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마지막 주일 아침의 경험.


밤새 눈이 내린 길... 온 가족을 차에 태우고 교회로 가야하는 나는 난감했다. 큰 길은 제설작업이 어느 정도 이뤄져서 문제가 없었지만, 언덕인 우리 아파트에서 고속도로까지 진입하는 것이 큰 과제였다. 아이들을 태우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집을 나서서 고속도로로 이어지는 큰길로 나가니, 아니나 다를까 난리가 아니었다. 눈이 녹다 말고 얼어버린 도로 위에서 거의 모든 차들이 헛바퀴가 돌면서 헤매고 있었고, 그로 인해서 정체는 극히 심했다. 한참을 올라가야 하는 얼어버린 도로는 참으로 난코스 중 난코스였다.
빙판길이나 눈길을 달릴 때면 2단기어로 출발해야하고, 엑셀에 발을 살짝 얹는 듯한 기분으로 달려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 아수라장에서도 내 차는 조금씩 전진했고, 다행히도 내 앞만은 어느 정도 길이 트였었다. 그런데 그 아수라장의 거의 정점에 이르렀을 때, 내 앞에 차가 한 대 갑자기 끼어들어 앞서서 가더니, 대책없이 옆으로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위기의 순간...
미끄러운 도로에서 한 번 멈추면 그 다음에 출발하기가 쉽지 않은데, 결국 멈추고 말았고, 앞 차가 헤매는 가운데 옆으로(앞으로가 아니라) 미끄러져 가는 바람에 내 앞은 뻥 뚤렸다. 이 때 즈음에는 거의 모든 내 옆이나 뒤에서 헛바퀴를 돌며 힘들어 하고 있었다.
'그래. 이제 내가 잘하면 된다!'라고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갔다. 다행히 차는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고, 나는 매우 느리지만, 전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 가장 많이 얼어 있고, 매우 힘들다고 시작하는 부분에서 내 차도 그만 약간의 헛바퀴를 돌기 시작하는 것 아닌가! '여기서 끝인가? 예배에 가야하는데...'라고 절망하고 있던 순간, 바로 뒤를 따라오던 사륜구동차가 멈추더니 운전하시던 아저씨가 내리셨다. 짜증낼 만한 상황인데도, 웃음을 띈 얼굴로 뒤에서 내게 손짓으로 밀어주겠다는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바로 그는 밀기 시작했고, 그의 도움으로 탄력을 받은 나는 2단으로 언덕 꼭대기까지 무사히 올라갔고, 그 후로 교회에 잘 도착해 예배드릴 수 있었다.
 모두가 자기의 문제로 힘들어하며 짜증을 내고 있던 그 때, 헤매기 시작하는 남의 차를 밀어줄 여유를 가진 그 분이 참 고마왔다. 그리고 그분이 오래 밀어 준 것도 아니고, 잠깐 힘을 실어 줬는데도, 그 힘을 받아 200미터 정도의 언덕을 부드럽게 올라가는 내 차를 보면서 누군가 넘어졌을 때, 절망했을 때, 기력을 잃었을 때, 손을 내밀어 약간의 힘을 보태주는 것이 얼마나 큰 도움이 될 것인가에 대해서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2012년의 마지막 주일 아침... 위험하고 힘들었지만, 참으로 감사한 체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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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에 경배하지 말라!"


"또 그리하여 네가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해와 달과 별들 하늘 위의 모든 천체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천하 만민을 위하여 배정하신 것을 보고 미혹하여 그것에 경배하며 섬기지 말라"(신 4:19)
준엄하신 하나님의 말씀 앞에, 칼뱅이 표현한 대로 "Idol Factory"인 나 자신은 결코 설 수 없는 존재임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수 없이 만들어내는 우상들... 그 모두는 결국 내 자신을 섬기고자하는 욕구와 하나님을 내 삶에서 지워버리고자 하는 반역의 욕구의 다양한 표현이 아니던가?
성령께서 끊임없이 일하심으로 그 우상들을 제하시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 성령께 순종함으로 우상이 아니라 하나님께 나아가기로 결단하고 부단히 노력하지 않는다면, 나는 자연스럽게 우상에 둘러싸여 그것들을 경배하는 사람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네가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찾게 되리니 만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그를 찾으면 만나리라"(신 4:29)
오늘 하루 내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찾아야 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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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묵상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그들을 무서워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보다 먼저 가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 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신 1:29-31)

오늘 아침 묵상 말씀이 하루 종일 머리를 맴돈다.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약속을 받으면 좋아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지금 내가 처한 현실에서 하나님께서 그런 약속을 하신다면, 감사가 넘치고 모든 근심걱정이 사라질 것같은데...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정작 이 말씀을 받은 60만의 성인 남자들 가운데 그 말씀을 문자 그대로 믿었던 사람은 이 말씀을 전한 모세 외에 단 두 사람 뿐이었다는 사실. 지금 내가 그 때의 그 사람들과 특별히 다르지 않다고 했을 때, 이 말씀을 철저하게 신뢰할 확률은 60만 분의 2에 불과한 것. 그만큼 말씀을 받고 믿음으로 화답하기가 힘들다는 것 아닌가?

사실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은 약속 하나 뿐이요, 눈 앞에 보이는 것은 거대한 아낙 자손들이 지키고 있는 훨씬 발전된 문명. 사실 거기에 비하면 원시 유목민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이스라엘은 그들이 평가했던 것처럼 메뚜기에 불과한 것. 현실과 하나님의 약속 사이에서 나는 분명히 그들과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신명기의 이 말씀이 간절히 필요한 현재의 상황에서 오히려 이 말씀은 내 안에 하나님에 대한 믿음없음을 드러내 보여준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다른 사람들과 달랐던 것은 같은 것을 봤지만, 그들이 보지 못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그 그림에서 겹쳐서 봤던 것. 메뚜기 같은 자신들과 거대한 산과 같은 적들만 있는 그림이 아니라, 우주를 창조하시고 그 산들을 창조하신 위대한 하나님이 그들의 그림에 존재했던 것. 그것이 그들을 담대하게 했다.

60만 분의 2. 결국 불가능하다는 것. 인간으로서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그 철저히 타락한 본성 상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필요하고, 그분의 십자가가 필요하고, 성령의 역사가 필요한 것같다. 하나님께서 내 죄악된 자아를 십자가에서 처리하시고, 내 안에 거주하시면서 그 분의 능력으로 나를 믿음과 신뢰로 이끌지 않으시면, 나는 그분을 결코 믿을 수 없는 존재인 것. 심지어 구원을 받은 이후에도 하나님으로부터 세상으로 튕겨져 나가려는 죄성을 완전히 처리하지 못해 그분이 직접 잡아주지 않으시면, 은혜의 궤도로부터도 이탈할 수 밖에 없는 형편없는 존재라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죄악된 나를 본다. 그리고 그런 나를 은혜로 강하게 붙드심으로 믿음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본다.

그저... 감사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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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


무지한 자들이 만든 법 하나 때문에, 내 주위는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 요동은 잠시후면 크나큰 태풍이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 태풍에 삶의 수단을 잃고 큰 슬픔에 잠길 것이다. 나 또한 예외가 아니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
풍랑이 일던 바다 한 가운데서 담대했던 바울을 생각한다.
그처럼 담대하게 폭풍 가운데서도 영적 평안함의 고요함을 즐기는 그런 믿음의 힘을 경험하고 싶다. 세상은 우는 사자와 같이 나를 삼키려고 하고, 또 막강한 파워로 개미만도 못한 내 존재를 날려버릴 듯이 달려들지만, 그것은 허상이며, 진정한 파워는 오직 주님께 있다는 것. 그분이 이 세상의 주관자이시요, 모든 결정의 최종 결정권자라는 사실을 믿는 믿음. 그것이 내 안에 흔들리지 않는 평안함을 준다. 나는 그 주님을 믿는 믿음 안에 머물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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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단상 again...

1. 저녁에 집에 가는 길. 복잡한 지하철. 내 뒤에 선 "아저씨"가 나에게 바짝 붙더니 내 등에 얼굴을 대고 휴식을 취한다. 넓은 등짝이라 좀 편해 보였나? 삶에 고단한 한 인생이 내 등에서 안식을 취한다고 기뻐하는 마음이 들어야 그리스도인일 것 같은데, "아저씨"라는 이유로 마음에 거부감이 드는 것은... 내가 아직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지 못해서일까?

2. 지하철에서 원하는 자리를 뺏는 방법. 앉을 자리는 없지만 공간은 넉넉한 늦은 아침 지하철. 한 젊은 여자가 내 옆에 바짝 다가와 섰다. 스킨십이 불편해 약간 자리를 옮겼더니 다시 달라와 붙는다. 이러기를 몇 번 반복하고 나니, 내가 있던 자리에 그 여자가 서 있고, 나는 다른 곳으로 쫓겨났다. 흠...
3. 가끔씩은... 지하철에서 게임하고 있는 사람을 볼 수 밖에 없을 때가 있다. 특별히 꽉 끼는 지하철에서 바로 옆 사람이나 앞 사람이 그 와중에도 기어이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할 때에는... 그럴 때는 게임하는 것을 관전하다가 답답할 때가 있다. 그 사람이 너무 못해서... 그럴 때는 스마트폰을 빼앗아서 내가 대신 해 주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기가 쉽지 않은 것을 발견한다. 그런 경우, 그저 내 눈을 들어 광고를 바라보는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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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교육이다!


플라톤은 "국가론"에서 왕정, 귀족정치, 공산주의, 민주주의 중 민주주의가 가장 위험하고 좋지 않은 제도라고 평가했다. 그것은 민주주의가 중우정치로 변질될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었다. 어찌보면 그는 민중의 판단 능력을 신뢰하지 않는 엘리트 주의자였던 것 같다. 그래서 그가 제안한 것은 철인정치. 그것은 일종의 왕정, 혹은 독재정치로서 모든 권력이 집중되는 독재의 자리에 가장 현명한 철학자를 앉힘으로써 사회를 위해 최선의 정치를 펼치는, 일종의 이상적인 사회를 꿈꿨었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비현실적인지는 그와 비슷한 정치체제를 갖췄던 Pax Romana 시기의 로마에서 엿볼 수 있다.

오늘날 한국의 정치상황을 볼 때, 일부 대선후보에 대한 맹목적인 지지를 보내는 대중을 볼 때, 플라톤의 사상이 옳은 것 아닌가하는 회의가 강하게 밀려온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인정치는 답이 아니다. 대안이 될 수 없다. 오히려 민주주의를 강화시켜나가는 것이 정답이다. 유권자들의 의식을 성숙시키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바른 방향인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교육의 문제는 바로 우리 나라의 운명에 직결됨을 알 수 있다. 민주사회에서 교육의 최고 목표는 성숙한 시민의 육성이 되어야 한다. 독립적으로 사고하고, 건전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그런 "시민"의 육성이 핵심이다.

그런데 과연, 우리의 교육은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대통령이 바뀐다면 물론 세상이 바뀔 것이다. 하지만 근본적인 변화는 교육의 변화에서 온다. 초등학교부터 민주시민의로서의 소양을 갖추는 일에 강조점을 두는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불행한 역사의 반복으로부터 우리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문제는 교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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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


지난 토요일 지금은 은퇴하신 영문과 원로 교수님이신 이상옥, 천승걸, 김명렬 선생님들과 제자 교수님들 몇 분과 함께 산행을 했다. 학생때 무서워서 자주 피해 다녔던 이상옥, 김명렬 선생님, 그리고 미국문학에 대해서 많이 가르쳐주신 천승걸 선생님.
하늘 같이 높은 그분들과 같이 산행을 하는 가운데, 유쾌하고 따뜻한 그분들의 일 면을 볼 수 있었다. 제자들이 찾아와 같이 하는 산행을 즐거워하시는 그 모습. 막내도 아주 갖난 애에 불과한 나에게 등산용 컵을 주시며 "이제 멤버가 되었으니 꼭 나와야 한다"고 장난 스럽게 말씀하신 선생님들과 즐거운 산행을 하는 가운데 그분들 밑에서 배우던 학창시절이 떠올랐다.
그리고 오늘 우리나라 최고의 문장가 중의 한 분이신 김명렬 선생님께서 잊지 않으시고 당신의 글 한편을 나에게 이메일로 보내 주셨다. 역시나 명문장...
학자로서 한 시대를 풍미하셨고, 우리 나라 영문학 교육의 틀을 세우신 원로 선생님들께서, 특히 암과 싸우고 계시는 천승걸 선생님께서 건강하게 오래 사시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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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27

화요일인 어제 중요한 프리젠테이션이 있었다. 잘 해야하는 것이기 때문에 월요일 저녁에 집에서 프리젠테이션 연습을 했다. 많이는 못했지만 두 세번 정도 전 과정을 연습했고, 조금은 개선 시킬 수 있었다.
아빠가 오랫만에 집에 일찍와서 혼자서 중얼거리는 모습을 본 딸들... 나름 대로 사안의 중요성을 알고 이런 저런 피드백을 주었다. 감사하게도...
연습을 어느 정도 마무리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요즘은 막내의 개인 사정상 막내가 아내와 자고 나는 큰 애랑 같이 이층침대에서 잔다.
자리에 누워 있는데, 윗층에 누워 있던 하연이가 말을 꺼낸다.

"아빠?"
"왜?"
"저기, 프리젠테이션 할 때 앞에 있는 사람들을 자주 쳐다봐야하는 것 같아요."
"그래?"
"예. 얼마전에 영어말하기 대회에서 내 친구는 앞을 자주 쳐다보면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했고, 나는 중간에 잊어버릴까 봐서 앞을 못보고 써서 가져간 종이만 봤는데, 친구가 상을 탔어요."
"그렇구나~~"
"예. 그러니 종이만 읽지 말고 앞에 있는 사람들을 자주 보면서 하세요."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큰 애의 조언에 참 감사했다. 아빠를 위하는 마음, 그리고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주는 그 조언. 내용보다 마음에 감동했다.

"알았다. 정말 고맙다. 내일 프리젠테이션 할 때 꼭 명심할께."
"예, 안녕히 주무세요."
"잘 자라!"

그리고 그 다음날, 프리젠테이션 시간에, 하연이의 그 조언이 내 머리속을 떠나지 않았다.

비록 초등학생의 조언이지만, 내 딸이 벌써 이렇게 커서 아빠에게 조언을 해줄 정도가 되었다니... 참 대견하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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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왜?

늘 떠오르는 질문...
그 대답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뻔히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터져나오는 질문... 왜?

장로교 목사이자 신학자로서 매우 존경하는 RC Sproul 교수. 지난 7년 동안 그의 강의와 설교를 거의 날마다 빠짐없이 들으면서 느낀 것은 탁월한 그의 신학적 지식, 특히 조직신학적 지식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그의 사랑과 충성의 크기가 대단하다는 것이다. 물론 사람 속이야 내가 절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지난 7년간 그의 강의를 통해서 느낀 것은 그것이다.
그는 이 시대의 선지자요, 하나님의 말씀을 깨우는 등불이다.
그런 그의 사랑하는 아들인 RC Sproul, Jr. 경제학 박사이자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헌신된 그는 사랑하는 아내를 암으로 먼저 떠나 보내야만 했다. 그리고 남은 아이들(친자식들과 입양한 아이들)을 혼자서 키워내는 어려움을 감내해야만 했다. 사랑하는 아들의 아픔은 곧 부모의 아픔. Sproul교수도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그런 그들이 작년에 방송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대담을 하는 것을 들었다. 가식이 아니라 진심에서 나오는 고백. 비록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하셨는지는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것이 최선이라는 것...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그들의 고백은 참 아름다왔다.

