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unbelievable.."

주일인 어제... 한국에 있는 친척으로부터 뭔가를 사달라는 부탁을 받고 온 가족이 쇼핑을 하기 위해 산 마르코스로 향하고 있었다. 주일이었기 때문에 유년부 예배 말씀이 무엇인지 궁금해서 아이들에게 물었다.

"오늘 예배시간에 무슨 말씀 들었어?"

잠잠한 아이들... 별로 관심 없다는 듯한 분위기.. 재차 묻자 예연이가 대답했다.

예연: "Adam and Eve hid from God."

아빠: "아담과 하와가 왜 숨었지?"

예연: "죄를 지어서..."

아빠: "그렇지. 죄를 지으면 하나님을 볼 수 없는거야. 하나님이 무서워서 숨게 되지. 하연이 예연이도 엄마 아빠한테 잘 못한 것 있으면 숨지?"

햐연: "아니요. 도망가요..."

아빠: "도망가서 숨지... 하나님은 죄를 얼마나 싫어하시는지 몰라."

그러면서 죄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엄마는 하나님께서 죄를 미워하시는 것이지 사람을 미워하시지는 않는다는 것에 대해서 설명했다. 예연이는 그것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내가 한 마디 했다.

아빠: "하나님은 죄를 정말 싫어하셔. 죄에 대해서는 반드시 벌을 내리시지. 우리는 모두 죄인인데,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아?"

예연: "어떻게 해요?"

하연; "Get spanked, and get it over."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서 설명하려고 했는데 이야기가 좀 다른 곳으로 흘렀다.

엄마: "하나님이 죄에 대해서 매를 때리시면 얼마나 무서운줄 알아?"

하연: (믿을 수 없다는 듯이) "It's unbelievable that God is scarier than you(엄마)!!"

.

사탄의 공격

어제인 토요일... 지금까지 청년부 부장으로 섬기면서 전혀 경험해보지 못했던 일들이 일어났다.

말씀 준비를 철저하게, 미친듯이 방해하는 사탄...
내 육신을 거의 쓰러질 지경까지 갑자기 약하게 만드는 마귀의 공격...
말씀을 전하러 나갈 때까지 끈질기게 공격하고, 말씀 전하는 것을 포기하게 만들고자 그렇게 날뛰는 마귀...

평소보다 말씀을 위해 기도를 더 많이 하고, 더 많은 시간과 정성을 들인 말씀준비였는데, 이상하리만큼, 영적인 공격이 심한 때였다. 말씀을 전한 후, 거의 탈진하고, 어지러운 상태에서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영적으로 시달렸다.

마귀가 날뛰는 것을 보면서 직감했다. 마귀가 오늘 말씀이 전해지는 것을 그 어느 때보다도 싫어 한다는 것을... 그것을 막기 위해서 별짓을 다하고, 심지어 물리적인 공격까지 감행해 오고 있다는 사실을...

그래서 기도했다. 무리하게 준비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그 가운데서 주시는 말씀을 더하지도 말고 덜하지도 말고 있는 그대로, 준비가 안 된 그대로 가감없이 전하도록... 준비가 안 되었다는 생각에 내가 뭔가 그럴 듯한 것을 만들어 낼 때, 혹은 말씀의 준비가 잘 안 되었다는 생각에 자신이 없어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뺄 때, 그것은 마귀에게 지는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깨달으며, 주님이 주신것을 주신 만큼, 준비가 잘 안 된 대로 전하게 해달라고 간구했다.

말씀을 전하면서, 사실 나는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전했다. 내 온 관심은 마귀와 대적하는 것이었으며, 주님께서 그냥 말씀하시도록 하는 것이었다.
다행히 하나님께서는 전하기를 원하신 말씀을 당신께서 직접 충분히 전하신 것 같았다.

말씀이 끝나자 마자 나는 쓰러질 것 같은 기분에 바로 집으로 향했고, 쓰러져 잠이 들었다.

하나님의 역사가 있었으리라 믿는다. 말씀을 전하며 하나님께서 너무 심하게 말씀하시는 것 아닌가 염려스러운 부분도 있었고, 믿음 안에 갖 들어온 지체들과 믿음이 없는 지체들에게 이 말씀이 제대로 전달될 것인지 걱정도 되었지만,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그냥 맡겼다. 나는 무지하지만, 하나님은 전지하시기 때문에 모든 지체들에게 꼭 필요한 말씀이 전해졌을 것이다. 감사하다.

한 가지 더...
말씀을 전하는 도중에 하나님으로부터 금식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토요예배에 말씀 전하기 전에는 금식으로 말씀을 준비하는데, 그것부터 시작해서 무기한, 하나님께서 그만 하라고 하실 때까지 금식하며 기도하라고 하셨다. 그 끝이 언제일지 모르지만, 금식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온전하신 역사가 있기를 기도한다.

성탄절... 주님의 날.

어릴적... 집안의 경제 사정으로 인해서 명절은 항상 악몽과 같은 때였다. 집안에 돈이 없는 것은 그나마 작은 문제었다. 사업을 하시던 아버지께서 임금을 지불하지 못해서 늘 초긴장하고, 많은 경우 사람들이 집까지 찾아와서 돈을 달라고 떼쓰고 행패부리는 험악한 경우를 많이 봤기 때문에, 그런 일이 없이 조용히 명절을 넘기는 것이 최고의 소원이었다. 크리스마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탄절은 어린 가슴을 기대감으로 설레게 하는 뭔가가 있는 날이었다.

초등학교 때, 성탄절에 선물이라는 것을 주고 받는다는 것을 TV를 통해 배웠다. 여자라고는 어머니 밖에 없고, 5부자가 사는 집안. 모든 것이 군대식이고, 상명하복의 절대복종, 절대충성의 원리가 지배하는 우리 집에는 선물이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생소한 것이었다. 어머니 생신 때 주로 하는 생일축하 인사는 "어머니... 오늘이 생신이셨어요?"였다. 성탄절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선물은 고사하고 카드조차 주고 받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선물을 주고 받는 것이 성탄절의 중요행사라는 것을 알고 난 후, 처음으로 내 돈을 들여서 작은형과 동생을 위해 선물을 하나씩 준비했다. 큰형은 왜 빠졌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쨋든 평생 처음으로 남을 위해 뭔가를 산 것이었다. 그 기분은 참 좋았다. 설레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고... '크리스마스란 이런 거였구나...'라고 혼자 생각하며, 기쁨으로 집에 와서 동생과 작은형에게 선물을 건넸다. 포장도 없었고, 카드도 없었다. 그 때는 그런 것을 꿈도 꾸지 못했다. 그냥 가게에서 산 물건을 툭 던져 주었을 뿐이었다. 건넨 나도 어색하고, 받는 그들도 얼마나 어색해 하던지... 이런 것을 왜 주냐는 듯한 표정... 그러면서도 고마와 하는 그 표정... 사실 그 이후로 선물을 다시 산 기억은 없다. 하지만 어린 나에게 성탄절은 선물을 주고 받는 절기였다.

조금 자라 중학교 때와 고등학교 때에는, 성탄절 즈음 최고의 관심사는 24일에 눈이 오느냐 오지 않느냐였다. 소위 White Christmas가 되면 뭔가 제대로 된 것 같고, 그렇지 않으면 실망하는 그런 절기였다. 눈이 오는 성탄절 이브에는 샹송인 "Tombe la Neige"를 부르며 감상에 빠져 거리를 혼자 걷곤 했다. 추위와 눈을 좋아했던 나로서는 눈 없는 성탄절은 뭔가 빠져서 실패한 작품과 같은 그런 것일 뿐이었다.

조금 자라고 대학생이 된 후, 성탄절은 여자친구와 함께 카페나 영화관이나 좋은 곳을 돌아 다니며 데이트를 하는 절기로 바뀌었다. 문제는... 나에게 여자친구가 없었다는 것. 지금의 아내를 만나기 전에 어느 누구와도 교제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성탄절은 언제나 나를 쓸쓸하게(혹은, 씁쓸하게)하는 시간이었다. 거리에 쌍쌍이 돌아다니는 연인들을 보면서 얼마나 부러웠던지...

그러다가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다. 그제서야 비로소 성탄절이 눈도, 선물도, 데이트도 아닌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는 그분의 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말 그대로 Christmas라는 것... 그것을 그 때야 깨닫게 되었다. 그 이후로 성탄절의 중심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가 되었다. 눈이 오지 않아도, 선물이 없어도, 데이트할 연인이 없어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그저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는 그런 절기가 되었다.

성탄절 새벽인 지금... 다시 한번 온 땅에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으로 오신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분께 경배와 찬양과 감사를 올려 드린다.

보물15

"보면 알아!"

(2006.02.21에 쓴 글)

지난 주 토요일...
매주 토요일이면 저녁에 목장모임이 있다. 목장모임은 가정마다 돌아가면서 하기도 하고 때로는 교회에서 모이기도 한다. 아이들은 이 날이 목장모임하는 날인 것을 안다.

애들이랑 놀고 있었는데 예연이가 갑자기 생각난다는 듯이 물었다.
"아빠! 오늘 목장모임 어디서해요?"
"응~~~ 박일 아저씨 집에서 할꺼야..."
"박일 아저씨? 박일 아저씨가 누구예요?"
"예연이 몰라?"
"나현이 언니 아빠?"
"아~~니~~"
"그럼 태훈이 아빠?"
"아~~니~~"
"그럼 누구예요~~~"

뭐라고 답할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하연이가 끼어들었다.
"아빠! 나는 알것같아요. 예연아! 이따가 보면 알아."
그러면서 설명을 덧붙였다.
"전번에 나도 새소식반에 간식이 뭔지 몰랐거든? 근데 나중에 보니까 피자였어.. 그러니 보면 알아..."
"응~~"

하연이가 언니답게 '보면 안다'는 것을 나름대로의 경험으로 설명한 것이었다. 그 예가 상황에 적절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어쨋든 예연이는 나름 대로 언니의 설명이 충분해 보였다. 이제는 알았다는 듯이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차원에서 사실관계와 인과관계의 한계 속에서 적절한 설명을 찾지 못하고 헤메는 나보다는 비록 그런 면에서는 부족하지만 나름대로의 설명력이 있는 하연이의 대답이 더 유용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UT의 종소리...

어제... Grading이 모두 끝난 기말고사 시험지를 과 사무실에 두고 오는 길이었다.
UT Tower에서 종소리가 울려 나고 있었다. 평소에는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만 났었는데, 음악 소리가 나고 있었다. 조용히 귀를 기울여 들어보니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찬송가가 연주되고 있었다.
맑고 밝은 날... 방학 중이라 텅빈 캠퍼스에 인적이 드문 가운데 울려 퍼지는 찬송가는 내 가슴을 울렸다. 온 캠퍼스에, 그리고 온 세상에 주님이 오심을 선포하는 천상의 음악처럼 들렸다. 찬송가를 따라 부르며 감격하며 길을 걸었다.

지나 다니는 사람들... 일부는 신기한 듯이 Tower를 바라다보고, 일부는 대화하느라 전혀 관심도 없었고, 일부는 이어폰 끼고 바쁘게 걸어가느라 음악 소리가 들리지도 않는 듯 했다.

그렇다... 창세 이후 온 우주는 하나님을 선포해 왔고, 천상에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 소리가 들려왔고, 주님의 십자가 이후에는 복음이 음악이 되어 온 세상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그것을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너무나 적었다. 복음은 늘 있어 왔지만, 천상의 찬양은 늘 있어 왔지만, 그것을 듣고 감동하며 은혜 받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어제 UT Tower에서 울려나오는 종소리를 들으며, 주님의 탄생을 참으로 기뻐하는 하나님 아버지와 온 피조세계를 볼 수 있었다.

속죄의 은혜...

지난 여름에 있었던 청년부 여름수련회가 나에게 남겨준 것은 새벽기도였다.
수련회가 끝난 직후 어느날, 하나님께서는 청년부의 일부 지체들에 대한 갑작스러운 염려를 주셔서, 기도하라고 명령하셨다. 그것이 새벽 네 시. 평소에는 결코 상상할 수 없었던 이른 시간이었다. 그 후 하나님께서는 새벽 네 시를 내 기상시간으로 삼으셨다. 비록 늦잠을 잔 경우가 없진 않았지만, 그 후 오늘까지 새벽 네 시는 내가 주로 일어 나는 시간이 되었고, 일어나서 말씀을 보고 기도하는 시간이 되었다.
새벽에 일어나는 것의 장점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을 충분히 확보하는 것이다. 고요한 새벽,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은 참으로 영적인 것이고, 즐거운 것이다.

말씀과 기도가 중심이 되었던 새벽의 삶에서 언제부터인가 그 중심이 조금씩 이동이 되었다. 그것은 찬송가를 부르는 것. 어느 때부터인가 아침에 찬송을 부르고 싶다는 욕구가 생겼고, 매일의 QT 본문이 나오는 성서유니온 홈페이지에서 제공하는 그날 본문에 해당하는 찬송가를 들으며 매일 찬양하게 되었다.
새벽이라 크게는 부르지 못하지만, 낮은 소리로 조용하게 따라 부르는 가운데, 기도와 말씀으로는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은혜와 충만함을 경험했다. 내 삶에서 가장 약한 부분이 찬양인데, 그 부분이 채워지는 것을 경험한 것이다.
어느새 새벽 시간에 찬송 부르는 것이 중심에 위치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찬송가의 가사들을 통해서 나를 만져 주셨고, 때로는 책망하시기도 했다. 찬송가는 늘 은혜로운 것이었다.

오늘 새벽에는 또다른 체험을 하게 되었다. 찬송가 한 곡을 부르고 난 후 더 찬양하고 싶은 생각에 찬송가 여기저기를 뒤지며 찬송을 하기 시작했다. 혼자만의 부흥회였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고백과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면서, 내 안에 하나님의 것으로 가득 채워지는 것을 경험했다.
그런데 찬송을 부르면서 발견 한 한 가지가 있었다. 그것은... 모든 찬송이 참으로 은혜로운 찬양이지만, 회개와 사죄를 주제로하는 찬송가를 부를 때, 내 가슴에 뜨거운 것이 올라 오면서, 감격, 또 감격하게 되는 것이었다. 나같이 보잘 것 없는 흉악한 죄인을 십자가에서 사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너무나 마음 속 깊이 울리는 것을 경험했다. 어느새 나는 회개와 사죄를 주제로한 찬송 메들리를 부르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신앙 생활에 참으로 많은 감사할 것이 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감사제목이요, 소망이 된다. 하지만, 나같은 죄인을 살리신 주님... 그 주님께서 나를 구원해 주신 그 순간보다 더 감격스러운 순간은 없는 것 같다. 그 은혜는 아무리 아무리 다시 생각해도, 감사의 눈물로 하나님 앞에 무릎꿇을 수 밖에 없는 하나님 아버지의 강권적인 은혜이다.
내가 죽는 날까지, 나를 죄에서 구원하신 주님을 찬양하며, 감사하며 감격하며 살다가, 구원자되신 나의 주님... 내가 그토록 사랑하는 그 주님의 품에 안기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마지막 대표기도를 준비하며...

지난 4년 동안 교회에서 집사로 섬겼다. 집사로서 하는 일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 매우 중요한 일은 주일예배 때 대표기도를 하는 것이다.
4년 동안 한 두달에 한 번씩 대표기도를 준비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약 4-5분간의 기도문을 준비하기 위해 평균 3시간 정도의 준비시간을 갖는다. 기도문을 준비하면서, 진정으로 교회를 대표해서 하나님께 올려드릴 기도가 되고 있는지를 점검하고, 성도들을 향한 나의 훈시나 설교가 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인다.
기도하는 사람은 그때 그때의 교회의 필요 뿐만 아니라 영적 상황까지도 민감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 그 모두가 기도의 제목이 되기 때문이다.

내년에는 집사를 휴무하기로 했다. 물론 청년부를 섬기는 부장으로서는 그대로 섬기지만, 교회의 공식적인 직분인 집사직은 내려 놓는다.
내년에 졸업할 계획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무래도 집사로 섬기는 것은 올해가 마지막이고, 따라서 올해의 마지막 대표기도인 오늘의 기도가 이 교회에서의 마지막 기도가 될 것이다.

기도를 준비하면서 만감이 교차했다. 내가 교회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교회를 위해 기도하는 부분에서 깨달았다. 그런데 내 스스로 놀랐던 것은, 담임목사님을 위해 기도문을 작성할 때였다. 오히려 교회를 기도할 때보다 더 간절한 마음과 눈물이 나왔다. 교회를 위해 기도할 때보다 더 많은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다. 예상치 못했던 것이었다.

우리 교회 담임 목사님은 진정으로 존경받아 마땅한 분이다. 복음을 향한 그분의 열정, 그리고 말씀을 그 모든 삶에 순수하게 적용시키시는 그 삶, 그리고 그분의 겸손 때문이다. 나는 목사님을 진심으로 존경한다.
하지만 우리 목사님은 인간적으로 가까와 질 수 있는 분은 아니다. 그분의 성격이 원래 그리 다정다감하지 않기 때문이다. 집사로 있는 나이고, 목사님을 가장 근접한 거리에서 오랫 동안 섬겨온 나였지만, 목사님과 가까와지지는 못했다.

마지막 기도문을 준비하면서, 나는 교회를 생각할 때 많은 눈물이 나오고 내 마음이 교회에 쏟아질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주님의 몸인 이 교회를 내가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내 마음을 간절하게 하고, 내가 진정으로 사랑한다고 느낀 것은 물론 교회도 사랑하지만, 오히려 목사님이었다.
그분을 위해 기도문을 준비하는 동안, 그분을 향한 간절함, 그분의 수고와 어려움, 고통과 외로움이 내 마음에 고스란히 전달되었고, 그것들을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는 기도문을 쓰면서, 내가 목사님을 존경할 뿐만 아니라 진심으로 사랑해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주님을 위해 온전히 헌신된 자에 대한 주님 안에서의 사랑이었다.

내 안에 있던 그 사랑을 깨닫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이 교회에서 있을 날이 얼마나 남았는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남아 있는 모든 날 동안, 나의 영적 리더로서 그분을 존경하고 순종할 뿐 아니라 진정으로 더욱 사랑하는 가운데, 복음 안에서 영적 새생명을 낳는 일에 동역하기를 기도한다.

오늘 기도할 때 눈물이 나지 않기를 바라는데... 오늘 아침에 이미 많이 울었기 때문에 담담하게 기도할 수 있으면 좋을텐데... 걱정이다...

요셉과 마리아가 아기 예수님을 예루살렘에 데리고 간 이유..

A Sunday School teacher asked her class why Joseph and Mary took Jesus with them to Jerusalem.


A small child replied: "They couldn't get a baby-sitter."

"주님의 마음을 본받는 자"



감동... 감동... 감동...

청년부 주제송으로 삼아야겠다.^^

사탄은 마침내 복음을 선택했다.

90년대 초에 신상언씨가 "사탄은 마침내 문화를 선택했다"라는 책을 발간하여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었다. 당시 대학생으로 문화 연구에 관심이 있던 나에게는 흥미로운 책이었다.

2009년 12월 오늘... 그 책을 다시 생각해 볼 때, 이제는 더 이상 그 논지에 동의하지 않는다. 특히 "마침내"라는 단어에 절대 동의하지 않는다. 창세기 5장에는 분명하게 하나님을 떠나 죄악 가운데 있던 인간, 마귀의 종이 되어 버린 가인의 자손들이 이룬 업적에 대해서 소상히 밝히고 있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그들은 문화와 문명을 건설한 것이다. 사탄이 "마침내" 문화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타락 직후부터 문화는 사탄의 귀중한 전략적 도구였다.

"마침내"라는 단어가 좀 더 잘 들어 맞도록 사용하려면 "사탄은 마침내 복음을 선택했다!"라고 해야 한다. 그것은 사탄이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탄이 복음을 흐리게 하는 전략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사실 이는 예수 그리스도 이후 교회가 생기면서부터 늘 있어왔던 것이다. 수많은 이단들의 역사는 복음을 흐리게 하고 왜곡시키려는 마귀의 노력의 역사이다. 교회는 그 도전에 대한 응전으로 복음을 더욱 분명하고 날카롭게 해 왔다. 마귀의 도전이 오히려 교회 내에 교리를 더욱 분명히 하는 데 (결과적으로) 귀하게 쓰임을 받았다. 많은 경우, 교회는 그 복음을 지키기 위해서 엄청난 희생을 감수해 왔다.

그렇게 전해 받은 복음...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교회가 복음의 담지자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현대 교회에서도 그 어느 때 못지 않게 "복음"이라는 단어가 많이 들린다. 설교의 강단에서도, 성경공부에서도, 기도에서도, 심지어 교회 이름과 사람 이름에서도 "복음"이라는 단어는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아니.. 홍수를 이룬다.
하지만 정작 복음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선포하는 경우는 생각보다 극히 드물다. 한국에서 교회를 소위 "열심히" "오랫동안" 다녔다는 사람들이 교회에 많이 오는데, 그들의 거의 대부분의 경우가 "복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하거나 부분적으로만 답을 한다. 복음이라는 단어는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지만, 복음의 내용에 대해서 단 한 번도 분명하고 적확하게 들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생명의 근원이자 주인되시고, 창조주 되신 하나님을 떠나 죄악 가운데, 죄덩어리가 되어, 행하는 모든 것이 죄 밖에 없는 인간.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되어 영적으로 죽어 있는 인간, 마귀의 종으로서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버린 인간. 죄에 쩔어 있어서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죄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으며, 그 끝은 영원한 파멸의 심판 뿐이라는 것.
그런 인간을 위해, 하나님께서 직접 이 땅가운데 육신을 입고 오셔서, 내가 달려 죽어야 할 심판의 자리,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야 할 그 저주의 자리인 십자가에 나를 대신하여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그리고 그분의 부활.
자신의 죄인됨을 통절히 회개하고, 십자가 앞에 온전이 무릎꿇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하나님이요 구원자로 받아 들이게 될 때,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가고, 내 안에 성령께서 임하셔서, 그리스도를 닮은 거룩한 자로서의 삶으로 이끄신다는 것. 천국의 삶을 약속하실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부터 그분의 통치를 받으며 천국을 맛보며 살 수 있는 존재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누린다는 것.

