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어스틴을 떠나 LA로 왔습니다. 그리고 내일 한국행 비행기를 타고 미국을 떠납니다.
공항에서 렌트했던 차를 돌려주고, 짐을 들고 카운터로 향하는 발걸음...
비행기가 이륙했습니다. 밖을 보지 않으려고 했는데, 언뜻 비행기가 기울면서 저도 모르게 시선이 바깥을 향했습니다.
창문밖으로 보이는 오스틴 정경....
거기에 있는 제가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들 생각에 울컥했습니다.
저를 너무나 사랑하고, 제 졸업을 누구보다도 기뻐해 주었을 지체들 중 거의 대부분에게 간다는 말도 못했습니다. 신라 향가 중 제망매가의 첫구절처럼 저는 간다는 말도 못하고 떠났습니다.
그리고 떠나면서 큰 아픔을 남긴 경우도 있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떠올립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조용히 떠나야 했다는 것을 그들이 언젠가는 이해해 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저에게 주어진 생명의 기간 중 9년을 보냈던 곳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곳에서 수 많은 스승들, 하나님의 사자들을 예비해 주셨고, 그들을 통해 지극히 악하고 어리석을 저로 하여금 하나님을 깨닫고 배우도록 하셨습니다. 9년의 배움과 훈련에도 불구하고, 저는 아직도 지극히 작은 자일 뿐이고, 문자 그대로 죄인 중의 괴수일 뿐이지만, 그렇게도 더디게 하나님을 깨닫고, 아직도 무식하고 완악한 자이지만, 그래도 그런 저에게 주님을 경험하고 아는 지식을 더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제가 의도했든 혹 그렇지 않든지 간에 저로 인해서 상처와 고통을 받은 모든 분들께 고개숙여 깊이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저 주님의 긍휼과 은혜로 저를 용서해 달라고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모두들 사랑합니다. 진정으로....
Words...
" It truly was an honor for me to serve on your committee. I know how hard you worded and I think you did an amazing job on your dissertation. It was one of the most interesting ones I’ve ever read. Thank you again for asking me to be on your committee. I thoroughly enjoyed it. I wish you the best of luck and I hope you keep in touch."
제 논문심사 위원이었던 경영학과 교수님의 메일입니다. 경영학에서는 뛰어나기로 정평이 나있는 교수이지요... 이 메일을 방금 읽었네요...
이 모든 칭찬은 제가 받아야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받으셔야 마땅하기 때문에, 분명히 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렇게 글로 올리며, 다른 사람들과 함께 저도 같이 주님을 찬양하기를 원합니다.
저는 아무런 능력이 없습니다. 겸손의 말이 아니라 진짜입니다. 저희 학과에서도 가장 못난 학생이었고, 가까이서 지켜보는 사람들이 답답해 할 정도로 학문적인 능력이 없는 사람입니다.
제 안에서 선한 것이 나올 수가 없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제가 더 잘 압니다.
그런 빈 깡통같은 저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시고, 하나님께서 주도하실 때, 그 인생이 어떻게 될 수 있는지를 보게 됩니다.
진심으로... 진심으로... 위대하신 주님입니다.
제 논문심사 위원이었던 경영학과 교수님의 메일입니다. 경영학에서는 뛰어나기로 정평이 나있는 교수이지요... 이 메일을 방금 읽었네요...
이 모든 칭찬은 제가 받아야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받으셔야 마땅하기 때문에, 분명히 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렇게 글로 올리며, 다른 사람들과 함께 저도 같이 주님을 찬양하기를 원합니다.
저는 아무런 능력이 없습니다. 겸손의 말이 아니라 진짜입니다. 저희 학과에서도 가장 못난 학생이었고, 가까이서 지켜보는 사람들이 답답해 할 정도로 학문적인 능력이 없는 사람입니다.
제 안에서 선한 것이 나올 수가 없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제가 더 잘 압니다.
그런 빈 깡통같은 저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시고, 하나님께서 주도하실 때, 그 인생이 어떻게 될 수 있는지를 보게 됩니다.
진심으로... 진심으로... 위대하신 주님입니다.
Posted at
오전 3:25:00
감사...
오늘은 저에게 중요한 날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주님의 능력과 위대하심을 체험하는 귀한 경험을 했습니다.
제 지도교수가 저에게 쓴 글 중 첫 부분입니다.
"Congratulations again on a fine performance at this morning's defense and on completion of a strong, convincing dissertation---well argued and well written."
분명 저에게 한 말씀이지만, 저는 압니다. 그건 제가 들을 말이 아니라,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함께하신 하나님께서 들으셔야 한다는 것을...
그분은 찬양받기에 합당하신 만왕의 왕이십니다.
저는 제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그것을 경험했습니다.
제가 이룬 성과보다도, 하나님으로 인해 기쁜 하루입니다.
.
그리고 오늘 주님의 능력과 위대하심을 체험하는 귀한 경험을 했습니다.
제 지도교수가 저에게 쓴 글 중 첫 부분입니다.
"Congratulations again on a fine performance at this morning's defense and on completion of a strong, convincing dissertation---well argued and well written."
분명 저에게 한 말씀이지만, 저는 압니다. 그건 제가 들을 말이 아니라,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함께하신 하나님께서 들으셔야 한다는 것을...
그분은 찬양받기에 합당하신 만왕의 왕이십니다.
저는 제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그것을 경험했습니다.
제가 이룬 성과보다도, 하나님으로 인해 기쁜 하루입니다.
.
Posted at
오전 9:56:00
무제..
토요일 저녁 9시경...
무작정 아파트를 나섰습니다. 답답하기도 했고, 월요일 오후까지 쓰기 위해서 Rent해 놓은 차를 그냥 놀리는 것이 아까와서 차를 몰고 나섰습니다. 그리고 나선 김에 콜라와 치약을 사기 위해 월마트에 가기로 했습니다.
공교롭게도 월마트와 제가 사는 아파트 한 중간에 전에 다니던 교회가 있습니다. 작년 12월 그 교회를 떠난 후 처음으로 교회에 가 봤습니다. 청년부 모임을 하고 있는지, 차량들이 조금 있었습니다.
교회 주차장을 한 바퀴 돌아 나오면서 여러가지 감정과 생각이 교차했습니다.
2006년 10월부터 거의 4년 동안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늘 토요일은 긴장되는 날이자, 은혜의 날이자, 기쁨의 날이자, 교제의 날이었습니다. 매주 말씀을 준비하기 위해 그렇게 씨름을 했고, 온 몸과 마음을 다해 말씀을 전했고, 청년부가 주님 안에서 바르게 성장하도록 기도하고 돕는 일에 모든 것을 쏟아 부었습니다. 비록 박사과정 유학을 하는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공부보다는 말씀을 연구하고 전하고, 형제자매들을 영적으로 바로 서도록 돕는 것이 항상 우선이었습니다.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다 쏟아 부었습니다. 진정으로 사랑했고, 진심을 다해 섬겼었습니다.
그런 공동체가 교회 안에 있는데... 주차장을 돌아 나올 수 밖에 없는 제 자신이 많이 안타까왔습니다. 제 마음에 그 공동체를 향한 사랑이 아직도 적지 않게 남아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기쁨으로 섬겼던 그 시절들의 느낌이 그대로 되살아 났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잘못된 부분도 많이 있었지만, 나름대로는 순수하게 진리와 복음만을 좇기 위해, 그리고 한 영혼 한 영혼을 돌보기 위해 정성을 다했던 아름다운 시간들이었습니다.
물론 지금와서 저에게 남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빈손으로 왔듯이 빈손으로 머물다가 빈손으로 떠나는 것이 인생인가봅니다.
사랑의 추억 외에는 모든 것을 묻어두고 빈손으로... 이제는 빈손으로...
하지만... 가슴 한 편이... 아려옵니다.
.
무작정 아파트를 나섰습니다. 답답하기도 했고, 월요일 오후까지 쓰기 위해서 Rent해 놓은 차를 그냥 놀리는 것이 아까와서 차를 몰고 나섰습니다. 그리고 나선 김에 콜라와 치약을 사기 위해 월마트에 가기로 했습니다.
공교롭게도 월마트와 제가 사는 아파트 한 중간에 전에 다니던 교회가 있습니다. 작년 12월 그 교회를 떠난 후 처음으로 교회에 가 봤습니다. 청년부 모임을 하고 있는지, 차량들이 조금 있었습니다.
교회 주차장을 한 바퀴 돌아 나오면서 여러가지 감정과 생각이 교차했습니다.
2006년 10월부터 거의 4년 동안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늘 토요일은 긴장되는 날이자, 은혜의 날이자, 기쁨의 날이자, 교제의 날이었습니다. 매주 말씀을 준비하기 위해 그렇게 씨름을 했고, 온 몸과 마음을 다해 말씀을 전했고, 청년부가 주님 안에서 바르게 성장하도록 기도하고 돕는 일에 모든 것을 쏟아 부었습니다. 비록 박사과정 유학을 하는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공부보다는 말씀을 연구하고 전하고, 형제자매들을 영적으로 바로 서도록 돕는 것이 항상 우선이었습니다.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다 쏟아 부었습니다. 진정으로 사랑했고, 진심을 다해 섬겼었습니다.
그런 공동체가 교회 안에 있는데... 주차장을 돌아 나올 수 밖에 없는 제 자신이 많이 안타까왔습니다. 제 마음에 그 공동체를 향한 사랑이 아직도 적지 않게 남아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기쁨으로 섬겼던 그 시절들의 느낌이 그대로 되살아 났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잘못된 부분도 많이 있었지만, 나름대로는 순수하게 진리와 복음만을 좇기 위해, 그리고 한 영혼 한 영혼을 돌보기 위해 정성을 다했던 아름다운 시간들이었습니다.
물론 지금와서 저에게 남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빈손으로 왔듯이 빈손으로 머물다가 빈손으로 떠나는 것이 인생인가봅니다.
사랑의 추억 외에는 모든 것을 묻어두고 빈손으로... 이제는 빈손으로...
하지만... 가슴 한 편이... 아려옵니다.
.
Posted at
오후 3:09:00
염려, 근심, 걱정, 두려움...
어떤 종류이건 간에, 어떤 이유이건 간에 내 안에 염려, 근심, 걱정, 두려움이 있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여기에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제외된다.)
염려, 근심, 걱정, 두려움은 세상이 두렵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세상에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고, 세상 그 자체로 엄청난 파워와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그렇다. 기계의 톱니바퀴가 매정하게 돌아가고 그 안에서 나는 아무런 능력이 없이 그 돌아가는 톱니바퀴 가운데서 어찌 되었든 그 흐름대로 맞추어 살아가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마음이 들기 때문에 내 안에 염려, 근심, 걱정, 두려움이 자리잡는다. 세상은 무한대로 커 보이고,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상태... 그것이다.
설사 그 무시무시한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이 살아계신다고 믿는다 하더라도 염려, 근심, 걱정, 두려움에 사로잡힐 수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존재하시긴 하지만, 그 능력이 절대적임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힘이 세신 분이긴 하지만, 이 세상을 완전하게 장악하시고, 그분의 뜻 가운데 모든 것을 이루실 수 있는 분, 그렇게 커 보이고, 무시무시해 보이는 이 세상이라 할지라도 그분께 복종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위대한 분, 절대주권자임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세상이 더 커보이고, 나를 근심하게 하고, 염려하게 하고, 그 가운데 걱정이 떠나지 않고, 그것으로 인해 두려워하게 하는 그 상황들, 그 어려움들, 다시 말해 세상의 파워가 하나님의 능력보다 더 막강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절대 능력, 절대 주권을 믿는다 하더라도 염려, 근심, 걱정, 두려움에 사로잡힐 수가 있다. 그분이 이 세상을 전적으로 다스리시는 만왕의 왕이라고 믿는 그 믿음이 확고히 서 있다고 하더라도, 세상 그 어느것도, 어떤 상황이라 하더라도 그분의 주권 아래 있다는 확실한 믿음이 있다 하더라도 나는 두려워하며 근심과 걱정 가운데 신음할 수가 있다. 그것은 그분의 선하심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분의 아버지되심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분이 그 절대 주권으로 나를 망하는 길로 내 몰수도 있다는 의심, 그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어려운 상황 가운데, 세상의 그 엄청난 파워 앞에 파리만도 못한 가운데 벌벌 떨고 있는 나같은 존재를 거들떠 보지도 않으실 것 같은, 험난 세파에 내동댕이쳐진 고아와 같이 내 힘으로 어떻게든 이겨내지 않으면 안되는 그런 존재로 스스로 느낄 때, 나는 근심과 걱정과 염려와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된다. 우주의 미아, 부모를 잃은 고아로서의 그 존재적 두려움이 나를 사로잡기 때문이다.
그 어떤 이유에서건 간에 내 안에 존재하는 염려, 근심, 걱정, 두려움은 내가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고 바로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 땅 가운데 존재하심을 바로 믿는다면, 그리고 그분이 절대주권자로서 세상의 모든 것을 통치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굳게 믿는다면, 그리고 그분, 그 만왕의 왕이 지극하신 자비와 사랑으로 나를 주목하시고, 나에게 가장 선한 것을 주시며, 최고의 길로 인도하심을 믿는다면, 내 안에 염려, 근심, 걱정, 두려움은 자리를 잡을 수가 없다. 그 믿음이 굳게 서 있다면, 비록 내 눈에 내가 망하는 길로 가는 것처럼 보이고, 하나님께서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그리고 내가 하나님의 크신 징계로 인해 극심한 어려움에 처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결국 하나님의 선하심에서 비롯되었으며, 그 선하심으로 나를 선한 길로 인도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결정임을 믿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을 바로 알고 바로 믿으면 나는 반드시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기뻐할 수 있고, 범사에 감사하며, 쉬지않고 기도할 수 있는 것이다. (살전 5:16-18)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을 아는 지식... 그것이 우리를 살리는 것이고,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이기게 하는 것이다.
염려와 근심, 걱정과 두려움으로 떨고 있는 나...
내 모습 가운데 드러나는 지극히 악한 이 모습을 보면서, 내 스스로에게 다시 한 번 믿음의 중요성을 되뇌인다.
.
염려, 근심, 걱정, 두려움은 세상이 두렵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세상에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고, 세상 그 자체로 엄청난 파워와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그렇다. 기계의 톱니바퀴가 매정하게 돌아가고 그 안에서 나는 아무런 능력이 없이 그 돌아가는 톱니바퀴 가운데서 어찌 되었든 그 흐름대로 맞추어 살아가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마음이 들기 때문에 내 안에 염려, 근심, 걱정, 두려움이 자리잡는다. 세상은 무한대로 커 보이고,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상태... 그것이다.
설사 그 무시무시한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이 살아계신다고 믿는다 하더라도 염려, 근심, 걱정, 두려움에 사로잡힐 수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존재하시긴 하지만, 그 능력이 절대적임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힘이 세신 분이긴 하지만, 이 세상을 완전하게 장악하시고, 그분의 뜻 가운데 모든 것을 이루실 수 있는 분, 그렇게 커 보이고, 무시무시해 보이는 이 세상이라 할지라도 그분께 복종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위대한 분, 절대주권자임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세상이 더 커보이고, 나를 근심하게 하고, 염려하게 하고, 그 가운데 걱정이 떠나지 않고, 그것으로 인해 두려워하게 하는 그 상황들, 그 어려움들, 다시 말해 세상의 파워가 하나님의 능력보다 더 막강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절대 능력, 절대 주권을 믿는다 하더라도 염려, 근심, 걱정, 두려움에 사로잡힐 수가 있다. 그분이 이 세상을 전적으로 다스리시는 만왕의 왕이라고 믿는 그 믿음이 확고히 서 있다고 하더라도, 세상 그 어느것도, 어떤 상황이라 하더라도 그분의 주권 아래 있다는 확실한 믿음이 있다 하더라도 나는 두려워하며 근심과 걱정 가운데 신음할 수가 있다. 그것은 그분의 선하심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분의 아버지되심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분이 그 절대 주권으로 나를 망하는 길로 내 몰수도 있다는 의심, 그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어려운 상황 가운데, 세상의 그 엄청난 파워 앞에 파리만도 못한 가운데 벌벌 떨고 있는 나같은 존재를 거들떠 보지도 않으실 것 같은, 험난 세파에 내동댕이쳐진 고아와 같이 내 힘으로 어떻게든 이겨내지 않으면 안되는 그런 존재로 스스로 느낄 때, 나는 근심과 걱정과 염려와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된다. 우주의 미아, 부모를 잃은 고아로서의 그 존재적 두려움이 나를 사로잡기 때문이다.
