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를 격노케 말찌니...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말찌니 낙심할까 함이라(골 3:21)
Fathers, do not exasperate your children, so that they will not lose heart.(NASB)
내가 평생동안 지금은 돌아가신 아버지께 가졌던 가장 서운한 것이 있다면, 어렸을 때의 한 사건 때문이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 정도 되었을 때였다. 어느날 오후에 학교에서 집에 돌아 왔는데,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냥 집에 들어서는데, 바닥에 아버지의 수첩이 떨어져 있는 것을 봤다. 평소에 아버지께서 수첩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을 알기 때문에,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것을 그대로 두면 안 될 것 같아서, 내 책상 서랍에 잘 보관해 두었다. 저녁에 아버지께서 오시면 가져다 드리고 자초지종을 설명드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친구분들과 한 잔을 하셨는지 그날 따라서 아버지는 늦게 오셨다. 아버지를 기다리다가 그냥 잠이 들었다. 한참을 자고 있는데, 느닷없이 몸이 아파왔다. 깨어보니 아버지께서 나를 무작정 때리고 계시는 것이었다. 자다가 얼떨결에 얻어 맞았는데, 나중에 왜 때리시는지를 여쭤보자, 내가 아버지의 수첩을 내 서랍에 숨겼다고 오해하시고, 화가 나서 때리시는 것이었다. 내 평생 동안 부모님께 거의 맞아본 적이 없었는데, 일생을 다해 얻어 맞았던 것 보다 더 많이 맞았다. 어머니께서는 옆에서 아버지를 말리고 계셨지만, 아버지는 단단히 화가 나셨던 모양이다. 그 수첩에는 그날 아버지의 사업을 위해서 필요한 모든 정보가 들어 있었는데, 수첩이 없어서 많은 어려움을 겪으신 것 같았다.
일단 늘씬 얻어 맏고, 아버지의 화가 좀 풀리셨을 즈음에, 나는 자초지종을 이야기 했다. 아버지는 그 이야기를 듣고도 화를 그치지 않으셨다. 하지만 더 이상 때리지는 않으셨다. 내 기억으로는 내 볼에 입을 맞추고 볼을 비비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버지의 까칠한 수염의 감촉이 아직 내 볼에 남아 있는 것을 보면...
하지만 아버지는 나에게 사과하지 않으셨다. 미안해 하신 것은 이해하지만 본인의 잘못을 인정하고 나에게 미안하다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나는 그것으로 인해 분노했고,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그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지만, 부당하게 당했다는 그 마음 때문에... 그 상처가 깊었던 모양이다. 아버지께서 미안하다는 말씀 한 마디만 하셨다면, 그렇게 되지 않았을텐데... 아버지에 대해서 다른 서운한 것은 거의 기억나지 않지만, 그 때의 그 분노는 여전히 나에게 남아 있다. 이제는 그것에 대해 아버지와 이야기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을 키우는 아버지가 된 지금... 나는 아이들을 인격체로서 존중하고 대하는 것이 쉽지 않음을 경험한다. 아이들은 아이들일 뿐... '뭘 안다고...'라고 가볍게 생각하고 넘어가버리기가 참 쉽다는 것을 느낀다. 하지만 아이들도 지각이 있고 생각이 있다. 부모가 부당한 행동을 하고도 자신에게 충분히 사과하지 않는다면, 그 아이들은 내면에 분노를 쌓게 된다. 성경에서 자녀를 격노케 하지 말라는 것은 아이들을 충분한 인격체로서 인정하고, 그 아이들을 부당하게 대우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나는 아이들을 키우면서 항상 이 말씀을 기억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아이들이, 비록 완전히 자란 성인은 아니지만, 인격체이며, 그 자체로서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을 늘 기억하려고 노력한다. 내가 아무리 아이들 때문에 화가 나 있다 하더라도 그 아이들의 인격을 손상하는 말이나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 그들을 훈육하는 과정에서 그들 인격의 핵심을 절대로 건드려서는 안된다는 것이 나의 철칙이다. 그리고 내가 어떤 이유로든지 그들에게 부당한 대우를 했을 때는 반드시 형식을 갖추어 진지하게 사과를 해야 한다는 것도 내가 지키고자 하는 원칙 중이 하나이다.
언젠가 하연이를 심하게 야단친 적이 있었다(무슨 일인지는 구체적으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 평소에는 내가 야단을 칠 때 하연이가 잘 순종하며 순순히 받아 들이는데, 그 때는 유난히도 반발이 심했다. 그로 인해서 내 언성이 높아져 갔고, 나는 매우 권위주의적인 자세로 복종을 요구했다. 하연이는 매우 억울해 하면서 내 힘에 못이겨 내가 원하는 대로 해 주었다. 잠시 후에 내가 잘못 알았음을 알게 되었고, 그로 인해 하연이가 매우 억울해 할 수 있고, 또 그 안에 분노가 자리잡았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연이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아빠가 뭘 잘못했는지, 왜 그렇게 잘못할 수 밖에 없었는지를 설명하고 진지하게 사과하고 용서를 구했다. 또한 하나님께서 아빠의 그 행동을 결코 좋게 보지 않으시고 책망하신다는 것을 하연이에게 알렸다. 착한 하연이는 아빠가 자신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을 보면서 어쩔줄 몰라했다. 그러면서 아빠를 용서해 주었다. 우리를 포옹을 했고, 서로간의 사랑을 확인했다.
어른으로서 아이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이 때로는 체면이 구겨지는 것 같기도 하고, 때로는 그럴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하연이에게 내 잘못을 고백하고, 진지하게 사과를 할 때, 아빠로서의 권위는 더 굳건해진다고 믿는다. 아빠로서의 내 권위는 내 지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진리 위에 서 있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내가 진리 위에 서 있지 못할 때는 그 잘못을 충분히 인정하는 것이 오히려 권위를 더 세우는 일이다.
또한 아이들이 자신이 부당하게 대우 받았다는 느낌 가운데 그 상처를 가지고 오랫동안 고통하는 것은 부모인 나로서도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는 것이다. 내가 내 자존심을 꺾고 내 아이에게 내 잘못을 충분히 인정하고 사과함으로써 그 아이들 영혼이 건강해 질 수 있다면, 내 자존심 따위는 내게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내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내가 못할 것이 무엇인가?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 내가 아버지이지만, 그래서 가장의 권위가 내게 있지만, 아빠인 내가 순종하고 더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아이들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다. 어른인 내가 어린 아이들에게 사과를 하는 것도, 나로 하여금 스스로의 잘못을 깨닫게 하는 것도, 그리고 아빠임에도 불구하고 자식들에게 사과를 하는 것도 모두 아빠의 권위보다 훨씬 높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임을 아이들에게 보여주는 것은 그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와 중요성을 각인시키는 효과가 있다. 아빠도 순종하는 그 하나님의 말씀... 자신의 부당한 대우를 바로 잡아주는 그 공의로운 말씀이라는 인상이 아이들에게 깊게 심어질 때, 나중에 아이들이 그 말씀을 대하는 태도가 분명히 다를 것이라는 것. 그것이 내가 가진 생각이다.
"자녀를 격노케 말찌니..."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이다. 그 말씀에 내가 순종할 때, 나와 내 가족이 살게 된다.
Posted at
오후 6:34:00
아침(새벽)에 경건의 시간을 가져야만 하는 이유 8
8. 아침에는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게 됨에 따라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며 복주실 것을 기도로 간구하는 일에 관심이 있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 잘못을 용서해 주시도록 자비를 구할 뿐만 아니라, 필요할 때마다 도움을 주시도록 은혜를 구하기 위해서도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다. 우리가 주님을 필요로 하지 않은 때가 언제인가? 그러니 기도하지 않고 지나칠 수 있는 아침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는 매일 같이 번제를 드려야 하는 것에 대해 읽어 볼 수 있다(스 3:4).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주님께서 자비롭게 섭리해 주실 것과 성령님께서 은혜롭게 역사해 주실 것을 기도하기 위하여 매일 아침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우리에게 돌보고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으며 그들이 잘되는 데에 관심이 있다. 그렇다면 매일 아침 기도로서 그들을 하나님께 부탁하며, 그들을 하나님의 은혜의 통치와 지휘 아래 두어 효과적으로 주님의 보호하심과 관심 속에 이끌 수 있도록 하자. 경건한 욥은 그의 아이들을 위해 번제를 드리려고 아침 일찍 일어났다. 우리도 그들의 명 수 대로 기도와 간구를 드림으로 그와 같이 해야 한다(욥 1:5). 그리하여 주님의 축복이 우리 가정 위에 머물도록 해야 하겠다.
우리의 생업을 위하여 나가려 할 때, 먼저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일들을 잘 관리해 나갈 수 있도록 지혜와 은혜를 구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하나님 안에 거하며 그 일들을 행하고, 믿음으로 우리가 그 일에 번영하고 성공할 것과 주님께서 그 일에 필요한 힘을 공급하시며 피곤할 때 붙들어 주시고 그 일들을 계획할 때에 인도해 주시며 위로가 되는 결과를 허락하시도록 기도하자. 여행을 하려 할 때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을 바라고,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함께 가 주실 것을 기도드릴 수 없는 곳이라면 가지 말자.
일이 잘되어 갈 좋은 기회가 보이면 그것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우리 손에 달려 있는 모든 것들 즉 기술과 의지와 용기에 열심을 품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함으로써 어리석은 자처럼 되지 않도록 하자. 또한 매일같이 유혹이 뒤따른다. 어떤 것들은 우리가 미리 예견했던 것이 있겠지만, 생각지도 못한 것이 더 많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어떠한 유혹에도 끌려가지 않고 모든 것으로부터 보호받으며, 어떤 일터에 들어가더라도 선을 행하고 그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지혜를 얻고, 좋은 일을 당하고 해를 받지 않는 지혜를 갖기 위하여 하나님께 열심을 품도록 노력해야 한다.
우리에게 어떤 하루가 다가올지 무슨 소식을 듣게 될지, 밤이 되기 전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전혀 생각해 볼 수 없다. 따라서 우리가 미리 볼 수 있는 것뿐만 아니라 미리 볼 수 없는 우리의 의무와 어려움도 은혜 속에서 지날 수 있도록 하나님께 간구해야 한다. 모든 하나님의 뜻에 온전하게 서기 위하여 날이면 날마다 주의 능력을 힘입어야 한다. 그 날의 걱정은 그 날로 충분하므로 내일 일을 걱정하는 것이 어리석은 것처럼, 오늘로서 충분한 오늘의 일을 생각해 보는 것이 현명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이란 모든 선한 말과 선한 일을 위하여 온전히 우리에게 채워 주시며, 모든 악한 말과 악한 일에 대항하여 우리를 온전히 강하게 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공급하는 일일 것이다. 그리하여 밤에 또 다시는 생각하거나 말하거나 행하고 싶지 않은 것들을 하루종일 생각지도 말하지도 행하지도 않게 될 것이다.
8. In the morning we are addressing ourselves to the work of the day, and therefore are concerned by prayer to seek unto God for his presence and blessing. We come, and are encouraged to come boldly to the throne of grace, not only for mercy to pardon what has been amiss, but for grace to help in every time of need: and what time is it that is not a time of need with us? And therefore, what morning should pass without morning-prayer? We read of that which the duty of every day requires, (Ezr.iii. 4.) and in reference to that we must go to God every morning to pray for the gracious disposal of his providence concerning us, and the gracious operations of his Spirit upon us.
We have families to look after, it may be, and to provide for, and are in care to do well for them; let us then every morning by prayer commit them to God, put them under the conduct and government of his grace, and then we effectually put them under the care and protection of his providence. Holy Job rose up early in the morning to offer burnt-offerings for his children, and we should do so to offer up prayers and supplications for them, according to the number of them all (Job i. 5). Thus we cause the blessing to rest on our houses.
We are going about the business of our callings perhaps, let us look up to God in the first place for wisdom and grace to manage them well, in the fear of God, and to abide with him in them; and then we may in faith beg of him to prosper and succeed us in them, to strengthen us for the services of them, to support us under the fatigues of them, to direct the designs of them, and to give us comfort in the gains of them. We have journies to go, it may be, let us look up to God for his presence with us, and go no whither, where we cannot in faith beg of God to go with us.
We have a prospect perhaps of opportunities of doing or getting good, let us look up to God for a heart to every price in our hands, for skill, and will, and courage to improve it, that it may not be a price in the hand of a fool. Every day has its temptations too, some perhaps we foresee, but there may be many more that we think not of, and are therefore concerned to be earnest with God, that we may not be led into any temptation, but guarded against every one; that whatever company we come into, we may have wisdom to do good, and no hurt to them; and to get good, and no hurt by them.
We know not what a day may bring forth; little think in the morning what tidings we may hear, and what events may befall us before night, and should therefore beg of God, grace to carry us through the duties and difficulties which we do not foresee, as well as those which we do; that in order to our standing complete in all the will of God, as the day is, so the strength may be. We shall find that sufficient unto the day is the evil thereof, and that, therefore, as it is folly to take thought for to-morrow's event, so it is wisdom to take thought for to-day's duty, that sufficient unto this day, and the duty of it, may be the supplies of the divine grace, thoroughly to furnish us for every good word and work, and thoroughly to fortify us against every evil word and work; that we may not think, or speak, or do any thing in all the day, which we may have cause upon any account to wish unthought, unspoken, and undone at night.
