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20

좋은 가족..
(2006.03.06 다른 곳에 작성한 글)


하연이가 아팠다. 며칠 전부터 갑자기 머리와 배가 아프다고 하더니 고열로 한참을 고통스러워 했다. 학교도 가지 못하고... 토요일인 어제는 조금 나아졌지만 힘이 없어 보였다.
저녁식사를 하고 잠자리에 들어 있는 하연이 옆에 같이 누웠다. 누워서 하연이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던 중 하연이가 갑자기 말했다.

"아빠! 우리 가족은 좋은 가족 같아요.."

"왜?"

"왜냐면요... 하연이는 학교에서 선생님 말씀 제일 잘듣는 학생이고요... 아빠는요.. 교회나 이런데서 하나님 말씀을 잘 가르치는 사람이고요... 엄마는요... 선생님이고요.. 예연이는요.. 음... 집에서 착한 아이쟎아요.. 그래서 우리 가족은 좋은 가족이예요.."

"그래... 듣고 보니 그렇구나.."

하연이가 아빠를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으로 인식을 하고 그것을 좋게 생각해 주는 것이 가슴이 뿌듯했다.

.

Grading을 하며...

지난 주 목요일부터 지금까지 Grading을 하고 있다. 유독히도 알아볼 수 없게 글씨를 쓰는 학생들이 많은 이번 클래스에서 거의 암호를 해독하는 기분으로 답안지를 읽으니 참 힘들다...
오늘까지는 끝내야 하는데... 아직 한 시간 정도를 더 채점해야 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참으로 귀중한 영혼들인데, 답안지로 만나는 그들은 그저 글씨일 뿐이고 문장일 뿐이다. 그들이 얼마나 많은 지식을 논리적으로 전개하여 제시하고 있는지가 관건이다. 그들의 개인적인 고민과 문제, 어려움은 아무런 고려 대상이 되지 않는다. 이들 중에는 참으로 힘든 여건 속에서 어렵게 공부하는 사람들도 있고, 시험 전날 피치못할 사정으로 공부에 집중하지 못한 사람도 있을텐데... 한 사람 한 사람의 사정을 들어 주면, 내가 이렇게 매몰차게 채점하지는 못할텐데...
참 비인간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 주님은 내 사정을 훤히 아시는 분이시다. 내 모든 행위로 심판을 하시겠지만, 겉으로 드러난 행위만으로 심판하시지는 않으신다. 그 행위가 내 속 깊이 자리한 믿음과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신다. 내 행위가 비록 남들이 보기에는 형편없어 보일지라도, 그 믿음과 연결되어 그것으로 드리는 것이라면 그것을 기쁘게 받으신다. 하지만 남들이 보기에 매우 훌륭해 보인다 하더라도, 그것이 내 믿음으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면 주님께서는 결코 받지 않으실 뿐 아니라 싫어하신다.

주님은 내 깊은 사정을 아시는 분이시다. 그것이 참으로 위로가 된다.

지난 학기까지만 하더라다도 채점을 할 때는 그 학생의 이름을 부르며 그 영혼을 위해 기도하며 채점했는데... 이번학기는 그것도 잊어버렸다. 돌려 주기 전에 이름들을 부르며 기도해야지... 그리고 힘내서 마무리해야지...

.

사랑...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고전 13:1-8)

무질서한 은사들이 난무하고, 도덕적 타락이 깊숙하게 침투해왔던 고린도 교회. 갈등과 분열 가운데 서로를 무시하며 자기가 최고라고 여기며 갈등을 일으키는 교회에게 사도 바울은 사랑을 가르칩니다. 그 교회에서 많은 이슈들이 있었지만, 사랑은 그 이슈 중 하나가 아니었고, 그 어느 누구도 누가 더 사랑했느냐는 것으로 따지는 자들이 없었습니다.
13 장은 12장과 14장 가운데 끼어든 삽입문입니다. 그 문제 많은 교회에 바울은 모든 것을 정리하는 중요한 가르침을 13장에서 강조하여 가르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편지의 흐름을 끊으며 사랑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1. 오래 참습니다. 이 단어는 "오래"라는 단어와 "열정, 노여움"이라는 단어가 합쳐진 단어입니다. 그것은 상대의 나쁜 감정이나 노여움에 대해 오래 견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2. 온유합니다. 이 단어는 헬라어 "크레스토스"(유용한, 친절한)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그것은 부드럽고 인자하며 친절하면서도 상대에게 유익이 되는 행동을 가리킵니다.
3. 투기하지 않습니다. 투기는 "끓는다"는 뜻의 원어에서 나온 말입니다. 여기서는 상대를 질투하고 시기하는 마음으로 가슴이 끓는 것을 의미합니다.
4. 자랑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과장해서 허세를 부리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5. 교만하지 않습니다. 교만은 자랑과 비슷하지만 주로 자신을 높이려고 하는 것에 주안점을 둔 말입니다.
6. 무례히 행치 않습니다. 무례하다는 것은 "오만불손하다" "예를 갖추지 않는다"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상대방에 온당한 태도로 예의를 갖추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7.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습니다. 이기적이지 않다는 것을 말합니다.
8. 성내지 않습니다. 이것은 성마르고 쉽게 예민해지는 기질을 가리킵니다. 쉽게 격분하게 되고 자신을 격정으로부터 제어하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9.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에게서 받은 해를 복수하기 위해 하나하나 장부에 기록하듯이 헤아리면서 원망하고 비판하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10.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반드시 진리에 기반을 둡니다.
11. 모든 것을 참습니다. 참는다는 말의 어원은 "지붕"입니다. 따라서 참는다는 것은 상대방의 모든 허물을 덮고 가리워준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죄악을 묵과해 준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해를 입힌 자에게까지 관용으로 용서하고 변함없이 상대를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12. 모든 것을 믿습니다. 좋을 때나 나쁠 때나 변치 않고 상대를 신뢰해 주는 것입니다.
13. 모든 것을 바랍니다. 소망을 잃지 않고 밝은 마음으로 끝까지 바라는 것입니다.
14. 모든 것을 견딥니다. "휘포메네이"는 단순히 참는 것을 넘어 용감한 군인처럼 담대한 마음으로 인내하며 미래를 향해 진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정말 놀랍도록 아름답고도 부담스러운 이 사랑에 대한 정의...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런 사랑을 하셨고, 그런 사랑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사랑의 정의에 참는 것과 관련한 것이 14개 중 6개나 됩니다. (오래참음, 투기하지 않음, 무례히 행치 않음, 성내지 않음, 모든 것을 참음, 모든 것을 견딤).  그만큼 사랑에 있어서 참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뜻이겠지요.

바울은 이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13장의 마지막 절에서 다시 한 번 확인을 합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

그렇게 중요한 사랑인데... 너무나 아름다운 사랑의 정의인데, 그것을 묵상할수록, 솔직히 절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랑이란 내가 성취할 수 있는 범위를 훨씬 벗어나 있기 때문이지요. 내 능력으로는 도저히 안 되는 것인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 사랑의 정의에 정반대되는 성향이 저에게 있는 것을 발견할 뿐이니까요...

그렇습니다. 내 능력으로는 절대로 안 되는 것이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사랑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차원의 사랑이기 때문이지요. 그것은 하나님만 이루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너무나 감사한 희망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 거듭난 모든 영혼에게 성령을 부어 주심으로 인해서, 인간의 능력으로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 당신 자신의 능력으로 내 안에서 그 사랑을 이루시겠다는 약속을 해 주신 것이지요. 그 성령께서 형편없는 내 모습을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으로 완전히 변화시키시겠다는 것이지요. 얼마나 기쁜 일인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흔적이 제 안에 분명히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내 본성으로는 불가능한 그 일을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이고, 이미 이루어 가고 계시다는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아니, 믿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이지요.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사랑은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경험한 자에게 주어지는 기쁨의 열매라는 것... 그것에 감사드리며, 그 열매가 풍성하게 맺히는 내 삶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

공동체 안에서의 상처... 대처방법은?

사랑하는 믿음의 동역자인 후배가 있었다. 그 후배는 스스로 자신의 생김새가 타조를 닮았다고 자주 말했다. 그 말을 듣기 전에는 잘 생각을 못했었는데, 그 말을 듣고 나니 정말 타조처럼 생겼다는 생각에 웃음짓곤 했었다. 언젠가, 산안토니오의 동물원에 가서 타조를 보면서 그 후배를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던 기억이 난다.
그 후배는 타조에 대해서 이야기 하면서 자주 타조가 맹수에게 쫓기거나 위급한 상황이 생겼을 때, 엄청난 빠른 스피드로 달려가다가 때로는 자기가 왜 도망가는지를 잊어버리기도 하고, 때로는 도저히 그 위험한 상황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없을 때는 갑자기 머리를 모래에 처박고는 이제는 자기 눈에 그 위험한 상황이 더 이상 보이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위안을 갖는다며 타조에 대해서 설명하곤 했었다. 위험요소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위험에 눈을 감아 버리는 것이다. 스스로는 만족하며 편안해 할지 모르지만, 얼마 후 타조는 맹수의 밥이 되고 마는 것이다.