그 어떤 이유에서건 간에 내 안에 존재하는 염려, 근심, 걱정, 두려움은 내가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고 바로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 땅 가운데 존재하심을 바로 믿는다면, 그리고 그분이 절대주권자로서 세상의 모든 것을 통치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굳게 믿는다면, 그리고 그분, 그 만왕의 왕이 지극하신 자비와 사랑으로 나를 주목하시고, 나에게 가장 선한 것을 주시며, 최고의 길로 인도하심을 믿는다면, 내 안에 염려, 근심, 걱정, 두려움은 자리를 잡을 수가 없다. 그 믿음이 굳게 서 있다면, 비록 내 눈에 내가 망하는 길로 가는 것처럼 보이고, 하나님께서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그리고 내가 하나님의 크신 징계로 인해 극심한 어려움에 처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결국 하나님의 선하심에서 비롯되었으며, 그 선하심으로 나를 선한 길로 인도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결정임을 믿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을 바로 알고 바로 믿으면 나는 반드시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기뻐할 수 있고, 범사에 감사하며, 쉬지않고 기도할 수 있는 것이다. (살전 5:16-18)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을 아는 지식... 그것이 우리를 살리는 것이고,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이기게 하는 것이다.
염려와 근심, 걱정과 두려움으로 떨고 있는 나...
내 모습 가운데 드러나는 지극히 악한 이 모습을 보면서, 내 스스로에게 다시 한 번 믿음의 중요성을 되뇌인다.
.
Posted at
오후 12:39:00
영적 리더의 죄...
영적인 리더...
영혼을 섬기고 영혼을 돕는 리더로서 가장 큰 죄는 성경에 대해 무지한 것이다.
어떤 변명으로도 용서가 되지 않는 것이 바로 그 죄이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때, 그 인도는 파멸의 길일 수가 있다.
자기 혼자 무지 가운데서 그 파멸의 길로 걸어가는 것도 비극이지만, 남의 손을 붙잡고 그 길로 걸어가는 것은 지극히 큰 비극이다.
영적인 리더인가?
두려워하라.
긴장하고, 필사적으로 성경을 연구하고 공부하라. 성경에 대해 무식한 자는 영적인 리더가 될 자격이 없다. 성경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서 도대체 뭘 가르친다는 말인가? 무엇으로 양육하고 인도한다는 말인가?
교회의 목사님이 던져 주시는 이미 소화된 말씀 몇 구절을 전달하는 것으로, 그리고 그 목사님이나 다른 영적리더가 던져준 그것을 마치 자기 것인양 무책임하게 전달하는 것이 영적인 리더인 자신의 역할이라고 생각하는가?
그처럼 무지하고 무책임한 처사가 어디 있는가?
영적인 리더의 자리는 영혼을 인도하는 자리이다.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 한 영혼에게 영향력을 끼치는 자리이다. 그 자리에 있는 자라면, 지극히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는 것을 직접 연구하고 직접 듣고, 그리고 직접 받은그 말씀들, 직접 연구한 그 연구 결과물을 영혼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만약 그런 수고가 싫다면, 아니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영적인 리더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요즘 얼마나 많은 자들이 말씀에 대한 진지한 연구 없이, 스스로 말씀을 깊이 파보지도 않고, 남이 소화해주는 말씀을 전달하는 deliverer로서의 역할로 만족하고 있는지....
참으로 개탄할 일이다...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영적인 리더는 절대로 성경에 대해 무식하면 안 된다.
영혼을 섬기고 영혼을 돕는 리더로서 가장 큰 죄는 성경에 대해 무지한 것이다.
어떤 변명으로도 용서가 되지 않는 것이 바로 그 죄이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때, 그 인도는 파멸의 길일 수가 있다.
자기 혼자 무지 가운데서 그 파멸의 길로 걸어가는 것도 비극이지만, 남의 손을 붙잡고 그 길로 걸어가는 것은 지극히 큰 비극이다.
영적인 리더인가?
두려워하라.
긴장하고, 필사적으로 성경을 연구하고 공부하라. 성경에 대해 무식한 자는 영적인 리더가 될 자격이 없다. 성경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서 도대체 뭘 가르친다는 말인가? 무엇으로 양육하고 인도한다는 말인가?
교회의 목사님이 던져 주시는 이미 소화된 말씀 몇 구절을 전달하는 것으로, 그리고 그 목사님이나 다른 영적리더가 던져준 그것을 마치 자기 것인양 무책임하게 전달하는 것이 영적인 리더인 자신의 역할이라고 생각하는가?
그처럼 무지하고 무책임한 처사가 어디 있는가?
영적인 리더의 자리는 영혼을 인도하는 자리이다.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 한 영혼에게 영향력을 끼치는 자리이다. 그 자리에 있는 자라면, 지극히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는 것을 직접 연구하고 직접 듣고, 그리고 직접 받은그 말씀들, 직접 연구한 그 연구 결과물을 영혼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만약 그런 수고가 싫다면, 아니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영적인 리더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요즘 얼마나 많은 자들이 말씀에 대한 진지한 연구 없이, 스스로 말씀을 깊이 파보지도 않고, 남이 소화해주는 말씀을 전달하는 deliverer로서의 역할로 만족하고 있는지....
참으로 개탄할 일이다...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영적인 리더는 절대로 성경에 대해 무식하면 안 된다.
Posted at
오전 8:14:00
오슬로 테러 참사를 보며...
노르웨이의 오슬로 테러 참사를 보면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습니다.
한 영혼이 천하보다 더 귀하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립니다.
그 한 영혼을 위해, 그 한 영혼 한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늘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셔서 아기의 모습으로 탄생하시고, 그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고 내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들, 그 인간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하시기 위해서 그분은 십자가의 형벌을 대신 당하셨습니다.
어떠한 주장과 신념도 고귀한 생명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진 하나님의 특별한 창조물을 그렇게 죽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분노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절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악에 대해서는 지극히 혐오하시고 진노하시지만, 인간에 대해서는 한 없는 사랑과 자비와 오래 참으심으로 기다리시고 품으시는 하나님입니다.
너무나 큰 아픔을 당한 노르웨이의 수 많은 사람들에게 주님의 위로를 보냅니다.
그리고 내 안의 인간을 향한 분노가 어떤 결과를 가져 올 수 있는지를 생각하며, 참으로 내 안에 사람을 향한 분노가 있는지 진지하게 다시 돌아봅니다.
인간은 사랑의 대상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사실....
흐르는 눈물 가운데 그 사실을 다시 한 번 되새깁니다.
눈물과 고통과 이별과 질병과 사망이 없는 그 세상...
주님이 오셔서 이루실 그 세상을 간절히 바랍니다.
.
한 영혼이 천하보다 더 귀하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립니다.
그 한 영혼을 위해, 그 한 영혼 한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늘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셔서 아기의 모습으로 탄생하시고, 그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고 내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들, 그 인간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하시기 위해서 그분은 십자가의 형벌을 대신 당하셨습니다.
어떠한 주장과 신념도 고귀한 생명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진 하나님의 특별한 창조물을 그렇게 죽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분노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절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악에 대해서는 지극히 혐오하시고 진노하시지만, 인간에 대해서는 한 없는 사랑과 자비와 오래 참으심으로 기다리시고 품으시는 하나님입니다.
너무나 큰 아픔을 당한 노르웨이의 수 많은 사람들에게 주님의 위로를 보냅니다.
그리고 내 안의 인간을 향한 분노가 어떤 결과를 가져 올 수 있는지를 생각하며, 참으로 내 안에 사람을 향한 분노가 있는지 진지하게 다시 돌아봅니다.
인간은 사랑의 대상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사실....
흐르는 눈물 가운데 그 사실을 다시 한 번 되새깁니다.
눈물과 고통과 이별과 질병과 사망이 없는 그 세상...
주님이 오셔서 이루실 그 세상을 간절히 바랍니다.
.
Posted at
오전 4:29:00
고통..
내가 고통을 느낀다는 것은, 어느모로 보면 복이다.
그것은 고통의 의미를 알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고통받는 자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고통받는 자들은 늘 소수자이고 그늘에 있는 자들이어서 세상이 눈여겨보지 않고 관심을 두지 않는다. 세상은 늘 성공하는 자들, 잘 나가는 자들, 건강하고 보기 아름다운 자들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추고 모든 관심을 쏟는다.
고통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관심을 두는 경우에는 많은 경우 훈계를 한다. 그 고통을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입바른 말들을 너무 많이 해댄다.. 그것이 고통 가운데 있는 자들을 더 고통스럽게 한다.
건강할 때 나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나는 참으로 고통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더 관심을 두고 그들의 고통을 이해하며 곁에 있어주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무엇이든지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결코...
나는 무관심 아니면 훈계로 일관한 사람이다. 지체 가운데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더라도 '참 안 됐다..'라고 혼자 생각하고는 그냥 잊어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관심을 갖더라도 '믿는 사람이 그런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고 힘들어하나'라는 정죄하는 마음으로 "옳바른 것"이 무엇인지를 훈계해대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낯뜨거운 짓... 그래도 내 주위에 있는 지체들은 너무나 사람들이 좋아서, 그리고 믿음이 나보다 더 훌륭해서, 그런 무례함과 상처주는 훈계를 경청하고 잘 받아들여서 본인들에게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활용하곤 했다. 그들을 생각할 때마다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그리스도인... 그것도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연약한 자의 연약함과 고통받는 자의 고통을 공감하는 자이다. 정죄와 훈계를 뒤로하고 함께 아파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보살펴주고 도와주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그래야 하는 것은...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히 4:15)
사실... 이 말씀대로라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 즉 그 죄악 가운데 거하며, 그 죄악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의 그 연약함을 전혀 공유하지 않으시는, 죄가 없으신 완벽하게 정결하신 분이지만, 그분은 우리의 연약함을 직접 경험하시고 공감하시고 이해하셨다.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우리를 도우시는 우리의 하나님이 되신 것이다.
공감과 이해 없이...
사랑 없이...
아픔을 그 마음에 담지 않고...
돕겠다고 나서는 것은 상처만 줄 뿐...
그나마 그것이 무관심보다는 낫겠지만...
그런데...
타인의 아픔을 공감하며 연약한 자들, 고통 가운데 있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며 그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두고 손발로 그들을 돕는 그런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참으로... 드문 것 같다...
모두들 자기 문제, 자기 고통에, 그리고 타인의 성공과 아름다움에 모든 관심을 빼앗겨 버렸기 때문에... 타인의 고통은 그 마음 가운데 설 자리가 없는 듯 하다... 그나마 관심을 두는 사람들은 정죄하고 훈계하기에 바쁘고...
세상 사람들이라면 이해할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그래도 되는 건가?
그리스도인이...
그것은 고통의 의미를 알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고통받는 자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고통받는 자들은 늘 소수자이고 그늘에 있는 자들이어서 세상이 눈여겨보지 않고 관심을 두지 않는다. 세상은 늘 성공하는 자들, 잘 나가는 자들, 건강하고 보기 아름다운 자들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추고 모든 관심을 쏟는다.
고통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관심을 두는 경우에는 많은 경우 훈계를 한다. 그 고통을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입바른 말들을 너무 많이 해댄다.. 그것이 고통 가운데 있는 자들을 더 고통스럽게 한다.
건강할 때 나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나는 참으로 고통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더 관심을 두고 그들의 고통을 이해하며 곁에 있어주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무엇이든지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결코...
나는 무관심 아니면 훈계로 일관한 사람이다. 지체 가운데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더라도 '참 안 됐다..'라고 혼자 생각하고는 그냥 잊어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관심을 갖더라도 '믿는 사람이 그런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고 힘들어하나'라는 정죄하는 마음으로 "옳바른 것"이 무엇인지를 훈계해대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낯뜨거운 짓... 그래도 내 주위에 있는 지체들은 너무나 사람들이 좋아서, 그리고 믿음이 나보다 더 훌륭해서, 그런 무례함과 상처주는 훈계를 경청하고 잘 받아들여서 본인들에게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활용하곤 했다. 그들을 생각할 때마다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그리스도인... 그것도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연약한 자의 연약함과 고통받는 자의 고통을 공감하는 자이다. 정죄와 훈계를 뒤로하고 함께 아파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보살펴주고 도와주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그래야 하는 것은...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히 4:15)
사실... 이 말씀대로라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 즉 그 죄악 가운데 거하며, 그 죄악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의 그 연약함을 전혀 공유하지 않으시는, 죄가 없으신 완벽하게 정결하신 분이지만, 그분은 우리의 연약함을 직접 경험하시고 공감하시고 이해하셨다.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우리를 도우시는 우리의 하나님이 되신 것이다.
공감과 이해 없이...
사랑 없이...
아픔을 그 마음에 담지 않고...
돕겠다고 나서는 것은 상처만 줄 뿐...
그나마 그것이 무관심보다는 낫겠지만...
그런데...
타인의 아픔을 공감하며 연약한 자들, 고통 가운데 있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며 그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두고 손발로 그들을 돕는 그런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참으로... 드문 것 같다...
모두들 자기 문제, 자기 고통에, 그리고 타인의 성공과 아름다움에 모든 관심을 빼앗겨 버렸기 때문에... 타인의 고통은 그 마음 가운데 설 자리가 없는 듯 하다... 그나마 관심을 두는 사람들은 정죄하고 훈계하기에 바쁘고...
세상 사람들이라면 이해할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그래도 되는 건가?
그리스도인이...
Posted at
오후 1:56:00
힘든 하루...
"으...."
신음 가운데 잠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몸에 열이나고 온 몸이 아픈 가운데, 추위에 벌벌 떨며 뒤척거리던 간밤의 잠에서 일어났지만, 피곤은 자기 전보다 더했고, 몸을 가눌 길이 없는 아픔 가운데, 어찌해야할바를 알지 못했습니다.
하루가 그 전의 일년보다 더 중요한 이 시기에 누워서 쉬면 안되는데...
도저히 어떻게 방법이 없어서 그냥 하릴 없이 좁은 방안, 침대에서 뒤척거리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성경은 엘리사의 엄청난 능력에 대해서 계속 말씀하시지만, 그 말씀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도대체 이해되지 않는 가운데 머리는 빙빙 돌고, 몸은 더 아파만 옵니다.
아침을 치킨으로 간단히 때우고난 후, 저녁이 될 때까지 밥을 차려먹을 힘이 없어, 침대에서 졸다, 자다, 졸다, 자다를 반복합니다.
'며칠만 더 있다가 아프지...'하는 마음에 원망스럽기까지 하지만...
그래도 지난 주일 예배 때 불렀던 찬양의 한 구절이 마음을 새롭게 합니다.
You give and take away,
but I will choose to say,
blessed be your name
"I will choose to say"에서 Choose라는 단어가 참 인상적입니다. 그것은 의지적 결단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상황이 어떻든 간에, 하나님께서 주시건 주시지 않던 간에, 내 몸이 아파서 일정에 큰 차질이 있건, 고통스럽건 간에, 믿는 자로서 해야할 것은 내 의지적 결단으로, 그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blessed be your name"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믿는 자이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Blessed be your name!"
신음 가운데 잠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몸에 열이나고 온 몸이 아픈 가운데, 추위에 벌벌 떨며 뒤척거리던 간밤의 잠에서 일어났지만, 피곤은 자기 전보다 더했고, 몸을 가눌 길이 없는 아픔 가운데, 어찌해야할바를 알지 못했습니다.
하루가 그 전의 일년보다 더 중요한 이 시기에 누워서 쉬면 안되는데...
도저히 어떻게 방법이 없어서 그냥 하릴 없이 좁은 방안, 침대에서 뒤척거리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성경은 엘리사의 엄청난 능력에 대해서 계속 말씀하시지만, 그 말씀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도대체 이해되지 않는 가운데 머리는 빙빙 돌고, 몸은 더 아파만 옵니다.
아침을 치킨으로 간단히 때우고난 후, 저녁이 될 때까지 밥을 차려먹을 힘이 없어, 침대에서 졸다, 자다, 졸다, 자다를 반복합니다.
'며칠만 더 있다가 아프지...'하는 마음에 원망스럽기까지 하지만...
그래도 지난 주일 예배 때 불렀던 찬양의 한 구절이 마음을 새롭게 합니다.
You give and take away,
but I will choose to say,
blessed be your name
"I will choose to say"에서 Choose라는 단어가 참 인상적입니다. 그것은 의지적 결단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상황이 어떻든 간에, 하나님께서 주시건 주시지 않던 간에, 내 몸이 아파서 일정에 큰 차질이 있건, 고통스럽건 간에, 믿는 자로서 해야할 것은 내 의지적 결단으로, 그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blessed be your name"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믿는 자이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Blessed be your name!"
Posted at
오전 8:25:00
어려움..
극한 어려움의 상황...
견디기가 힘들다고 느껴지는 가운데,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 차 오를 때...
그 때는...
그저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
존재를 지속하며..
주님을 붙잡고,
그분의 힘으로 버티는 것...
