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그분의 의지.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요 19:28)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시던 그 과정에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특성은 철저한 수동성이었다. 그분은 십자가의 고난이 시작되던 감람산에서부터 시작해서 자신을 위해 적극적으로 변호하신 적이 없고, 더구나 이적을 배푸시지 않았다(말곰의 귀를 고쳐주신 것을 제외하고는). 체포부터 시작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기까지 예수님은 세상의 악과 권력에 철저하게 희생당한, 마치 아무 힘이 없이 맹수의 공격에 당하는 어린 양과 같은 모습이셨다. 이런 모습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그의 십자가 사건을 실패한 사역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오히려 이 모든 것은 세상의 악의 속성을 속속들이 알고 계신 하나님에 의해 철저하게 계획된 사건인 것이다. 마치 가룟인 유다처럼, 그 악, 악한 자들은 자신들의 파워를 최대한으로 끌어 올려 창조주이신 예수님에게 해를 가하기를 갈망했고, 실재로 행동에 옮겼다. 하지만 예수님 한 분께 쏟아부은 그들의 악으로(혹은 그 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지극히 놀랍고, 지극히 선하신 일을 이루신다. 그것도 철저히 그분의 계획에 의해서...

십자가에 운명하시기 전, 예수님은 당신 편에서 이루어져야할 일들이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면밀히 점검하셨다("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태초에 계획하신 일들이었고, 성경을 통해 계시된 것들이었다. 당신 자신의 시나리오대로 일점일획도 어김없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보신 후, 성경에 예언된 대로(다시 말하면 당신 자신의 계획 대로) "내가 목마르다"는 말씀을 하신다.

십자가라는 비극의 자리는 참으로 paradox한 자리이다. 그것은 최고의 범죄자들의 자리였지만, 가장 고귀한 하나님이 달리셨던 자리였고, 철저한 수동성을 보이신 예수님에 의해 그 어떤 사건보다도 적극적으로 기획된 사건이었으며, 그 무엇보다도 잔인하고 끔찍한 형벌의 자리이지만, 그 무엇보다도 고귀하고 순수하며 아름다운 자리이고, 완전한 실패자의 자리이면서도 성경 역사상 최고의 승리의 자리이다.

믿음의 길을 가면서, 때로는 하나님이 이 세상의 역사를 이끌어가시는 주인이신가, 그분이 내 삶에 관심이라도 있으신가하는 회의가 들 때가 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어떻게...'라며 스스로에게 질문한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제한된 시야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인간의 한계 안에 머물러 있는 우리 눈에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그저 아무런 힘없이, 능력없이 끌려가는 죄수일 뿐인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믿음의 눈이 필요하다. 보이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분의 선하심과 전능하심을 믿는 믿음. 그리고 그 믿음 가운데 더욱 더 주님을 붙잡고 의지하는 신뢰. 그 믿음과 신뢰가 강해져 갈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시야를 조금씩 획득하게 된다. 그러는 가운데, 마치 엘리사가 천군천사가 자신을 호위하고 있는 것을 본 것처럼, 그 전에는 전혀 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를 보는 것이다. 그것이 믿음의 삶이고, 그것이 믿는 자만이 누리는 신비스러운 비밀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날을 기념하는 성 금요일인 오늘. 슬픔과 기쁨, 고통과 쾌락, 수치와 영광, 탄식과 감사가 공존한다.

참으로 기이한 날이다. 하나님의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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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참된 목회자...

이 글은 "복음과상황" 2013년 4월호에 게재된 김회권교수의 "사랑의교회 사태로 본 목회자의 욕망" 중 일부를 허락없이 옮겨 놓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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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혼미의 시대에 영적 분별력을 가진 사람들이 천연기념물처럼 희귀해진 오늘, 한국교회 그리스도인들이 분명히 알아야 할 한 가지 진실은 회개와 쇄신을 요청하는 설교자가 하나님의 영에 가득 찬 예언자요 하나님으로부터 온 참 선지자라는 사실이다. "평안하다"고 외치며 '돈'과 '쾌락'을 추구하는 설교자들, 그리고 대중의 중심 죄악을 규탄하거나 전혀 애통해하지도 않는 설교자들은 하나님과 아무 상관없는, 기독교를 빙자한 종교 흥행사들이다. 하나님에게 속한 설교자들은 하나님이 마음 쏟는 곳에 자신의 마음을 쏟는다. 하나님의 마음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던져져 사는 일 자체가 힘겨운 가장 연약하고 병든 사람들의 삶의 자리다. 가장 연약하고 병든 지체들에게 마음이 잇닿아 있는 상한 목자들이야말로 예언자적 설교자다. 예언자적 설교는 시대의 죄악을 규탄하지만, 그 시대의 중심 죄악 때문에 상하고 망가진 하나님의 어린 양을 돌보는 위로 넘치는 설교다. 곤핍한 자들을 도와주는 황금이 입과 혀, 십자가 핏빛 진심이 깃든 심장을 지닌 설교자를 통해 선포되는 설교다.
(중략)
성령을 알고 성령에 사로잡힌 목회자들은 하나님께 가까이 갈수록 자신의 욕망을 쉽게 부인할 수 있고, 자아가 작아지는 경험을 한다. 타인을 지배하고 조종하려는 권력 정치의 달인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의 몸과 마음을 하나님의 영에 맡겨버리는 순명과 순종만이 하나님을 아는 목회자의 특징이다. 목회자들이 대기업가들이나 정치 지도자들과 쉽게 친교하면서도 어떤 거리감이나 긴장감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들을 그들과 동류의 지배자나 왕적 통치자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대형교회 건물, 불필요한 학위, 정치 경제 거물급과의 스스럼없는 친교와 어울림을 과시하는 것은, 교인을 섬기려는 마음보다는 지배하고 통치하려는 세속군주적 욕망의 변형일 가능성이 크다. 실명을 부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엄청난 군중을 목회한다고 믿는 대형교회 목회자는 겸손하신 성령의 역사에 오랫동안 노출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성령은 거룩한 진리의 영이시며 지극히 인격적인 영이시기에,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군중을 모아놓고 목회한다고 주장하는 대형교회 목회자들의 마음 안에는 거하실 공간이 없을 것이다.
(중략)
교회의 진정한 부흥과 성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보혈 공로와, 그것을 개인의 심령 속에 매개하고 실재화하시는 성령의 종횡무진의 역사하심으로 가능하다. 그러니 모든 목회자는 성령의 역사에 자신의 몸과 마음을 내맡기기만 하면 된다. 기도와 찬양, 설교와 예배는 이 성령의 자유로운 역사하심을 매해하고 중개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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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글이 참으로 주옥같은 글입니다. 가능하면 전문을 정독하시기를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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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믿었으므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요 16:27)