믿음의 공동체에서 생활할 때, 많은 상처들을 주고 받는다. 아무리 거듭난 자들이라 할지라도,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에 그 상처는 피할 수가 없다. 상처가 없이 서로 사랑만하는 공동체를 꿈꾼다면, 그 공동체는 결코 교회가 될 수 없다는 것이 내 확고한 신념이다. 따라서 상처 때문에 실망하고 교회를 떠난다는 것은 일단 교회가 무엇인지를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크고 작은 상처를 받는다.(사실... 내가 상처를 받기보다는 주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정말 드물다.) 받은 상처로 아파하며 고통하는 사람들을 많이 본다. 그리고 나도 그 사람들 중 하나이다. 아픔이 있는 곳에 주님의 위로가 있고, 아픔이 있는 곳에 치유가 있다. 교회가 하나님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그런 주님의 놀라운 역사가 있고, 그것 때문에 교회는 세상의 다른 어떤 공동체와 다르다. 상처가 없기 때문에 다른 것이 아니라, 상처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역사가 있기 때문에 다른 것이다.

그런데, 과거에 내 스스로 공동체 안에서 절대 상처를 받지 않는다고 말해 왔던 것을 기억한다. 그 때 무슨 정신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상처가 오고 갈 수 밖에 없는 공동체 내에서 상처를 받지 않는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신앙 인격이 매우 성숙해서 성인 수준으로 인간의 죄를 소화해 내는 능력이 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또한 주님과 온전히 연합하는 가운데서 주님이 모든 것을 완전히 처리해 주시는 것을 늘 경험한다는 것과 동일한 말이기 때문인 것이다.
내가 그런 존재였는가? 내가 그런 은혜를 진짜 누리는 사람이었는가? 결코 그렇지 않았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그런 말들을 떠벌리고 다닐 수 있었을까?

최근에 와서야 내가 말한 그 "상처받지 않음"이란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조금 더 깊이 이해하게 되는 것 같다. 주님과 온전히 연합하는 가운데서 주님이 상처를 막아 주시기 때문에 그 복을 누리는 것이라기 보다는, 자신에게 상처를 주는 모든 사람들에게 "악인" "안 믿는 자" "믿음에 문제가 있는 자" 등등의 꼬리표를 붙이고, 모든 것을 그 사람들의 탓으로 돌리고, 자신은 순전히 피해자로서 주님의 위로를 받고, 그리고 나서 그 "문제 있는" 사람들을 그 자신의 관심 밖으로 밀어내 버리고는 그렇지 않다고 판단되는 사람들과만 함께하는 것이 바로 내가 말한 그 "상처받지 않음"의 비결이 아니었나 생각하게 된다. 마치 타조가 모래에 머리를 처박는 것과 같은 어리석음...
그것은 자기 합리화, 자기 방어일 뿐,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상처받지 않음"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자신이 의인이라는 고집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며 타인을 무조건 악인으로 몰아버리는 매우 사악한 태도일 뿐이라는 것이 최근 내 생각이다.

차라리 그런식으로 상처받지 않고 공동체 생활을 하기보다는 상처 가운데 아파하면서도, 그 상처 때문에 나를 돌아보고, 문제 많은 것처럼 "보이는" 그 상대방을 품어 안는 것이 더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이다. 늘 아파하지만, 늘 자신을 돌아보고, 더 아파지겠지만, 온 몸에 가시가 돋힌 것과 같은 한 인간을 가슴으로 품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더 가깝다.
형편없는 믿음 가운데 있던 제자들, 아무리 가르쳐도 도무지 알아 듣지 못하는 그들, 십자가 고난의 길을 걷고 있는 예수님 앞에서 누가 크냐는 권력다툼에 정신이 없던 그들을 주님께서는 품으셨다. 인내하셨다. 예수님이라고 제자들 때문에 상처를 받지 않으셨을까? 하지만 주님께서는 상처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영혼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그들을 그 가슴에 품으셨다. 예수님께서 흘리신 십자가의 피는 바로 그 "품으심"의 결과였다.

가장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상처를 들고 주님 앞에 나아간다. 그리고 그 상처를 통해 주님의 마음을 알고,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더 깊이 느끼고, 주님께서 손을 내미셔서 그 상처를 온전히 치유해 주시는 것을 경험한다. 그것이 진정으로 상처 없이 교회생활을 하는 비결이다. 상처를 받지 않으려고, 다른 이들에게 죄인의 꼬리표를 붙이고, 내가 의롭다며 스스로 상처-proof인 인간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온갖 상처를 그 가슴으로 받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그 영혼들을 사랑으로 더 깊이 품으며, 그로인해 만신창이가 된 상처투성이의 가슴을 주님께 들고 나아가 온전히 치유함을 받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 치유에는 완전한 용서가 있다. 이 블로그의 어디엔가 기록했던 것과 같은 그 용서가 있을 수 밖에 없다. 거기에는 상처의 원인이 되었던 모든 허물과 죄와 실수에 대해서 다시는 그 누구에게도 언급하거나 기억하는 일이 없게 된다. 그 일은 이 세상에서 존재하지 않았던 일이 되어 버린다.

그것이 진정한 치유이고, 그것이 성경적인 상처 대처법인 것이다.

.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지어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여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시 37:5-8)

길... 그것은 내 인생의 모든 여정을 가리킨다. 그것은 삶의 모든 계획, 목표, 방법 모두를 말하는 것이다. 그 모든 것들을 주님께 맡기는 것이 믿음의 삶이다. 여기서 "맡기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돌을 굴려버리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돌을 비탈 아래로 굴려버리고 난 후, 그 돌이 굴러가는 것은 내 손을 벗어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분께 맡긴다는 것은, 이미 내 손을 떠난 것으로써 전적으로 주님이 하시는 일, 극단적으로 말하면 이제는 내 인생의 길에 대해서 내 자신은 방관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한다. 내 인생의 모든 계획과 목표와 방법을 주님께서 결정하시도록, 주님께서 내 인생의 중요한 일들과 그 결과를 책임져 주시도록 맡기는 것이다. 그것은 기도하는 삶, 또한 성경 말씀의 원리에 내 삶을 온전히 의탁하는 삶이 이루어질 때만 가능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나님께 그 인생의 길을 맡긴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여기신다. 마치 햇볕이 가장 강한 정오의 강렬한 빛처럼, 내 의를 그렇게 높여 주시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서 찾으시는 최고의 의는 온전한 신뢰함으로 자신의 길을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이다. 그런 자의 인생은 하나님께서 친히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영광스러운 도구로 사용하신다. 가장 선하신 하나님께서 가장 선하신 뜻을 따라서 가장 선한 결과를 가져오는 인생으로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이것보다 더 큰 성취가 어디 있는가?

하나님께 그 길을 맡긴 자는 이제 하나님 앞에 잠잠히 참고 기다리는 자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자신의 모든 것은 이제 하나님께서 주관하시고 하나님의 손에 있기 때문이다. 비록 악한 자들이 그들의 목적을 이루어 가는 것을 볼 때에도, 그리고 때로는 그들의 악한 꾀로 인해서 내 인생에 손해가 있거나, 나에게 피해가 온다고 할지라도, 나는 잠잠하고 참아 기다릴 수 있게 된다. 여기서 잠잠하다는 것은 단순히 자포자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생각과 조급함에 성급히 나서거나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로 참으며 기다리는 것이다.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눈 앞에 보이는 것에 대해서 조급해 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기다린다"는 것은 원어의 의미가 "시선을 집중하다"는 뜻이다. 그것은 이 모든 것을 이루신 전능자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악인이 활개를 치고 그들의 행사가 모두 형통해 보이일 때에라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그 신뢰 때문에 그분께 시선을 고정시키고, 그분의 행사를 믿음으로 잠잠하게 기다리는 것... 그것이 믿음 안에서 성숙한 자의 바른 자세이다.

인생의 모든 여정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 앞에서 잠잠하며, 참고 기다리는 자는, 악이 횡행하는 세상 가운데서도 분노와 불평가운데 악에 대항하기 위해서 또 다른 악을 행하는 죄를 범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미워하신다. 비록 그것이 먼저 행해진 악을 징벌하기 위한 악이라 할지라도 용납하지 않으신다. 사도 바울이 악을 악으로 대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명령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분노하는 가운데 행하는 행동들과 말, 생각들은 악에 치우칠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경계하신다.

