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그러므로 이제 내 종 다윗에게 이처럼 말하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데서 취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고 네가 어디를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세상에서 존귀한 자의 이름 같이 네 이름을 존귀케 만들어 주리라."(삼하 7:8-9)

하나님께서는 유다 지파의 한 작은 고을 중 한 집안의 막내 아들로 태어나서 허드렛일을 하며 심부름꾼으로, 또 당시 가장 천대 받는 목자로 집에서 종처럼 일하고 있던 다윗을 지명하시고, 그에게 기름부으셔서 왕으로 불려 주셨다. 다윗의 이름은 천하에 존귀한 이름이 되었고, 그처럼 복받은 자가 이 세상에 없었으며, 오실 메시야가 "다윗의 자손"으로 불리우는 엄청난 영광을 누렸고, 실제로 그의 혈통을 좇아서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다.

그가 하나님 앞에서 극악한 죄를 범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버리신 것처럼 그를 버리시지는 않으셨다.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내가 네 앞에서 폐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같이 그에게서는 빼앗지 아니하리라."(삼하 7:14-15)

어찌보면 인간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하나님의 지극히 심한 편애이다. 사울은 비록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기는 했어도, (적어도 인간적 관점으로 봤을 때는) 다윗처럼 파렴치한 죄를 범하지는 않았다. 블레셋과 대치할 때, 군대의 사기가 점점 떨어져 가고 있고 소집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래처럼 많은 블레셋 군사들과 그들의 뛰어난 병기를 보면서 두려워 하는 가운데 하나 둘씩 도망가고 있는 상황에서, 그나마 그들을 종교적으로 결집시켜줄 수 있는 사무엘은 온다는 시각에 오지 않고 지체하고 있는 상황에서, 다급한 마음에 왕인 자신이 직접 제사를 드림으로써 군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기를 원했던 것 뿐이다.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명령을 받고 출전하여 말 그대로 아말렉을 완전히 진멸하고, 가축까지 도살했지만, 그 힘든 전쟁을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그럴듯한 전리품 하나 챙겨가지 못한다면 군대의 사기와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뭔가 보일 것이 없다는 생각에, 하나님께 가장 좋은 것을 드리고, 그 왕을 사로잡음으로써 함께 출전한 군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그들로 하여금 자부심을 가지게 하고자 아말렉의 왕을 사로 잡고, 제사 드리기에 너무 적합한 가축들을 몇 마리 끌고 왔을 뿐이었다.

반면, 다윗은 자기의 가장 충성된 신하 중의 한 사람의 아내를, 그것도 자신의 장수들이 모두 전장에 나가고 자기 혼자 왕궁에 남아 있는 상황에서, 그 여자를 범했고, 그것을 덮으려고 온갖 꽁수를 썼었고, 그것이 실패하자 무자비하게 그 충성스런 장군을 모살했으며,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그 여자를 끝내 자신의 아내로 (이미 몇 명의 아내들이 있었음에도) 취하고 마는 뻔뻔한 자였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신 이스라엘의 강성함을 자신의 자랑으로 삼으며, 인구조사를 하며 세금을 부과하려는 죄악 가운데서 수 많은 자신의 백성들이 죽임을 당하는 벌을 받게 했던 형편없는 리더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을 왕위에서 폐하셨던 하나님께서 다윗을 폐위하지 않으신 것은, 전적으로 그분의 사랑이고 그분의 은혜이다. 물론 다윗의 중심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열정과 마음이 있었고, 사울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홀히 여기고 하나님 섬기는 마음이 없었던 것을 그 원인으로 들 수 있겠지만, 그 이전에 하나님께서 다윗을 그 종으로 택하시고, 그의 종으로 삼으신 하나님 편에서의 일방적인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왕이 되었던 것이다.

"나의 힘이시여! 내가 주께 찬송하오리니 하나님은 나의 산성이시며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시 59:17)

그리스도인으로 부름받는 나... 나 또한 다윗보다도 더 악한 자이고, 다윗보다도 더 비열한 자이고, 다윗보다도 더 뻔뻔스러운 자이지만,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 아래, 십자가의 은혜를 알게 되었고, 죄용서를 받았고, 거룩한 삶을 갈망할 수 있는 자로 세우심을 받았다. 내 삶에서 행해진 수 많은 악들을 생각할 때, 나 또한 사울처럼 버림받아 마땅한 자임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인자야 포도나무가 모든 나무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랴? 삼림 중 여러 나무 가운데 있는 그 포도나무 가지가 나은 것이 무엇이랴? 그 나무를 가지고 무엇을 제조할 수 있겠느냐? 그것으로 무슨 그릇을 걸 못을 만들 수 있겠느냐? 불에 던질 화목이 될 뿐이라 불이 그 두 끝을 사르고 그 가운데도 태웠으면 제조에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그것이 온전할 때에도 아무 제조에 합당치 않았거든 하물며 불에 살라지고 탄 후에 어찌 제조에 합당하겠느냐?"(겔 15:2-5)

목재로서 아무짝에 쓸모 없는 포도나무와 같던 나를 당신의 자녀 삼아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 또 감사할 뿐이다...

[펌] 함께 있는 것.. 그 자체가 행복

(2006.02.02에 다른 곳에 쓴 글)

예전이 한국에서 큰 참사가 있었다. 일명 씨랜드 화재사건... 유치원생들이 단체로 놀러 갔다가 화재로 인해서 대부분 죽임을 당한... 정말 끔찍한 사건이었다. 그 사건이 있은 뒤 신문에는 연일 그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그 중에 내 마음에 남는 한 인터뷰... 그것은 한 부모와 인터뷰였는데, 그 중에서 마음에 남는 한 마디...

"내 아이가 죽어가고 있는데, 내가 그를 위해서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었다는게 가슴을 저미게 합니다."

사랑하는 아이가 죽어가고 있는 현장에서 얼마나 엄마 아빠를 찾았을까? 그 현장에 같이 있지 못하고 그 아이의 부르짖음이 응답하지 못했던 그 부모의 마음. 당시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그 마음이 참으로 공감이 간다.

지금도 있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유학오기 전에 "TV 동화 행복한 세상"이라는 프로가 있었다. 거기에 나온 에피소드 한 가지...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 내용은 대충 이렇다.

625 때 전쟁터에 나간 아들이 전사하여 화장된 유골로 전우의 손에 집을 다시 찾았다. 그 유골을 보고 하염없이 눈물 흘리는 어머니... 그 어머니에게 그 전우가 물었다.

"지금 과거로 돌아가 아드님과 함께할 한 순간이 있다면 언제로 돌아가시겠습니까?"

어머니의 대답... 그것은 아이와 행복했던 때도, 아이가 자랑스러운 일을 했을 때도, 아이가 효도했을 때도 아니었다. 그 어머니는 아들이 울고 있을 때... 그 때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우는 아이를 마음껏 안아주고 달래주고 위로해주고 싶다는 그 어머니의 바램...

자식을 키우면서 참으로 여러가지 감정을 복합적으로 경험한다. 그렇게도 사랑스럽던 자식들이 고집피우고 말안들을 때면 어찌 그리 미운지... 하지만 나는 늘 그럴 때마다 이 두 사건을 떠올린다. 그리고 울며불며 고집부리면서 말 안듣는 내 아이... 비록 그런 모습이지만 내가 그 애들과 함께 있다는 것, 그것이 나에게 행복이라는 사실을 떠올리면서, 내가 만약 전사한 아들의 어머니가 되어 내 아이들 곁에 있다면 해주고 싶은 것을 생각한다... 후회가 덜 될 그런 대응을 찾는다...

나의 행복...