십자가의 고난을 목전에 두신 예수님께서 하늘의 비밀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이 땅에서의 유언을 남기시면서 당신께서 가장 하시고 싶은 말씀, 제자들을 붙잡아 주실 그 놀라운 비밀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 중 제자들에게 가장 위로가 되고 소망이 되었던 말씀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는 말씀이 아닐까?
유대인에게 하나님은 지금의 이슬람의 알라와 비슷한 면이 있었다. 그분은 크고 위대하시며,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신 분으로 범접하기 힘든 분이셨다. 특히 예수님 당시에는 이스라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많이 약화되었고, 절대자로서 멀리 떨어진 율법의 체화된 모습이 지배적이었다. 그런 이미지는 율법주의자들이었던 바리새인들에 의해 강화되었다. 따라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고, 그분과 친밀한 인격적을 관계를 갖는 것도 불가능하게 여겨졌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그분은 내 아버지가 되신다. 그럴 뿐만 아니라 그 아버지는 엄격하고 무섭기만 한 체벌주의적인 아버지가 아니라, "친히(himself)"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사실 그 말씀이 제자들에게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보다 더 복음이 아니었을까?

그 아버지의 사랑. 친히 직접 사랑을 베푸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조건에 대해서 예수님은 단 하나로 정리해서 말씀하신다. 그것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을 믿었으므로"였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께서 주요 구주임을 믿는 믿음이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필요충분조건이 되는 것이다.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회의가 들 때가 있다. 그분이 사랑이 멀게만 느껴지고, 마치 세상에 혼자 던져져 고아가 된 것 같은 느낌으로 힘들 때가 있다. 느껴지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 하나님이 사랑을 확신하는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오늘 가르치신다. 그것은 내 안에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있는가? 그 크기와 상관 없이, (내가 임의로 만들어낸 것이 아닌) 성경에 객관적으로 묘사된 그 예수, 그분의 대한 사랑이 존재하는가, 그리고 바로 그 예수님을 내 하나님이요 구원자로,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이 땅 가운데 보내신 메시야로 믿는 믿음이 있는지를 확인하면 된다. 그 믿음이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나를 친히 사랑하고 계시는 것이다. 내가 그것을 친밀하게 경험하든 말든 말이다. 그 사랑과 믿음이 있는 자는 하나님께 빌립과 같은 요구를 하지 않는다.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믿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진리다.

오늘도 하나님의 사랑 안에 푹 젖어 살련다. 감사와 기쁨으로... 그것은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니까... 그것도 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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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글]"먼저 그의 의를 구하라"