결국 인생의 복은 그 길을 주님께 맡긴 자에게 주어진다. 그리고 주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자만 그 인생을 주님께 온전히 의탁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결국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깨닫게 된다. 결국 복음이고, 결국 십자가이며, 결국 예수 그리스도다. 그것이 답이다.

지난 얼마 동안 분노 가운데서 힘들어 했었다. 내가 너무 사랑하는 공동체에 관련된 일들이 처음에는 나를 힘들게 했고, 나중에는 그것으로 겉잡을 수 없는 분노를 일으켰다. 내 안에서 불길처럼 솟아나는 분노 가운데서 죄와 싸우면서 참으로 힘들었다. 그 가운데 죄를 지었다는 것을 솔직히 고백할 수 밖에 없다.
분노하는 나를 보면서, 내가 내 길을 하나님께 의탁하지 않고, 잠잠하며 참고 기다리지 못하는 믿음없는 자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그 길을 맡기지 못하고 스스로 그 "부당함"을 해결하려고 하는 과정에서 내 의를 드러내고, 다른 사람들의 죄악과 연약함에 대해서 분노하며 정죄했다.
이것이 바로 내 모습이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그 분께 맡기지 못하는 믿음 없는 내 모습... 하나님 앞에 한 없이 부끄러운 모습...

하지만 나에게는 십자가가 있다. 바로 이런 내 모습 때문에 돌아가셔야 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바로 그런 나의 죄악을 용서하시기 위해 그 고통의 죄값을 치르신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와 용서... 내가 오늘 내 완악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주님 앞으로 나아오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내가 완전해서가 아니라,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으시는 주님의 사랑 때문이다.
나는 형편없는 자이지만, 그분은 위대하신 분이시다. 나는 연약함으로 인해 죄를 짓는 자이지만, 그분은 강한 분이시고 완전히 정결하신 분이시다. 그 분이 나를 초대하신다. 그분의 품으로... 그분의 사랑으로... 그분의 온유함으로... 그리고... 그분의 거룩함으로... 나로 하여금 다시 시작하게 하신다. 죄책감에 빠져 힘들어 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이기고, 다시 정결하게 설 수 있도록 하신다. 그것이 십자가의 능력이다.

그분이 능력이 나를 잠잠케 한다. 사나운 파도와 폭풍을 잠잠하게 하셨던 예수님께서 내 안에 불타오르던 분노를 잠잠케 하셨다. 그리고 나를 힘들게 한 일련의 일들에 대해서 조용히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가운데, 평강으로 주님께 이 모든 것을 맡길 마음을 주셨다. 더 큰 죄를 짓지 않도록 막으시고, 나를 붙들어 주셨다.

죄 가운데서도 감사가 있는 것은, 바로 예수님... 나의 선한 목자 그분 때문이다.

.

"all your labs are normal"

지난 화요일 저녁 8시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수요일 오전에 학교 보건소의 lab에서 검사를 받아야 해서... 아침을 유난히 많이 먹는 나로서는 쉽지 않았다. 그래도 의사가 내 나이 때에는 피검사를 해야 한다고 해서 참았다.

수요일 아침 9시에 보건소에 도착해서 피검사와 오줌검사를 받았다. 그리고 도서관으로 돌아 와서 그날 점심과 저녁으로 아내가 싸준 도시락을 다 먹어 버렸다.... 한꺼 번에... 그날 하루 종일 아무리 먹어도 허기가 가시지 않았다... 나에게 아침 식사가 이렇게 중요한지 미쳐 몰랐었다.

그리고 어제 보건소의 의사로부터 아래와 같은 통지를 받았다.
---------------
Dear Kwangjin Lee:

all your labs are normal.

Sincerely,


Elena V. Stephens, M.D.
---------------

기분이 이상했다. 아무 이상 없다는 소식인데... 기분이 좋지 않았다.
밥 굶고, 허기를 참아가며, 시간을 내가면서 가서 한 것에 대한 보상이 겨우 이건가 하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내 몸 어딘가에 비정상적인 것을 발견했다는 통보라도 와야 제대로 보상을 받은 것처럼 느껴지는 참으로 아이러니한 기분...

때로는 인간의 감정이 얼마나 비이성적이고 비정상적일 수 있는지를 본다. 그리고 감정과 느낌에 의존하는 삶이 얼마나 misleading한 것인지도 보게된다. 내 자신의 생각과 경험과 느낌을 의존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고 절대적인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과 행동과 판단의 기준이 되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진리는 결코 나를 허탄한 곳으로 인도하지 않는다.

기뻐해야할 소식을 듣고, 기분나빠하는 나를 보면서 내가 얼마나 신뢰할 수 없는 존재인가 다시 생각해 본다.

.

익숙했던 것들과의 이별

인생은 만남과 이별의 연속이다.
어릴 때는 이별보다는 만남이 더 많고, 모든 것을 새롭게 접해야 하는 때라면, 인생의 중반에는 만남과 이별이 비슷한 비율로 일어나며, 노년으로 갈수록 만남보다는 이별이 더 많아지는 것 같다.

내 나이는 어느새 이별 더 많아지는 나이가 되어버렸다.

그 동안 익숙했던 것과 많은 이별을 했다. 그리고 이제 머지 않아 중요한 이별이 있을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아직 준비가 안 되어 있는데... 그 이별을 맞이할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많이 슬프다.
이제는 이별에 많이 익숙해질 때도 되었으련만... 이별은 언제나 힘들다. 그것은 그 만큼 그 "익숙했던 것"에 내 마음과 사랑을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어쩌랴? 그것이 인생인 것을...

.

그래도 글을 쓰는 이유...

고등학교 때로 기억한다.
집에서 나름대로 열심히 기타를 치면서 팝송을 부르고 있었다. 감정에 깊게 몰입한 상태에서 내 나름대로는 멋드러지게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좋아하는 곡들을 부르며 스스로 감격해 하며 즐기고 있을 때, 옆 방에 있던 동생이 다가 왔다. 한참을 쳐다본 후에 하는 말...

"형... 지금 형은 정말 멋지게 노래 부르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지?"
"......"
"그런데 듣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도 좀 알아 줬으면 좋겠네... 도저히 살 수가 없어... 공해도 이만저만한 공해가 아니야..."
"......"
"이제 그만하소!"

평소에 바로 윗 형인 나에게 꼼짝을 못하는 동생인지라, 그가 하는 말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물론 남에게 들려 주려고 노래부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동생의 너무나 솔직한 말에 더 이상 노래부를 용기가 사라졌다. 그 후로 기타는 거의 잡아본 적도 없고, 노래는 혼자 있을 때만 그것도 최대한 조용히 부른다... 남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언젠가부터 인테넷의 한 공간에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동생을 생각한다. 또 조용히 다가와서 한 마디 하지 않을지... (다행인지 불행인지 동생에게는 좀 읽으라고 그렇게 권해도 시간 없다고 쳐다보지도 않는다.)
노래 못 부르는 사람이 노래할 때, 그것이 공해가 되듯이, 글 못 쓰는 사람이 글을 써댈 때 그 글을 읽는 사람에게 얼마나 피해가 될까? 내가 써대는 글들을 읽으면서 도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짜증이 난다면...
글을 쓸 때마다, 그리고 글을 쓰고 난 뒤에 다시 읽으면서 항상 느끼는 것은... 나에게 참으로 글쓰는 재주가 없다는 것이다. 동생이 어느날 불쑥 전화해서 "형... 인터넷에 있는 글 말이야..."라고 말을 꺼내며 구박을 한다 해도 할 말이 없는... 기타치는 것을 그치고 조용하기로 작정했던 것처럼, 글쓰기를 그만 두고 다른 사람들의 글을 감상하며 즐기는 사람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 아닌지...

하지만, 내 글에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면서도 글쓰기를 지속하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1. 내 글을 읽는 사람이 거의 없다. 이 블로그는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알려져 있고, 그들조차도 거의 들어 오지 않는다. 노래는 듣기 싫은 사람도 들을 수 밖에 없지만, 글은 와서 읽는 사람에게만 피해를 줄 수 있다.(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
2. 내 글은 내가 만들어 낸 글이지만 그 내용은 내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많은 경우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은혜의 경험이다. 비록 포장이 매우 엉망일지언정, 그 내용물은 보석과 같은 것이다. 내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나에게 주어진 것이다. 망각의 천재인 나로서는, 결코 잃어버리고 싶지 않는 것들이다. 내 머리속으로부터 미끄러져 망각의 세계로 떨어지려는 그 보물들을 묶어 놓는 수단이 바로 글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에 집중되어 있기는 하지만, 내 삶의 작은 경험들, 지식들에도 해당되는 것이다.
3. 머릿속에 맴도는 모호한 생각이나 은혜, 혹은 묵상은 대부분의 경우 글을 씀으로써 더 분명하게 정리가 된다.