그런 그들에게 닥친 또 하나의 비극.
Sproul 교수의 손녀이자 Sproul, Jr.의 딸,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지만, 집안의 기쁨이었던 그 딸인 Shannon을 하나님께서 데려가셨다. 할아버지가 "인간의 사는 목적이 무엇인가?"라고 질문했을 때, 이제 막 말을 배우기 시작한 Shannon이 "For the gory [glory] of God."라고 앙증맞게 그렇지만 진지하게 답하던 그 아이. 할아버지가 방송에서 강의하면서 너무 대견해 하면서 자랑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그 천사같던 아이를 하나님께서 데려가신 것이다.
그들의 아픔은 얼마나 클까? 아무리 신학자요 믿음에 뛰어난 사람들이라 해도 그 가슴에 남을 그 아픔은...

하나님을 그토록 사람하는 사람들에게 왜?

아픔과 눈물과 이별과 죽음이 없는 그날... 그 날을 간절히 소망하며, Sproul 교수와 그 아들에게 하나님의 큰 위로가 있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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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ologetics without love...


이 시대의 가장 뛰어난 기독교변증론자인 Ravi Zacharias가 한 말: "Apologetics without love is simply decapitating the people in front of you." 가슴에 깊이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 사실 apologetics는 노력과 지적 능력으로 어느 정도의 수준에 오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사랑에 뒷받침이 되지 않는다면, 엄청난 상처와 폐해를 가져올 수 밖에 없는 가공할 무기가 되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이다. Zacharias가 말하는 그 사랑이란 성경적인 사랑이고, 그 사랑은 성령의 능력이 아니면 절대로 우리 안에 갖출 수 없는 것이다. 오로지 하나님 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랑은 사랑의 공급원이신 하나님 당신과의 끊임없는 친밀한 교제로만 우리 안에 전달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내가 하나님과 매우 친밀한 사랑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지 않는다면, apologetics는 오히려 독이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는 세대에 apologetics는 참으로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그 지식이 결코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 사람의 마음을 한 치도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지 않는다면, 선무당이 사람잡듯 위험한 지식이 되는 것이다.

결국...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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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보험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촛돌이라 그것을 믿는 이는 다급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 (사 28:16)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히 심판의 날을 피하는 보험이 아니다. 믿음은 그 이상이다. 믿음의 본질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며, 그분과 깊은 교제 가운데 그분을 닮아가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길을 따라가는 가운데 내 모든 삶의 영역에서 그분의 모습이 드러나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것이 믿음의 본질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보장성 보험의 성격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성경이 말씀하시듯,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크게는 심판의 날, 작게는 개인적인 종말이나 환난의 때에 다급하게 허둥대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보호자가 되시고, 그분 덕분에 하나님의 심판이 우리를 피해가며, 설사 환난과 마주한다 하더라도 이 세상의 주권자시고 왕중의 왕되신 그분을 믿는 믿음 가운데서 묵묵하게 환난을 견딜 수 있기 때문이다. 그분이 피할 바위가 되시는 경험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주의 미아로 던져진 채 아무 의지할 바가 없어, 돈, 권력, 인맥, 학벌 등으로 환난날 자신의 피할 바위를 삼으려고 하는 헛된 세상의 노력과는 비교할 수 없이 견고한 보호막.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다.
여호와를 송축하라! 그분께 감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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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책 중 나누고 싶은 부분들...

" . . . 기독교 신앙이 지난 세월 동안 우리 겨레를 감화시켰던 불교나 유교처럼 공평무사한 지도자와 인재들을 배출해 내고 있는가? 참으로 가슴에 손을 얹고 같이 고민해 볼 질문이 아닐 수 없다. 적어도 우리 세대는 근현대사의 초입에 한국교회가 발휘했던 지도력을 충분히 계승하는 데 부족함을 보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한국교회의 영적 쇄신과 신학적 사유의 성숙, 신앙 실천의 심화를 통해 한국 사회를 공평과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공동체로 변혁하라는 사명에 직면해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여기서 단지 한 나라의 중심 종교가 불교나, 유교나, 기독교냐에 대한 관심을 피력하는 것이 아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어떤 종교의 신앙 실천이 하나님의 통치 원리에 더욱 충실하느냐이다. 기독교회는 스스로 주창하는 그 절대적 진리(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신봉자답게 절대적 의미의 진리 실천에 투신해야 할 사명을 수행해야 한다.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기독교 신앙의 절대적 옳음을 스스로에게 선포하고 그 실천의 책임을 능히 감당해야 한다. 타종교에 대한 피상적 우월감을 피력하거나 우리 민족사의 한 시기에 상당한 고등종교 역할을 맡았던 타종교를 폄하하는 것은 교회 본연의 복음 전파의 일부가 아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이 확실한 진리를,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자신에게 각인시키고 실천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애국가는 대한민국이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때까지 존속되기를(대한민국 만세!) 희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한민국이 하나님 나라를 닮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다니엘서 5장의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계시가 아닐 수 없다. 하나님께서 한 나라의 왕의 통치 연대를 정하시기 위해 가난한 자들에 대한 공동체의 사랑과 돌봄, 권력 엘리트들의 탈법과 불법에 대한 사법적 견제력, 그리고 억울하게 희생당한 사회 구성원들을 위한 사회적 재활 및 복구 에너지의 양 등을 측량하셔서 나라의 존속 연대를 정하신다는 사실을 참으로 두렵고 떨리는 진리로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런 벨사살 같은 자는 세계 도처에 있다. 그들은 자신을 존숭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이 이룬 성취에 도취되어 자신의 성취가 가져다 준 권력을 극단까지 사용한다. 멸망의 날 직전까지도 그들은 알지 못한다. 현대는 가히 자아숭배의 세기다. 자기를 숭배하고 자기 매력을 극대화하고 상품화하여 이익을 얻으려는 시대다. 과도한 자부심 문화와 자기선전 문화가 지배하는 현대 사회에서 때때로 교만은 악이 아니라 덕처럼 칭송받는다. 운동 경기나 전쟁, 시장을 선점하기 위한 경쟁에서 이긴자들의 자기도취적 환호성은 어디서나 들을 수 있다. 우승한 선수들의 자기영화적 도취, 이긴 자들의 함성 등, 세계는 온통 이긴 자들의 자기자랑 이야기로 가득차 있다. 이들은 벨사살과 같은 인간들이다. 벨사살처럼 자기 권력과 부귀영화에 취해서 하나님의 저울을 무시하는 자가 바로 무신론자다. 그는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고 전능하신 분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교만은 인간의 자아를 무한히 부풀려, 하나님은 너무 작게 보이게 하고 자신은 너무 크게 보이게 만든다. 부풀려진 자아를 가진 인간에게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다. 교만의 죄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도 이해할 수도 없게 만든다."

--김회권, <<하나님나라 신학으로 읽는 다니엘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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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


지난 토요일에 있었던 두 사랑하는 지체들의 결혼식 안내문...

행복하기를, 승리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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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자들... 하나님 나라와 특별한 관계에 있는 집단"

"신학적으로 보면, 가난한 자들은 하나님 나라와 특별한 관계에 있는 집단이다. 현대 경제학에서 보면 이들은 경제 발전의 어둔 음영에 사는 자들로서 기껏해야 복지정책의 수혜자일 뿐 거의 "없는 자"처럼 취급당한다. 나라의 각종 경제지표를 하향 평준화하는 존재다. 한마디로 국민 대우를 충분히 누리지 못하는 존재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력 있는 국경선은 미국과 러시아, 한국과 일본, 동구와 서구 사이에 그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들과 가난하지 않은 자들 사이에 그어져 있다. 그 국경선 이쪽과 저쪽은 너무나도 다른 나라다. 가난한 자들이 중심적 지위를 차지하는 곳은 하나님 나라밖에 없다. 그래서 경제학에서는 천대받는 가난한 자들이 신학적으로는 우대받는다. 하나님 나라는 가난한 자들의 상속 자산이기 때문이다(눅 6:20; 마 5:3). 이런 이유로 가난한 자들은 하나님의 특별 계약으로 묶여 있는 특별 백성이라 불린다. 이 말은 어떤 특정 정치 이데올로기를 신격화 하는 말이 전혀 아니다. 공산당이나 노동당 등 특정 정당의 우월적 지위를 인정하는 말은 더더욱 아니다. 정치 조직으로 자신의 권리를 주장조차 하지 못할 연약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관심은 모세오경, 예언서, 잠언서와 시편, 공관복음서, 바울 서신 등 성경 66권 전체에 걸쳐 일관되게 강조된다.
(중략)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의 도덕적 선량함 때문에, 또 가난한 자들이 순박하고 상대적으로 선하기 때문에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지상의 권력구조 속에서 아무에게도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할 수 없는 절대 고독자인 가난한 자들의 눈물과 탄식에 슬픔과 동정을 느끼시는 자비로운 하나님이시며, 착취와 압제, 자원 약탈과 기회 박탈 등 불의한 사회구조에 분노하는 공의로운 하나님이시다. 이런 점에서 신학은 경제학과 정반대의 입장에서 가난한 자들을 바라본다. 가난한 자, 장애인, 연약한 자들은 하나님의 특별 호의와 복을 촉발하는 신학적 자산이다. 그들은 결코 이방인도 아니요 주변인도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애로운 시선과 거룩한 보호를 누리는 선민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가난한 자들을 우대하는 나라가 하나님 나라와 동맹을 맺은 나라다."

--출처: 김회권, <<하나님 나라 신학으로 읽는 다니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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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 하나 더...

지난 주 토요일 밤에 정말 오랫만에 TV를 켰는데, 볼 만한 프로가 거의 없었다.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다가 어느 방송사의 유엔 사무총장인 반기문씨에 대한 프로에 시선이 멈췄다.

그가 어떻게 유엔 사무총장이 될 수 있었는가에 대해서 성공요인을 분석한 것이었다. 그 프로에서 꼽은 첫번째 요인이 바로 영어. 방송은 그의 영어가 매우 "유창하다"고 설명했다. 그 영어로 인해서 세상을 알게되고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알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영어로 말하는 그분을 보면서 오히려 나는 반대의 생각을 했다. 그분의 영어는 결코 유창하지 않았다. 적어도 발음으로 볼 때는... 요즘 젊은 세대의 기준으로 볼 때는 중하위권도 들 수 없을 만한 영어였다. 그분의 영어를 보면서 '저렇게 영어를 못하는데도 유엔 사무총장이 될 수 있구나!'하는 생각을 가졌다.

하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 볼 때, 그분이 결코 영어를 못하는 분이 아니었다. 오히려 어느 정도는 "유창했다." 무슨 말인가? 그것은 발음의 차원이 아니라 영어를 구사하는 차원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영어 발음은 영어의 작은 한 요소에 불과하다. 발음이 영어의 전부는 아니다. 결코 아니다. 오히려 중요한 부분도 아니다. 특별히 몇 개의 발음만 주의한다면 발음문제는 외국인으로서 충분히 봐 줄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단어와 문장의 구사력이다. 물론 반총장님의 영어에서 콩글리시의 흔적을 자주 볼 수 있었지만, 발음에 비해서 문장 구사력이 더 뛰어남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유창함"은 발음도, 문장 구사력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분의 문장 구사력이 발음보다 뛰어나다고 하지만, 객관적인 기준으로 본다면 중간정도의 수준에 불과하다. 사실 그분의 영어실력이 특출나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세계의 이목이 그의 입에 집중되며 공감하며 감탄하는가? 그것은 영어라는 포장지에 실려 나오는 그분의 사상과 철학과 삶과 리더십이다. 결국 반총장님은 그분이 가진 그 무엇, 그 콘텐츠로 세상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세계 평화를 위한 그의 열정, 자신감, 그리고 그분의 인격에서 품어져 나오는 인간적인 매력과 리더십이라는 뛰어난 콘텐츠가 바로 그분의 영어를 차원이 다른 연설로 만드는 것이다.

영어 열풍에 빠져 있는 한국사회... 영어를 잘하는 사람들은 넘쳐나지만, 반총장님과 같은 그런 콘텐츠를 가진 사람을 찾아보기가 매우 드물다. 영어라는 포장지만 그럴듯하게 갖출 뿐, 그것으로 담아낼 그 뭔가를 부단히 배우고 또 생각하고, 고민하는 것이 없다. 영어라는 포장지에 담아낼 그 무엇이 없다면, 그 포장지는 휴지조각일 뿐이라는 것... 그것을 명심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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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

출퇴근 길 이용하는 마을버스 안에 있는 화면을 통해서 보여지는 아이돌 그룹들의 뮤직비디오를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은... 잘 훈련되고 잘 만들어진, 하지만 혼이 없는, 엔터테인먼트 기계(혹은 자동인형) 같다는 것이다.
음악을 통해서 낭만과 사랑과 현실의 어려움에 대한 위로를 받아왔던 나에게는, 오히려 더 현실적이고, 자본주의의 냄새가 강하게 나는 상품화된 그들의 소위 "음악"이 진열대의 하나의 상품처럼 친근감이 없다. 오히려 재벌의 행태를 본받아 그 전철을 밟아가는 연예기획사의 그 막강한 힘이 느껴져 거부감이 더해갈 뿐... 영혼 깊숙히 울리는 울림이 아니라, 말초신경의 감각에 호소하는 그들의 춤과 노래는 피상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천편 일률적인 춤과 노래. 혹독한 훈련과 기획에 의해 만들어진 이미지에 갖혀 사는 그들이 오히려 불쌍하다. 지금은 저렇게 열심히 하고 있지만, 효용가치가 떨어지면 언제든지 용도폐기가 되겠지라는 생각이 든다.

참 암울할 세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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룸살롱

안철수 교수가 룸살롱에 간 것을 본 적이 있다는 미확인 소문에 오늘 급기야 여당의 대선후보까지 나서서 진실을 밝히라고 안교수에게 요구했다.
확인이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룸살롱에 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도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강하게 여론몰이를 하며 안교수의 신선한 이미지에 상처를 내겠다는 의도이리라. 그리고 많은 국민들은 그 소위 '의혹'에 고개를 갸우뚱하며, '안철수가 그런 사람이었어?'라고 의문표를 붙이기를 고대하는 마음이리라. 물론 많은 국민들은 지금까지 늘 그래왔듯이 그런 이미지 놀이, 언론 플레이에 넘어가겠지... 그 전략은 우리 나라에서는 이미 그 효과가 검증된 것이니까...

사실 갔었는지의 여부에 대해서조차도 분명하지 않은 상황이긴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었다치고, "안교수가 룸살롱에 갔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람들은 자기의 경험에 비추어서, 그리고 일반화된 이미지로 그 의미를 거기서 추출하는 것이고, 그것은 진실, 혹은 사실과 동떨어져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여당에서는 바로 이런 것을 가지고 play를 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내 평생에 룸살롱에 간 적이 있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그렇다"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사실이니까...
그렇다면, 사람들은 나에 대해서 무슨 평가를 내릴까?
'세상에... 크리스천이라는 사람이... 그것도 집사가...'
'겉보기는 멀쩡해 보이는데, 뒤로는 할 짓 다 했군...'
'그럴 줄 알았어... 어쩐지... 위선자.'
등등  나는 악한 세상에 속한 자로서, 그 중심에서 할짓 다한 못된, 그리고 위선적인 크리스천으로 낙인찍힐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하지만 정작 "룸살롱에 갔었다"라는 것이 뭘 의미하는지는 아직 모호하다. 사실 이야기 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내가 룸살롱에 갔었던 것은 단 한 번. 군대에 있을 때(그때는 크리스천이 아니었다) 졸병시절, 광주의 한 시내에서 동기 기수 중에서 가장 친하게 지냈던 네 명이 만났다. 그 중 한 명이 대낮인 2시에 술을 먹자고 제안했고, 자기 형님이 룸살롱을 하고 있으니 거기로 가자고 제안했다. 동생이 동기들과 왔으니 술 값을 많이 안 받을 것이라면서... 그 때도 술을 안 마시던 나는 좀 꺼려지긴 했지만, 동기들이 가자고 해서 같이 따라갔다.
지하로 내려간 룸살롱에는 진짜 "룸"이 있었다.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둘러 앉아 술을 먹을 수 있도록 구조가 된 방.. 거게에 네 명의 군바리들이 앉았다. 대낮에... 룸살롱 주인이었던 동기 형님이 들어와 우리들과 인사하고, 먹고싶은 것 뭐든지 먹으라며 푸짐한 과일안주와 여러 안주를 들여 보냈다. 젊은 여자 한 명과 함께...
동기들은 술을 먹기를 원했지만, 대낮부터 술을 먹기가 좀 그랬는지, 그리 많이 마시지 않았고, 술에 입도 대지 않는 나는 안주만 냅다 집어 먹었다. 같이 들어오 여자는 내 동기와 잘 아는 사이인지 룸살롱 영업이나 손님들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고, 동기들은 힘든 군대생활에 대해 푸념하다가 네 시 정도에 룸살롱을 나왔다.
그것이 내 평생에 처음이자 마지막 룸살롱 체험이었다.