아래 글은 제 글이 아니라 존경하는 역사학자이신 이만열 교수님께서 그분의 페이스북에 올리신 것을 퍼온 것입니다. 너무 좋은 내용이라 나누고 싶어서 이렇게 허락도 안 받고 퍼날랐습니다. 이만열 교수님께는 죄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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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그 의를 구하라] 오늘 오후 3시부터 ‘함석헌읽기’강독회가 푸른역사 아카데미에서 모였다. 이 강독회는 매월 한 번 모여 <함석헌저작집>(한길사, 2009) 전 30권 중 1권씩을 읽어나가고 있다. 이번 모임에서는 김제태 목사의 인도로 <먼저 그 의를 구하라>라는 제목의 제 18권을 읽고 토론했다. 이 책에는 1927년 7월 <성서조선> 창간호에서 1940년 3월 제 134호에 이르기까지 함석헌이 쓴 32편의 글을 수록하고 있다. ‘먼저 그 의를 구하라’라는 글은 32편의 글 중 맨 처음에 나오는 글의 제목이기도 하다. 
이 책의 제목 ‘먼저 그 의를 구하라’는, 신약성경 마태복음 6:31-33절에 나오는 다음의 성경 귀절에 나온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개정개역판)
함석헌의 글에는 위의 성경 구절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에서 ‘그의 나라’는 빼 버린 채 ‘먼저 그 의를 구하라’라고만 언급했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 글이 쓰여진 시기가 1927년 ‘일제강점하’라는 사실도 그 점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일제는 일본 이외의 어느 나라도 용납하지 않으려 한 때가 있었다. 
함석헌은 그 시대에 이런 제목의 글을 쓰면서 많이 망서렸다. 당시 조선은 이 말을 받을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그의 말이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눈물로 양식 삼아가며 북만(北滿)으로 들어가는 형제의 손을 붙잡고 이 말로써 전송할 이가 몇인가. 벗은 허리를 꼬부리고 모욕을 옷 삼아 현해탄을 건너가는 자매를 보고 이 말로써 진정한 위로를 드릴 이가 과연 몇인가. 없다.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 그 안에 새 생명이 창조된 이를 제하고는. 만일 그리 말하는 이가 있으면 그는 양심을 속이는 자라고 꾸짖음을 들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미친 자라고밖에 인정을 받지 못하리라. 실로 이 가르침을 그대로 믿기에는 우리 현실문제는 너무 절박한 듯하다. 너무나도 명백한 듯하다. 이 사실을 모르는 체하고 복음을 믿기는 너무나도 무지한 듯하다. 너무나도 시대착오적인 듯하다. 너무나도 고집인 듯하다. 이 가르침을 실행하는 것은 너무나도 개인 중심적이요 너무나도 고식적이요 너무나도 동포애가 없는 듯하다.” 
함석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먼저 그 의를 구하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이유를 이렇게 강조했다. “현실문제가 아무리 급박하더라도 지식이 아무리 긍정을 아니 하더라도 복음은 진리다. 어찌할 수 없이 진리다. 참 생명을 좇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당시 조선의 젊은이들과 민중을 향해 이렇게 외쳤다. 
“근역(槿域:조선)의 자녀들아, 의를 구하자. 생명을 위하여 먼저 그 의를 구하자 - 현실이 아무리 급박한 듯해도. 이는 우원(迂遠)하고 어리석은 말 같고 점점 더 패멸로 인도하는 말 같으리라. 끌어올리는 두레박줄을 놓으라는 것같이 믿을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듯하리라. 그러나 진리다. 생명에 이르는 진리다. 근역의 자녀들아, 오늘날 우리는 불행에 우는 자다. 환난의 물결은 우리 위를 넘고 비탄의 부르짖음은 우리 입에 가득하다. 우리는 온갖 것을 저주하고 싶고 온갖 것을 파괴하고 싶다. 그러나 아니다. 그로 인하여 살길은 아니 온다. 구원은 오직 의의 신으로부터 온다. 그의 의를 구하라. [요한계시록 21: 3-4절 인용] 흰옷 입은 근역의 자녀들아, 그 의를 구하여라. 네 입은 옷은 정의의 흰 빛이 아니냐. 네 맘도 그와 같이 되기를!”
이 글을 쓰던 시기의 함석헌(1901-1989)은 27세에 불과했다. 동경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기 1년 전, 그는 김교신 등 선후배 동지들이 동인지로 간행한 <성서조선> 창간호에 이 글을 발표했다. 글은 당시 일제의 검열을 피할 정도의 수준을 유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표현과 언론의 자유가 있었다면 아마도 식민지 조선의 비참한 현실 묘사와 더 절절한 호소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 비참한 식민지 상황에서도, 그 비극적 절망 속에서도 낙심하지 말고 ‘먼저 그의 의를 구’해야 한다고 희망을 강조했던 것이다. 상황이 아무리 다르더라도 함석헌이 강조한 ‘먼저 그 의를 구하라’는 당부는 오늘날에도 들려져야 한다. 
오늘 강독회에서 토론하면서 필자는 내 부끄러움을 고백했다. 함석헌이 27세의 젊은 나이에 조국의 사회경제적 억압과 궁핍 속에서도 성경의 생명의 말씀을 씨알들에게 소개하고 용기와 희망을 북돋우려고 한 것은 놀랍다고 했다. 그러나 필자는 성경의 그 대목을 여러번 읽었지만 그 말씀에 주목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젊은이들이 사악한 정권 하에서도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등의 사회경제적 욕구에만 관심을 갖고 스펙쌓기에만 열중하지, 자기 사회의 정의의 문제에 대해서는 무관심해 하는 현상을 보면서 이 말씀에 주목하게 되었다. <복음과상황> 2011년 5월호애 ‘빚진자들이 무임승차까지 한다면’이라는 권두 칼럼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오늘날 젊은이들이 취업전선에 몰두하면서 역사의식마저 상실한 듯하다. 젊은이들을 그렇게 만든 기성세대로서 무력감과 자괴감을 통감한다. 그렇다고 젊은이들의 무기력함이 용서받거나 변명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시대 풍조도 경제 이외의 것에는 신경쓰지 못하도록 교묘하게 옥죄고 있어서 무기력증을 반전시킬 분위기 조성 또한 쉽지 않다. 그러나 젊은이들이 이 함정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결국 경제도, 정의로운 사회도 기약하지 못한다. 이럴 때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마 6:33)는 약속의 말씀에 용기를 얻는다. 그렇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결단 없이는 이 정권, 이 암울한 세대가 파놓은 깊은 수렁을 헤쳐나지 못한다. 이승만정권이나 유신독재체제, 신군부파쇼체제의 엄혹함 속에서도 학생과 젊은이들은 투철한 역사의식을 가지고 불의에 항거하면서 자기 몸을 던졌다. 그것이 민주화를 가져왔고 산업화를 이끌었다. 그 때도 취업자리가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경제적으로 암담했다. 그러나 그들은 공동체의 비전을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는’데서 찾았다. 그것은 곧 스스로의 희생을 의미했다. 그 요구에 먼저 순응했다. 자기 몸을 불사르는 젊음들의 희생이 이만한 정도의 오늘을 이룩했다. 호구지책과 안일한 도생(圖生)만을 위해 젊음을 도로(徒勞)하다가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는 말할 것도 없고 거기에 부수적으로 약속한 ‘이 모든 것’도 기약할 수 없다. 무임승차를 즐기는 공동체에 무슨 미래가 약속될 수 있겠는가.”
함석헌은 1927년 일제 강점하 자기 동족이 희망과 용기를 갖도록, 젊은이다운 혈기를 전혀 노출시키지 않은 채 이 글을 썼다. 이를 보고 놀라움과 감사의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27세에 주목했던 그 말씀이 필자에게는 이 나이에 눈에 띄었으니 그것도 부끄럽지만,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는 후반부의 사회경제적 약속을 보고서야 그 앞에 나오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한 말씀에 주목하게 되었으니 그건 더 부끄럽게 느껴졌다. 함석헌이 식민지하의 상황에서 ‘먼저 그 의를 구하라’고 한 것은, 민주화 산업화 시대에 ‘먼저 그 의를 강조한’것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다. 그는 젊은 시절, 벌써 기독교 사상가의 가능성을 이렇게 보여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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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이르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요 11:47-48)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 참으로 많은 기적들을 행하셨다. 그리고 그 기적은 심지어 죽어서 냄새나는 자를 살리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것은 모든 사람을 경악하게 할 능력이었다.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은 모두가 표적이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점이다. 기적을 행하는 그 능력, 그 사건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무엇인가를 가리키고 있었고, 그것은 바로 그것을 행하시는 그분의 정체성이었던 것이다. 예수님의 기적은 그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가리키는 지시자 역할을 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이 행하신 놀라운 일을 단순히 기적이라 하지 않고 표적이라고 했던 것이다.
예수님을 대적했던 종교지도자들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표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예수님의 기적에 대해 논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은 매우 바람직한 질문이었고, 예수님이 바라시던 질문이었다.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이르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하나님께서 내 인생 가운데 행하신 많은 일들을 보면서 나는 지속적으로 물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것들을 누리는 가운데 나는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그분이 베푸시는 것을 받아 누리는 것으로 만족하고 거기서 끝날 것인가? 아니면 그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그분의 뜻을 좇으며 순종하는 가운데 거룩한 삶을 살 것인가? 이 질문을 하는 것 그 자체, 그리고 그 질문에 바른 답을 하는 것은 신앙생활에 매우 중요한 것이다. 이 질문을 잊고 살 때, 우리는 신앙생활의 역동성을 잃어버리게 되어 관성화되고, 마귀의 밥이 되기에 알맞은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바른 질문을 던진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내 놓은 그들의 답은 가히 경악할 만한 것이었다.