한 걸음 한 걸음 발걸음을 옮기기가 너무나 힘들지만...
아무 생각 없이, 한 발을 앞으로, 그리고 그 다음 발을 앞으로 하며
포기하지 않는 것...
그 길을 그냥 가는 것..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임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것조차 내 힘으로 할 수 없어서 주님의 크신 은혜를 의지해야 함을 발견한다.
견디는 것이다.
그냥...
견디는 것이다.
견디기가 힘들다고 느껴지는 가운데,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 차 오를 때...
그 때는...
그저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
존재를 지속하며..
주님을 붙잡고,
그분의 힘으로 버티는 것...
한 걸음 한 걸음 발걸음을 옮기기가 너무나 힘들지만...
아무 생각 없이, 한 발을 앞으로, 그리고 그 다음 발을 앞으로 하며
포기하지 않는 것...
그 길을 그냥 가는 것..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임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것조차 내 힘으로 할 수 없어서 주님의 크신 은혜를 의지해야 함을 발견한다.
견디는 것이다.
그냥...
견디는 것이다.
Posted at
오전 6:00:00
세상이 두려워하는 교회...
현대 교회는 너무나 많은 경우 복음이라는 단어만 살아 있고, 그 내용은 잃어버렸다. 복음을 외치지만, 그 복음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정작 모르는 교인들을 너무나 많이 보면서 내린 내 결론이다. 죄가 어떤 의미인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분의 십자가가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그분의 부활이 도대체 왜 꼭 필요한 것인지에 대한 이해도 없이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이라는 너무나 공허한 개념이 복음의 자리를 대치해버렸다. 그만큼 복음으로 인해 진정한 거듭남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너무나 적다. 내가 믿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내 안에 들어와서 내 삶을 온전히 변화시키는 그 성령의 역사를 삶의 현장에서 경험하는 자들이 너무나 적은 것이다.
그것이 바로 교회가 한국 사회에서 영향력을 상실해버리고, 욕을 얻어 먹는 이유이다. 진정으로 거듭남을 경험하는 교인들이 가득찬 교회라면 세상에서 질타를 받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세상을 질타하는 존재가 된다. 세상이 함부로 할 수 없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교회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가 본질을 회복하기 위해서, 한국 사회내에서의 위상을 정립하기 위해서는 이런 저런 부패를 없애고, 이런 저런 선한 일들을 도모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곁가지일 뿐이다. 교회 안에서 진정한 거듭남의 역사, 성령으로 거듭나는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 그렇게 해서 교회 자체의 본성이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렇게 될 때에만, 교회 안에서 부정과 부패가 사라지게 되고, 하나님의 공의가 교회를 통해 선포되며, 썩어가는 세상에서 진정으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진정한 거듭남은 진정한 복음으로 외에는 있을 수 없다.
자신의 죄인됨에 철저히 절망하고,
그리스도의 하나님되심을 온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십자가에서 그분이 이루신 대속의 구원으로 기뻐하며,
부활하셔서 지금도 살아계셔서 온 세상의 통치자가 되시는 예수님께 복종하며,
다시오실 심판의 구주를 두려움과 기대 가운데 기다리며 하늘에 소망을 두고 이 땅을 살아가는 그런 삶...
예수님처럼 원수를 위해 과격하게 자신을 희생하기로 결단하는 자들...
예수님처럼 삶 가운데 죄악이 없이 아버지 하나님의 뜻만을 붙잡고 살겠다고 각오하는 자들...
예수님처럼 교만을 버리고 철저하게 겸손함을 견지하겠다고 다짐하는 자들...
예수님처럼 머리둘 곳도, 입을 옷도 없는 가난 가운데서도 부요함을 누리며 살겠다고 주님을 따르는 자들...
예수님처럼 고아와 과부, 사회적인 약자들을 돌보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는 자들....
예수님처럼... 예수님처럼...
예수님을 닮은 자들... 그리고 비록 지금의 모습은 형편이 없지만, 그분을 닮기를 소망하며, 큰바위 얼굴처럼 예수님을 바라보는 가운데 서서히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 가는 믿음의 사람들...
그런 삶이 교회에 가득가득 찰 때, 그 때 세상은 교회를 두려워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교회가 한국 사회에서 영향력을 상실해버리고, 욕을 얻어 먹는 이유이다. 진정으로 거듭남을 경험하는 교인들이 가득찬 교회라면 세상에서 질타를 받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세상을 질타하는 존재가 된다. 세상이 함부로 할 수 없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교회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가 본질을 회복하기 위해서, 한국 사회내에서의 위상을 정립하기 위해서는 이런 저런 부패를 없애고, 이런 저런 선한 일들을 도모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곁가지일 뿐이다. 교회 안에서 진정한 거듭남의 역사, 성령으로 거듭나는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 그렇게 해서 교회 자체의 본성이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렇게 될 때에만, 교회 안에서 부정과 부패가 사라지게 되고, 하나님의 공의가 교회를 통해 선포되며, 썩어가는 세상에서 진정으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진정한 거듭남은 진정한 복음으로 외에는 있을 수 없다.
자신의 죄인됨에 철저히 절망하고,
그리스도의 하나님되심을 온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십자가에서 그분이 이루신 대속의 구원으로 기뻐하며,
부활하셔서 지금도 살아계셔서 온 세상의 통치자가 되시는 예수님께 복종하며,
다시오실 심판의 구주를 두려움과 기대 가운데 기다리며 하늘에 소망을 두고 이 땅을 살아가는 그런 삶...
예수님처럼 원수를 위해 과격하게 자신을 희생하기로 결단하는 자들...
예수님처럼 삶 가운데 죄악이 없이 아버지 하나님의 뜻만을 붙잡고 살겠다고 각오하는 자들...
예수님처럼 교만을 버리고 철저하게 겸손함을 견지하겠다고 다짐하는 자들...
예수님처럼 머리둘 곳도, 입을 옷도 없는 가난 가운데서도 부요함을 누리며 살겠다고 주님을 따르는 자들...
예수님처럼 고아와 과부, 사회적인 약자들을 돌보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는 자들....
예수님처럼... 예수님처럼...
예수님을 닮은 자들... 그리고 비록 지금의 모습은 형편이 없지만, 그분을 닮기를 소망하며, 큰바위 얼굴처럼 예수님을 바라보는 가운데 서서히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 가는 믿음의 사람들...
그런 삶이 교회에 가득가득 찰 때, 그 때 세상은 교회를 두려워할 것이다.
Posted at
오전 9:35:00
내 자신을 보는 것... 제발 그만....
어제... 오랫만에 한 지체와 만나서 대화를 나누었다.
믿음의 문제로 힘들어하고 있고, 분노와 체념이 섞인 가운데 내 앞에 나타난 그 지체...
자신의 믿음없음, 자신이 주님 안에 있지 않음을 확신하고 내 앞에 나타는 그 지체를 보면서 참 안타까움이 앞섰다. 그리고 도와주고 싶었다.
믿음에 대해서, 복음에 대해서 하나하나 점검해 나가는 과정 속에서 그의 믿음에 문제가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십자가의 형벌, 그 대속의 죽으심을 인정하시 않으려고 하고, 그것에 관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불평과 원망이 있는 그를 보면서, 복음이 그에게 온전히 영접되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졌고, 그와 함께 그것을 깊이 있게 나누었다. 그는 비록 영접하고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그동안 포기한 가운데 어두움 속에 있던 그 상태를 벗어나서 주님 앞으로 나아가겠다고 약속했다.
그 역시 다른 지체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모습을 보는 데, 그리고 자신의 구원의 여부를 확인하는데 obssess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역시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주님을 놓치고 있었다. 그분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해 본 적도 없는 듯 했다. 오로지 나... 오로지 자신이 믿음없음과 자신의 죄와 자신의 불신앙의 증거들만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던 것...
도대체 그것들을 그렇게 들여다보는 이유, 들여다보게하는 이유가 뭘까? 내가 만난 모든 지체들은 바로 그것이 신앙의 최고 목적인 것처럼 자신을 들여다보고, 자신의 부족함과 믿음없음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 결과 그들은 모두 절망하고 있었고, 불안해 하고 있었고, 어두움 가운데서 벗어나지 못한 가운데 신음하고 있었다.
길이 되신 예수님... 진리가 되신 예수님... 생명이 되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을 완전히 망각하고 자신만을 돌아보는 가운데, 영혼은 시들어가고 파괴되어간다. 그렇다. 내 안에는 선한 것이 없고, 내 안에는 소망이 없다. 내 안을 들여다 볼 때 나오는 것은 구정물처럼 더러운 것들, 약한 것들, 추악한 것들 뿐이다.
성경은 내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성경의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 사역이다. 그렇다면 교회의 모든 사역과 모든 가르침은 그분께 집중되어야 한다. 그분만이 소망이고, 그분만이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 되기 때문이다. 집나간 아들이 돼지우리에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처지만을 바라본다면, 비관자살하는 것이 당연한 귀결이다. 살 의미가 없는 것이다. 신앙 생활, 교회생활을 해봐야 의미가 없는 것이다. 탕자가 돼지우리에서 생각한 것은 자신의 처지뿐만 아니라 선하신 아버지이시다. 그분의 풍요와 그분의 인자하심을 생각할 때, 집을 향한 발걸음을 내 디딜 수 있는 것이다. 어두움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그리스도를 바라보도록 그들의 시선을 바꾸어 주는 것이다. 고개를 들어 그분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거기에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 진정으로 내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바로 그 때만 가능하다. 내가 내 안을 들여다 볼 때, 내 부족함을 보긴 하지만, 결코 제대로 볼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거기에서 내 모습이 보이는 것이다. 그분의 거룩하심이 내 추함을 드러낸다. 그분의 선하심이 내 악함을 드러낸다. 그분의 무한하신 사랑이 내 사랑없음을 드러낸다. 그분을 알면 알수록, 거기에 비춘 내 모습이 매우 정확하게 드러난다. 거기에서 진정한 회개가 터져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자신에게 절망하는 동시에 주님을 바라보며 소망을 갖는 것이 바로 거기에서 가능한 것이다.
"당신은 어떤 존재입니까?"라는 질문이 어떤 면에서보면 매우 도움이 되는 것 같지만, 실재적으로 사람들을 저주의 길로 이끄는 위험한 질문이 될 가능성이 있는 질문인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께 모든 관심과 시선을 집중해야 한다. 그것만이 살 길이다.
믿음의 문제로 힘들어하고 있고, 분노와 체념이 섞인 가운데 내 앞에 나타난 그 지체...
자신의 믿음없음, 자신이 주님 안에 있지 않음을 확신하고 내 앞에 나타는 그 지체를 보면서 참 안타까움이 앞섰다. 그리고 도와주고 싶었다.
믿음에 대해서, 복음에 대해서 하나하나 점검해 나가는 과정 속에서 그의 믿음에 문제가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십자가의 형벌, 그 대속의 죽으심을 인정하시 않으려고 하고, 그것에 관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불평과 원망이 있는 그를 보면서, 복음이 그에게 온전히 영접되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졌고, 그와 함께 그것을 깊이 있게 나누었다. 그는 비록 영접하고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그동안 포기한 가운데 어두움 속에 있던 그 상태를 벗어나서 주님 앞으로 나아가겠다고 약속했다.
그 역시 다른 지체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모습을 보는 데, 그리고 자신의 구원의 여부를 확인하는데 obssess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역시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주님을 놓치고 있었다. 그분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해 본 적도 없는 듯 했다. 오로지 나... 오로지 자신이 믿음없음과 자신의 죄와 자신의 불신앙의 증거들만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던 것...
도대체 그것들을 그렇게 들여다보는 이유, 들여다보게하는 이유가 뭘까? 내가 만난 모든 지체들은 바로 그것이 신앙의 최고 목적인 것처럼 자신을 들여다보고, 자신의 부족함과 믿음없음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 결과 그들은 모두 절망하고 있었고, 불안해 하고 있었고, 어두움 가운데서 벗어나지 못한 가운데 신음하고 있었다.
길이 되신 예수님... 진리가 되신 예수님... 생명이 되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을 완전히 망각하고 자신만을 돌아보는 가운데, 영혼은 시들어가고 파괴되어간다. 그렇다. 내 안에는 선한 것이 없고, 내 안에는 소망이 없다. 내 안을 들여다 볼 때 나오는 것은 구정물처럼 더러운 것들, 약한 것들, 추악한 것들 뿐이다.
성경은 내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성경의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 사역이다. 그렇다면 교회의 모든 사역과 모든 가르침은 그분께 집중되어야 한다. 그분만이 소망이고, 그분만이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 되기 때문이다. 집나간 아들이 돼지우리에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처지만을 바라본다면, 비관자살하는 것이 당연한 귀결이다. 살 의미가 없는 것이다. 신앙 생활, 교회생활을 해봐야 의미가 없는 것이다. 탕자가 돼지우리에서 생각한 것은 자신의 처지뿐만 아니라 선하신 아버지이시다. 그분의 풍요와 그분의 인자하심을 생각할 때, 집을 향한 발걸음을 내 디딜 수 있는 것이다. 어두움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그리스도를 바라보도록 그들의 시선을 바꾸어 주는 것이다. 고개를 들어 그분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거기에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 진정으로 내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바로 그 때만 가능하다. 내가 내 안을 들여다 볼 때, 내 부족함을 보긴 하지만, 결코 제대로 볼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거기에서 내 모습이 보이는 것이다. 그분의 거룩하심이 내 추함을 드러낸다. 그분의 선하심이 내 악함을 드러낸다. 그분의 무한하신 사랑이 내 사랑없음을 드러낸다. 그분을 알면 알수록, 거기에 비춘 내 모습이 매우 정확하게 드러난다. 거기에서 진정한 회개가 터져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자신에게 절망하는 동시에 주님을 바라보며 소망을 갖는 것이 바로 거기에서 가능한 것이다.
"당신은 어떤 존재입니까?"라는 질문이 어떤 면에서보면 매우 도움이 되는 것 같지만, 실재적으로 사람들을 저주의 길로 이끄는 위험한 질문이 될 가능성이 있는 질문인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께 모든 관심과 시선을 집중해야 한다. 그것만이 살 길이다.
Posted at
오전 1:16:00
크심..
그분은... 항상 내 수용 범위를 훨씬 벗어나시는 크신 분이다...
내가 뭘 좀 안다고 설쳐대며 그분을 이해하고 깨달았다고 생각할 때...
그리고 그분의 거룩하심을 알고, 그 거룩하심을 나도 본받아 나아가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을 때...
나는 그래도 좀 괜찮은 존재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을 때...
내 신앙은 그래도 좀 낫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그분이 현존 앞에 내 자신이 맞딱드려지게 된다.
그분 앞에서 내 무식함이 얼마나 치가 떨릴 정도인지...
그분을 아는 지식이 얼마나 형편없었는지... 얼마나 제한적이었는지..
그리고 그분의 거룩하심과 흠이 없이 깨끗하심을 볼 때, 내 소위 쓸만한 신앙이라는 것이 얼마나 누더기에 불과한 것인지....
그분 앞에 부끄러워 고개조차 들 수 없을 많큼 창피한 내 자신을 발견할 뿐이다...
내 스스로 내 죄에 몸서리치도록 고통스러울 때...
나처럼 더러운 자를 주님께서 받아주실 리가 없다고 주님으로부터 돌아서려고 할 때...
내 죄의 크기가 너무 커서 이 세상 어떤 것으로도 그 죄를 깨끗이할 수 없다고 절망할 때...
심지어 주님조차도... 주님의 십자가조차도 이 흉악한 죄, 더러운 죄를 깨끗케 하기에는 역부족이라고 느끼고 소망을 발견할 수 없을 때...
그 때 그 분의 현존 앞에 다시 한 번 내 자신을 비추인다.
그분은 흉악한 강도와,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던 창녀와, 불가촉천민 취급을 받았던 문둥병자를 품으시고 사랑하시고 그들의 죄를 용서하신 분....
내 죄가 아무리 크더라도, 내 죄가 아무리 지저분하다 하더라도, 내 스스로에게 절망할 만큼 그 죄가 나를 억누르고 나를 절망으로 몰더라도, 그것을 감당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
세상의 어떤 죄도 그 십자가보다 크지 않고, 그 십자가 위에서 해결되지 못할 죄는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내 죄는 크지만, 그분은 그 죄보다 더 크신 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이라는 것...
그분은 언제나 내 제한된 인식의 한계를 뛰어넘으시는 위대하시고, 거룩하시고, 능력이 있으신... 바로 내 구원자가 되신다는 사실...
그것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믿는 자의 유일한 희망이다.
그분 앞에서는 고개를 숙이고 경배하는 것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내가 뭘 좀 안다고 설쳐대며 그분을 이해하고 깨달았다고 생각할 때...