내 평생에 룸살롱에 가본 적이 있는가?
물론 있다. 하지만 그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
내 경험이 룸살롱에 갔다는 일반적인 인식과 이미지와 어떤 면에서 일치하는가 혹은 일치하지 않는가?

'안철수 교수가 룸살롱에 갔다'는 주장이 의미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아무것도 없다. 그것으로 안교수를 평가할 만한 내용이 없다는 것이다. 그저 이 이슈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진실이든 아니든 간에 안 교수의 이미지가 그런 것이 문제가 될 정도로 대중들에게 깨끗하게 인식되고 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런 문제를 이슈화시켜야만 했을 정도로 여당에서 안교수에 대한 효과적인 공격거리를 (아직까지는)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룸살롱에 상습적으로 들락거리며 접대받고 접대하며, 여성에 대해서 수많은 추태와 비행을 일삼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당에서, 마치 자신들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듯이 "룸살롱"을 이슈화하는 것이다.

정말... 치졸한 작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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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ily Dickinson의 시 한 편

Success is counted sweetest

By those who ne'er succeed.

To comprehend a nectar

Requires sorest need.

Not one of all the purple host

Who took the flag to-day

Can tell the definition,

So clear, of victory!

As he, defeated, dying,

On whose forbidden ear

The distant strains of triumph

Burst agonized and clear!

이사야 12장


그 날에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는 내게 노하셨사오나
          이제는 그 노가 쉬었고
          또 나를 안위하시오니
          내가 주께 감사하겠나이다!"
할 것이니라.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의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그 날에 너희가 또 말하기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 이름을 부르며
          그 행하심을 만국 중에 선포하며
          그 이름이 높다 하라!
          여호와를 찬송할 것은
          극히 아름다운 일을 하셨음이니
          온 세계에 알게 할찌어다!
          시온의 거민아!
          소리를 높여 부르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가 너희 중에서 크심이니라!"
할 것이니라



You will say in that day:
“I will give thanks to you, O LORD,
for though you were angry with me,
your anger turned away,
that you might comfort me.
“Behold, God is my salvation;
I will trust, and will not be afraid;
for the LORD GOD is my strength and my song,
and he has become my salvation.”
With joy you will draw water from the wells of salvation. And you will say in that day:
“Give thanks to the LORD,
call upon his name,
make known his deeds among the peoples,
proclaim that his name is exalted.
“Sing praises to the LORD, for he has done gloriously;
let this be made known in all the earth.
Shout, and sing for joy, O inhabitant of Zion,
for great in your midst is the Holy One of Israel.”
(Isaiah 12 ESV)



National Geographic photo of the month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 정말 아름답다.

요나를 생각하며...

소위 선지자이지만 하나님의 분명한 명령을 받고도 그 메시지를 전달해야할 곳이 아니라 정반대 방향으로 도망한 자.
자신의 불순종으로 배가 침몰하고 모두가 죽게되었지만, 끝끝내 회개하지 않고 차라리 바다에 던져져 죽음을 택할 만큼 반역적인 자.
바다에서 죽었어야 했지만, 고래를 통해 구원하신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 하나님께 감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이 동일한 인자와 자비로 니느웨 사람들을 구원했을 때, 이를 갈며 하나님께 대들며 차라리 자신을 죽여달라고 함부로 하나님께 망언을 했던 자.
땡볕에서 자신에게 시원한 그늘이 되어주던 박넝쿨을 벌레로 하여금 죽게하시고, 뜨거운 바람으로 고통을 더하신 하나님을 원망하며 저주하며 대들던 자.

요나는 악한 인간의 표상이다. 그런 인간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를 설득하시고 훈계하시고 가르치시는 하나님. 요나서를 보면 마치 하나님의 세계에는 요나 한 사람 밖에 없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집중하신다. 요나가 말을 안듣는다면, 다른 사람을 시켜 그 메시지를 전하면 되는 것인데, 마치 이스라엘, 아니 이 세상에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할 만한 사람이 없다는 듯이 집요하게 그에게 그 일을 일임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때로는 이런 하나님이 낯설게 느껴진다. 이해될 듯 하면서도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처신.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바로 그 요나같은 자, 아니 요나보다 더 흉악한 자가 바로 나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그 반역적인 요나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그를 품으시고 설득하시고 훈계하시는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이 나에게도 적용될 수 있음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른다. 마치 이 세상에 귀한 존재는 나 한 사람 밖에 없다는 듯이, 내게 집중하시고, 나를 관용하시고, 나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나 한 사람을 위해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죽이시기까지 하신 그 사랑을 보여 주시는 하나님. 그 이해될 수 없는 사랑이 바로 요나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다.

요나서는 니느웨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요나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과 사랑을 더 극명히 보여준다. 결국, 다른 모든 성경의 책들처럼, 요나서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가장 중점적으로 보여주며 잘 보여주는 책이다.

요나의 하나님... 그분은 죄인을 오래 참으시는 분이며, 그 크신 자비와 인자로 죄인을 가슴에 품으시는 창조주이시다. 그분이 바로 나의 하나님이다.

감사. 감사.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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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과 세 친구가 부러운 이유

다니엘서를 공부하면서 다니엘과 세 친구인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혹은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참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
그 이유 하나는 다음 구절에 나온다.
"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지식을 얻게 하시며 모든 학문과 재주에 명철하게 하신 외에 다니엘은 또 모든 이상과 몽조를 깨달아 알더라.(As for these four youths, God gave them learning and skill in all literature and wisdom, and Daniel had understanding in all visions and dreams.)"(1:17, 영문은 ESV)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지식을 얻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모든 학문과 재주에 명철하게 하셨다. 학문을 하는 나로서는 가장 부러운 능력이 바로 지식과 학문에 명철하게 하시는 것 아닌가? 공부를 하면 할수록 내가 뭔가를 알아간다는 생각보다는 부족함을 느끼며 내 능력없음을 한탄하는 경우가 훨씬 많은 내 현실을 보면서 하나님으로부터 학문에 대한 능력을 부여받은 다니엘과 세 친구가 무한 부럽기만 하다.

그들이 부러운 또 다른 이유, 더 중요한 이유는 바로 그들의 동역이다.
"이에 다니엘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그 동무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에게 그 일을 고하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이 은밀한 일에 대하여 긍휼히 여기사 자기 다니엘과 동무들이 바벨론의 다른 박사와 함께 죽임을 당치 않게 하시기를 그들로 구하게 하니라."(단 2:17-18)
느부갓네살왕이 범상치 않은 꿈을 꾼 후에 그 꿈이 무엇인지와 그 해석을 동시에 알려라는 추상같은 명령, 어찌보면 불가능한 명령을 내린 후 그 당시 지식인들이 모두 처형될 위기에 처해있을 때, 하나님을 굳게 믿은 다니엘이 자신이 그 일을 감당하겠다고 선언한다. 그것은 자신의 목숨을 건 행동이었다. 만약 그가 말한 대로 왕이 무슨 꿈을 꿨는지를 말하지 못한다면, 그는 왕을 농락한 댓가로 처참한 죽음을 맞이해야 했으면, 자신의 민족 또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그런 위험한 모험이었던 것이다. 그런 절대절명의 상황에서 기도를 부탁할 수 있는 친구들이 그에게는 있었다. 그리고 그 친구들은 마치 자신의 목숨이 걸린 것처럼 간절하게 기도했고, 마침내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에 응답해서 다니엘에게 그 꿈과 해석을 보여 주셨다.
이후로도, 바벨론과 페르시아라는 당시 초강국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지켜가는 데 많은 생명의 위협을 겪었고, 풀무불과 사자굴이라는 죽음의 경계선을 넘나드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그럴 때, 그들은 믿음의 동역자가 있었고, 그 동역자와 같이 함께하는 가운데 넘어지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서로 격려하는 가운데 믿음의 길, 자신들의 목숨과 기득권을 내려 놓는 길로 나아갈 수 있었고, 종국에 이방의 한 중심, 우상숭배의 한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 복된 자들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목숨을 걸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길로 나아가는 결단. 그것은 바벨론과 페르시아의 시대 뿐만 아니라 오늘날 한국에서도 동일하게 믿는 자에게 요구되는 결단이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 뿐만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교회가 맘몬이라는 우상을 섬기며 거기에 절하고 있는 이 사회 속에서, 거기에 절하지 않고, 살아계신 하나님께만 경배를 드리고 그분께만 무릎을 꿇겠다는 믿음의 결단은 사회 뿐만 아니라 교회 내에서도 조롱과 핍박의 대상이다. 때로는 밥줄을 포기해야만 하고, 작게는 사람들 사이에서의 삶을 포기해야 한다. 그런 믿음의 길을 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은 내 개인이 하나님 앞에 보다 더 바르게 서고, 거룩한 삶 가운데 그분을 더욱 의지하는 것과 함께, 동시에 같은 뜻을 가지고 서로 격려하며 기도해주고, 함께 삶을 나누는 동역자들인 것이다.

나는 동역자들과 함께 살아가는 믿음의 삶이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를 경험했었다. 하지만 삶의 터전이 완전히 바뀐 지금, 거의 1년 동안 광야에 홀로 남아 있는 외톨이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동역자가 그립다. 믿음으로 나를 깨어있게 하고, 같이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일을 도모할 동역자들...

그것이 바로 다니엘과 세 친구가 무척 부러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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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 언제나...

얼마 전 일이다.
내 지도교수님 아래에서 같이 배웠던 한 후배가 선생님을 뵈러 학교에 찾아온다고 연락이 왔다. 지금 신문사 기자로 있는 후배인데, 겸사겸사 선생님께 인사드리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도 같이 뵈면 좋겠다고 그랬다.
선생님과 시간을 조정해 보려 했는데, 시간이 맞지 않아서 매우 이른 아침에 만나기로 했다. 장소는 내가 있는 곳 바로 옆방인 미국학연구소장실...

나는 약속된 날 시간에 맞춰 평소보다 일찍 연구실로 나갔다. 얼마 후 선생님께서 오셨다. 그러면서 이것 저것 부지런히 준비하시는 모습이었다. '다른 부담되는 손님도 아니고 제자가 찾아 오는데, 그냥 맞으시면 될텐데 뭘 그리 준비하시나?'하는 생각에 의아했다. 바로 옆방에 내가 있었음에도, 혼자서 뭔가를 하고 계셨다.
나는 내 방에 머물러 있다가 화장실로 갔다. 거기서 선생님과 마주쳤다. 화장실 바로 옆에 생수와 싱크대가 있는 작은 방이 있는데, 거기서 열심히 컵들을 씻고 계셨다. 찾아오는 제자와 나에게 특별한 커피를 대접하시고 싶은 것이었다. 그래서 커피메이커를 씻으시고, 물을 담으시고, 또 컵을 씻으시면서 준비하고 계시는 것이었다.

서울대언어교육원장, 한국아메리카학회회장, 서울대미국학연구소장 등등 현재 여러 큰 기관의 수장으로 일하고 계시는 선생님께서, 그것도 내 스승님께서, 제자인 나를 바로 옆방에 두고도 손수 그런 일을 직접하시는 것을 보면서, 제자를 대접하시고자 하는 스승의 따뜻한 마음과 함께, 그분의 소탈함과 겸손함이 느껴졌다.
언젠가 다른 학교를 방문했을 때, 거기에 계셨던 교수 한 분이 "교수 사회에 있다보면, 다들 자기도 모르게 어느새 높아져서 대접받는 것에 익숙하고 대접하는 것에는 매우 서투르게 된다."는 푸념을 들었다. 학교에 1년 밖에 있지 않았고, 또 신분도 교수가 아니라 시간강사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충분히 이해가 될 만한 경험들을 많이 했다.

그런 교수 사회에서 수 십년을 계셨던 선생님의 작은 섬김은 큰 감동으로 다가왔고 선생님의 그 마음쓰심과 (당신께서는 의도하지는 않으셨겠지만) 직접 행동으로 제자에게 가르치심에 감사했다.

교만, 오만, 자만...

나는  그 누구보다도 쉽게 높아지는 자이다. 스스로를 높이고 교만해지는 자이다. 그럴 자격도 없는 자임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높이는데 매우 민감한 자이다. 그런 내가 스승의 작은 섬김을 보면서 절로 고개가 숙여지며, 내 자신을 다시 한 번 진지하게 돌아보고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에게 배울 수 있는 훌륭한 스승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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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타파

대안언론의 상징인 뉴스타파가 회원을 모집하고 있습니다.
그 동안 뉴스타파를 후원할 길을 열리기를 기도하고 바라고 있었는데, 드디어 열렸네요. 저는 기쁨으로 동참했습니다.
제 블로그를 보시는 분들 중 많은 분들이 재정지원에 참여하면 좋겠습니다.

어두워져만 가는 이 땅에 진실이라는 빛을 비추는 이 운동이 하나님 나라 운동과 완전하게 일치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이 프로가 하는 일의 많은 부분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리라 확신합니다.



회원가입은 뉴스타파 홈페이지에서...

http://www.newstap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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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에 관한 가장 성경적인 입장

내 생각에 동성애에 관한 가장 성경적인 입장은 High Pointe Baptist Church의 Juan Sanchez목사님의 설교에서 확실하게 들어난다고 생각한다.
동성애에 대해서 기존교회의 입장은 배척-적대나 용인-수용의 두 가지 중 하나였다. 하지만, 성경적으로 볼 때, 그 둘은 모두 잘못된 것이다. 설교의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단어도 반대할 것이 없는 참으로 뛰어난 설교를 같이 나누고 싶다.

"And Such were Some of You: Healing for the Sexually Broken" (Leviticus 20: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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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념...


사장이 동성애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대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fastfood 체인점 중에서 가장 직원들에게 인간적으로 대하고 손님들에게 질 좋은 음식을 제공하는 Chic-fil-A가 "vice company"로 낙인 찍혀 시카고를 비롯한 몇 개의 도시에서 영업취소 처분을 받았다.

어찌보면 직원들과 사회에 심각한 해악을 끼치고 있는 맥도날드를 비롯한 다른 패스트푸드 기업들이 모범으로 삼고 따라야 할 만큼 성경적이고 양심적으로 경영을 해온 기업에 대해서 이토록 가혹한 형벌을 내리면서도, 그 악이 만천하에 공개되었을 뿐만 아니라 검증이 된 악한 거대 기업들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제대로 못하는 미국의 liberal들을 다시 한 번 주의깊게 바라본다. 오바마 대통령의 비서실장을 지냈던 엠마뉴엘 시카고 시장의 그 단호한 조치가 나로 하여금 미국 리버럴들에 대한 내 입장을 재고하게 만든다.

무엇이 악이고 무엇이 선인가? 명백한 악에 대해서 침묵하는 그들이 왜 동성애의 문제에 대해서는 그토록 민감하게 반응하는가? 한 잡지의 기자가 liberal facism이라고 부르는 이 작태를 보면서, 미국사회, 그리고 더 나아가 현 세상의 가치전도를 본다.

어찌보면 절대적 가치의 기준을 잃어버린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예견된 결과이기도 하지만, 가치의 전도가 이미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하나님의 질투...