너무나도 분명하고 간단한 이 진리를 분명히 아는 사람(온 존재로 체험하여 그 삶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린 사람을 둘째치고...)은 놀랍게도 생각보다 훨씬 드물다. 도대체 교회에서 복음을 가르치지 않으면 뭘 가르치는지 모르겠지만, 십자가의복음이 핵심이 되는 진리의 기독교가 일개의 종교로 전락하고 도덕적 가르침을 주는 곳으로 전락하는 가운데, 복음이 흐려지고, 복음에 대해서 무지한 소위 "교인들"을 양산해 내는 그런 교회로 타락시켜버린 것이 바로 사탄이 선택한 전략이다.
종교개혁 직전의 교회의 모습과 너무나 흡사한 모습이 되어 버린 것이다. 중세시대에는 평신도들에게 성경이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변명이라도 할 수 있지만, 지금은 성경이 넘쳐나는 시대이고, 누구나 그 진리를 쉽게 알 수 있는 시대인데도 불구하고, 성경에 무식한 것은 당연한 것이고, 구원의 기본 도리인 복음이 뭔지조차 설명하지 못하는 무식한 "교회출석자"를 양산해 내는, 마귀의 계략에 완전히 놀아나는, 현대 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징벌을 받아야 마땅한 것이다.

부흥... 그것은 회개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진정한 회개는, 진정한 복음의 역사가 있을 때에, 그 복음을 통해서 퍼부어지는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가능해 진다. 성령께서는 복음이 진정으로 복음이 되게 하시고, 생명이 되게 하시고, 그 앞에 완전히 무릎꿇게 하신다. 십자가가 아니면 저주받을 인생이라는 것을 가슴 깊이 깨닫고, 모든 것을 버리고 십자가만을 취하고자 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역사를 주심으로써 교회가 교회답도록 하신다.

복음을 그 삶으로 체험한 자들. 십자가의 복음이 그 삶에 중심에 분명히 선 자들. 세상의 모든 우상을 내려 놓고, 십자가 앞에 무릎꿇은 자들. 성경말씀이 생명이자 삶의 유일한 근거요 힘이 되는 자들에게는 사탄의 도구가 되는 문화는 아무것도 아니다. 문화 따위가 그들을 어떻게 할 수 없다.

이 시대에 사탄은 마침내 복음을 선택했다! 그것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내가 복음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보물14

(2006.02.14에 쓴 글)

지난 토요일 오후... 목장 식구들 중 한 가정이 우리 가정을 식사 대접해 주었다. 우리 집에서 잘 해 주는 것도 없이 은혜로 받는 대접이라 조금은 미안하기도 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한 식구된 자들로서 함께 식사하면서 섬김을 받는 것은 참으로 기분 좋은 경험이었다.

복부팽만감으로 행복감과 만족감, 그리고 약간의 거북스러움을 느끼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 조용히 있던 예연이가 갑자기 물었다.

"아빠! 남자는 왜 오줌을 서서싸요?"

"........"

갑작스러운 질문에 일단 할 말을 잃고 머리를 이리저리 굴리며 답을 찾고 있을 때, 아내가 물었다.

"ㅎㅎ.. 왜? 누가 서서싸는 것 봤어?"
"전번에 하민이(하연이와 Play group하는 동갑내기 남자애)가 서서 오줌싸는 것 봤잖아요... 문열어 놓고 오줌 쌌어요."
"그래~~~?"

그 때 하연이가 나섰다.
"나는 왜 그런지 알아요~~~. 남자는 오줌이 앞으로 나오니까 서서싸는 거잖아요~~ ㅋㅋ"

아내가 물었다.
"하연이도 봤어?"
"학교에서 남자애가 서서 오줌싸는 것 봤어요. ㅋㅋㅋ"
"그렇구나~~~..."

우리 아이들... 이제 철없던 아기의 수준을 벗어나서 점차 이성에 대해서 자각하는 것이 보인다. 이제부터 그들의 마음 속에 "남자"에 대한 이미지가 그려지겠지...
남자란 아빠 밖에 없는 우리 가정. 당분간 아이들이 이성에 대한 궁금증은 주로 나를 통해서 해결하겠지? 그러면서 남성에 대한 그들의 시각이 형성될 것이다.
아이들을 도와주고 싶다. 남자라는 존재가 "왕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거지"도 아닌... 한 "인간"이라는 것. 그들이 섬겨야 할 "폭군"도 아니고, 그들이 부려야 할 "종"도 아니라는 것. 여자와 다른 부분도 분명히 많이 있지만 같이 공유하는 부분도 있고, 강한 것 같지만 때로는 연약하기도 하여 감싸주고 보살펴 주는 것이 필요한 존재라는 것. 같은 인간으로서 서로 섬기고 섬김을 받으며 서로 세워주고, 함께 동역해 가는 동역자라는 것.
아직은 낯설기만한 "남자"라는 존재를 아빠를 통해 조금씩 알아갈 그들에게 정말 도움이 되는 그런 내가 되어야할 책임을 느낀다.

주 안에서의 수고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전 15:58)

주 안에서 하는 모든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는다.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다.

비록, 나의 수로고 인해 아무 것도 건진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이고,
나의 수고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더욱 악해져만 가는 것처럼 보이고,
최선을 다했지만 주님 앞에 너무나 보잘 것 없어 보이는 나의 수고로 인해 하나님 앞에 절망하더라도...

그것이 진심을 담아 드린 나의 최선이었다면,
나와 동행하시는 성령님께 드리는 기도 가운데 드린 나의 제사였다면,
그분의 능력을 의지해서 드리는 나의 신앙 고백이었다면...

그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쓰실 것이며, 그것으로 인해... 언젠가... 생명의 열매가 맺힐 것이다.

아멘...

은혜...

"그러므로 이제 내 종 다윗에게 이처럼 말하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데서 취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고 네가 어디를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세상에서 존귀한 자의 이름 같이 네 이름을 존귀케 만들어 주리라."(삼하 7:8-9)

하나님께서는 유다 지파의 한 작은 고을 중 한 집안의 막내 아들로 태어나서 허드렛일을 하며 심부름꾼으로, 또 당시 가장 천대 받는 목자로 집에서 종처럼 일하고 있던 다윗을 지명하시고, 그에게 기름부으셔서 왕으로 불려 주셨다. 다윗의 이름은 천하에 존귀한 이름이 되었고, 그처럼 복받은 자가 이 세상에 없었으며, 오실 메시야가 "다윗의 자손"으로 불리우는 엄청난 영광을 누렸고, 실제로 그의 혈통을 좇아서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다.

그가 하나님 앞에서 극악한 죄를 범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버리신 것처럼 그를 버리시지는 않으셨다.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내가 네 앞에서 폐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같이 그에게서는 빼앗지 아니하리라."(삼하 7:14-15)

어찌보면 인간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하나님의 지극히 심한 편애이다. 사울은 비록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기는 했어도, (적어도 인간적 관점으로 봤을 때는) 다윗처럼 파렴치한 죄를 범하지는 않았다. 블레셋과 대치할 때, 군대의 사기가 점점 떨어져 가고 있고 소집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래처럼 많은 블레셋 군사들과 그들의 뛰어난 병기를 보면서 두려워 하는 가운데 하나 둘씩 도망가고 있는 상황에서, 그나마 그들을 종교적으로 결집시켜줄 수 있는 사무엘은 온다는 시각에 오지 않고 지체하고 있는 상황에서, 다급한 마음에 왕인 자신이 직접 제사를 드림으로써 군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기를 원했던 것 뿐이다.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명령을 받고 출전하여 말 그대로 아말렉을 완전히 진멸하고, 가축까지 도살했지만, 그 힘든 전쟁을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그럴듯한 전리품 하나 챙겨가지 못한다면 군대의 사기와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뭔가 보일 것이 없다는 생각에, 하나님께 가장 좋은 것을 드리고, 그 왕을 사로잡음으로써 함께 출전한 군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그들로 하여금 자부심을 가지게 하고자 아말렉의 왕을 사로 잡고, 제사 드리기에 너무 적합한 가축들을 몇 마리 끌고 왔을 뿐이었다.

반면, 다윗은 자기의 가장 충성된 신하 중의 한 사람의 아내를, 그것도 자신의 장수들이 모두 전장에 나가고 자기 혼자 왕궁에 남아 있는 상황에서, 그 여자를 범했고, 그것을 덮으려고 온갖 꽁수를 썼었고, 그것이 실패하자 무자비하게 그 충성스런 장군을 모살했으며,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그 여자를 끝내 자신의 아내로 (이미 몇 명의 아내들이 있었음에도) 취하고 마는 뻔뻔한 자였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신 이스라엘의 강성함을 자신의 자랑으로 삼으며, 인구조사를 하며 세금을 부과하려는 죄악 가운데서 수 많은 자신의 백성들이 죽임을 당하는 벌을 받게 했던 형편없는 리더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을 왕위에서 폐하셨던 하나님께서 다윗을 폐위하지 않으신 것은, 전적으로 그분의 사랑이고 그분의 은혜이다. 물론 다윗의 중심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열정과 마음이 있었고, 사울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홀히 여기고 하나님 섬기는 마음이 없었던 것을 그 원인으로 들 수 있겠지만, 그 이전에 하나님께서 다윗을 그 종으로 택하시고, 그의 종으로 삼으신 하나님 편에서의 일방적인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왕이 되었던 것이다.

"나의 힘이시여! 내가 주께 찬송하오리니 하나님은 나의 산성이시며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시 59:17)

그리스도인으로 부름받는 나... 나 또한 다윗보다도 더 악한 자이고, 다윗보다도 더 비열한 자이고, 다윗보다도 더 뻔뻔스러운 자이지만,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 아래, 십자가의 은혜를 알게 되었고, 죄용서를 받았고, 거룩한 삶을 갈망할 수 있는 자로 세우심을 받았다. 내 삶에서 행해진 수 많은 악들을 생각할 때, 나 또한 사울처럼 버림받아 마땅한 자임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인자야 포도나무가 모든 나무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랴? 삼림 중 여러 나무 가운데 있는 그 포도나무 가지가 나은 것이 무엇이랴? 그 나무를 가지고 무엇을 제조할 수 있겠느냐? 그것으로 무슨 그릇을 걸 못을 만들 수 있겠느냐? 불에 던질 화목이 될 뿐이라 불이 그 두 끝을 사르고 그 가운데도 태웠으면 제조에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그것이 온전할 때에도 아무 제조에 합당치 않았거든 하물며 불에 살라지고 탄 후에 어찌 제조에 합당하겠느냐?"(겔 15:2-5)

목재로서 아무짝에 쓸모 없는 포도나무와 같던 나를 당신의 자녀 삼아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 또 감사할 뿐이다...

[펌] 함께 있는 것.. 그 자체가 행복

(2006.02.02에 다른 곳에 쓴 글)

예전이 한국에서 큰 참사가 있었다. 일명 씨랜드 화재사건... 유치원생들이 단체로 놀러 갔다가 화재로 인해서 대부분 죽임을 당한... 정말 끔찍한 사건이었다. 그 사건이 있은 뒤 신문에는 연일 그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그 중에 내 마음에 남는 한 인터뷰... 그것은 한 부모와 인터뷰였는데, 그 중에서 마음에 남는 한 마디...

"내 아이가 죽어가고 있는데, 내가 그를 위해서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었다는게 가슴을 저미게 합니다."

사랑하는 아이가 죽어가고 있는 현장에서 얼마나 엄마 아빠를 찾았을까? 그 현장에 같이 있지 못하고 그 아이의 부르짖음이 응답하지 못했던 그 부모의 마음. 당시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그 마음이 참으로 공감이 간다.

지금도 있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유학오기 전에 "TV 동화 행복한 세상"이라는 프로가 있었다. 거기에 나온 에피소드 한 가지...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 내용은 대충 이렇다.

625 때 전쟁터에 나간 아들이 전사하여 화장된 유골로 전우의 손에 집을 다시 찾았다. 그 유골을 보고 하염없이 눈물 흘리는 어머니... 그 어머니에게 그 전우가 물었다.

"지금 과거로 돌아가 아드님과 함께할 한 순간이 있다면 언제로 돌아가시겠습니까?"

어머니의 대답... 그것은 아이와 행복했던 때도, 아이가 자랑스러운 일을 했을 때도, 아이가 효도했을 때도 아니었다. 그 어머니는 아들이 울고 있을 때... 그 때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우는 아이를 마음껏 안아주고 달래주고 위로해주고 싶다는 그 어머니의 바램...

자식을 키우면서 참으로 여러가지 감정을 복합적으로 경험한다. 그렇게도 사랑스럽던 자식들이 고집피우고 말안들을 때면 어찌 그리 미운지... 하지만 나는 늘 그럴 때마다 이 두 사건을 떠올린다. 그리고 울며불며 고집부리면서 말 안듣는 내 아이... 비록 그런 모습이지만 내가 그 애들과 함께 있다는 것, 그것이 나에게 행복이라는 사실을 떠올리면서, 내가 만약 전사한 아들의 어머니가 되어 내 아이들 곁에 있다면 해주고 싶은 것을 생각한다... 후회가 덜 될 그런 대응을 찾는다...

나의 행복...

그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이미 주신 것이다. 다만 나는 그것을 내 성질과 내 욕심에 가리고 사는가 아니면 주심에 감사하며 한 순간 한 순간 그 것을 맛보며 사는가의 차이이다.

나는...

행복하다.

[펌] Bible Riddles

Q. Which servant of God was the most flagrant lawbreaker in the Bible?
A. Moses broke all 10 commandments at once. (Exodus 32:19)

Q. Which area of Palestine was especially wealthy?
A. The area around the Jordan-the banks were always overflowing.

Q. How do we know that Job went to a chiropractor?
A. Because in Job 16:12, 14, 16 we read, "I had come to be at ease, but he proceeded to shake me up: and he grabbed me by the back of the neck and proceeded to smash me."

Q: Why didn't Noah go fishing?
A: He had only two worms! (Genesis 7)

Q: How do we know that they played cards in the ark?
A: Because Noah sat on the deck. (by inference, in Genesis 7)

Q: What is the first recorded case of constipation in the Bible?
A: It's in Kings, where it says that David sat on the Throne for 40 years.

Define Yourself!

어제 산책을 다녀오는 길에 경영대 근처에 붙어 있는 포스터가 눈에 들어 왔다. 평소에 길을 가면서 주변의 사람이나 사물에 거의 전혀 신경을 쓰지 않기 때문에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포스터에는 고민하는 신사의 모습과 두 단어가 적혀 있었다.

"Define Yourself!"

그 글을 읽자마자 1초의 여유도 없이 내 안에서는 답이 터져 나왔다.

"I'm Christian. I'm a child of God!"

남자, 남편, 아빠, 집사, 대학원생 등등... 나를 정의할 수 있는 수 많은 방법이 있었지만, 내 속으로부터 즉시로 튀어나온 답이 바로 그것이었다는 것이 참 감격스러웠다.
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define할 수 없어서 힘들어한다. identity crisis는 개인에게 닥칠 수 있는 위기 중에서 심각한 것 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어떤 일이 있더라도, 심지어 내 자신이 schizophrenia에 걸린다 하더라도 절대로 흔들릴 수 없는 사실은,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다.

내 안에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인을 쳐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구하라... 예수의 이름으로...

지난 주 아이들 학교에서 event가 있었다. 어스틴 경찰서에서 주관하는 것으로 우리 아이들이 다니는 초등학교 아이들 중에서 선발된 25명이 경찰들과 같이 쇼핑하고 피자 가게에서 피자를 먹는 Shop with a Cop이라는 프로그램을 위해서 아이들을 선발하는 event였다. 경찰들과 같이 Target에 가서 개인당 50불어치의 쇼핑을 하게 하고 경찰들이 그 비용을 대 주는 것이었기 때문에 아이들의 기대가 대단했다. 하연이와 예연이도 목요일 저녁에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금요일에 추첨이 있었다. 결과는 하연이는 뽑혔고 예연이는 뽑히지 못했다. 확률이 매우 낮았기 때문에 하연이가 뽑혔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었다. 참고로 예연이가 속한 2학년 중에는 한 명도 뽑히지 못했다고 한다.

이로 인해서 예연이가 매우 상심했다. 하나님께서 언니의 기도는 들어 주시고, 자신의 기도는 들어 주지 않으셨다는 것 때문에 많이 울었다. 그날 오후, 예연이가 나에게 조용히 찾아와서 상담을 요청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거절하셨다면서 원망과 눈물이 섞인채로 서럽게 울었다.
예연이에게 기도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었고, 기도하는 자세와 그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의 응답에 대해서 여러 비유를 들어가며 알아듣도록 설명하려 했지만, 예연이를 이해시키는 데는 실패했다. 끝내 울음과 원망을 그치지 않는 예연이를 보면서 측은한 마음이 들기도 하고, 어떻게 해야할 도리가 없어서 조용히 예연이에게 현금으로 10불을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 말을 듣고 예연이의 표정은 금새 밝아졌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비밀리 건넨 10불을 몰래 자신의 저금통에 고이 간직하고는 그 후로 표정이 많이 밝아졌다.

미봉책으로 10불이라는 눈에 보이는 현금으로 문제를 수습하긴 했지만, 아직도 예연이의 마음 속 깊이 자리잡은 거절감에 대한 문제, 보다 더 근본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오늘 새벽에 아이들을 위해 기도할 때, 예연이를 위해 특별히 기도를 많이했다. 하나님께서 그 상처를 어루만져 주시고,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쌓이도록...

예연이의 일이지만... 예연이를 보면서 나 또한 별로 다를 바가 없는 자임을 느낀다. 기도에 대해서 참으로 많은 것을 이론적으로 알고 있지만, 내가 간절히 기도한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그 기도대로 응답하지 않으실 때, 내 안에 생기는 하나님에 대한 쓴뿌리는 나로서도 어쩔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예연이를 보게 하심으로써 내 모습을 보여 주신다. 얼마나 유치하고 하나님을 모르는 소치인가? 예연이는 아직 어리기 때문에 그것이 당연하다지만, 나는 왜 그 모양인가?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 16:24)

성숙한 기도는 주님 안에 거하는 기도, 주님의 말씀이 내 안에 거함으로써 그 말씀에 따라 구하는 기도이다. 그것은 다른 표현으로 주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기도이다. 주님의 이름으로 구한다는 것은 첫번째로 우리가 직접 하나님께 나아갈 자격이 없지만, 그분의 십자가 공로를 의지하여 하나님께 나아가 구한다는 것이다.  두번째는 그분의 이름으로 구한다는 것은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것들을 구한다는 것이다. 그분의 이름으로 구하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것을 구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근본적이고 핵심적인 의미 외에 매우 중요한 것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내가 구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구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예수님 안에 두셨다. 그것은 우리가 무엇을 구하든지간에, 그것은 결국 예수님을 더 소유하고 더 누리기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약 4:2b-3)

기도는 나의 필요와 욕망을 채우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그것은 주님을 구하는 수단이며, 그분과 교제하고 그분을 더 누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다. 주님을 구하는 기도, 주님을 누리기를 갈망하는 것이 동기가 된 기도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응답하여 주신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귀의 속삭임...

내 인생을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위하여만 살겠다고 결단할 때, 마귀는 옆에서 박수를 친다.

"훌륭해요!! 암~~ 그래야지!"

그리고나서 내가 하나님께 기도하려고 할 때, 옆에서 속삭인다.

"지금 좀 피곤하잖아... 조금만 쉬었다가 해. 그리고 다른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 일도 좀 신경 써야 되지 않겠어?"

그 가운데 나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헌신에 대한 개념만 아는 빈 껍데기 신앙으로 타락해 간다.



없는 시간을 내서 성경을 읽고 있을 때, 마귀는 옆에서 나를 매우 존경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말한다.

"와~~. 그렇게 바쁜데도 이렇게 열심히 성경을 읽고 있어? 하나님은 좋겠다. 이렇게 충성스러운 종이 있어서... 대단한 희생을 이렇게 과감하게 드리다니..."

그리고 나를 우쭐하게 만든다. 기분이 업 되어 있는 나... 성경을 읽어 나가면서 말씀에 대한 지식이 더해질 때, 마귀는 옆에 와서 더 조용히 속삭인다.

"너처럼 성경 많이 읽는 사람... 거의 못봤다. 너는 성경에 대해서도 다른 사람보다 많이 알고, 기도도 더 많이하고... 너 만한 그리스도인은 없지... 너 같이 훌륭한 그리스도인을 누가 함부로 무시하겠어? 너 스스로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져... 그건 교만이 아니야, 단지 자부심일 뿐..."

그렇게 해서 나를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심히 교만한 자로 서서히 인도한다.



마귀와의 싸움...
그것을 결코 나의 엄청난 희생을 요구하는 거창한 문제들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마귀는 참으로 교묘하다. 내가 열심히 신앙생활 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 어느새 내 옆에 가까이 다가와서 아주 작은 목소리로, 아주 작은 일에 대해서 조금씩 부추긴다.
사실상 마귀와의 싸움 중 가장 중요하고 가장 치열한 싸움은 바로 정말 사소해 보이는 그런 일들에서 발생한다. 겉으로는 사소해 보이지만, 그것은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니라, 사실상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한 일이다. 묵상하기 위해 아침에 눈뜨는 것, 기도하기 위해 무릎 꿇는 것, 그리고 꿇은 무릎을 좀 더 오래 지속시키는 것, 사소해 보이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도 결코 가볍게 보지 않고 그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하는 것...

'이 정도 쯤은 괜찮겠지...'라고 생각이 들 때, 그 때가 가장 경계를 해야할 때이며, 영적으로 긴장해야 할 때이다. 왜냐하면 그곳에 바로 사탄의 가장 중요하고 효과적인 공격 포인트이기 때문이다.

