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삶은 그리스도인의 지상과제이다. 모든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가장 근본적인 속성인 거룩에로 부르심을 받았고, 그들은 반드시 거룩해지는 삶을 살아야 한다. 삶의 거룩 지수가 날이 갈수록 높아지는 삶을 살아야 한다.
거룩한 삶... 어떤 것이 거룩한 삶일까? 어떤 행위들이 거룩할까?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언젠가 갖 결혼을 한 형제가 나에게 부부간의 성관계에 대해서 고민을 털어 놓은 적이 있었다. 아내와 성관계를 갖는 것이 뭔가 거룩하지 못하고 정결하지 못한 것으로 느껴져서 거리껴진다는 것이다.
비단 그 형제 뿐만 아니라, 소위 "믿음이 좋은" 형제 자매들은 분명히 성적인 것에 대해 거리끼는 마음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부부 사이에 성적인 문제로 고통스러워하는 경우의 많은 경우가 성 자체를 터부시하는 자매들에서 비롯된다는 것은 이미 많이 알려진 사실이다.
부부간의 성관계... 그것은 거룩하지 못한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2장에서 결혼이라는 제도를 만드셨다. 그리고 최초의 커플인 아담과 하와에에게 명령하셨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창 2:24)
For this reason a man shall leave his father and his mother, and be joined to his wife; and they shall become one flesh.(NASB)
하나님께서 최초의 부부에게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라고 명령하셨을 때, 그 의미는 다중적이다. 하지만 그 여러 의미들 중에서 가장 근본적인 부부간의 육체적 관계를 제외할 수는 없다. 한 남자와 한 여자를 남편과 아내로 부르신 하나님께서 그 둘에게 "원하시는" 것 중의 하나가 육체적인 결합이다.
이 후 성경 전반에 걸쳐서 부부간의 성관계에 대한 하나님의 입장은 너무 분명하다. 그것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부부의 관계로 맺어짐에 있어서 성관계는 필수적인 요소라는 것이다. 수 많은 성경의 본문 중의 하나가 바로 아래 말씀이다.
너희의 쓴 말에 대하여는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남편은 그 아내에게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찌라.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사단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전 7:1-5)
이 본문은 부부관계에서 성관계가 매우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어떤 원리에 의해서 성관계가 이루어져야 하는지도 명시하고 있다. 그것은 남편이나 아내나 자신의 몸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주장하도록, 즉 상대방이 성적 욕구가 있을 때 그것을 해소시켜 주는 것이 부부간의 도리라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 물론 그 요구가 폭력적이거나 강제적이어서는 절대 안된다는 것이 성경전체에서 말씀하시는 부부관계뿐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의 근본 원리인 것은 두 말할 나위 없다.
어쨋든 하나님께서는 결혼이라는 제도를 만드시고, 그 안에서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성적으로 결합하는 것을 반대하시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당연한 것으로 권장하고 계시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매우 기뻐하시는 일" 중의 하나인 것이다. 부부간에 있어서는 오히려 그런 관계를 터부시하며 거부하는 것이 거룩하지 못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성행위가 결혼이라는 제도를 벗어나 있거나, 그 제도 안에 있어도, 성경적 원리에 따르지 않을 때는 하나님께서 결코 기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는 모든 것은 죄이다.
결국 성행위 자체가 거룩과 거룩하지 못함을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얼마나 합치하느냐가 구별의 기준이 된다.
같은 원리로 본다면, 기도하는 것, 말씀보는 것, 예배드리는 것 등등 그 행위 자체로 매우 거룩해 보이는 행위들도 그것이 어떤 원리에 따라서 드려지느냐에 따라 거룩한 것이 될 수도 있고, 매우 사악한 것이 될 수도 있다. 주일에 예배를 드리지만, 그 자신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간절한 마음이 없이, 냉랭한 마음으로 자리만 차지하고 앉아 있는다면, 그 예배 행위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거룩한 행위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행위이고, 그것은 성경에서 가르치는 대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드려지는 행위이다. 그 행위는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것과 이웃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대로 드려지는 것만을 기쁘게 받으신다.(레위기 제사제도 참조)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할 터이나 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딤전 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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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깨어 근신할지라"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주의 날이 밤에 도적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적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지라(살전 5:1-6)
믿는 자들이 믿음 안에서 굳게 설 수 있는 한 가지 힘은 "주의 날"에 관한 약속이다. 예수님께서도 분명히 다시 오실 그 날, 심판의 날이자 동시에 기쁨의 날인 그 날에 대해서 말씀하셨고, 제자들, 특히 바울도 역시 그 날을 강조했다.
그리스도인으로 힘들고 지칠 때, "주의 날"을 기억하며, 이 세상이 영원하지 않음을 알고 인내로 견딜 수 있다.
죄악이 나를 유혹할 때, 혹은 죄 가운데 넘어져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때, "주의 날"은 우리로 하여금 죄에 더 이상 머물러 있지 못하게 하고, 주님 앞으로 다시 나아가게 한다. 어두움에 빠져 사는 것이 아니라 빛 가운데 거하며 내 자신을 거룩하고 정결하게 드리기를 힘쓰게 된다.
"주의 날"이 있음으로 인해 우리는 생명을 살리는 일에 긴박성을 가지고 임하여 더 열심으로 전할 수 있게 된다.
"주의 날"이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뭔가 이루어 보려고 하는 모든 욕심을 버리고, "주의 날"에 나를 평가하실 주님의 평가에 더 신경을 씀으로, 이 땅이 아니라 하늘에 보물을 쌓는 일에 더 열심을 낼 수 있다.
"주의 날"이 있기 때문에, 나에게 많은 달란트를 맡겨 주시고 떠나신 나의 주인이 돌아오시는 "주인의 날"이 있기 때문에, 나는 오늘 하루를 충성스럽게 살고자 하는 거룩한 욕심과 열망 가운데 나를 위한 삶이 아니라 그분을 위한 삶을 살게 된다.
믿는 자의 삶 가운데서 "주의 날"의 긴박성이 빠진다면, 그 믿음은 쉽게 흔들리고, 방황하게 된다. 하지만 "주의 날"에 대한 기대와 기다림이 강한 사람은 바울의 권면 대로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하는 가운데, 홀연히 임하시는 주님을 언제든지 맞이할 준비를 하는 지혜로운 자가 된다.
나는 오늘 이 시간, "주의 날"을 준비하며 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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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자들이 믿음 안에서 굳게 설 수 있는 한 가지 힘은 "주의 날"에 관한 약속이다. 예수님께서도 분명히 다시 오실 그 날, 심판의 날이자 동시에 기쁨의 날인 그 날에 대해서 말씀하셨고, 제자들, 특히 바울도 역시 그 날을 강조했다.
그리스도인으로 힘들고 지칠 때, "주의 날"을 기억하며, 이 세상이 영원하지 않음을 알고 인내로 견딜 수 있다.
죄악이 나를 유혹할 때, 혹은 죄 가운데 넘어져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때, "주의 날"은 우리로 하여금 죄에 더 이상 머물러 있지 못하게 하고, 주님 앞으로 다시 나아가게 한다. 어두움에 빠져 사는 것이 아니라 빛 가운데 거하며 내 자신을 거룩하고 정결하게 드리기를 힘쓰게 된다.
"주의 날"이 있음으로 인해 우리는 생명을 살리는 일에 긴박성을 가지고 임하여 더 열심으로 전할 수 있게 된다.
"주의 날"이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뭔가 이루어 보려고 하는 모든 욕심을 버리고, "주의 날"에 나를 평가하실 주님의 평가에 더 신경을 씀으로, 이 땅이 아니라 하늘에 보물을 쌓는 일에 더 열심을 낼 수 있다.
"주의 날"이 있기 때문에, 나에게 많은 달란트를 맡겨 주시고 떠나신 나의 주인이 돌아오시는 "주인의 날"이 있기 때문에, 나는 오늘 하루를 충성스럽게 살고자 하는 거룩한 욕심과 열망 가운데 나를 위한 삶이 아니라 그분을 위한 삶을 살게 된다.
믿는 자의 삶 가운데서 "주의 날"의 긴박성이 빠진다면, 그 믿음은 쉽게 흔들리고, 방황하게 된다. 하지만 "주의 날"에 대한 기대와 기다림이 강한 사람은 바울의 권면 대로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하는 가운데, 홀연히 임하시는 주님을 언제든지 맞이할 준비를 하는 지혜로운 자가 된다.
나는 오늘 이 시간, "주의 날"을 준비하며 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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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3:15:00
죄... 고통...
주일인 어제 저녁, 한 지체에게서 전화가 왔다.
전화를 받을 때부터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대화를 나누면서 죄의 유혹 가운데서 승리하지 못하고 늘 패배하는 자신에 대한 혐오와 한탄을 듣게 되었다.
급기야 그는 통곡하며 울기 시작했다.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할 정도로 울어대는 그 지체... 그 통곡은 절규였고, 그것은 반복되는 죄에 의 끈질긴 유혹을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자괴감의 탄성이었다. 그만큼 죄의 관성이 그를 힘 있게 붙들고 있었던 것이다. 벗어나고 싶지만, 깨끗하고 싶지만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죄의 종이 되어버린 자신에 대한 회한이었다. 엉엉 울어 대는 그 울음소리를 통해서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아픔을 볼 수 있었다.
마귀는 그렇게 한 인간을 물고 늘어지고 있었다. 저항할 수 없는 죄의 유혹, 그리고 그 유혹에 너무나 쉽게 반응해서 끌려가버리는 자아는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자신의 신앙의 모습, 믿는 자의 삶의 모습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 간극의 거리 만큼 자신에 대해 좌절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해 자라 가려고 노력하는 그,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보고자 하는 열망을 가진 그를, 주기적으로, 일 주일에 꼭 한 번씩, 나락으로 빠뜨리며 꼼짝 못하게 하는 사탄... 그는 거봐란듯이 웃으며 또 한 번의 승리를 만끽하며 쾌재를 부르고 있었으리라.
나도 할 말을 잃었다. 그로 하여금 계속 울도록 그냥 둘 수 밖에...
한참을 울게 그냥 둔 뒤에, 그의 삶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의 어린시절, 성장기의 시절, 그리고 나중에 우리 교회에 처음 왔을 때, 그리고 지금의 모습... 그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가 통곡하며 한탄스럽게 외쳤던 "변화 없이 죄의 유혹에 쉽게 너머지고 마는 자신의 모습"은 사실이 아님을 알려 주었다. 그의 일생을 통해서 죄인인 그를 하나님께서 얼마나 변화시켜 주셨는지, 그분의 인도하심과 변화를 불러오신 자비하신 능력의 역사를 같이 나누면서, 그는 결코 예전과 같이 않으며, 새로운 존재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 그가 믿음으로 취한 십자가의 능력, 그리고 그 안에서의 거룩한 성도의 모습.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죽고 그분으로 인해 다시 살게 되었다는 그 믿음의 고백이 어떻게 그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는지를 같이 나누었다.
그리고 또 한 번의 실패 가운데 너무 오래 있지 말고, 주님 앞으로 나아오라고 권면했다.
사람은 죄를 짓는 동안, 그리고 그 직후에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가 가장 필요한 때임에도 불구하고, "죄의식" 때문에 쉽게 그 앞으로 나아오지 못한다. 하지만 그것은 마귀가 노리는 속임수에 넘어가는 것이다.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주님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주님이 필요한 것이다.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을 안다면, 그분이 어떤 분인지를 안다면, 그 때가 바로 주님 앞으로 나아가 주님께 매달릴 수 있다.
그에게 당장 말씀을 묵상하고, 주님을 찬양하고, 주님께 회개와 간구의 기도를 드리라고 권했다.
전화 통화를 통해서 서서히 자신의 비참한 상태를 벗어나고 있는 그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말씀 앞으로 나아가겠다는 말과, 서로에 대한 사랑을 확인했다. 그리고 앞으로는 죄의 유혹이 자신을 엄습할 때, 지체없이 나에게 전화하라고 했다. 하나님을 찾으면 좋지만, 그 일에 있어 지속적으로 실패한 그에게, 눈에 보이는 누군가 의지할 사람이 필요했다. 그것이 나라면, 내가 언제든지 전화를 받을테니, 그 때마다 연락해서 같이 기도하고 권면하기로 했다.
죄의 유혹과 그 유혹에 쓰러져서 고통하는 한 지체의 일이지만, 나 또한 그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않다. 누구나에게 죄의 유혹은 있을 수 밖에 없으며, 언제나 유혹은 강하다. 강하지 않은 유혹은 이미 유혹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고, 정결과 거룩을 향해 나아가려는 갈망 가운데 있는 나에게, 왜 죄의 유혹이 사라지지 않고, 그 유혹과 싸우는 치열한 싸움이 끊이지 않을까? 그것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할까? 나는 늘 왜 이 모양일까? 예수님께서 친히 시험을 당하신 분으로서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신다고 말씀하셨는데, 왜 나에게는 시험을 이기게 하시는 예수님의 능력을 온전히 체험하지 못하는 것일까?
내가 진정으로 믿는 자라면, 다시 말해 나의 죄인됨으로 인해 십자가에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라면, 결코 그 전과 그 이후가 같을 수 없다. 그리고 날이 감에 따라 그 변화는 반드시 내 삶 가운데 있을 수 밖에 없다.
주님께서 나로 하여금 시험을 이길 수 있도도록 도우시는 방법은 몇 가지가 있다.
첫째는 시험이 시험이 아니게 만들어 버리시는 것이다. 죄의 유혹이 아예 유혹으로 느껴지지 않게 만들어 버리시는 것이다. 전에는 세상의 성공과 사람들의 인정이 나를 늘 유혹하였고, 내 자신을 드러내고, 내 자신이 영광을 받고자 하는 유혹에 너무 쉽게 넘어지는 자였다면, 그리스도를 알고 나서 그분을 체험할수록, 세상의 것들과 비교도 되지 않는 너무나 귀한 그분임을 알게 되고, 모든 영광이 그분께 돌려져야 함을 충분히 깨닫기 때문에 더 이상 내가 동일한 유혹을 "느끼지 조차" 못하는 자가 되어 버린다.
내 삶에 그런 변화들이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둘째, 특정한 죄의 유혹에 쉽게 빠지는 사람들 중의 상당수는 그 안에 있는 깊은 상처 때문이다. 성적으로 타락한 삶을 탐닉하는 형제들, 자신을 사랑해 줄 누군가가 없으면 살 수 없는 자매들 등등.. 그런 사람들의 내면에는 깊이 상처받은 자아가 자리잡고 있다. 그런 경우에는 아무리 성경적인 지식이 많고 체험을 많이 한다 하더라도 쉽게 유혹에 무너지고 만다. 주님은 십자가의 복음으로 그 상처를 치유하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다. 그분이 십자가에 돌아가시면서 우리의 상처까지도 같이 십자가에 못박으셨다는 사실, 그리고 우리 안에 그분의 영이 사시고, 그분이 내 안의 더 많은 영역을 장악하시고, 어두운 구석에 치유의 광선인 빛을 비추시기 때문에 내 안의 상처들이 오로지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으로 완전한 치유를 경험한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하심으로써, 죄의 유혹이 나를 엄습할 때,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고, 하나님의 아파하시는 마음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다. 그럼으로써 죄악의 습관에 물든 우리의 본성이 죄에 민감하게 반응하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하시고, 적당한 말씀을 떠올리게 하심으로써 그 죄악의 유혹을 물리치게 도우시는 것이다.
언제나, 죄의 유혹을 물리치기는 결코 쉽지 않다. 심지어 예수님조차도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을 때, 가볍게 이기신 것이 아니다. 유혹이 유혹인 한에 있어서는 언제나 나를 무너뜨릴 파워를 가지고 나에게 다가 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어떤 경우에도 우리가 잊어서는 안되는 사실 한 가지는, 나의 주인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그 죄악의 권세와 파워보다도 훨씬 더 크신 분이시며, 넉넉히 이길 힘을 가지신 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죄와 싸워보려고 하지 말고, 주인되신 주님을 붙잡고 의지함으로 그분께 맡기고, 그분의 그늘 아래 숨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죄의 유혹은 반드시 우리를 고통으로 인도한다. 하지만 주님께 피하는 자는 기쁨과 승리를 얻게 될 것이다.
사랑하는 내 지체가 주님으로 인해 동일한 죄의 유혹을 물리치고 승리함으로 그 입가에 환한 미소를 지을 그날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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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를 받을 때부터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대화를 나누면서 죄의 유혹 가운데서 승리하지 못하고 늘 패배하는 자신에 대한 혐오와 한탄을 듣게 되었다.
급기야 그는 통곡하며 울기 시작했다.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할 정도로 울어대는 그 지체... 그 통곡은 절규였고, 그것은 반복되는 죄에 의 끈질긴 유혹을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자괴감의 탄성이었다. 그만큼 죄의 관성이 그를 힘 있게 붙들고 있었던 것이다. 벗어나고 싶지만, 깨끗하고 싶지만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죄의 종이 되어버린 자신에 대한 회한이었다. 엉엉 울어 대는 그 울음소리를 통해서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아픔을 볼 수 있었다.
마귀는 그렇게 한 인간을 물고 늘어지고 있었다. 저항할 수 없는 죄의 유혹, 그리고 그 유혹에 너무나 쉽게 반응해서 끌려가버리는 자아는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자신의 신앙의 모습, 믿는 자의 삶의 모습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 간극의 거리 만큼 자신에 대해 좌절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해 자라 가려고 노력하는 그,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보고자 하는 열망을 가진 그를, 주기적으로, 일 주일에 꼭 한 번씩, 나락으로 빠뜨리며 꼼짝 못하게 하는 사탄... 그는 거봐란듯이 웃으며 또 한 번의 승리를 만끽하며 쾌재를 부르고 있었으리라.
나도 할 말을 잃었다. 그로 하여금 계속 울도록 그냥 둘 수 밖에...