"보라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예루살렘과 유다가 의뢰하며 의지하는 것을 제하여 버리시되 . . ."(사 3:1a)

하나님의 선언이다. 무서운, 하지만 감사한...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나의 의지할 유일한 분이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그분은 내가 의지하는 잡다한 다른 것들, 하나님 외의 모든 것을 제하여 버리실 것이다. 나로서는 그 동안 의지하던 바를 잃어버리기 때문에 당황스럽고 세상 살 맛이 나지 않을 정도로 고통스럽고 불안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은 끝끝내 진정한 의지할 바 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의지할 바를 모두 끊으심으로 하나님 당신만을 바라보고 의지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사실 그분 외에 의지할 만한 것이 세상에 어디 있는가? 세상에는 영원한 것도, 전능한 것도, 전지한 것도 아무 것도 없다. 내가 의지하는 대상 역시 유한자일 뿐이고 피조물일 뿐이고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에 있는 것들 뿐이다. 내 죄악된 본성이 영원하신 하나님을 끝끝내 무시하고, 다른 곳으로 내 시선을 돌리게 하고 마음을 두게 함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내 의지하는 바를 모두 끊으시고, 나를 벼랑끝으로 모시는 것은, 바로 거기에 그분이 계시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를 돌이킬 수 없기 때문에, 내 죄악이 그만큼 크고 내 존재에 사무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질투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준다. 그분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질투하실 필요도 없는 것이고, 질투하지 않는다면, 내가 우상을 섬기고 세상을 의지하든 말든 그분이 신경쓰실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내가 의지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고, 당신만을 의지함으로 당신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기를 원하신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할 때, 하나님께서는 결코 가만 있지 않으실 것이다. 분명 내 모든 것을 끊으시고, 나를 벼랑 끝을 몰 것이다. 무섭지만, 그것이 하나님 사랑이고, 그렇기 때문에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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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2:22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 (사 2:22)

이 말씀을 접할 때마다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은, 그 말씀이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경헝을 통해서 어느샌가 그것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늘 알고 있는 이 말씀이 접할 때마다 새로운 것은, 알기는 하지만, 내 삶이 그 말씀에 준하는 삶이 아니라 어느새 인간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리라.

어리석고 죄악된 인간인 나. 참으로 답답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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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원수에게 보복하리라"

네 고관들은 패역하여 도둑과 짝하며 다 뇌물을 사랑하며 예물을 구하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지 아니하며 과부의 송사를 수리하지 아니하는도다! 그러므로 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전능자가 말씀하시되 "슬프다! 내가 장차 내 대적에게 보응하여 내 마음을 편하게 하겠고 내 원수에게 보복하리라"(사 1:23-24)

오늘 아침에 묵상한 말씀인 이사야 1:21-31의 일부이다.

이사야 당시의 이스라엘을 보시는 하나님의 탄식. 하나님을 슬프게 만든 이스라엘의 죄악상은 바로 정치적, 사회적 지도자들의 부패였다. 그들은 뇌물로 부패한 자들이며, 사회적 약자인 고아와 과부를 돌보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억압하고, 가진자들, 힘있는 자들만의 사회를 건설해 나갔다. 바로 오늘의 우리 한국 사회의 모습이다. 법과 원칙과 정의의 수호자여야할 대통령은 비리와 부정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능력만을 우선시한다. 사회적 법질서를 확립해야할 검찰은 정치적 경제적 권력의 시녀로 가진자들의 수호자일 뿐, 약자들에게는 냉혹하리만큼 가혹하다. 사법부 역시 다를 바가 없다. 그들의 작태는 하나님을 슬프게 만들며, 하나님으로 하여금 "보복하리라"는 결심을 하게 만든다. 하나님이 얼마나 무서운지,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보복하리라"고 하실 때, 그저 코웃음칠 거리로 밖에 안 보이겠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 나에게는 매우 두렵고 떨리는 경고의 말씀으로 들린다.

하지만, 문제는 내가 '그들'이라고 비난하는 그들의 작태로부터 내가 자유로운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 경고의 말씀이 나와는 상관없이 그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말씀인가 하는 것이다. 나 또한 가진자의 일부로서 그들과 한 자리에서 그들만큼 악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는 않지만, 그들의 잔치상으로부터 떨어지는 떡부스러기로 배를 불리는 자가 아닌가? 이미 기득권에 속한, 혹은 속하게 될 사람으로서, 그들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그들을 비난하면서도, 그들이 세워 놓은 질서 속에서 특혜를 받으며,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으면서 누릴 것은 다 누리는 그런 사람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은 곧 나를 향한 말씀이요 경고인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그들을 향해 외칠 수 있어야 한다. 이사야처럼... 그가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자로서, 사회의 귀족출신으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이 있었지만, 그것을 내려 놓고, 그가 속한 사회를 향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자로 쓰임받았던 것처럼, 그리고 그 끝에 톱으로 켜서 죽임을 당했던 것처럼, 약자들을 위해 싸우고, 행동하고, 가진자들을 향해 쓴소리를 퍼붓지 않는다면, 나 역시 하나님을 슬프시게 만드는 악한 자인 것이다.

사회적 약자들의 원망과 곡성 점점 높아지는 이 때에 내 한 목숨, 내 삶의 안위를 위해 그 소리에 귀를 닫는 것은 죄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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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분위기

어제, 사무실을 다시 배치했다. 
창고 분위기가 나던 것을 연구실 분위기로 바꿨다. 가구와 모든 것을 새로 배치해서 완전히 새로운 공간이 되었다.
무엇보다 창문으로부터 불어오는 바깥 시원한 바람이 직접 나에게 오도록 해서 좋다. 그리고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면 바로 숲이 보이고 하늘이 보이는 것이 좋다.

공부 열심히 해야지...

그리움...

문득... 어스틴에서 만났던 많은 사람들을 떠올린다.

한 사람... 한 사람... 한 사람...

내 삶을 풍요롭게하고 감사하게 만들어 줬던 고마운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
평생에 남을 내 추억의 커다란 일부는 바로 그들과 만들어 갔던 기억들이 아닐까?
모두가 사랑스럽고, 모두가 보고 싶다.


그 사랑하는 영혼들 중에 특히 한 사람이 많이 보고 싶고 생각난다.
맑고 깨끗한 가운데 유난히 상처가 많던 그 영혼...
순수한 그 마음에 세상의 풍파가 큰 생채기를 많이 냈지만, 그 순수함만은 결코 잃지 않았던 그 영혼...
비틀거리면서도 주님을 붙잡고, 결코 그 분을 부인하지 않았던 아름다운 영혼...
악에 둘러 싸임으로 그 자신도 악이 될 여지가 충분히 있었지만, 그 거대한 악 조차도 어떻게 할 수 없었던,그 중심 깊숙이 선함을 가지고 있던 영혼...
여러모로 성숙함에도 불구하고, 천진난만한 아이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던 영혼...

그를 생각할 때마다 너무나 미안한 마음이 내 마음을 가득가득 차고 넘친다. 도와주지 못하고, 품어주지 못하고 오히려 더 큰 상처만 주었기에...

생면 부지의 땅에서 홀로 하루 하루의 삶을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을 그를 생각한다.

주님의 은혜가 그와 늘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돌보심이 그와 늘 함께 하시기를...
그의 인생 끝날 때까지 주님이 그의 친구가 되어 주시기를...
주님으로 인해 그의 입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기를...
주님의 말씀이 그 영혼에 생수처럼 쏟아지기를...

정말 그렇게 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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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 없는 자의 비밀

능력이란 남이 할 수 없는 일을 해 내는 것과 남도 할 수 있는 일이지만 같은 일을 더 적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해내는 것 두 가지를 포함한다. 대단하고 큰 일은 고사하고 사소한 것 하나를 제대로 해내지 못해서 낑낑 거리며 힘들어하는 내 모습을 보면서 내 능력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인가를 새삼 깨닫는다. 아침부터 나와 서 밤늦게까지 집에 가지 못하고 하루 종일 사무실에 앉아서 일함에도 밤에 오피스를 나가면서 느끼는 것은 뭔가를 이루었다는 뿌듯함이 아니라, 하루 종일 한 것이 없다는 절망감이다.


흔히들 여자에게 외모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이 남자에게는 능력이라고들  말한다.(여자에게 능력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런 면에서 나는 남자로서 정말 보잘 것 없는 자인 것이다. 열심히 일하면 일 하는 만큼 뭔가를 얻고 이룩해 내는 개미보다도 못한 자가 바로 나라는 생각이 든다. 그럴 때 물밀듯이 밀려오는 것이 자괘감, 혹은 자기 모멸감이다. 그리고 그것을 뒤따라 오는 것은 절망이다.


하지만, 다행히 내 경우에는 자기 모멸감과 절망은 오래 머물러 있지 않는다. 그것은 결국 내 자신의 자존감이 내 능력이나 소유, 혹은 성취나 내 자신에게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것들은 1992년 어느 날 서울대 총장잔디 근처의 벤치에서 이미 던져 버렸다. 내 자존감은 내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있다. 그분이 내 자존심의 근거이다.


사실, 나는 내 능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길로 들어섰다. 다른 것은 잘 할 수 있지만, 공부만은 잘 할 자신이 없었던 나를 그 길로 부르신 것이 하나님이셨다. 그분의 부르심만을 좇아서 여기까지 왔다. 내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길로 들어 섰기 때문에, 내 능력으로는 매우 작은 것 하나도 이룰 수 없었다. 나는 그저 그 자리에 있었고, 주어진 환경 속에서 열심히 살았을 뿐이었다. 내 능력과 성취의 크나큰 간극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채우셨다. 그리고 그 성취를 내 대신 이뤄 주셨고, 그 성취를 마치 내가 이룬 성취인양 포장해 주셨다. 그것이 바로 내가 지금 여기까지 오게 된 이유였다.


내 능력에 대한 절망은 날마다, 매 순간마다 일어나는 것이라 하나도 새롭지 않다. 하지만 지금도 놀라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다. 지금쯤이면 적응이 될만도 한데, 그게 아니다. 그분의 역사와 능력은 늘 내 기대를 뛰어 넘는다. 그게... 참 재미있다. 경험해 본 사람만 아는 것이다. 비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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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광현선생님 1주기 추모식



오늘 2011년 7월에 작고하신 신광현선생님 추모식이 있었다. 80학번으로서 나보다 9년 선배이신 선생님. 한창 나이에 위암으로 운명을 달리하신 선생님을 기억하며 그분의 죽음을 언타까와하는 분들이 많이 모여 있는 것을 보면서 그분이 어떤 인생을 사셨는지 가늠할 수 있었다. 정승의 개가 죽으면 사람들이 몰려와도 정작 정승이 죽으면 아무도 오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분을 기억하는 자리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슬퍼하는 것은 그분의 삶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리라.
서울대에 교수로 처음 부임하셔서 개설하셨던 첫 전공과목인 중세영문학시간에 보여 주셨던 학자로서의 매력, 모든 여학생들의 선망의 대상이요 남학생들의 감탄의 대상이었던 그 옷맵시와 멋 그리고 훤칠한 키(그 당시 과 사무실에서 일하시던 결혼한 여직원분이 '그분을 볼 때마다 가슴떨려서 말 한 번 못 걸어 봤다'고 했었다.), 친형같은 푸근함으로 감싸 안으시던 그 따뜻한 마음, 티없는 소년같았던 해맑음, 그러면서도 자신을 과시하지 않는 겸손함, 압구정동이 집이고 교수로 부임하자마자 중형차를 타시던 부유한 집안의 배경을 결코 부인하지 않으셨지만 그 온 몸에서 느껴졌던 소탈하심. 그 모든 것이 주변 사람의 감탄의 대상이었고, 그로 인해 그분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그 모든 것 보다도 그분이 가졌던 학문과 세상을 향한 치열한 고민과 탐구, 그리고 인간을 향한 크신 사랑이 바로 모든 사람들이 그를 그리워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가 아닌가 싶다. 그분의 수업을 들었던 학생들은 이구동성으로 그분의 수업을 통해서 지식 뿐만 아니라 인간을 배우고 사랑받았다는 것을 고백한다. 그것이 학생들을 다른 차원의 삶으로 인도했던 것이다.

오늘 추모사에서 인문대 학장이신 배영수 선생님께서 하신 "여운"이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했다. 내가 남기고 싶어서 남기는 그것이 아니라, 내가 떠난 자리에 자연스럽게 남아 있는 여운. 그것은 어떤 것일까? 어떤 것이어야 할까?
그리고 사랑. 학생들에 대한 애정. 그것이 대학에서 가르치는 자로서 반드시 가져야 할 중요한 덕목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나에게는 쉽지 않은 참으로 큰 도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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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Money Can't Buy: The Moral Limits of Markets by Michael Sandel



방금 Michael Sandel의 What Money Can't Buy: The Moral Limits of Markets를 다 읽었다. 올해 출판된 책으로 우리 나라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하버드대 철학과 교수의 책이다. 전공책들을 읽느라 너무 바빠서 도저히 틈이 안 났지만, 그래도 내가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주제를 다루는 책이라 전철을 오가며 틈틈이 읽어 오늘에야 읽기를 마친 것이다.

Sandel이 이 책에서 제기하고 있는 질문은 단순하면서도 상당히 새로운 것이다. 그것은 시장 메커니즘이 언제나, 그리고 어느 분야에나 최선의 시스템인가 하는 것이다. 사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특별히 후반에 갈수록 시장의 논리는 삶의 여러 분야에 파고 들었다. 심지어 "결혼시장"이라는 말이 전혀 거부감이 없이 사용될 정도로 거의 모든 분야에 시장 메커니즘은 표준으로 자리잡았다. Sandel은 이 책에서 그것이 바람직한가에 대해서 묻고 그 현상을 살펴보고 있다.

학자인 나로서는 Sandel이 보다 더 깊이 있고 치열하게 글을 쓰지 않고, 가볍고 쉽지만 깊이가 없는 책을 저작한 것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하지만, 스스로는 public philosopher로 규정하고 대중과의 소통을 중요시하는 학자인 것을 고려하면, 그의 선택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글을 쉽고 재미있게 씀으로써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그들로 하여금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에 관심을 가지고 더 깊이 생각하게 하는 것만으로도 큰 의의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Sandel이 던지는 질문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사실 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자본주의는 공산주의라는 경쟁상대가 있었고, 어느 시스템이 더 우월한가에 대해서 스스로를 입증해야했고, 자본주의는 공산주의(혹은 사회주의)라는 비교대상을 통해서 평가되었다. 하지만 구소련의 붕괴는 공산주의에 대한 자본주의의 최종적인 승리로 인정되었고, 그 이후 자본주의는 유일한 "진리"가 되었다. 자본주의는 항상 옳은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 가운데 자본주의를 움직이는 핵심 원리인 시장 메커니즘 역시 "진리"로서 인류가 가진 자원을 가장 효율적으로 배분하는 최고의 시스템으로 사람들의 마음 속에 각인되기 시작했다.

자본주의의 승리와 그 시스템에 대한 절대적 신뢰는 자본주의 국가 내에서 그 전에는 적용되지 않던 많은 영역으로 시장 메커니즘이 적용으로 이어졌다. Sandel은 공항이나 놀이공원 등에서 돈을 더내면 티켓을 사러 줄을 설 필요 없이 바로 들어갈 수 있게하는 제도, 시민권 판매, 몸무게를 줄이면 돈을 주는 인센티브 제도, 부자 자녀의 대학입학 허가, 돈으로 사는 친구관계, 선물의 현금화, 죽음의 상품화, 학교와 감옥까지 침투한 광고 등등 많은 구체적인 예를 들면서 70, 80년대 급증한 공공영역 혹은 개인영역에의 시장 메커니즘의 침투를 보여준다.


시장 메커니즘의 도입을 찬성하는 사람들은 예외없이 자원의 효율적인 분배, 즉 효율성의 극대화를 그 논리로 내세우지만, Sandel이 보여주는 것은 시장 메커니즘이 오히려 효율성을 떨어 뜨릴 뿐만 아니라, Civic virtue(혹은 civic spirit)을 퇴보하게 만들고, 도덕성을 떨어뜨림으로써 소기의 효과를 가져오지 못했다는 것을 차근차근 보여준다. 예를 들어 영국과 미국의 헌혈제도를 비교하면서 헌혈을 100% 자원으로 받는 영국의 현혈 비율이나 헌혈된 혈액의 질이 돈으로 인센티브를 주는 미국에 비해 훨씬 높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시장 메커니즘이 적용되는 곳보다 그렇지 않은 곳에서 더 많은 헌혈이 되고 있으며, 더 건강한 사람들이 헌혈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예들을 통해서 시장 메커니즘이 모든 경우에 만능이라는 생각은 허구에 불과함을 일깨운다.