Posted at
오후 6:04:00
아침(새벽)에 경건의 시간을 가져야만 하는 이유 7
7. 아침에는 밤사이에 우리 마음에 도사리고 있던 헛되고 죄된 많은 생각들을 반성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어 두려워진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들을 용서받기 위하여 아침에 하나님께 기도드릴 필요가 있다. 주기도문에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며”라고 기도드리게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우선적으로 아침에 드리도록 고안된 것 같다. 그 다음에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라고 되어 있다. 분주하게 하루를 지내면서 일관성이 없는 말과 행실로서 죄를 짓게 되며, 부패된 생각과 절제되지 못한 환상 속을 방황하며, 밤의 적막 속에서 죄를 짓게 된다. 미련한 자의 생각이 죄가 된다는 것(잠 24:9)은 분명하다. 미련한 생각은 곧 죄된 생각이며 모든 죄의 시작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너무나 많은 헛된 생각들이 숨어 있다. 그 수가 많기 때문에 그들의 이름은 군대라 한다. 누가 이러한 잘못들을 이해할 수 있는가? 그것들은 우리 머리의 머리카락 수보다도 더 많다. “침상에서 악을 꾀하며 간사를 경영하고 그 날이 밝으면 ...... 그것을 행하는 자”(미 2:1)에 대하여 읽어 보았다. 밤이 되면 수없이 의심하고 염려하는 생각들로 마음이 불안해지고 미혹케 되며, 부정하고 음란한 생각들로 오염되고, 솟구치는 교만한 생각들로 인해 도취되며, 경건한 생각들은 수없이 많은 무례한 것들에 의해 침해당한다. 우리와 함께 눕고 함께 일어나는 악한 생각들이 우리의 마음에 서부터 나오며,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함께 따라 다니는 이 부패된 샘에서부터 이런 샘물이 자연적으로 흘러나온다(전 5:2). 많은 말에 뿐만 아니라 많은 꿈속에도 허다한 허영이 담겨 있다.
매일 밤낮으로 회개할 일을 저지르는 우리가 그것을 새롭게 하기 전에 감히 나갈 수가 있는가? 우리의 마음이 방황하며, 반항과 고집으로 불평하며 타락하기 쉽다는 것을 아시는 주님께 자백하고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평화를 누리며, 우리 마음의 생각들이 용서받을 수 있도록 기도하는 일에 힘쓰지 않겠는가? 자백하여 용서받지 않은 죄를 않고서는 하루의 일과를 안전하게 시작할 수가 없다.
7. In the morning it is to be feared, we find cause to reflect upon many vain and sinful thoughts that have been in our minds in the night season; and upon that account it is necessary that we address ourselves to God by prayer in the morning, for the pardon of them. The Lord's prayer seems to be calculated primarily in the letter of it for the morning: for we are taught to pray for our daily bread this day: and yet we are then to pray, Father, forgive us our trespasses: for as in the hurry of the day we contract guilt by our irregular words and actions, so we do in the solitude of the night by our corrupt imaginations, and the wanderings of an unsanctified ungoverned fancy. It is certain, The thought of foolishness is sin (Pro. xxiv. 9). Foolish thoughts are sinful thoughts; the first-born of the old man, the first beginning of all sin; and how many of these vain thoughts lodge within us wherever we lodge? their name is Legion, for they are many: who can understand their errors? They are more than the hairs of our head. We read of those who work evil upon their beds, because there they devise it; and when the morning is light they practise it (Mic. ii. 1). How often in the night-season is the mind disquieted and distracted with distrustful careful thoughts; polluted with unchaste and wanton thoughts; intoxicated with proud aspiring thoughts; soured and leavened with malicious revengeful thoughts; or, at the best, diverted from devout and pious thoughts by a thousand impertinences: out of the heart proceed evil thoughts which lie down with us, and rise up with us, for out of that corrupt fountain, which, wherever we go, we carry about with us, the streams naturally flow. Yes, and in the multitude of dreams, as well as in many words, there are also divers vanities (Ecc. v. 2).
And dare we go abroad till we have renewed our repentance, which we are every night as well as every day thus making work for? Are we not concerned to confess to him who knows our hearts, their wanderings from him, to complain of them to him as revolting and rebellious hearts, and bent to backslide; to make our peace with the blood of Christ, and to pray, that the thought of our heart may be forgiven us? we cannot with safety go into the business of the day under the guilt of any sin unrepented of or unpardoned.
Posted at
오후 6:52:00
아침(새벽)에 경건의 시간을 가져야만 하는 이유 6
6. 아침에는 하나님에 대하여 새롭게 생각하며 그의 이름을 묵상하며 아니 그렇게 해야 하며, 그것들을 기도 가운데 그분께 올려 드려야 한다. 다윗의 본보기처럼 우리는 우리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밤중에 주를 묵상”(시 63:6)했는가? 다윗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깨어나 여전히 하나님과 함께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입술의 말을 가지고 은혜의 보좌에 나아가 우리 마음의 묵상을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이며 그리하여 그것은 주님께 드리는 향기로운 냄새나는 제사가 될 것이다. 만일 마음에서부터 좋은 말이 우러나오면, 당신의 혀로 하여금 왕 앞에 그것을 쏟아 놓는 필객의 붓과 같이 되게 하라(시 45:1).
하나님과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하나님의 말씀이 있으니, 우리는 매일 아침 성경 말씀을 읽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므로 우리는 밤낮으로 그 말씀을 묵상해야 한다.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우리들을 은혜의 보좌로 인도할 것이며 그곳에서 많은 좋은 것들로 우리를 채워 줄 것이다.
6. In the morning we have, or should have had, fresh thoughts of God, and sweet meditations on his name, and those we ought to offer up to him in prayer. Have we been, according to David's example, remembering God upon our beds, and meditating upon him in the night-watches? When we awake, can we say as he did, We are still with God? If so, we have a good errand to the throne of grace by the words of our mouths, to offer up to God the meditations of our hearts, and it will be to him a sacrifice of a sweet smelling savour. If the heart has been inditing a good matter, let the tongue be as the pen of a ready writer, to pour it out before God (Pa. xlv. 1).
We have the word of God to converse with, and we ought to read a portion of it every morning: by it God speaks to us, and in it we ought to meditate day and night, which, if we do, that will send us to the throne of grace, and furnish us with many a good errand there. If God in the morning by his grace direct his word to us, so as to make it reach our hearts, that will engage us to direct our prayer to him.
Posted at
오후 6:41:00
아침(새벽)에 경건의 시간을 가져야만 하는 이유 5
5. 아침에는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영광을 경배하게 하는 신선한 그 무엇이 있다. 안락과 유익을 주는 하나님의 선물에만 관심을 갖는다면 이는 소견이 좁은 소행이다. 그것뿐만 아니라 주님께는 영광이 되고 전 인류에게는 공통 이익을 주는 그의 섭리 가운데서 더욱더 일반적인 주님의 지혜와 그의 권능들을 관찰해야 한다. 시편 19편은 아침의 묵상이었던 것 같다. 거기서 우리는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관찰해 보게 된다. 그리고 그 빛과 권세로부터 받는 우리들의 이익뿐만 아니라, 하늘에 장막을 베푸시고 기둥을 세우시며 운행하는 법을 세우신 여호와께 그들이 드리는 영광을 보게 된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종들이기 때문에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길을 따라 계속 운행하고 있다. 날이면 날마다 이 사실을 선포하며 밤이면 밤나다 이 지식을 나타낸다. 심지어 천지를 지으신 위대한 창조자이시며 또한 그것을 다스리시는 분으로서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도 드러낸다. 원래의 약정에 따라 빛과 어두움이 규칙적이며 끊임없이 계속되고 회전하면서 교대로 다스리고 있음은, 창조의 역사를 말해 주는 신성한 묵시나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주신 약속(창 8:22), 낮과 밤에 대한 그의 약정(렘 33:20)에 대한 것들을 믿는 우리의 믿음을 확고하게 해 줄 수 있다.
새벽이 얼마나 정확하게 그 처소와 시간을 알아 그것을 지키며, 아침 햇살이 땅 끝과 하늘을 비추며, 그 빛을 받자마자 땅이 변화하여 진흙에 인친 것 같이 되는지를 바라보라(욥 38:12-14). 최근에 어느 훌륭하신 목사님의 이러한 표현을 듣고서 매우 기뻤다. 우리와 같은 비천하고 죄 많은 자들에게 아침 햇살을 비춰 주기 위해 태양은 수천 마일(그가 표현하기를) 여행했다. 하늘을 바라보라. 그리고 성장한 신랑처럼 무한한 기쁨을 안고 그의 방에서 나와 경주하기를 기뻐하는 장사와 같은 태양을 바라보라. 그 빛이 얼마나 밝으며 그 미소는 얼마나 감미로우며 그의 세력은 얼마나 강한지를 살펴보라. 하나님의 영광을 선보하는 이러한 불멸의 자연에 대한 설교자들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적이 없을 것인데 그러한 설교자들의 소리에 메아리치며 즐길 수 있는 아침과 저녁을 만드신 주께 영광을 돌리는 주를 섬기는 자들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면 이는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남들이 무성을 하든지 우리는 이런 목적으로 아침마다 주님께 기도드리고 아침마다 찬송을 드리자.
5. In the morning we have fresh matter ministered to us for the adoration of the greatness and glory of God. We ought to take notice, not only of the gifts of God's bounty to us, which we have the comfort and benefit of, they are little narrow souls that confine their regards to them; but we ought to observe the more general instances of his wisdom and power in the kingdom of providence which redound to his honour, and the common good of the universe. The 19th Psalm seems to have been a morning meditation, in which we are directed to observe how the heavens declare the glory of God, and the firmament sheweth his handywork; and to own not only the advantage we receive from their light and influence, but the honor they do to him who stretched out the heavens like a curtain, fixed their pillars, and established their ordinances, according to which they continue to this day, for they are all his servants. Day unto day utters this speech, and night unto night sheweth this knowledge, even the eternal power and godhead of the great Creator of the world, and its great Ruler. The regular and constant succession and revolution of light and darkness, according to the original contract made between them, that they should reign alternately, may serve to confirm our .faith, in that part of divine revelation which gives us the history of the creation, and the promise of God to Noah and his sons (Gen. viii. 22). His covenant with the day and with the night (Jer. xxxiii. 20).
Look up in the morning, and see how exactly the day-spring knows its place, knows its time, and keeps them: how the morning light takes hold of the ends of the earth, and of the air which is turned to it as clay to the seal, instantly receiving the impressions of it (Job xxxviii. 12, 13, 14). I was pleased with an expression of a worthy good minister I heard lately in his thanksgivings to God, for the mercies of the morning: "How many thousand miles" (said he) "has the sun travelled this last night to bring the light of the morning to us poor sinful wretches, that justly might have been buried in the darkness of the night" Look up and see the sun as a bridegroom richly dressed, and greatly pleased, coming out of his chamber, and rejoicing as a strong man to run a race: observe how bright his beams are, how sweet his smiles, how strong his influences; and if there be no speech or language where their voice is not heard, the voice of these natural preachers, proclaiming the glory of God, it is pity there should be any speech or language where the voice of his worshippers should not be heard echoing to the voice of those preachers, and ascribing glory to him who thus makes the morning and evening to rejoice. But whatever others do, let him hear voice to this purpose in the morning, and in the morning let us direct our praises unto him.
Posted at
오후 6:35:00
아침(새벽)에 경건의 시간을 가져야만 하는 이유 4
4. 아침에 우리가 새로운 자비를 받고 있으니 감사함으로 그를 찬양하도록 해야 한다. 주님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선을 행하시며 그의 축복으로 채워 주신다. 주님께서 날마다, 특히 아침에 우리를 축복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이름을 찬양할 이유가 있다. 아침마다 새로운(애 3:23) 그의 은총의 열매들 즉 우리가 어제와 똑같은 아침을 맞을지라도 그것들은 사라져 버리고 또 다시 필요하게 되므로, 늘 새롭다고 부를 수가 있는 그의 은총의 열매들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는 것처럼, 우리는 언제나 그에게 감사와 경건하고 진정한 사랑을 표현하기 위하여 그에게 나아가야 하며, 단 위의 불처럼 아침마다 새롭게 해야 한다(레 6:12).
편안하게 하룻밤을 지냈다면 그에 대해 감사하기 위해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이 밤이 편안하게 되기 위해서 동시에 얼마나 많은 자비가 베풀어졌는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어 있지 않은 은혜가 우리에게는 허락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머리 둘 곳이 없다. 우리 주님 자신도 그러하셨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 8:20)라고 하셨다. 그러나 우리는 거할 집이 있고 조용하고 평화로운 거처가 있으며, 혹 위풍당당한 집이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누울 침상이 있고, 그것도 따뜻하고 안락하며, 은빛 빛나는 좋은 것으로서 들어가 누우면 마치 시온에 있는 것처럼 편안할 것이다. 세상에서는 귀중히 여기지 않았으나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기던 어떤 성도들은, 사막이나 산에서 혹은 굴 속이나 땅 속의 동굴 속에서 방황하며 지낼 수밖에 없었지만, 우리들은 그렇지 않다. 누울 침상은 있으되 친구들의 병이나 원수의 두려움 때문에 밤을 지새우며 감히 눕지도 누울 수도 없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우리는 자리에 누울 수 있으며 우리를 두렵게 하는 자도 없으며, 창이나 칼의 위협이나 전쟁과 핍박의 두려움도 없다. 자리에 누울 수는 있으나 마음의 고민과 몸의 고통으로 인하여 새벽까지도 이리 뒤척 저리 뒤척하며 잠을 이룰 수 없는 사람도 많다. 그들은 근심스러운 밤을 지새며 뜬 눈으로 밤을 지샌다. 그러나 우리는 자리에 누워서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잠을 잔다. 우리의 잠은 달고 피로를 풀어주며 우리의 고민과 수고 사이에서 쾌적한 안식이 된다. 우리에게 잠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사랑하는 자에게 주시듯 우리에게 잠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한 번 자리에 누워 잠이 들어서는 영원히 깨어나지 못하고 죽음의 잠을 자기도 하며 그들의 침상은 무덤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누워서 잠을 자고 다시 깨어났으며 쉼을 얻고 새롭게 되었다. 우리가 여느 때처럼 누워 자고 깨어나는 것은 여호와께서 우리를 붙드셨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우리를 붙들지 아니하시면 우리는 잠들어 깨어나지 못할 것이다(시 3:5).