"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이 날부터는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53)

예수님의 기적에 대해서 소상히 알고 있었고, 그것이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표적임을 알고 있었던 그들이 예수님을 대적하고, 급기야 그분을 죽이는 모의를 시작하기에 이른 것이다. 아이러니 한 것은 그 살인 모의가 예수님이 행하셨던 가장 극적인 표적인 나사로를 살리는, 죽은 사람을 살리는 그 사건 바로 뒤에 있었다는 것이다. 나사로를 살리신 것은 단순히 한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죽어 냄새나는 인간들을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의 표현이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매우 중요한 사건이며, 태초부터 계획된 하나님의 세상구원에 대한 비밀을 공개하는 것이었다. 아이러니하게 이런 것을 가장 잘 알고 가장 환영해야할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평소에는 원수로 서로에 대해 으르렁거렸던 그들)이 연합하여 예수님을 대적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대적한는 종교지도자들은 인간의 악한 본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 본성은 선악과 사건으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자기중심성에 근거한 하나님의 상대화이다. 즉, 타락한 인간은 모든 것의 가치판단에 자신의 욕망을 중심에 두며, 그것에 부합하지 않으면 심지어 하나님의 위대한 표적이라 할지라도 "거추장스러운 것", "제거되어야 할 것"으로 치부해 버린다는 것이다.

"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는 두 가지가 중요했다. 한 가지는 그들의 종교권력을 유지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유대의 종교-사회적 자치를 유지해 나가는 것이다. 정치적으로는 로마에 복속되어 있었지만, 로마의 피정복민 정책으로 어느 정도 자치를 허용받았었는데, 그것을 지키는 가운데,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해 나가는 것이 그들에게는 가장 중요했던 것이다. 그것에 걸림돌이 되는 것은 그 무엇이든지 간에--심지어 하나님조차도--제거되어야할 것으로 전락해 버리는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가장 은혜롭고 가장 찬양받아 마땅한 하나님의 역사, 그리고 이 땅에 인간의 몸으로 오신 하나님 당신 그 자체를 대적하고 거부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죽일 모의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가증한 성향은 그들만의 것이 아니고 타락한 인간 모두에게 있는, 따라서 내 안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한 번 겸손을 생각한다. 인간들 사이에서 예의를 차리기 위해 자신을 잠시 낮추는 척하는 거짓 겸손이 아니라, 창조주이시고 왕이시고 구원자 되신 하나님을 바로 인식하고, 그 앞에서 무지하고, 죄악되고, 무능력한 존재인 나 자신을 인식하는 것. 그리고 내 안의 죄악된 욕망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늘 배우고, 성경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관점으로 내 안을 채우려는 노력. 부단한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특히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들, 믿음의 공동체에서 중요한 위치에서 섬기는 자들, 그리고 영적인 리더들은 이 부분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 우리가 꼭 염두에 둬야 할 것은 바로 예수님을 죽일 모의를 한 자들이 당대 존경받는 종교 지도자들이었다는 것이다.

남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내 이야기다. 내가 문제다.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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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위대하심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요 11:32)

사람들은 예수님을 직접 볼 수 있다면, 그 믿음이 참으로 커지고, 하나님께 헌신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이다. 예수님 당시 그분의 이적을 보고도 그분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그분에 대한 참 믿음을 가졌던 사람들은 극히 소수였다. 그 소수 중에서도 도드라진 믿음을 가졌던 자들, 어찌보면 예수님의 제자들보다 더 진실하고 바른 믿음을 가졌던 사람들이 바로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였다. 마르다는 베드로가 디베랴 바닷가에서 드렸던 그 위대한 고백과 동일한 고백을 드렸고,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직전, 그분의 장례를 예비했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들조차도 예수님이 진정으로 어떤 분인지를 완전히 알지는 못했다. 그들의 인식능력에 한계가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예수님의 크심이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그 때나 지금이나 죽은자는 죽은자일 뿐, 다시 살 수가 없는 것이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믿음은 그 인식의 한계 내에 머물렀다. 하지만, 예수님은 "나사로야, 나오라!"라고 명령하심으로써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을 해내셨다. 그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신앙생활의 초기에는 모든 것이 새롭기 때문에 열심히 배우려고 한다. 그 배우려는 자세 이면에는 자신의 지식이 짧다는 고백이 있다. 하나님에 대해서 많이 알지 못한다는 인정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초신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갈 수가 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교회 문화와 성경의 지식에 익숙하게 되면, 어느새 마치 자신은 다 아는 것처럼 하나님의 지식을 추구하는 열정이 식게 된다. 그 결과는 신앙생활의 나태함으로 나타나고, 믿음의 열매들은 점점 줄어들게 된다.
하나님은 크신 분이시다. 그 크심은 초신자가 몇 년 열심히 성경을 공부하고 교회생활과 문화에 익숙하게 되었다고 파악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나님의 크심에 비교한다면, 우리의 자람은 미미한 것일 뿐인 것이다. 따라서 언제나 말씀을 대할 때, 예수 그리스도를 대할 때, 우리 안에는 우리의 무지에 대한 인정에서 비롯되는 겸손이 자리 잡아야 한다. 그분은 항상 내 생각보다 크시다는 것을 명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자세로 성경을 접할 때, 성경은 늘 새로운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새로운 예수님의 면모, 그분의 능력, 그분의 인격, 그분의 뜻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새로움 속에서 예수님에 대한 지식은 자라가는 것이고, 우리의 신앙은 성숙해가는 것이고, 우리 안에 지적 교만이 자리잡을 틈을 주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건강한 신앙생활이다.

이 아침. 하나님 앞에는 늘 겸손해야 함을 깨닫는다. 내 안에 있는 교만을 지적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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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시 18:1)

다윗의 이 고백은 개인적으로 다윗의 고백 중 가장 위대한 고백들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이 고백은 그가 하나님과 내밀한 인격적인 관계 가운데 있었으며, 그 속에서 그분을 경험했으며, 또한 그분을 왕으로 모시고 그분의 뜻대로 살고자 피나는 노력을 기울였음을 보여주는 고백이기 때문이다.
언뜻 보면 이 고백은 가장 쉬운 고백인 것처럼 보인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자라면, 그분을 "나의 힘"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당연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적어도 내게는... 나는 솔직히 하나님께 이런 고백을 잘 드리지 못하고, 고백드릴 때 조차도 진심이 담겨 있을 때가 그리 많지 않다. 그것은 지적 수준에 머물러 있을 때가 대부분이다.
다윗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시편 18편이 그것을 보여준다. 7절부터 15절까지는 그의 고백이 어디에서 기인했는지를 보여준다. 그가 묘사하는 것은 그의 "힘"되신 하나님의 두려우신 영광과 능력과 위대하심이다. 그는 그것을 친히 경험했고, 그 앞에 무릎꿇었다. 또한 "사망의 줄"과 "불의의 창수"(4), "스올의 줄"과 "사망의 올무"(5) 가운데서 자신의 철저한 무능력을 경험했다. 그를 둘러싼 원수들에게서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절망을 경험했다.(3) 하나님의 위대하심의 경험과 자신의 무능함의 경험. 이 두 가지의 경험이 자연스럽게 다윗을 하나님께로 인도했다.
그 결과는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2)라는 고백인 것이다. "반석", "요새", "건지시는 이", "하나님",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 "방패", "구원의 뿔", "산성"은 모두 같은 의미이다. 반복해서 여러번 고백할 수 밖에 없을 만큼 '진하게' 그를 위험에서 건지신 하나님을 경험한 것이다. 그런 경험의 결과가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라고 소리 높여 하나님을 찬양하며,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라고 고백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그 고백은 그의 삶과 경험에서 우러난 영혼의 고백이었던 것이다. 그런 고백을 하나님께서는 정말 기쁘게 받으신다.