한참을 울게 그냥 둔 뒤에, 그의 삶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의 어린시절, 성장기의 시절, 그리고 나중에 우리 교회에 처음 왔을 때, 그리고 지금의 모습... 그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가 통곡하며 한탄스럽게 외쳤던 "변화 없이 죄의 유혹에 쉽게 너머지고 마는 자신의 모습"은 사실이 아님을 알려 주었다. 그의 일생을 통해서 죄인인 그를 하나님께서 얼마나 변화시켜 주셨는지, 그분의 인도하심과 변화를 불러오신 자비하신 능력의 역사를 같이 나누면서, 그는 결코 예전과 같이 않으며, 새로운 존재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 그가 믿음으로 취한 십자가의 능력, 그리고 그 안에서의 거룩한 성도의 모습.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죽고 그분으로 인해 다시 살게 되었다는 그 믿음의 고백이 어떻게 그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는지를 같이 나누었다.
그리고 또 한 번의 실패 가운데 너무 오래 있지 말고, 주님 앞으로 나아오라고 권면했다.
사람은 죄를 짓는 동안, 그리고 그 직후에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가 가장 필요한 때임에도 불구하고, "죄의식" 때문에 쉽게 그 앞으로 나아오지 못한다. 하지만 그것은 마귀가 노리는 속임수에 넘어가는 것이다.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주님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주님이 필요한 것이다.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을 안다면, 그분이 어떤 분인지를 안다면, 그 때가 바로 주님 앞으로 나아가 주님께 매달릴 수 있다.
그에게 당장 말씀을 묵상하고, 주님을 찬양하고, 주님께 회개와 간구의 기도를 드리라고 권했다.
전화 통화를 통해서 서서히 자신의 비참한 상태를 벗어나고 있는 그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말씀 앞으로 나아가겠다는 말과, 서로에 대한 사랑을 확인했다. 그리고 앞으로는 죄의 유혹이 자신을 엄습할 때, 지체없이 나에게 전화하라고 했다. 하나님을 찾으면 좋지만, 그 일에 있어 지속적으로 실패한 그에게, 눈에 보이는 누군가 의지할 사람이 필요했다. 그것이 나라면, 내가 언제든지 전화를 받을테니, 그 때마다 연락해서 같이 기도하고 권면하기로 했다.
죄의 유혹과 그 유혹에 쓰러져서 고통하는 한 지체의 일이지만, 나 또한 그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않다. 누구나에게 죄의 유혹은 있을 수 밖에 없으며, 언제나 유혹은 강하다. 강하지 않은 유혹은 이미 유혹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고, 정결과 거룩을 향해 나아가려는 갈망 가운데 있는 나에게, 왜 죄의 유혹이 사라지지 않고, 그 유혹과 싸우는 치열한 싸움이 끊이지 않을까? 그것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할까? 나는 늘 왜 이 모양일까? 예수님께서 친히 시험을 당하신 분으로서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신다고 말씀하셨는데, 왜 나에게는 시험을 이기게 하시는 예수님의 능력을 온전히 체험하지 못하는 것일까?
내가 진정으로 믿는 자라면, 다시 말해 나의 죄인됨으로 인해 십자가에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라면, 결코 그 전과 그 이후가 같을 수 없다. 그리고 날이 감에 따라 그 변화는 반드시 내 삶 가운데 있을 수 밖에 없다.
주님께서 나로 하여금 시험을 이길 수 있도도록 도우시는 방법은 몇 가지가 있다.
첫째는 시험이 시험이 아니게 만들어 버리시는 것이다. 죄의 유혹이 아예 유혹으로 느껴지지 않게 만들어 버리시는 것이다. 전에는 세상의 성공과 사람들의 인정이 나를 늘 유혹하였고, 내 자신을 드러내고, 내 자신이 영광을 받고자 하는 유혹에 너무 쉽게 넘어지는 자였다면, 그리스도를 알고 나서 그분을 체험할수록, 세상의 것들과 비교도 되지 않는 너무나 귀한 그분임을 알게 되고, 모든 영광이 그분께 돌려져야 함을 충분히 깨닫기 때문에 더 이상 내가 동일한 유혹을 "느끼지 조차" 못하는 자가 되어 버린다.
내 삶에 그런 변화들이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둘째, 특정한 죄의 유혹에 쉽게 빠지는 사람들 중의 상당수는 그 안에 있는 깊은 상처 때문이다. 성적으로 타락한 삶을 탐닉하는 형제들, 자신을 사랑해 줄 누군가가 없으면 살 수 없는 자매들 등등.. 그런 사람들의 내면에는 깊이 상처받은 자아가 자리잡고 있다. 그런 경우에는 아무리 성경적인 지식이 많고 체험을 많이 한다 하더라도 쉽게 유혹에 무너지고 만다. 주님은 십자가의 복음으로 그 상처를 치유하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다. 그분이 십자가에 돌아가시면서 우리의 상처까지도 같이 십자가에 못박으셨다는 사실, 그리고 우리 안에 그분의 영이 사시고, 그분이 내 안의 더 많은 영역을 장악하시고, 어두운 구석에 치유의 광선인 빛을 비추시기 때문에 내 안의 상처들이 오로지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으로 완전한 치유를 경험한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하심으로써, 죄의 유혹이 나를 엄습할 때,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고, 하나님의 아파하시는 마음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다. 그럼으로써 죄악의 습관에 물든 우리의 본성이 죄에 민감하게 반응하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하시고, 적당한 말씀을 떠올리게 하심으로써 그 죄악의 유혹을 물리치게 도우시는 것이다.
언제나, 죄의 유혹을 물리치기는 결코 쉽지 않다. 심지어 예수님조차도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을 때, 가볍게 이기신 것이 아니다. 유혹이 유혹인 한에 있어서는 언제나 나를 무너뜨릴 파워를 가지고 나에게 다가 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어떤 경우에도 우리가 잊어서는 안되는 사실 한 가지는, 나의 주인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그 죄악의 권세와 파워보다도 훨씬 더 크신 분이시며, 넉넉히 이길 힘을 가지신 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죄와 싸워보려고 하지 말고, 주인되신 주님을 붙잡고 의지함으로 그분께 맡기고, 그분의 그늘 아래 숨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죄의 유혹은 반드시 우리를 고통으로 인도한다. 하지만 주님께 피하는 자는 기쁨과 승리를 얻게 될 것이다.
사랑하는 내 지체가 주님으로 인해 동일한 죄의 유혹을 물리치고 승리함으로 그 입가에 환한 미소를 지을 그날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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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4:42:00
기도...
그저께 저녁에 집에 오니 잠에 든 예연이가 아빠에게 편지를 남겼다.
내용은 너무 단순한데, 예연이 스러운 그 표현과 장식, 그리고 예연이와 내가 알 수 있는 "I found this"라는 말이 참 정감이 있었다. 예연이가 발견한 것은 얼마 전에 예연이의 스쿠터에서 빠져서 분실된 부품의 일부였다. 예연이와 나 사이에 같이 공유하는 삶의 한 부분이기 때문에 그 전의 스토리는 모두 생략된 채 "I found this"라는 짧은 말 한 마디에 그 위에 그 부품을 올려 놓은 것이다. 편지를 읽으며 나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바로 알았다. 예연이와 내가 공유하는 삶의 한 스토리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예연이는 짧게 자신의 필요를 말한다. 군더더기 하나 없이 간단 명료하지만, 거기에는 아빠에 대한 큰 신뢰가 담겨 있다. 그것은 아빠에게 말하면 들어 줄 것이라는 것. 긴 편지로 나를 설득하지 않아도, 그 책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음을 호소하지 않아도, 자신의 필요를 아빠가 판단하고 채워줄 것이라는 믿음이 거기에 담겨 있다.
내가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를 생각해 본다. 너무 많은 군더더기들... 화려한 수사들... 그리고 나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시는 하나님을 대하는 듯한 기도의 태도... 그 모든 것은 불필요한 것인데... 그저 아빠 되시는 하나님과 삶을 공유함으로, "I found this"라고 짧게 말씀드려도 아빠이신 하나님께서 고개를 끄덕이시며 그 맥락을 이해하시는 삶... 그분과 늘 동행하며 함께하는 삶이 없다면 그런 기도가 불가능한 것인데... 그리고 그분께 나의 필요를 말씀드리는 기도...
"Child Is the Father of Man"이라고 영국 낭만주의의 태두였던 William Wordsworth가 말했다. 오늘 그것이 (다른 맥락이긴 하지만) 절실히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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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10:21:00
구원... 하나님의 강권적인 은혜...
구원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택하신 자들에게 베푸시는 전적인 은혜요 선물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택하신 자"에 대해서 고개를 갸우뚱하며 질문을 던진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에게만 구원을 주시면, 구원을 못받는 것은 하나님 책임 아니냐는 것이다. 아무리 받고 싶어도 하나님께서 택하지 않으셨다면, 결코 받을 수 없는 것이니, 내가 지옥 간다면, 하나님 책임이라는 것, 그래서 하나님은 편협하고 괴팍한 노인네 같은 존재라고 조롱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결코 진실이 아님을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 많은 비유를 들어가면서 하나님을 위한 변론을 한다. 그 비유는 아주 많지만 몇 가지만 추려서 대충 내용을 말하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은혜는 진수성찬으로 차려진 밥상과 같다. 하나님께서 정성을 들여 모든 음식을 다 해 놓으셨고, 인간인 우리는 떠 먹기만 하면 된다. (혹은 떡 먹여 주는 것까지 하나님께서 하시는데, 우리는 입만 벌려 먹기만 하면 된다.) 모든 것을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셨는고, 우리의 공로는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우리는 그냥 입을 벌려 먹기만 하면 되는데, 먹지 않는다면, 그래서 굶어 죽었다면, 누구탓이냐?
물에 빠져 거의 죽어가는 사람이 있다. 이제는 죽을 힘을 다해 고개를 내밀었다가 가까이 다가온 구조대가 던진 밧줄이 손가락에 닿았다. 그것만 잡으면 살 수 있다. 그런데 만약 그것을 잡지 않았다면 누구 책임이냐?
죽을 병에 걸려 침상에 누워있다. 어떤 약으로도 고칠 수 없지만, 그 병을 깨끗이 고칠 수 있는 약이 단 한 개가 있고, 그것이 바로 침대 옆에 누워 있다. 환자는 그 약을 얻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누군가 그 병에 죽는다는 것을 들은 사람이 그 약을 구해서 가져다 주었다. 이제 그 약을 입에 넣어 주려고 할 때, 입을 벌리지 않아서 그 약을 못먹는다면 그것은 누구 잘못이냐?
대충 그런 설명이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위한 모든 것을 베푸셨고, 인간은 그것을 취하기만 하면 되는데, 그것을 취하지 않는 것을 누구의 탓으로 돌려야 하느냐는 것이다. 구원을 위한 모든 공로는 하나님께서 다 해 놓으셨지만, 인간이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의 탓이지 하나님의 탓이 아니다라는 매우 설득력 있는 비유이다.
이 비유들이 매우 유용함에도 불구하고, 여기에는 심각한 오류가 있다. 많은 진리를 드러내 보여주는 비유이지만, 자칫 오해하게 만들 수 있는 요소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 비유대로 한다면, 진수성찬에 앉아 있는 사람은 입을 벌려 먹을 능력이 없는 이미 죽은 사람이라는 것,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빠져 죽은 자라는 것, 죽을 병에 걸려 죽어가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죽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이미 죽은 상태로 태어난다. 그리고 죽은 상태로 살아간다.
그는 완전히 죽어 있기 때문에,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 앞에 있다 하더라도, 심지어 그것을 입에 떠 먹여서 입안 가득히 담아 준다 하더라도 그것을 맛보고 먹을 능력이 없는 죽은 자들이라는 것이다.
죽은 자들은 식욕이 없다. 그리고 삶에 욕구도 없다. 죽어가는 자는 아직 생명이 조금 남아 있기 때문에 그것을 유지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지만, 이미 죽은 자는 생명의 구원에 대한 소망이 없는 자들이다.
인간인 우리는 바로 그런 자들이라는 것. 그것이 좋은 의도로 만들어 낸 그 비유들이 놓치고 있는 중요한 포인트이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갈 1:11-12)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택하신 자"에 대해서 고개를 갸우뚱하며 질문을 던진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에게만 구원을 주시면, 구원을 못받는 것은 하나님 책임 아니냐는 것이다. 아무리 받고 싶어도 하나님께서 택하지 않으셨다면, 결코 받을 수 없는 것이니, 내가 지옥 간다면, 하나님 책임이라는 것, 그래서 하나님은 편협하고 괴팍한 노인네 같은 존재라고 조롱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결코 진실이 아님을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 많은 비유를 들어가면서 하나님을 위한 변론을 한다. 그 비유는 아주 많지만 몇 가지만 추려서 대충 내용을 말하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은혜는 진수성찬으로 차려진 밥상과 같다. 하나님께서 정성을 들여 모든 음식을 다 해 놓으셨고, 인간인 우리는 떠 먹기만 하면 된다. (혹은 떡 먹여 주는 것까지 하나님께서 하시는데, 우리는 입만 벌려 먹기만 하면 된다.) 모든 것을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셨는고, 우리의 공로는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우리는 그냥 입을 벌려 먹기만 하면 되는데, 먹지 않는다면, 그래서 굶어 죽었다면, 누구탓이냐?
물에 빠져 거의 죽어가는 사람이 있다. 이제는 죽을 힘을 다해 고개를 내밀었다가 가까이 다가온 구조대가 던진 밧줄이 손가락에 닿았다. 그것만 잡으면 살 수 있다. 그런데 만약 그것을 잡지 않았다면 누구 책임이냐?
죽을 병에 걸려 침상에 누워있다. 어떤 약으로도 고칠 수 없지만, 그 병을 깨끗이 고칠 수 있는 약이 단 한 개가 있고, 그것이 바로 침대 옆에 누워 있다. 환자는 그 약을 얻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누군가 그 병에 죽는다는 것을 들은 사람이 그 약을 구해서 가져다 주었다. 이제 그 약을 입에 넣어 주려고 할 때, 입을 벌리지 않아서 그 약을 못먹는다면 그것은 누구 잘못이냐?
대충 그런 설명이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위한 모든 것을 베푸셨고, 인간은 그것을 취하기만 하면 되는데, 그것을 취하지 않는 것을 누구의 탓으로 돌려야 하느냐는 것이다. 구원을 위한 모든 공로는 하나님께서 다 해 놓으셨지만, 인간이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의 탓이지 하나님의 탓이 아니다라는 매우 설득력 있는 비유이다.
이 비유들이 매우 유용함에도 불구하고, 여기에는 심각한 오류가 있다. 많은 진리를 드러내 보여주는 비유이지만, 자칫 오해하게 만들 수 있는 요소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 비유대로 한다면, 진수성찬에 앉아 있는 사람은 입을 벌려 먹을 능력이 없는 이미 죽은 사람이라는 것,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빠져 죽은 자라는 것, 죽을 병에 걸려 죽어가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죽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이미 죽은 상태로 태어난다. 그리고 죽은 상태로 살아간다.
그는 완전히 죽어 있기 때문에,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 앞에 있다 하더라도, 심지어 그것을 입에 떠 먹여서 입안 가득히 담아 준다 하더라도 그것을 맛보고 먹을 능력이 없는 죽은 자들이라는 것이다.
죽은 자들은 식욕이 없다. 그리고 삶에 욕구도 없다. 죽어가는 자는 아직 생명이 조금 남아 있기 때문에 그것을 유지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지만, 이미 죽은 자는 생명의 구원에 대한 소망이 없는 자들이다.
인간인 우리는 바로 그런 자들이라는 것. 그것이 좋은 의도로 만들어 낸 그 비유들이 놓치고 있는 중요한 포인트이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갈 1:11-12)
복음은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고 비롯될 수도 없다. 이미 죽은 자들에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을 만들 수는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셔야 했고, 그래서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그 길을 만드셔야 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미 죽은 자들, 바로 앞에 밥상을 차려줘도 전혀 알지 못하고 먹지도 못하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셨다. 그들이 죽어 있을 때 이미 십자가로 생명의 길을 내 주시고, 죽어 있는 영혼에 감각을 주셔서 생명의 맛볼 수 있게 하셨고 온전히 생명 가운데 거하게 하셨다.
그것이 그분의 은혜다. 당신의 택하신 자들... 죽어 있지만, 그 기쁘신 뜻을 따라 살리기를 원하신 자들에게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놀라운 일을 행하신 것이다. 그 과정에서 필요한 모든 일을 100% 하나님 당신 혼자서 처리하셨고, 우리는 그저 옮김을 받은, 다시 말해 눈떠보니 살아 있는 경험을 한 것이다. 그것이 복음이고 그것이 은혜고 그것이 생명이다. 이 구원의 과정에서 구원받은 자가 스스로를 자랑할 것이 조금도 없음은 분명하다.
구원받지 못한 자의 구원받지 못함에 대한 책임은 밥을 못떠먹거나 밧줄을 안 잡거나, 입을 벌리지 않고 약을 안 먹거나 하는 데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들의 책임은 이미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 넣은 죄를 지은 책임에서 물어야 한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죄를 지은 자는 모두 죽음의 형벌을 받는 것이 하나님 나라에서의 법이다. 그 법에 따라서 죄를 지은 모든 자들은 매우 정당하게 법에 따라 죽음의 형벌을 받아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자신이 죽어 있게 된 것에 대한 책임을 따져야 할 뿐, 죽어있는 자신을 구원하지 않은 하나님께 그 책임을 돌릴 수는 없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죄로 인해 죽는다.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내가 죄를 짓는 데 어떠한 역할도 하지 않으셨다. 그것은 전적으로 나의 선택이다. 책임은 전적으로 죄를 지은 자신에게 있다. 입이 백 개, 아니 천 개라도 하나님 앞에서 할 말이 없는 인생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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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10:38:00
행복
모든 사람은 행복해지기를 원한다. 행복이란 삶에 만족을 느끼며, 무탈하게 잘 지내는 상태, 그래서 거기에서 기쁨을 느끼는 상태를 말한다.