그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이미 주신 것이다. 다만 나는 그것을 내 성질과 내 욕심에 가리고 사는가 아니면 주심에 감사하며 한 순간 한 순간 그 것을 맛보며 사는가의 차이이다.

나는...

행복하다.

[펌] Bible Riddles

Q. Which servant of God was the most flagrant lawbreaker in the Bible?
A. Moses broke all 10 commandments at once. (Exodus 32:19)

Q. Which area of Palestine was especially wealthy?
A. The area around the Jordan-the banks were always overflowing.

Q. How do we know that Job went to a chiropractor?
A. Because in Job 16:12, 14, 16 we read, "I had come to be at ease, but he proceeded to shake me up: and he grabbed me by the back of the neck and proceeded to smash me."

Q: Why didn't Noah go fishing?
A: He had only two worms! (Genesis 7)

Q: How do we know that they played cards in the ark?
A: Because Noah sat on the deck. (by inference, in Genesis 7)

Q: What is the first recorded case of constipation in the Bible?
A: It's in Kings, where it says that David sat on the Throne for 40 years.

Define Yourself!

어제 산책을 다녀오는 길에 경영대 근처에 붙어 있는 포스터가 눈에 들어 왔다. 평소에 길을 가면서 주변의 사람이나 사물에 거의 전혀 신경을 쓰지 않기 때문에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포스터에는 고민하는 신사의 모습과 두 단어가 적혀 있었다.

"Define Yourself!"

그 글을 읽자마자 1초의 여유도 없이 내 안에서는 답이 터져 나왔다.

"I'm Christian. I'm a child of God!"

남자, 남편, 아빠, 집사, 대학원생 등등... 나를 정의할 수 있는 수 많은 방법이 있었지만, 내 속으로부터 즉시로 튀어나온 답이 바로 그것이었다는 것이 참 감격스러웠다.
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define할 수 없어서 힘들어한다. identity crisis는 개인에게 닥칠 수 있는 위기 중에서 심각한 것 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어떤 일이 있더라도, 심지어 내 자신이 schizophrenia에 걸린다 하더라도 절대로 흔들릴 수 없는 사실은,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다.

내 안에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인을 쳐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구하라... 예수의 이름으로...

지난 주 아이들 학교에서 event가 있었다. 어스틴 경찰서에서 주관하는 것으로 우리 아이들이 다니는 초등학교 아이들 중에서 선발된 25명이 경찰들과 같이 쇼핑하고 피자 가게에서 피자를 먹는 Shop with a Cop이라는 프로그램을 위해서 아이들을 선발하는 event였다. 경찰들과 같이 Target에 가서 개인당 50불어치의 쇼핑을 하게 하고 경찰들이 그 비용을 대 주는 것이었기 때문에 아이들의 기대가 대단했다. 하연이와 예연이도 목요일 저녁에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금요일에 추첨이 있었다. 결과는 하연이는 뽑혔고 예연이는 뽑히지 못했다. 확률이 매우 낮았기 때문에 하연이가 뽑혔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었다. 참고로 예연이가 속한 2학년 중에는 한 명도 뽑히지 못했다고 한다.

이로 인해서 예연이가 매우 상심했다. 하나님께서 언니의 기도는 들어 주시고, 자신의 기도는 들어 주지 않으셨다는 것 때문에 많이 울었다. 그날 오후, 예연이가 나에게 조용히 찾아와서 상담을 요청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거절하셨다면서 원망과 눈물이 섞인채로 서럽게 울었다.
예연이에게 기도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었고, 기도하는 자세와 그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의 응답에 대해서 여러 비유를 들어가며 알아듣도록 설명하려 했지만, 예연이를 이해시키는 데는 실패했다. 끝내 울음과 원망을 그치지 않는 예연이를 보면서 측은한 마음이 들기도 하고, 어떻게 해야할 도리가 없어서 조용히 예연이에게 현금으로 10불을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 말을 듣고 예연이의 표정은 금새 밝아졌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비밀리 건넨 10불을 몰래 자신의 저금통에 고이 간직하고는 그 후로 표정이 많이 밝아졌다.

미봉책으로 10불이라는 눈에 보이는 현금으로 문제를 수습하긴 했지만, 아직도 예연이의 마음 속 깊이 자리잡은 거절감에 대한 문제, 보다 더 근본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오늘 새벽에 아이들을 위해 기도할 때, 예연이를 위해 특별히 기도를 많이했다. 하나님께서 그 상처를 어루만져 주시고,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쌓이도록...

예연이의 일이지만... 예연이를 보면서 나 또한 별로 다를 바가 없는 자임을 느낀다. 기도에 대해서 참으로 많은 것을 이론적으로 알고 있지만, 내가 간절히 기도한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그 기도대로 응답하지 않으실 때, 내 안에 생기는 하나님에 대한 쓴뿌리는 나로서도 어쩔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예연이를 보게 하심으로써 내 모습을 보여 주신다. 얼마나 유치하고 하나님을 모르는 소치인가? 예연이는 아직 어리기 때문에 그것이 당연하다지만, 나는 왜 그 모양인가?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 16:24)

성숙한 기도는 주님 안에 거하는 기도, 주님의 말씀이 내 안에 거함으로써 그 말씀에 따라 구하는 기도이다. 그것은 다른 표현으로 주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기도이다. 주님의 이름으로 구한다는 것은 첫번째로 우리가 직접 하나님께 나아갈 자격이 없지만, 그분의 십자가 공로를 의지하여 하나님께 나아가 구한다는 것이다.  두번째는 그분의 이름으로 구한다는 것은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것들을 구한다는 것이다. 그분의 이름으로 구하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것을 구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근본적이고 핵심적인 의미 외에 매우 중요한 것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내가 구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구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예수님 안에 두셨다. 그것은 우리가 무엇을 구하든지간에, 그것은 결국 예수님을 더 소유하고 더 누리기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약 4:2b-3)

기도는 나의 필요와 욕망을 채우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그것은 주님을 구하는 수단이며, 그분과 교제하고 그분을 더 누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다. 주님을 구하는 기도, 주님을 누리기를 갈망하는 것이 동기가 된 기도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응답하여 주신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귀의 속삭임...

내 인생을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위하여만 살겠다고 결단할 때, 마귀는 옆에서 박수를 친다.

"훌륭해요!! 암~~ 그래야지!"

그리고나서 내가 하나님께 기도하려고 할 때, 옆에서 속삭인다.

"지금 좀 피곤하잖아... 조금만 쉬었다가 해. 그리고 다른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 일도 좀 신경 써야 되지 않겠어?"

그 가운데 나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헌신에 대한 개념만 아는 빈 껍데기 신앙으로 타락해 간다.



없는 시간을 내서 성경을 읽고 있을 때, 마귀는 옆에서 나를 매우 존경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말한다.

"와~~. 그렇게 바쁜데도 이렇게 열심히 성경을 읽고 있어? 하나님은 좋겠다. 이렇게 충성스러운 종이 있어서... 대단한 희생을 이렇게 과감하게 드리다니..."

그리고 나를 우쭐하게 만든다. 기분이 업 되어 있는 나... 성경을 읽어 나가면서 말씀에 대한 지식이 더해질 때, 마귀는 옆에 와서 더 조용히 속삭인다.

"너처럼 성경 많이 읽는 사람... 거의 못봤다. 너는 성경에 대해서도 다른 사람보다 많이 알고, 기도도 더 많이하고... 너 만한 그리스도인은 없지... 너 같이 훌륭한 그리스도인을 누가 함부로 무시하겠어? 너 스스로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져... 그건 교만이 아니야, 단지 자부심일 뿐..."

그렇게 해서 나를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심히 교만한 자로 서서히 인도한다.