믿음은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삶이다. 일상의 삶의 작은 부분에서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다면, 나는 마귀에게 속고 있는 것이며, 그런 삶은 아무리 거창한 원칙과 비전을 가지고 사는 삶이라 할지라도, 결코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 없는 삶인 것이다.

manipulation

지난 10월 23일자 한겨레신문의 기사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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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동작경찰서는 23일 자신의 교회에 다니는 여성 신도 여러 명에게 “나와 성관계를 맺는 것은 신의 뜻”이라고 회유·압박해 이들을 상습 성폭행한 혐의(준강간)로 목사 조아무개(46)씨를구속했다고 밝혔다.
10여년 전 한 선교단체를 만들어 동작구에 교회를 차린 조씨는 자신을 찾아오는 여성신도들에게 “나와 성관계를 하면 모든 죄가 씻겨진다. 이것은 하느님의 뜻으로 행하는 것이다”라는 말로 구슬려내어 성관계를 맺는 방식으로 10여년동안 20대 미혼 여신도 6명을 수십차례에 걸쳐 성폭행한 혐의를 받고 있다. 경찰 조사 결과 조씨는 성관계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하느님의 뜻인 줄 알고 그랬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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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상식적으로도 이해가 안되는 이런 일들...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단순히 무지에서, 혹은 뭔가에 씌워서 그런 것이었을까?

일반인들의 인식 속에 "학대"라는 단어에 연상되는 것은 언어적, 물리적 폭행이다. 말을 함부로 하거나, 때리거나 하는 것을 "학대"라고 생각한다. 물론 맞는 말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일반적으로 생각하지 못하는 또 하나가 있다. 그것은 "manipulation"이다.
Manipulation이라는 것은 인간 안에 잠재 되어 있는 죄의식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것이다. 어린 아이들을 성폭행한 뒤, 아이들에게 "너는 더러운 아이야." "네가 잘못해서 그래." 등등으로 자주 이야기하면서 아이들이 성폭행 당한 것을 자신의 죄, 자신의 더러움으로 인식하게 하여, 자기 스스로를 자책하게 만듦으로써 그 죄를 은폐시키려고 하는 행위, 남편이 아내에게 폭행을 가하면서 "너는 그렇게 얻어 맞아 마땅한 덜떨어진 인간이야!"라고 폭행을 정당화 하는 행위, 남자에게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기어이 얻어내고자 남자의 약한 감정을 이용하여 그 마음에 미안한 마음이 들게 함으로써 자기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 내는 행위 등이 manipulation에 해당한다. 말 그대로 상대방의 약점이나 죄의식을 이용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부당한 방식으로 얻어내는 것이다. 이 manipulation은 "학대"의 한 중요한 양상이라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위의 신문 기사는 영적 파워를 가진 목사가 자신의 욕구/필요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여성도들의 죄의식에 자신의 욕구를 교묘하게 연결시킨 결과이다. 그는 결국 manipulation을 사용하여 여성도들을 학대한 것이다.

하나님을 떠나 죄의 노예가 되어 버린 모든 인간은 누구든지 그 영혼의 깊은 곳에 죄의식이 숨어 있다. 아담이 범죄하고 난 이후 하나님의 낯을 보기 두려워서 숨었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 깊은 곳에 죄의식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 죄의식이 바르게 사용되었을 때, 그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는 데 큰 역할을 한다. 하지만 그것이 잘못 사용되었을 때는 인간을 파멸하는 데 사용될 수 있는 것이다. 위에 인용된 신문 기사의 예가 바로 그런 예이다.

영적인 리더로서 섬기면서, 내 스스로가 manipulation의 가능성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기사에 나오는 것처럼 그런 심각한 것은 아니지만, 나를 영적인 리더로 믿고 따르는 지체들에게 내가 끼칠 수 있는 영향력이 생각보다 크다는 것을 여러 경우를 통해 경험하면서, 신문 기사에 나오는 것과 같은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실제로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감으로 느끼게 된다.
영적인 리더의 역할은 인간 안에 있는 죄책감을 말씀과 연결시키는 것이다. 그들이 말씀으로 도전받고 죄책감을 느끼며, 그것으로 인해서 주님께 더 나아가고, 주님 앞에서 해결되며, 그로 인해서 더 정결하고 거룩한 자가 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영적 리더의 역할이다.
그런데, 그 어떤 경우이든간에 그 죄책감을 자신의 욕구나 바램, 생각과 연결시킨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 엄청난 죄를 짓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을 관철 시키기 위해서, 지체들이 내 생각대로 움직이게 하기 위해서, 그들 안에 있는 죄책감에 호소를 한다면, 그들이 나로 인해서 죄책감을 느끼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왕위를 찬탈하는 지극히 사악한 행위인 것이다.
만약 그것이 의도적으로 지속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성령을 훼방하는 죄,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도 구원을 얻을 수 없는 악독한 죄악인 것이다. 그런 죄를 짓는다는 것은 생각만해도 몸서리쳐지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영적 권위를 주신 자리에서 섬긴다는 것이 두려운 이유이다. 영적 리더들은 그들이 섬기는 지체들보다 훨씬 더 철저하게 타락할 여지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권위가 manipulation에 이용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 그것으로 다른 영혼들도 타락으로 이끌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참 두렵다.
내가 더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 영적 리더로서 섬길 때, 내가 진정으로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섬기고 있는지를 묻고 또 묻는 가운데, 하나님 앞에 결코 거리낌이 없는 섬김을 해야 한다. 만약 내 것이 조금이라도 섞인다면,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그에 대해서 나를 매우 책망하실 것이다. 기쁨으로 맞이해야 할 주님 오시는 날이 저주와 슬픔의 날이 될 것이다.
주여 나를 도우소서!

[펌] 미국 생활의 즐거움 하나...

(2006.01.31에 다른 곳에 썼던 내 글)

미국 생활, 특히 미국에서의 유학생활은 그리 넉넉치 못한 경제적 형편과 공부의 고달픔, 그리고 장래의 불안 때문에 그리 녹록치는 않은 경험이다. 하지만 그 가운데도 어려운 삶은 이겨내도록 돕는, 그리고 나중에 공부가 끝나고 나서도 그리울 그런 작은 기쁨들이 있다. 예를 들어 같은 학생 아파트에서 생활하면서 아이들이 있는 집은 또래 아이들끼리 이리 저리 몰려 다니며 마냥 즐겁게 놀면서 마음대로 이 집 저 집을 드나드는 것, 급히 도움이 필요할 때, 이웃에 쉽게 손벌려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것 등이 그것이다. 한국에 있을 때 보다는 훨씬 더 개방적인 한국 학생 커뮤니티가 형성되어 있어 그 안에서 맛보는 인간적인 즐거움은 참으로 인상적인 것이다.

그 중에 나에게는 특별한 것이 있다. 그것은 목장모임... 목장이라는 것은 내가 다니는 교회에서 구역 대신에 붙인 이름으로 세 가정에서 일곱 가정 정도가 한 목장을 이루어 매 주마다 정해진 시간에 만나서 찬양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보는 소그룹 모임이다. 내가 속해 있는 목장에는 여덟 가정 정도가 소속되어 있고 그 중 여섯 가정 정도가 정기적으로 모여서 교재를 나눈다. 나는 거기서 목장을 인도하는 목자로 섬기고 있다.

목장모임... 이는 그저 교회에서 정해준 소그룹 모임의 수준을 훨씬 벗어나는 가족과 같은 관계이다. 어려운 미국생활을 하고 있는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모여서, 같은 신앙을 가지고 서로 격려하며 한 모임을 이루기 때문에 서로에 대한 마음 씀씀이가 참 아름답다.

얼마전에 가정의 문제 때문에 한국에 방문해야 했던 한 지체가 있었다. 모두들 그를 위해 얼마나 기도했는지... 얼마나 마음 졸이면서 한국에서 날라오는 소식을 기다렸는지... 또 한 가정에서는 태어난지 몇 개월 되지 않은 아기를 학업 때문에 한국에 보내야 했는데, 그 아기를 보내는 목장 식구를 보면서 내 마음이 왜 그리도 쓰린지... 그리고 애를 보내 놓고 힘들어 하는 그 엄마를 보면서 얼마나 안쓰럽고 가슴 아픈지... 목장 식구들 중에 한 사람이 알레르기로 무척 고생하여 목장 모임에도 참석하지 못하고 집에 드러 누워 있었을 때, 그 먼거리를 길도 익숙치 않으면서도 밥과 반찬을 해 들고 찾아가 위로하는 또 다른 식구, 그리고 예연이가 아파서 교회에 못간 아내가 식사도 제대로 못했을까 염려해서 감자탕을 준비한 가정... 한국에서 돌아온 형제가 시차 적응이 안되었을까봐서 밥과 김치, 반찬을 해들고 와서 밥 꼭 챙겨먹으라면서 건네주었던 자매...

작은 마음씀씀이... 작은 정성... 마치 내 일인양 신경쓰고 마음... 모두가 우리 목장을 영적인 가족으로 묶어주는 참으로 아름답고, 결코 작지 않은 섬김이고 사랑의 모습이라는 것을 하나님은 인정하시리라 믿는다. 이런 공동체에 속해있고, 이런 공동체를 섬기는 나는 참으로 축복받은 존재이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이 목장의 리더로 세워 주셨지만, 나는 오히려 우리 목장의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고 그 안에서 유학생활의 힘과 기쁨을 얻는다.

주님...

"그런데, 너 그 때 왜 나를 신뢰하지 못하고, 너 혼자 그렇게 힘들어 했니?"

"죄송해요. 예수님.. 그 때는 제가 믿음이 약해졌었어요.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분명히 알고는 있었는데, 상황과 제 자신을 보니, 그 약속을 신뢰하기가 힘들더라고요.."

"그래.. 그래서 내가 아버지 옆에서 얼마나 기도했는지 모른다. 아버지께서 너를 지켜 주셔서 결국은 모든 것이 잘 되었지."

"그래요... 그 때 정말 감사했었어요. 저 혼자 어찌할바를 모르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저에게 분명히 갈 길을 알려 주셨지요. 그런데, 예수님...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두고 혼자 기도하실 때, 얼마나 외로우셨어요? 예수님 당시 그 어느 누구도, 심지어 제자들마저도,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도대체 이해하지 못하고, 예수님 가슴 안의 번민과 고뇌를 이해하지 못하고 서로 싸우고 있었으니..."

"그래.. 그때 참 외롭고 힘들었지... 십자가의 고통보다는 오히려 아무와도 그 아픔을 나눌 방법이 없다는 것이 더 힘들었지.. 하지만 아버지께서 늘 나와 함께 계시면서, 나를 잘 붙잡아 주셨어... 그나저나 네가 내 마음을 이해한다니, 너도 어지간히 힘들었는가 보구나."

"예... 주님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지만... 주님 따라 살면서, 특별히 영혼들을 섬기면서, 많이 외로왔지요... 주님에 비하면 저에게는 믿음의 동역자들도 있고 그래서 형편이 훨씬 더 나았는데도... 어려운 결정을 내리거나, 주님의 일을 위해 깊이 고민할 때는 참으로 외로왔어요... 그 때 정말 힘이 들었고, 포기하고 싶을 때가 많았어요..."

"그래.. 내가 그 마음 알지..."

"주님이 마음을 알아 주실 거라 믿었어요. 그래도 이렇게 막상 예수님을 만나서 옛날 이야기를 하니, 그 때 힘들었던 것도 이제는 추억이네요.."

마지막 때...
주님을 만난 뒤... 주님과 나 사이에 끊임없는 대화가 오갈 그날... 주님께 책망도 듣고, 위로도 받고, 궁금했던 것을 질문하고 가르침을 받는 그 대화 속에서 그분과 더 깊은 사랑을 나눌 그날...

그 날을 위해 오늘 그분과 대화할 꺼리들을 많이 만들어야겠다. 그분과 지금 이 시간에 동행하면서 같이 일을 해나갈 때, 예수님과 할 말이 많아지겠지...
주님을 따르느라 겪었던 외롭고 힘든 모든 것도 주님께 털어 놓으면서 하소연할 때, 주님께서 내 마음을 아시고 어루 만져 주시겠지...

그 분을 만날 그 날을 생각할 때, 내 안에 모든 어려움을 이길 힘이 솟는다. 주님만을 의지하며, 주님께만 모든 것을 걸어야지...

What I think you were this year

하연이가 가족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생각하며 올해 그들이 자신에게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단어들로 표현했다.
평가가 많이 짜긴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매우 예리한 것 같다...
맨 위부터 예연, 아빠, 엄마 순으로 카드를 세 장 작성했다.


"예수 인도 하셨네..."

찬송가 434장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내주안에 있는 긍휼 어찌 의심하리요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위로 받겠네 무슨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 하리라 무슨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 하리라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어려운일 당한때도 족한 은혜 주시네 나는 심히 고단하고 영혼 매우 갈하나 나의 앞에 반석에서 샘물나게 하시네 나의 앞에 반석에서 샘물나게 하시네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그의 사랑 어찌 큰지 말로 할 수 없도다 성령감화 받은 영혼 하늘나라 갈때에 영영 부를 나의 찬송 예수 인도하셨네 영영 부를 나의 찬송 예수 인도하셨네 아-멘

내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이 찬송을 부를 수 있다면...
그분의 신실하심을 내 인생으로 체험할 수 있다면...
그것보다 더 큰 복이 있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그 신실하신 인도하심을 정말로 체험하기를 원한다면, 그분의 인도하심에 내 인생을 걸어야 한다. 하나도 남김없이 온전히 그분께 의지해야하고, 그분만이 내 인도자가 되시도록 맡겨 드려야 한다.
그것은 그분께, 그분의 말씀에 내 인생을 온전히 의탁하는 것이다. 그 외에는 그 어떤 것에도 내 삶을 의지하지 않아야 한다. 모든 것을 끊고, 그분께 100% 의지할 때, 분명히 그분은 나를 인도하신다. 그것도 신실하게... 절대로 나를 실망시키지 않으시며...

마지막 날, 천국으로 달려가며 나는 외치련다.
"예수 인도하셨네! 예수 인도하셨네!"

진리 하나...

누군가에 대한 정죄가 내 안에 있다면,
누군가의 부족한 부분들이 내 눈에 잘 보인다면,
누군가로부터 상처를 잘 받는다면,
그것은 내가 주님으로부터 그 만큼 멀어져 있다는 증거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다.

주님께 더 가까이 다가갈수록,
내 죄악된 모습이 더 분명히 보이고,
내 부족한 부분들이 더 선명하게 보이고,
내가 주님과 다른 사람들에게 준 끔찍한 상처가 보이기 시작하기 때문에,
남들에 대해서 신경 쓸 겨를이 없다.
너무나 심각한 내 자신의 죄악에 견주어 볼 때, 다른 사람의 것은 보잘 것 없이 작다는 것을 분명히 볼 수 밖에 없다.

그것이 진리이다.

영원한 죄인...

(교회 게시판에 올린 제 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내 모든 죄악을 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 능력은 나의 과거, 현재, 미래의 죄를 모두 처리하신 능력이며, 그 십자가를 믿음으로 받아들인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믿음의 가장 기초에 해당하는 이 사실은 믿는 자들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죄인이었던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용서함을 받았고, 이제는 만왕의 왕이시고 절대적으로 선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의롭다함을 받는 가운데, 천국을 소유한 자로 살게 된 것은 이 세상 그 어느 복보다도 큰 복임이 틀림이 없습니다.

용서받은 자. 죄사함을 받은 의인...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타이틀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죄문제는 완전히 해결된 것일까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서 진정으로 거듭난 영혼에게 "죄책감"은 있을 수 없는 것일까요? 신앙생활을 오래 할수록 자신의 죄인됨에 대한 고백이 점차 사라질 수 밖에 없을까요? 죄문제는 십자가에서 해결 되었으니, 이제는 다른 문제, 혹은 하나님을 믿는 긍정적인 면에 집중해야만 할까요?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은 "예"와 "아니오"가 동시에 답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죄책감"이라는 단어 때문입니다. 죄책감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율법의 정죄로 인한, 사망으로 이끄는 죄책감입니다. 이 죄책감은 사탄이 이용하는 죄책감이며, 이로 인해서 우리는 고통당하며, 결국 영원한 심판 가운데 처할 수 밖에 없는 죄책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율법에서 오는 정죄의 저주를 해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1-4)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은 정죄의 문제, 죄책감의 문제, 결국 죄문제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자유인--죄의 정죄로부터의 자유--입니다.

두번째 죄책감은 율법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이것은 다시 두 가지의 경우가 있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인이 죄에 노출되었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경고와 회개의 메시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마암아 죄로부터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인도 죄의 유혹에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그로 하여금 돌이키도록 말씀하십니다. 때로는 고통스러울 정도로 우리를 징계하시는 방법으로 말씀하시기도 하고, 때로는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모습으로 안타까와 하시기도 하는 모습으로 다가 오시기도 하지만, 그 목적은 하나입니다. 그것은 죄의 자리를 떠나서 아버지의 은혜의 자리, 거룩의 자리로 다시 돌아오라는 메시지입니다. 율법의 정죄에서 나오는 죄책감이 오히려 자신에 대해서 절망하게 하고, 자신을 책망하는 가운데 정죄의 사슬에 더 묶이게 함으로써, 더 확실한 마귀의 종이 되게하는 효과가 있다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정죄는 죄의 자리를 속히 떠나서 다시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나아오도록 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두번째는 내가 특별히 죄를 짓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 앞으로 점차 나아감으로써 생겨나는 죄책감(죄인식)입니다. 그것은 영적으로 더욱 성숙해 가는 가운데 빛이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때, 그 빛이 더 강렬해짐으로 인해서, 그 전에는 보지 못했던 내 자신의 죄된 모습을 보게 되기 때문에 생기는 죄책감입니다. 그전에는 빛이 약해서, 혹은 빛을 가리고 있는 부분이 있어서 드러나지 않았던 내 존재의 지저분한 모습들이 서서히 더 확실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런 죄책감은 영적으로 성장하지 않았다면, 결코 볼 수 없었던 것들, 그 전에는 결코 죄라고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서, 하나님을 더 깊이 경험하고, 그분을 더 알아감으로써, 이제는 죄라고 인식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죄인식은 나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더 확실하게 무릎을 꿇도록 인도합니다. 자신의 죄인됨을 인식할수록, 십자가가 위대해져 보이고, 그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사랑의 크기가 더 커보이고, 그런 나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위대해져 보입니다. 이런 죄인식은 나로 하여금 내 자신을 더 내려 놓게 하고, 주님을 붙들게 하며, 주님께만 소망을 두게하고, 따라서 보다 더 확실하게 주님의 종으로서 자신을 드리게 됩니다.
이런 죄인식은 내가 하나님을 더 깊이 경험하고 있다는 증거이며, 내 안에 생명이 있으며 자라고 있다는 증거이며, 내 영적 감수성이 더 발달하여 예민해져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믿음이란 역설의 연속입니다. 내가 그리스도께 종이 된 정도 만큼, 자유를 누립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어야만 생명이 내 안에 역사합니다. 내가 내 삶을 포기할 때, 진정으로 내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내가 쥐고 있는 모든 것을 내려 놓을 때, 진정으로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됨을 인식한 만큼, 내 삶은 거룩해져갑니다. 수많은 위대한 영적 선배들이 그들의 신앙이 성숙해 갈수록 자신의 죄인됨을 더 처절하게 고백하고, 죄와 더 치열하게 싸웠던 것은 그들의 삶에서 죄의 절대량이 많아져서가 아니라 바로 그들이 주님 앞으로 한 걸음씩 나아갔기 때문입니다. 그 가운데 그들의 삶은 더욱 정결해져가고, 더욱 거룩해져가는 것입니다.

영적인 성숙, 다시 말해 빛이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성장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주님 앞으로 불려갈 때까지 지속되는 과정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 "영원한 죄인"인 삶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진정한 축복입니다.

인생에서 내가 가장 성취하고 싶은 것...

"The things I had fought for and burned my midnight oil for had failed me. Success--I despised it. Recognition--it was dead ashes. Society, men and women above the ruck and muck of the waterfront and forecastle--I was appalled by their unlovely mental mediocrity. Love of woman--it was like all the rest. Money--I could sleep in only one bed at a time, and of what worth was an income of a hundred porterhouses a day when I could eat only one? Art, culture--in the face of the iron facts of biology such things were ridiculous, the exponents of such things only the more ridiculous."--Jack London

Jack London은 그 짧은 생애를 살면서, 세상의 성공을 위해 초인적으로 노력했던 사람이고, 그로 인해서 세상의 명예와 부를 누렸던 사람이다. (socialist로서의 그의 신념과는 상반되게) 그는 명예와 부와 여자들 외에는 아무 것에도 가치를 두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그의 소설은 바로 그것을 얻기 위한 전략적 수단에 불과했다.
그가 말년에 고백한 고백이 바로 위의 글이다. 그 글에서 허무를 느낄 수 있다. 그의 자전적 소설인 Martin Eden의 주인공이 소설을 통해서 유명해진 후, 유람선에서 뛰어내려 자살하는 것처럼, 무지개를 좇아 사력을 다해 달려 온 그 끝에 보이는 허무함. 그 허무 앞에 무너지는 인생을 볼 수 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 3:12-14)
London과는 대조적으로 사도바울의 삶은 그 마지막 순간까지 의미와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삶이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자신이 평생을 바쳐왔던 그리스도의 종된 삶에서 인생의 참 의미를 찾은 사람이었다.

나는 어떤 인생을 살 것인가? 어느 모델을 따라갈 것인가? 세상의 성공여부와 물질의 다소 여부를 떠나서 허무하고 비참한 종말을 맞이할 것인가, 아니면 참으로 의미있고, 소망이 있는 마지막을 맞이할 것인가?

내 인생... 한 번 밖에 없는 이 인생... 이 소중한 인생을 부와 명예와 안락이라는 세상의 신기루를 좇아 사는 어리석은 일에 낭비하고 싶지 않다.
마치 페르시아와의 전투에서 승리를 알리려 마라톤 평야를 죽을 힘을 다해 질주한 뒤 아테네 시민들에게 승리의 소식을 알리고 죽었던 한 병사의 전설처럼 살고 싶다. 그리스도 앞에 가는 날, 내 인생의 모든 것을 그분을 위해 소진하여, 그분 앞에 쓰러지는 인생을 살고 싶다. 내 존재의 한 방울까지 아낌없이 그분을 위해 모두 쏟아 붓는 인생을 살고 싶다.