그리고 그분의 거룩하심을 알고, 그 거룩하심을 나도 본받아 나아가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을 때...
나는 그래도 좀 괜찮은 존재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을 때...
내 신앙은 그래도 좀 낫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그분이 현존 앞에 내 자신이 맞딱드려지게 된다.
그분 앞에서 내 무식함이 얼마나 치가 떨릴 정도인지...
그분을 아는 지식이 얼마나 형편없었는지... 얼마나 제한적이었는지..
그리고 그분의 거룩하심과 흠이 없이 깨끗하심을 볼 때, 내 소위 쓸만한 신앙이라는 것이 얼마나 누더기에 불과한 것인지....
그분 앞에 부끄러워 고개조차 들 수 없을 많큼 창피한 내 자신을 발견할 뿐이다...
내 스스로 내 죄에 몸서리치도록 고통스러울 때...
나처럼 더러운 자를 주님께서 받아주실 리가 없다고 주님으로부터 돌아서려고 할 때...
내 죄의 크기가 너무 커서 이 세상 어떤 것으로도 그 죄를 깨끗이할 수 없다고 절망할 때...
심지어 주님조차도... 주님의 십자가조차도 이 흉악한 죄, 더러운 죄를 깨끗케 하기에는 역부족이라고 느끼고 소망을 발견할 수 없을 때...
그 때 그 분의 현존 앞에 다시 한 번 내 자신을 비추인다.
그분은 흉악한 강도와,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던 창녀와, 불가촉천민 취급을 받았던 문둥병자를 품으시고 사랑하시고 그들의 죄를 용서하신 분....
내 죄가 아무리 크더라도, 내 죄가 아무리 지저분하다 하더라도, 내 스스로에게 절망할 만큼 그 죄가 나를 억누르고 나를 절망으로 몰더라도, 그것을 감당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
세상의 어떤 죄도 그 십자가보다 크지 않고, 그 십자가 위에서 해결되지 못할 죄는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내 죄는 크지만, 그분은 그 죄보다 더 크신 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이라는 것...
그분은 언제나 내 제한된 인식의 한계를 뛰어넘으시는 위대하시고, 거룩하시고, 능력이 있으신... 바로 내 구원자가 되신다는 사실...
그것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믿는 자의 유일한 희망이다.
그분 앞에서는 고개를 숙이고 경배하는 것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Posted at
오전 5:27:00
떠나고 싶다...
떠나고 싶다...
비행기를 타고, 저 멀리... 고향으로...
여기... 이곳에서의 모든 것은 그대로 뒤로 한 채...
그냥...
떠나고 싶다...
모든 것이... 덧없다...
비행기를 타고, 저 멀리... 고향으로...
여기... 이곳에서의 모든 것은 그대로 뒤로 한 채...
그냥...
떠나고 싶다...
모든 것이... 덧없다...
Posted at
오전 3:23:00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화를 내는 것, 진노하는 것.. 그 자체가 죄인가?
분명히 그것은 죄가 아니다. 만약 그것이 죄라면, 진노하시는 하나님이 죄를 짓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진노하신다. 분노하신다. 그것이 하나님에 의해서 된다고 해서 진노가 다른 것이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분노... 그것은 죄를 향한 분노이며, 불의와 부정을 향한 진노이다. 하나님은 그 속성상 절대로 죄를 지으실 수 없는 분이다. 따라서 그분의 진노는 죄의 카테고리 안에 있지 않다. 만약 그렇다면, 화 자체, 분노 자체가 죄라고 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이 화를 내도 되는가? 나는 어떤 경우에는 그리스도인이 화를 내도 될 뿐만 아니라 화를 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진노를 해야할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불의를 볼 때, 특별히 나 자신에게 가해진 불의보다는 사회적 부정과 불의, 그리고 약한 자들에게 가해지는 불의, 죄를 볼 때 그것을 지켜보면서 아무런 감정이 없이 평상심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이고,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책임을 져버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공의가 훼손되고 있는 그 현장에서, 그리고 고아와 과부를 돌보시고, 그들을 품으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이 머무는 약한 자들에게 가해지는 불의와 부정을 보면서, 자식된 자로서 아무런 느낌을 받지 못한다면, 사실 자신이 그분의 자녀인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아버지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고 아버지 일이 곧 내 일이기 때문에 결코 평상심을 유지하고 그대로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 때, 반드시 분노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진노해야한다. 공분을 느껴야 한다. 그 때는 분노, 화는 정당화될 수 있다.
나는 어리고 약한 영혼들에게 가해지는 영적인 학대를 접하면서, 분노를 느낀다. 매우 심한 분노를 느낀다. 약한 영혼들의 무지와 어림을 이용해서 잘못된 신학으로 그들을 어두움으로 몰아가는 그 학대를 보면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얼마나 진노하고 계실지 생각한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마 18:6)
예수님의 이 말씀은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 말씀은 다른 두 복음서에서도 강조되어 있는 예수님의 중요한 가르침 중의 하나이다.(눅 17:2, 막 9:42) 예수님은 분명히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 있는 "소자"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믿음 안에 어리고 연약한 자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믿음 안에 있지만, 어리고 연약해서 믿음 없어보이는 행동들과 상태에 자주 빠지는 자들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들을 실족하게하는 자들은 누구일까? 두 부류이다. 한 부류는 죄의 유혹으로 인도하는 자들이고, 다른 한 부류는 당시의 바리새인들처럼 감당하기 힘든 무거운 짐을 그 위에 얹어 놓음으로써 그들이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게 하는 자들인 것이다. (사실 두 부류는 궁극적으로 한 부류이다.)
최근 나는 후자의 경우를 많이 본다. 비록 바리새인들처럼 행위의 조항들을 들고 와서 들이대는 것은 아니지만, 성경적 근거도 희박한 "구원의 기준"이라는 것들을 들이대면서 연약한 자들을 한없는 나락으로 이끈는, 어두움 가운데 쓰러져 신음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말도 안되는 영적 학대를 접하면서, 큰 분노를 느낀다. 나는 그들이 바로 예수님의 그 저주의 말씀에 해당하는 죄를 받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하지만 문제는 나에게도 있다. 그런 영적 학대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귀한 영혼들을 어두움으로 몰아가는 무책임한 자들을 보면서 분노를 느끼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것이 도를 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엡 4:26-27)
분노는 그 자체가 죄는 아니지만, 분노를 품는 자는 죄에게 기회를 줘서 스스로 죄에 빠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렇기 때문에 분노를 품고 있는 자는 스스로가 아무리 정당한 원인으로 분노를 품고 있다 하더라도 스스로를 매우 경계해야 하며, 그 분노를 선한 일의 에너지로 바로 치환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 분노를 품고 그 에너지를 사용해서 더 열심히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더 열심히 영혼들을 바르게 섬기고, 더 열심히 자신을 돌아보며 자신도 같은 오류에 빠져 같은 죄를 짓지 않는지를 돌아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 분노를 인간에 대한 미움으로 치환시킬 기회를 주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는 순간 마귀가 나를 실족시킬 절호의 기회를 잡게 되고, 내가 쓰러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죄를 보면서 내가 비판하며 내가 분노하는 가운데, 내 스스로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는 죄 가운데 거할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최근 영혼들에게 가해지는 영적 학대의 사례를 접하면서, 내 안에 끓어 오르는 분노가 자리잡게 되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내가 실족하고 죄를 짓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전혀 기뻐하지 않으시는 모습이다. 내 스스로가 먼저 회개해야 한다. 불의에 항거하며, 맞서 싸우는 것은 멈추지 않겠지만, 그 가운데 하나님 앞에 죄를 짓는 것은 스스로 자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도 그들과 같은 불의한 자에 지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분명히 그것은 죄가 아니다. 만약 그것이 죄라면, 진노하시는 하나님이 죄를 짓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진노하신다. 분노하신다. 그것이 하나님에 의해서 된다고 해서 진노가 다른 것이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분노... 그것은 죄를 향한 분노이며, 불의와 부정을 향한 진노이다. 하나님은 그 속성상 절대로 죄를 지으실 수 없는 분이다. 따라서 그분의 진노는 죄의 카테고리 안에 있지 않다. 만약 그렇다면, 화 자체, 분노 자체가 죄라고 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이 화를 내도 되는가? 나는 어떤 경우에는 그리스도인이 화를 내도 될 뿐만 아니라 화를 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진노를 해야할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불의를 볼 때, 특별히 나 자신에게 가해진 불의보다는 사회적 부정과 불의, 그리고 약한 자들에게 가해지는 불의, 죄를 볼 때 그것을 지켜보면서 아무런 감정이 없이 평상심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이고,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책임을 져버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공의가 훼손되고 있는 그 현장에서, 그리고 고아와 과부를 돌보시고, 그들을 품으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이 머무는 약한 자들에게 가해지는 불의와 부정을 보면서, 자식된 자로서 아무런 느낌을 받지 못한다면, 사실 자신이 그분의 자녀인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아버지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고 아버지 일이 곧 내 일이기 때문에 결코 평상심을 유지하고 그대로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 때, 반드시 분노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진노해야한다. 공분을 느껴야 한다. 그 때는 분노, 화는 정당화될 수 있다.
나는 어리고 약한 영혼들에게 가해지는 영적인 학대를 접하면서, 분노를 느낀다. 매우 심한 분노를 느낀다. 약한 영혼들의 무지와 어림을 이용해서 잘못된 신학으로 그들을 어두움으로 몰아가는 그 학대를 보면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얼마나 진노하고 계실지 생각한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마 18:6)
예수님의 이 말씀은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 말씀은 다른 두 복음서에서도 강조되어 있는 예수님의 중요한 가르침 중의 하나이다.(눅 17:2, 막 9:42) 예수님은 분명히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 있는 "소자"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믿음 안에 어리고 연약한 자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믿음 안에 있지만, 어리고 연약해서 믿음 없어보이는 행동들과 상태에 자주 빠지는 자들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들을 실족하게하는 자들은 누구일까? 두 부류이다. 한 부류는 죄의 유혹으로 인도하는 자들이고, 다른 한 부류는 당시의 바리새인들처럼 감당하기 힘든 무거운 짐을 그 위에 얹어 놓음으로써 그들이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게 하는 자들인 것이다. (사실 두 부류는 궁극적으로 한 부류이다.)
최근 나는 후자의 경우를 많이 본다. 비록 바리새인들처럼 행위의 조항들을 들고 와서 들이대는 것은 아니지만, 성경적 근거도 희박한 "구원의 기준"이라는 것들을 들이대면서 연약한 자들을 한없는 나락으로 이끈는, 어두움 가운데 쓰러져 신음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말도 안되는 영적 학대를 접하면서, 큰 분노를 느낀다. 나는 그들이 바로 예수님의 그 저주의 말씀에 해당하는 죄를 받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하지만 문제는 나에게도 있다. 그런 영적 학대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귀한 영혼들을 어두움으로 몰아가는 무책임한 자들을 보면서 분노를 느끼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것이 도를 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엡 4:26-27)
분노는 그 자체가 죄는 아니지만, 분노를 품는 자는 죄에게 기회를 줘서 스스로 죄에 빠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렇기 때문에 분노를 품고 있는 자는 스스로가 아무리 정당한 원인으로 분노를 품고 있다 하더라도 스스로를 매우 경계해야 하며, 그 분노를 선한 일의 에너지로 바로 치환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 분노를 품고 그 에너지를 사용해서 더 열심히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더 열심히 영혼들을 바르게 섬기고, 더 열심히 자신을 돌아보며 자신도 같은 오류에 빠져 같은 죄를 짓지 않는지를 돌아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 분노를 인간에 대한 미움으로 치환시킬 기회를 주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는 순간 마귀가 나를 실족시킬 절호의 기회를 잡게 되고, 내가 쓰러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죄를 보면서 내가 비판하며 내가 분노하는 가운데, 내 스스로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는 죄 가운데 거할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최근 영혼들에게 가해지는 영적 학대의 사례를 접하면서, 내 안에 끓어 오르는 분노가 자리잡게 되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내가 실족하고 죄를 짓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전혀 기뻐하지 않으시는 모습이다. 내 스스로가 먼저 회개해야 한다. 불의에 항거하며, 맞서 싸우는 것은 멈추지 않겠지만, 그 가운데 하나님 앞에 죄를 짓는 것은 스스로 자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도 그들과 같은 불의한 자에 지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Posted at
오후 11:47:00
교만...
무지에 열정을 더하면 독선이 된다.
그리고 독선에 자기 의(義)를 더하면 교만이 된다.
신학적, 성경적 무지가 얼마나 큰 해악을 끼치는지 몸서리쳐질 만큼 분명히 본다.
하나님에 대한 열정이 얼마나 위험한 것이 될 수 있는지... 그 무지 가운데서 그 열정이 영혼을 잠식하고, 한 영혼을 어두움 가운데로 몰아가고, 급기야 실족하게 까지하는 무서운 죄를 범하는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
자기 의(義)... 자기가 옳다는 확신... 그리고 자기만 옳다는 확신...
분별이라는 이름으로... 그것도 무지한 자신의 상태를 알지 못한 채, 소위 분별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그 교만과 독선...
자신이 분별할 준비도 능력도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망각한 상태에서 휘둘러 대는 그 무시무시한 분별이라는 칼날에 많은 영혼들이 상처받고 피흘리며 쓰러진다. 교만한 자들의 눈에는 쓰러져 피흘리며 고통하는 그 영혼들은 소위 "믿음없는" 불쌍한 영혼들일 뿐이다... 자신들의 말과 행동이 비수같은 칼날이 되어 영혼에게 해악을 끼쳤는지는 결코 돌아보지 않는다. 모든 것이 타인의 잘못일 뿐... 그들이 거듭나지 않아서일 뿐... 그 칼부림을 해대는 자신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확신한다. 철저한 무지... 자기 중심적인 사고... 남탓하는 것은, 남이 부족하다고,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쉬운 일이다... 자신을 돌아볼 줄 아는 자, 자신의 내면을 철저하게 돌아보고 자신의 과오를 볼 줄 아는 자들... 그런 자들이 진정으로 귀하게 쓰임받는 자들이다... 교만한 자들은 칼끝을 타인에게 들이대는 것에는 매우 익숙하지만, 그 칼을 자신 안에 있는 엄청난 오류와 잘못을 수술하기 위해 자신에게로 돌리는 데는 매우 인색하다...
교만한 자... 그들은 동역을 모른다. 지극히 제한된 소수의 사람들과 같이 일하는 그것만을 그들은 동역이라 부른다. 자신과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들은 "믿지 않는 자" "복음이 없는 자"라고 쉽게 규정해 버린다. 그리고 배척하고 함께하지 않는다.
분별이라는 이름으로...
그것이 바로 교만이라는 것을 그들은 알까?
그 교만이 지극히 가증스러운 것이라는 것... 그것을 알까?
분별할 능력도 준비도 되어 있지 않는 자들이 스스로 겸손할 줄 모르고 날뛰는 그 가증스러운 가공할만한 무식함의 횡포....
그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제발... 깨달아야 할텐데...
그리고 독선에 자기 의(義)를 더하면 교만이 된다.
신학적, 성경적 무지가 얼마나 큰 해악을 끼치는지 몸서리쳐질 만큼 분명히 본다.
하나님에 대한 열정이 얼마나 위험한 것이 될 수 있는지... 그 무지 가운데서 그 열정이 영혼을 잠식하고, 한 영혼을 어두움 가운데로 몰아가고, 급기야 실족하게 까지하는 무서운 죄를 범하는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
자기 의(義)... 자기가 옳다는 확신... 그리고 자기만 옳다는 확신...
분별이라는 이름으로... 그것도 무지한 자신의 상태를 알지 못한 채, 소위 분별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그 교만과 독선...
자신이 분별할 준비도 능력도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망각한 상태에서 휘둘러 대는 그 무시무시한 분별이라는 칼날에 많은 영혼들이 상처받고 피흘리며 쓰러진다. 교만한 자들의 눈에는 쓰러져 피흘리며 고통하는 그 영혼들은 소위 "믿음없는" 불쌍한 영혼들일 뿐이다... 자신들의 말과 행동이 비수같은 칼날이 되어 영혼에게 해악을 끼쳤는지는 결코 돌아보지 않는다. 모든 것이 타인의 잘못일 뿐... 그들이 거듭나지 않아서일 뿐... 그 칼부림을 해대는 자신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확신한다. 철저한 무지... 자기 중심적인 사고... 남탓하는 것은, 남이 부족하다고,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쉬운 일이다... 자신을 돌아볼 줄 아는 자, 자신의 내면을 철저하게 돌아보고 자신의 과오를 볼 줄 아는 자들... 그런 자들이 진정으로 귀하게 쓰임받는 자들이다... 교만한 자들은 칼끝을 타인에게 들이대는 것에는 매우 익숙하지만, 그 칼을 자신 안에 있는 엄청난 오류와 잘못을 수술하기 위해 자신에게로 돌리는 데는 매우 인색하다...