마귀와의 싸움...
그것을 결코 나의 엄청난 희생을 요구하는 거창한 문제들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마귀는 참으로 교묘하다. 내가 열심히 신앙생활 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 어느새 내 옆에 가까이 다가와서 아주 작은 목소리로, 아주 작은 일에 대해서 조금씩 부추긴다.
사실상 마귀와의 싸움 중 가장 중요하고 가장 치열한 싸움은 바로 정말 사소해 보이는 그런 일들에서 발생한다. 겉으로는 사소해 보이지만, 그것은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니라, 사실상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한 일이다. 묵상하기 위해 아침에 눈뜨는 것, 기도하기 위해 무릎 꿇는 것, 그리고 꿇은 무릎을 좀 더 오래 지속시키는 것, 사소해 보이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도 결코 가볍게 보지 않고 그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하는 것...

'이 정도 쯤은 괜찮겠지...'라고 생각이 들 때, 그 때가 가장 경계를 해야할 때이며, 영적으로 긴장해야 할 때이다. 왜냐하면 그곳에 바로 사탄의 가장 중요하고 효과적인 공격 포인트이기 때문이다.

믿음은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삶이다. 일상의 삶의 작은 부분에서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다면, 나는 마귀에게 속고 있는 것이며, 그런 삶은 아무리 거창한 원칙과 비전을 가지고 사는 삶이라 할지라도, 결코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 없는 삶인 것이다.

manipulation

지난 10월 23일자 한겨레신문의 기사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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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동작경찰서는 23일 자신의 교회에 다니는 여성 신도 여러 명에게 “나와 성관계를 맺는 것은 신의 뜻”이라고 회유·압박해 이들을 상습 성폭행한 혐의(준강간)로 목사 조아무개(46)씨를구속했다고 밝혔다.
10여년 전 한 선교단체를 만들어 동작구에 교회를 차린 조씨는 자신을 찾아오는 여성신도들에게 “나와 성관계를 하면 모든 죄가 씻겨진다. 이것은 하느님의 뜻으로 행하는 것이다”라는 말로 구슬려내어 성관계를 맺는 방식으로 10여년동안 20대 미혼 여신도 6명을 수십차례에 걸쳐 성폭행한 혐의를 받고 있다. 경찰 조사 결과 조씨는 성관계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하느님의 뜻인 줄 알고 그랬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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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상식적으로도 이해가 안되는 이런 일들...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단순히 무지에서, 혹은 뭔가에 씌워서 그런 것이었을까?

일반인들의 인식 속에 "학대"라는 단어에 연상되는 것은 언어적, 물리적 폭행이다. 말을 함부로 하거나, 때리거나 하는 것을 "학대"라고 생각한다. 물론 맞는 말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일반적으로 생각하지 못하는 또 하나가 있다. 그것은 "manipulation"이다.
Manipulation이라는 것은 인간 안에 잠재 되어 있는 죄의식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것이다. 어린 아이들을 성폭행한 뒤, 아이들에게 "너는 더러운 아이야." "네가 잘못해서 그래." 등등으로 자주 이야기하면서 아이들이 성폭행 당한 것을 자신의 죄, 자신의 더러움으로 인식하게 하여, 자기 스스로를 자책하게 만듦으로써 그 죄를 은폐시키려고 하는 행위, 남편이 아내에게 폭행을 가하면서 "너는 그렇게 얻어 맞아 마땅한 덜떨어진 인간이야!"라고 폭행을 정당화 하는 행위, 남자에게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기어이 얻어내고자 남자의 약한 감정을 이용하여 그 마음에 미안한 마음이 들게 함으로써 자기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 내는 행위 등이 manipulation에 해당한다. 말 그대로 상대방의 약점이나 죄의식을 이용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부당한 방식으로 얻어내는 것이다. 이 manipulation은 "학대"의 한 중요한 양상이라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위의 신문 기사는 영적 파워를 가진 목사가 자신의 욕구/필요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여성도들의 죄의식에 자신의 욕구를 교묘하게 연결시킨 결과이다. 그는 결국 manipulation을 사용하여 여성도들을 학대한 것이다.

하나님을 떠나 죄의 노예가 되어 버린 모든 인간은 누구든지 그 영혼의 깊은 곳에 죄의식이 숨어 있다. 아담이 범죄하고 난 이후 하나님의 낯을 보기 두려워서 숨었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 깊은 곳에 죄의식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 죄의식이 바르게 사용되었을 때, 그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는 데 큰 역할을 한다. 하지만 그것이 잘못 사용되었을 때는 인간을 파멸하는 데 사용될 수 있는 것이다. 위에 인용된 신문 기사의 예가 바로 그런 예이다.

영적인 리더로서 섬기면서, 내 스스로가 manipulation의 가능성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기사에 나오는 것처럼 그런 심각한 것은 아니지만, 나를 영적인 리더로 믿고 따르는 지체들에게 내가 끼칠 수 있는 영향력이 생각보다 크다는 것을 여러 경우를 통해 경험하면서, 신문 기사에 나오는 것과 같은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실제로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감으로 느끼게 된다.
영적인 리더의 역할은 인간 안에 있는 죄책감을 말씀과 연결시키는 것이다. 그들이 말씀으로 도전받고 죄책감을 느끼며, 그것으로 인해서 주님께 더 나아가고, 주님 앞에서 해결되며, 그로 인해서 더 정결하고 거룩한 자가 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영적 리더의 역할이다.
그런데, 그 어떤 경우이든간에 그 죄책감을 자신의 욕구나 바램, 생각과 연결시킨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 엄청난 죄를 짓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을 관철 시키기 위해서, 지체들이 내 생각대로 움직이게 하기 위해서, 그들 안에 있는 죄책감에 호소를 한다면, 그들이 나로 인해서 죄책감을 느끼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왕위를 찬탈하는 지극히 사악한 행위인 것이다.
만약 그것이 의도적으로 지속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성령을 훼방하는 죄,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도 구원을 얻을 수 없는 악독한 죄악인 것이다. 그런 죄를 짓는다는 것은 생각만해도 몸서리쳐지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영적 권위를 주신 자리에서 섬긴다는 것이 두려운 이유이다. 영적 리더들은 그들이 섬기는 지체들보다 훨씬 더 철저하게 타락할 여지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권위가 manipulation에 이용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 그것으로 다른 영혼들도 타락으로 이끌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참 두렵다.
내가 더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 영적 리더로서 섬길 때, 내가 진정으로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섬기고 있는지를 묻고 또 묻는 가운데, 하나님 앞에 결코 거리낌이 없는 섬김을 해야 한다. 만약 내 것이 조금이라도 섞인다면,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그에 대해서 나를 매우 책망하실 것이다. 기쁨으로 맞이해야 할 주님 오시는 날이 저주와 슬픔의 날이 될 것이다.
주여 나를 도우소서!

[펌] 미국 생활의 즐거움 하나...

(2006.01.31에 다른 곳에 썼던 내 글)

미국 생활, 특히 미국에서의 유학생활은 그리 넉넉치 못한 경제적 형편과 공부의 고달픔, 그리고 장래의 불안 때문에 그리 녹록치는 않은 경험이다. 하지만 그 가운데도 어려운 삶은 이겨내도록 돕는, 그리고 나중에 공부가 끝나고 나서도 그리울 그런 작은 기쁨들이 있다. 예를 들어 같은 학생 아파트에서 생활하면서 아이들이 있는 집은 또래 아이들끼리 이리 저리 몰려 다니며 마냥 즐겁게 놀면서 마음대로 이 집 저 집을 드나드는 것, 급히 도움이 필요할 때, 이웃에 쉽게 손벌려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것 등이 그것이다. 한국에 있을 때 보다는 훨씬 더 개방적인 한국 학생 커뮤니티가 형성되어 있어 그 안에서 맛보는 인간적인 즐거움은 참으로 인상적인 것이다.