문제는 그런 상태가 되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있어야 하는 것이 무엇이냐, 즉 무엇이 행복을 가져다 주느냐이다. 사람들마다 나름대로, 행복하기 위한 조건들이 있다. 사실상 우리가 행복을 말할 때는 어떤 상태를 가리키는 경우도 있지만, 더 많은 경우에는 그 행복의 조건, 그리고 그 조건들이 얼마나 충족되었는가에 관심이 있다.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환유법적으로 표현하자면, 나에게 있어서 행복은 무엇인가?
나에게 그 답이 분명히 있는지, 그리고 그 답이 정말 맞는 답인지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모든 사람들은 행복하기 위해서 뭔가를 추구해 간다. 대부분의 경우, 돈, 명예, 안락함, 건강, 좋은 인간관계, 본능적 욕구의 만족(즉, 쾌락), 소유 등등이다.
'돈이 좀 더 있다면 행복할텐데...'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는다면 정말 행복할텐데..'
'건강하면 행복할텐데...'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서로 사랑하는 관계가 된다면 행복할텐데...'
'나에게 여자(남자)친구 혹은 남편(아내)가 있으면 행복할텐데...'
'내 아이가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등등 수 없이 많은 행복의 이유와 조건들이 있다.
진정으로 그 행복을 위한 조건들이 나를 행복하게 할까? 그리고 그것들에 의해 주어진 "행복"이라는 것이 오래도록 지속되는 것으로 나를 행복한 "상태"에 머물게 할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위의 것들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행복한 사람들"이어야 한다. 재벌들, 헐리우드 스타들, 소위 잘나간다는 많은 사람들은 지극히 행복한 사람들이어야 한다. 그들 중 대부분은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싶어하는 것을 거의 다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며칠 전에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 내려 자살한 삼성전자의 부사장은 51세의 한창 나이에, 서울대와 스탠포드대학에서 공부했고, 최고로 인정받으며 삼성전자에 파격적인 대우로 입사했고, 승승장구하면서 초고속으로 승진했다. 벌어들인 돈만 하더라도 막대한 수익을 올렸다. 그런 그가 왜 자살했을까?
인간의 비극은 "행복의 조건"을 잘못 찾는 데서 비롯된다. 세상 사람들이 행복한 삶을 누리기 위해 그토록 얻고자 하는 그것들은 결코 행복을 가져다 주지 않는다는 것이 성경의 진리이다. 그것들은 신기루일 뿐, 그리고 마약처럼, 처음 성취했을 때는 황홀함을 가져다 주지만, 얼마 안 있어 쓴뿌리를 남기고 더 큰 성취라는 자극을 찾아서 나서야 하는 행복을 찾는 영적 하이에나로 전락시켜버릴 뿐이다. 그것이 성경의 분명한 진리이다. 참으로 개탄스러운 것은 그 성경의 진리로 사람들을 참 행복과 참 생명으로 바르게 인도해야할 교회조차 타락한 나머지, "하나님의 이름과 능력"을 이용해서 그런 조건들을 성취해 내는 방법(순전히 사기다!)을 가르치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이 정의한 자신의 행복을 돌아보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그의 행복의 조건, 아니 그의 표현대로 말하면 그에게 있어서 행복이란... "the knowledge of God"이다. 하나님을 더 알아가는 것, 하나님을 더 체험해 가는 것, 하나님과 깊은 교제 가운데 그분의 하나님되심을 더 깨달아가는 것... 그것이 어거스틴이 정의한 자신의 행복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성경적인 행복의 정의이다. 그 행복은 영원하며, 결코 사라지거나 줄어들거나 빼앗기지 않을 행복이다.
어거스틴의 행복이 바로 내 행복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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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그런 상태가 되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있어야 하는 것이 무엇이냐, 즉 무엇이 행복을 가져다 주느냐이다. 사람들마다 나름대로, 행복하기 위한 조건들이 있다. 사실상 우리가 행복을 말할 때는 어떤 상태를 가리키는 경우도 있지만, 더 많은 경우에는 그 행복의 조건, 그리고 그 조건들이 얼마나 충족되었는가에 관심이 있다.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환유법적으로 표현하자면, 나에게 있어서 행복은 무엇인가?
나에게 그 답이 분명히 있는지, 그리고 그 답이 정말 맞는 답인지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모든 사람들은 행복하기 위해서 뭔가를 추구해 간다. 대부분의 경우, 돈, 명예, 안락함, 건강, 좋은 인간관계, 본능적 욕구의 만족(즉, 쾌락), 소유 등등이다.
'돈이 좀 더 있다면 행복할텐데...'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는다면 정말 행복할텐데..'
'건강하면 행복할텐데...'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서로 사랑하는 관계가 된다면 행복할텐데...'
'나에게 여자(남자)친구 혹은 남편(아내)가 있으면 행복할텐데...'
'내 아이가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등등 수 없이 많은 행복의 이유와 조건들이 있다.
진정으로 그 행복을 위한 조건들이 나를 행복하게 할까? 그리고 그것들에 의해 주어진 "행복"이라는 것이 오래도록 지속되는 것으로 나를 행복한 "상태"에 머물게 할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위의 것들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행복한 사람들"이어야 한다. 재벌들, 헐리우드 스타들, 소위 잘나간다는 많은 사람들은 지극히 행복한 사람들이어야 한다. 그들 중 대부분은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싶어하는 것을 거의 다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며칠 전에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 내려 자살한 삼성전자의 부사장은 51세의 한창 나이에, 서울대와 스탠포드대학에서 공부했고, 최고로 인정받으며 삼성전자에 파격적인 대우로 입사했고, 승승장구하면서 초고속으로 승진했다. 벌어들인 돈만 하더라도 막대한 수익을 올렸다. 그런 그가 왜 자살했을까?
인간의 비극은 "행복의 조건"을 잘못 찾는 데서 비롯된다. 세상 사람들이 행복한 삶을 누리기 위해 그토록 얻고자 하는 그것들은 결코 행복을 가져다 주지 않는다는 것이 성경의 진리이다. 그것들은 신기루일 뿐, 그리고 마약처럼, 처음 성취했을 때는 황홀함을 가져다 주지만, 얼마 안 있어 쓴뿌리를 남기고 더 큰 성취라는 자극을 찾아서 나서야 하는 행복을 찾는 영적 하이에나로 전락시켜버릴 뿐이다. 그것이 성경의 분명한 진리이다. 참으로 개탄스러운 것은 그 성경의 진리로 사람들을 참 행복과 참 생명으로 바르게 인도해야할 교회조차 타락한 나머지, "하나님의 이름과 능력"을 이용해서 그런 조건들을 성취해 내는 방법(순전히 사기다!)을 가르치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이 정의한 자신의 행복을 돌아보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그의 행복의 조건, 아니 그의 표현대로 말하면 그에게 있어서 행복이란... "the knowledge of God"이다. 하나님을 더 알아가는 것, 하나님을 더 체험해 가는 것, 하나님과 깊은 교제 가운데 그분의 하나님되심을 더 깨달아가는 것... 그것이 어거스틴이 정의한 자신의 행복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성경적인 행복의 정의이다. 그 행복은 영원하며, 결코 사라지거나 줄어들거나 빼앗기지 않을 행복이다.
어거스틴의 행복이 바로 내 행복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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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3:48:00
삶의 여유...
내가 오랫동안 좋아해 왔던 찬양이다. 이 찬양이 내 마음에 울림이 되고, 지금까지도 내 삶을 돌아보며 평가하는 기준의 하나가 되고 있다. 이 찬양의 가사 중 특히 나를 돌아보게 하는 것은 두 가지가 있다.
1. "비교하기 보다는 나 자신을 가꿔가고"
세상에서의 삶은 경쟁 가운데서의 삶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고 비교당한다. 비교의 결과는 두 가지다. 남보다 낫다고 생각하면 우월감, 못하다고 생각하면 열등감. 우월감과 열등감 사이를 오가는 것이 인생이다.
비교의 인생. 비교로 인해 자신의 가치가 평가되는 인생은 피곤한 인생이다. 그리고 비참한 인생이다. 세상에는 항상 나보다 잘나거나 많이 가진 자가 넘쳐난다. 그들 앞에서 나는 늘 보잘 것 없는 자로 인식이 되고, 하나님께서 이미 베푸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지 못하도록 막는다. 심지어 십자가의 은혜조차도 작은 것으로 취급되어버리는 것이 이 "비교"하는 인생의 비극이다.
비교의 틀에서 벗어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남과의 비교가 아니라 하나님과 나의 관계 속에서 나를 평가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 있는 나,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나,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하심 속에 있는 나를 바라보고, 나에게 이미 베푸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 앞에 부끄럽고, 죄송할 수 밖에 없는 죄된 모습과 연약한 모습을 들고 그분 앞에 무릎꿇는 삶이 바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이다. 그 삶 속에 진정한 자유가 있고, 만족이 있고, 기쁨이 있다.
인생을 살아오는 동안, 내가 이 진리를 잠시라도 잊어 버렸을 때, 내가 얼마나 비참한 가운데 처하게 되는지를 여러번 경험했다. 이 찬양은 나를 돌아보게 하고, 내가 남과 비교하는 가운데 삶의 방향을 잃어버리고 허덕이며 살아가는지, 아니면 주님과 함께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하며, 그분이 소망하시는 내 삶을 가꾸어 가고 있는 삶을 사는지를 평가하게 된다.
2. "삶에 지친 사람들 찾아와 쉬어 가도록 우리 맘 속에 누군가의 자리 남겨두며 살아요."
현대 사회는 바쁘게 돌아간다. 모두들 바쁘다. 여유가 없다. 생존을 위해서, 살아 남기 위해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쏟아 부어도 어려운 상황이기 때문이다. 내가 살기도 힘든 판에, 남을 돌아볼 여유는 그저 사치일 뿐이다. 그것이 세상살이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죄악된 인간이 죄악된 세상 가운데서 죄악의 노예로 살아가는 모습을 뿐, 결코 천국백성의 삶의 원리가 될 수는 없다.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빌 2:4)
사도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이 말을 한 바로 직후에, 그런 삶의 모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그 예로 보여주고 있다. 예수께서 바로 그런 삶을 사신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으로 부르심을 받은 나는 어떠해야하는가?
내것을 챙기기도 힘들다. 논문을 쓰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어야 하는지 모른다. 이미 내 능력의 한계를 넘어선다는 느낌이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낭비없이 쏟아 부어도 어려운 상황이다. 하지만 그것을 느낄 때마다, 내가 바쁘고 힘들다고 느낄 때마다, 나는 이 가사를 생각한다.
내가 아무리 바쁘더라도, 힘들고 연약한 지체들이 찾아와서 쉬고 힘을 얻을 자리는 남겨 두어야 한다는 것. 그들을 위해 그늘이 되고 쉼터가 되는 것을 포기하는 순간, 내가 아무리 열심히 삶을 살고, 많은 것을 이룬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결코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내 스스로에게 일깨운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라도 나 아닌 남을 위한 여유를 남겨두고, 그 여유를 제외한 모든 것을 최선을 다하고 그 결과에 만족해야 한다.
나는 이 두 가지의 삶의 원리를 소중히 여긴다. 그리고 내 딸들도 그런 삶을 살기를 바란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에게 이 노래를 자장가로 불러 준다. 태어나기 전부터 그들에게 불러준 찬양이다. 지금은 그 뜻을 잘 알지 못하겠지만, 언젠가 아빠의 마음을 이해하고, 이 가사대로 살아가는 믿음의 아이들이 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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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2:02:00
"저는 내게 대하여 길한 일은 예언하지 아니하고 흉한 일만 예언하기로 내가 저를 미워하나이다"
여호사밧이 가로되 이 외에 우리가 물을만한 여호와의 선지자가 여기 있지 아니하니이까? 이스라엘 왕이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오히려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 한 사람이 있으니 저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물을 수 있으나 저는 내게 대하여 길한 일은 예언하지 아니하고 흉한 일만 예언하기로 내가 저를 미워하나이다. 여호사밧이 가로되 왕은 그런 말씀을 마소서 이스라엘 왕이 한 내시를 불러 이르되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로 속히 오게 하라 하니라. 이스라엘 왕과 유다 왕 여호사밧이 왕복을 입고 사마리아 문어귀 광장에서 각기 보좌에 앉았고 모든 선지자가 그 앞에서 예언을 하는데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는 철로 뿔들을 만들어 가지고 말하되 여호와의 말씀이 왕이 이것들로 아람 사람을 찔러 진멸하리라 하셨다 하고 모든 선지자도 그와 같이 예언하여 이르기를 길르앗 라못으로 올라가 승리를 얻으소서 여호와께서 그 성을 왕의 손에 붙이시리이다 하더라. 미가야를 부르러 간 사자가 일러 가로되 선지자들의 말이 여출일구하여 왕에게 길하게 하니 청컨대 당신의 말도 저희 중 한 사람의 말처럼 길하게 하소서 미가야가 가로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것 곧 그것을 내가 말하리라 하고 이에 왕에게 이르니 왕이 저에게 이르되 미가야야 우리가 길르앗 라못으로 싸우러 가랴 말랴? 저가 왕께 이르되 올라가서 승리를 얻으소서. 여호와께서 그 성을 왕의 손에 붙이시리이다. 왕이 저에게 이르되 내가 몇번이나 너로 맹세케 하여야 네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진실한 것으로만 내게 고하겠느냐? 저가 가로되 내가 보니 온 이스라엘이 목자 없는 양 같이 산에 흩어졌는데 여호와의 말씀이 이 무리가 주인이 없으니 각각 평안히 그 집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이스라엘 왕이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저 사람이 내게 대하여 길한 것을 예언하지 아니하고 흉한 것을 예언하겠다고 당신에게 말씀 하지 아니하였나이까?(왕상 22:7-18)
이스라엘 왕인 아합이 미가야 선지자를 끔찍히 싫어 했던 이유는, 미가야가 자신에 대해서 늘 부정적인 예언을 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아합 뿐만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 점을 보기 위해서 점집을 찾을 때, 그들이 듣고 싶은 것은 모든 것이 잘 된다는 것이고, 만약 그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흉(凶)한 화(禍)를 피하고 길(吉)한 복(福)을 얻을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들려진 것이 "진리"인가에는 사실 관심이 없다.
아합은 지극히 악한 왕이었다. 그가 행한 모든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었고,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그는 우상들을 적극적으로 좇았으며, 하나님께 정면으로 대적하기를 서슴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하나님께서 그런 그에게 미가야를 보내신 것은, 그를 끝까지 사랑하심으로 그 자리에서 돌이키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미가야를 통해서 아합이 듣기 싫은 흉한 예언만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하나님께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지적하시며 돌이키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아합은 그 흉한 예언을 들으면서 가슴을 찢고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적인 메시지를 전한 선지자를 미워했다. 그리고 그를 도외시하였으며, 그가 드디어 그 앞에 와서 바른 말로 말씀할 때에도 그를 핍박했을 뿐, 결코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가 의존한 것은 그의 귀에 듣기에 좋은 말을 쏟아내는 거짓 선지자들이었다. 그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진리에는 관심이 없는 자들이었고, 맹인들이었다. 대신 왕의 마음을 파악하는데 전문가들이었다. 왕이 무슨 말을 듣기를 원하는지를 파악하고, 그 마음에 있는 것을 들려주는 자들이었다.
아합은 결국 음악처럼 들리고, 자신의 소망에 긍정적인 확신을 주는 거짓선지자들의 말을 믿었다. 그리고 전쟁에 나가서 결국은 죽임을 당했다. 그의 피는 들에서 개가 핥았다.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이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늘 내 귀에 달콤한 것은 결코 아니다. 때로는 내 폐부를 찌르는 고통의 말씀이기도 하고, 때로는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순종을 요구하는 말씀이기도 하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고통을 주시고, 파멸의 길로 인도하시기를 기뻐하셔서가 결코 아니다. 그것을 바로 내 자신이 죄악 가운데 있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을 온전히 내 주인으로, 왕으로 모시지 못하고 다른 것을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늘 지극히 선하신 분이시다. 때로 내 삶에 큰 고통이 주님에게서 비롯되었다고 생각될 때에도 그것을 잊으면 절대 안된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며,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을 베푸시는 분이시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주님의 말씀 앞에 바로 서려고 늘 노력해도, 내 스스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말씀에서 벗어나 있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 말씀을 들고 나에게 쓴소리를 해줄 미가야 같은 사람이 내 곁에 있는가? 비록 흉한 말, 듣기 싫은 말, 기분나쁘게 하는 말이라 할지라도, 주님의 말씀을 들고 나에게 다가와 경책하며 돌이키도록 권면할 사람이 내 주위에 있는가? 아니, 나는 그런 사람을 하나님의 선지자로 알고 그 전해지는 말씀을 진지하게 받고 그 앞에 무릎꿇을 수 있는 사람인가? 아니면 "저는 내게 대하여 길한 일은 예언하지 아니하고 흉한 일만 예언하기로 내가 저를 미워하나이다"라며 인상을 찌뿌리는 사람인가?
다윗이 위대한 이유는 그가 죄를 짓지 않는 자여서가 아니라, 그 자신이 영적인 어둠움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께서 보내신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자신을 책망하는 말씀과 저주의 예언이 선포되었을 때 보이는 그의 반응에 있다.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삼하 12:13)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를 경책하는 자를 옆에 둔 사람은 하나님의 지극히 큰 사랑을 받는 자이며, 큰 복을 누리는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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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왕인 아합이 미가야 선지자를 끔찍히 싫어 했던 이유는, 미가야가 자신에 대해서 늘 부정적인 예언을 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아합 뿐만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 점을 보기 위해서 점집을 찾을 때, 그들이 듣고 싶은 것은 모든 것이 잘 된다는 것이고, 만약 그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흉(凶)한 화(禍)를 피하고 길(吉)한 복(福)을 얻을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들려진 것이 "진리"인가에는 사실 관심이 없다.