상쾌한 아침을 맞이했는가? 빛이 우리에게 즐겁게 느껴지는가? 햇볕 그리고 눈 빛, 이런 것들이 우리 마음을 기쁘게 하는가? 그렇다면 우리의 눈을 뜨게 하시며, 우리에게 아침이란 눈을 뜨게 해 주신 주님께 의무를 다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에겐 아침에 입을 따뜻한 의복이 있다(욥 37:17). 꼭 필요해서라기보다는 치장을 위하여 옷을 갈아 입지 않는가?
그 모든 것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이는 우리의 벌거벗은 것을 가리우기 위해 주신 털과 천으로서 모두 그의 것이다. 그러니 옷을 입고 난 그 아침은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드리기에 적당한 시간이다. 이처럼 많은 이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식탁에 앉아 식사를 하는 것처럼 끊임없이 감사를 드리는지는 의심스럽다. 건강하고 평안한가? 오랫동안 그렇지 않았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병들어 있고 고통받고 있는지를 생각하고, 우리가 과연 얼마나 그러한 것들을 받을 가치가 있는가를 생각해 보며, 특별한 은혜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평상시 끊임없이 베풀어 주시는 은혜에도 감사를 드려야 한다.
화재나 도난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시며 우리가 알고 있는 위험이나 보이지 않는 많은 위험들로부터 보호해 주시는, 우리 자신이나 가족들에 대한 주님의 특별하신 은혜를 경험한 적이 있을지도 모른다. 밤에는 울음이 계속되다가 아침에는 기쁨이 찾아와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입으라고 큰 소리로 외칠지도 모른다. 파괴는 천사가 어쩌면 멀리 나가서 밤중에 날아다니며 흑암 속에서 헤매던 화살을 다른 집 창문에 쏘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집은 그냥 지나쳐 넘어 갔으니 문설주에 뿌려진 언약의 피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한다. 어두움을 조성하여 캄캄하게 하고는 먹이를 찾는 짐승처럼 살금살금 다가오는 이 세상의 어두움의 통치자들과 우리를 대적하는 악한 천사들의 원한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며, 은혜를 베풀고 있는 우리 주위의 착한 천사들의 사역에 대해서도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한다. 모든 영광을 천사들의 하나님께 돌리라.
4. In the morning we have received fresh mercies from God, which we are concerned to acknowledge with thankfulness to his praise. He is continually doing us good, and loading us with his benefits. Every day we have reason to bless him, for every day he is blessing us; in the morning particularly; and, therefore, as he is giving out to us the fruits of his favour, which are said to be new every morning, (Lam. iii. 23.) because though the same we had the morning before, they are still forfeited, and still needed, and upon that account may be called still new; so we should be still returning the expressions of our gratitude to him, and of other pious and devout affections, which, like the fire on the altar, must be new every morning (Lev. vi, 12).
Have we had a good night? and have we not an errand to the throne of grace to return thanks for it? How many mercies concurred to make it a good night! Distinguishing mercies granted to us, but denied to others; many have not where to lay their heads, our Master himself had not; The foxes have holes, and the birds of the air have nests; but the Son of man hath not where to lay his head; but we have houses to dwell in, quiet and peaceable habitations, perhaps stately ones; we have beds to lie on, warm and easy ones, perhaps beds of ivory, fine ones, such as they stretched themselves upon who were at ease in Zion; and are not put to wander in deserts and mountains, in dens and caves of the earth, as some of the best of God's saints have been forced to do, of whom the world was not worthy. Many have beds to lie on, yet dare not, or cannot lie down on them, being kept up either by the sickness of their friends, or the fear of their enemies. But we have laid us down, and there has been none to make us afraid; no alarms of the sword, either of war or persecution. Many lay them down and cannot sleep, but are full of tossings to and fro, until the dawning of the day, through pain of body, or anguish of mind. Wearisome nights are appointed to them, and their eyes are held waking; but we have laid us down and slept without any disturbance, and our sleep was sweet and refreshing, the pleasant parenthesis of our cares and toils: it is God who has given us sleep, has given it us as he gives it to his beloved, Many lay them down and sleep and never rise again, they sleep the sleep of death, and their beds are their graves; but we have slept and waked again, have rested, and are refreshed, we shake ourselves, and it is with us as at other times, because the Lord has sustained us; and if he had not upheld us, we had sunk with our own weight when we fell asleep (Ps. iii. 5).
Have we a pleasant morning? is the light sweet to us, the light of the sun, the light of the eyes, do these rejoice the heart? and ought we not to own our obligations to him who opens our eyes, and opens the eye-lids of the morning upon us? Have we clothes to put on in the morning, garments that are warm upon us (Job xxxvii. 17). Change of raiment, not for necessity only, but for ornament? We have them from God: it is his wool and his flax that is given to cover our nakedness, and the morning when we dress ourselves is the proper time of returning him thanks for it: yet, I doubt, we do it not so constantly as we do for our food when we sit down to our tables, though we have as much reason to do it. Are we in health and at ease? Have we been long so? We ought to be thankful for a constant series of mercies, as for particular instances of it, especially considering how many are sick and in pain, and how much me have deserved to be so.
Perhaps we have experienced some special mercy to ourselves or our families, in preservation from fire or thieves, from dangers we have been aware of, and many more unseen; weeping perhaps endured for a night, and joy came in the morning, and that calls aloud upon us to own the goodness of God. The destroying angel perhaps has been abroad, and the arrow that flies at midnight, and wastes in darkness, has been shot in at others windows, but our houses have been passed over, thanks be to God for the blood of the covenant sprinkled upon our door-posts, and for the ministration of the good angels about us, to which we owe it that me have been preserved from the malice of the evil angels against us, those rulers of the darkness of this world, who, perhaps, creep forth like the beasts of prey, when he makes darkness and it is dark. All the glory be to the God of the angels.
Posted at
오후 6:28:00
아침(새벽)에 경건의 시간을 가져야만 하는 이유 3
아침에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어야 하는 경우나 일들부터 가장 자유로우며 일반적으로 조용하고 한적한 시간을 갖기에 가장 적합한 때이다. 게으른 자요, 네가 어느 때까지 누워 잠을 자겠느냐고 그들의 소명이 부를 때까지도 잠이 덜 깨어 이리 뒤척 저리 뒤척하며 이불 속에 누워 있는 게으름뱅이가 아니라면, 사업일로 바빠지기 전에 그들의 믿음을 위해 아침에 시간을 갖는 것이, 이 세상에서 할 일이 많고 하루 중 일 분이 아쉬운 사람들의 지혜이다. 그래야만이 그들은 그 일을 완전히 할 수 있으며, 더욱 몰두할 수가 있다.
하나님께 경배드리고 싶은 때는, 내적으로 무감각하고 우둔하지 않을 때 즉 외적으로 주의가 산만하고 분요하지 않을 때이다. 사도 바울은 분요함이 없이 주를 섬기는 것에 우리가 얼마나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지를(고전 7:35) 암시해 주고 있다. 따라서 7일 중에 하루는 (이것 또한 한 주일의 첫 번째 날로서, 한 주일의 아침이다.) 거룩한 일을 위하여 예정되어 있으며, 다른 모든 일을 쉬는 날로 되어 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섬기러 산 위에 올라갈 때에 산 아래 모든 것을 남겨 두고 갔다. 그러니 우리는 이생의 문제 속으로 휘말려 들기 전에, 아침 일찍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며 다른 차원의 생에 관심을 가져보자. 우리 주 예수님께서 친히 본보기를 보여 주셨다. 그의 생애는 전적으로 하나님과 인간의 영혼을 위한 일들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날이 밝기 훨씬 전, 무리들이 모여들기 훨씬 전에 일어나셔서 한적한 곳에 나가 기도하셨다(막 1:35).
3. In the morning we are most free from company and business, and ordinarily have the best opportunity for solitude and retirement; unless we be of those sluggards who lie in bed with .yet a little sleep, a little slumber, till the work of their calling calls them up, with, How long wilt thou sleep, 0 sluggard? It is the wisdom of those who have much to do in the world, that they have scarce a minute to themselves of all day, to take time in the morning before business crowds in upon them, for the business of their religion; that they may be entire for it, and therefore the more intent upon it.
As we are concerned to worship God, when we are least burthened with deadness and dulness within, so also when we are least exposed to distraction and diversion from without; the Apostle intimates how much it should be our care to attend upon the Lord without distraction (1 Cor. vii. 35). And therefore that one day in seven (and it is the first day, too, the morning of the week) which is appointed for holy work, is appointed to be a day of rest from other work. Abraham leaves all at the bottom of the hill, when he goes up into the mount to worship God. In the morning, therefore, let us converse with God, and apply ourselves to the concerns of the other life, before we are entangled in the affairs of this life. Our Lord Jesus has set us an example of this, who, because his day was wholly filled up with public business for God and the souls of men, rose up in the morning a great while before day, and before company came in, and went out into a solitary place, and there prayed (Mark i. 35).
Posted at
오후 6:21:00
아침(새벽)에 경건의 시간을 가져야만 하는 이유 2
(아침에 경건의 시간을 가져야 할 여덟 가지 이유)
2. 아침에는 신선하고 생동감이 있으며 최상의 상태에 있게 된다. 밤에 수면과 휴식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영혼이 활기를 되찾은 후,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전날의 피곤함이 잊혀져 있을 때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지만 그의 백성들을 위하여 평소보다 큰일을 하실 대에는 자다가 깨어나신 것으로 표현이 된다.(시 78:65) 우리가 어떤 일이든 훌륭히 하려면 그때는 아침이어야 한다. 따라서 이는 격언이 되어 있다. 그리고 아침이 시적 영감에게 친구(Aurora Musis Amica)가 된다면 은혜에게도 친구가 될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처음 되시는 주님께서 처음 것을 받으셔야 하며, 으뜸 되시는 주님께서 으뜸 되는 것을 받으셔야 한다. 긜고 우리는 어떤 일을 하기에 가장 적합할 때, 가장 필요한 일을 해야 한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영혼이 가장 좋은 상태에 있을 때, 가장 좋은 힘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긜고 그것은 충분히 그만한 가치가 있다. 어떻게 그들이 이보다 더 잘 사용이 되며, 더 좋은 이익을 낳을 수 있겠는가? 내 안에 있는 모든 것으로 주의 거룩하신 이름을 찬양한다고 다윗은 말했으며 그 모든 것으로도 충분치 않다고 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만한 은사가 우리에게 있다면, 그것을 불일듯하게 하기에 가장 적당한 때는, 우리의 영혼이 신선하여지고 새로운 힘을 얻었을 때인 아침이다.(딤후 1:6)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시 57:8) 이처럼 하나님을 붙잡도록 자신을 일깨우자.
2. In the morning we are fresh and lively, and in the best frame. When our spirits are revived with the rest and sleep of the night, and we live a kind of new life; and the fatigues of the day before are forgotten; the God of Israel neither slumbers nor sleeps; yet, when he exerts himself more than ordinary on his people's behalf, he is said to awake as one out of sleep (Ps. lxxviii. 65). If ever we be good for anything, it is in the morning; it is therefore become a proverb, Aurora Musis Amica--The morning is a friend to the muses; and if the morning be a friend to the muses, I am sure it is no less so to the graces. As he that is the first should have the first; so he that is the best should have the best; and when we are fittest for business we should apply ourselves to that which is the most needful business.
Worshipping God is work that requires the best powers of the soul, when they are at the best; and it well deserves them; how can they be better bestowed, or so as to turn to a better account? Let all that is within me bless his holy name, says David, and all little enough. If there be any gift in us by which God may be honoured, the morning is the time to stir it up (2 Tim. i. 6.). when our spirits are refreshed, and have gained new vigour; then Awake up, my glory, awake, psaltery and harp; I myself will awake early (Ps. lvii. 8). Then let us stir up ourselves to take hold on God.
Posted at
오후 6:20:00
말씀 앞에 선 나의 태도...
얼마전 우연히 과거에 내가 쓴 묵상 노트를 본 적이 있다. 묵상 "노트"라고 해서 어떤 공책이나 수첩이나 다이어리 같은 것이 아니고, hwp 파일로 컴퓨터에 저장된 것이다. 나는 가능하면 모든 것을 디지털 포맷으로 보관한다. "묵상모음"이라는 하나의 파일 안에 내 묵상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
오래 전 묵상부터 차근히 읽어 나갔다. 그 글을 쓸 당시 어떤 상태에 있었고, 어떤 마음으로 묵상을 정리했는지 분명하게 생각나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아니 더 많았다.) 묵상할 당시로부터 한 걸음 떨어져서 비교적 객관적으로 과거의 묵상들을 읽어 나가면서 한 가지 발견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내가 말씀을 묵상하면서 평소에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는가에 관한 것이었다. 한 마디로 말하면, 거기에는 내 삶의 모습이 많이 부족했다.
묵상은 일기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내 개인사의 기록이 될 필요는 없다. 아니 내 개인사에 너무 치중하게 되면 "나" 중심의 묵상이 되고 "하나님" 중심의 말씀 묵상이 약해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자중할 필요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하루하루 내가 말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하나님께 시선을 두고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가에 초점을 두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께서 내 "삶"에, 내 인생 가운데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시간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상적인 묵상이란 내 삶에 "적용"된 묵상, 다시 말해 내 삶에 침투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기록이어야 한다. 내 삶의 핵심을 건드리시는 하나님이 드러나야 한다.
성경을 처음 접하던 1991년부터 나에게 성경은 "연구"대상이었다. 늘 성경을 공부하고, 분석하는 훈련을 받아 왔다. 그 훈련은 나로 하여금 성경을 깊이 있게 연구하고, 또 말씀을 전하는 자가 될 수 있도록 도왔다. 하지만... 묵상 시간까지도 그런 자세를 견지한다면 참 문제가 있는 것이다. 묵상은 연구가 아니라 청취의 시간이다. 물론 본문을 분석하는 가운데 contextualize를 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확실히 들을 수 있지만, 그 후에 "나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하고, 그 말씀은 보다 더 구체적인 삶의 문제/현장에 적용되어야 한다. 나에게 있어 아직까지 그 적용부분이 많이 약한 것을 본다. 말씀이 살아 역사하는 것을 강하게 체험하기 위해서는 적용이 핵심이다.