그 중에 나에게는 특별한 것이 있다. 그것은 목장모임... 목장이라는 것은 내가 다니는 교회에서 구역 대신에 붙인 이름으로 세 가정에서 일곱 가정 정도가 한 목장을 이루어 매 주마다 정해진 시간에 만나서 찬양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보는 소그룹 모임이다. 내가 속해 있는 목장에는 여덟 가정 정도가 소속되어 있고 그 중 여섯 가정 정도가 정기적으로 모여서 교재를 나눈다. 나는 거기서 목장을 인도하는 목자로 섬기고 있다.

목장모임... 이는 그저 교회에서 정해준 소그룹 모임의 수준을 훨씬 벗어나는 가족과 같은 관계이다. 어려운 미국생활을 하고 있는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모여서, 같은 신앙을 가지고 서로 격려하며 한 모임을 이루기 때문에 서로에 대한 마음 씀씀이가 참 아름답다.

얼마전에 가정의 문제 때문에 한국에 방문해야 했던 한 지체가 있었다. 모두들 그를 위해 얼마나 기도했는지... 얼마나 마음 졸이면서 한국에서 날라오는 소식을 기다렸는지... 또 한 가정에서는 태어난지 몇 개월 되지 않은 아기를 학업 때문에 한국에 보내야 했는데, 그 아기를 보내는 목장 식구를 보면서 내 마음이 왜 그리도 쓰린지... 그리고 애를 보내 놓고 힘들어 하는 그 엄마를 보면서 얼마나 안쓰럽고 가슴 아픈지... 목장 식구들 중에 한 사람이 알레르기로 무척 고생하여 목장 모임에도 참석하지 못하고 집에 드러 누워 있었을 때, 그 먼거리를 길도 익숙치 않으면서도 밥과 반찬을 해 들고 찾아가 위로하는 또 다른 식구, 그리고 예연이가 아파서 교회에 못간 아내가 식사도 제대로 못했을까 염려해서 감자탕을 준비한 가정... 한국에서 돌아온 형제가 시차 적응이 안되었을까봐서 밥과 김치, 반찬을 해들고 와서 밥 꼭 챙겨먹으라면서 건네주었던 자매...

작은 마음씀씀이... 작은 정성... 마치 내 일인양 신경쓰고 마음... 모두가 우리 목장을 영적인 가족으로 묶어주는 참으로 아름답고, 결코 작지 않은 섬김이고 사랑의 모습이라는 것을 하나님은 인정하시리라 믿는다. 이런 공동체에 속해있고, 이런 공동체를 섬기는 나는 참으로 축복받은 존재이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이 목장의 리더로 세워 주셨지만, 나는 오히려 우리 목장의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고 그 안에서 유학생활의 힘과 기쁨을 얻는다.

주님...

"그런데, 너 그 때 왜 나를 신뢰하지 못하고, 너 혼자 그렇게 힘들어 했니?"

"죄송해요. 예수님.. 그 때는 제가 믿음이 약해졌었어요.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분명히 알고는 있었는데, 상황과 제 자신을 보니, 그 약속을 신뢰하기가 힘들더라고요.."

"그래.. 그래서 내가 아버지 옆에서 얼마나 기도했는지 모른다. 아버지께서 너를 지켜 주셔서 결국은 모든 것이 잘 되었지."

"그래요... 그 때 정말 감사했었어요. 저 혼자 어찌할바를 모르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저에게 분명히 갈 길을 알려 주셨지요. 그런데, 예수님...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두고 혼자 기도하실 때, 얼마나 외로우셨어요? 예수님 당시 그 어느 누구도, 심지어 제자들마저도,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도대체 이해하지 못하고, 예수님 가슴 안의 번민과 고뇌를 이해하지 못하고 서로 싸우고 있었으니..."

"그래.. 그때 참 외롭고 힘들었지... 십자가의 고통보다는 오히려 아무와도 그 아픔을 나눌 방법이 없다는 것이 더 힘들었지.. 하지만 아버지께서 늘 나와 함께 계시면서, 나를 잘 붙잡아 주셨어... 그나저나 네가 내 마음을 이해한다니, 너도 어지간히 힘들었는가 보구나."

"예... 주님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지만... 주님 따라 살면서, 특별히 영혼들을 섬기면서, 많이 외로왔지요... 주님에 비하면 저에게는 믿음의 동역자들도 있고 그래서 형편이 훨씬 더 나았는데도... 어려운 결정을 내리거나, 주님의 일을 위해 깊이 고민할 때는 참으로 외로왔어요... 그 때 정말 힘이 들었고, 포기하고 싶을 때가 많았어요..."

"그래.. 내가 그 마음 알지..."

"주님이 마음을 알아 주실 거라 믿었어요. 그래도 이렇게 막상 예수님을 만나서 옛날 이야기를 하니, 그 때 힘들었던 것도 이제는 추억이네요.."

마지막 때...
주님을 만난 뒤... 주님과 나 사이에 끊임없는 대화가 오갈 그날... 주님께 책망도 듣고, 위로도 받고, 궁금했던 것을 질문하고 가르침을 받는 그 대화 속에서 그분과 더 깊은 사랑을 나눌 그날...

그 날을 위해 오늘 그분과 대화할 꺼리들을 많이 만들어야겠다. 그분과 지금 이 시간에 동행하면서 같이 일을 해나갈 때, 예수님과 할 말이 많아지겠지...
주님을 따르느라 겪었던 외롭고 힘든 모든 것도 주님께 털어 놓으면서 하소연할 때, 주님께서 내 마음을 아시고 어루 만져 주시겠지...

그 분을 만날 그 날을 생각할 때, 내 안에 모든 어려움을 이길 힘이 솟는다. 주님만을 의지하며, 주님께만 모든 것을 걸어야지...

What I think you were this year

하연이가 가족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생각하며 올해 그들이 자신에게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단어들로 표현했다.
평가가 많이 짜긴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매우 예리한 것 같다...
맨 위부터 예연, 아빠, 엄마 순으로 카드를 세 장 작성했다.


"예수 인도 하셨네..."

찬송가 434장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내주안에 있는 긍휼 어찌 의심하리요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위로 받겠네 무슨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 하리라 무슨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 하리라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어려운일 당한때도 족한 은혜 주시네 나는 심히 고단하고 영혼 매우 갈하나 나의 앞에 반석에서 샘물나게 하시네 나의 앞에 반석에서 샘물나게 하시네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그의 사랑 어찌 큰지 말로 할 수 없도다 성령감화 받은 영혼 하늘나라 갈때에 영영 부를 나의 찬송 예수 인도하셨네 영영 부를 나의 찬송 예수 인도하셨네 아-멘

내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이 찬송을 부를 수 있다면...
그분의 신실하심을 내 인생으로 체험할 수 있다면...
그것보다 더 큰 복이 있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그 신실하신 인도하심을 정말로 체험하기를 원한다면, 그분의 인도하심에 내 인생을 걸어야 한다. 하나도 남김없이 온전히 그분께 의지해야하고, 그분만이 내 인도자가 되시도록 맡겨 드려야 한다.
그것은 그분께, 그분의 말씀에 내 인생을 온전히 의탁하는 것이다. 그 외에는 그 어떤 것에도 내 삶을 의지하지 않아야 한다. 모든 것을 끊고, 그분께 100% 의지할 때, 분명히 그분은 나를 인도하신다. 그것도 신실하게... 절대로 나를 실망시키지 않으시며...

마지막 날, 천국으로 달려가며 나는 외치련다.
"예수 인도하셨네! 예수 인도하셨네!"

진리 하나...