아합은 지극히 악한 왕이었다. 그가 행한 모든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었고,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그는 우상들을 적극적으로 좇았으며, 하나님께 정면으로 대적하기를 서슴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하나님께서 그런 그에게 미가야를 보내신 것은, 그를 끝까지 사랑하심으로 그 자리에서 돌이키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미가야를 통해서 아합이 듣기 싫은 흉한 예언만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하나님께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지적하시며 돌이키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아합은 그 흉한 예언을 들으면서 가슴을 찢고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적인 메시지를 전한 선지자를 미워했다. 그리고 그를 도외시하였으며, 그가 드디어 그 앞에 와서 바른 말로 말씀할 때에도 그를 핍박했을 뿐, 결코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가 의존한 것은 그의 귀에 듣기에 좋은 말을 쏟아내는 거짓 선지자들이었다. 그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진리에는 관심이 없는 자들이었고, 맹인들이었다. 대신 왕의 마음을 파악하는데 전문가들이었다. 왕이 무슨 말을 듣기를 원하는지를 파악하고, 그 마음에 있는 것을 들려주는 자들이었다.
아합은 결국 음악처럼 들리고, 자신의 소망에 긍정적인 확신을 주는 거짓선지자들의 말을 믿었다. 그리고 전쟁에 나가서 결국은 죽임을 당했다. 그의 피는 들에서 개가 핥았다.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이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늘 내 귀에 달콤한 것은 결코 아니다. 때로는 내 폐부를 찌르는 고통의 말씀이기도 하고, 때로는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순종을 요구하는 말씀이기도 하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고통을 주시고, 파멸의 길로 인도하시기를 기뻐하셔서가 결코 아니다. 그것을 바로 내 자신이 죄악 가운데 있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을 온전히 내 주인으로, 왕으로 모시지 못하고 다른 것을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늘 지극히 선하신 분이시다. 때로 내 삶에 큰 고통이 주님에게서 비롯되었다고 생각될 때에도 그것을 잊으면 절대 안된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며,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을 베푸시는 분이시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주님의 말씀 앞에 바로 서려고 늘 노력해도, 내 스스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말씀에서 벗어나 있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 말씀을 들고 나에게 쓴소리를 해줄 미가야 같은 사람이 내 곁에 있는가? 비록 흉한 말, 듣기 싫은 말, 기분나쁘게 하는 말이라 할지라도, 주님의 말씀을 들고 나에게 다가와 경책하며 돌이키도록 권면할 사람이 내 주위에 있는가? 아니, 나는 그런 사람을 하나님의 선지자로 알고 그 전해지는 말씀을 진지하게 받고 그 앞에 무릎꿇을 수 있는 사람인가? 아니면 "저는 내게 대하여 길한 일은 예언하지 아니하고 흉한 일만 예언하기로 내가 저를 미워하나이다"라며 인상을 찌뿌리는 사람인가?
다윗이 위대한 이유는 그가 죄를 짓지 않는 자여서가 아니라, 그 자신이 영적인 어둠움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께서 보내신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자신을 책망하는 말씀과 저주의 예언이 선포되었을 때 보이는 그의 반응에 있다.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삼하 12:13)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를 경책하는 자를 옆에 둔 사람은 하나님의 지극히 큰 사랑을 받는 자이며, 큰 복을 누리는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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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7:41:00
사랑... 진노... 감사... 두려움...
지난 금요일 저녁.
목장모임을 마치고 11시가 넘어서 집에 도착했다. 목장모임에서 받은 은혜로 아내와 나는 참 기분이 좋았다.
아이들은 피곤했는지 차에서 내리자 마자 바로 아파트 문앞으로 향했다. 그리고 나와 아내는 짐들을 챙기고 차 문을 잠그고 아이들의 뒤를 따랐다.
우리가 없는 그 짧은 사이. 아이들 사이에 뭔가 문제가 생겼다. 하연이는 뭔가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집으로 들어가고, 예연이는 엄마에게 와서 하소연을 했다.
"언니가 #^%$*&^%(&^*^@@!$라고 말했어요!"라며 도움을 요청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와 아내는 화가 머리 끝까지 올랐다. 입에 담을 수 없는 험악한 말을 했던 것이다. 나는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집에 먼저 들어와 있는 하연이에게 사실확인을 먼저 했다. 정말 그 말을 했는지... 하연이는 그렇게 말했다고 수긍했다.
나는 그 즉시 하연이를 데리고 애들 방에 들어가서 무릎을 꿇게 하고 손을 들게 했다. 그 벌이 너무 가벼운 것 같아서 그 손 위에 책 두권을 올려 놓았다. 그 때까지도 하연이는 자신이 얼마나 큰 잘못을 했는지 깨닫지 못하는 듯 했다. 올린 손으로 장난도 치고, 가끔씩 약간의 미소도 머금으며, '이러다 말겠지...'라고 생각하는 듯 했다.
나는 작심을 하고 무서운 목소리와 얼굴로 하연이에게 하연이의 그 말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를 일러 주었다. 아빠의 목소리와 얼굴을 통해서 사태가 가벼운 것이 아닌 것을 깨달은 하연이는 점점 더 진지해 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말했다.
"I didn't mean it..."
그 말 한 마디로 왜 그렇게까지 화를 내느냐는 듯한 조심스러운 항변이었다. 나는 그 말의 이면에 숨은 하연이의 증오와 미움을 이야기 했고,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살인하는 것과 같닥 말씀하셨다는 것. 그래서 그 미움이 얼마나 큰 죄인지, 하나님께서 그 죄에 대해서 얼마나 진노하고 계시는지를 말씀을 들어 설명했다.
그 설명을 들으면서 하연이는 자신 안에 있는 동생에 대한 미움과 거기에서 비롯된 자신의 독설이 얼마나 나쁜 것인지를 깨닫는 것 같았다.
얼마 후에는 나에게 용서해 달라고 빌었다. 그리고 벌서는 것이 너무 힘들다며 하소연을 했다.
나는 하연이의 죄에 대한 나의 실망과 분노, 그리고 하나님의 실망과 분노에 대해서 더 자세하게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그 분노 만큼 고통의 벌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는 것을 주지시켰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난 후, 올라간 손에서 느끼는 고통으로 인해 하연이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측은하기도 했고, 잘 시간이 이미 너무 많이 지난 아이에게 계속 벌을 주는 것이 바른 것인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지만, 이번 기회에 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진노를 하지는지, 그리고 그 죄가 다른 사람과 하나님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하는지, 그리고 궁극에 있어서 자기 자신에게 해가 되는지를 확실하게 주지시켜 주고 싶은 마음이 더 강해졌다. 내가 너무 사랑하는 내 딸이기에, 죄를 지극히 미워하시는 하나님을 알도록 도와주는 것이 그의 신앙인생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기에, 더더욱 분명히 그의 뇌리에 그 사실을 각인시키고 싶었다.
하연이가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 지 한참이 지났을 때에도 나는 그 옆에 앉아만 있었을 뿐, 손을 내리게 하지 않았다. 내 마음에도 고통이 있었지만, 그래서 그만 자게 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힘들어 하는 하연이를 보면서 말했다.
"네가 아픈 만큼, 너로 인해서 아픔을 겪은 예연이를 생각해봐. 너의 말과 너의 미워하는 죄는 다른 사람과 하나님의 마음을 네가 느끼는 아픔보다 더 크게 아픔을 가져다 주는거야."
"예... 알겠어요.."
"네가 뭘 잘못했는지 알겠어?"
"예.. 예연이 미워하고, 나쁜 말을 한 거요..."
"그게 하나님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하는지도 알겠어?"
"예... 잘못했어요..."
그 대화가 있고난 후 잠시의 침묵이 흐른 뒤, 하연이에게 손을 내리도록 하고, 씻고 나서 침대에 오르도록 했다.
침대에 누워 있는 하연이 옆에 나도 누웠다. 그리고 물었다.
"아빠가 하연이를 미워하는 것 같아?"
"예..."
"그게 아니야... 아빠가 미워하는 것은 하연이가 아니라 하연이가 품는 동생을 미워하는 마음과 그 나쁜 말이야.. 아빠는 한 번도 하연이를 미워한 적이 없어. 하연이는 아빠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거든... 그거 알아?"
"예... 알아요..."
"아빠가 왜 화가났는지 알겠어?"
"예... 알것 같아요.."
"아빠는 하연이가 공부도 열심히하고, 아빠도 잘 도와주고, 때로는 예연이에게 잘 대해주고 하는 여러가지 좋은 것들에 대해서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아빠의 딸로서 하연이를 사랑해. 그런데 아빠가 그렇게 좋아하고 아끼는 딸인 하연이 안에 그런 나쁜 마음이 있고, 그것으로 나쁜 말이 입으로 나오는 것을 볼 때, 아빠의 가슴이 너무 아픈거야. 너를 사랑하니까... 하나님도 마찬가지이지.. 아빠보다도 하연이를 더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하연이 안에 죄가 있는 것을 보실 때 얼마나 가슴이 아프실까?"
"......"
"아빠는 하연이를 야단치는 지금도 하연이를 향한 사랑은 변함이 없어. 아빠는 하연이의 죄를 야단치는거야. 하연이가 그 미워하는 마음을 버리고, 동생을 사랑하게 된다면, 하나님도 그렇고 아빠도 너무 기쁠거야... 이해해?"
"예.. 미안해요, 아빠."
"그럼 이제 기도하자. 동생을 미워하는 마음을 품고 나쁜말을 한 것은 하나님께 죄를 지은거야. 그러니 하나님 잘못했어요라고 말씀드리고, 이제 그런 마음이 들지 않고 동생을 사랑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하자."
그리고 하연이와 나는 같이 기도를 했다. 간절히...
"I love you, 하연."
"I love you, daddy."
그리고 하연이는 곧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전날 밤에 심하게 야단 맞은 하연이...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서 밝은 모습으로 나에게 뽀뽀하고, 내 품에 안기는 하연이... 그리고 예연이에게 최선을 다해 좋게 대하려고 노력하는 하연이를 보면서, 참 감사했다.
하연이가 하나님께서 그 영혼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것을 알고 감사하며, 동시에 죄에 대해서 진노하시는 그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그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죄에서 멀어지는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 성장해 나가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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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장모임을 마치고 11시가 넘어서 집에 도착했다. 목장모임에서 받은 은혜로 아내와 나는 참 기분이 좋았다.
아이들은 피곤했는지 차에서 내리자 마자 바로 아파트 문앞으로 향했다. 그리고 나와 아내는 짐들을 챙기고 차 문을 잠그고 아이들의 뒤를 따랐다.
우리가 없는 그 짧은 사이. 아이들 사이에 뭔가 문제가 생겼다. 하연이는 뭔가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집으로 들어가고, 예연이는 엄마에게 와서 하소연을 했다.
"언니가 #^%$*&^%(&^*^@@!$라고 말했어요!"라며 도움을 요청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와 아내는 화가 머리 끝까지 올랐다. 입에 담을 수 없는 험악한 말을 했던 것이다. 나는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집에 먼저 들어와 있는 하연이에게 사실확인을 먼저 했다. 정말 그 말을 했는지... 하연이는 그렇게 말했다고 수긍했다.
나는 그 즉시 하연이를 데리고 애들 방에 들어가서 무릎을 꿇게 하고 손을 들게 했다. 그 벌이 너무 가벼운 것 같아서 그 손 위에 책 두권을 올려 놓았다. 그 때까지도 하연이는 자신이 얼마나 큰 잘못을 했는지 깨닫지 못하는 듯 했다. 올린 손으로 장난도 치고, 가끔씩 약간의 미소도 머금으며, '이러다 말겠지...'라고 생각하는 듯 했다.
나는 작심을 하고 무서운 목소리와 얼굴로 하연이에게 하연이의 그 말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를 일러 주었다. 아빠의 목소리와 얼굴을 통해서 사태가 가벼운 것이 아닌 것을 깨달은 하연이는 점점 더 진지해 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말했다.
"I didn't mean it..."
그 말 한 마디로 왜 그렇게까지 화를 내느냐는 듯한 조심스러운 항변이었다. 나는 그 말의 이면에 숨은 하연이의 증오와 미움을 이야기 했고,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살인하는 것과 같닥 말씀하셨다는 것. 그래서 그 미움이 얼마나 큰 죄인지, 하나님께서 그 죄에 대해서 얼마나 진노하고 계시는지를 말씀을 들어 설명했다.
그 설명을 들으면서 하연이는 자신 안에 있는 동생에 대한 미움과 거기에서 비롯된 자신의 독설이 얼마나 나쁜 것인지를 깨닫는 것 같았다.
얼마 후에는 나에게 용서해 달라고 빌었다. 그리고 벌서는 것이 너무 힘들다며 하소연을 했다.
나는 하연이의 죄에 대한 나의 실망과 분노, 그리고 하나님의 실망과 분노에 대해서 더 자세하게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그 분노 만큼 고통의 벌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는 것을 주지시켰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난 후, 올라간 손에서 느끼는 고통으로 인해 하연이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측은하기도 했고, 잘 시간이 이미 너무 많이 지난 아이에게 계속 벌을 주는 것이 바른 것인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지만, 이번 기회에 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진노를 하지는지, 그리고 그 죄가 다른 사람과 하나님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하는지, 그리고 궁극에 있어서 자기 자신에게 해가 되는지를 확실하게 주지시켜 주고 싶은 마음이 더 강해졌다. 내가 너무 사랑하는 내 딸이기에, 죄를 지극히 미워하시는 하나님을 알도록 도와주는 것이 그의 신앙인생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기에, 더더욱 분명히 그의 뇌리에 그 사실을 각인시키고 싶었다.
하연이가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 지 한참이 지났을 때에도 나는 그 옆에 앉아만 있었을 뿐, 손을 내리게 하지 않았다. 내 마음에도 고통이 있었지만, 그래서 그만 자게 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힘들어 하는 하연이를 보면서 말했다.
"네가 아픈 만큼, 너로 인해서 아픔을 겪은 예연이를 생각해봐. 너의 말과 너의 미워하는 죄는 다른 사람과 하나님의 마음을 네가 느끼는 아픔보다 더 크게 아픔을 가져다 주는거야."
"예... 알겠어요.."
"네가 뭘 잘못했는지 알겠어?"
"예.. 예연이 미워하고, 나쁜 말을 한 거요..."
"그게 하나님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하는지도 알겠어?"
"예... 잘못했어요..."
그 대화가 있고난 후 잠시의 침묵이 흐른 뒤, 하연이에게 손을 내리도록 하고, 씻고 나서 침대에 오르도록 했다.
침대에 누워 있는 하연이 옆에 나도 누웠다. 그리고 물었다.
"아빠가 하연이를 미워하는 것 같아?"
"예..."
"그게 아니야... 아빠가 미워하는 것은 하연이가 아니라 하연이가 품는 동생을 미워하는 마음과 그 나쁜 말이야.. 아빠는 한 번도 하연이를 미워한 적이 없어. 하연이는 아빠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거든... 그거 알아?"
"예... 알아요..."
"아빠가 왜 화가났는지 알겠어?"
"예... 알것 같아요.."
"아빠는 하연이가 공부도 열심히하고, 아빠도 잘 도와주고, 때로는 예연이에게 잘 대해주고 하는 여러가지 좋은 것들에 대해서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아빠의 딸로서 하연이를 사랑해. 그런데 아빠가 그렇게 좋아하고 아끼는 딸인 하연이 안에 그런 나쁜 마음이 있고, 그것으로 나쁜 말이 입으로 나오는 것을 볼 때, 아빠의 가슴이 너무 아픈거야. 너를 사랑하니까... 하나님도 마찬가지이지.. 아빠보다도 하연이를 더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하연이 안에 죄가 있는 것을 보실 때 얼마나 가슴이 아프실까?"
"......"
"아빠는 하연이를 야단치는 지금도 하연이를 향한 사랑은 변함이 없어. 아빠는 하연이의 죄를 야단치는거야. 하연이가 그 미워하는 마음을 버리고, 동생을 사랑하게 된다면, 하나님도 그렇고 아빠도 너무 기쁠거야... 이해해?"
"예.. 미안해요, 아빠."
"그럼 이제 기도하자. 동생을 미워하는 마음을 품고 나쁜말을 한 것은 하나님께 죄를 지은거야. 그러니 하나님 잘못했어요라고 말씀드리고, 이제 그런 마음이 들지 않고 동생을 사랑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하자."
그리고 하연이와 나는 같이 기도를 했다. 간절히...
"I love you, 하연."
"I love you, daddy."
그리고 하연이는 곧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전날 밤에 심하게 야단 맞은 하연이...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서 밝은 모습으로 나에게 뽀뽀하고, 내 품에 안기는 하연이... 그리고 예연이에게 최선을 다해 좋게 대하려고 노력하는 하연이를 보면서, 참 감사했다.
하연이가 하나님께서 그 영혼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것을 알고 감사하며, 동시에 죄에 대해서 진노하시는 그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그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죄에서 멀어지는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 성장해 나가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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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4:36:00
[펌]아내의 저축...
(2006.03.01에 다른 곳에 작성한 글)
저녁식사를 하러 집에 갔다. 식사를 하면서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 중에 돈문제가 있었다. 경제적으로 넉넉치 않을 형편이다보니 통장의 잔고와 신용카드 사용이 항상 체크의 대상이 된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아내로부터 나 몰래 현금 잔금을 모은 것이 500불 가량 된다는 말을 들었다. 가난한 남편과 살아가는 아내로서 아이들이 아프거나 하는 비상 시에 대비할 뭔가가 필요했던 것이다.
아내로부터 500불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순간, 오래전 아내와 만나서 데이트하던 시절이 생각났다. 같은 대학에 다니는 우리였지만 캠퍼스의 다른 지체들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우리는 "밖"에서 주로 만났다. 그러다 보니 데이트 자금이 좀 필요했다. 경제적으로 넉넉치 못한 나였기 때문에, 그리고 그 사정을 너무 잘 아는 아내였기 때문에 데이트 비용을 분담하는 경우가 많았다. 아내도 특별히 돈을 벌고 있지 않고 부모님으로부터 용돈을 타서 쓰는 상황이라 그리 여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어느날 그녀가 통장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지나가는 말로... 초등학교때부터 한푼 두푼 모았다던 그 통장. 그 때까지 쓰지 않고 있었던 고사리 손으로 모아 왔던 그 통장. 이제 그 돈이 아내의 데이트 자금으로 조금씩 사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미안함. 고마움. 서운함. 안타까움. 사랑스러움. 등등의 감정이 당시 내 마음을 가득 채웠던 기억이 난다. 그 말을 하는 아내로부터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의 모습이 겹쳐서 나에게 다가오는 것 같은 느낌. 고마움... 그리고 그 소중한 추억이 담긴 통장을 나 때문에 써야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미안함...