설교말씀

주일... 예배 가운데 선포되는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너무나 관성적으로 말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표현 속에 진리가 있다. 듣는 사람이 인정하건 안하건 간에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주님을 영접하고 난 이후 나는 참으로 많은 훌륭한 설교자들을 만났다. 그리고 그분들을 통하여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영적으로 자라왔다.
사실 "훌륭한" 설교자라는 표현은 왠지 어색해 보인다. 왜냐하면, 그 선포자가 누구인지 상관 없이 예배 때 선포되는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훌륭하다"는 것의 정의가 선뜻 와 닿지 않게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이 "훌륭하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모르겠지만, 나에게 있어서 "훌륭하다"는 것의 정의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가감 없이 있는 그대로 선포되도록 준비된 설교자들을 일컫는다. 사실 그 만큼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선포한다는 것은 모든 설교자들의 과제이며, 쉽지 않은 문제이다. 이것을 결정하는 것은 설교자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담을 만큼 깨끗한 그릇인가와 그 설교자의 관심의 초점이 어디에 있는가이다. 이 두 가지 요소가 진리의 말씀이 성도들에게 잘 흘러가는가 아니면 어느 정도씩 막히면서 흘러가는가를 결정한다.

내가 속한 교회의 목사님... 목사님 당신께서는 본인에게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을 매우 꺼려하시고 좋아 하지 않으시지만 그분의 설교를 들을 때면, 마음 속으로 참으로 깊은 감탄이 절로 나온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 저런 설교를 하실 수 있을까?'

내로라하는 뛰어난 설교자들을 많이 접한 내가 볼 때, 지금까지 내가 경험한 그 어떤 설교자보다도, 목사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흘러나가는 통로로서 거의 막힘이 없다.

사실 지금 내가 다니는 교회에 처음 나오기 시작했을 때, 목사님의 설교는 참으로 지루했다. 설교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예화, 열정, 요점정리, 성도들과의 non-verbal communication 등에는 전혀 신경을 쓰시지 않는 우리 목사님의 설교는 내용은 매우 훌륭했지만, 그 포장이 너무 엉성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몇 달이 지나지 않아서 내가 틀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 자체를 전하는 데 있어서 그런 포장들은 오히려 그 복음의 가치를 떨어뜨릴 뿐이라는 것, 진리는 그 자체로 powerful하며 능력이 있기 때문에 다른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우리 교회 교인들은 누구나 잘 아는 사실이지만, 우리 목사님의 목회철학, 설교철학은 분명하시다. 오직 복음! 오직 복음! 바로 그것이다. 모든 말씀은 복음으로 귀결되며, 모든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로 해석이 되며, 복음이 기반이 된다. 어떤 본문이든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해석의 렌즈가 된다. 그분이 전하시는 어떤 말씀에서도 결코 복음이 빠지는 일은 없고, 복음이 중심이 되지 않는 경우는 없다. "복음"이라는 단어가 많다는 것이 아니고, 복음의 내용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절대 빠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목사님께서 바로 그런 철학 아래에서 오로지 하나님의 진리에 의지하며 그것을 포장없이 그대로 전달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이후로 주일 설교 말씀은 나에게 생명이 되었고, 그 어느 것보다 귀한 것이 되었다.

내가 청년부를 섬기게 되고, 매주 청년부에서 말씀을 전하게 되면서, 나는 내심 목사님처럼 말씀을 전해보리라 다짐했고 희망했었다. 하지만 3년이 조금 지난 지금... 내 스스로 느끼는 것은 내가 원하는 목사님의 설교에 그 발치 만큼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런 포장없이 복음의 진리를 전한다는 것이 생각같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것이 노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체험적으로 깨달으면서, 나는 우리 목사님을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특별하게 사용하시고 계시다는 것을 절절히 느끼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하시지 않으시면, 그런 설교가 나올 수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되면서, 주일 설교를 대하는 내 마음 자세가 확실히 달라졌다. 물론 그 전에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고 귀기울여 들은 설교말씀이었지만, 이제는 완전히 납작 엎드리는 마음으로, 천상에서 울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을 수 밖에 없게 되었다. 내 자신이 설교자가 되면서, 진정으로 그 설교의 의미를 알게 된 것이다.

오늘도 주일 말씀을 들으며,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나를 사로잡으시는 것을 느꼈다. 그분의 진리에 압도되어 내 자신을 하나님께 내어드리는 경험을 했다. 담백하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전하는 설교자와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나는... 참으로 복받은 자이다...

세상 속에 거하며 세상의 지식과 세상의 것들을 습득해야 하는 이유...

오늘 아침에 밥을 먹으며 참으로 오랫만에 TV를 켰다. CNN 뉴스를 보고 있는데, 내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Ray Comfort가 인터뷰에 나왔다. 뉴스 내용은 다윈의 "종의 기원"에 기독교 단체에서 다윈의 진화론을 반박하는 긴 서문(Ray Comfort가 썼다)을 붙여서 책으로 발간했고, 그것을 대학가에서 무료로 나누어 주고 있다는 것이다.

진화론을 전혀 믿지 않는 나로서는 참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과학을 가장한 신화와 허구에 불과한 이론을 진리인 것처럼 가르치는 현대의 세태에 하나님의 창조에 의한 인간과 만물의 존재를 주장하며 그것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은 적절해 보인다.

하지만 문제는 Ray Comfort의 서론이 학문적으로 충분히 검증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실 나는 아직 읽어보지 않았고 뉴스만 들었기 때문에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그러나 몇몇 전문가들의 의견을 통해서 볼 때, Comfort의 주장이 비판에 노출될만 한 것 같다.
뉴스에서 나오는 전문가들의 말로 판단해 볼 때, Comfort는 다윈의 진화론을 순수 과학적인 접근법으로만 비판한 것은 아닌 것같다. 그의 진화론이 사회, 정치적으로 미친 영향에 대해서 논하고 그것에 대해서 신랄한 비판을 가한 것으로 보인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과학적 진화론과 Social Darwinism을 혼동하고 있는 것을 보인다. 사실 현대 사상계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다윈의 진화론이 아니라 Herbert Spencer의 Social Darwinism이다. 둘은 어느 정도는 관계가 있지만, 상당히 다른 것이며, 따라서 다른 접근법을 사용해야 한다. Comfort는 이 점을 간과한 것 같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 싶어하는 요지는, 세상의 학문과 사상체계는 세속적이고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지 않기 때문에 마땅히 비판받아야하고, 진리이신 말씀이 그 가운데서도 선포되어야 하지만, 그것들을 만만하게 봐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자칫 무모하게 비판을 하다가는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돈키호테와 같은 꼴이 되어버리고 말고, 또한 세상의 웃음거리가 됨으로 기독교가 마치 천박하고 경박한 사상인 것처럼 인식되어버릴 수 있다.
어떤 주장과 사상에 대해서 효과적으로 반박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주장하는 자들만큼, 아니 그들보다 더 그 주장과 사상에 대해서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그들의 논리와 언어와 가정과 무엇보다도 그들 가운데서 오고가는 대화의 장(discourse)혹은 paradigm에 대해서 철저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나서 그들에게는 새로운 진리의 말씀에 근거한 비판이 "적절하고 설득력 있게" 가해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은 가볍게 거부해 버리고 만다.

그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학문과 지식을 배워야 하는 이유이다. 그들 중의 하나로 인정받아야 하는 이유이다. 철저히 그들이 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적어도 학문에 있어서 그들 중 하나로 인정받고, 그들 가운데서 실력을 인정받지 않는다면, 아무리 말씀에 근거한 주장과 비판을 가해도 그들은 가볍게 무시하고 만다.

지난 주일에 이 문제로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한 지체와 깊이 있게 대화를 나누었다. 신앙과 학문(특히 인문학과 사화과학)이 언뜻 보기에는 별개의 것으로 보이고, 믿음이 "좋은" 사람들은 세상의 지저분하고 더러운 학문 속을 발을 담그지 말고 아예 떨어져 있어야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는 그 영역조차도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영역이 되어야 함을 믿는다. 그곳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깃발을 꼽아야 하는 자들이 바로 그 학문에 종사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믿는다. 그것을 위해서 우리는 열심히 공부해야 하며, 그들과 대화가 되고, 그들의 인정을 받는 정도까지 학문적 진보를 이루어야 한다. 바로 그 때에야 비로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학자,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지성인의 목소리를 세상을 향하여 낼 수 있는 것이다.

유행을 보며...

나는 유행에 매우 둔감한 사람이다. 유행은 아예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 그것은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한 번 입은 옷은 다 떨어지거나, 아내에 의해서 버려질 때까지 입는다. 나에게 편하면 그만이지, 남들이 어떻게 입고 다니는지는 내 관심 밖이다.
그런데 올 해는 유난히 캠퍼스의 여학생들의 유행이 눈에 들어온다. 부츠차림에 몸에 딱 달라 붙는 바지를 입는 것(뭐라고 부르는지 모르겠다)... 하연이의 언니 뻘되는 어린 여학생들을 보면서 '내 딸들이 곧 저렇게 입고 다니겠지'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여성들, 특히 젊은 여성들은 유행에 매우 민감한 것 같다. 그 유행을 주도하는 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들에게 매년 같은 스타일의 옷을 입는 것은 유행에 뒤떨어지는 것이다. 물론 유행은 순환하기 때문에 유행이 지난 몇 년 뒤에 약간 바뀐 스타일로 다시 유행하기도 하지만, 매년 지속되는 변화의 트렌드에 여성들은 매우 민감한 것 같다.

여성들의 옷차림처럼 인생과 환경은 늘 변화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도 늘 바뀐다. 작년에 나에게 원하셨던 것을 올해도 동일하게 원하시지는 않는다. 그분은 시간과 관계없이 돌아가는 원리나 법칙이 아니라 살아계신 인격이시다. 작년에 내가 한 행위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더라도, 그 동일한 것을 그분을 오늘도 기쁘시게 할 수는 없다. 늘 그분의 마음과 뜻을 살피며, 그분이 "지금"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해야 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물론 하나님께서 영혼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시고, 하나님을 진정한 하나님으로 인정받는 것을 기뻐하시는 큰 틀에 있어서는 결코 변함이 없다. 그렇지만 구체적인 삶의 개별적인 일에 있어서는 변화할 수 밖에 없다.

신앙이 관성에 빠지고 제도화 되어가면서 타락하게 된다. 습관과 타성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그 안에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사랑과 경외가 사라지고, 자신의 욕심이라는 우상으로 가득차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늘 하던 대로 신앙생활하는 것은 타성 가운데서 정작 그분을 놓치는 길로 가는 것이다.
마치 젊은 여성들이 유행에 매우 민감하며, 그 유행이라는 바람결에 실려 가듯이, 변화되어가는 하나님의 뜻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는 나의 믿음이고 싶다. 그곳에 나의 영적 안테나를 한 껏 치켜 세우고 있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 3:5)

매일 아침.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도서관의 내 방으로 들어 와서 가장 처음하는 것은 신발을 벗고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그것은 출애굽기에서 모세에게 이르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계시는 거룩한 곳임을 인정하는 것이며, 종된 자로서의 나 자신을 하나님 앞에 인정하는 뜻에서 신발을 벗는 것이다.
이 말씀은 내가 청년부 부장으로 섬기면서 처음으로 전했던 말씀이었다. 하나님 앞에서는 항상 종된 자세로 있는 것이 나의 소망이었고, 각오였다.

요즘은 기도를 한 뒤에 컴퓨터를 켜면 바로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라는 찬양이 나온다.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나는 이 길을 가리라."

내 삶의 가장 큰 화두는 "종됨"이다. 그분께 완전한 종이 되고 싶은 열망이 나에게 가득하다. 무엇을 명하시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만 하다면, 군소리 없이, 두 말 없이, 순종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 나의 소원이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 날까지 그 모습 그대로 주님의 길을 가고자 하는 소망이 나에게 있다.

그런데...
최근 언제부터인가 그 종됨의 바른 자세를 잃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명하셨기 때문에 청년부의 부장으로 섬기는 것을 분명히 잘 앎에도 불구하고, 나 같이 부족하고 자격없는 자를 굳이 그 자리로 부르신 하나님께 대해서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원망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또한, 내 믿음의 동역자들, 내가 그토록 사랑하고 신뢰하는 동역자들을 하나씩 둘씩 다른 곳으로 옮기시는 것을 보면서, 내 속 깊은 곳에서 외로와 하고 힘들어 하는 것을 발견한다. 그들을 다른 곳으로 옮기시는 것에 명백하게 항거하지는 않지만, 그리고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 깊은 곳에서는 하나님을 원망하는 마음이 있다.

종이라고 감정이 없겠는가? 종이라고 자신의 생각과 소망이 없겠는가? 하지만, 진정한 종이라면, 주인의 마음과 주인의 계획을 마치 자신의 것인 양 생각하고, 완전히 따르는 자이다.

요즘... 몇 가지 다른 것들과 함께, 내 가장 깊은 곳에서 나를 흔들리게 하고 힘들게 하는 그 하나님에 대한 원망은... 내가 어떤 자인지를 잘 보여준다. 말과 수사와 스스로의 생각이 어떻든지간에, 나는 여전히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자세를 갖추고 있지 못하고 있고, 하나님에 대해서 여전히 범죄하고 있는 자인 것이다.
사실 그것 또한 스스로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에 더 힘든 것을 느낀다. 아예 모른다면, 원망하고 말텐데...

오늘 아침. 이렇게 완악하고 부족한 나에게 하나님께서는 QT 찬송을 통해서 위로하신다.

363장
내 모든 시험 무거운 짐을 주 예수 앞에 아뢰이면 근심에 싸인 날 돌아보사 내 근심 모두 맡으시네
내 모든 괴롬 닥치는 환란 주 예수 앞에 아뢰이면 주께서 친히 날 구해주사 넓으신 사랑 베푸시네
내 짐이 점점 무거워질 때 주예수 앞에 아뢰이면 주께서 친히 날 구해주사 내 대신 짐을 져주시네
마음의 시험 무서운 죄를 주 예수 앞에 아뢰이면 예수는 나의 능력이 되사 세상을 이길 힘주시네

[후렴] 무거운 짐을 나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질때 불쌍히여겨 구원해줄 이 은혜의 주님 오직 예수

완악한 종과 자비로우신 주인... 나에게 다가 오셔서 토닥거리시며 위로하시는 하나님...

언제나 나는 그 자비로우신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 합당한 종의 모습으로 설 수 있을까?

仰不愧於天

仰不愧於天 俯不作於人 二樂也(앙불괴어천 부부작어인 이락야)

"맹자"라는 책에 있는 君子三樂(군자삼락) 중 한 구절이다.
우러러 하늘에 부끄러움이 없고, 구부려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는 것이 군자가 누리는 세 가지의 즐거움 중 하나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었던 윤동주의 서시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김용의 선교사님께서 자주 말씀하시는 것처럼 "죄의 짱아치"였던 나를 주님께서 십자가의 보혈로 사해 주시고, 이제는 죄에서 깨끗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죄와 상관 없는 자로, 죄를 이기는 자로 불러 주신 은혜를 받은 자로서, 맹자의 이 구절은 나에게 참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거룩을 향한 소망이 있고, 거룩을 향한 변화는 있지만, 아직도 내 안에 도사리고 있는 무시무시한 죄성과 죄의 유혹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내 자신을 본다. 주님을 따라 살고 싶고, 주님을 향한 열망이 있고, 주님께 내 모든 것을 드리고 싶은 마음 한 구석에, 소돔성을 못내 아쉬워하며 힐끗 뒤돌아보는 롯의 아내의 아쉬움이 있다.
죄를 짓는 것이 끔찍이 싫지만, 죄와 지속적으로 싸우지만, 그것을 완전히 이기지 못하는 내 자신을 본다.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는데...
하나님께서 내 안을 모두 다 아시는데...
그리고 내 안에서 탄식하시는데...

仰不愧於天이 아니라 仰愧於天이다. 하나님께 부끄러울 따름이다.

주님을 향한 열망, 경건의 연습, 기도, 말씀, 거룩, 그분을 향한 사랑과 헌신, 나의 십자가, 나의 죽음...
이 모든 것이 헛된 관념이나 구호가 되지 않게하는 유일한 방법은, 내 자신이 완전히 주님께 드려지는 것 뿐이라는 것, 그것이 잠시라도 되지 않으면, 마귀는 나를 향해서 우는 사자와 같이 달려든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는다.
내가 주님 안에서 완전히 살지 못한다면, 나는 아직 죽어 있는 것이다.
주님으로 24시간을, 단 일 초의 공백도 없이 완전히 채우지 않으면 안된다.

주여!!!

하나님께서 주인이 되시는 공동체?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 것은 성경에 선포된 것이고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내가 속한 믿음의 공동체의 머리도 그리스도가 되셔야 한다.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주인이 되셔야 한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내 교회, 내 신앙 공동체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다고 해서, 모여서 찬양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듣고 공부한다고 해서, 그분이 공동체의 주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래야 할 것 같은데... 당연히 주님의 공동체여야 할 것 같은데... 실상 이 땅 가운데 있는 믿음의 공동체의 모습을 볼 때, 과연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인되신 것이 맞는지 의심이 들 때가 "정말" 많다.

진정으로 그리스도께서 주인이 되신 공동체라면 어떤 모습일까? 누가 보든지간에,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 당신께서 당신의 공동체라고, 당신이 주인되시는(정확히 말해서 주인대접 받으시는) 공동체라고 인정하시는 공동체는 어떤 특징들을 가지고 있을까?
내 스스로 자주 질문하고 묵상하지만, 사실 나도 정확하게 잘 모르겠다. 하지만 묵상하는 가운데 적어도 한 가지 확실하게 깨달은 것은 하나님께서 주인대접을 받으시는 진정한 주님의 공동체는 주님의 종들이 사역하는 곳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섬기는 모든 자들이 철저하게 주님의 뜻을 구하고, 그 뜻만을 구하는 가운데 순종하는 공동체라는 것이다.
섬기는 자들이 진정으로 종이 되어 있을 때만 주님은 주님으로 대접받으실 수 있다. 이 점은 신앙공동체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점이다.

최근에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 영적 리더들을 선발하고 있다. 절차는 간단하다. 현재 영적 리더로 섬기고 있는 지체들이 일정기간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구한다. 그리고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부르신다는 확신이 있는 지체들만, 부장인 나에게 추천한다. 그 추천을 받는 나 또한 일정 기간 동안 기도하는 가운데 추천된 지체들이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자들인가를 점검한다.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서 부르신다는 확신이 없다면 리더로 설 수 없다. 부장인 내가 일정기간 기도하면서 구하는 가운데 분명한 확신이 드는 지체들에게 개별적으로 통보하여 그들로 하여금 다시 일정기간 동안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여쭤보게 한다. 그 기간 동안 해당 지체들은 그 어느 누구에게도--부장인 나를 포함해서--그 사실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없고, 상의할 수 없다. 순전히 개인이 하나님과 독대하는 가운데, 하나님으로부터 분명한 부르심의 확신이 있어야만 한다. 그 부르심의 확신이 있는 사람만 영적 리더로 섬기겠다고 답변할 수 있다. 부장인 나에게 통보하는 것으로 모든 절차가 끝난다. 그 어느 경우에도 설득이나 권유는 없다.

이 프로세스는 내가 부장으로 섬기면서 정착시킨 것이다. 이 프로세스의 핵심은, 하나님의 뜻이고, 그에 대한 순종이다. 그것은 우리 공동체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믿음의 고백이다.

현재 기존의 리더들이 해야할 일들이 모두 끝나고 이제는 내가 기도하는 차례다. 청년부를 섬기고 있는 부장으로서 가장 어려운 것 중의 하나는, 이 과정 중에서 내 생각, 판단, 경험, 선호함을 내려 놓는 것이다. 누군가를 미리 생각하거나, 필요한 리더의 숫자를 미리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데 있어서 매우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내 안에 먼저 내려 놓는 작업이 되지 않으면 기도할 수가 없다. 사실 기도의 많은 부분은 나로 하여금 내 생각을 내려 놓도록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다.
만약 내가 보기에 좋은 사람, 내가 보기에 할 만한 사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리더로 선발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공동체에서 일할 하나님의 종을 선발하는 것이 아니라, 내 사람을 심는 것이다. 그렇게 될 경우 이 공동체는 더 이상 하나님의 공동체가 아니라 내 공동체가 된다. 내가 사역하기에는 편할지 모르지만, 이미 하나님 앞에 큰 죄를 짓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할 수가 없게 되어버리고 만다. 그렇게 될 경우, 섬기는 사역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이 되어버릴 수 밖에 없고, 그렇다면 그 엄청난 짐을 나 혼자 지고 가야 한다. 그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나는 이 공동체를 섬기는 짐을 질 능력이 없는 자라는 것을 너무 잘 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직접 일하셔야만 하고, 나는 그분의 종으로서 시키시는 대로 할 뿐이다. 나에게는 이 공동체에 대한 책임이 없다. 그분이 책임을 지시고, 나는 비서로서, 종으로서 그냥 그분을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나는 지금까지 그런 자세로 공동체를 섬겨왔다.

나는 내가 섬기는 청년부가 내 공동체가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래서 내 것을 내려놓는 작업을 철저하게 진행하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물론 인간이기 때문에 100% 그렇게 될 수는 없겠지만, 최대한 내려 놓는 가운데, 주님의 뜻을, 내 시각으로 왜곡되지 않은 순전한 뜻을, 받기를 간절이 원한다.

늘 그렇듯이 내 것을 내려 놓는 것은 고통이 수반된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내가 져야할 나의 십자가이다. 그리고 사실 그것만이 내가 우리공동체를 위해서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그것만 제대로 된다면,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다 하신다. 그분이 주인이시기 때문에... 내가 지는 십자가를 통해서 주님이 우리 공동체의 주인으로 인정될 수만 있다면, 나는 기쁘게 그 십자가를 지겠다.