누군가에 대한 정죄가 내 안에 있다면,
누군가의 부족한 부분들이 내 눈에 잘 보인다면,
누군가로부터 상처를 잘 받는다면,
그것은 내가 주님으로부터 그 만큼 멀어져 있다는 증거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다.

주님께 더 가까이 다가갈수록,
내 죄악된 모습이 더 분명히 보이고,
내 부족한 부분들이 더 선명하게 보이고,
내가 주님과 다른 사람들에게 준 끔찍한 상처가 보이기 시작하기 때문에,
남들에 대해서 신경 쓸 겨를이 없다.
너무나 심각한 내 자신의 죄악에 견주어 볼 때, 다른 사람의 것은 보잘 것 없이 작다는 것을 분명히 볼 수 밖에 없다.

그것이 진리이다.

영원한 죄인...

(교회 게시판에 올린 제 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내 모든 죄악을 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 능력은 나의 과거, 현재, 미래의 죄를 모두 처리하신 능력이며, 그 십자가를 믿음으로 받아들인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믿음의 가장 기초에 해당하는 이 사실은 믿는 자들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죄인이었던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용서함을 받았고, 이제는 만왕의 왕이시고 절대적으로 선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의롭다함을 받는 가운데, 천국을 소유한 자로 살게 된 것은 이 세상 그 어느 복보다도 큰 복임이 틀림이 없습니다.

용서받은 자. 죄사함을 받은 의인...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타이틀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죄문제는 완전히 해결된 것일까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서 진정으로 거듭난 영혼에게 "죄책감"은 있을 수 없는 것일까요? 신앙생활을 오래 할수록 자신의 죄인됨에 대한 고백이 점차 사라질 수 밖에 없을까요? 죄문제는 십자가에서 해결 되었으니, 이제는 다른 문제, 혹은 하나님을 믿는 긍정적인 면에 집중해야만 할까요?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은 "예"와 "아니오"가 동시에 답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죄책감"이라는 단어 때문입니다. 죄책감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율법의 정죄로 인한, 사망으로 이끄는 죄책감입니다. 이 죄책감은 사탄이 이용하는 죄책감이며, 이로 인해서 우리는 고통당하며, 결국 영원한 심판 가운데 처할 수 밖에 없는 죄책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율법에서 오는 정죄의 저주를 해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1-4)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은 정죄의 문제, 죄책감의 문제, 결국 죄문제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자유인--죄의 정죄로부터의 자유--입니다.

두번째 죄책감은 율법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이것은 다시 두 가지의 경우가 있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인이 죄에 노출되었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경고와 회개의 메시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마암아 죄로부터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인도 죄의 유혹에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그로 하여금 돌이키도록 말씀하십니다. 때로는 고통스러울 정도로 우리를 징계하시는 방법으로 말씀하시기도 하고, 때로는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모습으로 안타까와 하시기도 하는 모습으로 다가 오시기도 하지만, 그 목적은 하나입니다. 그것은 죄의 자리를 떠나서 아버지의 은혜의 자리, 거룩의 자리로 다시 돌아오라는 메시지입니다. 율법의 정죄에서 나오는 죄책감이 오히려 자신에 대해서 절망하게 하고, 자신을 책망하는 가운데 정죄의 사슬에 더 묶이게 함으로써, 더 확실한 마귀의 종이 되게하는 효과가 있다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정죄는 죄의 자리를 속히 떠나서 다시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나아오도록 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두번째는 내가 특별히 죄를 짓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 앞으로 점차 나아감으로써 생겨나는 죄책감(죄인식)입니다. 그것은 영적으로 더욱 성숙해 가는 가운데 빛이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때, 그 빛이 더 강렬해짐으로 인해서, 그 전에는 보지 못했던 내 자신의 죄된 모습을 보게 되기 때문에 생기는 죄책감입니다. 그전에는 빛이 약해서, 혹은 빛을 가리고 있는 부분이 있어서 드러나지 않았던 내 존재의 지저분한 모습들이 서서히 더 확실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런 죄책감은 영적으로 성장하지 않았다면, 결코 볼 수 없었던 것들, 그 전에는 결코 죄라고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서, 하나님을 더 깊이 경험하고, 그분을 더 알아감으로써, 이제는 죄라고 인식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죄인식은 나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더 확실하게 무릎을 꿇도록 인도합니다. 자신의 죄인됨을 인식할수록, 십자가가 위대해져 보이고, 그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사랑의 크기가 더 커보이고, 그런 나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위대해져 보입니다. 이런 죄인식은 나로 하여금 내 자신을 더 내려 놓게 하고, 주님을 붙들게 하며, 주님께만 소망을 두게하고, 따라서 보다 더 확실하게 주님의 종으로서 자신을 드리게 됩니다.
이런 죄인식은 내가 하나님을 더 깊이 경험하고 있다는 증거이며, 내 안에 생명이 있으며 자라고 있다는 증거이며, 내 영적 감수성이 더 발달하여 예민해져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믿음이란 역설의 연속입니다. 내가 그리스도께 종이 된 정도 만큼, 자유를 누립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어야만 생명이 내 안에 역사합니다. 내가 내 삶을 포기할 때, 진정으로 내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내가 쥐고 있는 모든 것을 내려 놓을 때, 진정으로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됨을 인식한 만큼, 내 삶은 거룩해져갑니다. 수많은 위대한 영적 선배들이 그들의 신앙이 성숙해 갈수록 자신의 죄인됨을 더 처절하게 고백하고, 죄와 더 치열하게 싸웠던 것은 그들의 삶에서 죄의 절대량이 많아져서가 아니라 바로 그들이 주님 앞으로 한 걸음씩 나아갔기 때문입니다. 그 가운데 그들의 삶은 더욱 정결해져가고, 더욱 거룩해져가는 것입니다.

영적인 성숙, 다시 말해 빛이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성장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주님 앞으로 불려갈 때까지 지속되는 과정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 "영원한 죄인"인 삶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진정한 축복입니다.

인생에서 내가 가장 성취하고 싶은 것...

"The things I had fought for and burned my midnight oil for had failed me. Success--I despised it. Recognition--it was dead ashes. Society, men and women above the ruck and muck of the waterfront and forecastle--I was appalled by their unlovely mental mediocrity. Love of woman--it was like all the rest. Money--I could sleep in only one bed at a time, and of what worth was an income of a hundred porterhouses a day when I could eat only one? Art, culture--in the face of the iron facts of biology such things were ridiculous, the exponents of such things only the more ridiculous."--Jack London

Jack London은 그 짧은 생애를 살면서, 세상의 성공을 위해 초인적으로 노력했던 사람이고, 그로 인해서 세상의 명예와 부를 누렸던 사람이다. (socialist로서의 그의 신념과는 상반되게) 그는 명예와 부와 여자들 외에는 아무 것에도 가치를 두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그의 소설은 바로 그것을 얻기 위한 전략적 수단에 불과했다.
그가 말년에 고백한 고백이 바로 위의 글이다. 그 글에서 허무를 느낄 수 있다. 그의 자전적 소설인 Martin Eden의 주인공이 소설을 통해서 유명해진 후, 유람선에서 뛰어내려 자살하는 것처럼, 무지개를 좇아 사력을 다해 달려 온 그 끝에 보이는 허무함. 그 허무 앞에 무너지는 인생을 볼 수 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 3:12-14)
London과는 대조적으로 사도바울의 삶은 그 마지막 순간까지 의미와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삶이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자신이 평생을 바쳐왔던 그리스도의 종된 삶에서 인생의 참 의미를 찾은 사람이었다.

나는 어떤 인생을 살 것인가? 어느 모델을 따라갈 것인가? 세상의 성공여부와 물질의 다소 여부를 떠나서 허무하고 비참한 종말을 맞이할 것인가, 아니면 참으로 의미있고, 소망이 있는 마지막을 맞이할 것인가?