비록 다른 사람들에게는 피해를 입혔을지 모르지만, 글쓰기를 통해서 그 동안 내 자신에게 많은 유익이 있었음을 인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도 글쓰기를 지속하련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내 자신을 위해서...
내 노래는 그쳤지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는 한... 내 글은 지속되리라.

.

마귀의 시험

창조 후 모든 것이 완벽한 그 때에, 마귀는 인간에게 다가와서 묻는다.

"하나님이 여기 있는 모든 나무의 과일을 먹지 말라고 하시더냐?"

너무나 어리석어 보이는 이 질문... No라는 답변을 뻔히 예상할 수 있는 이 질문.
속이기의 명수, Rhetoric의 대가, 사람을 넘어뜨리는 데 선수인 마귀가 왜 그리 무식한 질문을 들고 인간에게 접근했을까?
이 질문은 언뜻 보는 것과 같이 그리 단순하고 무식한 질문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과하신 단 한 가지의 제한/금지 명령에 인간의 관심을 집중시킴으로써, "제한적" 존재인 자기 자신을 불만스럽게 바라보게하는 효과를 노린 고단수의 질문이었다.
마귀의 의도대로 인간은 하나님을 왜곡된 시각으로 바라보게 된다. 하와의 답변 속에 그려지는 하나님은 금지 명령을 과도하게 내리는 폭군으로, 그리고 인간의 자유를 제한하는 일에 매우 관심을 깊이 보이는 존재이다. 하나님에 대한 불만과 불신의 마음이 이미 그 안에 생겨난 것이다.
그것을 본 마귀는 "네가 결코 죽지 않는다"라는 선언을 통해서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그분의 권위를, 더 나아가 그분의 하나님됨을 부인하도록 초청한다. 인간은 그 초청에 기꺼이 응함으로써 스스로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는 죽음의 길을 가고야 만다.

많은 세월이 흐른 후 팔레스타인의 한 광야. 침례요한으로부터 침례를 받으신 직후 예수님께서 광야로 내몰리셔서 시험을 당하신다. 40일 동안 아무 것도 드시지 못한 예수님. 마귀는 둘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님을 시험한다.
하나님의 아들... 아니 하나님 당신이신 그분을 시험하여 쓰러뜨리려고 획책하는 마귀... 그가 역사 속에서 자행한 수 없이 많은 시험 중에서 가장 확실한 필살기를 준비했을 것은 뻔한 것... 그런 그가 준비한 첫 번째 질문이 에덴의 인간들에게 던졌던 질문과 같은 종류인 먹는 것에 관한 것이었다.

"40일이나 굶었으니 얼마나 힘드냐? 네가 하나님 아들 맞아? 40일 전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확증하신 것이 맞아? 내가 보기에는 아닌데... 하나님의 아들이 뭐 이래? 도저히 못 믿겠는걸... 만약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돌을 떡으로 만들어봐... 그리고 40일을 굶었으면 충분해. 너도 먹고 살아야 할 것 아니야? 메시야고 뭐고 일단 먹어야 생존하지..."

에덴동산에서와 마찬가지로 마귀는 마치 그가 인간의 편에서서 인간을 지극히 염려하고 생각해주는, 동정해주는 존재로 자신을 포장한다.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되심이 40일전에 하늘에서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다는 듯, 마치 그것에 자신의 눈 앞에 증명되어야 확정이 되는 듯 교묘하게 시험한다. 또한 생존의 문제가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메시야로서의 사역에 앞선다는 것을 은근히 부추긴다.

첫째 인간과는 달리,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거리낄 것이 없는 분이시다. 돌을 떡으로 만들어 드실 능력이 있으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하셔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분이시다. 하지만 이 땅에 그분이 오신 것, 그리고 이 땅에서 이루셔야할 그분의 사명은 철저히 성부 하나님께 순종하며 그분의 권위를 온전히 인정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첫째 인간이 완전히 실패한 것이 바로 이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마귀가 돌을 떡으로 만들어라고 한 것은 단순히 배고픔을 해결하라는 차원에서만 시험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보다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분의 뜻, 그분의 말씀에 온전히 자신의 인생을 드리는 가운데 인간 구원을 위한 공생애 사역을 이루느냐 아니면 모든 인간이 매여 있는 먹고사는 문제를 이기지 못하고 그것이 인생의 가장 중요한 이슈로 부각되는 가운데,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부인하느냐의 시험인 것이다.

마지막 때... 성경에 의하면 마귀는 역사상 최고로 활발하게 활동한다. 믿는 자들을 시험하며 핍박하며 그들을 쓰러뜨리기 위해 마지막으로 발악하며 온갖 짓을 다할 것이다. 아니 이미 그것이 시작 되었는지도 모른다. 어떤 것으로 시험할까? 첫째 아담과 둘째 아담에게 했던 것과 같이 먹는 문제, 즉 생존의 문제, 생존에 가장 필수적인 문제들을 가지고 시험하지 않을까? 그것을 통해서 내가 하나님의 살아계심,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하나님의 그 엄위하신 말씀을 부인하고 "사는 길"을 택하도록 종용하지 않을까?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사는 삶의 결과가 죽음이고 파멸인 것처럼 보이도록 우리를 속이지 않을까? 그래도 먹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순수히 순종하지 않고 약간 타협하면서 사는 길을 우리에게 제시하지 않을까?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한 그리스도인으로서, 내 자신을 돌아본다. 나는 떡을 포기하고 말씀을 선택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는 것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많은 "자유"를 포기하고 살아가야 하는 "손해"를 감수하는 삶이라고 속삭이는 마귀에게, 하나님의 속박 가운데 있는 것이 진정한 자유라고 선언하며,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 "자유"를 제한하기를 기뻐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그분의 말씀이... 그분의 말씀만이 나에게 절대적인 진리이고 가치인가?

깨어 있을 때이고, 스스로를 돌아볼 때이다.

.

보물19

(2008년 9월 17일에 쓴 글)




지난 12일과 13일... 혼자서 교회의 집사수련회에 다녀왔다.
가는 날 하연이는 친구집에 놀러 갔었고, 그래서 인사를 못했다.
수련회에서 다녀온 날, 하연이가 쓴 쪽지를 발견했다.
(참고로 우리 집에서 X는 Kiss를, O는 Hug를 의미한다.)

.

사랑으로...

요즘...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에 나오는 호르헤 노인이 자주 생각난다.

에코가 의도적으로 포스트모던 소설가로 유명한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이름을 땄다는 그 노인. 아르헨티나 국립도서관 관장이었던 보르헤스와 마찬가지로 그는 중세 한 프란체스코 수도원의 도서관장이었다.
이 소설은 그 수도원에서 일어나고 있던 연쇄 살인사건의 미스테리를 풀기위해 파송된 영국의 윌리엄 수도사와 그의 시종이었던 아드소가 끔찍하게 죽어간 수도원 내부의 피살자들의 죽음의 흔적을 추적하는 가운데 그 범인이 바로 호르헤 노인이었다는 것을 밝히는 내용이다.

수도원... 중세 당시 많이 타락하긴 했지만, 그래도 전체적으로 타락해서 악취가 나던 중세 교회에서 영성과 말씀과 기도의 보루였던 그곳... 그 인생을 주님께 온전히 헌신하겠다는 각오로 세상과 결별하여 주님 앞에서 (Coram Deo) 살겠다고 작정한 자들이 모인 그곳. 그 당시로 볼 때, 그나마 가장 깨어 있는 그곳에서 일어나는 살인 사건... 그리고 그 주인공 호르헤 노인...

왜 그 수도원에서 그런 끔찍한 살인사건을 자행했을까?
호르헤 노인이 많은 사람들을 잔인하게 죽인 이유는 간단하다.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썼다고 알려져 있기는 하지만 분실되었다고 믿어지는 시학의 둘째권(첫째는 "비극"이다.)인 "희극"이 이 수도원의 도서관이 보관되어 있었는데, 그 책에 호기심을 가지고 접근해서 읽은 수사들을 호르헤 노인이 차례로 죽였던 것이다.

그 책이 왜 문제가 되었을까?
그것은 성경에 예수님께서 웃으셨다는 표현이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는 데서 비롯된 호르헤 노인의 잘못된 신념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웃으셨다는 표현이 성경에 없기 때문에, 예수님은 웃지 않으셨고, 예수님이 웃지 않으셨기 때문에 웃음을 죄악이라고 단정한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웃음과 해학에 대해서 쓴 "희극"은 불경한 것이고 악마의 서적이 되는 것이다. 그 악마의 서적에 접근한 자들은 성경의 이름으로, 정의의 이름으로 처단해야 한다는 논리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말도 안되는 논리이지만, 호르헤 노인 나름대로는 심각하고 진지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진리 위에 굳게 서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고, 진리에서 벗어나는 "이단자들"을 과감하게 처단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라 확신했던 것이다. 그래서 동료 수도사들을 처참하게 죽이고도 양심의 가책을 전혀 받지 않았다.