전에 학교 다닐 때 김소운씨의 "가난한 날의 행복"이라는 수필집이 있었다. 당시에는 참 욕도 많이 얻어 먹었던 내용이었다. 진짜 가난이 담겨있지 않는 동화같은 내용이라는 둥. 김소운씨의 아들이 사기죄로 감옥살이를 하는 것을 빗대어 가난에 대한 교육을 못시켰다는 둥...
하지만 여러 비판에도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은, 가난을 이겨내는 부부의 사랑이었던 것 같다. 거기에는 하나같이 아내를 가난으로 이끈 남편들의 미안함과 죄스러움, 그리고 그 가난 속에서도 남편을 존중하과 의지하는 아내들의 아름다운 마음들이 있었다.
저녁식사를 하면서 아내에 대해서 수년전 데이트 하던 시절에 느꼈던 그 감정, 그리고 김소운씨의 글에 등장하는 가난한 남편들과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아내... 항상 미안하면서도 고마운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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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식사를 하러 집에 갔다. 식사를 하면서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 중에 돈문제가 있었다. 경제적으로 넉넉치 않을 형편이다보니 통장의 잔고와 신용카드 사용이 항상 체크의 대상이 된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아내로부터 나 몰래 현금 잔금을 모은 것이 500불 가량 된다는 말을 들었다. 가난한 남편과 살아가는 아내로서 아이들이 아프거나 하는 비상 시에 대비할 뭔가가 필요했던 것이다.
아내로부터 500불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순간, 오래전 아내와 만나서 데이트하던 시절이 생각났다. 같은 대학에 다니는 우리였지만 캠퍼스의 다른 지체들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우리는 "밖"에서 주로 만났다. 그러다 보니 데이트 자금이 좀 필요했다. 경제적으로 넉넉치 못한 나였기 때문에, 그리고 그 사정을 너무 잘 아는 아내였기 때문에 데이트 비용을 분담하는 경우가 많았다. 아내도 특별히 돈을 벌고 있지 않고 부모님으로부터 용돈을 타서 쓰는 상황이라 그리 여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어느날 그녀가 통장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지나가는 말로... 초등학교때부터 한푼 두푼 모았다던 그 통장. 그 때까지 쓰지 않고 있었던 고사리 손으로 모아 왔던 그 통장. 이제 그 돈이 아내의 데이트 자금으로 조금씩 사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미안함. 고마움. 서운함. 안타까움. 사랑스러움. 등등의 감정이 당시 내 마음을 가득 채웠던 기억이 난다. 그 말을 하는 아내로부터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의 모습이 겹쳐서 나에게 다가오는 것 같은 느낌. 고마움... 그리고 그 소중한 추억이 담긴 통장을 나 때문에 써야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미안함...
전에 학교 다닐 때 김소운씨의 "가난한 날의 행복"이라는 수필집이 있었다. 당시에는 참 욕도 많이 얻어 먹었던 내용이었다. 진짜 가난이 담겨있지 않는 동화같은 내용이라는 둥. 김소운씨의 아들이 사기죄로 감옥살이를 하는 것을 빗대어 가난에 대한 교육을 못시켰다는 둥...
하지만 여러 비판에도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은, 가난을 이겨내는 부부의 사랑이었던 것 같다. 거기에는 하나같이 아내를 가난으로 이끈 남편들의 미안함과 죄스러움, 그리고 그 가난 속에서도 남편을 존중하과 의지하는 아내들의 아름다운 마음들이 있었다.
저녁식사를 하면서 아내에 대해서 수년전 데이트 하던 시절에 느꼈던 그 감정, 그리고 김소운씨의 글에 등장하는 가난한 남편들과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아내... 항상 미안하면서도 고마운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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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5:49:00
보물찾기...
초등학교 때, 소풍을 가면 자주 하는 것이 보물찾기였다. 여기저기 숨겨놓은 쪽지를 찾아내서 가져오면, 거기에 맞는 상을 주는 보물찾기... 어떤 친구들은 네 개, 혹은 다섯 개도 찾는 경우가 있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하나 혹은 둘을 찾아서 신나게 선생님께 가면, 선생님이 준비한 상을 주셨다.
나는... 거의 항상... 단 한 개도 찾지 못했다. 정말 이상하리만치 나에게는 그 "보물"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바로 내 눈 앞에 있는데도 나에게는 그것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 옆에서 친구가 손으로 가리켜 보여 줘야 그제서야 보인다는 사실... 참으로 희한한 일이었다. 내가 보물찾기 게임에서 상을 탄 적이 있다면, 그것은 친구가 나를 데리고 다니면서 보물이 있는 곳을 알려 줬거나, 아니면 여러개를 찾은 아이들이 불쌍해서 하나 건네 준 것을 받은 것으로 상을 탄 경우이다. 불쌍한 내 인생...
나는 뭔가를 찾는 것을 잘 못한다. 집에서의 서열이 맨 끝에서 두번째였던 나는 아버지, 어머니, 두 형의 심부름을 많이 해야 했다.(물론 내 유일한 동생인 막내 녀석처럼 많이 하지는 않았지만...) 하지만 그 심부름이 어디 가서 뭘 찾아오라는 심부름이라면, 나는 제대로 해 본 적이 없다. 그것을 너무 잘 아는 가족들은 "찾는" 심부름을 거의 시키지 않았다.
결혼 한 뒤, 아내는 그 사실을 잘 몰랐기 때문에, 나에게 뭔가를 찾아 달라는 부탁을 자주 했다. 그리고 물건을 찾지 못하는 나에게 때로는 비난도 하고, 때로는 한심하게 여기기도 했다. 바로 눈 앞에 있는데 그것을 못 보기 때문에... 충분히 이해할 만 하다. 요즘... 아내는 그 부분에 있어서는 포기를 한 것 같다. 아내가 바쁜 일로 정신없을 때, 가끔씩 나에게 뭔가를 찾아 달라고 부탁한다. 하지만 대부분 잘 찾지 못하는 나를 비난하지는 않는다. 원래 그렇다는 것을 알고 체념했기 때문이다.
왜 내 눈에는 그런 것들이 잘 안 보이는 것일까? 나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예외인 경우가 딱 한 경우가 있다. 그것은 말씀을 볼 때... 성경말씀을 읽을 때는 성경에 담겨있는 보물들, 맨눈으로는 쉽게 찾을 수 없는 깊은 뜻들이 나에게는 너무나 쉽게 발견이 된다. 책을 펼치면, 보화로 깔려 있는 땅, 금 광맥과 같이 하나님의 뜻과 진리가 넘쳐나는 것을 본다. 때로는 일별(一瞥)하여 보이지 않는 것도, 조금만 더 들여다 보면, 보물을 보게 된다. 말씀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을 만지게 되고, 이 세상에서 결코 없어지지 않을 진리가 내 눈에 들어와 박힌다.
그것이 내게 주어진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생각이 든다. 만약 그 반대였다면 어땠을까? 세상에서 살면서 자신을 이롭게 하는 것들에 대해서 매우 민감하게 잘 포착하고, 세상적인 보물들을 그렇게 잘 발견하면서도, 성경에서 아무 것도 건지지 못하는 그런 사람이었다면? 세상적으로는 부요한 자가 되었겠지만, 영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가난한 자가 되었을까?
세상의 보물을 향한 나의 눈을 멀게 하시고, 주님의 진리의 보물을 발견하는 눈을 열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게 된다. Spiritual treasure hunter로서 주님이 주시는 영적인 풍성함을 마음껏 누리며 살다가, 주님 앞에 보물을 들고 나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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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거의 항상... 단 한 개도 찾지 못했다. 정말 이상하리만치 나에게는 그 "보물"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바로 내 눈 앞에 있는데도 나에게는 그것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 옆에서 친구가 손으로 가리켜 보여 줘야 그제서야 보인다는 사실... 참으로 희한한 일이었다. 내가 보물찾기 게임에서 상을 탄 적이 있다면, 그것은 친구가 나를 데리고 다니면서 보물이 있는 곳을 알려 줬거나, 아니면 여러개를 찾은 아이들이 불쌍해서 하나 건네 준 것을 받은 것으로 상을 탄 경우이다. 불쌍한 내 인생...
나는 뭔가를 찾는 것을 잘 못한다. 집에서의 서열이 맨 끝에서 두번째였던 나는 아버지, 어머니, 두 형의 심부름을 많이 해야 했다.(물론 내 유일한 동생인 막내 녀석처럼 많이 하지는 않았지만...) 하지만 그 심부름이 어디 가서 뭘 찾아오라는 심부름이라면, 나는 제대로 해 본 적이 없다. 그것을 너무 잘 아는 가족들은 "찾는" 심부름을 거의 시키지 않았다.
결혼 한 뒤, 아내는 그 사실을 잘 몰랐기 때문에, 나에게 뭔가를 찾아 달라는 부탁을 자주 했다. 그리고 물건을 찾지 못하는 나에게 때로는 비난도 하고, 때로는 한심하게 여기기도 했다. 바로 눈 앞에 있는데 그것을 못 보기 때문에... 충분히 이해할 만 하다. 요즘... 아내는 그 부분에 있어서는 포기를 한 것 같다. 아내가 바쁜 일로 정신없을 때, 가끔씩 나에게 뭔가를 찾아 달라고 부탁한다. 하지만 대부분 잘 찾지 못하는 나를 비난하지는 않는다. 원래 그렇다는 것을 알고 체념했기 때문이다.
왜 내 눈에는 그런 것들이 잘 안 보이는 것일까? 나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예외인 경우가 딱 한 경우가 있다. 그것은 말씀을 볼 때... 성경말씀을 읽을 때는 성경에 담겨있는 보물들, 맨눈으로는 쉽게 찾을 수 없는 깊은 뜻들이 나에게는 너무나 쉽게 발견이 된다. 책을 펼치면, 보화로 깔려 있는 땅, 금 광맥과 같이 하나님의 뜻과 진리가 넘쳐나는 것을 본다. 때로는 일별(一瞥)하여 보이지 않는 것도, 조금만 더 들여다 보면, 보물을 보게 된다. 말씀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을 만지게 되고, 이 세상에서 결코 없어지지 않을 진리가 내 눈에 들어와 박힌다.
그것이 내게 주어진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생각이 든다. 만약 그 반대였다면 어땠을까? 세상에서 살면서 자신을 이롭게 하는 것들에 대해서 매우 민감하게 잘 포착하고, 세상적인 보물들을 그렇게 잘 발견하면서도, 성경에서 아무 것도 건지지 못하는 그런 사람이었다면? 세상적으로는 부요한 자가 되었겠지만, 영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가난한 자가 되었을까?
세상의 보물을 향한 나의 눈을 멀게 하시고, 주님의 진리의 보물을 발견하는 눈을 열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게 된다. Spiritual treasure hunter로서 주님이 주시는 영적인 풍성함을 마음껏 누리며 살다가, 주님 앞에 보물을 들고 나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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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3:28:00
갈대 지팡이
애굽의 모든 거민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애굽은 본래 이스라엘 족속에게 갈대 지팡이라. 그들이 너를 손으로 잡은즉 네가 부러져서 그들의 모든 어깨를 찢었고 그들이 너를 의지한즉 네가 부러져서 그들의 모든 허리로 흔들리게 하였느니라.(겔 29:6-7)
비록 바벨론이 세력을 얻던 시대에 애굽은 예전과 같은 초강대국으로서의 위용을 잃긴 했지만, 그래도 큰 나라였다. 바벨론의 침략을 받은 유다로서는 의지할 바가 애굽밖에는 없었다... 하나님을 제외하고는...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징벌을 받지 않으려고 하면서, 애굽을 의지하려는 유다백성들에게 눈물을 흘리며 호소하였다.
"바벨론은 너희와 너희 조상들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이다. 그 징계를 받아라. 70년 후면 하나님께서 너희들을 이 땅으로 돌리실 것이다!"
하지만, 그의 말을 귀담아 듣는 자들은 거의 없었다. 그들은 결코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아니었지만, 최후의 순간, 위기의 순간에 자신들의 조상신 야웨가 그들을 보호하시고, 그들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이라고 굳게 믿었다. 자신들이 그분을 섬기는 마음이 조금도 없었지만, 그분의 약속만은 믿었다. 그로부터 선택받은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겠다는 약속...
물론 신명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만을 사랑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을 지켜 주신다고 분명히 약속하셨다. 하지만 그 바로 뒤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경고하셨다.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음란하게 우상들을 섬기면, 그들은 분명히 징계를 받을 것이라고...
유다통치자들과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만 축복가운데 함께하시고 보호하시겠다는 말씀만 기억했다... 아니, 그것만 듣고 싶어 했다. 심지어 그 조건문 조차도 기억하지 않고, 그냥 보호하시고 지키시겠다는 말씀만 주워 담아 기억한 것이다.
그런 그들은 진정으로 주님을 신뢰할 수 없었다. 만일 야웨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키실 것이라고 진심으로 믿었다면, 그들은 애굽을 의지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들의 소위 "믿음"은 바벨론에 항복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는 데 쓰였을 뿐, 하나님께 순종하는 데는 전혀 쓰임받지 못했다.
야웨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못했던 그들은, 그들의 심령에서 진정으로 의지할 만하다고 판단한 애굽에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그들이 진정으로 의지한 것은 애굽이었다. 애굽이 그들의 우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사실 애굽은 "갈대지팡이"에 불과한 것이었다. 연약하여 힘이 없어서, 조금만 힘을 줘도 부러져 버리는... 그 자신도 똑바로 설 수 없는 그런 지팡이... 하나님의 말씀 대로, 애굽은 힘없이 바벨론에 무너져 내리고, 거기로 망명했던 유다의 잔당들, 예레미야를 끌고 갔던 잔당들은 거기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내가 믿는 하나님. 그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성경의 진리에 근거한 믿음이 아니라면, 그 믿음은 나를 결국 하나님께 불순종하게 만든다. 그 믿음은 진정한 믿음이 아니기 때문에, 갈대지팡이에 불과하지만, 겉으로는 그럴듯해 보이는 '애굽'에 의지할 수 밖에 없도록 나를 이끈다. 결코 하나님에 대한 무한한 신뢰로 그분만을 붙잡고 의지하며 나아가도록 인도하지 않는다. 그런 소위 "신앙"의 끝은 파멸이고 멸망일 뿐이다.
현대를 사는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많이 이런 오류에 빠져 있는지... 그리고 나 또한 그 오류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자인지...
오늘도 겸손히 내 '믿음'을 돌아본다. 그 믿음이 얼마나 성경적 진리로부터 거리를 두고 있는지... 주님께 간구하며, 통애하는 마음으로 갈대지팡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반석 위에 내 믿음을 세우는 자가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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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바벨론이 세력을 얻던 시대에 애굽은 예전과 같은 초강대국으로서의 위용을 잃긴 했지만, 그래도 큰 나라였다. 바벨론의 침략을 받은 유다로서는 의지할 바가 애굽밖에는 없었다... 하나님을 제외하고는...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징벌을 받지 않으려고 하면서, 애굽을 의지하려는 유다백성들에게 눈물을 흘리며 호소하였다.
"바벨론은 너희와 너희 조상들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이다. 그 징계를 받아라. 70년 후면 하나님께서 너희들을 이 땅으로 돌리실 것이다!"
하지만, 그의 말을 귀담아 듣는 자들은 거의 없었다. 그들은 결코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아니었지만, 최후의 순간, 위기의 순간에 자신들의 조상신 야웨가 그들을 보호하시고, 그들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이라고 굳게 믿었다. 자신들이 그분을 섬기는 마음이 조금도 없었지만, 그분의 약속만은 믿었다. 그로부터 선택받은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겠다는 약속...
물론 신명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만을 사랑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을 지켜 주신다고 분명히 약속하셨다. 하지만 그 바로 뒤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경고하셨다.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음란하게 우상들을 섬기면, 그들은 분명히 징계를 받을 것이라고...
유다통치자들과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만 축복가운데 함께하시고 보호하시겠다는 말씀만 기억했다... 아니, 그것만 듣고 싶어 했다. 심지어 그 조건문 조차도 기억하지 않고, 그냥 보호하시고 지키시겠다는 말씀만 주워 담아 기억한 것이다.
그런 그들은 진정으로 주님을 신뢰할 수 없었다. 만일 야웨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키실 것이라고 진심으로 믿었다면, 그들은 애굽을 의지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들의 소위 "믿음"은 바벨론에 항복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는 데 쓰였을 뿐, 하나님께 순종하는 데는 전혀 쓰임받지 못했다.
야웨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못했던 그들은, 그들의 심령에서 진정으로 의지할 만하다고 판단한 애굽에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그들이 진정으로 의지한 것은 애굽이었다. 애굽이 그들의 우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사실 애굽은 "갈대지팡이"에 불과한 것이었다. 연약하여 힘이 없어서, 조금만 힘을 줘도 부러져 버리는... 그 자신도 똑바로 설 수 없는 그런 지팡이... 하나님의 말씀 대로, 애굽은 힘없이 바벨론에 무너져 내리고, 거기로 망명했던 유다의 잔당들, 예레미야를 끌고 갔던 잔당들은 거기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내가 믿는 하나님. 그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성경의 진리에 근거한 믿음이 아니라면, 그 믿음은 나를 결국 하나님께 불순종하게 만든다. 그 믿음은 진정한 믿음이 아니기 때문에, 갈대지팡이에 불과하지만, 겉으로는 그럴듯해 보이는 '애굽'에 의지할 수 밖에 없도록 나를 이끈다. 결코 하나님에 대한 무한한 신뢰로 그분만을 붙잡고 의지하며 나아가도록 인도하지 않는다. 그런 소위 "신앙"의 끝은 파멸이고 멸망일 뿐이다.