더 나아가 시장 메커니즘에 맞지 않는 공공의 영역에 그 시스템을 적용시켰을 때, 비효율적일 뿐만 아니라 나중에 잘못을 깨닫고 다시 시장 메커니즘을 제거하려고 할 때, 원상태로 복구가 매우 힘든 것임을 보여줌으로써, 시장 만능주의가 얼마나 큰 폐해를 줄 수 있는지, 그리고 그 적용을 얼마나 신중하게 고려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런 깨달음을 바탕으로 그가 독자에게 호소하는 것은 보다 적극적인 참여와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Such deliberations touch, unavoidably, on competing conceptions of the good life. This is terrain on which we sometimes fear to tread. For fear of disagreement, we hesitate to bring our moral and spiritual convictions into the public square. But shrinking from these questions does not leave then undecided. It simply means that markets will decide them for us. This is the lesson of the last three decades. The era of market triumphalism has coincided with a time when public discourse has been largely empty of moral and spiritual substance. Our only hope of keeping markets in their place is to deliberate openly and publicly about the meaning of the goods and social practices we prize. 


Sandel의 글을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거리는 경우도 많았지만, 아쉬운 부분도 많았다. 무엇보다 그는 가치, 도덕을 다루면서 왜 그것이 도덕적일 필요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는다. 글 전체적으로 그의 입장은 utilitarian의 입장이다. 최고의 효용성이 가장 최고의 가치가 되는 것이다. 물론 그가 진정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인지, 아니면 독자를 설득하기 위해 그런 입장을 취하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런 그도 결국은 moral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의 논조가 효용성으로만은 설명될 수 없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morality가 civic virtue의 중요한 기틀이 된다면, 그 부분을 더 깊이 다뤘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가 공격하고 있는 시장 메커니즘과 postmodernism의 논리가 어떻게 교묘하게 연결되어 있는지, 어떻게 상호작용을 하는데 서로 promotion하는지, 그리고 postmodernism이 그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moraliity를 상대화 할뿐만 아니라 그 상대화 작업을 통해서 무력하게 만드는지, 그리고 그 틈을 시장 메커니즘이 파고 들게 되었는지를 살폈어야 더 설득력있고, 대안을 제시하는 비판이 되었을 것이다.

또 아쉬운 것은 이 책의 주요 논점의 대상은 아니지만, 시장 메커니즘이 적용될 만한 곳이라고 하는 그런 영역에서 진정으로 그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가 공공영역에서 보는 그런 폐해가 그곳에서도 보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서 전혀 언급이 없다는 것이다. 이 블로그의 어딘가에서 자세하게 썼던 것처럼, 과도한 임금과 소득격차가 시장 메커니즘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고, 앞으로 그 차이가 더 벌어질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는 이 때에, 과연 시장 메커니즘에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 최선인가에 대해 큰 회의가 들 때가 많이 있다.

가장 아쉬운 부분은 그가 한 가지 중요한 factor를 애써 무시함으로써 논의를 복잡하게 끌고 갈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다. 그가 왜 하나님이라는 가장 중요한 요인을 애써 외면했는지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하지만, 그 요인을 배제함으로써 오히려 글의 설득력이 많이 떨어질 수 밖에 없고, 상대주의의 입장에서의 공격에 대항할 수 없는 논리를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앞이마에 회사 광고를 문신으로 새겨넣는 행위를 비판하는 근거는 그 몸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근거로 비판할 때 가장 강력한 논리가 설 수 있다. 하지만 그는 그 근거를 회피한 채, 다른 논리를 대려 하지만, 논리성이 매우 떨어지는, 그래서 저자의 개인적 의견에 불과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마치 천동설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수많은 복잡한 이론들을 개발해야 했던 것을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로 단순 명료하게 설명할 수 있었던 것처럼, 분명하고 명백한 근거를 애써 외면한 결과 이 글은 쓸데없이 여러 말로 설명해야하는, 그것도 설득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논리를 개발해야 했던 것이다.


아쉬운 부분이 분명히 많이 있는 글이지만, Sandel의 주장은 우리 모두가 귀기울여 들을 필요가 있는 중요한 점이라 생각하며 모든 사람들이 꼭 이 책을 읽어 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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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라"

"But I discipline my body and keep it under control, lest after preaching to others I myself should be disqualified." (고전 9:27)

교회 내에서 가르치는 위치에 있던 자로서 가장 두려운 말씀은 바로 이 말씀이다. 왜냐하면, 가르치는 자는 자신이 가르치는 내용이 자신의 삶이요 신앙의 현주소라고 착각할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자신의 평가에 대해 심한 거품이 있음에도 남도 속이고 스스로도 속는 매우 어리석은 짓을 범하기가 쉬운 것이다. 나 또한 거기에서 절대 예외가 아니다. 내 삶이 얼마나 내 생각, 사상, 가르침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지 모른다. 내 위치가 만든 포장에 내가 속는다면, 그리고 그 상태에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벌거벗겨진다면 얼마나 황당하고 창피할 것인가?
바울은 그점을 크게 염려하고 있다. 그 자신의 가르침으로 다른 사람들은 구원으로, 거룩한 삶으로 인도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그 가르침대로 살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에게서 버림 받을 수 있다는 절박함이 그로 하여금 그 스스로를 끊임 없이 돌아보게 하고, 자신의 삶을 추스리게 한 것이다. 바로 그런 점이 그를 진정으로 위대한 사도로 만들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무엇을 가르치고 사람들을 어떻게 인도하는가를 중요하게 생각하시지만, 내 개인을 평가하실 때는, 내 말보다, 내 가르침보다, 내 삶과 행동을 보신다. 그것이 바로 내 믿음의 현주소인 것이다. 내 행동이, 내 삶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가증스러운 것이라면, 나는 언제든지 내쳐질 것이라는 두려움 가운데서, 은총과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내 스스로를 control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며, 그래서 내 삶이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도록 하는 것이 내게 복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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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말씀

지난 얼마의 기간 동안 나에게 개인 묵상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말씀하시던 하나님께서 그 말씀으로 나를 준비시키신 뒤 주일 말씀을 통해서 확실하게 인증하셨다.

I love those who love me; And those who diligently seek me will find me. (잠 8:18)

열린교회 김남준 목사 주일설교 말씀

때로는 하나님께서 내 속속들이 너무 잘 알고 계시는 것이 피부에 느껴지며, 참 두려워질 때가 있다. 지난 주일, 바로 그런 경험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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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분


아침부터 밤까지 밖에 거의 나가지 않고 지내는 연구실...
하루 종일 혼자서 읽고 쓰고, 인터넷 서핑하고...

생명이라고는 이따금 들어오는 모기들과 파리들 뿐인 연구실에 화분을 하나 갖다 놓았다.
연구실이 새로지은 건물에 있어서 새집에서 나는 냄새가 나는데, 환기도 한계가 있어서 그 냄새를 없애는 데 도움이 될까해서 가져다 놓았다.
그런데, 나 외에 한 생명이 나와 함께 있다는 것이 참... 너무 좋다. 말도 없고, 조용히 그저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생명이지만,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나에게 위안이 되고, 친구와 같은 느낌이 든다.
내 방에서 안 좋은 냄새만 흡수하지 말고, 햇볕도 많이 받아 건강하게 오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창가에 두었다.

감사한 동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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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artlessness...

It's not knowledge of God that I need but following Him.
It's my heart... It's my heart... that God is seeking not the heartless religious behaviors and offerings.

 최근 내 삶을 보면서 불현듯이 깨닫게 되는 것. 그것은 하나님께 전적으로 마음을 드리지 않는다는 것.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적다는 것이다.
행위는 많이 있지만, 그 안에 진정한 마음, 간절한 사랑이 담겨있지 않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그런 제사를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 있을까? 어떤 분이 말한 대로 그것은 "painted lie"에 불과한데, 그것을 하나님께 바칠 수 있을까?

어느새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식은 것이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교회 안에서 믿음의 동역자들과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있게 나누는 나눔이 없다는 것이 가장 치명적인 영향인 것 같다.

동역자가 필요하다. 공동체가 필요하다. 공동체가 없이 살아 온 지난 일년의 결과는 바로 heartlessness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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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델리 이탈리아 감독...

오늘 새벽 3시 30분... 눈을 비비고 일어나 TV 앞에 앉았다. 유로 2012 결승전을 보기 위해서...
그 동안 바빠서 단 한 게임도 못봤는데,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결승은 도저히 그냥 넘어 갈 수 없어서, 좀 무리했다.
게임은 스페인의 가공할 능력이 유감없이 발휘되는 가운데, 수비축구의 대명사인 이탈리아가 4대0으로 졌다. 스페인은 막강했고, 빈틈이 없는 반면, 이탈리아는 너무 운이 없었다. 스페인보다 하루를 덜 쉰 덕에 많이 피로해 있었고, 선수들의 부상은 치명적이었다. 절대 4대0으로 질 팀이 아닌데, 그런 결과가 나왔다. 스페인의 예술적인 축구를 보면서 한 편으로는 즐겼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이탈리아가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가슴이 아팠다.

경기가 끝난 후 그라운드의 유일한 흑인 선수였던 "악동"으로 유명한, 준결승의 영웅 이탈리아의 발로텔리는 자신의 화난 감정을 잘 다스리지 못하는 것이 역력했다. 그런 그에게 이탈리아 감독인 프란델리 감독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상대에게 너희가 더 잘했다고 말하며 악수를 청해라. 패배를 인정할 줄 알아야 성장한다."


참 멋있는 감독의 멋있는 조언이다. 패배와 실수는 우리 삶에서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것들로부터 성장할 수도 있고 그것으로 인해 인생이 무너질 수 있는 상황에서 그것을 어떻게 활용하는가 하는 우리의 자세일 것이다. 프란델리 감독은 발로텔리에게 우승 이상의 중요한 인생의 교훈을 가르친 것이다.
누구나 승리를 원한다. 성공을 원한다. 하지만, 패배할 때, 그것을 인정하고, 그 패배를 딛고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을 배우는 것이 바로 그 성공의 밑거름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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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감사...

주일인 어제는 내 생일이었다.

음력으로 생일을 쇠기 때문에, 한 해가 시작되면서부터 아이들이 내 생일을 물어본다.
"When is your birthday this year?"
"I don't know! I didn't check."
"How come you don't even know your own birthday?"

하지만 이내 아이들은 내 생일을 알아 내고, 마크한다. 생일 한달 전쯤부터, 아이들에 계속 물어오기 시작한다.
"What do you want for your birthday?"
"I don't know."
"What is it? Please think about it."
"Yes..."

생일이 가까와 질수록 질문은 더 잦아진다.
사실... 나이가 들어가는 나에게 생일이 무슨 의미가 있으랴? 그저 아이들이 바르고 건강하게 커주는 것이 가장 큰 선물인 것을...

하연이와 예연이가 점점 더 흥분하기 시작한다. 낌새로봐서 생일을 위해 많은 것을 준비하는 것 같다. 특히 예연이가 자주 선물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때로는 "천기"를 누설하기도 한다. 아이들은... 아빠 생일이 재미 있는가보다...

어제, 주일 아침.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아이들이 나에게 뽀뽀하며 생일축하한다고 여러번 반복해서 말해준다. 예배를 마치고 돌아와서 선물 공개시간... 아내와 아이들 두 명이서 준비한 선물은 갯수를 셀 수가 없다. 얼마나 많이 준비했는지... 특히 아이들은 아빠 선물을 사고 또 사도 뭔가 부족한 듯 하여 계속 선물 갯수를 추가했다. 볼펜, 포스트잇부터 시작해서, 노트, 자동차 방향제, 건전지, 사탕, 애프터 쉐이브 로션, 독서대 등등등등.... 하나하나 선물 포장한 정성이 참으로 기특하고 감사하다.
그리고 준비하 파워포인트 프리젠테이션... 아빠 생일을 축하하고 감사하는 프리젠테이션을 보면서, 컴퓨터에 어느 정도 자신 있는 나마저도 그 정성과 디자인에 놀란다..

아내와 아이들이 공동으로 만든 카드(거의 예연이의 작품), 그리고 하연이의 놀라운 카드(정말 멋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예연이의 입이 딱 벌어지게 만든 생일 축하카드... 몇 주일에 걸쳐서 정성스럽게 만들고 또 만든 그 사랑이 듬뿍 담긴 카드들을 보면서 감격한다.

생일날, "What do yo want for your birthday?"라고 물어봐 주는 내 딸들이 있다는 것, 아빠의 생일을 기대하며 기말시험으로 바쁜 와중에서도 정성을 기울여 몇 주 동안이나 카드를 만드는 그런 아이들이 내게 있다는 것, 아침에 일어나 뽀뽀하며 "Happy birthday, Daddy!"라고 말해주는 아이들이 있다는 것, 그리고 케익과 진수성찬을 정성스럽게 차려준 아내가 있다는 것...
참... 나는 복받은 사람이다.

시인인 예연이가 내 생일카드에 쓴 시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읽으면서 눈물이 났다.)

For a dad
You're not so bad
Always fun
And helps me a ton
You work for our family,
That's why we live happily.
I'll always try to follow your way,
I'll never forget
To wish you a happy birth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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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45편


고백이 참... 아름답다...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내가 날마다 주를 송축하며 영영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여호와는 광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이라! 그의 광대하심을 측량치 못하리로다!
대대로 주의 행사를 크게 칭송하며 주의 능한 일을 선포하리로다!
주의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위엄과 주의 기사를 나는 묵상하리이다!
사람들은 주의 두려운 일의 세력을 말할 것이요, 나도 주의 광대하심을 선포하리이다!
저희가 주의 크신 은혜를 기념하여 말하며 주의 의를 노래하리이다!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자비하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도다!
여호와께서는 만유를 선대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
여호와여! 주의 지으신 모든 것이 주께 감사하며 주의 성도가 주를 송축하리이다!
저희가 주의 나라의 영광을 말하며, 주의 능을 일러서
주의 능하신 일과 주의 나라의 위엄의 영광을 인생에게 알게 하리이다!
주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니 주의 통치는 대대에 이르리이다!
여호와께서는 모든 넘어지는 자를 붙드시며 비굴한 자를 일으키시는도다!
중생의 눈이 주를 앙망하오니, 주는 때를 따라 저희에게 식물을 주시며
손을 펴사 모든 생물의 소원을 만족케 하시나이다!
여호와께서는 그 모든 행위에 의로우시며 그 모든 행사에 은혜로우시도다!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
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의 소원을 이루시며 또 저희 부르짖음을 들으사 구원하시리로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는 다 보호하시고 악인은 다 멸하시리로다!
내 입이 여호와의 영예를 말하며, 모든 육체가 그의 성호를 영영히 송축할찌로다!"(시 145)

아멘! 아멘! 아멘!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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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알아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관대 저를 생각하시나이까? 사람은 헛것 같고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으니이다!"(시 144:3-4)