내 인생... 한 번 밖에 없는 이 인생... 이 소중한 인생을 부와 명예와 안락이라는 세상의 신기루를 좇아 사는 어리석은 일에 낭비하고 싶지 않다.
마치 페르시아와의 전투에서 승리를 알리려 마라톤 평야를 죽을 힘을 다해 질주한 뒤 아테네 시민들에게 승리의 소식을 알리고 죽었던 한 병사의 전설처럼 살고 싶다. 그리스도 앞에 가는 날, 내 인생의 모든 것을 그분을 위해 소진하여, 그분 앞에 쓰러지는 인생을 살고 싶다. 내 존재의 한 방울까지 아낌없이 그분을 위해 모두 쏟아 붓는 인생을 살고 싶다.

설교말씀

주일... 예배 가운데 선포되는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너무나 관성적으로 말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표현 속에 진리가 있다. 듣는 사람이 인정하건 안하건 간에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주님을 영접하고 난 이후 나는 참으로 많은 훌륭한 설교자들을 만났다. 그리고 그분들을 통하여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영적으로 자라왔다.
사실 "훌륭한" 설교자라는 표현은 왠지 어색해 보인다. 왜냐하면, 그 선포자가 누구인지 상관 없이 예배 때 선포되는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훌륭하다"는 것의 정의가 선뜻 와 닿지 않게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이 "훌륭하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모르겠지만, 나에게 있어서 "훌륭하다"는 것의 정의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가감 없이 있는 그대로 선포되도록 준비된 설교자들을 일컫는다. 사실 그 만큼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선포한다는 것은 모든 설교자들의 과제이며, 쉽지 않은 문제이다. 이것을 결정하는 것은 설교자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담을 만큼 깨끗한 그릇인가와 그 설교자의 관심의 초점이 어디에 있는가이다. 이 두 가지 요소가 진리의 말씀이 성도들에게 잘 흘러가는가 아니면 어느 정도씩 막히면서 흘러가는가를 결정한다.

내가 속한 교회의 목사님... 목사님 당신께서는 본인에게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을 매우 꺼려하시고 좋아 하지 않으시지만 그분의 설교를 들을 때면, 마음 속으로 참으로 깊은 감탄이 절로 나온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 저런 설교를 하실 수 있을까?'

내로라하는 뛰어난 설교자들을 많이 접한 내가 볼 때, 지금까지 내가 경험한 그 어떤 설교자보다도, 목사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흘러나가는 통로로서 거의 막힘이 없다.

사실 지금 내가 다니는 교회에 처음 나오기 시작했을 때, 목사님의 설교는 참으로 지루했다. 설교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예화, 열정, 요점정리, 성도들과의 non-verbal communication 등에는 전혀 신경을 쓰시지 않는 우리 목사님의 설교는 내용은 매우 훌륭했지만, 그 포장이 너무 엉성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몇 달이 지나지 않아서 내가 틀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 자체를 전하는 데 있어서 그런 포장들은 오히려 그 복음의 가치를 떨어뜨릴 뿐이라는 것, 진리는 그 자체로 powerful하며 능력이 있기 때문에 다른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우리 교회 교인들은 누구나 잘 아는 사실이지만, 우리 목사님의 목회철학, 설교철학은 분명하시다. 오직 복음! 오직 복음! 바로 그것이다. 모든 말씀은 복음으로 귀결되며, 모든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로 해석이 되며, 복음이 기반이 된다. 어떤 본문이든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해석의 렌즈가 된다. 그분이 전하시는 어떤 말씀에서도 결코 복음이 빠지는 일은 없고, 복음이 중심이 되지 않는 경우는 없다. "복음"이라는 단어가 많다는 것이 아니고, 복음의 내용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절대 빠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목사님께서 바로 그런 철학 아래에서 오로지 하나님의 진리에 의지하며 그것을 포장없이 그대로 전달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이후로 주일 설교 말씀은 나에게 생명이 되었고, 그 어느 것보다 귀한 것이 되었다.

내가 청년부를 섬기게 되고, 매주 청년부에서 말씀을 전하게 되면서, 나는 내심 목사님처럼 말씀을 전해보리라 다짐했고 희망했었다. 하지만 3년이 조금 지난 지금... 내 스스로 느끼는 것은 내가 원하는 목사님의 설교에 그 발치 만큼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런 포장없이 복음의 진리를 전한다는 것이 생각같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것이 노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체험적으로 깨달으면서, 나는 우리 목사님을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특별하게 사용하시고 계시다는 것을 절절히 느끼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하시지 않으시면, 그런 설교가 나올 수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되면서, 주일 설교를 대하는 내 마음 자세가 확실히 달라졌다. 물론 그 전에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고 귀기울여 들은 설교말씀이었지만, 이제는 완전히 납작 엎드리는 마음으로, 천상에서 울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을 수 밖에 없게 되었다. 내 자신이 설교자가 되면서, 진정으로 그 설교의 의미를 알게 된 것이다.

오늘도 주일 말씀을 들으며,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나를 사로잡으시는 것을 느꼈다. 그분의 진리에 압도되어 내 자신을 하나님께 내어드리는 경험을 했다. 담백하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전하는 설교자와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나는... 참으로 복받은 자이다...

세상 속에 거하며 세상의 지식과 세상의 것들을 습득해야 하는 이유...

오늘 아침에 밥을 먹으며 참으로 오랫만에 TV를 켰다. CNN 뉴스를 보고 있는데, 내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Ray Comfort가 인터뷰에 나왔다. 뉴스 내용은 다윈의 "종의 기원"에 기독교 단체에서 다윈의 진화론을 반박하는 긴 서문(Ray Comfort가 썼다)을 붙여서 책으로 발간했고, 그것을 대학가에서 무료로 나누어 주고 있다는 것이다.

진화론을 전혀 믿지 않는 나로서는 참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과학을 가장한 신화와 허구에 불과한 이론을 진리인 것처럼 가르치는 현대의 세태에 하나님의 창조에 의한 인간과 만물의 존재를 주장하며 그것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은 적절해 보인다.

하지만 문제는 Ray Comfort의 서론이 학문적으로 충분히 검증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실 나는 아직 읽어보지 않았고 뉴스만 들었기 때문에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그러나 몇몇 전문가들의 의견을 통해서 볼 때, Comfort의 주장이 비판에 노출될만 한 것 같다.
뉴스에서 나오는 전문가들의 말로 판단해 볼 때, Comfort는 다윈의 진화론을 순수 과학적인 접근법으로만 비판한 것은 아닌 것같다. 그의 진화론이 사회, 정치적으로 미친 영향에 대해서 논하고 그것에 대해서 신랄한 비판을 가한 것으로 보인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과학적 진화론과 Social Darwinism을 혼동하고 있는 것을 보인다. 사실 현대 사상계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다윈의 진화론이 아니라 Herbert Spencer의 Social Darwinism이다. 둘은 어느 정도는 관계가 있지만, 상당히 다른 것이며, 따라서 다른 접근법을 사용해야 한다. Comfort는 이 점을 간과한 것 같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 싶어하는 요지는, 세상의 학문과 사상체계는 세속적이고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지 않기 때문에 마땅히 비판받아야하고, 진리이신 말씀이 그 가운데서도 선포되어야 하지만, 그것들을 만만하게 봐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자칫 무모하게 비판을 하다가는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돈키호테와 같은 꼴이 되어버리고 말고, 또한 세상의 웃음거리가 됨으로 기독교가 마치 천박하고 경박한 사상인 것처럼 인식되어버릴 수 있다.
어떤 주장과 사상에 대해서 효과적으로 반박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주장하는 자들만큼, 아니 그들보다 더 그 주장과 사상에 대해서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그들의 논리와 언어와 가정과 무엇보다도 그들 가운데서 오고가는 대화의 장(discourse)혹은 paradigm에 대해서 철저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나서 그들에게는 새로운 진리의 말씀에 근거한 비판이 "적절하고 설득력 있게" 가해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은 가볍게 거부해 버리고 만다.