현대를 사는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많이 이런 오류에 빠져 있는지... 그리고 나 또한 그 오류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자인지...
오늘도 겸손히 내 '믿음'을 돌아본다. 그 믿음이 얼마나 성경적 진리로부터 거리를 두고 있는지... 주님께 간구하며, 통애하는 마음으로 갈대지팡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반석 위에 내 믿음을 세우는 자가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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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4:16:00
휴식..
학교 휴일인 어제, 도서관이 문을 안 열었음에도 불구하고, 학교에 나왔다. 책 한 권을 읽어 해 치워야 했기 때문에... 이 건물 저 건물을 오가며 앉아서 책을 읽는데, 몸이 많이 피곤함을 느꼈다. 책에 집중도 되지 않고, 졸음이 오고... 겨우 50페이지 정도를 읽고 나서는 포기하고 학교를 나섰다.
차를 몰고 학교를 떠나면서 여러 생각을 했다. 교회로 가서 읽을까? 아니면 스타벅스나 모짜르트? 편한 소파에 앉아서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이 많았지만, 내 몸은 자동적으로 차를 집으로 몰고 있었다. 거의 기계적으로...
집에 도착하니 휴일이라 집에 있던 하연이와 예연이가 나를 반긴다. 역시 집이 최고지... 공부하기에는 최악이지만... 몸이 안 좋을 것 같아서 잠깐 동안 잠을 자기로 했다. 평소에는 낮잠 자는 것을 매우 싫어하는데, 아무래도 몸은 잠을 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더구나 집에 오니 약간 더 몸이 좋지 않은 것을 느꼈다.
오후 4시 30분에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다음날 오전 4시에 휴대폰 알람이 울릴 때에야 잠에서 깨어났다. 20분 정도 잘거라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무려 11시간 30분을 잔 것이었다. 식사도, 화장실도 가지 않고, 계속 잠만 잤다.
너희가 일찌기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시 127:2)
평소같으면, 그렇게 오래 잔 것에 대해서 매우 기분이 언짢았을 것이다. 시간을 낭비했다는 것 뿐만 아니라, 원래 낮잠을 20분 이상 자고 나면 기분이 매우 나빠지는 것이 일반적인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감사했다. 휴식을 주신 하나님께...
금요일 저녁에 밤 늦게까지 교회에서 목장모임을 하고, 토요일 아침 일찍 교회목자모임에 참석하고, 그 후에 긴장된 시간 속에서 말씀을 준비하고 저녁에 말씀을 전하고, 주일 아침 1부예배 시간에 실행위원회 미팅을 갖고, 예배드린 다음, 청년부 목자모임을 갖고, 그 직후 집에서 팀장들과 식사를 하고, 조금 일찍 잠들었지만, 새벽 두 시부터 깨는 바람에 잠을 거의 못잔 주말을 보냈기 때문에 몸이 많이 피곤했던 모양이다.
할 일은 많았지만, 그래도 휴식을 깊게 취할 수 있어서 좋았다. 밀린 일들을 생각하면 "일찌기 일어나고 늦게 눕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내가 최선을 다해 수고해야만 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모든 것을 주님께 맞기는 자에게는 주님이 주시는 휴식을 즐길 수 있는 것이다. 게으르게 사는 것이 정당화되지는 않지만, 모든 것을 내가 스스로 다 해보려고 하는 그런 노력에서 자유로울 수 있게 된다.
신앙생활의 또 하나의 묘미가 바로 그것이다. 그것을 경험하고 누리는 자는 바쁜 삶 속에서도 하나님으로 인해서 "여유"를 갖는 사람이 된다. 집착과 성취와 결과에 대한 것을 내려 놓고, 순간순간 종으로서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기 때문에 그 삶은 풍요로와 진다.
모처럼 가진 긴 잠, 깊은 휴식을 통해 주님께 감사하게 된다.
차를 몰고 학교를 떠나면서 여러 생각을 했다. 교회로 가서 읽을까? 아니면 스타벅스나 모짜르트? 편한 소파에 앉아서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이 많았지만, 내 몸은 자동적으로 차를 집으로 몰고 있었다. 거의 기계적으로...
집에 도착하니 휴일이라 집에 있던 하연이와 예연이가 나를 반긴다. 역시 집이 최고지... 공부하기에는 최악이지만... 몸이 안 좋을 것 같아서 잠깐 동안 잠을 자기로 했다. 평소에는 낮잠 자는 것을 매우 싫어하는데, 아무래도 몸은 잠을 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더구나 집에 오니 약간 더 몸이 좋지 않은 것을 느꼈다.
오후 4시 30분에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다음날 오전 4시에 휴대폰 알람이 울릴 때에야 잠에서 깨어났다. 20분 정도 잘거라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무려 11시간 30분을 잔 것이었다. 식사도, 화장실도 가지 않고, 계속 잠만 잤다.
너희가 일찌기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시 127:2)
평소같으면, 그렇게 오래 잔 것에 대해서 매우 기분이 언짢았을 것이다. 시간을 낭비했다는 것 뿐만 아니라, 원래 낮잠을 20분 이상 자고 나면 기분이 매우 나빠지는 것이 일반적인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감사했다. 휴식을 주신 하나님께...
금요일 저녁에 밤 늦게까지 교회에서 목장모임을 하고, 토요일 아침 일찍 교회목자모임에 참석하고, 그 후에 긴장된 시간 속에서 말씀을 준비하고 저녁에 말씀을 전하고, 주일 아침 1부예배 시간에 실행위원회 미팅을 갖고, 예배드린 다음, 청년부 목자모임을 갖고, 그 직후 집에서 팀장들과 식사를 하고, 조금 일찍 잠들었지만, 새벽 두 시부터 깨는 바람에 잠을 거의 못잔 주말을 보냈기 때문에 몸이 많이 피곤했던 모양이다.
할 일은 많았지만, 그래도 휴식을 깊게 취할 수 있어서 좋았다. 밀린 일들을 생각하면 "일찌기 일어나고 늦게 눕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내가 최선을 다해 수고해야만 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모든 것을 주님께 맞기는 자에게는 주님이 주시는 휴식을 즐길 수 있는 것이다. 게으르게 사는 것이 정당화되지는 않지만, 모든 것을 내가 스스로 다 해보려고 하는 그런 노력에서 자유로울 수 있게 된다.
신앙생활의 또 하나의 묘미가 바로 그것이다. 그것을 경험하고 누리는 자는 바쁜 삶 속에서도 하나님으로 인해서 "여유"를 갖는 사람이 된다. 집착과 성취와 결과에 대한 것을 내려 놓고, 순간순간 종으로서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기 때문에 그 삶은 풍요로와 진다.
모처럼 가진 긴 잠, 깊은 휴식을 통해 주님께 감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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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2:18:00
기쁨의 찬양
예수님을 믿기 전, 나는 팝송을 매우 좋아했다. 그 중 특별히 저음 비트가 강하면서도 느리고, 느리면서도 인상적인 음악을 참 좋아했다. 예를 들어 UFO의 Belladonna나 King Crimson의 Epitaph 같은 노래가 바로 그런 것이었다.
믿음을 가지고 난 후에도, 음악적 성향은 바뀌지 않았다. 물론 모든 찬양이 좋았지만, 가슴을 울리는 것은 항상 조용하면서도 진지한 고백적 찬양이었다.
최근 하나님께서 내 심각한 죄들을 지적하시고, 회개하게 하시는 동안에도, 찬송가와 찬양 중에서 느리면서도 가슴의 모든 것들을 토로하는 속죄의 찬양에 많은 은혜를 받았고, 그 고백을 내 고백으로 삼게 되었다.
회개의 작업은 지금도 치열하게 진행 중이다. 하지만 이번 주부터, 내 안에 기쁨의 찬양에 대한 갈망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내 죄악에 대한 회개가 한참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주님의 십자가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의 광채를 조금씩 맛보기 시작한 것일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그분 안에서의 기쁨을 찬양하는 빠르고 경쾌한 찬양이 내 가슴에서 우러 나오면서 교회 청년부의 찬양팀 게시판에 올라와 있는 찬양 중 기쁨의 찬양을 모두 찾아서 불렀다.
그렇다. 나는 형편없는 죄인이지만, 주님은 나의 기쁨이 되신다. 그분은 나의 감사가 되시고, 그분은 나를 여전히 사랑하신다. 거기에 감격이 있고, 그분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된다.
나의 평생에 여호와께 노래하며 나의 생존한 동안 내 하나님을 찬양하리로다. 나의 묵상을 가상히 여기시기를 바라나니 나는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로다.(시 104:3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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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을 가지고 난 후에도, 음악적 성향은 바뀌지 않았다. 물론 모든 찬양이 좋았지만, 가슴을 울리는 것은 항상 조용하면서도 진지한 고백적 찬양이었다.
최근 하나님께서 내 심각한 죄들을 지적하시고, 회개하게 하시는 동안에도, 찬송가와 찬양 중에서 느리면서도 가슴의 모든 것들을 토로하는 속죄의 찬양에 많은 은혜를 받았고, 그 고백을 내 고백으로 삼게 되었다.
회개의 작업은 지금도 치열하게 진행 중이다. 하지만 이번 주부터, 내 안에 기쁨의 찬양에 대한 갈망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내 죄악에 대한 회개가 한참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주님의 십자가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의 광채를 조금씩 맛보기 시작한 것일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그분 안에서의 기쁨을 찬양하는 빠르고 경쾌한 찬양이 내 가슴에서 우러 나오면서 교회 청년부의 찬양팀 게시판에 올라와 있는 찬양 중 기쁨의 찬양을 모두 찾아서 불렀다.
그렇다. 나는 형편없는 죄인이지만, 주님은 나의 기쁨이 되신다. 그분은 나의 감사가 되시고, 그분은 나를 여전히 사랑하신다. 거기에 감격이 있고, 그분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된다.
나의 평생에 여호와께 노래하며 나의 생존한 동안 내 하나님을 찬양하리로다. 나의 묵상을 가상히 여기시기를 바라나니 나는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로다.(시 104:3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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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9:14:00
보물 17
하연이의 생일
(2006.03.01에 쓴 글)
하연이가 벌써 여섯 살이 되었다. 2000년 2월 광명시 철산동에 있는 광명성애병원에서 오랜 진통 끝에 얼굴을 보인 조그만 갓난 아기가 벌써 여섯 살(한국나이 일곱살)이 된 것이다.
아내도 같은 것을 느꼈는지, 가족끼리, 혹은 가까운 아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축하하던 지난 생일들과는 달리 이번에는 하연이 반 아이들과 동네 친구들을 많이 초대했다.
그리고...
(아내의) 고생은 시작되었다..
며칠 전부터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며 준비한 음식들... 여기저기 다니면서 모으고 만든 장식... 그리고 생일파티를 위한 이벤트와 그에 따르는 상품들... 엄마가 아니라면, 참 해내기 힘든 많은 것들을 준비하는 것은 하연이를 낳을 때 고통 가운데서도 아기에 대한 기대가 교차되는 복합 감정의 재연이라 할 수 있었다.
많은 준비물들을 들고 전에 예약해 둔 아파트의 커뮤티니 룸을 향했다. 장식하고, 음식을 진열하고 상품을 준비하면서 손님 맞을 준비를 했다. 하나씩 엄마 손을 잡고 나타나는 아이들.. 동네 한국 애들, 학교 같은 반 미국 아이들, 일본 아이.. 하나씩 둘씩 나타난 아이들은 예상했던 수를 훨씬 뛰어넘어 방 안에 북적거리기 시작했다. 그 만큼 하연이에게 쏟아지는 선물들... 기쁨...
음식으로 시작한 생일 파티는 엄마들과 아이들이 어우러진 그야말로 "파티"였다. 모두들 즐겁게 식사를 하고 나서 우리 목장 식구 한 분이 사준 근사한 케익에 불을 붙이며 하연이의 생일을 축하했다.
멍석을 깔아주면 뒤로 빼는 하연.. 역시나 촛불 끄기를 거부... 당황한 엄마와 아빠는 주위에서 불을 끄고 싶어하는 아이들과 함께 "후~~~~"하고 불을 모두 껐다.
이에 이어지는 순서... 종이 비행기 만들기... 한국아이들은 신나게 접기를 시작한 반면 미국 사람들에게는 낯선 듯 엄마들도 어떻게 만드는지 모르는 기색... 이를 대비한 하연 엄마의 철저한 준비정신!! 한글과 영어가 같이 있는 종이비행기 접는 법을 설명하는 유인물을 나누어 줘서 그들의 참여를 이끌 수 있었다.
종이 접기가 끝나자 모두들 밖으로 나가서 비행기를 신나게 날리는 동안 나는 캔디가 들어 있는 별 모양의 상자를 나무에 달았다.. (이름이 뭐라더라...피녜타?) 비행기 날리느라 정신이 없는 아이들을 불러 모아 상자를 향하여 출발!! 미국아이들 생일파티하면 자주 하는 것이라고는 하는데 우리에게는 낯선 이것은 아이들이 돌아가면서 나무 막대기로 두드려서 깨뜨려 사탕을 줍는 게임이다.
한 명씩 차례대로 돌아가며 두드리기 시작.. 마치 소풍 때 박을 터뜨리는 것처럼 사탕을 기대하는 아이들의 두드리는 열심은 시작되고... 한참... '으잉? 왜이리 안터지냐?' 오랫동안 터지지 않는 상자를 보면서 내심 걱정... 겸연쩍은 미소로 아이들을 바라보며 나는 살짝 상자를 찢는다.. '그래도 안 터지네..;--;" 결국 룰을 바꾸어서 아이들이 달려들어 상자를 찢게 하고... 쏟아지는 사탕위로 우르르 몰리는 아이들... '무섭군...'
이어서 Donkey Tail. 이 게임은 벽에 붙여 놓은 종이에 눈을 가리고 받은 스티커를 제자리에 붙이는 게임... 정확하게 붙이는 아이들... 어딘지 모르고 헤메는 아이들... 어쨋든 몰려드는 아이들...
정신없다...
마지막 순서.. 보물찾기... 내가 "It's time for treasture..."라고 말하는 도중에 아이들은 벌써 "와~~~~"하면서 보물이 있는 곳으로 출발.. (나중에 알고 보니 하연이가 주도했더만... 그리고 그 전에 친구들에게 미리 귀뜸을 해준 모양...) 아이들이 찾기 쉽게 잘 보이는데다 놓은 관계로 거의 모든 아이들이 보물을 찾아들고 아내에게로 달려갔다. 아내는 준비한 상품을 아이들에게 나누어 줬다.
흐뭇 & 행복해하는 아이들.. 저마다 상품을 자랑하면서 즐거워함으로 생일파티는 끝났다.
아내의 과감한 도전... 그리고 철저한 준비로 힘든 과정이었지만 나름대로 즐겁고 좋은 생일파티였다...
하루가 지난 오늘 저녁.. 하연이와 같이 식사를 하면서 물었다.
"하연아! 어제 왜 촛불을 안불었어?"
"왜냐면요... 입에 음식이 있었는데 음식이 튀어나올까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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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3.01에 쓴 글)
하연이가 벌써 여섯 살이 되었다. 2000년 2월 광명시 철산동에 있는 광명성애병원에서 오랜 진통 끝에 얼굴을 보인 조그만 갓난 아기가 벌써 여섯 살(한국나이 일곱살)이 된 것이다.
아내도 같은 것을 느꼈는지, 가족끼리, 혹은 가까운 아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축하하던 지난 생일들과는 달리 이번에는 하연이 반 아이들과 동네 친구들을 많이 초대했다.
그리고...
(아내의) 고생은 시작되었다..
며칠 전부터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며 준비한 음식들... 여기저기 다니면서 모으고 만든 장식... 그리고 생일파티를 위한 이벤트와 그에 따르는 상품들... 엄마가 아니라면, 참 해내기 힘든 많은 것들을 준비하는 것은 하연이를 낳을 때 고통 가운데서도 아기에 대한 기대가 교차되는 복합 감정의 재연이라 할 수 있었다.
많은 준비물들을 들고 전에 예약해 둔 아파트의 커뮤티니 룸을 향했다. 장식하고, 음식을 진열하고 상품을 준비하면서 손님 맞을 준비를 했다. 하나씩 엄마 손을 잡고 나타나는 아이들.. 동네 한국 애들, 학교 같은 반 미국 아이들, 일본 아이.. 하나씩 둘씩 나타난 아이들은 예상했던 수를 훨씬 뛰어넘어 방 안에 북적거리기 시작했다. 그 만큼 하연이에게 쏟아지는 선물들... 기쁨...
음식으로 시작한 생일 파티는 엄마들과 아이들이 어우러진 그야말로 "파티"였다. 모두들 즐겁게 식사를 하고 나서 우리 목장 식구 한 분이 사준 근사한 케익에 불을 붙이며 하연이의 생일을 축하했다.
멍석을 깔아주면 뒤로 빼는 하연.. 역시나 촛불 끄기를 거부... 당황한 엄마와 아빠는 주위에서 불을 끄고 싶어하는 아이들과 함께 "후~~~~"하고 불을 모두 껐다.
이에 이어지는 순서... 종이 비행기 만들기... 한국아이들은 신나게 접기를 시작한 반면 미국 사람들에게는 낯선 듯 엄마들도 어떻게 만드는지 모르는 기색... 이를 대비한 하연 엄마의 철저한 준비정신!! 한글과 영어가 같이 있는 종이비행기 접는 법을 설명하는 유인물을 나누어 줘서 그들의 참여를 이끌 수 있었다.
종이 접기가 끝나자 모두들 밖으로 나가서 비행기를 신나게 날리는 동안 나는 캔디가 들어 있는 별 모양의 상자를 나무에 달았다.. (이름이 뭐라더라...피녜타?) 비행기 날리느라 정신이 없는 아이들을 불러 모아 상자를 향하여 출발!! 미국아이들 생일파티하면 자주 하는 것이라고는 하는데 우리에게는 낯선 이것은 아이들이 돌아가면서 나무 막대기로 두드려서 깨뜨려 사탕을 줍는 게임이다.