시편 기자의 이 탄식이 곁들여진 감탄은 하나님을 아는 자들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흘러 나올 수 있는 고백이다. 그것은 자신의 보잘 것 없음을 잘 아는 지식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하나님의 크심과 위대하심에 대한 지식에 더 그 기반을 두고 있다.
나는 보잘 것 없는 자이고, 흉악한 자이다. 내가 어떤 자인지를 더 분명하게 아는 것은 믿음에 큰 도움이 된다. 하지만, 그 지식에는 한계가 있다. 그것은 자신의 가치가 0를 향해 한 없이 수렴해 가는 것을 실제로 느끼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시편 기자의 진정한 고백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그 경험에서 나온다. 그분의 가치, 그분의 크기가 무한대로 수렴해 가는 것을 진정으로 깨닫고 경험하게 될 때, 그 분이 나를 "생각하시고" "알아주시는" 것이 얼마나 있을 수 없는 일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사실,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없어지고 모든 지식이 폐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시작되어도 결코 그치지 않는 것은, 아니 천국에서도 영원히 지속될 우리의 "일"은 위대하신 하나님을 더 알아가는 일이다. 그일은 영원을 지속한다 하더라도 결코 끝이 날 수 없는 것이다. 그만큼 하나님은 크고 위대하시기 때문이다.
사실 시편 144편은 위대하신 하나님에 대한 고백으로 시작한다. "나의 반석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로 시작한 시편은 "여호와는 나의 인자(lovingkindness)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의 산성이시요, 나를 건지는 자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피난처시요, 내 백성을 내게 복종케 하시는 자"라고 고백하고 있다. 그것은 그의 삶 가운데서 경험한 위대하신 하나님에 대한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고백인 것이다.
위대하신 하나님을 만난 모든 인간은, 그 앞에서 자신의 보잘 것 없음을 본다. 그리고 그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다. 마치 베드로가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할 수 밖에 없었던 것처럼...
그런 성스러운 조우(holy encountering)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핵심인 것이다. 그런 조우가 있는 자들은 하나님 앞에 고개를 뻣뻣이 들고 있을 수가 없다. 그분 앞에 늘 엎드리며, 그분의 은혜와 긍휼만을 구할 뿐이다. 그분께 자신의 욕구와 욕망을 내세우지 않고, 그분의 뜻이 이 땅 가운데 이루어지는 주의 기도를 자신의 기도로 삼는 것이다.
그런 자들은 위대하신 하나님의 엄청난 능력을 경험하게 된다. 대적을 흩으시며 파하시는 장수이신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고, 환란 가운데서 나를 구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런 자들이 바로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인 것이다. 그리고 시편 기자는 목소리 높여 외친다.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하나님을 아는 진정한 지식이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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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내 기도를 주님께 드리는 분향으로 받아 주시고, 손을 위로 들고서 드리는 기도는 저녁 제물로 받아 주십시오. 주님, 내 입술 언저리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 앞에는 문지기를 세워 주십시오. 내 마음이 악한 일에 기울어지지 않게 해주십시오. 악한 일을 하는 자들과 어울려서, 악한 일을 하지 않게 도와주십시오. 그들의 진수성찬을 먹지 않게 해주십시오. 의인이 사랑의 매로 나를 쳐서, 나를 꾸짖게 해주시고 악인들에게 대접을 받는 일이 없게 해주십시오. 나는 언제나 그들의 악행을 고발하는 기도를 드리겠습니다." (시 141:2-5, 표준새번역)

내 삶이 기도가 되어 하나님께서 분향과 제물로 열납하실 수 있는 그런 삶이 된다면...
주님께서 악한 입술을 제어하시고, 친히 문지기가 되어 주시는 그런 복을 누린다면...
악을 향해 끊임없이 반응하고 이끌리는 내 마음을 주님께서 지켜주신다면...
악한 세상 가운데서 악인들 가운데 살더라도 그들과 함께 악을 도모하지 않도록 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입는다면...
부정의 축재에 참여하여 그들과 진수성찬을 먹기보다 깨끗함으로 가난함 굶주림을 오히려 즐거워 할 수 있다면...
동역자가 있어 나를 의의 매로 영적 혼수상태에서 깨어나게 하며, 부지불식간이나 의식적으로 짓는 죄에서 돌이키게 하기 위해 내 마음을 찢는 꾸짖음을 듣는 크나큰 복을 누린다면...
죄악과 부정을 일삼는 자들에게 대접할 가치가 없는 자, 대접이 통하지 않는 자로 여겨진다면...
세상의 악을 보면서 그들의 악에 분노하면서 정작 그 악을 내 안에 내면화함으로써 그들과 동류가 되는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면...

정말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정작 내 삶은...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너무나 더럽고 역겨우며, (마음의) 입술에는 언제나 독이 가득하고, (마음으로는) 세상의 악인과 함께 악을 도모하며, 가난을 두려워하고 잘먹과 잘 살고자 하는 욕구가 마음 가운데서 치솟고, 동역자들의 사랑의 매와 꾸짖음에 분노하며, 죄인들과 악인들에게 인정받는 자가 되기를 희망하고, 남의 악을 꾸짖고 분노하면서 정작 내가 그들과 똑같은 악을 범하는.... 천하에 흉악한 죄인 중의 괴수가 아닌가?


다윗의 기도... 감히 내가 하나님께 드릴 수 없는 기도이지만, 이런 흉악한 죄인을 위해 이 땅에 오시고, 그 죄를 감당하시고 십자가에 나 대신 죽으신 내 주인이고 내 하나님이신 예수님, 그분 때문에 (덕분에) 용기를 내어 이 벌레만도 못한 나를 그렇게 만들어 달라고 감히 기도한다.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 그분의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이 나를 변화시키고 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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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학개론



지난 주에 구청에서 공짜로 영화 한 편을 봤다. 약 14-5년만에 영화관 같은 곳에서 본 첫 영화...
<<건축학개론>>

비록 남성의 시각에서 그려진, 남성의 첫사랑의 판타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영화였지만, 첫사랑에 관한 아름다운 스토리와 상징과 절제가 절묘하게 이루어진 참 좋은 영화였다. 이 영화에 대해서 하고 싶은 얘기는 많지만 나도 절제하련다.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사람들은 첫사랑을 떠올리며 가슴이 먹먹함을 경험한다고 하는데, 나는 왜 가슴이 먹먹했을까? 첫사랑과 결혼해서 함께 살면서 매일 보고 있는데...
내 생각에 그 먹먹함이란, 단순히 첫사랑의 기억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90년대 초반을 대학생으로 살았던 사람으로서 느끼는 노스텔지어... 영화의 세세한 소품에 배여있는 90년대 초반의 분위기에 지극히 공감하는 사람으로서 느끼는 "그 시절"에 대한 그리움, 그 젊은 시절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그 시절에 영화의 주인공들처럼 철없고, 순수하고, 서툴렀던 자신의 지나간 과거의 모습에 대한 향수. 그것이 바로 그 "먹먹함"의 원인이리라.

영화의 주제곡인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이 아직도 내 귓가를 맴돈다...

'나도... 그런 시절이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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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n why worry?

딸내미가 이메일로 보내준 그림..


가장 중요한 것...

최근에 트위터에서 "하나님을 소유하고 다른 모든 것을 소유한 사람과 하나님을 소유하고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없다."라고 C. S. 루이스가 말했다는 것을 읽었다.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말이었다. 하나님이 전부이고, 그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피부에 와 닿게 표현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소유한 주님. 주님의 소유가 된 나.
그 가치가 얼마나 큰 것인지, 나는 자주 잊는다. 세상이 커보이고, 내가 가진 주님은 작아 보인다.
세상을 따르는 것이 더 멋있어 보이고, 거기에 생명이 있어보인다. 반면 주님은 내 관심 밖으로 사라져 간다.
그것이 바로 내 안에 아직도 남아 있는 뿌리깊은 죄성의 적나라한 모습이다. 주님의 가치를 축소시키고, 내 일상의 밖으로 밀어내려는 경향...

루이스의 한 마디는 나로 하여금 주님의 위대하심, 모든 것 되심을 다시 한 번 스스로 깊이 생각하게 한다.
그렇다. 주님이 전부이다. 그분을 소유하고, 그분의 소유가 된다는 것이 가장, 그리고 유일하게 중요한 일이다.
그리고 그분 안에서 흔들림이 없이 그분만 바라보고, 그분의 크신 능력을 믿고 잠잠하게 있는 것이 이 세상을 진정으로 평안하게 사는 방법이다. 그분 바깥의 세상에서 풍랑이 일건, 허연 이를 드러내고 삼킬 듯이 나에게 다가오건 상관 없이...

주님 때문에... 참...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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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생각 하나...

무신론자가 되기에 자신은 너무 믿음이 부족하다고 말하는 Ravi Zacharias...
그의 말에 100% 동감한다.

무신론자가 된다는 것은 수 많은 질문들에 대해서 덮어두고 넘어간다는 것이고, 그러는 가운데 생을 유지하는 것은 가히 엄청난 믿음을 필요로한다.

나라는 존재가 어디에서 왔는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내 인생의 의미는 무엇이고 어디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하는가?
선과 악,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 등의 "가치"는 어디에 그 근원을 두어야 하는가? 왜 어떤 것을 옳고 어떤 것을 옳지 않은가?
죽음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죽음 이후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인간이 짐승보다, 혹은 아메바나 바이러스나 해충보다 더 고귀하다는 것은 어디에 근거를 둔 것인가?

등등등...

수 많은 질문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거나 회피할 수 밖에 없는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큰 믿음을 수반하는 것이다.

아무리 곰곰히 생각해봐도, 아무리 내 자신에게 정직하게 되물어봐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는 가운데 그에게서 모든 문제들의 확실한 답을 찾는 것이 훨씬 믿음이 덜 필요한 가장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선택이다.

니체 이후 신을 제거한 세상은, 하나님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못하는 그 세상은, 의미를 찾지 못한 채, 표류하는 난파선과 같다. 지금 세상 돌아가는 모양이 딱 그것이다.
세상은 나에게 믿는 자라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세상이 더 큰 믿음을 강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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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력"이란? (이영표 선수 인터뷰 기사 중에서)

이영표 선수가 인터뷰에서 밝힌 축구선수의 정신력에 대한 정의이다. 깊이 새겨들을 만하다.

"자신보다 강한 자 앞에 섰을 때나 혹은 반드시 이겨야 하는 경기를 앞두고 밀려오는 두려움을 스스로 이겨낼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약한 상대를 쉽게 생각하지 않는 것, 경기장 안에서 자신의 감정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 또 졌을 때 빗발치는 여론의 비난을 묵묵히 이겨내는 것, 이겼을 때 쏟아지는 칭찬을 가려서 들을 줄 아는 것도 모두 멘탈에 속한다. 심지어 경기장 밖에서의 생활이 곧 경기장 안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아는 것도 멘탈이다. 그렇기에 멘탈은 경기 당일 날 "한번 해보자!" 라고 외치는 것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가장 강력한 멘탈은 훈련장에서, 그리고 우리의 일상에서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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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A Holy Nation" (레위기 10장)

오스틴에 있는 High Pointe Baptist Church의 Juan Sanchez 목사님의 설교

거룩함, 순종, 참된 그리스도인의 지표에 대해서 참으로 정리가 잘 되어있는 설교말씀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강력히 추천한다. 약간 길지만 꼭 들어 보시길...

http://www.highpointeaustin.org/archives/sermons/a-holy-nation-leviticus-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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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식

과 친구들의 졸업식.
작년 5월에 졸업식 한 이후에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들이 모두 모였다. 나만 빼고... 흑.

(오른쪽 맨 끝의 미모의 여자는 우리과 교수. 젊은 나이에 정교수가 된 매우 뛰어난 학자요 강사.)


잡생각...

때로는 하나님께서 나만 너무 편애하시는 것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질 때가 있다.
내 모든 일정을 미리 알고 준비해 놓으시고, 감당할 만하게, 하지만, 나에게 최선이 되도록 미리 준비하시는 어머니 같은 하나님.
내가 미래를 모두 알고, 또한 모든 것에 대해 전지한 능력이 있다면, 꼭 그렇게 했을 법하게 하나하나 준비해 놓으시는 하나님을 보면서 그렇게 느낀다.
그런 하나님이니까 맡길 만 하다. 신뢰가 간다. 당장 내일 일을 전혀 모른다 하더라도, 평안 가운데서 오늘을 살 수가 있다.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특권 아닌가?
세상에서 누가 그런 삶의 묘미를 알 것인가?

4시부터 시작될 강연을 위해 연구실을 나서기 10분 전...

준비 상태와 상관 없이 그저 감사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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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음에 감사하며...

토요일 아침.
학회 발표를 앞둔 오전...
조용히 연구실에 앉아 하나님께 감사한다.
살아있음에 대해서... 그것이 참 큰 감사제목이 됨을 지난 주와 이번 주, 폭풍같은 스케줄 속에서 극한을 향해 치닫는 삶을 사는 가운데, 깨달았다.
숨쉬는 것, 움직이는 것, 그리고 주어진 일이 있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어제가 518. 학생들과 518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다. 예전에는 518 때가 되면 대학가는 늘 들썩였다. 하지만 너무나 조용한 캠퍼스, 그저 다른 날에 비해 전혀 특이할 것이 없는 날인 것처럼 살아가는 대학생들을 일깨우고 싶었다.
"역사를 망각하면, 그 역사는 다시 되풀이된다"는 것을 화두고 시작한 518의 내 개인적인 경험들.
초등학교 5학년 때 광주의 한 가운데서, 도청에서 걸어서 15분 거리에 살던 내가 직접 경험한 그 끔찍한 비극, 하지만, 그 안에서 피어나던 민주화에 대한 열망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어제 트위터에서 어떤 한 사람은 "광주사태"는 사회 하층민에 있던 빨갱이들의 반역행위이고, 따라서 그들을 처단하고 진압한 것은 지극히 정당한 정부의 조치였다고 역설하는 것을 들었다. 그가 과연 광주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그렇게 주장하는지... 그 글을 읽으면서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무식하면 용감하고, 과격해질 수 있다.

그 당시 "민중"들은 광주 시민 모두였다. 못 사는 사람들이 일으킨 반란이 아니었다. 오해려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했다. 주로 중간계층에 있는 사람들이 주축을 이뤘지만 거의 모든 광주 시민들이 참여한 범시민적 운동이었다.
원하는 것은 단하나. 민주화. 민주적인 정부를 세우고, 민주적으로 대통령을 국민들이 직접 뽑는 것을 원했다.
광주시민들은 항거하는 와중에도 북한의 선동을 매우 경계했다. 우리 동네에서 총을 들고 정부군에 대해 항전에 참여했던 대학생들, 아저씨들은 간첩으로 보이는 사람, 북한을 찬양하고 선동하는 사람을 붙압아 경찰(혹은 정부군)에 넘겼다고 자랑했다. 그러면서 북한 간첩은 설 땅이 없음을 분명히 했었다. 그 "무용담"을 전해들은 동네 주민들은 모두가 잘 했다고 칭찬했다. 우리 모두는 반공교육을 철저하게 받는 박정희 세대였다. 그런 삶들을 종북 빨갱이로 모는 것을 보면서 참으로 어처구니 없다. 무식하다는 말 밖에는 할 말이 없다.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았지만, 설사 광주 시민들이 빨간물에 든 사람들이라고 치자. 그렇다고 그렇게 학살을 자행하는 것이 맞는가? 임신부의 배를 가르고, 처녀의 가슴을 도려내는(내 어머니께서 직접 그 시신을 보셨다.) 그 악한 행위가 정당화되는가?

내가 오늘을 살아갈 권리가 있다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 모든 인간도 동일하게 오늘을 살아갈 권리가 있는 것이다. 그들이 아무리 사상적으로 내 반대편 극단에 있다 하더라도 그들에게 주어진 생명은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것이다. 인간이 함부로 할 수 없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인 것이다.

오늘, 내 한 목숨 살아 있음에 감사하면서, 518 때 죽어간 영혼들을 추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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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전경

학교 내 방에서 보이는 전경...
아침의 신선한 공기가 오랫만에 찾아온 여유를 더 상쾌하게 한다.

스승의 날

스승의 날인 어제...

늘 그렇듯, 스승의 날을 맞아서 스승님들을 생각했다. 그리고 그분들께 어떻게 감사의 마음을 전할까 고민했다.

그리고 원고 마감 때문에 정신없이 논문을 쓰다가 시간이 되서 수업에 들어갔다. 영어교육과 대학원 수업.
들어가자마자 깜짝 놀랐다. 풍선 장식, 음료수, 케익(그것도 세 개씩이나), 과자, 과일...
아직 선생의 자리에 있는 것이 어색해서인지 전혀 생각을 못하고 갔다가 학생들이 준비한 것들을 보고서야 실감이 났다.