교만한 자... 그들은 동역을 모른다. 지극히 제한된 소수의 사람들과 같이 일하는 그것만을 그들은 동역이라 부른다. 자신과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들은 "믿지 않는 자" "복음이 없는 자"라고 쉽게 규정해 버린다. 그리고 배척하고 함께하지 않는다.
분별이라는 이름으로...
그것이 바로 교만이라는 것을 그들은 알까?
그 교만이 지극히 가증스러운 것이라는 것... 그것을 알까?
분별할 능력도 준비도 되어 있지 않는 자들이 스스로 겸손할 줄 모르고 날뛰는 그 가증스러운 가공할만한 무식함의 횡포....
그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제발... 깨달아야 할텐데...
Posted at
오후 4:54:00
"자기 존재의 밑바닥을 확인해야 한다?" (2)
그렇다면 두번째 질문...
자기 존재의 밑바닥을 확인한다는 것이 정말 가능한 것일까?
결론은 "불가능하다"이다.
사실 내 죄성의 바닥을 확인이 가능하다는 생각은 지극히 인간적인 생각이다. 그것은 인간을 과대평가한 소치일 뿐이다.
인간의 죄성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의 타락상이 창세기 3장부터 11장까지 잘 나와 있고, 성경 전체를 통해서 보여지고 있다. 인간의 밑바닥은 죽을 때까지 확인해도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타락했다. "Total Depravity"는 인간의 타락 범위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정도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만약 우리가 내 죄악의 밑바닥을 확인하고자 한다면, 평생 죽을 때까지 그것만 하더라도 죽기전에 그 바닥을 확인할 수 없다. 그것이 성경적이다.
밑바닥을 확인한다는 말 그 자체가 뭔가 내 죄의 끝이 있다는 것을 명시적으로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나도 잘 안다. 그리고 그 말들을 자주 사용하는 자들의 기본적인 생각은 내가 내 스스로에게 철저하게 절망할 만큼 내 죄인됨을 확인해야 한다는 의미로 그 말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도 잘 안다. 하지만 그게 그거다. 내 죄악의 밑바닥을 확인하는 것이 불가능할 만큼, 내가 내 스스로에게 철저하게 절망하는 것도 불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내 안에 생기는 죄에 대한 내성 때문이다.
내 안에 흉악한 죄를 발견할 때,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나에게 절망한다.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런 죄를 짓는 내 모습이 너무나 당연해 보인다. "So what?" 그런 반응을 보이게 마련이다. 인간은 죄에 대해 내성을 가졌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많은 죄를 짓고도 살아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인간의 모습을 보고 스스로의 죄를 보고 절망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참으로 친절한 의협심과 사명감에 가득차 있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거듭나기 위해서는 부서져야 한다는 것을 철저하게 믿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나서서 부서지는 것을 도와주고, 때로는 그것이 도를 넘어 돕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부숴뜨리기로 작정하고 나서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 사례들을 잘 알고 있다. 그것을 위해서 인격을 모독하는, 참으로 무례한 언행까지도 서슴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참으로 불쌍한 자들... 그들이 망각한 것은, 그것은 옆에서 도와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자신들이 나설 일이 아니라는 것... 자신들이 나서는 것은 인간적인 열심과 과욕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 그렇게 해서 나오는 결과는 대부분이 영혼을 더 깊은 어두움과 상처 가운데로 몰아가는 것일 뿐이라는 것... 인간이 진정으로 스스로의 죄를 보며 절망하게 되는 것은 오직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 어찌보면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서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나선 교만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본인들은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된다고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식으로 역사하시는 분이 아니다. 만약 옆에서 진정으로 돕고 싶다면, 한 영혼의 죄를 들춰내고, 찔러대고 상처를 주는 대신, 그 영혼에 성령의 역사가 있도록, 성령께서 임하셔서 그 영혼이 자신의 죄악됨을 철저히 깨달을 수 있도록 기도해 주는 것 뿐이다. 그리고 사랑과 온유와 인내로 그 영혼을 섬기는 것이다.
사실 한 영혼이 자신의 죄인됨을 가장 철저하게, 그리고 효과적으로 깨닫는 방법은, 자신의 죄악됨에 집중하는 것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노출되었을 때이다. 믿음이 있건 없건간에 성경의 말씀으로 사람은 하나님께 노출될 수가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 노출되었을 때, 인간은 그 거룩하시고 흠이 없으신 하나님에 비해서 자신이 얼마나 형편 없는지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라는 햇볕이 비추일 때 인간은 자신의 어두움을 자각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한 영혼에게 죄악을 지적하며 끝임없이 자신의 죄, 부족함, 나약함, 더러움에 집중하게 하는 것보다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주며, 그분께 시선을 고정시키도록 하는 것이 최고의 방법이다.
결론적으로 내 밑바닥... 그것을 들여다 본다고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게 될 때,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려주는 그 말씀에 노출되어 그분을 바라보게 될 때(그것은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하다), 그 때에야, 내 자신의 밑바닥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인 내가 영혼을 위해 할 수 있는 것... 그것은 그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지속적으로 말씀을 통해 나누는 것 뿐이다. 정말 그것 뿐이다...
자기 존재의 밑바닥을 확인한다는 것이 정말 가능한 것일까?
결론은 "불가능하다"이다.
사실 내 죄성의 바닥을 확인이 가능하다는 생각은 지극히 인간적인 생각이다. 그것은 인간을 과대평가한 소치일 뿐이다.
인간의 죄성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의 타락상이 창세기 3장부터 11장까지 잘 나와 있고, 성경 전체를 통해서 보여지고 있다. 인간의 밑바닥은 죽을 때까지 확인해도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타락했다. "Total Depravity"는 인간의 타락 범위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정도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만약 우리가 내 죄악의 밑바닥을 확인하고자 한다면, 평생 죽을 때까지 그것만 하더라도 죽기전에 그 바닥을 확인할 수 없다. 그것이 성경적이다.
밑바닥을 확인한다는 말 그 자체가 뭔가 내 죄의 끝이 있다는 것을 명시적으로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나도 잘 안다. 그리고 그 말들을 자주 사용하는 자들의 기본적인 생각은 내가 내 스스로에게 철저하게 절망할 만큼 내 죄인됨을 확인해야 한다는 의미로 그 말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도 잘 안다. 하지만 그게 그거다. 내 죄악의 밑바닥을 확인하는 것이 불가능할 만큼, 내가 내 스스로에게 철저하게 절망하는 것도 불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내 안에 생기는 죄에 대한 내성 때문이다.
내 안에 흉악한 죄를 발견할 때,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나에게 절망한다.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런 죄를 짓는 내 모습이 너무나 당연해 보인다. "So what?" 그런 반응을 보이게 마련이다. 인간은 죄에 대해 내성을 가졌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많은 죄를 짓고도 살아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인간의 모습을 보고 스스로의 죄를 보고 절망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참으로 친절한 의협심과 사명감에 가득차 있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거듭나기 위해서는 부서져야 한다는 것을 철저하게 믿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나서서 부서지는 것을 도와주고, 때로는 그것이 도를 넘어 돕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부숴뜨리기로 작정하고 나서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 사례들을 잘 알고 있다. 그것을 위해서 인격을 모독하는, 참으로 무례한 언행까지도 서슴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참으로 불쌍한 자들... 그들이 망각한 것은, 그것은 옆에서 도와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자신들이 나설 일이 아니라는 것... 자신들이 나서는 것은 인간적인 열심과 과욕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 그렇게 해서 나오는 결과는 대부분이 영혼을 더 깊은 어두움과 상처 가운데로 몰아가는 것일 뿐이라는 것... 인간이 진정으로 스스로의 죄를 보며 절망하게 되는 것은 오직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 어찌보면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서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나선 교만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본인들은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된다고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식으로 역사하시는 분이 아니다. 만약 옆에서 진정으로 돕고 싶다면, 한 영혼의 죄를 들춰내고, 찔러대고 상처를 주는 대신, 그 영혼에 성령의 역사가 있도록, 성령께서 임하셔서 그 영혼이 자신의 죄악됨을 철저히 깨달을 수 있도록 기도해 주는 것 뿐이다. 그리고 사랑과 온유와 인내로 그 영혼을 섬기는 것이다.
사실 한 영혼이 자신의 죄인됨을 가장 철저하게, 그리고 효과적으로 깨닫는 방법은, 자신의 죄악됨에 집중하는 것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노출되었을 때이다. 믿음이 있건 없건간에 성경의 말씀으로 사람은 하나님께 노출될 수가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 노출되었을 때, 인간은 그 거룩하시고 흠이 없으신 하나님에 비해서 자신이 얼마나 형편 없는지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라는 햇볕이 비추일 때 인간은 자신의 어두움을 자각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한 영혼에게 죄악을 지적하며 끝임없이 자신의 죄, 부족함, 나약함, 더러움에 집중하게 하는 것보다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주며, 그분께 시선을 고정시키도록 하는 것이 최고의 방법이다.
결론적으로 내 밑바닥... 그것을 들여다 본다고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게 될 때,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려주는 그 말씀에 노출되어 그분을 바라보게 될 때(그것은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하다), 그 때에야, 내 자신의 밑바닥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인 내가 영혼을 위해 할 수 있는 것... 그것은 그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지속적으로 말씀을 통해 나누는 것 뿐이다. 정말 그것 뿐이다...
Posted at
오후 2:06:00
"자기 존재의 밑바닥을 확인해야 한다?" (1)
"거듭나기 위해 자기 존재의 밑바닥을 확인해야 한다."
일면 맞는 말이지만, 일면 완전히 틀린 말이다.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자각이 생긴 사람이기도 하지만, 자기 자신에 대한 자각도 동시에 생긴 사람이다. 내가 누구인지 알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거듭나기 전에는 그래도 나는 쓸만 한 사람. 의인이라고 자청하기는 쑥스럽지만, 악인이라고 평가하는 것에 도저히 동의할 수 없고, 나쁜 짓을 했지만, 그래도 착한일을 더 많이한, 그것이 아니더라도 그리 나쁜일을 많이 하지 않은 그런 대로 괜찮은 사람이라는 자의식을 가지고 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면, 그런 자신이 얼마나 더러운지, 사도 바울의 표현에 의하면 "죄인 중에 내가 괴수"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자신의 존재의 밑바닥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런데, 거듭나기 위해서 반드시 그 전에 자신의 밑바닥을 확인해야 하는 것일까? 그것이 반드시 그런 순서대로 되는 것일까? 그리고 더 나아가 자신의 밑바닥을 확인한다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
개인적인 회심의 경험을 이야기하자면, 내 경우에는 거듭나기 전에 분명히 내 존재의 타락성과 부패성을 철저하게 자각했다. 내 죄성이 얼마나 뿌리깊은지, 내가 얼마나 형편없는 죄인인지를 분명히 알았고, 그것을 내 힘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깊은 절망도 맛 보았다. 그런 나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진정으로 구원이었고, 인간을 죄인으로 정죄하는 성경은 분명히 진리였다.
하지만, 내가 경험한 것이 모든 사람의 구원 경험에서 발견되는 것인가? 반드시 그런 프로세스를 거쳐야만 하는 것인가?
아니다. 결코 아니다. 절대 아니다. 만약 그런 식으로 구원 프로세스를 공식화 한다면, 그것은 진리를 왜곡하는 것이다.
물론 자신의 죄성에 대한 어느 정도의 자각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이해하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자기 존재의 밑바닥"을 경험해야만 복음을 받아 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밑바닥은 복음을 영접한 후 하나님을 더 깊이 경험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부산물일 가능성이 더 높다. 거룩하신 하나님, 흠이 없으신 그분을 알면 알수록, 거기에 비친 내 모습이 얼마나 더러운지, 그 전에 상상할 수 없었던 정도로 더럽고 벌레만도 못한 죄인임을 깨달아 가게 되는 것이다. 그런 깨달음, 그런 바닥 확인은 하나님을 만나고 지속적으로 경험하는 가운데 깊은 교제가 없으면 불가능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내 경우처럼 특별하게 역사하지 않으신다면, 그런 바닥확인은 당연히 거듭난 이후에 있는 하나의 과정인 것이다. 따라서 밑바닥 확인을 거듭남의 필수 요건인 것처럼 가르치는 것은 성경의 진리를 호도하는 것이다.
내 경우에는 나라는 인간이 특별히 교만하고, 자기 의에 가득차는 성향이 매우 강한 자이고, 내 스스로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교만한 자이기 때문에,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특별히 나를 낮추시고, 가망성 없는 내 모습을 직시하게 하심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찾지 않으면 안되도록 인도하신 것이다. 그것은 나를 창조하신 창조주로서 그 누구보다도 나를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나를 구원하시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그것을 모든 사람에게 일반화 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빌리 그래함 목사님의 부인이신 루스 그래함은 교회에서 태어나서 교회에서 자랐다. 그분은 자신의 죄성에 절망해서 자신의 존재의 밑바닥을 확인한 극적인 경험이 없었다. 그분은 자신이 언제 영접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어느 순간은 물론이고 대충 어느 나이 정도에 영접했는지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분은 분명 거듭난 자였고, 하나님의 자녀였다. 극적으로 회심을 경험했던 빌리 그래함 목사님은 루스 그래함을 절대로 거듭나지 않은 자라고 정죄하지 않았고, 오히려 한 믿음 안에 있는 자로서 평생을 같이 동역했고, 많은 열매를 맺고 크게 쓰임을 받았다. 루스 그래함이 태어나면서부터 믿음을 가졌던 것은 절대 아니다. 그 인생의 어느 시점에 분명히 구원 받은 시점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분의 구원 경험, 혹은 회심 경험은 나나 그분의 남편의 경험과는 다른 것이었다.(RC Sproul교수는 Conversion과 Conversion Experience는 분명히 구별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분에 따르면 그것을 혼동함으로써 많은 오류들이 양산되고 있다고 가르친다. 나는 전적으로 그의 주장에 동의한다. 내가 전에 다니던 교회가 그런 혼동가운데 있고 그래서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그렇다고 그분을 믿음 없다고 정죄할 것인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에 맞게 구원의 역사를 배푸신 것이다.
결론적으로 거듭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의 죄인됨의 밑바닥을 반드시 경험해야한다는 것은 결코 성경적이지 않은 주장인 것이다.
(다음에 계속...)
일면 맞는 말이지만, 일면 완전히 틀린 말이다.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자각이 생긴 사람이기도 하지만, 자기 자신에 대한 자각도 동시에 생긴 사람이다. 내가 누구인지 알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거듭나기 전에는 그래도 나는 쓸만 한 사람. 의인이라고 자청하기는 쑥스럽지만, 악인이라고 평가하는 것에 도저히 동의할 수 없고, 나쁜 짓을 했지만, 그래도 착한일을 더 많이한, 그것이 아니더라도 그리 나쁜일을 많이 하지 않은 그런 대로 괜찮은 사람이라는 자의식을 가지고 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면, 그런 자신이 얼마나 더러운지, 사도 바울의 표현에 의하면 "죄인 중에 내가 괴수"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자신의 존재의 밑바닥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런데, 거듭나기 위해서 반드시 그 전에 자신의 밑바닥을 확인해야 하는 것일까? 그것이 반드시 그런 순서대로 되는 것일까? 그리고 더 나아가 자신의 밑바닥을 확인한다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
개인적인 회심의 경험을 이야기하자면, 내 경우에는 거듭나기 전에 분명히 내 존재의 타락성과 부패성을 철저하게 자각했다. 내 죄성이 얼마나 뿌리깊은지, 내가 얼마나 형편없는 죄인인지를 분명히 알았고, 그것을 내 힘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깊은 절망도 맛 보았다. 그런 나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진정으로 구원이었고, 인간을 죄인으로 정죄하는 성경은 분명히 진리였다.
하지만, 내가 경험한 것이 모든 사람의 구원 경험에서 발견되는 것인가? 반드시 그런 프로세스를 거쳐야만 하는 것인가?
아니다. 결코 아니다. 절대 아니다. 만약 그런 식으로 구원 프로세스를 공식화 한다면, 그것은 진리를 왜곡하는 것이다.
물론 자신의 죄성에 대한 어느 정도의 자각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이해하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자기 존재의 밑바닥"을 경험해야만 복음을 받아 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밑바닥은 복음을 영접한 후 하나님을 더 깊이 경험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부산물일 가능성이 더 높다. 거룩하신 하나님, 흠이 없으신 그분을 알면 알수록, 거기에 비친 내 모습이 얼마나 더러운지, 그 전에 상상할 수 없었던 정도로 더럽고 벌레만도 못한 죄인임을 깨달아 가게 되는 것이다. 그런 깨달음, 그런 바닥 확인은 하나님을 만나고 지속적으로 경험하는 가운데 깊은 교제가 없으면 불가능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내 경우처럼 특별하게 역사하지 않으신다면, 그런 바닥확인은 당연히 거듭난 이후에 있는 하나의 과정인 것이다. 따라서 밑바닥 확인을 거듭남의 필수 요건인 것처럼 가르치는 것은 성경의 진리를 호도하는 것이다.