내 경우는 어떤가? 나도 역시 다윗과 같은 고백을 입에 늘 달고 살지만, 그것은 입술의 고백일 뿐, 내 중심에는 교만이 자리잡고 있고, 너무나 많은 경우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다. 내 삶을 그분께 의탁하려고 하지만, 나는 어느새 내 힘과 능력을 의지해 삶을 살아가며, 하나님의 뜻,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안중에도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 중심이 되어 규정되어야 할 "악"은 어느새 "나에게 해를 끼치고,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들"로 규정되어, 내가 스스로 생각하는 "악"과 싸우기에 바쁘다. 그 가운데 아내가 언젠가 지적한 대로 "성마른" 자가 되어 버린다. 하나님은 내가 규정한 악을 처리하는 쓰레기 처리인, 그리고 내 욕망을 성취해 주는 알라딘의 램프의 거인으로 전락해 버린다. 중심에 "사랑"을 잃어버리고 율법주의자가 되어 정죄하기에 바쁘다. 심지어 하나님께 정죄의 대상으로 삼아버리는 악을 행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동시에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흉악한 악을 행하기를 서슴지 않으며, 그런 죄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쉽게 용서해 주실 것으로 "믿고" 가볍게 넘겨버린다. 가증함의 극치를 달리는 내 모습...

그런 가운데 "나의 힘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라는 입술의 고백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그저 기도하기는, 내 삶 가운데 위대한신 하나님을 경험하며, 그 앞에 무릎꿇고 겸손히 내 무능력을 고백하고, 지극히 무능한 자에게 임하셔서 당신의 일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할 밖에... 성령께서 너무나 자주 솟아오르는 교만의 싹을 잘라 버리고 철저하게 낮아짐으로 하나님과 남을 높이고, 오로지 사랑만으로 가득찬 내면이 되기를 기도할 밖에...

오늘 아침, 다윗을 보며 갈길이 너무나 멀다는 것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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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6:1

"여호와여 주의 분노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오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시편 6:1)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 기도이다. 시편 6편에서 시인은 자신의 죄악과 허물로 인해 탄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고통받는 가운데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전체적인 논조는 자신의 허물보다는 자신에게 위해를 가하는 적들의 악으로 인해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6절)라고 탄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10절에 그가 선포하는 것처럼 "내 모든 원수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떪이여 갑자기 부끄러워 물러가리로다!"(10절)이라고 선포함으로 악인들에 대한 심판을 부르짖으며 그의 기도를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책망하지 마시오며",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라고 하는 것일까? 시인이 책망받고 징계받을 만한 것이 뭐가 있길래?
동일한 저자인지는 잘 모르지만, 이 시편은 5편의 연속선상에서 볼 때 이해가 될 수 있다. 5장에서 시인은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직접 복수를 하지 않고 하나님께 나아가 경배함을 노래한다. 그것은 악을 그냥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동일한 악으로부터 지킴과 동시에 그들에 대한 심판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다. 6편에서도 동일한 믿음을 보여준다. 본문 후반부에 노래하듯이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으셔서 그들을 징계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견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 나아가고 하나님의 개입을 바라는 시편 기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께 나아가는 자신을 받아 주실 것인가와 자신의 편이 되어서 대적들을 심판하실 것인가이다. 그것은 단순히 자신이 그분께 나아가는 것, 그리고 자신의 대적이 악하다는 것만으로 자동적으로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이고, 그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죄악이며 허물이다. 그것은 사람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에 대한 것이다.
시인은 자신 또한 하나님의 징계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알고 그것을 두려워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징계 중 가장 무서운 것이 그냥 내어버려두심임을 알고 하나님께 그런 징계를 내리지 말아달라고 청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자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하나님께서 아무 것도 하지 않으시는 것 아닐까?
사실, 내가 어떤 환경 가운데 있건 간에, 그 환경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내 모습이다. 내가 수 많은 대적 가운데 둘러 싸여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과 내가 사랑의 관계 안에 있다면, 두려울 것이 없는 것이다. 반면, 아무래 내가 세상적으로 잘 나간다 할지라도, 혹은 스스로 의롭다 생각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가 확실하지 않다면, 정말로 두려워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영이신 성령님은 나에게 큰 위안이 된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성부 하나님과 나 사이의 중보자가 되시며, 성부의 진노를 받아 마땅한 나를 위해 중보하시며, 그 관계를 사랑의 관계로 맺어 나가시기 때문이다. 사실, 그리스도가 아니었다면, 내가 악인들을 처벌해 달라고 기도를 할 수 있을까? 내 자신이 악인 중 괴수인데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바랄 수 있으며, 그것 때문에 나에게 가해지는 세상의 악에 대해서 악으로 갚지 않고 하나님께 맡기며 초연하며 어느 정도 평정심을 유지하는 가운데 선으로 악을 이길 수 있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특권이다. 그저... 감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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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한 자들에게 둘려싸여 있는 자의 고백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리이다."(시 5:7)

악을 행하는 대적들로 인해 고통받는 시편 기자... 그 고통으로 인해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했던 아픔과 절박함을 가졌던 그... 오만과 거짓과 피흘림과 사기의 칼로 자신을 위협하는 대적들을 대하는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만한 믿음의 고백...

악의 특징 중 한 가지는 그것이 마치 흡혈귀처럼 그 악을 행하는 자로 인해 당하는 자 안에 악을 불러 일으킨다는 것이다. 악한 대우를 받는 자들은 일반적으로 그 악으로 가해자에게 대항하게 된다. 그것을 우리는 "복수"라고 부른다. 복수의 연쇄사슬 가운데서 문제는 악화되고 인간은 피폐해지지만, 악의 세력은 흥왕해져간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시인은 그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악에 대해 그가 취한 대응방법은 받은 악을 그대로 되갚음해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는 것이고 그 안에 머무르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악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준다. 그 사랑은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기억하게 한다. 하나님께는 결코 악이 함께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악과 함께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복수를 통해 내 안에 응어리진 한을 푸는 것보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이 훨씬 더 좋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인간에 대한 "복수"는 내가 할 일이 아니라 주권자이고 전능하시고 절대선이신 그분의 몫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주인인 그분께 맡기게 된다.