'나도 선생이구나...'

그리고 나서 선생으로서의 내 자신을 돌아봤다.
그런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는 자인가?
내가 학생들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나?
내 학생들에게 주고 싶은 최고의, 최선의 것을 줬나?
그들의 인생에 도움이 되는 역할을 했나?

그런 생각을 하고 나서야, 스승의 날이 선생의 자리에 있는 나에게 두려운 날로 다가왔다.
내 스스로를 진심으로 돌아보는, 그 가운데 옷깃을 여미는 그런 시간이었다.

부끄럽지 않은 선생, 학자가 되고 싶다. 그저 열심히만 하는 자가 아닌, 나로 인해서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고, 인생에 중요한 뭔가를 얻어가는 그런 선생이 되고 싶다.

어제 정성껏 많은 것을 준비해 준 학생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조국..(통합진보당 사태를 바라보며)

조국...
내 나라. 내 어머니의 나라.

조국이라는 이 단어에는 내가 가장 미워하는 것까지 포함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자주 잊는다.
내가 싫어하는 정치인들, 기회주의자들
내가 싫어하는 부정과 비리
내가 싫어하는 이기주의
내가 싫어하는 교육제도
내가 싫어하는 사소한 규칙위반
내가 싫어하는 아귀다툼
내가 싫어하는 착취적인 자본가와 자본주의의 부정적인 영향들
내가 싫어하는 부패한 종교인들
내가 싫어하는 무지몽매한 유권자들
내가 싫어하는 전두환, 518의 악몽
내가 싫어하는 지역주의
내가 싫어하는 학벌중심, 집단 이기주의
등등등등...

이 모든 것들을 "조국"이라는 한 단어가 감싸고 있다는 것.
내가 조국을 사랑한다면, 비록 싸워야 하는 대상이라 할지라도, 아직은 그 조국의 일부라는 것. 따라서 그것까지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나는 참 자주 잊는다.

그래서 내가 싫어하는 이런 무리들, 이런 행태들을 일거에 없애버리고 싶은 마음,
그리고 그런 자들과 그런 행태들이 존재하는 한 조국 자체를 거부하고 싶은 욕구가 내 안에서 움터오른다.

아니다.
그건 아니다.
조국을 사랑한다는 것은, 있는 그 조국이 담고 있는 모든 아픔을 함께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 모순을 아파하지만, 결코 도외시하지 않고 같이 아파하며, 보다 더 나은 내 조국을 위해 자리를 지키며 때로는 싸우고, 때로는 묵묵히 내 일을 감당해 나가는 것이다.

다른 나라에 비해 너무나 부족한 것이 많은 못난 조국이지만, 그래도 내 아버지 어머니의 나라이며, 내 조상들의 나라이며, 내 아이들이 살아가야할 나라이다.

내 조국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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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당함... 자신감...

한국에 돌아와 학자로서 활동하면서 나에 대해서 "당당함" "자신감"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평가를 많이 듣는다. 그러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에 대해서 묻는 경우도 있다.
사람들은 내가 서울대 출신이고 미국 박사학위를 가진 사람으로서, 많은 좋은 타이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건 완전히 틀린 생각이다. 그런 타이틀은 거의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사실, 내 아내를 제외한 이 세상사람들은 내가 얼마나 겁이 많고, 두려워 떨며, 내 자신에 대해서 자신감이 없어하는지 상상하지 못한다.
초조, 불안, 좌절...
그러는 가운데 겉으로 드러나는 당당함과 자신감...
그것은 그렇게 보이려고 노력한 결과물이 아니다. 나는 당당하려고 노력하지 않았고, 자신감이 넘쳐보이도록 노력하지 않았다.
나는 나... 자신감 없고, 불안하며, 초조해하며, 두려워 떠는 나이다. 그것은 변함이 없다.

하지만 그것과 동시에 내 안에는 내 왕이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다.
전능하신 하나님. 전지하신 하나님.
왕중의 왕. 어느 누구도 꺾을 수 없는 절대 권능.
절대 선, 절대 정의이신 내 하나님.

그리고 그런 하나님이 내 아버지이고,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구원하신다는 사실.

그것에 대한 "믿음"이 있다.

한 없이 연약한 내 자신은 추호도 변함이 없지만, 내 당당함과 자신감의 근거는 바로 내 믿음에 있다. 내 존재의 가치와 내 미래를 내 자신이나 타인의 평가가 아닌 그 믿음에 두고 있기 때문에 나는 당당할 수 있고, 자신감에 넘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자가 그토록 당당하고 세상에 꿇리지 않을 수 있는 비결이다. 놀랍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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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얼마 전에 트위터에 그냥 쓴 글...)


수많은 통계의 숫자들... 그 숫자들에 포함된 한 사람을 우주로 보는 것... 그것이 바로 성경적인 관점이다. 특히나 그 한 사람이 약자이고 빈자일 경우에는 더욱 더... 아무리 적은 수라도 그들의 신음과 울음은 하나님에게 너무나 크게 들린다.

그리스도인인 나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그 신음을 하나님 만큼 들을 수 있는 귀. 그리고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 바로 그것이다.

하나님이 만드신 인간이 사는 세상은 정글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가족이다. 가족은 늘 가장 약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집중한다. 모든 것을 퍼 준다.

그런 가족 간의 사랑이 바로 이 시대에 꼭 필요하다.

성공한 자, 잘난 자, 잘 나가는 자에만 집중하고 능력있고, 힘있는 자들의 목소리에 약한 자의 목소리가 묻혀버리는 사회... 절대 건강하지 못한 사회이고, 절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그런 사회가 아니다.

"부모를 공경하라"-김남준 목사님 설교

오늘 주일... 예배 중에 들었던 말씀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성경의 말씀을 가장 잘 전달한 말씀이었다.
같이 나누고 싶다.

열린교회-김남준 목사

"부모를 공경하라"

반공, 멸공, 승공은 기독교의 정신이 아니다!(3)


그리스도인으로서 북한과 공산주의를 결코 선하다고 말할 수 없다. 분명 그것은 악이다. 하지만, 그것이 악인 이유를 분명히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북한과 공산주의는 그 자체로서 악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구분이 매우 중요한 이유는 바로 "종북"을 비판하며, "멸공"을 기독교의 교리처럼 설파하는 자들과 그런 교회의 이중성에 있다. 만약 그들이 북한과 공산주의를 비판한다면, 당연히 그들과 비슷한 행태를 자행하는 모든 악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비판해야 한다. 인간의 존엄성이 무시되는 현장이라면, 그 어디든지, 그 대상이 누구든지간에 신랄한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다양한 목소리가 존중되지 않고, 하나의 목소리만 용인되며, 다른 모든 목소리를 "숙청"의 대상으로만 보는 세력이 있다면, 그 세력 또한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생활을 유지해야할 경제권을 무시하는 세력이 있다면 그 세력 또한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문제는 소위 종북타파 운운하는 기독교 내의 일부 세력들이 국내의 그런 악들에 대해서, 특히 정부가 보이는 그런 동일한 행태에 대해서는 이상하리만치 침묵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칭송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분명히 해두지만, 나는 북한의 지도부와 공산주의를 옹호할 생각이 추호도 없다. 성경적으로 볼 때,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며 진노의 대상이다. 따라서 그들에 대한 비판은 (다양한 형태로) 가해져야 한다.
하지만... 그 동일한 잣대로 국내의 상황들, 특히 정부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성경적으로 볼 때, 현재의 정부는 결코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그런 정부가 아니다. 오히려 그분의 진노의 대상이다. 특별히, 이 정부가 기독교의 이름을 내 걸고 출범한 정부이고, 대통령이 교회의 장로라는 직분을 가진자로 국내에 너무나 잘 알려진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는 오히려 북한에 대한 진노보다 더 클 수 있다. 왜냐하면, 북한은 적어도 하나님의 이름을 팔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스스로 기독교에 적대적인 자들로 자처하고 있고, 세상의 모든 자들은 북한이 악당인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자행하는 악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MB 정부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더럽히고,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에 대한 냉대를 부추기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는 더 클 수 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이라면, 하나님의 이름의 거룩성을 그 누구보다도 귀한 가치로 여기는 믿음의 사람들이라면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답은 자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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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공, 멸공, 승공은 기독교의 정신이 아니다!(2)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북한이, 그리고 공산주의가 악인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무시이다. 인간은 (적어도 기독교적 관점에서 본다면) 두 가지의 측면을 동시에 갖는다. 하나는 하나님을 떠나 심판 받을 수 밖에 없는 죄인,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엄한 자이다. 이 양자적 측면이 인간을 지극히 독특하게 만든다. 어쨋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존중받아야 한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는 인간에 대한 희망과 인간에 대한 존중에서 시작되었다. 자본의 악랄한 착취에 인간의 가장 기본권인 생존권조차 위협받는 극한으로 몰려가는 노동자들을 분석하면서, 그들이 다수의 힘으로 폭력에 의해 자본가 계급을 제압하고, 그들만의 유토피아를 만들어 모두 같이 잘 살자는 것이 공산주의의 이념이다. 하지만, 그런 낭만주의적 인간관은 성경에서 정확하게 제시하는 극히 이기적인, 죄악된 인간이라는 현실에 발을 붙이고 있지 않기 때문에 실패할 수 밖에 없는 내재적 모순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공산주의는 시작부터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체제인 것이다. 그런 실패를 극복하기 위해, 혹은 인간의 죄성의 발현의 통로로서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무자비한 인권 유린을 자행했다. 죄악된 인간들을 자신들의 이상적인 체제에 순응시키기 위해 전례없이 강력한 독제체제를 구축해야만 했고, 독제로 권력이 강화되는 가운데, 죄악된 한낫 인간인 지배자들의 타락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가운데, 노동자들의 천국을 만들기 위해 시작된 정치체제가 그전의 그 어떤 악한 체제에 못지 않은 해로운 악이되어 버린 것이다.
그 가운데 사회적 다양성은 말살되어갔다. 공산주의라는 유일한 이념만이 인정을 받고 다른 모든 사상들은 "반동"이라는 꼬리표가 달려져 숙청의 대상이 되었다. 그 사회에서는 유일하게 한 목소리만 가능한 사회가 되어 버렸다.
다양성이 사라져버리고, 인간성에 대한 말살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경제적으로도 지극히 비효율적인 사회가 되어버렸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인간은 지극히 이기적인 존재이다. 자본주의가 성공하고 살아 남을 수 밖에 없는 제도인 것은, 자본주의의 가장 핵심에는 바로 그 인간의 이기성을 인정하고 그 이기성에 체제의 핵심과 근간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이기성을 부정한다. 이기성과 체제가 절묘하게 연계되어 있는 자본주의에서는 생산성이 날이 갈수록 높아질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노력하면 할수록 더 많이 얻어지는 결과물을 노력한 본인이 가져가는 제도이기 때문이다. 공산주의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그 사회에서는 생산성이 지극히 낮을 수 밖에 없다. 이런 이유로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생산성이 지극히 낮은 비효율적 경제체제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가난이 일상인 삶이 된 것이다.

공산주의가 악하다면, 그 자체로 악하다기보다는(우리는 사도행전에서 보여주는 믿음에 근거한 공산주의적 삶의 방식(개인의 소유를 팔아 모두 함께 나누는 공동체)이 긍적적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는 성경이 공산주의적 삶의 방식 자체에 대해서 부정하고 있지 않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물론 그 구현 방식은 성령의 임재에 의한 그분의 강력한 다스리심이 기반이 되고 있다는 것이 인간이 만든 공산주의와의 근본적인 차이이다.), 그 공산주의체제 하에서 벌어질 수 밖에 없는, 인간 존엄성에 대한 무시, 다양성의 말살, 경제적 비효율성 등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북한이 악이라면, 그런 부정적 요소들이 역사상 그 어느 나라보다도 더 극대화된 사회이기 때문일 것이다. 거기에 덧붙여 한낱 인간에 불과한 존재를 종교적 숭배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 (결국 그것은 앞에서 말한 악들을 더 효율적으로 자행하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지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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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공, 멸공, 승공은 기독교의 정신이 아니다!(1)

요즘, "종북"이라는 말이 많이 사용되고 있다. 보수(사실 보수라기보다는 수구가 더 정확하지만)진영에서 진보진영을 비난할 때 어김없이 사용하는 형용사이다.
정치적으로 두 진영으로 나뉘어 있는 가운데 서로를 비난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단어든지 가져다 쓰면서 상대의 이미지에 먹칠을 하는 것이 정치의 일부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그들을 비난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문제는 보수의 정치적 논리와 편의에서 사용되는 "종북"이라는 비난조의 단어가 소위 일부 기독교에서, 교회와 목사들에 의해서 마치 그것이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것처럼 오용되는 것에 대해 비판하고자 한다.

일부 대형교회와 많은 중소규모의 목회자들을 북한을 빨갱이이고 악이기 때문에 반공, 멸공, 승공이 하나님의 뜻이고, 따라서 마치 기독교 교리의 중요한 일부인 것처럼 설파하며 교인들을 오도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반공, 멸공, 승공은 기독교의 복음과 상관 없는 구호일 뿐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보수적(보다 더 정확히 발해서 수구적) 정치 이념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기독교를 이용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김홍도 목사는 너무나 잘 알려진 예이고, 이번 총선에서 느닷없이 등장한 기독자유민주당도 그런 좋은 예이다.

북한이 악인가? 공산주의가 악인가? 마귀인가? 하나님의 적인가? 복음의 적인가?
물론 어떤 면에서 보면 그렇다. 하지만 여기서 그들이 어떻게 해서 악이 되는지, 혹은 악으로 규정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좀 더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이 세상에서 정신이 조금이라도 제대로 되어 있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북한을 (특별히 북한 정권을) 선하다고 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맞다. 그들은 악이다. 하지만, 왜 그들이 악인가? 독제체제라서 그런가? 물론 그럴 수 있다. 민주주의를 절대적인 신앙으로 삼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북한의 독제 체제는 악이 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볼 때 독제체제는 악인가? 그 체제 자체가 악으로 규정될 수 있는가?
아니다. 결코 그럴 수 없다. 성경에서 보여주는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왕이신 절대왕정이다. 거기는 결코 민주주의가 발을 붙일 수 없는 정치체제를 가지고 있다. 지극히 완전하시고 선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완벽하게 왕이 될 만하고, 되어 마땅한 존재이신 하나님이 왕위를 차지하고 있긴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하늘나라의 정치체제는 독재정치이다.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서 죽이시면서까지 백성들을 사랑하는 왕, 공의와 사랑으로 다스리는 왕, 존재의 무게 자체가 완전히 다른 탁월한 존재인 왕이긴 하지만 독재는 독재다. 만약 민주주의가 지고의 선이고, 독재가 극한 악이라면 하나님 나라는 독재가 아니라 민주정치를 가져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독재는 그 자체로 성경적인 악이라고 볼 수 없다.
물론 하나님 앞에 모두 죄인들이고 아무도 더 낫다고 볼 수 없는 인간들 사이에서는 불완전하지만, 그나마 최선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이 민주주의일지 모른다. 하지만 플라톤이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주장했던 것처럼, 뛰어난 철학자들에 의한 통치가 더 낫다고 볼 수도 있다. 요컨데, 민주주의 그 자체가 기독교의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근거는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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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하나...


언론의 왜곡보도를 보여주는 신랄한 풍자의 그림.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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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하나님의 형상...