리더를 선발하는 이번 프로세스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직접 세우시는 리더들이 세워지기만을 간절히 기도한다.

용서..

언젠가... 차를 타고 가면서 들은 미국 기독교 방송에서 한 목사님이 설교 중에 용서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참 공감이 가는 내용이었다.

용서
1. 용서를 해주는 사람이 용서를 구하는 사람에게 다시는 그 잘못에 대해서 상기시키지 않고 언급하지 않는 것.
2. 용서를 해주는 사람이 제 3자에게 용서를 구하는 자의 잘못을 언급하지 않는 것.
3. 용서를 해 주는 사람 자신이 스스로 용서를 구하는 자의 잘못에 대해 기억하지 않는 것.

한 마디로 말해서 용서를 한다는 것은 상대방의 잘못을 기억에서 지워버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인간으로서는 참으로 하기 힘든 용서.. 하지만 하나님께서 나의 죄를 용서해 주셨다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완벽하게 이 용서를 실천하신다. 그것이 얼마나 은혜가 되는지...
주님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해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옵시고"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나를 완벽하게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용서... 그 용서를 따라가는 내가 되기를 기도할 뿐이다.

공짜전화 쓰는 법...

미국 내에서 공짜로 전화 쓰는 법.

1. Google voice에 가입하여 invitation 신청을 한다. (아니면 google voice를 이미 쓰고 있는 사람에게 invitation을 달라고 요청한다.)
2. Google에서 invitation e-mail이 오면 가입하고, 번호를 받는다. 오스틴의 지역번호인 512는 내가 가입할 때까지만 해도 있었는데, 지금은 다 나간 듯... 그럴 경우 가까운 도시의 지역번호가 있는 전화번호를 받는다.
3. Gizmo5에 가입한다. Gizmo5는 Skype와 비슷한 프로그램이다. MSN메신저처럼 컴퓨터와 컴퓨터를 무료로 통화할 수 있도록 해 주고, 일반 전화로 전화하는 경우는 요금을 내야 한다.
4. Gizmo5의 Desktop용 프로그램을 설치하고 난 후 로그인을 한다. 그리고 나서 "Edit"메뉴에서 "My Profile"을 선택하면 Sip Number칸에 1로 시작하는 11자리 숫자(전화번호와 비슷)를 볼 수 있다. 그것을 기록해 둔다.
5. Google Voice에 로그인해서 "settings"를 클릭하면, 거기에 Google Voice로 걸려 오는 전화를 forward할 수 있는 번호들을 등록하는 곳이 있다. (최소한 한 개는 집전화나 핸드폰 전화를 입력해야 한다.) "Add Another Phone"을 클릭한 후, "Number"에 Gizmo5 Sip Number중 1을 제외한 10자리 숫자를 입력한 후 "phone type"에서 Gizmo를 선택한다.
6. 다른 전화도 등록한다. 여러 전화를 등록할 경우, Google Voice의 전화번호로 걸려오는 모든 전화를 등록된 모든 전화에서 동시에 울리도록 할 수도 있고(이럴 경우 먼저 아무 곳이나 받으면 다른 곳은 벨이 정지한다.) 지정한 한 곳에만 울리도록 할 수도 있다.

이렇게 하면 컴퓨터를 통해서 미국 내의 모든 전화에 전화를 걸 수도 있고, 컴퓨터로 받을 수도 있다. 모두 공짜이다. 내 경우에는 핸드폰을 prepaid phone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전화 요금 절감에 큰 도움이 된다. 100불에 1000분을 1년 동안 쓸 수 있는 것으로 구입하여, 특별한 경우에만 핸드폰을 사용하고, 나머지는 거의 google voice로 해결한다. 약 7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450분 정도를 사용했기 때문에 많이 경제적이라 할 수 있다. 참고로 smart phone을 사용하는 사람은 전화를 사용하지 않고, 인터넷만 연결하도록 한다면, google voice를 사용하여 전화로도 쓸 수 있다. 이를 위한 smart phone으로 가장 적합한 것은 google에서 나온 "안드로이드"이다.

내 경우에는 내 핸드폰과 컴퓨터, 그리고 집전화를 등록해 두었다. 누군가 구글 전화번호로 전화를 하면, 세 곳에서 동시에 울린다. 내가 도서관의 방에 있는 컴퓨터 앞에 앉아 있을 경우에는 주로 컴퓨터로 받는다.(완전 공짜) 혹시 밖에 나가 있을 때면, 핸드폰으로 받는다.(이럴 경우에는 핸드폰 사용시간 만큼 minute이 떨어진다는 것을 주의할 것.), 그리고 집에 있을 때는 집에서 전화를 받는다. 따라서 아는 사람들에게 한 개의 전화번호만 알려주면 어디서든지 나는 전화를 받을 수가 있다. 이것이 Google Voice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이다.

참고로, 나는 집에서 쓰는 Google Voice번호가 따로 있다. 집에 그 번호를 두는 이유는, 위에서 설명한대로 1-6번까지 새로운 번호를 등록하고 나서 Linksys PAP2라는 20불 정도 하는 작은 기계를 구입하여 세팅을 잘 맞추면(쉽지 않다..) 집에서 컴퓨터를 켤 일이 없이, PAP2에 일반 전화를 연결하여 미국내 어디에든 전화를 공짜로 무제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전화를 무료로 사용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집에 설치한 지 약 한 달 정도 지났는데, 아직까지는 만족스럽다. 특히 집전화인 ATT전화가 시내통화 밖에는 안되는 전화이기 때문에, 512가 아닌 다른 전화로 할 때는 이 전화를 사용한다. 조금 더 써보고 만족스러우면 집전화를 없앨 계획이다.

혹시 생각이 있으시면 시도해 보시길...

100번째 글을 쓰며...

지난 주 토요일 청년부 말씀을 전한 뒤, 한 형제가 말했다.

"작년에 하셨던 말씀과 하나도 다르지 않게 말씀을 전하시네요..."

말씀의 주제는 이성교제와 결혼이었고, 일년에 가을 즈음에 꼭 한 두 번의 말씀을 그 주제로 다룬다. 내가 전하는 말씀은 매우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다시 반복하지 않는데, 이성교제와 결혼에 관한 말씀은 매년 같은 말씀으로 전한다.
사실 전에 말씀을 전한 이후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으므로 이번에 전할 때 뭔가 수정할 것이 있는지를 면밀히 살펴 보았지만, 몇 가지 예들을 업데이트한 것을 제외하고는 근본적으로 바꿀 것이 없었다. 말씀을 전하기 전에 이 점을 분명히 했고, 작년에 열심히 듣고 기억하고 있었던 그 형제가 역시나 똑 같은 것을 알고는 나에게 장난식으로 그렇게 말한 것이었다.

대부분의 말씀전하는 사람들이 그렇듯이, 나는 말씀을 전할 때,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진리가 무엇인지를 깊이 있게 고민한다. 그리고 내 생각과 내 지식과 경험이 그 진리를 왜곡시키지 않도록 기도하고, 또 주의한다. 사실 아무리 그렇게 노력한다고 하더라도, 내가 부족한 자이기 때문에 진리가 왜곡될 여지가 완전히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하나님께 구한다면, 큰 문제가 없이 진리를 전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설교를 계속할 수 있는 것이다.

진리의 속성은 변하지 않는 것이다. 내가 전하는 말씀이 진리라면, 그것은 몇 년이 지나도 바뀌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물론 그 진리를 적용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많은 변화가 있을 수 있겠지만, 메시지의 핵심은 늘 동일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진리가 기반을 두고 있는 말씀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1년이 지난 후에도 수정할 것을 찾지 못한 것이 어찌보면 나에게는 다행이라고 해야겠다.

이번 글로서 100번째 글을 쓰게 된다. 글을 쓰는 동기는 참으로 다양하다. 사실 이 블로그에서도 단 한 가지만의 이유로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내 안의 깊은 고민을 글로 씀으로써 정리해 나가기 위한 목적도 있고, 때로는 내 개인사의 중요한 기록으로 사용되기도 하며, 때로는 이 세상을 사는 잡담에 가까운 가벼운 이야기들을 남기기 위해 사용되기도 한다.
이 모든 목적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내 신앙의 동역자들에게 내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와 묵상을 나누기를 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허락하셔서 함께 주님의 일을 하다가 지금은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믿음의 동역자들, 그리고 지금 나와 함께 주님의 일을 도모하는 내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에게 내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들을 나눔으로써 그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적이다. 그 목적이 달성되고 있는지 나로서는 전혀 알 수 없다. 반응들이 없기 때문에... 하지만 그 소망을 가지고 시작한 글들이 그들에게 어떤 모양으로든 도움이 되기를 기도한다.

며칠 전에 이 블로그가 아니라 교회의 칼럼에 올린 내 글들을 읽어볼 기회가 있었다. 그 글들을 읽으면서 많은 은혜를 받고 감동을 받았다. 자신이 쓴 글에 자신이 감동하는 것을 보면, 웬지 푼수같다는 느낌, 자화자찬 하고 있다는 느낌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사실 내가 쓴 모든 글들이 나로 하여금 감동과 은혜를 주는 것은 아니다. 내 개인의 생각, 내가 알고 있는 지식에서 쏟아져 나오는 글들은 대부분의 경우 내 낯을 뜨겁게 한다. 세월이 이 만큼 지난 지금에 돌아 볼 때, 그 생각과 감정들이 얼마나 유치했는지, 그리고 그 지식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천박한 것이었는지 분명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런 글들을 보면 당장 지우고 싶은 마음이 앞선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 내 마음에 은혜와 감동을 주는 나의 글들은, 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주신 글들이다. 나는 글을 쓸 때, 내 안에서 글을 써야만 한다는 강력한 drive가 있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 내가 원하지 않는데, 마치 예레미야가 경험했던 것처럼, 그 글을 쓰지 않으면, 내 마음이 터져버릴 것 같고, 마음이 불붙는 것같은 것을 경험할 때가 있다. 내 안의 묵상과 생각들이 차고 넘치며 주님으로부터 주어진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 때가 있다. 그럴 때는 마치 누군가의 말을 받아 적듯이 그것들을 쏟아내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다고 내 글들이 성경 수준이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나는 그 글을 왜 써야 하는지 알지도 못하고 쏟아 내지만, 후에 알게 된다. 그 글이 나뿐만 아니라 내가 알고 있는 누군가를 위한 글이라는 것을...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나를 사용하시고, 나를 통하여 그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나에게 지금까지도 감동을 주고, 은혜를 끼치는 글들은 거의 대부분이 그런 글들이다. 내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닌, 내 안에 차고 넘쳐서 쏟아 낼 수 밖에 없는 묵상들... 그래서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글들... 그 글들이 지금까지 나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바로 진리에 기반을 두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나로서는 도저히 만들어 낼 수도 없고, 깨달을 수도 없는 진리이지만, 내 안에 계신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신 글들이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신앙 안에서 더 성숙해지고, 많은 지식이 더해진 지금 그 글을 쓴다 하더라도 더해지거나 덜해질 것이 별로 없는 그런 글들이 바로 진리에 기반한 글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그런 글들로 이 블로그를 가득 채우는 것이 내 소망이다.

그 글들로 인해서 내가 은혜받을 뿐만 아니라, 내 사랑하는 동역자들에게 그 은혜를 나누고, 또한 먼 미래에 다시 그 글을 읽을 내 자신에게 동일한 은혜를 끼치는 그런 글들을 주시기를 하나님께 기도한다.

쓴소리...

공자가어(孔子家語)의 육본편(六本篇)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良藥苦於口 忠言逆於耳(양약고어구 충언역어이)

그 뜻은 "좋은 약은 입에 쓰고, 충신의 말은 귀에 거슬린다"는 뜻이다. 좋은 약은 입에는 쓰지만 몸에는 좋고, 충신의 말은 귀에는 거슬리지만 그 말을 받아서 따르면 나라가 잘된다는 말이다.

이 말은 듣는 사람 입장에서 주는 교훈이다. 예나 지금이나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말은 듣기에 좋지 않다는 것이 진리인가보다. 들을 때 기분이 나쁘더라도 그 기분에 따라서 반응하지 말고, 그 말에서 진정으로 나에게 도움이 되는 진실이 있는지를 차분하게 생각해 보라는 성현의 충고이다. 사실 잘 알기는 하지만, 나만 보더라도 감정이 앞서는 가운데 어리석은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더 많다는 사실을 볼 때 따르기에 쉽지 않은 조언이다.

그런데 이 말은 또한 충고를 하는 입장에서도 곰곰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말이다. 누군가에게 쓴소리를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현대의 인간관계에서는 좀처럼 (비난이나 정죄가 아닌) 쓴소리를 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 그것은 그만큼 인간관계가 피상적이 되어버렸다는 것과, 인간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약화 되었음을 보여준다. 만약 내가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리고 그 대상이 자기 스스로에게 해가 되는 행동을 하는 것을 내가 본다면, 상대가 듣기 거북해 한다고 하더라도 쓴소리를 하는 것이 진정을 그 상대방을 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누군가에게 주는 "쓴소리"가 그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그로 하여금 힘들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약"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참 쉽지 않은 문제이다. 쓴소리는 그 단어 자체가 이미 상대방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것을 전제로하고 있기 때문에 모순처럼 들린다. 어떻게 해야할까?

사실, 나도 잘 모른다. 그 답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을까? 하지만, 나에게 원칙은 있다. 그것은 바로 내가 그 상대방이 잘되는 것을 진정으로 바라는 마음이 내 안에 있는지, 그리고 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지, 마지막으로 그 말을 하는 내가 충분히 겸손한지를 판단한 뒤에 그 모든 것이 'yes'라고 답이 될 때에만 사전에 충분한 기도와 준비 가운데 그 쓴소리를 하는 것이다.
상대방이 진정으로 잘 되는 것을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없다면, 내 입에서 나오는 쓴소리는 단순히 비방과 비난에 불과하다. 비방과 비난은 상대에 대한 감정적, 인격적 모독이며 공격일 뿐이다. 그 내용이 아무리 바르고 정당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상대로 하여금 깊은 상처를 줄 뿐, 그 사람에게 덕이 되게 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상대방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 인격 자체를 내 가슴에 품는 마음이 없다면, 다시 말해 상대에 대한 미워하는 감정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 쓴소리는 그저 돌을 던지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결국 그 사람에게 의미가 없거나 상처를 남길 뿐이다.
쓴소리를 하는 내가 충분히 겸손하지 않다면, 다시 말해서 상대방을 가르치려고 들거나, 내가 너보다 더 낫다는 식의 태도를 가지고 훈수를 두려고 한다면,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메시지가 전달되기 전에 마음을 닫게 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 내용이 아무리 좋은 내용이라 하더라도, 그 사람을 위해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진심으로 상대방을 위하고, 사랑한다면 쓴소리를 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내 입에서 나오는 모든 쓴소리가 반드시 그 사람을 위하고 사랑하는 것이 되지는 않는다. 쓴소리를 하는 사람은 반드시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

영적인 공동체에서 리더로 섬기면서, 쓴소리를 해야할 필요가 가끔씩 생긴다. 그럴 때면 나는 쓴소리를 해야하는지에 대한 갈등 가운데 기도한다. 하나님께서 내 입술을 주장해 달라고... 그리고 내 내면의 상태를 살피며, 진정으로 내가 쓴소리를 할 준비와 자격이 되어 있는지를 체크한다. 만약 하나라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쓴소리를 하는 것보다는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더 유익하다. 만약 모든 것이 준비가 되어 있다면, 반드시 "사전에 준비된 상태에서" 쓴소리를 한다. 그렇게 전달되는 쓴소리는 (듣는 사람의 상태에 따라 다르지만) 많은 경우 그 마음이 전달되기 때문에 영혼을 변화시키는데 쓰임을 받는다. 거기까지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이것이 적어도 아직까지는 "쓴소리"를 하는 것에 대한 나의 원칙이다.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90년대 중반, "부흥"으로 내 가슴을 뜨겁게 했던 고형원씨의 또 다른 찬양인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참으로 영성이 깊은 찬양 작곡가라는 느낌이 든다. 이 찬양을 부를 때마다, 하나님 나라를 향한 소망이 불타오르고, 이 땅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치열한 영적인 전쟁 가운데 내 모든 것을 바치겠다는 각오를 다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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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나는 이 길을 가리라
좁은 문 좁은 길 나의 십자가 지고
나의 가는 이 길 끝에서 나는 주님을 보리라
영광의 내 주님 나를 맞아 주시리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나는 일어나 달려가리라
주의 영광 온 땅 덮을 때 나는 일어나 노래하리
내 사모하는 주님 온 세상 구주시라
내 사모하는 주님 영광의 왕이시라...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나는 일어나 달려가리라
주의 영광 온 땅 덮을 때 나는 일어나 노래하리
내 사모하는 주님 온 세상 구주시라
내 사모하는 주님 영광의 왕이시라
내 사모하는 주님 온 세상 구주시라
내 사모하는 주님 영광의 왕이시라
내 사모하는 주님 온 세상 구주시라
내 사모하는 주님 영광의 왕이시라
내 사모하는 주님 온 세상 구주시라
내 사모하는 주님 영광의 왕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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有朋自遠方來

공자는 논어의 학이(學而)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
"친구가 있어 멀리서 찾아오면 그 아니 기쁜가?"

나와 함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도모하는 믿음의 동지들이 있는 것은 참으로 든든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나를 찾아와 같이 믿음의 도리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대화 가운데 서로의 믿음을 세워주며, 격려하는 가운데, 천국을 향해 같이 걸어가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있을까?
믿음에 대해서 공감하는 가운데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세상에서, 나에게 동역자를 주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마음에 기쁨이 넘친다.

십자가의 위치 에너지

지난 8일 오전 11시 인도네시아 남슬라웨시(South Sulawesi) 상공에서 엄청난 폭발음이 들렸다. 당시 폭발음은 1만 6천km 밖에서도 측정되었으며 하늘에는 흰색연기도 관측돼 지진이라고 생각한 주민들은 대피를 하는등 공황상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미 항공 우주국(NASA)은 그것이 ‘소행성 충돌’이었음을 공식 발표했다. NASA의 보고서에 의하면 이번 소행성은 지름 10m로 시속 4만 5천 마일로 지구 대기권과 충돌했다. 이번 소행성 충돌의 위력은 TNT 5만t의 폭발력과 상응하며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3배 정도 규모다. 그러나 이번 소행성은 다행히 그 크기가 작아서 공중 15km 내지 20km에서 폭발했다. 일부에서는 크기가 25m 가량만 되었어도 지구 표면과 충돌해 엄청난 인명피해를 줄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소행성이 이토록 엄청난 파괴력을 가지는 것은, 그 자체의 강도나 크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그 행성이 지구와 부딪히는 속도와 그것이 가지는 위치에너지 때문에 그런 파워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물리시간에 배운 공식에 의하면 위치에너지 P는 다음과 같이 표현될 수 있다: P=mgh (m: 질량, g: 중력상수, h: 높이) 즉, 공중에 떠 있는 한 물체가 가지는 위치에너지(충돌시의 파괴력)은 그 물체가 무거울수록, 그리고 높을수록 커진다는 것이다. 질량이 작더라도 높이가 높으면 큰 파괴력을 가질 수 있고, 높지 않더라도 질량이 크다면, 마찬가지로 힘이 커진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 존재했던 모든 것 중에서 가장 큰 위치에너지, 가장 큰 파괴력을 가졌던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자리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8)

여기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질량과 위로부터의 이동거리, 즉 높이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인간의 몸으로 오셨지만, 그분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본체" 즉 하나님이시다. 그 존재의 무게가 피조물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무거우신 분이시다. 이 온 우주는 그 말씀 한 마디에 사라지게도 하실 수 있고, 존재하게도 하실 수 있는 엄청난 분이시다. 그의 존재감, 예수의 존재의 무게는 무한대의 값을 가진다.

그분이 이동하셨던 거리는 "하나님과 동등됨" 즉 하늘 보좌에서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신" 그 자리까지 낮아지셨을 뿐 아니라, 인간들 가운데서도 가장 낮고 천한 저주받은 자리인 "십자가에 죽으시는" 자리, 철저히 자신을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신 그 자리까지 내려 오셨다. 그 거리 또한 무한대이다.

하늘 보좌에 앉으신 성자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자리까지 내려 오셨을 때, 그 위치 에너지, 즉 그 파괴력은 얼마였을까? 그 값은 무한대이다. 엄청난 파괴력이다. 그 파괴력은 태초에 최초의 인간인 아담의 범죄로 인해서 세상 그 어느 것도 끊을 수 없는 죄의 강력한 사슬에 매여 종노릇하던 인간들, 역사상 가장 강력한 파괴력으로도 끄떡도 하지 않았던 인간의 죄의 견고한 성벽을 단번에 무너뜨릴 수 있을 만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고후 10:4)이 되시는 것이다.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9)

십자가의 자리는 그렇게 엄청난 파괴력으로 죄악된 내 자신을 무너뜨리는 자리이다. 그 앞에 선 인간은 그 어느 누구든지 그 앞에 무릎꿇을 수 밖에 없으며, 하나님의 엄청난 힘(사랑) 앞에 압도 당한다. 그분의 능력으로 죄의 종노릇 하던 그 마귀의 결박이 끊어지고, 죄악된 자아가 무너진 그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리잡게 된다. 그 엄청난 파괴력을 경험한 자만이 죄악의 자리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거룩을 향한 열망을 가지는 삶을 살 수가 있다.

그것이 믿음의 역사다. 믿는 사람은 그 어느 누구든지 부인할 수 없는, 그리고 믿는 자들은 반드시 경험하는 성령의 건설적 파괴의 체험이다. 그것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경험하는 고통스럽지만 감격스러운 구원의 체험인 것이다. 지름 10m의 작은 소행성의 폭발만으로도 1만 6천km 밖에서도 그 소리를 분명히 들을 수 있었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파괴적 위치 에너지를 경험한 자는 자신 뿐만 아니라 그 주변, 그리고 그를 희미하게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까지 느껴질 만큼의 분명한 변화를 나타내 보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믿음의 경험이다.