내 스스로에게 훈련을 시킬 필요가 있다. 좀 더 구체적이고, 좀 더 삶에 맞닿아 있는 묵상이 필요하다.
오래 전 묵상부터 차근히 읽어 나갔다. 그 글을 쓸 당시 어떤 상태에 있었고, 어떤 마음으로 묵상을 정리했는지 분명하게 생각나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아니 더 많았다.) 묵상할 당시로부터 한 걸음 떨어져서 비교적 객관적으로 과거의 묵상들을 읽어 나가면서 한 가지 발견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내가 말씀을 묵상하면서 평소에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는가에 관한 것이었다. 한 마디로 말하면, 거기에는 내 삶의 모습이 많이 부족했다.
묵상은 일기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내 개인사의 기록이 될 필요는 없다. 아니 내 개인사에 너무 치중하게 되면 "나" 중심의 묵상이 되고 "하나님" 중심의 말씀 묵상이 약해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자중할 필요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하루하루 내가 말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하나님께 시선을 두고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가에 초점을 두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께서 내 "삶"에, 내 인생 가운데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시간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상적인 묵상이란 내 삶에 "적용"된 묵상, 다시 말해 내 삶에 침투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기록이어야 한다. 내 삶의 핵심을 건드리시는 하나님이 드러나야 한다.
성경을 처음 접하던 1991년부터 나에게 성경은 "연구"대상이었다. 늘 성경을 공부하고, 분석하는 훈련을 받아 왔다. 그 훈련은 나로 하여금 성경을 깊이 있게 연구하고, 또 말씀을 전하는 자가 될 수 있도록 도왔다. 하지만... 묵상 시간까지도 그런 자세를 견지한다면 참 문제가 있는 것이다. 묵상은 연구가 아니라 청취의 시간이다. 물론 본문을 분석하는 가운데 contextualize를 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확실히 들을 수 있지만, 그 후에 "나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하고, 그 말씀은 보다 더 구체적인 삶의 문제/현장에 적용되어야 한다. 나에게 있어 아직까지 그 적용부분이 많이 약한 것을 본다. 말씀이 살아 역사하는 것을 강하게 체험하기 위해서는 적용이 핵심이다.
내 스스로에게 훈련을 시킬 필요가 있다. 좀 더 구체적이고, 좀 더 삶에 맞닿아 있는 묵상이 필요하다.
Posted at
오후 8:29:00
아침(새벽)에 경건의 시간을 가져야만 하는 이유 1
(아침에 경건의 시간을 가져야 할 여덟 가지 이유)
1. 아침은 하루의 첫 부분이다. 따라서 가장 위에 계신 주님께서 첫 번째 자리에서, 처음으로 예배를 받으시는 것은 합당하다. 이방인들도 무엇을 하든지 신과 더불어 시작하라(A Jove Principium)고 말할 수 있었다. 세상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고 우리도 그렇다. 따라서 무슨 일을 시작하든지 그를 함께 모시는 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 이성의 태양이 우리의 영혼에 솟아오르자마자 우리 인생의 나날을 하나님께 드리며 그에게 예배드려야 한다. 아침에 동이 틀 때부터 새벽이슬 같은 청년들이 그리스도 앞에 나가기를 바란다.(시 110:3) 첫 열매와 짐승들의 첫 수확은 언제나 주님의 것이었다. 아침과 저녁기도로서 우리는 알파와 오메가 되시며 처음과 나중되시는 주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와 더불어 하루를 시작하고 마무리 지어야 한다. 그는 시작이며 끝이 되시고 처음이시고 또한 나중이시기 때문이다.
젊어서부터 나를 찾으며, 아침 일찍부터 나를 찾는 자는 나를 만나리라고 지혜가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이로써 하나님께서 마땅히 받으셔야 할 것, 즉 무엇보다 좋은 것을 드리며, 우리가 그를 기쁘시게 하는 일과 그에게 인정받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으며, 우리가 주님을 진실하게 구하고 있음을 나타내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진지하게 행해야 하는 것은 아침 일찍이 하라고 성경에서도 말씀하고 있다.(시 101:8) 부지런한 사람은 아침 일찍 일어난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시 101:8)라고 하면서 다윗은 그 온 마음과 정성으로 주께 헌신함을 표현했다.
1. The morning is the first part of the day, and it is fit that he that is first should have the first, and be first served. The Heathen could say, A Jove Principium-Let your beginning bs with Jupiter. Whatever you do, begin with God. The world had its beginning from him, we had ours, and therefore whatever we begin, it concerns us to take him along with us in it. The days of our life, as soon as ever the sun of reason rises in the soul. should be devoted to God, and employed in his service; From the womb of the morning, let Christ have the dew of thy youth (Ps. cx. 3). The first-fruits were always to be the Lord's and the firstlings of the flock. By morning and evening prayer we give glory to him who is the Alpha and the Omega, the first and the last; with him we must begin and end the day, begin and end the night, who is the beginning and the end, the first cause and the last end.
Wisdom has said, Those that seek me early shall find me; early in their lives, early in the day; for hereby we give to God that which he ought to have, the preference above other things. Hereby we shew that we are in care to please him, and to approve ourselves to him, and that we seek him diligently. What we do earnestly we are said in Scripture to do early (Ps. ci. 8). Industrious men rise betimes; David expresses the strength and warmth of his devotion, when he says, O God, thou art my God; early will I seek thee (Ps. lxiii. 1).
Posted at
오후 6:30:00
아침(새벽)에 경건의 시간을 가져야만 하는 이유 - Matthew Henry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시 5:3)
본문에서 이 선한 일을 하기 위해 특별히 정해 놓은 시간은 아침이다. 그리고 시편 기자는 여기, 즉 아침이라는 것을 특히 강조하고 있는 것 같다. 아침에만 하라는 것이 아니라 아침에 기도로 시작하라는 것이다. 아침 시간을 기도하는 시간의 하나로 삼으라. 율법 아래서는 아침마다 양이 제사로 드려진 것(출 20:39)과, 또한 아침마다 제사장이 향을 피웠던 것(출 30:7)을 알 수 있으며, 매일 아침 주께 감사드리며 찬송하는 자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대상 9:33) 에스겔의 성전에서도 아침마다 정해 놓고 제사 드리는 일이 있었다.(겔 46:13-15) 이것들을 통하여 영적인 제사는 영적인 제사장에 의하여 매일 아침, 아침이 탄생되는 것처럼 어김없이 드려져야 한다는 암시가 분명히 나타나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과 또한 모든 가정의 가장들은 그의 가족과 함께 매일 아침 은밀한 가운데 기도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할 이유들이 충분히 있다.
My voice shalt thou hear in the Morning, O Lord; in the morning will I direct my prayer unto thee, and will look up. (Psalm 5:3)
The particular time fixed in the test for this good work is the morning; and the Psalmist seems to lay an emphasis upon this in the morning, and again in the morning; not then only, but then to begin with; let that be one of the hours of prayer. Under the law we find that every morning there was a lamb offered in sacrifice, (Exod. xxix. 39) and every morning the priests burned incense, (Exod. xxx. 7) and the singers stood every morning to thank the Lord, (Chron. xxiii. 30). And so it was appointed in Ezekiel's temple, (Ezek. xlvi. 13,14,15). By which intimation was plainly given, that the spiritual sacrifices should be offered by the spiritual priests every morning, as duly as the morning comes. Every Christian should pray in secret, and every master of a family, with his family, morning by morning; and there is good reason for it.
Posted at
오후 6:13:00
아침(새벽)에 경건의 시간을 갖는 것에 대하여-2
아침 경건시간에 대한 권고의 말을 간직하도록 간곡히 부탁한다. 은밀한 가운데 계속해서 신실하게 예배드리는 것이 여러분의 영혼의 번영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 알고 있기 때문에, 정말 진지하게 여러분께 이 사실을 강조하려 한다. 즉 매일 아침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목소리를 들으실 수 있도록 기도하고 그를 바라라.
1. 여러분의 은밀한 예배를 반드시 사수하라. 여러분들의 선조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에 의한 관습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은 율법에 관련된 의무이기 때문에 이것을 지속해야 한다. 이것을 위해 정해 놓은 시간을 지키고 그 시간에 충실하라. 이제까지 은밀하게 기도드리는 일에 대해 전혀 무관심한 상태에서 살았거나 이 일을 종종 소홀히 한 사람들도 지금부터는 이것이 여러분들의 어떠한 일과보다도 가장 필요한 부분이며 그 날의 위로 중 가장 즐거운 부분으로 여기고, 끊임없는 주의와 끊임없는 기쁨을 가지고 이를 행해야 한다.
이성을 가진 사람이면 아무도 이 의무를 면하려고 핑계할 수는 없다. 어떤 사람들에게 이야기 되었다면 그것은 곧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것이다. "기도하고 기도하라. 계속해서 기도하고 주님을 바라라."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처럼 그들의 손이 일에 얽매여 있지 않으며,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들처럼 자선금을 많이 내지는 않지만, 부자이든 가난한 사람이든간에 기도는 마찬가지로 해야 한다. 부자라고 해서 당연히 해야 할 이 일을 넘어 갈 수 없으며,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해서 그들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어린 사람이라도 기도를 시작하기에 이르지 않으며, 아무리 나이든 사람일지라도 이제는 더 이상 기도할 일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들은 말년에 어리석은 사람이 될 것이다.
아무도 기도할 수 없다고 변론하지 말라. 굶주려서 멸망케 되었거든 먹을 것을 위하여 기도하고 구하며, 죄로 말미암아 파멸케 되었거든 자비와 은총을 베풀어 주실 것을 위해 기도할 수 있지 않은가?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인가? 그렇다면 기도할 수 없다는 부끄러운 말을 하지 말라. 이는 군인이 무기를 혹은 목수가 도끼를 다룰 줄 모른다고 함과 같이 어리석은 것이다. 그리스도의 교제 가운데 부르심을 입은 것은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교제를 갖기 위함이다. 여러분이 남들처럼 기도를 잘 할 수 없다면, 여러분이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기도를 들으실 것이다.
아침에 기도할 시간이 없다고 변명하지 말라. 여러분이 그보다 더 중요하지 않은 일을 위해서는 시간을 낼 수 있다고 나는 감히 장담할 수 있다. 기도하는 시간을 원하기 보다는 잠자는 시간을 갖기를 더 바라는데, 어떻게 여러분 자신의 만족과 이익을 위하여 시간을 더 잘 사용할 수가 있겠는가? 하루의 모든 일과는 하나님과 더불어 시작할 때 더욱 번영할 것이다.
기도하기에 적합한 은밀한 장소가 없다고 변명하지 말라. 이삭은 기도하기 위해 들판으로 나갔으며, 시편기자는 지붕 꼭대기 한쪽 구석에서도 하나님과 함께 할 수가 있었다. 여러분이 원하는 만큼 은밀한 중에 기도할 수 없다 해도 있는 그 상태에서 기도하라. 과시하기 위해서 보이는 가운데 기도하는 것이 나쁘지, 어찌 할 수 없는 경우에 주의하면서 그렇게 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나는 내가 젊었을 당시, 제임스 왕 시대에 역마차를 타고 런던으로 올라 가면서 우연히 어떤 한 신사와 동행하게 되었을 때를 기억한다. 그는 예수회 소속의 (가톨릭) 신자임을 털어 놓기를 꺼려하지 않았다. 나는 그와 함께 가는 동안 많은 논쟁을 했는데 그 중 이런 것이 있었다. 그는 천주교에서 어느 때나 사람들이 와서 기도할 수 있도록 성당 문을 늘 열어 놓고 있는 것을 찬양했다. 그러나 그것은 바리새인들이 회당에 들어가 기도하는 것 같이, 너희는 기도할 때 문을 열어 놓고 회당에 들어가지 말고 네 골방에 들어가 은밀한 중에 기도하라신 주님의 가르치심에 어긋난다고 그에게 말하자, 그는 이 논증에 대하여 격정적으로 대답하기를 "나는 프로테스탄트들이 아무 곳에서도 기도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다"고 했다. "왜냐면 (그가 말하기를) 나는 신교도들과 함께 마차를 타고 여핸한 적이 많고, 때로는 그들과 함께 한 여관 방에서 지내기도 하면서 그들을 주의 깊게 관찰했지만 밤이는 아침이든 기도하는 사람은 장로교인이었던 단 한 사람 이외에는 찾아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고 했다. 그가 이야기한 것이 사실이기보다는 악의로 그런 말을 했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것을 일례로, 우리가 아침에 주님의 말씀을 보며 기도드릴 때, 우리가 원하는 만큼의 은밀한 곳에 있지 못하더라도 빠뜨리고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빠뜨리고 지나침으로써 죄를 드러낼 뿐 아니라, 불명예스러운 일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
2. 여러분은 자진해서 은밀한 중에 예배를 드리며, 이 일에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이 일에 형식에 치우치지 않도록 하며 예배드릴 때 관습적으로 하지 않도록 주의하고 이 일에 진지하게 임하라. 단순한 기도를 드리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므로 하나님과 마음을 함께 하며, 엘리야가 기도했던 것처럼 기도드려야 한다(약 5:17). 에바브라가 기도했던 것 같이(골 4:12) 항상 애써 기도하는 것을 배우자. 그리하면 우리를 부요케 해주는 것은 바로 부지런히 이 의무를 행하는 손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기도가 얼마나 긴가에 관여하지 않으시며, 여러분이 유창하게 많은 말을 한다고 해서 기도를 들어 주시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진실이며, 주님께 기쁨이 되는 것은 정직한 자들의 기도이다. 하나님을 섬기며 그를 의지하면서 기도드린다면, 여러분의 아침 경건시간을 통하여 오는 위로와 축복은 지나쳐 가버리는 아침 구름같지 않고, 점점 더 밝게 비치는 아침 햇살과 같을 것이다.