그 결과는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 그분을 예배하는 것이다. 세상의 악이 가장 선하게 사용되는 경우, 세상의 악이 무력화되는 경우가 바로 이런 경우이다. 그 악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고, 그분을 의지하고, 그분을 경배하는 것. 그분께 위로를 받고, 그분으로부터 오는 진정한 치유를 맛보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세상의 악이 흥왕하지 못하고 세력을 잃게하는 "신의 한 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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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쁜 소식...


그토록 기다리던 좋은 소식을 들은 오늘...

기쁘다.

하지만, 박사 학위를 받았을 때도 그랬듯, 그 일이 "내" 일이 아닌 느낌. 하나님께서 내 삶에서 당신의 일을 이루신 것을 구경하는 기쁨. 그분의 능력과 인도를 경험한 하나의 드라마를 관람했을 때의 감동. 바로 그것이다.
내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 그분이 주인공이 되시고, 따라서 그분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야 한다는 것.

오히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더 깊이 체험했기 때문에, 그분에 대한 두려움, 아니 경외감이 한 껏 증대된 것 같다.

수 많은 죄악과 끈질긴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내 인생의 주인 자리를 포기하지 않으신 하나님. 그분의 긍휼과 집념 때문에, 가장 감사하고 그것이 바로 내 진정한 기쁨이 된다. 이 순간... 진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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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과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Obedience is not the condition of salvation, but it is the evidence of it."--Juan Sanchez

내가 너무나 존경하는 High Pointe Baptist Church 목사님의 말씀... 순종은 하나님께 잘 보여서 복을 얻어 내거나 구원을 그 값으로 받는 도구가 아니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외치며, 순종이 없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더더욱 문제가 많은 것이다. 진정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면 (비록 완벽하지는 않을지라도) 순종이 그 삶에서 우러나야 하는 것이다. 순종은 내가 구원받았음을 드러내 주는 증거이다. 다시 말해 순종은 구원받아 변화된 그리스도인에게서 자연스럽게 흘러 나오는 그 어떤 것이다.
더 나아가 구원의 가장 확실한 근거를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라고 주장하는 존경하는 신학자 RC Sproul 교수의 주장과 연결시킨다면, 순종은 바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역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은 순종으로 구체화 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서 그 삶에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순종이 결여되었다면, 혹은 하나님께 순종을 드리면서 그리스도를 가슴 속 깊이 사랑하는 사랑이 결여되어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믿음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 둘은 동전의 양면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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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마지막 주일 아침의 경험.


밤새 눈이 내린 길... 온 가족을 차에 태우고 교회로 가야하는 나는 난감했다. 큰 길은 제설작업이 어느 정도 이뤄져서 문제가 없었지만, 언덕인 우리 아파트에서 고속도로까지 진입하는 것이 큰 과제였다. 아이들을 태우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집을 나서서 고속도로로 이어지는 큰길로 나가니, 아니나 다를까 난리가 아니었다. 눈이 녹다 말고 얼어버린 도로 위에서 거의 모든 차들이 헛바퀴가 돌면서 헤매고 있었고, 그로 인해서 정체는 극히 심했다. 한참을 올라가야 하는 얼어버린 도로는 참으로 난코스 중 난코스였다.
빙판길이나 눈길을 달릴 때면 2단기어로 출발해야하고, 엑셀에 발을 살짝 얹는 듯한 기분으로 달려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 아수라장에서도 내 차는 조금씩 전진했고, 다행히도 내 앞만은 어느 정도 길이 트였었다. 그런데 그 아수라장의 거의 정점에 이르렀을 때, 내 앞에 차가 한 대 갑자기 끼어들어 앞서서 가더니, 대책없이 옆으로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위기의 순간...
미끄러운 도로에서 한 번 멈추면 그 다음에 출발하기가 쉽지 않은데, 결국 멈추고 말았고, 앞 차가 헤매는 가운데 옆으로(앞으로가 아니라) 미끄러져 가는 바람에 내 앞은 뻥 뚤렸다. 이 때 즈음에는 거의 모든 내 옆이나 뒤에서 헛바퀴를 돌며 힘들어 하고 있었다.
'그래. 이제 내가 잘하면 된다!'라고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갔다. 다행히 차는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고, 나는 매우 느리지만, 전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 가장 많이 얼어 있고, 매우 힘들다고 시작하는 부분에서 내 차도 그만 약간의 헛바퀴를 돌기 시작하는 것 아닌가! '여기서 끝인가? 예배에 가야하는데...'라고 절망하고 있던 순간, 바로 뒤를 따라오던 사륜구동차가 멈추더니 운전하시던 아저씨가 내리셨다. 짜증낼 만한 상황인데도, 웃음을 띈 얼굴로 뒤에서 내게 손짓으로 밀어주겠다는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바로 그는 밀기 시작했고, 그의 도움으로 탄력을 받은 나는 2단으로 언덕 꼭대기까지 무사히 올라갔고, 그 후로 교회에 잘 도착해 예배드릴 수 있었다.
 모두가 자기의 문제로 힘들어하며 짜증을 내고 있던 그 때, 헤매기 시작하는 남의 차를 밀어줄 여유를 가진 그 분이 참 고마왔다. 그리고 그분이 오래 밀어 준 것도 아니고, 잠깐 힘을 실어 줬는데도, 그 힘을 받아 200미터 정도의 언덕을 부드럽게 올라가는 내 차를 보면서 누군가 넘어졌을 때, 절망했을 때, 기력을 잃었을 때, 손을 내밀어 약간의 힘을 보태주는 것이 얼마나 큰 도움이 될 것인가에 대해서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2012년의 마지막 주일 아침... 위험하고 힘들었지만, 참으로 감사한 체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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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에 경배하지 말라!"