보물13

(2006.01.05에 쓴 글)

나영이와 지인이는 하연이의 가장 친한 친구이다. 나영이는 Pre-K 때 같은 반이었고, 지인이는 지금 같은 반이다. 그 애들은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 이웃이다.
하연이는 학교갔다 오면 동네 아이들과 노는 것을 좋아한다. 그 그룹에는 거의 항상 나영이와 지인이가 함께한다.
어제도 마찬가지였다. 학교에 갔다온 하연이는 나영, 지인이와 함께 밖에 나가서 신나게 놀았다. 약간 어두워 질 때까지.. 집에 있던 나는 하연이가 너무 늦게 오는 것같아서 하연이를 찾아 나섰다. 놀이터에도 가보고 아파트의 여기저기를 다녀도 찾지 못하자 다시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가는 도중에 하연이를 발견했다. 하연이는 애들과 노는 것을 마치고 집으로 갔는데, 집에 아무도 없어서 (마침 아내와 예연이는 장보러 나가고 없었다..) 울먹거리면서 다시 친구네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울먹거리는 하연이를 보면서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아빠가 업어줄까?"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애들은 아빠가 업어주는 것을 정말 좋아한다.) 하연이를 업고 바깥을 잠시 걸었다. 하늘에는 초생달이 떠 있었고, 밝은 별 하나를 볼 수 있었다. 하연이와 함께 달을 보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는 사이에 하연이의 기분이 많이 좋아졌다.

한참 후...

하연이가 잠을 자기 위해 잠자리에 누웠다. 하연이를 재우기 위해 하연이 옆에 내가 누웠다.

"하연이 오늘 재미 있었어?'
"예.. 근데.."
"근데?"
"나영이랑 지인이가 오늘 아침에 스쿨버스에서 나를 놀렸어요..."
"뭐?"

이야기인즉슨 가장 친한 친구인 두 아이들이 하연이의 어떤 점을 못마땅해 하면서 둘이서 낄낄거리면서 하연이에게 듣기 싫은 소리를 한 모양이다.

"그래서 울었어요.."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울었어?"
"예.. 그랬더니 지인이는 미안하다고 했는데, 나영이는 계속 계속 웃으면서 미안하다고 안했어요.."
"그래?"
"나영이랑 지인이가 미워요.."
"그래? 용서해주면 좋겠는데.."
"싫어요.. 지인이는 하연이에게 안좋은 말을 자주해요.. 나랑 안논다고 하고 나 빼고 나영이하고만 놀 때도 있었어요.. 지인이가 미워요.."

어린 아이들 사이에서 주고 받는 상처가 있고, 인간관계의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마음 아파하는 하연이를 대하면서 정말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다. 뭐라고 해줘야 하나...

"하연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정말 사랑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좋아하셔...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비웃고, 하나님과 놀기 싫어하고 하나님을 무시하지... 하나님이 얼마나 가슴이 아프실지 알겠어?"
"예.. 알겠어요.."
"그것을 죄라고 하는거야..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 우리가 잘못 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벌하실 수 있지..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어... 예수님을 보내주셨고, 우리가 하나님에게 야단 맞아야할 걸 예수님이 대신 야단 맞으셨지.."
"예.. 그래요.."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벌하시지 않으시고 예수님을 벌하신거야..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에게 용서를 받게 되었지..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무시하고 잘못했는데도 우리를 용서해 주셨어.. 감사하지?"
"예.. 정말 감사해요.."
"하나님이 우리가 잘못해도 용서하신 것처럼 하연이도 하연이 친구들이 잘못한 것을 용서할 수 있을까?"
"못해요.. 못하겠어요.."
"용서는 정말 힘들지? 그런데 다른 사람들에게 받은 상처 때문에 남을 미워하면 미워하는 사람이 더 힘들어져..."
"왜요?"
"그것은 미워하는 마음이 미워하는 사람을 더 상하게 하기 때문이지.."
"그래요?"
"그럼... 하연이는 어때? 친구들을 용서할 수 있어? "
"모르겠어요.."
"그럼 용서하는 마음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자.."

하연이와 함께 기도했다. 친구들이 하연이를 놀리지 않도록.. 그리고 하연이가 친구들을 용서할 수 있도록..
기도가 끝나고 같이 누워 있었다.

"I love you, dad."
"I love you, too."
"Thank you..."

짧은 대화를 끝으로 하연이는 꿈나라로 향했다.
하나님께서 하연이의 삶 가운데 함께하셔서 그가 앞으로 받을 수 많은 상처에도 불구하고 밝고 맑고 아름다운 마음을 유지해 나가길 기도한다.

[펌] 사실상 최고의 사악함

다음은 찰스 피니의 말이다.

"그 어떤 것도 이기적인 것은 신앙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에게 어떠한 욕망이 있든지, 그리고 그들이 어떠한 선택과 행동을 취하든지 결국에 있어서 그 바탕에 있는 동기가 이기적이라면, 그것은 영적으로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동기가 불순하면, 기도를 하거나 성경을 읽거나 모임에 출석하면서도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고자 하는 목적만으로 기도한다고 합시다. 그것이 신앙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자기의 전능한 종으로 삼고자 하는 시도가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큰 투자를 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 사람은 우주와 하나님과 모든 것을 자기를 행복하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극히 악한 행위입니다. 이것은 경건과는 정반대되는 것이며, 사실상 최고의 사악함입니다."

예레미야 24장 1절-10절 묵상

오늘 아침 예레미야서를 묵상했다. 24장 1절부터 10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두 광주리에 담긴 무화과를 보여 주신다. 한 광주리에는 지극히 좋은 무화과가 담겨 있었고, 다른 하나에는 좋지 못한 무화과가 담겨 있었다. 예레미야서 전체를 통해서 반복적으로 말씀하시듯이 이번에도 한 쪽은 포로로 잡혀간 유다인들을 다른 한쪽은 유다에 남아 있거나 이집트로 망명한 유다인들에 대한 비유의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유다 백성을 좋은 무화과로, 다른 부류를 악한 무화과로 평가하신다. 과연 그 평가는 맞는 것인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자들... 그들은 바벨론으로 곱게 모셔져간 자들이 아니다. 유다를 침공한 강력한 군대인 바벨론 군대에 의해서 비참하게 끌려간 자들이었다. 그들은 그들의 민족과 고향으로부터 분리되었고, 전쟁포로로서 쇠사슬에 매인 상태에서 온갖 고초를 겪으며 유다로부터 바벨론까지 그 먼거리를 걸어서 끌려간 자들이었다. 바벨론에서의 삶도 만만치 않은 삶이었다. 그것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시편 137편은 바벨론 포로의 생활이 어땠는지를 약간 보여 준다.

시 137:1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시 137:2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시 137:3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케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바벨론 강가에서 유다 포로들은 강제 노역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을 감시하는 자("우리를 사로잡은 자")들은 그들을 조롱했으며, 고단한 가운데 있는 그들에게 유대 전통 노래를 한 곡조 들려 달라고 요청했다. 그들을 위해 노래하는 가운데, 그들은 고국을 떠난 자신들의 처량한 신세를 한탄하게 되고, 사무치는 고향생각에 가슴이 아팠을 것이다.

반면, 유대에 남아 있는 자들은 아직 조국 회복의 소망, 전에 앗수르를 물리쳤던 것과 같은 극적인 생존을 희망하며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당시 정통 강대국인 애굽의 도움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로 항복하지 않겠다고 각오하는 가운데 결사 항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희망이 있었고, 땅과 동포가 있었다. 그들이 의지할 애굽도 있었고, 그 애굽도 자신들을 돕기로 약속한 상태에 있었다.

세상적으로 볼 때, 바벨론 포로들은 고난과 고통 가운데 있었고, 자신들의 처지가 결코 선해 보이지 않았고,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왜 그런 고난을 허락하시는지 원망하며 따지고 들 수 있는 여지가 많은 사람들이었다. 반면 유다 땅에 남아 있는 자들은 비록 자신들도 힘든 처지에 있기는 했지만, 포로로 끌려간 불쌍한 동포들에 비하면 훨씬 더 나은 처지에 있었다. 그들이 하나님께 바라는 것은 지금 있는 그 상태로 독립을 유지하며 오랫 동안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평가는 분명히 달랐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자들이 "극히 좋은 무화과"였고, 유다에 남아 있는 자들은 "악하여 먹을 수 없는 극히 악한 무화과"였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시는 선과 악의 기준과 우리 인간의 기준이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 주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알고 있는 우리로서는, 다시 말해 하나님과 같은 전지적 시점을 가지고 있는 우리로서는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평가하셨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결국 하나님의 뜻에 자의든 타의든 순종하고 따르는 자들이었던 바벨론 포로들은 생명을 유지하였고, 그들 중 일부는 70년이 지난 뒤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과 성벽을 재건하는 일을 하였고, 이후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그들에 의해서 명맥이 유지되었다. 반면 유다에 남아 있던 자들은 거의 대부분이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였고, 최후의 잔당은 애굽으로 망명한 뒤, 애굽이 바벨론에 의해 처절하게 유린당할 때 같이 죽임을 당하였다. 그것을 볼 때 하나님의 평가가 나름대로 이해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전지적 시점을 가지고 있지 않은 당시의 무리들은 예레미야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 그 평가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평가였을 것이다.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 나를 포함한 거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 하나님을 믿는 그들의 입에서, 고백되는 것을 보면서 우리 안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의 판단 기준을 하나님께 두지 않고 나에게 두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내 가족 중에 큰 병이 걸린 사람은 낫게 해 주시는 것이 좋은 것이고, 내가 기본적으로 생존에 필요한 물질은 공급해 주셔야 좋은 것이고, 내가 간절히 바라는 것은 이루어 주셔야 좋은 것이다. 나에게 불행한 일이 생기는 것은 좋지 않은 것이고, 내가 곤경에 처하는 것도 좋지 않은 것이다. 내가 소중히 여기는 것을 빼앗기는 것도 좋지 않은 것이다. 이처럼 내가 생각하기에 좋은 것과 좋지 않은 것에 대한 판단을 하나님의 평가보다 더 위에 둔다. 그런 상태에서 내가 보기에 좋은 것을 주지 않으시는 하나님, 내가 보기에 좋지 않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을 쉽게 원망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한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무너져간다.

유대민족의 예에서 보듯이 하나님께 대해 원망하는 마음이 나오는 그 때는 바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할 때가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좋은 것과 좋지 않은 것에 대한 판단기준을 의심해야할 때이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다고 하시는 무화과가 그리 좋지 않게 보이고, 하나님께서 좋지 않다고 평가하시는 무화과가 좋아 보일 때, 그 때가 바로 내가 잘못 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싸인이다.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선하시다. 따라서 내 삶에 주시는 하나님의 모든 것은 좋은 것이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기에 아무리 좋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그것은 좋은 것이다. 그것이 왜 좋은 것인지는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 혹은 내가 하나님 앞에 가서 하나님과 대화를 충분히 나눈 후에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결국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 당신에 대한 신뢰이다. 믿음이다.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굳건한 신뢰가 있는 사람은 설사 욥이 당하는 극한의 어려움을 당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부정하거나 의심하지 않는다. 자신의 판단이라는 우상을 내려 놓고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섬기는 자는 진실로 복되다.

아빠 이거 알아요?

(2005.12.30에 쓴 글)

늘 그렇듯이 아침에 늦게 일어났다..
눈을 부비면서 허겁지겁 아침을 먹고 있었다. 급한 대로 혼자 밥을 먹은 것이다...
하연이가 뭘 들고 와서 열심히 적고 있었다. 밥을 먹으면서 뭔가 하는 호기심에 들여다 봤더니 영어로 단어를 적는 작은 책이었다. 그 책에서 하연이가 적어야 할 내용은 각 동물들의 새끼 이름을 적는 것이었다.

하연이가 물었다.

"아빠! 아기 sheep은 뭐라고 불러요?"
(자신있게...) "그건 Lamb이지.. L-A-M-B!"

하연이는 불러주는 철자를 열심히 받아 적는다... 그리고 나서 묻는다.

"아빠! 아기 cow는 뭐라고 불러요?"
(역시 자신있게...)"그건 Calf라고 불러.. C-A-L-F!"

'아빠는 역시 대단해...'라고 생각하는 듯 이번에도 열심히 받아 적는다... 그리고 나서 묻는다.

"아빠! 아기 horse는 뭐라고 불러요?"
"......"
"예? 뭐라고 불러요~~~?"
"갑자기 생각이 안나는데..."

그 때 애 엄마가 하연이가 학교에서 선생님과 함께 공부한 다른 교재를 들고 와서 보여준다. 하연이 왈..

"Foal이었지! F-O-A-L..."

일단 자존심이 구겨졌다.. 다음 번 것은 잘 하리라... 하연이가 또 묻는다..

"아기 Duck는 뭐예요?"
"응~~~ Duckling이지... D-U-C-K-L-I-N-G!"

여기서 자존심을 약간 회복... 이 여세로 몰고 가기로 작정..

"아빠! 아기 pig는 뭐예요?"

약간 멈칫... 생각.. 그리고 나서..

"Piglet이야.. P-I-G-L-E-T-T-E!"

말해 놓고 뭔가 좀 이상하다.. 그래서 밥먹다 말고 영어 사전을 찾았다.. 흐이구... 철자가 틀렸다..

"하연아! 아빠가 틀렸네... 맨 끝에 있는 T-E를 빼야겠다... 그리고 piggy도 같은 뜻이네..."

이제는 밥을 다 먹고 일하러 갈 생각도 않고 하연이가 들여다 보는 책을 같이 봤다. '한꺼번에 처리해 버리지 뭐..'하는 생각을 가지고... 그런데... 거기 나온 그림들을 보내 기가 팍 죽었다... 토끼, 염소, 칠면조 등등...
'새끼 토끼를 영어로 뭐라더라? 새끼 칠면조는?' 혼자 아무리 생각해도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아빠는 영어를 잘한다고 항상 생각해온 하연이 앞에서 끝내 버벅대면서 "아빠도 모르겠다... 나중에 사전 찾아서 알려줄께!"하고 항복을 선언하고 서둘러서 일하러 나갔다.

학교 다닐 때 학교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영어에 대해서는 자신만만했고, 지금까지 원어민을 제외하고는 영어로 누구에게 주눅들어본 적이 없는 나였지만, 하연이가 보는 작은 책 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이제 하연이에게서 영어를 배울 날이 그리 멀지 않았나보다...

나는 철저히 현실주의자가 되고 싶다

어렸을 때부터 주위 사람들로부터 자주 들어온 나에 대한 말은 "융통성이 없다"와 "현실을 잘 모른다"는 말이다. 세상적으로 볼 때, 그 평가는 정확히 맞다. 나는 원칙을 중시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원칙에서 벗어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융통성이 적은 사람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는다. 내 소망은 내가 철저하게 융통성이 없는 사람으로 평생을 남는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사회에서 '융통성'이란 너무나 많은 경우 정도를 벗어나는 것에 적용되기 때문이다. 뇌물을 받고 정직하지 못하게 일을 처리해 주는 것도 융통성이고, 법과 규칙에 어긋나는 일을 하는 것도 융통성에 포함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아는 사람이라고 적당히 잘 봐주는 것도 융통성에 해당한다.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일은 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지극히 융통성이 없는, 법과 질서를 지키고,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지 않는 삶을 살기를 소망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연한 것이다.

마찬가지의 맥락에서 현실주의도 생각할 수 있다. 세상에서 말하는 현실주의란 눈앞에 보이는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을 일컫는 말이 아니라, 그 현실을 전부로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내가 보고, 듣고, 느끼고, 판단하는 것이 전부인 세계관이 바로 현실주의이다. 예를 들어 현실주의적으로 볼 때, 내가 청년부를 섬기면서 상당히 많은 시간을 쓰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나는 미국에 박사학위를 위해서 왔고, 박사학위를 받기 위해서는 내가 가진 모든 시간을 쏟아 부어도 8년 정도 걸려야 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다른 곳에 시간을 쓸 겨를이 없는 것이다. 어찌보면,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보내는 그 많은 시간은 사치이고, 이상주의자의 허영에 불과하다. 경제적인 부분을 봐도 그렇다.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앞으로 한 학기, 혹은 일 년을 생활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돈이 분명히 있고, 그것을 벌어야만 생활할 수 있기 때문에,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돈을 벌 궁리를 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생활할 수 없는 것... 그것이 현실주의자의 생각이다. 따라서 내 유학 생활은 반드시 공부와 돈벌이에 내가 가진 모든 시간이 투자되어야 한다. 그래도 그 현실을 감당하기 버겁다.

내 삶은 그 현실주의적인 판단과 거리가 멀다. 엄청나게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공부 외의 것, 돈버는 것 외의 것에 사용되고 있다. 유학생으로서 불필요한 사치에 시간을 쏟고 있는 것이다. 수 많은 사람들이 나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현실이란 무엇인가? 내가 내 눈으로보고 내 경험과 지식으로 판단하는 그 세계만이 현실인가? 그렇지 않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이다. 하지만 나의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위에서 정의한 현실주의의 시각에서 볼 때는 그리스도는 모든 판단에서 제외된다. 그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나의 주인이시다. 그런데 그 분, 그 살아계시는 분이 모든 판단에서 제외된다면, 그것은 진정한 현실주의가 아니다. 그것이야말로 비현실적인 관점인 것이다.

진정한 현실주의는 진리에 기반을 두는 인식론이다. 진리는 눈에 보이는 것만이 진리가 아니다. 오히려 진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데 기반을 둔다.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셨듯이 예수님이 진리되신다. 내 삶의 인식이 그 예수님에 기반을 두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현실적이냐 비현실적이냐를 가른다. 나는 내 눈에 보이는 것들과, 내 경험에 의해 이루어지는 현실 인식을 현실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주변의 것들이다.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그분의 뜻이 있다. 그분께서 내 삶에 원하시는 그 뜻을 내 실제 삶의 중심에 두고 그것에 기반해서 현실을 인식해 나갈 때, 그것은 진리에 기반을 둔 현실 인식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현실주의자의 삶이다. 따라서 현실주의는 물리적인 세계 뿐만 아니라 영적인 세계까지도 아우르는 폭넓은 현실 인식이다.

내 주인이신 그분께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지극히 현실주의적인 관점에서 볼 때, 내가 무엇에 중점을 두고 내 삶을 꾸려 나가야 할 것인지 분명해진다. 내가 비록 가난한 유학생이지만, 비록 내 능력에 넘치는 공부량과 해야할 일들에 허덕이는 자이지만, 그것에 매여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내 삶을 드리는 것이 지극히 현실적인 삶인 이유가 그것이다. 그것은 이상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마지막이 있고, 그 마지막 날에 내 주인이신 그분 앞에서 내 인생을 계수하는 그날이 있음을 인지하고 사는 사람에게는 지극히 현실적인, 치밀한 계산 끝에 나오는 결론인 것이다.

나는 이 세상 그 어느 누구보다도 현실주의자의 삶을 살고 싶다.

아빠의 역할

지난 두 주는 하연이와 예연이가 차례대로 아파서 학교에 못가고 집에 누워 있었다. 열때문에 벌개진 얼굴로 누워 있는 것을 보면, 아빠로서 마음이 참으로 안타깝고 마음이 무거워진다. 그럴 때면 나는 바로 아빠로서의 장난을 시작한다. 표정으로, 혹은 말로 광대 노릇을 하는 것이다. 아이들은 한참 정신 없이 누워서 힘들어 하다가 아빠의 장난이 시작된 것을 보면서 그 벌건 얼굴로 웃음을 그치지 못한다. 나는 아이들이 웃는 모습을 보는 것이 즐겁다. 더우기 아파 힘들어 할 때에는...

집 밖에서는 사실 유머 감각도 없고, 늘 진지하기만 한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집에서, 특히 아이들에게 나는 많은 경우 코미디언이고 장난꾸러기다. 그런 나를 아이들이 좋아한다. 나는 그것이 좋다.

어렸을 때 감명 깊게 읽었던 탈무드라는 책에 아버지의 역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아버지는 엄하지만 무섭지 않은 존재여야 한다." 가정에서 엄마의 역할은 인자와 사랑을 공급하는 역할이어야 하고, 아빠의 역할은 엄마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라는 것이다. 어릴 때는 이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어떻게 엄한 아버지가 무섭지 않을 수 있을까? 무섭지 않으면 어떻게 엄한 아빠가 될 수 있을까?

내 아버지는 무서운 분이셨다. 엄하셨는지는 그렇지 않으셨는지는 잘 모르지만, 무서운 분이셨다. 우리 네 형제가 되도록이면 피하고 도망가기를 원했던 존재, 부담스러운 존재가 아버지셨다. 그래서 나는 무서운 아버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만, 그렇지 않고 무섭지 않은 아버지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하지만 아빠가 된 지금, 그 말뜻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엄하다"는 것은 아이들의 잘못과 죄에 대한 것이다. 그것을 용인하지 않는 것이고, 눈물을 흘리게 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을 따끔하게 질책하여 바로 잡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엄한" 아버지가 맡아야 할 역할이다. "무서운" 아버지가 되지 않는 것은 그들이 평소의 상태에 있을 때 언제든지 접근 가능하고 친숙하게 느끼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잘못해서 야단을 쳐야 하는 때에도 아이들과 아이들의 죄/잘못을 분명히 구분할 줄 알아서 그 아이들의 인격에 상처를 주지 않는 그런 아빠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해서는 안된다는 격언이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다.

코미디언, 장난꾸러기 아빠가 갑자기 엄해 지는 것을 보는 아이들은 때로는 많이 혼란스러워 하기도 한다. 하지만 아빠가 엄해지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인식하게 도와 준다면, 아이들은 아빠의 자신들에 대한 사랑을 의심하지 않는다. 아빠가 자기 자신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잘못을 싫어 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인정하게 될 때, 아이는 그 잘못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가 강해진다. 아빠와 함께 그 죄/잘못을 싫어하는 아이가 되는 것이다.