내 경우에는 나라는 인간이 특별히 교만하고, 자기 의에 가득차는 성향이 매우 강한 자이고, 내 스스로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교만한 자이기 때문에,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특별히 나를 낮추시고, 가망성 없는 내 모습을 직시하게 하심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찾지 않으면 안되도록 인도하신 것이다. 그것은 나를 창조하신 창조주로서 그 누구보다도 나를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나를 구원하시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그것을 모든 사람에게 일반화 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빌리 그래함 목사님의 부인이신 루스 그래함은 교회에서 태어나서 교회에서 자랐다. 그분은 자신의 죄성에 절망해서 자신의 존재의 밑바닥을 확인한 극적인 경험이 없었다. 그분은 자신이 언제 영접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어느 순간은 물론이고 대충 어느 나이 정도에 영접했는지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분은 분명 거듭난 자였고, 하나님의 자녀였다. 극적으로 회심을 경험했던 빌리 그래함 목사님은 루스 그래함을 절대로 거듭나지 않은 자라고 정죄하지 않았고, 오히려 한 믿음 안에 있는 자로서 평생을 같이 동역했고, 많은 열매를 맺고 크게 쓰임을 받았다. 루스 그래함이 태어나면서부터 믿음을 가졌던 것은 절대 아니다. 그 인생의 어느 시점에 분명히 구원 받은 시점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분의 구원 경험, 혹은 회심 경험은 나나 그분의 남편의 경험과는 다른 것이었다.(RC Sproul교수는 Conversion과 Conversion Experience는 분명히 구별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분에 따르면 그것을 혼동함으로써 많은 오류들이 양산되고 있다고 가르친다. 나는 전적으로 그의 주장에 동의한다. 내가 전에 다니던 교회가 그런 혼동가운데 있고 그래서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그렇다고 그분을 믿음 없다고 정죄할 것인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에 맞게 구원의 역사를 배푸신 것이다.
결론적으로 거듭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의 죄인됨의 밑바닥을 반드시 경험해야한다는 것은 결코 성경적이지 않은 주장인 것이다.
(다음에 계속...)
Posted at
오후 2:06:00
[펌]Growing into Salvation through the Living and Abiding Word of God (1 Peter 2:1-3)
지난 주 주일 우리 교회 설교 말씀이다.
지난 주에 허리를 심하게 다쳐서 교회를 가지 못하고 침대에 누워 인터넷으로 예배를 드렸다.
말씀을 들으면서 참으로 놀랐다. 지극히 성경적이고, 지극히 균형잡힌 그 말씀...
그 말씀을 들으면서, 내 안에 뿌리깊게 자리잡은 신학적 오류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너무나 기뻤다. 너무 감사했다. 이런 귀한 말씀을 들을 수 있게 되어서...
http://highpointeaustin.org/archives/sermons/growing-into-salvation-through-1-peter-21-3
지난 주에 허리를 심하게 다쳐서 교회를 가지 못하고 침대에 누워 인터넷으로 예배를 드렸다.
말씀을 들으면서 참으로 놀랐다. 지극히 성경적이고, 지극히 균형잡힌 그 말씀...
그 말씀을 들으면서, 내 안에 뿌리깊게 자리잡은 신학적 오류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너무나 기뻤다. 너무 감사했다. 이런 귀한 말씀을 들을 수 있게 되어서...
http://highpointeaustin.org/archives/sermons/growing-into-salvation-through-1-peter-21-3
Posted at
오전 4:31:00
복음이란 무엇일까?
최근 한 달 사이에 예전에 다니던 교회의 청년부 지체들을 만나게 되었다.
처음에는 두 세명을 우연히, 혹은 다른 관계로 만나서 이야기 나누는 수준이었다. 그 때까지 교회를 떠난 자로서 멀리서 지켜보고만 있겠다는 생각을 해왔기 때문에 내가 떠나고 난 후 공동체가 잘 되기만을 바라는 마음만 가지고 있었을 뿐 어떤 액션도 취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이 두 세명을 만난 후 마음이 바뀌었다. 내가 그냥 지켜보고 있을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깨달았다. 하나님께서 결코 내가 그냥 있기를 원하지 않으신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나에게 찾아오는 지체들을 결코 피하지 않기로 했고, 아주 가끔은 낙망 가운데 쓰러져 있는 지체들에게 다가갈 필요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를 만난 그들... 대부분 나를 만나기를 먼저 원해서 만났던 그들은 모두 절망과 깊은 어두움 가운데 있었다. 구원에 대해서 확신은 없었고, 절망과 온갖 어두움이 그 영혼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들은 나를 만나자 마자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 내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나로서는 참으로 고통스러웠다. 왜냐하면, 그것은 온통 자신에 관한 이야기 뿐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의 믿음 생활을 듣기를 원했는데, 그들은 자신의 부족한 부분, 자신이 구원받지 못했다는 확신을 갖게한 교회가 알려준 자신의 부족한 부분들에 대해서만 나열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그들의 영혼은 좌절해 있었고, 어두움 가운데 거하고 있었다. 이들 이후에 만난 모든 영혼들은 동일한 모습을 나에게 보여줬다. 그들에게 믿음이란 도저히 다다를 수 없는 높은 "경지"에 있는 그 무엇일 뿐이었고, 자신들은 그 경지에 도달할 수 없는 형편없는 존재일 뿐이라는 확신이 너무 강했다.
절망 가운데서 눈물을 보이는 그들... 그것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내가 그 지체들을 만나서 할 수 있는 것은 단 한 가지 밖에 없었다. 그것은 복음을 전하는 것...
자신의 죄와 부족한 부분에만 고정되어 있는 시선을 돌려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는 것...
절망스러운 자신의 모습... 죄가 끊이지 않는 자신의 모습... 자기 의로 가득찬 자신의 모습... 믿음이 없이 연약해 쓰러지는 자신의 모습...
그렇다! 그것이 바로 인간이다. 칼빈이 Total Depravity라고 인간의 상태를 정의했을 때, 그가 그리고 있는 모습, 그리고 성경이 보여주는 인간의 모습은 바로 선한 것이 하나도 있을 수 없는, 그 존재 자체가 죄이고 악인 모습이었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절대 희망이 없다. 인간에게 집중하면 할수록 우리는 절망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마귀는 우리를 죄로 유혹한 뒤, 그런 죄된 우리의 모습에 집중하게 하고, 거기에 눌려 있게하고, 그래서 어두움 가운데서 자포자기한 상태에서 마귀의 종으로 계속 살게 한다. 그것이 그의 전략이다.
복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그런 형편없는 존재, 벌레만도 못한 나같은 존재를 위해서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으로 오셨고, 이 땅에서 "나를 위해서" 완벽하게 의로운 삶을 사셨고, "나를 위해서" 아니 "내 그런 더러운 죄, 아니 죄된 본성"을 짊어지시고 내가 달려야 할 십자가에 달리셨고, 하나님은 내가 있어야 할 그 자리에 내 죄를 지시고 달리신 그분께 모든 진노를 쏟아 부으셨고, 그 결과 죄의 궁극적인 결과인 죽음을 예수님께서 "내 대신" 맛 보셔야 했다는 것... 그래서 이제 나에게 더 이상 정죄가 없다는 것, 그리고 그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 살아계시고, 나의 주가 되시기 때문에, 나는 그분의 지배를 받으며 그분을 닮아가는 삶, 이제는 죄를 위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 그럴 자격이 전혀 없는 자가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그런 영광스런 자리로 부르심을 받게 되었다는 것.... 그것이 복음 아닌가?
그 복음은 분명 죄된 나의 모습을 보게 하지만, 그것이 절대 중심이 아니라는 것... 그것이 너무나 중요한 진리이다. 복음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내 죄와 내가 형편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보는 것에서 그친다면, 그것은 저주일 뿐이다. 거기에는 절망밖에 없다. 그런 나를 보는 시선에서, 내가 그렇게 죄인이기 때문에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 그것이 복음 아닌가? 나에게 철저히 절망하는 대신, 그분께 완전한 희망을 두는 것이 그것이 바로 복음이 아닌가?
정말 놀라운 것은... 정말 가슴아픈 것은... 내가 만난 모든 지체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시선, 예수 그리스도께 소망을 두는 그 소망,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을 완전히 망각한 채, 자신의 죄됨에만 너무 obssessed되어 있는 것을 본 것이다...
어찌 그럴 수가... 도대체... 도대체... 뭘 배웠길래?
모든 지체들에게 내가 한 것은 복음을 전하는 것 뿐이었다.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한 것 뿐이었다. 그런데 그 복음을 들은 그들이 보인 반응... 너무나 놀라는 그 반응... 눈을 번쩍 뜨는 그 반응...
솔직히 그 반응을 보고 내가 놀랐다. 그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너무나 기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듣고 놀라면 안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가 놀랐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듣고, 그분이 구원자가 되신다는 그 소식을 듣고, 그분께 모든 것을 집중하고 그분만 바라보라는 그 설명을 듣고, 그들이 놀랐다....
한 지체가 나를 만나고 나서 이메일을 보내 왔다. 사실 다음과 같은 메일은 그 지체만의 반응이 아니었다. 모든 지체들이 보이는 동일한 반응이었다.
"어제 들은 내용을 오늘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그 은혜... 내가 어떻게 해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받게 되는 그 십자가가 내것이라는 것을 정말 오랫만에 다시 깨닫게 되었고, 또 오랫만에 "예수님"의 이름이 나에게 저주가 아닌 구원의 이름으로 다가왔습니다. 예전 저에게 찾아와 주신 예수님을 다시 만나게 되는것 같아 너무나 기쁘고 정말 잃었던 것을 다시 찾은 듯 하였습니다.
오늘 정말 오랫만에 말씀을 보며 너무 두렵더군요... 정말 그 말씀을 제가 제대로 받고는 있는지.. 라는 생각에 두려웠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제가 필요한 말씀을 찾고 끼워 맞추고 있는 제 모습을 보았고, 하나님께 초점이 맞추어지지 않은 것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나에 눈을 뜨게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이해하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라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주권은 하나님께 계시다는것을 잊고 있었고 초점은 그분에게 있어야 한다는 것도 잊고 있었습니다."
복음과 더불어 만난 모든 지체들에게 강조한 것은 성경공부였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진리 그 자체라는 것.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모든 판단 기준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나도, 어떤 인간도 교회도 아닌 성경이라는 것. 성경만이 진리이고,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하시고자 하는 모든 말씀을 성경에 다 해 놓으셨기 때문에 부지런히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것이 믿는 자의 바른 자세라는 것을 누누히 강조했다.
나를 만난 이후 그들의 변화는 분명했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게 되었고, 말씀을 사랑하게 되었고, 거룩한 삶,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향한 열정이 생기는 것을 보았다.
최근 어떤 경로를 통해서 전에 내가 다니던 교회에서 나를 위험인물로 지목하고, 나를 블랙리스트에 올렸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내가 지체들을 만나서 교회를 떠나라고 부추기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로부터 오는 모든 연락에 반응하지 말라고 상부에서 지시가 내려진 모양이다.
사실 내가 만났던 많은 지체 중에서 내가 교회를 떠나라고 권면한 지체는 한 명 뿐이다. 그 지체는 그것을 거부했고, 지금도 열심히 다니고 있다. 나머지 지체 중 절반에게는 교회를 떠나지 말고 그 교회에서 중요한 것들을 더 배울 것을 권면했고, 그 나머지 절반에게는 본인들이 원하는 대로 하라고 권면했다. 내가 적극적으로 교회를 떠나라고 한 것은 한 경우 빼놓고는 없었다. 교회를 떠나는 것이 내 관심사가 아니기 때문에 그 주제는 대화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도 못했다. 중요한 것은 복음이었고, 그리스도였고, 말씀이었다.
복음을 전하는 나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죄인인 우리에게 유일한 희망이고 생명이라는 것을 전하는 내가 위험인물이고 기피해야할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다면, 참 아이러니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바로 그 교회가 스스로 복음에 목숨을 건다고 생각하는 교회이기 때문이다.
내가 사랑하는 지체들이 있는, 사랑하는 교회이다. 나는 그 교회가 하나님 안에서 복음 안에서 바르게 자라가는 것을 참으로 소망한다. 교회가 잘못되는 것은 내가 바라는 것이 절대 아니다. 복음이 바르게 이해되고 그리스도가 소망이되고 중심이되고 생명이되고 기쁨이 되는 가운데, 모두가 십자가로 인해서 해방의 기쁨을 만끽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한다.
만약 그런 내가 그들의 경계 대상이고 기피 대상이라면, 나로서는 할 말은 단 한 가지 밖에 없다.
"Let it be! I don't care!"
나는 나를 찾아 오는 불쌍한 영혼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하는 그 일... 바로 그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처음에는 두 세명을 우연히, 혹은 다른 관계로 만나서 이야기 나누는 수준이었다. 그 때까지 교회를 떠난 자로서 멀리서 지켜보고만 있겠다는 생각을 해왔기 때문에 내가 떠나고 난 후 공동체가 잘 되기만을 바라는 마음만 가지고 있었을 뿐 어떤 액션도 취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이 두 세명을 만난 후 마음이 바뀌었다. 내가 그냥 지켜보고 있을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깨달았다. 하나님께서 결코 내가 그냥 있기를 원하지 않으신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나에게 찾아오는 지체들을 결코 피하지 않기로 했고, 아주 가끔은 낙망 가운데 쓰러져 있는 지체들에게 다가갈 필요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를 만난 그들... 대부분 나를 만나기를 먼저 원해서 만났던 그들은 모두 절망과 깊은 어두움 가운데 있었다. 구원에 대해서 확신은 없었고, 절망과 온갖 어두움이 그 영혼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들은 나를 만나자 마자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 내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나로서는 참으로 고통스러웠다. 왜냐하면, 그것은 온통 자신에 관한 이야기 뿐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의 믿음 생활을 듣기를 원했는데, 그들은 자신의 부족한 부분, 자신이 구원받지 못했다는 확신을 갖게한 교회가 알려준 자신의 부족한 부분들에 대해서만 나열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그들의 영혼은 좌절해 있었고, 어두움 가운데 거하고 있었다. 이들 이후에 만난 모든 영혼들은 동일한 모습을 나에게 보여줬다. 그들에게 믿음이란 도저히 다다를 수 없는 높은 "경지"에 있는 그 무엇일 뿐이었고, 자신들은 그 경지에 도달할 수 없는 형편없는 존재일 뿐이라는 확신이 너무 강했다.
절망 가운데서 눈물을 보이는 그들... 그것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내가 그 지체들을 만나서 할 수 있는 것은 단 한 가지 밖에 없었다. 그것은 복음을 전하는 것...
자신의 죄와 부족한 부분에만 고정되어 있는 시선을 돌려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는 것...
절망스러운 자신의 모습... 죄가 끊이지 않는 자신의 모습... 자기 의로 가득찬 자신의 모습... 믿음이 없이 연약해 쓰러지는 자신의 모습...
그렇다! 그것이 바로 인간이다. 칼빈이 Total Depravity라고 인간의 상태를 정의했을 때, 그가 그리고 있는 모습, 그리고 성경이 보여주는 인간의 모습은 바로 선한 것이 하나도 있을 수 없는, 그 존재 자체가 죄이고 악인 모습이었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절대 희망이 없다. 인간에게 집중하면 할수록 우리는 절망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마귀는 우리를 죄로 유혹한 뒤, 그런 죄된 우리의 모습에 집중하게 하고, 거기에 눌려 있게하고, 그래서 어두움 가운데서 자포자기한 상태에서 마귀의 종으로 계속 살게 한다. 그것이 그의 전략이다.
복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그런 형편없는 존재, 벌레만도 못한 나같은 존재를 위해서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으로 오셨고, 이 땅에서 "나를 위해서" 완벽하게 의로운 삶을 사셨고, "나를 위해서" 아니 "내 그런 더러운 죄, 아니 죄된 본성"을 짊어지시고 내가 달려야 할 십자가에 달리셨고, 하나님은 내가 있어야 할 그 자리에 내 죄를 지시고 달리신 그분께 모든 진노를 쏟아 부으셨고, 그 결과 죄의 궁극적인 결과인 죽음을 예수님께서 "내 대신" 맛 보셔야 했다는 것... 그래서 이제 나에게 더 이상 정죄가 없다는 것, 그리고 그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 살아계시고, 나의 주가 되시기 때문에, 나는 그분의 지배를 받으며 그분을 닮아가는 삶, 이제는 죄를 위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 그럴 자격이 전혀 없는 자가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그런 영광스런 자리로 부르심을 받게 되었다는 것.... 그것이 복음 아닌가?