진리...
진리라는 말이 점점 의미를 잃어가는 이 시대에... 하나의 진리를 주장하는 것이 웃음거리가 되어버리는 이 시대에, 진리를 붙들기는 점점 힘들어진다. 그것은 바보들의 이야기일 뿐이고, 편협한 독단주의자들의 광기어린 집착증 정도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되어 버리는 세상이다. 이런 시대에 예수님이 진리이시라는 것을 믿는 믿음, 그리고 진리를 더욱 선명히 붙잡는 것은 어려울 뿐 아니라 불가능해 보이는 시대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복음의 진리를 놓치는 것은 생명을 잃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세상의 가치가 교회에 해일처럼 밀려오는 이 시대에, 수많은 교회들이 진리를 잃어버리고, 세속에 물들어간다. 그것은 교회가 생명을 잃는 것이고, 그것으로 교회는 존재 이유를 상실하는 것이다.
진리 사수... 그것은 죽느냐 사느냐에 관한 문제이다. 너무나 critical한 문제이다. 따라서 진리를 더욱 분명히 하고, 그 진리를 타협없이 지켜나가는 것은 이 시대에 꺼져가는 생명의 등불을 살리는 것이다.

하지만...
진리가 진정한 진리라면... 그것도 단순한 세상의 진리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토록 우리에게 전해 주시고자 했던 진리라면... 그 진리는 생명의 진리이다. 무책임하게 마구 휘둘러댐으로써 상처를 주고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서슬퍼런 칼 같은 진리가 아니라, 그 진리를 가진 자에게 아름다운 열매와 향긋한 향기가 넘쳐나게 만드는 것이 그리스도의 진리인 것이다. 진리를 더 알고, 진리에 더 누릴수록, 그 사람에게는 생명의 향기가 나며, 세상에서 찾을 수 없는 자유가 있으며, 사랑과 기쁨과 평화와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들이 눈에 띄게 나타나며, 겸손을 쉽게 찾을 수 있으며,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며,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넘쳐나고, 상황에 관계 없이 안식이 있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다. 누가 보든지 간에 너무나 매력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 열매들로 인해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고자 하는 마음이 들도록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물론 복음의 진리를 누구나 다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복음의 진리를 가진 사람들, 복음의 정수를 맛본 사람들은 반드시 그 인격에 있어서 하나님이 찾으시는 그 열매들이 증거로 나타나야 한다.

안타깝게도 현실의 삶에서 진리를 명확하게 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이 찾으시는 그런 인격의 열매들이 풍성하게 나타나는 경우는 너무 드물다. 많은 경우는 진리가 없는 상태에서 열매에 해당하는 것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다닌다. 그것은 가짜일 뿐이다. 또 다른 경우는 열매가 없이 진리에 대한 지식만 늘어간다. 그런 사람들은 마치 호르헤 노인과 같이 인격적인 매력이 거의 없는 냉혈한, 혹은 현대적 율법주의자가 되어간다.

둘 다 완전히 잘 못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의 진리 위에 분명히 서지 않고는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그 열매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 열매들을 절대로 맺을 수 없다. 반대로 복음을 진정으로 맛본 자들, 복음의 진리를 더 선명하게 깨달은 자들에게서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열매들이 풍성하게 맺히지 않을 수 없다. 만약 그 열매들이 충분히 보이지 않는다면, 복음의 진리를 더 "깊이" 혹은 "분명하게" 깨달았다는 것 자체가 허구이고, 착각일 뿐이다.

만약 열매들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소위 "진리"에 더 집착하게 될 때, 그 결과는 호르헤 노인, 그리고 그 소설의 마지막에 불에 타서 없어져버린 그 도서관과 같은 운명이 되어버릴 것이다.

복음을 안다고 생각하는 자들, 복음을 더 선명하게 깨닫는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자들은, 스스로에게 엄중하게 물어 보아야 한다. 나에게서 주님께서 기뻐 찾으시는 그 열매가 그 만큼 풍성하게 맺히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진정으로...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한다.

.

신뢰... 사람들 사이에서의...

이명박 대통령의 리더십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절대 빠지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그분이 자신의 사람을 고를 때는 그 누구보다도 신중하며 까다롭지만, 일단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고난 후에는 완전한 신뢰를 준다는 것이다. 비록 그 사람이 잘못해 보여도, 뭔가 부족해 보여도, 그 사람을 끝까지 믿으며 그 부족한 부분들을 극복해 나갈 것이라고 여겨주고 도와준다는 것이다.
반면 내가 매우 존경하는 고 김대중 대통령은 그렇지 못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분은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에게 매우 친절하게 대해주었지만, 전적인 신뢰를 주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항상 어느 정도 거리를 두었고, 조금 자라나는 사람들은 그 싹을 자름으로써 자신의 위치를 유지해 왔던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명박 대통령 스타일의 리더십을 추구한다. 같이 일할 사람들을 뽑을 때는 매우 까다롭고, 거의 모든 면을 부정적으로 보고 함께 일할 파트너(혹은 동역자)로 쉽게 선정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일단 같이 일하는 동역자로 결정이 된 이후에는 전폭적으로 신뢰하며, 믿어준다. 물론 그들에게 부족한 부분이 많이 보이기도 하고, 신뢰할 수 없는 모습들이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 자신에 대한 신뢰를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인간됨이나 섬김에 있어서 크고 작은 실수들을 꼬투리 잡아서 불신의 눈길을 던지고, 내 안에서 정죄하고 판단하면서 동역자를 바라보기 시작했을 때, 얼마나 그것이 일과 사역에 있어서 파괴적인 악한 영향을 끼치는지... 그리고 전적으로 신뢰함으로 믿어 주는 것, 그리고 그를 위해 기도해 주는 것이 얼마나 인간 관계에서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를 그 동안 참으로 많이 경험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동역자로 부르심을 받은 나... 나는 그 어떤 면에서 보든지 간에 하나님의 신뢰를 얻을 수 없는 존재이다. 오히려 그분의 사역에 방해가 되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인 그런 부족한 존재이다. 하지만, 그것을 이미 다 아신 하나님께서, 나를 당신의 동역자(종)으로 불러주시고, 나에게 당신의 일을 맡기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생명을 살리는 일... 그 엄청난 일을 맡기시는 것이다. 그분은 그 일을 나를 통해서 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볼 때, 하나님께서는 나를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아니, 내가 없는 것이 효율면에서 볼 때는 훨씬 낫다. 하지만 굳이 나 같은 불필요한 존재를 넘어서 그 사역에 장애가 되는 사람을 사용하시는 손해를 감수하시는 하나님... 왜 그러실까? 그것은 나를 위해서이다. 내가 하나님의 동역자로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가운데, 그분과 함께함으로써 그분을 더 경험하고, 그분의 마음을 알아가고, 그분의 관심과 그분의 역사하심을 배우는 가운데, 하나님을 진정 하나님으로 인정할 수 있고, 그분께 더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나를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불편과 손해를 감수하시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나를 신뢰해 주시고, 그 중차대한 일을 맡기시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께서 맡기시는 일은 결국 하나님께서 다 이루신다. 왜냐하면 나는 그일을 감당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것 또한 너무 분명히 알고 계신다. 그분의 일은 그분의 능력으로만 감당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생명을 주시고 자녀삼아 주셨을 뿐 아니라, 나를 종으로 불러 주심으로 당신의 사역에 동참하게 하셨다. 종으로 부르신 하나님은, 나를 신뢰하심으로 당신의 사역을 맡기시고, 그 일을 감당해 나갈 능력을 내 안에 두신다. 그리고 나를 통해서 당신의 일을 이루고야 마신다. 그 모든 과정은 하나님께서 다 하시는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마치 내가 그 일을 이룬 것처럼 나를 칭찬하신다. 나를 신뢰하심으로 부르시고, 능력주셔서 일을 이루시는 모든 과정이 당신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에 대한 공로를 나에게 돌리시고, 나를 높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다. 그 얼마나 은혜로운 분이신가? 그 앞에서 내가 내 스스로를 높이며 교만해 질 수 있을까? 내가 했다고 자랑할 수 있을까? 아니다! 결코 그럴 수 없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자는 많은 일을 할수록 그분 앞에 더 겸손해 질 수 밖에 없다. 그분의 하나님되심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분께 사용받는 것 하나만으로도 감사할 수 밖에 없다.