"또 그리하여 네가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해와 달과 별들 하늘 위의 모든 천체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천하 만민을 위하여 배정하신 것을 보고 미혹하여 그것에 경배하며 섬기지 말라"(신 4:19)
준엄하신 하나님의 말씀 앞에, 칼뱅이 표현한 대로 "Idol Factory"인 나 자신은 결코 설 수 없는 존재임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수 없이 만들어내는 우상들... 그 모두는 결국 내 자신을 섬기고자하는 욕구와 하나님을 내 삶에서 지워버리고자 하는 반역의 욕구의 다양한 표현이 아니던가?
성령께서 끊임없이 일하심으로 그 우상들을 제하시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 성령께 순종함으로 우상이 아니라 하나님께 나아가기로 결단하고 부단히 노력하지 않는다면, 나는 자연스럽게 우상에 둘러싸여 그것들을 경배하는 사람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네가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찾게 되리니 만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그를 찾으면 만나리라"(신 4:29)
오늘 하루 내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찾아야 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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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묵상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그들을 무서워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보다 먼저 가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 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신 1:29-31)

오늘 아침 묵상 말씀이 하루 종일 머리를 맴돈다.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약속을 받으면 좋아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지금 내가 처한 현실에서 하나님께서 그런 약속을 하신다면, 감사가 넘치고 모든 근심걱정이 사라질 것같은데...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정작 이 말씀을 받은 60만의 성인 남자들 가운데 그 말씀을 문자 그대로 믿었던 사람은 이 말씀을 전한 모세 외에 단 두 사람 뿐이었다는 사실. 지금 내가 그 때의 그 사람들과 특별히 다르지 않다고 했을 때, 이 말씀을 철저하게 신뢰할 확률은 60만 분의 2에 불과한 것. 그만큼 말씀을 받고 믿음으로 화답하기가 힘들다는 것 아닌가?

사실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은 약속 하나 뿐이요, 눈 앞에 보이는 것은 거대한 아낙 자손들이 지키고 있는 훨씬 발전된 문명. 사실 거기에 비하면 원시 유목민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이스라엘은 그들이 평가했던 것처럼 메뚜기에 불과한 것. 현실과 하나님의 약속 사이에서 나는 분명히 그들과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신명기의 이 말씀이 간절히 필요한 현재의 상황에서 오히려 이 말씀은 내 안에 하나님에 대한 믿음없음을 드러내 보여준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다른 사람들과 달랐던 것은 같은 것을 봤지만, 그들이 보지 못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그 그림에서 겹쳐서 봤던 것. 메뚜기 같은 자신들과 거대한 산과 같은 적들만 있는 그림이 아니라, 우주를 창조하시고 그 산들을 창조하신 위대한 하나님이 그들의 그림에 존재했던 것. 그것이 그들을 담대하게 했다.

60만 분의 2. 결국 불가능하다는 것. 인간으로서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그 철저히 타락한 본성 상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필요하고, 그분의 십자가가 필요하고, 성령의 역사가 필요한 것같다. 하나님께서 내 죄악된 자아를 십자가에서 처리하시고, 내 안에 거주하시면서 그 분의 능력으로 나를 믿음과 신뢰로 이끌지 않으시면, 나는 그분을 결코 믿을 수 없는 존재인 것. 심지어 구원을 받은 이후에도 하나님으로부터 세상으로 튕겨져 나가려는 죄성을 완전히 처리하지 못해 그분이 직접 잡아주지 않으시면, 은혜의 궤도로부터도 이탈할 수 밖에 없는 형편없는 존재라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죄악된 나를 본다. 그리고 그런 나를 은혜로 강하게 붙드심으로 믿음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본다.

그저... 감사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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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


무지한 자들이 만든 법 하나 때문에, 내 주위는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 요동은 잠시후면 크나큰 태풍이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 태풍에 삶의 수단을 잃고 큰 슬픔에 잠길 것이다. 나 또한 예외가 아니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
풍랑이 일던 바다 한 가운데서 담대했던 바울을 생각한다.
그처럼 담대하게 폭풍 가운데서도 영적 평안함의 고요함을 즐기는 그런 믿음의 힘을 경험하고 싶다. 세상은 우는 사자와 같이 나를 삼키려고 하고, 또 막강한 파워로 개미만도 못한 내 존재를 날려버릴 듯이 달려들지만, 그것은 허상이며, 진정한 파워는 오직 주님께 있다는 것. 그분이 이 세상의 주관자이시요, 모든 결정의 최종 결정권자라는 사실을 믿는 믿음. 그것이 내 안에 흔들리지 않는 평안함을 준다. 나는 그 주님을 믿는 믿음 안에 머물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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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단상 again...

1. 저녁에 집에 가는 길. 복잡한 지하철. 내 뒤에 선 "아저씨"가 나에게 바짝 붙더니 내 등에 얼굴을 대고 휴식을 취한다. 넓은 등짝이라 좀 편해 보였나? 삶에 고단한 한 인생이 내 등에서 안식을 취한다고 기뻐하는 마음이 들어야 그리스도인일 것 같은데, "아저씨"라는 이유로 마음에 거부감이 드는 것은... 내가 아직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지 못해서일까?

2. 지하철에서 원하는 자리를 뺏는 방법. 앉을 자리는 없지만 공간은 넉넉한 늦은 아침 지하철. 한 젊은 여자가 내 옆에 바짝 다가와 섰다. 스킨십이 불편해 약간 자리를 옮겼더니 다시 달라와 붙는다. 이러기를 몇 번 반복하고 나니, 내가 있던 자리에 그 여자가 서 있고, 나는 다른 곳으로 쫓겨났다. 흠...
3. 가끔씩은... 지하철에서 게임하고 있는 사람을 볼 수 밖에 없을 때가 있다. 특별히 꽉 끼는 지하철에서 바로 옆 사람이나 앞 사람이 그 와중에도 기어이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할 때에는... 그럴 때는 게임하는 것을 관전하다가 답답할 때가 있다. 그 사람이 너무 못해서... 그럴 때는 스마트폰을 빼앗아서 내가 대신 해 주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기가 쉽지 않은 것을 발견한다. 그런 경우, 그저 내 눈을 들어 광고를 바라보는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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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교육이다!


플라톤은 "국가론"에서 왕정, 귀족정치, 공산주의, 민주주의 중 민주주의가 가장 위험하고 좋지 않은 제도라고 평가했다. 그것은 민주주의가 중우정치로 변질될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었다. 어찌보면 그는 민중의 판단 능력을 신뢰하지 않는 엘리트 주의자였던 것 같다. 그래서 그가 제안한 것은 철인정치. 그것은 일종의 왕정, 혹은 독재정치로서 모든 권력이 집중되는 독재의 자리에 가장 현명한 철학자를 앉힘으로써 사회를 위해 최선의 정치를 펼치는, 일종의 이상적인 사회를 꿈꿨었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비현실적인지는 그와 비슷한 정치체제를 갖췄던 Pax Romana 시기의 로마에서 엿볼 수 있다.