한 명씩 차례대로 돌아가며 두드리기 시작.. 마치 소풍 때 박을 터뜨리는 것처럼 사탕을 기대하는 아이들의 두드리는 열심은 시작되고... 한참... '으잉? 왜이리 안터지냐?' 오랫동안 터지지 않는 상자를 보면서 내심 걱정... 겸연쩍은 미소로 아이들을 바라보며 나는 살짝 상자를 찢는다.. '그래도 안 터지네..;--;" 결국 룰을 바꾸어서 아이들이 달려들어 상자를 찢게 하고... 쏟아지는 사탕위로 우르르 몰리는 아이들... '무섭군...'
이어서 Donkey Tail. 이 게임은 벽에 붙여 놓은 종이에 눈을 가리고 받은 스티커를 제자리에 붙이는 게임... 정확하게 붙이는 아이들... 어딘지 모르고 헤메는 아이들... 어쨋든 몰려드는 아이들...
정신없다...
마지막 순서.. 보물찾기... 내가 "It's time for treasture..."라고 말하는 도중에 아이들은 벌써 "와~~~~"하면서 보물이 있는 곳으로 출발.. (나중에 알고 보니 하연이가 주도했더만... 그리고 그 전에 친구들에게 미리 귀뜸을 해준 모양...) 아이들이 찾기 쉽게 잘 보이는데다 놓은 관계로 거의 모든 아이들이 보물을 찾아들고 아내에게로 달려갔다. 아내는 준비한 상품을 아이들에게 나누어 줬다.
흐뭇 & 행복해하는 아이들.. 저마다 상품을 자랑하면서 즐거워함으로 생일파티는 끝났다.
아내의 과감한 도전... 그리고 철저한 준비로 힘든 과정이었지만 나름대로 즐겁고 좋은 생일파티였다...
하루가 지난 오늘 저녁.. 하연이와 같이 식사를 하면서 물었다.
"하연아! 어제 왜 촛불을 안불었어?"
"왜냐면요... 입에 음식이 있었는데 음식이 튀어나올까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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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5:15:00
아이들의 요구...
아이들이 크면서 아빠 엄마에게 요구하는 것이 점점 많아지고 커진다. 애들은 친구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같고 싶어한다. 닌텐도, iTouch, Wii 등등... 친구 집에서 본 것이나, 친구들이 가지고 다니는 것들을 보면서 부러운 마음에 사달라고 조른다.
"하영이 집에 Wii가 있어요... 우리도 사요... 예?"
"나영이와 진수는 iPhone이 있는데... 나도 하나 사줘요..."
이런식이다.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다. 사실, 아이들이 사달라고 조르는 것들, 특히 technology와 관련된 것들은 아이들보다도 내가 더 좋아 하는 것들이다. 어렸을 때부터 게임기와 컴퓨터에 관해서는 광적으로 몰두하고 빠져들었던 나이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사준다면, 아이들보다도 내가 더 즐길 것이 뻔하다. 하지만, 나는 아이들에게 묻는다.
"하영이는 집에 있는 Wii를 얼마나 자주 사용한다냐?"
"Wii의 가격이 250불에서 350불 정도 하는데, 그 정도의 돈을 지불해서 그 기계를 사는 것이 적합 하다고 생각하냐?"
"iTouch를 가지고 있다고 했을 때, 가장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를 말해 볼래?"
그리고 아이들에게 요구한다. 왜 그런 것들이 필요한지에 대해서 구체적인 이유들을 가지고 아빠를 설득하라. 남들이 다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이유가 될 수 없다. "그것"이 "나"에게 필요한 구체적이고 명시적인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투자 비용 대비 가치가 있다는 것을 입증해라.
아이들에게 너무 심한 요구일 수 있다. 그리고 아이들이 자신만 그것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것 때문에 열등감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안다. 하지만 나는 아이들에게 더 중요한 것을 가르치고 싶다. 그것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분명히 자신(혹은 하나님)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남들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도 가져야 하는 그런 심리가 잘못된 것임을 분명히 교육시키고 싶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평가할 때, 자신이 무엇을 가졌는가가 아니라, 어떤 존재인가로, 특별히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가로 평가하는 것을 심어주고 싶다. 나는 그것이 아이들에게 큰 유산이 될 수 있음을 믿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소비가 미덕이다. 소비는 경제성장의 원동력이 되며, 그것으로 인해 자본주의는 살아간다. 따라서 자본주의 경제체제는 소비를 진작시키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 한다. 그 핵심이 광고이다. 광고는 본질적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뭔가를 소유하지 않으면 그만큼 뭔가 부족하다고, 뒤떨어진 존재라고 느끼도록 조장한다. 대부분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느끼도록 한다. 그것을 통해서 소유욕구를 부추기고, 소유했을 때 만족을, 그렇지 못했을 때 불만족을 느끼게 한다. 그것이 객관적으로 어떤 효용가치가 있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터무니 없이 값비싼 명품들이 불티나게 팔려나가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그 브랜드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통해서 자기 자신의 존재감을 상승시키는 것이다.
요즘 아이들의 부모들이 그런 값비싼 물건들을 사주는 이유는 단순하다. 내 아이가 기죽는 것이 싫어서... 남들이 다 가진 것을 자기만 못 가졌기 때문에 소외되는 것이 싫어서...
그런데 과연 그럴까? 나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물론 일시적으로는 효과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아이들이 끝없는 필요를 부모가 끝까지 책임져 줄 수는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런 소비행태는 과소비를 부추긴다. 단순히 남들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또는 내 스스로의 자존감을 위해서 불필요한 것들을 구입하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치명적인 것은, 자신이 소유한 것으로 인해서 자신과 남을 평가하는 자가 되어 간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그토록 싫어하시는 물신주의의 한 형태인 것이다.
남들이 가지고 즐기고 있는 것을 내가 가지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불편이나 손해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자신의 자존감과 연결시키지 않는 훈련은 어렸을 때부터 배워야 하는 매우 중요한 교훈이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물건을 사 줌으로써 해소시키는 것이 아니라, 물건과 자신의 자존감의 연결고리를 끊도록 도와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내 딸들이 그런 훈련을 제대로 받기를 원한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과 닌텐도, Wii, iTouch를 사는 것에 대해서 자주, 그리고 끈질기게 논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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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영이 집에 Wii가 있어요... 우리도 사요... 예?"
"나영이와 진수는 iPhone이 있는데... 나도 하나 사줘요..."
이런식이다.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다. 사실, 아이들이 사달라고 조르는 것들, 특히 technology와 관련된 것들은 아이들보다도 내가 더 좋아 하는 것들이다. 어렸을 때부터 게임기와 컴퓨터에 관해서는 광적으로 몰두하고 빠져들었던 나이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사준다면, 아이들보다도 내가 더 즐길 것이 뻔하다. 하지만, 나는 아이들에게 묻는다.
"하영이는 집에 있는 Wii를 얼마나 자주 사용한다냐?"
"Wii의 가격이 250불에서 350불 정도 하는데, 그 정도의 돈을 지불해서 그 기계를 사는 것이 적합 하다고 생각하냐?"
"iTouch를 가지고 있다고 했을 때, 가장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를 말해 볼래?"
그리고 아이들에게 요구한다. 왜 그런 것들이 필요한지에 대해서 구체적인 이유들을 가지고 아빠를 설득하라. 남들이 다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이유가 될 수 없다. "그것"이 "나"에게 필요한 구체적이고 명시적인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투자 비용 대비 가치가 있다는 것을 입증해라.
아이들에게 너무 심한 요구일 수 있다. 그리고 아이들이 자신만 그것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것 때문에 열등감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안다. 하지만 나는 아이들에게 더 중요한 것을 가르치고 싶다. 그것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분명히 자신(혹은 하나님)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남들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도 가져야 하는 그런 심리가 잘못된 것임을 분명히 교육시키고 싶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평가할 때, 자신이 무엇을 가졌는가가 아니라, 어떤 존재인가로, 특별히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가로 평가하는 것을 심어주고 싶다. 나는 그것이 아이들에게 큰 유산이 될 수 있음을 믿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소비가 미덕이다. 소비는 경제성장의 원동력이 되며, 그것으로 인해 자본주의는 살아간다. 따라서 자본주의 경제체제는 소비를 진작시키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 한다. 그 핵심이 광고이다. 광고는 본질적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뭔가를 소유하지 않으면 그만큼 뭔가 부족하다고, 뒤떨어진 존재라고 느끼도록 조장한다. 대부분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느끼도록 한다. 그것을 통해서 소유욕구를 부추기고, 소유했을 때 만족을, 그렇지 못했을 때 불만족을 느끼게 한다. 그것이 객관적으로 어떤 효용가치가 있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터무니 없이 값비싼 명품들이 불티나게 팔려나가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그 브랜드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통해서 자기 자신의 존재감을 상승시키는 것이다.
요즘 아이들의 부모들이 그런 값비싼 물건들을 사주는 이유는 단순하다. 내 아이가 기죽는 것이 싫어서... 남들이 다 가진 것을 자기만 못 가졌기 때문에 소외되는 것이 싫어서...
그런데 과연 그럴까? 나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물론 일시적으로는 효과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아이들이 끝없는 필요를 부모가 끝까지 책임져 줄 수는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런 소비행태는 과소비를 부추긴다. 단순히 남들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또는 내 스스로의 자존감을 위해서 불필요한 것들을 구입하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치명적인 것은, 자신이 소유한 것으로 인해서 자신과 남을 평가하는 자가 되어 간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그토록 싫어하시는 물신주의의 한 형태인 것이다.
남들이 가지고 즐기고 있는 것을 내가 가지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불편이나 손해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자신의 자존감과 연결시키지 않는 훈련은 어렸을 때부터 배워야 하는 매우 중요한 교훈이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물건을 사 줌으로써 해소시키는 것이 아니라, 물건과 자신의 자존감의 연결고리를 끊도록 도와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내 딸들이 그런 훈련을 제대로 받기를 원한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과 닌텐도, Wii, iTouch를 사는 것에 대해서 자주, 그리고 끈질기게 논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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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53:00
성결을 향한 갈망...
목자수련회 마지막 날이었던 어제 아침 5시... 몸은 피곤했지만 눈이 떠졌다. 한 시간 정도 더 자야겠다고 생각하고 눈을 감았는데, 자고 싶은 마음도 없고, 내 몸도 일어나기를 원하고 있었다.
모두들 잠들어 있는 중에 일어나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간 밤에 애찬식과 프로그램으로 인해서 어지러워진 거실과 부엌이 보였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청소를 원하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천천히 하나씩 정리해 가기 시작했다. '이것이 내 인생에 마지막으로 목자들과 함께하는 시간의 끝이구나...'하는 생각을 하면서, 잠들어 있는 목자들에 대한 사랑과 그들을 섬기고 싶은 마음을 청소로 표현했다. 그 시간을 즐기기 위해서 일부러 천천히 정리했지만, 한 시간 반 정도 지나고 나니 더 이상 청소할 것이 없게 되었다. 참 아쉬웠다... 생각 같아서는 목자들이 자고 있는 방과 2층 거실도 청소하고 싶었지만, 어제 밤 늦게 잠들었을 그들을 깨우는 것이 미안해서 그냥 두었다.
그리고 주님과의 시간을 가졌다. 말씀 묵상을 통해 나의 죄들을 지적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그것은 진노였다. 하지만 그 진노는 나를 향한 그분의 사랑에서 나오는 진노였다.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죄들을 하나씩 지적하시면서 그 죄에서 돌이키기를 간절히 원하시는 하나님, 당신의 자녀로서 당신을 닮아 가기를 그토록 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511장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과 512장 "내 주되신 주를 참 사랑하고"를 반복해서 부르며 혼자서 부흥의 시간을 가졌다. 내가 죄악에서 떠나는 것은 오로지 주님을 더욱 사랑함으로만 가능하다는 사실이 다시 한 번 가슴 절절히 느껴졌다.
그리고 기도했다. 기도의 내용은 단 한 가지. 거룩과 성결. 주님을 더욱 사랑하는 것이었다. 모두에게 드러나는 내 외면이 아니라, 내 내면에서 그 기도가 이루어지도록, 주님과 나만이 알 수 있는 내 영혼 깊숙한 곳에서 영적 갱신과 부흥이 일어나도록, 그래서 주님과 나만이 공유하는 기적의 비밀이 충만해 지도록 기도했다. 그 기도는 목자수련회에서 돌아온 이후에도 계속 되었다. 어제 저녁, 빨래를 하러 세탁소를 여러번 걸어서 오가면서, 어두운 밤 하늘의 별을 보며 주님과 대화의 기도를 나누었다. 그 내용도, 하나님께서 너무 잘 아시는 내 안의 죄악들을 고백하며, 이 죄로부터 완전히 정결하게 해 달라는 간절한 간구와 하나님께서 허락하실 거룩함, 성결함이었다. 그것이 나의 가장 큰 소망이 되었다.
오늘 아침... 묵상을 하기 전에 부른 찬송가 212장은 그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었다. 나의 기도를 듣고 계신 하나님을 느끼며, 감사하며 또 감사하며 찬송가를 불렀다. 내 마음의 소원과 간절함을 담아 주님께 드린 나의 제사였다.
올해 주님의 말씀 대로 살기를 원한다. 아니 반드시 살아 낼 것이다. 주님께서 내 간절한 기도를 결코 멸시치 않으실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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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들 잠들어 있는 중에 일어나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간 밤에 애찬식과 프로그램으로 인해서 어지러워진 거실과 부엌이 보였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청소를 원하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천천히 하나씩 정리해 가기 시작했다. '이것이 내 인생에 마지막으로 목자들과 함께하는 시간의 끝이구나...'하는 생각을 하면서, 잠들어 있는 목자들에 대한 사랑과 그들을 섬기고 싶은 마음을 청소로 표현했다. 그 시간을 즐기기 위해서 일부러 천천히 정리했지만, 한 시간 반 정도 지나고 나니 더 이상 청소할 것이 없게 되었다. 참 아쉬웠다... 생각 같아서는 목자들이 자고 있는 방과 2층 거실도 청소하고 싶었지만, 어제 밤 늦게 잠들었을 그들을 깨우는 것이 미안해서 그냥 두었다.
그리고 주님과의 시간을 가졌다. 말씀 묵상을 통해 나의 죄들을 지적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그것은 진노였다. 하지만 그 진노는 나를 향한 그분의 사랑에서 나오는 진노였다.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죄들을 하나씩 지적하시면서 그 죄에서 돌이키기를 간절히 원하시는 하나님, 당신의 자녀로서 당신을 닮아 가기를 그토록 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511장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과 512장 "내 주되신 주를 참 사랑하고"를 반복해서 부르며 혼자서 부흥의 시간을 가졌다. 내가 죄악에서 떠나는 것은 오로지 주님을 더욱 사랑함으로만 가능하다는 사실이 다시 한 번 가슴 절절히 느껴졌다.
그리고 기도했다. 기도의 내용은 단 한 가지. 거룩과 성결. 주님을 더욱 사랑하는 것이었다. 모두에게 드러나는 내 외면이 아니라, 내 내면에서 그 기도가 이루어지도록, 주님과 나만이 알 수 있는 내 영혼 깊숙한 곳에서 영적 갱신과 부흥이 일어나도록, 그래서 주님과 나만이 공유하는 기적의 비밀이 충만해 지도록 기도했다. 그 기도는 목자수련회에서 돌아온 이후에도 계속 되었다. 어제 저녁, 빨래를 하러 세탁소를 여러번 걸어서 오가면서, 어두운 밤 하늘의 별을 보며 주님과 대화의 기도를 나누었다. 그 내용도, 하나님께서 너무 잘 아시는 내 안의 죄악들을 고백하며, 이 죄로부터 완전히 정결하게 해 달라는 간절한 간구와 하나님께서 허락하실 거룩함, 성결함이었다. 그것이 나의 가장 큰 소망이 되었다.
오늘 아침... 묵상을 하기 전에 부른 찬송가 212장은 그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었다. 나의 기도를 듣고 계신 하나님을 느끼며, 감사하며 또 감사하며 찬송가를 불렀다. 내 마음의 소원과 간절함을 담아 주님께 드린 나의 제사였다.
너 성결키위해 늘기도하며 너주안에있어 늘 성경보고 온형제들 함께 늘 사귀면서 일하기 전마다 너 기도하라
너 성결키위해 네머리숙여 저 은밀히 계신 네 주께 빌라 주사귀어 살면 주닮으리니 널보는이 마다 주 생각하리
너 성결키위해 주따라가고 일다급하여도 당황치말고 참 즐거울때나 또 슬플때나 너주님만 믿고 늘 따라가라
너 성결키위해 늘안심하며 네소원을 주께 다 맡기어라 너 성령을 받아 주 섬겨살면 저천국에가서 더 잘섬기리
올해 주님의 말씀 대로 살기를 원한다. 아니 반드시 살아 낼 것이다. 주님께서 내 간절한 기도를 결코 멸시치 않으실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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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11:50:00
初心
오늘... 예배시간에 그 동안 같이 교회를 섬기다 마지막으로 예배를 드리고 오스틴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게 된 집사 한 분의 간증을 들었다. 젊은 집사이지만, 그가 주님 앞에서 순전한 마음으로 섬기는 모습을 지켜 봐왔던 나는, 그의 간증을 들으며,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고, 그의 사역을 볼 수 있었다. 주님을 더 깊이 알아가며,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였다는 결론이 결코 겉치례의 형식적 인사 정도로 들리지 않는 것은 바로 그의 삶과 섬김이 분명한 증거로 뒷받침을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간증을 들으면서 내 모습을 비춰 보았다. 깨끗한 거울 앞에서 내 모습이 더 선명히 보이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너무나 변질되어 버리고, 부족한 나의 모습. 그의 간증 앞에서 할 말을 잃었다. 그런 간증을 할 수 있는 그가 참으로 부러웠다. 그리고 내가 이 교회를 떠날 때는, 결코 간증을 하지 않고, 그냥 떠나는 것이 모든 분들에게 덕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전에는 참으로 많은 간증거리가 있다고 생각했던 그 동안의 사역이 결코 그렇지 않음을, 아무 것도 아니었음을 분명히 보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에서 아내에게 말했다. 나는 떠날 때, 소리소문 없이 조용히 사라지는 것이 모두를 위해 좋을 것 같다고...