I beseech you, suffer a word of exhortation concerning this. I know what an influence it would have upon the prosperity of your souls to be constant and sincere in your secret worship, and, therefore give me leave to press it upon you with all earnestness; let God hear from you every morning, every morning let your prayer be directed to him, and look up.
(1) Make conscience of your secret worship; keep it up, not only because it has been a custom you have received by tradition from your fathers, but because it is a duty, concerning which you have received commandments from tho Lord. Keep up stated times for it, and be true to them. Let those who have hitherto lived in the total neglect, or in the frequent omission of secret prayer, be persuaded henceforward to look upon it as the most needful part of thoir daily business, and the most delightful part of their daily comfort, and do it accordingly with a constant care, and, yet, with a constant pleasure.
No persons who have the use of their reason, can pretend to an exemption from this duty; what is said to some is said to all, "Pray, pray, continue in prayer, and watch in the same." Rich people are not so much bound to labour with their hands as the poor; poor people are not so much bound to give alms as the rich,--but both are equally bound to pray. The rich are not above the necessity of the duty, nor the poor below acceptance with God in it. I t is not too soon for the youngest to begin to pray; and those whom the multitude of years has taught wisdom, yet at their end will be fools, if they think they have no further occasion for prayer. Let none plead they cannot pray; for if you are ready to perish with hunger, you could beg and pray for food; and if you see yourselves undone by reason of sin, can you not beg and pray for mercy and grace? Art thou a christian? Never for shame say, thou canst not pray, for that is as absurd as for a soldier to say, he knows not how to handle a sword, or a carpenter an axe. What are you called for into the fellowship of Christ, but that by him you may have fellowship with God? You cannot pray so well as others, pray as well as you can, and God will accept of you. Let none plead that they have not time in a morning for prayer; I dare say you can find time for other things that are less needful; you had better take time from sleep, than want time for prayer; and how can you spend time better, and more to your satisfaction and advantage ? All the business of the day will prosper the better, for your beginning it thus with God.
Let none plead that they have not a convenient place to be private in for this work; Isaac retired into the field to pray; and the Psalmist could be alone with God in a corner of the house-top. If you cannot perform it with so much secrecy as you would, yet perform it; it is doing it with ostentation that is the fault, not doing it under observation, when it cannot be avoided. I remember, when I was a young man, coming up hither to London in the stage-coach, in King James' time, there happened to be a gentleman in the company, who then was not afraid to own himself a Jesuit; many rencounters he and I had upon the road, and this was one; he was praising the custom in popish countries of keeping the church doors always open, for people to go into at any time to say their prayers: I told him it looked too much like the practice of the Pharisees, that prayed in the synagogues; and did not agree with Christ's command, Thou, when thou prayest thyself, enter not into the church with the doors open, but into tiny closet and shut thy door; when he was pressed with that argument, he replied with some vehemence, "I believe you Protestants say your prayers no where; for" (said he) "I have travelled a great deal in the coach in company with Protestants, have often lain in inns in the same room with them, and have carefully watched them, and could never perceive that any of them said his prayers, night or morning, but one, and he was a presbyterian." I hope there was more malice than truth in what he said: but I mention it as an intimation, that though we cannot be so private as we would be in our devotions, yet we must not omit them, lest the omission should prove not a sin only but a scandal.
(2) Make a business of your secret worship, and be not slothful in this business, but fervent in spirit, serving the Lord. Take heed lest it degenerate into a formality, and you grow customary in your accustomed services. Go about the duty solemnly: be inward with God in it; it is not enough to say your prayers, but you must pray your prayers, must pray in praying, as Elijah did (James 5:17). Let us learn to labour fervently in prayer, as Epaphras did, (Col. 4:12) and we shall find that it is the hand of the diligent in this duty that makes rich. God looks not at the length of your prayers, nor shall you be heard for your much speaking, or fine speaking; but God requires truth in the inward part, and it is the prayer of the upright that is his delight. When yon have prayed look upon yourselves as thereby engaged and encouraged, both to serve God and to trust in him; that the comfort and benefit of your morning devotions may not be as the morning cloud which passes away, but as the morning light which shines more and more.
1. 여러분의 은밀한 예배를 반드시 사수하라. 여러분들의 선조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에 의한 관습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은 율법에 관련된 의무이기 때문에 이것을 지속해야 한다. 이것을 위해 정해 놓은 시간을 지키고 그 시간에 충실하라. 이제까지 은밀하게 기도드리는 일에 대해 전혀 무관심한 상태에서 살았거나 이 일을 종종 소홀히 한 사람들도 지금부터는 이것이 여러분들의 어떠한 일과보다도 가장 필요한 부분이며 그 날의 위로 중 가장 즐거운 부분으로 여기고, 끊임없는 주의와 끊임없는 기쁨을 가지고 이를 행해야 한다.
이성을 가진 사람이면 아무도 이 의무를 면하려고 핑계할 수는 없다. 어떤 사람들에게 이야기 되었다면 그것은 곧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것이다. "기도하고 기도하라. 계속해서 기도하고 주님을 바라라."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처럼 그들의 손이 일에 얽매여 있지 않으며,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들처럼 자선금을 많이 내지는 않지만, 부자이든 가난한 사람이든간에 기도는 마찬가지로 해야 한다. 부자라고 해서 당연히 해야 할 이 일을 넘어 갈 수 없으며,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해서 그들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어린 사람이라도 기도를 시작하기에 이르지 않으며, 아무리 나이든 사람일지라도 이제는 더 이상 기도할 일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들은 말년에 어리석은 사람이 될 것이다.
아무도 기도할 수 없다고 변론하지 말라. 굶주려서 멸망케 되었거든 먹을 것을 위하여 기도하고 구하며, 죄로 말미암아 파멸케 되었거든 자비와 은총을 베풀어 주실 것을 위해 기도할 수 있지 않은가?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인가? 그렇다면 기도할 수 없다는 부끄러운 말을 하지 말라. 이는 군인이 무기를 혹은 목수가 도끼를 다룰 줄 모른다고 함과 같이 어리석은 것이다. 그리스도의 교제 가운데 부르심을 입은 것은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교제를 갖기 위함이다. 여러분이 남들처럼 기도를 잘 할 수 없다면, 여러분이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기도를 들으실 것이다.
아침에 기도할 시간이 없다고 변명하지 말라. 여러분이 그보다 더 중요하지 않은 일을 위해서는 시간을 낼 수 있다고 나는 감히 장담할 수 있다. 기도하는 시간을 원하기 보다는 잠자는 시간을 갖기를 더 바라는데, 어떻게 여러분 자신의 만족과 이익을 위하여 시간을 더 잘 사용할 수가 있겠는가? 하루의 모든 일과는 하나님과 더불어 시작할 때 더욱 번영할 것이다.
기도하기에 적합한 은밀한 장소가 없다고 변명하지 말라. 이삭은 기도하기 위해 들판으로 나갔으며, 시편기자는 지붕 꼭대기 한쪽 구석에서도 하나님과 함께 할 수가 있었다. 여러분이 원하는 만큼 은밀한 중에 기도할 수 없다 해도 있는 그 상태에서 기도하라. 과시하기 위해서 보이는 가운데 기도하는 것이 나쁘지, 어찌 할 수 없는 경우에 주의하면서 그렇게 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나는 내가 젊었을 당시, 제임스 왕 시대에 역마차를 타고 런던으로 올라 가면서 우연히 어떤 한 신사와 동행하게 되었을 때를 기억한다. 그는 예수회 소속의 (가톨릭) 신자임을 털어 놓기를 꺼려하지 않았다. 나는 그와 함께 가는 동안 많은 논쟁을 했는데 그 중 이런 것이 있었다. 그는 천주교에서 어느 때나 사람들이 와서 기도할 수 있도록 성당 문을 늘 열어 놓고 있는 것을 찬양했다. 그러나 그것은 바리새인들이 회당에 들어가 기도하는 것 같이, 너희는 기도할 때 문을 열어 놓고 회당에 들어가지 말고 네 골방에 들어가 은밀한 중에 기도하라신 주님의 가르치심에 어긋난다고 그에게 말하자, 그는 이 논증에 대하여 격정적으로 대답하기를 "나는 프로테스탄트들이 아무 곳에서도 기도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다"고 했다. "왜냐면 (그가 말하기를) 나는 신교도들과 함께 마차를 타고 여핸한 적이 많고, 때로는 그들과 함께 한 여관 방에서 지내기도 하면서 그들을 주의 깊게 관찰했지만 밤이는 아침이든 기도하는 사람은 장로교인이었던 단 한 사람 이외에는 찾아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고 했다. 그가 이야기한 것이 사실이기보다는 악의로 그런 말을 했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것을 일례로, 우리가 아침에 주님의 말씀을 보며 기도드릴 때, 우리가 원하는 만큼의 은밀한 곳에 있지 못하더라도 빠뜨리고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빠뜨리고 지나침으로써 죄를 드러낼 뿐 아니라, 불명예스러운 일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
2. 여러분은 자진해서 은밀한 중에 예배를 드리며, 이 일에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이 일에 형식에 치우치지 않도록 하며 예배드릴 때 관습적으로 하지 않도록 주의하고 이 일에 진지하게 임하라. 단순한 기도를 드리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므로 하나님과 마음을 함께 하며, 엘리야가 기도했던 것처럼 기도드려야 한다(약 5:17). 에바브라가 기도했던 것 같이(골 4:12) 항상 애써 기도하는 것을 배우자. 그리하면 우리를 부요케 해주는 것은 바로 부지런히 이 의무를 행하는 손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기도가 얼마나 긴가에 관여하지 않으시며, 여러분이 유창하게 많은 말을 한다고 해서 기도를 들어 주시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진실이며, 주님께 기쁨이 되는 것은 정직한 자들의 기도이다. 하나님을 섬기며 그를 의지하면서 기도드린다면, 여러분의 아침 경건시간을 통하여 오는 위로와 축복은 지나쳐 가버리는 아침 구름같지 않고, 점점 더 밝게 비치는 아침 햇살과 같을 것이다.
I beseech you, suffer a word of exhortation concerning this. I know what an influence it would have upon the prosperity of your souls to be constant and sincere in your secret worship, and, therefore give me leave to press it upon you with all earnestness; let God hear from you every morning, every morning let your prayer be directed to him, and look up.
(1) Make conscience of your secret worship; keep it up, not only because it has been a custom you have received by tradition from your fathers, but because it is a duty, concerning which you have received commandments from tho Lord. Keep up stated times for it, and be true to them. Let those who have hitherto lived in the total neglect, or in the frequent omission of secret prayer, be persuaded henceforward to look upon it as the most needful part of thoir daily business, and the most delightful part of their daily comfort, and do it accordingly with a constant care, and, yet, with a constant pleasure.
No persons who have the use of their reason, can pretend to an exemption from this duty; what is said to some is said to all, "Pray, pray, continue in prayer, and watch in the same." Rich people are not so much bound to labour with their hands as the poor; poor people are not so much bound to give alms as the rich,--but both are equally bound to pray. The rich are not above the necessity of the duty, nor the poor below acceptance with God in it. I t is not too soon for the youngest to begin to pray; and those whom the multitude of years has taught wisdom, yet at their end will be fools, if they think they have no further occasion for prayer. Let none plead they cannot pray; for if you are ready to perish with hunger, you could beg and pray for food; and if you see yourselves undone by reason of sin, can you not beg and pray for mercy and grace? Art thou a christian? Never for shame say, thou canst not pray, for that is as absurd as for a soldier to say, he knows not how to handle a sword, or a carpenter an axe. What are you called for into the fellowship of Christ, but that by him you may have fellowship with God? You cannot pray so well as others, pray as well as you can, and God will accept of you. Let none plead that they have not time in a morning for prayer; I dare say you can find time for other things that are less needful; you had better take time from sleep, than want time for prayer; and how can you spend time better, and more to your satisfaction and advantage ? All the business of the day will prosper the better, for your beginning it thus with God.
Let none plead that they have not a convenient place to be private in for this work; Isaac retired into the field to pray; and the Psalmist could be alone with God in a corner of the house-top. If you cannot perform it with so much secrecy as you would, yet perform it; it is doing it with ostentation that is the fault, not doing it under observation, when it cannot be avoided. I remember, when I was a young man, coming up hither to London in the stage-coach, in King James' time, there happened to be a gentleman in the company, who then was not afraid to own himself a Jesuit; many rencounters he and I had upon the road, and this was one; he was praising the custom in popish countries of keeping the church doors always open, for people to go into at any time to say their prayers: I told him it looked too much like the practice of the Pharisees, that prayed in the synagogues; and did not agree with Christ's command, Thou, when thou prayest thyself, enter not into the church with the doors open, but into tiny closet and shut thy door; when he was pressed with that argument, he replied with some vehemence, "I believe you Protestants say your prayers no where; for" (said he) "I have travelled a great deal in the coach in company with Protestants, have often lain in inns in the same room with them, and have carefully watched them, and could never perceive that any of them said his prayers, night or morning, but one, and he was a presbyterian." I hope there was more malice than truth in what he said: but I mention it as an intimation, that though we cannot be so private as we would be in our devotions, yet we must not omit them, lest the omission should prove not a sin only but a scandal.
(2) Make a business of your secret worship, and be not slothful in this business, but fervent in spirit, serving the Lord. Take heed lest it degenerate into a formality, and you grow customary in your accustomed services. Go about the duty solemnly: be inward with God in it; it is not enough to say your prayers, but you must pray your prayers, must pray in praying, as Elijah did (James 5:17). Let us learn to labour fervently in prayer, as Epaphras did, (Col. 4:12) and we shall find that it is the hand of the diligent in this duty that makes rich. God looks not at the length of your prayers, nor shall you be heard for your much speaking, or fine speaking; but God requires truth in the inward part, and it is the prayer of the upright that is his delight. When yon have prayed look upon yourselves as thereby engaged and encouraged, both to serve God and to trust in him; that the comfort and benefit of your morning devotions may not be as the morning cloud which passes away, but as the morning light which shines more and more.