그 복음은 분명 죄된 나의 모습을 보게 하지만, 그것이 절대 중심이 아니라는 것... 그것이 너무나 중요한 진리이다. 복음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내 죄와 내가 형편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보는 것에서 그친다면, 그것은 저주일 뿐이다. 거기에는 절망밖에 없다. 그런 나를 보는 시선에서, 내가 그렇게 죄인이기 때문에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 그것이 복음 아닌가? 나에게 철저히 절망하는 대신, 그분께 완전한 희망을 두는 것이 그것이 바로 복음이 아닌가?
정말 놀라운 것은... 정말 가슴아픈 것은... 내가 만난 모든 지체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시선, 예수 그리스도께 소망을 두는 그 소망,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을 완전히 망각한 채, 자신의 죄됨에만 너무 obssessed되어 있는 것을 본 것이다...
어찌 그럴 수가... 도대체... 도대체... 뭘 배웠길래?
모든 지체들에게 내가 한 것은 복음을 전하는 것 뿐이었다.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한 것 뿐이었다. 그런데 그 복음을 들은 그들이 보인 반응... 너무나 놀라는 그 반응... 눈을 번쩍 뜨는 그 반응...
솔직히 그 반응을 보고 내가 놀랐다. 그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너무나 기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듣고 놀라면 안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가 놀랐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듣고, 그분이 구원자가 되신다는 그 소식을 듣고, 그분께 모든 것을 집중하고 그분만 바라보라는 그 설명을 듣고, 그들이 놀랐다....
한 지체가 나를 만나고 나서 이메일을 보내 왔다. 사실 다음과 같은 메일은 그 지체만의 반응이 아니었다. 모든 지체들이 보이는 동일한 반응이었다.
"어제 들은 내용을 오늘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그 은혜... 내가 어떻게 해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받게 되는 그 십자가가 내것이라는 것을 정말 오랫만에 다시 깨닫게 되었고, 또 오랫만에 "예수님"의 이름이 나에게 저주가 아닌 구원의 이름으로 다가왔습니다. 예전 저에게 찾아와 주신 예수님을 다시 만나게 되는것 같아 너무나 기쁘고 정말 잃었던 것을 다시 찾은 듯 하였습니다.
복음과 더불어 만난 모든 지체들에게 강조한 것은 성경공부였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진리 그 자체라는 것.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모든 판단 기준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나도, 어떤 인간도 교회도 아닌 성경이라는 것. 성경만이 진리이고,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하시고자 하는 모든 말씀을 성경에 다 해 놓으셨기 때문에 부지런히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것이 믿는 자의 바른 자세라는 것을 누누히 강조했다.
나를 만난 이후 그들의 변화는 분명했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게 되었고, 말씀을 사랑하게 되었고, 거룩한 삶,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향한 열정이 생기는 것을 보았다.
최근 어떤 경로를 통해서 전에 내가 다니던 교회에서 나를 위험인물로 지목하고, 나를 블랙리스트에 올렸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내가 지체들을 만나서 교회를 떠나라고 부추기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로부터 오는 모든 연락에 반응하지 말라고 상부에서 지시가 내려진 모양이다.
사실 내가 만났던 많은 지체 중에서 내가 교회를 떠나라고 권면한 지체는 한 명 뿐이다. 그 지체는 그것을 거부했고, 지금도 열심히 다니고 있다. 나머지 지체 중 절반에게는 교회를 떠나지 말고 그 교회에서 중요한 것들을 더 배울 것을 권면했고, 그 나머지 절반에게는 본인들이 원하는 대로 하라고 권면했다. 내가 적극적으로 교회를 떠나라고 한 것은 한 경우 빼놓고는 없었다. 교회를 떠나는 것이 내 관심사가 아니기 때문에 그 주제는 대화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도 못했다. 중요한 것은 복음이었고, 그리스도였고, 말씀이었다.
복음을 전하는 나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죄인인 우리에게 유일한 희망이고 생명이라는 것을 전하는 내가 위험인물이고 기피해야할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다면, 참 아이러니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바로 그 교회가 스스로 복음에 목숨을 건다고 생각하는 교회이기 때문이다.
내가 사랑하는 지체들이 있는, 사랑하는 교회이다. 나는 그 교회가 하나님 안에서 복음 안에서 바르게 자라가는 것을 참으로 소망한다. 교회가 잘못되는 것은 내가 바라는 것이 절대 아니다. 복음이 바르게 이해되고 그리스도가 소망이되고 중심이되고 생명이되고 기쁨이 되는 가운데, 모두가 십자가로 인해서 해방의 기쁨을 만끽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한다.
만약 그런 내가 그들의 경계 대상이고 기피 대상이라면, 나로서는 할 말은 단 한 가지 밖에 없다.
"Let it be! I don't care!"
나는 나를 찾아 오는 불쌍한 영혼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하는 그 일... 바로 그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Posted at
오전 3:08:00
"아빠! 봐봐요!"
(2010년 11월 8일에 쓴 글.)
예연이가 얼마전부터 자전거를 본격적으로 타기 시작했다. 전에는 자전거가 무서워서 보조 바퀴를 달거나 내가 잡아 주지 않으면 혼자서 못탔었는데, 그래서 한참을 타지 않았었는데... 이번에 새롭게 시도해 보라고 했더니 너무나 잘 탄다. 대견스럽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예연이가 자전거를 탈 때, 반드시 내가 지켜보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리적으로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는 아빠이지만, 그 아빠가 예연이를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예연이로 하여금 두려움을 이기고 자전거를 도전하도록 하고, 또 신나게 자전거를 타도록 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을 느낀다. 아빠의 존재가 사라지면, 예연이 안의 모든 자신감도 같이 사라지는 것이다.
하연이 예연이가 아빠에게 원하는 것... 그것은 "아빠! 봐봐요!"라는 한 마디에 모두 담겨있다. 자신들의 새로운 시도를 아빠가 지켜봐주고, 격려해 주는 것. "우리 딸, 최고다!" "잘 하네!" "와!!"라는 반응이 아빠로부터 나올 때, 아이들은 으쓱하며 기뻐한다. 아빠의 시선과 칭찬이 아이들로 하여금 자신감을 갖게하고 자신에 대한 긍정적인 자아상을 형성해 나가도록 돕는 것을 본다. 아빠의 시선 아래 자란 딸들, 그리고 칭찬을 먹고 자란 아이들은 건강한 자아로 인해서 상처를 적게 받고, 상처를 받아도 잘 이겨 나간다. 아이가 다쳤을 때, 그 아이를 꼭 껴안아주고, 아픔을 공감해 주는 부모가 있는 아이들과, 그렇지 못한 아이들이 그 고통과 상처를 극복해 나가는 시간에 많은 차이가 있다는 연구결과를 본 적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들에게 있어서 아빠는 너무나 중요한 존재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늘 나를 지켜보고 계신다. 그것은 때로는 나에게 너무나 두려운 사실이다. 공의로우신 하나님, 죄에 대해 진노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분 앞에 죄를 짓는 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분은 내 아버지가 되신다. 늘 헤매는 나이지만, 가끔 한 번씩 기특한 일을 할 때면,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 "아빠! 봐봐요!"라고 으쓱하며 자랑할 수 있는 대상, 그 시선으로 인해 자신감을 얻을 수 있는 대상, 그 칭찬으로 선을 행할 힘, 거룩한 삶을 도전해 볼 수 있는 힘을 얻는 그런 아버지이시다.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정말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스스로 자랑하고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는 나를 사랑을 가득 담은 눈으로 바라보시는 아버지...
나에게는 그 아버지가 계신다.
예연이가 얼마전부터 자전거를 본격적으로 타기 시작했다. 전에는 자전거가 무서워서 보조 바퀴를 달거나 내가 잡아 주지 않으면 혼자서 못탔었는데, 그래서 한참을 타지 않았었는데... 이번에 새롭게 시도해 보라고 했더니 너무나 잘 탄다. 대견스럽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예연이가 자전거를 탈 때, 반드시 내가 지켜보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리적으로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는 아빠이지만, 그 아빠가 예연이를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예연이로 하여금 두려움을 이기고 자전거를 도전하도록 하고, 또 신나게 자전거를 타도록 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을 느낀다. 아빠의 존재가 사라지면, 예연이 안의 모든 자신감도 같이 사라지는 것이다.
하연이 예연이가 아빠에게 원하는 것... 그것은 "아빠! 봐봐요!"라는 한 마디에 모두 담겨있다. 자신들의 새로운 시도를 아빠가 지켜봐주고, 격려해 주는 것. "우리 딸, 최고다!" "잘 하네!" "와!!"라는 반응이 아빠로부터 나올 때, 아이들은 으쓱하며 기뻐한다. 아빠의 시선과 칭찬이 아이들로 하여금 자신감을 갖게하고 자신에 대한 긍정적인 자아상을 형성해 나가도록 돕는 것을 본다. 아빠의 시선 아래 자란 딸들, 그리고 칭찬을 먹고 자란 아이들은 건강한 자아로 인해서 상처를 적게 받고, 상처를 받아도 잘 이겨 나간다. 아이가 다쳤을 때, 그 아이를 꼭 껴안아주고, 아픔을 공감해 주는 부모가 있는 아이들과, 그렇지 못한 아이들이 그 고통과 상처를 극복해 나가는 시간에 많은 차이가 있다는 연구결과를 본 적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들에게 있어서 아빠는 너무나 중요한 존재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늘 나를 지켜보고 계신다. 그것은 때로는 나에게 너무나 두려운 사실이다. 공의로우신 하나님, 죄에 대해 진노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분 앞에 죄를 짓는 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분은 내 아버지가 되신다. 늘 헤매는 나이지만, 가끔 한 번씩 기특한 일을 할 때면,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 "아빠! 봐봐요!"라고 으쓱하며 자랑할 수 있는 대상, 그 시선으로 인해 자신감을 얻을 수 있는 대상, 그 칭찬으로 선을 행할 힘, 거룩한 삶을 도전해 볼 수 있는 힘을 얻는 그런 아버지이시다.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정말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스스로 자랑하고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는 나를 사랑을 가득 담은 눈으로 바라보시는 아버지...
나에게는 그 아버지가 계신다.
Posted at
오전 9:13:00
Elizabeth Taylor
오늘... 몸이 아파서 하루 종일 집에 있었다. 가끔씩 TV를 보면서...
CNN에서 오늘의 이슈는 오늘 아침에 79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 Elizabeth Taylor였다.


개인적으로는 연예인을 거의 신경쓰지 않고 좋아하지 않는 나 조차도, 어렸을 때 본 그녀의 영화 때문에 그녀의 미모에 매료되었던 유일한 배우의 죽음이라 심상치 않게 다가왔다.
미인박명이라고 했던가? 7명의 남자들과 8번의 결혼을 하면서 참으로 기구한 인생을 살다간 그였다.
그녀가 언젠가 불평했다는 말... 그 말이 뇌리에 남는다.
"남자들은 내 미모를 사랑하지만, 내 자신을 사랑하지는 않아요."
늘 남자들을 주변에 달고 다니는 그녀였지만, 사실 많이 외로왔을 것이다.
아파서 자리에 누운 지금... 그리고 외로움과 싸우고 있는 요즘... 그녀의 말이 참으로 가슴에 와 닿는다.
나를 대하는 많은 사람들의 태도.. 그것의 거의 대부분의 경우가 나로부터 뭔가 도움을 얻기 위한 것이다. 그것이 영적인 것이던 세상적인 것이든 간에, 그들은 그것을 위해 나에게 다가온다. 그리고 그들이 얻고 싶은 것을 얻고난 후에는 뒤돌아보지 않고 떠난다. 그것이 내가 지금까지 맺어온 인간관계다.
나를 인간으로 대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래서 내가 누군가를 필요로 할 때, 내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 몸이 아픈 오늘... 그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할 수 없다는 것... 외로운 요즘... 그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같이 있어 줄 사람이 없다는 것...
누구보다도 인기가 많았던 Elizabeth Taylor... 이 땅에 살 동안 그녀가 느꼈을 외로움을 공감하며, 그녀를 추억한다.
CNN에서 오늘의 이슈는 오늘 아침에 79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 Elizabeth Taylor였다.
개인적으로는 연예인을 거의 신경쓰지 않고 좋아하지 않는 나 조차도, 어렸을 때 본 그녀의 영화 때문에 그녀의 미모에 매료되었던 유일한 배우의 죽음이라 심상치 않게 다가왔다.
미인박명이라고 했던가? 7명의 남자들과 8번의 결혼을 하면서 참으로 기구한 인생을 살다간 그였다.
그녀가 언젠가 불평했다는 말... 그 말이 뇌리에 남는다.
"남자들은 내 미모를 사랑하지만, 내 자신을 사랑하지는 않아요."
늘 남자들을 주변에 달고 다니는 그녀였지만, 사실 많이 외로왔을 것이다.
아파서 자리에 누운 지금... 그리고 외로움과 싸우고 있는 요즘... 그녀의 말이 참으로 가슴에 와 닿는다.
나를 대하는 많은 사람들의 태도.. 그것의 거의 대부분의 경우가 나로부터 뭔가 도움을 얻기 위한 것이다. 그것이 영적인 것이던 세상적인 것이든 간에, 그들은 그것을 위해 나에게 다가온다. 그리고 그들이 얻고 싶은 것을 얻고난 후에는 뒤돌아보지 않고 떠난다. 그것이 내가 지금까지 맺어온 인간관계다.
나를 인간으로 대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래서 내가 누군가를 필요로 할 때, 내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 몸이 아픈 오늘... 그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할 수 없다는 것... 외로운 요즘... 그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같이 있어 줄 사람이 없다는 것...
누구보다도 인기가 많았던 Elizabeth Taylor... 이 땅에 살 동안 그녀가 느꼈을 외로움을 공감하며, 그녀를 추억한다.
Posted at
오전 11:17:00
요즘은...
요즘...
그 어느 때보다 혼자 있는 것이 싫다...
내 인생에서 그런 적이 없는데...
혼자 있는 것이 두렵다... 혼자 있어서 무서운 것이 아니라, 혼자 있음 그 자체가 고통스러워서 두렵다...
그냥 누군가 내 곁에만 있어 준다면...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이 내 곁에 계시는 것을 알고 만족하고 기뻐해야 하는데...
그래도 인간이... 누군가 나를 따뜻하게 맞아줄... 그런 누군가...
사무치게 그립다...
그 어느 때보다 혼자 있는 것이 싫다...
내 인생에서 그런 적이 없는데...
혼자 있는 것이 두렵다... 혼자 있어서 무서운 것이 아니라, 혼자 있음 그 자체가 고통스러워서 두렵다...
그냥 누군가 내 곁에만 있어 준다면...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이 내 곁에 계시는 것을 알고 만족하고 기뻐해야 하는데...
그래도 인간이... 누군가 나를 따뜻하게 맞아줄... 그런 누군가...
사무치게 그립다...
Posted at
오전 11:15:00
[펌] How to Stay Safe In the World Today (유머)
Posted at
오후 11:40:00
요즘 내가 미소지을 때는...
머릿속이 많이 복잡하고, 외로움과 괴로움으로 참으로 쉽지 않은 날들을 보내고 있는 요즘...
나도 모르게 어느새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을 때는, 아니 나도 모르게 넋을 잃고 헤벌레 웃고 있을 때는... 컴퓨터 화면 보호기로 설정해 놓은 아이들 사진이 나올 때다... 2002년, 2003년, 그리고 지금은 2004년 사진들이 컴퓨터 화면에 보인다. 아이들의 갖가지 포즈와 표정은 나를 잡아 끌고, 모든 것을 잊고 그냥 헤벌레... 웃게 만든다..
내 보물들...
나도 모르게 어느새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을 때는, 아니 나도 모르게 넋을 잃고 헤벌레 웃고 있을 때는... 컴퓨터 화면 보호기로 설정해 놓은 아이들 사진이 나올 때다... 2002년, 2003년, 그리고 지금은 2004년 사진들이 컴퓨터 화면에 보인다. 아이들의 갖가지 포즈와 표정은 나를 잡아 끌고, 모든 것을 잊고 그냥 헤벌레... 웃게 만든다..
내 보물들...