내 자신이 부족한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아빠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는 것을 결코 쉽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내가 신앙 안에서 성숙해 갈수록 아빠의 역할도 점차 잘 감당해 나갈 수 있는 것을 경험한다. 결국 아빠 역할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라도 주님 안에서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어야 한다.

하연이와 예연이의 아빠로서의 나... 아이들을 대하면서 "엄하지만 무섭지 않은 아빠"라는 탈무드의 지혜가 항상 내 가슴을 울린다.

아... 자본주의여...(2)

(... 앞에 이어서 계속)

그가 링에 공을 밀어 넣는 기술을 가지고 6천만불을 벌게 된 이면에는 자본주의의 논리가 작용하고 있다. 이론적으로 수요가 있고 공급이 있으면 거기에는 시장이 형성된다. 그리고 그 시장의 수요량과 공급량의 상관관계가 "보이지 않는 손"의 역할을 하면서 시장에서 거래되는 재화의 가격을 결정한다. 그 가격이 "가치"를 반영하는 것이다. 시장에서 희소성이 있으면 가치는 높아질 수 밖에 없고, 희소성이 없으면 가치는 낮아지게 되는 것이다. 또한 아무리 희소한 것이라도 찾는 사람이 없으면 가격은 높아질 수 없다.

언뜻 보기에 매우 공정해 보이고, 객관적으로 한 물품이나 서비스의 가치를 잘 반영할 것 같은 시장 메커니즘은 사실 반드시 우리가 생각한 것처럼 돌아가지 않는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미국의 시장을 지배했던 거대 자본을 통한 독과점의 문제도 있지만, 그것보다 더 근본적으로 수요의 창출을 조작 혹은 그 수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침으로써 시장이 공정하지 못하게(?) 만들 수 있는 여지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농구의 예를 든다면, 앞에서 말했듯이, 농구는 하나의 공을 동그란 링 안에 넣는 게임이다. 그것이 게임이기 때문에 자체의 룰이 있고, 그 룰을 어기지 않는다면, 그 링 안에 공이 들어갈 때 점수를 얻는 것이 농구의 가장 기초적인 fact이다. 그렇다면 링 안에 공이 들어가는 것의 가치는 얼마인가? 다른 말로 표현하면, 링 안에 공을 넣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가진 그 능력의 가치는 얼마인가? 그리고 그것의 가치는 어떻게 정해지는가? 누가 정하는가? 누가 그 능력을 소비하는가? 이 모든 질문들에 대한 답은 간단하지 않다.
마이클 조던이 공을 링에 집어 넣을 수 있는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그는 3천만불의 연봉을 받았다. 그의 능력은 1년간 시카고 불스라는 구단에 rent가 된 것이고, 그 구단은 그것을 위해 그 많은 액수를 지불한다. 그 구단이 그 액수를 지불할 수 있는 것은 그것보다 훨씬 더 막대한 이익을 그 능력으로부터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이익은 어디서 오는가? 그것은 관중 수입, 광고수입, 방송료, 구단관계 물품들(유니폼, 모자 등등)의 판매 등에서 그것이 나온다. 계산은 간단하다. 스타 플레이어가 있고, 승률이 높고, 박진감 있는 경기가 있으면 그 모든 수입은 올라가게 마련이다. 마이클 조던은 이를 위해 딱 맞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 어마어마한 액수를 주고서라도 그 능력을 rent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런데 농구를 매우 잘하는 마이클 조던이라는 사람과 그의 능력이 구단에서 원하는 수입과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농구를 탁월하게 잘하는 능력을 소유한 것과 막대한 돈을 버는 것에는 직접적인 상관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수 많은 것들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마케팅이 그 하나이고, PR을 통한 이미지 관리도 그 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을 통해 이루어 지는 것은 일종의 "신화화"이다. 다시 말하면, 마이클 조던에 대한 (반드시 fiction만은 아니지만..) 신화적 이야기들을 생산해 내는 것이다. 신화화는 "영웅화"와 일맥 상통한다. 마이클 조던이 단순히 공을 던져서 링 안에 그 공을 집어 넣을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한 한 인간이 아니라 위대한 전투를 승리로 이끈, 예를 들어 이순신 장군 같은, 영웅, 신비적 존재, 신화적 존재로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단순히 한 게임에 불과한 농구는 이제 피튀기는 "전투"가 되고, 거기에서 일어난 동작들에 의미가 더해지기 시작하며(스포츠 해설) 뒷얘기들이 생성되어가고, 그것을 통해서 위대한 인물, 위대한 영웅 "마이클 조던"이 탄생한다. 옛날에는 위대한 장수들에게 갔던 존경과 찬사가, 전쟁이 사라지고, 컴퓨터 게임화되고, 일상에서부터는 멀어져버린 일부 선진 자본국가에서는 일종의 "싸움"인 스포츠와 스포츠 스타에게 돌아간다. 스포츠를 설명하고 기술할 때 쓰이는 많은 용어들이 전쟁 용어임을 기억한다면, 그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한 인물이 영웅화 되어가고, 거기에 의미들이 더 덧붙여지고, 그것에 의해서 수요는 조작되어간다. 그런 작업을 조직적으로 전개해 나가는 것은 바로 거대자본이다. 거대자본은 그 자본들을 통해 manipulation작업에 들어가고, 그 수요를 조작하는 작업은 "항상" 자신의 몸집을 더 크게 불리는 방향으로 전개되어 간다. 물론 모든 소비주체들이 아무런 생각이나 저항 없이 그 조작에 넘어가지는 않지만, 그들의 소비 패턴에 상당히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거대 자본의 "조작"이 항상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런 조작들을 통해서 판이 커지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통해서 먹고 살게 되기 때문이다. 농구라는 게임이 신화화 되고, 마이클 조던이 수퍼스타로 부상함에 따라서 소비가 증가하게 되고, 그 판에 뛰어든 모든 기업이나 개인들은 그것을 통해서 생활응 영위한다.

하지만 내가 가장 크게 문제제기를 하는 것은 (그리고 바로 이런 재미없는 글을 쓰게 된 것은) 그 가치가 정말로 정당한 가치인가이다. 마이클 조던이 공을 링에 넣는 기술을 가진 것이 6천만불의 가치를 가지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어떤 논리에서(자본주의적 시장 논리) 본다면 분명히 그렇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논리가 항상 옳은지, 그리고 항상 최선인지를 묻는다면, 내 개인적으로는 아니라고 대답하고 싶다.

아침 일찍 사람들이 드문 거리를 청소하고 있는 청소부의 일을 생각해 보자. 그의 청소하는 노동과 마이클 조던이 링에 공을 넣는 "노동"을 비교했을 때, 어느 것이 더 가치가 있는가? 밤새 지저분해진 그 거리를 깨끗하고 단정하게 정리하기 위해서 흘리는 한 청소부의 땀방울과 농구대에 공을 밀어 넣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흘리는 마이클 조던의 땀방울의 가치가 얼마나 차이가 날까? 청소부가 시간당 10불씩 받고 일주일에 40시간씩 일한다고 했을 때 버는 돈은 일년에 2만불 정도... 그렇다면 그들의 가치가 3천배의 차이가 난다고 할 수 있을까? 자본주의의 논리를 떠나서, 아침을 깨끗하게 여는 청소부의 노동이 사회에 기여하는 것과 농구 공을 동그란 rim에 집어 넣은 마이클 조던의 노동이 사회에 기여하는 것이 3천배의 차이가 난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결코 그렇다라고 대답할 수 없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분명 청소부의 노동이 사회에 더 큰 공헌을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그렇다면 둘 사이의 가치를 3배, 30십배 혹은 300배가 아닌 3천배의 차이를 가져오게 하는 자본주의는 과연 올바른 것인가? 제로섬 게임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유한한 자원을 가진 이 지구에서 소수가 그렇게 과도하게 자원을 독식하는 것을 허용하는 자본주의... 그것이 과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이 세상의 모습일까? 그것이 정당한 것일까? 다른 대안은 없는 것일까?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보상을 받지만, 뛰어나지 않더라도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누구나 어느 정도 걱정없이 살만 한 그런 시스템은 없을까? 능력 없는 사람들도 비참한 삶을 살지 않아도 되는 그런 세상은 불가능한 것일까?

그것이 내가 평생 고민하는 것이다. 앞으로도 죽을 때까지 고민만 하지 않을까?

(참고로 여기서 분명히 밝혀 두지만, 나는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이상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 둘은 낭만주의의 소산이며, 그 시스템들은 근본적으로 실패하게 되어 있는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것들이다. 왜냐하면 그 두 시스템의 기본 가정이 "인간은 선하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다. 인간은 악하고 이기적인 존재들이다. 낭만적인 이상주의로 접근했을 때 자본주의보다 더 처절하게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제도들이다.)

아... 자본주의여...(1)

예전에 마이클 조던을 무척 좋아 했었다. 그의 농구 실력은 가히 그 어느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예술이었고, 그의 사람됨에서 풍겨나오는 카리스마가 매력적이었다. NBA의 최고 전성시대를 이끌었던 정말 보기 드문 스타였다.
내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한창 때 그가 받았던 연봉은 3천만불 정도 되었던 것 같다. 광고나 기타 수익까지 합치면 1년에 6천만불을 벌어 들였다는 이야기도 기억난다. 만불이나 십만불 정도면 그 돈이 얼마나 큰지 감이 잡히는데, 백만불 이상을 넘어가면, 그건 "엄청나게 많다" 혹은 "매우 크다" 정도의 느낌을 주는 숫자로만 인식되기 때문에 잘 감이 안 온다. 6천만불이면 나처럼 가난한 유학생의 (마이클 조던이 활약했던 당시로 볼 때) 일년 생활비인 (많게 잡아서) 2만불의 3천배 정도 된다는 것, 다시 말하면 지금처럼 생활한다면 3천년을 살아갈 수 있는 액수라고 환산을 하고난 뒤에야 그 크기가 얼마나 되는지를 조금은 깨닫게 되는 정도다. 상상을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액수를 단 일년에 벌어들이는 놀라운 능력의 사람... 그가 마이클 조던이다.

시카고 불스가 우승을 하느냐 아니면 2등에 머무느냐는 절대절명의 순간. 점수는 엎치락 뒤치락 몇 초 남은 순간까지 그 결과를 알 수 없다. 모두들 긴장하고 있는 그 때, 가장 확실하게 점수를 내서 끝을 맺을 한 사람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그 순간.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조던에게 기대를 걸고, 그가 농구공을 농구대의 링 가운데로 통과시키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를 지켜보고 있다. 그 중압감 속에서 경기는 다시 시작하고, 몇 초 남지 않은 순간, 팀은 최선을 다해서 슛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든다. 작전과 노력 끝에 기회는 왔고, 바로 그 때 공은 조던의 손을 떠나 링으로 향한다. 마치 슬로 모션으로 보는 것과 같은 클라이맥스의 순간, 공은 링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불스는 NBA 챔피언으로 등극한다. 시카고는 축제의 분위기가 되고, 미국 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이 경기를 지켜보던 수많은 사람들은 조던의 기술과 과감함에 찬사를 보내며 그를 칭송한다.

이것이 바로 조던으로 하여금 1년 동안 6천만불을 벌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다. 그에게는 아무에게나 찾을 수 없는 재능이 있다. 그것은 농구 공을 링에 꽂아 넣어서 통과 시킬 가능성이 그 누구보다도 높게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그가 속한 팀이 공 넣기 작업을 가장 잘 할 수 있도록 하는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드라마 같은 이 한편의 장면 뒤에는 자본주의와 그의 핵심인 시장경쟁의 논리가 그대로 깔려 있다. 마이클 조던은 농구라고 하는 스포츠의 시장에서 희소성을 가진 능력과 인격의 소유자이다. 그에 대한 수요는 너무 많고, 그와 같은 능력을 가진 자는 극히 드물다(아니 그 혼자일 뿐이다). 수요와 공급의 원칙에 의해서 그의 "값"은 일반인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높게 책정이 되고, 그 높은 몸값에도 불구하고, 그를 고용하는 자가 생겨난다. 그는 공정한 경쟁에서 승리한 승자이다. 그는 희소한 재능을 타고났고, 그 재능이 최대한으로 발휘되게 하기 위해서 부단한 노력을 한 자였고, 노력과 재능이 최대한으로 꽃 핀 결과로 모든 경쟁에서 최고의 승자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승자에게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해 주는 것이 마땅하며 그 대우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6천만불이라고 하는 어마어마한 연봉이었다.

지금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인다. 어차피 세상은 경쟁이고 부정한 수단을 쓰지 않는다면 그 공정한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삶의 원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번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매우 단순화 해서 볼 때, 농구라는 게임은 작은 공 하나를 동그란 링 가운데로 통과시키는 게임이다. 복잡한 규칙이 있지만, 그 규칙 내에서 공을 원에 통과 시키면 점수를 얻는 게임이다. 그것을 최고의 기술로 성공시킨다고 해서, 그것이 6천만불의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을까? 그 기술 자체가 그렇게 가치가 있는 것인가? 무슨 기술이든지 조던 급의 기술이 있다면, 그 정도의 재능과 노력이 있다면, 같은 액수를 벌 수 있을까?

(다음에 계속...)

[펌]집으로...

(2005.12.07에 제가 작성했던 글입니다.)

하루의 일과를 정리하고 집으로 가는 길... 그것은 때로는 피곤함에 지쳐 터벅거리며 가는 길이기도 하고, 때로는 하루 종일 수고했지만 얻은 것이 없는 마치 물고기를 잡는 베드로와 같은 허탈함으로 가슴 아파하며 가기도 하고, 때로는 뭔가를 이루었다는 뿌듯함에 기쁨으로 가는 길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아무 생각없이 때가 되서 그냥 내 거처로 돌아가는 것일 뿐이다.
일반적으로는 저녁 늦게 집에 가기 때문에 집에 돌아가도 모두들 자고 있어서 나도 그냥 씻고 때로는 TV를 보거나 아니면 공부를 더 하다가 잠자리에 든다. 그로써 하루가 지나가는 것이다.

가끔은 아이들이 깨어 있을 때 집에 돌아가기도 한다. 그럴 때면 문 앞에서 열쇠를 돌리는 순간부터 안에서 들려오는 반응들이 각각이다. 때로는 애들은 울고 있고 애엄마는 목소리를 높여 혼내고 있고, 때로는 즐거운 웃을 소리가 집안 가득히 들리기도 하고, 때로는 조용히 아무런 소리가 없을 때가 있다.

그 중 가장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아빠다! 아빠!"라는 두 아이들의 즐거운 비명소리가 들릴 때이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나를 향해 인사를 하는 아이들... 그리고 뽀뽀해주고 안아주기를 기다리는 아이들... 나를 아빠로 인정하고 반가와 하는 아이들은 나에게 너무 큰 기쁨이다.

며칠 전, 집에 들어가는데 예연이의 커다란 울음소리가 들렸다. 너무 서럽게 울어대는 예연이를 본 나는 영문도 모르고 일단 꼭 껴안아 주었다. 한참 후에 울음이 잦아들자 왜 그렇게 우는지 물어 보았다. 이유인 즉슨 잠자려고 엄마와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가 내가 오는 소리에 나와서 인사하려고 침대를 내려오면서 받을 헛디뎠는지 넘어졌다는 것이다.
"아빠! 안녕히 다녀오셨어요?" 라고 즐겁게 인사하려는 계획이 무산되서 서럽고, 넘어져서 아파서 더욱 서러워 한참을 울어대는 예연이를 꼭 안아주면서, 나를 반기며 나를 사랑해주는 내 아이들이 있다는 사실에 너무 행복했다. 힘들고 지친 하루였지만 아이들을 보고 안아주는 순간 모든 것들을 다 잊어버리고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기쁨을 만끽하며 내 보물을 껴안고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내 두 보물들로 인해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시 하나...

아래 시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활동했던 시인인 Paul Laurence Dunbar의 시이다. 그는 흑인이었고, Elevator boy로 일했던 억압받고 천대받았던 흑인이었다.
며칠 전 집으로 가는 길에 읽었던 그의 시집 중에서 나로 하여금 미소를 짓게 했던 시가 있어서 소개한다.

Accountability

Folks ain't got no right to censuah othah folks about dey habits;
Him dat giv' de squir'ls de bushtails made de bobtails fu' de rabbits.
Him dat built de gread big mountains hollered out de little valleys,
Him dat made de streets an' driveways wasn't shamed to make de alleys.

We is all constructed diff'ent, d'ain't no two of us de same;
We cain't he'p ouah likes an' dislikes, ef we 'se bad we ain't to blame.
Ef we 'se good, we needn't show off, case you bet it ain't ouah doin'
We gits into su'ttain channels dat we jes' cain't he'p pu'suin'.

But we all fits into places dat no othah ones could fill,
An' we does the things we has to, big er little, good er ill.
John cain't tek de place o' Henry, Su an' Sally ain't alike;
Bass ain't nuthin' like a suckah, chub ain't nuthin' like a pike.

When you come to think about it, how it's all planned out it's splendid.
Nuthin's done er evah happens, 'dout hit's somefin' dat's intended;
Don't keer whut you does, you has to, an' hit sholy beats de dickens,--
Viney, go put on de kittle, I got one o' mastah's chickens.

胡蝶之夢

새벽 두시 정도에 잠에서 깨었다...
갑자기 엄습해 오는 앞날에 대한 두려움과 하나님에 대한 불신, 그리고 온갖 죄악된 생각들이 나를 깨운 것이었다. 한번 잠들면 좀처럼 깨지 않는 나이기에 특별한 체험이었다. 한 동안 그 상태에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다 어느 새 잠이 들었다.

오늘 새벽에 일어났을 때, 아직도 그 때의 두려움과 불신과 죄악된 생각들의 잔영이 남아 있어서 무거운 마음으로 묵상을 시작했다. 매일성경에 나온 대로 묵상 전에 찬송을 불렀다. 오늘 찬송은 444장...

예수가 거느리시니 즐겁고 평안하구나 주야에 자고깨는 것 예수가 거느리시네
때때로 괴롬당하면 때때로 기쁨 누리네 풍파중에 거느리고 평안할 때에 거느리네
내 주의 손을 붙잡고 천국에 올라가겠네 괴로우나 즐거우나 예수가 거느리시네
이세상 이별할때에 지옥의 권세 이기네 천국에 있을 때에도 예수가 거느리시네

[후렴] 주 날 항상 돌보시고 날 친히 거느리시네 주 날 항상 돌보시고 날 친히 거느리시네 아-멘

찬송을 부르면서 간밤에 폭풍처럼 나를 휩쓸었던 모든 죄악에 단숨에 쓸려 나가고 정결함과 하나님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다시 회복하게 되었다. 찬송의 능력이 참으로 대단하다는 것을, 그리고 찬송가가 참으로 영적인 노래라는 것이 다시 한 번 느껴졌다. 마치 잠에서 깨어난 듯, 악몽에서 깨어나 너무 평안한 세상을 다시 보는 듯한 경험이었다.

胡蝶之夢(호접지몽, 나비의 꿈)은 중국 고전인 "장자"에 나온 구절이다. 장자가 어느날 잠들었는데, 나비가 되어 자유롭게 날아다니며 인생을 즐기고 있었다. 너무나 자유롭게 그 인생을 즐기고 있을 때 잠에서 깨었다. 그 순간 장자는 꿈속의 나비가 꿈을 꿔서 장자 자신이 되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장자가 나비 꿈을 꾼 것인지 분간이 안 되었다. 이 경험을 통해서 그가 말하는 것은 중국 도교의 사상적 바탕이되는 노장사상 중 특히 장자에 의해 강조되었던 物我一體(물아일체, 사물과 내가 하나), 즉 자연과 내가 구분되지 않고 하나가 됨을 역설하고 싶었던 것이다.

오늘 아침에 있었던 경험을 통해 胡蝶之夢을 떠올리는 것은, 신앙생활이란 어찌보면 꿈꾸는 것과 비슷한 체험이기 때문이다. 주님을 믿으며 열심히 신앙생활 하다가 문득 '내가 뭘하고 있는 것인가? 이러다 망하는 것 아닌가?'라는 자각이 들 때가 있다. 세상은 세상의 원리대로 열심히 살고 있는데, 그것을 거부하며 다른 삶의 원리를 따라 사는 것이 제대로 된 것인지 회의가 들 때가 있다. 그 때면 마치 장자 본인과 나비 중 어느 것이 현실인지가 혼동되는 것처럼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 진리인지 아니면 정신차리고 열심히 자기 앞길을 찾아 세상사람처럼 사는 것이 바른 것인지를 헷갈리는 경우가 있다. '내가 뭘하고 있나?'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 마치 꿈에서 깨어서 현실로 돌아 오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어느 것이 꿈인지 혼동되는 것이다.

오늘 아침에 부른 찬송은 나로 하여금 어느 것이 꿈이며 어느 것이 현실인지를 분명히 보여주었고, 나로 하여금 현실에 발을 딛도록 도와 주었다. 세상의 방식을 따라 사는 것은 꿈일 뿐이며, 언젠가는 깨지게 될 삶의 방식이다. 지극히 현실적인 것은 주님 안에서 그분의 품 안에서 사는 것이다. 그것이 진리이다. 실상 나로 하여금 현실을 자각하게 만드는 '내가 도대체 뭘하고 있나?'라는 질문은 사탄이 던지는 유혹이며, 나로 하여금 멸망의 길로 다시 돌아가게 하는, 예수님의 표현을 빌자면 개가 토한 것을 다시 먹는 그런 것일 뿐이다.

이 새벽 나를 아시고 나를 위해 찬송을 예비하심으로 다시 주님을 붙잡게 하신 주님을 찬양한다.

[펌]왜 엄마 것은 없어요?

엄마가 시장에서 돌아오시면
동생과 나는 오로지 장바구니에만 관심이 있었다.
"엄마 내 운동화 사왔어요?"
"다음에 꼭 사올게."
"운동화 다 떨어져서 창피하단 말이예요."
엄마의 장바구니엔 우리가 쓸 칫솔과 아버지 속옷
그리고 우리 식구가 먹을 찬거리뿐이었다.