나에 대한 하나님의 전적인 신뢰가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인정하게 만든다. 믿음에 성장이 있도록 돕는다. 마찬가지로 나에게 주신 동역자들에 대한 전적인 신뢰는 그들이 주님 안에서 성장하도록 돕는 동력이 된다.
내 인생이 끝나는 날까지, 나는 나에게 주신 동역자들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그들을 사랑으로 품으며, 느리지만 함께 가는 믿음의 길을 가련다.

.

건강검진

어제 학교 보건소에 건강검진을 받으러 갔다. 어디가 아파서가 아니라, 학교 보험이 매우 좋은 보험이라는데, 한 번도 써 본 적이 없어서, 아까와서 갔다. 한국에서 회사 입사할 때인 1995년에 검사한 이후로 한 번도 검사를 해 본 적이 없어서, 15년 만에 내 몸을 체크해 보는 것도 좋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보건소에 가서 처음으로 한 것은 몸무게와 키를 재는 것. 197파운드의 몸무게에, 5피트 9인치의 키. 15년 전에 비해 1인치가 컸다.
그 다음으로는 혈압 및 체온... 검사가 끝난 뒤 간호사가 나를 보며 환하게 웃더니 "You're perfect!"라며 기뻐해 줬다.
그 후 방으로 들어가서 의사와 약 40분간의 대화를 나누며 내 삶의 전반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상담을 하러 온건지, 검사를 받으러 온건지...) 그 과정에서 내 몸 여기저기를 만지고 두드리고 눌러보고 찔러보고... 마치 내 몸이 물건이 된 듯한 착각...

그 후 심장을 검사하기로 했다. 내 나이 때는 하는 것이 좋다고 의사가 강력히 추천해서 일단 받아 보았다. 몸 여러 곳에 검사 장치를 붙이고 한참을 누워 있었다. 검사가 모두 끝난 후 (전과는 다른) 간호사의 말... "You're perfect!"

간호사가 나가고 나서 다시 그 의사가 들어 왔다. 그리고 그 간 결과를 보면서 피검사를 받아 볼 것을 권했다.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내 나이 때는 그 검사를 받아 보는 것이 좋단다. 그렇게 하기로 했다. 피검사는 12시간 금식을 해야 하기 때문에 다른 날에 오기로 했다.

잠정적인 결론이라면서 의사가 하는 말... "So far, you are perfect!"
그러면서 웬만한 20대의 건강한 몸 정도의 수준이란다... 그걸보니 생활을 매우 절제되고 규칙적으로 하는 것 같다면서 놀라와 했다.

나는 그간 해 온 운동이란 하나님 나라 운동(?)에 약간 쓰임 받은 것 외에는 운동이란 해 본적이 별로 없는 사람인데... 최근에 Push-up과 Jumping Jack을 시작하긴 했지만... 그간 몸이 건강을 유지해 온 것이 신기하다. 하나님 나라를 위한 운동을 규칙적으로 해서 그런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나라를 위해 자신의 몸을 쓰는 사람에게 건강도 허락하시는 모양이다.

어쨋든 감사하며 보건소를 나왔다... 물론 최종 결과는 피검사를 마친 후에야 나오겠지만...

예전에 이상구 박사가 한 때 열풍이었던 적이 있었다. 건강을 위한 여러가지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이 세상을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방법을 알려 주었고, 많은 사람들은 그 정보를 흡수하고, 자신의 몸을 위해 많은 물질과 시간과 관심을 투자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이 내 몸의 건강일까? 소위 well-being 시대라고 하는데, 사람들이 자신의 몸과 정신 건강에 쓰는 관심과 시간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

내 몸은 하나님의 것이다. 그래서 함부로 다루면 안된다. 하나님의 것으로서 소중이 다뤄야 한다. 하지만 건강이 우상이 된다면 그것은 정말 곤란한 것이다. 건강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 몸이 하나님께서 거하실 거룩한 처소가 되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몸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곳에 쓰임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몸의 건강은 그 지고의 목적에 종속되는 한에서 중요한 것이다.
때로는 육신의 연약함과 고통과 질병이 하나님 나라에 쓰임 받을 때가 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거나, 하나님의 뜻을 이 땅 가운데 선포하는 데 쓰임 받을 때가 있다.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요 9:1-3)

몸은 도구이지 목적이 아니다. 내 몸을 만드신 그분의 뜻을 늘 기억하며, 주님께서는 내 몸을 그 분께 드리는 믿음의 결단을 기뻐 받으신다.



.

바다 위의 거대한 쓰레기들

바다 위에 떠다니는 거대한 쓰레기들...



풍요와 안락 속에서 인간이 생산해 내는 거대한 악의 찌꺼기들을 보는 것 같은 아픔이 있다.

바다 위에 넘쳐나는 쓰레기들... 그것은 이 땅에 관영하는 죄악에 대한 visual metaphor가 아닐지...

그리고 그 죄악에 무관심하고 감각을 잃어버린 우리 자신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지...





미국 역사 이야기2

1918년... 1차대전이 막바지에 이르고 있을 무렵... 많은 미국인들이 죽었다. 유럽의 전쟁터에서 뿐만 아니라 미국 본토에서... 그것도 눈에 보이지 않는 아주 작은 적들에 의해서... 그것은 독감이었다.

작년... 돼지독감(H1N1)으로 미국 뿐만 아니라 온 세계가 긴장했었던 기억이 있다. 다행히도 예측과는 다르게 훨씬 적은 사망자를 내고 이제 사라져가는 것 같다. 하지만 1918년, 미국과 유럽을 휩쓸었던 독감은 그렇지 않았다.

Spanish Influenza로도 불렸던 1918년의 독감은 Kansas의 한 군부대 훈련캠프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어느 날 건강하던 군인들이 중 많은 수가 갑자기 고열과 통증을 호소했다. 병원이 가득 찰 정도로 하룻새에 많은 장병들이 앓아 누웠다. 그 중 네 명은 얼마 안 가서 죽었고, 나머지는 다행히도 나아졌다. 죽은 네 명을 검시해 본 결과 그들의 폐는 온통 파란색이었고, 물이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은 폐에서 물이 차서 질식사 한 것이었다.

이 부대는 후에 유럽으로 파병이 되었고, 거기에서 수 많은 사람들에게 전염되는 가운데 바이러스는 더 강해져 갔다. 후에 파병되었던 일부 병사가 미국으로 돌아 오면서 바이러스는 급격히 전파되기 시작했다. 약 10개월 동안 바이러스는 미국의 대도시로부터 시작해서 시골 한적할 곳까지 퍼져갔다. 이는 1차대전이 진행되는 동안 미국인들은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해서 다양한 형태의 모임과 parade를 많이 가졌기 때문에, 바이러스가 급속히 퍼져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미국 내에서 가장 심했던 곳은 Philadelphia였다. 이 도시에서의 감염율과 사망율은 다른 곳에 비해 7-8배 정도 높았다.

이 바이러스로 인해서 건강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쓰러지며 고열과 고통을 겪었다. 독감에 걸린 사람들은 거의 정신을 잃었고, 매우 고통스러워 하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가 많았다. 많은 집에서는 가족 전체가 독감으로 죽음을 맞이하기도 했다. 이 독감의 특징은 연령에 상관 없이 걸렸으며, 그 중 20대의 건강한 남녀가 가장 많이 죽는다는 것이었다.



병원은 환자들로 넘쳐났다. 병원 내에 더 이상 환자를 수용할 장소가 없어서 곳곳에 임시 텐트를 설치하고 환자들을 받아야만 했다. 더욱 어려운 것은 이 환자들을 치유할 방법이 없을 뿐만 아니라 도대체 그 원인이 무엇인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많은 과학자들이 그 원인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바이러스의 정체에 대해서 거의 아는 것이 없었던 당시로서는 그 원인균을 찾아내서 백신을 만들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다만 이 균이 호흡기관을 통해서 전염이 된다는 결론을 내린 미국 정부의 방침에 따라서 모든 미국인들은 항상 마스크를 하고 다녔고,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과 대화를 꺼리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미국 전역에서 죽어가는 사람들로 인해서 관을 구할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죽었던 Philadelphia에서는 지금 쓰레기를 내 놓는 것처럼, 각 집에서 사망자를 딱딱한 상자에 넣어 집 앞에 두면 도시를 돌아다니는 트럭이 싣고 가도록 해야할 정도였다.

독감이 휩쓴 10개월 동안 미국 내에서 (매우 보수적으로 추산했을 때) 60만명이 죽음을 당했다. 그리고 전 세계적으로는 3백만명이 죽었다.

다행히 이 독감은 1차대전이 끝난 1918년 11월 이후에 급격이 잦아 들었고, 더 이상 그로 인해 죽는 피해자가 많이 나오지는 않게 되었다.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는 작은 바이러스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게 자취를 감춘 것이다.

하지만 1918년의 독감은 미국 역사상 최악의 전염병으로 인한 사망의 해로 기록되고 있다.