그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학문과 지식을 배워야 하는 이유이다. 그들 중의 하나로 인정받아야 하는 이유이다. 철저히 그들이 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적어도 학문에 있어서 그들 중 하나로 인정받고, 그들 가운데서 실력을 인정받지 않는다면, 아무리 말씀에 근거한 주장과 비판을 가해도 그들은 가볍게 무시하고 만다.

지난 주일에 이 문제로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한 지체와 깊이 있게 대화를 나누었다. 신앙과 학문(특히 인문학과 사화과학)이 언뜻 보기에는 별개의 것으로 보이고, 믿음이 "좋은" 사람들은 세상의 지저분하고 더러운 학문 속을 발을 담그지 말고 아예 떨어져 있어야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는 그 영역조차도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영역이 되어야 함을 믿는다. 그곳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깃발을 꼽아야 하는 자들이 바로 그 학문에 종사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믿는다. 그것을 위해서 우리는 열심히 공부해야 하며, 그들과 대화가 되고, 그들의 인정을 받는 정도까지 학문적 진보를 이루어야 한다. 바로 그 때에야 비로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학자,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지성인의 목소리를 세상을 향하여 낼 수 있는 것이다.

유행을 보며...

나는 유행에 매우 둔감한 사람이다. 유행은 아예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 그것은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한 번 입은 옷은 다 떨어지거나, 아내에 의해서 버려질 때까지 입는다. 나에게 편하면 그만이지, 남들이 어떻게 입고 다니는지는 내 관심 밖이다.
그런데 올 해는 유난히 캠퍼스의 여학생들의 유행이 눈에 들어온다. 부츠차림에 몸에 딱 달라 붙는 바지를 입는 것(뭐라고 부르는지 모르겠다)... 하연이의 언니 뻘되는 어린 여학생들을 보면서 '내 딸들이 곧 저렇게 입고 다니겠지'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여성들, 특히 젊은 여성들은 유행에 매우 민감한 것 같다. 그 유행을 주도하는 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들에게 매년 같은 스타일의 옷을 입는 것은 유행에 뒤떨어지는 것이다. 물론 유행은 순환하기 때문에 유행이 지난 몇 년 뒤에 약간 바뀐 스타일로 다시 유행하기도 하지만, 매년 지속되는 변화의 트렌드에 여성들은 매우 민감한 것 같다.

여성들의 옷차림처럼 인생과 환경은 늘 변화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도 늘 바뀐다. 작년에 나에게 원하셨던 것을 올해도 동일하게 원하시지는 않는다. 그분은 시간과 관계없이 돌아가는 원리나 법칙이 아니라 살아계신 인격이시다. 작년에 내가 한 행위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더라도, 그 동일한 것을 그분을 오늘도 기쁘시게 할 수는 없다. 늘 그분의 마음과 뜻을 살피며, 그분이 "지금"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해야 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물론 하나님께서 영혼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시고, 하나님을 진정한 하나님으로 인정받는 것을 기뻐하시는 큰 틀에 있어서는 결코 변함이 없다. 그렇지만 구체적인 삶의 개별적인 일에 있어서는 변화할 수 밖에 없다.

신앙이 관성에 빠지고 제도화 되어가면서 타락하게 된다. 습관과 타성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그 안에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사랑과 경외가 사라지고, 자신의 욕심이라는 우상으로 가득차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늘 하던 대로 신앙생활하는 것은 타성 가운데서 정작 그분을 놓치는 길로 가는 것이다.
마치 젊은 여성들이 유행에 매우 민감하며, 그 유행이라는 바람결에 실려 가듯이, 변화되어가는 하나님의 뜻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는 나의 믿음이고 싶다. 그곳에 나의 영적 안테나를 한 껏 치켜 세우고 있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 3:5)

매일 아침.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도서관의 내 방으로 들어 와서 가장 처음하는 것은 신발을 벗고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그것은 출애굽기에서 모세에게 이르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계시는 거룩한 곳임을 인정하는 것이며, 종된 자로서의 나 자신을 하나님 앞에 인정하는 뜻에서 신발을 벗는 것이다.
이 말씀은 내가 청년부 부장으로 섬기면서 처음으로 전했던 말씀이었다. 하나님 앞에서는 항상 종된 자세로 있는 것이 나의 소망이었고, 각오였다.

요즘은 기도를 한 뒤에 컴퓨터를 켜면 바로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라는 찬양이 나온다.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나는 이 길을 가리라."

내 삶의 가장 큰 화두는 "종됨"이다. 그분께 완전한 종이 되고 싶은 열망이 나에게 가득하다. 무엇을 명하시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만 하다면, 군소리 없이, 두 말 없이, 순종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 나의 소원이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 날까지 그 모습 그대로 주님의 길을 가고자 하는 소망이 나에게 있다.

그런데...
최근 언제부터인가 그 종됨의 바른 자세를 잃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명하셨기 때문에 청년부의 부장으로 섬기는 것을 분명히 잘 앎에도 불구하고, 나 같이 부족하고 자격없는 자를 굳이 그 자리로 부르신 하나님께 대해서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원망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또한, 내 믿음의 동역자들, 내가 그토록 사랑하고 신뢰하는 동역자들을 하나씩 둘씩 다른 곳으로 옮기시는 것을 보면서, 내 속 깊은 곳에서 외로와 하고 힘들어 하는 것을 발견한다. 그들을 다른 곳으로 옮기시는 것에 명백하게 항거하지는 않지만, 그리고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 깊은 곳에서는 하나님을 원망하는 마음이 있다.

종이라고 감정이 없겠는가? 종이라고 자신의 생각과 소망이 없겠는가? 하지만, 진정한 종이라면, 주인의 마음과 주인의 계획을 마치 자신의 것인 양 생각하고, 완전히 따르는 자이다.

요즘... 몇 가지 다른 것들과 함께, 내 가장 깊은 곳에서 나를 흔들리게 하고 힘들게 하는 그 하나님에 대한 원망은... 내가 어떤 자인지를 잘 보여준다. 말과 수사와 스스로의 생각이 어떻든지간에, 나는 여전히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자세를 갖추고 있지 못하고 있고, 하나님에 대해서 여전히 범죄하고 있는 자인 것이다.
사실 그것 또한 스스로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에 더 힘든 것을 느낀다. 아예 모른다면, 원망하고 말텐데...

오늘 아침. 이렇게 완악하고 부족한 나에게 하나님께서는 QT 찬송을 통해서 위로하신다.

363장
내 모든 시험 무거운 짐을 주 예수 앞에 아뢰이면 근심에 싸인 날 돌아보사 내 근심 모두 맡으시네
내 모든 괴롬 닥치는 환란 주 예수 앞에 아뢰이면 주께서 친히 날 구해주사 넓으신 사랑 베푸시네
내 짐이 점점 무거워질 때 주예수 앞에 아뢰이면 주께서 친히 날 구해주사 내 대신 짐을 져주시네
마음의 시험 무서운 죄를 주 예수 앞에 아뢰이면 예수는 나의 능력이 되사 세상을 이길 힘주시네

[후렴] 무거운 짐을 나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질때 불쌍히여겨 구원해줄 이 은혜의 주님 오직 예수

완악한 종과 자비로우신 주인... 나에게 다가 오셔서 토닥거리시며 위로하시는 하나님...

언제나 나는 그 자비로우신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 합당한 종의 모습으로 설 수 있을까?

