 시각적으로 느끼고 싶은 욕심이 있었는데, 그 동안 제가 느껴왔던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비하면 참으로 보잘 것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이들은 Grand Canyon의 경치에는 관심이 없었고, 그 주변의 눈을 보며 즐거워했고, 오스틴에서는 해 보지 못했던 눈싸움을 하며 참으로 좋은 시간을 가졌습니다.

Grand Canyon에서 그 다음 숙소로 가는 길... 밤에 출발했습니다. GPS의 인도를 따라 갔는데, 가다보니 6000피트가 넘는 험한 산을 넘는 길이었습니다. 오가는 차는 거의 없고, 길은 매우 위험하게 구불거리는 그 산을 넘으며, 주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을 구했습니다. 그리 무섭거나 두렵지는 않았지만, 긴장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인도로 무사히 숙소에 도착했습니다.

주일부터 계속 제가 운전을 했는데도, 전혀 지루하거나 힘들지 안네요.. 힘이 넘치고, 오히려 운전하는 것이 더 즐거워집니다.

앞으로 남은 여정도 주님 안에서 안전하고 즐거운 여행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여행...

지금 엘파소의 한 호텔에 있습니다.
지난 주 목요일에 갑자기 서부여행을 확정하고, 정말 후다닥 준비를 해서 주일 아침 1부 예배 후 서부로 향해 떠났습니다. 먹을 것을 바리바리 싸들고 차 트렁크를 가득 채우고나서 헝그리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El Paso를 들러 Grand Canyon과 Zion Canyon (혹은 Bryce Canyon)을 돌아보고, Las Vegas에서 잔 후 바로 LA로 가서 약 이틀 정도 머문 후, 다시 El Paso를 통해서 Austin으로 돌아오는 일정입니다. 어디를 가든지 철저한 계획이 미리 세워지지 않으면 성에 차지 않는 저인데... 이런 일이 발생하고 마네요...

어스틴을 출발해 I-10을 타고 8시간을 달렸습니다. "광야"라는 말이 어떤 것인지 실감나게 하는 도로 주위의 풍경, 일직선으로 뻗어 있는 제한속도 80마일의 도로 위를 달리면서, 텍사스의 또 다른 면을 보았습니다. '이게 서부로 가는 길이구나'하는 생각을 하며, 미국이란 나라는 도대체 어떤 나라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달렸습니다.

오랜 시간 운전을 하면서도, 아내에게 운전대를 맡기지 못하고 저 혼자서 계속 운전했습니다. 아마 앞으로 집에 돌아 올 때까지 거의 그렇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가 훈전을 거의 혼자서 감당하는 이유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제가 운전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운전석에 앉을 때, 편안함을 느낍니다. 차와 제가 일체가 되었다는 느낌, 그 안에서 어딘가를 달린다는 것이 저에게 기쁨을 줍니다.
둘째 이유는 첫째보다 더 중요한데, 그것은 제 가족을 제가 책임진다는 것 때문입니다. 아내와 아이들의 안전이 저에게 달려 있고, 또한 그들을 기쁘게 하는 일을 위해 제가 헌신하고 있다는 가장으로서의 책임감과 봉사욕구를 만족시키기 때문입니다. 내가 가족을 위해 중요한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저에게는 큰 기쁨입니다. 특히, 오랫동안 운전을 해 왔지만, 아직도 운전을 부담스러워하고, 즐겨하지 않는 아내에게 남편으로서 해 주는 하나의 배려이고 섬김이라는 것이 저를 기쁘게 만듭니다.
마지막이면서도 가장 중요한 이유는, 제가 아내의 운전을 신뢰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아내도 운전을 잘 합니다. 아직 사고를 내 본적이 없는 운전경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 저는 아내의 운전실력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아내가 운전석에 앉아 있고, 제가 조수석에 앉아 "쉬려고" 할 때, 거기에는 쉼이 없습니다. 오히려 불안해지고, 긴장이 되는 가운데 더 힘들어 지기만 합니다. 차라리, 제가 운전대를 잡는 것이 몸은 힘들지만, 덜 긴장하고, 덜 피곤합니다.
그래서 결국 제가 운전을 도맡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왜 아내에게 운전대를 맡기지 못할까?'를 계속 묵상하면서,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생각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면서 주님을 믿는 것이란 내 인생의 운전대를 그분께 맡기는 것이라고 자주 말해줍니다. 그런데 내가 주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않는다면, 운전대를 맡기는 것이 오히려 나에게 부담이 되고, 스트레스가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이번 여행에서 얻은 결론입니다. 험한 인생을 아무도 의지하지 못하고 스스로가 주인이 되어서 운전대를 꼭 붙잡고 긴장하며 사는 것도 쉽지 않는 것이고, 예수님은 그 무거운 짐을 예수님께 맡기라고 하시지만, 신뢰가 형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나의 안전과 인생의 향방이 결정되는 운전대를 그분께 맡기면, 그것은 오히려 더 무거운 짐을 지는 것이 되고 맙니다.

주님은 선하신 목자입니다.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그것을 진심으로 믿는다면... 내가 내 인생을 주장할 때보다 오히려 그분이 나를 주장하실 때, 다시 말해, 내가 그분의 온전한 종이 되어 그분의 인도하심을 철저히 따를 때, 거기에서 진정한 안식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역으로 내가 그분을 따름으로 안식을 누리는가가 내가 그분을 진정을 믿는지, 신뢰하는지를 가늠하는 척도가 됩니다.
그분을 신뢰하면 맡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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