살다보면, 때로는 밥을 먹고 있는 내 자신이 식충이나 동물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사회에서 제 구실도 못하면서, 능력도 없으면서, 꾸역꾸역 밥을 축내는 내 자신을 보면서 느끼는 느낌이다.
그럴 때면 내 자신에 대한 혐오감으로 가득 차 오른다.
내 스스로가 가치없는 인간으로 보이고, 삶이 무의미해진다.
'나같은 인간은...' 하며 별의별 생각이 다 든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하나님 앞에 죄악된 생각임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창세 전에 나를 품으시고, 나를 창조하신 그분의 뜻과 계획을 온전히 무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 스스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은 내 의지와 상관 없는 창조주의 의지의 결과이다. 그분은 목적을 가지고, 사랑 안에서 귀하게 나라는 인간을 창조하셨다. 그런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 결과가 바로 내 스스로에 대한 혐오인 것이다.

나는 내 스스로를 비하하거나 혐오할 권리가 없다. 그것은 나에 대한 주권이 나에게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은 피조물인 나를 귀하게 여기신다.

내 스스로에 대한 비관적인 생각은 참으로 위험하기도 하다. 그것은 그런 생각이 내 자신에게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이 사회에 기여하는 "실질적인" 역할이 없는 사람들은 존재 가치가 없는 듯한 그런 태도, 능력이 없는 자들과 장애를 가진 자들을 멸시하는 태도가 바로 같은 마음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사악한 생각이다. 인간은 그 누구든지 간에 인간인 그 자체로서 존귀하고 이 땅에 존재할 가치를 충분히 가진다. (사실 매우 드물게 이런 원칙이 적용되기 매우 힘들어 보이는 경우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귀한 자이고, 다른 모든 것을 떠나 그 자체로서 존중받고 이 땅에 살 권리를 보장받아야 마땅한 존재인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이 내가 능력이 있고,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라는 사실이 참으로 놀랍다. 그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날이 갈수록 뼈저리게 느낀다.
그분은 나를 있는 그대로, 부족하고 무능력한 그대로 받으신다. 그분의 자녀로 나를 품으신다. 내가 부족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큰 은혜와 사랑으로 품으신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닌가?

내가 오늘도 밥을 먹고 생존하며 이 땅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마치 내가 무슨 중요한 사람이나 된 듯한 태도를 가지고 자신있게 살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런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다. 나를 창조하신 그분 때문이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그분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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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부터 난 지혜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 거짓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리라."(약 3:14-18)

내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하나님의 엄위하신 말씀이다. 이 말씀이 내 스스로를 한 없이 부끄럽고 수치스럽게 만든다.

하나님. 저를,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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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시 자실한 두 중학생을 생각하며...

인간에 대한 이해, 타인에 대한 배려, 특히 약자와 소수에 대한 배려를 완전히 상실한 채, 개인의 성공과 물질적 풍요가 주는 안정만을 지상의 가치로 여기는 지극히 이기적인 사회... 그런 사회에서 아이들에게 서로 잘 지내라고, 서로 죽이지 말라고 하는 것은 완전히 딴 세상에서 사는 사람처럼 살라고 강요하는 것과 같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자화상이다. 그들에게서 어른들의 일그러진 모습이 보인다. 그들을 어떻게 비난하랴? 그런 상태에서 만 가지의 "대책"이란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저 땜빵식일 뿐, 사태만 더 악화시는 것. 사실 어른들도 그 대책이라는 것을 모른다. 만약 알았다면 그들 먼저 변했겠지...

하나님의 복음이 그 정답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자로서 존엄하기 때문에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함을... 그리고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인간에게, 특히 약자와 소수에게 특별한 사랑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마땅히 그들을 섬겨야 한다는 가장 기본적인 진리가 거기에 담겨 있다. 강한 자가 약한 자의 발을 씻기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기독교의 핵심이자, 이 사회의 핵심 가치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이 사회를 바꾸는 힘이고, 자살로 죽어가는 아이들을, 그들의 피폐한 삶을 풍요롭고 살 가치가 있게 만드는 것이다. 복음으로 혁명을... 혁명을 일으켜야 한다.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그의 십자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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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오후...

토요일 오후...
서울대 캠퍼스는 한산하다. 몇몇 학생들과 캠퍼스를 구경하기 위해 찾은 아이들과 어른들...

서울대 바깥은 이미 봄이 왔지만, 이곳은 아직 봄의 문턱에 진입하기 직전의 상황인듯, 약간은 춥다.

토요일에도 학교에 나와 연구실에서 수업준비하고 논문준비하는 것이 참... 이렇게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래도 공부할 곳이 있고, 나를 바쁘게 하는 일거리가 있다는 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에게 얼마나 감사해야할 일인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지난 수요일에 있었던 총선 후, 마음을 추스리기가 너무 쉽지 않았다. 쓰라린 패배에 따른 원망과 좌절. 공의와 정의를 기대했건만, 세상은 달랐다.
아직도 마음이 잘 잡히진는 않지만, 일상을 삶에서 내가 해야할 일을 감당하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 한산한 캠퍼스에서 다음 주 수업시간에 만날 학생들을 생각하며, 그들에게 최고의 것을 주는 선생이 되어야 겠다는 마음, 그리고 학계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기여를 해야겠다는 다짐,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 왕, 내 주인, 내 친구, 내 모든 것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그분의 가장 충실한 동반자요, 종이요, 제자가 되겠다는 소망을 품고, 나아간다.

조금씩 제 색깔을 내기 시작한 개나리를 보면서, 좌절하지 않고 감사하며, 희망하며, 내 자신 안의 어두움, 그리고 이 사회, 내 조국의 어두움과 싸우리라.

책 읽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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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로 살 것인가?

부활주일 아침...
예배를 드리면서, 그리고 하루 종일 깊이 생각한 것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의미가 이 땅을 사는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에 관한 것이었다.

주님이 부활하셨다!

여러 면에서 너무나 기쁜 소식... 신학적으로, 그리고 이론적으로는 기뻐해야 할 이유를 수도 없이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지금 나는 기쁜가? 정말 기쁜가? 그분의 부활이 내 삶에 절대적으로 복음으로 다가오는가?

자신있게 답할 수 없는 것이 내 현실...

하루가 24시간이 아니라 48시간이더라도, 일주일이 7일이 아니라 14일이더라도 시간이 부족해서 허덕이며 하루하루 한 순간 한 순간을 정신없이 살아가는 나에게, 고갈되는 체력과 정신력 가운데 이번 학기가 탈없이 지나가기만을 고대하고 있는 나의 삶에 부활은 어떻게 기쁨이 되는가?

내 마음 속에 뚜렷이 떠오른 한 생각... 그것은 그분이 살아계시다는 것이다.
내 하나님, 내 구원자, 내 도움, 내 피할 바위, 내 피난처, 내 능력, 내 주인께서 지금 살아 계시다는 것이다. 그것이 나에게 기쁨이 되지 아니한가?

내 인생... 마치 아무 도움도 없이 스스로의 인생을 스스로의 힘으로 개척해 나가야 하는 고아와 같이 살아간다면, 나는 삶에 매몰되어 살 수 밖에 없고, 일주일의 삶에서 한 치의 여유도 없이, 생존을 위해 투쟁해야 하는 것이 내 삶의 현 주소...
턱없이 부족한 내 능력... 너무나 많이 주어지는 일들... 그 간극, 그 괴리를 매꾸는 것은 오로지 더 일하고, 더 노력하고, 더 내 자신을 쥐어 짜는 것 밖에 없다면... 내 인생은 결국 그 가운데서 피폐해지거나(성공할 경우), 무너지는 것(실패할 경우) 외에는 다른 결론이 없어보인다.

하지만, 주님이 부활하셔서 살아계신다. 그분은 내 주인이고, 하나님은 내 아버지이시다. 내가 사는 것은 그분의 뜻 안에서 사는 것이고, 그분이 허락하신 반경 안에서 사는 것이다. 애초에 내 능력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내 노력으로 완성된 뭔가를 이루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는 게임의 룰이 다르다.
살아계신 그분의 능력으로 사는 것이다. 그분이 살아계셔서 나를 지켜보고 계시고, 그분의 전능하신 오른 팔로 나를 붙드시는 것이다.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그분을 하실 수 있다.

그분과 교제하며, 그분을 사랑하며, 순종하며, 그분의 뜻 안에 거하며, 하루하루, 순간순간을 충실하면서도 성실히 살아간다면 내 능력과 내 과업의 엄청난 간극은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 의미를 잃는다.

그분이 살아나셨고, 살아 계신다. 나는 우주에 던져진 미아가 아니다. 나에게는 내 주님이 계신다.

부활이... 그분의 부활이 참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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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칙, 준법

며칠 전 아침 5시에 차를 몰고 학교로 향했습니다.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일찍 학교에 가서 일을 시작하기 위해서였지요. 오랫만에 차를 몰고 달려가는 길 내내 너무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그것은 단 한 대를 제외한 모든 차들이 교통신호를 완전히 무시하고 달리는 것을 봤기 때문입니다. 빨간불과 파란불이 아무런 의미가 없었고, 도로에 그려진 차선마저도 그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듯 마구 질주하는 차들... 차종에 상관 없이, 택시, 승용차 가리지 않고 모든 규칙을 무시하며 달리는 그 모습...
'내가 미국에서 너무 오래 살았나?'라고 혼자 생각하며, 이 희한한 광경을 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빨간불이 켜진 횡단보도 앞에서 정차해 있는 내 자신이 너무나 불편하고, 내가 이상한 사람이 되어버린 듯한... 융통성이 전혀 없고, 앞뒤 꽉막힌 사람이 되어 버린듯한 자괴감. 나도 그들과 같이 달려야 하지 않을까하는 마음과 그러고 싶은 충동 가운데, 얼마 안 되는 정차 시간이 길게만 느껴졌습니다.

요즘 정치권에 대한 분노, 특히 이명박 정부에 대한 분노가 우리 나라를 휩쓸고 있습니다. 그 분노의 본질은 법과 규칙을 그 누구보다도 지키고 수호해야할 장본인들이 법과 규칙을 무시하며 목적을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지 거리끼지 않았던 것에 대한 것일 겁니다. 하루가 멀다하고 터져나오는 대형 스캔들을 보면서 "세상에!" "저런!" 등등의 탄식가운데 그들을 정죄합니다.

맞습니다. 그들은 정죄 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을 심판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탈법이 우리의 규칙위반과 본질적으로 다를까요? 사안의 경중에 차이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법과 원칙을 존중하는 마음이 없다는 면에서는 같은 것이 아닐까요? 이번에 그들을 심판하면 다음에는 나아질까요? 우리 안에, 우리 사회 안에 준칙과 준법의 정신이 사라져 있는데, 그것이 가능할까요?

그리스도인이 20프로가 넘는다는 우리 한국사회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이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을 삶으로 실천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자들은 당연히 국가의 법도 두려워하고 존중할 줄 아는 자들이어야만 합니다. 그들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질주하며 달리는 그들 가운데,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으로 자처하는 자들은 없었을까요?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복음으로 거듭났다는 것이고, 거듭난 자들은 세상의 목적을 따라 살아가는 자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들입니다. 모든 면에서 다를 수 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교통신호를 지키는 것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회변혁을 위해 투표해야합니다. 사회 변혁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적극적으로 "운동"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세상이 바뀔 것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바른 삶을 먼저 사는 것, 그리고 그런 바른 삶의 기운이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확산됨으로써, 세상이 함부로 살지 못하도록 소금의 역할을 하는 것. 그것이 빠진다면, 그 "운동"은 허상에 불과할 것입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밤중에 내가 빨간불이 켜진 횡단보도 앞에서 정차해 있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전하는 것 못지 않게 중요한 일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내 신앙 고백이요,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표지이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이 아무리 불편하고, 튀지 않고 다른 사람들과 같이 행동하고 싶은 욕구가 치솟더라도, 그것 때문에 나는 그 자리를 지킵니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참여...

숨이 턱턱 막히게 정신없고 바쁜 일정. 하루가 24시간이라는 것, 그리고 일주일이 7일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 또한 체력과 정신력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이 원망스럽기만 한 작금의 상황.

하지만, 그 바쁜 것을 내려 놓고, 어제 가족들과 함께 여의도에 갔다. 일주일의 피로와 긴장감, 두개의 강의로 극도로 피곤한 몸, 그리고 당장 처리해야 할 산적한 일들을 뒤로하고, 나보다 더 큰 나, 내 조국의 앞날과 그보다 더 중요한 내 주님의 나라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실천으로 방송 3사의 파업공연에 참석했다.
내리는 비, 수많은 인파, 오래 서있어서 힘들어하는 아이들. 고생스러웠다. 하지만, 파업에 참여한 사람들 속에서 상식과 진실과 정의를 향한 간절한 열망을 보았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리라는 강한 확신 가운데서, 공연을 즐겼다. 어린시절, 대정부투쟁이 일상이었던 광주에서 자랐고, 시위가 한창이었던 때 대학을 다닌 나로서는 새로운 방식의 파업과 대정부 투쟁이 약간은 낯설었지만, 그 때보다 훨씬 바람직하고 효과적이 되었다는 생각을 가졌다. 불법과 부정에 대해 싸우면서 폭력을 사용하는 것은 그 때나 지금이나 동의할 수없는 것. 불법과 부정은 선과 정의로 이길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어제 비록 정부와 방송사 사장들을 욕하는 욕은 좀 거슬렸지만, 그래도 폭력이 아니라 축제로, 강요가 아니라 호소로 진행되는 그 모습은 바로 내가 원하던 그런 시위와 저항의 모습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쓰러져 정신없이 자고 일어나 또 다시 내 바쁜 일정을 시작했다. 그렇게 또 일상에 매몰되어 살아 가겠지... 하지만, 내 일신의 안락이 아닌, 내 조국과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열정과 마음은 결코 잊지 않을 것이고, 또한 그 운동에 참여는 점차 강화시켜 나갈 것이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힘으로...

seasons

예연이는 시인이다. 가끔씩 쓰는 시가 참 대견할 정도이다. 아래는 그 시들 중 하나...

제목: Seasons

spring summer
fall winter.
4 seasons of the year
spring, summer fall is here,
lets get ready.
winter's near.
flowers, ice cream colored leaves,
way too cold to feel the breeze.
picking, swimming, viewing, freezing,
four seasons of the year.

"Why don't you..."

방학...
한국에 와서 처음 맞는 겨울방학... 역시 미국에 비해 훨씬 길다.

방학이 되면 일감이 없어서 실업자 신세가 되는 특성 때문에, 무직 상태로 집에 머물렀다. 그로 인해 방학 내내 우리 가족은 거의 함께 집에서 생활했다. 아이들은 40일을 집에서 빈둥빈둥 거리면 지겨워서라도 어딘가에 좀 나가자고 조를만도 한데... 전혀... 아무 데도 가잔 말 없이 둘이서 잘 논다... 물론 "논다"는 마냥 즐겁게 보낸다는 뜻 만은 아니다. 때로는 깔깔거리며 웃고, 때로는 작은 창작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하고, 때로는 각자 공부하거나 책을 읽는다... 그리고 물론 때로는 아웅다웅 싸우다가 울기도하고 서로 으르렁거리기도 한다.
그 "노는" 행위 중의 하나가 이 비좁은 아파트에서 서로 쫓고 쫓기는 "놀이"이다. 때로는 하연이가 쫓기고, 때로는 예연이가 쫓기지만, 주로는 예연이가 쫓기고 하연이가 쫓아가서 응징한다. 그걸보면 예연이가 장난을 걸고, 장난을 걸다 좀 지나쳐서 하연이를 자극하는 경우가 많은가보다. 이 쫓고 쫓기는 행위는 자주 있는 일상이라서 처음에는 주의를 주다가 나중에는 포기하고 그냥 관망만 하게 된다.

어느날 하연이와 예연이가 방안에서 숙덕거리며 뭔가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 좀 옥신각신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예연이가 튀어나와 안방으로 후다닥 도망갔다. 드디어 또 쫓기 "놀이"가 시작되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이상하게 하연이가 예연이를 쫓아가지 않았다. 도망가던 예연이는 언니가 쫓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 못했으리라... 잠시후 안방에서 예연이의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대단히 화가난듯이 자기가 도망 나왔던 방을 향해 씩씩거리며 걸어갔다. 그러면서 큰 소리로 화내면서 하는 말:

"YOU!!!!! Why don't you chase 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