내 나이 서른이 넘어 이제야 물어본다.
"엄마, 엄마가 쓸 것은 왜 하나도 없어요?"


- 심승현의 《파페포포 투게더》중에서 -

미국에서 동양인으로 사는 것...

(2005.06.14. 작성)

어제 가게에서 일하고 있는데, 단골 손님이신 분이 찾아왔다. 해병대 하사관 출신으로 월남전에도 참전했던 분으로서 30년 전에 미국으로 건너와 여러 사업을 하시면서 산전수전 다 겪으신 분이다.
늘 그렇듯이 가게에 와서 해병대 후배인 가게 주인아저씨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게 주인아저씨는 미국에 온지 2년이 채 안되었기 때문에, 그 분은 올 때마다 미국에 정착하고 살아가는 여러 다른 한인들 이야기를 해주면서, 가게 주인아저씨에게 간접적으로 조언을 주곤 한다.
어제는 한국인으로서 미국에 와서 사업에 성공한 사람들 이야기를 했다. 주로 도너스 가게, 샌드위치 가게, 세탁소, 청소업 등을 하면서 일부는 많은 돈을 벌었다고 했다. 주로 미국인들이 힘들어서 하고 싶어하지 않은 일이지만, 그 일을 열심히 함으로써 많은 돈을 벌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한국인은 역시 한국인... 많은 돈을 벌게된 그들은 그 돈을 부동산에 투자했다고 한다. 건물을 몇 채를 사거나 아니면 아파트 단지를 구입해서 월세를 받아서 편히 살아보고자 하는 욕심이었으리라... 그런데 그 분의 말이, 그런 투자를 한 사람들은 (적어도 내가 있는 오스틴과 텍사스에서) 거의 다 망하고 많은 돈을 잃었다.
그 이유인 즉슨, 바로 세입자들이 월세를 안내고 버티고 있기 때문이란다. 정확하게 이유는 설명할 수 없지만 (그 분은 동양인을 무시하는 풍조 때문이라고 해석했지만..) 백인이 주인으로 있을 때는 월세를 밀리는 일이 거의 없다고 했다. 꼬박꼬박 월세를 잘 내던 사람들이 주인이 동양인으로 바뀌면, 그 때부터 태도를 달리해서 심한 경우에는 1년치 월세를 밀리고도 아주 당당하게 버틸 정도라고 했다. 그럴 경우 강제로 끌어낼 방법이 없기 때문에 재판을 하게 되는데, 그 막대한 소송비용과 시간을 낭비해야하며, 설령 재판에서 이긴다 하더라도 그 동안의 밀린 월세는 받지도 못할 뿐더러, 강제 퇴거 당하는 세입자에게 나가서 1개월간 살 돈을 줘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많은 경우 월세를 밀려서 강제로 퇴거 당하는 경우 집안 시설물들을 아주 교묘하게 모두 파괴해 놓고 떠난다는 것이다...
동양인들이 주인이 될 경우 이런 일들이 너무 빈번히 발생해서 도저히 운영을 할 수 없을 지경이 되고, 결국은 막대한 손해를 보고 손들고 나올 수 밖에 없단다... 이렇게 해서 손해를 본 사람들이 부지기수라고... 이 이야기를 하던 그 손님도 역시 같은 피해자 중의 한 사람이란다.
이런 일은 심지어 대학 기숙사에도 적용되어서, 한 번은 UT 법대와 연계해서 운영하는 기숙사가 있는데, 그 동안 백인이 주인으로 운영되어 오선 기숙사였던 모양이다. 이 기숙사는 법대 학생 한 명에게 공짜로 방을 제공하고 그로 하여금 다른 후배들을 들어오게 하고 관리를 맡기는 그런 식으로 운영이 되기 때문에 주인은 월 한번씩 가서 월세만 받아오면 되는 그런 아주 좋은 조건의 사업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 그런 식으로 쉽게 운영되어 오던 기숙사를 한국인 한 사람이 그 운영을 넘겨 받았는데, 그 이후로 월세가 걷히지 않고, 그 동안 운영되어 오던 시스템이 완전히 망가져서 도저히 운영을 감당할 수 없을 지경까지 되어 결국 그 사람도 이 사업을 포기했다는 소문이다...

이와 관련한 또 한 가지.. 오스틴 몇 년 전 수도국 국장은 필리핀 출신의 젊은 사람이었단다. 그 사람은 아주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여서 젊은 나이에 박사학위를 받고, 그 능력이 탁월하여 오스틴의 수도국 총책임자로 발탁이 되었는데... 아시아계가 총책임자로 임명이 되자 그 아래 사람들(거의 대부분이 백인인)이 그를 완전히 왕따를 시키기 시작했다고... 어느 누구도 국장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말도 건네지 않고, 말도 듣지도 않아서 도저히 업무를 할 수가 없었던 그는, 결국 부동산 사업에 뛰어들어 거기서 성공을 거두자 국장 일을 그만 두게 되고 사업가로 변신한 모양이다.

이 두가지의 작은 에피소드로 인해서 미국 전체를 판단할 수는 없다. 하지만 미국에서 아시아인으로 사는 것이 그리 녹록한 것만은 아닌 것은 분명하다. 내가 아는 한 한인 목사님은 그 젊은 시절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미국이 자신의 조국이고 자신은 분명히 미국인이라는 확신한 자아 정체성 가운데 대학까지 마쳤다. 하지만 그가 대학을 나와 접한 미국 사회에서 그는 철저히 미국인이 아닌 아시아인으로 인정되고 있느 것을 발견했고, 그로 인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많은 벽들이 존재하는 것을 깨닫고 많은 좌절을 경험한 끝에 하나님의 도움으로 그 좌절을 극복하고 목회의 길로 나섰다.
2차 대전 시절, 미국에서는 일본인들을 위한 캠프를 설치해서 일본인 이민자들을 모두 (1세대는 물론 4-5세대까지) 그 캠프에 몰아 넣었다. 그것은 그들이 일본 본국에 협력하며 미국의 안전을 위협할 수 있다는 미국인들의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들에게 일본인들은 아무리 그들이 미국에서 오래 살았다 하더라도 이방인일 뿐이었다. 반면 독일계는 아무런 조치가 취해진 것이 없었다. 그들은 미국인들이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살면 행복할까?

(2004.07.28. 작성)

2002년 7월 초에 미국으로 유학온지 2주일 정도 지난 다음의 일이다. 택사스의 살인적인 더위를 피해 하루 종일 아파트에 박혀있다가 초저녁 즈음 돼서 너무 답답해 집사람과 아이들을 데리고 가까이에 있는 수퍼에 가서 간단한 음식을 사오기로 했다. 당시에는 차를 아직 구입하지 않은 시점이라서 수퍼까지 걸어가야 했는데, 우리가 사는 아파트의 입지 조건이 너무 좋아서 수퍼가 코앞에 있는 편이었는데도 걸어서 30분 정도 걸어가야 수퍼에 갈 수 있었다. 초저녁이라 좀 선선할 줄 알았는데, 왠걸.... 오히려 한 낮보다 더 더운 것이었다. 칭얼대는 두 아이를 대리고 그 더운 날씨에 어찌어찌 수퍼까지 갔다.

빵빵한 에어컨으로 시원하다 못해 춥기까지 한 그 넓고 넓은 수퍼를 이리저리 쏘다니며 쇼핑을 마치고 나오는데 와이프는 문 입구 안쪽에서 벽쪽에 있는 광고지들을 들여다보고 있었고, 나는 밖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와이프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그 때,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정도 되어 보이는 백인 아줌마 한 명이 나에게 다가오더니 인상을 험악하게 하면서 나를 위아래로 쳐다보면서 "Welcome to America!"라고 으르렁 거리듯이 내뱉으며 가버리는 것이었다. 나는 순간 너무 당황스러워서 아무말도 못하고 있었고, 도대체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고 있었다. 그 때 뒤에서 수다를 떨고 있던 백인 여학생들 (중고등학교 학생들처럼 보였다) 세 명이 나를 불렀다.

"Wasn't she so rude to you?"

"I don't know. I don't understand what happened..."

"We are sorry, she was so rude. She shouldn't say so."

미국 애들이 보기에도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무례한 행동이었다.



미국의 문화와 미국인의 사고 방식을 연구하는 학문인 미국학을 전공하는 나에게 이 사건은 아직까지도 내 마음 속에서 떠나지 않고 있다. 미국과 미국인에 대해서 다양한 공부를 하면서 지금까지 곰곰히 생각해보지만 도대체 왜 그 아줌마가 그리 화가 나 있었고, 나에게 그런식으로 대했는지는 이해할 수가 없다. 911사태 이후에 외국인에 대한 반감이 고조되어 있는 상태에서, 특히나 조지 부시를 열열히 지지하는 텍사스라는 동네의 특성상 나같은 외국인에 대해서 그렇게 함부로 대하는 것이 이제는 자연스러워 졌는지... 아니면 수퍼 안에서의 내 행동이 거슬렸던지 뭐 그 정도가 아닐까?

하지만 내가 이 사건을 통해서 본 것은 단순히 한 아줌마가 나에 대해서 모욕적인 말을 했다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당시 그 아줌마는 나에 대해서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나는 그 아줌마와 이야기를 나누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내가 미국 태생의 미국인인지, 아니면 외국인인지 알 수가 없었을 것이다. 설사 내가 한국말을 쓰는 것을 들었다 하더라도 나의 국적이 미국인지 아니면 외국인지 그녀로서는 도저히 알 도리가 없다. 문제는 그 아줌마가 나의 생김새를 보고 당연히 나를 외국인으로 생각을 했고, 그 판단하에 "Welcome to America!"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 것은 미국 백인들의 마음 속에 아직도 유색인종은 법적으로는 미국인이지만 심정적으로는 미국인이 아니며 따라서 유색인종은 미국의 핵심부에 자리 잡을 수 없다는 의식을 드러내는 사건인 것이다. 미국 사회는 아직도 WASP (White Anglo-Saxon Protestant)가 핵심을 장악하고 있다 평가되고 있다. 내 경험을 통해서 느끼는 것은 WASP가 정치, 사회, 문화, 경제 각 분야 뿐만 아니라 아직도 미국인 스스로의 마음까지 장악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 미국에서의 유색인종, 특히 아시아계 미국인은 자신의 나라에서 영원히 타인으로 대접을 받을 뿐인 것 같다. 자신의 나라에서 주변인 신세를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런 나라에서의 삶은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을 까?

Ronald Takaki라는 유명한 학자가 있다. 그는 이민 4세이며 그의 조상들이 미국에 정착한지는 100년이 넘었다. 그는 당연히 자신을 미국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는 실재 미국인이었다. 그가 어느날 학회 참여차 버지니아를 여행하게 되었다. 공항에서 택시를 잡아 타고 운전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백인이었다. 그는 Takaki교수가 영어를 너무 잘하는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택시기사가 물었다. "How long have you been in this country?" Takaki 교수는 자신은 이민 4세대이며 100년 이상 미국에 정착한 가정에서 태어난 미국인이라고 수차례 강조했다. 그의 설명을 들은 기사는 말했다. "I was wondering because your English is excellent!" 이 경험은 Takaki교수가 평생을 거쳐 겪어온 자신의 조국에서 이방인으로 대접받는 경험의 일부일 뿐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Somehow I did not look "American" to him; my eyes and complexion looked foreign.

[펌]Where Are You Going?

In January 2000, leaders in Charlotte, North Carolina, invited their favorite son, Billy Graham, to a luncheon in his honor. Billy initially hesitated to accept the invitation because he struggles with Parkinson's disease. But the Charlotte leaders said, "We don't expect a major address. Just come and let us honor you." So he agreed.

After wonderful things were said about him, Dr. Graham stepped to the rostrum, looked at the crowd, and said, "I'm reminded today of Albert Einstein, the great physicist who this month has been honored by Time magazine as the Man of the Century.

"Einstein was once traveling from Princeton on a train when the conductor came down the aisle, punching the tickets of each passenger. When he came to Einstein, Einstein reached in his vest pocket. He couldn't find his ticket, so he reached in his other pocket. It wasn't there, so he looked in his briefcase but couldn't find it. Then he looked in the seat by him. He couldn't find it.

"The conductor said, 'Dr. Einstein, I know who you are. We all know who you are. I'm sure you bought a ticket. Don't worry about it.' Einstein nodded appreciatively.

"The conductor continued down the aisle punching tickets. As he was ready to move to the next car, he turned around and saw the great physicist down on his hands and knees looking under his seat for his ticket.

"The conductor rushed back and said, 'Dr. Einstein, Dr. Einstein, don't worry. I know who you are. No problem. You don't need a ticket. I'm sure you bought one.' Einstein looked at him and said, 'Young man, I too know who I am. What I don't know is where I'm going.'"

Having said that Billy Graham continued, "See the suit I'm wearing? It's a brand new suit. My wife, my children, and my grandchildren are telling me I've gotten a little slovenly in my old age. I used to be a bit more fastidious. So I went out and bought a new suit for this luncheon and one more occasion.

You know what that occasion is? This is the suit in which I'll be buried. But when you hear I'm dead, I don't want you to immediately remember the suit I'm wearing. I want you to remember this: I not only know who I am, I also know where I'm going."

십자가...

지난 달 마지막 주일에는 청년부에 새로 온 지체들을 환영하는 시간을 가졌다.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그림으로 표현하는 시간에 곰곰히 묵상하다가 다음과 같은 그림을 그렸다.



세상의 수많은 화살들(염려, 유혹, 죄, 욕망 등들)이 나를 향하 비오듯이 쏟아진다 하더라도, 십자가 앞에 무릎꿇고 그 가장 밑둥을 붙잡고 있는 나에게, 그리고 그 자세로 하나님께 기도로 나아가는 나에게, 그 화살들은 의미가 없다는 것, 하나님께서 나를 보호해 주시고 구원해 주신다는 믿음을 표현하고 싶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어설프게나마 표현하고 싶었다.

집에서 하연이에게 그림을 보여줬다. 그 때의 감동이 다시 밀려오며, 사뭇 진지하고 경건해 지는 마음이 밀려오고 있을 때, 하연이가 말했다.

"The person seems to be digging up the cross!"

Joel Osteen

"I'm very careful about saying who would and wouldn't go to heaven. I don't know."-Joel Osteen
"I'm going to let God be the judge of who goes to heaven and hell."-Joel Osteen

Joel Osteen의 책에 나오는 두 구절이다... 이 두 문장의 핵심은 "careful"과 "judge"라는 두 단어에 있다. 그는 이 두 단어를 통해서 많은 비판을 하고 있고, 자기 의를 주장하고 있으며, 기존 교회에 많은 불만과 상처를 가진 사람들, 오해하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성경에 대해서 무지한 사람들의 호감을 단번에 사는 효과를 얻고 있다.
그가 "careful"이라는 단어를 의도적이고 효과적으로 사용하면서 주는 메시지는 지옥과 천국, 죄와 구원에 대해서 말하는 (혹은 강조하는) 믿는 자들과 교회를 "careless"한 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생각이 없기 때문에, 혹은 상대를 배려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함부로 말들을 해 대는 것이고, 죄, 지옥, 형벌, 진노, 구원의 여부를 떠들어 대는 것이라는 강한 비판이 담겨 있는 말이다.
두 번째 문장에 있는 "judge"라는 단어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가 이 단어를 쓰는 맥락은 매우 성경적으로 보인다. 하나님 외에 누가 감히 사람의 영혼을 judge할 수 있겠는가? 그 권한을 하나님께 내어 맡기는 것은 얼마나 바람직한 일인가? 그런데 세상의 많은 교회와 영적인 리더들은 주제넘게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고 있고, 그것은 그들의 careless한 면을 한층 부각시켜 주는 것이 아닌가?

Osteen의 말이 맞다고 느껴지는가? 아니다! 그는 완전히 틀렸다. 그의 언어 수사의 특징은 모호함과 진리의 한 쪽 면만을 부각시킨 채 전체를 가리는 데 있다. 그것은 사탄의 수법이다. 사탄은 언제나 부분적인 진리로 전체 진리를 왜곡시키며, 그것으로 사람들을 유혹한다. 광야에서 예수님을 세 번 시험했던 사탄의 수법을 잘 분석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Osteen이 말한 한 구절을 예를 들어보자. "You may make some mistakes-but that doesn't make you a sinner. You've got the very nature of God on the inside of you." 언뜻 듣기에 참으로 encouraging하는 말이고 긍정적인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은 겉포장은 그럴듯하지만 그 내용이 무엇인지를 곰곰히 생각해 보면 그 의미가 뭔지를 잘 알 수 없다. 그저 너무 죄책감에 사로잡히지 말고 긍정적으로 생활하라는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몇 가지 개념이 모호한 단어를 가져다 썼을 뿐이다. 예를 들어 "the very nature of God"는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이 실수를 하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또한 "mistakes"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죄와 어떻게 다른 것인가? 그의 말들은 이런 모호한 개념들, 피상적인 개념들을 가져다 씀으로써 다양한 사람들로 하여금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게 하여 아전인수격의 해석을 원천적으로 가능하도록 도와준다. 거기에는 진리가 없다. 그저 자신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고 긍정적/낙천적인 생각을 갖도록 도와 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위에서 인용한 Osteen의 문장의 모호함은 careful이라는 단어와 saying이라는 단어를 연결시키는데 있다. 도대체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정확하게 무엇인가? 한 영혼이 구원을 받았는지 그렇지 않았는지를 속으로는 판별해도 되지만, 겉으로 말해서는 안된다는 의미인가? 아니면 아예 판별을 하지 말라는 것인가? 왜 말해서는 안된다는 것인가? 그것이 성경적으로 옳지 않기 때문인가, 아니면 그것을 "말하는 것"이 사람들의 기분을 나쁘게 하기 때문인가?
만약 성경적으로 옳지 않다면 그것은 근거가 어디에 있는가? 구약의 수많은 선지자들이 심판에 대해서, 죄에 대해서 외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에서 떠나지 않으면 형벌을 면할 수 없다고 외쳤고, 예수님께서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질책하시며 그들이 천국에 들어 갈 수 없음을 분명히 말씀하셨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전하면서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망할 수 밖에 없다고 선언했다. 그것은 때로는 집단에 대한 선언이기도 했고, 개인에 대한 분명한 말씀이기도 했다. 사도 바울은 서신서를 통해서 어떤 교회가 하나님의 칭찬을 받고 믿음 안에 있는지(예를 들어, 빌립보교회), 그렇지 않은지(예를 들어, 갈라디아교회, 고린도교회)를 분명하게 구별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교회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개인(데마)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말을 한다.
사실 성경적으로 볼 때, 교회의 영적인 리더로 세우심을 받은 모든 자들은 그 양들의 영적인 상태를 살피고, 그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을 가장 큰 임무로 부여받은 자들이다. 그들이 진리를 좇아 천국의 길을 가고 있는지, 아니면 세상과 마귀를 좇아 지옥의 길을 가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판단하여, 지옥으로 향하는 영혼들을 말씀과 기도로 권면함으로 돌이키게 하는 것이 그들이 해야할 가장 중요한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위해 각 공동체마다 영적인 리더들을 세우셨다.

(여기서 그가 신랄하게 비판하는 "judge"에 대해서 잠깐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판단"하지 말라고 하셨을 때, 그 판단은 분명히 당시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었다. 그들, 특히 바리새인들은 죄인들을 사랑으로 품으며 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지 않고, 경멸과 멸시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들에 비해서 자신들의 의로운 존재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자기 의에 충만한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판단"의 바른 정의이다. 우리가 영혼을 바라볼 때,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그 사람을 정죄하거나 멸시해서는 안된다. 다만 한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영혼이 잘되기를 기도하며 천국을 향해 갈 수 있도록 바르게 "분별"하고 도와야 한다. 이것은 절대 "판단"이 아니다. 오히려 이 단어를 쓰면서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고 있는 Osteen의 태도는 다른 버전의 바리새인이다. 그는 영혼을 사랑으로 섬기는 자들에 대해서 못마땅해하고 있으며 그들을 "비난"하고 정죄하고 있다. 그러면서 자신을 그렇지 않다고 자기의 의를 드러내고 있다. 언뜻 매우 겸손해 보이고 남을 배려하는 듯이 보이는 그의 태도의 이면에는 매우 심각한 정죄와 자기의가 자리잡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가 한 말로 판단해 볼 때 Osteen은 그런 하나님의 부르심, 하나님의 사명에 전적으로 무지한 자다. 만약 무지한 자가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고 있는 자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인 영적인 공동체의 리더는 한 영혼의 상태에 대해서 "I don't know."라고 말해서는 절대 안되는 자들이다. 그것은 악하고 게으른 종으로서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고 있지 못하다는 증거가 된다.
그가 "I'm very careful about saying who would and wouldn't go to heaven."라고 말한 그 이면에서 그가 바라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영혼에 대해 관심이 없다. 그는 사람의 비위를 맞추는 것에 관심이 있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이다. 유다가 멸망하기 직전에 곧 완전히 망해서 수 많은 사람들이 비참하게 죽음을 당할 그 유다 백성들을 향해서 그들의 멸망과 회개를 눈물로 호소했던 예레미야와는 달리 "평안하다! 평안하다!"라고 외치며 긍정적 사고와 낙관적인 미래를 외쳤던 당시 많은 거짓 선지자들과 동일한 것을 추구하는 이 시대의 거짓 선지자이다. 하나님께서 하시지 않은 말들을 하나님의 말처럼 떠들어 대며, 사람들의 관심을 이 세상의 물질과 자신의 번영과 안녕에만 초점을 맞추게 하는, 그러는 가운데 죽어 있는 영혼들이 지옥을 향해 열심히 달려 가고 있는 것을, 그들에게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있는 것을 보지 못하게 하고 스스로도 그 가운데 있는 악한 자이다.

마지막 때에 거짓 선지자들이 많이 일어날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그 거짓 선지자들은 사탄의 도구를 사용하여 혹세무민하는 자들이다. 영적으로 깨어 있어서 진정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한 때이다.