오늘날 한국의 정치상황을 볼 때, 일부 대선후보에 대한 맹목적인 지지를 보내는 대중을 볼 때, 플라톤의 사상이 옳은 것 아닌가하는 회의가 강하게 밀려온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인정치는 답이 아니다. 대안이 될 수 없다. 오히려 민주주의를 강화시켜나가는 것이 정답이다. 유권자들의 의식을 성숙시키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바른 방향인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교육의 문제는 바로 우리 나라의 운명에 직결됨을 알 수 있다. 민주사회에서 교육의 최고 목표는 성숙한 시민의 육성이 되어야 한다. 독립적으로 사고하고, 건전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그런 "시민"의 육성이 핵심이다.

그런데 과연, 우리의 교육은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대통령이 바뀐다면 물론 세상이 바뀔 것이다. 하지만 근본적인 변화는 교육의 변화에서 온다. 초등학교부터 민주시민의로서의 소양을 갖추는 일에 강조점을 두는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불행한 역사의 반복으로부터 우리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문제는 교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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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


지난 토요일 지금은 은퇴하신 영문과 원로 교수님이신 이상옥, 천승걸, 김명렬 선생님들과 제자 교수님들 몇 분과 함께 산행을 했다. 학생때 무서워서 자주 피해 다녔던 이상옥, 김명렬 선생님, 그리고 미국문학에 대해서 많이 가르쳐주신 천승걸 선생님.
하늘 같이 높은 그분들과 같이 산행을 하는 가운데, 유쾌하고 따뜻한 그분들의 일 면을 볼 수 있었다. 제자들이 찾아와 같이 하는 산행을 즐거워하시는 그 모습. 막내도 아주 갖난 애에 불과한 나에게 등산용 컵을 주시며 "이제 멤버가 되었으니 꼭 나와야 한다"고 장난 스럽게 말씀하신 선생님들과 즐거운 산행을 하는 가운데 그분들 밑에서 배우던 학창시절이 떠올랐다.
그리고 오늘 우리나라 최고의 문장가 중의 한 분이신 김명렬 선생님께서 잊지 않으시고 당신의 글 한편을 나에게 이메일로 보내 주셨다. 역시나 명문장...
학자로서 한 시대를 풍미하셨고, 우리 나라 영문학 교육의 틀을 세우신 원로 선생님들께서, 특히 암과 싸우고 계시는 천승걸 선생님께서 건강하게 오래 사시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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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27

화요일인 어제 중요한 프리젠테이션이 있었다. 잘 해야하는 것이기 때문에 월요일 저녁에 집에서 프리젠테이션 연습을 했다. 많이는 못했지만 두 세번 정도 전 과정을 연습했고, 조금은 개선 시킬 수 있었다.
아빠가 오랫만에 집에 일찍와서 혼자서 중얼거리는 모습을 본 딸들... 나름 대로 사안의 중요성을 알고 이런 저런 피드백을 주었다. 감사하게도...
연습을 어느 정도 마무리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요즘은 막내의 개인 사정상 막내가 아내와 자고 나는 큰 애랑 같이 이층침대에서 잔다.
자리에 누워 있는데, 윗층에 누워 있던 하연이가 말을 꺼낸다.

"아빠?"
"왜?"
"저기, 프리젠테이션 할 때 앞에 있는 사람들을 자주 쳐다봐야하는 것 같아요."
"그래?"
"예. 얼마전에 영어말하기 대회에서 내 친구는 앞을 자주 쳐다보면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했고, 나는 중간에 잊어버릴까 봐서 앞을 못보고 써서 가져간 종이만 봤는데, 친구가 상을 탔어요."
"그렇구나~~"
"예. 그러니 종이만 읽지 말고 앞에 있는 사람들을 자주 보면서 하세요."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큰 애의 조언에 참 감사했다. 아빠를 위하는 마음, 그리고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주는 그 조언. 내용보다 마음에 감동했다.

"알았다. 정말 고맙다. 내일 프리젠테이션 할 때 꼭 명심할께."
"예, 안녕히 주무세요."
"잘 자라!"

그리고 그 다음날, 프리젠테이션 시간에, 하연이의 그 조언이 내 머리속을 떠나지 않았다.

비록 초등학생의 조언이지만, 내 딸이 벌써 이렇게 커서 아빠에게 조언을 해줄 정도가 되었다니... 참 대견하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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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왜?

늘 떠오르는 질문...
그 대답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뻔히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터져나오는 질문... 왜?

장로교 목사이자 신학자로서 매우 존경하는 RC Sproul 교수. 지난 7년 동안 그의 강의와 설교를 거의 날마다 빠짐없이 들으면서 느낀 것은 탁월한 그의 신학적 지식, 특히 조직신학적 지식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그의 사랑과 충성의 크기가 대단하다는 것이다. 물론 사람 속이야 내가 절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지난 7년간 그의 강의를 통해서 느낀 것은 그것이다.
그는 이 시대의 선지자요, 하나님의 말씀을 깨우는 등불이다.
그런 그의 사랑하는 아들인 RC Sproul, Jr. 경제학 박사이자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헌신된 그는 사랑하는 아내를 암으로 먼저 떠나 보내야만 했다. 그리고 남은 아이들(친자식들과 입양한 아이들)을 혼자서 키워내는 어려움을 감내해야만 했다. 사랑하는 아들의 아픔은 곧 부모의 아픔. Sproul교수도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그런 그들이 작년에 방송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대담을 하는 것을 들었다. 가식이 아니라 진심에서 나오는 고백. 비록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하셨는지는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것이 최선이라는 것...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그들의 고백은 참 아름다왔다.

그런 그들에게 닥친 또 하나의 비극.
Sproul 교수의 손녀이자 Sproul, Jr.의 딸,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지만, 집안의 기쁨이었던 그 딸인 Shannon을 하나님께서 데려가셨다. 할아버지가 "인간의 사는 목적이 무엇인가?"라고 질문했을 때, 이제 막 말을 배우기 시작한 Shannon이 "For the gory [glory] of God."라고 앙증맞게 그렇지만 진지하게 답하던 그 아이. 할아버지가 방송에서 강의하면서 너무 대견해 하면서 자랑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그 천사같던 아이를 하나님께서 데려가신 것이다.
그들의 아픔은 얼마나 클까? 아무리 신학자요 믿음에 뛰어난 사람들이라 해도 그 가슴에 남을 그 아픔은...

하나님을 그토록 사람하는 사람들에게 왜?

아픔과 눈물과 이별과 죽음이 없는 그날... 그 날을 간절히 소망하며, Sproul 교수와 그 아들에게 하나님의 큰 위로가 있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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