Posted at
오전 7:16:00
the differences
An unregenerated mind can't understand God's wrath while a regenerated mind can't understand His love and grace. (my words)
교회에 다녀오는 길에 운전하는 차에서 내 머리에 떠오른 생각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불평한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면서 어떻게 인간을 그렇게 잔인하게 심판해? 어떻게 그렇게 협박을 해?" 그것은 하나님이 얼마나 공의로우시고 거룩하시고 정결하신 분이신지에 대해서, 그리고 인간이 얼마나 타락하고 죄많은 존재인지에 대해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그분의 심판에 대해서는 눈을 찌뿌린다. 사실... 그들이 아는 하나님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그들이 만들어낸 지극히 인간적인 개념일 뿐이다. 그들이 심판을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사랑도 모르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험한 자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경험한 자들은 도저히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경험했기 때문에 그분의 공의와 그분의 거룩을 안다. 그리고 그들은 인간의 죄성이 얼마나 뿌리깊고 끔찍한지도 안다. 그 둘 사이의 간극은 도저히 세상 어떤 것으로도 매꿀 수 없을 만큼 크다. 하나님과 인간... 거기에는 도저히 용서와 사랑이 존재할 수 없고, 심판만이 존재해야하는 그런 공간이다. 그것은 너무나 쉽게 잘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것을 뛰어넘으신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와 긍휼... 그분의 사랑이다. 예수 그리스도이다.
나같은 죄인을 사랑하신 하나님....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그래서 믿음이 필요하다.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교회에 다녀오는 길에 운전하는 차에서 내 머리에 떠오른 생각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불평한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면서 어떻게 인간을 그렇게 잔인하게 심판해? 어떻게 그렇게 협박을 해?" 그것은 하나님이 얼마나 공의로우시고 거룩하시고 정결하신 분이신지에 대해서, 그리고 인간이 얼마나 타락하고 죄많은 존재인지에 대해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그분의 심판에 대해서는 눈을 찌뿌린다. 사실... 그들이 아는 하나님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그들이 만들어낸 지극히 인간적인 개념일 뿐이다. 그들이 심판을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사랑도 모르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험한 자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경험한 자들은 도저히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경험했기 때문에 그분의 공의와 그분의 거룩을 안다. 그리고 그들은 인간의 죄성이 얼마나 뿌리깊고 끔찍한지도 안다. 그 둘 사이의 간극은 도저히 세상 어떤 것으로도 매꿀 수 없을 만큼 크다. 하나님과 인간... 거기에는 도저히 용서와 사랑이 존재할 수 없고, 심판만이 존재해야하는 그런 공간이다. 그것은 너무나 쉽게 잘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것을 뛰어넘으신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와 긍휼... 그분의 사랑이다. 예수 그리스도이다.
나같은 죄인을 사랑하신 하나님....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그래서 믿음이 필요하다.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Posted at
오전 2:51:00
외로움...
오늘..
학교에서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오는 길...
셔틀버스에서 내려 내가 사는 아파트로 향했다.
아파트 주차장..
그 곳에서 변함 없이 서서 나를 기다리는 내 차...
모두가 떠나간 듯, 텅 빈 내 마음이 세차게 부는 바람에 너무나 추운 그 때...
'주인님! 제가 있습니다. 저는 이렇게 주인님을 기다리며 제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듯한 그 모습.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학교에서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오는 길...
셔틀버스에서 내려 내가 사는 아파트로 향했다.
아파트 주차장..
그 곳에서 변함 없이 서서 나를 기다리는 내 차...
모두가 떠나간 듯, 텅 빈 내 마음이 세차게 부는 바람에 너무나 추운 그 때...
'주인님! 제가 있습니다. 저는 이렇게 주인님을 기다리며 제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듯한 그 모습.
눈물이 날 것 같았다.
Posted at
오전 11:28:00
[CCM] I Have a Shelter
I have a shelter in the storm
When troubles pour upon me
Though fears are rising like a flood
My soul can rest securely
O Jesus, I will hide in You
My place of peace and solace
No trial is deeper than Your love
That comforts all my sorrows
I have a shelter in the storm
When all my sins accuse me
Though justice charges me with guilt
Your grace will not refuse me
O Jesus, I will hide in You
Who bore my condemnation
I find my refuge in Your wounds
For there I find salvation
I have a shelter in the storm
When constant winds would break me
For in my weakness, I have learned
Your strength will not forsake me
O Jesus, I will hide in You
The One who bears my burdens
With faithful hands that cannot fail
You’ll bring me home to heaven
© 2008 Integrity’s Hosanna! Music (ASCAP)/Sovereign Grace Worship (ASCAP) (Admin. By Integrity’s Hosanna! Music) Sovereign Grace Praise (BMI)(Admin. By Integrity’s Praise! Music)
Posted at
오전 1:07:00
침례...
오늘 교회에서 침례식이 있었다. 흑인 자매 한 명이었다.
침례식 전 비디오를 통해서 간증이 방영되었다. 간증문을 읽는 것이 아니라 인터뷰식이었는데, 인터뷰 질문은 나오지 않았고, 그에 대한 답변들만 편집되어서 나왔다. 밝은 표정, 기쁨, 감사가 넘치는 그 모습...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의 삶, 그녀가 만난 예수님, 그리고 그 이후의 변화된 삶과 교회와 침례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밝히는 그 영혼이 참으로 아름다왔다. 모두들 기뻐하며 박수로 그 기쁨에 동참했다.
특이한 것은 침례식이었다. 어디를 봐도 침례탕이 보이지 않는 교회였다. 그런데 알고 보니 위의 사진에서 보이는 큰 스크린 왼편의 높은 곳에 있는 곳에 보이지 않게 침례탕이 있었다. 그리고 더 놀랍게도, 침례식은 우리 교회의 목사님들 중에서도 가장 젊은 목사님인 청년부 담당 목사님이 침례를 집전했다. 일반적으로 senior pastor가 침례를 집전하는 것과는 달랐다. 침례를 집전하면서 침례의 의미가 무엇인지 설명하는 그 설명을 통해서 모든 성도들은 다시 한 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다시 태어난 의미를 되새겼다.
목사님은 물에 잠기는 자매에게 당신의 옛 자아는 예수님 안에서 죽었다고, 그리고 물에서 나오는 그녀에게 이제 당신은 주님 안에서 새생명이라고 선언해 주었고, 그리고 나서 기도로 마무리를 지었다.
기쁨이 있는 침례식...
인상적이었다.
침례식 전 비디오를 통해서 간증이 방영되었다. 간증문을 읽는 것이 아니라 인터뷰식이었는데, 인터뷰 질문은 나오지 않았고, 그에 대한 답변들만 편집되어서 나왔다. 밝은 표정, 기쁨, 감사가 넘치는 그 모습...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의 삶, 그녀가 만난 예수님, 그리고 그 이후의 변화된 삶과 교회와 침례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밝히는 그 영혼이 참으로 아름다왔다. 모두들 기뻐하며 박수로 그 기쁨에 동참했다.
특이한 것은 침례식이었다. 어디를 봐도 침례탕이 보이지 않는 교회였다. 그런데 알고 보니 위의 사진에서 보이는 큰 스크린 왼편의 높은 곳에 있는 곳에 보이지 않게 침례탕이 있었다. 그리고 더 놀랍게도, 침례식은 우리 교회의 목사님들 중에서도 가장 젊은 목사님인 청년부 담당 목사님이 침례를 집전했다. 일반적으로 senior pastor가 침례를 집전하는 것과는 달랐다. 침례를 집전하면서 침례의 의미가 무엇인지 설명하는 그 설명을 통해서 모든 성도들은 다시 한 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다시 태어난 의미를 되새겼다.
목사님은 물에 잠기는 자매에게 당신의 옛 자아는 예수님 안에서 죽었다고, 그리고 물에서 나오는 그녀에게 이제 당신은 주님 안에서 새생명이라고 선언해 주었고, 그리고 나서 기도로 마무리를 지었다.
기쁨이 있는 침례식...
인상적이었다.
Posted at
오전 6:41:00
새장단
가족들이 떠난 날...
허전한 마음을 분주함으로 달래 보려고, 그리고 빨리 정리하고 공부하는 분위기를 만들고 싶어서 하루 종일 쉬지 않고 일해서 방 구조를 바꾸고 수없이 많이 갖다 버렸습니다.
완전히 새로와진 분위기... 마음을 잡고 공부해야지요..
허전한 마음을 분주함으로 달래 보려고, 그리고 빨리 정리하고 공부하는 분위기를 만들고 싶어서 하루 종일 쉬지 않고 일해서 방 구조를 바꾸고 수없이 많이 갖다 버렸습니다.
완전히 새로와진 분위기... 마음을 잡고 공부해야지요..
Posted at
오후 12:56:00
비
가족들이 떠나는 날부터 오스틴에 비가 내립니다. 한 시도 쉬지 않고...
빗소리가 들릴 만큼 굵은 빗줄기도 아니고, 가랑비보다 아주 약간 더 굵은... 소리없지만, 온 땅을 적시는 비...
마치 제 기분을 그대로 담고 있는 것 같은 비입니다.
하루 종일.. 정신없이 집을 renovaton했지만, 마음 속으로는 울고 있었습니다. 굵은 비처럼 통곡은 할 수 없었고, 할 마음도 아니지만, 잔잔하게 슬픔을 느끼며 아파하고 있었습니다. 울컥 울컥 쏟아지는 눈물도 있었지만, 그냥 조용히 슬퍼하는 슬픔이 나를 압도합니다.
그리움과 슬픔..
가랑비가 내리듯이 잔잔하게 제 주위를 맴돌고, 제 내면을 사로잡네요..
빗소리가 들릴 만큼 굵은 빗줄기도 아니고, 가랑비보다 아주 약간 더 굵은... 소리없지만, 온 땅을 적시는 비...
마치 제 기분을 그대로 담고 있는 것 같은 비입니다.
하루 종일.. 정신없이 집을 renovaton했지만, 마음 속으로는 울고 있었습니다. 굵은 비처럼 통곡은 할 수 없었고, 할 마음도 아니지만, 잔잔하게 슬픔을 느끼며 아파하고 있었습니다. 울컥 울컥 쏟아지는 눈물도 있었지만, 그냥 조용히 슬퍼하는 슬픔이 나를 압도합니다.
그리움과 슬픔..
가랑비가 내리듯이 잔잔하게 제 주위를 맴돌고, 제 내면을 사로잡네요..
Posted at
오후 2:51:00
가족들을 보내며...
오늘 아침 6시 30분..
공항에서 마지막으로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아내... 하연이.. 예연이...
마치... 어디 잠깐 다녀올 듯한 기분으로 인사를 나누고 그들이 비행기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 보았다.
비행기의 문이 닫히고, 비행기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창가에 서서 우두커니 그 비행기를 바라 보았다.
돌아오는 길...
추적추적 내리는 빗길을 달리면서, 뭔가를 하고 싶은데,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알 듯 모를 듯한 묘한 기분으로 달리다, 터져 나오는 눈물을 가누지 못하고, 운전하는 내내 울었다. 소리를 내서 울었다.
바로 그것...
그것이 내 안에서 진정으로 원하는 그 무엇이었다.
작별한지 10분도 안 지났지만, 벌써 그립고, 보고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못난 나 때문에 사랑하는 가족이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것, 내 가족, 나에게 의지하는 세 명의 귀한 영혼들이 더부살이를 해야 한다는 것. 가장으로서 무능력한 나 때문에 내 사랑하는 가족을 먼저 보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들이 너무 보고 싶다는 것...
몇 가지가 뒤섞인 감정으로 인해 눈물은 계속 흘러 나왔다.
소중한 세 영혼...
사랑하는 줄은 알았지만, 작별하고 돌아서며, 그들이 내 마음에 너무나 소중한 존재들, 소중한 보물들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간절히 기도한다.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하시기를...
가장인 내가 무능력으로 인해 할 수 없는 그들과의 동행...
나보다 더 능력이 있으시고, 더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그들의 보호자가 되시기를...
I love you, Hayun...
I love you, Yehun...
I really love you, honey...
I love you all, and I miss you already.
공항에서 마지막으로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아내... 하연이.. 예연이...
마치... 어디 잠깐 다녀올 듯한 기분으로 인사를 나누고 그들이 비행기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 보았다.
비행기의 문이 닫히고, 비행기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창가에 서서 우두커니 그 비행기를 바라 보았다.
돌아오는 길...
추적추적 내리는 빗길을 달리면서, 뭔가를 하고 싶은데,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알 듯 모를 듯한 묘한 기분으로 달리다, 터져 나오는 눈물을 가누지 못하고, 운전하는 내내 울었다. 소리를 내서 울었다.
바로 그것...
그것이 내 안에서 진정으로 원하는 그 무엇이었다.
작별한지 10분도 안 지났지만, 벌써 그립고, 보고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못난 나 때문에 사랑하는 가족이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것, 내 가족, 나에게 의지하는 세 명의 귀한 영혼들이 더부살이를 해야 한다는 것. 가장으로서 무능력한 나 때문에 내 사랑하는 가족을 먼저 보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들이 너무 보고 싶다는 것...
몇 가지가 뒤섞인 감정으로 인해 눈물은 계속 흘러 나왔다.
소중한 세 영혼...
사랑하는 줄은 알았지만, 작별하고 돌아서며, 그들이 내 마음에 너무나 소중한 존재들, 소중한 보물들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간절히 기도한다.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하시기를...
가장인 내가 무능력으로 인해 할 수 없는 그들과의 동행...
나보다 더 능력이 있으시고, 더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그들의 보호자가 되시기를...
I love you, Hayun...
I love you, Yehun...
I really love you, honey...
I love you all, and I miss you already.
Posted at
오후 10:23:00
2011년을 맞이하며 우리 교회 목사님이 게시판에 쓰신 글
Christians, We Must Be Readers!
Let the wise hear and increase in learning, and the one who understands obtain guidance, to understand a proverb and a saying, the words of the wise and their riddles. The fear of the Lord is the beginning of knowledge; fools despise wisdom and instruction. (Proverbs 1:5-7, ESV)
Solomon wrote many proverbs to instruct his sons in the way of God’s wisdom (Proverbs 1:8). As the first one to turn to Christ in my family, I never received such instruction while growing up, so I sought it out from Christian brothers. Though I have had many godly men come into my life, I have yet to find that man of God who would take me under his wings and encourage, rebuke and guide me in God’s wisdom and instruction. Nevertheless, I have found that through the act of reading God has given me the opportunity to sit at the feet of some of His great saints in order to learn from them the truth, wisdom and instruction He has entrusted to them. Allow me to share some guidance as to how you too may undertake the task of reading in order that you may continue to grow in the grace and knowledge of Jesus Christ.
Since Christianity is a faith that is based on the authoritative truth recorded in Scripture, then reading the Bible should be our first priority. We must purpose to read the book of God before we read the books of men. Daily Bible reading is important, for Jesus reminds us that we do not live by bread alone but by every word that comes from God (Matthew 4:4); the Word is food to our hungry souls. Bible reading plans are provided for your benefit in the foyer.
Bible reading, though, is not the only kind of reading Christians should undertake. Many great Christians have gone before us and have left a legacy from which we could learn much. Whether they have written to give us a better understanding of Scripture, Christ, the church, culture or ourselves, we would do well to read what they have written. Since men are fallible, however, their books are sure to be fallible as well; therefore, we must always read such books with discernment. Nonetheless, WE MUST BE READERS! It is arrogant of us to think that we cannot learn anything from those who have gone before us. May we, then, be readers so that we may find wisdom and gain understanding (Proverbs 3:13).
Since even those of us who are readers tend to gravitate toward a favorite author or a particular genre or period of literature, we must discipline ourselves to be well-rounded readers. Therefore, allow me to suggest the following reading pattern for maturing followers of Christ. After the Bible, all Christians should read . . .
Christian Biography
Christian biography encourages us as we identify with those saints who have gone before us and recognize God’s grace working through feeble humans.
Church History
Church history allows us to connect with the church of all ages. It also helps us to learn from the church’s mistakes made in the past.
Christian Theology
Every Christian must work out what they believe in accordance with the Scriptures. Reading theology helps us understand how the doctrines we believe affect all areas of life. Note: Popular pastors/preachers may not be the best source for theological reading.
Culture and Cultural Issues
Unfortunately, too many Christians are ignorant about the cultural issues of our day. It is time that we become informed, so that we can give an informed, biblical response. Note: Read all perspectives so you speak intelligently on the issues.
Christian Devotional Literature
Here, I don’t mean the devotionals that merely give a Scripture reference, add a heart-warming story and are ever so popular. By devotional literature, I mean that literature which is anchored in God’s Word and makes us think great thoughts of God and challenges us to drink deeply from God’s Word.
Christian Living
Every Christian should spend time reading about the issues where faith and life meet (courtship, marriage, parenting, personal finances, stewardship, etc.). Again, be careful with what is popular.
For your convenience I have provided reading lists from 9 Marks and Desiring God on my blog. Feel free to visit that blog at http://s2h.org.
Love,
Pastor Juan
Love,
Pastor Juan
Posted at
오전 6:4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