Posted at
오후 11:05:00
아침(새벽)에 경건의 시간을 갖는 것에 대하여-1
아래 글은 18세기 영국의 유명한 주석가인 Matthew Henry의 Directions for Daily Communion With God(날마다 하나님과)의 일부입니다.
============
태만한(omissions, 즉 개인 경건시간을 쉽게 빼먹는 것) 마음 속에 이런 말을 새겨두자. 태만은 죄이며 심판을 받아야 한다. 아침에 성경보고 기도하는 일(아침 경건시간)을 게을리 하고 소홀히 행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전혀 하지 않거나 거짓되게 행한다. 전혀 제사를 드리지 않거나 혹은 드린다 해도 상처난 것, 절름발이거나 병든 것이었다. 기도를 전혀 하지 않거나, 한다 해도 올바르게 하나님께 우러러 드리는 기도가 아니었다. 주님께서는 아침에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며, 우리들의 아버지로서 사랑과 관심을 표하시기에 인색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우리는 아침에 제사도 드리지 않았고, 부끄럽게도 그의 자녀로서의 해야 할 바를 하지 못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며, 우리 자신들이 아침 경건시간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유익을 잃어버린 어리석음과 죄를 인하여, 오늘 아침 진정으로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오자. 하나님께서 이러한 열매를 찾으시며 우리의 골방에 오셨으나 아무도 발견하지 못하셨고 혹 발견하셨더라도 전혀 주님께 기도하고 있지 않거나 올바르게 기도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하찮은 것을 핑계로 삼아 아침 경건시간을 제쳐 놓고, 좋은 구실이 없을 때는 양심에 상처를 입게 되고 뼈가 쇠잔하여지며, 점점 더 그에 대해 냉담해지고 점차적으로 멀리 떠나버리게 된다.
Let this word put us in mind of our omissions; for omissions are sins, and must come into judgment: how often has our morning-worship been either neglected or negligently performed. The work has been either not done at all, or done deceitfully; either no sacrifice at all brought, or it has been the torn, and the lame, and the sick; either no prayer, or the prayer not directed aright, nor lifted up. We have had the morning's mercies, God has not been wanting in the compassion and care of a Father for us, yet we have not done the morning's service, but have been shamefully wanting in the duty of children to him.
Let us be truly humbled before God this morning for our sin and folly herein, that we have so often robbed God of the honour, and ourselves of the benefit of our morning-worship. God has come into our closets seeking this fruit, but has found none, or next to none; has hearkened and heard, but either we spake not to him at all, or spake not right. Some trifling thing or other has served for an excuse to put it by once, and when once the good usage has been broken in upon, conscience has been wounded, and its bonds weakened, and we have grown more and more cool to it, and perhaps by degrees it has been quite left off.
============
태만한(omissions, 즉 개인 경건시간을 쉽게 빼먹는 것) 마음 속에 이런 말을 새겨두자. 태만은 죄이며 심판을 받아야 한다. 아침에 성경보고 기도하는 일(아침 경건시간)을 게을리 하고 소홀히 행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전혀 하지 않거나 거짓되게 행한다. 전혀 제사를 드리지 않거나 혹은 드린다 해도 상처난 것, 절름발이거나 병든 것이었다. 기도를 전혀 하지 않거나, 한다 해도 올바르게 하나님께 우러러 드리는 기도가 아니었다. 주님께서는 아침에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며, 우리들의 아버지로서 사랑과 관심을 표하시기에 인색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우리는 아침에 제사도 드리지 않았고, 부끄럽게도 그의 자녀로서의 해야 할 바를 하지 못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며, 우리 자신들이 아침 경건시간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유익을 잃어버린 어리석음과 죄를 인하여, 오늘 아침 진정으로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오자. 하나님께서 이러한 열매를 찾으시며 우리의 골방에 오셨으나 아무도 발견하지 못하셨고 혹 발견하셨더라도 전혀 주님께 기도하고 있지 않거나 올바르게 기도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하찮은 것을 핑계로 삼아 아침 경건시간을 제쳐 놓고, 좋은 구실이 없을 때는 양심에 상처를 입게 되고 뼈가 쇠잔하여지며, 점점 더 그에 대해 냉담해지고 점차적으로 멀리 떠나버리게 된다.
Let this word put us in mind of our omissions; for omissions are sins, and must come into judgment: how often has our morning-worship been either neglected or negligently performed. The work has been either not done at all, or done deceitfully; either no sacrifice at all brought, or it has been the torn, and the lame, and the sick; either no prayer, or the prayer not directed aright, nor lifted up. We have had the morning's mercies, God has not been wanting in the compassion and care of a Father for us, yet we have not done the morning's service, but have been shamefully wanting in the duty of children to him.
Let us be truly humbled before God this morning for our sin and folly herein, that we have so often robbed God of the honour, and ourselves of the benefit of our morning-worship. God has come into our closets seeking this fruit, but has found none, or next to none; has hearkened and heard, but either we spake not to him at all, or spake not right. Some trifling thing or other has served for an excuse to put it by once, and when once the good usage has been broken in upon, conscience has been wounded, and its bonds weakened, and we have grown more and more cool to it, and perhaps by degrees it has been quite left off.
Posted at
오전 6:45:00
나의 뿌리...
(2004년 10월 21일에 쓴 글)
내 성(姓)은 이(李)가이고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경주 이가는 우리 나라 이씨의 원 뿌리라는 것이 "이씨연구"라는 책의 주장이다. 삼성의 이건희 회장이 경주 이가이다. 삼성에서 워낙 돈을 많이 써서 대전에 최첨단 시설을 갖춘 경주 이가 족보 보관소가 있다고 하는데 가보지는 않았다.
경주 이씨의 유래를 잠깐 살펴보자면 경주 이씨(慶州 李氏) 시조 謁平(알평)은 진한 6촌장의 1인으로서 다른 5촌장과 함께 박혁거세를 신라 초대 왕으로 추대하고 개국원훈으로 아손의 벼슬을 지내고 유리왕 때 다른 다섯 촌장들과 함께 사성받았는데 알평이 바로 이씨였다. 그 후 세계를 이어 오다가 36세손 진골출신인 거명(소판공)을 중조(1세조)로 하여 대를 이어오고 있다. 본관은 시조의 발상지 양산촌이 경주로 바뀌었으므로 경주로 하였고 경주의 고호가 월성암으로 월성 이씨라고도 한다.
경주 이씨(慶州李氏)의 세계(世系)는 거명의 17세손(고려 말기)에서 8파로 대별되고 다시 아래로 내려오면서 대소(大小) 70여 파로 분파(分派)된다. 8대파는 평리공파(評理公派)·이암공파(怡庵公派)·익재공파(益齋公派)·호군공파(護軍公派)· 국당공파(菊堂公派)·부정공파(副正公派)·상서공파(尙書公派)·사인공파(舍人公派) 등이 있으며, 이 밖에 판전공파(判典公派)·월성군공파(月城君公派) ·시랑공파(侍郞公派)·석탄공파(石灘公派)가 그에 버금간다.전통의 명문거족인 경주 이씨는 고려 말에 크게 세력을 떨쳤고, 조선조에 와서도 수많은 공신·학자·명신을 배출하여 명문의 대를 이었다.
나는 8대파 중의 첫번째인 평리공파에 속해있고 41대 (즉 42세)손이다. 이 대수는 중시조인 성암공(고려시대 평리벼슬을 한 평리공파의 중시조)을 1대로 한 대수이기 때문에 시조까지 올라가면 80대에 가까이 된다고 들었다.
"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을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딛 3:9)
어렸을 때에는 이 족보에 대한 교육을 많이 받았고, 내 개인적으로도 두꺼운 족보를 들고 많은 연구를 하며 내 뿌리에 대해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거족인 경주 이가의 가문에 속해 있다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을 느낀다. 물론 내 육신의 조상에 대한 공경과 그분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고 내 육신의 부모님께 최선을 다해 효도하며 그분을 섬기는 것은 마땅한 도리이지만, 육신의 계보보다는 하나님 나라에 속한 천국백성이라는 것이, 그리고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어 내려온 믿음의 계보에 내가 속해 있다는 것이 정말 자랑스럽다. 내가 그 믿음의 계보의 한 자리를 차지했다는 것, 그리고 나로 인해서 그 대를 이을 믿음의 후손들이 나올 것이라는 기대가 나를 기쁘게 한다.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여 그리스도를 통해 영적으로 거듭난 믿음의 계보에 속한 자이다.
내 성(姓)은 이(李)가이고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경주 이가는 우리 나라 이씨의 원 뿌리라는 것이 "이씨연구"라는 책의 주장이다. 삼성의 이건희 회장이 경주 이가이다. 삼성에서 워낙 돈을 많이 써서 대전에 최첨단 시설을 갖춘 경주 이가 족보 보관소가 있다고 하는데 가보지는 않았다.
경주 이씨의 유래를 잠깐 살펴보자면 경주 이씨(慶州 李氏) 시조 謁平(알평)은 진한 6촌장의 1인으로서 다른 5촌장과 함께 박혁거세를 신라 초대 왕으로 추대하고 개국원훈으로 아손의 벼슬을 지내고 유리왕 때 다른 다섯 촌장들과 함께 사성받았는데 알평이 바로 이씨였다. 그 후 세계를 이어 오다가 36세손 진골출신인 거명(소판공)을 중조(1세조)로 하여 대를 이어오고 있다. 본관은 시조의 발상지 양산촌이 경주로 바뀌었으므로 경주로 하였고 경주의 고호가 월성암으로 월성 이씨라고도 한다.
경주 이씨(慶州李氏)의 세계(世系)는 거명의 17세손(고려 말기)에서 8파로 대별되고 다시 아래로 내려오면서 대소(大小) 70여 파로 분파(分派)된다. 8대파는 평리공파(評理公派)·이암공파(怡庵公派)·익재공파(益齋公派)·호군공파(護軍公派)· 국당공파(菊堂公派)·부정공파(副正公派)·상서공파(尙書公派)·사인공파(舍人公派) 등이 있으며, 이 밖에 판전공파(判典公派)·월성군공파(月城君公派) ·시랑공파(侍郞公派)·석탄공파(石灘公派)가 그에 버금간다.전통의 명문거족인 경주 이씨는 고려 말에 크게 세력을 떨쳤고, 조선조에 와서도 수많은 공신·학자·명신을 배출하여 명문의 대를 이었다.
나는 8대파 중의 첫번째인 평리공파에 속해있고 41대 (즉 42세)손이다. 이 대수는 중시조인 성암공(고려시대 평리벼슬을 한 평리공파의 중시조)을 1대로 한 대수이기 때문에 시조까지 올라가면 80대에 가까이 된다고 들었다.
"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을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딛 3:9)
어렸을 때에는 이 족보에 대한 교육을 많이 받았고, 내 개인적으로도 두꺼운 족보를 들고 많은 연구를 하며 내 뿌리에 대해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거족인 경주 이가의 가문에 속해 있다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을 느낀다. 물론 내 육신의 조상에 대한 공경과 그분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고 내 육신의 부모님께 최선을 다해 효도하며 그분을 섬기는 것은 마땅한 도리이지만, 육신의 계보보다는 하나님 나라에 속한 천국백성이라는 것이, 그리고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어 내려온 믿음의 계보에 내가 속해 있다는 것이 정말 자랑스럽다. 내가 그 믿음의 계보의 한 자리를 차지했다는 것, 그리고 나로 인해서 그 대를 이을 믿음의 후손들이 나올 것이라는 기대가 나를 기쁘게 한다.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여 그리스도를 통해 영적으로 거듭난 믿음의 계보에 속한 자이다.
Posted at
오후 8:33:00
보물10
(2005년 6월 3일에 쓴 글)
오늘은 좀 특별한 날이었다. 텍사스에만 있는 제도일 것 같은데, 여기서는 만 네살이 되면 유치원 전단계인 Pre-Kindergarten (Pre-K)를 다닌다. 이것으로 시작해서 공교육이 시작되는 셈이다. 대부분의 학교는 Pre-K부터 시작해서 Kinder 그리고 Elementary가 같이 있다.Pre-K는 주로 영어가 Native가 아닌 애들이나 미국인들 중에서 소득이 일정액 이하인 집의 애들이 주로 다닌다.
지난 1년 동안 하연이가 Pre-K를 다니고 얼마전에 졸업했다. 방학을 한 것이다. 그런데 방학이라고 마냥 노는 것이 아니다. 이제 Kinder부터는 본격적이 교육이 시작되기 때문에, non-native speaker인 애들은 방학 때 한 달간 집중적으로 영어 (쓰기와 대화)와 수학 교육을 받는다. 이 때는 그 동안 다니던 학교에서가 아니라 한 학교를 지정해서 그 일대에 있는 같은 처지의 학생들을 모아 놓고 가르친다.
오늘은 그 여름학기 수업의 첫째날이었다. 선생님들 중에선 한국인 선생님 한 분이 있고, 대부분의 경우가 Hispanic이었다. 그것은 이 지역에 Hispanic들이 많기 때문이다. 하연이는 많은 한국 애들이 한국 선생님의 반에 편성된 것과는 달리 멕시코계 미국인 선생님 반으로 편성이 되었다. 그 반에는 멕시코계 아이들이 많고, 한국 애들은 하연이를 포함해 세 명이었다.
오늘 저녁식사를 하는데, 학교 생활에 대해서 물어봤더니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하연이는 대단히 만족해 했다. 너무 재미 있다는 것이다. 안도를 하는 순간 하연이가 말했다.