21세기를 예측한 많은 예측 중에서 21세기의 사망 원인의 1/3은 바이러스에 의한 사망이 될 것이라고 예측한 것을 본 적이 있다.  작은 바이러스 앞에서도 이토록 무기력한 것이 인간인데... 창조주 되신 하나님을 거역하고, 죄악의 길로 가며, 자신의 힘과 능력을 믿고 살겠다고 하나님 앞에서 고집을 부리는 그 무모함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지...

바른 질문

"Do you know Jesus?"
"Do you have the Holy Spirit within you?"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까?"
"예수님을 영접하셨습니까?

교회 안에서, 혹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나 연약한 자들을 돕기 위해서 자주 하는 질문이다.
그러나 이 질문들은--비록 전략적인 측면에서나 대화를 시작하는 측면에서는 나름대로 의미가 있기는 하지만--잘못된 질문이다. 그것은 그 질문들에 모두 "Yes!"라고 대답한다고 해서 구원의 보증이 되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도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를 잘못 알게하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Does Jesus know you?"
"Are you ruled by the Holy Spirit in your everyday life?"
"Are you possessed by Him? Does your life prove it?"
"Is your life holy?"

이것이 바른 질문이다. 이 질문들에 대해서 진정으로 "Yes!"라고 답을 할 수 있는 삶을 사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지만, 성경에서 요구하는 믿음의 삶은 바로 이런 삶이다.

오늘 하루도 내 스스로에게 이 질문을 던지며, 내 삶을 살펴보고자 한다. 나는... 정말, 나는... "Yes!"라고 대답할 수 있는가?

.

무시당함

예전... 선교단체에 있던 간사님이 결혼하셨다. 결혼 얼마 후 간사님의 신혼집에 놀러 갔었다. 결혼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고 있던 그 때... 결혼생활이 궁금해서 이것 저것 여쭤봤다. 그 질문들 중에 하나가 부부생활 하면서 언제 가장 분노하는가였다. 그분은 성격이 워낙 조용하시고 온유한 분이라서 절대로 화를 내지 않으실 것 같았고, 사랑하는 아내에게 분노를 품을 분이 아니라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이 질문은 궁금해서라기 보다는 설마 그럴 일이 있을까하는 생각에 그냥 던져본 질문이었다.
그분은 의외로 심각해 지시더니, "아내가 나를 무시한다고 생각할 때..."라고 대답하셨다. 그 말씀을 들으면서, 그분이 분노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 놀라기도 했지만, 무시를 당한다는 것이 그토록 심각한 것인지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놀랐었다.

최근 어떤 일로 내 의견이 무시당하는 것을 경험했다. 그 때 느낀 내 안에서의 좌절감과 분노는 참으로 의외라고 생각할 만큼 컸다. 내 말이 상대에게 무게있게 다가가지 않고, 신뢰를 주지 못한다는 것 때문에 기분이 많이 상했었다.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을 발견했다. 그 과정에서 예전에 간사님으로부터 들었던 말씀, 그리고 그 말씀을 들었을 때의 충격이 생각났다.

그렇다. "무시하는 것"은 참으로 상대에게 심각한 상처를 준다. 그것은 온유한 성격의 사람에게 분노를 품게할 만큼, 파괴력이 큰 것이다. 그 아픔을 치유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릴 만큼, 그것은 심각한 상처를 남긴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3:2-3)

하나님으로 이 땅에 오신 메시야 그분이 인간에게서 철저하게 무시를 당했다. 모든 인간군상들은 그에 대해 증오를 품어 댔고, 그를 외면했다. 인간이 같은 인간에게 무시를 당해도 그 안에 큰 상처를 입고 고통스러워 하는데... 하나님이신 그분이 인간에게서 외면을 당하셨으니... 얼마나 그 마음이 아프셨을까? 하나님 당신을 사랑한다고 하는 종교열심자들, 적어도 겉으로는 거룩한 척하는 종교 사제들, 고통과 압제 속에서 자신들을 구원할 다윗과 같은 "메시야"를 기다리던 일반 군중들, 그리고 당신과 함께 동고동락하며 팔레스타인 땅을 거닐었던 제자들... 그 모두가 십자가를 지고 가는 그를 외면했고 무시했다. 그는 철저하게 고도한, 볼품없는 한 인간에 불과했다.

그분의 십자가... 그 위대한 능력으로 거듭난 나... 예수를 그리스도로,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오늘의 나... 나는 그 하나님을 "무시"하는 죄를 짓고 있지는 않는지... 일상의 삶 가운데서, 그분을 무시하지 않고, 모든 순간에 진정으로 나의 왕으로 모시고, 그분과 동행하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을 신뢰하며 무게를 두고 내 삶 가운데 받아들이고 있는지... 그분의 눈길이 머무는 곳, 그분의 마음이 향하는 것으로 내가 달려가고 있는지... 그분의 말씀이 진정으로 내 삶에서 육신이 되어서 구체화되고 있는지...
관념에 머물며, 구호에 불과한 하나의 종교로서 그분을 믿고 있지는 않은지... 내 눈은 세상을 바라보고, 내 욕망을 이루고자 하는 갈망에 가득차 있으면서, 그분을 이용하려는 사악함에 빠져 있지는 않은지... 그러는 과정에서 그분을 지속적으로 무시하면서, 내 뜻, 내 생각, 내 욕망을 관철시키고 있지는 않는지...

믿음이란 그분을 신뢰함으로 내 인생을 그분께 온전히 의탁드리는 것이고, 그분이 원하신 대로 사용하시도록 완전히 내어 드리는 것이다. 그런 믿음을 갖는 자는 절대로, 한 순간이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무시하는 삶을 살지 않는다. 그분이 절대화 되며, 그 외의 모든 것이 상대화되는 삶을 살 수 밖에 없다. 그것이 믿음이고, 그것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성화과정이다.

하나님을 무시함으로 그분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일만큼은 절대 피하고 싶다. 내가 아플지언정, 그분을 아프시게 하는 것은 이제 도저히 참을 수 없다. 그것은... 그분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이 나 때문에 이미 너무 많은 고통을 당하셨기 때문이다...

주님... 사랑합니다...

.

미국 역사 이야기1

1870년대와 1880년대의 미국을 The Gilded Age라고 부른다. 모든 것이 풍요로와 보일 때였고, 또 내부로는 부패와 부정이 만연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 당시의 최고 미인으로 뽑혔던 여인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File:Lillian Russell 4.png

그것은 당시 유명한 가수이자 배우였던  Lillian Russell이다.(Russell은 1890년 Alexander Graham Bell이 새로 발명한 장거리 전화기를 최초로 테스트한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당시 뉴욕에 있었던 그녀는 자신의 집에서 워싱턴에 있던 Cleveland 대통령에게 노래를 불러 주었다.) 당시 Russell이 최고의 미인으로 뽑혔던 것은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당시 기준으로 보면 특별히 빼어나지는 않은)이 아니라 그녀의 풍만한 몸매였다.
당시는 large woman이 미인으로 인정되던 때였다. Russell의 경우 5피트 5인치(당시로서는 매우 큰 키)로 140-160파운드의 몸무게를 자랑했다. 그 때 당시의 미국 여자들은 조금이라도 더 "찌기" 위해서 몸부림을 다했다. 커네티컷의 어떤 젊은 여인은 몇 달 만에 18파운드가 쪘다면서 매우 자랑스럽게 주위 사람들에게 소식을 알렸던 기록이 남아 있다.

사실, 남북전쟁 전후의 미국 여인들에게 이상적인 몸매는 20인치의 허리였다. 사실 내 개인적인 견해로 볼 때, 아무리 젊은 여성이라 하더라도 20인치는 거의 병적으로 말라야 가능하지 않나 싶고, 보기에도 매우 흉할 것 같은데, 어쨋든 당시에는 그것이 모든 여인들의 목표치수였다. 맨 몸으로는 불가능한 그 수치에 도달하기 위해 만들어 낸 도구가 Corset였다.



당시 남자들이 Corset을 입은 여인들을 얼마나 아름답게 여기고 즐겼는지는 모르겠지만, Corset은 여성들에게 고문기구 이상의 고통을 안겼다.
우선, 여성이 외출할 때, 가장 흔하게 볼 수 있었던 준비 장면은, 그 여성의 어머니 (간혹, 하인들)이 여성을 바닥에 엎드리게 하고 발로 밟아 등에 올라 서서 corset에 있는 줄을 있는 힘껏 당겨 허리를 최대한으로 줄이려고 끙끙대는 장면이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그리고 Corset은 여성들의 행동을 매우 제한했고, 식사도 제대로 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당시 일부 매우 도발적인(?) 여성들은 너무나 불편한 여성복장에 반기를 들고 편하게 하기 위해서 만들어 낸 Bloomer(아래 그림)를 입기도 했지만 그 조차도 Corset으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했다.