오늘 주일예배 설교 말씀을 통해 내가 왜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지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그것을 확증하셨다. 첫 마음을 잃어버리고 복음이 변질되어버리는 교회들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을 통해서, 내가 초심을 잃어버리고 가야할 바른 길에서 얼마나 멀리 떠나 왔는지를 보여 주셨다. 그리고 그것을 강하게 질책하시는 하나님의 엄위하신 말씀을 들었다. 어찌보면 너무 멀리 와 버려서 다시 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할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마음에 낙심이 많이 되었다. '내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라는 회한이 가슴에 몰려왔고 그 집사를 위해 기도하는 시간에 많은 눈물을 흘렸다. 순전한 마음으로 섬기던 그 집사를 보내야만 하는 것에 대한 가슴 아픔 절반, 그리고 그의 모습을 통해서 비친 나의 한심한 모습에 대한 아픔이 절반 섞인 눈물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내 자신에 대해 더 많은 좌절을 경험한다. 얼마나 내가 형편없는 인간인지를 더 깊이 깨달아 간다. 내 자신에 대해 좌절할 때마다 가슴은 무너져 내린다. 그리고 아픔이 있다. 그것은 피할 수 없는 것 같다. 하지만, 분명 그것은 주님의 은혜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나 자신에게 좌절할 때, 나는 십자가를 붙잡는 것 외에 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주님을 붙잡고 주님께만 매달리는 것만이 내가 살 길이라는 절박함이 더 해지기 때문이다. 믿는 자로서 그것처럼 복된 것이 또 어디 있는가?
먼 곳으로 이주하는 주님의 충실한 종인 그 집사와 그 가정에 주님의 동행과 역사가 늘 함께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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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간증을 들으면서 내 모습을 비춰 보았다. 깨끗한 거울 앞에서 내 모습이 더 선명히 보이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너무나 변질되어 버리고, 부족한 나의 모습. 그의 간증 앞에서 할 말을 잃었다. 그런 간증을 할 수 있는 그가 참으로 부러웠다. 그리고 내가 이 교회를 떠날 때는, 결코 간증을 하지 않고, 그냥 떠나는 것이 모든 분들에게 덕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전에는 참으로 많은 간증거리가 있다고 생각했던 그 동안의 사역이 결코 그렇지 않음을, 아무 것도 아니었음을 분명히 보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에서 아내에게 말했다. 나는 떠날 때, 소리소문 없이 조용히 사라지는 것이 모두를 위해 좋을 것 같다고...
오늘 주일예배 설교 말씀을 통해 내가 왜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지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그것을 확증하셨다. 첫 마음을 잃어버리고 복음이 변질되어버리는 교회들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을 통해서, 내가 초심을 잃어버리고 가야할 바른 길에서 얼마나 멀리 떠나 왔는지를 보여 주셨다. 그리고 그것을 강하게 질책하시는 하나님의 엄위하신 말씀을 들었다. 어찌보면 너무 멀리 와 버려서 다시 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할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마음에 낙심이 많이 되었다. '내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라는 회한이 가슴에 몰려왔고 그 집사를 위해 기도하는 시간에 많은 눈물을 흘렸다. 순전한 마음으로 섬기던 그 집사를 보내야만 하는 것에 대한 가슴 아픔 절반, 그리고 그의 모습을 통해서 비친 나의 한심한 모습에 대한 아픔이 절반 섞인 눈물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내 자신에 대해 더 많은 좌절을 경험한다. 얼마나 내가 형편없는 인간인지를 더 깊이 깨달아 간다. 내 자신에 대해 좌절할 때마다 가슴은 무너져 내린다. 그리고 아픔이 있다. 그것은 피할 수 없는 것 같다. 하지만, 분명 그것은 주님의 은혜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나 자신에게 좌절할 때, 나는 십자가를 붙잡는 것 외에 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주님을 붙잡고 주님께만 매달리는 것만이 내가 살 길이라는 절박함이 더 해지기 때문이다. 믿는 자로서 그것처럼 복된 것이 또 어디 있는가?
먼 곳으로 이주하는 주님의 충실한 종인 그 집사와 그 가정에 주님의 동행과 역사가 늘 함께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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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8:05:00
결혼기념일.
1월 9일은 결혼기념일이다.
1999년 1월 9일 토요일... 영하 13도의 날씨에 우리는 아내의 교회였던 서울 대방동의 대방교회에서 결혼했다. 충청 이남 지방에서는 폭설이 내리는 바람에 고속도록가 폐쇄되어서 광주에서 올라오기로 했던 내 친척들과 여러 분들은 참석하지도 못했고, 급히 입석 열차를 탄 부모님과 형제들만 결혼식에 참석했다.
그 이후 11년간의 결혼생활... 결혼생활이라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것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 시간이었다. 첫눈에 반했고, 처음 만났을 때, 결혼을 생각할 정도로 좋아했고,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다른 여자들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내 눈을 멀게 했던 바로 그녀와 결혼했는데...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없더라도, 이 여자만 내 곁에 있어준다면, 행복할 것 같았고, 그런 그녀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나라는 사람이 결코 그런 존재가 아님을 결혼 생활을 통해 분명히 보게 되었다.
얼마나 이기적인지...
얼마나 용서할줄 모르고, 얼마나 자기 잘못에 대해서 뻔뻔스러운지...
얼마나 포용력이 없는지...
얼마나 이해심이 없는지...
얼마나 무능력한지...
얼마나 무관심한지...
얼마나 사랑이 없는지...
얼마나 이중인격적인지...
얼마나 가식적인지...
내 존재의 밑바닥을 확인하는 시간...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여인에게 말로 다 할 수 없는 상처를 주었는지 알 수 없다. 11년을 회상하면서, 남는 것은 후회와 미안함 뿐... 앞으로는 잘 해 보겠다고 다짐하지만, 그것 또한 지키지 못할 것임을 알기에, 자신이 없다.
회한의 11년... 하지만 내 무능력과 악함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나를 떠나지 않았고, 나에게 두 딸을 낳아주었고, 아내로서, 그리고 엄마로서 충실하게 자리를 지켜 주었다. 또한, 하나님께서 아내와 나 사이에 늘 함께 하셔서, 내가 부족하고 악할 때에도, 우리를 하나로 묶는 끈이 되어 주셨고, 무엇보다도 가망이 없을 것같던 나, 그리고 우리 관계를 조금씩 바꾸어 주셨다. 우리 부부관계를 진정으로 주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에 지탱이 가능한 것이었다. 믿음의 능력, 믿음 안에서의 결혼의 중요성을 그 어느 누구보다도 분명히 체험했다.
작년 1월 9일은 청년부 목자수련회 기간 중이었다. 올해도 마찬가지이다. 작년에 결혼 10주년 기념이라고 특별히 아내에게 해 준 것이 없었는데, 올해도 그렇다. 결혼기념일보다 목자수련회 준비로 바쁘게 지낸 한 주가 되어버렸다. 아내에게 정말 감사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마디도 불평을 하지 않고, 나와 함께 목자수련회를 준비한다는 것이다. 여자로서, 결혼기념일에 대한 기대와 생각이 왜 없겠는가만... 주님 안에서 하나님을 위한 일에 더 가치를 두고 나를 도와 동역하는 그 모습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결혼 11주년... 아내와 하나님께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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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1월 9일 토요일... 영하 13도의 날씨에 우리는 아내의 교회였던 서울 대방동의 대방교회에서 결혼했다. 충청 이남 지방에서는 폭설이 내리는 바람에 고속도록가 폐쇄되어서 광주에서 올라오기로 했던 내 친척들과 여러 분들은 참석하지도 못했고, 급히 입석 열차를 탄 부모님과 형제들만 결혼식에 참석했다.
그 이후 11년간의 결혼생활... 결혼생활이라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것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 시간이었다. 첫눈에 반했고, 처음 만났을 때, 결혼을 생각할 정도로 좋아했고,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다른 여자들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내 눈을 멀게 했던 바로 그녀와 결혼했는데...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없더라도, 이 여자만 내 곁에 있어준다면, 행복할 것 같았고, 그런 그녀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나라는 사람이 결코 그런 존재가 아님을 결혼 생활을 통해 분명히 보게 되었다.
얼마나 이기적인지...
얼마나 용서할줄 모르고, 얼마나 자기 잘못에 대해서 뻔뻔스러운지...
얼마나 포용력이 없는지...
얼마나 이해심이 없는지...
얼마나 무능력한지...
얼마나 무관심한지...
얼마나 사랑이 없는지...
얼마나 이중인격적인지...
얼마나 가식적인지...
내 존재의 밑바닥을 확인하는 시간...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여인에게 말로 다 할 수 없는 상처를 주었는지 알 수 없다. 11년을 회상하면서, 남는 것은 후회와 미안함 뿐... 앞으로는 잘 해 보겠다고 다짐하지만, 그것 또한 지키지 못할 것임을 알기에, 자신이 없다.
회한의 11년... 하지만 내 무능력과 악함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나를 떠나지 않았고, 나에게 두 딸을 낳아주었고, 아내로서, 그리고 엄마로서 충실하게 자리를 지켜 주었다. 또한, 하나님께서 아내와 나 사이에 늘 함께 하셔서, 내가 부족하고 악할 때에도, 우리를 하나로 묶는 끈이 되어 주셨고, 무엇보다도 가망이 없을 것같던 나, 그리고 우리 관계를 조금씩 바꾸어 주셨다. 우리 부부관계를 진정으로 주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에 지탱이 가능한 것이었다. 믿음의 능력, 믿음 안에서의 결혼의 중요성을 그 어느 누구보다도 분명히 체험했다.
작년 1월 9일은 청년부 목자수련회 기간 중이었다. 올해도 마찬가지이다. 작년에 결혼 10주년 기념이라고 특별히 아내에게 해 준 것이 없었는데, 올해도 그렇다. 결혼기념일보다 목자수련회 준비로 바쁘게 지낸 한 주가 되어버렸다. 아내에게 정말 감사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마디도 불평을 하지 않고, 나와 함께 목자수련회를 준비한다는 것이다. 여자로서, 결혼기념일에 대한 기대와 생각이 왜 없겠는가만... 주님 안에서 하나님을 위한 일에 더 가치를 두고 나를 도와 동역하는 그 모습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결혼 11주년... 아내와 하나님께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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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2:01:00
목자수련회를 앞두고...
오늘 오후 3시 30분부터 주일 오전 10시 30분까지 목자수련회를 갖는다.
어제 하루 종일 여기저기 돌아 다니며, 목자들을 먹일 음식재료를 준비했다. 음식을 준비하고, 교회에 챙겨놓는 것, 그리고 목자 수련회 프로그램 책자를 만드는 것에 꼬박 하루가 걸렸다. 목자수련회는 목자들을 위한 시간, 그들이 쉼을 얻고, 힘을 얻고, 도전을 얻고 재충전을 하는 시간이기 때문에, 그들이 충분히 섬김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내 확고한 생각이다.
목자들...
2006년 10월 청년부 부장을 맡으면서 가장 먼저 한 것은 목자들과의 개인 면담이었다. 한 사람 당 짧게는 두 시간, 길게는 5시간 동안 깊은 이야기들을 나누면서, 그들을 통해 청년부를 파악했고, 또한 목자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 수 있었다. 그 후, 내 청년부의 사역은 목자들이 중심이 되는 사역이었다. 목자들은 나와 한 몸이 되었고, 한 마음이 되었고, 그들을 깊이 사랑하며, 그들과 늘 함께하는 것이 내 사역이었다. 일상의 삶에서도 목자들에 대한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고, 나와 가족들을 위해 기도하는 정도와 비슷하게 그들을 위해 기도했다.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너무 훌륭한 목자들을 보내 주셨다. 대부분 나보더 더 훌륭하고, 내가 배울 점이 있는 지체들을 목자로 세워 주셨다. 그들과 하나가 되어서 영혼을 구원하고, 자라게 하는 그 사역을 같이 하는 것이 나에게는 그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하면서도 즐거운 사역이었다.
목자 수련회 음식을 준비하면서, 예산 걱정을 하는 아내에게 "목자들을 잘 먹여야 하니까 돈은 걱정하지 말고, 먹이고 싶은 것은 마음껏 사도록 해!"라고 말해 주었다. 그것이 진정한 내 심정이다. 청년부의 영혼들을 직접 섬기고, 그들을 인도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목자들이다. 청년부에 주어진 영혼들이 소중하다면, 그들의 목자로 세우심을 받은 사람은 더더욱 소중한 지체들이다. 이것은 편애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영혼을 섬기는 일꾼들에 대해 당연히 가져야할 태도이다. 그들은 분명 특별한 존재들이다.
늦어도 올 겨울에는 논문을 마치고 졸업하게 해 달라고 주님께 간구하고 있기 때문에, 이번 목자수련회가 부장으로서 마지막 수련회가 될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나는 늘 떠날 준비를 하면서 산다. 아무리 사랑하는 지체들이라 할지라도, 언젠가는 내가 그들을, 혹은 그들이 나를 떠날 수 밖에 없는 것... 지난 달, 하나님께서는 내가 청년부 목자들에게 얼마나 깊이 감정적으로 attach되어 있는지, 사역면에서 얼마나 심하게 그들을 의지하고 있는지를 보여 주셨다. 그러면서 질책하셨다. 그리고 이별을 준비하라고, 또한 주님만을 의지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나는 이제 이별을 준비해야 한다. 아니 그 준비는 이미 시작되었다. 하지만 내 인생에 이런 훌륭한 목자들과 함께 사역하는 기쁨과 특권을 또 누릴 수 있을까를 늘 생각한다. 그들과 함께하는 것이 내 인생에 주어진 마지막 기회일 수 있다. 최선을 다해 섬기고 사랑하고 싶다. 주님께서 그들을 감정적으로, 사역면에서 과도하게 의지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지, 그들을 사랑으로 섬기지 말라고 하신 것은 아니지 않는가?
목자수련회에 하나님의 충만하신 은혜와 사랑과 하나됨이 있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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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하루 종일 여기저기 돌아 다니며, 목자들을 먹일 음식재료를 준비했다. 음식을 준비하고, 교회에 챙겨놓는 것, 그리고 목자 수련회 프로그램 책자를 만드는 것에 꼬박 하루가 걸렸다. 목자수련회는 목자들을 위한 시간, 그들이 쉼을 얻고, 힘을 얻고, 도전을 얻고 재충전을 하는 시간이기 때문에, 그들이 충분히 섬김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내 확고한 생각이다.
목자들...
2006년 10월 청년부 부장을 맡으면서 가장 먼저 한 것은 목자들과의 개인 면담이었다. 한 사람 당 짧게는 두 시간, 길게는 5시간 동안 깊은 이야기들을 나누면서, 그들을 통해 청년부를 파악했고, 또한 목자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 수 있었다. 그 후, 내 청년부의 사역은 목자들이 중심이 되는 사역이었다. 목자들은 나와 한 몸이 되었고, 한 마음이 되었고, 그들을 깊이 사랑하며, 그들과 늘 함께하는 것이 내 사역이었다. 일상의 삶에서도 목자들에 대한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고, 나와 가족들을 위해 기도하는 정도와 비슷하게 그들을 위해 기도했다.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너무 훌륭한 목자들을 보내 주셨다. 대부분 나보더 더 훌륭하고, 내가 배울 점이 있는 지체들을 목자로 세워 주셨다. 그들과 하나가 되어서 영혼을 구원하고, 자라게 하는 그 사역을 같이 하는 것이 나에게는 그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하면서도 즐거운 사역이었다.
목자 수련회 음식을 준비하면서, 예산 걱정을 하는 아내에게 "목자들을 잘 먹여야 하니까 돈은 걱정하지 말고, 먹이고 싶은 것은 마음껏 사도록 해!"라고 말해 주었다. 그것이 진정한 내 심정이다. 청년부의 영혼들을 직접 섬기고, 그들을 인도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목자들이다. 청년부에 주어진 영혼들이 소중하다면, 그들의 목자로 세우심을 받은 사람은 더더욱 소중한 지체들이다. 이것은 편애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영혼을 섬기는 일꾼들에 대해 당연히 가져야할 태도이다. 그들은 분명 특별한 존재들이다.
늦어도 올 겨울에는 논문을 마치고 졸업하게 해 달라고 주님께 간구하고 있기 때문에, 이번 목자수련회가 부장으로서 마지막 수련회가 될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나는 늘 떠날 준비를 하면서 산다. 아무리 사랑하는 지체들이라 할지라도, 언젠가는 내가 그들을, 혹은 그들이 나를 떠날 수 밖에 없는 것... 지난 달, 하나님께서는 내가 청년부 목자들에게 얼마나 깊이 감정적으로 attach되어 있는지, 사역면에서 얼마나 심하게 그들을 의지하고 있는지를 보여 주셨다. 그러면서 질책하셨다. 그리고 이별을 준비하라고, 또한 주님만을 의지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나는 이제 이별을 준비해야 한다. 아니 그 준비는 이미 시작되었다. 하지만 내 인생에 이런 훌륭한 목자들과 함께 사역하는 기쁨과 특권을 또 누릴 수 있을까를 늘 생각한다. 그들과 함께하는 것이 내 인생에 주어진 마지막 기회일 수 있다. 최선을 다해 섬기고 사랑하고 싶다. 주님께서 그들을 감정적으로, 사역면에서 과도하게 의지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지, 그들을 사랑으로 섬기지 말라고 하신 것은 아니지 않는가?
목자수련회에 하나님의 충만하신 은혜와 사랑과 하나됨이 있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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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11:58:0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