仰不愧於天

仰不愧於天 俯不作於人 二樂也(앙불괴어천 부부작어인 이락야)

"맹자"라는 책에 있는 君子三樂(군자삼락) 중 한 구절이다.
우러러 하늘에 부끄러움이 없고, 구부려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는 것이 군자가 누리는 세 가지의 즐거움 중 하나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었던 윤동주의 서시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김용의 선교사님께서 자주 말씀하시는 것처럼 "죄의 짱아치"였던 나를 주님께서 십자가의 보혈로 사해 주시고, 이제는 죄에서 깨끗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죄와 상관 없는 자로, 죄를 이기는 자로 불러 주신 은혜를 받은 자로서, 맹자의 이 구절은 나에게 참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거룩을 향한 소망이 있고, 거룩을 향한 변화는 있지만, 아직도 내 안에 도사리고 있는 무시무시한 죄성과 죄의 유혹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내 자신을 본다. 주님을 따라 살고 싶고, 주님을 향한 열망이 있고, 주님께 내 모든 것을 드리고 싶은 마음 한 구석에, 소돔성을 못내 아쉬워하며 힐끗 뒤돌아보는 롯의 아내의 아쉬움이 있다.
죄를 짓는 것이 끔찍이 싫지만, 죄와 지속적으로 싸우지만, 그것을 완전히 이기지 못하는 내 자신을 본다.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는데...
하나님께서 내 안을 모두 다 아시는데...
그리고 내 안에서 탄식하시는데...

仰不愧於天이 아니라 仰愧於天이다. 하나님께 부끄러울 따름이다.

주님을 향한 열망, 경건의 연습, 기도, 말씀, 거룩, 그분을 향한 사랑과 헌신, 나의 십자가, 나의 죽음...
이 모든 것이 헛된 관념이나 구호가 되지 않게하는 유일한 방법은, 내 자신이 완전히 주님께 드려지는 것 뿐이라는 것, 그것이 잠시라도 되지 않으면, 마귀는 나를 향해서 우는 사자와 같이 달려든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는다.
내가 주님 안에서 완전히 살지 못한다면, 나는 아직 죽어 있는 것이다.
주님으로 24시간을, 단 일 초의 공백도 없이 완전히 채우지 않으면 안된다.

주여!!!

하나님께서 주인이 되시는 공동체?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 것은 성경에 선포된 것이고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내가 속한 믿음의 공동체의 머리도 그리스도가 되셔야 한다.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주인이 되셔야 한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내 교회, 내 신앙 공동체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다고 해서, 모여서 찬양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듣고 공부한다고 해서, 그분이 공동체의 주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래야 할 것 같은데... 당연히 주님의 공동체여야 할 것 같은데... 실상 이 땅 가운데 있는 믿음의 공동체의 모습을 볼 때, 과연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인되신 것이 맞는지 의심이 들 때가 "정말" 많다.

진정으로 그리스도께서 주인이 되신 공동체라면 어떤 모습일까? 누가 보든지간에,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 당신께서 당신의 공동체라고, 당신이 주인되시는(정확히 말해서 주인대접 받으시는) 공동체라고 인정하시는 공동체는 어떤 특징들을 가지고 있을까?
내 스스로 자주 질문하고 묵상하지만, 사실 나도 정확하게 잘 모르겠다. 하지만 묵상하는 가운데 적어도 한 가지 확실하게 깨달은 것은 하나님께서 주인대접을 받으시는 진정한 주님의 공동체는 주님의 종들이 사역하는 곳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섬기는 모든 자들이 철저하게 주님의 뜻을 구하고, 그 뜻만을 구하는 가운데 순종하는 공동체라는 것이다.
섬기는 자들이 진정으로 종이 되어 있을 때만 주님은 주님으로 대접받으실 수 있다. 이 점은 신앙공동체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점이다.

최근에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 영적 리더들을 선발하고 있다. 절차는 간단하다. 현재 영적 리더로 섬기고 있는 지체들이 일정기간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구한다. 그리고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부르신다는 확신이 있는 지체들만, 부장인 나에게 추천한다. 그 추천을 받는 나 또한 일정 기간 동안 기도하는 가운데 추천된 지체들이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자들인가를 점검한다.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서 부르신다는 확신이 없다면 리더로 설 수 없다. 부장인 내가 일정기간 기도하면서 구하는 가운데 분명한 확신이 드는 지체들에게 개별적으로 통보하여 그들로 하여금 다시 일정기간 동안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여쭤보게 한다. 그 기간 동안 해당 지체들은 그 어느 누구에게도--부장인 나를 포함해서--그 사실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없고, 상의할 수 없다. 순전히 개인이 하나님과 독대하는 가운데, 하나님으로부터 분명한 부르심의 확신이 있어야만 한다. 그 부르심의 확신이 있는 사람만 영적 리더로 섬기겠다고 답변할 수 있다. 부장인 나에게 통보하는 것으로 모든 절차가 끝난다. 그 어느 경우에도 설득이나 권유는 없다.

이 프로세스는 내가 부장으로 섬기면서 정착시킨 것이다. 이 프로세스의 핵심은, 하나님의 뜻이고, 그에 대한 순종이다. 그것은 우리 공동체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믿음의 고백이다.

현재 기존의 리더들이 해야할 일들이 모두 끝나고 이제는 내가 기도하는 차례다. 청년부를 섬기고 있는 부장으로서 가장 어려운 것 중의 하나는, 이 과정 중에서 내 생각, 판단, 경험, 선호함을 내려 놓는 것이다. 누군가를 미리 생각하거나, 필요한 리더의 숫자를 미리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데 있어서 매우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내 안에 먼저 내려 놓는 작업이 되지 않으면 기도할 수가 없다. 사실 기도의 많은 부분은 나로 하여금 내 생각을 내려 놓도록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다.
만약 내가 보기에 좋은 사람, 내가 보기에 할 만한 사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리더로 선발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공동체에서 일할 하나님의 종을 선발하는 것이 아니라, 내 사람을 심는 것이다. 그렇게 될 경우 이 공동체는 더 이상 하나님의 공동체가 아니라 내 공동체가 된다. 내가 사역하기에는 편할지 모르지만, 이미 하나님 앞에 큰 죄를 짓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할 수가 없게 되어버리고 만다. 그렇게 될 경우, 섬기는 사역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이 되어버릴 수 밖에 없고, 그렇다면 그 엄청난 짐을 나 혼자 지고 가야 한다. 그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나는 이 공동체를 섬기는 짐을 질 능력이 없는 자라는 것을 너무 잘 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직접 일하셔야만 하고, 나는 그분의 종으로서 시키시는 대로 할 뿐이다. 나에게는 이 공동체에 대한 책임이 없다. 그분이 책임을 지시고, 나는 비서로서, 종으로서 그냥 그분을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나는 지금까지 그런 자세로 공동체를 섬겨왔다.

나는 내가 섬기는 청년부가 내 공동체가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래서 내 것을 내려놓는 작업을 철저하게 진행하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물론 인간이기 때문에 100% 그렇게 될 수는 없겠지만, 최대한 내려 놓는 가운데, 주님의 뜻을, 내 시각으로 왜곡되지 않은 순전한 뜻을, 받기를 간절이 원한다.

늘 그렇듯이 내 것을 내려 놓는 것은 고통이 수반된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내가 져야할 나의 십자가이다. 그리고 사실 그것만이 내가 우리공동체를 위해서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그것만 제대로 된다면,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다 하신다. 그분이 주인이시기 때문에... 내가 지는 십자가를 통해서 주님이 우리 공동체의 주인으로 인정될 수만 있다면, 나는 기쁘게 그 십자가를 지겠다.


리더를 선발하는 이번 프로세스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직접 세우시는 리더들이 세워지기만을 간절히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