The Gilded Age가 지나고 1920년대가 되면 Corset을 집어 던지고 편한 복장을 하고 테니스를 치는 등 운동을 하며, 심지어(?) 자전거를 타기까지 하는 New Woman(아래 그림)이 등장하게 된다.



The Gilded Age의 풍만한 여성상에 대한 동경은 아마도 Corset 시대에서  New Woman시대로 옮겨가는 과도기가 아닌가 생각된다. 아직 Corset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병약하고, 가늘고, 힘없어 보이는 여성을 이상으로 삼았던 그 전시대의 이미지를 거부하고, 튼튼하고 건강하고 풍만한 여인을 동경함으로써, 이제는 보다 더 자유스럽고 건강한 이미지의 여성을 맞이할 준비를 한 것이리라...

어쨋든, 모든(!!!) 여성들이 살빼는 것에 obsessed된 오늘의 싯점에서, Lillian Russell과 같은 여인이 최고의 미인으로 인정되는 날이 온다면, 모두에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

斷想...

토요일...
일반적으로 가장 한가한 날... 하지만 우리 부부에게는 가장 바쁜 날이다.
나는 아침 7시 30분에 있는 교회 목자모임 참석을 위해 일찍 준비해 나가야 하고, 목자모임 이후에는 교회에서 예배 말씀 준비에 전념하며 긴장된 하루를 보내고, 저녁에는 토요예배에 참석하여 온 에너지를 다 쏟아 말씀을 전하고, 집에 오면 보통 9시 30분 정도 된다. 하루 종일 바깥에 나가 있고, 긴장된 생활을 하다가 집에 오면, 피곤함을 느낀다.
아내는 아이들을 아침식사를 먹이고, 도시락을 싸서 아침에 있는 한글학교 교사모임에 참석, 그 후에 어린 아이들을 가르치느라 시간을 보낸다. 그것이 쉽지 않은 일인 것이, 집에 올 때 즈음이면 목이 많이 쉬어 있는 것을 본다. 오후에 잠깐 집에 들렀다 5시부터 있는 청년부 예배를 위한 중보기도모임을 인도하러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고 나와 같이 집에 돌아간다.

토요일이 이렇게 바쁘다보니 집에 올 때 즈음이면 서로가 지쳐 있을 때가 많다. 집에 돌아 오면, 바로 잘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아침에 치우지 못한 것들을 치우고 정리하는 일이 남아 있다. 돌아보건데, 거의 항상 이 일은 아내의 일이었다. 나도 피곤하고 지친 것은 사실이지만, 아내도 나 못지 않게 힘들텐데, 왜 이 일이 꼭 아내가 해야하는 일로만 여겨졌었는지... 똘똘뭉친 내 이기적인 마음이 여실히 드러난다.

지난 토요일 저녁. 아내가 유난히 힘들어하며, 집에 돌아오자 마자 아이들을 재우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나도 대충 씻고 바로 잠자리에 들었을텐데, 우연히 그날 아침에 못다한 설거지가 눈에 들왔다. 순간적으로 마음 가운데 갈등이 생겼다. 피곤한 육신에 빨리 가서 자고 싶은 마음과, 내가 지금 이것을 그냥 지나가면 아내가 해야할 일이라는 생각이 서로 충돌한 것이다.
결론을 말하자면, 그날 나는 설거지를 해 놓고 잤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있었던 마음의 갈등, 그리고 그 갈등을 극복하고 설거지를 "하기"까지의 과정은 참으로 부끄러운 과정이었다. 그 갈등 가운데서 내 마음은 그냥 모른 채 하고 빨리 잠자리에 들고자하는 욕망이 점점 더 강해졌다. 사랑하는 아내, 그것도 많이 피곤해 하는 아내가 그 일을 해야한다는 사실을 앞에 두고 아내에 대한 긍휼한 마음에 그 피곤을 이겨내고 내가 설거지를 해야하는 것은 어찌보면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파렴치한 인간이 아니라면 그 외의 다른 생각을 할 것도 없어 보이는 것이 사실이지만, 내 마음은 그 모든 것을 무시하고 "내가" 피곤하다는 생각에 사로 잡힌 것이다.
인간의 죄성,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죄성이 내 안에 시퍼렇게 살아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 죄성의 크기와 뿌리깊음의 정도는, 내가 결국 설거지를 하는 것으로 결정하는데, 내 노력으로는 불가능했고, 하나님의 말씀, 온 우주의 창조자이시고 절대자 되신 크신 하나님이 능력 가운데 개입하셔야 가능했다는 사실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아무것도 아닌 일인 것 같지만, 그 아무것도 아닌 너무나 당연한 일조차도 순종하지 못하고, 선을 이루지 못하는 내 자신을 보았다. 죄는 나를 언제든지 그렇게 악한 방향으로 끌고가서 기어이 죄를 짓고야 말도록 나를 주장한다. 죄악의 무서운 힘이다.

마귀가 내 이기심을 부추기는 가운데, 나를 이끌고 가고 있을 때, 그 힘으로부터 나를 해방시킨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하나님께서 결코 그런 나를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것. 그리고 남편으로서 아내를 섬기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라는 것. 연약한 그릇인 아내가 힘들고 어려웠을 때, 그를 돕는 것이 내 자신을 돌보는 것보다 우선해야 한다는 것. 그것이 남편인 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것이 떠오르는 순간, 나는 내 이기심에 이끌려 무정함과 무관심의 죄악의 직전에서 돌아 올 수 있었다. 그리고 기쁜 마음이 아니라, 자원하는 마음이 아니라, 오로지 주님께 순종해야겠다는 결단으로 설거지를 시작했고, 마칠 수 있었다.

설거지... 정말 아무 것도 아닌 작은 일 하나에서조차 선을 이루지 못하고 악을 도모하는 것이 나의 본성인 것을 본다.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섬기라고 보내 주신 내 아내에게조차 선을 행할 능력이 없는 죄악된 나를 본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다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없다면... 내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 수 없는 악한 인간인 것을 다시 깨닫는다. 반면, 나같은 악한 인간을 자녀삼아 주시고, 끊임없는 반역과 반항 가운데서도, 나를 인내하시고, 신실하게 나를 인도하셔서, 당신 자신의 열심과 성실로 내 안에 선을 창조하시고 이루시고 마는 하나님께 감사한다. 내 삶을 통해 맺히는 모든 선한 열매는 바로 그분의 열심과 성실의 결과이다.

.

"I need a homepage..."

금요일...
목장모임에 가기 전에 아이들 방에서 아이들과 오랫만에 놀았다.
각자의 책상에 앉아서 책을 읽는 하연이... 뭔가를 열심히 만들고 있는 예연이...

갑자기 예연이가 말했다.
(텍사스 사투리가 약간 섞인 어투로) "Daddy! I need a homepage. Can you make it for me?"
"왜?"
"I just need it..."
"홈페이지 만들려면... 서버를 구해야 하고,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홈페이지를 꾸며야 하는데... 쉽지 않은 일인데..."
"I wish I had it."
"뭐하려고?"
"I want to make a game, and put it on the homepage..."
"무슨 게임?"
"A toilette game..."
"Toilette?"
"Yes. I want to make a toilette game. A player flushes Hayun into the toilette... It'll be fun!"
그러면서 물에 빨려서 내려가는 몸짓을 하며 몹시 즐거워했다.

'언니가 그렇게 밉나?' 혼자 생각하며 옆에서 책을 읽고 있던 하연이의 눈치를 살폈다. 의외로 별로 신경쓰지 않는듯... 아니 오히려 웃고 있었다.

하연이가 태어난 후, 둘째를 난다면 딸이 태어나기를 바랬었다. 아무래도 동성의 형제들이 더 친하게 잘 지낼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바램대로 예연이를 보내 주셨고, 두 살 터울의 아이들이 지금까지 잘 자라고 있어서 너무 감사하다.
자주 싸우고, 울고, 미워하기도 하지만, 예연이가 언니를 얼마나 생각하고 위하는지 잘 알고 있다. 곧 있으면 언니 생일인데, 자신의 돈을 많이 써 가면서 언니 선물을 준비하는 예연이를 보면서 참으로 대견하기도 하고, 이제 세상에서 가장 친한 친구가 되어 갈 두 딸들을 보면서 하나님께 감사한다.
물론 지금은 언니를 flush하고 싶을 정도로 밉기도 하겠지만, 그리고 십대를 지내면서 서로에 대한 감정은 더 복잡해지고, 더 많이 싸울 수도 있겠지만, 언젠가 철이 들고 나와 아내가 이 세상에 없을 때는 유일한 혈육으로 서로 사랑하며 의지하며 살게 될 것이라 믿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