"오늘 테스트 봤어요."
"그래?"
"근데, 선생님이 내가 Best래요..."
이 말을 듣는 순간 너무 기뻤다. 하연이가 그렇게 훌륭하게 시험을 통과하다니... 너무 장했다.
"전체 학생들에게 물어본 것이었어?"
"아니. 한명씩 불러서 테스트 했어요."
"와, 대단하다! 하연이~~~"
한 참을 기뻐하다 물었다.
"무슨 테스트를 했는데?"
"숫자 세는 거요.."
"뭐?"
"One부터 Nine까지 셌어요..."
"... ... ..."
"내가 제일 잘했대요.."
"(실망)그럼 딴애들은 그것도 못해?"
"예.. 민희(하연이 친구)도 Nine까지 셀수 있어요.."
(사실 하연이는 영어로 100이상을 셀 수 있다... 아마 대부분의 한국애들은 비슷할 껄...)
"그리고, 오늘은 Five까지 쓰는 것 배웠어요.."
"(애써 실망한 표정을 감추며) 그래 대단하다.. :--:"
그 이후로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반편성이 잘 된건가?
오늘은 좀 특별한 날이었다. 텍사스에만 있는 제도일 것 같은데, 여기서는 만 네살이 되면 유치원 전단계인 Pre-Kindergarten (Pre-K)를 다닌다. 이것으로 시작해서 공교육이 시작되는 셈이다. 대부분의 학교는 Pre-K부터 시작해서 Kinder 그리고 Elementary가 같이 있다.Pre-K는 주로 영어가 Native가 아닌 애들이나 미국인들 중에서 소득이 일정액 이하인 집의 애들이 주로 다닌다.
지난 1년 동안 하연이가 Pre-K를 다니고 얼마전에 졸업했다. 방학을 한 것이다. 그런데 방학이라고 마냥 노는 것이 아니다. 이제 Kinder부터는 본격적이 교육이 시작되기 때문에, non-native speaker인 애들은 방학 때 한 달간 집중적으로 영어 (쓰기와 대화)와 수학 교육을 받는다. 이 때는 그 동안 다니던 학교에서가 아니라 한 학교를 지정해서 그 일대에 있는 같은 처지의 학생들을 모아 놓고 가르친다.
오늘은 그 여름학기 수업의 첫째날이었다. 선생님들 중에선 한국인 선생님 한 분이 있고, 대부분의 경우가 Hispanic이었다. 그것은 이 지역에 Hispanic들이 많기 때문이다. 하연이는 많은 한국 애들이 한국 선생님의 반에 편성된 것과는 달리 멕시코계 미국인 선생님 반으로 편성이 되었다. 그 반에는 멕시코계 아이들이 많고, 한국 애들은 하연이를 포함해 세 명이었다.
오늘 저녁식사를 하는데, 학교 생활에 대해서 물어봤더니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하연이는 대단히 만족해 했다. 너무 재미 있다는 것이다. 안도를 하는 순간 하연이가 말했다.
"오늘 테스트 봤어요."
"그래?"
"근데, 선생님이 내가 Best래요..."
이 말을 듣는 순간 너무 기뻤다. 하연이가 그렇게 훌륭하게 시험을 통과하다니... 너무 장했다.
"전체 학생들에게 물어본 것이었어?"
"아니. 한명씩 불러서 테스트 했어요."
"와, 대단하다! 하연이~~~"
한 참을 기뻐하다 물었다.
"무슨 테스트를 했는데?"
"숫자 세는 거요.."
"뭐?"
"One부터 Nine까지 셌어요..."
"... ... ..."
"내가 제일 잘했대요.."
"(실망)그럼 딴애들은 그것도 못해?"
"예.. 민희(하연이 친구)도 Nine까지 셀수 있어요.."
(사실 하연이는 영어로 100이상을 셀 수 있다... 아마 대부분의 한국애들은 비슷할 껄...)
"그리고, 오늘은 Five까지 쓰는 것 배웠어요.."
"(애써 실망한 표정을 감추며) 그래 대단하다.. :--:"
그 이후로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반편성이 잘 된건가?
Posted at
오후 6:00:00
제사장으로서의 가장
성경적 원리로 볼 때 한 가정의 가장은 그 가정의 제사장이다. 제사장은 영적인 리더이며,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의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하는 자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가정의 남편/아버지를 가정의 제사장으로 세우셨다는 것은 모든 남자들은 가정의 영적 상황에 대해 하나님으로부터 책임추궁을 당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결코 쉽지 않은 무서운 책임이다. 그 책임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졌기 때문에,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내 마음대로 양도할 수가 없다는 것이 더 두려운 것이다.
죄악으로 물들어 버린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가정의 가장에게 허락하신 영적인 리더십은 왜곡되어 버렸다. 그 한 모습은 가정 가운데 군림하는 제왕으로서의 모습이다. 명령을 내리는 가장. 모든 것을 자기의 뜻과 욕심대로 관철시키고 마는 가장. 그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언어적/정서적/물리적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가장. 그것은 죄악이다.
또 다른 한 모습은 그 리더십을 포기하는 것이다. 가정의 모든 문제는 아내에게 맡겨버리고, 자신은 바깥 일만 신경을 쓴다. 가정 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아이들의 교육과 영적인 상황에 대해서 전혀 무지한 가장들. 현대 사회에서 너무나 흔히 볼 수 있는 이런 가장들의 모습은 결코 성경적인 것이 아니다.
두 가지 중 어떤 모습이든지 간에 그런 가장들로 인해서 가정의 영적 상태를 악화되어 갈 수 밖에 없다. 가장이, 남자들이 제사장으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이 절실히 필요하다.
제사장으로서의 가장은 어떤 모습일까? 그것은 먼저 자신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다. 제사장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분명히 아는 자이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종이라는 사실을 결코 부인하지 않는 자이다.
제사장으로서의 가장은 가정의 죄악들을 들고 나아가 회개하는 자이다.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은 일 년에 한 번 씩 이스라엘의 민족적 죄악을 들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갔다. 가정의 죄악들, 그리고 가정 구성원의 죄악들을 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회개할 책임이 가장에게 있다.
그리고 가장은 하나님께 기도의 책임이 있다. 가정과 가정구성원들을 위해 중보기도하는 중보자로서의 책임이 있다. 지난 수련회 때 신인훈 목사님의 말씀 가운데 복음을 쉽게 받아들이는 사람 뒤에는 반드시 그를 위해 중보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씀이 기억난다. 아내를 위해서, 그리고 아이들의 구원을 위해서 늘 기도함으로 그 아이들이 구원 가운데로 나아 올 수 있도록 돕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을까? 하나님께서는 영적인 리더인 가장에게 그 책임을 맡기신다. 아이들을 위해 날마다 기도하지 않는 아버지는 가정 안에서 영적인 리더로서의 역할을 게을리하는 자다. 내가 날마다 기도 가운데 아이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나는 하나님께서 아내와 아이들을 위한 내 기도를 결코 잊어버리지 않으실 것으로 믿는다.
제사장으로서의 가장은 섬기는 자이다. 가정의 영적인 성장을 위해서, 낮은 곳에서 아내와 아이들을 섬기면서 그들이 하나님께로 인도되도록 돕는 자이다. 그들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데 걸림돌이 되는 모든 장애물들을 낮은 곳에서 섬기는 섬김으로 제거해 나아가는 자이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보여 주셨듯이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는 리더가 가장 낮은 곳에서 섬기는 것이다. 그 원리가 가정 안에서 분명히 실천될 때, 그 가정에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
제사장으로서 가장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에 대해서 분명한 목소리로 "No!"라고 외칠 수 있는 자이다. 이 역할은 제사장보다는 선지자에 가깝다. 제사장은 중재자이다. 많은 경우 백성들을 대표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이지만, 때로는 하나님을 대신해서 백성들에게 나아가기도 해야한다. 가장이 하나님의 말씀에 바로 선 가운데 가족 구성원들에게 그 말씀을 분명하게 선포할 책임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르게 훈육해야할 의무가 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가정의 가장은 반드시 말씀에 깨어 있는 자이어야 하고, 말씀을 연구하는 자이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남자를 한 가정의 영적 리더로 세우셨다. 그것은 특권이기도 하지만, 감당하기 버거운 의무이기도 하다. 이 무게 때문에 이 역할을 회피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다면, 리더의 역할은 자연스럽게 그 삶 가운데 이루어질 수 있다.
하나님께서 모든 가정의 남편/아버지를 가정의 제사장으로 세우셨다는 것은 모든 남자들은 가정의 영적 상황에 대해 하나님으로부터 책임추궁을 당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결코 쉽지 않은 무서운 책임이다. 그 책임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졌기 때문에,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내 마음대로 양도할 수가 없다는 것이 더 두려운 것이다.
죄악으로 물들어 버린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가정의 가장에게 허락하신 영적인 리더십은 왜곡되어 버렸다. 그 한 모습은 가정 가운데 군림하는 제왕으로서의 모습이다. 명령을 내리는 가장. 모든 것을 자기의 뜻과 욕심대로 관철시키고 마는 가장. 그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언어적/정서적/물리적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가장. 그것은 죄악이다.
또 다른 한 모습은 그 리더십을 포기하는 것이다. 가정의 모든 문제는 아내에게 맡겨버리고, 자신은 바깥 일만 신경을 쓴다. 가정 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아이들의 교육과 영적인 상황에 대해서 전혀 무지한 가장들. 현대 사회에서 너무나 흔히 볼 수 있는 이런 가장들의 모습은 결코 성경적인 것이 아니다.
두 가지 중 어떤 모습이든지 간에 그런 가장들로 인해서 가정의 영적 상태를 악화되어 갈 수 밖에 없다. 가장이, 남자들이 제사장으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이 절실히 필요하다.
제사장으로서의 가장은 어떤 모습일까? 그것은 먼저 자신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다. 제사장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분명히 아는 자이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종이라는 사실을 결코 부인하지 않는 자이다.
제사장으로서의 가장은 가정의 죄악들을 들고 나아가 회개하는 자이다.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은 일 년에 한 번 씩 이스라엘의 민족적 죄악을 들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갔다. 가정의 죄악들, 그리고 가정 구성원의 죄악들을 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회개할 책임이 가장에게 있다.
그리고 가장은 하나님께 기도의 책임이 있다. 가정과 가정구성원들을 위해 중보기도하는 중보자로서의 책임이 있다. 지난 수련회 때 신인훈 목사님의 말씀 가운데 복음을 쉽게 받아들이는 사람 뒤에는 반드시 그를 위해 중보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씀이 기억난다. 아내를 위해서, 그리고 아이들의 구원을 위해서 늘 기도함으로 그 아이들이 구원 가운데로 나아 올 수 있도록 돕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을까? 하나님께서는 영적인 리더인 가장에게 그 책임을 맡기신다. 아이들을 위해 날마다 기도하지 않는 아버지는 가정 안에서 영적인 리더로서의 역할을 게을리하는 자다. 내가 날마다 기도 가운데 아이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나는 하나님께서 아내와 아이들을 위한 내 기도를 결코 잊어버리지 않으실 것으로 믿는다.
제사장으로서의 가장은 섬기는 자이다. 가정의 영적인 성장을 위해서, 낮은 곳에서 아내와 아이들을 섬기면서 그들이 하나님께로 인도되도록 돕는 자이다. 그들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데 걸림돌이 되는 모든 장애물들을 낮은 곳에서 섬기는 섬김으로 제거해 나아가는 자이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보여 주셨듯이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는 리더가 가장 낮은 곳에서 섬기는 것이다. 그 원리가 가정 안에서 분명히 실천될 때, 그 가정에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
제사장으로서 가장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에 대해서 분명한 목소리로 "No!"라고 외칠 수 있는 자이다. 이 역할은 제사장보다는 선지자에 가깝다. 제사장은 중재자이다. 많은 경우 백성들을 대표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이지만, 때로는 하나님을 대신해서 백성들에게 나아가기도 해야한다. 가장이 하나님의 말씀에 바로 선 가운데 가족 구성원들에게 그 말씀을 분명하게 선포할 책임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르게 훈육해야할 의무가 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가정의 가장은 반드시 말씀에 깨어 있는 자이어야 하고, 말씀을 연구하는 자이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남자를 한 가정의 영적 리더로 세우셨다. 그것은 특권이기도 하지만, 감당하기 버거운 의무이기도 하다. 이 무게 때문에 이 역할을 회피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다면, 리더의 역할은 자연스럽게 그 삶 가운데 이루어질 수 있다.
Posted at
오후 8:34:00
오늘 아침 묵상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가서 예루살렘 거민의 귀에 외쳐 말할지니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네 소년 때의 우의와 네 결혼 때의 사랑 곧 씨뿌리지 못하는 땅,광야에서 어떻게 나를 좇았음을 내가 너를 위하여 기억하노라. 그 때에 이스라엘은 나 여호와의 성물 곧 나의 소산 중 처음 열매가 되었나니 그를 삼키는 자면 다 벌을 받아 재앙을 만났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야곱 집과 이스라엘 집 모든 가족아, 나 여호와의 말을 들으라.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 열조가 내게서 무슨 불의함을 보았관대 나를 멀리하고 허탄한 것을 따라 헛되이 행하였느냐? 그들이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광야 곧 사막과 구덩이 땅,건조하고 사망의 음침한 땅,사람이 다니지 아니하고 거주하지 아니하는 땅을 통과케 하시던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말하지 아니하였도다.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기름진 땅에 들여 그 과실과 그 아름다운 것을 먹게 하였거늘 너희가 이리로 들어와서는 내 땅을 더럽히고 내 기업을 가증히 만들었으며 제사장들은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하지 아니하며 법 잡은 자들은 나를 알지 못하며 관리들도 나를 항거하며 선지자들은 바알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무익한 것을 좇았느니라. (렘 2:1-8)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온전히 잊어버리고 찾지도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서 책망하신다. 그들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를 받았었고, 가나안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들어 갈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좇는 것을 잊어버린 것이다.
감사는 내가 가진 것에서 좋은 뭔가가 더해져야만 내 안에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감사는 이미 주어진 것에 대해서, 그것이 어떻게 주어졌고,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잘 알 때에야 내 안에서 감사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이 가나안에서 살고 있고, 풍요를 누리고 있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게 되었다. 그곳은 “그들의 것”이고 그들이 거기에 머물러 있는 것도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곳은 그들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 아래에서 그곳에 머물도록 허락받은 것이다. 그들이 거기에 지속적으로 살 수 있는 것도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하나님께서 지켜주고 계시기 때문에 그들이 거기서 살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이 진실을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시고자 하신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역사상 가장 큰 재난이 되어버린다.
내가 삶을 사는 것, 숨을 쉬는 것, 공부하는 것, 그리고 경제적인 공급을 받는 것 등등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감사의 제목이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자격없는 죄인인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은혜다. 내가 어떤 상태에 있든지 간에 나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 “기름진 땅에 들여 그 과실과 그 아름다운 것을 먹게”하신 은혜를 입은 자이다. 그것을 망각하게 될 때, 내 안에 감사가 사라지고, 내 안에 감사가 사라질 때,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생겨나고,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생겨날 때,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지 못하고 우상으로 눈을 돌리게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땅에서 하나님의 땅을 더럽히고 하나님의 기업을 가증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미 주신 것들을 감사하는 것, 그리고 그 무엇보다 나에게 주어진 구원의 은혜, 그리고 구원으로 인해 그리스도께서 나와 함께하시고, 나의 주인이 되어 주신 것에 대한 감사가 내 삶의 중심에 자리 잡아야 한다. 그리고 그 감사는 그 은혜가 주어지기까지 하나님께서 치르셨던 희생, 즉 십자가를 늘 기억하고, 또한 그 십자가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었던 형편없었던 나 자신을 기억함으로 생겨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함이 감사의 원동력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온전히 잊어버리고 찾지도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서 책망하신다. 그들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를 받았었고, 가나안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들어 갈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좇는 것을 잊어버린 것이다.
감사는 내가 가진 것에서 좋은 뭔가가 더해져야만 내 안에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감사는 이미 주어진 것에 대해서, 그것이 어떻게 주어졌고,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잘 알 때에야 내 안에서 감사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이 가나안에서 살고 있고, 풍요를 누리고 있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게 되었다. 그곳은 “그들의 것”이고 그들이 거기에 머물러 있는 것도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곳은 그들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 아래에서 그곳에 머물도록 허락받은 것이다. 그들이 거기에 지속적으로 살 수 있는 것도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하나님께서 지켜주고 계시기 때문에 그들이 거기서 살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이 진실을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시고자 하신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역사상 가장 큰 재난이 되어버린다.
내가 삶을 사는 것, 숨을 쉬는 것, 공부하는 것, 그리고 경제적인 공급을 받는 것 등등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감사의 제목이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자격없는 죄인인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은혜다. 내가 어떤 상태에 있든지 간에 나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 “기름진 땅에 들여 그 과실과 그 아름다운 것을 먹게”하신 은혜를 입은 자이다. 그것을 망각하게 될 때, 내 안에 감사가 사라지고, 내 안에 감사가 사라질 때,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생겨나고,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생겨날 때,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지 못하고 우상으로 눈을 돌리게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땅에서 하나님의 땅을 더럽히고 하나님의 기업을 가증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미 주신 것들을 감사하는 것, 그리고 그 무엇보다 나에게 주어진 구원의 은혜, 그리고 구원으로 인해 그리스도께서 나와 함께하시고, 나의 주인이 되어 주신 것에 대한 감사가 내 삶의 중심에 자리 잡아야 한다. 그리고 그 감사는 그 은혜가 주어지기까지 하나님께서 치르셨던 희생, 즉 십자가를 늘 기억하고, 또한 그 십자가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었던 형편없었던 나 자신을 기억함으로 생겨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함이 감사의 원동력이 된다.
Posted at
오후 7:41:00
가난
(2009년 3월 5일에 쓴 글)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가라사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눅 6:20)
결혼하기 전, 교제하던 지금의 아내에게 한 번 정도 내 딴에는 심각하게 말했다. 나는 평생 가난하게 살 것이라고... 나의 의도와는 다르게, 아내는 그 말을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인 것 같지는 않다.
믿음을 가지고 나서, 자발적으로 가난하면서도 의미 있게 인생을 살아가는 믿음의 선배들을 보고, 그리고 "가난의 영성"을 접하고는 나는 가난한 삶을 동경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나름대로는 추구하며 살게 되었다.
가난하기로 작정하면, 세상에 얽메이지 않는다. 불편을 감수하고 친척들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해야할 것들을 조금 적게 하거나 못하는 것에 대해서 뻔뻔스럽기로 작정하기만 하면, 가난은 그리 힘든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돈이 자유를 준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자유라는 속박에 얽메여서 허덕거린다. 그것이 돈에 미쳐 돌아가는 한국 사회의 현 주소이다. 오히려 자유를 포기하고, 조금 고상한 삶을 포기한다면, 인생은 훨씬 자유로와지고, 세상은 살 만 하다.
가난하게 사는 삶의 백미는, 일상의 삶에서 하나님과의 대화가 더 긴밀해진다는 것이다. 가난하게 사는 것은 단순히 돈에 쪼들려 살면서 해야할 것을 아무것도 못하면서 산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나와 내 가정의 모든 필요를 내가 직접 모두 마련하고 장만한다는 욕심과 책임에서 벗어나서 전능하신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이다.
돈이 많을 때는 하나님을 찾을 이유가 그만큼 줄어든다.. 하지만, 가난 속에서 살면, 삶의 모든 부분을 하나님께 아뢰고,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실 것을 기도하게 된다. 부족한 가운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작은 공급에도 감사하게 되고, 그분이 내 삶에 개입하고 계심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 기도 응답에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며, 내 인생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방향과 속도를 조절하면서 살 수 있다.
가난은 내 자신을 믿고 사는 불신앙에서 나를 탈출시키고,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붙들고 의지하는 믿음의 삶으로 인도한다. 삶의 지극히 냉혹한 현실 가운데서 가난한 자의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그 냉혹함을 녹이는 따뜻한 불이며, 그 가운데 나는 하나님의 세밀하신 인도하심을 경험하는 역동적이고 살아 있는 믿음을 견지하게 된다.
그러한 가난은 이 세상에 보화를 쌓으려는 노력을 완전히 포기하고, 하늘의 보화를 쌓으려는 거룩한 욕심을 가질 때, 나에게 하나님의 크신 축복으로 다가온다. 내가 가진 것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내 놓을 수 있고, 내가 가진 것이 내 것이 아님을 고백하는 고백 가운데서 나는 내 소유 뿐만 아니라 내 존재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다. 내 인생의 주인이 주님인 것을 진심으로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피조물인 내가 하나님께 돌릴 수 있는 "유일한" 영광은, 하나님을 진정한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드리는 자발적인 가난은... 내 삶을 통해 그 분이 하나님되심을 인정하게 함으로써 나를 하나님께 진정으로 영광돌리는 삶으로 인도한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가라사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눅 6:20)
결혼하기 전, 교제하던 지금의 아내에게 한 번 정도 내 딴에는 심각하게 말했다. 나는 평생 가난하게 살 것이라고... 나의 의도와는 다르게, 아내는 그 말을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인 것 같지는 않다.
믿음을 가지고 나서, 자발적으로 가난하면서도 의미 있게 인생을 살아가는 믿음의 선배들을 보고, 그리고 "가난의 영성"을 접하고는 나는 가난한 삶을 동경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나름대로는 추구하며 살게 되었다.
가난하기로 작정하면, 세상에 얽메이지 않는다. 불편을 감수하고 친척들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해야할 것들을 조금 적게 하거나 못하는 것에 대해서 뻔뻔스럽기로 작정하기만 하면, 가난은 그리 힘든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돈이 자유를 준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자유라는 속박에 얽메여서 허덕거린다. 그것이 돈에 미쳐 돌아가는 한국 사회의 현 주소이다. 오히려 자유를 포기하고, 조금 고상한 삶을 포기한다면, 인생은 훨씬 자유로와지고, 세상은 살 만 하다.
가난하게 사는 삶의 백미는, 일상의 삶에서 하나님과의 대화가 더 긴밀해진다는 것이다. 가난하게 사는 것은 단순히 돈에 쪼들려 살면서 해야할 것을 아무것도 못하면서 산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나와 내 가정의 모든 필요를 내가 직접 모두 마련하고 장만한다는 욕심과 책임에서 벗어나서 전능하신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이다.
돈이 많을 때는 하나님을 찾을 이유가 그만큼 줄어든다.. 하지만, 가난 속에서 살면, 삶의 모든 부분을 하나님께 아뢰고,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실 것을 기도하게 된다. 부족한 가운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작은 공급에도 감사하게 되고, 그분이 내 삶에 개입하고 계심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 기도 응답에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며, 내 인생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방향과 속도를 조절하면서 살 수 있다.
가난은 내 자신을 믿고 사는 불신앙에서 나를 탈출시키고,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붙들고 의지하는 믿음의 삶으로 인도한다. 삶의 지극히 냉혹한 현실 가운데서 가난한 자의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그 냉혹함을 녹이는 따뜻한 불이며, 그 가운데 나는 하나님의 세밀하신 인도하심을 경험하는 역동적이고 살아 있는 믿음을 견지하게 된다.
그러한 가난은 이 세상에 보화를 쌓으려는 노력을 완전히 포기하고, 하늘의 보화를 쌓으려는 거룩한 욕심을 가질 때, 나에게 하나님의 크신 축복으로 다가온다. 내가 가진 것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내 놓을 수 있고, 내가 가진 것이 내 것이 아님을 고백하는 고백 가운데서 나는 내 소유 뿐만 아니라 내 존재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다. 내 인생의 주인이 주님인 것을 진심으로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피조물인 내가 하나님께 돌릴 수 있는 "유일한" 영광은, 하나님을 진정한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드리는 자발적인 가난은... 내 삶을 통해 그 분이 하나님되심을 인정하게 함으로써 나를 하나님께 진정으로 영광돌리는 삶으로 인도한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Posted at
오후 10:50:00
진정한 남성
"Men are easily threatened. And whenever a man is threatened, when he becomes uncomfortable in places within himself that he does not understand, he naturally retreats into an arena of comfort or competence, or he dominates someone or something in order to feel powerful. Men refuse to feel the paralyzing and humbling horror of uncertainty, a horror that could drive them to trust, a horror that could release in them the power to deeply give themselves in relationship. As a result, most men feel close to no one, especially not to God, and no one feels close to them.
현대사회의 남성성과 여성성은 참으로 많이 왜곡되어 있다. 최근에 성경적인 남성관에 대해서 깊이 연구하면서, 내 자신을 보게 된다. 내 안에 이 사회가, 문화가 강요하는 남성의 모습에 내 자신이 많이 억눌려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남자인 나에게 주신 남성성의 모든 좋은 것들을 오히려 억누르고, 죄악된 문화가 심어주는 좋지 않은 "남성성"을 내 스스로에게 강요하는 가운데, 내 자아가 상처받고 비뚤어져 있는 것을 깨달았다. 하나님은 나를 만드신 분이시다. 나를 인간으로 만드셨지만, 동시에 나를 남자로 만드셨다. 만드신 분이 나에 대해서 가장 정확하게 아시는 분이시다. 성경을 통해서 충분히 꽃피워야 할 내 안의 하나님께서 심어두신 남성성을 발견하고 또한 나에게 강요된 왜곡된 남성성을 제거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 제거작업은 내 안에 진정한 남성성을 발견하고 개발해 나갈 때 자연스럽게 없어질 수 있다.나 자신을 위해서, 내 가족을 위해서, 내가 속한 공동체를 위해서,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만드신 하나님을 위해서 꼭 필요한 작업이다.
"Something good in men is stopped and needs to get moving. When good movement stops, bad movement (retreat or domination) reliably develops." --from The Silence of Adam
현대사회의 남성성과 여성성은 참으로 많이 왜곡되어 있다. 최근에 성경적인 남성관에 대해서 깊이 연구하면서, 내 자신을 보게 된다. 내 안에 이 사회가, 문화가 강요하는 남성의 모습에 내 자신이 많이 억눌려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남자인 나에게 주신 남성성의 모든 좋은 것들을 오히려 억누르고, 죄악된 문화가 심어주는 좋지 않은 "남성성"을 내 스스로에게 강요하는 가운데, 내 자아가 상처받고 비뚤어져 있는 것을 깨달았다. 하나님은 나를 만드신 분이시다. 나를 인간으로 만드셨지만, 동시에 나를 남자로 만드셨다. 만드신 분이 나에 대해서 가장 정확하게 아시는 분이시다. 성경을 통해서 충분히 꽃피워야 할 내 안의 하나님께서 심어두신 남성성을 발견하고 또한 나에게 강요된 왜곡된 남성성을 제거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 제거작업은 내 안에 진정한 남성성을 발견하고 개발해 나갈 때 자연스럽게 없어질 수 있다.
Posted at
오후 10:25:00
보물 9
(2005년 3월 29일에 쓴 글)
지난 주일은 부활절이었다. 주일 아침에 두 애들 챙기고 분주히 집을 나섰다.
여느 때와 같이 차를 몰고 교회에 거의 도착했을 때, 둘째가 갑자기 물었다.
"아빠! 왜 맨날 똑같은 교회만 가요?"
"......"
지난 주일은 부활절이었다. 주일 아침에 두 애들 챙기고 분주히 집을 나섰다.
여느 때와 같이 차를 몰고 교회에 거의 도착했을 때, 둘째가 갑자기 물었다.
"아빠! 왜 맨날 똑같은 교회만 가요?"
"......"
Posted at
오전 5:42: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